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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17호
2012.10.17 (음9.3)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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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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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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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예술이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 로이 아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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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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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그분이요? / 그분이오?
‘이다’의 ‘이-’에 붙는 ‘-오’와 ‘요’에 대해서 이 칼럼에서 몇 번 다뤘다. 요점은 ‘이요’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할 때 쓰고 ‘이오’는 문장을 종결지을 때 쓴다는 것이다.
ㄱ. 공은 공이요, 사는 사다. ㄴ. 고래는 젖먹이동물이요, 상어는 물고기다. ㄷ. 미물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생명이오. ㄹ. “방금 지나간 분이 새 담임 선생님이다.” “그분이?” ㅁ. “그곳엔 네가 가야 해.” “내가?”
ㄱ, ㄴ의 ‘이요’는 앞의 사실과 뒤의 사실을 연결하고 있고, ㄷ의 ‘이오’는 문장을 종결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ㄹ,ㅁ과 같이 앞에 말한 내용을 반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ㄹ을 공손한 어투로 고칠 때 문장이 끝난다는 데 끌려 “그분이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그분이요?”가 옳다. 이때의 ‘이’는 ‘이다’에서 온 ‘-이’가 아니라 주어임을 나타내는 조사이기 때문이다. ㅁ의 “내가?”를 높임말로 바꾸면 “내가오?”가 아니라 “내가요?”가 되는 걸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말바루기] 뭘로 / 뭐로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친구와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식사 뒤 김 아무개가 계산을 하려고 식당 계산대에서 주문서를 내밀었다. 계산대의 종업원 왈, “손님, 현금이나 신용카드 중 뭘로 결제하시겠어요?” 또 하나. 길거리나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 처음에는 점잖은 말로 대화하다 서로 간에 상스러운 말들이 오고 간다. 점점 격해지다가 결정적인 무시를 당한 듯한 느낌을 받은 쪽에서 터져 나오는 말. “아니, 이 양반이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두 예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뭘로’를 살펴보자. 우선 ‘뭘’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무엇을’이 줄어든 말이라고 나온다. “저녁으로 뭘 좀 먹긴 먹어야 할 텐데”처럼 쓰인다. 그래서 ‘뭘로’로 쓰면 틀리게 된다. ‘무엇을로’가 되기 때문이다.
‘뭘로’는 ‘뭐로’로 고쳐야 예문의 뜻이 통한다. ‘뭐로’라고 해야 ‘무엇으로’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뭐’는 ‘무엇’ 또는 ‘무어’의 준말이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처럼 사용된다.
입말투에서는 ‘뭐로’보다 ‘뭘로’가 발음하기 쉽다. 하지만 글로 쓸 때는 ‘뭘로’가 아니라 ‘뭐로’로 적어야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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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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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처럼 - 설태수 ― K에게
기억 속에 가물거리던 그대 모습을 오랜만에 본 그 날. 내 안으로 기분 좋은 전류가 흘러들었어요. 지금, 오리나무와 참나무의 금빛 갈색 잎들은 後光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는데요. 해가 산 능선 쪽으로 기울수록 단풍의 광채는 하늘로 상승하고 있답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한 지는 잎들과 새들의 소리도 후광의 한 정경이지요. 나무 꼭대기에서는 잎들이 일렁이는데 그럴 때마다 그 언저리에서 맴돌던 햇살과 바람이 마구 쏟아지곤 해요. 예수와 석가의 후광도 이처럼 멋지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묘하게도 이 풍광에 그대 얼굴이 오버랩 되곤 한답니다. 한참을 이런 광경 속에 있으니, 침묵 속에 잠기는 것 같아서 걷기 시작했어요. 작은 돌을 툭 차기도 하면서요. 바람 따라 흩날리는 형형색색의 낙엽들. 그 잎들 너머로 멀리 있는 인수봉이 눈에 들어왔어요. 걸을 때마다 신호등 간판 건물 등에 그 봉우리가 잠시 가려지긴 했지만 몸을 바꾸면 다시 보이곤 하지요. 이런 저런 일상으로 그대 얼굴 또한 종종 잊혀질지 몰라도 그대가 거느린 여운이야 어디 쉽게 지워지겠어요? 그대에겐 보는 이를 환하게 해주는 은은한 빛이 있으니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기분 좋은 겁니다. 늘 기분 좋으면 마음이 정화된다는 말도 있지만 가끔 회상하는 것으로도 썩 괜찮은 일이지요. 방금, 큼직한 후박나무 잎이 쿵 떨어졌어요. 하나의 세계를 품은 그 소리. 들리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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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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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3. 배움과 가르침을 위한 수프
나는 교사이다
나는 교사이다. 아이의 입에서 질문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난 태어났다. 난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의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난 질문을 이용해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도록 자극하던 소크라테스이다. 난 헬렌 켈러의 내민 손바닥에 우주의 비밀을 두들겨 주던 앤 셜리반이다. 난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던 이솝이고, 한스 안데르센이다. 난 모든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투쟁한 마르바 콜린스이다. 난 오렌지 담는 상자로 책상을 만들어 위대한 대학을 설립한 메리 맥클라우드 베튠이다. 그리고 난 '내려가는 계단을 올라가려고'시도한 벨 카우프만이다. 인류를 위한 명예의 전당에 명단이 올라간 사람들, 이를테면 붓다, 공자, 노자, 장자, 에머슨, 레오 버스카글리아, 모세, 예수... 이들 모두가 나와 동일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또한 얼굴과 이름은 잊혀졌지만 그 가르침만큼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세세토록 기억되는 사람들이다. 난 나의 제자였던 학생들의 결혼식장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 함께 웃었고, 그들이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무덤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슬피 울었다. 하루의 수업중에서 난 때로는 배우이고, 친구이고, 간호사이고, 의사이며, 운동 경기의 감독이자, 분실물을 찾아 주는 사람이다. 돈을 꿔 주는 사람이기도 하며, 택시 운전사이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 대리 부모, 정치인, 신앙인이기도 하다. 온갖 지도와 목록표와 공식, 명사와 동사 변화, 이야기와 책들을 갖고 있지만 난 사실 가르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내 학생들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 그리고 난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선 온 세상이 다 필요하다는 걸 아니까.
난 하나의 역설이다. 난 가장 귀기울여 들어야 할 때 가장 큰 소리로 말한다. 나의 가장 큰 선물은 내가 학생들로부터 감사하게 받는 것 속에 있다. 물질적인 부는 나의 목표가 아니다. 난 하루 종일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과 같다. 내 학생들이 각자의 재능을 이용해 새로운 기회를 붙잡을 수 있도록. 때로 패배감 속에 파묻혀 있는 그들의 재능을 난 끝없이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난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복된 직업을 갖고 있다. 의사는 한순간에 마술적으로 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재능을 지녔다. 난 새로운 질문과 사상, 그리고 우정 속에서 매순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걸 지켜보도록 허락받았다. 건축가는 공들여 건물을 세우면 그 건물이 수세기 동안 서있으리라는 걸 안다. 교사는 사랑과 진리로 건물을 세우면, 그 건물이 영원히 서 있으리라는 걸 안다.
날마다 난 부정적인 시각, 두려움, 안주하려는 마음, 편견, 무지, 무관심과 싸우는 전사이다. 하지만 내게는 훌륭한 동지들이 있다. 지성, 호기심, 학부모의 뒷받침, 개성, 창조성, 신뢰, 사랑과 웃음이 그것이다. 그들이 끝없는 후원을 보내며 내게로 깃발을 날리며 달려온다. 내가 이런 행운을 누리면서 아름다운 인생을 보내게 해 주는 것은 바로 학부모들이다. 난 그들에게 가장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게 자신의 소중한 아이들을 믿고 맡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온갖 추억들로 가득한 과거를 갖고 있다. 모험과 도전과 흥미로 가득한 현재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난 하루하루를 미래와 함께 보내도록 허락받았으니까.
난 교사이다. 난 그 사실에 대해 날마다 신께 감사드린다.
존 웨인 쉴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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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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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이 장에서는 현대 철학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현대의 특징인 세계 위기에 철학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 현대에는 철학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나아가 현대의 인간에게 철학은 어떤 의미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 보기로 하자. 앞에서 나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 철학을 비교적 길게 설명했다. 헤겔은 독일 관념론을 집대성하여 거대한 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헤겔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은 헤겔 철학이 극단적인 관념에 흐르고 구체적인 현실과 생생한 삶을 등한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헤겔로부터 특정한 방법을 빌려왔으면서도 헤겔의 관념론을 반박했다. 서양 철학은 특히 20세기에 접어들면서 19세기까지 지녔던 영향력과 관심을 잃게 되었다. 물론 19세기 중반부터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등이 나타나 헤겔 철학에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철학의 관심과 영향이 극도로 쇠퇴해 철학 자체가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경향들의 철학적 움직임이 활발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니체는 삶과 세계에 대한 심원하고도 광범위한 안목과 문제점들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가지고 새로운 삶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삶의 의미를 결단으로서의 실존에서 구하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삶과 세계의 본질을 비합리적으로 꿈틀거리는 삶의 의지에서 찾고자 했으나, 이러한 의지는 맹목적인 것으로서 윤리적으로는 고통에 불과하다고 보아, 궁극적으로 열반에 도달하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딜타이는 현대의 삶이 소유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석학적 입장에서 풀어 보려고 했다. 지금까지 예로 든 철학자들은 철학의 위기를 절박하게 느끼고 사유했기 때문에 단순히 관념의 지평에만 머물지 않았다. 구체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삶을 추구했으며, 삶의 상황으로서의 세계 위기를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로 보았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은 종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당시의 철학의 위치를 대변한다. 나아가 그 말은 철학의 관심과 영향 곧 철학의 역할에 관해서도 암시를 던져 준다. 헤겔적 체계에 의해서 확립된 이성과 정신으로 완전히 무장한 관념 철학은 더 이상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삶의 근원적 측면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 방식이 종래의 철학이 해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니체뿐만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그 이전 세기의 사상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완강한 반발과 투쟁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엄청나게 거대한 이성 및 정신의 체계는 19세기 철학의 특징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거쳐서 독일의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매우 깊은 것이었다. 이러한 합리적 체계의 사고방식은 일차원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자체 안에 이미 서구 문화의 위기라는 싹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적, 형식적, 절대적인 관념의 체계를 파괴하고 유기적인 삶과 실존의 기치를 내걸었다. 또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헤겔의 역사철학을 방향 전환시켜, 물질의 자기 전개를 역사 과정으로 보았다. 한편, 엄밀한 자연과학의 훈련을 수단으로 삼은 실증주의의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학적 진리를 추구하려 했다. 프로이트는 심층심리학 이론으로써 의식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해 전통적 사유에 일대 경종을 울렸으며,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고전물리학적 시간 개념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엄밀하게 학적인 의미에서 현대 철학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경향으로는 19세기 말의 '학문비판'을 꼽을 수 있다. 이 경향은 지금까지 역학이 근거로 삼았던 수학적 자연 과학의 입장을 유지하지 않고 학문의 독단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인식론적 분석을 핵심으로 취한다. 이 경향은 학문의 정립 근거를 결코 합리적 체계와 형식적 범주에 의해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전하며 변화하는 탐구 정신과 가치 보장을 근거로, 사유 모델과 개념들의 존재 구조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학문 비판의 목적이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19세기에 헬름홀츠, 키르히호프 등이, 오스트리아에서는 마흐가 이러한 경향을 대변했다. 또 프랑스에서도 학문 비판의 경향이 강하게 일어나, 과학 일반에 대한 비판이 활발해졌다. 포앙카레, 루지에 등이 이 경향을 대변했다. 영국에서는 화이트헤드, 러셀 등에 의해서 수학과 자연과학의 기초에 대한 비판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인식 가능성이 어디까지 현실화될 수 있고 어떤 점에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 날카롭게 물었다. 이들이 제기하는 물음은 미래의 새로운 문제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지닐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일반 과학 전체에 대한 비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후설로부터 출발하는 현상학이다. 후설은 의식과 체험의 영역인 현상에 관한 엄밀한 탐구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철학의 자기 정립 및 근거의 불확실성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아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후설의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의 개별 과학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상당수의 개별 학문들은 탐구 방법으로서 현상학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주어진 현상으로서의 구체적 체험 내용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것이 현상학의 주된 방법인데, 이러한 방법을 근거로 그것을 한층 더 확장시켜서 가치 문제와 존재 문제에까지 논의를 이어 나간 사람들이 셸러와 하르트만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정신과학(문화과학 또는 인문과학)의 근거 정립이 커다란 문제였다. 신칸트학파의 빈델반트, 리케르트 등은 정신과학의 근거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딜타이는 정신과학 자체의 체계와 이 체계의 고유한 이해에 관해서 심도있게 탐구했다. 현대의 가치 문제는 사회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탐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는 가치의 전도를 주장하고 인간의 약동하는 삶에 고유한 '힘에의 의지'가 바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에 비해 후설, 셸러, 하르트만 등은 정신적이며 윤리적인 삶의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본질과 구조를 살피려고 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제임스, 듀이 등의 실용주의가 철학을 대변했다. 실용주의는 앎과 진리의 개념을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기능으로 파악했다. 실용주의는 특히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 적용되어 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용주의는 유럽의 철학 전통과 미국의 서부 개척 정신이 결합된 특수한 형태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말할 수 있다. 비판철학과 분석철학이 그것이다. 비판철학은 선험적 의식의 반성을 특징으로 가지며 삶의 철학 내지 실존철학의 형태를 가진다. 딜타이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은 비판철학의 경향을 지닌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은 비록 정치학, 사회학 및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철학의 문제들을 전개해 나갈지라도 여전히 삶의 철학과 실존철학에 대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분석철학은 과학철학, 일상 언어철학, 기호 논리학 등 취급하는 내용에 따라서 입장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실제적인 경험과 검증 및 그것에 의한 언어 분석 그리고 명제의 참거짓에 대한 판단 등의 공통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경향과는 약간 다르게 다시금 전통 철학의 주제들에 접근해 삶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베르그송, 하르트만 등에 의해서 수행되어 왔다. 이들은 삶의 본질을 종전과 같이 철학의 특정한 한 분야로부터가 아니라 철학의 전체 분야들의 종합적 측면으로부터 탐구함으로써 삶과 세계의 본질 및 구조를 해명하려고 했다. 특히 셸러가 대변하는 철학적 인간학은 종합적 관점에서 인간을 밝히고자 했다. 개별 과학으로서의 정신과학이나 자연과학은 인간의 삶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연구하는 데 비해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삶을 유기적 통일성과 전체성으로 그리고 세계를 구체적으로 직접 체험하는 주체로 탐구한다. 철학적 인간학이 인간의 삶을 탐구하면서 제기한 것은 절대자, 이성, 이념, 영원성 등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제한된 인간 존재가 가지는 고유한 체험의 구조 및 그것의 의미였다.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는 철학적 인간학이 제기한 문제를 한층 더 심도 있게 탐구했다. 야스퍼스는 삶의 상황을 좌절로 보고 이 좌절 속에서 현존재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실존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세상은 암호로 가득 차 있다. 암호는 존재 자체 또는 포괄자(신적인)의 암호이고 삶 자체의 암호이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좌절은 암호 해독을 위한 하나의 실존적 계기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시발점은 일상성으로서의 현존재이다. 현존재는 은폐된 자이고 비진리이다. 이 가면의 세계가 비은폐된 세계의 진리 및 개방된 것으로 이행할 때 실존의 의미가 밝혀진다. 마르크스의 사회변혁을 시도하는 철학적 경향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수정된 형태로 전개되어 왔는데 이 역시 비판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로부터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비록 마르크스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노동자에 의한 혁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비판 작업과 의사 소통에 의해서 사회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비판 철학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 철학의 대체적 경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경향을 눈여겨봄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통찰하게 된다. 우선, 현대라는 상황은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사유의 방향에서 현대의 상황을 한 눈에 명백하게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현대라는 시점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부정적인 상황들이 지배적이므로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방향을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무수히 많은 관점에서 수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삶과 세계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고 정립하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삶의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도식화된 무기적 집단화와 기능화에 시달리고 있다.
철학의 뜻은 '철학'이라는 고정된 형식적 개념이 아니라 '철학한다'는 유기적, 통적 개념에서 찾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의 참뜻은 삶과 세계를 해석하면서 동시에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과연 철학은 소멸되어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 비로소 철학은 새로운 힘을 가지고 우리의 존재와 삶의 역동적인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삶의 철학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를,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았다면, 베르그송은 '삶의 약진'을 핵심으로 하는 생명을 형이상학적 원리로 고양했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헤겔의 형식적이며 체계적인 변증법적 관념론의 철학을 허풍선이의 철학이라고 맹공하면서 비합리주의적 경향의 삶의 철학을 정초했다. 그는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의 철학이 관념에만 몰두하는 사변철학이라고 보고 생동하는 삶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허무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플라톤, 칸트 그리고 인도 철학의 영향을 보여주면서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현상과 물 자체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면서도 물 자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의지가 물 자체라고 본다. 통일적인 세계 의지는 곧 '삶에의 의지'이며 이것이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이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해당한다. '삶에의 의지'는 합리적이며 목적론적인 종전의 이성이나 정신 또는 신 등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꿈틀거리는 생명력 자체이다.
쇼펜하우어는 무기적 자연(무기물)과 유기적 자연(생명체)에서 의지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본다. 유기적 자연에서 의지는 의식으로 고양되며,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의지는 지성에 의해 표상으로 전개된다. 칸트는 감성 형식과 오성 형식에 의해서 파악되는 세계를 현상이라고 했다. 칸트의 현상은 쇼펜하우어의 표상에 해당된다. 쇼펜하우어는 표상 세계의 모든 변화는 인과율의 원리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나 자신과 세계의 존재 근거는 의지이다. 무기적 자연에 있어서 의지는 맹목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유기적 자연의 기초를 무기적 자연으로 보기 때문에 의지의 기본 형태는 혼돈에 찬 무이성적 의지이다. 맹목적 의지는 결국 윤리적 측면에서 전체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혼돈에 찬 의지로 인해 고통과 권태라는 두 가지 악령이 삶을 물들인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권태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혼돈에 찬 의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의지의 극복에는 소극적인 자세와 적극적인 자세가 있다고 본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본질을 맹목적인 것, 혼돈에 찬 것으로 보면서 그것이 윤리적으로 고통과 권태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다. 또한 의지의 본질을 혼돈에 찬 것이라고 말하면서 의지를 극복하려는 것 역시 모순을 범한다. 우선 소극적인 의지 극복은 무관심한 직관적 미적 고찰에 의해서 가능하다. 인간 주관은 순수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직관하면서 의지의 욕망을 망각하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또 자살에 의해서 의지를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살은 신체만 소멸시키고 의지는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역시 적극적인 방책이 될 수 없다. 적극적인 의지 극복 방법은 '열반'에 의해서 가능하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삶에서 완전히 멀리하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필요를 침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영원한 정적인 열반에서 비로소 의지를 극복한 성자가 가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의지의 전적인 부정인 허무에서 비로소 의지의 극복이 가능하다. 고통과 권태로운 삶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삶의 뿌리인 의지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를 기초로 한 삶의 철학은 후에 니체, 바그너, 헵벨 그리고 현대의 호르크하이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비약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합리주의적이며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를 삶과 세계의 근거로 본 그의 사상은 고정된 형식적 세계관을 파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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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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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視目聽(이시목청) 耳(귀 이) 視(볼 시) 目(눈 목) 聽(들을 청)
열자(列子) 중니(仲尼)편에 실린 이야기다. 춘추시기 노자(老子)의 제자로 항창자(亢倉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귀로 사물을 보고 눈으로 소리를 듣을 수 있었다(能以耳視而目聽)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들은 노(魯)나라의 군주는 상경(上卿)의 예(禮)로써 그를 초빙하여, 겸손한 말로 그러한 능력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이에 항창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런 소문은 전한 사람들의 망발입니다. 도가(道家)의 수련에서 눈과 귀를 쓰지 않고도 소리를 듣거나 물체를 볼 수는 있지만 귀와 눈의 기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가 눈을 쓰지 않고 귀로 물체를 본다는 것과 귀를 쓰지 않고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가장된 것이오니, 이를 사실로 믿지마십시오.
耳視目聽은 본시 도가수련의 한 단계로서 눈과 귀의 도움없이 정신만으로도 보고 듣는 것이 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耳視란 직접 보지 않고 소문을 들어서 알아차림 을 뜻하고, 目聽이란 직접 듣지 않고 표정을 보고 알아차림 을 뜻하니, 耳視目聽이란 사람의 눈치가 매우 빠름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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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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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7. 비극2
그래서 그날이 됐다. 그때의 내 심정을 완전히 그려내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개혁에의 열의, 그리고 생애에서 한 중대한 새 출발을 한다는 호기심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을 하면서 도둑질이나 하듯 숨겨야 하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지배적이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조용한 곳을 찾아 냇가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난생 처음 고기를 보았다. 빵집에서 구운 빵도 있었다. 내게는 어느 것도 다 맛이 없었다. 염소 고기가 가죽같이 질겼다.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진저리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밤새 혼이 났다. 무서운 가위가 나를 눌렀다. 잠이 들락말락 하노라면 곧 산 염소가 뱃속에서 음매음매 우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육식은 의무라고 생각을 고쳐 먹고 해서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내 친구는 웬만큼 하고는 그만 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는 고기를 가지고 별별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기 시작했다. 식사할 장소는 이제 냇가의 어느 외진 곳이 아니라, 식당과 테이블과 의자가 갖추어진 주의사당이었다. 그것을 내 친구는 그곳의 요리주임과 의논하여 모두 준비해 놓았다. 그 미끼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싫던 빵도 좋아지고 염소에 대한 불쌍한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반드시 고기 자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고기 요리의 맛을 알게 됐다. 그것이 한 1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고기 잔치는 모두 합하여 대여섯 번 밖에 못되었다. 그것은 주의사당에 그렇게 매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비싼 고기 요리를 자주 장만하기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개혁의 비용을 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밑천은 내 친구가 늘 장만해야 했다. 어떻게 그것을 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는 해냈다. 그는 나를 꼭 육식가로 만들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수단에도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 잔치는 자연 드문드문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이 비밀 잔치를 치른 날이면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는 건 말도 안됐다. 어머니는 자연 내게 밥을 권하고 왜 안 먹느냐고 까닭을 물었다. 나는 그저 오늘은 먹고 싶지 않습니다. 소화가 좀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했지만, 그런 핑계를 꾸며 대자니 양심에 가책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짓말도 어머니에 대한 거짓말이다. 또 내가 고기먹는 놈이 되어 버린 줄을 어머니나 아버지가 알게 되시는 날이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내 심장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고기를 먹는 것은 필요하고, 전국적으로 음식 개혁 을 일으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제 부모들을 속이는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은 육식은 말도 안되고, 그들이 안계시게 되어 맘대로 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나는 내놓고 고기를 먹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올때까지는 나는 육식을 하지 않겠다. 이 결심을 친구에게 말하고 그뒤로 나는 다시는 육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들은 두 아들이 육식자가 된 줄은 알지도 못했다. 나는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순결한 의욕에 육식을 끊었지만 친구와의 사귐은 끊지 않았다. 그를 개심시키자는 내 열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교제는 나로 하여금 아내에 대해 불신을 저지르게 하는 데까지 이를 뻔했는데,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면했다.
내 친구는 한번은 날 사창가로 끌고 갔다. 그는 내게 필요한 훈수를 해주고는 나를 들여보냈다. 모든 것을 미리 다 꾸며 놓았었다. 돈도 미리 치러져 있었다. 나는 죄의 문턱에 빠져 들었었는데, 하느님께서 그 무한한 자비로 나를 나 자신에게 건져 주셨다. 그 죄악의 굴에 들어가니 눈이 캄캄하고 귀가 막막했다. 나는 여자의 침대 곁에 앉았으나 입이 붙어버렸다. 여자는 참다못해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으며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나는 사내의 면목을 잃기라도 한 것 같아 부끄러워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뒤로 언제나 하느님이 나를 건져 주신 것을 감사한다. 나는 내 일생 동안 그런 일이 네 번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대개의 경우 내편에서 힘을 써서라기 보다는 운수가 좋아서 구원됐다. 엄정한 도덕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경우는 다 도덕적 타락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욕은 이미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행동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몸으로 범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구원됐다 할 것이다. 나는 다만 그런 의미에서 구원이 됐다. 어떤 행동은 그것을 피하게 된 것이 피한 그 사람에게나 그 주위의 사람에게나 천행인 때가 있다. 누구나 올바른 의식으로 돌아만 오면, 그 모면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이 아무리 빠지지 않으려 애를 써도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는 동시에, 또 이따금은 자신은 그러려 하지도 않는데 하느님의 섭리가 뛰어들어서 건져 주시는 일이 있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사람은 어디까지가 자유이고 어디까지가 환경의 산물일까? 자유의지는 얼마만한 역할을 하며 운명은 어디서부터 무대에 나타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신비요, 또 영원히 신비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그런 일을 당하고도 나는 내 친구와의 사귐이 나쁘다는 데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그의 타락의 꼴이 환히 드러나서 내 눈이 확 뜨일 때까지 아직도 더 많은 쓴잔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순서를 따라 나아가면서 차차 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같은 시기의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해야겠다. 내 아내와의 불화의 원인의 하나는 두말할 것 없이 이 친구와의 사귐이다. 나는 진실하면서도 질투심 많은 남편이었는데, 내 친구는 내가 아내를 의심하도록 부채질을 했다. 나는 그 친구가 거짓말을 하려니 하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자꾸 아내에게 폭력을 가해서 고통을 주었던 내 죄를 나는 도저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 아마 그런 학대는 힌두 교도의 아내만이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여자를 관용의 화신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하인은 억울한 의심을 받으면 그 자리를 떠나면 그만이요, 친구는 사귀기를 그만두면 그만이다. 아내는 자기 남편이 의심스러우면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남편이 만일 자기를 의심한다면 아내는 망하는 것이다. 어디를 갈 데가 있을까? 힌두의 아내가 법정에 가서 이혼을 요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법률이 약이 될 수 없다. 내가 내 아내를 그러한 궁지에다 몰아넣었던 죄를 나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그 혐의의 혹이 뿌리뽑힌 것은 내가 아힘사*1의 뜻을 모든 면에서 이해한 다음에야 된 일이다. 그때 가서야 나는 브라마차랴*2의 영광을 깨달았고, 아내는 남편의 종이 아니라 그의 짝이며, 돕는 자요, 그와 고락을 같이하는 동반자로서 남편과 꼭같이 자유로 자기 길을 택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심과 혐의로 캄캄했던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어리석음과 잔인한 치정이 혐오스러워 가슴이 꽉 막히고, 내가 맹목적으로 내 친구를 믿었던 것을 통탄하게 된다.
*1. Ahimsa : 비폭력이라는 뜻. *2. Brahmacharya :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행위라는 뜻. 방법적인 의미로는 자체, 특히 성기관의 제어를 의미한다.
8. 도둑질과 속죄
내가 육식을 하던 시기, 또는 그 조금 전에 저지른 나의 실수에 관해서 말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 결혼 직전 또는 직후에 시작된다. 내 친척 한 사람과 나는 담배를 피우게 됐다. 담배 피우는 것이 무슨 좋은 점이 있다거나, 또는 담배 냄새가 좋아서 한 짓이 아니었다. 다만 입으로 연기를 푹푹 내뿜는 것이 재미있는 듯해서 한 짓이었다. 우리 아저씨가 그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우리도 그대로 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내버린 꽁초를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꽁초를 늘 얻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는 연기가 많이 뿜어지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인도 궐련을 사기 위해 머슴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담배를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였다. 물론 우리는 어른들 앞에서 피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훔친 돈을 가지고 몇 주일을 그럭저럭 피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어떤 식물의 줄기가 구멍이 많아 담배와 같이 피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것을 구해서 피워도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자립을 못하는 것이 몹시 원통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완전히 정이 떨어져 우리는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까? 어디서 그 독약을 구할 수 있을까? 다투라의 씨가 독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 우리는 정글속을 찾아 다녀서 그것을 얻었다. 저녁때가 적당하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케다르지 만디르로 가서 절간 등에다 기름을 치고 다르샨*1을 한 후 조용한 구석을 찾았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내 죽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또 죽어서 좋을 것이 무엇이냐? 차라리 자립을 못하더라도 참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두서너 알을 삼켰는데 더이상 삼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둘 다 죽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람지만디르로 가서 마음을 고쳐먹고 자살할 생각을 씻어 버리기로 했다. 나는 자살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다음부터 언제나 누가 자살한다고 위협하는 것을 들어도 거의 또는 전혀 겁내지 않게 되었다.
자살하려던 생각 때문에 결국 우리 둘은 담배 꽁초를 피우는 습관과 담배피울 목적으로 머슴의 돈을 훔쳐내던 습관은 끝을 내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나이든 후에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담배를 피우는 습관은 야만적이고 더럽고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전세계를 통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왜 그렇게 성행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이 가득 들어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차간에서 여행을 하기란 참 힘드는 일이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심한 도둑질은 좀더 후에 내가 저지른 것이었다. 내가 동전을 훔친 것은 열두세살 아니면 그보다 어린 때의 일이었다. 그 다음 도둑질은 내가 열다섯살에 저지른 것이다. 이번에는 육식하던 형의 팔찌에서 금 한조각을 훔쳐냈다. 그 형님은 약25루피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팔에 순금 팔찌를 끼고 있었다. 거기서 한 조각을 떼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도둑질을 했고, 그 빚은 청산이 됐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때릴까봐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니, 아버지가 언제 우리에게 매질을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당할 고통이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깨끗한 자백없이 결백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자백서를 써서 그것을 아버지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기로 작정했다. 나는 종이조각에 그것을 써서 내 손으로 아버지께 바쳤다. 이 글속에서 나는 내 잘못을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 대하여 적당한 벌을 달라고 했고, 내 죄 때문에 아버지 자신을 벌하지는 말아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또 앞으로는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버지께 자백서를 바칠 때 나는 벌벌 떨었다. 그때 아버지는 누관을 앓고 계셨으므로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침대는 편편한 나무판자였다. 나는 종이조각을 드리고 판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가 그것을 다 읽었을 때 구슬 같은 눈물이 두 뺨을 흘러 떨어져 종이를 적시었다. 잠시동안 눈을 감고 생각한 다음 종이를 찢어 버렸다. 그는 읽기 위해 일어나 앉았던 몸을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나도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고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만일 화가라면 오늘이라도 그 광경을 그대로 그릴 수 있겠다. 내 마음속에 아직껏 그렇듯 생생하다. 그 사랑의 구슬방울들이 내 양심을 정화시켰고, 내 죄를 씻어 버렸다. 그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가에 있는 대로,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만이 그 힘을 안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아힘사 의 실물교육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는 거기서 한 아버지의 사랑을 볼 뿐이었지만, 오늘날 나는 그것이 순수한 아힘사 임을 안다. 그러한 아힘사가 모든 것을 쓸어안게 될 때 그에게 닿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숭고한 용서는 우리 아버지에게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노해서 몹시 나무라며 자기 이마를 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놀랍게도 평화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의 깨끗한 자백 때문이라고 믿는다. 죄를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는 순결한 고백은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 앞에 바쳐졌을 때 가장 순수한 타입의 회개가 된다. 나는 내 고백이 아버지로 하여금 내게 대하여 절대로 안심하게 하였고, 내게 대한 사랑을 무한히 더하게 했다는 것을 안다.
*1. Darashan : 어떤 위대한 것을 대함으로써 얻는 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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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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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3장 그리스의 태초 신들
9. 데메테르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 엘레우시스 신전의 벽 장식. BC 450]
데메테르(Demeter, Ceres)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둘째딸로 헤스티아와 헤라의 가운데다. 종교상으로나 신화상으로 성격은 가이아(우주의 관점에서 대지여신)와는 판이하여 농사 특히 곡물의 지모신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 세계 도처, 특히 밀이 자라는 고장이면 이 여신의 전설이 많다.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풍요의 여신 케레스와 동일시하였다. 데메테르 여신 숭배와 전설의 중심지는 엘레우시스와 시칠리아이며 그밖에 크레타, 트라키아 및 펠로폰네소스에서도 성행하였다. 여신 숭배와 전설은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로 후에 코레라고만 불린 페르세포네가 긴밀히 연계되어 각지에서는 단순히 이주여신으로 존경하는 경우가 많고, 대중신화는 전승된 두 모녀의 특이한 사건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엘레우시스 비의의 시작은 여신 속에 태로된 깊은 의미를 발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 태어난 페르세포네는 이복자매인 아테나 및 아르테미스와 함께 행복하게 성장하였고 결혼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페르세포네에게 눈독을 들인 숙부 하데스가 제우스의 동의를 받아 그녀를 유괴해 버렸다. 시칠리아의 엔나 초원에서 유괴하였다 하나 막연히 뉴사 초원이라고도 한다. 다른 설에는 엘레우시스 혹은 아르카디아의 큐레네 산록 케피소스 강변에 하데스의 나라로 통하는 동굴이 있는 들 혹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근처 동굴이 있는 초원이라고도 한다. 그 곳이 어디였든간에 땅이 열리고 동굴에서 나타난 하데스는 꽃을 따고 있던 페르세포네를 불문곡직한 채 끌고 지하계로 내려가 버렸다. 딸의 실종을 알게 된 데메테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 세상을 수소문하여 딸을 찾아나섰다. 구렁으로 끌려가면서 계속 절규하는 페르세포네의 울부짖음을 얼핏 듣고 데메테르는 깜짝 놀라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딸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9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의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양 손에 횃불을 들고 실성한 채로 딸의 행방을 찾아 세상을 헤맸다. 열흘째 되던 날, 헤카테를 만나 물었으나 역시 딸의 울음소리는 들었지만 행방은 모른다고 하였다. 결국 납치 정황을 모두 지켜본 바 있는 헬리오스가 데메테르의 딱한 모습을 보고 사건 전모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전승된 이야기로는 아르골리드의 주민인 헤르미오네가 하데스가 범인이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화가 치민 데메테르는 천계로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지상에 남아 딸이 돌아올 때가지 곡물 여신의 역할을 포기하였다. 그리고는 노파로 변장하여 엘레우시스로 가서 바위에 앉아 쉬었는데 그 후 이 바위는 '즐거움없는 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서 그 나라 왕 켈레오스를 만나러 가던 길에 한 아낙네와 어울리게 되는데 이암베라는 이 여자는 익살스런 농으로 오랜만에 데메테르에게 웃음을 찾아주었다. 데메테르는 왕궁에 가서 왕비가 막 출산한 아들 데모폰(혹은 트립톨레모스 라고도 한다)의 유모가 되었다. 왕과 왕비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므로 여신은 그 대가로 아기를 불사신으로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인간 부분을 불에 태우는데 마침 왕비가 나타나 이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아기를 빼앗았다. 그제서야 여신은 신분을 밝힌 후 자신의 본 뜻을 알리고 왕자 데모폰에게는 이 세상 어디에 가든 밀을 뿌리라고 지시하였다. 다른 설에는 시큐온 왕 플렘나이오스의 유모역을 하였다고도 한다. 여신이 이렇듯 자진하여 천공에서 지상으로 망명하여 귀양살이를 하자 땅이 메말라 황폐해지고 온 세상은 황무지가 되어 인간에게 끼치는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제우스는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이미 지하세계에서 단식을 지키지 않고 석류씨를 먹었기 때문에 하데스에게 몸을 의지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제우스는 지상과 지하 사정을 절충하여 1년의 반은 어머니가 있는 올림포스 산에서, 나머지 반은 지하계에서 살게 하니 데메테르는 딸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엇다. 이렇게 해서 매년 봄 밭고랑에서 첫 싹이 솟아나면 페르세포네는 지하계에서 탈출하여 천상에 올랐고, 결실기에는 다시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페르세포네가 데메테르와 헤어져 있는 동안 땅은 말라붙고 음산한 겨울철이 되어 지상은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한편 데메테르가 딸을 행방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에는 지역에 따른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곁들여졌다. 예컨대 시큐온에서는 여신이 물레방아를 발명하여 주민에게 사용법을 알려주고 딴 곳에서는 야채 기르는 법을 일러주었으며 특히 콩과 무화과 재배법을 가르쳤다.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 성역은 그리스 전역에 퍼져 있는데 옛적에 여신이 체재한 곳이거나 은신처라고 전해져 온다. 또한 이 이야기 안에는 데메테르가 페르세포네를 찾고 있을 때 그녀를 사랑하여 열을 올린 포세이돈의 이야기도 가미되었다. 당시 데메테르는 포세이돈의 눈을 피해 암말로 변하였는데 포세이돈 또한 수말로 변신하여 교합하였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아레이온이라는 명마와 그 이름을 언급이 금기된, 그저 여사(mistress)라고만 불리는 딸이 태어났다. 그밖에 데메테르는 이아시온과 밭에서 연애하여 아들 플루토스를 두었는데 커서 부의 신이 되었다. 데메테르는 숭배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시칠리아에서는 헤파이스토스와, 캄파니아에서는 디오뉴소스와 다투었다. 데메테르 여신의 상징 식물은 밀이삭과 수선화 및 앵속이고, 좋아하는 새는 두루미이며 암퇘지를 공양으로 바친다. 조각상은 횃불과 뱀을 갖고 있거나 밀이삭을 가진 상으로 표현한다. 테스모포리아는 테스모포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데메테르와 딸 페르세포네를 위한 비의 축제로 가을철에 그리스 전역에서 개최되었다. 아테네에서는 퓨아넵시온(10.11월)에 데메테르 축제 퓨아넵시아가 개최되었는데, 제11~13일에는 여성만이 제를 지내며 그 첫날에는 나뭇가지로 천막을 치고 모여 앉는다. 축제는 둘째날에 시작되고 3일째 되는 날에는 땅에 뿌릴 씨앗에 성장과 다산 또한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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