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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15호
2012.10.9 (음8.24)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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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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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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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려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 것은 늙어간다는 징조. - 버드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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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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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진면목
“‘자기표현’을 한다고 해도 남자들이 감정과 욕구, 강함과 약함을 모두 갖춘 자기 내면의 진면목을 전부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로 국내의 친북 세력도 이제 북한의 진면목을 깨닫게 됐을 것이다.”
‘면목(面目)’은 ‘사람 얼굴의 생김새’ ‘사람이나 사물의 겉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면목’ 앞에다 ‘참된’ ‘진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진(眞)-’을 붙이면 ‘진면목’이 된다.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뜻한다.예문의 ‘진면목’이라는 한자어보다는 쉬운 우리말 ‘참모습’을 쓰는 게 더 좋다.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모습’이란 뜻이다.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와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모습’은 설명하는 단어가 다를 뿐 결국 같은 뜻이다.
‘진면목’보다는 “정의로움과 아름다움의 한결같은 참모습,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철학이 지향하는 지혜란, 변화무쌍한 현상을 넘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 한결같은 참모습에 대한 지식이었다”처럼 ‘참모습’을 쓰면 된다.
[우리말바루기] 응큼하다
최근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옆자리에 앉은 여성을 추행하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화제가 된 바 있다. 실제로 여성 직장인 10명 중 4명꼴로 출퇴근길에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이런 응큼한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된다” “다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응큼하게 느껴졌다”에서와 같이 ‘엉뚱한 욕심을 품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응큼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엉큼하다’가 맞는 말이다.
‘엉큼하다’는 위에서와 같이 주로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긍정적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그이는 보기보다 엉큼하게 일을 잘해내 믿음이 간다”에서처럼 ‘보기와는 달리 실속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엉큼하다’의 작은말인 ‘앙큼하다’는 ‘엉뚱한 욕심을 품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는 의미를 지녀 ‘엉큼하다’와 실질적 뜻이 같다. 그러나 표현상 느낌이 작고 가볍고 밝게 들려, “앙큼한 사랑의 거짓말”에서와 같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깜찍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어감의 차이가 ‘엉큼한 손길’과 ‘앙큼한 손길’의 의미를 구분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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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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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論 - 최영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 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아지못할 근원으로 한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 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 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 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一字나 十字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놓을 때 그때마다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턱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혜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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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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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3. 배움과 가르침을 위한 수프
할렘가의 왕실 기사단
뉴욕 맨하탄에는 멕시코인들이 사는 할렘가 지역이 있다. 내가 사는 맨하탄 아파트에서 그곳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곳은 수만 광년 떨어진 이질적인 세계이다. 미국의 한 지역이면서도 여러 면에서 그곳은 제3세계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유아와 산모 사망률이 방글라데시와 비슷하고, 남성의 평균 수명은 방글라데시보다 더 낮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사용하는 언어 때문에도 뉴욕 시의 다른 행복한 지역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매스컴은 이 지역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있다. 이 제3세계 국가에서 근무하는 경찰과 교사들조차 그 지역 안에서 생활하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내용은 그들의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배우게 되는 것은 뻔하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 사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스트 101번가의, 철제 담장과 콘크리트 운동장을 가진 황폐한 작은 구획 안에 한 중학교가 있었다. 그곳에서 빌 홀은 정규 영어 과목 외에도 푸에르토리코와 중남미 지역, 그리고 심지어 파키스탄과 홍콩에서 이민 온 학생들의 제2외국어에 대항하는 기초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자기 낯선 나라에 도착한 아이들은 당연히 새로운 문화와 이상한 규칙에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부모나 이웃들 역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미아가 된 느낌을 갖고 있고,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 모든 환경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그리고 빌 홀은 이제 그 아이들과 날마다 마주하게 되었다. 이 다양한 집단의 아이들에게 동질감을 심어 주고 동시에 영어도 가르칠 수 있는 흥밋거리가 무엇일까 궁리하던 빌은 어느 날 이웃 사람 하나가 체스판을 들고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도 체스의 실력자였던 빌은 그것이 문화를 초월하는 게임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빌 홀은 몹시 미심쩍어하는 교장을 설득해 방과후에 체스 동아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여학생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여자가 체스를 두는 것을 본적이 없는 까닭에 여학생들은 이 동아리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델이 될 만한 여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동아리를 찾아온 몇 명의 여학생들마저 얼마 가지 않아서 떨어져 나갔다. 남학생 역시 많은 수가 포기했다. 체스는 그 지역에서 있기있는 취미 생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두 명 정도의 아이들은 계속 남아서 체스의 기본 정석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은 그 아이들이 방과후까지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놀려 댔고, 어떤 부모는 체스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빈민가에서 체스를 두는 건 사치일 뿐 아니라 먹고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빌이 그들의 삶에 특별한 어떤 것을 심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은 처음으로 그들을 신뢰해 주고, 그들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가져준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체스 실력과 영어 실력이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실력이 많이 나아지자 빌은 그들을 할렘가의 외부 지역에 있는 학교들로 데리고 다니며 체스 시합을 주선했다. 빌리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지하철 요금을 대고 저녁 식사로 피자를 사주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빌이 진심으로 자기들을 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사의 봉급으로는 그것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이 백인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좀더 독립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빌은 외부에서 체스 시합이 열릴 때마다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전체를 통솔 하도로 했다. 아이들은 돌아 가면서 체스 시합에 따른 모든 여행 일정과 준비물들을 책임져야만 했다. 차츰 빌이 없어도 이이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떠맡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지도하고, 개인적인 문제들을 상의하며, 서로의 부모에 게 체스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설득시켰다. 이런 자심감은 수업 시간으로도 이어져 차츰 성적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더 나은 학생이 되고 더 나은 체스 선수가 되자 아이들에 대한 빌 홀의 꿈도 켜져 갔다. 그는 맨하탄 체스 클럽에서 받은 약간의 후원금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시라큐스(뉴욕 주 중부에 있는 도시)에서 열리는 주 결승전에 참가했다.
한때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외톨이들이고, 수동적이며, 폐쇄적이기만 했던 이 열두 명의 아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선택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이 그것이었다. 주결승전에서 3위에 입상한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전미 중학교 체스 결승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따낼 수 있었다. 그러나 빌의 동료 교사들은 빌에게, 무의미하게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한 교사가 말한 대로, 이 빈민 지역의 아이들은 실제 생활에서는 평생동안 '뉴저지 주(뉴욕 주 바로 옆에 위치한 주)를 지나가 보지도 모할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왜 쓸데없이 기금을 모아 그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나라 반대편까지 날아간단 말인가? 그것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현실 생활에 불만을 갖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은 캘리포니아행 비행기 티켓을 살 기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전미 대회에서 109개 팀 중에서 17위를 차지했다. 이제 체스는 그 학교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체스팀에 들어가면 적어도 다른 도시로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뉴욕 체스 클럽을 방문한 체스 부원들은 세계 여성 체스 챔피언인, 러시아에서 온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을 기회로 아이들은 빌조차도 깜짝 놀랄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이 소녀가 러시아에서 올 수 있었다면, 왜 왕실 기사단이라고 러시아에 갈 수 없단 말인가? 어쨌든 러시아는 체스의 종주국이었으며, 곧 전세계 학생 체스 친선대회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인으로서 그 연령의 체스 선수가 이 대회에 참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역 공무원들의 노력으로 계획은 통과되었다. 빌은 여행 경비의 후원금을 받기 위해 몇 개의 대기업을 찾아갔다. 물론 이 팀이 우승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여행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의 삶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이라고 빌은 역설했다. 마침내 펩시콜라 회사에서 2만 달러짜리 수표를 건네주는 순간, 빌은 이 허황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들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외면했던 미국을 대표해서 공식적인 경기 참가단의 자격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아이들은 뉴욕 할렘가의 유명인사들로서 자신들의 가난한 이웃을 대표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입은 유님폼 등에는 'U.S.A' 가 아니라 '왕실 기사단'이라고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자신감을 잃었다. 상대편 러시아 선수들은 그들이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특유의 심사숙고형 경기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사단의 한 선수가 30대의 러시아 체스 챔피언과의 시범 경기에서 무승부를 이루는 기적을 낳았다. 러시아 선수들이라고해서 물리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사람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 기사단은 러시아에서 벌어진 모든 경기의 절반 정도를 이겼으며, 스피드 체스 경기에선 오히려 자신들의 이점을 살려서 전 경기를 석권할 수 있었다. 천천히 심사숙고하면서 두는 것을 미덕으로 배워 온 러시아 선수들과는 달리 기사단 선수들은 거리에서 익힌 빠른 속도로 경기를 해 나가면서도 정확성을 잃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레닌그라드 시합에 참가해서는 아이들의 사기가 더 높아졌다.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에서 체스에 대한 아무런 재능도 없이 무작위로 모인 선수들이었지만, 아이들은 한 경기에서 승이를 거두고 또 다른 경기에서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기사단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러한 자신감이었다. 그로부터 몇 잘 뒤에 내가 그 중학교의 체스 특활반에 들렀을 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빌 홀 선생이 최근에 체스 부원인 푸에르토리코 학생과 백인 교사 사이에 일어난 일 때문에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묻자 빌은 아이에게 직접 설명하도록 했다. 그 학생이 시험 점수가 높게 나오자 교사는 아이가 컨닝을 했다고 믿고는 재시험을 치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시험에서도 높은 점수가 나오자 교사는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 때문에 기분 나빠 하더라는 것이었다. 빌 홀은 말했다. "만일 이웃에 있는 다른 학교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들은 그런 식의 차별 대우를 수업 시간에 줄곧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의식이 심어져 있었다. 그 아이는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그 선생님은 질투가 나는 것이겠죠. 우리가 이 학교를 지도에 나오는 학교로 만들었으니까요." 사실이 그러했다. 이 거무칙칙한 중학교의 강당은 러시아 무용단의 뉴욕 순회 공연 때 공연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각 학교의 교장들이 이 학교에 체스 지도법을 문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텔레비젼과 라디오, 신문들이 왕실 기사단과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아이들의 중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수많은 고등학교들로부터 이 '재능 있는'학생들을 스카우트하겠다는 제의가 쇄도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고등학교를 선택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한 학생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아이들은 서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 가슴아팠지만, 제의를 받은 그 학생을 설득했다.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말했어요."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우리가 매주 편지를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자 세 번째 아이가 말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치 않고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그들은 이제 법률가, 회계사, 교사, 컴퓨터 과학자가 될 포부들을 갖고 있었다. 전에는상상도 못 할 미래의 꿈이었다. 그들이 그런 미래를 성취한 뒤에 다시 모이게 되었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더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들 삶 속으로 어느 날 빌 홀이라는 이름의 교사와 체스 경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내 질문에 아이들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한 소년이 대답했다. 그 아이는 이제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아이였다. "거리를 배회하면서 인생이 개 같다고 느꼈죠." 또 다른 아이는 고백했다. "꼬마애들한테서 점심값을 뜯거나 이따금 환각제를 즐겼어요." 세 번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방 안에 누워 만화책을 보면서, 아빠한테서 게으름뱅이라는 욕설을 듣는 게 고작이었죠." 그렇다면 학교 교과서가 이들을 특별한 아이들로 변화시켰는가? 그러자 한 아이가 말했다. "빌 홀 선생님이 우리를 뛰어난 아이들로 인정해 주시기 전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실제로 우리는 뛰어난 아이들 이거든요."
글로리아 스타이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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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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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5부 독일 관념론 철학 이야기
셸링의 동일 철학
셸링은 하나의 동일한 세계 근거, 곧 절대적 무차별자로서의 동일자로부터 주관과 정신 그리고 객관과 자연이 생긴다고 본다. 정신과 자연은 동일한 세계 근거가 분열된 것이므로 동질적이다.
셸링(1775~1854)은 레온베르크 출신으로 횔덜린, 헤겔과 함께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수학, 물리학, 의학을 공부했으며 1798년 예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예나 대학에서 슐레겔 형제가 주도하는 낭만파에 가담했으며 자신의 대표 저서들을 집필했다. 셸링은 뷔르츠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에얼랑겐 대학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했다. 셸링의 철학은 보통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연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두 번째 시기는 브루노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동일 철학의 시기이다. 그는 자연과 정신을 보다 더 높은 원리의 두 국면으로 보았다. 세 번째 시기는 종교철학의 시기로 뵈메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은 신화 철학과 계시 철학, 곧 셸링이 말하는 긍정 철학으로 나타난다. 셸링의 철학의 각 시기의 특징은 서로 연관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념론적 사고가 일관성 있게 전개되며 또한 헤겔 변증법의 기초가 되는 변증법적 요소도 강하다. 그러나 셸링 철학은 세계 원리로서 동일자를 강조하면서 또한 지적 직관에 의한 동일자의 파악을 제시하기 때문에 신비주의 철학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브루노, 뵈메와 같은 신비주의 철학자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 철학 셸링은 절대 자아가 비아와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정립한다는 피히테의 생각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보고 자신은 객관적 관념론을 구축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존재자들은 자연의 근원적 근거를 바탕으로 삼아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셸링은 하나의 동일한 세계 근거, 곧 절대적 무차별자로서의 동일자로부터 주관과 정신 그리고 객관과 자연이 생긴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에 그리고 현대 프랑스의 베르그송의 '삶의 약진'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는 사상이다. 그러면 정신과 자연은 어떻게 생기는가. 셸링은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적으로 동일한 통일을 세계 근거 자체라고 부르며 이 동일자가 스스로 분열되어 대립적인 정신과 자연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동일자는 자기 분열에 의해서 정신과 자연으로 되고 이들 양자는 각각 자신에게 특수한 발전 과정을 진행한다. 자연을 비롯한 물질도 대립된 두 힘에 의해서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두 가지 힘은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 곧 견인력과 반발력이며 그것들은 전기적 힘이나 자기적 힘의 형태로 나타난다. 셸링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자연을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며, 자연 안에는 견인력과 반발력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연을 이끌어 가는 힘은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의 양극성이다. 셸링의 이러한 생각은 동양의 음양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암컷이 있으면 수컷이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어서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음양 사상의 핵심이다. 셸링에게 있어서 자연의 양극성은 항상 균형을 추구하지만 두 힘의 갈등은 계속되므로 완전한 균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셸링은 자연을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이 세계에서 질료는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반면에 정신은 능동적이며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정신과 자연(질료)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세계 근거가 분열된 두 국면이기 때문에 동질적일 수밖에 없다. 신화 철학과 계시 철학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철학에서 셸링은 절대적 무차별자인 동일자를 신으로 본다. 결국 신은 자신을 분열함으로써 정신과 자연으로 나타나며 정신과 자연 안에는 항상 대립하는 견인력과 반발력이 작용한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세계 근거는 신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신으로 복귀하려고 한다는 것이 셸링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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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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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4 - 김병총
5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당몽(唐蒙)은 사신으로서 야랑국(夜郞國:貴州省 西部)으로 가 계략을 사용해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공(四川省 西昌縣), 작(四川省 成都縣 남서쪽)의 추장(酋長)들도 자청하여 한의 내신(內臣)이 되고 한나라 관리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 제56에 <서남이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서남이(西南夷:蜀의 남쪽에 있는 만이)의 군장(軍長)은 수십 명이었다. 그러나 야랑국 군장의 세력이 가장 컸다. 야랑국의 서쪽에는 미막(靡莫)이라는 부족이 수십 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국(雲南省)이 가장 큰 부족이었다. 또 전국 이북으로는 군장국이 수십 개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공도가 가장컸다. 이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밭을 갈며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이밖에 서쪽으로 동사읍(同師邑:雲南省)과 동북방의 접유(雲南省 大理縣 東北)에 이르기까지를 쉬국(四川省 寧遠府), 곤명국(昆明國:四川省 鹽源縣)이라 이름한다. 모두들 머리를 땋고 가축을 따라 주거지를 옮기며 군장도 없이, 그들이 이동하는 땅은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쉬에서 동북방으로 또 수십 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사국(徙國:四川省)과 작도국이 가장 컸다. 작도국에서 또한 동북방으로 수십 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그 중에서 염국과 방국(모두 四川省)이 가장 컸다. 그들의 풍속을 보면 혹은 정착해 살고 혹은 떠돌며 살았는데, 대체로 촉(蜀)의 서쪽이 본거지였다. 염국과 방국의 동북방에도 역시 수십 개의 군장국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백마국(白馬國)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모두가 저(티베트 종족)족이다. 이상은 모두 파, 촉의 서남 외부에 살고 있는 만이족들이다.
당초 초(楚)나라 위왕(威王)시대에 왕은 장군 장교를 시켜 양자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파군, 촉군, 검중군(黔中郡:湖南省) 이서를 공략케 했다. 장교는 본래 초 장왕(莊王)의 후손이다. 장교가 전지(昆明池, 雲南省)까지 갔는데 전지는 사방 3백 리이며 그 부근 수천 리가 비옥한 땅이었다. 장교는 무력으로 이곳을 평정한 뒤 초에 귀속시켰다. 그런데 마악 귀국하려는 순간 진나라가 공격해 와서 파군, 검중군을 탈취하는 바람에 초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차라리 전화위복이다. 내 부하들을 이끌고 되돌아 가서 전국의 왕이 되겠다." 장교는 지방민들의 복장으로 바꾸고 습속에 따르면서 그 땅의 군장이 되었다. 진나라 시대가 되자 상알이라는 자가 공략해 들어오더니 도폭 다섯 자가 되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그런 후 많은 관리들을 보내와 일대를 다스렸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섰다. 한나라는 이들 땅을 치외(治外)의 땅으로 버려 두고 촉에 있던 요새의 관문까지 닫아 버렸다. 교통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파, 촉의 백성들은 작국의 말과 북국(건위군 지방의 종족)의 노비나 털이 긴 소 등을 밀무역했다. 그로 인해 파, 촉의 백성들은 부유했고 활기찼다.
건원 6년에 대행 왕회(王恢)가 동월을 토벌하고 동월은 그들 왕 영을 죽임으로써 한나라의 공격을 모면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왕회는 무력을 과시하며 파양 현령 당몽을 시켜 남월에게 한나라로 귀순하도록 간곡히 타일렀다. 그때 남월에서는 당몽에게 촉에서 생산되는 구장(枸醬:枸의 열매로 만든 장)을 먹였는데 당몽은 그 맛에 혹하여 생산지를 물었다. "서북쪽 장가강을 거쳐 온 것입니다. 장가강의 폭은 몇 리가 되며 파우성 아래로 흐르고 있지요." 당몽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촉의 장사치에게 구장 생산의 사실 여부를 물었다. "구장은 촉에서만 생산됩니다. 몰래 야랑땅으로 가지고 나와 매매하지요." "야랑은 장가강에 임하지 않는가. 거기에 배를 띄울 수 있겠는가." "강폭이 몇 리에 걸쳐 있으니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당몽이 촉과 야랑을 탐내고 있음을 눈치챈 상인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남월에서는 재물을 보내 야랑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동사(同師) 지역까지 거느린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역시 신하로까지 부리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됐다." 당몽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남월왕은 천자에게만 허락된 황금빛 수레와 좌독기(左纛旗)를 세우고 다니며 그 국토는 동서로 만여 리는 됩니다. 비록 한나라의 외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한 주(州)의 군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사(長沙), 예장(豫章)의 군사로 그들을 토벌하려 해도 수로(水路)가 자주 끊어지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관찰해 본 결과 야랑에서 정병 10만은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이들을 동원해 장가강에 띄워 남월을 불의에 습격하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한나라의 강대함과 파, 촉의 부유함을 가지고 야랑으로 통하는 길을 개척하기만 한다면 그곳에 관리를 두기란 매우 쉬운 것 같습니다.
황제는 당몽의 제안을 허락했다. 그를 낭중령으로 임명해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한편 치중거를 끄는 병사 1만여 명도 주었다. 당몽은 이들을 이끌고 파촉의 작관(四川省)에서 야랑으로 들어가 드디어 야랑후 다동(多同)을 만났다. 당몽은 다동에게 후한 선물을 준 뒤 천자의 위덕을 깨우쳐 주고 야랑에 한나라 관리를 둘 수 있도록 권했다. "만일 이런 약정에 동의한다면 그대의 아들을 현령으로 임명되도록 하겠소." 야랑 주변의 성읍에서는 모두 한나라 비단을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동은 혼자서 생각했다. "한나라로 통하는 길은 어차피 험난하다. 한이 야랑을 탐내 보았자 점령하지는 못할 걸." 그런 판단을 내린 다동은 드디어 당몽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몽은 귀국해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한에서는 그 지역에 건위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파촉의 군졸을 징발해 도로를 닦으며 북에서 장가강까지 밀고 나갔다. 촉나라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이(西夷)땅 공, 작 지역에도 군(郡)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마상여를 낭중령으로 삼아 서이에게로 가서 한에 복속하도록 타이르게 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다 한 명의 도위(都尉)와 10여 개의 현(縣)을 설치해 촉에 소속시켰다. 이렇게 되니 파촉의 4군(四郡:漢中, 巴邑, 廣漢, 蜀郡)에서는 서남이의 땅으로 도로를 닦는 역사로 인해 식량운반 군사들의 왕래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 도로 개통을 보지 못했다. 사졸들은 지치고 굶주렸으며 습기에 시달려 사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자주 모반하는 서남이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동원해 보았지만 힘만 소모할 뿐 군공 역시 없었다. 황제는 이런 사정을 근심했다. 그래서 공손홍(公孫弘)을 시켜 현지를 시찰케 했다. 시찰에서 돌아온 공손홍은 서남이와의 불편한 교통을 보고했다. 한편 공손홍은 어사대부가 되어 삭방군에다 성을 쌓아 황하에 의지해 흉노를 축출하는 일에 매달려 있던 터였으므로 황제에게 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남이의 경영은 잠시 중지하고 오로지 흉노 축출에 진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황제는 서남이에 파견된 관리 대부분을 철수시키고 남이와 야랑 두 현에만 도위 한 명씩을 두어 점차로 건위군을 자치(自治)하도록 했다.
한무제 원수(元狩) 원년이었다. 박망후 장건(張騫)이 대하국(大夏國:바트리아)으로 사신갔다 와서 이렇게 말했다. "대하에 체류할 때 촉(蜀)의 베[布]와 공의 지팡이[竹杖]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동남방의 견독국(身毒國:印度天竺. '견독'은 '인도'로 발음되기도 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가 어딘가?" "촉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이고, 공의 서쪽으로 치면 2천 리 가량 떨어진 곳이지요. 물론 그런 물건들은 촉의 상인들이 견독국에서 무역해 온 것이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해 보라." "미리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대하국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지만 흉노가 교통로를 막고 있어 올 수가 없답니다. 촉과의 길만 트게 한다면 견독국과도 길이 가까워지고 그럴 경우 중국에도 해는 없고 이익만 있다고 했습니다." 황제는 몹시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등에게 영을 내려 오랑캐들 몰래 서쪽을 벗어나가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국에 도착했을 때 전국왕 상강(嘗羌)이 왕연우 등을 억류시켜 버렸다. "저 자들에게 좋은 일 시킬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찾아보도록 하자." 그러면서 상강은 전국 사람 10여 인을 시켜 견독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들도 1년이 넘도록 길을 찾지 못했다. 거의가 곤명국(昆明國)에서 길을 차단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국왕은 한의 사신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한나라와 우리 전국과 비교해서 어느 쪽 나라가 크오?" "모르겠습니다." 야랑국으로 갔을 때에도 꼭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통이 두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이나 야랑국이나 자신의 나라는 물론 한나라의 광대함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의 사자들은 하릴없이 귀환했다. "전국은 큰 나라입니다. 한나라와 친교를 맺어 두어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황제는 전국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치의후(馳義侯)를 시켜 건위군을 통해 남이의 군사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저란국(且蘭國:貴州省)의 군주는 자신이 원정간 사이에 인근 나라들이 자국의 노약자들을 잡아가지 않을까 근심했다. 결국 강제 원정을 떠나지 않으려면 한나라에 저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치의후와 건위군 태수를 살해하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도 바빴다. 전날 파촉의 죄수로서 남월을 토벌했던 8명의 교위(校尉)를 출동시켜 저란국을 격파하도록 했다. 그런데 때마침 남월이 격파된 상황이 되어 8교위군을 저란국에서 돌려 두란국(頭蘭國:南夷)을 먼저 치게 했다. 두란국이야말로 한이 전국으로 가는 길을 항상 가로막았던 나라였다. 두란국이 평정되자 남이는 저절로 평정되었으며 그곳에다 장가군을 설치할 수가 있었다. 야랑국은 원래 남월에 의지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한이 남월을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한을 배반했던 나라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자 야랑도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랑왕은 제빨리 한에 배반한 나라들을 주벌하는 일에 합세하면서 한나라에 입조해 버렸다. 황제는 야랑후를 야랑왕에 임명했다. 남월을 멸망시키고 난 한나라는 저란, 공, 작의 군장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렸다. 그러자 염, 방 등의 군장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어서 한나라 신하가 될 테니 한시바삐 한나라 관할 군(郡)을 설치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공도에 월쉬군(四川省)을, 작도에 침려군(四川省)을, 염, 방에는 문산군(汶山郡:四川省)을, 그리고 광한(廣漢) 서쪽의 백마(白馬)에 무도군(武都郡:甘肅省)을 설치했다. 황제는 왕연우를 시켜 남월을 멸망시키고 남이를 주멸한 한의 무력을 전국왕에게 과시하게 하면서 그를 달래어 입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전왕은 그가 거느린 무리가 수만이며 또 동북방으로 노침국(努浸國)과 미막국이 동성(同姓)이라 협조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한나라의 요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노침과 미막은 한나라 사자와 사졸들에게 폭행을 가하기조차 했다. 원봉 2년에 황제는 파촉 군사를 동원해 마침내 노침과 미막국을 멸망시켰다. 연달아 전국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자 전왕은 서남이에게 이탈해 나라를 들어 한에 항복했다. 그리고 입조하기를 청원했다. 한에서는 전부터 전국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왕을 주살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익주군(益州郡:雲南省)으로 삼고 전국왕에게는 국왕이 옥새를 내렸으며 자기 백성의 군장이 되게 했다. 서남이의 군장은 수백 명이었으나 오직 야랑과 전국만이 왕의 인장을 받았다. 전국은 가장 작은 나라였으면서도 한나라한테서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초나라 선조는 하늘의 은총을 받은 것일까. 주대(周代)에는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초나라에 봉함을 받았으니까. 주가 쇠망했을 때에도 그의 영지는 사방 5천 리라고 했다. 진이 제후를 멸망시킨 후에도 오직 초의 후예만이 아직 전국왕으로 남은 것이다. 서남이를 주멸했을 때에도 오직 전국만 한의 황제가 총애하여 왕국으로 존속시켰다. 그런데 남이 사건의 발단은 당몽이 파우에서 구장(枸醬)를 본 데서 시작되었다. 서이는 후일 동서로 분리되었다가 드디어 7군(七郡)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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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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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遂自薦(모수자천) 毛(털 모) 遂(이를 수) 自(스스로 자) 薦(천거할 천)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자신의 집에 수많은 식객들을 두고 있었다. 조나라 효왕(孝王) 9년,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이에 평원군은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가게 되자, 식객중에서 자신을 수행할 사람 20명을 뽑고자 했다. 몇번이고 고르고 골랐지만 끝내 한 사람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자신를 추천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유능한 사람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송곳처럼 금방 드러나게 되는 법인데, 당신은 삼년 동안이나 내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수는 제가 지금 초나라 수행을 원하는 것은, 저를 자루 안에 넣어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군께서 저를 좀더 일찍 자루에 넣어주셨더라면, 저의 재능도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毛遂自薦 이란 자신의 재능을 알리며 자기가 자신을 추천함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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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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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5. 중학교에서
내가 결혼했을 때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말을 이미 했다. 우리 삼형제는 모두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맏형은 훨씬 높은 학년이었고, 나와 함께 결혼했던 형은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우리는 결혼 때문에 한 해를 허비했다. 우리 형님께는 정말 나쁜 결과가 돼버렸다. 그는 공부를 아주 그만둬 버렸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 힌두 사회에서만 공부와 결혼이 그와 같이 병행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계속했다. 중학교에서는 열등생으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해마다 부모님께로 학업 성적과 품행 통지표가 왔는데, 나는 한번도 나쁜 통지표를 받은 적이 없었다. 2학년 말에는 사실 상까지 탔다. 5학년과 6학년에서는 각각 4루피와 10루피의 장학금을 탔는데, 사실 그것은 운이 좋아서 탄 것이지 내 성적 때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장학금은 모든 학생이 다 탈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카디아와드의 소라드 구에서 온 학생 중 우수한 사람에게만 주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40내지 50명 되는 한 학급 학생 중에 소라드에서 온 사람은 그리 만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나 스스로 공부를 잘하노라는 생각은 없었다. 상이나 장학금을 탈 때마다 나는 늘 놀라곤 했다. 그러나 품행에 관해서는 매우 깊이 조심을 했다. 지극히 조그만 잘못 때문에도 나는 눈물을 흘리곤 했다. 꾸중 들을 짓을 했거나 또는 선생에게 그렇게 보인 때는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번은 체벌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데, 벌 그 자체보다도 벌을 받아야만 했다는 그 사실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나는 슬피 울었다. 그것은 내가 1학년인가 2학년 때의 일이었다. 7학년 때도 한번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도랍지 에둘지기미씨가 그때 교장이었는데, 그는 엄격하고 수완도 있으며 좋은 선생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인망이 높았다. 그는 체조와 크리켓을 상급 하년의 필수과목으로 정하였으나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싫어했다. 필수과목이 되기 전부터 나는 크리켓이나 축구, 그밖의 어떤 운동에도 끼여 놀지 않았다. 그렇게 섞이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나의 수줍음 때문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때 나는 운동은 교육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나는 체육은 교과과정에서 지육과 똑같은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운동은 하지 않았어도 몸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왜그랬느냐 하면, 나는 책에서 바깥 공기 속에서 오래 산책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읽고, 그 가르침이 좋아서 산책하는 습관을 길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이 산책으로 나는 상당히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체육을 싫어한 이유는 아버지의 간호를 잘 해드리자는 열의 때문이었다. 학교가 끝나기만 하면 나는 곧 집으로 달음질쳐 와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체육이 필수과목이 되니 아버지 간호에 지장이 생겼다. 나는 기미 씨에게 아버지를 간호할 수 있게 체육과목을 면제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그는 들어 주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에 일어난 일인데, 그날은 오전 수업이므로 오후 네 시에 체육을 하러 나는 집에서 다시 학교로 가야 했다. 나는 시계가 없었는데 흐린 날씨가 나를 속였다. 내가 학교에 채 가기도 전에 아이들은 벌써 다 헤어졌다. 이튿날 기미씨는 출석부를 조사하다가 내가 결석한 것을 보고 결석한 까닭을 물었으므로,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1안나인가 2안나(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의 벌금을 물라고 명령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를 졌다! 그것이 내게는 한없이 괴로웠지만 내 결백함을 무엇으로 증명할까? 도리가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고민에 울음이 복받쳤다. 진실하려는 사람은 또한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내가 학교 시절에 부주의를 저질렀던 처음인 동시에 마지막 사건이었다. 결국 벌금은 물지 않게 됐던 것을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아버지가 직접 교장께 편지를 내어 방과 후에는 나를 집으로 보내 주기를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체육시간의 면제를 받았다.
그러나 체육을 게을리한 데 대해선 비록 별로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것 또 하나를 무시했던 죄로 그 벌을 오늘까지도 받고 있다. 어디서 그런 관념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글씨 잘 쓰는 것이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 갈 때까지 그랬다. 그후,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거기에서 나서 거기에서 교육을 받은 변호사와 젊은이들의 잘 쓴 글씨를 보고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필체를 소홀히 했던 것을 뉘우쳤다. 나쁜 글씨는 불완전한 교육의 표시로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후에 고쳐 보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었다. 젊어서 게을리했던 것을 나는 끝내 고치지 못하고 말았다. 모든 젊은이들은 나의 실례를 보고 유의하여 글씨를 바로 쓰는 것이 교육의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지금 나의 의견으로는 아이들은 쓰기를 배우기 전에 먼저 그림 그리기를 배워야 한다. 어린이가 꽃이니, 새니 하는 다른 물체를 관찰하여 배우듯이 글자도 관찰해서 배우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글씨 쓰는 것은 물체를 그릴 줄 알게 된 뒤에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학교 시절의 회고담 중 기록할 만한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내가 결혼 때문에 한 해를 잃었으므로 선생은 나더러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한 학년 건너 뛰라고 했다. 그것은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만 허락하는 특혜였다. 그래서 나는 3학년에 여섯 달을 있었을 뿐이고, 여름 방학 전에 시험을 치고 4학년으로 진급을 했다. 4학년부터는 대부분의 과목이 영어로 수업한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하학이 새 과목으로 들어 있었는데, 나는 기하학에 특별한 실력이 없는 데다 영어로 수업을 하니 더욱 어려웠다. 선생은 퍽 잘 가르쳐 주었으나 내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두 학년을 한 해에 하려는 것은 너무도 욕심을 부린 것이라 생각하며 몇번이나 낙심을 하고 다시 3학년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 아니라 선생님께도 망신이다. 나의 노력을 믿고 진급을 추천해 주셨으니 말이다. 그래 이중으로 망신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냥 눌러 앉았다. 그런데 애를 써서 유클리드의 제13정리에 들어가니, 갑자기 기하란 매우 쉬운 과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순수하게 추리력의 사용만을 요구하는 과목이 어려울 리가 없다. 그뒤로 기하학은 내겐 쉽고 재미 있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는 정말 어려운 과목이었다. 기하학에서는 암기할 것이 없었는데, 산스크리트에서는 모든 것을 암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과목도 4학년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6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낙심이 됐다. 내가 보기에 선생은 아이들을 억지로 공부시키려고 애를 쓰는 엄한 사람이었다. 산스크리트 선생과 페르시아어 선생 사이에는 일종의 경쟁이 있었다. 페르시아어 선생은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페르시아어는 쉽고, 페르시아어 선생은 착해서 학생들을 잘 봐준다고 하였다. 그 쉬움 이 나를 유혹하여서 어느날 나는 페르시아어 시간에 들어가 앉았다. 산스크리트 선생은 매우 섭섭해 했다. 그는 나를 곁에 불러놓고 말했다. 네가 어떻게 바이슈나바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느냐? 너는 네 종교의 말을 아니 배우려느냐? 어려운 것이 있으면 어째서 내게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산스크리트를 내 있는 힘을 다해 가르치려 한다. 차차 해가노라면 너는 그 속에 미치리만큼 재미있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낙심해서는 안돼. 와서 다시 산스크리트 반에 앉아.
그 친절을 보고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내 선생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오늘 나는 크리슈나샹카르 판댜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조금이나마 산스크리트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도저히 우리의 성전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산스크리트의 좀더 깊고 완전한 지식을 얻지 못한 것이 크게 후회스럽다. 그후에야 나는 모든 힌두의 자녀들은 산스크리트의 완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인도 고등교육의 모든 교과과정에는, 각각 제 국어는 물론이지만, 그 밖에 힌두어, 산스크리트, 페르시아어, 아랍어, 영어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짓수가 많은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 교육이 좀더 조직적으로 된다면, 그리고 학생들이 모든 교과를 외국말로 배워야 하는 짐을 덜어 버리기만 한다면, 이 말들을 다 배우는 것은 그리 힘드는 일이 아닐 것이고 아주 재미난 것이 될 줄로 확신한다. 한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은 다른 언어의 학습을 비교적 쉽게 하기 때문이다. 실상 힌두어.구자라트어.산스크리트는 한 언어로 생각할 수 있고, 페르시아어.아랍어도 한 언어라 할 수 있다. 페르시아어는 아리안 어족에 속해 있고, 아랍어는 셈어 계통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사이에는 가까운 친족관계가 있다. 양쪽이 다 자기네의 완전한 발달을 이슬람교의 부흥에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르두어도 나는 아주 다른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법은 힌두어의 것을 채용했고 단어는 주로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 우르두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배워야 하고, 정확한 구자라트어나 힌두어.뱅골어.마라타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산스크리트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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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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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3장 그리스의 태초 신들
5. 아이아코스 아이아코스(Aeacus)는 제우스와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 사이에 난 아들이다. 오이노피아 섬의 왕으로 섬 이름을 어머니 이름을 따서 아이기나로 바꾸었다. 그런데 섬에 질병이 돌아 섬 사람들이 모두 멸망하게 되자 제우스 신에게 자기 영토에 다시 사람이 늘게 해주기를 탄원하였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소원대로 참나무 고목에 있는 수많은 개미가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이들 족속을 개미족이라는 뜻의 뮤르미돈족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내 엔데이스와의 사이에서 델라몬(살라미스의 왕으로 테우케로와 아옉스의 아버지)과 펠레우스(아킬레스의 아버지)를 두었으며 그 외 네레이데스의 처녀 프사마테로부터 아들 포코스를 얻었다. 아이아코스는 성실한 성품을 지녀 옛 그리스 세계에서는 미노스, 라다만 토스와 더불어 지하계의 재판관으로 추앙받았다.
6. 튜폰 튜폰(Typhon, Typheus)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타르타로스의 교합으로 실리시아의 동굴에서 태어난 전무후무한 괴물이다. 그는 거인족을 멸망시켜 신권 장악에 성공한 제우스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도전하는데, 이는 가이아가 자신의 아이들인 거인족이 패망한 데 분개하여 제우스에게 보복을 하도록 보낸 것이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튜폰은 뇌성과 흰 머리를 지닌 괴물이었지만 제우스가 벼락으로 공격을 퍼부어 타르타로스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다른 주장에 의하면 제우스와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아 처음에는 제우스에게 패하여 동방으로 도망쳤으나 시리아 경계에서 반격을 가하여 도리어 제우스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제우스의 칼(우라노스를 거세한 반달형 낫)을 빼앗아 제우스 손발의 건을 잘라 힘을 못쓰게 만들고는 절망적인 제우스를 실리시아 산속 동굴로 떠밀어 넣었다. 참혹하게 패배한 제우스는 마침내 소식을 듣고 찾아온 헤르메스와 판의 도움으로 잘린 건을 다시 훔쳐와 복원시키고 올림포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튜폰과의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 때 튜폰은 뉴사산에 있었는데, 운명의 여신 파테스는 하루살이 곤충이 먹는 물기 많은 열매가 힘을 기르는데 효과가 있다고 속여 튜폰에게 권하였다. 이 열매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간의 음식으로 먹으면 허약해지는 것이었다. 튜폰은 트라키아의 하이모스 산에서 제우스와 최후의 격전을 벌였으나 큰 상처를 입어 그의 피가 온산의 계곡을 넘쳐 흐르니 이에 연우하여 이 산을 피의 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승자가 된 제우스는 시칠리아로 패주한 튜폰을 마지막으로 에트나 산으로 덮어 눌러 처치하였다. 지금도 산이 들먹거리고 연기를 뿜으며 화산이 터지고 있는 것은 튜폰이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튜폰의 형상은 날개가 달린 거대한 괴물로 허리 위는 사람 모양, 그 아래는 두 개의 용 꼬리로 되어 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튜폰은 상체 세 개가 하나의 허리에 붙어 있는 괴물로 묘사되어 있으며, 날개와 용 혹은 뱀꼬리가 달려 있다. 상징적으로 물과 이삭 및 새를 들고 있으며 청색 머리(중간은 회색 머리)와 청색 수염(콧수염과 구레나룻)이 특이하다.
[기원전 550년 전 물병에서 발견된 제우스와 튜폰 문양]
7.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란 선견자라는 뜻이다.이아페토스와 오케아노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에피메테오스와 아틀라스 및 거만하고 잔인하여 제우스에 의해 타르타로스로 내던져진 메노이티오스는 모두 친동기간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크로노스와 제우스 부자 간에 벌어진 대격전에서 현명한 제우스에 가담하여 승리를 이끌어 내게함으로써 제우스에게 가장 신임받는 측근이 되었다. 또한 그는 보이오티아 지방 파노페아에서 흙으로 빚은 물건에 아테나로 하여금 생기를 불어넣게 하여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더 널리 알려진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그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천상에 불을 훔쳐와 인간에게 주었으며, 신에게는 항상 좋은 고기를 바쳐야 하는데도 황소를 잡아 비계 덩어리를 제우스에게 보내고 살코기를 넣은 위 뭉치는 사람에게 보내었다. 이것이 결국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카우카소스 산꼭대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찍히게 되었다. 후에 그는 테티스의 아이가 앞으로 천상을 황폐화시키고 대신의 자리를 찬탈할 것이라는 예언을 해준 대가로 제우스로부터 풀려나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는 항상 인간을 보호하고 짐승보다 나은 생활을 하도록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으며 특히 도공을 도와주어 아테네 사람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다. 천문에서 이아페토스는 토성의 제2위성이다.
[제우스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오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 에피메테오스(Epimetheus)는 후각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판도라와 결혼하여 딸 퓨라를 두었다. 퓨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과 결혼하였고 제우스가 내린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
아틀라스
짊지는 자라는 뜻의 아틀라스(Atlas)는 이아페토스와 테미스의 아들로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오스와는 형제간이다. 원래는 천공의 기둥을 보호하는 감시자인데 티탄족의 내란 때 제우스에 항거한 죄로 천공을 양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헤라클레스가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찾아다닐 때 아틀라스 대신 천공을 짊어지고 이 사과를 얻었는데, 천공을 그대로 떠맡기려 한 아틀라스에게 천공을 고쳐 짊어지게 도와달라고 꾀어 다시 떠넘겼다. 후기에는 페르세우스가 고르곤의 머리를 보여 아틀라스를 돌로 변화시켰다고 한다. 대서양은 아프리카 북단의 아틀라스 산맥이 하늘을 떠받쳐 푸른 바다가 되었다고 하여 아틀란틱 해라 부르게 되었다. 해부학에서는 머리를 받치고 있는 제 1경추를 아틀라스라고 하는데 이는 천공을 메고 있는 아틀라스에서 연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판도라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뜻]
판도라(Pandora)는 인간세계의 첫 여인으로, 천상의 제우스 신이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흙으로 여신처럼 빚어내어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용모를 갖추었다. 제우스는 당시 신들에게 불경하고 술수를 쓰는 프로메테우스를 벌주기 위하여 그녀를 배우자로 주고자 하였다. 모든 신은 판도라가 교양을 지니도록 기여하고 선물을 주었는데, 특히 아프로디테는 여성미와 상대를 기쁘게 하는 기교를, 카리테스는 매혹적인 능력을, 아폴론은 노래부르는 법을, 헤르메스는 애교의 기량을, 아테나는 최고로 값나가는 찬란한 장신구를 주었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이처럼 모든 신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제우스는 후에 그녀에게 아름다운 상자를 주며 결혼 상대자에 주라고 지시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빚어 만든 인간에게 생활할 능력을 주기 위하여 천공에서 태양의 불을 훔쳐다 준 일이 있어 신들의 노여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헤르메스가 판도라를 이 프로메테우스에게 데려왔다. 그러나 속임수에 민감하고 제우스를 비롯한 모든 신을 믿지 않았던 프로메테우스는 그녀에게 매혹당해 고민하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거절하였다. 반면 그의 동생 에피메테오스는 형과는 달리 영특한 데가 없고 신중하지도 않아 형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와 결혼하였다. 과연 제우스가 준 선물상자를 궁금하게 여긴 판도라가 급기야 선물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서 모든 병과 재앙의 불씨가 튀어나와 온 인간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세상은 끊임없이 치명적인 재앙과 고난에 시달리게 된다. 판도라는 황급히 뚜껑을 닫았지만 안에 든 것은 다 빠져 나가 버리고, 단 하나 희망만이 상자 밑바닥에 남아 인간이 고난에 빠질 때마다 힘이 되어 고통을 줄이고 갈등과 슬픔을 덜어주었다. 일설에는 역설적으로 희망도 악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을 절망상태에서도 요행에 매혹되는 도박심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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