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5부 독일 관념론 철학 이야기
몽테뉴로부터 콩디약에 이르기까지(16~18세기) 프랑스에서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계몽 철학의 경향들이 발전했다. 그 경향들은 몽테뉴, 바일이 대변하는 철학적 계몽주의, 몽테스키외, 볼테르가 대변하는 정치적, 역사적 계몽주의, 라 메트리, 엘베시우스, 콩디약, 돌바흐가 대변하는 자연철학적 계몽주의 등이다. 독일의 계몽 철학을 대표하는 칸트와 아울러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 철학이 등장하기까지는 영국의 경험론, 대륙의 합리론 그리고 프랑스 계몽 철학의 성과들이 거름으로 깊게 쌓여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 계몽 철학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적 계몽주의 : 전통적인 교리나 학설을 배격하고 오성(분별하고 계산하는 능력)의 본유적이며 불변하는 성격을 알려고 한다. 또한 철학적 계몽주의는 비판적 학문 태도를 견지한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오성의 잘못된 사용을 버리고 오류를 범하지 않고자 했다. 바일은 쓸모 없는 의심과 독단을 버리고 오로지 이성에 주어진 윤리 법칙만을 명백한 것으로 인정했다. 정치적, 역사적 계몽주의 : 이성의 법칙에 따라 정치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인간을 계몽하고 아울러 이성과 비이성의 갈등이 역사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제시하고자 했다. 몽테스키외는 참다운 현실의 정치 상태를 지배 권력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이 처한 모든 상황과 조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적합한 국가 형태를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이 분리된 국가라고 보았다. 몽테스키외는 오늘날의 국가 형태의 창시자이다. 그는 세 가지 권력 가운데서 이성의 표현인 사법권을 가장 중요한 국가의 권력으로 보았다. 볼테르는 역사 철학적 입장에서 역사를 문화사로 정의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원인은 초월적인 형이상학의 원리가 아니고 인간의 정신과 관습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월적 독단을 거부해 염세적 기질을 보이면서도 문화의 진보를 희망한 계몽주의자이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가치 아래 관념론과 유물론을 배격하고 두 가지의 조화를 꾀한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성선설의 입장에서 이론과 실천 그리고 교육과 정치에 있어서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감으로써 사회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자연철학적 계몽주의 : 이 경향은 어느 다른 경향의 계몽주의보다 더 철저하게 초월적인 형이상학과 종교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다. 라 메트리는 <기계 인간>과 <식물 인간>이라는 두 저서에서 인간의 정신 기능을 기계적인 자동 형상으로 설명한다. 엘베시우스, 콩디약, 돌바흐 등은 유물론 및 기계론의 사상을 대변하며 감각주의의 입장에서 세계의 모든 것들이 물질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본다. 이 경향은 프랑스 계몽 철학에서 유물론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영국의 경험론, 대륙의 합리론 그리고 프랑스의 계몽 철학은 칸트철학과 독일 관념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경험론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적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볼 것을 가르쳤으며, 대륙의 합리론은 정확한 이성 추리와 연역에 의해서 명석판명한 관념을 획득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계몽 철학은 오성 내지 이성의 본유적인 성격에 충실할 것을 가르쳤다. 칸트는 앞선 시대의 여러 철학 경향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통일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하고 거대한 비판철학의 체계를 완성했다.
서양철학사를 대략적으로 훑어보면 몇 개의 거대한 호수를 만날 수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등이 그들이다. 이들로부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뻗어 나오고 이 물줄기들은 다시 커다란 호수로 몰려든다. 칸트는 웅대한 형이상학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영국 경험론, 대륙의 합리론 그리고 프랑스의 계몽 철학을 비판적 입장에서 수용해 인식론, 윤리학, 미학의 영역에서 치밀한 비판체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는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을 저술함으로써 철학함의 독자성을 확보했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칸트철학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보충하면서 피히테와 셸링을 거쳐 헤겔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현상이라고 부르고 현상의 배후에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알 수 없고 단지 생각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해서 그것을 물 자체(Ding an sich)라고 했다. 피히테는 이론적으로 알 수 있는 현상보다 실천적으로 행할 수 있는 물 자체를 기본적인 것으로 보아 칸트의 체계를 비판하고 수정함으로써 독일 관념론 철학의 문을 열어 놓았다. 셸링은 피히테를 비판해 동일 철학을 그리고 헤겔은 다시 피히테와 셸링을 비판함으로써 절대적 관념론의 체계를 확립했다.
칸트의 비판철학 칸트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구축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미래의 형이상학을 정립하고자 한다.
칸트(1724~1804)는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비교될 만큼 두드러진 철학자이다. 그는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 그리고 프랑스의 계몽 철학을 종합, 통일해 독자적인 철학을 구성한 커다란 철학의 호수이자 거봉이다. 그의 철학은 다른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인 칸트는 기독교 경건주의 신자인 부모 밑에서 엄한 종교적 분위기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마구제작 기술자였다. 프레데리카눔 고등학교 시절 칸트는 로마 고전에 관심을 보였으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시절에는 물리학, 수학, 철학, 신학 등을 공부했다. 칸트는 대학 졸업 후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에서 오랜 기간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자신의 철학 연구에 몰두했다. 1755년에 보수 없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강사가 되어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인류학, 자연신학 등 다방면에 걸쳐서 강의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강사를 하면서 왕립 도서관의 보조 사서로 일하기도 했다. 1770년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어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담당하다가 1797년 은퇴했다. 그는 수많은 철학 저술을 남겼다.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등 세 비판서는 칸트철학의 체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저서들이다.
칸트 철학의 특징 칸트는 <논리학>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네 가지 물음을 던지는데 앞의 세 물음들을 종합한 물음이 네 번째 물음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칸트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구축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미래의 형이상학을 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쓴 후 그것에 대한 해설판을 저술하면서 제목을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설>이라고 일컬었다. 칸트는 생활에 있어서나 학문에 있어서나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말을 빌려 타고 가다가 말이 길을 잘못 들어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 하룻밤 지낸 것 이외에는 거의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일이 없었다. 매일 10시에 취침하고 아침 7시에 기상해 8시에 동네를 산책했다. 하루는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8시가 지난 후 산책을 나가자 동네 사람들이 시계가 잘못된 줄 알고 시계를 돌려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생활의 철저함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철저함을 수행하고자 한 칸트는 프랑스 계몽 철학(특히 루소)의 자유 정신을 가지고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종합해 인식, 가치 및 예술의 철저한 바탕과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결국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밝히려고 했다. 칸트는 합리론자들에게 동의하며 수학이나 물리학의 기초에 관한 보편적, 필연적 지식이 있지만, 우주론과 신학 및 심리학을 포함하는 사변적 내지 합리적 형이상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경험론자들에 동의해 우리는 경험하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감각은 인식의 재료를 제공해 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경험적 재료와 이성적 법칙에 의해서 성립하는 우리의 인식은 제한된 형상에 관한 것이고 사물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다.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제한된 감각과 오성이 알려주는 현상으로서 '한 그루 소나무'를 인식한다. 하지만 소나무 자체는 물 자체로 남아 있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제한된 견해에 따라서 사물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칸트는 경험 사실이 아닌 물 자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경험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도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고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예컨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 자유, 영혼 불멸 등은 인식할 수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칸트는 <형이상학 서설>에서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 일반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등 네 가지 물음을 던진다. 이 네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은 <순수 이성 비판>에서 해명된다. 칸트는 인간의 영혼의 능력을 사유, 의욕, 느낌 등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각 능력에 따라서 인식의 철학, 욕구의 철학 및 느낌의 철학이 가능하다. 이들 각각에 해당하는 저서가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식의 한계 때문에 이론(이성)은 결국 실천(이성)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 이성은 자연법칙을 그리고 실천 이성은 자유의 이념을 취급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자연법칙의 영역에도, 그렇다고 자유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쾌와 불쾌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미적 내지 반성적 판단력의 대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의 철학은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및 <판단력 비판>의 체계를 가진다.
순수 이성 비판 가. 인식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도대체 인식이란 무엇이며, 인식은 어떻게 성립하고, 인식의 타당성은 어떤 것이고, 인식의 한계는 어떤 것인가 등의 물음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인식은 곧 판단이다. 그렇다면 판단이 무엇인지가 밝혀질 경우 인식의 성격은 자연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의 결합에 의해서 성립한다. 칸트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따라서 판단을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 두 가지로 구분한다.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고 하는 판단에 있어서 '연장' 곧, 길이, 넓이, 부피 등의 개념에는 이미 물체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연장적이다'라는 술어는 '물체'라는 주어에 아무런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지 않고 단지 '물체'라는 주어를 설명하기만 한다. 칸트는 이러한 형태의 판단을 분석 판단이라고 말한다. 분석 판단은 설명 판단으로서 술어가 주어에 전혀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지 않고 단지 주어를 설명하기만 하는 판단이다.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는 판단에 있어서 '무게'의 개념은 물체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무게를 가진다"는 술어는 '물체'라는 주어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한다. 종합 판단은 주어 개념에 새로운 술어 개념을 첨가시키는 그러한 종류의 판단이다. 칸트는 대부분의 종합 판단은 후천적(경험적)인 것이지만 경험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선천적 종합 판단이 분명히 있으며 이것에 의해서 비로소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다"에서 '직선'은 성질을 나타내는 선천적 개념이며 '짧은'은 양의 선천적 개념으로서 '직선'은 '가장 짧은 거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위의 판단은 선천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칸트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가진다"와 같은 판단 역시 선천적 종합 판단에 속한다고 말한다.
칸트의 말대로라면 판단은 1. 후천적 분석 판단. 2. 후천적 종합 판단. 3. 선천적 분석 판단. 4. 선천적 종합 판단의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분석 판단을 동의어 반복이라고 할 경우 후천적 분석 판단은 불가능하다. '후천적'이라는 말은 '감각 경험에 의한'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천적 분석 판단, 후천적 종합 판단, 선천적 종합 판단 세 가지가 남는데 선천적 분석 판단은 자명한 것이고 후천적 종합 판단은 대부분의 경험 판단이므로 칸트의 탐구 대상에서 제외되고 남는 것은 오직 선천적 종합 판단이다. 즉 감각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주어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시켜주는 판단이야말로 칸트에 의하면 보편적, 필연적 인식일 것이다. 후천적 판단은 경험을 근거로 삼는 데 반해, 선천적 종합 판단은 가능한 대상의 형식과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엄밀한 보편 타당성과 필연성을 소유한다. 선천적 종합 판단은 인식 능력의 본성에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천적 종합 판단을 철저히 탐구할 경우 인식 능력의 본성도 자연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칸트는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되지만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기지는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인식 능력의 본성을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선천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칸트가 '선천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감각의 불변하는 형식, 곧 공간과 시간의 직관 형식 그리고 오성(계산하고 분별하는 능력)의 형식, 곧 범주의 성격을 일컫는다. 칸트는 수동적인 직관 형식과 자발적(능동적)인 오성 형식에 의해서 개념의 인식이 성립한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은 선천적 종합 판단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것 같지만 차근차근 추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 선험적 감성론 <순수 이성 비판>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제1부는 '선험적 감성론'이다. 여기서 칸트는 감성(감각 성질)의 선천적 내용, 곧 선천적인 공간 직관과 시간 직관의 능력을 취급한다. 제2부는 '선험적 논리학'으로, 제1절 '선험적 분석론'에서 칸트는 오성의 선천적 내용, 곧 범주들의 능력을 다룬다. 제2절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합리적 심리학, 합리적 우주론, 합리적 신학의 근거가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선험적 감성론'의 물음은 순수 수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모아진다.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경험적 직관에 의존한다. 우리는 키가 몇 미터이며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안다. 이 경우 우리가 완전히 감각에만 의존한다면 '소나무'를 확실히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감각의 성질에는 불변하는 선천적 요소 내지 형식들이 있는데 그것은 크기와 움직임의 틀 또는 그물과도 같은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은 수동적인 그물로서 대상을 받아들임으로써 '5미터 크기의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한 그루의 소나무'에 대한 상을 만들어 낸다. 과거로부터 공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은 외부 세계에 실재한다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칸트처럼 공간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감성의 직관 형식이라는 주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간은 우연이며 사물의 성질이지만, 데카르트에 의하면 공간은 물질이며 실재적인 어떤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사물의 질서에 불과하다. 그러나 칸트는 이들 견해에 반대하여, 공간을 감성의 직관 형식, 곧 인간 내면에 있는 틀 내지 그물로 파악한다. 말하자면 공간은 의식의 한 요소이다. 무엇을 감각으로 알 때, 곧 대상을 지각할 때 공간은 그 지각이 성립하는 조건이 된다. 칸트는 공간과 시간을 순수 직관이라고 말한다. 우선 공간과 시간은 외부로부터 성립하는 표상(겉으로 나타난 사물의 형태)이 아니다. '한 그루 소나무'의 표상이 성립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이미 공간과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과 시간은 개념도 아니다. 개념은 논증적 사유에 의해서 성립하는 데 비해 공간과 시간은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순수한 직관 형식이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영혼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있는 주관적 직관 형식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은 외적 감각의 형식이고 시간은 내적 감각의 형식이다. 공간과 시간 두 가지 모두 우리들 마음의 주관적 형식(틀이나 그물)이긴 하지만, 공간은 외적 지각(감각으로 아는 것)의 질서를 만들어 준다. 즉 '한 그루의 소나무'의 크기를 틀로 잡는다. 그런가 하면 시간은 앎의 내면적 과정의 진행, 곧 운동을 틀로 잡는다. 즉 '한 그루 소나무'의 흔들림을 내면적 과정에 의해서 틀로 잡는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 속하므로 결국 공간 형식은 시간 형식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의 기능과 근원은 관념적(주관적)이고 동시에 경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가장 근원적인 틀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선험적 관념성'을 가진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 공간과 시간은 처음부터 경험과 얽혀 있기 때문에 '경험적 실재성'을 소유한다. 이와 같은 점을 보면 칸트가 경험론과 합리론을 치밀하게 탐구하고 두 가지를 종합, 통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선험적 논리학 1. 선험적 분석론 <순수 이성 비판>의 제1부는 '선험적 감성론'으로,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수학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선천적인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 형식임을 밝히고 있다. 제2부 '선험적 논리학'으로서 제1절 '선험적 분석론'에서는 오성의 선천적 내용을 다루고, 제2절 '선험적 변증론'에서는 합리적 심리학, 우주론, 신학의 근거가 타당치 못함을 밝히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우리들의 수동적이며 주관적인 틀로서 대상을 받아들여서 상을 만들며, 이 상은 표상이라고 일컬어진다. 예컨대 우리가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보는 순간 그것에 대한 인식이 즉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의 꼴만 생긴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의 틀이 소나무의 형태만 그림으로 붙잡기 때문이다. 오성이 자발적으로 표상을 재구성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그루의 늙은 소나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소나무에 대한 인식이 완성된다. 소나무의 직접적 표상은 희미하며 잡다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통일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칸트는 그것을 일컬어 '순수 자아' 또는 '자기 의식의 형식적 통일' 또는 '선험적 통각'이라고 부른다. 선험적 통각이란 근원적으로 모든 지각이나 표상들을 통일하는 인식 능력을 뜻한다. 선험적 통각은 형태나 색깔 등을 종합함으로써 대상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자연 현상을 인식 주관의 산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칸트에게 있어서 앎(인식)은 크게 두 가지 과정에 의해서 성립한다. 우선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 형식에 의해서 대상은 지각되어 표상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다양한 표상은 오성 범주의 선험적 통각에 의해서 '한 그루의 늙은 소나무'라는 명확한 개념으로 형성된다. 칸트는 우리의 자발적인 사유 형식을 오성 개념 또는 범주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있는 것으로서 '소나무'라는 표상(그림)을 '한 그루의 참다운 소나무'라고 명확하게 개념으로 만든 역할을 한다. 우리들의 오성은 양, 질, 관계, 양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열두 가지 범주를 가지고 있다. 양의 범주(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질의 범주(실재, 부정, 제한), 관계의 범주(실체성, 인과성, 상호작용), 양태의 범주(가능성, 현존, 필연성), 공간과 시간은 감성 형식으로서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상을 만든다. 오성의 범주들은 능동적으로 잡다한 표상들을 종합해 개념을 만든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 그루의 늙은 소나무'라는 개념을 형성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을 얻지만, 소나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직관 형식과 오성 형식(범주)에 의해서 인식된 것이므로 우리는 소나무의 '현상'에 관해서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간, 시간 및 범주들을 벗어나서 초월적으로 그 자체로 있는 '소나무 자체' 내지 물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초월적 사물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학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공간과 시간의 감성 형식과 오성 범주를 이용해서 초월적 대상을 붙잡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용을 밝히는 것이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이다.
2. 선험적 변증론 칸트는 '선험적 감성론'에서 공간과 시간의 직관 형식은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대상의 꼴(표상)을 만들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순수 수학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선험적 분석론'에서는 오성 형식인 범주가 표상을 능동적으로 구성함으로써 개념을 만들기 때문에 범주(선천적인 오성의 형식)에 의해서 순수 자연과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밝힌다. 감성 형식(공간과 시간)과 오성 형식(범주)을 매미채라고 한다면 매미채로는 기껏해야 잠자리나 나비 또는 매미 등 곤충만 잡을 수 있다. 매미채로 코끼리나 악어를 잡을 수는 없다. 매미채로 코끼리나 악어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우리가 감성 형식이나 오성 형식 등 인식의 선천적 형식으로 현상이 아니라 그것의 배후에 있는 초월적 대상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우리가 경험 가능한 대상을 인식할 경우 작용하는 것은 감성 형식(공간과 시간)과 오성 형식(열두 가지 범주)이다. 그러나 경험이나 직관 형식과 전혀 상관없는 이성의 능력이 있다. 바로 추리이다. 이 추리에 의해서 소위 순수한 이성 개념이 형성된다. 칸트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하고 그것과 관련해서 순수 이성 개념을 이념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경험과 상관없이 추리에 의해서 얻어진다. 칸트는 이성 추리를 세 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의 추리에 의해서 형성되는 세 가지 이념을 제시한다.
정언적 추리 :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처럼 긍정적으로 단언하는 추리인데 이것은 불변하는 실체 개념을 기초로 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주관의 통일인 영혼에 도달하며 영혼은 심리학적 이념이다. 가언적 추리 : "만일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존재한다"처럼 인과율(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기초로 삼는 추리로서 이것은 조건 계열의 통일인 세계의 전체성이라는 개념에 궁극적으로 도달하는데, 세계는 우주론적 이념이다. 선언적 추리 : 이 추리는 "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꽃이다"라는 형태를 가지며 공통성의 개념을 기초로 삼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조건들의 절대적 통일인 신 개념에 궁극적으로 도달한다. 신은 신학적 이념이다.
영혼과 세계와 신은 선험적 이념이기 때문에, 직관에 의해서도 오성에 의해서도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이나 오성에 의해서 그것들을 인식하려고 했으므로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칸트의 견해이다. 우리들의 인식의 한계는 직관 형식(공간과 시간)과 오성 형식(범주)에 의해서 오로지 대상을 현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그런데 초월적 이념 또는 물 자체를 직관이나 오성에 의해서 파악하려고 할 때 오류 추리가 생기거나 이율배반이 생긴다. 예컨대 "영혼은 실체이므로 영혼은 물질이 아니다"라고 추리한다면 이것은 오류 추리이다. 영혼이 실체인지 아닌지를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실체이다"라고 인식한 것으로 친다면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세계는 시간의 시초를 가지고 공간에 한계 지어져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음에 반해 "세계는 하등의 시초도 없으며 아무런 공간적 한계도 없고 무한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세계'를 인식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면 세계에 관해서 이율배반적 주장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단지 생각할 수만 있는 영혼, 세계, 신과 같은 이념들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직관 형식(공간과 시간)과 오성 형식(열두 가지 범주)은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기 때문에 구성적 원리이다. 그러나 영혼, 세계, 신의 이념들은 우리의 인식과 전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우리가 수학 탐구에 몰두할 경우 수학 계산 자체는 수학과 상관없는 인생관이나 행동에 의해서 방향이 좌우된다. 또 예컨대 한 그루의 소나무라도 불교를 믿는 사람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그리고 세계의 전체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또한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살아간다. 영혼, 세계, 신과 같은 이념들은 결코 인식의 구성적 원리가 아니고 오직 규제적 원리이다. 직관 형식과 오성 형식의 구성적 원리에 의해서 우리들은 '한 마리의 개'를 정확하게 형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는 사람과 영혼은 소멸한다고 믿는 사람이 '한 마리의 개'를 바라보는 방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실천 이성 비판 영혼, 세계, 신과 같은 이념들은 더 이상 인식의 대상, 곧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실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의 제1권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론'에서 의지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지, 어떤 규정 근거가 도덕적으로 타당한지 그리고 의지의 자유는 무엇인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실천 이성 비판>의 제2권 '순수 실천 이성의 변증론'에서 칸트는 최상의 선으로부터 생기는 영혼 불멸과 신이라는 두 가지 이념의 실재를 탐구한다. 인간은 누구나 의지를 가지고 실천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의지가 어떤 것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원칙에 의해서 규제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준칙과 법칙의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그것들을 구분한다. 예컨대 나 또는 너라는 개별적 자아가 돈 훔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할 때 그것은 준칙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키는 실천 원칙, 예컨대 "인간의 본성은 어질다"와 같은 것은 법칙으로 일컬어진다. 각 개인의 준칙은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실천적 내지 객관적 원칙으로서의 법칙이 과연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가 칸트의 핵심 과제이다. 준칙은 주관적 원리를 기초로 삼기 때문에 칸트에 의하면 준칙은 의지의 타율을 형성한다. 각 개인은 나름대로의 소질을 가지며, 소질에서 나온 준칙은 욕구된 외적 대상을 마련해 줌으로써 각자에게 쾌락함이나 행복과 같은 내면의 상태를 제공한다. 따라서 "만일 외적 대상이 제공된다면 행복하다"와 같은 가언명법이 성립되어 생기는 준칙은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없고 단지 주관적이다. 칸트는 준칙과 전혀 달리 모든 외적 경험 대상에 앞서서 의지를 좌우하는 원칙이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객관적 실천 원칙인 도덕법칙이다. 준칙은 외적 경험 대상이 제공될 경우 쾌락이나 행복을 얻는 제약적 원칙임에 반해 원칙은 경험 대상과 전혀 상관없이 의지를 좌우하고 명령하는 무제약적 정언명법이다. 칸트는 무제약적 정언명법으로서의 도덕법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 원리로서 항상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칸트에 의하면 이 도덕법칙은 모든 사람들에게 작용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며 보편적이다. 만일 이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양심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천적 확실성으로서의 자유에 따라서 "그대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는 당연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명제를 인정하게 된다. 또한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도덕법칙에 따른 행동이 생길 수 없다.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은 곧 의무 감정이다. 인간은 선천적인 도덕법칙에 의해 덕스러움을 소유할 수 있는 한편, 경험적인 경향에 의해서 행복을 추구한다. 덕스러움과 행복은 서로 모순되지만 '행복의 가치'에서 통일됨으로써 실천적 실재인 영혼 불멸과 신을 암시한다. 칸트는 영혼 불멸을 실천적으로 요청한다. 영혼 불멸은 인식 대상이 아니고 초월적이므로 실천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덕과 행복의 통일은 최고의 덕이지만 순간적인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무한한 과정을 통해서 영혼이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 불멸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영혼의 행복은 최고의 선을 전제로 삼고 또한 그것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서 최고선은 자신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서의 시초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시초는 물리적이며 윤리적인 궁극 원인으로서의 신이다. 우리는 세계의 전체성, 영혼 불멸, 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믿는다. 이들 이성은 인식의 구성적 원리이다. 하지만 실천 이성은 인식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좌우하는 규제적 원리이므로 그 범위는 이론이성의 범위보다 더 넓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실천 이성이 이론 이성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윤리나 도덕이 앎이나 지식보다 우위를 점한다는 것을 뜻한다.
판단력 비판 가. 미적 판단력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자연법칙을, <실천 이성 비판>은 자유를 취급한다. 이론 이성(순수 이성)이 취급하는 현상은 자연의 인과법칙에 의해서 성립하는 자연임에 비해 실천 이성은 자연법칙과 상관없는 의지의 자유를 탐구한다. 이제 칸트는 자연과 자유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탐구하는데 그것은 칸트에 의하면 반성적 판단력이다. 자유는 최고선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지만 최고선을 자연에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 자연은 자유 법칙에 따라서 목적에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사고가 자유로 또는 자유에 대한 사고가 자연으로 이행하게 할 수 있는 통일적 근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한 통일적 근거를 칸트는 판단력에서 찾는다. 오성은 개별 개념을 만들며, 이성은 보편 개념을 만든다. 개별 개념을 보편 개념에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오성이나 이성 이외의 또 다른 능력, 곧 판단력이 필요하다. 칸트는 자연이 목적에 어울리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의 합목적성은 바로 반성적 판단력을 이끌어 내는 원리라고 말한다.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을 미적 판단력과 목적론적 판단력으로 구분한다. 반성적 판단력은 우리가 대상 인식에서 느끼는 쾌락에 대해 쾌와 불쾌를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규정한다. 우선 우리는 일정한 대상을 개념으로 만들기에 앞서서 그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는데 그것은 미적 판단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 경우 우리가 쾌락을 느끼고 만족하는 대상은 미적이다. 미적 대상은 아름다운 것과 숭고한 것을 실현시킨다. 또한 대상의 꼴(표상)을 특정한 개념에 연결시킬 경우 우리는 쾌락을 느끼는데, 이때 쾌락의 대상은 합목적적인 것을 가진다. 이것은 목적론적 판단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아름답다는 개념은 어떻게 생기는가. 기호(맛)의 판단은 아름다운 것을 판단하는 근거이다. 칸트에 의하면 기호의 판단은 구상력의 유희와 오성의 유희를 바탕으로 가진다. 칸트는 질과 양 그리고 관계에 따라서 기호의 판단이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밝힌다.
1. 우선 질에 따라서 관심과 관련 없는 만족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유쾌함이나 선과 구분된다. 유쾌함이나 선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욕구나 관심이 없이도 만족 내지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양에 따라서 특정한 개념을 가지지 않고 보편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한다. 아름다움은 관심과 관련 없는 만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는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면, 다른 어떤 대상이 관심과 관련 없는 만족을 줄 경우 그것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을 당연히 기대한다. 3. 아름다운 것은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관계에 따라서 형식상 합목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예컨대 복잡한 추상화를 볼 때 어떤 목적과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그것이 형식적으로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목적에 합치한다고 생각한다. 4. 개념을 가지지 않고 쾌를 가져다주는 것은 양태에 따라서 아름다운데 그것은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통해서 규정된다.
미적 판단력은 먼저 아름다운 것을 구현하고 다음으로 숭고한 것을 구현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대상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을 가지지 않은 대상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꽃이나 산의 아름다움은 대상 형식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나 석가모니의 숭고함은 대상의 형식과는 관계가 없고 대상의 무제약성에서 생긴다. 아직 무엇이라고 규정되지 않은 오성 개념(자연적 대상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름다움이 라면 아직 규정되지 않은 이성 개념, 곧 이념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은 숭고함이다. 왜냐하면 자연 대상들은 제약적이고 형식적이므로 오성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데 비해서 이념들은 무제약적이고 형식을 가지지 않은 이성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숭고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칸트는 숭고함을 수학적 숭고함과 역학적 숭고함으로 구분한다. 아름다움은 질에 의해서 좌우되는 데 반해, 숭고함은 양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양이 길이나 넓이 등(연장)에서 크면 그것은 수학적 숭고함을 자아내고 양이 힘에 있어서 크면 그것은 역학적 숭고함을 생기게 한다. 예컨대 크고 정교한 교회의 건축물은 수학적 숭고함을 보여주지만 예수상이나 불상은 힘을 내뿜기 때문에 역학적 숭고함을 나타낸다. 칸트는 아름다운 대상의 산출에 관계되는 현실에 관해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주장을 전개한다. 우리가 목적에 알맞게 무엇을 형성하는 행위는 단순한 기계적 작용과 구분될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다. 칸트는 이 점에서 예술과 자연을 구분하는데, 예술은 작품을 구상하고 성숙시킴으로써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반면, 자연은 단순히 물리적 작용만 동반한다. 자연은 어디까지나 자연으로 끝나지만 예술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승화시킨 작품을 성숙시킨다. 우리의 상상력(구상력), 오성 그리고 정신과 기호(맛 또는 취향)는 아름다운 예술에 관계되는데 이러한 관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천재이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천재는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재능"이며 또한 천재는 자신의 본성을 통해서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본유적 심정의 소질이다. 나아가서 칸트는 예술을 논하는 비평가와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가를 구분하면서 아름다운 대상을 평가하는 데는 기호(맛)가 작용하고 아름다운 대상(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데는 천재성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나. 목적론적 판단력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대상 인식에 있어서 두 가지 종류로 쾌락을 느낀다. 우선 우리는 특정 대상의 개념을 만들기에 앞서서 그 대상의 지각에 의해서 쾌락을 느낀다. 이러한 대상은 미적이며 우리는 미적 판단력에 의해 쾌락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대상의 표상을 특정 개념에 연결시킬 때 쾌락을 느끼는데 이때의 대상은 합목적적이고 우리는 목적론적 판단력에 의해서 이 대상을 판단한다. 자연 사물들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때 합목적적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자연 사물들은 상호 관계에서 주관과 상관없이 자연 합목적성을 드러낸다. 칸트는 자연 사물들에서 외적 합목적성과 내적 합목적성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외적 합목적성은 외부적이면서 동시에 우연적이다. 예컨대 산이 있어야 한다면 흙이나 나무 또는 돌도 있어야 하는 데, 흙, 나무, 돌 등은 우연적이며 외부적이다. 내면적 합목적성은 우주 전체에서 파악되는 것으로서 특히 유기적 자연물에 내재한다. 예컨대 소는 똑같은 계획을 가진 다른 소를 산출한다. 소의 각 부분과 전체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소의 각 부분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는 궁극 원인 내지 궁극 목적을 전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어떤 것의 목적이다. 또 우리는 정확히 알려는 목적 때문에 책을 읽으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정확히 알려고 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고 하며 ... 이렇게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유기체를 비롯해서 우주 전체는 궁극 목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칸트의 철학을 일컬어 구성 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칸트가 자신의 철학의 특징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있다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종래의 지구중심설을 뒤집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칸트는 인식에 있어서 종래의 대상 중심설을 물리치고 우리의 마음의 자연에 법칙을 부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대상을 구성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자연과 자유 및 아름다움과 목적에 관한 탐구에 있어서도 일관된다. 칸트의 이러한 철학함의 자세는 그의 비판철학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며 그의 비판철학은 피히테, 셸링, 헤겔의 독일 관념론 철학이 나올 수 있는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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