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옮긴이의 말
나는 내가 하지는 못하면서도 남을 나무라기는 잘한다. 칼릴 지브란의(예언자)를 읽고는 왜 이날껏 이 (예언자)를 번역한 사람도 하나 없었느냐 하고, (바가바드 기타)를 얻어 듣고는 이런 보배를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알려주지 않았을까 했다. 내가 나무라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재지가 없으니 나은 선배들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이 간디의 자서전도 그렇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외국 인물로서 일반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것은 간디 아닐까? 그런데 3.1운동 이후 그렇게 좋아하는 간디인데 어째서 그의 전기는 광복이 될 때까지 하나도 번역된 것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라가 씨알에게 있는 줄 알고, 씨알을 깨워주고 길러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요,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라면, 글을 배운 책임을 하기 위해서라도 씨알들에게 간디를 스승으로, 친구로 소개해 주었어야 할 것인데 아니했다. 생각해보자. 광복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방방곡곡을 파고들어 쑤셨듯이, 간디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그만큼 씨알에게 알려 주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겠나? 붉은 군대가 북한 사람을 속이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조만식 선생을 내세우며 조선의 간디 라고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무슨 뜻인가? 자기네와는 180도 반대방향의 간디인데 왜 그 이름으로 조선생을 내세웠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조선놈을 잡으려면 조선놈의 심정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도리어 그렇게 못했는데 우리 대적은 간디주의를 내세우면 조선놈은 다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간디의 길은 그만큼 우리에게 들어맞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까울손, 그것을 우리가 못했다는 말이다. 안타깝고 부끄러워하는 소리지, 남을 나무랄 것 있겠는가, 나를 채찍질 해야지.
겨우 1958년에 와서야 간디연구회 란 것을 몇이서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5월 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이상기후를 탓해도 소용없고, 생명은 제 책임을 제가 만들어 지는 거다. 내가 했어야 할 것인데 약했다. 지금 와서야 솔직히 하는 고백이지만 모든 책임은 내게 있었다. 이번에 삼성출판사에서 간디자서전 과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 을 한권으로 만들어 낼 것을 계획하면서 그 번역을 부탁해 왔기 때문에 첫마디에 응했다. 이제는 간디가 유명은 커녕 잊혀지려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사양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상앞에 앉아 번역에 몰두할 수 없었다. 그때, 다른 것은 별로 없으나 걱정되는 것이 둘 있었다. 하나는 병석에 누워 7년동안 몸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언제나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늙은 아내요, 그 다음은 약속해 놓은 간디의 자서전 이었다. 다행이 일이 잘 풀려 일을 할 수는 있었으나 너무 늦어서 삼성출판사에 미안하기 짝이 없다. 본래 6월말까지로 약속한 것인데, 9월 15일로, 또 10월15일로 연기를 하다가 이제 11월 15일이 됐으니 사과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지연은 됐지만 그대신 얻은 것이 많다. 병석에 있던 아내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의 뿌리를 들추어 내고, 그것을 청소하고 책상에 앉아 간디를 대하면 폭풍 속을 가르고 나가는 사공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하여서 나는 지난 70여 년보다 이 한 해에 배운 것이 더 많다.
이번에는 정말 한 자 한 자, 내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서 하노라고 했고, 첫번 번역에서 잘못이 있던 것도 더러 발견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전보다는 간디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이다.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될수록 주를 많이 달려 했으나 그래도 출처를 알 수 없어 못한 것이 많고, 혹시 잘못된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유명사의 발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저히 인도인들이 하는 대로는 할 수가 없었고, 부득이 보통 하는 로마자 발음대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빈다. 여러 군데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냥은 써 내려갈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찾곤 했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인격적 매력이라 할까, 영어로 한다면, 참말 스위트한 점이 있다. 선배에 대한 존경을 어쩌면 그렇게 하는지, 자기의 위대함은 전혀 잊고 그저 어린애처럼 선배를 위한다. 자기의 위대함을 잊으니 정말 위대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부질없는 내 탄식이나 적자. 내가 10년 전에 이 태도로 간디를 읽었다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요, 우리나라 역사도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지나간 것이 문제랴, 앞이 문제지.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야 하지.
소로의 이름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우치무라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였다. 역시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인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이가 소개해 주는 것이므로 보통 사람의 생각이 아닌 줄은 알고, 어느 때 가서는 읽게 될 것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그때 당장 소로를 읽지는 못했다. 정말로 소로에 흥미를 가진 것은 도리어 간디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간디 연구회를 시작했을 때 제1착으로 한 것이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일반에게 보급시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모든 것이 불편했고 돈도 없었으므로 프린트로 해서 내기로 했고, 그 사무를 염낙준 씨가 담당하기로 했는데, 그 번역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지금 경북대학에 지질학 교수로 있는, 그때는 아직 연구생이었던 장기홍 군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삼성출판사에서 간디자서전 과 시민의 불복종 을 한 권으로 해서 출판할 계획이라 하므로 참 잘한 생각이라 하고 그 번역을 다시 한번 새로이 하려고 내가 그것을 맡았다. 소로의 글은 그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매우 까다로워서 번역이 힘든 데가 많다. 그러나 대체로 장 교수의 그전 번역이 좋기 때문에 다소 수정을 가했을 뿐 그대로 채용했고, 또 내 일이 바쁘다는 말을 듣고 한국신학대학에 재학중인 서정웅 군이 자진해서 도와 주겠다고 하며 전문을 번역하여 그 원고를 넘겨 주었으므로 해석에 도움이 필요할 때 많이 참고하였고 어려운 구절은 만나서 의논을 했다. 맨처음 출판 당시의 역사를 살리기도 할 겸, 내용도 이 글에 대한 해제도 그대로 좋기 때문에, 당초에 이 글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장 교수가 썼던 글을 그대로 여기 붙이기로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내가 소로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써야 할 것이나, 나 자신이 연구한 것은 없으므로 잘 앗는 분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에 김동길 박사에게 그것을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하고 써 주셨다. 다만 유감인 것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원고량을 너무 적게 제한해 드려서 그만 충분한 설명을 못해 주신 점이다. 그 점을 아주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 같이 싣는 글로도 그 중요한 요점을 아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함석헌
해제 : 간디의 사상과 비폭력 운동 Mohandas Karamchand Gandhi:Gandhi's Autobiography;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 차기벽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을 서술하고 있는 간디의이 자서전 은 제1차 불복종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920년에 끝맺었다. 비폭력 운동이라는 특이한 투쟁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간디의 나머지 생애는 적어도 인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간디의 구체적인 실천운동을 잘 모르는,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그의 후반생에 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아쉬운 감을 갖게 하지만, 그러나 간디의 기본사상과 실천방법은 그의 전반생에 이미 확정되고 있는 것이다. 탁월한 영도력을 가진 빈틈없는 현실정치가인 동시에 자기 탐구를 민족독립만큼 중요시하던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간디의 기본사상, 실천방법을 먼저 살피고 그러고 나서 간디주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는 것으로 해설을 대신하기로 한다.
1. 문제제기 150만의 지원병과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하여 1차대전 수행에 적극 협력한 인도에 대한 전후 영국의 보답은 무엇있어나? 빵이 아니라 돌이었다. 자치부여의 공약이행이 아니라 민족운동에 대한 새로운 탄압, 즉 롤라트법과 아므리차르 대학살이었다. 어긋난 기대 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북받쳐 오르고, 쓰디쓴 굴욕감이 납덩어리처럼 인도 민중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능의 괴물한테 사로잡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수족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감동이었다. 고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에서 당시를 기막힌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사실 오랜 세월이 걸친 가차없는 착취로 인하여 민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고, 민중의 활력은 갈수록 메말라들고 있었다. 몇세대에 걸쳐 피와 고생과 눈물과 땀을 몽땅 바쳐 버렸기 때문에, 인도의 몸과 마음은 병들 대로 병들었고 민중의 연대생활은 해독을 입지 않은 면이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를 가난과 기아 속에서 비굴감과 공포심의 포로가 되었고, 중산계급이나 인텔리는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빈곤과 패배주의! 일거에 결판을 내려는 모험주의로는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너무나 깊은 구렁텅이요, 기만적인 엉터리 요법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뿌리 깊은 질환이었다.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마치 일진의 서늘한 바람에 비길 만하여, 우리는 가슴을 펴고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어둠에 비쳐 드는 한줄기 빛과도 같아 우리의 눈에 낀 안개를 닦아 냈다. 그는 또한 선풍처럼 많은 것을 뒤집어 엎었지만, 특히 민중의 마음가짐을 일변시켰다. 라고 네루는 당시의 감격을 말하고 있다. 흥분과 희망의 급작스런 물결이 인도 민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이때부터 인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높고 원대한 이상과 현실적인 실천과를 하나로 결부시킨 간디의 영도하에 인텔리는 물론이요, 농민도 동원되어 이제는 일반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의 민족운동이 성난 물결처럼 인도의 지평을 휩쓸게 되었다. 침체와 무기력,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헤매던 인도 민중을 이토록 각성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발동을 건 간디, 그는 과연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사상은 어떻게 실천에 옮겨졌을까?
2. 기본사상 한마디로 그것은 아힘사(Ahimsa :사랑 내지 비폭력)의 교의에 입각한 사탸그라하(Satyagraha : 진리파지) 운동을 통해서였다. 간디가 그의 아힘사 라는 교의를 인도에 가져온 이래로 그것은 줄곧 전인도를 지배해 왔다고 논한 후, 네루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에 커다란 역할을 다하고, 또한 널리 세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교의 그 자체는 물론 인간의 사상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중적인 규모로 정치 및 사회운동에 적용한 이는 아마도 간디가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당초에는 그것은 개인에 관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간디는 이 개인적인 이상을 사회적인 이상으로 높이려고 애썼다. 그것으로 정치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변경하려고 하였다. 라고. 간디는 철두철미 실천의 인간이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인도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그는 한시라도 실천활동을 그만둔 일이 없었다. 그와 같은 실천활동은 간디가 사탸(Satya : 진리) 또는 아힘사의 법이라고 부르던 도덕률에 일관해서 의지하였고, 그런 도덕률은 그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간디에 있어서는 종교와 도덕은 서로 방편을 달리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그의 실천활동을 밑받침해 주고 있었다. 간디는 이렇듯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인생철학은 주로 자기가 개인적인 정치적 경혐을 통해서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인도의 종교심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인도의 종교심을 재평가하는 데 있어서의 주요 특징은 그가 아힘사를 사탸의 실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아힘사에 대해서 사탸 에 대해서와 거의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데 있다. 사탸와 아힘사 는 간디의 전사상 구조의 근본원리이니만큼 그 의미부터 명백히 해둘 필요가 있다. 간디에 의하면, 온 우주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이 가득 차 있는데, 이 힘이야말로 변전무상한 이 세계에 있어서 영구불변하는 유일한 실재라고 한다. 그리고 이 힘의 작용을 관찰한 결과 그 힘은 선을 위하는 힘이지, 악을 위하는 힘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디가 사탸 또는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힘을 말하는데, 그는 이 힘을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법, 즉 생명의 법, 자연의 법, 도덕률이라고 생각한다. 간디는 이와 같이 구극적 실재를 하나의 신비롭고 선한 힘이라 생각하고, 우주 속에서 질서와 조화 및 도덕률의 지배를 보며 이 도덕률이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의 지도원리라고 간주한다. 즉 간디에 있어서는 그런 도덕률은 인류를 지배하며 인간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는 항구불변의 인생법칙이다. 그는 그러한 도덕률을 진리의 법 이라 부르고, 때로는 진리 또는 사탸라고만 하기도 한다. 이 사탸 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지는 우리말은 참 이다. 참은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사실과 일치하는 말을 뜻하는 진실의 의미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체 에 일치하는 지식을 뜻하는 진리 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탸는 경우에 따라 진실이라고도, 진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실은 사탸라는 말은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진실과 진리 이외에도 선량, 정의, 구극적 실재와 신, 이런 모든 속성들의 참된 실체도 아울러 의미한다. 그리고 간디 철학에서 이 사탸에 다음가는 가장 주요한 요소인 아힘사도 사탸 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존립 그 자체가 의거해 있는 보편적인 제1원인이다. 증오와 전쟁으로 인한 파괴 속에서도 인류생활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그런 파괴의 법보다 더 고차적인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는데, 그 법이 다름아닌 아힘사의 법 이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애정, 동정, 자비, 관용, 봉사, 자기희생 등의 적극적인 의미와 아울러 비폭력. 불상해와 같은 소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간디는 그 적극적인 측면을 사랑의 법 내지 사랑 이라 부르고, 소극적인 측면을 비폭력의 법 내지 비폭력 이라 불렀다. 아힘사의 적극적인 면은,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사랑을 적까지 포함하여 온 인류에게 확대시키는 일이요, 소극적인 면은 사리를 더욱 추구하거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고의로 어떤 생물을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삼가는 일이다. 그런데 간디철학에 있어서 이 아힘사와 사탸의 관계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라는 칸트의 유명한 말에 따라 표현하면 진리(사탸)없는 사랑(아힘사)은 맹목이요, 사랑 없는 진리는 공허하다. 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양자는 꼬인 새끼와도 같아서 나누기는 어렵지만, 아힘사는 수단이고 사탸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간디는 아힘사를 통하지않고는 사탸는 발견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육신을 가지는 인간은 자연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기 쉬우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을 점차로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어떤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을 간디는 아힘사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아힘사에 관해서 간디는 소년시절부터 뼈저린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즉 15세때, 형한테 빌린 돈을 갚으려고 그 형의 팔찌에서 금을 조금 떼어 팔았지만 양심의 가책을 이길 길이 없어 마침내 그 고백을 써서 부친에게 바쳤다. 그 속에는 고백과 함께 그것에 대한 적절한 벌을 달라고 쓰여 있었다. 부친은 당시 누관으로 앓고 있었다. 부친은 그 글을 다 읽고 나자 진주와 같은 눈물이 뺨을 흘러 그 종이를 적시었다. 부친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그 종이를 찢었다.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이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부친의 사랑의 눈물은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내 죄를 씻어 주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아힘사에 대한 사실상의 교훈이었다. 당시 나는 이것을 부친의 사랑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순수한 아힘사 였음을 알고 있다. 그런 아힘사의 정신이 모든 것을 포옹하게 되면, 그것은 접하는 일체의 것을 변화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 고 쓰여있다. 간디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그러한 아힘사를 실천에 옮긴 예는 허다한데, 일례를 들면, 그의 수도장에서 부도덕한 짓을 한 젊은이를 벌하는 대신에 자기 스스로가 참회하기 위해 7일간의 단식과 4개월 반의 기간에 걸쳐 1일 1식밖에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간디는 아힘사 를 실천에 옮길 때마다 그 위력을 절감하고 점점 더 아힘사를 믿게 되었다. 그런데 간디에 있어서는 아힘사란 불상해.비폭력과 같은 부정적.소극적인 면보다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으로 대한다는 적극적인 면을 더 의미하고 있었다. 이 점은 비겁과 힘사(폭력)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경우에는 나는 힘사를 택하도록 권한다. ....... 그러나 나는 아힘사는 힘사 보다도 월등히 나으며, 용서는 처벌보다 한층 더 떳떳함을 알고 있다. 라는 간디의 말에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간디는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진리를 행동으로 추구하는 자가 만일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허위와 부정의 세력인 적을 폭력으로 타도한다면, 그는 다만 외관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따름이요, 실은 그 싸움에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적 성장은 억제당하고, 그의 진리추구는 쉬워지기보다는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적이라 생각되는 개인들은 기실 악한 세력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며 진정한 적은 그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많건 적건 깃들어 있는 폭력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과 싸우면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적은 잊고 있다. 만일 그가 악한 세력의 희생자인 외부의 적을 동정과 사랑으로 대하는 한편, 내부의 적인 자기 자신의 사나운 격정과 싸우며 이긴다면, 그의 인격은 평정을 얻고 그의 시각은 투명하게 되어 자기 앞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힘사의 길이다. 구도자는 이 길을 통해서 진리에로 전진할 수 있는 동시에, 그의 인격의 매력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개심케 하여 자기와 보조를 맞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디는 이 아힘사의 놀라운 힘을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아힘사를 단지 개인을 개심시키는 데 뿐 아니라, 그가 그리던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사회적 부정과 싸우고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는 데도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간디가 그리던 이상사회는 어떠한 사회이며, 그 실현에 필요한 사회 변혁과 정치적 독립을 위해 어떻게 그는 아힘사를 실천에 옮겼을까?
3. 실천방법 영국 지배하에 정상적인 발전이 저해되어 온 인도에서는 왜곡된 자본주의가 심한 사회적 폐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1차대전을 계기로 크게 발전한 인도의 공업은 노동력의 흡수보다는 도리어 실업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방대한 이익배당으로 자본이 축적되는 반면에 빈곤과 실업은 증대되고 있었다. 대중의 빈곤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간디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는 빈부간의 엄청난 격차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대중간의 그러한 격차는 주로 대규모의 기계로 구현된 근대 유럽문명에 의거하는 외국의 지배와 착취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치적이며 자급자족적이었던 옛 촌락공동체 시대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라므라자 -순수한 아힘사에 입각하는 국가 없는 사회-라는 이상사회를 그렸지만, 이것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했다. 인도의 해방과 더 나아가서는 그의 비폭력적인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첫째로 그는 비폭력적인 사회를 위한 개인의 마음을 준비하려고 새 교육제도의 기초를 세웠다. 둘째로 그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생각하는 비폭력적인 사회에 약간이라도 닮은 데가 있는 실제적인 사회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근대 공업문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어딘가 옛날의 소박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인도 농촌에서 도덕적 및 경제적 부흥의 건설적 프로그램 에 착수했다. 그리고 셋째로 그는 비폭력적 사회의 건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인 폭력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탸그라하의 방법을 창안했다.
새교육 모든 종교적.도덕적 교사들처럼 간디도 사회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유일한 방법은 개인을 개심시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즉, 그는 개인을 내면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외부환경을 변경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간디는 일찍부터 교육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종교적.도덕적 견지에서 국민교육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인도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도의 정신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간디는 인도가 유럽문명의 멍에를 벗기를 원하면서 참으로 인도적인 교육의 기초를 닦으려고 애썼다. 그는 인도문화의 부흥.종합과 인도 통일의 이상에 입각하는 대학교육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표시했지만, 특히 그는 아동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유럽식 교육이 아동의 지능만을 발달시키고, 전인의 교육에 불가결한 공작을 경시하는 데 반대했다. 간디에 의하면,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의 인격을 도야하며 그를 사회의 건전한 성원이 되도록 훈련하는 일반교육은 다만 지성과 정서에 관한 교육이 아니고 전인간-몸과 마음과 혼-의 교육인데,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같이 가장 잘 발전시키는 교육은 지능의 사용에 국한되는 읽고 쓰기의 매개 수단을 통해서는 행해질 수 없고, 손과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사용케 하는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간디가 아동교육을 공작에 국한하고 읽고 쓰기는 불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책을 통한 교육은 지적 훈련 뿐 아니라 실제 생활, 심지어는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함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만 유용한 공작 뿐 아니라 일반교육의 교수요목에 포함되는 모든 과목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다만 그는 공작을 교과목들의 중심에 두고 다른 모든 과목들은 그것과 서로 관련시킴으로써 학식과 행동,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활동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교육방법을 제창하고 실천했을 따름이다. 공작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런 식의 아동교육의 주목적은 물론 교육적인 면에 있었으나, 간디는 그 경제적 측면도 간과하지는 않았다. 인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장차 직업을 갖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건설적 프로그램 공작 중심의 기초교육이 지니는 정신적 중요성은 그것이 민중의 마음속에 노동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고, 그들에게 유용한 일손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며 그것에 대한 능력을 가지게 하는 데 있다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몇몇 기본적인 농촌 수공업의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그들은 농촌을 부흥시키고 농촌을 도시의 착취에서 보호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어, 농촌의 사회적.정신적 자유를 쟁취하고 라므라자 의 이상적 구조의 초석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혁명이라는, 시일이 오래 걸릴 어려운 운동을 시작함에 있어서, 간디는 기초교육을 통하여 훈련된 새 세대가 사회에 등장할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사회적 이상에 대해 전폭적으로 찬동하던 그의 추종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가 온건하게 건설적 프로그램 이라고 부르던 인도 농촌의 부흥을 위한 포괄적인 계획을 작성하여 가능한 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그는 이 건설적 프로그램 속에, 인도가 직면하고 있고 또한 인도가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온갖 정신적.사회적.경제적 문제를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는 종파간의 융화를 도모하는 일을 첫째로 꼽았다. 다음은 불가촉천민제의 해악에 대한 반대투쟁이었다. 그리고 사회의 자기 정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그가 생각하던 셋째 것은 취하게 하는 온갖 종류의 물건(술, 아편 따위)을 버리는 일이었다. 위에 든 세 가지 순수하고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개혁에 뒤이어 건설적 프로그램의 넷째 것은 카디(Khadi : 손으로 짠 옷감) 운동의 추진이었다. 이는 간디가 그리던 이상적 사회질서의 기초였던 자급자족적인 촌락 공업경제의 이념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일 농촌이 식량을 생산하듯이 스스로의 옷감을 생산할 수 있다면 농촌은 그 기본적 필수품을 자급자족하게 되어 그 이상 도시한테 착취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카디를 인도의 국민적 통일과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라 보고, 카디 운동의 추진을 모든 애국적 인도인, 특히 건설적 프로그램 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의무로 삼게 하였다. 간디는 어떤 과업에 착수하면 매우 사소한 일까지 이를 계획해서 실행하곤 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건설적 프로그램 속에 이 카디 에 더하여 제분.비누.제조.제지.성냥만들기.기름짜기 등과 같은 농민의 일상적 수요를 충족하는 여러 종류의 소규모 농촌공업을 첨가했다. 그의 만년에는 거의 카디만큼이나 퇴비만들기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화학비료는 토양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도 농촌에서 소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머니가 가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해당했으므로 소의 보호는 역시 건설적 프로그램의 중요한 항목이었다. 촌락위생, 기초교육과 성인교육, 자신의 권리수호와 국가에의 봉사를 위한 부인, 노동자 및 학생의 조직도 건설적 프로그램 의 다른 중요 항목들이었다. S.아비드 후세인이 요약하고 있다시피, 건설적 프로그램 이란 요컨대 간디가 자유.평등 및 사랑에 의거하는 새 사회질서로 인도하는 하나의 조용한 사회혁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던 자발적인 사회봉사와 자조의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사탸그라하 간디에 의하면, 건설적 프로그램은 자기의 사회적 이상을 달성하는 데직접적으로 이바지한 동시에, 다른 하나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도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즉, 건설적 프로그램 은 그 일군들에게 봉사와 자기희생의 정신, 규율과 조직에 관한 의식, 근면과 인내의 능력을 육성함으로써 그 일꾼들을 사탸그라하를 위해 훈련시켰다는 것이었다. 사탸그라하는 사회혁명의 전투를 감행하기 위한 간디의 사랑(아힘사)의 무기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간디는 허위와 부정에 항거하고 진리와 정의를 지지함에 있어서 사탸그라하라는 특이한 방법을 창안하여 그것을 공적 생활에서 전례없는 규모로 사용하였다. 이 방법의 본질은 순수한 아힘사에 입각하여 상대방을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대신에 정신력으로 상대방이 마음을 사는데, 달리 말하면 상대방을 해치거나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마음과 기사도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인간적인 감정을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 앞서 살펴본대로, 간디는 악한 세력과 악한 인간과를 구별지었다. 악이나 부정과 싸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진정한 적이 악이나 부정의 세력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적은 그들에게 해악과 부정을 감행하는 인간이라 착각하고 있다고 간디는 주장하였다. 간디에 의하면 인간은 다만 그런 악한 세력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악한 세력은 억압자나 피억압자 쌍방안에, 억제되지 않은 사나운 격정이나 욕망의 형태가 아니면 공포와 비겁의 형태로 존재한다. 피억압자는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세력과 싸우고, 그러고 난 후에 억압자 안에 있는 그런 세력과 싸워야 한다. 피억압자가 적절한 훈련을 통하여 자기의 보다 훌륭한 인간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자신의 사나운 격정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인격에다 조화와 기품, 그리고 하나의 잠재적 정신력인 이상한 매력을 지니게 하는 동정과 사랑의 감정을 발산하게 된다. 악과 부정에 항거함에 있어서 이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사탸그라하 라고 부른다. 그것은 억압자의 마음의 금선을 울리게 할 수 있는 반면에, 피억압자의 분노.증오 및 이기심을 억제시키고, 정의.사랑 및 자기 희생의 정신을 발휘시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적까지 사랑하는, 즉 톨스토이의 말대로 사랑에 입각하는 사상이며 행동이다.
사탸그라하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 개인의 사탸그라하는 보통 단식이라는 수단으로 행해지나 그것은 또한 드물기는 하지만 시민적 불복종의 형태로 행해지기도 한다. 집단적 사탸그라하 내지 대중 사탸그라하는 하르탈 -일의 중지와 철시, 다르나 -연좌항의, 피케팅 -외래품 상점 감시, 납세거부 등을 통해서도 행해질 수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시민적 불복종과 비협력이다. 그 어느 형태를 취하건간에 사탸그라하는 물리력이 아니라 영력을 가지고 싸워지는 하나의 기묘한 전쟁이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낡은 형태의 전쟁에서조차 공들인 훈련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의 전쟁인 사탸그라하를 위해서는 훨씬 더 공들이고 철저한 훈련이 요청된다. 간디에 의하면, 사탸그라하는 이중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인간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필요한 일반적인 종교적 및 도덕적 훈련이요, 다른 하나는 비폭력적 사회혁명의 선봉인 사탸그라하 운동자에게 행해지는 특수한 실제적인 훈련이다. 첫째 훈련은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인도에서 세운 수도장에서 행해졌다. 이는 사탸와 아힘사를 비롯하여 절제 비소유 및 브레드레이버 -빵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한 생산적인 일손-의 5대 기본 덕성과 겸양, 공포를 갖지 않는 일 등 그밖의 중요한 도덕적성품의 실천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둘째 훈련은 수도장의 수업을 마친 사탸그라하 운동자에게, 그들을 건설적프로그램 과 관련된 실제운동을 하도록 농촌에 파견함으로써 행해졌다. 이는 그들에게 책임감.시간엄수.이해력.솔선수범.요령.사려분별.철저성 등을 발전시키기 위한 충분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개인적 사탸그라하를 위해서 간디는 대중 사탸그라하 보다도 더 철저한훈련을 하도록 강조하였다. 개인적 사탸그라하 운동자들은 만사를 그들 자신의책임과 주도하에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전자는 앞에 쓴 두 가지훈련을 모두 철저하게 받은 사람들로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간디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만일 그 지도자가 비폭력의 원리와 실제를 전수받고 있다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지도자는 비폭력을 신조로서가 아니라 다만 정책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데 불과한, 그리고 사탸그라하의 기술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고 지도자의 지시하에 그 도덕적 원리에 따르고 있는 일꾼의 추종자들과도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지도자가 정치적 사탸그라하 운동자 이외에, 사탸그라하에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충분한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운동은 보다 큰 힘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바로 간디가 그 도움을 받아 인도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비폭력적 군대였다. 이 군대는 마침내 1947년에 인도의 자유를 쟁취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도는 간디의 염원에 반하여 분할독립되었다. 더구나 비폭력의 사도 간디는 폭력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간디의 이러한 사탸그라하 내지 비폭력운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
4. 간디주의의 평가 나는 오랫동안 간디의 정략을 연구하고 그것이 가지던 효과를 주시한 결과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뒷받침된다면, 그것은 식민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가나의 전대통령 엥크루마의 술회를 빌릴 필요도 없이, 간디의 사탸그라하 투쟁은 다분히 정책적인 의의도 가지고 있었다. 이점은 스와라지(Swaraji : 자치)가 민족의 목표다. 비폭력이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도가 정복자의 폭력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하는 것이다. 폭력은 인도를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스와라지는 인도의 독특한 무기인 영혼의 힘, 사랑의 무기, 진리의 힘 없이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간디의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2차대전 중 간디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 나머지, 만일 인도가 자유국가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만 있다면, 회의파의 전쟁참가에 동의해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간디를 가장 잘 알고 있던 네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그 (간디)에게는 심한 고뇌와 고통을 수반하는 획기적이며 놀라운 변화였다. 그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요 생존의 의의로까지 되고 있는 비폭력(아힘사)의 원칙과, 그에게 있어서 마음을 지배하고 몸을 태워버릴 정도의 열망이었던 인도의 자유와의 상극 사이에서 저울은 후자에로 기울어졌다. 물론 이것은 그가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약화시켰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전쟁에는 비 폭력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회의파의 견해에 동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적인 정치가로서의 면이 비타협적인 예언자로서의 면에 이긴 것이었다. 라고, 조국이 최대의 위기에 처하자, 간디는 민족의 독립과 비폭력의 원칙 중에서 전자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간디의 비폭력은 민족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목적과 수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실로 간디의 도덕철학에서는 수단과 목적간에 아무런 구별도 없다. 간디는 목적을 일련의 수단의 맨나중 것으로 본다. 즉, 간디에게 있어서 목적을 향해 취해지는 하나 하나의 단계는 그 목적의 부분적 실현이요, 그 최종단계는 목적이라 불리고, 앞선 모든 단계는 수단이라 불리는 것은 단순한 관습에 불과하다. 인도의 분할독립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간디의 개탄은 이러한 배경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지난 30년간에 걸쳐 우리가 해온 것은 비폭력의 저항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동적 저항이었다. 수동적 저항은 약자만이 하는 짓이다. 약자는 무력저항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비폭력적 저항이 수법을 실현할 수 있었다면 - 그것은 견인불발의 용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 우리는 양분된 인도 대신에 그와는 저혀 다른 자유 인도의 모습을 세계에 나타냈을 것이다. 인도는 둘로 분할되고 게다가 서로 몹시 의심하고 있다. 분할된 인도는 서로 심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수백만의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의 형태로 그들 앞에 자태를 나타내는 신의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모른다. 나는 민중에게 나의 비폭력주의를 가르치고 실행시켰다. 그 때문에 인도는 자유를 쟁취한 것으로 나는 최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느끼고 있다. 이 이상 자기 기만을 계속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나의 신념의 승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독립을 계기로 편견과 사리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들의 저열한 모습을 쓸쓸한 심정으로 지켜보며 간디가 쓰디쓰게 내뱉은 이런 술회야말로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영국인에 대한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전략과 전술로서는 승리 했으나, 새로운 사회철학, 인간을 재생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서는 완전히 실패 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남부디리파드는 평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간디가 그의 특이한 도덕.종교관과 사회.정치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도 자본주의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새 교육으로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자주독립의 인간을 만들어 내려 했고, 건설적 프로그램 을 통해서 인도의 농촌을 부흥하여 민족자본의 힘의 공급원을 강화하는 한편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국민적 통일을 기하려 했으며, 그리고 사탸그라하 투쟁을 통해서 인도 민족자본의 궁극적 목표인 인도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간디는 인도 민족자본의 은인이었다 하겠다. 그러므로 간디의 영도 아래 성장.발전한 인도 민족자본은 독립을 쟁취하자 간디의 은혜를 잊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간디는 위대한 정치지도자였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에 국한해서 보면 전술한 남부디리파드의 견해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결국 부르주아지한테 이용당한 데 불과했을까? 그것은 인간을 개조함으로써 사회를 변혁하려 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을까? 인간을 개조하려는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당장에는 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요, 또한 독립 후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반대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부르주아지를 위하는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간디가 악착같이 고집하던 비폭력주의는 부르주아지한테 이용당한 것이 사실일는지 모르나 비폭력주의에 대한 남부디리파드의 비판은 당시의 환경의 제약을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간디의 종교적 신앙을 너무 경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정치적 비판은 간디의 비정치적인 면, 특히 인간적.종교적인 면을 소홀히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로 간디는 많은 면에서 인도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고, 또한 그의 비폭력의 유훈은 부단 : 그라므단 운동의 지도자 비노바브하베를 비롯하는 정통파 간디주의의 건설적 프로그램 운동자들에 의해 충실하게 지켜져, 그의 비폭력의 정신은 여전히 인도에 살아 남아 있지만, 그 정신은 다만 인도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세한 폭력에 대한 비폭력 투쟁은 지난날 피억압 민족의 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거니와, 그것은 오늘날에도 각국의 인종차별 반대운동의 지도자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폭력의 극한점에 달하여 자멸의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헤매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전쟁에 호소하지 않고, 종파간이나 민족간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간디의 사탸그라하의 방법이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일찌기 로망롤랑은 간디야말로 3억의 민중을 궐기시켜 대영제국을 진감시키고 거의 2천 년 이래 인류의 정치에 가장 강력한 운동을 도입한 인물 이라 평했지만, 근자에도 아널드 토인비는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간디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