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 4 - 김병총
50. 흉노열전(匈奴列傳)
하(夏), 은(殷), 주(周) 3대 이래로 중국에서는 언제나 흉노가 환난과 재해의 근원이었다. 한실(漢室)에서는 그들 강약의 시기를 알아채고 군비를 갖추어 그들을 정벌하려 했다. 그래서 제50에 <흉노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흉노의 조상은 하왕조(夏王朝) 우임금의 후손인 순유(淳維)라고 일컬어진다. 요임금, 순임금 이전에는 이 씨족들을 가리켜 산융(山戎), 험윤, 훈육 따위로 불렀다. 대체로 북쪽의 미개척지대에서 목축을 하며 이리저리 이동하며 살았다. 그들의 가축에는 말, 소, 양이 많았고, 진기한 가축 중에는 낙타, 나귀, 노새, 버새, 푸른말, 야생말 등이 있었다.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해 가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있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농사를 짓지 않았으므로 나누어 가진 땅도 없었다. 그러니까 땅문서가 없으니 구두로 대충 약속하고 살았다. 어린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활로써 새나 쥐를 쏠 수 있었다. 소년이 되면 여우나 토끼사냥으로 집안의 식용을 충당했다. 활을 당길 만한 힘과 말을 제대로 탈 줄 알게 되는 청장년이 되면 그들 전원이 무장기병(武裝騎兵)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 습속은 평화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생계를 세웠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원 전투에 임해 침략과 공격에 나섰다. 그것이 그들의 천성이었다. 그들의 무기에는 원거리용으로서 활을 사용했고 접전시에는 칼과 짧은 창을 사용했다. 싸움이 유리하면 무작정 전진하고 전세가 불리하면 사정없이 도망쳤다. 그들은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익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갔으므로 예의 같은 것도 있을 수가 없었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가축의 살코기를 주식으로 했고 그 가죽으로는 옷을 해입었다. 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먹었고 그 나머지를 노인들이 먹었다.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한 자가 자연히 천대되었다. 아비가 죽으면 그 아들이 아비의 후처들을 아내로 삼았고 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 그들 풍속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이름을 불렀고, 성(姓)이나 자(字) 같은 것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하왕조의 도(道)가 쇠미해지자 공유(公劉:周의 시조 后稷의 증손)가 대대로 이어받았던 직관(稷官:농업관리 大臣) 벼슬을 잃고 서융(西戎)으로 이주해 빈에다 도읍했다. 그 후 3백여 년이 지나서 융적(戎狄)이 왕 고공단보(古公亶父:공유의 9世孫)를 공격했다. 단보가 도망하여 기산(岐山) 기슭으로 갔다. 그때 빈의 주민들이 모두 단보를 따라가 새로 도읍을 이루고 주(周)나라를 일으켰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나 주나라 서백(西伯)인 창(昌:고공단보의 손자. 후일의 文王)이 견융(犬戎:견이씨)을 정벌했다. 10년이 지나 주의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낙양(洛陽)에다 도읍을 정했다. 그는 또 풍(狹西省 鄂縣 동쪽)과 호(長安, 鎬와 같음)에도 살면서 융이(戎夷)를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이북으로 추방하고 그들에게 계절마다 조공을 바치게 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황복(荒服)이라 불렀다. 그 후 또 2백 년이 지나자 주의 정도(政道) 역시 쇠미해졌다. 목왕(穆王)이 견융을 정벌하고 네 마리의 흰 이리[白狼]와 네 마리의 흰 사슴[白鹿]을 잡아서 돌아왔다. 그런 뒤부터 황복에서는 조공을 바치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주나라에서는 보후(甫侯:呂侯)에게 명하여 여형(呂刑)의 법(法:贖罪法)을 만들었다. 목왕 이후 2백여 년이 지나 주나라 유왕(幽王)이 총희 포사 때문에 신후(申侯:유왕의 아버지, 宣王의 장인)와 틈이 생겼다. 신후가 노해 견융과 합세하여 여산(驪山:狹西省 臨潼縣 남동쪽)에서 유왕을 죽이고, 드디어 주나라 초호택(狹西省 涇陽縣)을 점령해 경수와 위수(渭水) 사이에 거주하면서 중국을 침략 횡행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신후의 딸이 유왕의 왕후가 되어 태자 의구(宜臼)를 낳았는데, 유왕이 포사를 사랑해 나중에 백복(伯服)을 낳았다. 유왕은 의구를 폐한 뒤 백복을 태자로 삼는다. 신후가 견융, 서이(西夷)와 공모해 유왕을 여산 아래에서 죽이고, 태자 의구를 왕으로 세웠다].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이때 주나라를 구원해 견융을 치고 기산(岐山)에까지 이르러 비로소 제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주의 평왕(平王)은 이때 풍, 호를 떠나 동쪽으로 와서 낙양에다 도읍을 정했다. 그로부터 65년 후 산융(山戎:北狄 즉 鮮卑族으로 河北省 滄州 이북에 있었음)이 연(燕)을 넘어와서 제(齊)를 쳤다. 제나라 희공이 제의 도성 밖에서 그들을 맞아 싸웠다. 그로부터 44년 후 또 산융이 연을 쳤다. 연에서 제나라에게 위급함을 알렸더니 제의 환공(桓公)이 북쪽으로 산융을 쳤다. 산융이 패주했다. 그 후 20년이 지나 융적이 낙읍으로 들어와 주나라 양왕(襄王)을 치니 양왕은 정(鄭)나라 범읍(氾邑:河北省 襄城縣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는 처음에 주의 양왕이 정나라를 치려고 융적 추장의 딸과 정략 결혼해 후(后)로 삼고 그 병사들로 정나라를 쳤었다. 그런데 그 후 추장딸 적후(狄后)를 내치니 적후가 양왕에게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양왕의 계모 혜후(惠后)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어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적후와 내통해 융적을 쳐들어 오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주나라 양왕을 내쫓고 자대를 천자로 삼았다. 이때부터 융적은 육혼(陸渾:河南省 嵩縣 북동, 伏流城 북쪽)에 머물러 살았으며, 동쪽으로 위(衛)에 이르기까지 침략하고 횡포한 일을 자행했으므로 중국사람들은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에 융적을 치니 여기에 험윤을 쳐 태원(太原)에 이르다 끝없이 수레를 내어 저 삭방(朔方:北方)에 성을 쌓고
주나라 양왕이 도망쳐 도성 밖에서 산 지가 4년이 되었다. 양왕은 진(晋)으로 사자를 보내 괴로움을 호소했다. 때마침 진의 문공(文公)은 방금 즉위한 패기만만한 왕으로서 패업을 성취할 야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문공은 곧 군사를 일으켜 융적을 쳐 쫓아버리면서 자대를 잡아 주살하고 주의 양왕을 낙읍에 있게 했다. 이 무렵에는 진(秦)과 진(晋)이 강국이었다. 진(晋)의 문공은 융적을 하서지방(河西地方)의 은수와 낙수 사이로 몰아넣어 그들을 적적(赤翟), 백적(白翟) 따위로 부르고 있었다. 또 진(秦)의 목공은 서융의 현사(賢士) 유여(由余)를 얻음으로써 서융의 8개국을 진나라에 복속시킬 수가 있었다. 농의 서쪽에는 면저, 곤융, 적원이 있었고, 기산, 양산(梁山), 경수, 칠수(漆水:모두 狹西省) 이북에는 의거(義渠), 대려, 오지(烏氏), 구연의 융들이 있었다. 그리고 진(晋)의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의 융이 있었으며, 연의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이 각각 계곡으로 분산해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군장(君長)이 있었고, 가끔 백여 개의 융이 모이는 수는 있었으나 한 종족처럼 단결시켜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1백 년 후 진(晋)의 도공(悼公)이 융으로 위강(魏絳)을 사자로 보내 화친을 제의하자 융적이 비로소 진(晋)에 입조했다. 다시 1백 년 후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代)를 격파 병합하면서 북방 융족 호맥(胡貊)과 인접하게 되었다. 조양자는 점차로 한(韓), 위(魏)와 함께 지백(智伯)을 멸망시키고 진(晋)의 영토를 분할 소유했다. 즉 조(趙)나라는 대(代)와 구주산 북쪽을 소유하였고, 위나라는 하서(河西)와 상군(上郡)을 소유하면서 모두 융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의거의 융이 성곽을 쌓고 나름대로 수비를 튼튼히 했지만 강대한 진(秦)나라가 이를 점차로 먹어들어가 혜왕(惠王)에 이르러서는 의거의 25개 성이 함락되었다. 혜왕은 또 위(魏)까지 쳐서 서하군(西河郡:오르도스 지방)과 상군(上郡:狹西에서 오르도스에 걸친 일대)을 진으로 편입시켰다.
진(秦)나라 소왕(昭王)의 모친 선태후(宣太后)가 융왕과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은 일이 생겼다. 그러나 선태후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감천궁(甘泉宮:別宮, 狹西省)에서 융왕을 속임수로 죽인 뒤 내친김에 군사를 동원해 의거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진(秦)은 농서, 북지, 상군을 소유하게 되었고 장성까지 쌓아 오랑캐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은 또한 풍속을 바꾸어 호복(胡服:승마에 편리한 흉노 복장)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았으며, 북쪽으로 임호, 누번을 격파해 장성을 구축한 뒤 대(代)에서부터 음산산맥(陰山山脈:雁門郡, 雲中郡의 북쪽 즉 朔北을 東西로 달린 산맥)에 이르기까지를 요새로 만들어 운중군, 안문군, 대(代)군을 두기까지 했다. 연나라 진개(秦開)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는 흉노에 볼모가 된 적이 있는데 흉노에서는 그를 매우 신임했다. 진개는 그때에 정세를 잘 파악해 두었다가 귀국하자마자 동호를 격파했다. 이때 동호는 천 리나 퇴각했다. 진왕(秦王) 정(政:秦始皇帝)을 형가(荊軻)와 함께 암살하러 떠났던 진무양(秦舞陽)이 바로 진개의 손자이다. 연에서는 또 장성을 조양(造陽:察哈爾省 懷來縣)에서 양평(襄平:遼寧省 遼陽縣 북쪽)까지 구출했고,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 요동군을 설치해 흉노에 대비했다. 이 무렵 의관(衣冠)과 속대(束帶)를 할 줄 아는 예제(禮制)의 문명국은 전국칠웅(戰國七雄:齊, 燕, 楚, 韓, 魏, 趙, 秦)이었다. 그때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의 변경을 넘볼 수가 없었다. 그 후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가 몽염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북쪽 흉노를 치게 했다. 몽염은 하남(河南:오르도스 지방) 땅을 모조리 손에 넣고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었다. 황하를 따라 44개의 성을 쌓으며 유형수(流刑囚)로 구상된 군사를 강제 이주시켜 이쪽을 수비케 했다. 몽염은 또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狹西省)까지 직선도로를 통하게 했으며,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아 수선 가능한 여러 섬들을 이어 임조(감숙성 임조현 남서쪽)에서 요동(遼東:요녕성 요양시 부근)까지 대장성을 축조했으니 그 길이가 1만리였다. 게다가 그는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산이름. 高闕의 동쪽)과 북가(北假:九原의 서쪽) 사이에 근거지까지 두었었다.
그 무렵 동호와 월지(月氏)가 강했다. 흉노의 선우(單于:추장)를 두만(頭曼)이라 했는데 그들도 진(秦)은 이길 수가 없어 북쪽으로 아예 이주해 살았다. 십여 년이 지나 몽염은 죽었다. 제후들이 진을 배반해 중국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진이 강제로 변경에 이주시킨 유형수들도 모조리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여유를 얻은 흉노는 점차로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진나라 이전의 요새선(要塞線)으로 다시 중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선우에게는 묵특(冒頓)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런데 선우가 총애하는 연지(閼氏:선우의 后妃 칭호, 원음은 '알저')가 말자(末子)를 낳았다. 선우는 태자를 폐하고 말자를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월지국(月氏國)으로 볼모로 보냈다. 그런 뒤 선우는 갑자기 월지국을 공격했다. 그러자 선우의 예상대로 월지국에서는 볼모 묵특을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묵특은 월지국의 명마를 훔쳐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선우는 자신의 계획은 어긋났지만 아들 묵특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1만기(騎)를 거느리는 대장으로 삼았다. 묵특은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명적(鳴鏑:우는 화살, 嚆失이라고도 함)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타고 활쏘기 연습을 시킨 뒤 이렇게 명령했다. "이것은 소리나는 화살이다. 내가 이 명적으로 쏘거든 너희들도 내가 쏘아 맞춘 곳으로 일제히 쏘아라. 듣지 않는 놈은 벤다." 그런 후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소리나는 화살로 새 한 마리를 쏘았는데 함께 쏘지 않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그 자리에서 그 자를 베어 버렸다. 얼마 후에 묵특은 명적으로 자신의 애마를 쏘았다. 좌우에서 주저해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발사하지 못한 자를 베었다. 다시 얼마 지난 후 묵특은 명적으로 이번에는 자신의 애첩을 쏘았다. 좌우에서 몹시 두려워하여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묵특은 그 자를 베어 버렸다. 묵특은 어느 날 사냥하러 나갔다. 두만선우의 명마가 보였다. 그래서 묵특은 명적으로 선우의 준마를 쏘아 버렸다. 좌우의 부하들이 그제서야 두만선우의 명마에다 대고 화살을 쏘았다. "됐다. 이제는 모두가 내 부하로 쓸 만하다!" 어느 날 묵특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부친 두만선우를 따라 사냥을 나갔다. 묵특은 명적을 꺼내어 아버지 두만선우에게 화살을 쏘았다. 좌우의 부하들이 이제는 지체없이 두만선우에게 화살을 쏘아대었다. 부친 두만선우는 죽었다. 묵특은 잇달아 계모와 부친의 말자와 저항하는 대신들을 모조리 명적으로 쏘았다. 부하들이 활을 쏘아 그들 모두를 죽였다. 묵특은 자립해서 선우가 되었다. 그 무렵 인근국 중에서도 동호가 강했다.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어? 트집을 잡아 응징해야 되겠다!" 동호에서는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어 생전에 두만선우가 타던 천리마(千里馬)를 달라고 했다. 묵특이 뭇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안 됩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묵특의 생각은 달랐다. "가까운 이웃끼리 어찌 한 마리의 말을 아끼는가." 묵특은 동호에게 천리마를 주어 버렸다. 동호에서는 묵특이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묵특의 연지[愛妾] 하나를 요구해 왔다. 묵특의 신하들이 펄펄 뛰며 노했다. "무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놈입니다. 감히 선우의 연지를 요구하다니! 차제에 동호를 쳐버립시다!" 묵특의 계산은 여전히 달랐다. "이웃나라끼리 어찌 한 사람의 여자를 아끼겠는가." 그래서 사랑하는 연지를 택해서 동호를 보냈다. 동호의 왕은 더더욱 교만해졌다. 그런데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버려둔 땅 1천여 리의 무인지경이 있었다. 그러니까 양국은 각각 불모의 사막 주변에 살고 있었으며 천리의 무인지경이 바로 국경이었다. 교만해진 동호가 갑자기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런 제안을 해 왔다. "흉노와 우리 동호가 경계로 삼고 있는 1천여 리의 불모의 땅이 있지 않습니까. 흉노에서도 이용가치가 없어서 버린 땅이니 우리 동호가 이를 접수하겠습니다." 회의가 열렸다. 묵특의 신하들은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까짓 쓸모없는 땅은 주어 버리십시오." "안 됩니다. 다른 계략이 있는 듯합니다." "주어도 괜찮고 주지 않아도 무방하니 논의할 가치도 없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던 묵특이 그제서야 불같이 화를 내었다. "땅이란 무언가! 나라의 근본 아닌가. 어째서 그 땅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묵특은 '주어도 좋다'고 말한 신하와 '주든 말든 마음대로'라던 신하의 목까지도 자르고 말았다. 그런 후 즉시 말 위로 오르며 전국에 명령했다. "동호를 친다! 뒤늦게 출진하는 자도 베어 버리겠다!" 묵특은 동쪽으로 달려가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로서는 처음부터 흉노를 가볍게 보고 있었던 관계로 방비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동호는 철저히 격파되었다. 동호의 왕을 죽인 뒤 백성들과 가축들을 노획하여 귀환했다. 묵특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서향하여 월지족들을 부수고, 뒤이어 남향해서는 하남의 누번, 백양(白羊) 두 부족의 땅을 병합하여 진나라 몽염이 탈취해 간 땅 전부를 삽시에 회수해 버렸다. 그로 인해 한제국과는 본래의 국경인 하남의 요새선에 관문을 두고 조나(朝那:감숙성 平凉縣 남동쪽), 부시(膚施:섬서성 부시현 남동쪽)까지 진출하게 되었으며 잇달아 연과 대(代)까지 침입해 들어갔다. 당시의 한나라 군대는 항우와 싸우느라고 몹시 지쳐 있었다. 흉노 쪽으로 눈돌릴 틈이 없었다. 그로 인해 묵특은 자신의 위치를 강고히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궁사(弓士)만 해도 30만이나 되었다.
순유에서 두만선우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 흉노는 때때로 강대했고 혹은 약소했다. 그들끼리도 이합집산이 되풀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전승해 온 내력을 차례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묵특이라는 흉노의 가장 영특한 왕에 이르러서는 북방 만족들을 모조리 복종시킬 만큼 강대해지고 남으로는 중국과 대치될 만큼 대단한 형세를 이루게 됨으로써 비로소 흉노의 관직과 칭호 정도는 기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우 밑에는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 좌곡려왕, 우곡려왕, 좌대장, 우대장, 좌대도위(左大都尉), 우대도위, 좌대당호(左大當戶), 우대당호, 좌골도후(左骨都侯:王族과 다른 姓의 大臣), 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어질다, 현명하다'를 도기(屠耆)라고 했는데 그래서 언제나 태자를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 불렀다. 또 좌우 현왕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1만 기(騎) 작게는 수천 기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24인의 군단장들이 있어 이들을 만기(萬騎)라 불렀다. 여러 대신들의 관직은 모두 세습되었고, 흉노의 귀족에는 호연씨(呼衍氏), 난씨(蘭氏), 수복씨(須卜氏)가 있었다. 좌(左)가 붙는 왕족이나 장군들은 동방에 위치하며 상곡군 동쪽을 담당하였고 예맥(穢貊)민족과 조선(朝鮮)민족에 접하고 있었다. 우(右)자가 붙는 왕족이나 장군들은 서방에 위치해 상군 서쪽을 담당하였고, 월지족이나 저족, 강족(羌族:둘 다 서장족)과 접하고 있었다. 선우의 도읍지[외몽고의 塔米爾河의 北方]는 대군(代郡), 운중군(雲中郡)을 대하고 있었다. 각 부족들은 제각기의 영역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며 살았고, 그들 중에서 좌우의 현왕과 좌우의 곡려왕 영역이 가장 컸다. 좌우의 골도후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했다. 24인의 군단장들은 자신이 각각 천인대장(千人隊長), 백인(百人)대장, 십인(十人)대장, 비소왕(裨小王), 상(相), 봉(封), 도위(都尉), 당호, 저거(且渠) 등의 속관을 두었다.
매년 정월에는 여러 군단장들이 선우의 왕정(王庭)에 모여 소규모의 회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용성(祭天하는 王庭 남쪽의 장소)에서 대규모 회합을 가지고 그들의 조상, 하늘, 땅 및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찔 무렵에는 대림(제사 지내는 숲, 혹은 地名)에서 대집회를 열고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그들의 법률에서는 평상시에 칼을 한 자 이상 칼집에서 뽑은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자는 그의 가산 전부를 몰수했다. 가벼운 범죄자는 알형(軋刑:수레바퀴로 뼈를 부수는 刑, 笞刑, 칼로 안면을 가르는 刑 등의 해석이 있음)에 처해졌으며 중범죄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감옥에 가두는 기간은 길어도 열흘을 넘지 않았으며, 죄수는 전국을 통틀어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선우는 매일 아침 막영(幕營)에서 나와 일출(日出)을 보며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했다. 좌석의 차례는 왼쪽에 앉아 북향(北向)하는 것을 상좌(上座)로 삼았고, 열흘마다 돌아오는 십간(十干:天干) 중에서 제5일째의 무일(戊日)과 제6일째의 기일(己日)을 길일(吉日)로 쳤다. 장례식에는 관(棺), 곽(槨)에다 금은이나 옷가지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는 심지 않았고 상복(喪服)도 입지 않았다.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사(殉死)했는데 많을 경우에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다.
전쟁을 일으킨 때나 거사(擧事)를 할 때는 달의 상태를 주로 보았다. 즉 달이 차고 빛나면 공격하고 달이 이지러지면 퇴각했다. 적을 공격해서 목을 베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한 잔의 술을 내렸고, 노획품은 그대로 본인이 갖게 하였다. 포로는 역시 잡은 자의 노비로 삼게 했다. 그러므로 전투시에는 제 이익을 위하여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그들은 적을 발견하면 이익 때문에 새떼들처럼 모여 들었고 곤경에 빠져 패색이 짙게 되면 구름처럼 조각조각 흩어졌다. 전쟁터에서 전사자를 거두어 돌아오면 그 전사자의 가재(家財)를 모두 얻게 했다. 묵특은 그 후 북방으로 혼유(渾庾), 굴석(屈射), 정령(丁靈), 격곤), 신려 등의 5개국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흉노 귀족들과 대신들은 모두 심복했으며 묵특선우를 현군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 무렵 한나라가 비로소 중국을 평정하고 한왕(韓王) 신(信)을 대군(代郡)의 마읍(馬邑:山西省 朔縣 북동쪽)에 도읍하게 했다. 그런데 흉노가 대공세를 펴서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 신은 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흉노는 여세를 몰아 남방으로 구주산을 넘어 태원군을 공격해 진양(晋陽:山西省 太原縣 북서쪽)성 밑으로 쇄도했다. 한의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거느려 맞싸우러 나갔다. 때마침 엄동 추위에 눈까지 심하게 내려 병사들은 동상으로 손가락을 잃는 자가 열 명 중에 두셋은 되었다. 묵특은 한군의 그런 상황을 알아챘다. 그래서 거짓 패하는 척하고 한군을 유인해 갔다. 그리고 정예병은 감춘 뒤 노약병만 표면에 배치했다. 멋모르는 한군은 보병을 32만으로 증원시켜서는 도주하는 적을 뒤쫓아 북진했다. 고조가 선두에 서서 평성(平城)에 도착했을 때였다. 묵특은 삽시에 정병 40만 기를 풀어 한의 대군 대열을 잘라 버리면서 평성 동쪽 백등산(白登山)을 에워싸 버렸다. 고조는 꼼짝없이 갇혀버린 것이다. 포위된 상태가 7일 간이나 계속되었다. 한군은 포위망의 안팎에서 서로 구원할 수도 식량을 보급할 수도 없게 되었다. 고조가 바라보니 백등산의 서쪽 기병은 모두가 백마(白馬)를 타고 있었고 동쪽 기병은 청방마(靑馬)를 탔으며 북쪽은 오려마(烏驪馬:黑馬), 남쪽은 모두가 성마(赤黃馬)를 타고 있었다. 가히 그 위용에서부터 질려 버렸다. 고조는 꾀를 내어 연지에게 줄 후한 선물을 밀사를 시켜 보냈다. 효과가 있었던지 연지가 묵특을 달랬다. "두 나라 임금이 서로를 괴롭히는 건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 거기에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선우께서 그를 치려 하시나 한왕 신(信)의 간특한 계략이 있을지도 모르니 섣불리 공격은 마십시오." 묵특이 생각해 본즉, 마침 한왕 신의 두 장군 왕황(王黃)과 조리(趙利)가 합류해 와서 치기로 돼 있었는데 기일이 되어도 오지 않아 음모가 있을까 의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연지의 말을 받아들여 포위망의 한쪽을 풀어 주었다. 고조는 활시위를 한껏 당긴 채 살을 매겨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는 포위가 풀린 한쪽으로 도망쳐 나갔다. 고조는 마침내 자신의 대군과 만나게 되었고, 묵특도 군대를 끌고 돌아가 버렸다. 고조 역시 군대를 이끌어 돌아가면서 유경(劉敬)을 시켜 화친을 맺게 했다. 그 뒤에 한왕 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었다. 왕황, 조리 등과 함께 자주 화친조약을 깨면서 대군, 운종군에 침입해 약탈해 갔다. 얼마 안 되어 한나라의 진희가 모반해 한왕 신과 짜고 대군(代郡)을 공격해 왔다. 한에서는 번쾌를 시켜 이들을 공격해 안문, 운중의 여러 군현을 탈환하긴 했으나 국경의 요새선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이 무렵 흉노로 투항하는 한나라 장수들이 특히 많았다. 그래서 교만해진 묵특은 대군 일대를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 사정을 걱정한 고조는 유경을 시켜 황실의 딸을 공주라 속이고 받들어 가게 해서 연지로 삼게 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면포(綿布)와 견포(絹布)와 술, 쌀, 식품 등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흉노와 형제국이 되는 화친조약을 맺게 했다. 그렇게 되자 묵특도 침략행위를 조금은 멈추었다. 그렇지만 그 후 연왕(燕王) 노관이 모반해 일당 수천 명을 끌고 흉노로 투항해 갔다가 상곡군 동쪽을 왕래하며 주민들을 괴롭혔다.
고조가 붕어했다. 효허제, 여후(呂后)의 시대가 되었다. 묵특이 이번에는 여태후에게 교만하고 망령된 편지를 보냈다.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나와 혼인하는 게 어떻겠소. 한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감히 오랑캐가 태후를 희롱하다니!" "논의할 거 없습니다. 대군을 일으켜 묵특의 목을 벱시다!" 그러나 많은 장수들이 이를 말렸다. "고제의 현명함과 용맹을 가지고서도 그들을 응징하기는커녕 평성에서의 곤욕까지 겪었습니다. 정벌은 불가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여태후도 울며 겨자먹기로 참으면서 정벌을 그만 두기로 하고 다시 흉노와 화친을 계속하도록 방침을 고수했다. 효문제가 즉위해서는 화친조약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도 그의 3년 5월에 흉노 우현왕이 하남땅으로 쳐들어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뒤 상군의 요새를 공격해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 쪽 만이를 약탈하고 죽였다. 효문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승상 관영에게 조칙을 내려 거기(車騎) 8만5천을 징발해 고노(高奴:섬서성 膚施縣 북서쪽)로 진출해서 우현왕국을 치게 했다. 결국 우현왕은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그때 효문제는 태원까지 행행했는데 제북왕(濟北王:興居)이 그 틈을 타서 모반했으므로 급히 장안으로 귀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승상이 흉노를 치려던 계획까지도 중지시키고 말았다. 이듬해 선우가 한나라에 글을 보내왔다.
-하늘이 세워준 흉노의 대선우(大單于)는 삼가 중국의 황제에게 묻노니 그동안 무사한가. 전날 황제가 말한 화친의 건은 내 뜻에 맞았기 때문에 화친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도 한나라 관리가 우리 우현왕을 침범 모욕했으므로 우현왕은 선우인 나한테 주청할 겨를도 없이 제 부하인 후의(後義), 노후(盧侯), 난지(難氏) 등의 계략을 받아들여 반격을 했던 것이다. 어쨌건 두 나라 관리들은 서로 싸워 두 나라 임금의 화친약속을 깨뜨리고 형제로서의 친밀한 정을 이간질했다. 황제로부터 문책하는 편지가 두 번이나 왔으므로 이쪽에서도 사자를 파견해 편지로 회답했는데, 그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고 한에서도 다시는 사신이 오지 않았다. 한나라가 어떤 이유로서든 화친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화친할 수가 없다. 지금 한나라의 관리가 화친의 약속을 깨뜨린 죄를 물어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의 월지(月氏)를 치라고 했다. 다행히 하늘은 복을 내리어 우리의 사졸은 우수하였고 말은 강력하여 그 힘으로 월지족을 섬멸시키고 누란(樓蘭), 오손(烏孫), 호걸과 그 근방 땅을 모조리 평정해 흉노에 병합시켰다. 궁술에 능한 백성들이 이제는 한 집안 식구가 되어 북방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원컨대 이제는 전쟁을 중지시켜 사졸과 말을 쉬게 하고 싶다. 앞서 있었던 국경 분쟁 문제는 불문에 붙이고 당초의 화친조약을 회복시켜 변경지대 백성들이 편히 지냈으면 한다. 젊은이들은 탈없이 성장하고 노인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여 태평을 즐기도록 해주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중국 황제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낭중(郎中:秘書) 계우천(係雩淺)을 시켜 이 편지를 보내는 동시에 낙타 한 마리, 승마용 말 2두(頭), 수레 끄는 말 8두를 헌상하는 바이다. 황제가 흉노군이 한나라 변경에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귀국의 관리와 백성에게 조칙을 내려 멀리 떨어져서 거주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사자가 도착하거든 즉시 그를 귀환시켜 6월 중에는 신망(薪望:요새선의 地名)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
편지는 오만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한에서는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만 공격하느냐 화친하느냐만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대신들 대부분의 의견들은 이러했다. "선우는 새로 월지족까지 격파해 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흉노의 영토를 얻는다 해도 늪 아니면 소금기 많은 황무지뿐이니 살 만한 곳도 못 됩니다. 결국은 화친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한의 황제는 화친을 허락했다. 효문제 전원(前元) 6년 한에서는 흉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묻노니 무사한가. 낭중 계우천을 시켜 짐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우현왕은 나 선우에게도 고하지 않고 후의, 노후, 난지 등의 계략만 듣고 양국 군주의 화약을 깨뜨렸으며 형제로서의 친애의 정을 이간했다. 한에서 화친을 부정하니 우리도 친근할 수 없다. 지금 우리로서는 한의 말단관리가 깨뜨린 화친이어서 우현왕을 시켜 죄를 물어 월지족을 섬멸하고 평정했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 사졸과 말을 쉬게 하고 싶다. 앞서 있었던 국경 분쟁 문제는 불문에 붙이고 당초의 화약을 회복시켜, 변경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젊은이들이 탈없이 성장하며, 노인들을 편안하게 지내게 하여 대대로 태평을 누리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짐은 이 말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마치 옛 성주(聖主)의 마음씨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국이라는 친애의 정리로 선우에게 매우 후한 선물을 보내었다. 그런데도 약속을 배반하고 형제간의 정리를 이간시킨 것은 항상 흉노 쪽이었다. 그러나 우현왕이 일으킨 사건은 한나라에서 이미 대사령(大赦令)을 발포하기 이전의 일이므로 죄는 이미 용서되었으니 선우는 그를 심히 처벌하지는 말기 바란다. 만약 선우가 이 편지의 취지에 찬동한다면 귀국의 여러 관리들에게 명백한 포고를 하여 화친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도 신의를 배반하는 일이 없이 선우 편지의 뜻을 준수할 것이다. 사자의 말에 의하면 선우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여러 나라를 정벌해 비록 전과는 얻었으나 한편 전쟁으로 인한 피해 역시 크다 하므로 짐이 착용하는 수겹기의(거죽은 수놓은 비단, 안은 붉은 비단으로 받친 겹옷), 수겹장유(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겹바지), 금겹포(錦織저고리) 각각 한 벌, 비여(比余:변발을 장식하는 얼레빗) 한 개, 황금으로 장식한 대(帶) 한 개, 황금제의 대구(帶鉤) 한 개, 수놓은 비단 열 필, 비단 서른 필, 붉은 비단 푸른 비단 각각 마흔 필씩을 중대부 의(意)와 알자령(謁者令) 견(肩)을 시켜 선우에게 보낸다.
얼마 안 있어 묵특이 죽고 아들 계육(稽粥)이 서서 이름하여 노상선우(老上單于)라 했다. 노상계육선우가 즉위하자 효문제는 다시 황족의 한 여자를 공주라 하여 선우에게 보내 연지로 삼게 했다. 그때 연나라 출신의 환관 중항열(中行說)을 공주의 부(傳:보호관)로 삼아 보냈다. 가기 싫어하는 중항열을 억지로 보내자 그는 불평했다. "두고 보라. 내가 가게 되면 반드시 한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다." 중항열은 흉노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귀순해 버리고 말았다. 선우는 중항열을 몹시 총애했다. 흉노는 처음에 한나라의 견직물과 면포와 식품 따위를 몹시 좋아했다. 그러자 중항열이 이렇게 말했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일개 군(郡)만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흉노가 강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의복과 음식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나라와 다르며 한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선우께서 풍속을 변경해 한나라 물자를 애용한다고 해 보십시오. 한나라 물자의 10분의 2도 흉노가 소비하기 전에 흉노는 모조리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러니 한의 비단옷이나 무명옷을 얻게 되면 선우께서 그것을 입고 나가시어 풀과 가시덤불 속을 헤집고 말달려 가십시오. 필시 바지 저고리는 모조리 찢기어 못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단옷이나 무명옷이 흉노의 털옷이나 가죽옷보다 훌륭하고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한나라 음식을 얻으시면 모두 버리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한나라 음식이 우리가 먹는 짐승의 젖이나 건락(乾酪)만큼 편리하고 맛있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되는 것입니다." 중항열은 또 선우의 좌우 신하들에게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것으로 인구와 가축 수를 셈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몹시 좋아했다. 중항열이 한 일은 또 있었다. 이제까지 한나라에서 선우에게 보내오는 편지 문구는 대체로 이러했다.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묻노니 무사하신가. 보내는 물품은 무엇무엇...... 용건은 무엇무엇......
그리고 한 자 한 치의 서판(書板)을 사용했었다. "이제 선우께서 한나라로 편지를 보내실 때에는 한나라의 것보다 크고, 즉 한 자 두 치의 서판을 쓰시고 도장과 봉투도 한나라 것보다는 넓고 크고 길게 하십시오. 그래야 권위가 섭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문구도......" 그래서 중항열은 선우에게 훨씬 거만한 문투의 글귀를 사용하도록 권했다.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묻노니 무사하신가. 보내는 물품은 무엇무엇...... 용건은 무엇무엇......
한나라 사자가 와서 중항열과 한담하다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흉노에서는 노인을 천대하는 풍습이 있다더군요." 중항열은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얘기요!" "따뜻한 옷과 맛있는 음식을 청장년들이 독차지해버려 노인은 쓰레기같은 것만 먹게 된다던데요." "한나라에서는 안 그렇소?" "예에?" "한나라 풍습에서도 종군하는 아들을 위하여 그 부모가 가장 따뜻한 옷을 입히고 가장 영양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 보내지 않는가 말이오." "그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말해서 흉노는 전투를 일삼는 민족이오. 노약자는 전투를 할 수 없소. 그래서 이들의 영양좋고 맛있는 음식과 두텁고 따뜻한 옷을 전장으로 나가는 건장한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는 거요. 그럼으로써 노약자는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부자간에도 아들이 잘 싸움으로서 자기도 보호됨을 믿고 있는 것이오. 그것이 어찌 노인을 홀대하는 풍습이라 말할 수 있겠소!" 사자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흉노는 도무지 인간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부자가 같은 방에서 기거하며 애비가 죽으면 아들이 그 애첩을 차지하며 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아내로 삼습니다. 아름다운 의관도 위엄 있는 속대도 없으며 조정에서도 도무지 예절같은 게 없습디다." "웃기는 얘기 그만하시오. 흉노의 풍습에서는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소. 그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철따라 옮겨다닐 수밖에 없는 일이오. 싸울 때를 위하여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며 평상시에는 번거롭지 않은 무사한 것을 즐기게 되는 것이오. 그들의 약속은 간단하고 그래서 실행하기가 쉽소. 군신지간의 관계도 간단하고 쉬워서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편하오. 아니, 자기 몸처럼 자유롭소. 부자, 형제가 죽고나서 그 아내를 취하는 풍습은 가계를 끊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오. 그런 까닭에 흉노는 비록 어지러워지더라도 반드시 한 집안 친족을 선우로 세우는 거요." "그것은 짐승이나 할 짓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내놓고 부자지간에 서로 죽이고 형제간에 서로 죽이고 역성혁명(易姓革命)하여 천자의 성(姓)이 바뀌는 그 짓은 금수가 할 짓이오? 아니, 금수도 그렇게는 하지 않소. 예절의 폐해란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예의를 지키다 위아래가 서로 원망만 깊어질 때 생기는 거요. 오늘의 그 잘난 중국을 잘 보시오. 좋은 집짓기에 힘을 다 쏟아 보니 생산력은 한없이 쇠퇴해졌소. 농사와 양잠으로 의식의 재료를 구하고 성곽을 쌓아 자신을 방비할 생각만 하니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서투를 수밖에 없고, 평소에는 일에 지친데다 법령은 어렵고 죄는 무거우니 그것 역시 고달픈 삶이 아니겠소. 아아, 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불쌍한 한나라 사람들이여, 자신을 되돌아 보고 쓸 데 없는 변명이나 하지 마시지. 도대체 영리한 척 말만 많은 그대가 그따위 관을 쓰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말이오." 사자가 다시 반박하려 하자 중항열이 얼른 잘라 버렸다. "한나라 사자는 쓸데없는 소리 이제 그만하라. 한나라에서 흉노로 보내오는 비단과 무명과 쌀과 누룩의 수량이나 맞고 품질이나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무슨 군소리인가. 만일 보내오는 물품이나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고 품질이 조악한 것이라면 흉노는 추수기를 기다렸다가 말달려 가서 농작물을 짓밟을 뿐이겠거늘!" 중항열은 한나라를 침공하기에 편리한 지점을 잘 살펴두라고 밤낮으로 선우를 설득 지도했다.
한의 효문제 14년이었다. 흉노는 기병 14만을 거느리고 조나(朝那), 소관(蕭關) 쪽으로 침입했다. 북지군 도위 앙을 죽이고 가축과 백성들을 약탈해 갔다. 드디어 팽양(彭陽:감숙성 鎭原縣 동쪽)까지 쳐들어 와 기습병으로 회중궁(回中宮:섬서성 鳳翔縣 남쪽)을 불태운 뒤 옹(雍)의 감천궁(甘泉宮)에 이르렀다. 효문제는 중위 주사(周舍)와 낭중령 장무(張武)를 장군으로 삼아 전차 1천대 기병 10만을 동원해 장안 근방에 포진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 창후 노경(盧卿)을 상군장군에 임명하고 영후 위수를 북지장군에 임명했다. 융려후 주조를 농서장군에, 동양후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에 임명하였으며, 성후 동혁(董赤)을 전(前)장군에 임명하는 등 전차와 기병을 대대적으로 동원시켜 흉노로 출격케 했다. 그런데 선우는 국경 요새선 안에서 한 달 가량 머물더니 슬그머니 물러가 버렸다. 한군은 요새선을 돌파해 부지런히 추격했으나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적에게 손해를 주지는 못했다. 흉노는 날마다 교만하게 굴었다. 해마다 변경지대를 침범해 백성들과 가축들을 살해, 약탈해 갔다. 운중군과 요동군이 가장 심했으며, 대군(代郡)같은 데서는 만 명 이상이 피해가 있었다. 한나라로서는 근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흉노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우도 또한 당호(當戶)를 시켜 사과해 왔으며 다시 화친을 문제삼게 되었다. 효문제 후원(後元) 2년이었다. 사신을 시켜 흉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하노니 그동안 무사한가. 당호인 저거(且居:且渠) 조거난(雕渠難)과 낭중 한요(韓遼)를 통해 짐에게 보낸 말 두 필은 삼가 잘 받았다. 그런데 우리 선제(先帝:漢의 高祖)의 조칙에 '장성(長城) 이북 궁술의 나라는 선우에게서 명령을 받으며, 의관(衣冠)을 갖춘 장성 안의 국가는 짐이 다스린다. 만백성이 밭 갈고 베 짜며 사냥하고 입고 먹게 하고, 아비와 자식이 떨어짐이 없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편안하게 하여 모두에게 포악한 일이 없게 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사악한 백성이 탐욕스럽게도 이익에 눈이 어두워 나아가 빼앗고 의리를 배반하고 약속을 어기고, 만백성의 생명은 생각지 않고 양국 군주의 친선을 이간질시켰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일로 취급하고 싶다. 귀서(貴書)에도 '양국은 이미 화친하고 쌍방의 군주가 기꺼이 전투를 중지하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고 대대로 번영과 화락을 누리면서 화합해 재출발하자'고 했으니, 짐도 이것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성인(聖人)이란 날마다 새롭게 옛 것을 고쳐서 보다 나은 정치를 시행하여 노인은 안식할 수 있도록 하고 어린 것들은 잘 자랄 수 있도록 하고 백성들은 각자가 신명(身命)을 보존하여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한다. 짐은 선우와 함께 이 길을 따라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이것을 무궁히 시행해 간다면 천하에서 행복하다고 안할 사람이 없다. 한과 흉노는 이웃하고 있는 대등한 국가이다. 흉노는 북쪽 땅에 위치해 추우니만큼 만물을 조락(凋落)시키는 냉기가 일찍 내습한다. 그래서 관리에게 명령해 해마다 선우에게 일정량의 차조, 누룩, 황금, 견포, 면포 기타를 보내기로 한다. 지금 천하는 크게 태평해 만백성은 화락하고 있다. 짐과 선우는 만백성의 부모이다. 짐이 지난 일을 회상해 보건대 모두가 모신(謀臣)의 계략이 잘못된 사소한 사고다. 모두가 형제국으로서의 친목을 이간시킬 만한 것이 못 된다. 짐이 듣기로는 하늘은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덮지 않고 땅도 어느 한쪽만을 치우치게 싣지 않는다고 한다. 짐과 선우는 사소한 지나간 사고는 흘려보내고 함께 대도(大道)를 걸으며 구악(舊惡)을 타파하여 장구한 대책을 세워서 양국 백성으로 하여금 한 집안의 식구처럼 되도록 해야 한다. 또 수많은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밑으로는 물고기나 자라에 미치고 위로는 나는 새에 이르기까지, 발로 걸어다니는 것과 입으로 숨쉬는 것과 꿈틀거리는 미물에까지 안전하고 이익을 얻게 하여 위태로움을 피하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싶다. 오는 자를 막지 않는 게 천도라 한다. 다 함께 지난 일을 잊자. 짐은 흉노로 도망친 한의 백성을 용서하겠다. 선우도 장니(章尼:한에 항복한 흉노인)를 불문에 붙이기 바란다. 짐이 듣건대 옛날의 제왕은 약속은 분명히 하고 식언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우가 화친에 유념한다면 천하는 태평할 것이다. 화친한 뒤에는 한에서 먼저 약속을 어기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우는 이 점 깊이 살펴주기 바란다.
선우는 화친을 약속했다. 그래서 효문제는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흉노의 대선우가 짐에게 편지를 보내와 화친을 제안했고 그래서 화친은 기왕에 결정되었소. 흉노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인구를 더해주는 것도 영토를 넓히는 것도 아니니 모두 흉노로 돌려보내오. 이제부터는 흉노가 요새선을 넘어 침입하지 않을 것이니 한에서도 요새선에서 나가지 않도록 경고하오. 이 규약을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오. 이렇게 하면 오래도록 화친할 수가 있을 것이고 후일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니, 서로 편리할 것이오. 짐은 이 일을 이미 재기한 것이니 천하에 포고하여 알리도록 하오." 그로부터 4년 뒤에 노상계육선우가 죽고 그의 아들 군신(軍臣)이 서서 선우가 되었다. 군신선우가 즉위하자 효문제는 다시 흉노와의 화친을 확인했다. 그런데 중항열이 새 선우를 꼬드겼다. 그래서 군신선우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화친을 무시하고 흉노는 상군과 운중군으로 대거 침입했다. 그들은 각각 3만 기(騎)씩으로 극심한 살해와 약탈을 자행하고는 물러갔다. 한에서도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북지군에다 세 장군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대군(代軍)에는 구주산에 주둔시키고 조(趙)에는 비로(飛狐:河北省 常山關)의 입구에 주둔시키고 변경지대에도 역시 수비를 견고히 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리고 세 장군 주아부(周亞夫), 서려, 유례(劉禮) 등을 장안 서쪽의 세류(細柳)와 위수(渭水) 북쪽의 극문(棘門), 패상(覇上:둘 다 狹西省) 등에 포진시켜 흉노에 대비케 했다. 그러나 흉노의 기병이 대군 구주산 변두리를 침입해도 적의 내습을 알리는 봉화가 감천(甘泉:狹西省)에서 장안까지 전달되려면 수개월이 걸리는 어려움이 있었다. 한군이 연락을 받고 변경에 도달하면 흉노는 벌써 국경 요새선에서 멀리 물러가 버린 후가 되었다. 그래서 한군은 하릴없이 철수하곤 했다. 그 후 1년 남짓 지나 효문제가 붕어하고 효경제가 즉위했다. 그런데 조왕(趙王) 수(遂)가 흉노로 가만히 사람을 보내 오, 초 7국의 반란을 틈타 침입해 오도록 모반했다. 그러나 한군이 조나라를 포위해 격파해 버렸으므로 흉노도 침략을 포기해 버렸다. 이후 효경제는 흉노와 다시 화친했다. 본시의 협약대로 관소에서 교역하고, 흉노에 물자를 보내주고, 한나라 공주를 보냈다. 효경제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변경에서 비록 소규모의 흉노 침입은 있었으나 대규모 침입은 없었다. 효무제가 즉위하자 흉노와 화친의 맹약을 확실히 하고 또 그들을 후대하여 달랬다. 관시(關市)에서 교역하도록 했고 물자를 풍부하게 보내 주었다. 그렇게 되니 흉노에게는 선우 이하 모두가 한나라와 친근해져서 장성 근방까지 왕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나라가 먼저 법금(法禁)을 어기면서 계략을 썼다. 마읍성(馬邑城) 근처에 사는 섭일 노인을 시켜 요새선을 넘어 교역하도록 해서 우선 흉노와 교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섭일노인은 마읍성을 파는 척하고 선우를 유인했다. 선우는 마읍의 재물이 탐나 섭일의 계략에 솔깃해졌다. 그래서 10만 기를 이끌고 무주현(武州縣:山西省 雁門縣)의 요새로 돌입했다. 한에서는 마읍 근방에 30만 대병력을 매복시켜두고 있었다. 어사대부 한안국이 호군(護軍)이 되어 네 장군을 독려하며 흉노를 일망타진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선우는 이미 요새에 돌입해 마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백여 리만 가면 마읍이었다. 그런데 들판에는 가축들이 무진장 널려 있었으나 목자(牧者)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정장(亭障:변경의 요새에 설치한 검문소)을 습격해 보아라." 이때 안문군(雁門郡)의 위사(尉史:변경군의 武官)가 변경의 요새를 순시하다가 침입군을 발견하고는 정장을 수비하던 중 흉노군한테 잡혔다. 선우가 그를 죽일듯이 위협하자 위사는 한군의 모략을 불어 버렸다. 선우는 크게 놀랐다. "어쩐지 처음부터 수상했다!" 선우는 병력을 철수시켜 요새선을 벗어나가면서 말했다. "내가 위사를 잡게 된 것은 천명(天命)이다. 하늘이 그대를 시켜 일러주게 한 것이요." 그래서 위사를 천왕(天王)이라 불렀다.
한편 한군에서는 선우를 치려고 아무리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그들은 슬그머니 철수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렇게 되니 한군에서는 어떤 전과도 거둘 것이 없었다. 특히 한의 장군 왕회(王恢)의 별동대는 대(代)에서 진출해 흉노의 치중대(輜重隊)를 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흉노군이 철수하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그 병력의 대단함을 겁내어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원래 이번의 계략을 세운 것은 왕회였다. 전략 자체가 애초부터 졸렬했을 뿐 아니라 흉노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죄로 왕회를 참형에 처했다. 그로 인해 흉노는 화친을 끊고 걸핏하면 통로에 있는 요새를 공격했고, 한의 변경지대를 수없이 노략질했다. 그런 한편으로 흉노는 관문에서 탐욕스럽게 한의 재물과 교역하기를 즐겼다. 한에서도 또한 관문에서의 교역을 계속함으로써 흉노를 달래려는 정책을 썼다. 마읍의 사건이 있은 지 5년 후 가을에, 한에서는 네 장군에게 각각 1만 기씩을 주어 관시 부근의 흉노를 치게 했다. 상곡군에서 출격한 장군 위청(衛靑)은 용성에서 7백 명의 흉노 수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공손하(公孫賀)는 운중군에서 출격했는데 전과가 없었다. 공손오(公孫敖)는 대군에서 출격했는데 7천 명의 병력을 잃을 정도로 대패했다. 안문군에서 출격한 이광(李廣)은 역시 대패하여 생포까지 당했다가 나중에 도망하여 돌아왔다. 공손오와 이광은 투옥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풀려나와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해 겨울에 흉노는 한의 변경을 부지런히 침입해 왔는데 어양군(漁陽郡)의 피해가 가장 컸다. 그래서 한에서는 장군 한안국을 어양군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케 했다. 그 이듬해 가을에 흉노의 2만 기가 한나라로 침입해 요서군(遼西郡)의 태수를 죽이고 2천여 명을 잡아갔다. 그리고 뒤따라 침입해 어양군의 군사 1천여 명을 죽이면서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은 1천여 기의 병력으로 용전분투하다 전멸할 뻔했으나 때마침 연(燕)에서 구원병이 도착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흉노군은 다시 안문군으로 침입해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그래서 한에서는 장군 위청에게 3만 기를 주어 안문군에서 출격케 하고, 이식(李息)에게는 대군(代郡)에서 출격케 했다. 그때 흉노의 수급과 포로를 수천 명 얻었다. 그 이듬해에 위청이 다시 운중군에서 출격해 서쪽 농서군에 이르러 흉노의 누번왕(樓煩王), 백양왕(白羊王)을 하남(河南)에서 격파하고 한에서는 드디어 하남 땅을 평정해 삭방군(朔方郡:오르도스 지방 남부)을 설치했으며, 또 옛날 진대(秦代)의 장군 몽염이 구축했던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하수(河水)를 방편삼아 방비를 굳건히 했다.
한편 한나라는 상곡군 북방으로 치우쳐 있는 조양현(造陽縣) 땅을 버리듯이 흉노에게 내주었다. 이 해가 원삭(元朔) 2년인데 그 이듬해 겨울에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었다. 군신선우의 아우 좌곡려왕 이치야(伊雉斜)가 자립해 군신선우의 태자 어단(於單)을 격파하고 선우가 되었다. 어단이 도망쳐 한으로 망명해 오자 섭안후(涉安侯)로 봉했으나 수개월이 지나서 죽었다. 이치야선우가 즉위하자 그 해 여름 수만 기를 몰고 대군으로 침입해서 태수 공우(恭友)를 죽이고 1천여 명을 잡아갔다. 그 해 가을에는 안문군으로 침입해 또 1천여 명을 살해, 납치해 갔다. 이듬해에는 다시 대군, 정양군, 상군으로 각각 3만여 기가 쳐들어 와 수천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들은 한나라가 하남 땅을 빼앗고 삭방군에 요새를 구축한 것을 원망해 자주 변경을 침범해 살해, 약탈을 감행했다. 이듬해 봄, 한에서는 위청을 대장군으로 하여 여섯 장군을 합세시켜 10만의 병력으로 삭방군 고궐(高闕)을 치게 했다. 우현왕은 한군이 거기까지는 쳐들어 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로 술에 취해 있었다. 한군은 요새선 밖 6, 7백 리나 쳐나가 한밤중에 우현왕을 포위하자 그는 크게 놀라 몸을 빼어 도주했다. 정예기병들도 흩어져서 도망쳤다. 한군은 우현왕에게 딸려 있는 남녀 1만5천 명과 비소왕(裨小王) 10여 명까지 잡았다. 그 해 가을 흉노는 보복으로 1만 기를 대군에 투입해 도위 주영(朱英)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잡아갔다. 그 이듬해 봄, 한에서는 다시 대장군 위청에게 여섯 장군과 10만여 기의 병력을 주어 정양(定襄)에서 수백 리 이상 출격케 하여 흉노를 쳤다. 그때를 전후하여 수급과 포로로 얻은 것이 1만9천여 명이었으나, 한에서도 두 장군과 3천여 기의 병력을 잃었다. 무장군 건(建:蘇武의 부친)은 탈출할 수 있었고, 전(前)장군 흡후(翕侯) 조신(趙信)은 전세가 불리해 항복하고 말았다. 원래 조신은 흉노의 소왕(少王)이었으나 한나라에 항복하여 봉을 받아 흡후가 된 자였다. 그건 조신이 우장군과 합세해 주력과는 딴 길로 진군하다가 단독으로 선우의 군을 만나 조신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선우는 조신을 사로잡자 자차왕(自次王:單于 다음가는 존중받는王이란 뜻)으로 삼아 자기 누나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한나라 정벌에 대한 모의를 함께 했다. 조신은 선우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더욱 더 북쪽으로 물러나 사막을 넘어서 그 쪽으로 한군을 유인하여 극도로 피로케 만든 뒤 공격하면 쉽게 때려잡을 수가 있습니다. 요새를 접근하게 되면 우리가 당합니다." "좋은 계략이긴 하나 유인하는 방법이 문제겠구먼." 그 이듬해 흉노는 기병 1만으로 상곡군에 침입해 수백 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한에서는 다시 그 이듬해 봄에 보복으로 표기(驃騎)장군 곽거병에게 1만 기를 주어 농서군에서 출격케 하여 연지산(焉支山:감숙성 刪舟山 혹은 大黃山)을 지난 1천여 리 지점에서 흉노를 쳤다. 그때 흉노의 수급과 포로 1만8천여 기를 얻고 휴도왕(休屠王:흉노의 小王)을 격파한 데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황금상(像:金人, 金佛像이나 浮圖 같은 것)까지 손에 넣었다. 그 해 여름 곽거병은 다시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나가 농서군, 북지군에서 2천여 리를 진격해서 흉노를 쳤다. 거연(居延)을 통과하여 기련산(祁連山)을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를 잡은 것이 3만여 명이며 비소왕 이하 70여 명도 사로잡았다. 이때 흉노 쪽에서도 크게 반발해 대군, 안문군을 침입하여 수백 명을 살해, 납치해 갔다. 한에서는 박망후(博望侯) 장건과 이광 장군을 시켜 우북평군에서 진격해 좌현왕을 치게 했다. 그러나 이광은 좌현왕에게 포위를 당해 4천 명의 군사들이 흉노를 1만 명이나 죽이면서 분투해 거의 전멸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장건 군이 도착해 간신히 살아났다. 한군의 손실은 컸다. 공손오는 곽거병과의 약속날짜에 대어오지 못했고 장건 역시 이광과의 약속날짜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두 사람 모두 사형을 해당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해 가을, 선우는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이 서방에 있을 때 부하를 수만 명이나 죽인 책임을 물어 소환해 죽이려 했다. 이에 놀란 두 왕은 한군에 항복할 것을 도모했다. 한에서는 곽거병을 시켜 이들을 영접케 했다. 그런데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그의 군민을 인솔해 와서 한에 항복했다. 4만여 명이었으나 10만이라고 불려졌다. 한에서 이미 혼야왕을 손에 넣자 농서, 북지, 하서(河西) 방면의 흉노 침공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함곡관 동쪽의 빈민들을 흉노에게서 탈취한 하남, 신진중(新秦中:長安 이북에서 朔方 이남의 땅)으로 옮겨 살게 해 이 지역을 채웠으므로 북지군 서쪽의 수비병을 절반으로 줄일 수가 있었다. 그 이듬해 흉노군은 우북평군과 정양군으로 수만 기로 침입해 1천여 명을 살해 혹은 납치해 갔다. 한에서는 전략을 다시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해 계략을 세운 게 틀림없습니다." "조신이 어떤 계략을 세운 것 같소?" "사막 북쪽으로 물러나, 한나라 군사가 그쪽까지는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쪽으로 간다?" 그래서 한에서는 말을 배불리 먹인 뒤 10만 기를 동원했다. 그 대열은 어마어마했다. 양식과 치중(輜重)을 실은 말을 제외하고도 사물(私物)을 싣고 따르는 말만 14만 필이었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군사를 양분해 인솔했다. 위청은 정양에서 출격하고 곽거병은 대군에서 출격해 사막을 건너 흉노를 치기로 약속했다. 흉노의 선우가 이 소식을 들었다. 선우는 그의 치중을 멀리 대피시킨 뒤 정예군을 인솔하고 사막 북쪽에서 대기하다가 위청과 접전했다. 어떤 날 해질 무렵에 때마침 큰 바람이 불었다. 한군은 그 틈을 타서 좌우익 군사를 놓아 선우를 포위했다. 선우는 한군을 당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수백 명의 친위군만 거느린 채 포위를 돌파한 뒤 북서쪽으로 도망쳤다. 한군은 어두워서 그를 추격하지는 못하고 대신 흉노의 수급과 포로를 잡은 게 1만9천이었다. 한군은 계속 북방의 전안산(외몽고의 山名) 조신의 성채까지 쳐들어 갔다가 너무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되어 곧 되돌아나왔다. 선우가 급히 도망칠 때 그의 병사들은 한군과 뒤섞여서 선우를 뒤따랐으므로, 선우 역시 자신의 군대를 장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흉노의 우곡려왕은 선우가 난전 중에 죽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내가 선우다!" 우곡려왕이 선우가 되었다. 그랬는데 진짜 선우가 죽지 않고 살아 나왔다. 그래서 우곡려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한편 곽거병은 대군에서 출격해 2천여 리를 밀고나가 흉노의 좌현왕과 접전했다. 이때 한군은 흉노를 대패시켜 좌현왕과 장군들을 모두 도주케 했으며 수급과 포로를 얻은 것만 7만이었다. 곽거병은 낭거서산(狼居胥山:綏遠省 五原縣 北西의 黃河 北岸의 狼山)에서 봉제(封祭: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올리고 고연산(姑衍山:고비사막 북쪽 山)에서 선제(禪祭:땅을 쓸어 땅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곽거병의 군은 한해(翰海:바이칼湖)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왔는데, 그로부터는 흉노는 멀리 달아나 사막 남쪽에서 선우의 왕정(王庭)을 볼 수 없었다. 한에서는 적극책을 써 황하 북쪽 삭방군 서쪽 영거(令居:감숙성 平番縣의 北西)까지 진출해 곳곳에 관개용 물길을 내고 전지(田地)의 관리관을 두었으며 5, 6만의 관리, 병사를 배치해 흉노 땅을 점차로 잠식해서는 흉노의 북쪽 땅과 맞닿게 되었다. 결국 한나라의 두 장군이 대거 출격해 선우를 포위하여 8, 9만이나 죽이거나 포로로 했지만 한나라 역시 수만이 죽고, 말도 10만 필이나 죽는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되니 한에서는 말이 없어 흉노를 더 추격할 수는 없었다. 흉노도 더 견딜 수가 없었는지 조신의 계략을 채택해 화친을 청해 왔다. 황제는 흉노의 제안을 조정 논의에 붙였다. 혹자는 화친을 찬성했고 혹자는 끝끝내 밀어부쳐 흉노를 신하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사(長史:승상의 속관) 임창(任敞)이 나섰다. "흉노는 패전한 지가 얼마 안돼 지금 몹시 곤궁합니다. 이때 밀어부쳐 흉노를 속국으로 삼아 봄, 가을에 변경으로 오게 하여 입조의 예를 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는 임창을 흉노로 사신 보냈다. 선우는 임창의 제안을 듣고 크게 노했다. 전날 한으로 귀순해간 흉노의 사신이 있었으므로 흉노도 이에 대항하여 임창을 억류해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에서는 다시 군사를 징집하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표기장군 곽거병이 병사했으므로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한에서는 흉노를 치지 못했다. 이치사선우가 즉위한 지 13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오유(烏維)가 선우가 되었다. 그 해가 한의 원정(元鼎) 3년이었다. 오유선우가 섰을 때 한의 황제는 처음으로 수도에서 나와 군현을 순시했다. 그 이후로 한은 남쪽의 동월(東越)과 남월(南越)을 치느라고 흉노를 징벌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의 변경으로 흉노가 침입해 오지는 않았다.
오유선우가 선 지 3년 만에 한나라에서는 이미 남월을 멸했으므로 본시 태복(太僕)이었던 공손하을 시켜 흉노를 치게 했다. 1만5천 기를 이끌고 구원(九原)에서 2천여 리나 진격해 나가 부저정(외몽고의 井名)까지 뒤졌지만 흉노라곤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또한 본래의 종표후(從驃侯) 조파노(趙破奴)에게 1만여 기를 주어 영거(令居)까지 수천 리를 뒤졌지만 역시 한명의 흉노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무렵 황제는 변경지대를 순시해 삭방군에 이르러서는 18만 기의 군사를 검열해 절도 있고 당당한 무위(武威)를 과시했다. 그런 후 곽길(郭吉)을 시켜 선우에게 한나라 위세를 알리게 했다. 흉노의 주객(主客:使節의 응대를 주관하는 官)이 곽길에게 사자로 온 취지를 묻자 곽길은 예의바른 겸손한 말로 대꾸했다. "선우를 뵙고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곽길은 선우 앞으로 인도되었다. "남월왕의 목은 이미 한나라 수도의 북문에 걸려 있습니다. 지금 선우께서는 가능하다면 나아가 한나라와 한 번 싸워 보십시오. 천자께서 몸소 병사를 거느려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선우께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시면 남쪽을 향해 한나라의 신하가 되십시오. 어찌하여 사막의 북쪽, 춥고 괴로운 물도 초원도 없는 땅으로 도망쳐 부질없이 숨어 살고 계십니까.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뜻밖에도 선우는 몹시 노했다. 곽길을 만나게 한 주객을 즉시 목베어 버렸다. 그런 후 곽길을 억류해 돌려보내는 대신 북해(北海:바이칼湖)로 내쳐 버렸다. 선우는 그러면서도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대신 병사와 말을 쉬게 하고 승마와 활쏘기를 수렵을 통해 익히게 하면서 한나라로 자주 사신을 보내 좋고 교묘한 말로 화친을 청했다. 한에서는 왕오(王烏) 등을 흉노로 보내 그 쪽의 형편을 살피게 했다. 그런데 흉노의 법으로는 한나라 사신이라도 절(節:使者라는 證明) 대신 얼굴에 먹물을 들이지[경] 않으면 선우의 막사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왕오는 북지군 출신으로 흉노의 풍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절을 버리고 과감하게 먹물을 얼굴에 들인 뒤 선우의 막사로 들어갔다. 선우는 왕오에게 호의를 가진 듯했다. 그의 의견을 듣는 척하면서 태자를 한으로 볼모삼아 보내 화친하겠다고 청했다. 그래서 한에서는 양신(楊信)을 흉노로 사신가게 했다.
이 무렵 한에서는 동쪽으로 예맥(穢貊), 조선을 정복해 군(郡)으로 삼고 서쪽으로는 주천군(酒泉郡:감숙성)을 설치해 흉노와 강족(羌族)과의 통로를 차단했다. 더구나 서쪽으로는 월지(月氏), 대하(大夏:박트리아)와 우호하고 한실(漢室)의 공주를 오손왕(烏孫王)에게 시집보내 흉노를 지원하던 서쪽 여러 나라를 떼어 놓았다. 또 북쪽으로도 경지 면적을 더욱 확장해 현뢰(烏孫의 북쪽)까지 나가서 요새를 구축했다. 그래도 흉노는 끝내 한 마디의 항의도 없었다. 이 해에 흡후 조신이 죽었다. 한나라 집권자들은 흉노가 이미 쇠약해져 신하로서 따르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양신은 강직해 굽힐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사신의 절을 버리지 않았다. 선우는 그가 그런 고집불통인 데다 고위직 관리도 아니어서 시답잖게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선우가 막사 밖에다 자리를 마련해 양신을 입견했다. 양신이 설득했다. "진정으로 한나라와 화친하기를 원하신다면 선우의 태자를 한의 볼모로 보내십시오." 그러나 선우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본시의 약속과는 다르오. 본래 한에서는 언제나 공주를 보내며 견포, 면포, 식품 등을 보내 화친하지 않았겠소. 그래서 흉노도 한의 변경을 시끄럽게 하지 않았잖은가 말이오. 그런데 이번에는 옛 약속과는 달리 나의 태자를 볼모로 달라 하니 이건 얘기가 틀리오." 흉노의 습관으로는 한나라 사자가 중귀인(中貴人:궁중에서 총애받는 宦官)이 아닌 것을 보면 항상 의심했다. 학자 중에서도 장로(長老)인 경우에는 설득하러 온 줄 알고 그의 변설을 꺾으려 했고, 젊은이인 경우에는 암살하러 왔다 하여 그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또한 한나라 사자가 흉노로 들어올 때면 흉노 역시 사자를 한으로 즉시 보내놓고 한에서 흉노의 사자를 억류하면 흉노에서도 그 보복조치로 한의 사자를 억류하는 수단을 강구해 두고 있었다. 양신이 하릴없이 귀국하자 이번에는 한에서 왕오를 사자로 다시 보냈다. 선우는 교묘한 말로 왕오의 비위를 맞추어 한나라 재물을 가급적 많이 얻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내가 한으로 직접 들어가 천자를 뵙고 형제국이 되기를 면전에서 약속하고 싶소." 왕오가 한으로 귀국해 그렇게 보고하자 한에서는 선우를 위해 장안에다 대저택을 건축했다. 그런데도 선우는 다시 트집을 잡았다. "한나라에서 고위층을 일단 사자로 보내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성의있는 답변을 하지 않겠소." 그러면서 흉노에서는 고위층을 사자로 한에 보냈는데 그만 그가 병이 걸려 죽고 말았다. 한으로서는 사자를 완쾌시키려 온 정성을 다했지만 별 수 없었다. 한에서는 노충국(路充國)에게 2천 석 고관이 차는 인수(印綏)를 주어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수천 금의 비용을 들여 정중히 장례를 치룬 유해를 운구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흉노의 사신을 죽인 것이라 트집잡아 노충국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한으로서는 선우가 태자를 볼모로 보내겠다든가 자신이 직접 한으로 오겠다든가 하는 약속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구나 한의 변경을 자주 침입하는 것을 보고서는 그 사실을 더욱 확인했다. 한에서는 곽창(郭昌)을 발호장군(拔胡將軍)으로 삼고 착야후 조파노(趙破奴)를 삭방군의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 만에 오유선우가 죽었다. 즉위한 지 10년 만이었으며 그 아들 오사려(烏師廬)가 서서 선우가 되었다. 오사려는 나이가 어려 아선우(兒單于)라 불렀다. 이 해가 한의 원봉(元封) 6년이었다. 그로부터 선우는 병력을 북서쪽으로 증강해 좌익의 군사는 운중군에 맞서고 우익의 군사는 주천군, 돈황군(燉煌郡:감숙성)에 맞서게 했다. 아선우가 즉위하자 한에서는 흉노를 이간시키려고 두 사람의 사신을 보내 하나는 선우를 조문(弔問)케 하고 또 하나는 우현왕을 조문케 했다. 그러나 두 사신 모두 붙잡혀 아선우한테로 가서 억류되었다. 한의 사신으로 억류된 자는 전후해서 10여 명이었으며 한에서도 흉노의 사신이 오면 역시 역류해 비등한 수효로 만들었다. 이 해에 한에서는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시켜 서쪽으로 대원(大宛: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을 정벌케 하고 인우장군 공손오를 시켜 수항성(受降城:綏遠省의 九原 부근)을 구축케 했다. 그 해 흉노 땅에서는 큰 눈이 내려 많은 가축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아선우는 나이가 젊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흉노인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려고 몰래 한나라로 사람을 보냈다.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너무 멀어서 걱정이랍니다. 만약 한군이 맞아 나와서 보호해 준다면 흉노에서 곧 반란을 일으키겠답니다." 한에서는 옳게 생각하고 수항성을 구축해 흉노의 좌대도위를 맞을 준비를 했으나 여전히 거리는 멀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 착야후 조파노에게 2만 기를 주어 삭방군 북서쪽 2천여 리까지 진출시켜 준계산(浚稽山:외몽고 喀爾喀 경계)에서 좌대도위를 맞아 오게 했다. 조파노는 약속한 날짜에 약속한 지점으로 갔으나 좌대도위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곧 철군해 가면서 흉노와 접전해 수천 명의 수급과 포로를 얻었다. 수항성까지 돌아가려면 4백 리쯤 남아 있었다. 그때 흉노군 8만 기가 조파노군을 포위했다. 그새 좌대도위는 모반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되었고 아선우는 즉시 군사를 동원해 조파노를 공격했던 것이다. 멋모르는 조파노는 밤중에 몸소 물을 구하러 나섰다가 숨어 있던 흉노군에게 사로잡혔다. 흉노는 즉시 한군에게 공격을 가했다. 조파노의 진중에서는 곽종(郭縱)이 호군(護軍:총지휘관)이었고 유왕(維王)이 거수(渠帥:上將軍인 듯)였는데, 이들은 몹시 당항했다. "장군을 잃은 죄는 사형이오. 교위(校尉)들까지도 주살될 것이 두려워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구료." 그렇게 되어 전군이 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아선우는 몹시 기뻐했다. 즉시 기습병을 보내어 수항성까지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흉노는 변경지대를 노략질하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선우 자신이 수항성을 공격하려 나섰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병들어 죽었다. 아선우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은 것이다.
그의 아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선우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아선우의 숙부 즉 오유선우의 아우 우현왕 구리호를 선우로 삼았다. 한의 태초(太初) 3년이었다. 구리호선우가 즉위하자 한에서는 광록대부(光祿大夫:官名) 서자위(徐自爲)를 시켜 오원군(五原郡:綏遠省)의 요새를 벗어난 수백 리 지점에서 천여 리에 걸쳐 성채와 망루를 쌓게 했다. 그 성채는 여구산(흉노의 땅)까지 연결되었다. 그리고 유격장군(遊擊將軍) 한열(韓說)과 장평후(長平侯) 위강(衛伉:衛靑의 아들)을 근방에 주둔시키고,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을 시켜 거연택(居延澤:寧夏省) 가에도 요새를 구축케 했다. 그 해 가을 흉노군은 정양군, 운중군으로 대거 침입해 수천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으며, 2천 석 고관 몇 명의 군사를 격파한 뒤 돌아가는 중에 서자위가 구축한 성채와 망루까지 파괴하고 돌아갔다. 또 흉노의 우현왕이 주천군, 장액군으로 침입해 수천 인을 살해 또는 납치했으나 때마침 한나라 장수 임문(任文)이 출격해 구출함으로써 흉노는 약탈했던 것을 모두 잃고 돌아갔다. 이 해에 이사장군 이광리가 대원을 격파해 그 왕을 목베고 돌아왔다. 흉노가 그의 귀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미치지 못했다. 그 해 겨울 흉노는 수항성을 공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선우가 병사했다. 구리호선우는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은 것이다. 흉노는 이에 그의 아우 좌대도위 저저후를 세워 선우로 삼았다. 한나라는 대원을 주벌한 뒤로 그 위세가 외국에도 떨쳐졌다. 그래서 황제는 차제에 흉노를 곤궁케 하려고 마음먹어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고조황제는 짐에게 평성(平城)의 원한을 남겼다. 또 고후(高后) 때는 선우가 매우 무도한 편지를 보내왔다. 옛날 제(齊)의 양공(襄公)은 구세(九世:原文에는 百世로 돼 있으나 <한서>에 따라 九世로 번역했음)의 원수를 갚으니 공자가 저술한 <춘추>에서도 이것을 칭찬했다.
이 해가 태초 4년이었다.
[이하의 것은 후세 인이 가필한 것이라 한다.] 저저후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 사신 가운데 흉노에 항복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돌려보내 주었다. 그래서 노충국 등도 귀국할 수 있었다. 선우가 즉위한 당초에는 한나라의 침공이 두려워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애다. 어떻게 내가 감히 한의 천자와 대등하기를 바라겠는가. 한나라 천자는 내 아버지 같으신 어른이다." 한나라에서는 중랑장 소무(蘇武)를 파견해 선우에게 후한 예물을 보냈다. 그러나 선우가 더욱 오만무례해졌으므로 한의 기대에는 어긋났다. 이듬해에는 조파노가 흉노에서 도망쳐 한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한의 이사장군 이광리가 3만 기를 인솔해 주천군에서 진출하여 천산(天山)에서 우현왕을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1만을 얻었으나 돌아오는 도중 흉노에게 완전 포위되어 전사자는 10중 6, 7이나 되었다. 한에서는 인우장군 공손오가 서하군(西河郡)에서 출격해 강노도위 노박덕과 탁야산(외몽고의 西部, 일명 탁사)에서 합류했으나 전과는 없었다. 또 기도위(騎都尉) 이능(李陵)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거연 북쪽 1천여 리까지 진격시켜 흉노와 교전케 했으나 흉노병 1만여 명을 살상하고도 병력과 식량이 다해 이능은 흉노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의 병사는 겨우 4백 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선우는 이능을 존중해 그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 후 2년이 지나서 다시 이광리를 시켜 6만 기와 보병 10만으로 삭방군에서 출격케 했고 노박덕이 거느린 1만여 군사와 합류케 했다. 유격장군 한열은 보병과 기병 합쳐 3만을 거느리고 오원에서 출격케 했고 인우장군 공손오는 1만 기와 보병 3만으로 안문에서 출격케 했다. 이 정보를 들은 흉노는 처자와 재산을 모두 여오수(余吾水:외몽고의 翁金河)의 북쪽으로 대피시킨 뒤, 선우가 직접 10만 기를 이끌고 여오수 남쪽에서 이광리와 접전했다. 이광리는 선우와 10여 일을 싸워 지친데다 자신의 가족들이 무고(巫蠱)의 난(亂:漢武帝 征和 2년에 方士와 무당들이 宮人들을 고혹시켜 木人을 궁중에 묻고 제사하게 했는데, 그때 우연히 황제가 병에 걸렸다. 戾太子와 사이가 나쁜 강충이 '황제의 병은 무당들이 현혹 때문이다'고 말해, 궁중의 목인들을 파내자 태자궁에 가장 많았다. 태자가 두려워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패하자 자살했다)에 연루되어 몰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흉노에 투항했다. 유격대장 한열도 전과가 없었고 인우장군 공손오도 좌현왕과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 철수하고 말았다. 이 해에는 한나라 군사로 출정해 흉노와 싸운 군공(軍功)을 논할 여지조차 없는 해였다. 따라서 논공할 만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조칙을 내려 태의령(太醫令) 수단(隨但)을 체포했다. 그가 이사장군 이광리의 가족이 몰살되었다고 지껄여 이광리로 하여금 흉노로 투항케 했기 때문이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공자가 저술한 <춘추>에 보면 은공(隱公)과 환공(桓公) 사이의 일들은 명료하게 서술되었으나 자신과 동시대인 정공(定公)와 애공(哀公) 사이의 일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당세에 너무나 가까운 일을 기록하는 일이라 비판을 꺼려한 때문인 듯도 하다. 속인들의 흉노에 관한 의견은 모두가 일시적인 권세를 얻기 위해 제 의견이 채택되도록 아첨하고 있다. 그래서 편견에 사로잡힌 그들의 의견은 피아(彼我)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결함을 항상 지니고 있다. 장수들은 중국이 광대하다는 것만 믿고 기고만장했으며, 황제는 그들의 의견에 따라서만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그래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요(堯)임금은 현명한 군주였지만 혼자서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우(禹)임금을 얻고서야 비로소 중국 전토가 안녕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룩한 천자의 위업을 일으키려면 오직 훌륭한 인물을 골라 장군이나 대신으로 임명하는 데에 달렸을 뿐이다. 선택해 일을 맡기고 가려서 일을 맡기는 데 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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