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4부 근세 철학 이야기
인식론의 창시자 로크
로크의 <인간 오성론>은 당시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적 저술이다. 로크는 인식론을 인식 심리학의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다.
17세기를 일컬어 인식론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그 시작은 로크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들은 누구나 대상에 대해서 확실한 인식(앎 또는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 능력이 무엇이며,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어떤 인식이 타당한지 그리고 인식의 한계는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에 관해서 그와 같은 탐구의 문을 활짝 연 사람이 바로 로크이다. 존 로크(1632~1704)는 오컴의 유명론과 데카르트의 실체론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학 분야 이외에 국민 경제학, 교육학, 자연 종교, 정치적 자유주의 등의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로크가 루소와 볼테르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로크는 자연과학, 의학, 철학을 공부했고 샤프츠베리 백작이 네덜란드로 망명길에 올랐을 때 함께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고, 뉴턴, 보일 등과 교제했으며, 말년에는 시골 마을 오프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로크의 <인간 오성론>은 당시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적 저술이다. 로크는 인식론을 인식 심리학의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다. 로크는 모든 지식과 관념은 경험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경험에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오성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고수한다.
인간의 영혼에 본래부터 관념은 과연 있는가 로크의 경험론적 인식론은 우선 합리론자들의 본유관념을 비판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과 같은 합리론자들은 특정한 관념들이 인간의 영혼에 본래부터 불편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로크는 이에 반대하여, 앎의 어떤 원리나 관념도 영혼에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부터 생긴다고 말한다. 로크에 따르면, 합리론자들은 오성(계산하고 분별하는 능력)의 이론적 원칙과 도덕의 실천 원칙이 본유적이라고 주장한다. 합리론자들은 동일률(A는 A이다)이나 모순율(A는 not A와 같지 않다)과 같은 논리학의 원칙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참다운 오성의 이론적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크는, 원시인이나 어린아이 또는 바보는 이 원칙들을 모르며, 따라서 그것들은 본래부터(본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경험에 의해서 획득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인식 능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지만 인식(지식이나 앎)은 나중에 획득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도덕의 실천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로크에 의하면 행복에 대한 요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도덕 규칙이란 인간이 경험과 교육을 통해서 획득한 것이다. 로크는 유명론의 입장에서 신 개념도 본래부터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연은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목적들의 궁극적인 것은 신이라고 생각할 때 신 개념에 도달하므로, 신 개념은 영혼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로크는 주장한다.
인식의 원천은 감각과 반성이다 로크에 따르면 마음에는 어떤 본유관념도 없기 때문에 영혼은 원래 백지와도 같다. 이 백지에 경험이 관념을 새겨 넣게 된다. 로크는 경험을 외적 경험(감각)과 내적 경험(반성)으로 구분한다. 우리는 감각에 의해서 외부 대상의 경험을 의식에 새겨 넣는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반성에 의해서 영혼의 상태나 활동, 곧 사고와 의욕 및 느낌 등을 영혼에 새겨 넣어 관념을 만든다. 로크는 인식의 원천으로 감각과 반성을 말하면서 인간의 성장 과정을 놓고 볼 때 감각은 반성에 선행한다고 본다. 로크는 감각과 반성에 의해서 생기는 관념을 일컬어 단순 관념이라고 말한다. 단순 관념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형성되는가에 따라서 네 가지로 나뉜다. 외적 감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단순 관념 : 색깔, 소리, 맛, 냄새 등 여러 가지 감각들에 의해서 한꺼번에 매개되는 단순 관념 : 형태, 운동, 연장(길이, 넓이, 부피 등) 영혼이 내적 경험에 의해 의식하는 단순 관념 : 느낌, 사유, 지각 등 감각과 반성에 의해서 생기는 단순 관념 : 쾌, 불쾌, 힘, 단위, 시간 계열, 존재 등 정신이 단순 관념들을 결합함으로써 복합 관념들이 생긴다. 로크에 의하면 복합 관념에는 실체, 양태, 관계가 있다. 실체 : 개나 소 등 자연 대상을 다른 것이 아니고 개나 소에게 하는 것, 실체의 성질은 알 수 있어도 실체 자체는 알 수 없다. 양태 : 홀로 독립해서 있을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있는 것으로서, 단순 관념으로부터 도출된 변형들이 양태이다. 크기, 거리, 평면 등 공간의 양태와 연속, 계기 등 시간의 양태, 그리고 기억이나 회상 등 사유의 양태가 있다. 관계 : 우리는 현상들을 결합함으로써 현상들을 비교하고 거기에서 원인과 결과, 동일성과 차이, 시간 관계, 장소 관계 등의 연관성을 이끌어 낸다. 로크는 복합 관념의 형성에 있어서 기억을 중시한다. 정신은 사물들을 비교하고 구분하며 또한 결합하고 추상한다. 복합 관념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과 추상이다.
올바른 인식과 인식의 한계 관념이 올바른가라는 물음은 관념이 타당한가라는 물음과 같다. '장미꽃'이라는 관념은 그것에 일치하는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자유'라든가 '사랑'이라는 관념은 내적 경험, 곧 반성을 기초로 삼으므로 그에 일치하는 대상을 찾기 힘들다. '실체, 양태, 관계' 등의 복합 관념은 정신 활동에 의해서 생긴 것이므로 그것에 일치하는 외적 대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에 의해서 '장미꽃' 관념에 일치하는 대상을 안다고 할지라도 감각은 '그 대상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각이 받아들이는 것만을 아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앎과 '대상 자체'는 서로 떨어져 있고, 우리는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은 알아도 '대상 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로크는 이처럼 인식의 한계를 정하고 나서,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성질에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이 있다고 한다. 사물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1성질은 우리가 아는 성질로, 연장(길이, 면적, 부피 등), 운동, 정지 등을 말한다. 제2성질은 주로 감각 기관의 기능과 조직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성질로, 소리, 색깔, 냄새 등을 말한다. 제1성질은 사물의 변치 않는 성질이므로 사물 자체를 가리킬 수 있지만, 제2성질은 사물의 부분적 힘만을 가리킨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된장 냄새가 구수하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된장 냄새처럼 고약한 냄새가 없다고 각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한다. 이처럼 제2성질은 사물보다 오히려 인간 주관에 더 많이 의존한다. 그렇지만 로크는 참다운 인식은 오직 직관과 증명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로크가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성립한다고 말한 것과 모순된다. 로크는 경험적 지식, 합리적 지식 그리고 직관적 지식의 세 가지 지식을 말하는 셈이 된다. 이성에 의한 합리적 지식은 결국 경험에서 나오지만 로크가 말하는 직관은 대상을 직접 아는 능력이다.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제한된 주관적 인식만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직관에 의해서 참다운 지식을 얻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로크의 주장은 한편으로 경험론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합리론을 주장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로크 다음에 등장한 버클리는 철저한 경험론을 바탕으로 마음의 외부에는 아무런 대상도 참답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연 상태는 전쟁이 아니라 조화이다 로크는 홉스와 정반대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각자가 자신의 권리와 재산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상태로 본다. 때문에, 로크에 있어서 자연 상태는 전쟁이 아니라 조화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해서 성악설을, 맹자는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보아 성선설을 주장했다. 홉스의 자연 상태가 성악설에 가깝다면 로크의 자연 상태는 성선설에 가깝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 자연법은 어느 누구도 타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자연법을 침해하거나 침략자를 제재하거나 불의를 응징할 권리를 갖는다. 로크의 자연 상태는 홉스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평화, 선한 의지 그리고 상호 협력의 상태이다. 인간이 그러한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서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공동 사회와 국가가 성립된다. 홉스가 불행이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국가가 성립한다고 본 반면에, 로크는 평화, 정의, 선한 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국가가 형성된다고 본다. 홉스가 절대 군주제도를 바람직한 국가 체제로 본 반면에, 로크는 만민이 평등한 시민 정부를 가장 바람직한 정부로 본다. 로크는 자연법의 기초가 공공의 선을 지향하는 사회의 보존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공공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 실정법은 입법권을 확립하는 일이다. 법을 실행하는 행정권과 전쟁이나 평화에 관한 연합권은 항상 결합되어 있다. 그렇지만 가장 우선하는 것은 입법권이다. 물론 정부가 있는 한 입법권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시민의 신뢰에 어긋날 경우 백성들은 입법을 제거하거나 고칠 수 있는 가장 높은 권리를 가진다. 로크의 이러한 국가론은 근대 시민사회 성립의 확고한 기틀을 제공했으며,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로크의 인식론은 후에 버클리, 흄 그리고 칸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험 심리학은 영국의 연상 심리학의 기틀이 되었으며 콩디약, 엘베시우스 등 프랑스 감각주의의 기원을 이루었다. 로크의 윤리학은 또 샤프츠베리, 허치슨, 흄, 아담 스미스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의 교육 이론은 루소에게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정치철학은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정치철학이 나을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로크의 사상은 17~18세기의 정치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세기의 계몽 사상에서 그 영향은 절정에 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