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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06호
2012.9.24 (음8.9)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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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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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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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날이 있다. -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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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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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안전성 / 안정성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신문과 TV 뉴스에 ‘안전성/안정성’만큼 자주 등장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전성’과 ‘안정성’은 발음과 모습이 비슷해 헷갈려 쓰기 쉽다.
‘안전성’은 ‘위험이 없거나 안전을 보장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자동차의 안전성을 높이다” “중국산 농산물의 안전성을 검사했다” “건물의 안전성에 큰 결함이 발견됐다” “약품의 안전성을 검사하기 위해 임상시험을 실시한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안정성’은 ‘바뀌어 달라지지 않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직장의 안정성을 보장하다” “금융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와 같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돈을 맡길 때 높은 이자를 주는 은행보다 재무 상태가 건전한 은행을 선택했다면 ‘안전성/안정성’ 중 어떤 것을 고려한 게 될까. 이 경우 ‘안전성’을 고려한 선택이 된다. 주가나 예금 금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일 경우엔 ‘안정성’이 없다고 표현한다.
[우리말바루기] 밤새 / 밤새워
사내는 어스름한 새벽에 잠에서 깼다. 길가 전봇대 밑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으스스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무슨 일 있나? 얼굴이 왜 그래?” “홍대 뒷골목에서 친구와 함께 밤새 술을 마셨어. 택시 탄 뒤론 기억이 없네.” “밤새 마셨다고? 아니면 밤새워 먹었다고?” “왜? 무슨 차이가 있는데?”
“‘밤새’는 ‘밤사이’의 준말이야. ‘밤새’ 술을 마셨다고 하면 초저녁부터 몇 시까지인지, 밤 12시부터 새벽까지인지 알 수가 없잖아. 물론 자세히 밝히고 싶지 않아 ‘밤사이’에 그냥 술을 마셨다고 강변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구먼.” “전봇대 밑에서 잘 정도였다면 ‘밤새워’ 마셨다고 해야 말이 되지. ‘밤새우다’가 ‘잠을 자지 않고 밤을 보내다’란 의미의 타동사니까. ‘밤새도록’ 마셨다고 해도 돼. ‘밤새다’가 ‘밤이 지나 날이 밝아 오다’라는 뜻의 자동사니까.” “일상 대화에서 ‘밤새’를 ‘밤새도록’으로 알아듣지 ‘밤사이’로 해석할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밤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시는 건 현실적으로 좀 어렵잖아.” “말하고 글하곤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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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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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수사학 -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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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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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2.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프
한 문장의 답안지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쯤에, 한 젊은 학생이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종교학 과목의 중요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그날의 시험 문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에 담긴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시술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각자 자신이 이해한 바에 따라 열심히 긴 논술문을 작성하고 있는 동안 그 학생은 혼자서 두 시간이 넘도록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시험 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지만 이 학생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시험 감독이 학생에게로 다가와, 답안지를 걷기 전에 어서 무슨 말인가를 쓰라고 재촉했다. 학생은 마침내 연필을 들어 답안지에 다음과 같은 한 줄의 문장을 썼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이 학생이 바로 훗날 영국 최고 시인이 된 바이런이다.
- 리처드 셀쩌
인생이라는 게임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은 가장하고 있으면서 가장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는 일
우린 우리가 누구인가를 잊어버렸으며,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우린 정말 누구인가?
우릴 지켜보고 있고 이 연극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그 중심.
그 나, 우주를 거울처럼 완벽하게 비추고 있는 무엇보다 강한 그 의식체
그러나 일찍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린 수동적인 인생을 선택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최면에 걸렸다.
처벌이 두려워 또는 사랑의 상처가 두려워 우린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란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마치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가장하게 되었다.
우린 우리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으며, 이런 자기 학대적인 태도 이런 나약함 이런 무기력함에 길들여졌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우주 에너지의 중심이다. 당신의 의지가 곧 당신의 힘이다.
당신이 그런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가장하지 마라. 정말로 그렇게 될 수가 있으니까.
- 버나드 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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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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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4부 근세 철학 이야기
홉스의 자연주의적 세계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표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투쟁'과 '늑대'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은 정서와 이성이다.
토마스 홉스(1588~1679)는 맘즈버리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영국 청년 귀족들의 가정교사로 그리고 동반자로 널리 대륙을 여행했으며, 파리에서는 데카르트, 가상디, 메르센 등과 교제했다. 그는 크롬웰에 반대해 프랑스로 도피했다가 1651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홉스는 국가철학 및 법철학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공리주의적 사회 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근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홉스 또한 과거와 결별하고자 하며, 베이컨처럼 과학과 철학의 실제적 유용성을 강조한다. 그는 철학의 기초가 자연적 오성에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타당한 추리를 사용해서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결과로부터 원인을 도출해 내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 할 일이다. 홉스는 비록 그 자신이 위대한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우리들에게 보편적 지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하학적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기하학적 방법은 사물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들은 철학에 의해서 사태의 결과를 앎으로써 삶을 실천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사물들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물질적이며 기계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홉스는 유물론자이며 기계론자이다. 철학은 결국 물체들에 관해서 탐구하는 물체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합리적으로 구성되는 모든 물체들이다. 홉스는 철학의 탐구 대상을 자연적 물체와 인위적 물체 두 가지로 구분해 고찰한다. 자연 현상의 물질적인 대상들은 자연적 물체에 속하는 반면 사회나 국가와 같은 대상들은 인위적 물체에 해당한다. 홉스는 자연적 물체를 다루는 철학을 일컬어 자연철학이라고 부르고 인위적 대상을 고찰하는 철학을 일컬어 정치철학이라고 말한다. 홉스는 자연철학이나 정치철학 모두에 있어서 철저한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물질의 기본 요소는 원자이고 영혼의 기본 요소는 감각이라고 보고 우리들의 사고의 바탕은 감각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고 하여, 경험론 의 입장을 대변한다.
감각 경험으로부터 지식이 성립된다. 앎의 문제에 관해서 홉스는 감각 경험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본다. 외부의 사물이 인간 주관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감각이 생긴다. 홉스에 의하면 외부 사물과 주관의 감각은 아무런 비슷한 것도 없고 단지 사물이 주관에 부딪쳐서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사유는 단일성, 필연성, 다수성 등의 범주를 가지는데 이 범주들 역시 경험에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앎의 이론은 홉스 이후 로크나 흄의 경험론적 앎의 이론(인식론)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감각 경험이 가장 먼저 이루어지고 이 감각 경험으로부터 지식(인식)이 성립된다는 주장은 경험론적 인식론의 일반적 틀이기 때문이다. 논리학에 있어서 홉스는 중세 말기 월리엄 오컴의 유명론과 보조를 같이한다. 유명론은 "판단이란 명칭들의 결합이며 결합은 곧 계산이다'라는 이론이다. 홉스는 사유를 일컬어 계산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곧 명칭들을 결합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홉스는 엄격한 기계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에 자연 현상과 아울러 인간의 신체 현상도 역학적 자연법칙에 따라서 운동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세 철학에서 주장했던 '의지의 자유'나 합리론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의지의 사유'는 홉스에게 있어서 전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자연 세계의 모든 현상은 역학적 자연법칙에 따르는 운동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감각 경험을 앎의 기초로 보고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입장을 확고히 했으며, 중력이란 지구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주장하여 뉴턴의 만유인력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의 견해에 찬성해 지동설을 옹호한다. 홉스는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입장을 채택해, "인간이란 가장 정교한 시계"와 같은 일종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일반적으로 윤리학, 국가론, 정치철학 등은 사회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 사회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홉스이다.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알고 나면 국가와 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법은 인위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마음이란 물질적 실체의 운동에 불과하다고 본다. 의식도 물질적 운동의 부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존재와 마음을 근거 삼아 국가철학과 도덕철학을 종합적으로 연구 할 수 있다. 홉스는 국가철학 및 도덕철학의 원리 역시 경험으로부터 도출되고 경험에 의해서 보증된다고 본다.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의해서 설명되는 정치철학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묘사되어 있다. 국가는 인공적 인간 내지 유기체로서, 그것은 살아 있는 거대한 기계이다. 홉스는 국가의 영혼, 기억, 손발, 건강, 질병에 해당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영혼에 해당하는 것은 지배자, 국가의 기억에 해당하는 것은 충고이며, 국가의 손발은 관리이다. 국가의 건강은 일치이며 국가의 질병은 불일치이다. 홉스의 국가론은 국가를 거대한 인공적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근거로 하여 성립한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자연적 욕구와 자연적 이성 두 가지를 포함한다. 인간의 본성은 한편으로 인간 자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기주의적 힘을 유지하면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충동을 가지기 때문에 자연적 욕구에 물들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본성은 모든 현상을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통찰하고자 하기 때문에 자연적 이성을 가진다. 자연적 욕구와 자연적 이성 두 가지는 모두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서,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려는 이기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이들 두 가지는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사회 공동체와 국가를 형성한다. 이러한 홉스의 국가관은 그를 영국 경험론에 있어서 공리주의의 선구로 만든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의 삶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말하고,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이다"라는 표현으로 특징짓는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과 충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에 자연적 이기주의가 자연 상태의 인간을 지배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함께 살 경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늑대"인 상태는 각자를 불리하게 하며 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투쟁"과 "늑대"의 상태를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정서와 이성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홉스는 말한다. 정서는 죽음을 대하는 불안이며, 노동을 통해 안락을 획득하려 한다. 이성은 평화 유지의 원칙을 제기하는 능력이다. 정서와 이성에 의해서 전쟁 방어의 수단이 마련되지 못할 경우 각 개인은 자연적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가 포기되고 공동 사회의 결속을 위한 계약이 만들어질 때 국가가 성립한다. 홉스는 민주주의, 귀족주의, 전제주의, 군주제도 등 여러 가지 국가 형태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군주제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각자가 계약에 의해서 개인들의 힘과 권리를 완전히 보호하고 보장해 줄 한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절대 지도자인 군주는 국가에서 모든 개인을 지배하지만, 반대로 각 개인의 권리와 힘을 보호하고 각 개인의 의무를 충실히 실행하도록 할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는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 상태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국가가 성립되면 국가가 시민의 도덕 의무를 정함으로써 덕과 악덕,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권리와 의무 등의 윤리 개념이 성립된다. 이러한 홉스의 국가론(정치철학)은 백성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반대하고 당시 영국의 스튜어트 군주를 옹호하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는 당대의 왕권주의자들에 의해 호평을 받았다. 홉스는 가장 전형적인 근대 정신의 대변자로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하비 등 과학의 창시자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자연과학 사상을 흡수하고 유물론 철학의 입장에서 역학 이론의 결과들을 도출했다. 홉스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철학과 정치철학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홉스의 노력은 로크와 흄을 거치면서 한층 더 섬세하게 가다듬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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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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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4 - 김병총
47. 위기후, 무안후열전(魏其侯, 武安侯列傳)
오, 초 7국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실의 종속(宗屬) 중에서는 오로지 위기후 두영만이 현명하여 선비들을 좋아했으며 선비들도 그를 사모하여 따랐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산동(山東)의 형양에서 반군(反軍)과 항전했다. 그래서 제47에 <위기후, 무안후(武安侯:전분)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위기후 두영은 효문제의 황후(皇后:뒷날의 竇太后)의 종형(從兄)아들이다. 부친의 대까지 대대로 관진현(觀津縣:河北省)에 살고 있었는데 두영은 유달리 빈객들을 좋아했다. 효문제 때에 그는 오나라 재상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했다. 효경제가 즉위하자 두영은 첨사(詹事:皇后나 太子의 執事)에 임명됐다. 양(梁)의 효왕은 효경제의 아우로 모친인 두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양의 효왕이 입조했을 때 황제는 형제로서의 주연을 그에게 베풀었다. 그때에는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황제는 별 생각 없이 아우 양효왕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천하를 아우인 네가 가져라." 태후가 옆에서 듣고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두영은 벌주(罰酒)를 황제에게 올리면서 정색하여 말했다. "천하는 고조의 천하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를 물리는 것이 그때부터 한 나라의 정해진 약속입니다. 어찌 마음대로 양왕에게 천하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태후가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노했다. "제깐 게 무어길래 그런 일에 참견하누!" 그 일로 해서 두태후는 두영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다. 두영 역시 태후한테서 미움받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다 관직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사실상 병에 걸려 있기도 해서 첨사직을 사임했다. 태후는 두영을 더욱 미워하여 문적(門籍:宮門을 出入할 수 있는 名札)까지 없애 버렸다. 그렇게 되니 두영은 황제를 알현할 길까지 막혀 버렸다.
효경제 3년이었다. 오, 초 7국이 모반했다. 다급했다. 황제는 종실과 외척인 두씨 일가까지 두루 살펴보았으나 두영만큼 현명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영을 불렀다. 그 무렵에는 두태후도 두영의 위인됨을 깨닫고 자신의 불명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궁한 두영은 신병으로 인해서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중책을 굳게 사양했다. 황제는 꾸짖었다. "천하가 바야흐로 위급한 처지에 놓였는데 왕손(王孫:두영의 字)만 굳이 겸양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소!" 별 수 없었다. 두영은 대장군에 임명되고 금 천 금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두영은 하사받은 금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군문의 낭하에 벌려놓아 군리(軍吏)들이 필요한 만큼 재량하여 갖다 쓰도록 했다. 또한 두영은 차제에 원앙과 난포 등 운거하고 있는 명장과 현사(賢士)들을 황제에게 추천했다. 두영은 형양에다 진을 치고 지키면서 제나라와 조나라 군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은 두영이 7국의 반란군을 모두 물리치고나서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많은 유세객들과 빈객들이 다투어 두영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효경제도 조정에서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와 두영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되니 열후들도 감히 두영에게 대등한 예(禮)로 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효경제 4년에 율희(栗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두영을 태부로 삼았다. 그런데 효경제 7년에 율(栗) 태자를 폐위시켜 버렸다. 두영은 이 문제로 자주 황제와 간쟁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에 다시 두영은 병을 핑계하여 종남산(終南山:長安의 남쪽) 기슭으로 은거해 버렸다. 그는 거기서 수개월 동안 밭이나 갈면서 살았다. 여러 빈객이나 변사들이 조정으로 나가게 하려고 설득했으나 아무도 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양나라 출신의 빈객 고수(高遂)가 이렇게 설득했다. "장군을 부귀하게 만든 것은 폐하이시며 장군을 친애하신 분도 태후이십니다. 지금까지 장군은 태자의 스승으로 계셨으나 폐위된 마당에 간쟁할 수도 없거니와 기왕에 간쟁했으나 성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은거하며 병을 핑계대면서 조나라 미녀들을 끼고 앉아 참조(參朝)하지도 않으면서 빈객들을 상대로 시비(是非)만 논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옳게 변명하면서 폐하의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폐하와 태후의 양궁(兩宮)에서 문득 장군께 진노함을 품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군은 물론 아마 처자까지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두영이 생각해 보자 고수의 말에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참조하게 되었다.
때마침 도후(桃侯) 유사(劉舍)가 재상직을 사임했다. 두태후가 이번에도 두영을 재상으로 황제에게 추천했다. 효경제가 대답했다. "태후께서는 제가 인색하여서 위기후에게 재상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는 위기후는 잘난 척하는 인물일 뿐입니다. 경솔하여 승상이라는 중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결국 황제는 두영을 재상으로 등용하지 않고 건릉후(建陵侯) 위관을 재상에 임명했다. 무안후(武安侯) 전분은 효경제의 황후(皇后:후일의 王太后) 동생인데 장릉(長陵:狹西省) 출신이었다. 위기후 두영이 대장군이 되어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전분은 겨우 낭관(郎官)에 불과했다. 그래서 고귀한 신분인 두영의 집을 드나들면서 술시중이나 들며 아들이나 손자처럼 굴었다. 효경제 만년에 이르렀을 때 전분은 차츰차츰 승진하더니 드디어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전분이 변설이 능한데다 <반우(槃盂:皇帝의 史官인 孔甲이 서술한 26편의 書)>와 잡가서(雜家書)들을 읽어 아는 것이 종횡무진 많아 보였으므로 왕태후는 그를 무척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효경제가 붕어하자 그날로 태자가 즉위해 효무제(孝武帝)가 되었다. 곧 왕태후가 섭정(攝政)했다. 천하 인심을 진무하기 위한 계책 중에는 전분의 빈객들이 올린 계책이 많았다. 또 전분과 그의 아우인 전승(田勝)도 모두 왕태후의 동생이므로 효경제가 붕어한 3년 후에는 전분은 무안후로 봉해졌고 전승도 주양후(周陽侯)로 봉해져 있었다. 전분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가급적 승상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빈객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였고 은거하고 있는 명사들을 추천해 존귀하게 해 주었다. 이는 기존의 세력가들인 두영이나 장군, 재상들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의 하나로 진행되는 일이었다. 건원(建元) 원년 승상 위관이 병으로 사임했다. 황제는 후임 승상과 태위(太尉) 문제를 거론했다. 무안후 전분의 문하인 적복(籍福)이 전분에게 넌지시 설득했다. "위기후 두영은 존귀해진 지가 오래 되어 천하의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흥기하는 장군께서는 결코 위기후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만일 폐하께서 짐짓 장군을 승상으로 삼으려 하시더라도 결코 받지 마시고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됩니다. 태위와 승상은 그 존귀하다는 점에서는 거의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군께서는 현명한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셨다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전분은 적복의 말이 옳다 생각하고 태후에게 그 뜻을 넌지시 전했다. 황제의 귀로 들어가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일은 뜻대로 되어 두영이 승상이 되고 전분이 태위가 되었다. 적복이 이번에는 두영을 찾아갔다. "승상의 천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십니다. 이번에는 선인들이 모두 군후를 칭찬하였기에 승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악인을 미워하십니다. 세상에 악인은 많으며 장차 승상을 비방할 것입니다. 승상께서 선인과 악인 모두를 포용하신다면 행운은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만 악인을 미워하시면 그 악인의 비방으로 인해 자리를 떠나셔야 할 겁니다." "축하와 위로의 말을 동시에 해 주시는구려." 두영은 이상 더 말하지 않았다. 신통하게도 두영과 전분은 꼭 같이 유학(儒學)을 좋아했다. 그래서 합세하여 조관을 추천해 어사대부로 삼게 했고 또 왕장(王臧)을 낭중령 자리에 앉히도록 했다. 또 노(魯)나라 신공(申公)을 맞아들여 명당(明堂:天子가 제후를 모아 정치를 듣는 장소)을 설치했으며, 열후들을 각자의 나라로 돌려 보내고, 관문에 부과하는 세금도 없애 버렸다. 예법에 맞는 의례(衣禮) 제도를 정비해 가히 태평성대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외척인 두씨나 황족들 중에서 소행이 좋지 않은 자를 적발해 족적에서 빼버렸다. 즈음에 외척에 열후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황녀와 결혼해 자기들의 영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사정들은 결국 두영과 전분을 비방하게 만들었고 그런 소리는 매일같이 두태후의 귀로 들어갔다. 더욱 사태가 악화된 것은 두태후가 도가(道家)인 황, 노(黃, 老) 학설을 선호한 데에 있었다. 그럴수록 두영, 전분, 조관, 왕장 등은 유학을 애써 장려해 그만큼 도가의 학설을 몰아쳤다. 이래서 두태후는 두영 등을 더욱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건원 2년이었다. 어사대부 조관이 황제에게 동궁(東宮:두태후가 있는 長樂宮)을 통하지 않고 정무를 처리하고 싶다고 주청했다. 그것은 두태후의 세력을 만만하게 본 결과였다. 두태후는 몹시 노했다. 조관과 왕장은 말할 것도 없고 승상과 태위까지 추풍낙엽처럼 하루 아침에 벼슬자리가 떨어졌다. 백지후(栢至侯) 허창(許昌)이 승상이 되고 무강후(武彊侯) 장청적(莊靑翟)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두영과 전분은 그 사건으로 벼슬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후(侯)의 신분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전분은 현직에서는 떠났지만 왕태후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가깝게 지낼 수가 있었다. 정사를 상주하면 청허되는 일이 많았다. 권세와 이익에 관심이 많은 천하의 관리들과 인사들이 그런 분위기를 놓칠 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무안후의 시대가 반드시 온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두영을 떠나 전분한테로 모여 들었다. 건원 6년이었다. 두태후가 드디어 붕어했다. 승상 허창과 어사대부 장청적은 오히려 두태후의 장례 일을 소홀히 했다는 책임을 물어 즉시 파면되었다. 전분이 승상에 오르고 대사농(大司農) 한안국(韓安國)이 어사대부로 발탁되었다. 천하의 인사들과 군국(郡國)의 제후들의 인심은 더욱 무안후 전분에게 쏠리게 되었고 심하게 아부했으며, 전분은 날로 방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분의 용모는 추악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존귀하게 보이게 하려는 성미였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황제는 어리고 제후, 왕들에 연장자가 많아 외척으로 승상이 된 내가 예법으로 그들의 콧대를 미리 꺾어놓지 않으면 천하가 나까지 공경하지 않을 테지." 즈음에 국사는 승상 혼자 궁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리고 그가 상주하는 것은 모두가 윤허되었다. 사람을 추천해도 되지 않는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서민에서 2천 석의 지위로 일약 뛰어오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히 전분의 권세는 황제보다도 높았다. 어린 황제가 하루는 이렇게 전분한테 말했다. "승상의 관리 임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소? 나도 좀 관리를 임명하고 싶은데." 어느 날 전분이 고공실(考工室:기계제작을 주관하는 관청)의 부지를 불하받아 자신의 택지를 넓히겠다고 청한 적이 있었다. 황제도 그제쯤 많이 성장해 있었다. 그는 그때 대로하여 소리쳤다. "그대는 아예 무기창고의 부지가 탐난다고 말씀하시지 그래!" 전분은 찔끔했지만 그의 오만은 여전했다. 어느 날 전분은 객들을 초대해 주연을 베푼 적이 있었다. 그의 형 갑후(蓋侯)도 초대했다. 그러나 그는 형을 남향(南向:下席)해 앉게 하고 자신은 동향(東向:上席)으로 버티고 앉으면서 말했다. "승상의 자리는 존귀하오. 형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굽힐 수는 없소." 그의 저택은 엄청나게 크고 호화로웠다. 전원(田園)은 매우 기름졌으며, 각 군현에서 저택 치장용 집기를 팔러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앞채에는 종과 북이 벌려져 있고 곡전(자루가 구부러진 비단 旗)이 세워졌으며 안채에는 수백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제후들이 바친 금, 옥, 개, 말 등의 애완물들이 방마다 가득했다. 한편 위기후 두영은 두태후가 죽은 후에는 더욱 소외되어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세가 없었다. 빈객들의 발걸음도 뜸해졌으며 그에게 경의도 표하지 않았다. 오직 관부(灌夫)장군만이 옛정을 잊지 않고 간혹 찾아왔다. 두영은 뜻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묵묵히 지낼 뿐이었다.
관부장군은 영음(潁陰:河南省)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장맹(張孟)은 일찍이 영음후 관영의 가신(家臣)이었는데 관영의 총애를 받아 봉록 2천 석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리하여 관씨 성을 받아 관맹(灌孟)이 된 사람이다. 오, 초 7국이 모반했을 때 영음후 관하(灌何:관영의 아들)가 장군이 되어 태위 주아부 밑에 소속되어 있을 때 관맹을 교위(校尉)로 삼겠다고 신청했다. 그때 관부는 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아버지 관맹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관맹이 연로하여 싸울 수가 없는데도 관하가 억지로 청을 넣어 징용되었기 때문에 관맹은 울적한 심사를 풀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관맹은 항상 적의 견고한 성만 골라 공격하다가 결국은 오나라 군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군법에 따르면 부자가 함께 종군해 어느 한 쪽이 전사하면 남은 한 쪽이 그 유해를 거두어 귀가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관부는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오나라 왕이나 적장의 머리를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분연히 말하자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옷을 입은 관부는 갈래창을 잡아 평소에 그를 따르던 수십 명의 병사를 모집해 용약 출진했다. 그러나 성벽문을 나서자 아무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좋다! 그렇다면 혼자라도 가겠다!" 관부는 단신으로 말을 달려 오나라 군중으로 달려들었다. 여남은 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관부는 닥치는 대로 베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수십 명을 벤 뒤 더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한나라 군의 누벽으로 돌아왔는데, 다 죽고 오직 일기(一騎)만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도 열 군데나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나마도 때마침 만금짜리 좋은 약이 있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상처가 아물게 되자 관부는 다시 장군에게 청했다. "저번에 돌격했다가 오나라 성벽의 곡절(曲折)을 익혀 두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가게 해 주십시오." 장군은 그의 의열함이 가상하나 십중팔구 잃을 것이므로 태위에게 상의했다. 그러나 태위도 이를 말려 허락하지 않았다. 오가 격파된 뒤 관부는 그 일로 용맹이 천하에 알려졌다. 관하가 황제에게 관부를 추천했다. 관부는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법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그 이후로 장안에 살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를 칭찬하지 않는 인사가 없었다. 효경제 때에는 대(代)의 재상이 되었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효무제가 즉위했다. "회양군(淮陽郡:河南省)은 천하의 요충이며 강병(强兵)이 배출되는 곳이다. 관부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 그래서 관부는 회양군 태수가 되었다. 건원 원년에 관부는 조정으로 들어가 태복(太僕:天子의 車馬를 주관하는 長官)이 되었다. 건원 2년이었다. 관부가 장락궁의 위위(衛尉)인 두보(竇甫)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의 태도가 돼먹지 않았다 하여 손찌검을 한 일이 있었다. 두보는 두태후의 동생이므로 황제는 태후가 관부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연(燕)나라 재상으로 전출시켜 버렸다. 관부는 몇 해가 지나 다시 법에 걸려 관직을 잃고 장안의 집으로 돌아와 소일하고 있었다. 관부의 사람됨은 강직했다. 술에 취하면 주사가 있는 게 흠이지만 의협의 사나이였다. 그는 아첨을 싫어했다. 일족이 존귀하여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위세등등한 상관에게도 예의를 다하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능멸하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자기보다 빈천한 사람에게는 항상 그들을 높여서 대등하게 교제했다. 그는 아랫사람을 추천하고 아껴주었으므로 선비들도 그 때문에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의협심이 있었고 일단 책임진 일은 반드시 수행했다. 그래서 그가 교제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호걸이 아니면 무뢰한의 두목급들이었다. 집에는 재물이 풍족했으므로 식객들이 들끓었으며 빈객들은 그의 연못과 전지(田地)를 이용해 권세와 이익을 얻는 이들도 많았다. 좌우지간 영천에서는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영천의 아이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영천 물이 맑으니 관씨는 태평 영천 물이 흐려지면 관씨는 멸족
관부가 은퇴는 했지만 여전히 부자였다. 그러나 권세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이나 시중(侍中) 등 거물급 빈객들은 점차 오지 않게 되었다. 그때 두영과 관부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두영이 권세를 잃었을 때에는 그도 관부에 의존하려 했고 관부도 두영에 의존해 열후나 종실과 교제를 맺어 명성을 얻고자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끌어 주는 것이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그들은 서로 알게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오히려 늦게 만나게 된 것을 한탄했다. 관부가 복상중(服喪中)인데도 승상 전분에게 들렀더니 전분은 별 뜻도 없이 지나가는 말을 했다. "나는 중유(仲孺:관부의 字)와 함께 위기후의 집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하필 그대가 복상중이구려." 관부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승상께서 다행히 위기후를 방문하시겠다면 제가 어떻게 복상중이라는 이유로 사절을 하겠습니까. 위기후에게 알려 승상을 대접하는 준비를 하도록 알려놓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왕림해 주십시오." 전분은 승락했다. 관부는 무기후 두영에게 전분의 방문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두영도 부인과 함께 시장으로 나가 고기와 술을 사오고 밤에는 집안청소를 하는 등 응대 차비를 극진히 했다. 그런데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전분은 오지 않았다. 두영이 관부에게 말했다. "승상이 혹시 잊어 버리고 있지나 않을까." 그러자 관부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복상중에 있으면서도 청한 것인데...... 가봐야 되겠습니다." 관부는 마차를 몰아 전분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실상 승상 전분은 관부에게 전날 예사롭게 말했고 예사롭게 승낙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가야 한다는 계획이 도무지 없었다. 관부는 자고 있던 전분을 다짜고짜 깨웠다. "승상께서는 어제 다행히도 위기후를 방문하겠다고 승낙하셨습니다. 그래서 위기후 부부는 어제부터 대접할 준비를 밤새도록 했으며 아침부터 승상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식사도 아직 하시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시지요." 전분은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어제 취해서 중유와 했던 약속을 깜박 잊었었구려!" 전분은 마지못해 일어나 천천히 마차를 몰아 떠났다. 관부에게는 전분의 그런 짓거리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이 시작되어 취기가 돌자 관부의 주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당신도 일어나 한바탕 추슈!" 전분에게 소리쳤다. "나에게는 춤추는 재주는 없네." "뭐, 이런 승상이 다 있어!" 전분은 모른 척했다. 두영이 얼른 일어나 사람을 시켜 관부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 관부가 나간 후 두영은 전분에게 사과했다. "원래 버르장머리가 저렇습니다." "내 체질에 맞지 않을 뿐이지요." 두 외척이 화해할 수 있도록 관부가 적절한 기회를 잡아준 것만큼은 확실했다. 전분은 밤 늦도록까지 술을 마시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그는 돌아갔다. 그런데 전분한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적복을 시켜 두영 소유의 성남(城南)밭을 양보해 줄 수 없느냐고 소개를 넣었던 것이다. 전분의 입장에서는 두영이 당연히 땅을 내놓아 줄 줄 알았고 그런 심부름을 해야 되는 적복의 입장에서는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적복은 말도 건네기 전에 전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기후 두영은 늙어 곧 죽게 됩니다. 조금만 참아 달랍니다." 그 소문이 슬금슬금 두영의 귀로 들어갔다. "내 아무리 버림받은 몸이며 전분이 존귀한 승상의 자리에 있다 하나 어찌 권세로 남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단 말인가!" 두영은 노했다. 그 소문이 또한 관부의 귀로도 들어갔다. 그래서 관부가 고래고래 고함치며 전분을 욕했다. 결국 두영과 관부가 욕했다는 소문이 전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무어? 내가 달라는 땅을 못내놓겠다고? 세상에 그토록 뻔뻔스러울 수가 있나! 두영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 내가 그를 구해줬는데 그 보답으로써도 그까짓 땅 몇 이랑쯤은 줄 수 있을 텐데. 게다가 관부 이놈은 또 무슨 참견인가. 그까짓 땅 몇 경(頃:一頃은 百畝, 一畝는 百步) 때문에 나를 그토록 모욕 준단 말인가!"
원광(元光) 4년 봄이었다. 승상 전분이 황제에게 말했다. "관부의 집이 영천에 있습니다. 그런데 관부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이 몹시 괴롭다고 상서하고 있습니다. 청하오니 자세히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황제대로 화가 났다. "그건 승상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새삼스럽게 짐한테 일러바칠 건 또 뭐가 있겠소!" 전분의 빈객들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살핀 후 전분에게 권했다. "이번 사건은 화해하시는 게 좋습니다. 관부가 승상의 비리와 간사한 이익을 꾀한 일 등에 대해 상세한 확증을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어?" "회남왕의 요청을 금품을 받으시고 들어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다면 화해하는 게 상책이겠군." 여름이었다. 승상 전분이 연왕(燕王)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태후가 조명(詔命)을 내려 열후와 황족들 모두가 가서 축하해 주도록 했다. 두영이 관부에게 들렀다. "그대도 함께 가세." "아닙니다. 저는 술 때문에 승상에게 자주 실수를 해서...... 지금도 저를 싫어할 걸요." "그 일은 이미 해결되었네." 그래서 관부는 마지못해 두영을 따라갔다. 주석이 흥겨워져서 전분이 일어나 축배를 들자 전 좌석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서 경의를 표했다. 그 다음에 두영이 축배를 들자 그의 옛 친구들만 자리를 고쳐 잡으려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술에 취한 관부는 이번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서 술잔을 들고 신랑 전분에게로 갔다. 그러나 전분은 무릎을 꿇었지만 술은 사양했다. "이젠 마실 수가 없소." 관부는 조소하면서 대꾸했다. "존귀한 분이시니 마셔야 합니다." 그러자 전분은 아예 관부를 외면해 버렸다. 머쓱해진 관부는 다음 자리로 갔다. 마침 거기에는 임여후(臨汝侯) 관현(灌賢:관영의 孫子)이 있었다. 관현은 정불식(程不識)과 무언가를 귀엣말로 주고 받느라고 술잔이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관부는 분노를 풀 길이 없었는데 마침 만만한 관현 앞에서 폭발구를 찾은 듯했다. "이봐! 자넨 평소에 정불식을 두고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쓰레기라며 헐뜯고 다녔었잖아. 그런데 지금 어르신네가 축수를 하는데 넌 아녀자처럼 귀에 대고 속살거리고 있잖아!" 관현도 가만있지 않았다. "나는 괜찮소. 그런데 정불식 장군을 이런 식으로 모욕주어도 되는 거요?" "목이 잘리든 가슴팍에 구멍이 나든 내가 알 게 뭐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되자 손님들은 변소에 가는 척하고 일어나서 슬금슬금 집으로 가버렸다. 두영도 참지 못하고 관부를 손짓해 불러 밖으로 나갔다. 전분은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저놈이 저토록 방자해지도록 방치해 둔 건 내 탓이로구나! 그러나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라!" 전분의 사병들이 달려들어 관부를 붙들었다. 이때 적복이 일어나 관부에게로 달려갔다. 짐짓 관부의 목을 누르며 속삭였다.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사죄하게. 일이 심상치가 않네." "뭐라고!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저런 자한테 사죄를 해야 하는가!" 일이 그렇게 되자 전분이 소리질렀다. "무얼 하고 있나! 어서 저놈을 묶어 전사(傳舍)에 가두어라!" 관부가 병사들에 끌려 유치소로 가고 난 뒤였다. 전분은 장사(長史:승상의 속관)를 불렀다. "오늘 황족들을 손님으로 부른 것은 조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부가 굳이 찾아와 빈객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은 조칙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불경죄로 일단 처넣고 기시(棄市)에 처해지도록 탄핵해라!" 과연 관부의 처지는 전분이 말한 대로 그의 지족(支族)들까지 잡혀와 옥에 갇혔다. 두영이 크게 놀라 자금을 풀어 자신의 빈객을 시켜서 관부의 석방운동을 폈으나 여전히 관부를 풀려나오게는 할 수 없었다. 전분의 관리들이 그날 현장의 이목(耳目)이 되어 있은데다 관씨들은 두려워 숨어 버렸으므로 관부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관부는 전분의 비위사실을 움켜쥐고 있었으나 구속된 몸이어서 전분의 부정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 그런대로 두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관부를 구해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두영의 부인이 말했다. "관장군은 승상에게 죄를 얻은데다 태후의 집안을 거역한 몸입니다. 당신의 힘으로는 그를 구출할 수가 없으니 그냥 두십시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나에게는 위기후라는 작위가 있는 몸이요. 내 작위는 내 힘으로 얻은 것이니 내가 이것을 잃는다 해도 아까울 건 없소. 관중유(灌仲孺)를 죽게 하고 홀로 살 수는 없단 말이오!" 두영은 아무도 몰래 상서했다. 곧 황제가 두영을 불렀다. 그래서 두영은 관부가 술에 취했던 사정과 그 일로 인해 관부가 주벌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장황하게 아룄다. 황제는 두영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돼 음식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태후한테 가서 변명해 주시오." 그래서 두영은 동조(東朝:태후의 朝延)로 가서 관부는 착한 사람이며 승상이 취중의 일을 빙자해 다른 감정을 가지고 관부를 죄주려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태후는 이번에는 전분을 불렀다. 전분은 관부의 횡포와 악역무도, 오만방자함을 역설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천하는 다행히도 태평무사합니다. 그래서 황실의 외척으로서나마 오늘의 지위에 이르러 그렇기 때문에 몸조심하며 승상의 지위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과 견마(犬馬)와 장원(莊園)과 저택이 고작이며 더불어 아끼는 것이 있다면 창우(倡優:연예인)와 공장(工匠)이 기껏입니다. 그런데 위기후와 관부는 밤낮으로 천하의 호걸들과 장사들을 불러모아 뱃속으로 비방하고 마음으로 헐뜯어 하늘 우러러 천상(天象)을 점치지 않으면 땅을 굽어보며 모반을 꾀하면서 폐하가 계시는 미앙궁과 태후가 계시는 장락궁 사이를 쏘아보며 천하에 혹시 변란이라도 일어나지 않나 고대해 그 틈에 공이라도 세우려고 도모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저들의 행위 의도가 나변에 있는가를 살펴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이 점차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황제는 조신들을 불러모아 누구의 말이 옳은가를 물었다. 어사대부 한안국이 대답했다. "위기후의 말에 의하면, 관부의 부친은 전쟁터에서 한몸을 던져 죽었고 관부 자신도 갈래창 하나를 들고 말을 달려 죽기살기로 오군(吳軍)에 뛰어들어 몸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어 그 이름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관부는 천하의 장사지요. 대악(大惡)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술잔을 주고받다 저지른 실수오니 다른 허물을 끌어대어 주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위기후의 변명이 옳습니다. 그런가 하면 승상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관부는 무뢰한들과 상통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집에는 거만의 재산을 축적했으며 영천에 살면서 횡포하고 방자해 황족을 능멸하고 제 부모형제에게까지 해를 끼쳤다 하니, 이것이 바로 가지가 뿌리보다 크고 정강이가 다리보다 커서 꺾지 않으면 쪼개지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 승상의 말 또한 옳습니다. 오로지 현명하신 황제폐하의 처분만 기다릴 뿐입니다."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은 두영의 말이 옳다고 했고,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는 처음에는 두영을 편들었다가 나중에는 우물쭈물했고, 나머지 신하들은 친척싸움임을 꺼리어 아무도 답변하려 들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자 황제 또한 노해서 정당시를 대표로 꾸짖었다. "그대는 평소에 위기후와 무안후의 장단점에 대해 자주 언급하더니 오늘 조정 회의에서는 어찌 그렇소. 그 위축돼 있는 꼴이 마치 멍에 밑에 매여 있는 망아지 같지 않겠소. 이런 식이라면 내가 그대들 같은 무리들도 참형에 처해야겠소!" 황제는 대신들에게 하문을 중지하고 태후한테 들어가 음식을 올렸다. 태후는 한편 사람을 시켜 조정의 회의 진행과정을 상세히 보고받고 있었기로 이상 더 묻지는 않았다. 노한 상태로 식사도 들지 않고 말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도 내 동생을 저토록 짓밟고 있는데 내가 죽고나면 아예 어육(魚肉)으로 만들어 먹지 않겠소. 황제 역시 건재해 계신데도 저러하니 붕어하신 후에는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이오." 황제는 사과하며 대답했다. "그토록 일방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오. 위기후나 무안후나 모두 황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논의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않다면 일개 형리(刑吏)가 판결할 문제일 뿐입니다." 낭중령 석건(石建)이 황제에게 두 사람의 일을 분별 있게 아뢰었지만 결론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회가 흐지부지 끝나 전분은 지거문(止車門:宮門名)을 나서며 한안국을 수레에 태운 뒤 꾸짖었다. "오늘 나는 그 대머리영감[두영을 일컬음]을 단단히 해치우려고 작정했었는데 그대는 나를 도와주지 않고 어찌 애매한 소리나 하고 섰단 말이오!" 한안국은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승상께서도 오늘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행동을 취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무어?" "위기후가 승상을 헐뜯을 때 승상께서는 당연히 관을 벗어 승상의 인수를 폐하께 돌려드리며 이렇게 역습했어야 옳았습니다." "어떻게?" "'제가 외척이기 때문에 승상 자리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실상 저는 승상이 될 자격도 없는 몸이올습니다. 위기후의 말씀이 모두가 옳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야지요. 그렇게 하셨더라면 폐하께서는 승상의 미덕을 높게 평가하시어 승상의 말씀을 옳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위기후도 속으로 부끄러워 두문불출하다가 혀를 깨물어 자살했을 걸요. 그런데도 승상께선 위기후가 승상을 헐뜯자 승상 역시 그를 헐뜯었으니 이는 마치 장사꾼이나 아녀자들이 다투는 소행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른다우신 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하, 그 자와 다투느라고 미처 그걸 생각 못했었네!" 그래서 전분은 가만히 대궐로 돌아들어가 한안국이 들려주던 말을 그대로 황제에게 아룄다. 그렇게 되자 황제는 결국 어사대부 한안국을 불러 두영과 관부에게 잘못이 있었음을 문서로 올리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탄핵서가 올라오자 즉시 그 문서를 도사공(都司空:詔獄을 주관하는 官)에게 맡겼다. 두영은 일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효경제의 유조(遺詔)를 받아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 상주할 수 있는 특권을 주노라.
관부의 죄는 일족에 미쳤고 두영 역시 체포되었다. 조신들 역시 황제에게 변명해 주려는 자가 없었으므로 일은 급박하게 되고 말았다. 두영은 옥으로 조카를 불러 유조문서를 찾아 황제께 상주토록 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두영은 즉시 황제 앞으로 불려갔다. 그러나 일이 묘하게 되었다. 상주문이 도착했을 때 황제는 즉시 유조를 상서(尙書:宮中 文書 취급관청)로 돌렸다. 그런데 효경제가 붕어했을 당시에 쓰여진 유조의 부본(副本)이 없었다. 부본이 없을 경우 그것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조서는 오직 위기후의 집에서만 가령(家令)이 봉인(封印)하여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위기후 두영은 선제(先帝)의 조서를 속였다. 그 죄는 기시(棄市)에 해당한다.
두영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탄핵되었다. 원광(元光) 5년 시월이었다. 관부와 그 가족 모두가 논고되고 처형되었다. 위기후 두영은 얼마 후 그 소식을 들었다. 듣는 순간 격노하는 바람에 중풍에 걸려버렸다. 그래서 그는 단식하고는 죽을 작정을 했는데 황제가 두영을 죽일 뜻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두영은 다시 일어나 음식을 들며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논의에서도 두영을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두영은 살아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두영을 비방하는 유언비어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좋지 않은 소문만 황제의 귀로 들어왔다. 누군가가 두영을 한사코 죽이기로 작정한 계략이 있은 듯했다. 황제도 이상 더 참지 못했다. 그해 12월 그믐에 논죄되어 두영은 위성(渭城:狹西省)에서 처형되고 기시되었다.
이듬해 봄 전분이 앓아 누웠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전분은 헛소리를 지르면서 손바닥을 싹싹 비비는 흉내를 수없이 내었다. 귀신을 볼 수 있다는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두영과 관부 둘이서 무안후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전분이 마침내 죽었다. 아들 염이 뒤를 이었다. 원삭(元朔) 3년에 무안후 염이 짧은 홑옷을 입고 입궁하는 불경죄를 범해 봉국(封國)이 제거되었다.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모반을 기도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전날 회남왕이 입조했을 때 전분은 태위로 있었는데 유안(劉安)을 패상(覇上:狹西省)까지 출영해 가서 전분은 이렇게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황태자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가장 현명하신 분이 대왕 아니십니까. 더구나 고조의 손자이시고요. 만일 폐하께서 붕어하시면 대왕께서 제위(帝位)에 오르실 것이니 자중하십시오." 회남왕 유안은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황금과 재물을 전분에게 후하게 보냈다. 그때의 사건이 뒤늦게 황제의 귀로 들어갔다. 황제는 사실 두영, 관부의 사건 때부터 전분을 올바른 인간으로는 보지 않았다. 다만 태후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대로 살려두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회남왕과의 금품수수 사건을 듣게 되자 황제는 울컥 화를 내었다. "억울하구나! 전분이 지금 살아 있다면 멸족의 형벌을 내렸을 터인데!"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은 모두 외척이었기에 중용되었고, 관부는 한때 결사(決死)의 계책(計策)을 단행했기로 유명해졌다. 위기후가 중용된 것은 오, 초 7국의 난이 계기가 되었고, 무안후가 존귀하게 된 것은 일월(日月:孝武帝와 王太后)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후는 시대의 변천을 알지 못했고 관부는 학문도 없는데다 불손했다. 이 두 인물은 서로를 도와가며 화란(禍亂)을 조성했다. 무안후는 존귀한 지위를 믿고 권세를 좋아했으며, 주고받는 술잔으로 트집잡아 저 어진 사람들을 모함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관부에 대한 노여움을 두영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자신의 명(命)까지 재촉했다. 뭇사람들의 추대와 존경도 받지 못하고 악평만 얻었으니 슬픈 일이다. 아, 화(禍)라는 것은 반드시 그 근원이 있는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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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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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無長物(별무장물) 別(나눌 별) 無(없을 무) 長(길 장) 物(만물 물)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왕공(王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회계(會稽)에 갔다가 수도인 남경(南京)으로 돌아오자, 왕침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왕침 또한 태자의 스승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왕공이 새로운 대자리에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이 멋있는 대자리는 필시 회계의 명물(名物)일 것이며, 하나만 사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왕침이 대자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왕공은 자기가 앉아 있던 하나뿐인 대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 후, 왕공은 풀로 엮은 헌 자리를 깔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 일이 왕침에게 알려지자, 그는 서둘러 왕공의 집으로 달려와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왕공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도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이제껏 저는 물건을 남도록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恭作人無長物).
長物은 여분(餘分)이라는 의미이니, 別無長物 이란 곧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 을 뜻한다. 이는 물욕이 없는 검소한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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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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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45. 거북이가 바다로 가는 이유
텔레비전에서 보는 '동물의 세계'는 신비롭기도 하지만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을 자주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잔인하고 참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저 세계를 어린이들에게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과연 그들의 정서교육에 어떨까 싶다가도 어쨌든 사람 사는 게 바로 저럴진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때론 든다. 그런가 하면 알(새끼)을 낳아 희생적으로 새끼를 키우는 장면에서는 저것은 교육적으로 좋겠다는 생각이고 사람이 본을 받아도 좋을 것이 많아 좋다. 우리가 거기서 가끔 접하는 것이 거북이 새끼들이 알에서 까여서 바다로 떼지어 달려가는 장면인데 그것이 본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눈도 덜 뜬 놈들이 저렇게 물냄새를 맡고 달려가며(포식자가 있다는 것은 어디서 배웠으며) 저것들이 커서 다시 제가 태어난 저곳에 와서 모래 속에 알을 낳는다고 생각하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연어, 뱀장어 등 물고기들의 모천회귀에 관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놈들이 제 알자리를 찾는 것을 뭐라 이름 붙이는 것이 좋을까. 모해변회귀본능이라 할까 모사장회귀라 할까. 아무튼 그 넓은 바다를 4~5년씩이나 돌아다니며 먹이 잡아먹고 살다가 바로 제가 태어난 그 해변을 찾아든다. 우리나라에는 거북이 무리가 4종이 있다. 바다에 사는 바다거북 ,장수거북과 민물산인 자라, 남생이가 그놈들인데 이 중에서 크기는 남생이가 제일 작다. 방생용으로 또 관상용으로 수입한 열대성 자라는 추위에 약해서 성체는 강에서 월동을 하나 번식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거북이는 파충류로 도마뱀, 뱀, 악어, 공룡이 속하며 모두가 알을 낳고 냉혈성이다. 바다의 거북이 생태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민물에 사는 자라를 조금 보고 가자. 먼 곳에 가 있는 자식 생각에 젖어 있는 모심을 "자라 알 바라듯한다"고 하는데 자라는 알을 오뉴월에 강가 모래사장에 굴을 파고 한배에 보통 60개 정도를 낳고, 낳은 후 약 2개월이 지나면 부화된다. EBS에서 방영한 적이 있는 부화과정을 보면 이놈들도 바다거북들처럼 부화되자마자 강물로 냅다 달려간다. 자라나 거북이는 목이 특징인데(모두 뼈가 8개다) 급하면 등의 갑밑에 집어넣을 수가 있어서 "자라목 된다"고 하고 목의 신축력이 강하기에 평소에는 작아도 발기하면 매우 커진다는 "자라 자지"란 말도 거기서 생겨났고 자지의 대가리를 귀두라 하여 남자의 음경을 자라에 비교한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예부터 거북이나 자라를 용궁까지 가는 영물로 취급하여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고 하지만 요새는 수입한 자라의 뱃바닥에 펜으로 '소원성취'따위를 써 강에도 방생한다. 옛날에 사람도 적고 할 때는 이런 방생도 가능했겠지만 이제는 외제자라 새끼 사다가 강에 뿌리는 방생은 삼가해야겠고 알고 보면 또 다른 모습의 살생이다.
1,000의 새끼 중 되돌아오는 놈은 단 1마리뿐 장수의 상징물인 바다거북이 이야기로 들어가자. 여름날 오후해가 지자마자 미국 남부 플로리다 해변에는 난리가 난다. 해지기를 기다리며 알에서 막 깨어난 거북이 새끼놈들이 설쳐대기 때문이다. 한 달여 전 어미 거북이가 40센티미터 모래바닥에 굴을 파고 한 굴에 100여 개씩(여러 굴에 수천 개를 낳는다) 심어놨으니 거의 동시에 까인 새끼떼가 죽 끓듯한다. 위에 있는 놈은 모래천장을 파내고 옆의 놈은 벽을 허물고 아래 놈들은 어영차 모래를 밟으며 한발자국씩 위로 올라와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바다로 바다로 행렬을 이룬다. 꼬무작 모래뚜껑을 열고 올라와 뒤집어쓴 모래톨 털 틈도 없이 앞에 놈이 달려가는 쪽을 따라서 종종 내 닫는다. 귀신게에 뒷다리를 물린 놈, 여우에 먹히는 놈, 갈매기에 쫓기는 놈 등 아비규환의 소리가 바다 사막을 뒤덮는다. 재수 좋게도 대부분의 새끼들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는 아이구 살았구나 하는 순간 고기떼가 달려들고 역시 물새들이 내리꼽아 잡아물고 간다.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저 새끼들이다. 눈깜짝할 짧은 시간에 일어난 생존투쟁이다. 바다거북은 세계적으로 7종이 있으며 종에 따라 체장의 형태(무늬)가 다 다르다. 가장 작은 놈은 1미터가 채 못되고 제일 큰 장수거북(Dermochelys coriacea)은 2미터가 넘는다. 이놈들의 어미는 물에 살지만 알은 뭍에 낳는데 척추동물 중에서도 어류, 양서류는 물에 알을 낳고 파충류와 조류는 땅에 알을 낳는다. 거북이의 알에도 새의 알처럼 난황이 많이 들어 있어서 모체의 양분을 받지 않고 조건(온도, 습도)만 맞으면 저절로 발생이 일어나는 난생을 한다. 여기서의 의문은 알에서 깬 새끼들이 어둑어둑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순간 때 맞춰 바다로 내빼는 것은 게, 새 등의 천적이 무서워 피하느라 그랬을까 아니면 하늘의 별과 달빛을 보고 바다의 방향을 찾아가기 위함이었을까. 여기 이야기의 대상은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Caretta caretta라는 종인데 우리나라 근해에도 자주 나타나는 바다거북(Chelonia mydas japponica)과 매우 유사한 놈으로 일단 사막을 떠나 바다에 들어간 다음 몸길이가 0. 5미터가 되기 전에는 미국근해에 나타나지 않고 그 동안에 대서양까지도 가서 풍부한 먹이를 섭취하며 큰다고 한다. 보통 떠났던 새끼 1,000마리 중에서 1마리 정도만이 살아 돌아와 같은 해변을 찾는다고 하니 얼마나 바닷속의 생존경쟁이 치열한지 짐작이 간다. 계산해보면 회귀율이 0. 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데 2퍼센트 정도 된다는 우리나라 동해안의 연어의 회귀율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저쪽 북태평양까지 다녀온 연어 보다 더 험한 바닷살이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북이는 광활한 바닷속에서 어떻게 되돌아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들이 어떻게 눈 대중할 물건 하나 없는 광활한 바다를 몇 년간 헤매다가 제 태어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암놈은 반드시 제가 태어난 곳을 알아차린다고 한다. 본능이란 답이 있겠으나 그 본능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새나 물고기들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이들 거북이도 유사할 것으로 보는데 태양(낮)과 별(밤), 냄새, 지자장, 풍향, 바닷가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깊은 바닷속까지 들리는 소리 중에서 어느 것을 이용하는가를 같이 보도록 하자. 사실 미련한 듯 우둔한 듯한 180킬로그램이 넘는 어미 거북이로 실험하기란 어려움이 많아 주로 새끼로 실험을 했다. 예를 들면 부화된 새끼들에게 꼬리표를 붙여서 바다로 내보낸 다음 커서 돌아오는 것을 본다든지, 어느 바다에서 잡았을 때 붙여 둔 표의 부착 여부 등의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거북은 눈이 근시안이라 물밖에 나오면 별을 보지 못한다고 하니 별자리를 보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동물들처럼 지구의 자장을 이용하거나 파도의 방향 즉 파도가 치는 쪽(쳐오는 쪽)으로 항상 이동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지구 자체가 하나의 큰 자석으로 지자장이 밤낮으로 같고 환경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물들이 이동하는 데 이용하기가 좋다. 이 지자장을 연어, 다랑어, 상어 같은 물고기는 물론이고 양서류 곤충 연체동물까지도 알고 이용한다. 거북이도 그런가를 알기 위해서 첫째로 새끼거북이들을 1미터 직경의 큰 접시 위에 올려 매어놓고 컴퓨터로 움직이는 방향을 기록해봤더니 항상 가는(가야 하는) 쪽으로 몸을 돌렸고 불을 끄고 연속 관찰해 봐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데 이것은 이놈들이 동서남북을 알아서 움직인다는 증거라고 보는 것이다. 즉 이동에 지자장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자연상태(바다)로 나가서 실험을 했는데 물에 뜨는 부이(buoy)에 줄로 새끼들을 묶어 매고 어떻게 이동하나를 추적했던 것이다. 바닷가에서도 또 모래가 안 보이는 저 먼바다에서도 첫 번째와 같은 방향으로 헤엄쳐 갔다. 그런데 더운 날 이른 아침 실험수조 안의 새끼들이 방향을 잃고 혼란 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연구원들도 혼란을 일으켰다는데 알고 보니 산들바람이 불어 놈들이 종잡을 수 없는 파도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파도를 일으켜 보니 새끼들이 하나같이 파도가 오는 쪽으로 수영을 하지 않는가! 자연상태에서 바람이 불어 바닷가로 파도가 쳐오는데 이와 반대 방향으로 파도를 일으켜 봤더니(땅에서 바다 쪽으로) 이놈들이 모두 땅 쪽으로 이동하더라는 것인데 이는 지자장보다 파도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바닷가에서는 파도에 반응하고 먼 바다에서는 해풍을 이용해 일정한 방향 즉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해풍은 바닷바람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수백 킬로미터 멀리서도 지역 기후 형태에 관계없이 몇 달을 계속하는 것이라 이들이 민감하게 이용한다고 본다. 거북은 수백만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살아온 바다의 생화석이라 할 수 있는데 성체는 벽걸이 관상용으로 잡아대고 알은 정력에 좋다고 다 쓸어 담으니 그 수가 줄어들었고, 해양오염에 숨이 차고 그물에까지 걸려드니 대단히 위험에 처해 있다. 멸종이 되기 쉬운 종이라는 뜻이다. 십장생의 거북이도 명 끊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을 날도 가까워온다는 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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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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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장
2.그리스의 조소미술과 도자기
조소미술 그리스인은 일반적으로 조각의 목적을 신과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데 두었고 각각의 조각에서 순수한 미적 쾌감도 역시 종교적 체험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그리스 조각에서는 오직 오성에 새겨진 상에 따라 만들어진 자연의 이상적인 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스인은 대리석과 청동을 사용하여 참으로 열정적으로 수많은 조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서구를 위시한 온 세계 대형 박물관의 경쟁적인 수집 대상이 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풍부한 그리스 조상 더미에 당혹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진품은 이미 옛적에 사라져 버리고 독창적 작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유품은 없다. 그 엄청난 수집품 속에는 반복하여 모방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변형되어 딴 물건이 되어 버린 것, 반쯤 생명이 없어진 모조품, 또한 후대 헬레니즘 복제 등만이 존재할 뿐 진정 설득력있는 품목은 하나도 없다. 다만 상고기(기원전 500년 이전)의 조각과 부조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괴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을 재건할 때 성책의 기초로 묻혔다가 근래 발굴되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남아 있어 그 면모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기(기원전 5~4세기) 조각은 박공과 소벽의 부조 일부가 존재할 뿐 거장의 손으로 된 작품은 없다. 거장의 작품으로는 파락시텔레스의 '어린 디오뉴소스를 안은 젊은 헤르메스상' 정도가 고작인데, 그나마도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작품이 아니며 또한 일부 설에는 기원전 340년경의 헬레니즘 모작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전기 예술을 마무리하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는 페이디아스의 박공과 소벽의 부조 조각은 대부분 반출되어 런던 박물관의 어두운 광 속에 쌓여 광채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 조각에 대한 진수와 원천은 이처럼 믿음직하지 못하고 개탄스러운 상태다. 더구나 대부분의 고대 예술가들은 돌을 쪼는 것을 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동으로 주조하였다. 고전기의 세 거장인 기원전 5세기의 뮤론과 폴류클레이토스, 또한 기원전 4세기의 류시포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손수 만든 청동상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각처의 대형 박물관에 청동상의 수가 매우 적은 이유도 고대 말기 이후 청동제의 원작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거장들의 작품을 알아보고 탐구하는 데는 후세의 복제, 그것도 원작의 재질과는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모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청동 걸작을 녹여서 종, 화폐, 심지어 대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작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언제나 모작, 그것도 두 번째 아니면 네 번째, 다섯 번째 모작일 뿐이라고 보나르는 통절히 개탄한다.
도자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자기 생산은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가마에서 구워 낸 단지는 식수, 올리브유, 포도주 같은 액체 음식의 저장에 불가결하였다. 아테네 및 아티카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모든 도시국가에서는 요업이 성행하여 그리스의 주 농작물인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단지나 항아리에 담아 수출하고 대신 곡물 특히 소맥을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제기와 생활 도자기도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었으므로 그리스 세계의 요업은 크게 번창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단순한 둥근 무늬없는 토기였고 제조 수법도 간단하였으나 문명기(미노스 및 미케네 문명)에 들어서 기술이 향상, 모양과 장식이 다양해지고, 그림 새기는 기법도 도입되어 채문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미케네의 멸망과 함께 도자기 숙련 기술은 사라졌고, 그 후 멀리 키프로스로 피난간 그리스인이 만든 미케네 기형의 단지가 본토에 역수입되었는데 장식은 간단한 원형, 삼각형, 사각형 무늬 정도에 그쳤다. 다시 아티카에서 도자기 요업이 재개되어 기원전 1100~660년 사이에는 단지의 표면 무늬가 단순성을 벗어나 다양한 기하학 무늬로 지그재그, 음영삼각형, 체크무늬, 그물 세공, 탄젠트 및 동심원, 반원, 웨이브 줄무늬, 장미꽃, 수레바퀴 장식, 만자, 구불구불한 무늬가 나타났다. 이처럼 단지 무늬가 두드러지는 때를 시대구분상 기하학기로 부른다. 한편 암흑기(기원전 1125~900)를 벗어나면서 기존의 단일 문양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화공들은 신화, 전설, 일상생활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영웅의 무용담 서사시 음송과 더불어 신화에 나오는 개개의 인물과 신의 속성을 그림으로 묘사해 냈다. 기원전 7세기부터는 가정의 단지와 식기에까지 빠짐없이 신화장면이 등장하고 그 외 향수와 기름을 담은 화장용기나 약병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내용은 기품 있고 자비에 찬 신과 인간의 탁월성, 싸우고 죽이는 냉혹한 전쟁장면, 신들의 불화, 납치, 유혹상, 인간사회의 이면상으로 도둑과 노상강도, 유곽에서의 성행위 장면도 거침없이 담고 있다. 신과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소재로 삼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신관, 개인관 또한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림도자기는 그리스 본토, 크레타, 키클라데스 군도, 시칠리아, 키프로스로 퍼져나가 각 도시국가의 도예 단지에서 생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리스의 그림도자기 수는 수십만 점에 달하며 그것도 전에는 모사품이 없었고 근래까지(1960년대) 위조품도 나돌지 않아 그리스 미술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이 도기 그림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옛 벽화나 판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풍부한 도자기 그림은 고고학적 가치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옛 기록에는 미술 작품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지만 도자기 그림으로 시대 측정은 어려움이 없다. 시대구분상 고고학에서는 원시기하학(기원전 1050~900)와 기하학기로 나누고 있으나, 역사학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총칭하고 이를 대략 기원전 750년까지로 잡는다. 다음은 상고기라 부르며 시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기원전 480년까지로 한다. 다음 시대는 고전기로 구분하고,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기까지는 헬레니즘기라고 칭한다. 그러나 공예, 미술 및 건축상으로는 시대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의 도기 화공은 원 고장의 연구기관의 집계에 따르면 1000명을 훨씬 웃돌며 그 중에는 화풍이 훌륭하며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는 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기에 명이 있는 예도 수백 종류가 넘는데 대부분 기원전 6~5세기 아티카 도자기에 서명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개가 만들었다'라든가 '아무개가 그렸다'라는 식의 명기이다. 고대에는 도기 형태를 만드는 기술이 그림장식 기술보다 더 높게 평가되어 화공이 도공의 이름을 적어 놓는 등, 도공의 명이 화공보다 더 많다. 초기에는 요업주 자신이 도공이자 화공이었을 것이다. 오듀세우스가 외눈박이 폴류페모스를 눈 멀게 하는 장면이나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의 그림은 기원전 650년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필치가 거칠다. 그후 단지 그림(기원전 650~600)은 더 착실하고 온건한 화풍을 나타내 사람과 동물의 모습이 훨씬 정상적이고 일부 기명 도기에 의하면 엑세키아스, 두리스, 프시악스 같은 화풍이 뛰어난 화가가 묘사한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도기에는 도공이나 화공의 서명 표지가 없어 장인들은 명성이나 실리에 구애받지 않은 직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형태와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대강 마무리한 것이 대부분인데 채식그림 단지는 일반 생활그릇으로서 염가품이라 공들여 만들 의욕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편의상 옛 화공의 명칭을 별칭으로 불러 구분하고(예:아킬레스 화공, 아우로라 화공 등), 또한 도공과 화공의 서명이 있는 도자기 작품이라고 발굴자의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인 프랑수와 꽃병은 불치(티베르 강 서북부 에트루리아 도시)의 에트루리아인 묘에서 발굴된 대형 크라테르(높이 66cm)로 기원전 57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신화를 소재로 한 찬란한 그림으로 가득 덮여 있고 인물과 동물 등이 270, 명이 121개, 도공은 에르고티모스, 화공은 클레이티아스라고 적혀 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이후 자신의 그림에 이렇듯 서명을 남겼다는 사실은 장인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개성을 엿보게 한다. 같은 화가의 손으로 그린 수십 내지 수백 점(200점 이상)의 그림단지도 있다. 상고기 그림은 대체로 농담없이 단조로운 색채에 거친 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또한 화가의 서명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기원전 475년까지) 날짜에 한한다.
(디오니소스, 포도주에 취해 그를 따르는 무리)
도자기 그림은 흑색그림과 적색그림으로 구분하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흑색그림 : 기원전 7세기 말경부터 약 100년간 아티가(아테네 포함) 도기 화공은 녹로에서 붉은 빛이 도는 진흙으로 단지를 빚어 말린 다음 철화합물이 섞인 흙물로 검정 실루엣 그림을 그려 가마에 구워 냄으로써 그림자 그림이 나타나게 하였다. 코린토스에서는 더 오랫동안 이 기법이 지속되었다. 그림안의 세밀한 부분은 바늘로 긁어서 새기고 어떤 부분은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검정 바탕 위에 백색과 자색 도료를 덧칠하였다. 엑세키아스의 큘리스 술잔 그림(기원전 540년경) '디오뉴소스의 해상 귀로'에 잘 나타나 있다.
적색그림 : 기원전 530년경 아테네에서 발전한 도기 그림으로, 흑색그림과는 반대되는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 묘사의 제한성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는 철분흙물 페인트를 묻힌 붓으로 그림 윤곽을 그려 불에 구우면 흑색으로 변하고 그림 내용은 붉은 진흙색으로 남게 되는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정밀한 세부묘사로 얼굴 표정을 세밀하고 또한 돋보이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재현 실험을 근거로 한 추정설에 따르면, 흑.적색의 채색은 산화철의 환원.산화 작용 기법에 의한 것으로 철분도료로 그림을 그리고 가마의 온도를 조절하여 공기 차단으로 흑색을, 자유로운 통풍으로 적색을 표출케 한 것이라 한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옛 도공이 온도 조절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우리 나라의 한 도공이 읊은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도자단상 - 한익환
도자기에다 내 영혼을 넣는다고 그 많은 세월을 부셔 깼지만
언제부터인가 흙의 참 맛을 알게 되면서 침묵의 스승 자연을 알게 되었고 자연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길 깨닫게 되었다.
한잎 잎새와도 같은 도공의 꿈 도자기에다 내 하찮은 영혼을 넣는다는 것이 어느덧 흙의 영혼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도자기(단지, 항아리, 생활용기) 명칭 피토스 : 독 혹은 큰 항아리, 족자리(손잡이) 또는 위아래 및 몸체에 밧줄고리가 달려있다. 암포라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타원형 단지. 구형 단지는 펠리케라 한다. 크라테르 : 혼주 단지로 아가리가 넓다. 손잡이 장식의 모양에 딸 볼루테(나선), 칼륙스(꽃받침), 콜룸(기둥) 크라테르라 한다. 그밖에 벨(종) 크라테르가 있고, 식탁용으로는 스탐노스, 손잡이가 없는 들통 모양의 칼라토스도 있다. 프슉테르 : 포도주 냉각용 단지로 대야의 찬물 속에 담근다. 휴드리아 : 작은 물항아리로 두 손잡이 외에 물을 쏟는 데 필요한 손잡이가 하나 더 길게 붙어 있으며 칼피스라고도 한다. 소녀가 모리에 똬리를 얹고 이고 다녔다. 오이노코이 : 한 개의 손잡이가 길게 붙어 있는 포도주 조끼로 받침대가 없는 것을 올페라 한다. 칸타로스 : 두 손잡이와 긴 축 받침대가 있는 포도주 잔으로, 주신의 잔이다. 큘릭스 : 운두가 낮은 사발 술잔. 한 쌍의 손잡이와 홀쭉한 축과 굽이 있으며, 굽이 없는 잔은 스템리스 큘릭스라 한다. 스큐포스 : 두 귀가 달린 작은 술잔. 더 깊고 수평 손잡이가 달린 코듈레도 있다. 레큐토스 : 향료 단지. 낮고 폭이 넓은 스쿠아트 레큐토스도 있다. 아류발로스 : 화장 기름병, 램프 기름병은 아스코스라 하며 아가리가 좁다. 알라바스트론 : 향수, 기름 또는 약을 담는 병. 뚜껑 있는 약병은 퓩시스라 한다. 레베스 : 고기 삶는 솥. 두 귀 달린 후기의 솥은 데이노스, 결혼 선물용 솥은 레베스 가미코스라 한다. 루트로포로스 : 정수를 긷는 단지, 또는 제의에 쓰이는 꽃병이다. 류톤 : 짐승머리 모양의 잔 혹은 뿔잔으로, 유방형 잔은 마스토스라 한다. 피알레 : 운두가 낮은 헌주 사발로, 손으로 잡기 위해 한가운데가 돌출된 것은 피알레 메콤팔레스라 한다. 레카니스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대야(수반)로, 뚜껑과 기대가 달린 수반도 있다. 아미스 : 휴대용 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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