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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05호
2012.9.21 (음8.6)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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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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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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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편협한 고집장이라도 한때는 편견에 얽매이지 않았던 어린아이였다. - 메어리 드 루르드 修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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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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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시보리
“그러니까 데나우시 안 생기게 시야게 잘해서 오사마리 합시다.” 방송 제작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 바닥 전문가가 아니면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이런 말을 풀어내기 위해 방송 관계자들이 의기투합한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일본어 잔재를 다듬기 위해서였다. 국어학을 전공한 박사와 아나운서, 방송 세트를 만드는 현장 실무자가 머리를 맞대고 매주 하나씩 다듬어 나가자고 발 벗고 나섰던 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건설 현장, 영화 촬영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영화 <피에타> 속의 ‘시보리’를 곱씹으며 공구·공작 업계와 의상·봉제 업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여태 쓰이고 있는 일본 용어 찌꺼기가 다양함을 짚어보았다. ‘빠우’, ‘로구로’, ‘스카시’, ‘헤라시보리’ 따위가 빠질 수 없는 보기이다. ‘헤라시보리’를 인터넷 누리집에 소개한 한 업체의 설명은 이렇다. “‘헤라(へら, 구둣주걱)’처럼 길쭉한 막대기를 지렛대처럼 사용해 선반으로 둥근 기물을 가공하는 작업. 트로피, 종, 밥공기, 화분 등을 만드는 일로 100%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그 분야에서는 전문용어처럼 쓰지만 일반인에게는 낯선 표현이기에 따로 풀어주었을 것이다.
금속이나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기계나 작업인 ‘빠우’는 ‘광내기’, 목기나 가구 다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기구인 ‘로구로’는 ‘돌림판’, 실톱으로 무늬를 내는 작업을 뜻하는 ‘스카시’는 ‘실톱질’로 이미 다듬은 표현이다.(국어순화용어자료집, 1997) 현장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일본어투 용어를 모두 걷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비계(←아시바), 줄(←야스리), 놋쇠(←신츄)처럼 번듯한 우리말이 있으면 마땅히 제자리 찾아 써야 한다. 글머리에 내보인 말은 그래서 이렇게 다듬어야 한다. “그러니까 뜯어고치는 일 안 생기게 마무리 잘해서 작업 끝냅시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뒤처지다, 뒤쳐지다
‘위에서 아래로 축 늘어지다, 기분이 가라앉다, 뒤에 남게 되다’ 등의 뜻을 나타내는 동사는 ‘처지다’로, ‘처지니, 처져, 처졌다’처럼 활용된다. 우리말에 ‘쳐지다’란 동사는 없다. “무거운 짐을 올려놓은 듯 사람들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처럼 쓰인다. ‘쳐져’는 “그물이 쳐져 있다”와 같이 무엇을 펴서 벌리다는 뜻의 ‘치다’가 활용된 형태이므로 구분해야 한다.
‘뒤처지다’도 마찬가지다. “그는 취직이 안 되자 대열에서 뒤쳐진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처럼 흔히 사용하지만 ‘뒤처진’으로 고쳐야 맞다. ‘뒤쳐지다’는 “현수막이 뒤쳐졌다”와 같이 물건이 뒤집혀 젖혀지다는 의미로 쓰이는 동사다. 어떤 수준에 들지 못하고 밀리다란 뜻으로는 ‘뒤처지다’를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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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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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 장이지
청록색 돌의 길 위로 장난기 많은 천사는 물 폭탄을 터뜨립니다. 그것은 11월의 수정우(水晶雨)가 되어서는 가로수 노란 상념 몇 잎에 가 맺히고, 그것은 또 카페 창유리에 가 이마를 대고 허브 향이 떠도는 실내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세상에서 울음이 가장 많은 실연한 여자의 방에도 내려서는 낡은 책상을 적시고 제비꽃 꽃잎 같은 편지들을 적시고, 소파에는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침대보를 축축하게 하고 여자의 울음 위로도 흘러내렸으므로, 슬픔은 씻겨가 치자색 실내등 얼비치는 물기로 남는 것입니다.
"무슨 근심이 있나요?" "무슨 번뇌가 또 있는가요?" 테디 곰 인형의 눈은 말없이 뿌예지고……,
울음 여왕이 잠든 밤, 졸음에 겨운 천사는 여자의 방에 찾아와 울음 섞인 물기를 훔치고 훈의초(薰衣草) 향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천사는 여자의 잠옷에 향기로 어리다가 대형 전광판이 눈부시게 빛나는 야경 위를 날아다니는 여자의 꿈에 나타나서는 여자에게 한 아름 유성 꽃다발을 안겨주었지요. 부드러운 날개를 지닌 천사는 훈의초 향기가 어린 하늘을 여자 곁에서 내내 날아다녔습니다. 여자의 착한 새 애인이 되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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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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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2.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프
예시 돈덴
병원 현관의 게시판에 공고문이 나붙었다.
'예시 돈덴이 7월 10일 오전 여섯시에 시범 진료를 실시합니다.'
그 아래에 세부적인 사항들이 적혀 있고, 끝으로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예시 돈덴은 달라이 라마(티벳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의 개인 주치의입니다,'
나는 히말라야의 신들이 보낸 명의를 고의적으로 무시할 만큼 대단한 회의론자는 아니다. 그런 냉소적인 태도는 세속에서의 행복에도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영원에 관한 문제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래서 7월 10일 아침에 나는 시범 진료가 있기로 한 병동으로 갔다. 병동에 딸린 작은 회의실에 병아리떼처럼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숨기고 있었지만, 속임수를 쓸지도 모르는 동양에서 온 수상쩍은 의사에 대한 불신과 의혹으로 방 안 공기가 무거웠다. 정확히 여섯시가 되자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키가 작고, 구릿빛 얼굴에다, 땅딸막한 체구의 남자였다. 소매가 없는 노란색과 자주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삭발을 했으며, 얼굴에 난 털이라곤 두꺼운 눈꺼풀 위에 난 희미한 눈썹이 전부였다. 그와 동행한 젊은 통역자가 소개를 하는 동안 그는 두 손을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곤 설명이 이어졌다. 예시 돈덴은 우리 병원의 의료진들이 선정한 환자 한 명을 진료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 환자의 증세와 병병을 알고 있었지만 예시 돈덴에게는 그것이 비밀로 부쳐져 있었다. 환자에 대한 시범 진료는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질 것이고, 진료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회의실에 모여 예시 돈덴으로부터 환자의 증상에 대한 진단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또한 설명에 따르면, 예시 돈덴은 벙원에 오기 전 두 시간 동안 목욕재계와 금식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정결히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을 잘 먹었을 뿐 아니라 늘 하던대로 허둥지둥 세수를 한 것이 고작이었으며, 내 영혼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나는 곁눈질로 동료 의사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우리들 자신이 추하고 천한 꼴이 되어 버린셈이었다.
환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리라는 걸 미리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소변검사를 할 수 있도록 소변을 받아 놓으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그래서 우리가 병실로 들어갔을 때 그 여성 환자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성병 환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순종하고 포기하는 얼굴 표정을 터득한 지 이미 오래였다. 이번 역시 그녀에겐 끝없이 계속되는 실험 진단과 검진의 하나에 불과했다. 예시 돈덴은 환자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고, 나머지 우리는 조금 떨어져서 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말 없이 그 여성 환자를 응시했다. 특별히 그녀의 신체 부위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반듯이 누워 있는 환자 위쪽의 어느 공간에 시선을 고정시킨 듯했다. 나 역시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의 병명을 알려 줄 만한 어떤 신체적인 특징이나 명백한 증상 같은 건 없었다. 마침내 예시 돈덴은 환자의 한쪽 손을 잡아 자기 손 안으로 가져갔다. 이제 그는 잔뜩 웅크린 듯한 자세로 침대 위에 몸을 구부렸다. 그의 머리는 승복의 옷깃 속으로 쑥 움츠러들었다. 그런 자세로 그는 환자의 맥박을 짚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두 눈은 지그시 감겨져 있었다. 그는 한순간 만에 그녀의 맥박을 찾았으며, 그 후 30분 동안 그런 상태로 환자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이국적인 황금빛 새가 날개를 접고 환자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요람에 넣듯이 자기 손안에 품고서 그녀의 맥박 위에 손가락을 얹고 있었다. 그의 모든 기가 그 한 가지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다. 맥을 짚는 행위가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느껴졌다. 내가 서 있는 침대 발치에서 바라보니 그 순간 두 사람은 마치 어떤 특정한 장소로 멀리 떠나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장소 주위에는 우리가 침범할 수 없는 한없이 고요한 공간이 가로놓여 있었다.
환자는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이따금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기 위에 웅크리고 있는 기이한 형체를 바라보고는 다시 베개 위로 몸을 눕혔다. 내 눈에는 두 사람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손은 두 사람만의 친밀한 교감 속에서 하나로 묶여 있었으며, 그의 손가락 끝은 그녀의 손목에서 전해지는 심장 고동과 리듬을 통해 그녀의 병든 신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질투심이 일었다. 그에 대한 질투심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지닌 예시 돈덴에 대한 질투심이 아니라, 그 여성 환자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나도 그녀처럼 그 자리에 누워서 완전히 수용적인 자세로 그에게 맥을 짚어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난 알았다. 지금까지 나는 수만 번이나 환자의 맥을 짚어 왔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맥박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걸. 마침내 예시 돈덴은 몸을 일으키고 환자의 손을 부드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통역자가 작은 나무 주발과 젓가락 두짝을 꺼냈다. 예시 돈덴은 주발에다 환자의 소변을 붓더니 두 젓가락으로 휘젓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소변에서 거품이 일 때까지 수분 동안 계속했다. 그런 다음 주발에 얼굴을 묻고 세 차례에 걸쳐 깊이 냄새를 맡았다. 그는 주발을 내려놓고 병실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병실 문 근처까지 갔을 때, 그 여성 환자가 고개를 쳐들더니 다급하지만 평온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의사 선생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예시 돈덴이 맥을 짚었던 손목을 어루만졌다. 마치 그곳에 잠깐 머물렀던 어떤 소중한 것을 다시 붙잡으려는 듯이. 예시 돈덴은 고개를 돌려 잠깐 동안 그녀를 응시하고는 복도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해서 시범 진료는 끝이 났다.
우리는 다시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마침내 예시 돈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티벳어였다. 그가 말을 시작하자 뒤이어 젊은 통역자가 통역을 시작했다. 마치 두 마리의 말이 달리듯이 두 개의 목소리가 나란히 달려나갔다. 한 목소리에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지는 동시 통역의 협주곡이었다. 그것은 마치 수도승들의 염불 소리와도 같았다. 예시 돈덴은 그 여성 환자의 몸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바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는 거센 바람이 신체 내의 각 부분에 있는 중요한 칸막이들을 무너뜨리면서 환자의 몸 속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회오리바람은 환자의 혈관 속에 들어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맨 마지막으로 그것은 불완전한 심장을 강타했다고 했다. 그녀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에, 심장의 방들 속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가 꼭 닫혀 있어야 할 수문 하나를 열어젖혔다. 그 열린 문을 통해 마치 봄철에 산의 계곡물이 폭포가 되어 넘쳐흘러 논밭을 덮치듯, 그녀의 몸 전체에 강물이 범람해서는 호흡을 잠식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예시 돈덴은 침묵에 잠겼다. 교수 한 명이 질문을 했다.
"그럼 이제 최종적으로 병명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시범 진료의 주인공이자 진정한 앎에 도달해 있는 예시 돈덴이 말했다. "선천성 심장병입니다. 심장 판막의 결손과,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심장 쇠약입니다." 심장의 수문이라...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열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것이 열리는 바람에 그 수문을 통해 물이 범람해 들어가서 그녀의 호흡을 잠식해 버렸다. 그랬구나! 이 동양 의사는 우리 모두가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하고 있는 신체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성직자였다.
나는 안다. 신들이 내려보낸 의사는 순결한 지식, 순결한 치료 그 자체라는 걸. 하지만 인간이 만든 의사는 자꾸만 걸려 넘어지고, 자꾸만 상처를 입힌다. 그가 죽어야 하듯이 그의 환자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이후 나는 환자들을 진료할 때마다 자주 예시 돈덴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오래 전에 그 의미는 잊어버렸지만, 고대 불교의 기도문처럼 그 음악만이 내 귀에 남아 있다. 그러면 어떤 환희 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고, 내 자신이 어떤 신성한 손길에 의해 어루만져지는 느낌이 든다.
리처드 셀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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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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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4부 근세 철학 이야기
르네상스 철학이 막을 내리면서 스콜라 철학의 권위는 소멸되었다. 사람들은 낡은 전통을 과감히 벗고 현실의 사물과 사물들의 진행 과정에 대해 냉철한 철학적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브루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철학은 자연과학의 탐구 방법을 소화하면서 독자적 방법을 모색했고 나아가 자연과학에 기대어 의미 있는 결과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과학의 급속한 진전이 시작된 근대를 일컬어 철학적으로는 인식론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 철학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습득함으로써 철학의 고유한 방법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이다. 그 고유한 방법은 바로 귀납법과 연역법이다. 자연과학은 경험적 학문이다. 자연과학이 탐구하는 대상은 경험을 통해서 알려진다. 하나하나의 현상을 관찰하고 검증함으로써 공통된 특징을 찾아내거나 동일한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상들에 공통되는 법칙을 구성하거나 동일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개별 현상의 관찰로부터 보편 법칙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귀납법이라고 하며, 이 방법에 주로 의존한 것은 영국의 경험론이다. 개별들로부터 보편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귀납법이라고 한다면, 보편으로부터 개별들을 도출해 내는 방법은 연역법이다. 예컨대,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라는 보편 법칙을 개별적인 삼각형들에 적용하면 삼각형들의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확인된다. 연역법의 대표적인 예는 수학에서 찾을 수 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다. 귀납법의 결과는 가설이다. 이 사람도 죽고 저 사람도 죽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가설에 도달한다. 이 가설을 통해 볼 때 과연 저 사람이나 이 사람도 다 죽는다면, 우리는 이 가설이 연역법에 의해서 개별 현상에도 역시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철학자들은 귀납법과 연역법의 상호작용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어떤 한 방법만이 올바르고 이상적이라고 믿었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은 귀납법을 올바른 방법으로 선택, 다양한 입장에서 귀납법을 사용하여 각자의 철학을 진전시켰다. 그런가 하면 대륙의 합리론 철학자들은 연역법을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선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철학의 길을 제시했다. 경험론자들은 감각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항상 주관주의적, 상대주의적 및 회의론적 색채를 지녔다. 이에 반해 합리론자들은 이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객관주의적, 독단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17세기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은 근세 철학을 형성한다. 이 시기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인간의 지식에 대한 탐구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근세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학문 및 철학의 방법론이 확고하게 성립되었고 특히 인간의 지식에 의한 자연과 인간의 탐구가 획기적인 진전을 이를 수 있었다.
제1장 경험론 철학 - 진정한 근대 정신의 시작
베이컨 - 아는 것이 힘이다 자연과학의 체계적이고 방법적인 관찰과 실험을 근거로 철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려고 한 베이컨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정신의 대변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고대의 권위에 반대했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철학, 중세 스콜라 철학이 추상적 지식만을 탐구하므로 비성과적이라고 비판했다. 베이컨은 법학과 정치학에 몰두했고, 자신의 재능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과 제임스 1세 때 궁내 대신의 직위에까지 올라갔다. 그는 1621년 횡령죄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지만 벌금형에 처해져서 왕의 사면을 받았다. 그는 단순한 추론 방법은 옛 지식을 확인해 줄뿐이므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귀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리 중심의 저서 <기관>(Organum)에 대립해서 자신의 저서에 <신 기관>(Novum Organum Scientiarum)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베이컨이 보기에 과거의 학문은 방법과 근거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 그릇된 것이었고 성과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사고에 의해서 전통적인 편견과 속견을 벗어나서 사물들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지식의 모델은 자연과학이어야 하고,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귀납법이어야만 하며, 지식의 목표는 발명의 기술이다. 베이컨은 <대 개혁>이라는 저술을 통해서 과거의 지식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을 새로운 과학의 토대 위에서 획득할 것을 역설한다. 그는 새로운 방법, 곧 귀납법에 의해서 학문, 예술 및 모든 인간의 지식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구체적인 자연과학의 실험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또 수학을 본질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수학적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대하고 조직적인 경험론의 체계를 세우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연과학의 체계적이고 방법적인 관찰과 실험을 강조했고, 이를 근거로 철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려고 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정신의 대변자라 할 수 있다.
버려야 할 네 가지 우상 우리들은 누구나 편견의 더미에 묻혀 살고 있다. 산골에서 사는 사람은 바닷가에 사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다. 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를 믿는 사람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베이컨은 우리의 정신이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편견을 우상이라고 부르며, 그것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베이컨이 버리기를 주장한 네 가지 우상은 다음과 같다.
종족의 우상 : 우리들은 본성상 모든 것을 인간의 편에서 생각한다. 예컨대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를 악하다고 생각하고 고양이 새끼에게 젖먹이는 개를 착하다고 여긴다. 베이컨은, 사물을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면 종족의 우상(편견)에 빠지게 되며, 이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굴의 우상 :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편견이다. 늘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든지 승용차를 몰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관적 편견이 지나치면 사물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동굴의 우상'은 플라톤의 <국가>편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에서 따온 말이다. 동굴 안에 횃불이 타고 있으면 동굴 벽에는 사물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그림자만 보는 사람들은 그림자가 참다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이컨은 그러한 편견을 각 개인의 '동굴의 우상' 이라고 부른다. 시장의 우상 : 말이 우리의 생각에 가져다주는 편견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다. 인간의 언어는 모든 사물들을 담고 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한다. 그만큼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이화여대 학생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믿으면 "모든 이화여대 학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답다"는 신념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시장의 우상이라는 편견에 빠지는 결과를 낳는다. 극장의 우상: 전부터 내려오는 견해나 남의 생각에 휩쓸려서 가지게 되는 편견을 말한다. 극장의 무대에서 배우들은 자기들이 실제인물인양 흉내낸다. 남존여비를 주장하거나 윗사람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사람을 보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전수되어온 생각을 무조건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베이컨은 특히 그릇된 철학 이론들이 대부분 극장의 우상(편견)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본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삼단논법(연역추리)은 어떠한 새 지식도 가져올 수 없다고 본다. 이전의 과학과 철학은 인류에게 비성과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적절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의 개념, 원리, 공리 등은 경험을 근거로 삼을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질 수 있지만, 베이컨이 보기에 경험 자체가 애매하고 오류를 범할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는 오직 귀납법만이 우리들에게 참다운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귀납법은 네 가지 우상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귀납법의 현상 탐구 방법 베이컨은, 현상을 올바르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편견들을 버리고 개별적인 경우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사물들이나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법칙, 또는 보편 개념으로서의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개별적인 경우를 하나하나 탐구해서 보편 법칙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귀납적 방법이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록을 작성할 것을 권한다.
현존의 목록 : 먼저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를 목록으로 작성해야 한다. 예컨대 '깡마른 사람은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실제로 깡마른 사람들 하나하나를 실험해서 성격이 급할 경우의 목록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결여의 목록 : 해당되는 현상이 빠져 있는 경우의 목록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깡마른 사람은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살찐 사람을 실험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정도의 목록 : 해당되는 현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의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깡마른 사람들도 마른 정도가 서로 다르며, 성격이 급한 정도도 서로 다르게 나타나므로, 이런 차이를 목록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
베이컨은 이들 세 가지 목록을 종합하여 가장 일반적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현상에 대한 하나의 법칙이나 보편 개념에 도달하는 귀납법이 수행된다고 본다. 자연과학상의 발견은 대부분 이러한 귀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경험적 지식으로 자연을 지배한다 베이컨에 앞서서 이미 자연과학상의 여러 가지 새로운 발명과 발견이 이루어졌다. 베이컨은 이러한 상황에 기대를 걸고 인간의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베이컨이 저서 <대 개혁>의 부제목을 '인간의 지배에 대하여'라고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그의 말 역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함으로써 앎의 영역을 넓히고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베이컨은 경험적 귀납법에 의해서 보편적 지식을 얻어야 하며, 그러한 지식을 써서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베이컨은 수학의 보편성과 수학의 방법인 연역법을 인정하면서도 수학은 경험과 상관없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신의 탐구 영역에서 배제했다. 그는 오로지 경험적 탐구만이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외적 경험만이 객관적 탐구를 가능하게 한다. 베이컨은 또한 종교적인 것을 자신의 철학 탐구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사람들은 섭리, 삼위일체, 종말론, 영혼 불멸 등을 단순하게 믿는다. 그러한 것들을 경험적으로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이컨은 종교적인 대상을 철학 탐구 내지 학문에서 제외하고 그것을 단지 신앙의 문제로 여긴다. 베이컨의 경험론이 완전한 일관성과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시를 제외하고 우리들의 모든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그의 말은 그가 분명히 경험론자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보편 개념이 아니고 개별 사물들이라고 본다. 보편 개념은 개별 사물들을 귀납법에 의해서 고찰한 후 생기는 결과이다. 베이컨에 있어서 이성이란 그 자신의 진리를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이나 이성은 감각이 제공해 준 재료들을 바탕 삼을 때 비로소 작용할 수 있다. 베이컨은 조직적인 철학 체계를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의 능력 중 이성적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이성적 영혼은 종교적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이성적 영혼에 대해서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비록 그 체계는 완벽하지 못했지만 자연과학적 귀납법과 경험적 지식을 강조한 베이컨의 업적은 그에게 경험론의 아버지라는 위치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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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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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열전 1 - 김병총
46. 오왕비열전
고조의 형 유중(劉仲)은 왕위를 빼앗겼지만 그의 아들 유비는 오(吳)의 왕이 되었다. 바로 한제국(漢帝國)이 기초를 다지는 초기에 그는 남방의 양자강과 회수(淮水) 일대를 평정했다. 그래서 제46에 <오왕비열전>을 서술했다. <太史公自序>
오왕 비는 고조인 유방의 형 유중의 아들이다. 고조가 이미 천하를 평정한 지 7년에 형 유중을 대국(代國)의 왕으로 삼았다. 그런데 흉노가 대를 공격하자 유중은 사수하지 못하고 대국을 버리고 잠행도주하여 낙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황제에게 자수했다. 그러나 고조는 차마 형을 벌줄 수가 없어 왕위만 박탈한 채 합양후로 떨어뜨리는 것에 그쳤다.
고조 11년 가을이었다.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경포)가 모반했다. 그는 동으로 형(荊:양자강 델타지역) 땅을 병합하고 서로는 회수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고조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토벌했다. 유중의 아들 패후(沛侯) 유비는 나이 20세로 기력이 흘러넘치는 기병대장이었다. 그는 영포의 군사를 기현(安徽省 宿縣) 서쪽인 괴추에서 격파했다. 형왕(荊王) 유가(劉賈)가 영포에게 피살되었는데 마침 아들이 없었다. 고조는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델타지역임)의 주민들이 재빠르고 사나워 이들을 다스릴 만한 경험많고 용맹한 인물을 골랐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고조의 아들들 역시 어려서 왕으로 기용할 수가 없었다. 그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인물이 유비였다. 젊지만 용감무쌍했다. 유비를 패(沛)에서 기용해 오왕으로 임명하고 3군(三郡)과 53성시(城市)를 다스리게 했다. 고조가 유비를 불러 다시 찬찬히 인상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이놈의 얼굴에는 반역의 상(相)이 있구나!" 그러나 이미 오왕의 옥새를 넘겨 주었으므로 취소할 수도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후회하면서도 고조는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부탁했다. "한조(漢朝)에서 앞으로 50년 후에 남동쪽에서 반란이 일아난다면 그건 아마 너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유씨 천하가 아니냐. 꿈에라도 모반할 생각일랑 말아라."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효혜제와 여태후의 치세시대는 천하 평정 초기에 해당되어서였던지 그럭저럭 넘어갔다. 각국의 왕과 제후가 지배하의 백성들 어루만지기에 급급했기 때문인 듯했다.
오나라 예장군(豫章郡:江西省)에는 구리[銅]광산이 있었다. 유비는 전국의 유랑자들을 불러들여 많은 동전을 만들어 내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아도 국가재정은 튼튼했다. 효문제 때였다. 오나라 태자가 입조해 황제를 알현한 뒤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쌍륙(雙六)을 치는 기회가 있었다. 오나라 태자의 사부(師傅)는 모두가 초나라 사람들이어선지 사납고 경박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오나라 태자도 원래가 교만한 성격에 쌍륙을 치면서도 그 놀이방법을 가지고 무례하게 다투었다. 참다 못한 황태자가 쌍륙판을 들어 오태자의 머리통을 깨부수자 즉사했다. 오나라 태자의 유해는 오나라로 돌려보내졌다. 그러나 유해를 맞은 오왕은 대노했다. "무어라고!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지낼 일이 아닌가. 천하가 같은 유씨 일가라면서 굳이 여기로 돌려보내 장례를 치른단 말인가!" 유비는 한사코 아들의 시체를 장안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것이 원한의 발단이었다. 오왕은 그 이후부터 한조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입조하라는 연락이 와도 병을 핑계로 장안으로 가지 않았다. 장안에서도 차츰 오왕이 태자 피살사건으로 신병을 핑계삼아 입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나라 사자를 번번이 잡아 옥에 가두며 힐책 심문했다. 오왕도 차츰 불안해졌다. "기왕에 잘릴 목이라면 모반하는 게 낫겠다!" 그래서 오왕은 음모에 몰두해 가게 되었다. 추청(秋請:봄에 천자를 뵈러가는 것이 朝이고 가을에 뵈러가는 것은 請이다) 때였다. 여전히 오왕은 오지 않았다. 효문제가 사자를 힐문했다. 그랬더니 사자는 대답했다. "사실 오왕께서는 병이 없습니다. 오의 사자들을 폐하께서 계속 투옥 심문하셨기 때문에 오왕이 겁이나 더욱 병이라 핑계한 것입니다. 연못 속 물고기를 들여다 보듯 아랫나라 사정을 너무 자세히 들추려 하시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듯합니다. 오왕께선 처음에는 신병이라 속였지만 발각되어 문책을 당하자 더욱 폐하의 주벌이 무서워 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기왕지사를 버리시고 오왕과 함께 새출발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오의 사자에게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오왕에게 보내 고령이니 입조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그제서야 오왕도 죄를 용서받자 꾀하던 음모도 그만두게 되었다. 오나라는 오나라대로 잘 다스려졌다. 구리와 소금의 수입으로 백성들에게 부세를 받지 않아 배불렀으며, 남을 대신해 병역을 복무하는 자에게도 그에 따른 보수를 주었으며, 일 년 중 인재를 뽑아 상을 주었으며, 다른 나라에서 망명자나 범법자를 체포하러 오면 잡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기를 40년 동안이나 하니 백성들은 모두 오왕을 믿고 따랐다.
한편 한나라에서는 조착이 황태자의 가령(家令)이 되어 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종종 조착은 오왕이 과오를 범했으니 영지(領地)를 삭감해야 한다고 태자에게 말했고, 또 효문제에게도 상서했지만, 관인한 성품의 효문제는 차마 오왕을 처벌하지는 못했다. 효문제가 죽고 황태자가 즉위해 효경제가 되었다. 조착이 어사대부로 승진하자마자 그는 효경제에게 말했다. "옛날 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한 당초에는 형제분들도 얼마 안 되어 여러 황자들도 어렸기 때문에 큰 영지(領地)를 다만 동성(同姓)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씨들에게 봉했습니다. 그래서 첩복(妾腹)의 황자 유비(劉肥:悼惠王)에게 제(齊)의 70여 성을 지배케 했으며, 배다른 아우 유교(劉交:元王)에게는 초(楚)의 40여 성을 지배케 하고, 형의 아들 유비(吳王)에게는 오(吳)의 50여 성을 주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되어 이들 3인의 방계(傍系)에게 전국의 절반을 주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 오왕은 전날에 있었던 태자 피살사건으로 원한을 품고 거짓으로 병이라 핑계삼아 도무지 입조조차 하지 않습니다. 고래의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합니다만 선제(先帝)께서는 차마 그를 처벌하지 못해 도리어 안석과 지팡이까지 내리셨습니다. 그 은덕은 지극한 것이어서 오왕은 당연히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 출발을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오왕은 더욱 오만불손해져서 화폐를 사사로이 주조하고 바닷물을 멋대로 제염해서 그 부유함으로 전국에서 망명한 불평분자들을 끌여들여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폐하께서 단단히 결심하셔야 될 때입니다. 그의 영지를 삭감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삭감하지 않아도 역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삭감하면 그 반란이 빨리 일어나나 피해는 적을 것이고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나나 그 피해는 클 것입니다." 효경제가 결심을 못하고 있을 때인 3월 겨울, 초왕 유무(劉戊)가 입조했다. 그 기회에 조착이 간했다. "초왕 유무는 왕년에 박태후(薄太侯)의 복상시(腹喪時) 남몰래 간통죄를 복상하던 집에서 범했습니다. 청컨대 그를 주벌(誅罰)하십시오." 그러나 효경제는 유무를 용서하고 그 벌로서 동해군(東海郡)만 삭감했다. 기왕 그 기회에 오왕의 예장군, 회계군을 삭감[<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으나 있어야 타당함]하고, 전원(前元) 2년에는 조왕(趙王) 유수(劉遂)가 죄를 지었다 하여 영지 중에서 하간군(河間郡:<元王世家>와 <漢書>의 <비전>에는 常山郡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타당하다)을 떼어냈으며, 교서왕(膠西王) 유앙이 작위를 판 부정행위를 했다 하여 그의 6현(六縣)을 삭탈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의 대신들이 제후국의 영지를 삭감하자는 논의를 끊임없이 계속하자 오왕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오왕은 일의 진행이 영지 삭탈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차제에 음모를 표면화해서 거사하려 했다. 그러나 제후 중에서 더불어 모의할 인물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교서왕이 어떻겠습니까. 용감하고 호전적이고 기개(氣慨)를 존중하는 분이니까요." 오의 중대부(中大夫) 응고(應高)가 간했다. 실상 교서왕을 제(齊)의 지방 제후[齊를 갈라 세운 나라로 膠西, 齊, 膠東, 濟南, 濟北 등]들이 모두 꺼려하고 두려워한다고 오왕은 듣고 있었다. "만일을 위한 것이니, 문서 없이 그대가 직접 가서 구두로 설득하시오." 그래서 오왕은 응고를 교서왕에게 파견했다. "오왕은 불초하여 여러 해 동안 어리석은 고민에 잠겨 계십니다. 감히 다른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표시할 수가 없어 저를 직접 보내시어 충심(衷心)을 대왕께 알리도록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라고 하셨소?" "지금 황제께서는 간신들에 의해 조종되고 계십니다. 감언이설과 사소한 제 이익을 빙자한 인간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서 마음대로 법률을 변경하고 제후의 영지를 불법으로 빼앗고 재물의 징발은 더욱더 많아졌으며 무엇보다 선량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날로 가혹해지고 있습니다. 속담에 '쌀겨를 다 먹어버리면 쌀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영지를 이토록 삭감당하다가는 제후국들은 언젠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오왕과 교서왕은 제후들 중에서 특히 이름이 알려져 있는 고로 한번 가혹한 감찰을 받게 되면 그대로 안온하게 유지될 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오왕께선 20년 이상이나 속병을 앓아오고 계셔서 참조(參朝)를 못했는데 그것을 트집잡아 영지를 삭감당해 그것이 걱정스럽고, 교서왕께서는 작위를 팔았다는 죄로 영지를 깎였다고 들었는데 어디 그게 죄가 될 법이나 하는 일입니까. 그런 식으로 갔다가는 영지 삭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라를 몽땅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들어보니 그럴 것 같구려. 헌데, 나더러 어떻게 하자는 거요?" "함께 미움받는 자는 서로 돕고, 좋아하는 게 같은 자는 서로 붙들고, 뜻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 도와서 성취시키고, 욕망이 같은 자는 서로 같은 길을 달려가고, 이익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왕께서는 대왕과 꼭 같은 걱정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차제에 기회를 이용하여 도리대로 몸을 던져 천하의 걱정거리를 없애버리는 게 어떠하실지요." 교서왕은 깜짝 놀랐다. "과인이 어찌 모반하겠소. 지금 황제께서 꾸짖음이 추상같지만, 오직 죄를 입고 두말 없이 죽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폐하의 뜻을 거스릴 수는 없겠소이다." "어사대부 조착을 아시지요. 그 자가 바로 천자를 현혹시켜 제후들의 영지를 불법으로 빼앗고 충신을 가리며 어진이를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를 미워하고 있으며, 제후들은 그를 원망해 모두가 배반할 뜻을 품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사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전란의 징조인 살별이 나타나고 땅에는 황충(蝗蟲)의 피해가 자주 일어나 기근의 징후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만세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천하 백성들이 근심과 고통을 느끼니 바야흐로 성인(聖人)이 일어나셔야만 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왕은 안으로는 조착 토벌을 명분으로 삼고 밖으로는 교서대왕의 수레를 뒤따라 천하에 웅비하려고 하는 바......" "내가?" "우리 정의의 군사가 가는 곳에는 항복이 있을 뿐이며, 복종치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승낙한다는 한 마디만 해 주신다면 오왕은 초왕을 이끌고 함곡관을 공략해 형양과 오창의 곡창을 확보하고 한군(漢軍)의 진출을 막으면서 대왕이 나오실 때를 기다리겠답니다. 다행히 대왕께서 내림하시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때 두 대왕께서 천하를 양분해 가지시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서왕은 잠깐 궁리한 뒤에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하겠소." 응고가 귀국해 오왕에게 보고했다. "그렇지만 혹시 교서왕이 마음이 변하면 어쩌지?" "의심스러우면 직접 면대하셔서 맹약을 체결하십시오." 그래서 오왕이 직접 교서국으로 가서 유앙과 맹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교서국의 신하들 중에서 모반 음모를 듣고 충고하는 자가 있었다. "한 사람의 황제를 섬기는 것이 훨씬 안락한 일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한나라를 배반하고 오왕과 함께 서진해 가서 설사 일이 잘 되더라도 결국은 두 군주가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니 또 하나의 화근을 만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제후국 땅을 모두 합해도 한실(漢室)이 직할하는 군(郡)의 2할도 채 못되는데 그로써 힘이나 제대로 사용해 보겠습니까. 더구나 반역함으로써 태후께 근심을 끼쳐드리는 바도 죄송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러나 교서왕의 귀에는 그런 충고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로 사자를 출발시켜 제(齊), 치천, 교동(膠東), 제남(濟南), 제북(濟北) 등과 맹약을 맺음으로써 기고만장해졌다. "성양국(城陽國:山東省)의 경왕(景王:朱虛侯 劉章)한테는 협조를 요청할 필요도 없다. 제딴엔 의(義)를 존중한답시고 여씨(呂氏) 일족을 칠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사자를 보내 봐야 허탕일 것이다. 나중에 대사가 성취되고나서 성양국을 분할해 가질 따름이다." 실제로 제후들은 새로이 영지가 깎이든가 벌을 받음으로써 조착에 대한 원망이 컸다. 오나라에 회계군과 예장군을 삭감한다는 조서(詔書)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래서 오왕이 먼저 병사를 일으켰다. 교서국에서는 정월 병오일(丙午日)에 한(漢)에서 파견돼 있던 2천 석 이하의 관리들을 모조리 주살해 버렸다. 교동, 치천, 제남, 초, 조나라에서도 교서국에서와 꼭 같이 한의 관리들을 죽여 버렸다. 그런 후 병사들을 동원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불길한 징조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왕(齊王) 유장려(劉將閭)가 동맹국에 가입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래서 그는 음독자살함으로써 동맹국에서 이탈했다. 또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가 그의 낭중령(郎中令:侍從長)에 의해 감금당했다. "안됩니다. 파괴된 성을 아직 수리도 못했는데 군사를 동원하다니요!" 그래서 제북은 출병치 못했다. 그렇지만 교서왕이 동맹국의 통솔자가 되어 교동, 치천, 제남의 병사와 함께 임치를 에워쌌다. 조나라 왕 유수(劉遂)도 반란군에 합세한다는 뜻으로 가만히 흉노로 사자를 파견해 군사를 빌어 동맹국에 참전시켰다. 어쨌건 7개국의 군사동맹이 결성되자 오왕은 다음과 같은 총동원령을 국내에 포고했다.
-과인의 나이 62세다. 스스로 대장이 되어 출전한다. 내 막내아들이 이제 14살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사졸의 선두에 선다. 그러하니 모든 백성들은, 위로는 과인과 동년배로부터 아래로 나의 말자(末子)와 동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자를 동원한다.
그렇게 되어 오나라에서는 20여 만 명이 동원되었다. 또한 남방의 만족인 민월에도 군사요청을 했었는데 동월에서 이에 응해 오왕의 뒤를 따랐다. 효경제 3년 갑자일(甲子日)이었다. 오왕은 광릉(廣陵:江蘇省 楊州)에서 행동을 개시해 서진하여 회수를 건너서며 초군과 합류했다. 오왕은 여기서 제후국들에 일제히 서신을 띄웠다.
-오왕 유비는 삼가 교서왕[유앙], 교동왕[劉雄渠], 치천왕[劉賢], 제남왕[유벽광], 조왕, 초왕, 회남왕[劉安], 형산왕(衡山王:劉勃), 여강왕(廬江王:劉賜) 및 전날의 고(故) 장사왕(長沙王:吳著)의 아들께 묻사오니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지금 한나라 조정에 적신(賊臣)이 있어 천하에 아무런 공로도 없는 주제에 불법으로 제후들의 영지를 빼앗고 형리(刑吏)를 시켜 탄핵하고 계류(繫留:구금)하고 심문하고 단죄(斷罪)하여 우리들을 욕보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인군(人君)에 대한 예의로써 제실(帝室)인 우리 유씨 골육인 제후들을 대우하지 않고 선제(先帝)의 공신들을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간악한 무리들을 대신 천거해 천하를 속이고 어지럽혀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폐하께서는 다병(多病)하시어 정사(政事)에 뜻을 잃으시고 사태를 성찰할 능력까지 잃고 계십니다. 이에 병사를 동원해 폐하의 측근에 있는 적신들을 주멸하고자 하는 바 여러 제후들의 뜻을 삼가 교시받아 따르고자 합니다.
오왕의 설득편지는 계속된다.
-저희 오나라는 비록 좁다고 하나 땅은 사방 3천 리이고 인구가 비록 적다고 하나 정예병 50만은 갖출 수가 있습니다. 또한 과인은 평소에 남월(南越)의 여러 나라들과 친교 맺은 지가 30여 년이나 되어 과인이 원하기만 하면 사졸을 갈라 따르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병력이 30여 만입니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과인은 비록 불초하오나 이 몸을 바쳐 여러 왕들을 따르고자 하는 바입니다. 장사(長沙)와 접경하고 있는 남월의 북부지방 백성들은 장사왕의 아들을 주축으로 서쪽 촉, 한중으로 달려가게 하여 장사 이북을 평정토록 하겠습니다. 동월왕, 초왕, 회남의 삼왕(三王:淮南王, 衡山王, 廬江王)은 과인과 함께 서진하기를 바랍니다. 제(齊)의 제왕(諸王:치천왕, 교동왕, 제남왕)과 초왕은 하간(河間)과 하내(河內)를 평정하고 임진관(臨晋關:狹西省 朝邑縣 북동쪽)으로 진입하든지 또는 과인과 낙양에서 합류하기 바랍니다. 연왕(燕王:劉嘉)과 조왕은 흉노왕과 맹약한 바 있으니 연왕은 북진하여 대(代)와 운중을 평정하고 흉노병을 통솔해 소관(蕭關:甘肅省 固原縣 남동쪽)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장안으로 진출해서 천자(天子:<한서>에는 天下)를 바로잡고 고조의 묘를 안태케 하십시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이상과 같은 방향으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의 원왕의 아들인 지금의 초왕(楚王:劉戊)과 회남의 3왕은 시름을 풀 길이 없어 입욕(入浴:官吏의 휴가)할 경황도 없이 지내온 지가 10여 년이어서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풀어 보려고 벼르고 있을 것입니다. 과인은 아직도 여러 왕들의 참뜻을 타진할 기회가 없었고 또 타진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여러 왕국들이 전멸하려는 마당이라 분연히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국가를 재흥시키고 약자를 구하고 포악한 자를 쳐서 유씨 일족을 안태롭게 하는 것이 한(漢)나라가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나라는 비록 가난하나 과인은 의식(衣食)을 절약해 금전을 저축하여 밤낮으로 군비를 갖추고 식량을 모아온 지가 30년이나 됩니다. 이 모두가 기왕의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여러 왕들은 이것을 마음껏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왕 비는 한실에 대한 모반의 명분을 적은 뒤 이번에는 공로에 대한 상사(賞賜) 규정도 자세히 적어내려갔다.
-적의 대장을 베거나 생포한 자에게는 황금 5천 근(斤:한 근은 약 256그램)을 하사하고 1만 호의 영지에 봉하며, 열장(列將)을 베거나 생포한 자에게는 황금 3천 근에 5천 호의 영지를, 비장(裨將:副將)을 베거나 사로잡으면 황금 2천 근에 2천 호의 영지에 봉할 것입니다. 봉록 2천 석의 관리를 베거나 사로잡으면 황금 1천 근에 1천 호의 영지에 봉하고, 1천 석의 관리의 경우에는 황금 5백 근에 5백 호의 영지를 주어 모두 열후(列侯)에 봉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적군으로서 적군과 함께 또는 적의 성읍(城邑)과 함께 항복하는 자에게는 그 병졸이 1만 명이거나 성읍이 1만 호일 때 대장을 얻은 경우와 같은 대우를 할 것이며, 5천 명의 군사와 5천 호의 성읍인 경우에는 열장을 얻은 경우와 같은 대우를 하며, 3천 명의 군과 3천 호의 성읍이라면 비장을 얻은 경우와 같은 대우를 하며, 1천 명의 군과 혹은 1천 호의 성읍인 경우에는 2천 석 호봉의 관료를 얻은 것과 같은 대우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적의 하급 관리를 얻은 경우에도 상대의 등급에 따라 작위와 상금을 줍니다. 기타의 봉작이나 상사도 모두 한(漢)의 통상규정보다 두 배로 할 것입니다. 본래부터 작위와 봉읍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위에 규정한 바에서 가증(加增)시키며 이전의 영지에 대해서는 구애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하니 여러 왕께서는 신하들에게 이런 내용을 자세히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속이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과인의 금전은 천하 도처에 있으니 굳이 오나라로 와서 가져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 여러 왕들이 밤낮으로 이것들을 사용하더라도 모조리 없앨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할 것이 있다면 과인에게 보고만 해 주십시오. 언제라도 과인이 달려가서 상을 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삼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서가 천자에게 올라갔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태위(太尉:軍 최고사령관)인 조후(條侯)가 주아부(周亞夫:周勃의 아들)을 시켜 36명의 장군들을 거느리게 해 오, 초로 진격케 했다. 곡주후(曲周侯) 역기에게는 조를 치게 했고, 장군 난포에게는 제(齊)나라를 치게 했다. 대장군 두영에게는 형양에 주둔케 하여 제나라, 조나라 군사의 동태를 감시케 했다. 한나라 군사가 출발하기 전이었다. 두영은 전날 오나라 재상이었던 원앙을 효경제에게 추천했다. 그 무렵 원앙은 은퇴해 집에 있었다. 조칙을 받은 원앙이 입조하자 마침 효경제는 조착과 함께 병력을 점검하고 병량 조달에 관해서 상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가 원앙을 반기며 물었다. "그대가 한때 오나라 재상으로 있었기에 묻겠는데, 오왕의 신하 전녹백(田祿伯:吳의 大將軍)의 사람됨에 대해서 좀 아오? 더구나 지금 오, 초가 반기를 들었는데 그대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는지." 그러자 원앙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실 일이 못됩니다. 금새 격파되고 맙니다." "오왕은 광산에서 화폐를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굽는 등 부자가 되었소. 그것으로 천하의 호걸들을 끌여들여 제 머리가 백발로 성성한데도 거사했단 말이오. 그가 만전의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어찌 거사를 했겠소.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그가 곧 격파될 것이라 말할 수 있소?" "오왕이 동광산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구워 부자가 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가 천하 호걸들을 부력(富力)으로 끌여들였다는 얘기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렇소?" "진정한 호걸들이란 오왕 따위를 도와 반란을 획책하지는 않지요. 차라리 오왕을 잘 보필하여 오왕으로 하여금 의(義)를 지키게 했겠지요." "그럼 측근의 그 자들은 무어요?" "천하의 무뢰배 자제(子弟)들이거나 망명해 온 자들이며 위조화폐를 사주하는 간악한 무리들일 뿐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울려 일으킨 반란이니 성공할 턱이 있겠습니까?" "오나라에 대한 원앙의 판단은 지당합니다!" 조착이 곁에 섰다가 거들었다. 황제는 다시 원앙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우면 좋겠소?" "우선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신하들이 물러갔으나 총신 조착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원앙이 다시 간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신하로서 알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아뢰자 황제는 조착까지 물러가게 했다. 조착은 궁전 동쪽으로 바삐 물러가며 투덜거렸다. "저 자가 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려고 저러누!" 좌우가 깨끗이 정리된 뒤 원앙은 이렇게 말했다. "오와 초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고조황제께서 자제들을 왕으로 삼고 각각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적신 조착이 제멋대로 제후들의 죄를 문책하며 그들의 영지를 삭탈하고 있다. 이것을 반란의 명목으로 삼아 서진하여 조착을 주살하고, 옛 땅을 회복한 후에라야 군사 행동을 중지하자'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하니 당면한 계략은 조착을 베고 오, 초 7국에 사자를 파견해 그들을 용서한 뒤 삭감된 그들의 옛 땅을 돌려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양쪽 군사는 칼날에 피 한 방울 바르지 않고 반란군은 명분을 잃어 해산될 것입니다." 황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일이 어렵소. 정작 한 사람을 아끼지 않고 벰으로써 천하에 사과하는 것이 옳을까." "어리석은 제 생각으로서는 이보다 나은 계책이 없을 듯합니다." 황제는 원앙을 전격적으로 태상(太常)에 임명했다. 오왕의 아우의 아들 즉 오왕의 조카 덕후(德侯) 유광(劉廣)을 종정(宗正:皇族을 주관하는 大臣)으로 삼았다. 원앙은 즉시 여장을 갖추어 오나라로 떠났다. 한편 열흘 쯤 후였다. 황제는 중위(中尉)를 시켜 조착을 불러내었다. 조착은 멋모르고 조복(朝服)으로 정장한 채로 입조했다. 그를 속여 수레에 태운 황제는 장안의 동시(東市)로 데려갔다. 그는 그 차림대로 참형에 처해졌다. 원앙과 유광이 오나라에 도착했다. 원앙은 종묘의 뜻을 받들게 하라는 설득을 하기 위해서 갔고, 종정 유광은 원앙의 계책대로 황실 친척들을 돕게 한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것이다. 종정 유광은 친척이라는 이유로 먼저 오왕에게 들어가 회견했다. 그는 오왕을 잘 타일러 황제의 조칙을 배례하고 받게 하려 했다. "무어? 원앙도 함께 왔다고? 그렇다면 나를 설득하러 온 게 분명하군. 나 이미 동쪽의 황제가 되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배례를 한단 말인가!" 오왕은 원앙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중(軍中)에 억류해 놓고는 반군(反軍)의 장군이 되든가 주살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협박했다. 원앙은 야음을 틈타 탈출할 수 있었다. 도보로 도망해 양군(梁軍)의 군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무사히 귀경해 황제에게 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대장군 주아부는 대군을 형양으로 집결시키려고 6두마차를 타고 달려 낙양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서 뜻밖에도 극맹(劇孟:俠客의 두목)을 만났다. "오, 반갑구려! 7국의 반란으로 인해 내가 역전거(驛傳車)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는 것조차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소. 모반한 제후들이 천하의 호걸 극맹을 한편으로 끌어들였다고 떠들었거든요. 그러나 당신은 엄연히 그대로 이곳에 계시니 지극히 안심이오. 이제 나는 걱정 않고 형양으로 가겠으니 낙양을 지켜 주시오. 이쯤되면 형양 이동(印)에는 근심될 만한 자가 아무도 없겠소이다." 주아부는 형양(滎陽:원문에는 淮陽으로 되어 있으나 梁玉繩의 說에 따라 형양으로 함)에 이르러 부친 주발의 빈객이었던 등도위(鄧都尉)에게 물었다. "좋은 계책을 주십시오." "오군이 매우 정예로워 정면대결로는 어렵습니다. 초군은 또 경솔하니 지구전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니 장군은 북동으로 병사를 철수시켜 창읍(昌邑:山東省 金鄕縣의 북서쪽)에다 누벽을 구축하십시오. 오나라를 양(梁)나라에 맡기는 것이 상책입니다. 오군은 반드시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 양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동안 장군께선 호(濠:垓字)를 깊이 파고 누벽을 높이 쌓은 뒤 굳게 지키는 한편, 기동력 좋은 경장비병을 이용해 회수와 사수(泗水)의 합류점을 차단하십시오. 오군의 군량미 수송로를 막아버리는 형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쯤 되면 오군과 양군 모두 전투에 지치게 되며 양식은 바닥납니다. 그때 상처입지 않은 날쌘 군사로 오군을 치면 피폐한 그들은 반드시 격파될 것입니다." "좋은 계략입니다." 주아부는 등도위의 계략을 따랐다. 창읍의 남쪽에 누벽을 굳게 구축한 뒤 경장비병을 출동시켜 오의 양도를 차단했다. 오왕이 진격을 개시한 당초에는 전녹백이 대장군이었다. 그래서 전녹백은 오왕에게 진언했다. "대군이 한 덩어리로 모여 진격하더라도 특별한 군략을 세우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5만 명만 갈라주십시오. 별도로 양자강과 회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회남과 장수를 수중에 넣고 무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있다가 대왕과 합류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책(奇策)입니다." 그러나 오의 태자가 반대했다. "왕께서는 반군(反軍)의 이름을 내걸고 있습니다. 이런 군사를 남에게 빌려주다니요. 남에게 빌려주어 왕을 배신하면 어찌하겠습니까. 더구나 병권을 갈라놓았을 경우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폐해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왕은 전녹백의 진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군의 젊은 장수 환장군(桓將軍)이 역설했다. "우리 오군에는 보병이 많습니다. 보병에게는 험난한 지형이 유리합니다. 한군에게는 전차와 기병이 많은데 그들은 평지가 유리합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진격하는 도중 항복하지 않는 성읍은 그냥 두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창고부터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오창(敖倉)의 양곡을 보급받아 산하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어 굳이 관중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천하는 이미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만약 대왕께서 천천히 진군해 성읍을 모조리 항복시키고 있다가는 한군의 전차와 기마대가 양, 초의 들판으로 달려들어와 거사는 실패하게 되겠지요." 오왕은 얼른 결심이 서지 않아 노장(老將)들에게 물었다. "그대들 생각은 어떻소?" "젊은애의 무모한 계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의 원래 계략이 가장 옳습니다." 그래서 환장군의 계략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직도 회수를 건너기 전이었다. 오왕의 여러 빈객들이 모두 장군, 교위(校尉), 군후(軍侯), 군사마(軍司馬) 등에 임명되었으나 홀로 주구(周丘)만이 어떤 자리에도 임명되지 못했다. 주구는 하비 출신이었다. 오나라로 망명해 와서 술장사를 하고 있던 재사(才士)였다. 그러나 그의 행실이 신중치 않고 짓거리가 경박하다 하여 오왕은 그를 임용치 않았던 것이다. 이에 주구가 오왕을 찾아 설득했다. "무능하다 하여 임용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장군이 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만, 무언가?" "왕께서 가지고 계신 한나라 조정에서 발부한 절부(節符:使者라는 증명서) 하나만 주십시오. 반드시 왕께 보답하겠습니다." "그대가?" 오왕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절부 하나를 주구에게 내어 주었다. 주구는 절부를 받아가지고 밤을 도와 하비로 말을 달렸다. 이때에 하비에서는 오나라가 모반해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주구는 여사(旅舍)에 들러 절부를 사용해 현령(縣令)을 불러들였다. 주구는 종자(從者)를 시켜 현령이 여사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죄를 씌워 베어 버렸다. 그런 다음 주구의 형제들과 친한 토호들과 관리들을 모조리 불러놓고 설득했다. "오의 반란군이 곧 이곳으로 도착할 것이오. 오기만 하면 이까짓 하비성쯤은 한 식경도 못 되어 쑥밭이 될 것이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미리 항복하시오. 집집마다 안전을 약속할 테니까. 그리고 유능한 자는 제후에 봉해질 것이오." 관리들이 나가 주구의 말을 전하니 하비 백성들이 모조리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주구는 하비의 병력 3만 명까지 수중에 넣었다. 주구는 사람을 시켜 오왕에게 하비성의 사정을 보고한 뒤, 그 병력을 이끌고 북진하여 성읍을 공략했다. 성양(城陽)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주구의 군사는 10여 만 명이나 불어 있었다. 그래서 쉽게 성양의 중위(中尉:王國의 최고 武臣)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구는 거기서 오왕이 패배하여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내가 저토록 허술한 자와 대사를 도모했다니!" 주구는 오왕에게 협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하릴없이 군대를 철수시켜 하비로 다시 향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울화가 치밀었던지 주구는 등창(瘡:잔등에 나는 악성 腫氣)이 났다. 그래서 하비에 채 닿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2월이 되었다. 오왕의 군사는 벌써 격파되어 패주했다. 동시에 천자는 한나라 장군들에게 조칙을 내렸다.
-짐이 들은 바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갚아 주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 갚아 준다'고 했다. 고조황제께서 몸소 공덕 있는 신하를 표창해 제후로 세워주셨다. 유왕(幽王)과 도혜왕(悼惠王)에게는 후사도 없었지만 효문황제께서는 그 나라가 끊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유왕의 아들 유수(劉邃)와 도혜왕의 아들 유앙 등을 왕으로 삼아 선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여 환의 번병(藩屛)으로 두었었다. 그 덕은 천지에 비길 만하고 그 빛은 일월에 비길 만하다. 그런데도 오왕 비는 배은망덕해 의리를 저버리고 천하의 망명자들과 죄인들을 끌어들여 사전(私錢)을 주조해 공전(公錢)을 어지럽혔으며, 병이라 핑계하여 20년 이상이나 입조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오왕의 죄를 들출 것을 요청했으나 효문황제께서는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오로지 그가 개과천선하기만 고대하셨다. 그런데 오왕 유비는 초왕 무, 조왕 수, 교서왕 앙, 제남왕 벽광, 치천왕 현, 교동왕 웅거와 합종의 맹약을 맺고 모반해 악역무도한 짓을 자행했다. 즉 병사를 동원해 종묘를 위태롭게 하였고 대신들과 한나라가 보낸 사자들을 살해했다. 또한 만백성을 협박하였고 죄없는 백성을 요절냈으며 민가를 불태우고 분묘를 파헤치는 등 포악한 짓이라면 가려서 다 하였다. 또 교서왕 유앙도 악역무도한 일을 거듭했다. 군(郡), 국(國)에 있는 고조황제의 묘(廟)를 불사르고 그곳의 복기(服器)를 약탈해 갔다. 짐은 특히 이 점을 애통히 여겨 소복(素服:白衣)을 입고 정전(正殿)은 피한 채 별전에 있으면서 근신하고 있다. 장군들은 각자의 사대부들에게 권고하여 반도들을 치게 하라. 반도를 치는 데는 적진 깊숙히 들어가 많이 죽일수록 그 공로가 크다. 목을 베어도 좋고 사로잡아도 좋으나, 3백 석 이상의 봉록자들은 그대로 두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감히 이 조칙을 비난하거나 또는 조칙에 불복하는 자는 요참(腰斬:斬首보다는 重刑, 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이보다 앞서 오왕이 회수를 건너 초왕과 함께 서진해 극벽(棘壁:河南省 寧陵縣 서쪽)을 격파할 때만 해도 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 기세가 매우 날카로워 양(梁)의 효왕(孝王) 유무(劉武)는 위협을 느껴 장군 6명을 보내어 오군을 공격케 했지만 격파된 두 장군의 사졸들은 쫓겨서 양으로 돌아왔다. 양에서는 여러 번 주아부에게 전황을 보고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구원요청은 번번이 기각되었다. 할 수 없이 양에서는 사자를 황제에게 보내어 주아부를 헐뜯었다. 그랬더니 황제는 주아부에게 사자를 보내 양나라를 구원하도록 설득했다. 그래도 주아부는 작전의 편의만 고집해 황제의 말도 듣지 않았다. 양에서는 별 수 없었다. 한안국(韓安國)과 또 전날 초왕에게 간하다가 죽은 초의 재상 장상(張尙)의 아우 장우(張羽)를 장군으로 삼아 가가스로 오군을 격파할 수는 있었다. 오군이 서진하려고 했으나 양이 성을 굳게 지킨 탓으로 감히 서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군은 주아부의 주력군을 상대로 하읍(下邑)에서 마주 싸우려 했다. 그런데 주아부도 굳이 누벽만 지키며 구태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진 오군은 초조했다. 사졸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밤을 타서 죽기살기로 누벽의 남동방을 공격했다. 그 기세가 대단했다. "지키기만 할 뿐이다. 오늘 밤 오군은 틀림없이 누벽의 북서쪽을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니 남서방의 수비를 굳게 하는 척하고 북서쪽으로 유도해라." 아니나 다를까 오군은 밤중에 북서방으로 침입해 왔다. 그제서야 주아부의 군은 밖으로 내달아 오군을 대패시켰다. 오군의 사졸들은 대부분 굶어죽었다. 그러자 나머지 사졸들은 오왕에게서 이반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오왕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휘하의 장사(壯士) 수천 명을 거느리고 야음을 타서 도망해 양자강을 건넜다. 단도(丹徒:江蘇省 丹徒縣)를 거쳐 동월(東越)에 도착했다. 동월에는 1만 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리고 흩어졌던 도망병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한에서는 사람을 시켜 이익을 미끼로 동월을 매수했다. 오왕이 밖으로 나가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때 동월의 군사 하나가 미친 척 갈래창으로 오왕의 목을 찔렀다. 동월은 오왕의 머리를 그릇에 담아 역전거를 달려 한으로 보냈다. 오왕의 아들 자화(子華)와 자구(子駒)는 민월로 도망쳤다. 나머지 군사들은 주아부나 양군에게 항복했다. 초왕 유무는 패전을 하게 되자 자살했다. 교서, 교동, 치천의 3국 왕은 제의 수도 임치를 포위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나라 군대가 진격해 왔으므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각각 군사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교서왕은 웃옷을 벗고 맨발로 짚방석에 꿇어앉아 물만 마시면서 죄를 빌었다. 모친인 태후에게 회오의 정을 표한 것이다. 그러자 태자 유덕(劉德)이 왕을 말렸다. "왜 이러십니까. 한군은 멀리서 왔으므로 제가 보기에도 많이 지쳐 있습니다. 습격하면 이길 만합니다. 원컨대 대왕의 잔여병을 거두어 제게 주십시오.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그때 해중(海中)의 섬으로 도망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아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피로해 있다. 도저히 징발해서 쓸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교서왕은 태자의 진언을 듣지 않았다. 즈음에 한의 장군 궁고후(弓高侯) 퇴당(頹當)이 교서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저는 조칙을 받들어 불의를 주멸하고 있습니다. 항복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용서하여 전과 같이 대우하고, 항복치 않는 자는 주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왕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교서왕은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그래서 편지 대신 직접 한군의 누벽으로 접근해 가서 머리를 땅에다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나 유앙은 한나라의 법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으며 천하 백성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장군을 괴롭혀 궁벽한 먼 나라에까지 오시게 했습니다. 저해(人肉을 잘게 썰어 젓담그는 형벌, 또는 짓이겨 죽이는 형벌)의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궁고후는 굳이 군을 지휘하는 종과 북을 쥐고서 말했다. "군사(軍事)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선 병사를 동원하게 된 경위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왕은 절하고 무릎으로 걸어나와 대답했다. "조착은 천자의 정권을 대행하는 신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가 고조황제께서 정하신 법령을 함부로 변경해 제후들의 영지를 침탈했습니다. 저희들은 그것이 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국이 병사를 동원해, 천하를 교란시키는 그의 정책을 응징해 장차 조착을 죽이려고 거사했던 바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들으니 조착이 이미 주살되었다고 하므로 저희들은 삼가 군대를 해산하고 귀국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퇴당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왕께서는 그토록 조착이 좋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셨다면서 어찌 한 번도 폐하께 상주하지 않으셨는지요." "그것은 오왕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조칙도 없었고 호부(虎符:出兵을 허락하는 割符)도 없었을 텐데 제멋대로 군사를 동원해 어찌 정의를 수호하는 나라를 쳤지요. 결국 이러한 점들로 판단해 본다면 왕의 참뜻은 조착을 주살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교서왕은 할 말이 없었다. "아니되겠습니다. 조서를 읽어드릴 터이니 모두 들은 후 왕 스스로가 자신을 도모하기 바랍니다." 퇴당이 조서를 꺼내 교서왕에게 읽어주자 그는 체념한 듯했다. "그렇습니다. 나같은 인간은 죽어도 죄가 남겠습니다." 드디어 유앙은 자살했다. 태후도 태자도 죽었다.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도 모두 죽었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조리 몰수되어 한나라의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장군 역기도 조나라를 포위해 10개월 만에 항복시켰다. 결국 조왕도 자살했다. 제북왕은 협박을 당해 반란군에 가맹했고 또 신하에 의해 감금되어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한 채 치천왕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초에 오왕이 주모자로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군을 병합 통솔하고 제나라, 조나라 등을 연합해 결국 1월에 기병해서는 3월에는 완전히 패한 꼴이 되었다. 오로지 조나라만 10개월을 버티다가 뒤늦게 항복한 것이다. 또 초의 원왕 유교(劉交)의 작은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초왕으로 삼아 원왕 유교의 뒤를 잇게 해 주었고,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를 오의 옛 땅으로 옮겨 강도왕(江都王)의 칭호를 주었다. 이로써 오, 초 7국의 대란은 정리가 되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왕 유비가 왕이 된 것은 그의 부친인 대왕(代王)의 죄를 덜어준 데서 기인한다. 그는 부세를 경감하고 민중을 사역해 산해(山海)의 자원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래서 교만해졌다. 반역의 싹은 그의 아들에게서 텄다. 쌍륙을 치다가 재난을 일으켜 자기 본가(本家)를 멸망시킨 꼴이다. 오왕은 만족인 동월과 친근해 종실인 한나라를 전복하려다가 오히려 멸망한 것이다. 조착은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세웠다가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었고, 원앙은 권모술수로 처음에는 총애를 받았으나 뒤에는 욕된 생애를 보냈다. 옛말에, '제후의 영지는 사방 백 리를 넘어서도 안 되고, 산해(山海)의 자원이 있는 곳에 제후를 봉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예기(禮記)>의 '왕제편(王制鞭)']. 또, '이적(夷狄)과 가까이 하느라 친족을 멀리하지 말라[출처 미상]'고 돼 있는데 이는 오나라의 경우를 두고 말함인가. 또한 '권모술수의 주동자가 되지 말라. 도리어 그 허물을 입게 될 것이다 [<주서(周書)>]'고 돼 있는데, 이것은 원앙과 조착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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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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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南捷徑(종남첩경) 終(끝날 종) 南(남녘 남) 捷(빠를 첩) 徑(지름길 경)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실린 이야기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시(詩)와 부(賦)에 뛰어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곧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심신을 수양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노장용은 정말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얻게 되었다. 부임 길에 오른 그는 몹시 기쁜 마음에 종남산을 가리키며 이 산 중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도다(此中大有嘉處)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마승정(司馬承禎)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벼슬을 하지 않고 종남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노장용의 말을 듣고는 그의 속뜻을 알아 차리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따름이다(仕官之捷徑耳).
終南捷徑이란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런 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지름길만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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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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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44.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니는 이유
동물 삶의 모습을 굳이 나눠본다면 혼자살이 하는 단독생활에서 개미, 벌의 사회생활, 영장류의 가족생활 등이 있고 또 이와 달리 무리를 짓는 군집생활, 물속의 산호 같은 군체생활을 하는 것도 있다. 한마디로 생물들은 제놈들이 살아가는 데 유리하게끔 나름대로의 방법을 개발해서 다양하게 살아간다. 돌, 바위 같은 무생물은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는가. 생물의 다양성, 가변성, 융통성, 적응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물고기들은 왜 떼를 짓고 다니며, 태어나서(부화 후) 언제부터 떼짓기를 시작하고, 어떤 물고기가 그렇게 하며, 어떻게 그렇게 수백만 마리까지 모이며, 또 모여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살아남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떼짓기를 하는 것에는 물고기말고도 하루살이, 새, 발정기의 뱀, 얼룩말, 사슴 등 그 예가 제법 된다. 고등한 포유류를 살펴보면 무리를 짓는 동물들은 호랑이 같이 혼자 따로 사는 힘센 동물이 아니라 얼룩말 같은 약한 동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고기의 떼짓기를 아름답다고 구경하지만...... 그러면 물고기의 떼짓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자. 여기서 얻은 의문이나 답은 다른 무리를 짓는 동물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동물에 따라 다 차이가 있다는 것도 참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고기들이 떼를 짓는 것을 민물에서는 거의 보기가 어렵고(은어, 연어가 바다에서 올라올 때를 제외하고) 모두가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민물에서는 갓 부화된 한배내기 잔챙이들이 더럭바위 밑에서 들락거리는 것을 볼 때가 있지만 큰고기가 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생각을 바다로 돌려 놓고 이글을 읽어나가길 바란다. 사실 물고기가 떼짓기를 하면 갈매기나 어부에게는 신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물고기 떼는 물고기가 규칙성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많이 모인 물고기 무리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하나의 본능적인 행위로 봐야 하고 해부학적 분화를 통해서 진화한 사회적 모임이라는 것이다. 몇 사람이 코마개를 하고 팔다리를 맞춰 율동하는 수중발레를 볼 때면 물고기 떼가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고기들도 움직여 나가는 것을 보면 머리방향, 몸의 간격이 같고 옆의 것과는 끼리끼리 평행하게 한 놈처럼 정확하게 몸놀림을 한다. 그런데 물고기는 새떼처럼 앞서 나가는 리더가 있는 것이 아니고 떼의 사방 가장자리에 있는 놈들이 때에 따라 대장이 되어 앞으로 가다가 또 옆으로 방향을 틀면 옆 가장자리에 있던 놈이 대장이 된다. 일사분란하게 앞으로 가다가 옆으로 돌아가고 그러다가 또 앞으로 가는 그들의 행동은 날렵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수조 속에서 떼를 지어 움직이던 놈들에게 먹이를 주면 중구난방으로 규칙성과 통일성이 무너지고 만다. 어궤조산이란 이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고기떼의 특성을 보면 수백만 마리가 하나같이 크기가 비슷한데 크기에 차이가 나면 속도 조절이 어려워 그런 것이고(큰놈일수록 빠르다) 고기 종류에 따라 고기떼의 전체 모양이(하늘 위에서 볼 때) 다르며 이것들이 3차원적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어떼는 하늘에서 보면 큰 아메바 모양을 하는데 어떻게 왜 그런 떼를 지우는 것일까. 고기들이 일정한 간격(공간)을 유지하면서 같은 속도로 평행하게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다가 어떤 자극이 나타나면 그것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동일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며 종마다 다른 특징을 나타내는 본능현상으로 통합된 중앙조절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랑어떼]
바다에 사는 어류 중에서도 떼를 짓는 놈은 2,000종이 넘는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등어, 청어, 다랑어, 숭어 등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바다에 뿌려 놓은 알이 까여 자라면서 떼를 이루는데 부화 직후에는 떼를 짓지 못 하고 일정한 크기가 되었을 때 떼짓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두마리가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만나서 방향을 틀면서 나란히 가고 그 뒤를 따라 다른 두마리가 따라오고, 두마리 옆에 또 다른 한 마리가 달라붙으면서 점점 큰 떼를 이룬다. 이런 행동(경험)이 축적되면 작고 약한 자극에는 자극 쪽으로 반응을 일으키나 큰 소리나 물리적 충격 등 강한 자극에는 피해가는 것이 새끼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강가 바위 밑에서 눈챙이들이 노니는 것에서도 같은 반응을 볼 수 있다.
물고기 새끼를 재료로 한 엉뚱한 실험 한 가지를 소개하면, 지금처럼 친구 만나 떼짓기를 배우는 시기에 치어들을 무리에서 격리시켜봤더니 사망률이 엄청나게 높아지더라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떼 속에서 산 놈들은 백에 한 마리가 죽는데 반해서 따로 수조에 넣은 놈들은 사망률이 열 배나 높다는 것이다. 통계란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열 배나 차이가 난다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 여러 마리 같이 자라는 놈들은 부화 후 뱃속에 아직 알막 속에서 먹다 남은 난황이 남아 있는데도 던져준 먹이를 먹기 시작해 격리시킨 놈에 비해서 섭식 시작 시기가 훨씬 빠르더라는 것이다. 물고기나 공작이 그렇고 원숭이도 장난치면서 놀아줄 친구가 있어야 한다. 이런 관찰이 있다. 한 마리의 공작 수놈이 있었는데 옆방에는 (철망이 막고 있다) 코끼리거북이가 있어서 어려서부터 같이 컸다고 한다. 수놈 공작이 이제는 커서 발정기가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암놈 공작한테 멋진 사랑의 나래를 펴는 것이 아니라 못난 코끼리거북이 쪽으로 몸을 돌려 날개짓을 하더라는 것이다. 어려서 공작과 같이 못 자란 그 수놈 공작은 그 거북이가 친구로, 짝으로 각인된 것이다. 또 원숭이를 키우면서 세 부류로 나눠 키워봤다고 한다. 우리 속에 혼자 가둬 키운 놈, 격리시켜 키우지만 가끔 친구들과 놀게 한 놈, 자유롭게 어울려 자란 놈 등. 독자 여러분은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분명한 것은 동물이나 아이들이나 자라면서 형제자매(친구)와 어울려 싸우고, 장난을 하면서 커야 사회성도 뛰어나고 적응력도 강해진다는 것이다. 장난치는 일은 모두 어린 동물들의 본능이라 보면 된다. 강아지 새끼나 곰돌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물고기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들 물고기도 새끼들이 서로 때지어 살 때 튼튼하게 잘 큰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를 공작, 원숭이 이야기로 보태봤는데 사람도 자식을 많이 낳아 키워야 튼튼하게 자란다는 것을 이 물고기에서도 배울 수 있다.
이번엔 격리시켰던 새끼 물고기를 떼를 지어다니는 수족관에 다시 넣어봤더니 처음에는 일정하게 움직이는 친구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무리와 떨어져 있는 등 시행착오를 계속하더니 4시간 정도가 지나자 친구들과 같이 행동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올챙이가 떼짓기를 할 때 서로 냄새를 맡아 모인다는데 이놈들도 그런 것일까. 이렇게 떼를 지어 다니면 어떤 점이 유리할까. 첫째, 떼를 짓는 데는 시각적인 것이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물고기들이라는 말이다. 눈이 성하지 못한 놈은 떼를 이루지 못하고 외눈박이는 성한 눈 쪽에 항상 떼거리가 있는 것을 관찰 할 수 있다. 물고기는 원시이기 때문에 흐릿한 상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이런 실험을 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물고기 눈에 콘택트 렌즈도 붙여 봤다고 하니 우습기도 하지만 외경스런 느낌이 든다. 둘째, 시각말고도 청각이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가 백령도로 채집을 갔을 때 팔십 노인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연평도에서 조기잡이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조기떼가 연평도로 산란하러 밀려 올 때는 '조기소리'가 꼭 우~ 하는 바람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이 바로 떼를 짓기 위해 물고기들만이 알아듣는 교신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물을 가르면서 차고 나가는 소리가 고기 종류에 따라 다르고 그래서 조기떼는 '조기소리'를 내는 것이다. 셋째, 다음과 같은 실험에서 고기들이 시각적인 것 외에도 떼를 짓게 하는 또 다른 기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기떼 사이에 투명한 유리 칸막이를 두고 관찰해봤더니 처음에는 서로 가까이 가서 마주보고 관심을 나타냈으나 나중에는 흥미를 잃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것인데 이것은 곧 맛이나 냄새가 관여할 것이라는 증거다. 넷째, 어류의 감각기관에 수온, 수압, 화학물질 등을 알아내는 측선이 있어서 진동과 수류까지도 감지를 하니 이 기관이 떼짓기에 중요한 일을 할 것이라고 본다. 측선을 옆줄이라고도 하는데 물고기의 머리에서 꼬리 쪽으로 배 중간을 질러 나 있는 것으로 현미경으로 보면 비늘에 구멍에 뚫려 있고 그 아래까지 신경이 분포해 있다.
어쨌거나 앞에서 기술한 여러 방법으로 떼를 짓는 어류가 무척 많다고 하니 살아가는 수단 중에서 성공한 행동이라고 봐도 되겠다. 이들은 모두가 작고 납작한 가슴지느러미를 가져서 행동이 느린 편이고 먹이가 있어도 뒤로 바로 몸을 틀지 못하고 한바퀴 빙 돌아와서 앞으로 헤엄쳐 가는 물고기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떼짓기 현상은 어떤 적응현상이라고 봐야 하겠는가. 첫째, 큰 물고기 떼가 움직여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면 포식자가 겁을 먹을 것이고, 실제로 먹을 것이 너무 많으면 천적은 어느 것도 먹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다고 한다. 둘째, 떼를 지어 먹이를 먹는 것을 소시얼 피딩(social feeding)이라 하는데 격리된 놈들보다 떼를 지어 다니는 놈들이 더 많이 먹는다고 한다. 닭에게도 힘센 놈 순서대로 먹이를 먹어대는 페킹 오더(pecking order)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경우는 혼자서 모이를 실컷 주워먹고 배가 불러 있는데도 다른 놈들이 달려와서 제 앞에 남은 것을 먹기 시작하면 그놈도 시샘하여 경쟁적으로 더 먹는다. 셋째, 떼를 지어 다니면 먹이 찾기가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먹이 떼를 만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고 넷째, 멀리 이동할 때 혼자 가는 것보다 힘이 덜 든다는 것으로, 앞에 간 놈들이 이뤄 논 소용돌이를 타고 가기 때문에 훨씬 쉽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암수가 여러 마리 같이 있어서 산란기의 짝짓기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가 있고 산란과 방정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수정될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유리한 점이 있다.
물고기들 중에도 보통 때는 따로 살다가도 산란기에는 떼짓기를 해서 산란을 해서 산란, 방정을 한다고 하니 떼짓기는 생식방법으로는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렇게 물고기 한 마리의 행동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까닭이 들어 있다. 우리가 관찰하고 실험한 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에 대한 앎은 아마도 1퍼센트가 못 되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연구도 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이렇게 어렵사리 자연계를 연구하는 것은 그들을 거울 삼아 우리를 그들에게 투영해보자는 것이다. 이 해맑은 자연의 거울에 먼지를 끼게 한다거나 흠집이 나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거와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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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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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장 - 서문
그리스 사람들은 헬렌의 후예라 하며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자부한다. 오늘날 나라의 공식 명칭은 Hellenic Republic이며 간단히 헬라스라 부른다. 헬라스는 옛 테살리아의 한 도시 혹은 아소포스 강과 에니페오스 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지칭한다. 라틴어로는 그리스의 한 옛 지역 이름을 본떠, 혹은 그리스인이 이탈리아 남부 식민개척지에 위대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고 이를 마그나 그라이키아(대그리스)라 한 데서 그라이키아 및 그라이키라 불렀으며 이에 연유하여 현재 영어로는 Greece 및 Greeks, 불어로는 Grecque 및 Grece, 포르투칼어로는 Gresia라 한다. 동양에 있어서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헬라스의 발음을 수용하여 희랍이라 하고 일본은 포르투갈어 Gresia를 음역하여 기리시아로 쓴다. 서구인은 그 나라의 고대 문화와 정치체제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greek 혹은 grecque라는 낱말을 협잡꾼, 도박꾼이라는 뜻으로 전용하고 있어 과거 그리스 사람을 기피하는 심정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나라 선조 헬렌에게는 아리올로스, 도로스 및 크수토스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 각각의 후손들은 아이올리아인, 도리스인 및 이오니아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오니아는 크수토스의 아들 이온에 연유한다. 언어상으로도 각각 아이올리아 방언, 도리스 방언 및 이오니아 방언이 있으며 여기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방언이 생겨났다. 언어학자에 의하며, 사포의 시(기원전 611년경)와 알카이오스의 시(기원전 606년경)는 레스보스의 아이올리아 방언이며, 보이오티아 태생으로 테베에서 수학한 핀다로스의 일부 시(기원전 490)는 보이오티아의 아이올리아 방언에 일부 도리스 방언이 섞여 있다.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기원전 800년경)는 고대 이오니아 방언으로 서술하였고, 헤로도토스(기원전 420),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30), 투키디데스(기원전 423), 플라톤(기원전 399)등의 시문은 아티카 지방의 이오니아 방언으로 쓴 작품이다. 알렌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4~323)의 통치 영역이 동방세계로 확장되면서부터는 코이네(주로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라고 하는 표준말이 보급되었고, 아테네 크세노폰의 저술과 알렌산드리아 등지의 문학작품, 신약성경은 모두 이 코이네로 쓰여졌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에 그리스 신의 신성을 결부시킨 로마 신화는 서구세계의 문화 유전자로 깊숙이 스며 있어 지울래야 지울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문화의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원래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한 것이고 로마시대에 와서는 라틴어로 번역 계승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그리스어 원본과 라틴어 판을 기초로 여러 나라 말로 옮겨져 번역판과 관련 논문 및 논설이 수없이 출간되고 있다. 자연히 신화에 나오는 고유 낱말과 발음 표기는 시대나 지역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고 각 나라 언어의 운에 맞추어져 변형되었으며 낱말 표기에도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학자간, 또는 번역자 간에 적지 않은 이견이 제시되어 근래에 와서는 될 수 있는 한 그리스어 낱말의 원형과 원발음을 반영하고자 하는 정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말 음역으로 적고, 또한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된 라틴어 음역과 영어 번역음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였다. 또한 그리스어의 고유 낱말의 장모음은 별도 표기하지 않았다. 낱말의 알파벳 철자는 영어 표기 방식에 따랐다. 낱말 어간의 철자는 영어(혹은 불어, 독어 등) 표기에서도 그리스어 어간의 철자와 큰 차이 없으나 어미의 표기에 있어서는 라틴어, 영어, 불어 등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어미 os와 us, lia와 ly, ce와 cia, ion과 ium, ia와 ea, d와 s는 서로 병용하고, 통용하는 낱말들의 융통성을 두어 획일화시키지 않고 또한 어미 생략 표기방식도 같이 적용하였다. 그리스어에 대한 이해 범위가 한정된 소위 'Greekless Greek'(번역물에만 의존한 그리스 문학 연구를 빗대는 말) 초보자로서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무리인 동시에 사족인 줄 안다. 이 기록은 신화 입문자의 초보 기록으로 체계를 세워 저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정리한 것도 아니다. 다만 보고 읽고 한 그리스의 신화 및 고대사의 인식을 보다 깊게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의향과 실용성 또한 개인적 선호성에 따라 적어 본 것이다. 첨부해서 말하면 아이들에게 직접 이야기로써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전할 소질이 없어 신화의 개요를 알린다는 의도도 갖고 정성을 다 해서 엮었으나 두찬을 면치 못하였음을 밝혀 둔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그리스의 자연 현 그리스의 면적은 남한은 1.3배, 경작지는 20% 이내로 국토의 5분의 4가 산지이며 1000m를 넘는 높은 산이 흔하다. 이 나라 산중에서 최고봉은 2,917m의 올림포스 산봉으로 신화시대에는 주신들의 상징적 주거지로서 외경하는 성역이다. 고지대에는 나무와 숲이 있으나 대부분의 높은 산은 석회질 절벽의 민둥산이며 중턱부터 완만한 고원 경사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옛 켄타우로스족이 살았던 테살리아 고원은 800평방km가 넘는 비옥한 목초지이며 말 사육지로 이름 높다. 고원의 계곡을 흐르는 이 나라 최장의 강 페네이오스는 2000km가 넘는 긴 강이지만 상류는 물살이 세고 하류는 완만하나 수심이 얕아서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내륙 골짜기는 좁아서 겨울 우기에 계곡의 하천이 범람하며 겨울이 지나면 건조기로 들어가 하천은 계속 말라붙어 자연의 혜택이라곤 거의 없다.
원래는 산야에 나무가 많아 소나무를 비롯한 플라타너스, 느릅나무, 떡갈나무 등 거목이 무성하여 날짐승과 들짐승이 우글거렸으나 원시시대부터 가옥, 목선, 숯을 만든다고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말았다. 따라서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무성한 숲은 자취를 감추고 산지나 언덕은 지금과 같은 메마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무지한 주민은 별 수 없이 땡볕과 바윗돌, 우기에는 광란하는 물결에 몸을 맞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산지와는 달리 육지 둘레의 바다-지중해는 문자 그대로 대지 한가운데에 있는 풍광 명미한 고요한 내해로, 겨울철을 빼놓고는 천혜의 낙원이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쪽빛 바다의 뱃길은 그지없이 상쾌하고 삶의 즐거움을 솟게 한다.
고대에는 지정학적으로 소아시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키프로스, 크레타, 키클라데스를 거쳐 점진적으로 북상하여 그리스 본토에 전파되고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의 큰 땅덩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지세로 보아 북쪽 본토의 짧은 줄기에 달린 큰 섬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 와서 줄기 부위인 코린 토스 협부를 개척,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개통시켜 섬으로 만들고 교량을 가설해서 육로를 소통시켰다. 이 나라 해안선은 굴곡이 심해서 도처에 만과 곶이 있고 해안선이 이오니아해, 에게해, 지중해로 매우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의 왕래나 짐을 나르는 데는 언덕을 넘어야 하는 육로보다 배를 이용하는 바닷길을 선호하여 해운이 발달하였다. 남쪽 전설의 고장 크레타는 지중해섬들 중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키프로스, 코르시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높은 산들과 산맥이 군데군데 끊긴 대형 협곡이 산재하고 최고봉은 이다 산의 타원형 단일봉 티미오스 스트라브로스(2,425m)이다. 섬의 해안선은 1000km가 넘고 기원전 2000년경 해안을 끼고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은 가장 유서가 깊고 이름나 있다. 에게해의 중앙 부위에는 델로스를 둘러싼 한 무리의 섬들이 점철하는데 이 군도를 키클라데스라 한다. 여기에는 기원전 3000년경 이미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대부분 석회질 바위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지각변동이라는 대역사는 아티카, 에우보이아 산맥의 동남쪽 연줄을 바다 속으로 내려 놓아 높은 산봉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동쪽으로 가서는 다시 아시아의 산맥으로 이어진다.
북쪽 산악지대는 겨울철에 몹시 춥고 눈이 많은 대륙성 기후로 옛적에는 인구가 희박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쪽 해안지대와 에게해 섬은 아열대의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로 사철 내내 밖에서 지내도 큰 지장이 없다. 겨울철 우기에는 서해안 쪽에 비가 많고, 동해안 쪽에는 비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많다. 봄.여름.가을철은 대체로 많은 날이 이어지고, 초여름에서 늦가을까지 햇볕이 따가워 개울물이 줄어들고 초목이 시들며 말라 버린다. 해변은 해풍으로 견딜만 하고, 햇볕이 그리워 찾아오는 인파가 비취색 지중해 해안으로 모여든다. 태양열로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시원한 그늘진 곳을 찾는 모습은 일찍이 기원전 5~4세기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도 희극시 '말벌'에서 "나귀 그늘을 차지 하느라 다툰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평지에는 곡물을 심기도 하나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므로 가뭄을 타지 않는 올리브, 포도 또는 더위에 강한 실과나무를 심으며, 생산되는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예로부터 이 나라의 주요 산물이 되었다. 언덕은 목축지로 이용하여 양이나 산양을 기르고 있으나 소를 키우는 데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경작지의 부족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외국에서 조달해야 했다.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7세기 솔론 시태부터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곡물, 특히 소맥의 수입을 무엇보다 중요한 시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곡물은 주로 흑해 연안의 여라 나라와 이집트에서 들여왔고, 따라서 흑해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트 해협을 지키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기원전 1240년 미케네가 유괴당한 헬레나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트로이 성을 공략하여 헬레스폰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장장 10년에 걸쳐(기원전 1240~1230) 전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아테네는 북위 38도선에 위치한 그리스 수도로 인구 1100만 명중 400만 명이 시내와 근교에 거주한다(1995년 현재). 고대에 신전과 성채들로 들어찼던 아크로폴리스는 156m의 언덕으로 페르시아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된 것을 승전 후 아테네의 전성기를 구가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 우아하고 찬란한 구조물과 조각상을 재건립한 성역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신전의 돌기둥, 부조된 박공, 대들보 등의 조각만이 옛 영광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옛 아테네인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감동적 유적이다. 자연은 거기에 자리한 생물, 인간의 생활과 얼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빈곤을 극복하는 강인성과 자립심이 유달리 돋보이며 쾌청한 기후 조건을 배경으로 쾌활한 심성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감성에는 각별히 찬사를 보내고 신체단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으며 연극 경연에 열정을 The아 도시마다 또한 신전이 있는 곳마다 우아한 원형극장과 경기장을 설치하여 축제를 올렸다. 조각예술의 장인은 자연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사유를 지니게 되었다. 교역의 길로서 일찍이 해운이 발달한 바다는 그리스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바다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무대였으며, 또한 이 바다를 통해 건너온 해외 문물에 접하여 독특한 헬레네스 문화를 꽃피워 낼 수 있었다.
그리스 사람은 어느 민족에 못지 않은 강렬한 조국 사랑의 혼을 가지고 있다. 종교 이상의 정서가 지배하는 이 혼은 오랜 역사의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리스(그리스어로 말한다면 바로 헬레네스)를 강고하게 지켜 오는 힘이 되었다. 오랜 오토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고자 1821년 총궐기하여 항쟁하는 헬레네스의 용사를 위해 솔로모스는 다음과 같은 해방의 송시를 발표하였다.
당신의 날카로운 공포의 칼날은 해방을 이루게 할 줄 아나이다. 당신의 빛나는 광채는 국토를 비추어 줌을 잘 아나이다. 거룩한 폐허에서 되살아나는 헬레네스의 위대성과 자유 지난 날처럼 용감하여라! 만세 만세 오! 우리의 해방!
이 송시 158연 중에서 첫 7연이 1865년 그리스의 국가로 채택되었다.
고대문명 문화와 문명이라는 말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낱말을 대비시켜 비교적 물질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사회의 편리를 위한 발전적 소산은 문명(Civilization)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바 큰 성과를 문화(Culture)라 하는 견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는 예술.도덕.종교.학문 등 인간의 내적 정서 활동의 소산을 가리키고, 주로 언어와 얽혀 있다.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를 만들어 시민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독일 문화철학에서는 문명에 대비하는 문화상위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독창적인 정신 소산을 문화라 하며, 현실적 인간 생활 영위에 요구되는 합리적 수단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류발달사에 있어서는 야만, 미개에 이어지는 단계를 문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스에는 구석기시대에도 주민이 있어 문명을 지닌 흔적이 있고 신석기인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나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2000년간 융성한 에게 세계를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그리스의 초기 문화와 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후반까지 이뤄진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기원전 2200~1400)이다. 그리스 본토 문명(기원전 1600~1200)과 구분되는 키클라데스 문명도 특징적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의 빛나는 유물, 예컨대 옥제품이나 대리석 조각상, 항아리 등의 발굴로 입증되었으며 미노아 문명이나 헬라스(미케네) 문명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기원전 1600~1400)에 이르러 상류사회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궁전과 정원, 대리석 층계로 이은 웅장한 고층건물, 발달된 위생시설을 갖춘 거실, 침실, 광 등을 미로형으로 배치하였다. 상쾌한 채색벽화는 이 시대 사람의 모습과 습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굴자 에반스는 멋들어진 한 여인의 프레스코 초상회에 '파리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전, 가옥 및 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귀중품, 생활용품, 상아조각상, 광택 있는 홍색 고급토기, 정교한 금동제 기물들, 석각인, 반지 등은 그들이 누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는가를 뒷받침한다. 부유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락으로서 장기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운동경기를 즐겼으며 왕과 여러 신, 특히 뱀여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의 교역과 접촉으로 해외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기념비적 문명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장식적 예술을 창안하였으며 그 문화는 인근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었다. 테라(산토리니) 섬 유적, 특히 아크로티리 도시의 출토물은 크레타 유적과 맞물려 플라톤의 대화편(기원전 4세기)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실체라고 추리하는 견해도 거듭 나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 초반, 크레타와 주변 섬에 관련이 있는 인종과 소아시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침투 혹은 침입하였다. 청동기시대 중반 기원전 2000년 직후에 그리스 본토는 두 차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재 그리스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북방 코카서스의 아리안 인도족이 들어와 점차 융화되었다. 초기 그리스인은 에게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크노스스에 나라를 건설한 후 점차 섬을 넘어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서방으로는 리파리 제도, 이스키아, 남부 이탈리아로 뻗어나가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를 크게 확산시켰다. 본토인은 크레타의 성숙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미로식 궁전은 성채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내부 장식벽화, 작은 조각품, 금속공예, 항아리 등은 크레타의 그것과 유사하며 흔히 미케네 문명으로 불린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1600~1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문명의 후반기인 기원전 1400~1100년은 그리스의 영웅시대라 하며 아가멤논 왕의 세력권 아래 있던 미케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 전쟁을 감행하였다. 트로이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청동기 말기에 미케네족은 멸망하고 많은 도시가 파괴 소각되었다. 멸망의 일부 원인은 먼 혈연의 도리스인이 일리리아인의 대이동에 밀려 침입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북방에서 새로운 그리스족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 후예의 귀환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토착문화를 덮치면서 문화 수준이 하락하고 건축, 항아리 모양등이 완연히 달라졌다. 이 시대에 특기해야 할 유물은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서판이다. 크레타에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림표기가 있었으며, 중기에는 드물지만 상형문자가 나타나는데 말기에는 2획문자로 선문자 A(기원전 2000~1500)와 선문자 B(기원전 1500~1100)가 등장하였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선문자 B는 1952년 벤트리스가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문자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이다. 서판의 기록은 영구적 문서가 아니고 그때 그때에 기록해 둔 비망록 정도에 불과한데, 기원전 1400년경의 화재로 점토서판이 구워지는 바람에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밖에 기원전 1200년경 불에 탄 본토 도시 퓰로스의 서판은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진 점토판으로 대량 출토되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단지의 무늬에 연유하여 기하학기로 부르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이 무늬단지는 500년간의 암흑시대에 드물게 남겨진 유물이다.
기원전 8세기경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암흑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알파벳 문자가 보급되어 다시 예술, 철학, 서사시(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세이아)가 정착하여 고전문화가 가꾸어졌다. 각 도시마다 독자적인 화폐가 주조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달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외침을 받으면 국가 간에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올림피아 축제기간이나 질병 등의 극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중지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분립주의는 폴리스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났고, 빈약한 영토에서 발전된 정치제도는 앞서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개방적이고 시민 개개인의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단 이러한 모든 시민(여자.어린이.노예는 제외)의 참여는 오직 소규모 정치단위들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아테네와 그 주변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이며, 서구의 지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스는 그의 저서 '고대 그리스사'의 권말에서 "대다수 그리스인들이 그들 문명의 독특한 장점이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생각에 동의하길 주저할 까닭은 없으며 또 그 자유의 현상을 그리스인들이 의도하였던 정치영역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우리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걸작품을 바라볼 때는 물론이고 일상적 사항을 볼 때조차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우리 세계와는 판이한 것이면서도, 그들을 움직였던 문제들이 오늘날의 문제와 대체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두 세계는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연구는 그저 기원을 알고자 하는 호고성 탐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유리피데스와 플라톤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고, 나아가 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맺음말은 서구인의 의향이며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지 이제 100년이 넘고 더구나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현대화 물결에 휩싸여 온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하고 의미있는 충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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