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9. 시간-슬픔-죽음
나는 신에게 가서 진리를 가르쳐달라고 한 어떤 위대한 제자에 관한 얘기를 되풀이하고 싶다. 이 가난한 신은 <친구여, 날이 몹시 덥다. 물 한 잔 마시게 해다오>하고 말했다. 그래서 그 제자는 그가 만난 첫 번째 집 문을 두드렸고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문을 열었다. 그 제자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해서 7, 8명의 아이들을 가졌다. 그러다가 어느날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또 내렸다-급류는 넘치고, 거리는 물에 잠기고, 집들은 떠내려갔다. 제자는 그의 아내를 꼭 붙잡았고 아이들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떠내려가게 되자<하느님, 저를 구해주소서>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가 부탁한 물잔은 어디 있는가?>고 말했다.
이 이야기가 왜 훌륭한 이야기냐 하면 우리들 대부분이 시간에 의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에 의해 산다.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의 즐겨하는 도피의 게임이 되어왔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서의 변화가 시간 속에서 이룩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 속에서의 질서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고 하루하루 증가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질서나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점진성에 의해 생각하기를 그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화롭게 안주할 내일이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순간에 질서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진짜 위험이 있을 때 시간은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거기엔 즉각적인 행동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많은 문제들의 위험을 알지 못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시간을 만들어 낸다. 시간은 우리 자신들 속에 변화를 가져오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므로 사기꾼이다. 시간이란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놓은 운동이며, 인간이 그걸 쪼개는 한 그는 항상 갈등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인가? 우리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증오하고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길이 있다는 걸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이 삶-지금 보는 바와 같이 괴물스럽고 무의미하게 만드는데 우리가 도와온 이 삶을 변화시키고 문제를 풀려면 시간의 문제를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맨처음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마음의 신선함과 천진성을 가지고 보아야만 시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문제들에 관해 혼란되어 있으며 그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만일 누가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가 맨처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선 발을 멈추고 선다, 그렇지 않은가?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혼란되어 길을 잃으면 잃을수록 우리는 사방으로 좇아다니고, 찾아 헤매고, 캐묻고, 요구하고, 구걸한다. 그러므로, 우선 해야 할 일을 나더러 말하라면, 그것은 당신이 내적으로 완전히 정지하는 일이다. 당신이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완전히 정지하는 일이다. 당신이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지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매우 평화로와지고 아주 맑아진다. 그러면 당신은 이 시간의 문제를 정말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쟁점과 불완전하게 만날 때, 문제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쟁점과의 불완전한 만남이 문제를 낳는다. 우리가 어떤 도전과 부분적으로, 단편적으로 만날 때, 또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할 때-즉 우리가 완전한 주의력없이 그것을 만날 때-우리는 문제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불완전한 주의를 계속하는 한, 요 며칠 사이에 해결하고자 하는 한, 문제는 계속된다. 당신은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대순의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 시간을 아는가?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간격이다. 생각이란 분명히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다-즉 그것은 안전하려는 생각이다. 행동은 언제나 즉각적이다. 그것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미래의 것도 아니다.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 속에서이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러나 행동은 아주 위험하고 아주 불확실한 나머지,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안전함을 줄 거라고 기대되는 생각에 순응한다.
당신 자신 속에서 이것을 관찰하자. 당신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당신 자신과 사회에 관한 이념적 개념을 갖고 있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 따라서 행동은 그 생각과의 일치, 그 생각에의 접근에 있어서의 그것이며, 그래서 거기엔 항상 갈등이 있다. 생각, 간격 및 행동이 있다. 그리고 그 간격 속에 시간의 전장이 있다. 그 간격은 본질적으로 생각이다. 당신이 장차 행복해질거라고 생각할 때, 당신은 시간 속에서 어떤 결과를 성취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는다. 생각은, 관찰을 통해서, 욕망을 통해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간 생각에 의해 유지된 그 욕망의 계속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장차 나는 행복해질 거야. 장차 나는 성공할 거야. 장차 세계는 아름다운 곳이 될거야.> 그래서 생각은 시간인 그 간격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내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을 만큼 완전하게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시간은 슬픔이기 때문이다. 즉 어제 또는 수많은 어제로 되어 있는 지난 날, 당신은 사랑했고, 혹은 지금은 가버린 친구를 가졌었으며, 그리고 기억은 남아서 당신은 그 쾌락과 고통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당신은 돌이켜 보고, 원망하고, 희망하고, 후회하며, 그래서 생각은 그걸 되풀이하면서 우리가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을 키우고 시간에 연속성을 준다.
생각에 의해 키워진 이 시간의 간격이 있는 한, 거기엔 슬픔이 있고, 공포의 연속이 있을 터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간격이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게 과연 끝날까>하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생각이고, 당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당신은 간격을 갖는 것이요 그래서 당신은 다시 붙잡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중대한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죽음을 알며, 그게 매일 당신 옆에서 걷고 있다는 걸 안다. 도대체 당신이 그것(죽음)을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완전하게 그것을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을 그렇게 만나려면 그것에 관한 모든 신념, 모든 희망, 모든 공포가 끝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어떤 결론, 이미지, 미리 생각한 불안을 가지고 그 별난 것을 만나며, 그리하여 당신은 시간과 더불어 그것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간격이다. 즉 관찰자-당신-는 죽음이라고 불리우는 그것을 만나기를 두려워 한다. 당신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즉 당신은 그것에 관한 모든 종류의 희망과 이론을 갖고 있다-당신은 재생이나 부활을 믿으며, 또는 무시간적이고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바 영혼, 아트만atman, 정신적 실체라고 말해지는 어떤 것을 믿는다. 그러면 당신은 영혼이 있는지의 여부를 스스로 알아낸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당신에게 물려진 생각인가? 생각을 넘어선 영속적이고 연속적인 어떤 것이 있는가? 만일 생각이 그것(죽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각의 장 안에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영속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생각의 장 안에는 영속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속적인 것은 없다는 발견은 엄청나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마음은 자유로와지고, 당신은 볼 수 있으며, 그러면 거기엔 커다란 기쁨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이 그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죽음은 말이며, 공포를 낳는 것은 이 말이요, 이미지이다. 그러면 당신은 죽음의 이미지 없이 죽음을 볼 수 있는가? 생각이 솟아나는 원천인 이미지가 존재하는 한, 생각은 언제나 공포를 낳아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죽음의 공포를 합리화하고 그 불가피한 것에 대항하든가 아니면 당신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당신은 수많은 믿음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당신과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 사이에는 틈이 있다. 이 시공의 틈 속에 공포, 불안, 자기연민인 갈등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죽음의 공포를 키우는 생각은 이렇게 말한다. <그걸 미루자, 그걸 피하자, 될 수 있는대로 그걸 생각하지 말자>-그러나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당신이 <나는 그걸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 당신은 이미 그걸 어떻게 피할까를 생각한 것이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한 까닭은 당신이 그걸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갖고 있으며,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공포이다. 그 간격, 그 시간은 공포가 낳은 것이다. 삶은 황홀한 바다로 향한 창을 가끔 여는 나날의 괴로움, 나날의 모욕 그리고 슬픔과 혼란이다. 그것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죽음이란 그 비참(고통, 불행)을 끝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부딪치는 것보다는 아는 것에 매달리는데-즉 우리의 집, 우리의 가구, 우리의 가족, 우리의 성격, 우리의 일, 우리의 지식, 우리의 명성, 우리의 외로움, 우리의 신들이 우리가 아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그것 자체의 쓰라린 실존의 틀에 갇혀서 그것 자체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우리는 삶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저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이 나날의 삶의 싸움이 삶인지 아닌지 물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재생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영혼의 살아남음에 대한 증거를 원하며, 천리안의 주장과 심령 연구의 결과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결코 묻지 않는다-즉 어떻게 매일 기쁨과 아름다움을 갖고 살 수 있는가는 묻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과 절망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락했고 그것에 익숙해졌으며, 죽음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때, 죽음은 엄청나게 삶과 비슷하다. 당신은 죽음 없이 살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매순간 심리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당신은 살 수 없다. 이것은 지적 역설이 아니다. 하루하루 마치 그것이 새로운 아름다움인 양 완전하게, 전적으로 살려면 어제의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당신은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고 기계적인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또는 자유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는 산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며, 따라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불안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안전이 없다는 걸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운동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갈등 없이 사는 사람, 아름다움 및 사랑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가족, 기억, 당신이 느낀 모든 것을 포함한 모든 아는 것에 대해서 죽는다면, 그때 죽음은 정화이며 다시 젊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면 죽음은 천진성을 가져오며, 오직 천진한 사람만이 정열적이고,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을 믿거나 알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당신이 죽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정말 알아내려면 당신은 죽어야 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야 한다-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내적으로, 당신이 소중히 품어온 것들과 쓰라려 하는 것들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쾌락중의 하나에 대해서,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에 대해서, 아무 강제나 논의없이 자연스럽게 죽었다면, 비로소 당신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완전히 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의 일상적인 원망, 쾌락, 괴로운 걱정들을 비우는 걸 뜻한다.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변화이며, 그 속에서 생각은 기능을 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을 때 거기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죽음이며, 그러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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