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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82호
2012.7.6 (음 5.17)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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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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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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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임무는 지구를 떠맡는 노릇이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물려받는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적 상상력이 없으면 인간과 믿음 그리고 과학이 함께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 - 제이컵 브러노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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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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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기
“오늘 엠비시 앞에 뜬 ‘밥차’에서 삼계탕을 받아먹었다. 회사 식당이 바로 코앞인데, 밥상 차린 곳은 엠비시 남문 길바닥이었다. 여기저기 빚 많이 진 형편에 ‘삼계탕 빚’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빚을 어찌 다 갚을지, 걱정이다. 고마운 이웃들, 시청자 여러분!” 지난 월요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영양센터’라 간판 내건 통닭집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닭고기는 보양식이니, 그 행사에 함께한 모든 이는 삼계탕 한 그릇에 ‘끼니’ 이상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삼계탕, 통닭만큼이나 인기를 끄는 게 ‘닭도리탕’이다. “연구자들은 ‘닭도리탕’의 ‘도리’를 일본어 ‘도리’(とり)에서 온 것이라는 결과를 내놓았으며, <우리말어원사전>(1997)은 ‘도리탕’의 어원을 ‘(일)鳥/鷄[tori]+湯>도리탕’으로 제시하고 있다.”(국립국어원 누리집) 그래서 제시한 순화어가 ‘닭볶음탕’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도리’가 ‘도리다’(둥글게 빙 돌려서 베거나 파다)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에 바탕을 둔 주장은 김형주 독자(2007), 김선철 국어원 연구관(2008), 예종석 교수(2010) 등이 <한겨레>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올해 초에 소설가 이외수씨도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닭도리탕 논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것 같다.
‘닭볶음탕’은 문화부가 발표한 <식생활 관련 용어 순화집>에 ‘닭도리탕’의 순화어로 공식 등장한다. 20년 전인 1992년의 일이다. 이때 함께 나온 것 중의 하나가 ‘다진 양념’이다. ‘다대기’는 ‘두드리다, 다지다’는 뜻의 일본어 ‘다타키’(たたき)에서 온 것이니 순화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함경도 지방을 대표하는 함흥냉면에는 고춧가루 양념이 애용되어 ‘다대기’라는 말이 이곳에서 나왔을 정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라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우리말큰사전>(1995)은 ‘다대기’를 우리말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벗기다 / 베끼다
'끝이 없는 새로운 매력을 지닌 사람'을 표현할 때 "베껴도 베껴도 속을 모르는 양파 같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양파의 껍질을 '베껴'서는 양파 같은 이의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없다. 흔히 '벗겨 내다'는 의미를 나타내고자 할 때 "아이의 옷을 베꼈다" "묵은 때를 베껴 냈다"와 같이 '베끼다'를 사용하지만 이는 "아이의 옷을 벗겼다" "묵은 때를 벗겨 냈다"의 잘못된 표현이다.
'벗기다'는 "옷을 벗기다" "안경을 벗기다"에서와 같이 '몸 일부의 물건을 떼어 놓게 하다', "양파 껍질을 벗길 땐 눈물이 난다"에서와 같이 '가죽이나 껍질 따위를 떼어 내다', "때를 벗기다" "칠을 벗기다"에서처럼 '거죽을 긁어내다', "뚜껑을 벗기다"에서와 같이 '씌운 것을 열거나 걷어내다', "바다의 신비를 벗기다"에서처럼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게 하다', "이런 사대부쯤 벗겨 먹기는 식은 죽 먹기지"에서처럼 '남의 물건 따위를 뜯어내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베끼다'는 "친구의 숙제를 베끼다" "고흐의 그림을 베껴 그렸다" "책 한 권을 몽땅 베껴 본 적이 있다"에서와 같이 '글이나 그림 따위를 원본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리다'는 뜻으로만 사용된다. 양파 껍질을 아무리 '베껴' 봐야 그 매력을 알 수 없다. 양파 껍질을 '벗겨' 봐야 벗겨도 벗겨도 새로운 속살을 드러내는 양파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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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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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워진다는 것 - 박연숙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스멀스멀 비 내리는 풍경이 이해될까요? 나는 차츰 나를 무서워하기 시작해요 이완을 되풀이하는 나의 바깥은 미끈미끈한 하늘을 마주하죠 등 뒤엔 한 떼의 날개, 이것은 더러운 것인가요? 음모처럼 치부를 읽어내는 미지근한 입속 지루한 천사처럼 환호를 보내요 물기 많은 손톱 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드러워서 적막한 몸을 보았거든요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잠* 날개들이 둘러앉는 식탁 같은 것들 말이에요 부푸는 잠 속으로 걸어와 나의 내부를 뒤적거리는 당신의 입술은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스멀거리는 이 창문을 이해할까요?
*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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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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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한 장 - 김민정
펼치면 온 우주를 다 덮고도 남지요
오므리면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 되지요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웃고 울며 살지요.
(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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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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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한번에 하나
우리의 친구 하나가 황혼이 물들어 가는 시각에 멕시코의 한적한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도 어떤 노인이 혼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멕시코 원주민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의 친구는 노인이 연신 몸을 숙여 모래밭에서 뭔가를 주워선 바닷속으로 던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노인은 그렇게 계속해서 뭔가를 바다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서 보니 노인은 방금 파도에 휩쓸려 해변으로 올라온 불가사리들을 한 마리씩 주워 물 속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놀란 우리의 친구는 노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안녕하시오. 노인장.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멕시코 노인이 대답했다. "불가사리들을 바닷속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소. 지금은 썰물이라서, 해변으로 쓸려 올라온 이 불가사리들을 바닷속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면 햇볕에 말라서 죽고 말지요." 우리의 친구가 말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만, 이 해변엔 수천 마리가 넘는 불가사리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저부 바다로 되돌려 보내겠다는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미처 생각을 못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멕시코 해안에 있는 수백 개의 해변에서 날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소. 매일같이 수많은 불가사리들이 파도에 휩쓸려 올라와 모래밭에서 말라 죽지요. 당신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겠소?" 멕시코 원주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몸을 굽혀 불가사리 한 마리를 집어올렸다. 그는 그것을 멀리 바닷속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말했다. "지금 저 한 마리에게는 큰 차이가 있지요."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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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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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2. 원시 시대의 가족
1) 가족, 자연의 요구 원시 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결정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가족의 형태이다. 원시 시대의 가족은 최초의, 유일한 사회 조직이었다. 가족도 다른 사회 조직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그러나 최초의 가족이 어떤 모습이었을까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매우 적다.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고등한 동물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물들이 얼마간 지속적인 가족을 형성하는 가장 일차적이고 보편적인 요인은 임신한(혹은 부화중인) 암컷과 새끼의 부양이다. 동물들은 각기 고유한 종족 번식의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자연에 적응해 온 오랜 기간에 걸쳐 본능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정적이다. 암수가 짝을 짓는 형태나 새끼를 부양하는 방법에 대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암컷의 임신(혹은 부화) 기간이 길고 새끼를 적게 낳을수록, 그리고 새끼가 태어나서 자립할 때까지의 기간이 길고 태어난 후에 배워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가족 관계는 지속적이고 가족간의 정서적 유대 관계도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보다 고등한 동물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원숭이는 새끼를 오랫동안 키우면서 먹이를 얻는 법, 위험을 피하는 법 등을 가르친다. 고등 포유류에서는 대개 수컷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우리는 대부분의 포유류들에서뿐 아니라 조류나 어떤 종류의 파충류, 양서류, 심지어 곤충들에서조차도 눈물겨운 모성애와 부성애를 확인할 수 있다. 또 가족의 형태나 지속성은 먹이를 취하는 방식, 생존 방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의 경우 새끼를 낳은 직후부터 암컷이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주로 혼자서 사냥을 한다는 사실은 암컷만이 새끼를 돌보고 수컷은 혼자서 살아가는 그들의 생존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맹수의 먹이가 되는 보다 약한 초식 동물들은 무리를 지어 살면서 새끼를 공동으로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물의 가족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가족 역시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즉 가족의 가장 기본적이고 흔들릴 수 없는 기초는 남성과 여성이 합하여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고, 자식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부모의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임신 기간과 산후 회복 기간이 길고, 적은 수의 자식을 낳으며, 자식의 성장기가 길고, 또한 아무리 단순한 인간 사회라도 언어, 전통,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많은 노력가 노동(점점 많아지는)이 필요하며 이 노동은 가족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생활에는 감정적 유대와 상호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요컨대 자식의 성장과 성인의 생활에 필요한 상호 협력과 의존이 인간 가족의 지속성과 단일성, 강력한 감정적 유대의 궁극적인 기초이다. 물론, 남녀의 결합은 종의 번식을 위한 의식적인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의 목적이 곧장 자녀의 출산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많은 경우 자녀의 출산은 결혼의 결과이며, 때로는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에게 이 부산물을 어쩌면 결혼 자체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함으로써 역으로 결혼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2) 가족의 옛 모습 요컨대 가족은 한편으로는 종족 보존의 본능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를 기르고 생활하기 위한 남녀의 협업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은 각각의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있어 이에 합당한 형태를 향해 발전해 왔다. 그 과정은 일률적이지 않다. 자연 조건, 노동 방식, 문화적 요인들이 가족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다. 현존 원시 사회에서나,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 사회들에서나 가족의 모습은 실로 천차 만별이다. 원시 사회의 가족의 형태는 군혼과 단혼, 모계제와 부계제, 모처제와 부처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현존 원시 사회를 볼 때 수렵, 채집 사회의 가족 구성은 절반 이상이 남편, 아내, 자녀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핵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대규모의 가족은 농경이 발달된 이후에 비로소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가족이 자년 양육을 위한 부부의 협력에 기초해 있으며, 그 원초적인 형태가 집단혼보다는 단혼에 보다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노동 방식의 변화가 가족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단혼을 현재의 일부일처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인간의 가족은 매우 원시적인 상태로부터 발전해 왔다. 초기의 인류에게는 성교에서 어떤 금기가 없었을 것이다. 즉 처음에는 형제 자매간의 성교는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성교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성서를 보면 형제 자매간의 결혼은 다반사이고 아버지와 딸의 성교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근친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불과 수백 년 전의 일이다.
신라 시대 왕실의 경우, 기록이 확실한 53건의 결혼 중 13건이 부계 혈족혼, 즉 근친혼이었는데, 신분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원시 시대의 관행이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광종, 덕종, 문종의 왕비는 그들의 친 여동생이었으며 경종, 성종, 예종의 왕비는 그들의 종자매였다. 고려 왕실의 기록에 나타난 왕비 51 명 중에서 동성혼이 22 명이나 된다.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은 이러한 왕실의 혼인 뿐이지만, 근친혼의 풍습이 왕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근친혼을 금지한 것은 고려 11 대 문종 때부터(1080 년경)이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근친 상간은 조선조에까지도 답습되어, 근친혼을 곤장 80-100 대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원시 상태로부터 근친혼에 대한 금기가 발달해 왔다. 이는 한편으로는 근친혼의 유해한 우생학적 결과를 막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 자매의 관계가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혼동은 가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또 단혼과 함께 여러 가지 형태의 집단혼을 발견할 수 있다. 단혼은 부부의 성적 자유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결혼은 보다 쉽게 해체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푸에블로 서쪽에 거주하는 호피(Hopi)족의 경우, 부부 관계는 쉽게 해체될 수 있고 이혼율이 약 34%였다고 한다. 이때의 남녀 관계가 자유로왔다는 것은 부족 국가가 출현한 이후에도 전해 내려온 원시 시대의 유습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제사 의식에서 보존되어 왔는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구려와 부여의 백성들은 10월의 제천 행사 때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무리를 이루어 연일 먹고 마시며 노래와 춤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이 기간은 "귀천이 없는 절기"로서 이 기간 중 남녀간에 생긴 애정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신라에서도 제천 행사 때에는 남녀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겼다. 고구려인들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결혼을 하였으며, 이러한 풍속은 이미 유교 윤리를 익힌 중국인들의 눈에 음란하게 보일 정도였다. 또한 고려 시대에도 자유로운 남녀 관계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중국 송나라 서경이 고려 사회를 보고 쓴 '고려도경'에는 남녀가 구별없이 시냇가에서 옷을 벗고 목욕하며, 결혼하는 데 있어서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고 놀라고 있다. 고려 시대의 종교 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등에서도 뭇 남녀가 집단적으로 자리를 같이하여 즐기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 유교를 숭상한 양반들에 의해 '남녀 상열지사'라고 매도당한 고려 시대의 고려 장가는 자유로운 남녀 관계를 전해준다.
얼음위에 댓잎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얼음위에 댓잎자리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하략)(주12) (전략) 삼장사에 불공드리러 갔더니 그 절 주지스님 내 손목을 잡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거들랑 조그만 상좌중아 네말이라 하리라 더러듕성 다리러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위 다로로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같이 울창한 곳 없거니 (하략)(주13)
원시 사회의 초기부터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 단혼 가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은 기존의 모계제나 부계제 가족에 대한 상과는 맞지 않는다. 모계제와 부계제의 문제에 대해 로위는 순수하게 모계적이거나 순수하게 부계적인 사회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모계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계제와 부계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위는 가족은 모계와 부계 양계적 원칙으로, 동족 조직은 단계적 친척 관계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가족 단위는 언제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자식들로 구성된 반면, 친족 조직은 모계나 부계 어느 한 편으로 되었다는 것이다.(주14) 여기서 모계냐 부계냐는 가족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 상속이 모계를 따르는가 부계를 따르는가를 규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친족 제도가 모계냐 부계냐를 결정한 주요한 요인은 그 사회의 주요한 산업과 그 담당자가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물려주어야 할 기술과 전통, 사회적 유산 혹은 귀중품이나 도구 등 재산의 소유자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모계냐 부계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머덕의 '민족지'에 따르면 약 862개의 원시 사회 중 모계제 사회는 약 100개 정도인데, 이는 원예 농경의 형태를 갖는 호미 경작 사회이고, 부계제는 대개 잉여물이 생기는 농경이나 가축 사육 사회라고 한다. 원시 농경의 담당자가 주로 여성이었고, 농경, 목축의 담당자가 주로 남성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식량 조달에서 남녀의 위치와 상속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원시 시대에 부계가 발달하는 주요한 요소는 식량을 획득하는 데서 남자가 차지하는 위치였을 것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그 자식과 강력한 유대로 묶였다.
그러나 또한 앞의 예로부터 모계제가 좀더 원시 시대 초기의 가족 형태이고, 부계제는 보다 후기의 형태일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는 단계는 원시 시대가 문명으로 넘어가는 시점으로 원시 농경보다 후기이다. 또한 부계는 부부 관계가 보다 안정적이고 단혼이 보다 확립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부계는 모계 가족보다는 좀더 후기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원시 시대의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들이 식량 획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모계 가족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모계 씨족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러한 모계 씨족의 존재는 현존하는 원시 부족의 경우 외에도 여러 나라의 신화와 전설, 단어의 어원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대개의 건국 신화나 영웅 설화를 보면 그 어머니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 명백하지만 아버지는 여자가 길을 가다 알을 주워 먹고 자식을 낳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명백하지 않으며, 부권이 확립된 후세에 와서야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식으로 덧붙여진 경우가 많다. 또 단군 신화의 '웅녀'이야기, 성명의 성자가 여자가 낳았다는 뜻을 가졌다는 사실, 중국의 고대 성씨에 여자 변을 가진 성씨가 많다는 것 등등이 모계 씨족의 존재를 말해준다.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관습상 신랑과 신부의 어머니가 성이 같아선 안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신라 상대의 석씨와 김씨 제왕이 박씨인 혁거세의 제사를 지낸 것은 혁거세가 그들의 외조나 외조의 외조가 되기 때문이었으며, 신라 하대의 박씨왕이 김씨왕의 제사를 행한 것도 같은 이유였는데, 이는 모계의 유습이다. 이러한 모계의 유습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 남아 있었으며 거의 완전히 부계로 바뀐 것은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였다.
3) 장가 오는 남자 노동에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과 함께 가족이 여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모계제로 인해 여자는 동일한 씨족에 속하고 남자는 다양한 다른 씨족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은 원시 시대의 여성 우위의 현시적 기초였다. 즉 모계 씨족의 족외혼 규칙에 의해 남자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이 태어난 씨족을 떠나 다른 씨족으로 옮겨 갔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2장 24절에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또 리빙스턴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전도 여행과 탐험'에서 여성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토인 부족의 생활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잠베이의 바론다인들은 여성들이 평의회를 열며 결혼한 남자는 자신의 부락을 떠나 아내의 부락으로 옮겨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는 장모에게 평생 동안 나무를 공급할 의무를 진다. 만일 이혼하면 자식은 어머니의 소유로 남는다. 그 대신에 여자는 남자를 부양한다. 몇몇 부부의 경우이긴 하지만 남자는 결코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리빙스턴은 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여자를 노엽게 한 남자에게는 굶기는 벌을 내렸다. 또한 당시 대우혼이 행해지던 이러쿼이 세네아카족 내에서 수년간 선교 활동을 한 A.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여성들은 다른 씨족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모든 물건은 공유였으나 너무 게을러서 자기 몫의 일을 하지 못하는 남편이나 애인은 가련하게도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자식과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때고 명령 한마디면 봇짐을 싸고 나가야만 했다. 그가 이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거역하고서는 배겨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씨족으로 돌아가든가(대개의 경우 그랬지만)다른 씨족에서 새로운 혼인 상대를 찾아야 했다. 여성은 씨족 내에서, 그리고 모든 곳에서 최대의 권력자였다. 여성들은 필요할 때는 족장을 파면하여 일반 졸병으로 만드는 일까지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모계 사회의 유풍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해모수와 유화 아씨가 야합하는 대목을 보면 "서민은 서민과 결혼하나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됨을 재걸 삼걸 한 위에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 결혼하며, 그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에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다하고 딴 살림을 차리어 자유의 가정이 되는 것인고로"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여전히 모계 씨족 사회의 결혼 풍속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도 약간의 모습을 달리하면서 꾸준히 유지되었다. 즉 고려 시대까지는 결혼한 딸과 사위와 외손자를 포함하는 가족, 사위의 입장에서 보면 장인, 장모를 포함하는 가족이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장가간다는 말도 '장인,장모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유명 무실하게 되었는데, 그 명맥만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즉 혼례시 신랑이 신부집으로 초행을 하여 3일을 지내고 함께 시집으로 가는 풍습이 그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이나 지역에 따라서는 석달이나 때로는 해를 넘겨 '달묵이', '해묵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존하는 원시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원시 농경 사회는 모계제이며, 대부분의 모계제나 원예 농경 사회에서는 모처제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시 사회의 모계제는 여성의 생산 노동에서의 위치와 함께 원시 시대 여성의 높은 지위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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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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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들어가는 말
'철학 이야기'는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 또는 사상가들이 세계와 인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앎, 존재, 가치, 아름다움 등의 문제가 어떤 관점에서 탐구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의 철학사상을 살핌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걸쳐 타당한 사고를 만드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의 궤변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따르면, 내가 한 눈으로 볼 때의 책상과 두 눈으로 볼 때의 책상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결국 똑같은 하나의 책상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프로타고라스의 사상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참다운 앎이란 과연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볼 수 있다. 그러한 질문이야말로 앎의 진리에 관한 탐구의 시작이다.
우리는 왜 철학을 하는가 인간은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면서 일생을 보낸다. 물음은 삶과 세계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왜 철학을 하는가'도 역시 하나의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철학함'이 아닐 수 없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철학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철학은 어떤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 '국가에 대한 충성', '감각의 확실성' 등은 건전한 상식일 수 있으나, 진지한 의심이나 경탄을 결여한 것들이다. 그것은 대체로 엄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습관적으로 전해져 온 것들이다. 미신이나 신비를 철학으로 여기는 태도 역시 비판을 결여하고 있다. 풍수지리나 토정비결 또는 사주팔자나 성명 철학을 확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맹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이비 종교에서 흔히 주장하는 신비적 체험을 참다운 철학으로 주장하는 태도도 비판을 결여하고 있다. 한편으로, 철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철학을 직접 가르치는 이들 중에도, 전문적인 철학사를 달달 외우면서 은근히 자신을 위대한 사상가라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철학사에 대한 지식은 '철학함'에 대한 부분적 지식일 뿐, 그 자체가 '철학함'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철학을 하는가? 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는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철학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상 앎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를 좀더 넓히면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며 아름다움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물음들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탐구한다. 나아가 자신이 있을 수 있는 삶과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탐구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애절한 음성으로 전화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는 과연 무엇인가?" 수많은 물음들 중에서 가장 일상적인 물음은 "무엇"의 물음이다. "무엇"은 물음의 시발이자 씨앗이다. 그러나 한층 더 포괄적인 물음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라는 물음이다. "이 사과나무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한 여자는 한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어떻게"라고 묻는 것은 물음의 과정이다. "어떻게"에서 우리는 "무엇"을 넘어서서 어떤 사물이나 사태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것의 형성과정까지도 문제로 삼는다. 하지만 "무엇"은 물론 "어떻게"도 아직 근본적인 물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철학적 물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왜"라는 물음이다. 흔히 우리는 "어떻게"와 "왜"라는 물음을 혼동하고 있다. 다음의 대화를 살펴보자.
"너는 왜 저 남자를 사랑하니?" "저 남자하고 결혼하기 위해 서지." "단지 그것 때문에 그토록 끔찍하게 사모한단 말이야?" "언제나 같이 있고 싶어서이기도 해. 저 사람을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나는 미칠 것 같아."
연인들이 결혼하거나 함께 있는 것은 사랑의 과정이지 결코 사랑의 원리가 아니다. 위의 대화에서 "왜"는 참다운 의미의 "왜"가 아니고 삶의 과정으로서 "어떻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신은 왜 저 여인을 사랑합니까?" "나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저 여인을 사랑합니까?"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 인간의 삶과 세계의 근원을 체험하기 위해서 저 여인을 사랑합니다."
이런 정도의 대화라면 가히 철학적인 물음 "왜"의 뜻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논리와 앎 그리고 사물(존재자)과 가치 및 아름다움에 관해서 근원 물음 "왜"를 던지고 답함으로써 그 원리를 찾으려고 했다.
철학의 뜻 일상생활은 '지나감'과 '덧없음'으로 물들어 있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매일매일은 무의미한 지껄임과 호기심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철학함'은 일상생활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철학은 '지혜'(sophia)와 '사랑'(philia)이 합쳐서 된 말로,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지혜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이다.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앎에 대한 이론(인식론), 사물과 그것의 근거 내지 원리에 대한 이론(형이상학 또는 존재론), 가치에 대한 이론(윤리학), 아름다움에 대한 이론(미학) 그리고 질서 있는 사고의 표현에 대한 이론(논리학) 등 몇 가지 기본 분야로 나뉘어 발달해 왔다. 철학은 이러한 기본 분야들로 형성되기 때문에 '기초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철학은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개별 과학들(언어학, 심리학, 역사학, 생물학, 물리학 등)의 원리나 성립 근거를 밝혀 줄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를 긍정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철학은 기본 분야를 가지면서도 개별 과학과 결합해서 역사철학, 법철학, 정치철학, 교육철학, 과학철학, 종교철학 등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힘은 의심과 경탄이다. 의심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문제가 제기되어 그것을 해결할 때 우리들은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첨성대를 예로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은 첨성대가 신라 시대의 유물이겠거니 하고 건성으로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첨성대를 신라인들은 왜 만들었을까? 첨성대의 건축 구조를 알아내면 신라인들이 첨성대를 만든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을 가지고 이 사람이 신라 시대의 사회 배경에 대한 책들을 읽고 또 첨성대의 건축양식과 구조에 관한 연구서들을 읽은 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자. "신라인들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그들은 별을 관찰함으로써 기후의 변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고 별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석조물을 건축한 것이었다." 이 사람은 손뼉을 치면서 스스로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경탄이 굳어 버리면 다시 의심이 제기된다. 의심이 해결되면 새로운 경탄이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지혜는 성숙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함'의 씨앗은 일상성이 아니라 의심과 경탄에 있다. 의심과 경탄은 반성과 비판의 모습을 띤다. 과거의 철학사를 암기하는 것은 단순한 일상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이야기'를 의심과 경탄 속에서 읽으면서 반성하고 비판할 때 '철학 이야기'는 비로소 '철학함'으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것이다.
철학사의 가치 딜리라는 철학사가는 과거 철학자들의 업적을 요약해 줄 뿐 아니라 미래의 철학적 탐구를 위한 재료들을 제공해 주는 데 철학사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의 말을 근거로 삼을 때 우리는 철학사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어떤 시대에 어떤 지역에서 삶과 세계의 원리에 대해서 어떻게 체계적인 생각이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다. (2) 어떤 곳에서는 일관성 있는 철학과 문화가 전개되어 온 반면, 또 다른 곳에서는 처음에 위대한 철학 사상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어 버린 까닭이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다. (3) 다양한 철학 사상과 문화가 혼합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사상을 창출하지 못한 민족이 있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다. (4) 과거와 현재의 사고 양태를 반성하고 비판함으로써 건전하고 타당한 미래의 삶과 세계에 대한 개방된 자세를 계획할 수 있다.
철학과 문화 문화(cultura)의 동사형은 콜레레(colere)이다. 콜레레는 원래 '일하다, 경작하다, 거주하다, 염려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영혼의 도야' (cultura animi)라는 뜻으로 바뀌었으며, 인간의 정신적 업적, 예컨대 학문, 예술, 종교, 도덕, 기술 등을 일컬어 문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넓게 보면 철학도 문화의 한 분야지만, 철학은 철학 이외의 다른 문화 영역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반대로 그러한 영역들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아 왔다. 우리들이 철학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철학과 그 밖의 문화들이 어떤 상호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철학과 문화의 상호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곧 나와 우리의 위치와 모습을 옳게 붙잡을 수 있다는 것, 나아가 보다 바람직한 인간의 미래상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인 모습은 말 그대로 혼란하고도 혼미하다. 어떤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의 문화 의식(또는 정신)의 구조는 양파와도 같다. 양파의 맨 겉껍질이 현대 과학과 기술 그리고 기독교라고 한다면, 중간 부분은 유교적 정신이며, 그보다 더 안쪽 부분은 불교 정신,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은 샤머니즘이다. 이들 여러 종류의 정신이 얽히고 설켜 있으면서도,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은 샤머니즘이기 때문에 더욱 난해하다는 것이다. 함께 철학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복잡하게 얽힌 오늘날의 철학과 문화의 실마리를 풀어 나갈 수 있는 반성과 비판의 작은 열쇠가 발견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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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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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미셸푸꼬 / 인간사랑
제3장 광인들 (1/2)
오삐딸 제네랄의 탄생과 영국과 독일에서의 교화소의 설립으로부터 18세기 말까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낭비벽이 심한 타락한 가장들, 방종한 탕아들, 불경한 언행을 하는 사람들 등 스스로 파멸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감금했다. 이런 식의 병렬, 이 이상한 사람들의 복합을 통해서 이성의 시대는 비이성에 대한 자신의 경험의 윤곽을 제시하고 있다. 각 도시에서는 모든 종류의 광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리의 '오삐딸 제네랄'의 재소자 중 10분의 1은 '광인들', '정신착란 상태의 사람들', '분열된 정신의 소유자들',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구분의 표시도 발견되지 않았다. 목록을 통해서 본다면 단일한 기준으로 그들을 찾아내고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을 격리시킨 것으로 보인다. '도덕성의 파괴' 또는 '아내 학대나 자살 시도' 때문에 수감된 사람들이 환자였는지 정신병자였는지, 또는 범죄자였는지는 의료 고고학(medical archaeology)에 맡기자. 그러나 주지해야 할 것은 '광인들'이 실제로 감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지위는 단순히 '죄수'의 지위가 아니었다. 비이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서 광기만을 위한 특별한 변형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변형은 정확한 의미론적 구분없이 '미친, 소외된, 발광한, 정신이 분열된, 낭비벽이 심한' 등등으로 불린 현상에 대한 것이다. 이 독특한 형태의 인식은 비이성의 세계 내에서 광기가 취한 고유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추문과 관계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에서 본다면 감금은 추문을 피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서 설명되거나 적어도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악의 의식에서의 중요한 변화를 의미하기까지 한다.
르네상스는 비이성이 햇빛 아래 드러나는 것을 허용했다. 대중의 모욕 덕분에 죄악은 본보기가 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있었다. 15세기에 '이단, 배교, 남색, 혹세무민의 마법과 예언, 우상숭배, 살인, 반신앙적인 행위, 죄악에의 유혹'등의 죄명으로 기소된 길드래(Gilles de Rais)는 마침내 법정 밖의 고백에서 자신이 "만 명의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재판 전에 그는 라틴어로 자신의 고백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고백이 구어로 출판되어 라틴어를 모르는 다수의 방청객들에게 배포될 것인지, 그리하여 그가 범한 죄에 대해 신의 자비로운 용서와 사면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법정에서 그는 방청객들 앞에서 같은 고백을 할 것을 요구받았다. 재판관은 그에게 "자신의 죄상을 상세하게 진술해야 하며, 거기서 빚어지는 수치가 향후의 그의 고통을 감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17세기까지는 가장 극악하고 비인간적인 형태의 범죄는 대중에게 폭로되지 않는 한 재판을 받거나 처벌되지 않았다. 고백을 낳은 빛만이 죄를 낳은 어둠을 상쇄할 수 있었다. 각 단계를 거치면서 죄악은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대중 앞의 고백과 공개를 치러야 했다. 반대로 감금은 비인간적인 자로 하여금 수치심을 갖게 하는 양심에 대한 일종의 배반이다. 죄악이 가진 양상 중에는 강력한 전염성, 즉 공개되기만 하면 무한한 전파력을 발휘하는 힘이 있다. 오직 은폐만이 그것을 억제할 수 있다. 독살을 감행한 퐁샤르트랭(Pontchartrain)의 경우 그에게 명령된 것은 공개재판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수용소였다. "파리 시의 경우를 보더라도 왕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은 무지에서, 다른 일부는 용이함 때문에 죄를 범했다. 우리의 폐하께서는 절대적으로 은폐해야 하는 죄가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신다." 공개에서 오는 위험이 아니더라도 가문과 교회의 명예는 감금을 고무시킬 수 있었다. 생 나자르로 보내진 성직자의 경우를 보면 "그러므로 그와 같은 성직자는 교회와 성직의 명예를 위해서 더 이상 지나친 비호를 받아서는 안 된다." 18세기 말엽에는 감금이 가문의 불명예를 피할 수 있는 권리로 규정되기까지 했다. "소위 비열하고 추악한 행위란 공공의 질서를 위해 관용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문은 명예를 위해서 친족에게 수치심을 갖게 하는 비열하고 추잡한 행위를 하는 자를 사회로부터 추방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사면은 추문이 사라지고 가문과 교회의 명예가 손상될 위험이 해소되었을 때 가능했다. 수도원장 바르게데(Bargede)는 오랫동안 감금되었는데, 그의 사면에 대한 요구는 그의 나이와 무기력 때문에 더 이상의 추문이 불가능했을 때나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신마비 상태이고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는 상태이다"라고 다장송(d Agenson)은 증언하고 있다. "나는 그의 석방이 정당하고 자비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이성의 경계에 있는 모든 형태의 죄악은 비밀 속에 은폐되었다. 고전주의 시대는 비이성의 현존에 대해 르네상스 시대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광기에 대해서는 비밀이라는 관행을 유지하지 않았다. 광인들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는 것은 확실히 중세적인 관행이다. 독일의 나르튀르머(Narrturmer)의 경우를 보면 광인들을 유리벽으로 된 방에 가둬놓고서 대중들이 밖에서 그들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도시 입구에서 펼쳐진 하나의 장관이었다. 특이한 사실은 수용소가 폐쇄된 후에도 이러한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파리나 런던 등지에서는 제도적인 성격에로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복지의 집'(House of Commons)에 제출된 보고서를 믿는다면, 1815년경에도 베들레헴의 병원에서는 일요일마다 1페니의 관람료를 받고 미치광이들을 구경시키고 있다. 관람료 수입은 연간 4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 수치는 96,000명의 관람객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경우는 비세트르의 답사 및 광인 관람이 혁명 때까지도 레프트 은행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일요일의 열광적인 놀이의 하나였다. 미라보(Mirabeau)는 "영국여행기"(Observations d un voyageur anglais)에서 비세트르의 광인들이 "진기한 동물같이 보였고 첫 번째 만난 백치에게 기꺼이 동전을 던져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간수가 광인들을 마치 생 제르맹의 박람회에서 조련사가 원숭이를 다루듯이 다루는 것이 관찰되기도 했다. 몇몇 간수들은 몇 번의 채찍질만으로 광인들이 춤추고 기계체조를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 유명해졌다. 18세기에 과서야 이루어진 유일한 관용은 마치 광인의 본성을 점검하는 책임이 광인 자신에게 있다는 듯이 광인들이 직접 광인들을 관람시킬 수 있게 한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본선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해달라. 영국 여행자가 광인들을 관람시키는 행위를 인간의 본성 이하로 본 것은 옳다. 우리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모든 이러한 딜레마들은 보상받을 수 있다. 이제는 평정기 때의 광인 자신들이 광인들을 관람시키는 임무를 담당한다. 물론 그들 또한 자신의 차례가 되면 동일한 임무를 통해 은혜를 갚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불행한 피조물의 관리자들은 결코 자신을 천하게 만드는 냉혹함을 보이지 않고도 관람에서 오는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여기서 광기는 수용소의 침묵에서 구경거리로 발전되었으며 대중의 즐거움을 위한 대중의 추문으로 변질되었다. 비이성은 수용소의 침묵 속으로 감추어졌지만 광기는 -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동요상태로 - 계속해서 세상의 무대에 등장했다.
중세와 르네상스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을 제국체제에서는 매우 빨리 도달할 수 있었다. 블루 쉽(Blue Ship)의 기묘한 형제애는 광인에게 무언극을 허용했지만, 이제 무대에 등장하는 광기는 피와 살이 있는 광기 자체이다. 19세기 초 샤랑통의 감독관 꿀미에(Coulmier)는 광인이 때로는 배우가 되고 때로는 관찰되는 관객도 되는 저 유명한 공연방식을 조직했다. "이러한 연극에 출연하는 광인들은 무책임하고, 들떠 있고, 종종 사악하기도 한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의 기묘한 행동과 그들의 상태는 관객으로부터 모욕적인 동정과 조롱 섞인 웃음을 선사받았다." 광기는 사드(Sade)의 지배력이 미치는 세계, 스스로를 확신하는 이성의 선한 양심을 견제하는 세계에서 순수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19세기 초엽까지 ... 광인은 괴물로 남아 있었다. 즉, 어원에 따르면 보여져야 하는 존재 또는 사물이었다. 감금은 비이성을 은폐시켰고 그 결과 비이성으로부터 수치심을 박탈했다. 그러나 광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관심을 가지고 광기를 지적했다. 비이성의 경우 주된 관심이 추문을 피하는 것이었다면 광기의 경우 감금의 목적은 광기의 조직에 있었다. 기묘한 반대의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를 비이성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 속에 포함시켰다. 르네상스나 중세가 개별화시켰던 광기의 특수한 형태들을 모든 형태의 비이성의 이해 속으로 추상화시킨 것이다. 동시에 고전주의 시대는 광기에 특별한 기호를 부여했다. 병자의 기호가 아니라 영광의 추문의 기호를. 18세기에 행해졌던 광기의 전시와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이 누렸던 자유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기는 어디에서나 존재했고 그 위험과 이미지에 의해 모든 경험과 섞일 수 있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는 보여질 따름이었다. 난간의 저쪽에서. 광기의 현존 또한 광기와 어떤 관계도 갖지 않고 어떤 유사성도 거부하는 이성의 눈 아래서 이성과의 거리를 유지한 현존이었다.
광기는 사물로서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광기는 우리 내부의 괴물이 아니라 이상한 메카니즘의 동물, 오랫동안 인간을 억압해 온 야수성이 되었다. "나는 손과 다리, 머리가 없는 인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왜냐하면 머리가 다리보다 훨씬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오직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고가 불가능한 인간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돌멩이이거나 야수이기 때문이다." '광인의 임상치료에 관한 보고서'에서 데포르트(Desportes)는 18세기 무렵 비세트르의 병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가구라고는 짚으로 된 초라한 침상뿐인 이 불행한 사람들은 전신을 벽에 붙인 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벽에서 떨어지는 물에 온몸이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라 살패트리에르 병실의 경우보다 비참하고 끔찍한 사실은 이 방들이 하수구와 같은 높이에 있기 때문에 세느 강이 범람하는 겨울에는 건강에 해로운 것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쥐떼들의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이다. 쥐떼들은 밤이 되면 사람들을 덮쳐서 아무데고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여자 광인들은 온몸이 물어뜯긴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쥐떼의 습격은 사실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병실들은 지하감옥으로 오랫동안 광인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광포한 사람을 가두는 데 사용되었다. 만일 광인들이 좀 더 온순해지고 따라서 아무도 이들에게 위험을 느끼지 않게 되면 다른 크기의 방들로 옮겨졌다. 사무엘 튜크의 가장 활동적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고프리 히긴스는 20파운드를 지불하고서 요크 지방의 수용소를 시찰할 권리를 얻어냈다. 이 방문과정에서 그는 8피트가 안 되는 방으로 통하는 비밀문을 발견했다. 이 방은 13명의 여자가 밤 동안에 감금되는 장소였다. 이들은 낮 동안에도 거의 같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다.
한편 광인들이 특히 위험한 경우 그들은 특정 체제에 의해서 통제를 받았다. 그 체제는 분명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광인의 광기를 좁은 장소에 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광인들은 보통 벽과 침대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베들레헴에서는 광포한 여자 광인들은 긴 복도의 벽에 쇠사슬로 발목이 묶여 있었으며, 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의복은 홈스펀 내리닫이였다. 다른 병원을 하나 더 예로 들자면, 베드날 그린에서는 강제로 감금된 여자들이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수감되어 있었다. 그리고 광기의 발작이 지나간 후에는 그녀들은 단지 담요 한 장만을 덮은 채로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다. 겨우 몇 발짝 걷는 것이 허용되었을 때조차도 다리 사이에는 쇠막대가 끼워져 있었고, 발목에는 수갑과 연결된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사무엘 튜크는 '광인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한 보고서'에서 몹시 위험한 남자 광인을 통제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고안된 복잡한 체제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베들레헴의 남자 광인들은 벽과 연결된 긴 사슬에 묶여져 있었고 간수는 그들을 밖으로 끌어당겨서 가죽으로 묶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 주위에는 작은 사슬로 다른 쇠고랑과 연결된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 다른 쇠고랑은 감방의 바닥과 천장에 고정된 수직 쇠막대에 부착되어서 막대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움직였다. 베들레헴에서 이 제도가 개혁되기 시작했을 때는 그렇게 수감되었던 사나이들에게는 12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였다. 광인 수용체제의 운용이 이 정도까지 폭력적으로 되었을 때는 그 체제가 더 이상 교화나 처벌을 위해 이용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 제도에서는 '광인들의 교정'(resipiscence)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히려 그 시기의 수용소에서는 광인들에게 동물성이란 이미지를 연결시켰다. 광기는 그 얼굴을 야수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감옥의 벽에 쇠사슬로 묶어 있는 광인들은 더 이상 방황하는 영혼을 가지 인간이 아니라 자연적인 광포함에 희생된 동물들일 따름이다. 따라서 가장 미약한 정도의 광기는 도덕적인 비이성이었을지라도 극단에 이른 광기는 더 이상 도덕적인 비이성이 아니었다. 이 극단에 이른 광기는 강한 발작이라는 개념의 매개에 의해서 동물성이 지닌 직접적인 폭력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동물성의 모델은 수용소에 널리 퍼져 있었고, 수용소로 하여금 우리 또는 순회 동물원의 이미지를 갖게 했다. 코겔(Coguel)은 18세기 말엽의 라 살패트리에르를 묘사하고 있다. "자주 광포한 발작을 일으키는 여자 광인들은 흡사 개처럼 감방의 문에 묶여져 있었고, 쇠창살로 막아진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간수나 방문객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이 쇠창살을 통하여 그들에게 먹을 것과 짚으로 된 침상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오물은 창살 밖에서 갈고리로 치워졌다." 낭트의 순회 동물원은 사나운 짐승들만 가두어 놓은 개별 우리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에스키롤(Esquirol)은 결코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감방문을 잠그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바위와 못과 쇠막대가 사용되었다. ...문 옆에 달린 작은 창도 쇠막대와 덧문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작은 창 바로 옆에서는 벽에 고정된 사슬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슬 끝에는 흡사 나무로 만든 신발 같은 무쇠 용기가 달려 있었다. 이 용기 속에 음식이 담겨져서 작은 창의 쇠막대 사이로 감방 안에 들여졌다."
프랑소아 엠마뉴엘 포데레(Francois-Emmanuel Fodere)는 1814년 스트라스부르그의 병원을 방문하여 기술적으로 세심하게 지어진 일종의 인간 우리를 발견했다. "위험한 광인들이나 스스로를 더럽힌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은 중키 정도의 남자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또는 나무상자였다." 이러한 우리들의 바닥에는 쇠격자가 깔려 있었는데, 이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15Cm 떨어져 있었다. 쇠격자 위에는 짚으로 된 침상이 놓여 있고, 각 우리에 배당된 광인은 "완전히 또는 거의 벌거벗은 채로 침상 위에 누워 있거나 음식을 먹거나 배설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인의 광포함과 발작을 막기 위한 보호체제 전체이다. 광인은 발작과 광포함은 중요한 사회적 위험요소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사회적 위험을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광인은 결코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사실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무차별성은 확실히 강박관념으로서의 효과가 있다. 이 강박관념은 고대, 특히 중세 이래로 동물세계를 가까이 있지만 낯선 것으로, 경탄할 만하지만 위협적인 것으로, 무언의 것이지만 가장 강력한 불안의 대상으로 만든 오랜 공포와 뿌리박고 있다. 아직도 이러한 공포는 상상의 전지평에서 광기에 대한 지각을 따라다니고 있지만 공포의 의미는 둘 또는 세 세기 전과는 다르다. 동물적인 변형은 더 이상 극악한 힘의 가시적인 기호도 아니며, 비이성의 악마적인 작용의 결과도 아니다. 인간 속의 동물은 더 이상 초월(beyond)의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인간 속에 들어 있는 동물은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것과도 매개되지 않고 바로 광기로 변형된다. 자기 자신이란 자연의 지위를 갖는 광기, 그의 광기이다. 광기 속에서 날뛰고 있는 동물성은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요소를 박탈한다. 그것은 인간을 다른 힘에게로 맡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본성이 무에 이르는 지점에 인간을 위치시키기 위해서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광인은 어떤 매개도 없이 자신의 동물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간이다.
진화론의 시각에서 광기에 현존하는 동물성이 질병의 징조 - 나아가 바로 그 본질 - 로 여겨지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반대로 광인은 결코 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천명되었다. 사실 동물성 때문에 광인은 인간적인 허약함, 불확실함, 그리고 병으로부터 보호되었다. 광기가 갖는 동물적인 강인함, 야수의 세계에서 빌려온 단단함은 광인으로 하여금 굶주림, 더위, 추위,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했다. 광인은 어떤 존재의 비참함도 무한히 견딜 수 있다는 믿음은 18세기까지의 상식이었다. 그들은 보호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의복도 난방도 필요가 없었다. 1811년 사무엘 튜크는 남부 지방에 있는 작업장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작업장의 방들의 채광이 창살 사이로 들어왔다가 문에서 차단되는 희미한 빛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을 보았다. 모든 여자들은 거의 발가벗고 있었다. 그 때 "날씨는 매우 추웠고 전날 저녁의 기온은 화씨 18도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행한 여자들 중 한 사람은 아무런 덮을 것도 없이 작은 거적 위에 누워 있었다." 광인들이 동물처럼 최악의 조건을 견뎌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피넬에게는 여전히 의학적인 도그마였다. 그는 항상 "남녀 광인 중 몇몇이 가장 혹독하고 가장 긴 추위를 쉽고도 지속적으로 견뎌낸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공화정 제3년의 니보즈(Nivose)달에 기온이 영하 10, 11 내지 16도로 떨어진 며칠 동안 비세트르의 병원에 수감된 광인은 자신의 모직 담요가 더워서 감방의 냉바닥 위에만 앉아 있었다. 매일 아침 감방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셔츠바람으로 안마당으로 뛰어들어 눈과 얼음을 한움큼 쥐고서 가슴을 문질렀고 그 서늘함에 즐거워했다. 광기는 동물적인 광포함의 기색을 띠는 한, 인간을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광기는 통찰력 있는 자연이 동물에게 부여한 것과 유사한 불멸성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신기하게도 이성의 혼돈은 광인이 동물성에로의 복귀를 통해서 자연과의 직접적인 친밀성을 회복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왜 극단적인 지점의 광기가 의료나 교화의 분야와 결코 연결될 수 없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다스려지지 않은 동물성은 가혹한 처벌과 잔인한 처사에 의해서만 지배될 수 있었다. 광인은 동물이라는 견해는 광인에게 모종의 교육방법을 사요해 보고자 하는 18세기의 시도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었다. 피넬은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설립된 유명한 수도원"의 경우를 인용했다. 그곳의 한 광포한 광인에게 개조라는 엄한 훈도가 주어졌다. 수면과 식사를 거부할 경우 그는 "그 거부의 대가로 다음날 소가죽 채찍으로 열 대를 얻어맞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반면에 온순하게 말을 잘 들을 경우 그는 식당에서 간수와 같이 식사할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그러나 조금만 규칙을 위반해도 즉각적으로 그는 손가락에 호된 채찍질을 당했다. 따라서 그 단계 하나하나로 이러한 '비인간적인' 감금의 관행들을 설명해 주는 이상한 변증논리의 사용 때문에 광기의 거칠 것 없는 동물성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갖는 훈육에 의해서만 길들여질 수 있었다. 그 훈육의 의의는 야수를 인간으로 교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해 있는 순수한 동물성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광기는 광기의 진실인 동물성을 폭로했다. 그리고 광기는 모종의 과정을 통해 이 동물성에로 다시 몰입했다.
18세기 중엽 스코틀랜드 지방의 한 농부는 광기의 치료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피넬은 내친 김에 우리의 그레고리가 헤라클레스의 체격까지도 가졌다고 칭찬했다. "그의 방법은 광인들이 가장 힘든 농사일도 할 수 있도록 광인들을 가축이나 하인처럼 부리고, 반항할 때는 채찍질로 다스리는 것이다." 동물성의 환원을 통해서 광기로 스스로의 진실과 치유책을 동시에 발견한다. 광인이 야수가 될 때 인간에 현존하는 동물, 즉 광기라는 추문의 원인인 인간 내부의 동물은 제거된다. 그것은 이 동물이 다스려져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가축처럼 되어 버린 인간에게 부재하는 이성은 하나의 지혜와 질서를 가르친다. 광기가 치유되는 것은 광기의 진실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동물성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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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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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羊補牢(망양보뢰) 亡(망할 망) 羊(양 양) 補(기울 보) 牢(우리 뢰)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酒色)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大臣) 장신(莊辛)은 경양왕에게 왕을 수행하는 주후, 하후, 언릉군, 수릉군 등은 사치하고 방탕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 간언하였다. 경양왕이 이 말에 몹시 분노하자, 장신은 만약 신의 말을 믿을 수 없으시다면, 신이 조(趙)나라로 피난하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장신이 떠난 지 다섯 달이 되었을 때, 진(秦)나라는 과연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을 점령하였다. 경양왕은 먼 곳까지 도망하고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장신을 찾아오도록 하여, 그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다. 장신은 토끼를 발견하고 나서 사냥개를 생각하여도 늦지 않으며, 양이 달아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고 들었습니다(亡羊而補牢, 未爲遲也) 라고 대답하였다.
亡羊補牢(It is never too late to mend) 란 일이 발생한 후에라도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 을 비유한 말이다. 각종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비는 결코 늦는 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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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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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21. 먹이경쟁을 피하는 유충과 성충의 지혜
알고 보면 봄은 땅속에서 먼저 온다. 4월이면 벌써 지렁이는 땅바닥에서 고무작고무작 기어올라오기 시작하고, 가랑잎 쌓인 나무 그루터기에는 배추흰나비의 주름 번데기도 기지개를 펴고 껍질 깰 준비를 한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봄바람에 처녀 젖가슴 튼다"는 말이 있듯이 아직도 볼에 닿는 바람에는 찬기가 남아 있는데도 양지 바른 장다리꽃 핀 밭가에 팔랑팔랑 날아가는 흰나비를 보면서 "야! 벌써 나비가, 흰나비가 아닌가"하고 다시 보곤 두 손으로 갑자기 얼굴을 가린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흰나비를 보지 않았어"하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그해 이른 봄 흰나비를 먼저 보면 엄마 죽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망막에서 '흰나비의 영상을 지우려고 머리 도래질을 하던 곰살궂은 내 어린 시절의 그 잔상이 아직도 뇌리 깊숙이 있다. 봄 하늘에 나비 한 쌍이 하늘하늘 날면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밀월여행을 하는 것으로 그 순간에 정자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면 재주가 용타는 생각이 든다. 공중을 날면서 짝짓기를 하는 놈은 하루살이, 나비 정도가 아닌가 싶다. 생물계를 유심히 보면 어미와 새끼 사이에도 먹이와 공간 다툼을 피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한다. 사실 생물의 싸움은 모두가 먹이얻기 싸움이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터뺏기 경쟁이다. 사람들의 땅따먹기도 알고 보면 넓은 공간을 차지하여 많은 먹을거리를 얻겠다는 것이 목적이다. 사람들이 목숨과도 맞바꾸면서까지 권력, 재산, 명예라는 삼부(불경에서는 삼악이라 한다)를 쫓는 것도 모두가 잘먹고 큰 집(넓은 땅)을 갖겠다는 본능적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먹이와 공간이 없이는 종족보존이 불가능하기에 그렇게 박이 터지도록 싸운다.
다형질화를 통한 생물의 지혜 앞에서 얘기한 배추흰나비는 물론이고 다른 생물들도 다형질화 현상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서로 경쟁을 피하고 있다. 나비를 한자로 호접이라 하고 영어로는 여자 멋쟁이란 뜻인 버터플라이(butterfly)라고 하는데 '버터'색깔을 한 곤충이란 결국은 노랑나비를 칭한다. 나비를 화이트플라이(whitefly)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서양 사람들도 '흰나비'를 먼저 보면 엄마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일까. 이른 봄 월동한 번데기에서 부화된 배추흰나비 성충은 밭 언덕 아래 남새밭의 냉이, 무, 배추꽃의 꿀을 먹고 산다. 이런 초봄의 나비는 다른 곤충과 마찬가지로 크기가 작고 덜 예쁜데 이를 춘형(봄형)이라 하고, 여름에 부화된 놈들은 크기도 크고 색깔도 현란하여 이를 하형이라 한다. 아마 독자들은 대만 등 동남아에 나비의 종류가 많고, 크기도 매우 크고 예쁜 이유를 짐작할 것이다. 사실 나비만이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변온동물이 다 그렇다. 뱀이나 물고기도 열대지방으로 갈수록 종도 다양하고 덩치도 커지고 색깔도 원색으로 바뀐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포함한 정온동물들은 추운 지방에 살수록 몸집이 커진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봄나들이를 하면서 수놈의 정기를 받은 암놈 나비는 한 배에 100~200개의 알을 무, 배춧잎에(주로 뒤쪽에) 가지런히 놓아붙인다. 제가 먹고 컸던 바로 그 식물에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비의 알이 부화되어 애벌레가 되고 그놈이 배춧잎을 갉아먹고 커서 번데기가 되었고 그것이 억센 껍질을 뚫고 나와 어른 나비되어 다시 제 고향 배춧잎에 알을 낳았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알에서 깨어난 배추흰나비 유충을 우리는 '배추벌레'라고 부르며, 이놈들은 식물의 잎과 체색이 같은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사람 눈에도 잘 띄지 않는다. 어미는 무나 배추 같은 식물의 꿀을 빨아먹고 살고, 새끼는 같은 종류의 풀이지만 짙푸른 잎을 갉아먹고 산다. 이렇게 성체와 유충의 모양이 다르고 식성도 사는 장소에 따라 달라서 서로 경쟁을 피해간다. 바다에 사는 해파리의 경우도 유생세대인 폴립(polyp)세대는 바닥에 붙어 사나 성체인 메듀사(medusa)는 떠다니며 살아서 역시 먹이와 공간의 다툼을 지혜롭게 피해가고 있다.
알-애벌레-번데기-성충의 복잡한 생활사를 갖는 나비와 새끼가 어미와 같은 사람과는 어느 쪽이 이 지구에 더 잘 적응한 것일까. 동물이 고등하면 고등할수록 태어난(갓 낳은) 자식이 어미를 닮으나(닮은꼴) 하등할수록 새끼는 송충이, 배추벌레고 어미는 날개 가진 나방, 나비처럼 생판 다른 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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