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30. 하이데거 : 존재에 대한 진술
한 사상가를 이해하려면 그의 출신 성분이나 환경을 고려하는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점은 마르틴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 그의 출신 성분은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알레만 지방 출신으로 1887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거의 변함없이 슈바르츠발트나 그 부근인 프라이부르크에서 보냈다. 펠트베르크의 비탈진 언덕 위에 그는 조그만 오두막집을 갖고 있었다. 스파르타 식의 간결한 나무 의자와 침대로 검소하게 꾸며진 오두막이었다. 물은 부근에 있는 우물에서 직접 길어 와야 했다. 하이데거는 자주 오랫동안 움막 앞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과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사상은 무르익어 갔다. 또는 근처의 조그마한 "음식점 겸 맥주집"에서 이웃에 사는 농부들과 이 지방 특유의 툭툭 끊기는 사투리로 그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알레만적 기질이 단순히 슈바르츠발트 지방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애착에서만 발휘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인 특질에서도 부각된다. 즉 무겁고 신중한 사유, 묻고 대답하는 데 집착하는 성격, 그를 에워싸고 있는 외로움,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우울한 분위기 등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외모에서도 그는 시골 농부티가 났다. 어떤 사람 얘기로는, 한번은 비엔나의 한 철학자가 하이데거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그는 강연을 끝내고 나서 맨 앞줄에 앉아 있는 한 농부가 강연이 계속되는 동안 줄곧 다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농부는 바로 하이데거 자신이었다. 이것은 전해 내려오는 꾸민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에, 젊은 사람들이 즐겨 입는 향토풍의 옷을 입고, 끝이 현족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산속의 드넓은 풀밭을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즉시 이 철학자가 대지와 결속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지와의 깊은 유대감으로 그는 두 번이나 베를린 대학의 명예로운 교수 초빙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는 대도시의 소음과 요란한 문화를 싫어해 차라리 아직까지는 조용한 프라이부르크에 머물거나 "들길"을 거닐면서 들길이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여 그 말들을 명상적인 글 속에 기술하기를 바랐다. 하이데거는 소년 시절에는 스키에 열광하였으며 또 사실 선수 못지않은 전문 스키인이었다. 그는 심지어 스키에 대해 강의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추억거리가 있다. 펠트베르크의 한 여관에서 플라톤에 대한 세미나를 한 뒤 곧이어 스키장으로 가서 스키 교육을 받았다. 이때 아주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그가 아주 완만한 커브 길에서 미끄러져 눈 속에 나뒹구는 바람에 선생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닌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철학함에서의 미끄러져 나동그라지는 것보다도 여기서의 이 실수가 그에게는 한결 난감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의 이러한 실수에 제자들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고, 하이데거 역시 몹시 민망해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곧 그는 아주 기막힌 회전 기술을 보임으로써 그 같은 실수를 만회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스키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철학 선생으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격앙되는 법 없이, 수사학적인 거드럼을 피우는 법 없이, 불필요한 잡소리 없이, 긴장하여 약간은 거칠게 목에서 나는 목소리로 각 낱말들을 강조하며, 때로는 문장들마저도 딱딱 끊어 가면서 말한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서는 어떤 강력한 매혹적인 힘이 발산된다. 그가 강의나 강연을 할 때면 강의실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그의 세미나에서 학생들은 언제나 사실에 머물려는, 어떠한 문제도 회피하지 않으며 모든 성급한 대답들을 물리치는 사유의 긴장을 배운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강사로서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는 마르부르크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젊은 시절에 특히 그는 헌신적으로 제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그의 제자들이 철학뿐만 아니라, 신학과 그 외 다른 학문 분야의 교수직을 맡고 있다 이들은 또한 하이데거 집에서 열렸던 수많은 축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정원을 돌며 행한 제등 행렬과 민요 합창, 그리고 깊이파고든 그 토론의 시간들을 말이다. 하이데거는 사유란 순전히 그 자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변형시키려 해야 하며, 개인적 실존이든 공적인 실존이든 상관없이 실존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국가 사회주의(나치)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 현존재의 영웅적으로 인내하는 사상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실책 때문에 그는 교수직을 내놓아야 했고, 그 후 현실적인 정치와는 담을 쌓는다. 만년에 가서는 모든 공직 생활에서 거의 완전히 물러나 가까운 동료들의 모임에만 나타날 뿐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그는 언제나 그의 사유의 위력과 깊이로 계속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활동은 두 번의 절정기를 갖는다. 한번은 20년대이고, 그 다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첫번째 시기는 (존재와 시간)의 출판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 책은 비록 반에 해당하는 일부만 출간되었지만 그야말로 번개처럼 철학의 아성들에 철퇴를 내리쳤다. 하이데거로서는 그것은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사유로의 돌파였다. 그는 가톨릭 신학과 신칸트 학파로부터 기인하여, 현상학자의 거장인 에드문트 훗설-그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 있다-의 영향을 받아 단번에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오래 전에 플라톤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라 부른 것을 새롭게 부각시키려 한다. 핵심적인 물음은 "존재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있다)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컨대 나무가 "있다", 인간이 "있다", 신이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얼핏 보기에 철학의 한 특정 분과, 즉 존재론의 추상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물음을 추적해 보면, 그것이 사유의 근거와 릴은 심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해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물음을 어떻게 궤도에 올려 놓아야 하는가? 또 인간이 그것에 대해 묻고 있는 존재는 어디에서부터 접근 가능해지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해에서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인간이 항상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이해는 언어 속에서 표현되고 있지만 또한 사물을 다루는 일상적인 행동과 동료 인간들과의 교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존재 이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하이데거는 이를 상세하게 분석해 나가면서 존재 이해의 장소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그는 분석을 인간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적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인간을 인간 밖의 어떤 한 관점, 예컨대 신이라든가 절대 정신 따위에서 고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그 자신에게 그의 고유한 관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 고찰하려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처럼 그냥 단순하게 거기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방향으로 자신을 설계하여 선택한 그 가능성 안에서, 그 가능성들로부터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 이래 근세 철학이 으레 인간을 인위적으로 고립시켜 파악해 왔는데 하이데거는 그런 식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개개인의 인간이 나름대로의 "세계"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그가 다른 존재자에 파묻혀 또는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실존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세계 내 존재"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자에 비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개입 없이는 닫혀진 채 머물러 것을 세계가 인간에 의해 열려지고 관찰되고-인식되고 느껴진다는-바로 그 점이다. 인간이 "존재자 전체로 침투"함으로써 이 존재자 전체가 "개방 가능한 것" 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인간 현존재의 "초월"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인간이 어떤 초감각적 존재 또는 어떤 초감각 존재적 세계와 연관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언어 사용에 있어 초월이란, 인간이 존재에 대한 시각에서 모든 존재자를 항상 이미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존재는 흡사 모든 이해, 느낌, 그리고 인식의 지평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존"이라는 표현도 하이데거에게는 비슷한 것을 의미한다. 실존 대신에 그는 가끔 "탈존"(Ek-sistenz)이라는 표현도 쓴다. 실존이란 인간의 꾸밈없이 적나라한 현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인간이 돌이나 나무처럼 그렇게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기나 하다는 듯이 말이다. 오히려 실존이란 인간은 현실적으로 실존함의 방식으로, 탈존의 방식으로, 또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항상 이미 이해된 존재 안으로 나가 서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존으로서의 세계 내 존재를 좀더 상세하게 해석하는 데 있어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우선 대개 그 자신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계에 빠져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존재한다. 인간은 "그들"(세상사람들)에게 내맡겨져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과제는 자신이 이처럼 옭아매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참된 자신을 찾는 데 있다. 이것은 일종의 근본 기분 속에서 분명해진다. 이 근본 기분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떠한지를 알려줌으로써 반성없이 멋대로 그냥 살아가는 삶과 인간의 환상으로부터 구출해 준다. 이러한 근본 기분들 중에서 하이데거는-키에르케고르를 좇아-불안을 가장 고귀한 기분이라고 칭한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모든 현실은 물거품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불안 속에서 인간은 회피할 수 없는 죽음과 세계의 가능한 허망함을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불안 속에서는 모든 일시적인 의지는 무너져 내리고 전면에 내세웠던 모든 구실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만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경험하여, 그가 "무속으로 빠져 그 안에 붙들려 있음"을 체험한다. 그리고 나서 "인간 현존재의 섬뜩한 곳에서 외치는 소리"인 양심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 즉 비본래적인 것에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끄집어 내어 그를 적나라하게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래의 자기 앞에 세워놓는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성" 속에서 그 자신이 되며, 그 자신의 "허무한 실존"을 떠맡으면서 그 자신이 된다.
인간은 결단할 때, 타인의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 그리고 자신의 가장 고유한 근본에서부터 실존하기로 결단할 때 그 자신이 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사상이 다름아닌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 사이에 확립되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갖는 어이없는 무근거성과 내적인 위험이, 인간에 대한 보다더 깊은 철학적 해석과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돌파구에 대한 전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단번에 그 시대의 철학적 움직임의 정상에 올라서고 사방에서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밀물처럼 밀려든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단순한 인간 상황의 묘사가 아니었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실존 관계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물음과 연관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했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 존재의 근본 구조로서 시간성을 들추어 낸다. 이것은 자주 논의되어 온 시간이라는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시간은 그 안에서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도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어떤 객체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본질상 인간 현존재의 시간성이다. 자신의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는 가운데 또한 매 일상의 행위 가운데 인간은 "자신을 앞서 가 있다." 그는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획 투사한다. 동시에 인간은 매순간 자신의 기재(과거)에 의해 규정되며 철저히 지배된다. 인간은 전혀 자신의 행함이 없이 자신의 구체적인 현존재에로 내던져져 있다. 이것이 인간의 "이미 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자를 현재화시키면서 현존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서 "곁에 있음"도 일부를 이룬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 즉 "자신을 앞서서", "이미 있음", "곁에 있음" 등이 인간 현존재의 독특한 시간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요소들은 인간 현존재의 "탈자체" 들이다. 즉 인간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서부터 나와서 서 있는 방식들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인 유한성을 구현시키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시간에 대한 인간 지식의 근원이기도 하다.
(존재와 시간)이후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하이데거의 저술들이 연달아 간행된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철학사, 즉 아낙시만드로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그리고 특히 니체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다양한 사상에 새롭고 놀라운 관점을 개진해 놓는다. 다른 저술들은 시인과 시 작품의 해설을 담고 있다 특히 횔더린이 주요 주제이기는 하지만 릴케, 게오르게, 트라클, 벤 등도 해설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세상의 이목을 끈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와 (휴머니즘에 대한 서한), 그리고 보다 심원한 저서 (동일성과 차이성)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유를 정초해야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오늘날 특히 긴박한 몇 가지 물음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즉 언어, 예술, 기술의 본질에 대한 글을 발표한 것이다. 이 모든 저술에서 하이데거가 통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의 사유가 도달하려고 애쓰는 곳인 존재로는 처음에 제시한 길인 인간과 인간의 현존재를 통한 길로서는 도달할 수 없음을 통찰하게 된다. 그보다는 도리어 관점을 버려야 한다는 과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즉 인간과 인간의 존재 이해를 통해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통하여 인간과 유한한 전체 현실을 고찰해야 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사유의 전향"이라는 요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하이데거는 수십 년을 고독한 투쟁을 해온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여정에 대해 본질적으로 통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만일 존재가 문제가 되고 중요시된다면 인간에 관한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인간에게서 인간이 근세의 주관주의와 현대의 실존주의에서 획득한 그 핵심적 지위를 박탈해 버린다 현대를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기술도 그렇게 볼 때 하나의 오류의 길일 뿐이다. 기술은 주관성의 마지막 승리인 셈이다. 왜냐하면 기술에서 그리고 기술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의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자율적인 본질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오직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인간은 존재에 예속되어 있다. 모든 것은 존재에 달려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도 인간 자신을 위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존재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인간에 의해서 존재의 드러남이 실현되고 있는 한, 아니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그렇게도 빈번히 시사하고 있는 이 존재란 무엇인가? 그는 존재에 대해 자주 거의 신화적인 단어들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존재는-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 자체이다. 존재를 경험하고 말하는 것을 미래의 사유는 배워야만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이데거가 "존재"로써 무엇을 의미했는지가 더욱 애매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좀더 명확히 하려 한다면, 하이데거가 분명히 존재 아래 신이나 세계 근거를 이해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존재란 하이데거에서 있어 절대로 존재자(존재하는 어떤 것)가 아니다.
사람들은 존재를 대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는 가장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특히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균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견해를 따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형이상학은 바로 이 점을 등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형이상학은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대체로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 엄청난 귀결이 뒤따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대체로 "서양의 숙명"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관점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이 표현은 하이데거에서 드러나 있음, 감추어져 있지 않음(비은폐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의 사실에 대해 그 사실과 그 사실이 놓여 있는 관계가 그에게 드러나고 은폐됨이 없을 때, 그것이 "있다"고, 그것이 어떠어떠하게 "있다"고, 그것이 어떻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존재하다"(있긴는 하이데거에게는 어떻게든 현존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다"(있다)는 오히려 감추어져 있지 않고 드러나 있는 것, 빛 속에서 있는 것, 나타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존재"는 바로 이러한 "밝힘"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계의 드러남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하이데거의 첫번째 대답은 이러하다. 그것은 무의 발견을 통해 실현된다. 만일 우리가 불안 한가운데서 마주치듯 무를 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무가 세계 전체를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함으로써 모든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존재자가 있다는 것마저도 유의할 수 없을 것이다. "불안의 무라는 밝은 밤에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그 자체의 근원적인 드러남의 가능성이 생겨나온다. 존재자는 있고 무는 없다(존재하는 것은 존재자이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 물음의 절박성, 존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제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가 인간을 덮쳐와 마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불안 속으로 끌고 갈 수 없듯이 그렇게 무를 대면한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무자체는 활동적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이렇게 표현한다. "무는 무화한다." 그러나 이때 물론 어떤 형이상학적 주체를 떠올려서는 안된다 무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어떤 것 그 자체가 무화되어 버리는 사건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하이데거는 아직 그의 본래의 노력의 목표점인 존재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무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것인지, 따라서 철저한 허무주의가 참된 사유 방식이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하이데거는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허무주의는-그것이 비록 서양 사람들의 숙명임이 부인될 수 없다 하더라도-분명 인간의 지속적인 체류 장소는 아니다. 그것은 무의 본질 자체로부터 귀결되어 나온다. 무는 단지 "존재의 너울"일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계속 더 파고 들어가야 한다. 무의 배후에서 존재 자체를 대면하게 될는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존재는 하이데거에게 있어 무와 똑같은 기본 구조를 갖고 있다. 존재도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근본 사건" 즉 "존재의 사건"이다. 따라서 존재는 무와 마찬가지로 동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 안에서 존재자와 인간이 드러나게 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건이다. 존재는 발생하는 비은폐성이다. 존재가 발생한다는 말은 존재가 세계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밝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존재란 밝게 비추어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밝힘"(Lichtung)으로써 존재가 역사적 인간에게 스스로를 선사해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존재에도-무에서와 같이-그것이 인간의 은총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자체에서부터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통용된다. 존재는 결코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존재야말로 세계가 밝게 드러나는 사건의 본래의 참된 주체이다. 존재에게 본래의 우선권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인간을 위해서도 아니요, 존재자를 위해서도 아니요, 오직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서 존재를 수행하고 있다. 존재는 자신의 의미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이런 식으로 존재는 역사의 개별 시기에 존재자와 인간을 각기 상이한 관점에서 드러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바로 그 수행에서 본 존재이다. 따라서 중국, 그리스 또는 중세에서의 존재는 현대인과 다른 어떤 것을 뜻하고 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존재는 주로 부정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너무나 존재자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안에게 존재는 주로 "모든 존재자의 붕괴", "고향상실"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기술의 이질적 본질로서 현대인에게 밀어닥친 운명-이것도 존재가 인간에게 보낸 것이다-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 시대에 존재 그 자체는 저의 망각되어 버렸다. 현대는 "존재 망각"의 시대, "존재 부재"의 시대이다 바로 그 때문에 "허무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허무주의란 "존재가 밖에 머물러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극단적인 존재 망각의 존재 운명도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인간에 의해서나 인간의 작위를 통해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존재 자신이 자기측에서부터 오류의 길을 가고 있는 인간에게 다시 새롭게 몸을 돌려 존재의 새로운 경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미래에 걸어 보는 희망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인간이 "존재의 부름"에 "귀를 기울여" 존재가 건네오는 말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가 "존재의 목동"임을 다시 경험하는 길밖에 없다 인간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 나타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는 "존재의 말함"이 소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최대의 과제이며 거기에 인간의 본질적인 품위가 놓여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도래는 존재의 운명에 기인한다." 그 모든 진지함 속에 이것이 일어날 때-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현대의 이 "신이 멀리 떠나 버린" 밤의 어둠이 극복될 수 있다. 그럴때 새로운 신이 존재의 빛 속에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인간이 "존재의 가까이에" 이를 때 비로소 인간은 "신이나 신들이 거절하며 남아 있어 어둠이 그대로 깔려 있게 될지, 성스러움이 솟아오르면서 신이나 신들의 현현이 새로이 시작될 수 있게 될지"의 결정이 일어나게 되는 데까지 오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인간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 존재 자신의 관장 사항이다.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의 가능성에 속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 점을 분명 의식하고 있다 "미래의 사유는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다. 그 사유는 자신의 일시적인 본질의 궁핍 속으로 내려가고 있다. 사유는 언어를 단순한 말 속에 집결시킨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명 속에 실존하는"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독일어: Martin Heidegger, 1889년 9월 26일 ~ 1976년 5월 26일)는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그러한 칭호를 거부하였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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