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29. 야스퍼스 : 풍요로운 실패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닌 사람이 방문 허가를 받고 칼 야스퍼스를 찾아가면, 의자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는 야스퍼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치 나랏님이 은혜로 아랫사람을 굽어 살피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이러한 자세로 그의 손님에게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가르친다. 이 일은 다소 겸손하고 호의가 어려 있기는 하지만 현저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행해진다. 야스퍼스는 방문객이 반대 의견을 펴면 예의 바르게 귀를 기울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절하게 동의하거나 쌀쌀맞게 거절하면서 자신의 설명을 계속 진행해나가기 위해서이다 이런 식의 다소 격식을 차린 듯한 접대는 분명 나름대로 고상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 냉기어린 쌀쌀함을 포함하고 있다.
지금 묘사된 이 장면은 야스퍼스의 일생 내내 지배해 온 근본 분위기와 상응한다. 즉 고독감, 인간들에 대한 무너뜨리기 힘든 거리감, 세계와의 모든 접촉에 대한 불안감 등이 그것이다. 야스퍼스 자신도 종종 얼마나 그가 학창 시절에, 또한 대학에 들어가서도, 혼자 있는듯한 느낌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단지 몇몇 사람들과만 동경해 마지않던 교제를 갖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심지어 친한 친구와도 자주 절교하곤 했다. 이러한 고독은 근본적으로 어려서부터 줄곧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병에 원인이 있다. 이 병으로 그는 여행, 승마, 춤, 수영 등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당구 뿐이었다 이 병은 또 그에게 아주 규칙적인 하루하루를 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병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동료들과 항상 거리감을 유지했는데, 그 이유는 통상적인 사회 생활을 함께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함께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무상의 이유가 아니면 어떤 집단도 방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야스퍼스의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바젤 시절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20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단 한번 영화 구경을 갔고, 단 한번 연극을 보러 갔는데, 두 번 다 단순히 그의 제자들이 그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뢰와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수직 이외에는 공직이건 대학의 보직이건 결코 맡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그의 동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철학자들의 회합에 대한 그의 심각한 혐오감은 더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말년에 선동적인 저서들에서 종종 도덕적 설교자의 태도로 정치적 토론에 적극 개입하는 바람에 더욱더 외로워진다. 그는 좌익과 우익 모두로부터 그저 경멸의 차가운 시선만을 받아야 했다.
주변 세계에 대한 야스퍼스의 태도를 우리는 교육자적 태도와 예언자적 태도가 혼합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어디를 가든 그는 언제나 가르쳤다. 그런데 이 가르치는 일은 단지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교제나 그의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훗날 그를 "게르만 교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식 전달 차원에서의 그의 가르침은 비본래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의 이론은 그가 고독 속에서 돌연 깨달은 통찰들로서, 그는 이 통찰들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여 설명하려 들지 않고 아예 선포부터 한다. 그래서 일반 여론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양태도 분열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는가 하면, 일부 사람들은 칼 바르트처럼 "야스퍼스의 연극"또는 "청소년의 유혹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야스퍼스의 철학을 "주정꾼의 허튼 소리"라고까지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스퍼스를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 한 가지는 확실히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확실히 심각한 진지함 속에서 산출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외로운 사람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의사 소통의 철학은 현대의 모든 노력 가운데 가장 고독한 노력이 아닌가?"
야스퍼스가 철학적으로 말하려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 왜냐하면 소수의 철학자들에게서처럼 그에게도 사상은 실존에서부터 직접 생겨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사상에 대한 헌신으로 영위해 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썼다. "나의 분야는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도 지속적인 집중력과 기쁨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훗날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과 분리될 수 있는 철학의 문제란 없다. 철학하는 사람, 그의 근본 경험, 그의 행위, 그의 세계, 일상적인 행동, 거기에서부터 말해지고 있는 힘 등을 옆으로 제쳐놓아 둘 수는 없다." 이러한 철학적인 자세가 야스퍼스의 철학함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의 사유는 끊임없이 인간 주변을 맴돈다. 그의 정신적 열정은 인간의 근본을 캐는 일에 쏠려 있었다. 그가 의학과 정신 병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참으로 "인간을 그 전체로 파악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알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그의 (정신 병리학)이 오늘날까지도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
야스퍼스는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이미 50여 년 전에 발간된 그의 (세계관의 심리학)은 학문 세계로 하여금 그에게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미 그는 그가 그 후 언제나 거듭 겪게 되는 일과 마주치게 된다. 즉 한편에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받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냉혹한 거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의 심리학) 이후 야스퍼스는 본래의 철학함 속으로 계속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이 역시 계속 인간에 대한 관심에 의해 이끌려지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근본적 사상을 그는 광범위한 두 권의 저서-그 중 하나는 (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철학적 논리학)이다-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철학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도 인간의 문제에 방향을 두고 행해졌다. 이 연구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작품 속에 있는 인간의 자기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그 스스로 인간에 대한 걱정으로 안달하는 사람만이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스퍼스에게 철학이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 이것이 그의 전체 작품을 꿰뚫고 있는 근본 분위기이다. 이러한 근본 흐름에 기초하여 그는 자신이 "교수들의 철학"이라 이름 지은 것에 대항해 싸운다. 그에게 이 교수들의 철학이란 "본래적인 철학"이 아니고 단지 "우리현존재의 근본 물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한 설명" 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야스퍼스의 관심은 인간과 더불어 현대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생생하게 관찰하게 만든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극단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본다. 그는 그것을 속세의 권력이 그에게 교수직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을 때, 그리고 부인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권력만이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욱 단호하게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도 그러한 위험은 가중된다. 즉 기술과 획일화된 집단 군중을 통해서, 가열된 산업 열기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 버림으로써, 인간 관계의 비인간성을 통해서도 일어난다.
야스퍼스는 인간에 대한 염려를 현대에 대한 그의 해석의 토대로 삼아 국가 사회주의(나치)의 지배가 시작되기 2년 전에 (현대의 정신적 상황)이라는 저서를 내놓아 폭넓은 반향을 얻지만, 이 철학자도 물론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상황을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와 똑같은 우려는 야스퍼스가 60년대에 발표한 정치적 저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저서에서 그는 독일 민주주의의 위험에 대한 그의 걱정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야스퍼스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에게 더욱더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다. "인간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불확실하다 " 인간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며 가장 커다란 위험이다."바로 그 때문에 인간을 파악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인간을 세계 안의 사물들처럼 중립적인 직관에 의해 파악할 수는 없다. "인간 그 전체는 어떤 파악 가능한 객관화의 가능성 에서도 벗어나 있다. 인간은 흡사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인간은 열려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라는 독특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다.
파악할 수 없고 증명할 수도 없으며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모든 학문적인 탐구를 벗어나는 어떤 것, 곧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자뿐만 아니라 인류와 인류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물들의 흐름을 전체로 규정하고 있는 역사 법칙이란 없다. 미래에 속하는 것은 인간의 결단 및 행위에 대한 책임이다." 이러한 자유의 이념이 야스퍼스의 근본 사상이다. 그것과 더불어 그가 말한 모든 것은 존립하거나 무너진다 자유는 물론 보편 타당하게 확정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현실 속에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현실을 그렇게 관찰할 수 있다 "자유는 증명될 수도 반박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이 오로지 형편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결단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물론 이론적인 앎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는 오직 실천 속에서만 명백해진다. 즉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결단을 내리는 가운데, 즉 가능성을 움켜잡는 가운데 드러난다. "자유는 나의 통찰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고 이 행위의 영역에서 자유의 의식은 확실성을 띠게 된다. 나는 "행위하면서 지금 내가 원하고 행위하고 있는 그것을 나 자신이 원하고 있음을 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그러한 순간을 갖는다. 나는 알기를 원하는 것과 행위함이 내게 달려 있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고, 그렇게 존재하고 있고, 그 결과로써 그렇게 행위할 뿐 아니라, 나는 행위함과 결단을 통해 나의 행위와 동시에 나의 본질의 근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자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야스퍼스에게 있어 자유는 우선,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때마다 이것이나 저것을 결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는 좀더 심원한 차원을 가지고 있다. 자유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도 놓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자유 속에서 자기 자신을 획득할 수도 잃어 버릴 수도 있다. 여기에서 비로소 야스퍼스 철학의 윤리적 뿌리가 전면에 부각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심오한 실존적인 자유"이고, "실존적 선택"이며, "나 자신의 선택", "현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결단"이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움켜잡는 것,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정립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고, 그래서 또한 철학함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야스퍼스는 그의 사유를 "실존 철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실존 철학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될 수 있는 그러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실존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현존재와 같은 것,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존은 인간의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의미 한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이렇게 자기 존재에 대한 그의 사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콧대 높은 고림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으므로, 철학함 이라는 것이 순전히 고독 속에서의 개별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야스퍼스가 이웃 사람에 대해 취하고 있는 그 모든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아니 아마 바로 그 때문에 더욱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즉 자기 존재란 오직 다른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더욱이 근본적으로 한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 가능할 뿐이다 그는 결혼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한평생 한 사람에게만 행해야 하는 것으로 본 유일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자서전적 저서에서도 계속해서 확실히 하고 있듯이 그러한 경험을 그의 사유의 기본 토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교류는 그에게 자기 존재와 자유의 본질적인 판단 기준으로 비쳐진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으로 되는 그만큼 우리 자신이 되며,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되는 한에서만 우리 자신도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단초로 부터 야스퍼스의 정치적 요청이 싹튼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이고 동시에 그로 인한 올바른 양상의 공존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이성 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며, 야스퍼스는 오로지 그 사회 속에서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는 거기서부터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세계 질서의 요청에 이른다. 그 요구는 무엇보다도 특히 원자 폭탄의 위협에 직면해서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가고 있는 길은 끊임없이 암초와 낭떠러지를 지나쳐 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야스퍼스는 그 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파멸은 최종적인 것이다." 사유하고 인식하며 세계 속에서 연구하려는 노력, 다시 말해 과학의 길은 그 내적 필연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물음 위에 또 물음이 있고, 물론 부분적인 대답도 있지만 문제가 포괄적이 되면 아무런 해결책도 없다. 예컨대 세계의 시작과 끝에 대한 물음, 세계의 유한성과 무한성에 대한 물음, 심지어 사물의 근거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조차 대답할 수 없다. 이렇게 물음들은 모순과 역설에 빠진다. 이런 식의 물음들을 제기하면 사람들은 "사실적, 과학적인 세계 정위가 품고 있는 의문점에 도달"하게 되고, 결국에는 "단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의 낭떨어지"에 도달한다. 따라서 과학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러한 한계란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과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과학은 끝까지 파고들어 드디어 "현존재의 균열"을 보게 될 때까지 멀리 그리고 깊이 파헤쳐 들어가야 한다. 야스퍼스가 이해하고 있는 철학함은 과학으로 하여금 한계에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임을 상기시켜 주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로 향하려고 노력하고, 그 자신을 이해하려하고, 그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형성하려고 시도할 때, 더욱더 압박해 오는 한계를 경험한다. 인간은 그의 현존재가 사물의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는 예기치 못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야스퍼스는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부른다. 이 한계 상황 속에서 위기는 과학의 한계에서 겪은 그 실패보다 무한히 더 깊이 인간을 좌초시킨다. 인간은 한계 상황 속에서 그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하게 된다. 그는 절대적인 한계에 부딪친다. 그것은 가령 이웃 사람의 죽음을 보는 순간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또는 피할 수 없는 전쟁, 고통, 죄책감을 경험하면서, 또는 모든 사람이 얽매여 있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체험 속에서 일어난다. 이 한계 상황들은 "인간 그 자체에 관련되고, 유한한 현존재에게 불가피하게 주어져 있는 궁극적 상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추구는 이렇게 결국 벗어날길 없는 상황 속으로 몰고 간다. 모든 체계가 다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마치 "발 밑의 바닥이 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한계 상황들은 마치 "우리가 부딪치는 벽"과 같다. 한계 상황들은 "둥둥 떠 다니는 불확실함" 속에서의 현존재, 철저히 좌초한 현실에 놓인 현존재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모습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런 모습이 유별나게 두드러진 현대에서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경험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한계 상황 속에서 비로소 의식되기 때문이다"
야스퍼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인간의 현존재는 이 희망없는 전망으로 끝나 버려야만 하는가? 그는 무엇보다는 인간은 그것에서부터 어떻게 헤어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인간은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욱더 깊이 그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좌초를 바라볼 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 대한 앎이 불안을 고조시킬 때 또는 절망이 나를 불안 속으로 가라앉히려 할 때, 이러한 불가피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불안만이 마지막 남은 것인 양 느껴진다 본래적인 불안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떠한 출구도 없는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불안이다." "나는 그러한 불안 속에서 최후의 불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침몰해 들어간다." 그것은 허무한 절망의 상황이고, "무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 내는 도리밖에 없다. "허무주의 속에서 성실한 인간에게 불가피한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현존재의 파악이 불가능함을 시인해야만 한다. 인간은 죽음, 고통, 전투, 죄의식, 운명에 대해 긍정해야만 한다. 그가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행할 때, 바로 이 한계 상황을 견뎌 내면서 그의 고유한 실존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열린 눈으로 한계 상황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이 한계 상황이 또한 "보다 깊은 철학의 근원"이 된다.
야스퍼스가 가정한 실존의 답습은 물론 연속적인 과정이나 필연적인 과정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약을 통해 가능해진다. 즉 절망에서부터 장악한 자기 존재로의 비약을 통해, "자유로서의 나에게로의 비약"을 통해 가능해진다. "불안을 떨쳐 버리고 평온으로 비약하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엄청난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비약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이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비약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야스퍼스의 철학함의 새롭고 심오한 차원이 밝혀진다. 자기 존재와 자유로의 비약은, 절망에 직면해서 외적인 불가능함을 넘어서서 특별한 경험, 곧 선사되어짐의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다. 좌초 속에서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 마련해 줄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바로 나의 자기 존재의 근원 안에서 나는 내가 나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님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오직 나의 근원적인 의지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되돌아 가 본래적인 나에게로 갈때, 나에게 내가 완전히 내 자신이 될 때, 나는 더 이상 단지 나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내가 충족된 역사적 현재에서 '나'라고 말하는 이 본래적인 '나 자신'이 분명 나에 의해 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나로 인해 놀란다. 예컨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 혼자서 그것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을 다시 한번 그렇게 할 수도 없으리라는 점이다. 의욕 속에 내가 본래 나 자신이었을 때, 나는 동시에 나의 자유 속에 나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 나는 내 자신 안에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음"을 경험한다. 선사됨과 주어짐은-야스퍼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선사와 주는것을 전제한다 그것도 역시 근본 경험의 한 부분이다. 극단적인 좌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세계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어떤 도움을 만나게 된다. 야스퍼스는 그와 같은 만남을 "초월"이라고 부른다. 경우에 따라 그는 그것을 "신"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고려해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존은 초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숙명 속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위치를 고수할 때, 죽음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 낼 때, 이것을 그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여기서 그를 도와 주는 것은 세계 안에 있는 그 모든 도움과는 다른 종류의 도움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자유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초월의 도움 덕분이다." 이로써 철학은 자신의 최고의 과제와 마주치게 된다. 그 과제는 "초월로의 비약을 준비하고 상기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그것을 수행하는 사유이다." "철학은 초월을 맴돈다. "야스퍼스는 초월에 대한 이러한 기초적 경험을 "철학적 믿음"이라 부른다. 그것은 "초월에 대한 믿음"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확실성"을 수반하고 있다 "철학적 믿음은 모든 진정한 철학함의 필수 불가결한 근원이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신에 관해 우리는 그것을 더이상 진술할 수 없다고 여긴다. "신에 관한 숙고를 통해 신의 존재는 더욱더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의 참된 앎이란 "무지의 앎"이다 "철학적 실존은 숨어 있는 신에게 결코 직접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감수한다. " 그러면서도 야스퍼스는 형이상학적 진술을 한다. 그렇지만 이 진술은 직접적으로 신에게로 향한 것이 아니고, 신에 의해 규정된 세계로 향한 것이다. 전 실재는-세계적인 실재건 인간적인 실재건-철학적 믿음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해석을 획득하게 된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제 암시로서, 기초로서, "초월의 암호"로서 이해될 수 있다. "암호일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현존재는 어떤 규정되지 않은 흔들림과 언어를 가지고 있어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세계는, 자연이건 인간이건, 천체 공간이건 역사이건, 그냥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흡사 관상학적으로 직관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결국 야스퍼스는 그가 구상한 철학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철학함에서는, 같은 길에 있는 사람에게는 계시가 완전히 배제된 신앙이 호소해 오고 있다. 그것은 혼미 속에서의 어떤 객관적인 이정표는 아니다. 인간은 각기 가능성으로서의 그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초월의 관점 아래 현존재의 존재를 밝혀 줄 차원에의 추구가 감행된다. 모든 점이 다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 세계 안에서, 우리는 목표를 알지 못하면서도 철학적인 방향을 잡아 보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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