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28. 니체 : 허무주의의 위력과 무기력
어떤 모임에서건 니체의 이름을 거론할 때, 누구든지 으레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너 여자한테 가니? 채찍을 잊지 말아라." 그렇지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노파의 입을 빌려한 이 말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를 완전히 잘못 전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에 대해 니체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줍음을 탄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여자들 즉 할머니, 어머니, 두 명의 고모, 누이 등에 둘러싸여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모든 여자들 앞에서의 불안감은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촉진되었을지도 모른다. 니체는 학생 시절, 드리워진 커텐 뒤에서 소녀들에게 갈채를 보내려고 과감히 시도한 적이 있지만, 이때에도 한 무리의 학우들과 함께 그랬을 뿐이다. 언젠가 한번은 하인에게 잘못 이끌려서 사창가에 가게 되지만 그는 재빨리 도망쳐 나온다. 그래서 "싸구려 장신구와 속이 훤히 내비치는 얇은 옷"을 휘감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그에게 몇 소절 연주해 보일 틈도 없었다. 두번째로는 먼 발치에서 본 여배우에게 푹 빠져 특별히 그녀를 위해 작사 작곡한 노래를 그녀의 집으로 보낸다. 물론 그 여배우는 답장을 주지 않았다. 세번째로 열차여행을 하는 동안 발레리나와 사귀게 되는데 이 소박한 모험도 종착역에 도착하자 곧 끝나 버린다. 네번째로 니체는 젊은 여자에게 편지로 처음으로 청혼을 한다. 그런데 그것도 그가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편지 쓰는 것마저 몹시 서툴러서 그가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할 지경이다. 다섯번째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인인 코시마를 연모한다. 여섯번째로 그늘 머리에 떠오르는 젊은 여자들에게 전부 초청장을 보내어 스위스에 있는 그를 방문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도 아무 진전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번에 니체는 당시 21세밖에 안 된 한 매력적인 여성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녀의 이름은 루 살로메이다. 첫번째 만남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운명적인 힘이 우리를 서로 만나게 하였나요?" 그는 루를 신뢰하여 그의 가장 깊이 감추어 둔 생각까지 털어놓았으며, 그녀를 그의 유일한 제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감히 그녀의 손을 잡아볼 엄두도 못 낸다. 그는 한 친구를 전령으로 루에게 보내 본다. 그런데 이 친구 역시 루에게 반해 있었으며, 더군다나 그녀에게 청혼까지 하였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 친구가 부정적인 대답을 알려 온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곧 루와의 관계도 끝장나고 그 친구와의 관계도 누이동생의 간계에 의해 끝이 나버린다. 결국 니체는 그저 이런 말을 할 따름이었다. "결혼한 철학자는 코메디에나 어울린다." 아직 한 여자가 남아 있는데, 그녀는 "라마"라고 불리는 니체의 누이이다. 그녀는 니체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자신의 남자라고 선언한다. 그녀는 니체를 교묘하게 휘어잡아 꼼짝 못 하게 하고 큰 공헌이 될 유고 발간의 노력에서도 명백한 서류의 위조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니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채찍은 노파의 근거없는 수다에 불과하다.
이보다 엄청난 것은 니체의 철학적 자기 의식이다. "내가 이 시대 제일의 철학자라는 것은 불가능한 말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그 이상일 것이다. 2000년 사이에 놓여 있는 그 어떤 결정적인 것과 숙명적인 것이 나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인류의 역사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결정적인 과업"을 맡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앞으로의 모든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 그러한 결의를 인류에게 촉구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여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4년 신교도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분명 그의 집의 가풍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전한다. 그는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기막히게 암송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린 목사"가 그의 별명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소년은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10세 때 모텟(Motette, 성서 중의 구에 의거해서 작곡한 다성의 무반주 악곡)을 작곡하고 많은 시를 짓는다. 그는 14세 때 이미 자서전을 쓸 준비를 한다. 그 후 유명한 슐포르타 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는 특출한 학생으로 손꼽혔는데, 무엇보다도 독일어 작문과 음악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였다. 단지 수학과 철자법이 다소 부진했을 뿐이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얼마나 엄격히 교육시켰나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이야기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언젠가 한번 니체는 학생들을 감독해야 했다. 그리고는 감독 보고서를 다소 익살스럽게 기록한다. "강당에서 깜빡깜빡 타고 있는 램프들이 너무 흐려서 학생들은 각자 자기의 불이라도 빛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최근에 고3 교실의 긴 의자들을 페인트로 칠했는데, 탐탁지 않은 패거리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표시해 놓았다. " 이런 식으로 가볍게 보고서를 작성한 결과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엄격한 선생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진지한 보고서를 다분히 장난기를 섞어 작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경악스러워했다. 선생님들은 토요일에 나를 종교 재판에 회부해서 벌칙으로 3시간 동안의 감금과 몇 차례의 외출 금지를 선고하였다."
니체는 고등 학교 졸업 시험 (Abitur)을 치른 후, 이미 학생 시절부터 그의 집안의 믿음과는 소원해졌기에 집안의 전통에 어울릴 듯한 신학 대신에 고대 언어학을 본과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한다. 그는 잠시학생 조합원이 되며 결투를 하기도 하는데 항상 돈에 쪼들린다. 그는 전공과 함께 "저 활기에 넘친 어두운 천재"인 쇼펜하우어에 매우 심취한다. 그의 염세주의는 니체에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풍긴다. "나는 여기서 질병과 치료, 추방과 은신,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자기 인식에 대한 욕망, 실로 자기 파괴에 대한 욕망이 나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쇼펜하우어 식 요리 냄새를 풍겨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또한 니체는 그가 선택했던 전공 학문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그의 지도 교수이자 유명한 고대 언어학자인 리출은 그를 "전체 젊은 언어학도의 우상"이라고 극찬한다. 그는 한동안 정신적 세계에서 멀어진다. 그는 기마 야전 포병에 입대한다. 금욕적인 학자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칼을 찬, 철학자적인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용감무쌍한 사진이 한 장 있다. 그 당시를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때 그의 임무는 "이곳의 대포를 끌어안는 것이다. 부드러움보다는 원한 서린 태도로."
니체는 아직 학위 획득을 끝내기도 전인 75세 때, 바젤의 교수로 초빙된다. 그는 그곳에서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 자재로 풍부한 강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우정-훗날 니체는 그와 가장 씁쓸한 불화를 빚게 된다-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가 "진정한 언어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힌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최초의 위대한 저서 (음악 정신에서의 비극의 탄생)을 내놓는다. 이 작품은 전공 세계에서 전적인 무시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그는 10년 뒤 견디기 힘든 두통과 눈의 통증에 시달리고, 또 우울 증세와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그리고 대학에서의 교수의 의미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교수직을 그만둔다. 니체는 그때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도망자"처럼 바젤과 독일의 많은 지방,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옮겨다니며 생활한다. 어디서나 검소한 호텔 방에서 지낸다. 그는 무척 빠른 속도로 작품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는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은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니체는 이로 인해 몹시 실망하고 더욱더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해 온 그 모든 것에 대항한 나의 통렬하고 선동적인 투쟁 속에서 나 자신은 남이 눈치 채지 못하는 동굴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설령 사람들이 찾으려고 나서더라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끔 감추어져 있는 그 어떤 것 말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최후의 철학자라 부른다. 왜냐하면 내가 최후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나와 이야기하지 않으며, 나의 목소리는 내게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여겨진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마저 반응이 없자 이렇게 쓴다.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의 외침에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끔찍한 체험이었다. 그 체험은 나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그 모든 모임에서부터 끄집어 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끝도 안 보이는 낭떠러지에 서 있다."
1887년 니체가 45세의 나이에 졸도하였을 때, 낭떠러지는 입을 벌려 완전히 그를 삼켜 버렸다. 그 사건은 튜린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흐느끼며 끌어안는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그는 호텔로 옮겨진다. 의사들은 발작 증세라고 진단하는데 원인은 예전에 전염된 일이 있는 매독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 그는 11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머니 집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간호를 받으면서 산다. 가장 신뢰하는 친구인 오버베크는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피아노에서 울려나오는 시끄러운 노래와 광기에 고조되고,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상 세계로부터 갈기갈기 찢어져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때 그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희미한 어조의 짧은 문장으로 죽은 신의 후계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기이한 예언자적인 이야기와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일 등 그 모든 것을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이 이야기한다. 다시 형언하기 어려운 괴로운 전신 경련과 발작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은 내가 거기에 있었던 짧은 일시적인 순간 동안 일어났다. 전반적으로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천직인 새로운 영원성을 표현하는 익살꾼의 표현들이 압도적이다. "비길 데 없는 표현의 대가인 그가 즐거움의 환호마저도 가장 진부한 표현이나 우스꽝스러운 춤과 발작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니체는 1900년 세상을 떠났다 니체의 사유는 그의 삶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전 육신과 삶을 다해 책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니첸 사상의 변화들은 또한 그의 실존의 단계이다. 그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은 바로 그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다. "나는 너희에게 세 가지 정신의 변형을 말하려 한다. 즉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고,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린 아이가 되는지를 말하겠다. " 낙타는 이상에의 경외와 믿음의 단계, 전수된 것에 대해 인내하는 자세의 단계를 말한다. 사자는 이러한 믿음을 파괴하고 자유로운 정신의 시대, 허무주의를 체험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추구를 가리킨다. 그것은 삶을 순진 무구하게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단계, 새로운 믿음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정신적 여정 또한 문화적인 창조물로 과거에서 현재로 전수되어 온 그 모든 것의 숭배에서 시작된다. "첫번째 과정. 그 누구보다. 더 숭배한다. (그리고 따르고 배운다) 모든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한데 모아 서로 싸우게 한다. 모든 고난을 짊어진다." 이러한 의도에서 문화적 가치, 특히 그림과 음악에서의 문화적 가치들이 쇼펜하우어적인 의미로 기분 좋은 환상, 또 세계의 심연 위에서의 연극이라고 정당화된다. 현실은 아주 깊숙이까지 균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을 이미 그의 첫번째 단계에서 알았다. 가령 그리스 정신은, 독일의 고미술 학자 빈켈만이 그렇게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이해해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 정신은 오히려 비애를 자아내는 지반에서 비롯됐다. 아폴로적인 요소, 절제와 질서는 파괴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인 힘의 원리인 디오니소스적 요소와 끊임없는 투쟁의 관계에 서 있다. 이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로소 그리스 정신의 가장 높은 업적인 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는 문화에 대한 믿음이 파괴됨으로써 끝이 나버린다. 여기에서의 전형적인 예는 니체와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과의 관계이다.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의 음악을 보편적 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표현하였다고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 후 그는 그 음악에서 몰락의 징후를 탐지한다. 이제 바그너의 시대는 퇴폐로 보인다. "우리가 내던져진 이 시대는" "커다란 내적인 몰락과 붕괴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불확실함이다. 아무 것도 확고한 기초와 견고한 믿음 그 자체 위에 서 있지 못한다." 니체가 시대의 몰락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한 특징적인 표현은'허무주의"라는 말이다. 겉으로는 그토록 안정되게 존립하고 있는 것의 자리에 "허무", 무가 들어선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200년의 역사이다. 내가 서술하는 것은 도래하는 것, 더 이상 다르게 다가올 수 없는 것, 즉 허무주의의 도래이다. 이 역사는 지금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마저도 여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래는 이미 100개의 징후로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운명은 어디에서나 자신을 예고하고 있다. 이 미래의 음악에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귀를 종긋 세우고 있다. 전체 유럽의 문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매 세대마다. 커가는 긴장의 책임 추궁 속에 파국을 향해 움직여 가고 있다. 즉 불안하고 폭력적이며 황급하게 덮치면서 종말을 알리는 급류처럼 더 이상 성찰하지 않으면서 성찰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니체 자신도 그 스스로가 이러한 운명에 얽혀들었음을 알고 있다. 그는 허무주의를 그 자체 내에서 끝까지 참고 견뎌 내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임을 파악한다.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했듯이, 그는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를 이미 스스로 그 종말까지 산 사람이다." 따라서 니체는 그 시대의 내적인 붕괴를 가차없이 폭로하여, 현재가 얼마나 허무주의적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인류에게 최고의 자기 성찰의 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니체에게 "자유로운 정신"의 임무이다. "두번째 과정 사람들이 가장 단단하게 얽매여 있는 숭배하는 마음을 깨뜨린다. 자유로운 정신 독립, 폐허의 시대. 모든 숭배의 비판." 자유로운 정신은 무엇보다도 전수되어 관습처럼 굳어져 버린 선입견을 뒤집어 엎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 가지 관점에서 행해진다. 첫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의 파괴이다. 시대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는 자신의 학문적 인식의 진보를 자랑한다. 그러나 니체는 시대 의식이 밑바탕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에게는, 그가 언젠가 그랬듯이, 절대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단지 "모든 믿음, 모든 의견이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통찰"만이 남는다. 따라서 허무주의는 첫번째로 "진리와는 끝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두번째로 "도덕과도 끝장"임을 의미한다. 니체는 매우 명석하게 통상적인 도덕이 지닌 불확실성을 깨달았다. 즉 도덕적인 원칙이 공표되지만 행위는 그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허무주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절대적인 무가치에 대한 믿음", "절대적인 무의미에 대한 믿음"이다. 도덕이 그렇게 허무주의적으로 전복되어야 할 필연성의 근거는 허무주의 자체 안에 이미 결정되어 놓여 있다. 도덕은 삶에 대항한다. 도덕은 "반자연"이 된다. 이제 삶과 자연이 진실을 위하여 도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 "도덕의 자살이 이들의 최후의 도덕적 요구이다."
허무주의는 세번째로 "종교와도 끝장"임을 의미한다. 니체는 그의 허무주의적 태도의 귀결로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에 이른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나는 결코 어떠한 동의도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오직 한가지의 정직함, 즉 무조건적인 부정만이 있을 뿐이다. " 니체는 더 깊이 들여다. 본다. 그리스도교는 멸망을 자초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그 시작부터 직접적인 삶에서 등을 돌렸고, 바로 그 이유로 근본적으로 허무주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붕괴는 그리스도교 자체에서부터, 즉 그리스도교 안에서 키워진 진실성의 본능에서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이제 바야흐로 "경외심을 가지고 명령하고 기만하던 2000년 동안의 진리에 길들여졌던 것이 파국을 맞아 이 파국이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에서도 거짓말을 금지하는" 시기가 왔다. 종교가 붕괴되면서 종교는 이미 언제나 인간의 생산물, "인간 작품이며, 인간 광기"라는 점이 폭로된다. 따라서 허무주의의 가장 깊은 의미는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는 모두 신을 죽인 살인자들이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바닷물을 다 마셔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움직여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에 의해 길을 잘못 들지 않았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었다! 모든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까? 이 위대한 행위는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한 것이 아닌가? 그 품위에 걸맞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신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보다. 더 위대한 역사에 속한다. " 그러나 니체는 물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안다. 신의 죽음의 결과는 "연속적인 붕괴, 파멸, 멸망, 전복"이다. 그 결과는 "그 비슷한 것은 아마도 아직껏 이 세상에 있어 본 적이 없는 경악과 음울과 인식의 섬뜩한 논리"일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니체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멈추어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확고하게 주장한다. 허무주의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에서 긍정적인 점은, 허무주의가 하나의 통과점이라는 것이다. 허무주의에 의해 "유럽에서는 그토록 웅장한 정신의 긴장이 형성됐다. 그토록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로 사람들은 가장 멀리 있는 목표를 쏠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이 세번째 단계로의 전환이다. 이 단계에서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제 허무주의에서 "모든 연극 중 가장 희망찬 연극"을 본다. "세번째 과정. 적극적인 입장에, 긍정에, 쓸모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위대한 결단. 내 위에는 어떠한 신도, 어떠한 인간도 있을 수 없다!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를 아는 창조자의 위대한 본능. 위대한 책임감과 순결" "우리는 감히 광막함 속으로 뛰어든다. 우리 자신이 감히 그것을 결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강인함이 지금까지 태양이 사라져 간 그곳, 그 바다로 갈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 새롭게 창조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붕괴되고 가면이 벗겨진 도덕이다. 철학자는 "새로운 도표 위에 새로운 가치를 서술하여야 한다. " 그것은 "모든 가치들의 전복"으로 이끈다. 그렇지만 이것은 초월자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서부터 생겨난다. "창조하고 의욕하고 평가하는 자아"가 이제 "사물의 척도와 가치"가된다. 새로운 가치 질서의 근본 가치는 삶이 된다. 중요한 것은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본래의 무궁 무진함을 즐거워하며 생성 자체의 영원한 기쁨이 되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유형을 회상하면서 갖는 삶에의 의지, 자신 안에 또한 소멸의 기쁨까지도 지니고 있는 기쁨"이다. 인간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해 밖으로 밀치고 나가는 삶의 위대한 창조의 과정 속에 서 있다. 인간은 "하나의 통과점이고 몰락"이다. 그러나 인간의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 니체는 이렇게 답한다. 인간 그 이상인 어떤 것으로, 그렇지만 신이 아닌 "초인"에게로 가고 있다. 초인은 "인간의 먹구름에서 내려치는 번개"이다. 초인은 숭고한 새로운 인간 유형이 된다.그러나 현재의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를 이어주는 밧줄-절벽 위의 밧줄"이다.
자신을 넘어서서 밖으로 밀어붙인다는 이 규정은 인간적 현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이 규정을 모든 생명의 근본 특징, 아니 존재 자체의 근본 특징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힘에의 의지"라는 특징을 서술한다. "나에게 세계는 무엇인가? 세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지한 활력을 가진 괴물-써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단지 변형되기만 하는 활력의 괴물-이다. 그 자신의 한계가 아니면 '무'로 둘러싸여져 있다. 그 자체 내에서 폭풍우를 일으키고 휩쓸어 버리는 힘의 바다,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가장 다양한 형태로 흩어지게 하며 밀물과 썰물로서 영원히 도로 흘러 들어오는 바다, 가장 견고하고 가장 차가운 것에서부터 가장 거칠고 가장 자기 자신에 모순되는 것으로 흩어지는 바다. 그리고 나서는 풍부함에서 다시 간단함으로 귀향하고, 모순의 게임에서 다시 조화의 기쁨으로 귀향하는, 충족을 모르고 피곤을 모르는 생성-영원히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영원히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이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너희들은 이 세계의 이름을 알기를 원하는가?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또한 이 힘에의 의지이다.-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창조와 파괴에서의 이러한 삶은 어떠한 방향도 어떤 목적도 어떤 목표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 허무주의적이다. 따라서 삶의 긍정은 결국 삶의 허무주의적 성격의 긍정이다. 이것에 대한 최고의 상징은 "영원한 회귀"이다. 존재한 적이 있는 것은 모두 다시 돌아온다. "달빛 속에 기어가고 있는 느린 거미, 달빛, 그리고 함께 속삭이고 있는, 영원한 사물에 대해 속삭이는 문 가에 서 있는 나와 너-우리들은 모두 이미 한 번 존재했었지 않았는가?" 이로써 허무주의의 극단에 도달한다. "현존재는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듯이 의미와 목적이 없고, 무로 끝나버림이 없이 불가피하게 되돌아 온다. '영원한 희귀', 이것은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무(즉 '의미 없는 것')는 영원하다."
그렇지만 니체에게는 그 모든 것 안에 허무주의에서의 구제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의미 없는 현존재를 긍정해야 하고, 그래서 무의미의 한가운데에서 의미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된 정신은 우주의 한가운데 신뢰하는 즐거운 숙명론과 더불어, 오직 개별자만이 배척되어야 하고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이 스스로를 구제하고 긍정한다는 믿음 속에 서 있다. 그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태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표현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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