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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76호
2012.6.21 (음 5.2)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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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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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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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부를 가져야 하지만 매처럼 이를 감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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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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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불쾌한 반응
"내가 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충고하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이 상황을 글로 표현할 때 "그는 나의 충고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나의 충고에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 어느 쪽이 적절할까? 전자의 경우는 '타당한 충고를 했는데 그가 얼굴을 찌푸려 내가 불쾌했다'는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그에 비해 후자는 '내가 충고한 것에 대해 그가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뜻이 된다. 불쾌함을 느끼는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예는 언론 매체에서 자주 듣고 볼 수 있다. "최 의원이 '김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에서 학교를 마쳤는데 친미파가 아닌가'라고 공격하자 김 본부장은 '친미파라니요'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이 그가 출연한 영화 '올드보이'에 영향을 받았다는 보도에 최민식은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등이 그런 예다. 이 경우는 모두 '불쾌한 반응'보다는 '불쾌하다는 반응'이라고 쓰는 게 정확하다.
'실망스러운 반응/실망스럽다는 반응' '재미있는 반응/재미있다는 반응' 등도 이와 유사한 경우다.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내 제의에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그가 내 제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나는 마음이 상했다)/그는 내 제의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그는 내 제의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말에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다(깜짝 놀라는 등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내 말에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내 말이 흥미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말바루기] 주워섬기다
"워낙 빠른 속도로 주워삼키는 그의 말을 쫓아가느라 나 역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자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철학자나 이론가의 이름을 주워삼기 일쑤인 사람들과 달리 유쾌하고 경쾌한 언어에 슬쩍슬쩍 자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이론을 스며 넣는 솜씨는 내게 그저 한없는 열등감을 안겨줄 뿐이다."
예문에서 보듯이 들은 대로 본 대로 이러저러한 말을 아무렇게나 늘어놓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주워삼키다' '주워삼다'는 바른 말이 아니다. 이런 뜻을 가진 올바른 단어는 '주워섬기다'이다.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수다스럽게 주워섬겼다" "그녀는 '신문.요구르트 배달, 접시 닦기, 쓰레기 수거, 건물 청소원, 웨이트리스, 심야다방 DJ…'로 한참 주워섬기다가 '당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일, 다만 호스티스만 빼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처럼 사용된다.
'주워삼키다'를 '주워 삼키다'로 띄어 쓰면 말이 된다.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흩어져 있는 것을 집는다는 의미의 '줍다'와 무엇을 입에 넣어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뜻의 '삼키다'를 함께 이를 때, 즉 "손님 중에는 감자튀김을 주워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모래알을 주워 삼키는 수탉들"처럼 쓰이기 때문이다.
'주워섬기다'와 '주워대다'는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 다르다. '주워섬기다'는 들은 대로 본 대로 자기가 체험한 사실들을 죽 들어 늘어놓는 것이고, '주워대다'는 생각이나 논리가 없이 제멋대로 이 말 저 말을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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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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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 허수경
내가 입고 싶은 저 비단옷은 어느 록 가수가 입었던 가죽옷과 비슷해 감옥과 감옥 사이를 돌며 북과 기타를 울리며 노래하던 록 가수는 아마도 내 고향 비단 시장에 오면 비슷한 공연을 하면서 울지도 몰라
비단이 얼마나 많은 폭력 속에서 지어낸 피륙인지 누에는 알고 있을 거야 이제는 자연에서 혼자 사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저 누에들은 어떻게 저 폭력을 참아내었을까 그래서 비단은 저렇게 곱게 차곡차곡 지층처럼 시장 한가운데 누워 있는 걸까
난 한때 시인들이 록 가수였으면 했어 어쩔 수 없잖아, 시인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월스트리트, 증권 판매상이 그 일을 하니?
어미를 죽인 자 아이를 죽인 자 현금을 강탈한 자 강간한 자 외국인을 살해한 자 이 모든 것이 당신 탓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십자가를 긋던 수많은 성도들을 위해
저 많은 협곡을 돌아 저 많은 태풍을 뚫고 집에 돌아와 겨우 잠이 든 시인이 이 세계가 멸망의 긴 길을 나설 때 마지막 연설을 인류에게 했으면 했어
인류? 사랑해 울지 마!, 라고
따뜻한 이마를 가진 계절을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별처럼 나는 아직도 안개처럼 따뜻하지만 속은 차디찬 발을 하고 있는 당 신에게 그냥 말해보는 거야.
적혈구가 백혈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차곡차곡 접힌 고운 것들 사이로 폭력이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것처럼 폭력이 짧게 시선을 우리에게 주면서 고백의 단어들을 피륙 사이에 구겨 넣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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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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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 이인자
온 몸을 다 태우고 모두가 떠난 자리 물방울에 담겨진 영혼을 바라본다. 무채색 붓길 따라서 출렁이는 생의 물결
숫자를 지워가 듯 시간을 헤아리면 침묵도 아름다운 푸르른 이야기들 마지막 길 끝나는 곳 긴 그림자 머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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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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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 동쪽에서온사람의삼촌(이스트맨스 엉클 - 샨티 수우 족)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문명인들은 가슴을 갖고 있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들은 자기 부족의 어떤 사람을 하인으로 부린다. 그렇다, 사람을 노예로 만든 것이다. 우리 인디언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문명인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하인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오래 전에 그들의 몸에 검은 물감을 칠한 것 같다. 그래서 이제 하인들은 그들과 똑같은 피부색의 아이들만 낳게 된 것에 틀림없다.
문명인들은 삶의 목표를 오로지 더 많이 소유하는 것,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에 두고 있다. 그들은 온 세상을 저 혼자 차지하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끝없이 우리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해왔다. 마침내 우리가 말을 듣지 않자 군인들을 보내 강제로 땅을 빼앗아 버렸으며, 우리는 아름다운 땅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문명인들은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하루를 여러 시간으로 나누고, 한 해를 여러 날로 쪼개었다.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나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따지고, 끝까지 이익을 추구하며, 마침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쓰레기라 여긴다. 그들은 아마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은행이라는 큰 집에 돈을 맡기고 가끔씩 이자를 붙여 찾아간다. 그러나 우리 인디언에게는 은행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는 돈이나 담요가 남으면 그것을 부족의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필요할 때는 그들에게서 얻어다 쓴다. 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은행인 셈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삶의 기준을 돈에다 두고 있으며, 진실과 거짓조차 돈 앞에선 그 위치가 바뀌고 만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우리 인디언들과 사뭇 다른 종족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진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진리가 적혀 있다는 책을 늘 지참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들만큼 진리와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자들도 없다. 만일 인디언 부족 내에 그러한 자가 있었다면 당장에 부족 밖으로 추방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책'이라는 것을 가져본 역사가 없으며, 누가 어떤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책에다 적어 놓고 찬양하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진 삶은 죽음이며, 그러한 삶을 사는 자에게는 진리의 책도 아무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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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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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3장 사물을 사고하는 방법
3. 정리를 알라
논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고 하기보다는 정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정리를 중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 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의 이상이어서, 정리를 아는 사람은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정리를 알고 있는 믿음직한 인간이 되도록 마음쓸 뿐이다. 실제로 나는 세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이건 국가적인 문제이건 이 정신을 몸소 터득하는 시대가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정리를 아는 부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딸의 신랑감을 고르려면 표준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상대가 정리를 아는 사람인가 어떤가 하는 문제뿐이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라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리를 따져서 다투고 정리로써 화해하는 정리 있는 부부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정리 있는 인간 세계야말로 평화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정리 시대라고 할 만한 시대가 언제고 온다면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대이며 정리 있는 정신이 널리 퍼지는 시대일 것이다. 인생의 정리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은 중국이 세계에 제공해야만 할 최선의 것이다. 중국의 군벌들이 50년이나 앞날의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걷어가는 것이 정리를 아는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이 정신이야말로 중국 문명의 정수이며, 그 최선의 측면이라고 나는 말한다. 나의 이와 같은 발견은 우연히 오랫 동안 중국에 살았던 두 미국인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으로 30년이나 중국에 머물렀던 미국인은 중국의 온갖 사회 생활은 <강리(도리를 말한다)>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이 싸움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는 말은, <이봐, 그게 도리에 맞는다는 말이냐!> 하는 말이다. 누구나 곧잘 하는 가장 통렬한 선어는 <부강리>한 놈이라는 것, 즉 <이치에 맞는 말을 하지 않는 놈이다>라는 한 마디다. 자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인정하게 되면 싸움은 이미 진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적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정리를 아는 인간은 때에 따라서는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올바른 것이다. 편지의 추신에는 이 두 가지의 대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나는 언제나 친구가 보내 주는 편지의 추신을 사랑하는데, 본문과 완전히 모순된 말을 쓴 추신은 특히 재미있다. 추신 가운데는 본문을 쓴 뒤에 가슴에 손을 대고 여러 가지 세상에서의 정리에 비춰 보아서 생각한 일이나 망설임이나 기지나 상식이 한데 섞여 있다. 어떤 명제를 긴 논의로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 뒤에 갑자기 어떤 직각에 부딪쳐서 번갯불처럼 상식이 비쳤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의론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자기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다. 이런 것이 온정 있는 사상가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사고 방법이야말로 내가 인간미 있는 사고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편지의 본문에는 논리적인 인간으로서 말하고, 그 추신에서는 참다운 인간적 정신과 정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어떤 아버지가 여자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대는 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치자. 그는 붓을 달려 어째서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는가 하는 이유는 첫째, 둘째, 세째로 조항을 들어 말하고 누가 보아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갖가지의 논거를 적어 놓는다. 이론을 정연하게 늘어놓아 반문할 여지라곤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미 오빠 셋을 대학에 보내고 있으며, 어머니가 병이 낫으니 누구든지 집에서 시중을 들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느니, 어쩌느니 여러 가지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편지 맨 마지막에 이름을 쓰고 나서 간단한 글귀를 한 줄 적어 넣었다. <그래, 괜찮겠지, 주리야, 올 가을에 입학할 생각으로 준비를 해 두어라. 어떻게 되겠지> 또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할 뜻을 적어 보내려고 하는 남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첫째,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성실성을 잃고 있었다. 둘째, 남편이 집에 들어 왔을 때 따뜻한 음식을 마련해 준 일이 없다는 등등, 모두 당연한 그럴 만한 이유이며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점도 있다. 만약 변호사를 부탁한다면 논리는 더 한층 완전해지며, 사정은 한층 더 정정당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다 써 놓고 보니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글씨로 갈겨 쓰기를 <제기랄, 사랑하는 소휘여! 나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려. 나는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겠소> 하였던 것이다.
이 양쪽 편지의 본문에 있는 논의는 매우 완전하며 옳다.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추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참다운 인간적인 정신... 인간적인 아버지와 인간적인 남편이다. 조금만 정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까다로운 의논 따위에 골치를 앓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충동과 감정과 욕망이 변해 마지않는 바다 가운데서 건전한 키를 잡도록 애써야 할 것이며, 그것이 인간적인 정신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가 진실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인간 세계에 잇어서의 진리의 모습이다. 공박할 여지가 없는 의론에는 인정이라는 것이 맞서며, 정당한 것일지라도 애정 앞에서는 약한 법이다. 그러니까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는데, 아무래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경우가 가끔 있다. 법률조차도 그가 주장하는 절대적인 정의에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있다. 법률은 가끔 조문의 <조리 해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는 것, 최고 행정장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면 뚜렷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 이 사면권을 매우 효과 있게 행사했다. 이렇듯이 정리를 중히 여기는 정신은 온갖 사고 방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며, 우리들 자신이 정확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관념을 원숙하게 하며, 행위에 있어 모가 난 곳을 둥글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 대립되는 것은 사상과 행위... 개인 생활, 국가 생활, 결혼,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온갖 종류의 광신과 독단이다. 나는 감히 주장하는 바인데 중국에서는 지적인 광신과 독단논이 다른 여러 나라보다 적다. 중국의 폭도는 매우 흥분하기 쉬운 면도 있으나 정리를 분별하는 정신은, 중국의 전제 군주제, 종교, 또 이른바 <부인의 억압>을 매우 인간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런 일들은 모두 얼마간 조건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떻든지 틀림은 없다.
정리라는 것이 중국의 황제, 신, 남편을 단순한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가는, 황제는 하늘의 명령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며, 잘못 다스렸을 경우에는 <하늘의 명령>을 잃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황제가 나쁜 정사를 할 경우에는 우리는 사정없이 목을 베고 만다. 지난날 수없이 망하고 흥한 그 많은 왕조의 왕이나 황제의 목을 너무나 많이 베었으므로 그들이 <신성>하다거나, 반신적이라는 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성현은 신으로 모셔지지 않고 오직 언제나 지식의 스승으로서 우러를 뿐이다. 또 중국의 신은 완전무결한 전형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어떻게라도 될 수 있는 썩어 빠진 사람들이어서 아첨도 통하는가 하면 뇌물도 통하는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는 정리를 떠난 사람은 곧 부친런칭(인간성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것)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만다. 너무나 성인인 체하며 완전무결한 인간은 마음 속에 이상이 있다고 여기고 반역자처럼 다루어지는 일조차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유럽을 살펴본다면, 정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정리는 커녕 이성조차 통하지 않고, 오히려 광신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다만 국가의 목적인 충돌이 있다든다, 국경 문제나 식민지를 요구하는 마찰이 있다든가, 그런 일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런 일들만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근원이 더 깊고, 오히려 유럽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것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낯선 도시에서 택시를 탔으나 갑자기 운전수를 믿을 수 없게 되어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과 같다. 운전수가 지리에 어둡고 정확한 노선으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지 못한다면, 다소 이야기를 납득할 수 있지만, 운전수가 무언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좌석에 앉아 있는 손님의 귀에 들려, 이 사람이 과연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인가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 그야말로 곤한한 문제다. 더우기 정신이 이상한 운전수가 권총을 가지고 있고, 손님은 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다면 신경과민은 단연 극도로 심해진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이런 컬리커추어는 인간 정신의 참다운 모습은 아니다. 온갖 나쁜 병의 물결에 휩쓸리듯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불태워 버리고 마는 단순한 정신 착란, 일시적인 발광의 단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나에겐 아무래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경우가 가끔 있다. 법률조차도 그가 주장하는 절대적인 정의에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있다. 법률은 가끔 조문의 <조리 해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는 것, 최고 행정장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면 뚜렷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 이 사면권을 매우 효과 있게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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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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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27. 마르크스 : 현실을 위한 혁명
칼 마르크스가 그의 본래적인 삶의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더라면 오늘날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청년 마르크스는 타고난 시인으로 자처했고, 또한 그의 시 정신이 엿보이는 몇몇 증거들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것들은 (요정의 노래), (땅의 정령의 노래), (사이렌(바다. 요정)의 노래) 등 지극히 시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전부 신화적인 노래들이다. 비록 매우 슬픈 시이기는 하지만 특히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가 하나 있다. 그 제목은 (운명의 비극)이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은 인용해 볼 만하다
아가씨는 거기에 그토록 창백하게 서 있네, 조용히 입을 다문 채로. 천사와도 같은 부드러운 마음은 눈물로 흐려져 있고, 새침해 있네. 그토록 경건했고, 그토록 부드러웠던 그녀 하늘에 내맡긴 순결의 복된 모습은 단아함으로 엮어졌다네 거기에 고귀한 기사가 화려한 준마를 타고 눈에는 바다와 같은 사랑과 타오르는 열정을 담고 왔었네. 그가 말릴 길 없이 싸움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노도와 같이 떠나 버리자 가슴 깊숙이 꽂혔다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다른 어조로 노래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죽음의 노래를 울부짖고 우리는 냉정한 신의 원숭이들이다.
이 시들을 감상하고 난 후, 마르크스가 비록 심하게 영혼에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시인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독일어 시 예술이 많은 것을 잃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무튼 유명한 변호사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네가 통속적인 시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면 유감 천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들에게 워털루 전투에 대해 "웅장한 양식의 송시"를 써 보라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인류의 행복으로 보느냐 불행으로 보느냐에 따라 마르크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시 쓰기를 단념한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 "온갖 소음과 우스꽝스러운 성화와 성상으로 뒤덮인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인"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흥미있는 것은 훗날 열광적인 무신론자가 된 그가 고등 학교 졸업 논문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일치"라는 주제로 썼다는 것이다. 그 후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 본에 갔을 때, 확실히 그는 외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여하튼 걱정이 된 어머니는 이렇게 써 보냈다. "네가 너의 작은 살림을 어떻게 꾸려 나가고 있는지, 작은 살림이건 큰 살림이건 가계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인데 잘 꾸려나가고 있는지 몹시도 궁금하구나. 내가 이런다고 약한 여성들의 노파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몇 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구나. 사랑하는 칼, 청결과 정리 정돈을 사소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건강과 쾌적함은 바로 그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네 방을 자주 청소하는 것을 잊지 말고 정확하게 잘 지켜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칼, 매주 수세미와 비누로 문질러 닦도록 해라." 그녀가 이러한 훈계조의 편지를 쓴 것은 분명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공부하는 양을 보면 정리 정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 조합에 가입한다. 그리고-이 기록이 사실이라면-결투하다가 부상을 당한다. 그는 "야간 안면 방해, 고성 방가 및 음주"로 학생 감옥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는 "금지된 무기"를 소유했기 때문에 고소된다. 그는 계속 빚을 진다. 이 와중에 그는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약혼한다. 귀족 가문인 약혼녀의 집안에서는 이 무일푼의 총각을 다소 주저하며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도 "시적인 감흥으로 사랑의 흥분과 도취에 들떠" 한 여자를 잡아두려는 것을 나무란다.
마르크스는 베를린에서 두 학기 동안 학업을 계속하는데, 여기에서도 모범 학생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아버지가 불평을 호소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무질서하고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 등잔 아래서 모호한 야심을 품고 맥주 때문이 아니라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 짓을 하는 것, 예의라고는 모르는 제멋대로 된 녀석"이라는 비난을 아들에게 퍼붓는다.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도 아버지를 놀라게 한다. 마르크스는 몇몇 강의만을 들을 뿐이었는데, 그것도 법률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 분야였다. 그는 학기 내내 거의 학교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23세에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서 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이 모든 외적인 사건들은 전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가 정말 중요하게 여긴 일은 청년 헤겔 학도의 모임인 "박사 클럽"의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 밤낮없이 토론하는 일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사상의 창고", "이념의 황소 대가리"라고 단정했다. 그는 틈틈이 "새로운 형이상학의 근본 체계"를 서술한다. 물론 그는 교수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헤겔 좌파인 그의 친구들이 거의 예외 없이 보수주의적인 정권에 부딪쳐 실패하는 것을 보고는 그 생각을 버린다. 그 대신 마르크스는 편집인, 그것도 쾰른에서 발행되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라인신문)의 편집인이 된다. 그는 직업상 정치, 경제적인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게 된다. 그는 대담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신문을 편집한다. 훗날 그는 공산주의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이때는 공산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그는 정치적 탄압 때문에 편집자 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프로이센 왕이 "라인강의 창녀"라고 명명한 이 신문은 폐간되고 말았다
그 후 마르크스는 오래 기다려 온 약혼녀와 서둘러 결혼을 하고, 파리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친구 아놀드 루게와 함께 (독일, 프랑스 연감)을 발행한다. 그는 얼마 동안 루게 가족과 함께 일종의 "공산주의 공동체" 생활을 하지만, 그의 융통성없는 성격 때문에 곧 갈라서고 만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하이네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이 도시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고 브뤼셀에 잠시 체류한다. 그는 브뤼셀에서 제1차 세계 공산당을 (17명의 회원으로) 창당한다. 그 다음 잠깐 동안 런던에 가 있다가 1848년 독일 혁명이 발발하자 돌아온다. 이 혁명을 계기로 그는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고, 자신의 혁명 계획을 촉진시키기 위해 잠시 프랑스와 독일로 되돌아간다. 그는 쾰른에서 (신라인 신문)을 창간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다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결국 죽을 때까지 런던에서 살게 된다. 대륙을 잠시 여행하는 동안 말고는 줄곧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파리와 브뤼셀에서 체류한 짧은 기간은 그나마도 의견을 달리하는 혁명가들과의 통렬한, 그리 관대하지 못했던 불화로 점철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연구에도 몰두하여 (경제학, 철학 수고)를 집필한다. 그렇지만 이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출판된다.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극도로 궁핍한 가운데 무섭게 불어나는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간다. 현실적인 궁핍이 종종 그들의 생활을 짓눌렀다. 잡지 창간은 실패로 끝나 버린다. 마르크스는 대개 후원금으로, 특히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살림은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때때로 가구를 저당잡혀 차압당하기까지 해야 했다. 언젠가 한번은 외출할 수조차도 없었는데, 그 까닭은 그의 옷을 전당포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마는 끊일 새 없이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들었다. 다만 몇몇 아이만이 태어난 첫 해를 넘겼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빛으로 압박 받다가 마침내 파산을 선고하려고 한다. 오직 충실한 벗 엥겔스만이 이 최악의 조치를 막아 준다. 부인 제니는 절망에 빠져서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느니 자신과 아이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이 판국에 마르크스는 하녀와 연애 소동을 일으킨다. 이 연애 사건의 결과, 그렇지 않아도 재정적 궁핍으로 뒤숭숭한 가정의 분위기는 완전히 흐트러지고 만다. 같은 신조를 가진 동지들과의 논쟁도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한다. 너무나 지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탈감에 빠진 짧은 기간을 빼고는 열심히 작업을 계속했다. 이렇게 그는 대표작 (자본론)을 집필한다. 그는 실제로 그 책의 제1권을 출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책에 대한 평이 전혀 없자 스스로 긍정적, 부정적 비판들을 쓴다. 그러나 전3권으로 된 이 저서가 완성되기 전, 마르크스는 1883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마르크스의 외모와 인간성에 대해서는 러시아 친구 중 한 사람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멋있는 수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활력, 의지력, 꺾일 줄 모르는 확신으로 뭉친 그런 남자의 전형이다. 외모도 매우 기이하게 생겼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 털로 뒤덮인 손, 단추가 잘못 채워진 웃옷, 비록 그의 외모와 행동이 아주 기이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경을 요구할 권리와 힘을 갖고 있는 그린 남자의 풍모를 가졌다. 그의 행동은 순하면서도 과감하고 자신에 차 있다. 그의 태도는 모든 사회적 예절과 너무나도 상반된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거만했고, 약간의 경멸감마저 띠고 있었다. 그의 금속성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가 내리고 있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극단적인 판단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명령조의, 어떠한 반대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어투가 아니고는 달리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또 나를 거의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어조에 의해-그가 말하는 모든 말이 그러했다-그의 말투는 더 날카롭게 들린다. 이러한 어조로 그는 정신계를 지배하고 이 정신계에 법칙을 하달해야 하는 그의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토로했다. 마치 환상의 순간이 눈앞을 떠돌듯이 내 앞에 한 민주주의 독재자의 화신이 서 있었다."
마르크스는 철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 시대의 위대한 정신적 논쟁에 뛰어든다. 그 시대는 거물 헤겔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는데 그는 헤겔의 사상을 "현금의 세계 철학"이라고 하며 심취한다. 그러나 그런 뒤 그는 심취했던 것보다. 더 단호하게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의 비판은 헤겔의 역사에 대한 고찰에 집중된다. 헤겔에 있어 역사는 사건의 단순한 우연적인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내재적인 원리 다시 말해 일종의 내적인 변증법에 따라서 진행되는 의미있는 흐름이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역사의 본래의 주체는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역사에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정신-헤겔은 이것을 "세계 정신" 또는 "절대 정신" 또는 "신"이라고 부른다-이 지배한다. 생성되어 가는 신이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자기 의식을 실현한다. 그는 역사 과정의 개별 단계에서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 헤겔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것도 그 자신의 체계 안에서 절대 정신이 역사를 통한 모든 잘못된 길을 거쳐 마침내 그의 목표, 즉 완성된 자기 의식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이제 세계 정신은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최종의 철학은 그 모든 이전 철학의 결과이다. 아무 것도 상실되지 않고 모든 원리는 보존되었다. 이 구체적인 이념은 무려 2500년에 걸친 정신의 노력의 성과, 자신을 인식하려는 정신의 진지한 연구의 결과이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이 출현한 후에는 파악되지 않은 현실이란 더 이상 없다. 이것이 (법철학) 머리말에 나오는 그 유명한 명제의 의미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따라서 헤겔은 이성과 현실은 이제 드디어 일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현실은 진정 화해하였다. 절대 정신은 자기 자신을 모든 현실로, 그리고 모든 현실을 자신의 구현으로 파악하였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모든 현실을 절대 정신으로부터 이해해야만 한다는 헤겔의 사상은, 그에게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일종의 "신비주의"일 뿐이다. 이럴 경우 현실 자체에서부터가 아니라, 실제 현실 위의 한 점에서부터 철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요구는, 철학은 물구나무 세워져야 한다는 것 즉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가 역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적인 현실을 가지고 이 세상의 현실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사유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현실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 철학에 무신론이라는 각인을 새긴다. "진리의 피안이 사라져 버린 지금 역사의 과제는 차안의 진리를 확정짓는 것이다" 헤겔이 현실은 이성과 화해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구체적인 현실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한다. 헤겔의 경우 그것은 순전히 사유의 영역에서 전개된다. 헤겔이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도 순전히 사유된 현실일 뿐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실적 현실은 모순적인 것, 파악될 수 없는 것, 따라서 이성과 화해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헤겔의 전체 철학은 이 실제의 현실을 그의 포괄적인 사유 안에 포함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좌초하고 만다. "따라서 세계는 총체적인 철학이 마주 대하고 있는 일종의 찢어진 세계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현실은 인간의 현실이다. "우리가 시작하는 전제는 실제의 개인들이다. " 마르크스가 가정하는 철학은-헤겔에 반대하여 포이에르바하를 따르는-인간 실존의 철학이다. "인간의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철학을 "현실의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인간을 위한 제I의 가장 본래적인 현실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에서부터 새로운 사유도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는-헤겔처럼-인간을 본질적으로 인식의 능력으로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적 실천, 구체적 활동이다. "인간은 실천 속에서 진리, 즉 현실과 힘, 그의 사유의 현세성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것은 실제로 활동적인 인간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실천의 본질에는 그것이 공존 속에서 수행된다는 것이 포함된다.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파악했다면, 마르크스는 매우 명백하게, 인간은 항상 이미 그를 떠받치고 있는 한 사회 안에서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개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 그것은 인간들의 세계 곧 국가, 사회이다." 이 사회적 본성은 마르크스에게 그 다음의 모든 숙고를 위한 출발점을 형성한다. 많이 논의되고있는 명제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는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마르크스의 대답은 이러하다. 일차적으로 공동의 의식이 아니라, 공동의 노동에 의해서 형성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경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계와 특별히 그 관계의 기초가 되는 생산력은 인간 현존재의 토대이다. 단지 이 경제적 관계가 변화되는 정도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라 표현되는 의식의 방식이 발전된다.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에는 국가, 법률, 이념, 도덕, 예술, 종교 등이 있다. 경제적 토대에서 헤겔이 정신에 부여한, 역사 발전의 법칙이 발견된다. 경제적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그것도 계급간의 갈등 속에 전개된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에 있어서 역사는 특히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철학사를 풍부하게 만든 그 많은 인간학적 역사 철학 이론 가운데 하나나 다름없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흥미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단지 수많은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엇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고 있는가? 그 다음 시대를 그토록 폭넓게 규정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마르크스가 순수한 사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단호하게 현실을 변화시킬 과제를 떠맡고 있는 데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의도에서 마르크스는 그의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대 곳곳을 둘러보며 그는 인간의 진정한 본질, 즉 인간의 자유와 독립, "자유롭게 의식된 행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관찰한다. 어디에서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서부터 이탈되어 있다. 어디에서나 인간은 진정한 인간 현존재의 가능성을 상실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인간의 "자기 소외"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의미이다. 자기 소외는 만연되어 있는 "인간 세계의 평가 절하"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도 마르크스는 경제적 관계로 소급해 올라간다. 인간의 자기 소외는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에서 소외되어 있다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은 노동자가 향유하지 못하고 고용주의 손 안으로 들어간다. 노동의 생산물은 "상품"이 된다. 다시 말해 노동자에게는 낯선 물건이 된다. 노동자는 살아가기 위하여 그 물건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 물건에 예속되어 얽매이게 된다. "노동이 생산한'상품,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일종의 힘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도 역시 "소외된 노동"이 되어 버린다. 즉 노동은 노동자의 활동 의욕의 표시가 아니라 그에게 자기 보존을 위해 강요된 수단이 된다.
노동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강제 노동"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의 발전은 자본주의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난 권력의 기능을 떠맡는다. 노동 생산물의 소외는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도 초래한다. 그것은 단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반목적인 투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는 갈수록 더욱더 직접성을 상실해 간다. 그 관계는 상품에 의해, 그리고 "누구에게나 몸을 파는 창녀"인 돈에 의해 매개된다. 마침내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 무산 계급)도 상품의 성격을 받아들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은 노동 시장에서 거래되고, 구매자의 자의에 무방비로 내맡겨진다. 프롤레타리아의 "내면의 세계"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 그들의 "인간적 위치와 품위"는 갈수록 짓밟힌다. 이것이 소외의 절정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상실되어 버린 인간"이다. 그의 현존재는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이다. 즉 그의 본질은 "탈인간화된 본질"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의 절정에서-마르크스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전복이 나타나야만 한다. 이 전복은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소외를 의식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프롤레타리아는 이제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 비참을 의식된 비참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인간 상실을 의식하고, 그래서 그들 스스로를 없애 버리는 인간성 상실"을 이해한다. 마르크스의 진단에 따르자면, 그것은 자본은 소수의 손안에서 축적되고, 대중의 빈곤은 증대되고, 실업자가 증가되는 현상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자본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제 역사적인, 학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변증법적 필연성에 의해, "확실한 법칙"에 따라, 전복과 혁명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전복의 과제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을 인간을 위한 최고의 본질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굴복당하고 노예로 되고 버림받고 멸시받는 존재가 되는 그 모든 관계를 뒤집어 엎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진정한 자유의 왕국"을 여기로 이끌고 오는 것, 인간이 "그의 본질을 최대한 풍부하게" 계발하여 소외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공산주의 운동의 과제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한다. 바야흐로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 재산을 적극적으로 파기하여 인간에 의해 그리고 인간을 위해 인간의 본질을 실제적으로 구현할 때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그 모든 발전 안에서 이 발전을 의식하게 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다시 말해 인간다운 인간 자신에로의 완전한 복귀이다. 이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의 진정한 해소이며, 자유와 필연성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진정한 해결 방법이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수수께끼의 해답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위한 인간 본질의 실제의 구현"이다. 공산주의를 통해 "인간 사회의 선사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제는"진실로 인간적인" 사회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회의 모양새가 어떠한지에 대해 마르크스는 더 이상 귀띔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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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미셸푸꼬 / 인간사랑
제 1장 광인의 항해 (1/4)
중세 말엽, 서구에서 나병은 사라졌다. 성문 밖이나 촌락의 변두리는 더 이상 병자들이 어슬렁대지 않았고, 아무도 살지 않는 불모의 땅으로 버려져 있었다. 수세기 동안 이 지역들은 사람이 전혀 없는 장소로 남아 있었다.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구인들은 이상한 주문을 통해서 새로운 질명, 즉 새로운 공포의 대상이 나타나기를 간청하면서 정화와 배제의 새로운 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세 중엽에서 십자군 말엽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저주받은 도시들은 나병환자 수용소들을 크게 증가시켰다. 마태오 파리(Mathieu Paris)에 따르면 기독교 세계 전체에 걸쳐 나환자 수용소는 19,000개 정도가 있었다 한다. 여하튼 1226년경 프랑스에서 루이 8세가 나환자 수용소에 대한 법률을 제정했을 당시에는 2,000개를 넘는 나환자 수용소가 공식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파리교구 내에만도 43개소가 있었는데, 부르 르 렌느(Bourg le Reine), 꼬르베이유(Corbeil), 생 발레르(Saint Valere), 그리고 그 불길한 상 뿌리(Champ Pourri), 로뗀 필드(Rotten Field)등이 바로 그것이며, 샤랑통(Charenton)도 이에 속한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큰 생 제르망(Saint Germain)과 생 나자르(Saint Lazare)는 파리의 근교에 있었다. 이 수용소들의 이름은 다른 질병의 수용소로서 후에 다시 거론될 것이다. 다른 질병의 등장 때문에 15세기 이후 모든 나환자 수용소는 텅 비게 된다. 16세기에 생 제르망은 범죄 청소년의 수용소로 개조되었으며, 성 뱅샹 시대 이전에 벌써 상 나자르 수용소에는 단 한명의 나환자 - 민사법정에서 개업을 했었던 시에르 랑글르와(Sieur Langlois) - 만이 남아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시 나환자 수용소에도 마리 드 메디시의 섭정 기간중에는 4명의 재감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까텔(Catel)의 "기록"(Memoires)에 따르면 중세 말엽에 뚤루즈(Toulouse)에는 29개의 병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일곱 개는 나환자 수용소였는데 17세기 초엽에는 3개만 남게 된다. 생 십리엥(Saint Cyprien), 아르노 베르나르(Arnaud Bernard), 그리고 생 미셸(Saint Michel)이 바로 그것이다. 나병이 물러간 것을 축하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1635년경 갱스(Reims) 지역의 주민들은 이 천벌로부터 자신들의 도시를 구원해 준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거룩한 행진을 거행했다.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왕권은 나환자 수용소에 대한 기부금으로 조성된 막대한 기금을 관리하고 전용해 왔다. 1543년 12월 19일의 칙령을 통해서 프랑소와 1세는 "현재 나환자 수용소들 내에 있는 엄청난 무질서를 제거하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하고 그 명단을 작성했다. 이어서 앙리 4세는 1606년의 한 포고를 통해 수용소의 회계를 고쳐서 프랑소와 1세가 행한 "조사의 결과에 따라서 남게 된 금액들을 가난한 귀족이나 상이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와 똑같은 일이 1612년 10월 24일에도 있었다. 1612년에는 다만 초과기금 수입들은 극빈자 구호에 사용되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말엽까지도 나환자 수용소들에 대한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이 문제의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몇 가지 분쟁이 있었다. 1677년경까지 도피네(Dauphine) 지방에만도 44개의 나환자 수용소가 존재하고 있지 않았던가? 1672년 2월 20일 루이 14세는 생 나자르와 몽 까멜의 명령들이 각 군대와 병원에서 행해지는 명령과 동일한 효과를 갖게 만들었다. 즉, 다시 말해서 두 수용소들은 왕국의 나환자 수용소에 대한 행정에 위탁되었다. 20년이 지난 후 1672년의 칙령은 폐지되었고, 따라서 1693년 3월부터 1695년 7월에 행해진 일련의 조치들에 의해서 나환자 수용소의 자산들은 다른 병원과 복지시설에 귀속되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1,200여 개의 소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소수의 나환자들은 오를레앙(Orleans) 근처의 생메쓰맹(Saint Mesmin)에 집단수용되었다. 이 칙령들은 파리에서 처음 적용되었다. 파리 의회는 문제의 수입을 "오삐딸 제네랄"(Hopital General)을 설립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 이 조치는 지방에서도 모방되었다. 뚤루즈는 관내 나환자 수용소들의 재산을 "오삐딸 데 젱뀌라블" (Hopital des Incurables, 폐환자 전문병원)에 귀속시켰고, 노르망디의 보리외(Beaulieu)의 자산은 깽(Caen)의오뗄 디외(Hitel Dieu)에로 넘어갔고, 볼레이(Voley)의 자산은 오삐딸 드 생뜨 프와(Hopital De Sainte Foy)에 넘어갔다. 오직 생 메쓰맹과 보르도 근교에 있는 가네(Ganets)만이 여전히 나환자 수용소로 남아 있었다. 12세기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만도 150만 명의 주민들을 위해서 220개의 나환자 수용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4세기 초 이 수용소들은 비워지기 시작했다 ; 에드워드 3세는 1342년 리폰(Ripon)에 있는 병원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병원에는 환자들이 없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병원의 자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2세기말에 퓌젤(Puisel) 대주교가 설립한 병원의 경우도 1434년에는 오직 두 개의 침상만이 나환자들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1348년 생 알앙(Saint Albans)과 같은 거대한 나환자 수용소에는 단지 3명의 환자만이 수용되어 있었다 ; 켄트의 로메날 병원은 나환자가 없어서 24년 후에 폐지되기도 했었다. 샤탬(Chatham)에 있는 성 바르톨로메(Saint Bartholonew) 나환자 수용소는 1078년에 설립된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수용소 중의 하나였으나, 엘리자베드 시대에는 단지 두 사람의 환자만을 수용하고 있다가 1627년에 마침내 폐지되었다.
그 속도는 다소 느렸지만 독일에서도 동일하게 나병은 사라져 갔다. 마찬가지로 나환자 수용소들은 다른 병원시설로 개조되었으며, 종교 개혁은 이 개조에 박차를 가해 병원과 복지시설의 책임을 시당국에 위임시켰다. 이러한 예는 라이프치히, 뮨헨, 함부르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42년 슐레스비히 - 홀스타인(Schleswig - Holstein)의 나환자 수용소의 재산은 병원들에게 넘어갔다. 1589년의 한 판사의 보고에 따르면 슈튜트가르트의 나환자 수용소에는 이미 50년 전부터 환자가 없었다. 리프링겐에서도 나환자 수용소는 곧 폐병환자와 정신병자로 채워졌다. 나병이 이렇듯 이상하게 소멸된 것은 물론 오랫동안 취해진 의학적 노력의 결실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격리수용에서 생겨난 우연한 결과이며,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이라는 병의 진원지와의 단절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나병은 사라졌지만 이 비천한 장소들과 의식(ritual)들은 남아 있었다. 나병에 대한 의식은 나병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병과 신성한 거리를 유지하고 나병을 저주(inverse exaltation) 속에 묶어두기 위한 의식이었다. 나환자 수용소가 비워져 가는 동안에 나병보다도 더 오래 존속한 것은 나환자의 모습에 부여된 이미지와 가치였으며, 이러한 격리가 갖는 의미, 즉 신성한 집단에 소속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 집단에서 축출되지도 않은 이 두렵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이었다. 나환자가 세계로부터, 그리고 가시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나병의 존재는 여전히 지속적인 신의 현현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의 분노와 은총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엔나 교회의 전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이여, 당신이 나병에 걸린다면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주님은 당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당신을 지상에서 처벌하시는 은총을 내리고 계신다네." 그리고 성직자와 그의 보조자들이 나환자를 뒷걸음으로 교회에서 축출할 때, 그들은 나환자야말로 신에 대한 증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대가 교회나 건강한 그대의 벗들로부터 멀어진다고 해도 신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브뤼겔(Brueghel)의 나환자들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었던 골고다 언덕에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행렬에 따로 떨어져서 그러나 끝까지 참석했다. 그들은 죄악의 종교적 증인으로서 바로 이러한 격리 속에서, 이러한 격리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한다. 선행과 기도에 대립되는 이 이상한 공덕속에서 나병환자들은 결코 자신을 향해서는 뻗쳐지지 않은 손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자기집 문앞에서 나환자를 쫓아버리는 죄인은 말하자면 나환자에게 천국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 그대는 그대의 병을 인내하라. 주님께서는 병 때문에 그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그대를 그대의 벗들로부터 떼어놓는 것도 아니다. 인내하라, 그러면 구원받을지니, 부잣집 문앞에서 죽은 문둥병자처럼 그대로 곧바로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니라." 축출(abandonment)이 곧 구원이며, 그의 격리(exclusion)는 그에게 또 다른 형태의 화해(communion)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병도 나환자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종종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방식의 격리 의식이 2,3세기 후에 이상할 정도로 유사하게 반복되곤 했다. 가난한 부랑아, 범죄자, 그리고 '광인들'(deranged minds)이 나환자가 맡았던 역할을 대신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격리를 통해서 격리된 사람들과 그들을 격리시킨 사람들을 위해 기대된 구원(salvation)이 무엇인지를 앞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가질지라도 이 형식들은 여전히 - 사회적 격리(social exclusion)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재통합(spiritual reintegration)인 - 이 엄격한 분리(division)라는 현실의 본질적인 핵심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것이 르네상스의 상상의 지평에서 출현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르네상스의 지평에서 특권적인 자리를 점유할 것이다, 바보들의 배, 라인란트의 조용한 강들과 플레미쉬 운하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항해하는 이상한 '술취한 배'가 바로 그것이다. "나렌쉬프"(Narrenschiff, 바보들의 배)는 확실히 문학적 구성물이다.이것은 아르그노전설(argonaut cycle)에서 빌려온 듯한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신화적 테마는 르네상스 당시 부르군디 제국에서 제도적인 양태를 획득함으로써 재생되고 부활되었다. 나렌쉬프에 관한 창작이 유행한 것이다. 상상의 영웅들과 윤리적인 모델들, 또는 사회적 위협 등으로 구성된 이 배의 선원들은 위대한 상징적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를 통해서 그들은 재산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들의 운명 또는 그들의 진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생포리엥 샹피에(Symphorien Champier)는 1502년에 "왕자들의 배와 귀족들의 전쟁"을, 1503년에는 "정숙한 여인들의 배"를 창작했다. 1413년 야콥 반 외스트보렌(Jacob van Oestvoren)의 "블로베 슈트"(Blauwe Schute)에 뒤이어 "건강의 배", 세바스챤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1494), 호세 바데(Josse Bade)의 작품 "어리석은 여자들을 싣고 항해하는 선단 이야기"(Stultigerae naviculae scaphae fatuarum muliercum, 1498) 등이 계속 창작되었다. 물론 보쉬(Bosch)의 그림도 이 상상의 선단에 속한다.
이 낭만적이고 풍자적인 함대들 중에서 나렌쉬프만이 실존했던 유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광인들이 실존했고 그 건강하지 못한 화물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기는 선박들이 실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인들은 쉽게 방황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도시들은 광인들을 도시의 경계선 바깥으로 몰아냈다. 광인들은 따라서 상인이나 순례자들의 행렬에 끼지 않는 한 광활한 변방을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습은 특히 독일에서 유행했다. 15세기 초엽에 뉴렘베르크에는 63명의 광인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31명이 추방되었다. 그 후 50년 후에는 21명이 더 강제적으로 추방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바로 시당국에 의해 체포된 광인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종종 그들은 선원들에게 넘겨졌다. 139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원들은 벌거벗은 채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광인을 도시에서 몰아낼 것을 명령받기도 했다. 15세기 초 똑같은 방식으로 한 미친 범죄자가 마인즈에서 추방되었다. 때때로 선원들은 이 골치아픈 여행자들을 그들이 약속했던 시기보다 빨리 상륙시켜 주기도 했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의 한 대장장이는 크로이쯔나하로 영원히 추방되었다가도 되돌아오곤 했었다. 종종 유럽의 도시들은 이 '바보선'들이 그들의 항구에 접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었다. 이러한 관습들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이것은 시당국이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방랑하는 광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취했던 일반적인 조치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사실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떤 정신병자들은 그들을 수용할 특별한 건물들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병원에 수감되어 치료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리의 오뗄 디외에서는 정신병자용 침상들이 병원내에 설치되어 있었다. 더욱이 유럽의 전지역에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전시기에 걸쳐 정신병자들을 수감하는 장소가 존재했다. 샤뜰레 드멜륑(Chatelet de Melun)이나 저 유명한 깽의 광기의 탑을 예로 들 수 있다. 독일에도 수많은 정신병원들, 예를 들어 뤼백의 '성문들' 또는 함부르크의 융퍼(Jungpfer)등이 있었다. 따라서 광인들이 항상 추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들 중에서 이방인들만이 추방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도시는 이방인 또한 광인들과 마찬가지로 잘 돌봐주었다. 우리는 중세도시들의 회계장부에서 정신병자를 이한 도시의 보조금이나 기부금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지역 사람이 아닌 관인들이 다른 곳의 경우보다 훨씬 많이 모이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첫째로 순례지들을 들 수 있다. 라르샹의 생 마뛰렝(Saint Mathurin), 구르네이의 생 일데베르(Saint Hidevert), 브장송(Besancon), 길(Gheel)등이 그곳이다. 이러한 지역으로의 순례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종종 시나 병원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초기 르네상스의 전작품에 출몰하는 이 '바보선'이 자신들의 이성을 찾아 헤매는 광인들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화물을 실은 '순례선'들이었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이들의 배들은 벨기에나 길을 향해 라인 강을 따라 내려갔고, 다른 일부의 배들은 주라(Jura)나 브장송을 향해 라인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확실히 뉴렘베르크와 같은 도시들은 순례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도시 자체가 제공할 수 있는 숫자 이상의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광인에게는 집이 주어졌고 시 예산으로 부양되었다. 그러나 치료를 받지는 못했다. 그들은 다지 감옥과 같은 곳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역과 노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도시들에서 상당수의 정신병자들이 상인이나 선원들에게 넘겨져 '실종되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광인들은 그들이 살았던 도시들에서 추방되었다. 이러한 "모의 순례지"(counterpilgrimage)들은 정신병자들이 순례자로 간주되는 순례지들과 혼돈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치유와 격리에 대한 관심이 일치한 것이다. 정신병자들은 성스러운 기적의 장소와 격리되었다. 길과 같은 마을은 이런 식으로 발전했다. 수용소가 된 성지, 거기에서 광기는 구원을 기구하고 인간은 오래된 주제들에 따라 일종의 의례적인 분리를 실행했다. 문제는 방랑하는 정신병자들, 그들을 격리시키는 행위, 그들의 격리, 그리고 정신병자들의 항해가 사회적 유용성이나 안전의 차원에서만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훨씬 의식에 가까운 다른 의미들도 확실히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의미들의 여러 가지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교회법은 정신병자들이 성사를 행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자들이 교회에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또한 교회는 미친 성직자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1421년 뉴렘베르크에서는 한 미친 사제가 특별한 절차 없이 추방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타락이 그의 영혼의 신비한 속성에 의해 배가된 것처럼 생각했고, 그리고 시의 예산으로 그 미친 사제에게 여비를 제공했다. 어떤 광인들은 대중 앞에서 채찍질을 당하거나 사냥놀이에서 사냥감으로 쫓기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쇠몽둥이로 두들겨 맞으면서 도시로부터 추방되기도 했다. 광인을 추방하는 것이 수많은 추방의식 가운데 하나의 방식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들은 아주 많다. 따라서 우리는 광인의 항해가 갖는 이상한 함축과 거기에 부여된 위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우리는 광인의 항해가 갖는 의심 할 여지없는 실질적인 효능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 광인을 선원에게 넘겨주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도시의 성벽 아래서 배회하지 못하도록 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항해는 광인이 떠나갔다는 것을 확인했다. 항해를 통해 광인은 포로가 된 셈이다. 그리고 물은 이 어두운 광인집단에게 항해와 더불어 부가된 격리의 요소이다. 그래서 항해는 광인을 멀리 데려가 버릴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즉 광인을 순화하는 의미를 갖는다. 항해는 인간을 운명의 불확실함으로 인도한다. 모든 출항은 종말을 내포하고 있다. 광인이 바보선을 타고 항해하는 목적지는 다른 세계이며, 그가 정박할 때 그는 언제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다. 광인의 항해는 엄격한 분리인 동시에 절대적인 항해이다. 어떤 의미에서 항해는 반은 실재이고 반은 상상인 중세의 지리를 통해서 중세적 관심의 지평 위에 광인의 한계적인 지위를 발전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한계적인 지위는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성문(바깥)에 국한된 광인의 특권에 의해서 실제적인 것으로 된 지위를 말한다. 광인의 격리는 광인의 감금이 되어야 한다. 만약 광인이(성문이라는) 문턱 자체나 또 다른 감옥을 갖지 못하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그는 항해중에 있어야 된다. 그는 내부에서 외부로 추방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에 의해서 그는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다. 하나의 매우 상징적인 위치로서의 광인의 지위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광인의 것으로 남아 있다. 다만 과거에는 질서라는 가시적 성곽이었던 것이 지금은 우리 의식이라는(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역자)성으로 된 것만이 다른 뿐이다. 물과 항해는 분명히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광인들은 탈출구가 없는 배에 감금되어 수천 개의 지류를 가진 강과 수천 개의 길을 가진 바다로, 죽 모든 것의 외부에 있는 엄청난 불확실성으로 인도되었다. 광인은 가장 자유로운 것,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열려 있는 길 가운데에서 끝이 없는 십자교차로 위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는 탁월한 항해자임과 동시에 그 항해의 포로이다. 그가 정박하고자 하는 땅은 그가 떠나온 땅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세계였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두 나라들 사이에 있는 불모의 광활함에서만 그의 진실과 고향을 만난다. 이것이 바로 서구문명 전체를 통해서 추적될 수 있는 그 긴 상상의 관계의 시원에 있는 의례들과 가치들인가? 역으로 말해서 이것이 바로 태고적부터 항해의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확립된(의례적인)관계란 말인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유럽인의 상상 속에서는 물과 광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광인으로 위장한 트리스탄(Tristan)은 선원들에게 자신을 콘월(Cornwall)의 해안에 상륙시켜 달라고 했고, 그가 마크 왕(King Mark)의 성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익숙한, 그러나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진부한 비밀들을 더욱 많이 알고 있어서 다른 낯선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웃에서 온 것 같았다. 그는 화석화된 땅, 화석화된 도시들에서 돈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안정한 바다로부터 왔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매우 이상한 지식을 감추고 있는 아무도 모르는 거리에서, 그리고 환상의 평야에서, 그리고 지하세계에서 온 것이다. 이졸데(Iseut)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 광인이 바다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무례한 선원들이 불행의 상징인 그를 여기에 내던져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저주받을지니, 이 미친 자를 여기 데려온 뱃사람들이여! 왜 그대들은 그 녀석을 바다에 처넣어 버리지 않았는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몇 번이고 이와 똑같은 주제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15세기의 신화 속에서 이 주제는 한 영혼이 소형 범선이 되어 무한한 욕망의 바다 위에 버려진 채 근심과 무지의 불모지에서, 지식의 신기루들 속에서, 세계의 비이성 가운데서 헤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이 작은 배는 바다를 향해 튼튼한 닻이나 믿음을 던지지 않는 한, 또는 영적인 항해를 통해서 항구로 인도하는 신의 숨결을 받지 않는 한 광노한 바다의 손에 내맡겨진다. 16세기 말엽 드랑크르(De Lancre)는 온전한 사람의 악마적 기질들의 기원을 바다에서 찾았다. 위험한 항해, 별들에의 의존, 전승된 비밀들, 여자로부터의 소외 등등 그 엄청나고 거칠은 평원(바다)이 갖는 바로 그 이미지가 사람들로 하여금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집에 대한 애착을 잃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악마의 손아귀에, 즉 사탄의 속임수로 가득 찬 바다에 붙잡혀 있었다. 고전주의 시대 영국인들의 우울증(melancholy)은 해양성 기후 -추위, 습기, 불안정한 날씨 - 에 의해 쉽게 설명되었다. 신체의 근육과 혈관에 침투한 미세한 물방울들이 신체를 관기에로 기울게 한다. 마지막으로 오펠리아(Ophelia)에서 로렐라이에 이르는 거대한 문학을 무시한 채 다만 저 위대한 하인로트(Heinroth)의 만은 인류학적이고 반은 우주론적인 분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광기란 인간 정신의 밝고 성숙한 안정성에 반대되는 것, 즉 모호하고 축축한 요소, 어두운 무질서, 뒤섞이는 혼돈, 모든 사물의 싹이자 죽음이 인간에게서 현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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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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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眉(백미) 白(흰 백) 眉(눈썹 미)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권39에는 마씨(馬氏) 5형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마량(馬良:서기187-222년)은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으로서 자(字)는 계상(季常)이었는데, 동네에서는 흔히들 마씨 다섯 형제 중, 흰눈썹이 가장 낫다네(馬氏五常, 白眉崔良) 라고 하였다. 마량과 읍참마속(泣斬馬謖) 이라는 성어(成語)의 주인공인 마속 등 다섯 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며, 그들의 자(字)에 모두 常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오상(五常) 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들 형제 중 맏이인 마량의 눈썹에는 흰털이 나있었는데, 그의 재능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흰 눈썹이 최고 라고 하였던 것이다. 유비(劉備)는 촉(蜀)땅에 들어와서 마량을 좌장군연(左將軍 )으로 임명하였으며, 제위(帝位)에 즉위한 후에는 그를 시중(侍中)에 등용하였다. 마량은 유비를 수행하여 이릉(夷陵)전투에 참가하였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白眉(The best of all) 란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 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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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劉備)는 적벽대전 후 형주(荊州), 양양(襄襄), 남군(南郡)을 얻고 군신(群臣)을 모아서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하여 준 이적(伊籍)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유비가 이적(伊籍)에게 물었다. "어진 선비가 누구요?" "형양(荊襄) 땅 마량(馬良)의 다섯 형제가 모두들 재명(才名)이 있는데, 가장 어진 이는 양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양(良)'으로 자(字)는 계상(季常)이라고 합니다. 또 향리(鄕里)에서도 '마씨집 오상(五常)이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가 있는 마량(馬良)이 제일 뛰어나다.(馬氏五常 白眉最良)'고 합니다. 공(公)께서는 어찌 청하여 오지 않으십니까?" 유비는 즉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
[출전]《三國志》〈蜀志 馬良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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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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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15. 가위개미 농사짓기
선인들은 우리나라의 한겨울을 청송백설로 표현하였는데 산에는 만취를 뽐내는 늘푸른 소나무가. 들에는 만상을 덮어버린 흰눈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겨울 풍경은 정년 일품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그 겨울의 소나무 숲 사이의 토끼나 고라니를 잡겠다고 날뛰면서도 차가운 겨울의 한풍 속에서도 봄을 준비하는 대지의 숨소리는 놓치기 십상이다. 봄이면 풀에는 새싹이, 나무 끝에는 봄꽃이, 땅 밑의 벌레 앞에서는 유충이 번데기에서 나비 나방이가 춘기를 듬뿍 받고 새 생명을 움틔운다. 이 추운 동토를 떠나서 저 남미로 가보자. 여러분은 브라질의 한 곳 열대우림지대를 생각해도 좋겠다. 남반부인 그쪽은 모든 것이 우리와 반대라 햇빛의 그림자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식물의 덩굴손도 왼돌이가 더 많다고 한다. 이곳이 가을이면 그곳은 여름이라 개미들도 먹이 사냥하느라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이는데 세계적으로 4,000종이 넘는 개미 중에서 200여 종은 곤충등 동물의 썩은 시체나 배설물 또는 부패한 식물에 곰팡이를 키워서 먹기도 한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가위개미(Acromyrmex octospinosus)는 살아 있는 나뭇잎을 잘라 운반해와서 5미터 아래 지하실에서 그 일을 발효시켜 곰팡이(버섯)를 양생하여 먹는다. 가위개미를 영어로 나뭇잎을 자르는 개미란 뜻인 리프커터 앤트(leafcutter ant)라고 하는데 이놈들은 턱이 발달하여 잎을 자를 때는 꼭 전기가위처럼 날쌔고 힘세다고 한다. 수십만 마리가 나무꼭대기에서 잎 자르는 소리는 아마도 소낙비 내리는 소리를 닮았을 것이고 숲속에 잎사귀 조각이 쏟아져내리는 모습은 시간이 멈춘 원시 그대로의 것이 아닐까 싶다. 태풍에 아카시아 나뭇잎이 잘라지고 찢어져 흩날리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나무 위에 떼거리로 올라가 잘라서 바닥에 떨어뜨리면 밑에 있는 놈들이 그 잎을 물고 일렬로 나르는데 그 꼴이 꼭 개미가 우산을 쓰고 가는 것 같다고 한다. 하룻밤새 큰 나무 하나를 벗겨버려 나목을 만드는 것은 누워 떡먹기라 열대우림지대의 나뭇잎 15퍼센트는 이들 개미가 자른다니 피해도 상당하다.
개미도 사람처럼 나뭇잎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곰팡이를 이용하는데 이런 농사짓기는 수백만 년 전에 시작한 것으로 인간보다 훨씬 먼저 농사를 지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락집으로 가져온 잎을 다른 무리가 입으로 잘게 조각을 내고 또 다른 무리들은 와서 자잘한 조각을 꼭꼭 씹어 침과 섞은 후에 자신들의 배설물을 쏟아놓고 다음에는 이 풀 같은 끈적한 것을 마른 잎에 바르고 오래된 딴 방에서 곰팡이 조각을 물고 와서(거기에 홀씨가 묻어 있다) 그 위에 문질러둔다. 시간이 지나면 곰팡이의 균사가 자라게 되고 빵조각처럼 모인 이 균사를 먹이로 섭취하는데 식물즙을 먹는 것 외에는 이 곰팡이로 완전하고 균형 잡힌 식사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곰팡이를 키우는 방이 지하5미터쯤 된다고 하는데 그 음습한 곳에서 어째서 다른 잡스런 버섯은 생기지 않고 제가 먹는 놈만 생기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개미의 침에 항생물질이 들어 있어서 필요한 곰팡이 외 잡균은 모두 죽인다고 하니 개미라고 시쁘게 여길 것이 아니다. 다 살게 태어난 것이 신통할 뿐이다. 아무튼 개미도 사람도 버섯을 즐겨 먹는다. 버섯은 항암효과가 있다니 가위개미는 암 하나는 걱정을 놓았겠다.
개미들도 습성이 다 달라서 여기 예를 든 곰팡이를 양식해서 살아가는 개미 외에도 진딧물을 기르는 목축개미, 다른 집 개미의 알과 유충을 잡아와서(싸움에서 이겼다) 노예로 쓰는 노예사냥 개미, 식물의 씨앗을 모아뒀다가 봄에 뿌려 그 잎을 갉아먹는 수확개미 등이 있는데 모두가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긴 세월 생활하다 터득한 하나의 생활양식이라 봐야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가위개미도 여왕개미, 병정개미, 수캐미, 일개미로 계급제도가 철저한 분업을 통한 사회생활을 하는 놈들로 일개미가 많이 분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분화되어 있다는 말은 꿀벌이나 보통 개미는 일개미가 크기, 모양, 색깔이 같으나 가위개미의 일개미는 크기부터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이다. "개미 금탑 모으듯 한다"는 말은 부지런한 역사를 한다는 뜻이고 진보가 없을 때를 "개미 쳇바퀴 돌 듯한다"고 하는데 이 두 말은 부지런함과 융통성 있는 생활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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