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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75호
2012.6.19 (음 4.3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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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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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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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란 구두가 온통 진창에 푹푹 빠지더라도 휘파람을 불고 싶은 기분이 저절로 샘솟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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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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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영어식 회사명 표기
며칠 전 연세가 지긋한 독자분께서 전화를 해 오셨다. 외국어 발음을 우리말로 잘못 표기한 회사 이름이 많은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팔래스호텔'을 예로 들면서 '팰리스(palace)'이지 어떻게 '팔래스'가 되느냐며, 직접 그 호텔을 찾아가 이름을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분의 지적처럼 외국어를 우리말로 적을 때는 표기 원칙을 따라야 한다.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을 따르긴 쉽지 않지만, 문제는 기업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의 발음마저 따르지 않고 있어 혼란을 준다는 점이다.
비씨카드(←비시카드), 씨티은행(←시티은행), 스탠다드차타드은행(←스탠더드차터드은행), 한국후지쯔(←한국후지쓰), 푸르덴셜(←프루덴셜),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한국선마이크로시스템스), 리나리찌(←리나리치), ○○캐피탈(←○○캐피털), 푸쳐비젼(←푸처비전), 휘트니스센터(←피트니스센터) 등 표기 원칙에서 벗어난 회사 이름이 수없이 많다. 일종의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신문에서도 그대로 표기해 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한국리크루트'의 경우 과거에 '한국리쿠르트'로 표기하다 영어 발음에 맞춰 바로잡은 적이 있다. 비용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영어식 이름을 쓰고 있는 회사가 상장기업의 3분의 2나 된다고 한다. 기업체가 공익을 생각한다면 외래어로 이름을 짓는 것을 자제해야 하고, 굳이 영어식으로 하려면 표기법에 맞게 적어야 한다.
[우리말바루기] 알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방학인 요즘이 오히려 더 바쁘다. 방학특강.보충수업 등으로 짜인 시간표가 빽빽하다. 지현이와 정주는 이번 주 학원 방학을 맞아 가족과 휴가를 떠난다. 들뜬 마음도 잠시, 선생님은 숙제를 한 보따리 준비해 놓으셨다.
"놀지만 말고 숙제 꼭 해 와야 한다!" "알겠습니다."(정주) // "알았습니다."(지현)
누구의 대답이 적절한 것일까.
'알겠다'와 '알았다'는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대답들이다. 그러나 '알겠다'와 '알았다'는 의미상 차이가 있으므로 구분해 써야 한다.
'알겠다'에서의 '-겠-'은 "내일 새벽에 도착하겠네"에서처럼 '추측'을 나타내거나 "나는 대통령이 되겠어"에서와 같이 '의지.다짐'을 나타낼 때 쓰인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알겠다"에서처럼 '가능성.능력'을 의미하거나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 하겠다"에서와 같이 '완곡하게 말하는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숙제 꼭 해 와야 한다!"의 대답으로 "알 것 같다(추측)" "꼭 알도록 하겠다(의지)" "알 수 있을 것이다(가능성)" 등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고 수긍한다는 의미의 "알았습니다"라는 지현이의 말이 적절한 대답. 완곡한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알겠습니다"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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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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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정끝별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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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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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의 추억 - 이인자
빈 들녘 쓸고 가는 갈잎의 거친 숨결
푸름도 다 내주고 빈손으로 돌아서면
하이얀 손수건 펼쳐 손 흔드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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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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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날마다 좋은 날 : 동쪽에서온사람(오히예사 - 샨티 수우 족)
"모든 영혼은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서야 한다..."
인디언은 생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종교적이다. 아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 되는 첫날부터 젖을 떼는 두 살 무렵까지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영적인 영향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인디언 어머니는 아이를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순결한 언행과 은밀한 명상을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열려 있는 영혼에게 그가 모든 창조물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인디언의 아이 교육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첫번째 규칙으로 삼는다. 그녀는 거대한 삼림의 정적 속에서, 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평원의 가슴 위에서 홀로 산책을 한다. 그리고는 시적인 마음을 통해 장차 위대한 영혼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리라고 상상한다. 원시의 숨결이 어린 대자연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아무도 그 상상을 방해하지 않는다. 가끔씩 들리는 소나무의 한숨소리나 먼 거리의 폭포소리만이 그녀의 상상을 일깨울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의 삶에 새로운 순간이 열리고, 또한 새로운 삶이 그녀를 통해 지상에 나오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그녀는 혼자서 새 생명을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다했다. 인디언 어머니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신성한 의무라 여긴다.
인디언 아이의 출산은 어머니 혼자서 맞이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 여긴다. 타인의 호기심은 방해만 될 뿐이다. 대자연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소리친다. "이것은 사랑의 힘이다! 이것은 생의 완성이다!"
아이를 인디언 천막으로 데려오면 어머니의 영적인 가르침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손가락으로 아이에게 자연 속의 사물들을 가리켜보일 뿐이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새처럼 노래를 속삭여 준다. 어머니와 아이는 새를 사람과 똑같은 존재이며, '위대한 신비'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 여긴다.
아이가 성급하게 행동할라치면 어머니는 부드럽게 주의를 준다. "그렇게 하면 영혼이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자작나무가 수런대는 소리, 사시나무의 은빛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밤이면 소리없이 길을 여행해 가는 별들의 대장정을 손짓해 보인다. 침묵, 사랑, 경외감 - 이것이 아이 교육의 세 가지 기준이며, 아이가 좀더 성장하면 자비심, 용기, 순결성의 기준이 뒤따른다.
인디언은 무엇보다도 겸허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친다. 특히 영적인 자만심은 인디언의 성격이나 가르침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인디언은 자신의 말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서 문명인들처럼 상대방을 '어리석은 야만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디언은 침묵의 힘을 믿으며, 그것을 완전한 평정의 표시로 여긴다. 침묵은 육체, 정신, 영혼의 절대적인 조화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영혼이 흔들림없이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 - 나무 이파리 하나 떨리지 않고 물결 하나 일지 않듯이 지식에 물들지 않은 현자의 마음을 갖는 것을 인디언은 생의 목표로 삼는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인간이라 여기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디언과 한 부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에 가까운 학생들이다. 인디언은 문명인들이 책을 갖고 공부하듯이 자연 속의 여러 행동방식들을 통해 배운다. 인디언 아이들은 같은 부족의 어른들을 지켜봄으로써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배운다.
야생의 평원에 사는 아이들만큼 오감을 잘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보고 듣고 냄새 맡는다. 또한 깊이 느끼고, 깊이 맛본다. 야생의 생활만큼 기억력을 발달시키는 생활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침묵과 과묵함을 배웠다. 이것들은 인디언의 성격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사냥꾼과 전사가 되기 위해선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또한 인내심과 자기를 다스리는 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디언 아이들은 문명 국가의 아이들이 법률가나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하듯이 용기 있는 인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우정을 간직하는 것, 그것이 인디언에게는 삶 속의 가장 중요한 시험이다. 가족과 친척에게는 누구라도 쉽게 신의를 지킬 수 있다. 같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애정은 짝짓기의 본능에 기초하고 있으며 욕망과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친구를 갖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표시이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이 우리 인디언의 믿음이다. 물질적인 길을 뒤쫓으면 영혼이 중심을 잃는다. 따라서 인디언은 어렸을 때부터 자비심의 미덕을 배운다.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남에게 주도록 가르침 받으며, 그래서 일찍부터 주는 것의 기쁨을 알게 된다. 인디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친구나 다른 부족에서 온 손님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늙은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준다. 그리고는 절대로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남에게 베푸는 법을 알았다. 그런데 문명인이 된 다음부터 그 아름다움을 잊어버렸다. 그때는 자연스런 삶을 살았으나 지금은 인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는 조약돌 하나도 가치 있게 여겼으며, 나무를 봐도 놀라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문명인들과 더불어 액자에 넣어진 풍경화 앞에서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있다니! 바위를 갈아서 생긴 돌가루로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로 문명사회의 인위적인 벽을 쌓듯이, 내 안에 있던 인디언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에 말을 잃을 때가 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내린다. 그런가 하면 드넓은 평원에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한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의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의 날이기에!
모든 영혼은 아침의 태양과 만나야 한다. 그 새롭고 부드러운 대지, 그 위대한 침묵 앞에 홀로 마주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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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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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3장 사물을 사고하는 방법
2. 상식으로 돌아가라
중국인은 <논리적 필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인간적 사상에 논리적인 필연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논리를 불신하는 것은 우선 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어 더욱 정의를 혐오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온갖 체계와 논리에 대해 증오하게 되었다. 아마도 말과 정의와 체계가 있음으로 해서 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겼기 때문이다. 철학의 타락의 말에 몰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학자인 공정암은 말했다. <성현은 말하지 않고, 능한 자는 이야기 하며, 어리석은 자는 논한다>그런데 공부자 자신은 매우 논의를 좋아하였다니, 흥미있는 이야기다. 성현과 능한 자와의 사이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성현은 스스로가 직접 체험해 얻는 인생에 대해 말하지만, 능한 자는 성현의 말에 대하여 말하며, 어리석은 자는 능란 자의 말을 서로 논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궤변학자 가운데는 말을 주고 받는 놀이 그 자체를 흘겨워한 순전한 담론가가 있었다. 지식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철학은 말에 대한 사랑이 되고, 궤변파적인 경향이 커져감에 따라 철학과 인생은 점점 더 멀리 동떨어지고 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철학자는 점점 더 많은 말을 쓰게 되고, 더욱 더 긴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인생을 풍자하는 경구는 문장으로 바뀌고, 문장은 논증으로, 논증은 논문으로, 논문은 평석으로, 평석은 철학적인 연구로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게다가 사용하는 말을 정의하고 분류하기 위해 더욱 더 많은 말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과잉은 어디까지 가도 끝날 줄을 모른다. 드디어는 생활에 직접 친근감 있는 감정이나 각식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속인들이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하고 역습을 할 권리를 갖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상사를 통하여 괴테나 사무엘 존슨이나 에머슨이나 윌리엄 제임즈 같은 인생 그 자체를 직접 체험한 소수의 독립된 사상가는 저 담론가가 말하는 투의 잠꼬대를 배척하고 완강히 분류적인 정신에 계속 반대했다.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의 참다운 의의를 유지해 준 현명한 철학자였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에는 논의를 버리고 경구로 돌아갔다. 경구로 말하는 능력을 잃었을 때는 단문을 썼다. 단문으로 명백하게 나타내지 못할 때는 논의를 시작했다. 논의를 해도 진의를 다할 수 없을 경우에는 비로소 논문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인간이 말을 사랑하는 일은 무지로 빠지는 제1보며 정의를 사랑하는 일은 제2보가 된다. 분석이 세밀해지면 정의는 더욱 더 많아지고 더욱 더 불가능한 논리적인 완성을 보게 되지만, 이와 같은 노력은 무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인간의 사상의 재료이므로 정의를 내리려고 하는 노력은 매우 갸륵한 마음가짐이기는 하다. 소크라테스는 유럽의 정의광의 원조였다. 다만 위험한 것은 정의를 내린 말의 의의를 안 다음 그 정의에 사용된 말에 또 정의를 내려야 하게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에는 인생 그 자체를 정의하고 또는 표현하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정의하는 다른 종류의 말을 갖는 것이 되는 셈이어서, 결국은 그 편이 철학자들의 주요한 관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쁜 말과 한가한 말, 일상 생활에 쓰이는 말과 철학자의 연구실에서 밖에는 쓰이지 않는 말과의 사이에는 분명히 구별이 있으며, 소크라테스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정의와 현대의 교수들의 정의 사이에도 차별이 있다. 인생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었던 셰익스피어는 일체 정의를 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에는 다른 작가에서는 볼 수 없는 <실체>가 갖추어져 있다. 그의 어법에는 오늘날의 작가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인간적인 비극감과 장엄감이 불어 넣어져 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에게 어떤 특수한 여성관을 실토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말을 특정한 기능에 고정시켜 놓을 수는 없다. 대개 정의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을 숨막히게 하고 인간 그 자체의 특질인 찬란한 공상적인 색채를 말살시키기 쉬운 것이다. 대체로 정의란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말이 아무래도 표현 과정에 있는 사상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체계를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예민한 지각에 한층 더 치명적인 장해가 된다. 체계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팔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체계가 논리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사팔뜨기는 더 심해진다. 인간은 가끔 진리를 인식하면서도 오로지 그 한쪽만을 보고, 그것을 한 개의 완전한 논리적 체계로 발전시키고 승격시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철학이 점점 더 인생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운명에 놓여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에 의하여 진리를 해치고, 진리를 실증하려고 하는 사람은 실증하려고 하는 것에 의해 진리를 손상하고 또 비뚤어지게 한다. 진리에 레테르를 붙이고 유파의 이름을 쓰는 사람은 진리를 죽이고, 스스로 신봉자라고 일컫는 사람은 진리를 땅 속에 묻어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진리라도 일단 체계가 된 것은 세 번이나 죽여서 묻힌 진리이다. 그를 장사지낼 때 거기에 모인 합장자 일동이 부르는 만가는 <우리는 모두 옳고 그대는 모두 잘못되었느니라> 하는 글귀이다. 어떤 진리를 장사지내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장사지낸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렇듯이 옹호하는 자의 수중에서 계속 괴로와하며, 예나 이제나 철학의 온갖 유파는 <우리는 모두 옳고 그대는 모두 잘못되었느니라> 한 점을 증명하기에 분주하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는 근본성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일정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큰 논저를 쓰지만, 결국은 진리를 터무니 없는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들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나쁜 모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서양의 사상가들에게는 이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질환을 인정할 수 있다. 추상적이 되면 될수록 증상은 더욱 더 악화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논리의 결과로서 비인간적인 진리가 나타난다. 오늘날의 철학은 인생 그 자체와는 더욱 더 인연이 먼 것이 되고, 인생의 의의와 생활의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는 거의 포기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철학은 우리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점으로 하는 인생에 대한 친밀감 또는 생활의 지각을 잃고 만 것이다. 읠리엄 제임즈가 스스로 <경험의 요소>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친근감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앞으로 윌리엄 제임즈의 철학과 논리는 현대의 서양적인 사고법에 더욱 더 파괴적인 힘을 미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서양 철학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려고 한다면 우선 서양 논리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논리정연하게 하려는 것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현실과 접촉하고, 인생과 접촉하여 특히 인간성과 접촉하려는 시고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데카르트의 발견 속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사고의 질병을 없애고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그대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하는 휘트먼의 보다 인간적이며 현명한 생각으로 옮겨져야 한다. 인생, 다시 말해서 실체는 논리 앞에 무릎 꿇고 자기의 존재와 실재를 증명해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윌리엄 제임즈는 무의식중에 중국인이 생각하는 식의 사고 형식을 싫증하고 옹호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그러나 윌리엄 제임즈가 만약 중국인이었다면, 말하는 바 학설 연구에 그렇듯 많은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우 3백 낱말이나 5백 낱말의 수필에, 또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쓴 일기 형식의 수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고 쓰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말을 많이 쓰면 오해를 받을 근심도 많아지는 것이니까, 그는 그 말 자체에 대하여 겁장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윌리엄 제임즈에게는 민감한 인생에 대한 지식과 인간적인 경험의 다양성과 기계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항이 있었다. 그는 또 사상을 끊임없이 유동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야말로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본원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혼자만의 체계 속에 집어 넣어 버리려는 인간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틀림없는 하나의 중국인이었다. 그는 또 예술가의 지각적인 현실감은 개념적인 현실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중국인이었던 것이다. 진실한 철학자라는 것은 감수성을 가장 높은 촛점으로 하여, 생명의 흐름을 지켜보고 신기하고 이상한 역설이나 모순, 원칙에 맞지 않는 알 수 없는 예외에 부딪치면 영원히 놀라움을 느끼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체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온갖 서양 철학의 학파에 대하여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그가 말했듯이 우주의 일원관과 다원관의 차이는 철학사상 가장 함축성 있는 점이다. 그는 철학으로 하여금 화려한 공중 누각을 잊게 하였으며 인생 그 자체로 되돌아갈 수 있게 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는 잠깐 동안이라도 인간에서 떨어져선 안된다. 떨어져야 할 것은 도가 아니니니라> 공자는 또 제임즈의 입에서라도 나올 듯한 기지에 가득찬 짧은 말로 <도가 인간을 크게 만드는 것이며, 인간이 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삼단 논법이나 의론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주는 말하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것이다. 우주는 논의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할 따름이다. 영국의 어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저술가의 말을 빌면, <이성은 신비의 한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하기 그지없는 의식의 등 뒤에서 이성과 회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다. 논리적인 필연은 썩었다. 그러나 회의와 희망은 사이가 좋다. 우주에는 야성이 있다. 매의 날개처럼 날짐승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다. 대자연 이 모든 것이 기적이다> 나는 생각한다. 서양식인 논리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간의 겸손이다. 그들을 구제하는 임무는 오로지 헤겔식의 자만을 고치는 사람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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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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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26. 포이에르바하 - 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
행운이 따르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불행에 쫓겨다니는 철학자도 있다. 이런 사람으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를 꼽을 수 있다. 어쩌다가 삐그덕거리는 그의 삶에 때때로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의 시작은 매우 전도양양해 보였다. 저명한 법률가인 아버지는 한 명의 애첩에게 지출되는 돈을 충당하고도 많은 자식들을 그런 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재산이 있었다. 어린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모범생으로서 선생님들의 신임을 얻는다. 그의 학교 시절의 생활 기록부 중 하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활달한 성격을 지녔고 질서를 잘 지키며 매우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졌으며, 대단히 모범적인 품행과 근면성을 지닌 특출난 학생이다. "그는 넉넉한 학비 보조를 받으면서 하이델베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신학에 실망하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왜냐하면 "자유와 예속, 이성과 믿음에 대한 신학의 헛소리들은 나의 진리, 즉 통일성, 단호함, 무조건성을 죽을 때까지 요구하는 영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베를린으로 옮긴 후 그는 비밀 정치적인 신조를 갖고 있다고 증명해 보임으로써 혐의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헤겔의 영향을 받게 된다. 헤겔과 짧은 인사말을 주고받은 것을 제외하면 딱 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유명한 루터와 베그너의 포도주 집에서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때 너무 수줍어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그 후 포이에르바하는 에어랑겐에서 학위를 받고 25세의 나이로 강사가 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그는 천천히 내적으로 헤겔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이 도시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며 오로지 전적으로 자신의 학문에만 몰두한다. 그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토록 조용한 곳에서 지금 나는 거실 같은 자연에 둘러싸여 아침에는 물 한잔을 마시고, 점심에는 약간의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맥주 한 조끼와 이에 곁들여 기껏해야 무우 하나를 먹는다."만일 내가 언제나 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서 아무 것도 더 바랄 게 없으리라." 그밖에 그는 고작해야 "그토록 오랜 시간 앉아 있으려면 꼭 필요한 커피"를 마실 따름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친다. 포이에르바하는 짧은 기간의 강사 활동으로도 대학에 싫증을 낸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가 (죽음과 불사 불멸에 대한 사상)이라는 책을 쓴 것이다. 비록 익명으로 그 책을 발행하기는 했지만, 그가 저작자임이 곧 드러났다. 이 책은 저자인 그를 신학적, 정치적 보수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학술 분야에서는 더 이상 활동을 못 하도록 발을 묶어 버리는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그는 그의 누이에게 이렇게 써보낸다. "나는 소름끼치는 자유 사상가, 무신론자,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반그리스도의 화신이라는 소문 속에 휩싸여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포이에르바하 스스로 자신은 강단에서 거의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의 재능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강의가 아니었다. 에어랑겐에서 교수 자리를 얻을 가망은 사라졌다. 그는 변명이 될 만한 구실을 대면서 대학을 떠난다. 즉 대학에는 "생계를 위한 감자 재배의 학문을 빼놓는다면 경건한 양치기만이 번창하고 있을 뿐이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소 대담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닌 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철학 교수로는 적당하지가 않다." 그는 "특별한 존재의 등급"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전문 교수의 지위로 깍아 내려서는" 안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제 부득이 온갖 가능한 직업을 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나지움 선생, 가정 교사, 도서관 사서, 편집인, 자유 기고가 등 여러 직업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어떤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리로 떠나기로 오래 전부터 마음먹어 왔지만 결단성 없는 성격으로 실패한다. 그 다음 그는 다소 앞뒤가 맞지 않지만 다시 여러 대학에 자리를 얻기 위해 서류를 제출한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결국 단념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교수대에 목을 매단 채로 살고 있다." 이때 한 여자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성주이자 도자기 제조업자의 딸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의 영혼은 심연에 빠져있다오. 거기에서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탄식만이 유일한 생명의 징표로서 내 귓전을 울리고 있소." 베르타 뢰브라는 이 여자는 포이에르바하의 정신적인 기품 때문인지 그의 외모의 수려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전기 작가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알맞게 균형 잡힌 고상한 몸가짐을 유지하였고, 걸음걸이는 가볍고 탄력이 있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온화하고, 총명한 외모에다 담갈색의 날카로우면서도 인자하고 친절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넓고 아름답게 생긴 이마는 짧게 자른 숱 많은 갈색 머리로 덮여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코와 입은 단호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성품이 착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적당하게 콧수염을 기르기로 작정했는데 콧수염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을 온통 뒤덮었다." 전기 작가는 "그의 인품에서 풍기는 인상이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여자는 포이에르바하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총각 생활의 지저분함을 다 떨쳐 버리고 신성한 결혼 생활의 깨끗한 목욕물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그에게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커다란 안정감을 준다. 그는 성의 탑 꼭대기 방에서 그렇게 바라던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외적인 생활은 도자기 공장에서 벌어들이는 아내의 수입뿐만 아니라--전기 작가가 영명하게 표현하고 있듯이-훌륭한 과수원과 정원, 야생 동물과 새들이 사는 커다란 숲, 그리고 양어장에 의해 풍족하게 꾸려 나갔다.
포이에르바하의 지나칠 정도의 꼼꼼한 생활 방식에 관해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모범적이고 단순한 생활 습관을 가졌다. 그는 거실의 청소와 난방을 스스로 하였고, 밤에는 잠자리를 몸소 돌보고-이런 점은 파스칼과 아주 비슷하다-낮에는 잘 정리 정돈해 두었다. 그의 연구실은 빈틈없이 정돈되고 청결하게 유지되었다. 천재적 인간의 표면상의 특권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을 끼치게 하는 어수선함이지만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옷매무새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하고 다녔다. 그는 새벽부터 소박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꽉 끼는 듯한 맨 윗단까지 단추를 채운 어두운 색깔의 웃옷이나 산지기처럼 보이는 자켓을 주로 입었다. 그는 특히 독일의 많은 학자들에게 필수적이다시피 한 잠옷과 슬리퍼 등 연약하고 태만한 안락함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그는 낮에는 언제나 장화를 신었고, 때때로 테가 없는 작은 모자를 가볍게 눌러 쓰기도 했다. "우리는 이 도망 나온 대학 강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장인의 성안에서 세상을 떠난 명상적이고 약간은 고루한 구식 풍의 생활을 즐겼다."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생활은 은둔 생활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사회 관계는 모든 외적인 연대성의 위장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하게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원적인 생활에서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명성을 높인 책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저술한다. 학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포이에르바하 자신도 그 책의 가치를 분명하게 의식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이 "뿌리까지 썩고 철두철미하게 위선적인 현 세대를 위한 저술이 아니라 커 가고 있는, 더 나은, 더 강한 세대를 위한 저술"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철학 사상이 극단적인 한계에까지 내몰린 시대의 마지막 철학자"라고 느낀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인정해 주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농부, 여관집 주인, 군인들이 그의 책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는 것에 참으로 기뻐하였다. 이들은 먼 곳에서 어려운 걸음으로 그를 방문하였고, 그에게 힘차고 감동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의 책을 읽고 마음의 혼란을 일으켜 비극적으로 생을 끝낸 어느 처녀의 이야기조차도 그의 행복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없었다. 그때 새로운 일이 터진다. 즉 1848년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는 눈부신 활동과 적극적인 참여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았다. 그는 민주주의 시대의 본분을 다한다. "국가의 용무를 특권 계층이나 특권 계급의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 민족의 문제로 만들려는 정신은 승리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의 승리와 더불어서 인류의 과제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열심히 활동한다. 그는 혁명의 막이 오른 도시, 파리로 갈까 생각해 본다. 그에게 농장을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고 한 자유의 땅, 미국으로의 이민도 고려해 본다. 형편이 달라졌으니 다시 대학에서 활동하거나 잡지를 발행해 볼 까도 생각한다. 포이에르바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학생들로부터 "새로운 시대 정신을 발하기 시작한 매우 드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강의에 초빙받는다. 대학 당국이 그에게 강의실을 내주기를 거절하자 그는 학자와 노동자를 상대로 시청에서 강의를 강행한다. 그가 강연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이델베르크의 학생으로서 강연에 참석한 고트프리트 켈러는-그의 서투른 강의 방식에 대해 약간의 유보적인 언급을 하면서도-포이에르바하를 "현대의 철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포이에르바하는 다시 무기력과 낙심에 빠진다. "나는 언제나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를 견디며 살아왔다. 나는 예전의 조용하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즐거웠던 그 삶이 사무치게 그립다. 내게는 모든 것이 무시무시하고 으시시하다." "나는 내가 강단에서야 하는 것이 마치 가련한 죄인이 단두대 위로 가야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혁명적 운동에 동참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한다. 그는 어떤 열렬한 혁명가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등단 바로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하이델베르크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강연을 합니다. 만일 내가 그곳에서 뿌린 씨앗 가운데 몇 개의 낟알이라도 100년 안에 싹이 튼다면, 나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당신의 투쟁으로 이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해 놓은 셈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은신처로 되돌아온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어렵게 생활해 나가야만 한다. 그는 그의 거처를 "나의 우울한 연구실"이라고 부른다. "나는 매 순간마다 세계를 못질했던 그 가장 날카로운 못에 찔린다." 체념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그에게는 "자신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철학자보다 차라리 나무꾼이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원한 삶을 떠나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세계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로도 더 이상 그가 망각된 채 있는 것을 깨우지 못했다 대작에 뒤이은 그의 저작들은 전혀 언급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무관심과 냉담이 그를 사로잡았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을 "늙은데다가 사람들을 배척하는, 비위가 상하는 상태 속에서 쇠약해진 남자", "오직 자기 자신의 추도사를 쓰는 데나 유용할, 일할 능력도 없는 백발의 노인"이라고 썼다.
설상가상으로 궁핍한 외적 생활이 시작된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도자기 공장의 수입이 떨어지고, 결국은 파산을 선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공장에 돈을 투자한 포이에르바하는 재산을 깡그리 날려 버린다. 성에 있는 단촐한 주거지마저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뉘른베르크 근교로 이사한다 그러나 "소음의 시궁창"이라 할 새 집에서 포이에르바하는 거리의 소란스러움, 어린 아이들의 고함 소리, 개 짖는 소리에 시달려 몇 년 동안 제대로 연구를 못 한다 마침내는 자선단체의 기부금 및 친구들의 공개적인 모금과 희사로 가까스로 생활을 유지한다. 그는 여러 번 졸도 발작을 일으킨다. 포이에르바하는 마침 내 정신이 혼미한 채로 오랫동안 식물 인간으로 지낸다. 그는 1872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비록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학생 시절에 이미 신학을 단념했지만, 그래도 그의 관심은 일생 동안 종교 문제에 쏠려 있었다. 16세 때 그는 "종교에 반대하는 단호한 경향"을 마음 속에 확고하게 하였다. 그는 훗날 "종교를 내 인생의 목적이자 사명으로 삼는다."라고 썼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저서들은 "엄밀히 볼 때 오직 하나의 목표, 하나의 의지, 한 가지 사상,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있다. 이 주제는 바로 종교와 신학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모든 세계의 실재를 지배하는 절대 정신에 경도된다. 그렇지만 그는 곧 이 사상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헤겔의 의미로 보자면 절대 정신은 포이에르바하가 문제삼았던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신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헤겔의 절대 철학 역시 사변 신학이다. 그는 "사변"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변이란 단지 "술 취한 철학"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이 다시 말짱한 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자기 자신의 철학함에서는 결코 그 어떤 신적인 원리나 또는 절대 본질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 오로지 인간에서 출발하기로 결심한다 이때의 인간이란 구체적인 현존재와 자연의 질서 속에 놓여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인간의 첫 번째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은 모든 사물과 모든 실재의 척도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철학의 관심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실재로서 인간 현존재를 지적한 것, 따라서 일종의 인간학적 철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포이에르바하의 고유한 업적이다. 그밖에도 그에게는 일반적으로 "현실성과 총체성에 있어서의 현실"이 중요했다. 그의 관점으로 보자면 거의 모든 철학과 신학의 전통은 환상의 허깨비를 뒤쫓고 있었다. 그 전통은 내세, 절대 세계, 이데아의 세계, 신의 세계를 본래적인 실재로 상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포이에르바하는 현세의 실재, 즉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의 실재와 인간의 실재를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본다. 그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실재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에게는 다른 존재자보다 인간이 뛰어난 점은, 특히 동물보다 뛰어난 점은 이성-전통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주장되어 왔듯이-이 아니다. 이성은 너무나 지나치게 실재를 뛰어넘어 사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오히려 감성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감성은 인간의 본질이다. " 그리고 정신은 단지 "감성의 본질일 뿐이고 감각의 보편적 통일성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은 또한 진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진리, 실재, 감성은 전부 동일하다." 그는 그의 철학적 여정을 회고하여 이렇게 쓴다. "나는 초감각적인 것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넘어갔으며, 초감각적인 것의 비 진리와 허위에서 감각적인 것의 진리를 도출해 내었다." 모든 초감각적인 것의 포기가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철학사에서 최초로 근본적으로 그리고 그 모든 귀결까지 염두에 두고 필이 생각하였다. "신의 본질은 신이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입장에 맞서 포이에르바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인간화"이고, "신의 인간 외적, 초자연적, 반이성적 본질을 인간의 자연적, 내재적 타고난 본질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헤겔의 신적 이성, 절대 정신은 단지 "우리 밖에 실재하는 망령"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최고의, 가장 폭력적인 추상화"이다. 이에 반해 유한한 인간에게 제한되는 무신론은 포이에르바하에게 있어서는 참된, 본래적인 철학적 입장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원리로써 헤겔의 절대적 사변뿐만 아니라 일반으로 통틀어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가 내동댕이쳐진다. 포이에르바하는 그렇지 않아도 그리스도교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일종의"종교적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멸망되어 가는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그것을 동정하지 않고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인간이 그리스도교를 포기할 때, 비로소 그는 인간이 된다." 그로써 인간은 구름 속의 낙원을 포기하고 오직 이 현세의 참된 실재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자리에 무 신앙이, 성경의 자리에 이성이, 종교와 교회의 자리에 정치가가, 하늘의 자리에 땅이, 기도의 자리에 노동이, 지옥의 자리에 물질적 궁핍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부터 "새롭고 솔직하고, 더 이상 그리스도교척이 아닌, 단호히 비 그리스도교적인 철학의 필연성이" 흘러나온다.
그 시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이러한 지적만으로는 물론 대단한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거의 전 인류의 역사에서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받아들여져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해석의 원리는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도입한 인간학적 관점이다.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고, 종교의 중간이며, 종교의 끝이다." 이러한 인간으로의 환원은 신 개념의 파괴를 몰고 온다. 포이에르바하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신은 "표상이나 환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이지, 진리나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이념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 즉 종족으로서 그에게 보편적인 것을 자기 밖에 설정해 놓고 하나의 신으로 만드는 데서 비롯된다. "신에 대한 앎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영,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앎이다." 신은 하나의 독립적인 실재의 존재로서 직관된 인간 본질의 이상이다. "신은 인간의 "외화된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특히 포이에르바하가 전통으로 신에 대해 거론된 특성들을 조사할 때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든 특성은 포이에르바하가 이해했듯이, 인간의 자기 이해에서 생겨났다. "인간은 신의 전지(Allwissenheit) 안에서만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자신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인간은 신의 편재 (Allgegenwart) 안에서만 어떤 장소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소망을 구현한다. 인간은 신의 전능함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소망을 구현한다 " 이렇게 신적인 영역은 그 전체가 몽땅 인간에게로 되돌려진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은 학문 이론적 주장을 하게 긴다. "신학의 신비는 인간학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아직 왜 인간이 거듭해서 상상의 도움으로 신과 신적인 종교를 만들어 내려는 유혹에 빠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심리적인 소여성으로 소급시킨다. 인간 내재적 능력과 힘이 신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특히 예속 감정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인간은 그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을 신으로 숭배한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며,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 그래서 인간에게 자신의 제한성, 무력감, 연약함 등 자기 비하의 감정을 불어넣게 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예속성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속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의존하곤 있는 것은 자연, 그것도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힘"인 외적인 자연뿐 아니라 우리 안의 자연 본성, 즉 충동, 욕망, 관심 등이다. 따라서 예속 감정은 포이에르바하가 생각하듯이 세계 내재적으로 또한 인간 내재적으로 이해해야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예속성의 감정이 연관을 맺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어떤 세계 초월적, 인간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그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욕망과 이 욕망 기저에 행복에 대한 충동이 깔려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다시 신에 대한 사상의 생성을 유발하는 동기가 된다. "인간이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그것을 인간은 신으로 만들며,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신이 된다." 자신의 행복을 결코 완전히 실현할 수 없는 인간은 상상력을 가지고 완전한 행복인 신을 만들어 낸다. "신이란 상상 속에서 충족된 인간의 행복에의 욕망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계속 숙고해 나갔고, 결국 그에게는 모든 신에 대한 믿음의 뿌리는 이기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행복을 향한 갈망은 이기적인 갈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충족시킬 수 없는 과도한 이기주의를 만족시키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신을 생각해 낸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종교와 신학의 근본 원리이다. 왜냐하면 숭배와 흠숭의 대상이, 따라서 한 본질의 신적인 품위가 인간의 안녕에 대한 그 존재의 연관성에 달려 있다면, 그리고 인간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존재만이 신적 존재라고 한다면, 그 존재의 신성의 근거는 오직 유일하게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만 연관시키고 이러한 연관 속에서만 평가하는 인간의 이기주의에 있다." 이 문장에서의 "이기주의"라는 표현은 물론 사람들이 흔히 이 말과 연결시키고 있는 도덕적인 평가 절하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이 표현은 오히려 자기 긍정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자기 긍정은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처럼 오로지 인간에게만 의존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시켜 버리는 그러한 철학의 필연적인 기초를 형성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무신론적 철학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미래의 철학"으로 모든 종교, 모든 신학, 그리고 신학적으로 전염된 모든 철학을 완전히 극복하였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결정적인 책에 "세계 역사적 사실의 등급"을 매길 수 있었다. 그는 그의 학설이 "세계사의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뭔가 잘못 생각하였다. 신의 문제에 관한 논쟁은 포이에르바하의 단호한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되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절박성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고 있다.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폰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년 7월 28일 - 1872년 9월 13일)는 독일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이다. 유명한 법학자인 파울 요한 안젤름 리터 폰 포이어바흐(Paul Johann Anselm Ritter von Feuerbach)의 넷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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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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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미셸푸꼬 / 인간사랑
역자 서문
1984년 미셸푸꼬(Michel Foucault)의 사망은 프랑스 지성사에 하나의 공백을 가져왔다. 푸꼬의 사상은 철학, 역사, 문학, 문학이론, 사회과학, 심지어 의학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푸꼬의 의의는 서구철학이 당연시해 온 이성과 계몽의 의미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했고, 서구철학이 깊이 있게 제기하지 못한 '권력'에 대해서 질문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푸꼬의 지적 작업의 의도는 주체로서의 인간, 주변성, 제도(또는 제도적인 것), 정치를 권력관계의 맥락에서 재개념화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의 실현을 위해서 푸꼬는 지식-권력의 복합체로서의 담론구성체를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계보학적인 방법(Genealogical Method)과 고고학적 방법(Archae - ological Method)을 통해서 규범화의 기술, 사회적 관계를 형성시키는 통제장치로서의 담론적 실천을 분석해내고자 한다. 따라서 "병원의 탄생"에서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푸꼬의 저서는 담론구성체를 통해서 당시대의 지식- 권력의 복합 관계를 밝히고 있다.
1968년 프랑스의 5월혁명은 문화적 비판주의, 비판적 유토피아주의적 실천에 대한 실제적 반성을 가져왔다. 프랑스 지성들은 사유틀로서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를 인식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대문명이 새롭게 제기하는 여성, 성, 의학, 정신병, 환경, 소수민족, 범죄 등의 문제에 대해서 무능할 따름이었고, 이것은 우리에게 '권력과 관련된 억압은 단일의 사회, 정치적 장치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심급의 관계 그 자체 속에서 확인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푸꼬도 마르크스주의가 '권력이라는 신비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사실에 대해 설명해 주는 발견적 도구로서의 기능을 해내지 못함'을 간파하고, 권력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해서 새로운 인식틀을 찾아내고자 했다.
1. 푸꼬가 의미하는 권력은 단순히 정치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푸꼬의 권력은 사회현상 속에서 편재하는 권력관계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푸꼬는 모든 관계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이며, 인간의 제실천 역시 권력의 효과임을 역설하면서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이해를 위해 권력을 '전략'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러한 권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서서 '광기, 죽음, 범죄, 성'과 같은 경험들과 권력의 여러 기술들과의 관계를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이러한 여러 현상들 속에서 권력에 대한 분석이 가능한 것은 푸꼬가 계급의 점유 대상으로서의 권력개념을 부정하고 권력을 계급이 차지하는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푸꼬의 지적 작업이 갖는 또 다른 의의는 질문의 심급을 '무엇을'이나 '왜'에서 '어떻게'로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희랍철학 이래 이성은 무엇이며 인간의 존재방식은 왜 그러한가? 등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고 했던 노력들은 실질적인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오히려 이성은 어떻게 변형되어 왔고, 담론적 실천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권력의 작용은 어떻게 효과를 낳는가를 천착하는 것이 현대문명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천을 이해함에 있어 보다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푸꼬의 견해이다. 생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푸꼬의 의도는 특유의 실증주의(positivism)를 성립시킨다. 권력이 다양한 관계망 속에 분산되어 있다는 입장을 '경험에 대한 정치학'을 요구한다. 여기서 푸꼬의 경험은 개별자를 주체로서 성립시키는 객관화 작용을 의미한다. 객관화 작용이란 개념과 지식의 영역, 그 속에 내재된 실천과 규칙이 실천을 매개로 해서 성립되는 관계를 말한다. 결국 푸꼬의 작업영억은 담론구성체로 표현되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경험들속에 들어 있는 정치적 효과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푸꼬는 현재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따라서 푸꼬는 모든 작업은 지식의 생산에 대한 정치적 역사를 기술하는 작업이며, 지나간 시간의 실천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을 기술하려는 계보학적 또는 고고학적 분석이 되는 것이다.
3.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aI age classique, 영문판 Madness and Civilization)는 푸꼬가 1961년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를 둘러싸고 실제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규정, 광기를 둘러싼 감금의 관행들, 광기의 치료법 등을 통해서 푸꼬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결국 고전주의 시대의 '권력'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권력의 작용을 분석하기 위해서 푸꼬는 고전주의 시대의 '감금의 역사'를 천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1973년 푸꼬와 폰타나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담에서도 알 수 있다. 푸꼬는 그 대담을 통해서 "광기의 역사"를 서술했을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문제가 권력과 지식의 문제 혹은 과학과 그 사회의 정치, 경제의 구조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였음을 지적했고, 정신의학처럼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과학을 대상으로 삼으면 권력과 지식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바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음을 간접적으로 피력했었다.
4-1.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광기의 역사"는 17세기에 일어난 대감금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주목하면서, 당시 파리 시 인구의 1% 이상이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광기의 감금에 있어서 한편에는 광기에 대한 법률적 이론 및 도덕적 견해와 다른 한편에는 광기에 대한 정신의학적 해석이 있었다. 4-2.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기의 역사"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광기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권력의 총체적 전략이며 그 효과이다. 이를 입증해내기 위해서 푸꼬는 감금이라는 일반화된 사회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광기와 관련된 제담론을 분석했다. 광기에 대한 철학적 규정, 의학적 관행들, 광기의 감금에 대한 법률적 조치들, 나아가 광기에 관한 문학적 서술들을 분석함으로써 푸꼬는 "권력과 지식은 서로 직접 포함하고 있다는 점, 어떤 지식의 영역과의 상관관계가 조립되지 않는 권력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련을 상정하거나 조립하거나 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4-3. 셋째로 푸꼬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서구의 이성 중심의 사고체계 역시 권력의 효과임을 시사하면서 그러한 사고체계가 형성해낸 '분리'와 '차별'의 역사를 다룬다. 푸꼬는 "광기의 역사" 결론부에서 이러한 시각에서 서구적 이성의 기원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성의 간지를 냉정하게 비판했다. 이와 더불어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형상화된 푸꼬의 권력론에서 우리는 민중(plebs)이라 할 수 있는 주변적 존재, 소외된 존재의 소리를 이데올로기적이라기보다는 실증적으로 대변하고 했다는 것을 시사받을 수 있다. 푸꼬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체계로는 포섭되지 않는 광인, 죄수, 아동, 사병, 환자, 노동자 등의 주변적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망, 권력의 전략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이상과 같은 의도하에서 서술된 "광기의 역사"가 보여주는 광인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문명의 역사로서의 인간의 역사가 결국 이성과 권력의 결탁의 역사임을 보여줌으로써 "광기의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 나아가 해방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 것이다.
1991년 1월 /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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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파스칼(Pascal)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거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Dostoievsky)는 그의 "작자일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sanity)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광기(la folie)라고 하는 또 다른 형태, 즉 광기라는 타자성의 역사를 기술해야만 한다. 바로 이 타자성을 통해서 인간은 지배적인 이성의 작용 속에서 자신의 이웃을 감금하고, 비광기(nonmadness)라는 냉혹한 언어를 통해서 서로를 인지하고 서로 교통한다. 또한 우리는 이 언어가 진리의 영역에 확실히 정착하기 전에 이 언어와 이성의 공모의 순간을 규정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광기의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영점(zero point)에로 복귀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는 광기는 무차별적인 미분화된 경험이었으며, 분리 자체에 대한 아직 미분화된 경험이었다. 우리는 광기의 궤도에서부터 출발하여 이 '타자성의 형태'를 기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타자성의 형태는 광기와 이성을 각각 한 편에 두고서 각각의 활동에 대해서 타자성으로, 즉 일체의 교통의 밖에 있는 사물로, 서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나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규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편안치 못한 영역이다. 이 영역을 개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라고 하는 편의를 포기해야 하고, 우리 자신이 광기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리학의 어떤 개념도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회고(retrospection)라고 하는 내적 과정에 있어서는 구성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본질적인 것은 광기를 구분하는 행위이다. 일단 이 구분이 이루어진 후 조용히 복원됨으로써 체계화된 과학은 어떤 본질적인 의미도 갖지 못한다. 원초적인 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거리를 확립시키는 단절의 지점이다. 이 지점은 이성이 비이성으로부터 광기, 질병, 범죄라는 비이성의 진리를 박탈함으로써 비이성을 명백하게 정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나 승리에 대한 권리를 전제함이 없이 이 원초적인 투쟁에 관해서 기술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론이라든가 진리에로의 피난과 같은 것은 모두 유보해 두고 역사 속에서 재검토 된 투쟁과 관련된 활동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과 이성이 아닌 것을 분리시키는 작용, 양자간의 거리, 양자 사이에 제정된 공간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의 실현에는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 때에,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이성의 인간과 비이성의 인간이 서로 떨어져 작용해도 여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는 영역을 규정할 수 있다. 이 영역에서는 매우 조야한 초기의 언어를 통해서 과학의 언어를 예견하면서 이성과 비이성간에 불화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 대화의 과정에서 양자는 여전히 서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시적으로 검증된다. 여기서 광기와 비광기, 이성과 비이성은 서로 교묘히 얽혀들며,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서로를 분리시키는 상호 교통을 통해서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존재하게 된다.
고요한 정신병의 세계에서는 근대인은 더 이상 광인과 교통할 수 없다. 한편에서는 이성의 인간은 광기에 정신과 의사를 파견하고, 그럼으로써 질병이라는 추상적 보편성을 통해서만 관계를 정당화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광기의 인간은 똑같이 추상적인 이성의 매개에 의해서만 사회와 교통한다. 여기서 이성은 질서, 물리적, 도덕적 제약과 집단으로부터의 익명성의 압력, 일치에 대한 요구로서 규정된다. 이성의 인간과 광기의 인간 사이에는 공통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8세기 말 광기를 정신병으로 규정함으로써 대화는 명백히 단절되었고, 양자의 분리는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그럼으로써 광기와 이성 사이의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구문론도, 더듬거리는 불완전한 단어들도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에 불과한 정신분석학의 언어는 그와 같은 침묵에 근거해서만 확립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언어의 역사가 아니라 이러한 침묵의 고고학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휘브리스(Huibris, 방탕함)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의 것은 아니었다. 트라시마커스(Thrasymachus)나 칼리끌레스(Callicles)의 존재가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한다. 비록 그들의 언어는 이미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 가리워진 채 우리에게 드러났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는 어떤 반의어도 갖지 않았다. 중세가 시작된 이래로 유럽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광기, 정신분열, 비건전성이라고 불리워진 것과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 아마도 서구의 이성은 이 모호한 현존 덕분에 그 심층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소크라테스적 사유의 소포스우이게(sophosuige, 정신의 평정)가 휘브리스의 위협에 기여한 것과 같다. 어쨋든 이성과 광기의 연계는 서구문화에 대해서 원초성의 한 차원을 형성한다. 이러한 연계는 이미 이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이전부터 오랫동안 서구문화의 동반자였으며, 니체(Nietzsche)와 아르또(Artaud)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언어 심층에 있는 이 관계는 무엇인가? 이성의 수평적인 진행을 따라 이성을 탐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문화를 자기 자신이 아닌 것과 대면시키고, 유럽문화 고유의 혼란을 통해서 유럽문화의 영역을 확립시키는 지속적인 수직성을 그때그때마다 추적하고자 하는 탐문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지식의 역사도 역사 자체도 아닌 어떤 영역에로 우리는 들어서야 하는가? 지식의 목적론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며 합리적인 인과론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닌 -왜냐하면 원인은 이미 단절 이후의 것이므로- 어떤 영역에로 우리는 진입해야 하는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문화의 동일성이 아니라 문화의 한계가 문제가 되는 영역이다.
고전주의 시대 - 윌리스에서 피넬에 이르는, 라신느의 오르스테스(Oreste)가 일으키는 광포한 발작에서 사드(Sade)의 쥴리에뜨(Juliette)와 고야의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 광인의 집)에 이르는 - 는 광기와 이성 사이의 교통이 시대의 언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바로 그 시대이다. 광기의 역사 속에서 발생한 두 사건이 똑같이 분명하게 이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 1657년 오삐딸 제네랄(Hopital General, 구빈원)의 탄생과 '빈민의 대감금', 그리고 1794년 비세트르(Bicetre)에서의 수감자의 해방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독창적이고 대칭적인 사건들 사이에서 그 애매성 때문에 의학사가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발생했다. 혹자는 그것을 절대주의적 체제에서의 맹목적인 억압으로, 혹자는 과학과 순례를 통해서 광기를 그 실증적인 진리 속에서 발견해낸 점진적인 과정으로 표현한다. 사실상 이러한 전도된 의미들의 심층에서 애매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애매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구조에 의해서 우리는 광기에 대한 중세의 인간주의적 경험이 광기를 정신병으로 국한시키는 오늘날의 경험으로 전이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때까지 인간의 광기에 대한 투쟁은 세계의 비밀스러운 힘을 직면하게 만드는 하나의 투쟁이었다. 광기의 경험은 타락, 신의 의지, 야수, 변태의 이미지들로,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인식의 비밀들로 가려져 있다. 우리 시대의 경우 광기에 대한 경험은 광기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지식체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진행하는 동안 상상들도, 실증적인 등장 인물들도 갖지 못한 세계에 의해서 하나의 위대한 부동의 구조 - 무성의 제도, 논평이 없는 행위, 즉각적인 지식으로서 - 를 드러내는 일종의 무언의 간명성을 통해서 하나의 변환이 일어났다 : 이 부동의 구조는 드라마도 지식도 아니다. 이것은 역사를 수립시키는 동시에 배격하는 비극적인 범주 속에 역사가 고정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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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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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琴俱亡(인금구망) 人(사람 인) 琴(거문고 금) 俱(함께 구) 亡(죽을 망)
세설신어(世說新語) 상서(傷逝)편에는 죽음에 대한 애상(哀傷)을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동진(東晋)의 유명한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字는 子猷)와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字는 子敬) 형제가 모두 병에 걸렸는데, 동생인 자경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 자요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자경의 소식은 없는 것입니까? 그 얘가 이미 죽은 게 아닙니까? 라고 물으면서 조금도 슬퍼하거나 울지는 않았다. 형 자요는 즉시 수레를 타고 동생의 빈소로 달려가서는 동생의 관(棺) 위에 올라가 동생이 평소에 좋아하였던 거문고를 꺼내들고 타보았다. 그러나 거문고가 소리를 내지 않자, 자요는 이를 내던지며 자경아, 자경아, 너와 거문고가 함께 죽었구나(子敬, 子敬, 人琴俱亡) 하면서 한참동안이나 애통하였다. 한 달쯤 지나 형 자요도 그만 세상을 떠났다.
人琴俱亡은 인금병절(人琴幷絶) 이라고도 하며,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哀悼)의 정(情)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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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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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14. 나락 이야기
벼를 남도에서는 나락이라 부르며 그 껍질을 벗긴 알톨을 입쌀, 한자로는 미라 한다. 쌀미 자를 잘 분석해보면 8+8이 모여서 만들어졌으니 한 톨의 쌀알을 얻는 데 여든여덟 번의 손질이 간다는 뜻이고 88세의 나이를 미수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한세상 태어나 우리 모두 백수는 못해도 미수는 살다 가야 하겠는데 명은 제 마음대로 못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노인들만이 남아 아이 울음소리마저 그친 농촌에 못자리를 내느라 아주머니와 노인들의 손길이 바쁘다. 옛날 같으면 조붓한 논두렁 끝에 도랑쳐서 물대고 소에 부리망 씌우고 멍에 얹어 쟁깃술 끝의 보습 흙 턱턱 털고 논바닥을 갊에 흙살이 척척 갈라져 나자빠졌고, 써레질하여 흙을 고르고 흙덩어리를 으깨어 반반하게 자리를 만들고 삽으로 골지어 씨나락(볍씨)을 골고루 뿌려 두었다. 요즘은 그때와 영판 다르게 이양기를 써서 모를 심고, 곳에 따라서는 숫제 자리 만듦도 없이 논에 바로 볍씨를 뿌려 버린다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이제는 못줄 넘기는 재미도 없어졌으니 미자의 의미도 많이 변질되고 말았다. 그뿐인가. 물오리 지나치듯 하지만 그래도 세벌 논을 매었고 힘내라고 들녘에는 메나리(미나리)합창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가는 새끼로 얽어 만든 망을 소 주둥이에 씌워 초봄에 소가 풀맛을 보면 여물을 먹지 않기에 하는 것이라는 것을 덧붙여둔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볍씨를 뿌리는 시기도 많이 당겨졌다. '제2의 농업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닐 덕분인데 어떻게 보면 '제 1의 혁명'인 품종개량을 통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에 못지않은 크나큰 변화임에 틀림없다. 빨리 뿌려서 햇빛을 오래 받게 되어 그만큼 소출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채소나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비닐하우스 덕분으로 끝이 안 보이게 펼쳐 있는 운해 같은 '하우스'는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양지 바른 담부랑 밑에 구덩이를 깊게 파고 쇠스랑으로 퇴비 두엄 다죠 넣고 똥물로 물기 맞추고 보드라운 참흙 깔고 거적 덮어 거기서 나오는 열고 고구마 순을 트게 했던 나의 어릴 때를 생각하면 정말로 금석지감이 된다. 어쨌거나 흩어뿌린 저 볍씨가 땅 내 맡아 뿌리 내리고 땅심을 흠뻑 받아 알알이 여물어 가을 바람에 황금 물결을 이룬다. 입추 말복 사이에 벼가 하도 빨리 자라서 그때쯤이면 벼 크는 소리에 개가 짓는다고 한다.
숱한 꽃가루받이 끝에 벼의 학명은 Oryza sativa인데 속명 Oryza는 쌀이란 뜻이고 sativa는 재배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벼는 세계적으로 5,000품종(품종이란 같은 종이면서도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하며 변종, 생태종, 아종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래서 세계의 쌀은 단 1종뿐이란 말이 된다. 그리고 품종끼리도 교배가 되기에 같은 종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이 있지만 크게 쌀알이 짧고 둥글며 찰기가 있는 일본형(Japonica type)과 길고 점도가 거의 없는 인도형(Indica type)으로 나누는데 후자가 안남미(Annam Rice)로 베트남의 안남 지방의 이름을 딴 것이다. 벼의 원산지를 인도 근방으로 보며 주로 열대.아열대 지방에서 잘 자라고 논벼말고도 밭벼가 있는데 후자는 수확량이 떨어져 우리나라에는 잘 심지 않는다. 필리핀에 쌀 품종개량을 전담하는 국제미작연구소가 있어 이곳이 '녹색혁명'의 본산지로 '통일벼'도 그곳의 연구가 큰 힘이 되었다.
농촌진흥청 발표를 보면 단보당(3백평) 711킬로그램을 수확하는 수원 405호와 그보다 더 많은 736킬로그램을 내는 수원 414호 볍씨를 1997년부터 농가에 보급하기로 했다는데 지금까지의 평균 459킬로그램보다 무려 60퍼센트나 더 많이 증산된다고 하니 말 그대로 '슈퍼쌀'이다. 이렇게 새로운 품종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최소한 7년(옛날에는 14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수많은 계통에서 선택법이라는 순수 분리를 하거나 교잡법을 쓴다. 예를 들어 통일벼도 교잡법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일본 북해도의 유가라종과 대만종인 대중재리 1호를 교잡하고 이것을 필리핀종 1R8과 교배하는 삼원교배를 했던 것이다. 각 품종의 좋은 점(수확량이 많고, 쭉정이가 적고, 병충해에 강하고, 단백질 함량이 많고 등등)을 고루 갖춘 품종하나를 만드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만도 2,000이 넘는 벼 품종이 있다니 오늘도 그놈들 돌보느라 말없이 연구실에서 외곬으로 품종개량에 애쓰는 많은 분들께 격려를 보내는 바이다. 이쪽 포기의 6개 수술 끝의 꽃가루를 붓으로 묻혀 저쪽 그루의 암술 머리에 문질러 꽃가루받이시키는 주례 선생님들께 말이다. "새끼 많이 둔 소 길마 벗을 날 없다"고 사람 입이 자꾸 늘어만 가니 붓놀리기도 더 바빠져야 하겠고 곡식 자급률이 29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하니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곡식 많이 나는 몇 나라가 담합하여 식량을 무기삼아 옥죄여 올 것을 예상하여 제 먹을 것은 제가 지어 먹어야 한다.
완전식품, 쌀 우리나라에 쌀이 들어온 지도 2000년이 넘었다고 하니(A. D. 33년경으로 추정) 연년세세 우리 몸에 쌀물이 흘러들어 유전형질화됐을 만도 하다. 쌀이 거의 완전식품이라는 것은 젖 떨어진 아이들이(옛날에) 미음죽만 먹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구수한 밥 냄새가 바로 쌀에 들어 있는 7퍼센트나 되는 아미노산 냄새요, 밥솥에 자르르 흐르는 밥 기름이 지방인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비가 60:20:20일 때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니 쌀밥만 먹고는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고, 여기서 꼭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우리네 식단에서 지방이 차지하는 비가 아직도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콜레스테롤을 불순물이나 사람 잡아먹는 바이러스 정도로 생각하여 겁을 내고 먹지 않는데 큰 잘못이라는 말이다. 항상 포식하여 배에 기름이 넘치거나 나이를 먹어 동맥이 딱딱해지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한창 크는 아이들에게 달걀이나 돼지 비계를 먹이지 않는다니 정말로 반식자 우환이란 말은 이때 쓰는 것이리라. 모름지기 음식은 골고루 먹으라고 한다. 쌀 이야기로 돌아와서 뒤주에서 쌀 한쪽박을 떠서 절미하고 부엌으로 가져와 바가지에 싹싹 문질러 씻은 쌀뜨물은 시래깃국 끓이는데 썼었고 쓿은 쌀 속에 겨가 벗겨지지 않은 벼 낟알이 섞여 있으니 이를 뉘라 하는데 그것도 껍질을 까서 밥에 보태었다. 요즘은 개새끼도 이밥을 남기니 그 꼴을 볼 때마다 배때기를 차버리고 싶어진다. 세월은 덧없는 것이고 제행무상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벼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속겨는 사료로 쓰고 비료나 비누의 원료로도 썼다고 하며 왕겨는 베갯속에 넣거나 번개탄을 만든다. 짚은 소를 먹이는 여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새끼를 꼬아서 덕성 명석 짜고, 지붕 이엉과 짚둥우리를 만들었으며 작두로 잘라내어 황토 흙에 섞어 담벼락을 쌓았고, 그 이용의 범위는 끝이 없다. 뭐니 해도 사랑방에서 삼아 신은 오금 종아리에 물 튀기던 짚신짝 생각이 오늘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쌀과 지푸라기는 정녕 우리 생활문화의 핵이었다.
식물의 번식 본능 살다가 곱게 운명하거나 잡았던 권력이나 누렸던 호강이 하루 아침에 몰락할 때를 "짚불 꺼지듯 한다"라고 한다. 짚은 불땀이 좋지 못해 밥짓기에도 쓰지 못하나 짚단에 불을 붙여 논두렁에 끌고 다니며 마른 풀 태우는 데에는 안성맞춤이다. 또 하늘높이 쌓아둔 짚북데기 틈새는 숨바꼭질하기에 제격이었고. 그런데 독자들도 가을 나락을 베고 남은 밑둥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뾰족뾰족 올라와 자라는 것을 봤을 것이다. 바삭 말라버린 씨알 달린 줄기를 잘라 가을걷이를 한 뿌리에서 새움이 나는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온도만 맞다면 길길이 줄기가 자라나 또다시 너울거리는 벼가 열릴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일본에서 있었던 실험으로 온실에 벼를 심어놓고 꽃이 필 만하면 볏대(꽃대)뽑기를 계속해봤다고 한다. 뽑고 나면 곧바로 새 줄기가 자라나고 다시 개화할 때면 또 뽑아버리고를 몇 년이나 계속했다는 것이다. 만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그대로 뒀다면 그렇게 재빠르게 반응하여 새순이 계속해서 나지 않을 건데 말이다. 벼뿐이 아니라 다른 식물도 마찬가지라 꽃을 계속 보고 싶으면 열매가 맺을 때마다 그놈을 따준다. 이렇게 어느 생물이나 후손을 남기려는 번식 본능이 강하다. 사람이 그것들의 본을 받아도 좋을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늙은이 행세를 하게 되면 정말로 자기도 모르게 퇴물이 되기 쉬우나 항상 마음을 젊게 먹고 하루하루를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면 온실의 벼포기처럼 생기를 얻으리라. 또 라마르크의 기관을 쓰면 발달하고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용불용설도 곱게 늙겠다는 사람에겐 참 좋은 교훈이 되겠다.
아무튼 이제는 품앗이나 놉을 대야 했던 논매기도 없어졌고 퇴비증산의 풀베기도 업어지고 말았다. 논에 나는 잡초는 2-4-D나 다른 제초제를 뿌려버리고 그래서 세벌매기하던 잡초와의 전쟁도 없어졌다. 그뿐인가. 땅을 일궈낼 생각은 않고 농약에 비료를 쏟아부어대니 논밭은 산성으로 바뀌었고 살흙이 토기를 잃은 지가 오래되고 말았다. 유기물이 3퍼센트는 되어야 걸진 옥토라고 하는데 땅이 퇴비 맛을 못 보니 하는 소리다. 오늘 따라 덜 여문 벼를 쪄 말려 찧은 찐 쌀을 질겅질겅 씹어 단물 빨아먹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의 젖물 같은 그 단맛이. 꾀쬐죄한 삼베바지 호주머니에 그놈을 불룩 넣어가지고 천하의 부자가 된 것처럼 뻐기던 그 심보. 그 시절이 정말로 행복하였다. 쌀은 죽어서도 입에 물고 간다. 그 저승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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