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1장 교양의 즐거움
4. 문장도에 대하여
문장도는 문장을 짓는 법 그 자체, 즉 글을 쓰는 기법보다 매우 범위가 넓은 것이다. 실제에 있어 작가를 지망하는 초심자에 대해서는 우선 문장의 기법에 지나치게 구애되는 마음을 제거해 주는 것이 좋다. 즉 기법이니 하는 피상적인 문제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된 문예적 인격의 함양은 모든 글짓기의 기초로 하여 자기 정신의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좋다. 참된 문예적 인격이 길러지고 올바르 기초가 마련되면 문예는 저절로 갖추어질 것이며, 기법의 끄트머리에 이르는 조그마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소질 그 자체가 좋아지면 수사나 문법 같은 점에서 다소 서투르고 못한 점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어느 출판사에서도 반드시 전문적인 교정원이라는 것이 있어서 콤마니 세미콜론이니 분할 부정법 같은 것에 주의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하는 일로 되어 있다. 그 반면 제아무리 문법이 바르고, 문학적 수식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문예적인 인격의 수양을 게을리 해서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뷔풍(1707 - 1788, 프랑스의 박물학자, 철학자)이 말한 것처럼 <문체는 사람이다> 문체는 방법도 아니고 체계도 아니고 상식도 또한 아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느껴지는 작가의 품성의 특질, 즉 깊이가 있는가 없는가, 통찰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밖의 기지, 유우머, 신랄한 풍자, 다정스러운 정미, 감성의 섬세함, 이해력의 섬세함, 부드러운 야유나 또는 냉소적인 상냥함, 고집스러움, 실용적인 상식,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그러한 여러 가지 것에서 독자가 받는 인상의 총화를 가리켜서 문체라고 한다. <유우머러스한 기법>을 숙달케 하는 핸드북이니, <냉소적이면서 상냥해질 수 있는 세시간 강좌>니, <실용적인 상식 15법칙>이니, <감정 섬세 11법칙>이니 하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이다. 우리는 문장도의 표면에서부터 깊이 파내려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깊은 곳에 도달한 순간 문장도의 문제에는 문학, 사상, 사물의 통찰력, 사고법, 감정 그리고 읽고 쓰는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자기 표현파의 부흥과 발랄하고도 개성적인 산문체의 발달에 뜻을 두고 중국에서 문학 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문예 전반, 특히 문장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논하기 위해 차례로 많은 논문을 써야만 했다. 또 전체를 <담뱃재>에 씌어 있는 내용을 조금만 적어 보겠다.
5. 기법과 인격에 대하여
작문 교사가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목수가 마술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평가가 문장 기법에서 문예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기술자가 태산의 높이와 구조를 콤파스로 측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말로 우습기 짝없는 일이다. 문장 기법이니 하는 따위의 것은 없다. 다소 그 가치가 인정되어 있는 모든 중국의 우수한 작가는 모두 다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문장에 있어서의 문장 기법은 교회에 있어서의 교의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하찮은 인간이 하찮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일 뿐이다. 초심자는 언제나 기법론에 현혹된다... 소설, 희곡, 음악, 연극의 기법에. 문장기법이 작가의 출현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미술, 문학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의 기초에 인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6. 문학 감상에 대하여
이제 가령 훌륭한 작가의 문장을 많이 읽었다고 하자. 첫째 작가의 묘사는 매우 발랄하며 생동감이 있고, 둘째 작가에게는 섬세하고 우아한 취향이 깊고, 셋째 작가의 표현은 정묘하며, 네째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이 있다. 다섯째 작가의 작품은 고급 위스키의 맛과 같고, 여섯째 작가의 것은 향기 그윽한 술과 같다고 느꼈다고 하자. 이럴 때 그 사람의 감상력이 참된 것인 한, 이런 작가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공언하기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광범위한 독서의 경력을 쌓음으로써만 비로소 정밀, 원숙, 강인, 힘, 광채, 신랄, 섬미, 매력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적절한 경험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풍미를 모조리 다 맛보게 되면 한 권의 핸드북을 읽지 않더라도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 연구가의 첫째 법칙은 여러 가지 풍미를 맛본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풍미는 고요하고 쾌활하며 원숙된 맛이지만, 작가로서 이 경지에 도달하기란 무엇보다도 어렵다. 고요함과 무미하고 단조로움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 밖에 안된다. 사상에 깊이가 없고, 독창성이 결여된 작가는 평범한 문체로 하려다가 결국 무미하고 단조롭게 되어 버리고 만다. 신선한 물고기만이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즙으로 요리될 수 있는 것이다. 신선하지 못한 물고기는 안초비 소오스니 후추니 겨자로 맛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조미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맛이 나는 것이다. 뛰어난 작가는 분도 연지도 바르지 않고 직접 황제를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양귀비의 동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후궁의 다른 미인들에게는 모두 분과 연지가 있어야 한다. 감히 평범한 영문을 쓰려고 하는 작가가 매우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7. 문체와 사상에 대하여
문장이 좋고 나쁘고는 아름다움과 풍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무엇을 아름다움이라고 하는가. 그 법칙은 있을 수 없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파이프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또는 산마루에서 솟아오르는 구름처럼 멀리 희미하게 나타난다. 가장 좋은 문체는 소동파의 그것처럼 <행운 유수(구름이 흐르듯 물이 흘러가듯)>다. 문체는 언어, 사상, 인격이 모두 합쳐진 합성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어만으로 되어 있는 문체라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뚜렷한 사상이 뚜렷하지 못한 말로 싸여 있는 예는 거의 없다. 뚜렷하지 못한 사상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한 문체는 분명히 뚜렷하지 못하다. 뚜렷하지 못한 말로 표현된 뚜렷한 사상은 고집스러워 고쳐 줄 수 없는 독신자의 문체다. 아내에게 아무런 설명도 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임마누엘 칸트와 같다. 사무엘 버틀러까지도 때로는 꽤 이상야릇한 말을 하고 있다. 문체는 언제나 그 <문학의 연인>의 감화를 받는다. 사고법이나 표현법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더욱 더 연인을 닮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초심자가 문체를 수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후년에 이르면 자기를 발견하는 것에 의하여 자기의 문체를 발견한다. 독자가 저자를 싫어하면 그 저서에서 배우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러한 일을 잊지 마시라! 인간의 성질에는 천성적인 것도 있다. 문체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다른 부분은 여러 가지가 섞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혼이 있을 리 없다. 언제까지 지나도 무정란이다. 화분이 생기지 않는 암술이다. 좋아하는 작가 즉 문학상의 여인은 혼의 화분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다. 없는 것은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인생의 그림이나 도회지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뉴욕이나 파리의 사진은 보지만 진짜 뉴욕이나 파리를 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 똑똑한 사람은 책과 더불어 인생 그 자체를 읽는다. 우주는 한 권의 큰 책이다.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학교다. 뛰어난 독자는 저자를 뒤집어 놓는다. 거지가 이를 찾느라고 저고리를 뒤집는 것처럼. 어떠한 문제거나 그것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그 문제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책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취하면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반대 입장의 책을 읽어 두면 찬성하는 입장의 책을 읽는 마음의 준비가 한층 잘 정돈되기 때문이다. 비평적인 정신을 기르는 방법은 이것이다. 작가는 언제나 말로서의 말에는 본능적인 흥미를 갖는다. 모든 말에는 보통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는 생명과 인격이 담겨 있다. 다만 콘사이스 옥스퍼드 또는 포켓 옥스퍼드 사전만은 예외로 하고. 좋은 사전은 P. O. D.(포켓 옥스퍼드 사전)처럼 언제라도 읽을 수 있는 사전이다. 말의 광산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새 것과 헌 것과 헌 광산은 책 속에 있고, 새 광산은 일반 용어 속에 있다. 2류즘 되는 예술가는 한 광산을 파겠지만 1류 예술가에 한하여 새로운 광산에서 무엇인가를 파낼 수가 있다. 헌 광산의 광석은 벌써 정련되어 있지만 새로운 광산의 광석은 아직도 정련되어 있지 않다.
왕충(기원 27 - 100년)은 <전문가>와 <학자>를 구별하였고 또 <작가>와 <사상가>를 구별했다. 전문가는 그 지식의 범위가 넓어졌을 때 학자로 진급되고, 작가는 그 예지가 깊어졌을 때 사상가로 진급한다. 그런데 <학자>의 저작은 다른 학자들로부터 빌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인용하는 원전이나 출전이 많을수록 <학자>답게 보인다. 사상가의 저작은 자신의 뱃속의 관념으로 되어 있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자기의 장액에 의존한다. 학자는 입으로 먹는 것을 다시 배앝아서 새끼를 먹여 기르는 갈가마귀와 같은 것이다. 사상가는 뽕잎이 아니라 비단을 배앝는 누에와 같은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관념을 임신하는 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출생하기 전에 태아가 자궁 내에서 임신 기간을 지나는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가 자기의 혼에 불을 켜고, 산 관념의 흐름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은 곧 <수태>다. 그 관념이 임신 기간을 지나기 전에 인쇄를 서두르는 것은 설사이지 진통은 아니다. 작가가 양심을 팔고, 신념에 위반되는 글을 쓴다면 그것은 인공 유산이며 태아는 틀림없이 사산되고 만다. 소나기처럼 격렬한 경련을 머리에 느끼고, 그 상념을 배앝아 버리기 전에는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며 종이 위에 쓰기 시작해야만 비로소 안심이 된다면 그것은 문예적 탄생이다. 따라서 작가는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문예적 소산에 모성애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것일 때에 훌륭하게 생각되고, 여자는 남의 아내일 때가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펜은 화공의 송곳처럼 쓰면 쓸수록 날카로와지고, 점점 수놓는 바늘처럼 예리해진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사상은 더욱 더 원숙해 간다. 마치 낮은 산에서 높은 봉우리로 오르면서 바라보는 경치와도 같이. 작가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에 대한 통렬한 논란을 퍼부을 생각으로 붓을 들려고 생각하고 있어도, 만일 아직 그 사람의 좋은 반면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붓을 놓아야 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그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A. 자기 표현파 16세기 끝 무렵 원 3형제(원이라 함은 명의 원송도, 원굉도, 원중도의 3형제)에 의해 창시된 이른바 <성령파>,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공안파(공안은 3형제의 고향)는 자기 표현파다. 성은 <개성>을 의미하고, 영은 사람의 <혼>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저술은 자기의 천성, 품격의 표현, 또는 그 생명력의 약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천래의 신흥>이란 이 생명력의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혈액 속의 호르몬의 과잉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 늙은 스승을 대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옛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옛사람의 생명력의 흐름을 찬찬히 본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생명력의 흐름이 메말라서 윤기가 없거나 그 정신이 비열하면 아무리 훌륭한 서예가나 문장가의 작품도, 정신 다시 말해서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 <천래의 신흥>은 즐거운 꿈을 꾸면서 깊이 잠들고, 아침이 되어 저절로 잠이 깼을 때 솟아나오는 것이다. 아침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신문을 읽는다. 마음을 산란하게 할 만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천천히 서재로 발걸음을 옮겨 밝은 창문 앞의 깨끗한 책상을 대하고 앉는다. 창밖에는 명쾌한 햇빛이 빛나고 바람은 고요하다. 이러한 한때 좋은 수필, 좋은 시, 좋은 편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좋은 평을 쓸 수 있다.
<자아> 또는 <인격>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사지, 근육, 신경, 이성, 감정, 교양, 이해력, 경험, 편견 따위가 한묶음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도 있고, 교양에 의한 것도 있으며, 선천적인 것도 있고, 갈고 닦음에 의한 것도 있다. 사람의 성질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벌써 결정되어 있다. 아니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이 잔인하고 비열하며, 또 어떤 사람은 천성이 쾌활하고 솔직하며, 직정, 인협, 관후하며, 또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나약하거나 근심꾸러기이다. 이러한 자질은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훌륭한 교사, 아무리 현명한 어버이라 할지라도 인격의 형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자질은 태어난 뒤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사상, 관념, 인상은 다종다양한 원천과 생애의 각 시기의 갖가지 영향에서 생기는 것인 한 관념, 편견, 사물의 관찰법, 사고법은 심한 혼란과 모순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은 개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를 무서워 한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개를 무서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격의 형을 연구하는 것은 모든 과학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이다.
자기 표현파는 본인에게 참된 사상과 감정, 즉 거짓 없는 사랑, 거짓 없는 미움, 거짓 없는 두려움, 거짓 없는 취미만을 문장에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좋은 것만을 내놓고 나쁜 것은 숨기는 따위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옛날의 성현이나 현대의 권위자의 설과 모순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자기 표현파의 작가는 한 작품 가운데서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향을 사랑하고 그 향 중에서 가장 특징 있는 문장을 사랑하며, 문장 중에서 가장 특징 있는 표현을 사랑한다. 하나의 장면, 감정,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자신이 본 그대로의 장면, 자신이 느낀 그대로의 감정, 자신이 해석한 그대로의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이 법칙에 들어맞는 것은 문학이며 들어맞지 않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홍루몽> 속에 나오는 소녀 임대옥은 <시인이 좋은 구를 얻었을 때는 운이 이제까지의 형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그런 것에 구애되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자기 표현파의 하나일까? 자기 표현파는 거짓 없는 감정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자연 꾸밈이 많은 문체를 경멸한다. 따라서 문장의 순수하고 온화한 풍미를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사달이기(문장의 유일한 목적은 표현에 있다)>라고 한 맹자의 금언을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파의 위험은 작가의 문체가 단조로와지는 것(원중랑이 그러하다), 관념이 이상한 것에 치우치는 것(김성탄이 그러하다), 또는 그 관념이 권위 있는 기성 관념과 몹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이탁오가 그러하다). 자기 표현파가 매우 유가의 미움을 사게 된 까닭도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중국의 사상과 문학을 그 절대적 획일주의와 죽음에서 건져낸 것은 이러한 독창적인 작가들이었다. 이제부터 앞으로 수십 년 뒤에는 중국도 반드시 그들의 천하가 될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정통파 문학은 분명히 성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로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죽었다. 성령파 문학은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로 자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 있다.
이 파의 작가에게는 긍지와 독존의 기풍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본래의 도를 떠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공자, 맹자가 그들에게 동의하고, 그들의 양심까지도 승인하였다고 하면 굳이 자기의 도를 떠나서 성현에 반대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이 승인하지 않으면 공자, 맹자에게도 감히 도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황금의 유혹에도 동하지 않고, 추방의 위협에도 꿈쩍도 않을 사람들이다. 진정한 문학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경이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시력이 건전하고 또렷한 사람은 언제나 모두가 이 경이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기 위하여 진실을 일그러뜨릴 필요는 없다. 이 파의 작가의 관념, 사물의 관찰법이 언제나 새롭고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독자가 비뚤어진 시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약점은 성령파 비평가가 사랑하는 점이다. 성령파 작가는 옛사람이나 현대인을 흉내내는 것, 문학의 기법 법칙에 다같이 반대하였다. 원 형제는 <입이나 손목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좋은 모양이 된다>는 것을 믿었고, <문학의 요는 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입 옹은 <문학의 요는 매력과 흥미>라고 믿고 있었다. 원매는 <문학에는 기법이 없다>라고 믿고 있었다. 송나라 첫무렵의 작가 황산곡은 <문장의 행과 형은 벌레가 파먹은 나무의 구멍처럼 전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B. 모든 것을 다 터놓은 문체에 대하여 탁 터놓은 문체의 작가는 너그러운 기분으로 말을 한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는다. 그러므로 무장하고 있지 않다.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는 엄격한 교장과 학생과 같은 관계여서는 안된다. 모름지기 친한 친구끼리의 관계여야만 한다. 이래야 비로소 온정미가 생기게 된다. 자기의 작품에서 <나>를 쓰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단연코 좋은 작가는 될 수 없다. 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보다는 거짓말장이를 사랑한다. 거짓말장이도 빈틈없고 조심성 있는 거짓말보다 경솔한 거짓말장이가 더 좋다. 그 경솔함은 그가 독자를 사랑하고 있는 증거다. 나는 경솔한 바보를 신용하고 법률가를 의심한다. 경솔한 바보는 국가의 가장 큰 외교관이다. 그는 민중의 마음을 잡는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좋은 잡지는 한 주일 걸려 발행하는 잡지다. 2주간에 한 번 조그마한 방에 좋은 좌담가 한 무리를 모아 놓고 함께 이야기하게 한다. 독자에게는 그것을 옆에서 듣게 하고, 좌담회는 대개 두 시간 정도로 끝마치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즐거운 야화에 열중하는 것과 같아서, 그것이 끝나면 독자는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아침 잠을 깨어 어떤 사람은 은행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회계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학생에게 게시문을 내붙이는 교장으로서 각자의 일터로 나가는 것인데, 어젯밤의 환담의 향기는 아직도 뺨 근처에 떠돌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이다. 금테를 두른 거울이 있는 큰 방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하는 요정도 있고, 또 몇몇 사람의 주연에 맞도록 꾸며진 술집도 있다. 두서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조촐한 주연을 베푸는 것으로 나의 소망은 충분히 족하다. 부귀와 권세 있는 집의 큰 주연에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조촐한 음식집에서 마시고 먹고 떠들고 상대편을 야유하고 술잔을 뒤집어 엎고 옷을 버리거나 하는 재미도 큰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아아, 그때 그토록 즐거운 일이 있었지> 하는 즐거운 추억도 없다. 세상에는 부호의 정원이나 저택도 있고, 산속의 한 간짜리 오막살이도 있다. 산속의 오막살이라 해도 때로는 취미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갖춘 집도 있기는 하지만 분위기 그 자체는 요란하게 채색한 집에 한 무리의 하인들이 주욱 늘어선 부잣집과는 전혀 다르다. 안에 들어가도 충성된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점잔을 빼는 집사나 문지기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떠날 때도 문밖에 있는 한쌍의 <음란한 돌사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정경은 17세기의 한 작가에 의하여 역력히 묘사되어 있다. <주, 정, 장, 주의 모든 학자가 복희당에 자리를 함께 하여 머리 숙여 절을 나누고 있다. 그 자리에 난데없이 소동파와 동방삭이 신도 신지 않고 절반 벌거벗은 채로 뛰어 들어온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면서 농을 걸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아마도 어이가 없겠지만 이 두 고매한 선비의 마음과 마음은 서로 통해 있다!>
C.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아름다움, 사물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리는 것은 변화와 움직임에 딸려 있는 수가 많다. 즉 생명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서 있다. 생명있는 것에는 언제나 변화와 움직임이 있으며, 변화와 움직임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아름다움이 갖추어진다. 산간의 절벽, 골짜기, 계류에는 운하 따위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멋대로이며 호탕한 아름다움이 있다. 더군다나 그것은 건축가의 계산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보면 문학 문장에 일정한 법칙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별자리는 천문, 즉 하늘의 문학이다. 명산대강은 땅의 문학, 즉 대지의 문학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의 모양이 변하면 거기에 비단무늬가 생긴다.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거기에 소슬한 가을빛이 나타난다. 푸른 하늘의 궤도를 도는 별은 지상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관상하고 있다는 것을 머릿속에 둔 일이 있을까. 더구나 큰개좌와 견우성은 가끔 가다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이다. 지각은 신축이 무상하여 높은 산을 밀어 올리고 깊은 바다를 뚫는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에게 숭배하게 하려고 오악을 만든 것일까, 더구나 태산이나 화산이나 곤륜산은 웅혼한 리듬을 가지고 우뚝 솟아 있고, 옥녀나 선동 같은 묏부리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장엄하게 솟아 있어,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거장인 창조주의 분방하고 자재로운 한 번의 솔질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산꼭대기에서 솟아올라 거세게 부는 산바람의 돌격을 만난 구름에게, 인간에게 보이려고 바지나 목도리에 마음을 쓸 겨를이 있겠는가. 더우기 구름은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 어떤 때는 고기 비늘이 되고, 어떤 때는 비단 무늬를 그려내고, 어떤 때는 쏜살같이 달리는 개 같고, 어떤 때는 포효하는 사자로 변하고, 어떤 때는 춤추는 불사조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뛰어다니는 외뿔짐승의 모습으로 변한다. 정말로 시문의 신품을 연상케 한다. 춥고 더운 고난과 서리의 침해를 몸에 느끼고 호흡을 맞추어 정력을 보존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가을 나무에게 옛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고 분과 연지로 치장할 겨를이 있겠는가. 더구나 나무들은 차갑고 해맑으며 적막감을 주며, 그 풍취는 왕유나 미불의 그림보다 훨씬 낫다.
이렇듯 우주 사이의 산물에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마른 덩굴의 아름다움은 왕희지의 글씨보다 위대하다. 준엄하고 날카로운 절벽은 장맹룡의 묘비명보다 웅혼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문, 즉 예술미는 그 천성에서 나오고, 그 천성을 다하는 자는 문, 즉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 즉 선과 형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며, 결코 밖에서 온 것은 아니다. 말의 발굽은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범의 발톱은 짐승을 덮쳐 누를 수 있도록, 학의 다리는 늪이나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곰의 발은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말이나 범이나 학이나 곰은 형태나 균형이 잡혀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생활의 기능을 다하고, 운동에 적합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동물이 하려고 하는 모두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말의 발굽, 범의 발톱, 학의 다리, 곰의 발 등은 그 완전히 갖추어진 외형에도, 힘의 암시에도, 선의 섬세함과 강함에도, 선명한 윤곽에도, 또는 그 불끈 솟아오른 관절에도 훌륭한 아름다움이 있다. 또 코끼리의 발은 예서와 같고, 사자의 갈기는 비백과 같으며, 싸우는 뱀은 보기 좋게 구불구불 구부러진 초서를 쓰고, 날으는 용은 진서를 쓰고, 소의 다리는 팔분을 연상케 하고, 사슴은 소해를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동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세와 움직임에서 생기고 자태는 몸의 기능의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문장미의 비결이기도 하다. 운동의 힘, 즉 자세에 필요한 것은 문장에서도 억제해서는 안되고, 자세나 운동에 필요가 없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문의 걸작은 자연 그 자체의 운동과 같은 것이어서 모양이 없으면서 모양이 있고, 매력과 아름다움은 스스로 갖추어진다. 힘이라는 것은 동태미이지 균제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것에는 모두 이 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있고, 글이 있다. 즉 형과 선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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