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21. 피히테 - 자유를 위한 반란
1801년 '프리드리히 니콜라이의 생애와 별난 견해'라는 제목의 기이한 반박문이 발표된다. 이 반박문의 대상은 바로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일반 독일 문고"의 편집인이고 많은 책을 발표한 저술가이자 계몽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 반대하여 씌어진 이 글은 니콜라이의 생애와 견해를 엄밀한 철학적 방법에 의해 단 하나의 원칙에서 도출해 내려는 진기한 시도를 하였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올바르고 유용한 것은 모두 생각해 냈고,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올바르지 않고 유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요 명제"에 대한 반박도"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로 시작되며, 그로써 문제는 완전히 결정되어 버린 것이었다.
반박문은 악의에 찬 풍자로 니콜라이의 자서전과 저서를 언급하면서 그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갓난 아기의 최초의 울음소리가 저술가의 세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세계의 모든 죄인을 전율하게 만들었을 때, 그리고 이미 이 아기의 기저귀가, 그가 그 이후 불후의 명언으로 내뿜어 휘두를 세련된 익살의 향기를 풍기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이 아기가 커서 무엇이 될꼬? 하고 한결같이 경탄하며 말하였다." 이 책은 니콜라이가 괴테와 실러, 칸트, 피히테, 셀링 등과 관련하여 어떻게 "그들의 그럴 듯해 보이는 예술 작품과 발견이 결코 아무것도 아님을" 증명하고 있나를 기술하고 있다. 니콜라이는 이렇게 굳게 확신하고 있을 정도이다. "나는 우리 시대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정신 세계가 풍부하고 가장 멋있는 사람이다." 아니, "나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최초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포괄적인 철학자이다." 마지막에 가서도 "자신의 작품의 불후의 가치를 경건하게 신뢰하면서" 세상을 떠난다. 반박문은 계속해서, 니콜라이의 이 그로테스크한 자만심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대답은 이러하다. "경박한 지혜"와 "천박한 학식", "무궁 무진한 수다와 그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나 다 비꼬아 버리는 교묘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니콜라이는 "타고난 돌대가리"이며 "배워먹지 못한 야비한 수다쟁이"이고 "보기 드문 진기한 것을 갖고 뒤죽박죽 잡동사니 속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학식"의 소유자이다. "그에게 입 놀리는 것말고 도대체 제대로된 인간적인 면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더욱 분격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18세기의 문학적 스컹크와 독사가 되기로 운명 지워진 우리의 영웅은 주변에 악취를 풍기고 독소를 내뿜는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개에게 말하고 쓰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떤 개라고 할지라도 니콜라이의 뻔뻔스러움과 니콜라이의 인생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영웅처럼 훌륭한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끝에 가서는 니콜라이의 저서에 최후의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고 있다.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저서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진부한 것과 하찮은 것-하찮은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스스로 알아차리기 시작한다-을 기묘하게 요리 조리 돌리고 비트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 위해서이다."
이 무자비한 반박문의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면 일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이다. 저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의 저자이자 ''지식학'을 명철하게 사유해 낸 사람이고, 철학적 정신을 가장 훌륭하게 창조해 낸 사람이며, '복된 삶으로의 안내'를 저술한 아주 심오한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진지한 철학자가 어떻게 그다지도 무지막지한 비방을 퍼부을 수 있을까? 철학함을 고요한 적막 속에 잠겨 완전한 평온 가운데서 사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철학함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이중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계로 나와 현실을 변형 시키려는 충동 속에 실재에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근세의 철학자들 어느 누구보다 피히테에게서 가장 힘차게 분출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학자라는 직업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생각만 할 수는 없다. 나는 행동하고자 한다." "나는 원대하고 열렬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 나의 자부심은 행위의 업적을 통해 인류 안에서의 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며, 나의 실존을 인류와 전 정신 세계에 영원히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명서, 반박문, 호소문, 연설 등을 작성해 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에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주제에 대한 반박문 중 하나는 '유럽 왕들에게서 지금까지 그들이 억눌러 왔던 사상의 자유를 반환 청구'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자신의 진리에로 전향시키려고 하였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를 여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자 다음과 같은 과감한 부제의 책을 저술한다. 그것은 (태양처럼 자명한 보고서 ...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었다.
피히테의 개인적 영향력 역시 대단했다. 이에 대해 그의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보고 하고 있다. "그가 말을 멋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말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 그의 근본 주장은 강력했고 인간성에 의해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도전을 받을라치면 더욱 격렬해졌다. 그의 정신은 쉴새없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갈망했다 그래서 그의 공개 강연은 매번 불꽃을 튕기는 뇌우처럼 폭발적이었다. 그는 영혼을 고양시켰으며, 또한 선한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그의 눈길은 엄격했고 걸음걸이는 거만했다. 자신의 철학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정신을 주도해 나가려고 했다. 상상력은 펄펄 끓어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표현력은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과감하고 원대했다. 그는 대상의 가장 깊숙한 심연으로 파고 들어가서 개념의 왕국을 마음대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이것은 그가 비가시적인 세계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행동하려는 이러한 강력한 의지에서 피히테가 주위 세계를 다루는 강력한 힘이 자라나 온다. 그는 "전광 석화"처럼 이야기한다. 그는 언제나 싸움에 휘말려 있다. 반대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앞서 착한 니콜라이에게 했듯이 그렇게 화가 나서 욕을 퍼부어 댄다. 동시대의 슈미트라는 이름의 한 선량한 사람에게 했듯이 존재조차 박탈하려 한다. "나는 철학자로서의 슈미트 씨란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선언한다 "이 모든 행동을 피히테는 잔인한 즐거움으로 행했다. "레싱식의 불화를 다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에게 도전해 오라! 나는 선술집에서 개와 싸우는 것보다는 더 진지하게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재미삼아 ... 한 사람을 뒤흔들어 놓아 다른 사람의 흥미를 망쳐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라서 유명한 법률가인 안셀무스 포이에르 바하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고 해서 전혀 이상하게 생각 할 것 없다. "피히테와 다투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어떠한 반대도 참지 못하고, 그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모든 반대자를 자신의 인격의 반대자로 간주하는 다루기 어려운 동물이다. 나는 그가 마호메트 시대에 살았더라면 마호메트와 도박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의 강단이 왕좌였다면 '그는 칼과 교도소로 지식학을 도입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이 철학자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투쟁자로서의 피히테는 한편으로는 통찰을 위해 조용하게 열심히 몰두하여 노력하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단 하나의 정열을, 단 하나의 욕망을, 나 자신에 대한 단 하나의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사변적인 생활에 대한 자신의 확고 부동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학문에 대한 사랑, 특히나 사변에 대한 사랑은, 그것이 사람들을 일단 사로잡기만 하면 그로 하여금 조용히 그 학문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만일 내가 나 이전의 몇 세기의 삶을 보았더라면, 이미 지금쯤은 나의 삶을 완전히 나의 경향에 맞추어, 혁명을 위해서는 한 시간의 여유도 돌아가지 않도록 시간을 배당했으리라." 마침내 피히테는 "영원을 향한 갈망"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흘러가 버리지 않는 영원한 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에로 녹아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은 모든 유한한 존재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가장 깊은 뿌리이다. ... 영원한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위를 감돌며 자신을 우리에게 내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을 붙잡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행동도 할 것이 없다." 이렇게 모순투성이의 인간이 변화 없는 단조롭고 평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피히테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인생은 끊임없는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1762년 오베라우짓츠의 한 작은 도시에서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가 처음 해본 일은 가축을 지키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때 이미 그가 자기의 채찍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거위에게 지배자로서의 쾌감을 느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가정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는 하나의 교훈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어느 일요일 정오경에 영주가 그 마을에 오게 되었는데, 그는 목사의 설교를 놓치게 된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이때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거위지기 피히테가 설교를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외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실제로 어린 피히테는 말과 억양, 제스처까지 완벽하게 목사의 흉내를 냈다. 이에 놀란 영주는 이 거위지기를 자기가 맡아 교육시키기로 결심했다. 영주의 결심이 결국철학 세계에 피히테라는 인물을 선사하게 된 셈이다. 피히테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예나 대학에 다닐 때쯤 해서는 다시 경제적 상태가 어려워졌다. 귀족 후견인이 죽고 나자 상속인들은 그의 예술 애호가적인 돌발 행위를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피히테는 장학금을 얻으려고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시간제 과외로 어렵사리 견뎌 나가야만 했다. 피히테는 취리히의 가정 교사 자리를 얻어 이 비참한 생활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어린이를 교육시키기 이전에 먼저 부모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가장 눈에 띄는 교육적 과오에 대한 일기"를 써서 자기 학생의 부모로 하여금 그 책을 매주마다 읽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 부모가 즐겁게 이 책을 매주 읽지 않고, 드디어는 가정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 강압적이고 도발적인 교육가의 오만한 위협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히테는 물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형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처음부터 고집불통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드디어 내가 그들을 몰아 붙이고 그들로 하여금 나를 존경하도록 위압적인 방법으로 강요했을 때, 나는 이미 나의 퇴직을 선언한 셈이었습니다. 그것을 번복시키기에는 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였고 그들의 두려움은 너무 컸습니다."
어쨌든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취리히는 피히테에게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피히테는 사랑에 빠지고 약혼을 하게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도 물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한편으로 불타는 듯한 열정으로 지를 쓸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여 폭발할 것만 같은 나의 이 불타는 열정을 그대로 당신에게 퍼부을 수만 있다면!" 그는 애인을 위해 시를 짓기까지 하였다. 물론 단 한 편이긴 했지만-그가 고백하듯이-시 한 구절을 쓸 때마다 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주저하면서 형에게 이렇게 쓴다. 나는 "내 안에서 너무나 많은 활력과 욕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흡사 날개가 잘려 버리고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굴레를 지게 되는 것이나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그의 약혼녀가 워낙 양순해서 피히테의 모든 교육적 지시를 공손하게 따랐기 때문에 마침내 피히테는 그래도 결혼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가정 교사 일이 끝나자 피히테는 부득이 취리히를 떠나야 했다. 그는 라이프치히로 가서 약간은 진기한 방법으로 생활비도 벌고 유명해 지려고 한다 교육 방면에서 그렇게도 분명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는 왕자의 선생이 되려고 했다. 이 일이 성사가 안되자-추측컨대 자신의 약혼에 자극 받아서-"여성 교양 잡지"를 발행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어떤 출판업자도 피히테 같은 사람에게 곧바로 그와 같은 일을 맡기는 모험을 감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극과 단편 소설을 써 보기도 하지만 피히테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처럼 많은 실패를 겪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를 구출해 준다. 이 우연한 사건은 그를 그의 기질의 다른 면, 즉 조용한 면으로 이끌어 가서 그의 전 생애를 결정짓는다. 바로 한 대학생이 그에게 칸트 철학을 가르치는 개인 교사가 되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당시의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알게된다. 얼마나 이 사건이 그를 감동시켰는지,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주 원대한 계획을 품고 취리히를 떠났다. ... 그러나 짧은 기간에 그 모든 희망은 좌절되어 버렸고 나는 거의 자포 자기에 빠졌다. 나는 절망 속에 칸트 철학에 몰두했다. ... 그의 철학은 마음을 고양시키는가 하면 지독한 두통거리이기도 했다. 나는 칸트 철학에서 마음과 몸 모두를 가득 채우는 작업을 발견한 셈이다. 나의 광포한, 길길이 뛰던 정신은 잠잠해졌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체험해 온 나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빵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뛰어다녀야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아마도 이 넓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외적인 궁핍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히테는 라이프치히에서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고, 마침내는 가정 교사 자리를 하나 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바르샤바였다. 그러나 다시 취리히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는 자기 학생의 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바르샤바에서는 적어도 한 가지 좋은 일은 생겼다. 그가 떠나올 때 적지 않은 보상금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 보상금 덕분에 그는 먼발치에서 존경해 온 쾨니히스베르크의 칸트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칸트는-분명 피히테는 어지간히 요란하게 그에게 접근해 갔을 것이다-처음에는 매우 말을 않고 삼가고 있다가 주저주저하면서 화를 낼 때에만 입을 열었다. 새롭게 생긴 돈은 금방 바닥이 났다. 칸트에게 돈을 빌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뜻밖의 행운이 굴러 들어와서 덕분에 이 폭풍우 같은 사나이의 생활은 풍족해진다. 피히테는 4주에 걸쳐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적 시도"라는 책을 썼다. 칸트는 이 원고를 칭찬하고 출판업자에게 추천하였다. 이 출판업자는 실수로 저자의 이름을 빼 놓은 채 그 책을 출간하였다. 그러자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책을 늙은 칸트가 썼다고 간주하였다. 사람들은 그 당시 바로 그와 같은 주제의 글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가장 유명한 학술 기관지인 '예나의 일반평론 잡지'조차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러므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인류를 위해 불후의 공헌을 세운 그 작품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이 작품의 고상한 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후 저자가 칸트가 아니라 피히테임이 밝혀졌을 때, 그렇다고 이 저서의 명성이 퇴색해 버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피히테는 이제 칸트에게나 어울릴 정도의 책의 저자로 간주되었다.
그 후 피히테는 전격적으로 대학의 교수 초빙을 받는데, 바로 예나 대학이다.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학생들이 그의 강의에 쇄도하였다. 그러나 곧 그의 공격적인 기질이 그를 새로운 어려움에 빠지게 하였다. 그는 눈꼴사나운 방자함에 빠져 있는 학생 단체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그들은 뛰어난 검투사로서의 공적 외에는 아무런 공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학생들이 그의 강의 시간에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히테의 부인을 대로상에서 모욕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무기, 즉 돌멩이로 교수의 창문 유리를 깨뜨려 버렸다. 피히테는 말할 것도 없이 노발대발하였다. "나는 내가 가장 흉악한 범죄자보다 더 나쁘게 대접받고 있음을 알았다. 못된 젊은이들의 무엄 때문에 나와 나의 재산을 포기해야 함을 알았다." 그렇지만 동료 교수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워 대응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즉 "어느 교수의 창문이 자주 깨지는 것은 그 교수의 성실함에 대한 가장 명예로운 증거일 것이다." 바이마르의 문교 장관인 괴테는 한술 더 떠서 아주 풍자적으로 피히테의 자아에 대한 이론-자아는 절대적인 주권으로 세계를, 즉 비자아를 정립한다-을 끌어들여 이렇게 썼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적 자아가 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 자아는 사람들이 정립한 비자아에 의해, 돌조각에 의해 몹시 무례하게 깨져 버릴 수가 있다. 그는 만물의 창조주와 보존자처럼-신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듯이-그의 피조물로 인해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의 더 복잡한 사건이 터지자 그때는 괴테 자신이 개입하여 무마시킨다. 피히테의 제자 한 사람이 논문을 썼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독립적인 종교란 없고 모든 믿음은 순전히 도덕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피히테는 이 논문을 출간시켰다. 하지만 이 제자가 이끌어 낸 그 극단적인 결론을 약간은 약화시키려고 그러한 내용이 담긴 자신의 논문을 그 책에다 첨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반박문이 피히테와 그의 제자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하였다. 사태는 금세 확대되었다. 작센 지방의 행정부는 자기 지방의 학생들을 더 이상 예나에서 공부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사람들은 이 싸움을 좀더 좋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나 대학의 동료 교수인 실러와 괴테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피히테의 고집이 일을 그르치게 하였다. 그는 굴복하느니 차라리 "용감하게 밀고 나간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견책하려 하자 그는 문교부에 협박 편지를 보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오히려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점에 대하여 작센의 영주보다 더 관대한 군주가 있었다. 피히테가 새로운 활동 무대를 구하기 위해 베를린에 갔을 때, 경찰이 이 수상한 인물의 체류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때, 프로이센 왕은 이렇게 지시했다. "그가 자비로운 하느님을 적대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일이 사실이라면, 이제 자비로운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관대하게 대해 주는 것에 힘입어 피히테는 베를린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강연을 하다가 드디어는 곧 창립된 베를린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여기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철학 강의의 명석함과 심오함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도적인 정치인과 지식인도 매료당했다. 다만 프로이센 아카데미만이 그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이로 인해 유명한 의사 후페란트는, 아카데미 철학위원회는 피히테가 바로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심술궂은 말을 했다.
베를린에서도 피히테는 그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눈앞에 보면서 자신의 활동을 철학 교수직에 국한시킬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제 그의 의도는 철학으로 하여금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가지고 프로이센 국가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노력에 결정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물론 그의 이러한 협력에 대해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일종의 세속적인 종군 목사로서 군대와 함께 행군하며 "전쟁 지도자를 신의 품안에 잠재울" 의도를 갖고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왕은 청원을 거절하고 피히테를 위로하여 "아마도 그의 웅변술이 승리를 위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히테는 평화 조약 체결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간호원 일을 돕던 그의 부인이 열병에 걸렸다. 그녀는 다시 건강을 회복했지만 피히테가 전염되었다. 그는 1814년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렇게 정열적으로 행동에 뛰어들면서도 동시에 생각 속에 파묻혀 버리기를 좋아하는 이 사람의 생애와 사람됨을 눈앞에 그려 볼 때, 그의 철학함이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듯 단호하게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에게는 행위가, 활동적인 자아가 철학적 구상 속에서도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그토록 내면적으로 침잠해 사색하는 사람에게는 현실의 고요한 비밀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피히테의 철학함은 그런 상태에 있다. 그것은 절대적 행위의 사상과 더불어 시작되어, 활동하는 자아가 신성의 심연 속에 가라앉음으로써 끝이 난다.
첫번째의 주제와 관련해서 피히테는 처음에는 칸트를 따른다 칸트는 인간의 본질이 자유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 자유를 무조건적인 의무와 도덕률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히테에게도 자유의 사상을 불러일으키며 양심 속에서 자신을 알려 오는 도덕의 요청이 있다. 인간의 근본 본질로서의 이러한 자기 자신을 착신하는 자유가 바로 피히테의 전체 사유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추어져 있는 본질을 깊이 생각하게 됨에 따라 그는 칸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이 이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피히테는 칸트의 개념에 모순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자아는 분명 그의 본질적 근거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칸트는 동시에 자아를 극히 제한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특히 자아가 인식하며 활동하는 곳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얽매여 있다. 그렇다고 비록 소박하게 생각하듯이 인식의 역할이 현상하는 사물에 얽매여 단지 모사하는 데만 국한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칸트는 오히려 인식에서 주체의 자발성이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아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에 의거하여 사물에 대한 표상을 완전히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자아는 오히려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 즉 감각 속에서 자신을 알려 오는 "사물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있다. 피히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물 그 자체"에 의한 이러한 식의 제한이 자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유를 인간의 근본 본질로 생각한다면, 자아와 더불어 일어나는 모든 것은, 따라서 인간의 인식조차도 인간의 고유한 행위에 의한 사실이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르게 이해된 자유의 개념으로는 자아 옆에 또 하나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둘 수 없다. 우리에게 세계로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의 총체는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자기 자신 밖에다 세워 놓은 형상일 뿐이다. 그것은 창조적인 자아가 자신의 자유 가운데 기획하고 있는 세계 기획이다. 물론 이러한 세계 형성은 의식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의식된 상태에 앞서서 일어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자아는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외부의 영향에 의존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롭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피히테의 사상은 독일 관념론의 시작을 이룬다. 왜냐하면 관념론의 근본사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곧 단지 관념적인 것만이, 정신적인 것만이, 그의 자유 가운데 있는 자아만 실재한다. 이에 반해 세계의 실재성이란 다만 우리의 표상 안에 주어져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표상마저도 세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산출해 낸 것이다. 이러한 사상 속에서 활동적인 생활의 철학자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실재는 자아의 행위의 산물이 되어 버린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자유로운 행위에로 소급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자유 가운데 있는 자아뿐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 때문에 자아는 절대적 자아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엄청난 사상이다. 이것은 피히테와 같은 정신의 강력함을 간직하고 있는 사상가만이 사유할 수 있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실재를 지배하는 인간의 권력은-이것을 획득하려고 근대의 그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 왔다.-그 극치에 도달한다. 피히테는 물론 인간적 자아를 이렇게 절대적 자아로 끌어올린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했다. 왜냐하면 무제한적이 되어 버린 자아의 자유 앞에서는 모든 실재의 독립성이 용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자아의 절대성은 세계를 침몰시켜 버린다 그런데 이 용해는 더욱더 심화된다. 자유로운 자아도 그것이 피히테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생각될 때는 공허한 자아가 되어 버린다. 자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신도 다른 인간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아 그 자체는 가장 냉혹한 고독 속에 존재해야 한다. 자아는 자유롭다. 그러나 비실재적이 되어 버린 실재 안에서 이러한 자유를 가진들 자아가 무엇을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실재의 절멸 속에서 드디어는 자아마저도 그 자신의 실재성이 빠져나가고 만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단순한 표상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면, 자아만이 유일하게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존재의 소멸이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무엇이 막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자아는 결국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즉 "무에서 무로 쓸데없이 장난하고 있는 제작자"인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단순히 지어 낸 이야기"일 뿐이다. 피히테 자신도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자아는 어디에서건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자아는 결코 존재가 아니다. 자아 자신은 도대체 알지도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자아는 관념이다. 관념만이 거기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들은 자신에 대해 관념의 방식으로 알고 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관념, 스쳐 지나가는 그것에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관념, 관념의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념,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관념, 의미도 목적도 없는 관념, 나 자신도 이러한 관념 중의 하나이다. 아니 나 자신은 그것도 아니고 단지 관념에 대한 혼란한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모든 실재는 하나의 멋있는 꿈으로 변해 버린다. 그것이 꿈꾸고 있는 삶도 없고, 거기에는 꿈꾸는 정신도 없다. 꿈속에서 자기 자신과 연결이 되는, 그러한 꿈속에서 꿈을 꾼다. " 칸트는 "세계와 그리고 이 세계와 더불어 우리 자신까지도 절대적 무 속으로 가라앉히는" 이 극단적 관념론의 섬뜩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피히테의 '지식학'에 관해 이렇게 쓴다. '지식학'은 "나에게는 일종의 괴물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그 괴물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결코 그 괴물을 잡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저 자기 자신을 잡았을 뿐이다 심지어 괴물을 잡으려고 뻗치는 손만을 발견할 뿐이다."
세계와 자아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리는 이 소용돌이에 놀라 피히테는 다시 한번 자유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한다. 그는 자유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자유는 제한 없는 절대성 안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유는 본래적 제한을 발견해야만, 사실일, 그 모든 절대성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유한한 자유로서 이해되어야만 침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피히테는 자아는 그의 근본적인 본질에 .절대적이며 동시에 유한하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그것이 처음에 그렇게 보이듯이, 순수 절대성이 아니다. 인간은 절대성과 유한성의 균열이다. 피히테의 과감한 사상은 분명 순수 절대성을 건드리지만, 여기에 빠져 자신을 망각하지는 않는다. 피히테는 결국 그 안에서 인간성이 침몰해 버리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티탄(거인족) 같은 절대적 자아를 예고하는 예언자는 아니다. 피히테는 가장 철저하게 모순적인 존재인 인간 현존재가 그 안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바로 그 모순을 사유한 사상가이다. 피히테에게 있어 유한성이란 자아가 자기와 똑같은 다른 존재를 자신의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해야만 하는 그 사실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이 비록 사물을 자아의 단순한 표상으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세계 안에는 사물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도 존재한다. 피히테는 다른 사람들을 단순한 표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바로 자유의 사상이 피히테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자유로운 인격을 볼 것을 강요한다. 이래서 피히테는 자유로운 자아와 자아의 창조적인 능력에서 기획 투사된 사물의 세계 외에도 다시 자유로운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로써 그의 사유의 출발은 변경되어야 했다. 이제 더이상 개별화된 자아가 출발점이 아니라 자유로운 본질의 공동체, 즉 "정신의 왕국"이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한 이러한 자유의 제한도 자아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정립하는 데 놓여 있는 위험을 막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그것은 자유가 또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단적으로 결정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은 자유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피히테는 우리의 자유는 일반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때 그때 이미 규정된, 그것도 근본에서 부터 규정된 자유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자유의 근원에는 더 깊은 필연성이 지배하고있다. 피히테는 이제 이 근원적인 필연성의 어둠 속을 더듬어 내려가며 자유의 뿌리에서 숨겨진 것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자유의 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사람은 자유를 뒤에 남겨 두어야만 한다. 자유는 그의 근거에 대한 순수한 지시로 바뀌어야 한다. 자유는 죽음으로써 진정 살아 있는 실재를, 근거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권력의 소멸을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유한성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자유는 오직 죽음을 꿰뚫고 나아가야만 삶에 이른다.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 아무 것도 그를 그의 본질의 폭력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 "자아는 철저하게 소멸되어 버려야 한다." 후기의 피히테는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가장 절박한 과제를 보았고, 또한 그가 극도의 이기심의 시대라고 부른 바로 그의 시대를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렇다고 여겼다. 인간이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위력을 죽여 버리는 것을 감내하게 될 때, 그는 진정 자신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로 자유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유가 자기 자신을 혼자서 끌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근거에서 진정한 절대성, 즉 신성을 보게 된다. "인간이 최고의 자유를 통해 자기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포기하고 상실할 때, 그는 본래의 진정한, 신적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절대적 자아의 자리에 이렇게 절대적 신이 들어선다. 이것은 피히테의 사유에서 위대하고 결정적인 전향이다. 그는 "이제 오직 신만이 있을 뿐이다. 신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되는 것은, 그가"신의 존재와 계시"로서 존재할 때이다.
이러한 후기 피히테의 사상에서 절대적 자아의 독재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그러나 파괴적 붕괴의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조용한 방법으로 자아는 자신의 근원인 신 안에 가라앉아 자기의 자유를 신의 자유 안에 묻어 버린다. "신 안에서의 삶은 신 안에서의 자유로움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반란자인 철학자 피히테의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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