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1장 교양의 즐거움
2. 유희로서의 예술과 품격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창조적인 동시에 오락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서 오락, 즉 순전한 정신적인 유희로서의 예술 편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이건 건축이건 문학이건 불후의 창조적인 제작이라면 온갖 형식의 것을 존중은 하지만, 참된 예술적인 정신은 불후의 걸작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수의 민중이 예술을 오락으로서 즐기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보다 일반화되고, 보다 넓게 보급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전국 경기에 출전하는 소수의 운동 선수나 축구 선수를 길러내는 것보다도, 잘하건 못하건 간에 모든 학생들이 테니스라든가 축구라든가를 하는 편이 중요한 것처럼, 한 나라가 한 사람의 로댕을 낳게 하는 것보다도 모든 어른, 모든 어린이들이 저마다 독자적인 창작을 즐거움으로 삼게 되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 명의 직업적인 예술가가 있는 것보다는 전국 학생들에게 찰흙 공작을 가르치고, 모든 은행장이나 경제 전문가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 수 있게 되도록 하고 싶다. 이것은 하나의 기발한 제안일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즉 온갖 분야에서의 아마추어 주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철학자, 아마추어 시인, 아마추어 사진가, 아마추어 마술사,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는 아마추어 건축가, 아마추어 음악가, 아마추어 삭물학자, 아마추어 비행가 이런 것들이다. 하룻밤 친구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소나티네를 치는 것을 들으면, 일류 전문가의 음악회에 참석한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낀다. 친구들 가운데 아마추어 마술가가 있다면 누구나 무대에서 공연하는 전문가인 마술사보다 그 편을 더 기뻐할 것이고, 어떤 부모건 셰익스피어 극을 보는 것보다는 자기의 자식들이 하는 아마추어 연극을 훨씬 더 기뻐한다.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다. 예술의 참된 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의 그림은 전문적인 화가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학자들의 오락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매우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유희적인 정신이 잃어지지 않았을 때 예술은 비로소 상품화를 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런 이렇다 할 까닭없이 논다. 또한 놀이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유희가 지닌 특징이다. 유희는 그 자신 훌륭한 이유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진화론에 의하여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생존 경쟁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동물에게는 해로운 아름다움의 형식조차도 있다. 이를테면 너무 지나치게 자란 사슴의 뿔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아름답기는 하겠지만 사슴에게 있어서는 귀찮은 것이다. 다아윈은 식물계, 동물계의 아름다움은 자연 도태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웅 도태라는 2차적인 대원리를 들고 나와야만 했다. 예술이란 단지 육체적, 정신적인 정력이 넘쳐 흐르는 과잉된 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자유롭고 아무런 속박도 없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과 예술이 지닌 본질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비난이 많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공식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가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문제이며, 단순히 모든 예술적인 창조의 심리적인 기원에 관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업 예술은 이따금 예술적인 예술은 창조의 정신을 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치적인 창조의 정신을 죽여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자유야말로 예술의 혼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정치적인 예술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총검의 힘으로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마치 창녀에게서 진실된 사랑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정력 과잉으로 말미암은 예술의 육체적인 기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이것은 예술적인 충동 또는 창조적인 충동으로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영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예술가 자신은 그런 충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학자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충동과 마찬가지로 다만 정신적인 긴박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할 도리는 없다. 오늘날 생물학에 대한 지식 덕분에 인간의 정신 생활의 모든 조직은 여러 가지 기관과 그 기관을 지배하는 신경 계통에 작용하는 혈액 속에 있는 호르몬의 증감, 배분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되었다. 노여움이나 두려움조차도 단지 아드레날린의 공급이 어떤가 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천재라는 것 자체도 선분비의 과잉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호르몬이라는 현대적인 지식 따위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의 어느 무명 작가는 온갖 활동의 원동력은 사람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벌레>에 있다는 올바른 추단을 내린 바 있다. 간통은 사람의 창자를 뜯어먹음으로써 욕망을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벌레 때문에 저질러지는 것이다.
야심이나 침략성이나 명예욕이나 권세욕 같은 것도 야망을 이룰 때까지는 그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지 않는 또 다른 벌레 탓이다. 글을 쓴다는 것, 이를테면 소설을 쓰는 것도, 작자를 몰아세워 무슨 인과인지 창작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는 어떤 종류의 벌레 탓인 것 같다. 호르몬인지, 벌레 때문인지,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벌레라고 하는 편이 더 생생한 느낌이 든다. 이 벌레가 너무 많아지면, 아니 보통 분량인 때에는 사람은 무엇이건 창작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정력이 넘치게 되면 보통 때 걷는 방법이 변하여 뛰거나 달리거나 하게 된다. 어른의 정력이 넘치게 되면 걷는 것이 도약이나 무용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무용을 한다는 것은 능률이 나쁜 걸음걸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능률적이 아니라는 말은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아 정력의 낭비가 있다는 뜻이지 심미적인 뜻으로는 아니다. 댄스를 하는 사람은 어느 한 점에 도달하는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을 취하지 않고 왈츠의 음악에 맞추어 원을 그리면서 앞으로 나간다. 사실상 춤추는 동안은 아무도 애국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이념이니 팟쇼나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춤을 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댄스가 가진 유희성과 영광스러운 비능률의 정신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거나 또는 충실한 동지가 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오직 걸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야 한다. 댄스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알고 있지만, 유희의 신성함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더더군다나 문명인들은 다른 온갖 종족에 속하는 동물에 비하여 지나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일이 모자란다는 말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한가한 시간, 오락과 예술을 위한 극히 짧은 시간조차도 국가라는 괴물의 요구 때문에 침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예술의 본질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예술과 도덕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자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자태는 명화나 아름다운 다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에도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그림이나 음악이나 댄스보다도 훨씬 범위가 넓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자태는 경기중인 운동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가 하면, 어린 시절에서, 청년, 장년, 노년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에 알맞은 아름다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휘와 작전이 다같이 잘 되어서 점차로 마지막 승리를 향해 나가는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라는 것은 있는 터이고, 사람의 웃음 속에도, 침을 뱉을 때에도 아름다운 자태는 있다. 중국의 늙은 관리들은 아주 조심해서 침을 뱉도록 훈련되어 있지만 그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온갖 행동에는 자태와 표현이 있고, 온갖 표현의 형식은 예술의 정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기법을 음악이라든가 댄스라든가 그림 따위의 소수의 분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예술을 이같이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좋은 행위의 자태와 좋은 예술의 인격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고, 다같이 중요한 것이 된다. 잘 조화된 시의 운율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운동도 여러 가지 사치스러운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정력이 넘쳐 흐르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지 침착성과 우아함과 자태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된다. 이 침착성과 우아함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는 육체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의식, 즉 어떤 일이고 보통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좀더 추상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게나 이런 아름다움은 있다. 멋진 일, 즉 솜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은 본디 미적인 충동이다. 교묘한 살인, 솜씨 있는 교묘한 음모, 그러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얼른 보기에는 아름답다. 좀더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조그만 하찮은 일 속에도 이런 침착성과 우아함과 능력은 실제로 있다. 또는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생활의 마음 가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이 테두리 안에 속한다. 사람에게 적절하고도 훌륭한 인사를 하면 멋진 인사를 했다는 말을 듣지만, 볼품없는 어설픈 인사를 하면 볼품없는 인사의 말을 듣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말과 생활과 습속에 아름다운 예의를 요구하는 경향은 중국에서는 진조 끝 무렵에 최고도로 발달되었다. 그 무렵은 <청담>이 유행한 시대여서, 부인들의 옷치장에 가장 마음을 썼고, 미남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이름을 떨친 사나이들이 가장 많았던 시대였다. <아름다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크게 유행되었으며, 남자들은 훨씬 품이 넉너한 긴 웃옷을 입고 일부러 몸을 건들건들하면서 멋부려 걸었다. 가운데를 긁으려고 생각하면 온몸 어디에나 손이 닿을 수 있게 옷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엇이건 우아하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 말 총을 다발로 묶어서 자루를 붙인, 모기나 파리를 쫓는 <주>라는 것이 소중한 대화용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한담은 문학 작품 속에서는 <주담>이라고 오늘날도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에 든 <주>를 흔들흔들 우아하게 휘두르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부채도 또한 청담의 아름다운 부속물이 되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부채를 펴기도 하고, 설렁설렁 부치기도 하고, 또는 접거나 하는 폼이 보기에 퍽 아름답다. 마치 미국의 노인이 연설을 하면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효용이라는 점에서 말한다면, <주>나 부채 편이 영국인의 외알 안경보다는 약간 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효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때의 체모를 갖추기 위한 것의 하나로서, 지팡이가 산책하는 데 있어서 겉치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취향이다. 내가 서양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몸가짐은 프러시아의 신사가 객실에서 귀부인에게 인사를 할 때 구두 발꿈치를 맞추어 탁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나 독일의 처녀가 한쪽 발을 뒤로 살짝 물리며 몸을 굽혀 절하는 그런 모습이다.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몸가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중국에서는 사교상 지켜야 하는 예의 범절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손가락, 손, 팔 따위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연구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타천이라고 하는 만주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인사의 방법도 퍽 아름답다. 방안에 들어온 사람은 한쪽 팔을 똑바로 늘어뜨리고, 한쪽 다리를 굽혀 점잖게 몸을 굽히는 것이다. 자기 주위에 자리를 같이한 손님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대로의 자세로 똑바로 세운 다리를 축으로 하여 조용히 몸을 돌리며 일동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품격 있는 바둑 손님이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놓는 모습도 한번 보아 둘 만하다. 희고 검은 작은 바둑돌을 하나 교묘하게 균형을 잡아 둘째 손가락 위에 얹고, 엄지손가락을 바깥쪽으로 움직이고 둘째 손가락을 안쪽으로 당기면서 가만히 밀어내어 매우 우아하게 바둑판 위에 놓는 것이다. 교양 있는 관리는 화가 났을 때에도 매우 아름다운 몸짓을 한다. 그들은 <마라이슈>라고 하여 소매 끝을 접어 올려서 비단을 댄 안감이 드러나 보이는 긴 웃옷을 입고 있는데, 몹시 기분이 상했을 때는 오른쪽 팔이나 양쪽 팔을 동시에 힘껏 아래로 내려뜨려서 <마라이슈>의 걷어 올린 소매를 소리내어 아래로 내려뜨리고는 매우 멋지게 거드름을 피우며 방에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후슈>라고 한다. <소매를 털고 떠난다>는 뜻이다. 교양 있는 관리가 말하는 투도 매우 듣기 좋은 법이다. 그 말은 아름다운 운을 밟고 있다. 북경 액센트의 음악적인 음조에는 우아한 음악적인 억양이 있다. 한마디 한마디가 천천히 점잖게 발음된다. 참된 학자의 경우에는 그가 하는 말에는 중국의 문예어가 주옥처럼 섞여 나온다.
주욱인이 갖고 있는 예술의 품이라는 생가은 자못 흥미로운 데가 있다. 이것은 인품이니 품격이니 하고 말하는 수가 있다. <제1품>, <제2품>의 예술이라든가 시인이라든가 할 경우에는 등급을 붙이게도 되고, 또한 좋은 차를 맛보거나 시음하거나 하는 것은 <차를 품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정한 행동에 나타난 개인의 인격에 관한 표현의 모든 카테고리가 이 말에 포함되어 셈이다. 쉬운 예로서 질이 나쁜 노름꾼, 다시 말해서 성급하고 버릇이 나쁜 노름꾼은 <도품>이 나쁘다고 말한다. 노름꾼으로서의 사람됨이 나쁘다는 뜻이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는 걸핏하면 야비한 행동을 하는 술꾼을 <주품>이 나쁘다. 즉 술꾼으로서의 사라됨이 나쁘다고 한다. 바둑두는 사람의 좋고 나쁜 것은 <기품>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말로 표현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의 평론은 <시품>이라고 하여, 여러 시인들을 평한 것이다. 물론 <화품>이라는 미술 평론의 책이 몇 권이나 나와 있다. 이 <품>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중국인 누구나가 인정하는 어떤 신조가 생겨났다. 그것은 예술가의 제작은 엄밀하게 그가 갖추고 있는 품격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품격>은 도덕적인 것인 동시에 예술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의 오성, 광희, 탈속을 숭상하고, 사소한 일과 용렬함, 그리고 저열함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정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품이란 영어의 매너 또는 스타일에 가까운 뜻을 갖고 있다. 자유분방하며 낡은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예술가는 분방한 스타일을 나타낼 것이고, 마음씨가 착하고 인정미가 있는 사람은 그 스타일 속에 따뜻한 마음씨와 섬세한 감정을 담을 것이고, 취미가 고상하고 우아한 대예술가는 <매너리즘>에 무릎을 끓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어떠한 화가도 화가 자신의 도덕적 미적 품격이 위대하지 않다면 거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신념을 중국인은 은연중에 승인해 왔다. 따라서 서화를 평하는 경우 기법이 좋고 나쁨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품격이 높으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기법은 완벽하면서도 품격이 얕은 작품도 있다. 이런 것은 영어에서 말하는 캐럭터가 없는 작품이 된다. 우리는 이리하여 온갖 예술의 중심 문제에 도달한 셈이다. 중국의 대장군이며 대재상이기도 했던 중국번은 자기의 가족에게 보낸 한 편지 속에서 서도 단 두 가지 살아 있는 원리를 형태와 표현이라고 말하고, 그 무렵 첫손가락을 꼽던 서예가의 한 사람인 하소기가 이 공식을 시인하여 그의 높은 식견을 칭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은 모두 구체적인 것이므로 기계적인 문제, 즉 반드시 익혀 두어야 하는 기법의 문제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지만 예술은 또한 정신이기 때문에 온갖 형식의 창작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요소는 표현의 품격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법을 초월한 예술가의 품격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예술적인 작품에서 오직 하나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저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저서 가운데에서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작가의 판단과 좋고 나쁜 것에 나타난 그 스타일과 감정이다. 이 품격 즉 표현의 개성이 기법 때문에 지워지고 말 위험성은 끊임없이 있다. 그리고 그림이건 문학이건 연극이건 초심자가 모두 가장 곤란해 하는 것은 자기를 발휘한다는 일이다. 그것은 초심자가 형식, 즉 기법에 위협을 받는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 개성적인 요소가 없어서는 어떠한 포옴도 결코 좋은 포옴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모든 좋은 포옴에는 움직임이 있다. 그 움직임은 골프 선수가 내리치는 골프채의 스윙이건, 로켓처럼 성공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사나이의 움직임이건, 또는 공을 갖고 경기장 안을 달리는 축구 선수의 움직임이건, 어느 것이든 모두 남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에는 개성적인 표현이 넘쳐 흘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력은 기법에 구애되는 일이 없이 자유롭고도 즐거이 기법 속에서 약동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퉁이를 돌아갈 때의 기차에도, 돛에 흠뻑 바람을 안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요트에도 스윙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늘을 나는 제비, 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드는 매, 또는 이른바 <멋진 포옴>으로 결승점으로 뛰어들어 오는 우승마에도 모두 아름다운 스윙이 있다. 우리는 온갖 예술이 품격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품성이란 예술가의 인격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심정이라든가, 또는 중국인이 말하는 <회>를 예술 작품이 암시하거나 말없이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 작품에 인격 또는 품격이 나타나 있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아무리 심미안이 높더라도 기법이 완벽하다는 것만으로는 생명이 없으며, 또한 생명력이 없는 예술을 구출할 수는 없다. 품격이라는 고도의 개성적인 요소가 빠져 있어서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평범하고 속된 것이 되고 만다. 품격을 기르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학식과 교양이 다같이 필요하다. 교양은 취미에 가까운 것이어서 예술가에게는 자연히 생겨나게 마련이겠지만, 예술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학식의 뒷받침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이것은 특히 그림과 서도에 있어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하나의 붓글씨를 보면 그 서예가가 수많은 위의 탁본을 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만일 본 사람이라면 그 학식은 서예가에게 어떤 고전적인 품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서예가는 더 나가서 자신의 영혼, 즉 품격을 그 서예 속에 쏟아 넣어야 한다. 이러한 품격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며, 섬세하고 감상적인 기질의 사람이라면 섬세하고 감상적인 서예를 나타낼 것이고, 또한 강함이나 흐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질에 어울리는 서예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과 서도의 경우 미적 특질과 여러 가지 아름다움의 온갖 카테고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더우기 완성된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과 예술가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변덕스럽고 방자한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매우 거친 힘의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다. 힘찬 것의 아름다움도 정신적인 자유의 아름다움도, 용기와 돌진하는 아름다움도, 로맨틱하고 매력적인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자제하는 아름다움, 차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준엄한 아름다움, 소박함과 우둔함의 아름다움, 단순한 정돈된 균형 잡힌 아름다움, 신속의 아름다움,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추괴함의 아름다움이라는 것까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꼭 한 가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미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분투 노력하는 미, 즉 분투적 생활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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