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9. 흄 : 회의론의 난파
1711년 스코틀랜드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데이비드 흄은 회의론자였다. 사람들은 회의론자라고 하면 흔히 풍채가 빈약하고 매부리코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입을 가진 사람을 떠올린다. 그러나 흄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시대의 어떤 사람은-흄 철학의 신봉자이다-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외모는 모든 관상학을 비웃는 듯하다. 관상학에 가장 정통한 사람일지라도 특징이 전혀 없는 그의 얼굴에서는 실오라기만큼의 정신력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흄의 얼굴은 둥글넓적하고 살이 많이 찐 편이었으며, 입은 크고 우직한 인상을 주었다. 눈도 멍하니 생기가 없어 보였는데 그의 비만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교양 있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북이 요리를 먹고 있는 시의원을 대하는 듯한 생각이 들 것이다. 지혜는 분명코 아직 한번도 그런 별난 모습으로 변장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빗나간 모습에도 불구하고 흄은 철학자이며, 그것도 회의론적인 철학자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우리가 철학자라면, 우리는 회의론적 원칙을 따르는 철학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흄은 어린 시절부터 철학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16세에 이미 그는 열정적인 독서를 통해 자극 받아, "철학자처럼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1년 후에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미 건조한 법학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철학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키케로가 그의 위대한 정신적인 친구가 된다. 이처럼 옆길로 이탈함으로써 그는 졸업 시험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이 중요한 철학적 발견으로 나아가는 도상에 있다고 믿었다. "많은 공부와 심사 숙고를 거친 후 드디어 내게-이때 나는 18세 가량이었다-전혀 새로운 사유의 세계가 열렸다. 나는 이때 이 일에서 그 어떠한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 이상 확실하게 알아낼 수 없었다. 흄은 훗날 이 시기의 모든 기록을 불태워 버린다.
흄은 우울증으로 4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철학에 더더욱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그는 엄격한 자기 극기로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의 자가 치료 중 하나는 날마다 억지로라도 두서너 시간씩 철학적 성찰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흥분된 공상을 식힐 시간과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나의 철학적 탐구를 앞으로 어떻게 진척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심사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철학적 탐구를 계속하는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여튼 흄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자 정식 직업을 찾아 나섰다. 그는 브리스톨에 있는 설탕 상회에서 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이 이 일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구나 그는 상점의 주인과 다투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주인의 편지를 그냥 받아 적지 않고 주제넘게 문법에 맞추어 문장을 고치고 문체에 손을 대어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흄은 다시 순수한 철학적 실존을 시도한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3년 동안 지내는데, 그는 그곳에서 영국에서보다 더 힘들게 생활비를 조달해야만 했다. 그는 파리에서 시작하여 이어서 런던에서 그의 최초의 저서인 '인간 본성에 대한 논고'를 집필한다. 당시 28세였던 흄은 그 책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은 흄의 저술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흄은 일생 동안 가슴 아파했다. 그는 극심한 고독을 느꼈으며, 마침내 그 시대 사람들이 그토록 의도적으로 자기를 모르는 척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고의적인 적개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나는 나의 철학으로 인해 아무도 없는 적막함과 놀라움과 혼란에 빠진 나 자신을 보았다. 나는 내가 기이하고 흉칙한 괴물일 것이라고 상상할 정도였다. 나 같은 괴물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인간들과 더불어 생활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모든 인간적 교제에서 쫓겨나 완전히 고독하고 암담하게 지낼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모든 형이상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신학자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사방에서 투쟁, 모순, 분노, 중상 모략, 경멸 등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나의 눈을 내면으로 돌렸을 때, 나는 회의와 무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흄은 그 이후의 몇 해 동안 발표한 도덕과 정치학에 대한 에세이로 약간의 성공을 거둔다. 그는 이제 윤리학과 정치학 교수가 되려고 힘쓴다. 그러나 이 교수직마저도 그를 자연신론, 회의론, 무신론이라고 비난하는 성직 사회의 반대에 부딪치고, 동료 철학자들 역시 힘써 지원해 주지 않아 좌절된다. 아마도 이때의 실패 때문에 흄은 당시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를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반발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발표하지 않은 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 다음 몇 해 동안 흄은 여러 가지 활동으로 분주하게 지냈으나 그 일들에 그다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 질환에 걸린 후작의 시중을 들게 되는데 그의 자서전에서 이 일이 자신의 생애 중 가장 경악스러운 것이었다고 술회한다. 곧이어 그는 한 장군의 비서로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때 그는 그의 기형적인 몸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복 때문에 많은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육군 법무관이 되었고, 그 후 대사로 승진한 장군의 비서로 비엔나와 투린에 간다. 이 모든 활동 중에도 그는 틈틈이 여유를 갖고 그의 처녀작을 다시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 지성에 대한 논고'와 '도덕 원리에 대한 논고'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번에는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흄의 불안정한 사회 생활은 그가 에딘버러 대학 법학부 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자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이 자리를 얻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또다시 자연신론자, 회의론자,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문제는 공식적인 싸움으로 비약된다. 흄은 한 남자가 이와 같은 비난을 그냥 받아들인 까닭으로 그의 애인이 떠나 버린 사실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흄은 새로운 일을 하면서 그의 4부작 '영국사'를 집필할 기회를 갖는다. 이 책은 마침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정신적인 안정을 얻었고, 그가 "부도덕한 근대 문학"류의 책들을 우선적으로 도서관에 구입한다는 그의 적들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5년 후 흄은 도서관 사서직에서 물러나 파리 주재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봉직한다. 그는 파리에서 급작스럽게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프랑스 수도 파리의 계몽된 상류 사회는-그 정점에는 퐁파두르 부인이 있다-두 팔을 벌려 그를 환영하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해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나의 생활에 대해 묻는다네. 나는 내가 암보리사(불로 불사의 약)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먹고, 넥타(신들의 음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마시며, 향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들이마시지 않고, 꽃길 이외에는 어느 곳도 산책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네." 그 시대의 계몽주의자인 그림 남작은 이렇게 전한다. "부인들 사이에서 이 못생긴 스코틀랜드 사람은 참으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또 다른 관찰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페라 극장에서는 으레 미소짓는 젊은 부인들의 얼굴 사이로 그의 넓적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이 사교계 생활에 너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녀들의 남편과 어머니들을 불안스럽게 만들지 않으며 그녀들의 비위를 맞추는 남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예쁜 여자들과의 관계를 결혼으로까지 연장시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 필수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에서의 체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흄은 곧바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곳 파리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나의 안락의자와 피난처를 그리워했다." "나는 이 예절 바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떠나기 전에 내가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적막하기만 했던 좁은 고향으로는 아니었다. 그는 외무부 차관이 되었으나, 1년 후 이 자리를 내놓고 모든 공직 생활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그는 에딘버러에 살면서 친구들과 교제하며 철학을 하였으나 많은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이때 그는 그의 "훌륭한 요리 기술"을 발휘한다. 1776년 흄은 그의 친구 아담 스미드가 술회하듯이 "완전한 정신의 평온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도 회의주의를 버리라는 그 모든 권유를 마지막까지 완강히 거부하며 죽었다고 한다.
흄의 회의는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에,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을 규정해 왔던 사유의 저 거들먹거리는 체계에 향해 있다. 형이상학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초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사변은 모두 그의 날카로운 투쟁의 대상이 된다. 형이상학적 이념이란 "인간 지성으로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을 파고들려고 버둥거리는 인간 허영심의 무익한 노력의 산물이거나, 또는 넓게 확트인 벌판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미신의 허깨비이다. 이 미신은 벌거벗은 자신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얽히고 설킨 숲을 찾아 헤맨다." 따라서 이 사이비 철학은 가차없이 그 정체가 폭로되어야 한다고 흄은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한 철학의 허구적 문제들을 그것의 가장 깊숙한 은신처까지 추적해야 한다. 이러한 성향으로 볼 때 흄은 인간 인식의 어둠에 빛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계몽주의의 분명하고 철저한 대변자이다. 심지어 흄은 반계몽주의적, 형이상학적인 서적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릴 것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도서관의 책들을 한번 잘 살펴보자. 어떻게 도서관을 청소해야 할지! 예를 들어 신학 책이나 형이상학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물어 보아야 하리라. 그 책은 수량에 관한 추상적인 연구를 포함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 책은 사실과 존재에 대해 경험에 맞는 논의를 담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책을 불 속에 던져 버려라! 왜냐하면 그 책은 궤변적인 허구만을 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흄은 그가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해 싸우는 그 형이상학 대신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에게 있어서 이제 철학은 형이상학과 더불어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과 반대되는 하나의 새로운 분야를 철학에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에서 거의 전적으로 새로운 전환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 "이러한 쓸데없는 문제들에서 탐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이 길이다. 인간의 지성을 엄밀히 조사 연구하고 이 지성의 힘과 능력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지성이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어두운 대상에는 전혀 부적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은 초감성적인 영역으로 탈선하여 방황해서는 안 되고, 엄격히 경험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인간 지성의 제한된 능력에 가장 알맞는 대상에 우리의 연구를 국한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은 본성적으로 커다란 비약이다. 인간의 상상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것, 비정상적인 모든 것들을 즐기며, 통제 없이 시간과 공간과는 가장 관계가 먼 부분까지 대강 대어봄으로써 습관상 너무나 익숙해진 대상들은 회피한다. 그러나 올바른 판단 능력은 그것과 정반대의 절차를 밟으며, 온갖 멀리 놓여 있는 고도의 탐구를 한쪽으로 제쳐놓고, 익숙한 삶과 일상의 실천과 경험에 속하는 그러한 대상에 자신을 국한시킨다." 요컨대 흄은 철저한 경험주의자이다. "우리의 이성은 경험의 도움 없이는 현실적인 실재와 사실과 관련해서 어떠한 추론도 수행할 수 없다."
흄이 경험에 대해 더 상세하게 탐구하게 되자, 형이상학적 사유에 반대하는 투쟁은 더 강화된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그것의 진리를 보증하는 계기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 지성과 이성이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흄이 볼 때, 한 세대 앞서간 대륙 철학의 합리주의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합리론은 인간의 정신에 어떤 선천적 관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관념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참인 것으로서, 예컨대 보편적인 존재 개념이나 자아의 이념이나 신에 대한 개념 등이 그렇다고 한다. 흄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지성과 이성은 그 자체로서는 어떤 진리도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밖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최종적으로는 오직 감각적 인상들, 즉 듣고,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구하고, 원할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생생한 감성만이 남는다. 모든 인식은 감성에서 출발한다. 감성은 또한 궁극적으로 참임을 증명해 주는 그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감성의 배후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적인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감각적 인상은 스스로 모든 참된 인식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며, 동시에 그러한 인식에서 유일하게 직접적인 대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한 감각적 인상에서는 인간의 인식에 주어지는 것과 같은, 전체 세계의 모습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표상이 매개의 역할을 떠맡으며 등장한다. 즉 대상과 행위 그리고 이들의 연결에 대한 표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표상은 직접적으로 참된 것이 아니라, 다만 감각적 인상으로 소급 연결됨으로써만 참됨이 증명될 수 있다. 여기에서 감각적 인상에 의해 입증되는 것만이 진리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따라서 철학의 중심 과제도 모든 표상을 직접적인 감각적 인상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
흄의 방법상의 관점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는 자아의 문제와 인과율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면, 흄은 여기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적용시킨다. 원래 단일하게 그 자체로서 파악될 수 있는 자아는 없다. "왜냐하면 자아란 감각적 인상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감각적 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나 인격은 결코 인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여러 가지 인상과 표상이 관련을 맺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흄에게 있어서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형이상학적 철학에서와 같이 어떤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느낌들이 함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붙잡기 어려운, 빠른 속도로 따라다니며 끊임없는 흐름과 움직임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의식 내용들의 단순한 묶음이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인과율의 원칙에 대한 흄의 비판은 철학사적으로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비판은 칸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데이비드 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수년 동안 빠져 있었던 독단의 선잠에서 비로소 깨어나게 했고, 사변 철학 분야에서의 나의 연구에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흄은 우리가 모든 사건을 인과율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어떤 하나는 필연적으로 다른 것에서 뒤따라 나옴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질서정연한 세계에 관한 표상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제 흄은 도대체 어떠한 근거에서 인간은 사물과 사건의 인과적인 결합이라는 확실한 전제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진리는 오직 직접적인 감각적 인상 안에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과율은 감각적 인상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적 인상의 도움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손이 움직이고 공이 구른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똑같은 확실성을 갖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대상도 감각으로 내보여지는 속성들을 통해서는 그 대상을 있게 한 원인과, 그 대상에서 흘러나오게 될 영향(결과, 작용)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마치 그와 같은 인과율의 연결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그러한 가정이 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신뢰할 만한 확실성은 아니다. 인간의 사유는 그것을 입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행위에서의 그 확실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흄은 이 확실함을 "습관"으로 끌고 올라간다. 따라서 순수한 주관적 원칙으로 끌고 올라가며, 그것을 "믿음"이라고도 지칭한다. 우리는 한 가지 상태에 다른 상태가 뒤따르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에, 드디어는 거기에 어떤 필연적인 연결이 있다고 믿게 되고, 그 결과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사실상 고마운 속임수일 뿐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과 관련된 흄의 회의론은 계몽주의의 종말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표상의 밤에서 드디어 이성의 빛의 밝음을 찾는 인간의 자만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제 이 이성 자체가 문제가 된다. 흄은 우리가 이성의 "속임수의 연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강조한다. "이렇게 인간의 눈멈과 나약함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철학의 성과이다." "전체 세계는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이다. 회의, 불확실성, 판단의 유보는 가장 날카롭고 가장 주도 면밀한 탐구를 통해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귀결이다." 흄은 물론 그가 제한한 길을 추구해 갈 때 결국에 가서는 그러한 귀결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때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수많은 모래톱 위를 치달려 좁은 해협에서 가까스로 난파를 모면한 뒤, 그래도 여전히 용기를 가지고 폭풍으로 파손되어 물이 스며드는 배를 출범시키고 있는 사람, 아니 더 나아가 그러한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계 일주를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지만 흄은 이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흄에 대한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흄은 "그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오기 위해 그의 배를 해변(회의주의)에 정박시켜 놓았다. 그 배는 계속 거기에 매여 있으면서 녹슬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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