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0장 자연의 즐거움
5. 원중랑의 <병사>에 대하여
꽃꽂이에 관한 가장 뛰어난 책은 아마도 원중랑이 쓴 책일 것이다. 이 사람은 16세기 끝 무렵의 사람으로, 다른 점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인의 한 사람이다. 꽃꽂이에 대한 그의 저서 <병사>는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꽃꽂이에<굉도류>라는 일파가 있는 것도 모두가 다 아는 바다. 그는 그 서문의 첫머리에서이렇게 말했다. ... 다행히도 꽃, 대나무, 산, 물은 명성과 권세를 얻으려는 싸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성과 권세를 쫓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애를 태우며 산과 물, 꽃과 대나무를 즐길 겨를이 없다. 그러나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학자는 그 처지를 이용하여 자연의 즐거움을 독차지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진 것이다. 그러나 꽃꽂이를 감상하는 것을 정상적인 즐거움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고작 도회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일시적인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세상의 자연을 즐기는 보다 더 큰 행복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는 또한 서재를 꾸미려고 꽃을 놓는 데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며, 종류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꽃을 놓는 것보다는 전혀 놓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고, 또 꽃꽂이에 쓰는 여러 가지 모양의 청동이나 도자기 꽃병의 설명까지도 했다. 모양은 크게 나누어 둘로 분류된다. 한대의 오랜 옛날의 청동 화병을 가지고 있고 큰 방이 있는 집에서 사는 부유한 사람들은 커다란 꽃병에 큼직한 꽃과 키가 큰 가지를 꽂아야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좀더 작은 꽃가지를 충분히 음미한 작은 꽃병에 꽂는 편이 학자다와서 좋다. 예외로 허용되는 것은 모란과 연뿐이며, 꽃이 크니까 큰 꽃병에 꽂아야 한다.
A. 꽃병에 꽃을 꽂으려면 너무 난잡하거나 너무 빈약해도 안된다. 꽃병에 꽂는 꽃은 많아야 두세 종류에 그치고, 높고 낮은 균형이나 배치는 명화의 구도를 목표로 해야 한다. 꽃병을 놓는 데는 쌍으로 하거나 똑같은 모양으로 하거나 똑바로 한 줄로 늘어 놓거나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꽃을 실로 묶는 것도 또한 좋지 못하다. 꽃의 청초한 아름다움은 제멋대로인 소동파의 명문처럼, 또는 연구에 구애되지 않는 이백의 시처럼 가지런하지 못하면서도 저절로 갖춰진 형용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청초한 아름다움이다. 단순히 지엽의 균형이 잡히고, 홍백이 섞여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 청초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으로는 시골 관리의 집 뜰이나 무덤으로 가는 돌을 깐 길같이 느껴진다. 가지를 골라서 꺾을 때에는 날씬하고 볼품있는 가지를 고르는 것이 좋고, 너무 복잡한 가지를 서로 한데 모으는 것은 좋지 못하다. 꽃꽂이에 쓰는 꽃은 한 가지 종류만이 좋으나, 많아야 두 가지 종류에 그치고, 두 가지 종류의 꽃이 같은 가지에서 난 것처럼 보이도록 맞추어주어야 한다... 대체로 꽃은 꽃병과 어울려야 하나, 높이는 꽃병보다 네댓치쯤 높은 것이 좋다. 높이가 두 척쯤 되고, 몸체와 바닥이 넓은 꽃병이라면 꽃의 높이는 꽃병 주둥이에서 두 척 예닐곱 치 정도가 알맞다. ... 가느다란 꽃병에는 되도록 길게 가지가 뻗고 약간 굽은 가지의 맵시가 좋은, 길고 짧은 두 개의 가지를 꽂는 것이지만, 이때 꽃이 꽃병보다 네댓 치 짧으면 한층 더 운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꽃병에 비해서 너무도 꽃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복잡한 것도 또한 피해야 한다. 이를테면 꽃을 많이 묶어서 핸들처럼 만들어 버리면 멋이고 뭐고 모두 없어지고 만다. 작은 꽃병에 꽃을 꽂을 때는 꽃병 주둥이에서 꽃까지의 길이를 꽃병의 높이보다 두 치만 짧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높이 여섯 치의 가늘고 긴 꽃병에는 고작 예닐곱 치의 꽃이어야 한다. 그러나 튼튼하게 생긴 꽃병이라면 꽃병의 높이보다 두 치쯤 긴 꽃이라도 괜찮다. 꽃이 있는 방에는 간소한 책상과 등의자를 놓는 것이 좋다. 책상은 넓고 두터우며, 좋은 나무를 써서 표면이 반들반들해야 한다. 가장자리에 장식이 붙은 옻칠한 책상, 황금빛으로 칠한 장의자, 색칠한 꽃무늬의 대 따위는 모두 쓰면 안된다.
꽃의 <탕욕> 즉 <세욕>에 관하여 저자는 꽃의 기분과 정서를 깊이 생각하며 관찰하고 있다.
꽃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고, 또 잠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적당한 때에 물을 주면 꽃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비가 된다. 햇빛은 밝고 구름이 엷은 날, 저녁 해가 아름답고 달 밝은 밤은 꽃에게는 아침이다. 큰 태풍, 억수 같은 비, 지글지글 타는 더위, 지독한 추위는 꽃에게는 저녁이다. 화대가 햇볕을 받아 연약한 몸을 바람에게서 보호받고 있을 때는 꽃이 행복한 기분에 잠기어 있을 때다. 안개 깊은 날 꽃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일 때, 또는 잠잠하여 나른하게 보일 때, 꽃은 슬픈 기분으로 있다. 몸을 꼿꼿이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몸을 비스듬히 하고 쉬고 있을 때는 꽃이 꿈을 꾸면서 잠을 자고 있을 때다.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고 기쁜 듯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잠에서 깨었을 때다. 꽃의 <아침>에는 인기척이 없는 정자나 넓은 방에 두는 것이 좋다. <저녁>에는 조그마한 방이나 단채에 옮기는 것이 좋다. 슬플 때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고 싶을 것이겠고, 기쁠 때는 웃거나 떠들거나 까불고 싶을 것이다. 잘 때는 커어튼을 쳐주기를 바랄 것이고, 잠이 깨면 화장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모두 꽃의 성정을 만족시키고, 그 자고 깨는 시간을 조정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꽃의 <아침>에 물을 주는 것이 가장 좋고 잠잘 때가 그 다음이고 기쁠 때가 맨 마지막이다. 꽃의 <저녁>, 즉 슬퍼하고 있을 때 물을 주는 것은 꽃을 학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꽃에 물을 주는 데는 술 취한 사람을 깨우게 하는 가랑비처럼, 또는 꽃의 온몸에 스며드는 정다운 이슬처럼, 샘에서 막 길어온 맑은 물을 조용히 조금씩 뿌려 주는 것이 좋다. 꽃에 손을 대거나 손끝으로 만져 보거나 하는 따위는 좋지 못하다. 그러한 일을 어리석은 하인이나 하찮은 하녀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매화는 세상을 등지고 고요히 사는 학자에게, 해당화는 아름다운 손님의 손으로, 모란은 아름답게 차려입은 젊은 처녀들에게, 석류는 아름답게 생긴 몸종에게, 물푸레나무는 영리한 아이들에게, 연꽃은 요염한 첩에게, 국화는 옛사람을 사모하는 이름 높은 선비에게, 납매는 여윈 중에게, 이런 식으로 저마다 그 맛을 따라서 물 주는 일을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추운 계절에 피는 꽃에는 물을 주지 말고 엷은 비단으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
원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꽃을 꽃병에 꽂으면 다른 어떤 종류의 꽃의 꽃의 컴비, 즉 <시녀>로서 잘 조화되는 것이 있다. 귀부인에게 한평생 봉사하는 시녀라는 것이 옛날 중국의 제도에 있었는데, 아름다운 귀부인은 필요한 부속물로서 아름다운 시녀들을 옆에 모시게 하여 섬기게 할 때 비로소 나무랄데 없는 귀부인이 된다는 생각이 옛날부터 중국에는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귀부인이나 시녀가 다같이 미인이어야 하지만, 어떤 형의 아름다움에는 어찌된 셈인지 주인 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녀 편이라는 것이 있다. 여주인과 조화되지 않는 시녀는 안채와 균형이 안 맞는 외양간 같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꽃에 옮겨 원은 꽃꽂이에 알맞은 <시녀>를 발견했다. 즉 매화에는 동백, 해당화에는 사과꽃과 라일락, 모란에는 육계색의 장미, 작약에는 양귀비와 해바라기, 석류에는 백일홍과 무궁화, 연꽃에는 백옥잠화, 물푸레나무에는 부용, 국화에는 가을 해당화, 납매에는 수선이 시녀로서 섬기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녀도 모두 갖가지 색으로 아름답고 그 주인 못지않게 저마다 뛰어나게 얌전한 것들이다. 시녀라고는 하지만 이 화비들을 우습게 보려는 것은 조금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상 유명한 시녀들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선은 하늘의 직녀의 시녀 양옥청처럼 모습이 날씬하고 맑고 깨끗하며, 동백꽃과 장미는 금나라 시대의 석가와 양가의 시녀 현풍과 정완처럼 맑고 고우며, 산반화는 비극적인 여승 시인 어현기의 여종처럼 깨끗하고 낭만적이며, 라일락은 화사하지만 백옥잠화는 냉정하며, 추해당은 정강성(한대의 학자, 경전의 평역이 많다)의 시녀처럼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잘난 체하는 냄새를 풍긴다.
어떠한 방면이라도, 예를 들면 장기 같은 것이라도 어엿한 하나의 권위를 이루는 사람은 반드시 미친 사람처럼 그 길에 열중한다는 것이 원의 사고 방식의 근본인데, 꽃도락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없고 얼굴조차도 보기 싫은 인간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도락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꽃을 미치도록 사랑한 옛사람들은 진귀한 종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심산 유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아 헤매어, 몸의 피곤이나 지독한 추위나 더위나 살갗이 벗겨지는 일이나 진흙 투성이가 되는 것쯤은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꽃이 봉오리를 맺으려고 할 때 침상과 베개를 꽃나무 아래에 옮겨 놓고 자면서 어린 꽃이 어른이 되어 드디어 지고 말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관찰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과수원에 수 천의 꽃을 심고는 그 변화하는 모양을 연구하고 또는 몇 그루를 방 안으로 옮겨 놓고 끝없는 흥취에 잠겼다. 잎의 냄새를 맡고는 꽃의 크기를 알아 맞힐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뿌리를 보고 꽃빛을 알아 맞힐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꽃의 애호가, 꽃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다.
꽃을 감상하는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를 마시면서 꽃을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꽃을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술을 마시면서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시끄럽게 움직이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하는 것은 모두 꽃의 혼을 모독하는 짓이 된다. 꽃을 즐기는 데는 그에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다. 적당한 환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추울 때 꽃을 감상하려면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나, 또는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을 때나, 초승달이 떠 있는 동안이나, 따뜻한 방안이 좋다. 온화, 즉 봄의 꽃은 맑게 개인 날이나, 조금 추운 날에 아름다운 넓은 방에서 방에서 즐겨야 한다. 여름의 꽃은 비가 개인 뒤 상쾌한 바람을 받으면서 녹음이 우거진 나무 그늘, 대나무 아래 또는 물가의 노대가 적당하다. 양화, 즉 가을의 꽃은 싸늘하고 상쾌한 달 아래, 또는 저녁 때, 회랑의 돌층대 가장자리, 이끼 낀 뜰안의 오솔길 또는 오래된 덩굴이 얽힌 바위 가까이에서 감상해야 한다. 바람이나 태양이나 장소 여하를 생각치 않고 마음이 꽃 밖에서 헤맬 때 꽃을 대하게 된다면, 기생집이나 술집에서 꽃을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맨 끝으로 원은 다음의 열 네 가지를 <화쾌의>의 조건으로 들고 <23개 조항> <화절욕>의 조건으로 들고 있다.
B. 화쾌의 열 네 가지 명창 정궤 고정 송현 송도계성 주인은 화벽이 있고 시운을 사랑하다. 차에 취미를 가진 친구 승이 찾아오다. 계주인이 술을 갖고 오다. 방안의 손님 시취가 풍부하다. 향기로운 꽃이 눈부시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찾아오다. 예화서를 쓰면서. 밤이 이슥하여 차솥이 끓는다. 처첩이 꽃이야기를 교정하며 주고 받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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