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865호
2012.5.15 (음 3.25) / 발송인: |
|
(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무지개는 하늘이 성낸 것을 사과하는 것. - 실비아 A.보이롤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우리말바루기] 잇달다, 잇따르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처럼 범죄나 어떤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표현할 때 '잇달다'를 사용해야 할지 '잇따르다'를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가 많다. 강도를 당하는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면 '잇따른 강도 사건' '잇단 강도 사건' 중 어떤 걸 써야 할까? 미리 답을 말하면 이 경우는 둘 다 옳다.
'잇따르다'는 "돈을 실은 차 뒤에는 무장한 경호 차량이 잇따랐다"처럼 '움직이는 물체가 다른 물체의 뒤를 이어 따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선거 패배 후 의원들의 탈당이 잇따랐다'처럼 '어떤 사건이나 행동 따위가 이어 발생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잇달다'는 목적어가 따르는 경우(타동사)와 그렇지 않은 경우(자동사)로 나눌 수 있다. 타동사로 쓰일 때는 "객차에 객차를 잇단 기차가 뱀처럼 스르르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에서 보듯 '일정한 모양이 있는 사물을 다른 사물에 이어서 달다'라는 뜻을 지닌다. 자동사로 쓰이는 '잇달다'는 '잇따르다'와 의미가 같다. 문두의 '잇단 강도 사건'은 자동사로 쓰인 것이다.
'잇따르다'와 자동사 '잇달다'는 서로 넘나들어 사용할 수 있지만 '-는'이나 '-ㄴ다' '-고 있다'와 결합할 때는 '잇따르는 경사/잇다는 경사' '경사가 잇따른다/경사가 잇단다' '경사가 잇따르고 있다/ 경사가 잇달고 있다'에서 알 수 있듯 '잇달다'보다는 '잇따르다' 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말바루기] 생살, 살생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게 마련이다. 이는 운명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운명의 여신 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한자어로는 '생사(生死)'라고 한다. '생사'를 거꾸로 한 '사생(死生)'은 '죽음과 삶'으로 '생사'와 '사생'은 결국 동일한 뜻을 가진 낱말이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일'을 '살생(殺生)'이라고 한다. '살생죄(殺生罪)' '살생유택(殺生有擇)' 등과 같이 쓰인다. '살생'을 거꾸로 하면 '생살(生殺)'이 되는데, 이는 '죽은 것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살리고 죽이는 일'을 가리킨다. '생살권(生殺權)'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처럼 사용된다.
'살생'과 '생살'은 이렇듯 그 뜻이 다르다. '살생부(殺生簿)'와 '생살부(生殺簿)'도 그 말뜻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생부'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풀이해 놓은 것처럼 '죽이고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둔 명부(名簿)'가 아니라 '죽일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둔 명부'를 가리키게 된다. '죽이고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둔 명부'는 '살생부'가 아니라 '생살부'가 되어야 한다.
만일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定義)처럼 쓰려면 '살생'에 '죽이고 살리는 일'이란 풀이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리하면 '살생'과 '생살'의 뜻이 같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살생'과 '생살'은 그 구성이 다른 말이므로 구분해 쓰는 것이 옳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
|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 이근배
한세상 살다가 모두 버리고 가는 날 내게도 쓰던 것 주고 갈 사람 있을까 붓이나 벼루 같은 것 묵은 시집 몇 권이라도
다리를 찍으러 가서 남의 아내를 찍어온 나이든 떠돌이 사내 로버트 킨 케이트 사랑은 떠돌이가 아니던가 가슴에 붙박혀 사는
인사동 나갔다가 벼루 한 틀 지고 온다 글 쓰는 일보다 헛것에 마음 뺏겨 붙박힌 사랑 하나쯤 건질 줄도 모르면서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봄앓이(5) - 서공식
시끄러운 인파속의 쓸쓸한 느낌처럼 절절한 그리움을 내려놓는 마음 같이 궂은 비 내리는 봄날 자지러드는 이 몸살
|
|
문학자료 → 수필 |
|
|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말과 침묵 - 서있는곰(스탠딩 베어 : 테톤 수우 족)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을 살았다. 첫 숨부터 마지막 숨까지..."
나는 테톤 수우 족의 추장이다. 우리 수우 족에는 여러 지파가 있었으며, 서쪽에 사는 지파를 통틀어 라코타 족이라 불렀다. 나는 나의 아버지들 외에는 누구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며, 나의 아버지들은 대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당신이 당신의 신을 갖고 있듯이 나의 부족은 위대한 정령 와칸탕카를 믿었다. 와칸탕카는 이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의 라코타 부족의 신이었다. 위대한 정령 와칸탕카께서 이 세계의 모든 산 것들에게 생명의 힘을 심었다. 평원에 핀 꽃, 그곳에 불어가는 바람, 바위와 나무와 새, 들짐승 - 이 모두가 똑같은 생명의 힘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힘이 최초의 인간에게도 숨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신비'라 불렀다. 모든 것은 한 부족이었다. 대지와 하늘 사이에서 숨쉬는 모든 생명체가 한 혈족이었다. 우리는 이른 새벽마다 미명을 헤치고 들판으로 나가서 지켜보곤 했다. 들짐승과 새의 세계에는 형제의 감정이 존재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의 라코타 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라코타 족은 언제나 이들 날개 달리고 털 달린 친구들에게 형제애를 갖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하나의 언어로 말했다.
동물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보호를 받을 권리, 삶을 누릴 권리, 번식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 그리고 인간의 어깨에 기댈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 권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코타 족은 결코 동물을 노예처럼 부리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의복에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는 함께 삶을 공유했다. 라코타 족은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생명과 생명의 관계를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보았다. 이 마음은 라코타 족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심어 주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안을 삶의 기쁨과 신비로 채웠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모든 생명을 외경심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라코타 부족과 함께라면,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이 대지와 하늘의 틀 안에서 저마다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저마다의 살 장소를 차지할 수 있었다. 라코타 족은 어떤 창조물도 속일 줄 몰랐다. 모두가 같은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위대한 신비'로 채워진 한 혈족이기 때문이었다. 라코타 족은 영혼이 겸허하고 온유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대지를 물려받을 것이다.' - 이것이 라코타 족에게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대지로부터 그들은 오래 전에 잊혀진 비밀들을 물려받았다. 그들의 종교는 지극히 건강하고, 자연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인디언의 대지에 뿌리내린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해 문명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들의 파괴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 베어넘기지 않은 숲, 우리 안에 가둬 넣지 않은 들짐승, 네 발 달린 인간에게 착취 당하지 않은 대지에 대해서 그들은 참지 못한다. 문명인들에게는 그것들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나의 라코타 부족에게 야생이란 없다. 나의 라코타 족에게 자연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더없이 우호적인 것이었으며, 금지된 구역이 아니라 한 형제였다. 라코타 족의 철학은 그만큼 건강했다. 두려움과 독단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여기서 나는 인디언 부족과 백인 부족의 신앙의 큰 차이를 발견한다. 인디언 신앙은 인간과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했다. 반면에 백인 신앙은 환경의 지배를 추구했다. 나눔으로써,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인디언 부족은 자연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었다. 반면에 백인 부족은 두려워함으로써 정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인디언 부족에게 있어서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백인 부족에게는 이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갈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온갖 죄와 추악함으로 가득 찬 곳이다. 다른 세상에 가면 그들은 날개를 달고서 반은 인간처럼 반은 새처럼 살게 된다고 믿는다. 백인 부족은 신에게 이 세상을 바꾸라고 끝없이 요구한다.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신이 만들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부족 중의 악한 사람을 벌하라고 신에게 끝없이 애원한다. 또한 지상으로 신의 빛을 보내 달라고 끝없이 조른다. 하지만 나의 라코타 족은 이 지상이 늘 와칸탕카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새벽의 빛, 낮의 빛, 밤의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우리가 눈꺼풀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빛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따라서 백인 부족은 인디언 부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라코타 부족은 지혜로웠다.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진 인간의 마음은 금방 딱딱해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 있는 것들 역시 인간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라코타 부족은 아이들을 늘 자연에 가까이 가도록 해서 딱딱하지 않은, 부드러운 심장을 갖도록했다. 인디언 부족은 동료 피조물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틈이 없었다. 라코타 족에게 있어서 산과 호수, 강, 실개천, 계곡, 덤불숲은 모두 그 자체로 완성된 아름다움이었다. 바람, 비, 눈, 햇빛, 낮, 밤, 계절의 변화 등은 끝없는 매혹 그 자체였다. 새, 벌레, 들짐승들은 인간의 지식에 조금도 뒤지지 않은 놀라운 지식과 이해로 자기들의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
라코타 족은 진정한 자연주의자,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라코타 족은 대지를 사랑했으며,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 애착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더 깊어지곤 했다. 늙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흙을 사랑했다. 그들은 땅 위에 앉거나 땅에 기대곤 했다. 어머니의 힘에 더 가까이 간다는 느낌으로. 대지에 맨살이 닿는 것은 좋은 일이다. 늙은 라코타 족 사람들은 모카신(인디언들이 신는 뒤축 없는 신)을 벗고 맨발로 신성한 땅 위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천막(티피)을 흙 위에 세웠으며, 제단 역시 흙으로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대지 위에 내려와 날개를 쉬듯이, 대지는 모든 산 것들의 최종적인 휴식처였다. 흙은 부드럽고, 힘 있으며, 정화의 힘과 치료의 힘을 갖고 있었다. 늙은 인디언들은 의자에 앉기를 거부했다. 흙 위에 그대로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 생명을 주는 대지의 힘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었다. 얼굴 흰 문명인들은 그것을 야만과 무지라 여겼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땅 위에 눕는 일이 인디언에게는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깊이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삶의 신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며, 자기 주위의 다른 생명들에게 더 가까운 혈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백인 부족은 강제로 나의 인디언 부족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큰 혼란이 찾아왔다. 이유가 무엇인가? 대지의 근본 법칙, 영적인 법칙을 백인 부족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디언 거주지역에 몰아넣어진 날로부터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를 덮쳤다. 그것은 나의 정의감, 삶의 권리에 대한 나의 존경심, 진리와 정직과 자비에 대한 나의 애정, 또는 라코타 족의 신 와칸탕카에 대한 나의 신앙의 어떤 것에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끝없이 설교를 하고 해설을 하지만, 위대한 학자들이 수없이 들춰내지만, 또 좋은 책에 아름다운 언어와 멋진 표지로 표현되지만 인간은, 인디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여전히 위대한 신비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얼굴 흰 문명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메리카 대륙과 인디언 부족의 오랜 역사에 비하면 얼굴 흰 부족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하루 이틀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얼굴 흰 부족의 나무 뿌리는 아직 바위와 흙을 움켜쥐지 못했다. 문명인들은 아직도 원시적인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아직도 대륙을 개척한다는 위험 의식을 갖고 있다. 아직도 의심하는 눈초리와 더듬는 발걸음을 버리지 못했다. 문명인들은 여전히 떨고 있다. 뜨거운 사막과 금지된 산꼭대기 위에 서 있던 자신의 조상들의 기억 때문에 몸을 떨고 있다. 유럽에서 이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아직도 외국인이고 이방인이다. 아직도 그들은 이 대륙을 횡단하려고 길을 묻는 자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인디언은 아직도 대지의 혼과 하나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혼의 맥박을 느끼고,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대지에 소속되려면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무수히 반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육체가 그들 조상의 뼈와 먼지로 만들어져야 한다.
칭찬이나 아첨, 과장된 매너, 또 세련되고 목청 높은 말 따위를 나의 라코타 족은 더없이 무례한 것으로 여겼다. 지나친 예절은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으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야만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곧바로 대화가 시작되는 법이 없었다. 바쁘게 시작되는 대화는 금물이었다. 먼저 침묵의 대화가 앞섰다. 아무리 중요한 경우라도 성급히 질문을 하지 않았으며, 대답을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대화를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인디언 부족의 예의였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예의는 말보다 행동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모닥불 앞이나 나이 먹은 어른들과 방문객 앞을 가로질러 다니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불구자나 못생긴 사람을 놀리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만일 한 아이가 생각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엔 부모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바로잡았다. 백인 부족이 너무나 가볍게, 또 쓸데없이 자주 사용하는 '미안하다' '고맙다' '실례한다' 등의 말은 라코타 족의 언어에는 없었다. 모르고서 다른 사람을 치거나 가로막았으면 '와눈헤쿤'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르고 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일부러 무례하게 군 것이 아니며, 우연한 실수임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라코타 족의 예의범절 아래서 자란 젊은이는 절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끝없이 떠들어대거나 상대방과 동시에 떠들어대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뿐 아니라 바보스런 일이었다. 나의 라코타 족은 마음의 조화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으며, 침묵은 마음의 조화의 표현이었다. 라코타 부족에게 있어서 침묵은 언제나 우아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불편하거나 당황스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침묵은 라코타 족에게 의미 깊은 것이었다. 라코타 족은 대화를 시작함에 있어서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진정한 예의로 알았다. '말 이전에 생각이 먼저다'라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슬픈 일이 닥쳤거나, 누가 병에 걸렸거나, 또는 누가 죽었을 때 나의 부족은 먼저 침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불행 속에서도 침묵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유명하거나 위대한 사람 앞에서도 침묵은 곧 존경의 표시였다. 라코타 부족에게는 말보다 더 힘있는 것이 침묵이었다.
라코타 부족이 말과 행동을 엄격히 절제하는 것을 보고 얼굴 흰 문명인들은 그것을 극기라고 잘못 해석했다. 그들은 라코타 족 사람들을 벙어리이고, 어리석고, 무관심하고, 느낌이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사실은 라코타 족이야말로 가장 느낌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의 깊이와 진실성의 조화를 잃지 않았다. 라코타 족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침묵은 진리의 어머니다." 왜냐하면 침묵하는 사람은 신임받을 수 있지만, 언제나 입을 열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진지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말할 때 라코타 족의 어른들은 땅 위에 한 손을 얹고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우리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자. 어머니로부터 우리 모두가 나왔으며, 다른 모든 생명체들도 나왔다. 우리는 곧 떠날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 앉아서 쉬고 있는 이 장소는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땅 위에 앉거나 눕는 법을 배웠으며, 수만 가지 모습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생명들에 대해 자각했다. 때로 우리 부족의 소년들은 가만히 앉아서 새들을 지켜보곤 했다. 작은 개미들을 관찰하곤 했다. 또는 작업중인 어떤 작은 동물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근면함과 지혜를 배웠다. 아니면 우리는 바닥에 누워서 멀리 하늘을 응시하곤 했다. 별들이 나타나면 여러 집단으로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모든 생명체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오직 모습에 있어서만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모든 것들 속에 지혜가 전수되어져 있었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 속의 책들이란 돌과 나뭇잎, 풀, 실개천, 시와 들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지의 성난 바람과 부드러운 축복을 나눠 가졌다. 자연의 학생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배웠는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폭풍이나 난폭한 바람, 차가운 서리와 폭설에 악담을 퍼붓지 않았다. 따라서 무엇이 우리 앞에 오든지 우리는 필요하다면 더 많은 노력과 힘으로 우리 자신을 적응시켰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번개조차도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것이 가까이 올 때마다 모든 천막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모닥불 속에 삼나무 이파리를 던졌으며, 그 마술의 힘이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켰다. 밝은 날과 어두운 날은 둘 다 위대한 신비의 표현이며, 인디언 부족은 위대한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기뻐했다.
관찰은 분명히 그 보상을 가져다 주었다. 흥미와 놀라움과 경탄의 마음이 커지고, 생명 현상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놀라운 그 무엇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라코타 족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삶은 생동감있게 맥박쳤으며, 세상에는 우연하거나 진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인디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살았다. 첫 숨부터 마지막 숨까지.
|
|
|
문학자료 → 수필 |
|
|
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0장 자연의 즐거움
4. 꽃과 꽃꽂이에 대하여
꽃과 생화를 관상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다소 엉터리인 것 같다. 꽃을 관상하는 것은 나무를 관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의 등급이나 순위를 잘 이해하고 일정한 정서와 환경을 일정한 꽃에 연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처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꽃의 향기다. 향기에는 재스민처럼 강렬하고 분명한 것도 있고, 또 라일락처럼 미묘한 것, 또는 난초처럼 유례가 없을 만큼 기품이 있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것도 있고, 가지각색이다. 그 향기가 그윽하고 미묘할수록 고상한 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은 꽃의 빛과 자태의 아름다움인데, 이것도 또한 실로 천태만상이다. 어떤 것은 풍만한 처녀 같고, 어떤 것은 초초하게 풍취가 깊은 고요한 숙녀와도 같다. 어떤 것은 그 매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자기의 향기에 도취되어 꿈같은 날을 보내면서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꽃도 있다. 또 화려한 빛깔을 즐기는 것도 있고, 얌전하게 조심성 있는 것도 있다. 꽃은 우선 외계의 환경과 그 꽃이 피는 시기를 언제나 연상케 한다. 장미는 맑게 개인 봄날을 연상케 하고, 연꽃은 연못 위의 싸늘한 여름 아침을 연상케 하며, 물푸레 나무는 가을 달과 중추의 명절을 연상케 하고, 국화는 늦가을에 먹는 게 맛을 연상케 해주고, 매화는 눈을 연상케 하며, 수선과 더불어 정월의 즐거움에는 없어서는 안 될 꽃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저절로 일어나는 연상이다. 어느 꽃이나 다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 환경에 놓이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철나무가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것처럼 꽃을 마음 속에 그리고 여러 계절에 특유한 정경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다.
난과 국화와 연꽃은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어딘지 모르게 고상한 취향이 있는 것을 찬양하며, 국문학에서는 군자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난은 특히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평가되고 있다. 매화는 아마도 어떤 꽃보다도 중국 시인에게 애호받고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의 절에서 다소 말해 두었다. 매화는 새해와 더불어, 즉 4계절의 꽃 중에서도 제일 먼저 피는 데서 <제1화>라고 불리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이설이 있어, 옛날에는 특히 당시대에는 모란이 <꽃의 왕>이라고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란은 빛과 꽃잎이 요염하기 때문에 부귀와 행복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데 반하여 매화는 시인의 꽃, 고요하고 청빈한 선비의 상징이 되어 있다. 즉 모란은 물질적이지만 매화는 정신적이다. 일찌기 어떤 학자가 크게 모란을 칭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 당나라 무후가 예의 과대망상인 변덕을 일으켜 어원의 모든 꽃에 대하여 한겨울인 어느날 일시에 꽃피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게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모란만이 용감하게도 몇 시간 늦게 피었기 때문에 그것이 몹시 무후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수천 분의 모란은 칙명에 의하여 모조리 서울 장안에서 낙양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임금의 은총을 잃기는 하였으나 모란을 예찬하는 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며 낙양은 모란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중국인이 왜 좀더 장미를 존중하지 않느냐 하면, 장미의 빛이나 자태가 모란과 동급에 들어갈 만하지만 모란의 호화로움에 그만 눌리고 말았을 것이다.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모란의 종류는 90종이나 있어, 그 모두가 매우 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난은 모란과 달라서 둔세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즉 사람이 사는 동리를 멀리 떠나 깊은 산골짜기에 피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난은 사람이 관상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 고독의 미를 즐기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로 이식되기를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비록 억지로 옮겨 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난의 독특한 조건에 따라서 기르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을 어기면 당장 시들어 죽고 만다. 그러한 데서 우리는 깊은 방안에서 고이 자란 아름다운 처녀나, 권세나 명성을 싫어하여 산 속에 숨어 사는 큰 선비를 흔히 <유곡란>에 비유한다. 그 향기는 매우 엷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별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단 그 향기를 알게 되면 그 신성함에 감탄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은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이 되고 또한 참다운 우정의 상징으로도 되어 있다. 그것은 옛글에 <난을 장식한 집에 들어가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향기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그 까닭은 향기가 몸 속에 배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입 옹은 난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방마다 난을 두지 말고, 다만 한 방에만 놓고 그 방에 드나들 때마다 난의 향기를 즐길 것을 권하고 있다. 미국산 난에는 이러한 그윽한 향기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대신 모양도 크고 빛깔도 훨씬 화려하다. 내 고향인 복건성은 <복건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에서 가장 좋은 난의 산지로 되어 있다. 그 꽃은 엷은 녹색으로 자색 반점이 있고 매우 작으며 꽃잎의 길이는 1인치를 조금 넘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귀염을 받고 있는 가장 좋은 품종인 진몽량은 그 빛이 물과 같으므로 물 속에 담그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버린다.
매화는 시인 임화정의 꽃, 연꽃은 유교의 이론가 주무숙의 꽃, 이에 대해 국화는 시인 도연명의 꽃이다. 늦가을에 피는 이 꽃은 <냉향>이니 <냉수>니 하는 풍취를 띠고 있다. 국화의 냉수와 이를테면 모란의 화려함과의 대조는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국화는 수백의 품종이 있는데, 그 품종마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는 유행의 선구 구실을 한 것은 내가 아는 바로는 송대의 위대한 유산자 범성대다. 국화의 생김새와 그 색채와 더불어 그 종류가 다양 다종인 것이 국화의 특징인 것 같다. 흰색과 노랑색이 국화의 <정통>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보라색과 빨강색은 변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등급도 훨씬 떨어진다. 흰색과 노랑색은 <은분>, <은령>, <금령>, <옥반>, <옥령>, <옥수수>라는 여러 가지 품종의 이름을 낳았다. 또는 <양귀비>, <서시>와 같은 유명한 미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있다. 짧게 깎아올린 여자의 단발 같은 모양의 것도 있고, 꽃잎이 물결치는 곱슬머리 비슷한 것도 있다. 향기도 품종에 따라 모두 다르지만, 사향이라든가 또는 이른바 <용뇌>의 향기가 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연, 즉 수련은 다만 한 종류를 이루고 있지만, 수면에 떠 있는 그 줄기가 잎을 포함하여 꽃 전체로서 바라보면 모든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된다. 근처에 연이 없이는 여름을 즐길 수 없다. 만일 집 근처에 연못이 없다면 커다란 질그릇 수반에 옮겨 심으면 된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반 마일씩이나 연이어 피어 있는 연꽃의 아름다움, 대기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 향기, 진주와 같은 물방울이 구르는 연잎의 아름다움, 그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연잎 끝의 홍백으로 아롱진 그 꽃의 아름다움은 대부분 잃고 말게 된다(미국의 수련-Water lily는 중국의 연과는 다르다) 송대의 학자 주무숙은 그의 수필 <애련설>에서 연을 사랑하는 까닭을 말하여, 연은 군처럼 흙탕물 속에서 자라나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일반 유가의 설과 다를 것이 없다.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연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근은 청량음료를 만드는데 쓰이고, 잎은 과일이나 그밖의 음식을 찔 때 그것을 싸는데 쓰이고, 꽃은 그 모양과 향기 때문에 사랑받고, 마지막으로 연밥은 신선이 먹는 것으로서 존중되며, 까서 그냥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고 말려서도 먹을 수 있고 설탕에 절여서 먹을 수도 있다.
사과꽃을 닮은 해당화는 다른 꽃과 마찬가지로 시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두보만은 자기의 고향인 사천의 명물인 이 꽃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그럴 듯한 설은 두보의 모친의 이름이 해당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모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피했다는 것이다. 향기가 좋은 점에서 난보다 윗자리에 올려놓고 싶은 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물푸레나무와 수선이다. 수선도 내 고향인 창주의 특산물로서, 구근으로 미국에 수출되는 금액은 한때 수십만 달러에까지 오른 일이 있으나, 농무성은 그 구근에 간혹 붙어 있는 병원균을 막기 위해서 이 하늘로부터 얻은 영묘한 향기를 가진 꽃을 미국 국민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선녀처럼 고운 수선의 흰 구근에 병원균이 붙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흙탕 속과는 달라서 물을 담은 유리그릇이나 사기그릇 속에 잔돌로 받쳐서 심고 최선의 주의를 다해 기르는 것이다.
진달래는 그 모습이 완연한 아름다움에 비해 보통 세상에서는 비극의 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꽃은 두견새의 피눈물에서 싹튼 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두견새는 계모의 학대로 쫓겨난 형을 찾는 소년이 변신한 것이라고 한다. 꽃을 선택하여 그 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병에 꽃을 꽂는 기술도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적어도 멀리 11세기부터의 예술이다. 19세기 첫무렵의 <부생육기>의 저자는 <한정기취>라는 장에서 훌륭한 구도의 그림 못지않게 꽃꽂이의 재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나는 국화를 열렬히 사랑했다. 나는 국화를 화분에 심지 않고 꽃병에 꽂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화분에 심기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집에 뜰이 없었으므로 손수 손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구해 오는 꽃은 손질이 잘되어 있지 않아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화를 꽃병에 꽂을 때는 짝수가 아니라 홀수로 하고, 어느 화병에라도 한 가지 빛깔의 꽃만을 꽂아야 한다. 꽃병의 주둥이는 꽃을 함께 쉽게 꽂을 만한 넓이가 잇어야 한다. 꽃병 하나에 꽂은 꽃이 여섯 개가 되든 30개 또는 40개가 되든 그것은 모두 다같이 꽃병 주둥이에서 곧게 서도록 꽂아야 한다. 너무 많이 뭉쳐져도 안되고, 사방으로 흩어져도 안되며, 꽃병 주둥이에 기대어도 안된다. 이렇게 위치를 정하는 것을 <근채>라고 한다. 꽃은 품위 있게 똑바로 서 있는 경우도 있고,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효과가 너무 단조로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몇 송이의 꽃봉오리를 곁들여 일종의 멋을 살려 질서를 무시하여 꽂는 것도 좋다. 잎은 너무 배서도 안되고, 또 줄기가 너무 딱딱해도 안된다. 줄기를 세우기 위해 침봉을 쓸 경우에는 침봉 끝이 겉으로 나오면 보기가 흉하니까 긴 침은 잘라 버려야 한다. 이른바 <병주둥이는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치다. 탁자의 크기에 따라서 셋 또는 일곱 개의 꽃병을 탁상에 늘어놓는다. 꽃병 수가 너무 많으면 너무 빽빽한 감이 들어 거리에서 팔고 있는 국화의 진열같이 보인다. 화병대의 높이도 서네 치에서 고작해야 두 자 다섯 치 정도로 하고, 통일성 있는 구성을 가진 그림처럼 높이가 각각 다른 꽃병이 서로 군형이 잡혀 각기 서로 조화를 이룬 것처럼 해야 한다. 높은 꽃병을 하나 가운데 놓고 낮은 것을 그 양쪽에 놓는다거나, 낮은 꽃병을 앞에 놓고 높은 것을 뒤에 놓는다거나, 또는 잘 균형을 취하여 한 쌍씩 나란히 늘어 놓거나 하는 방법은 흔히 말하는 <금회퇴>라는 나쁜 풍속이다. 적당히 간격을 취하는 방법과 그 배치하는 방법은 각 개인의 회화적인 구성의 이해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다.
사발이나 큰 접시를 쓰는 경우에는 꽃을 받치려면 정제한 송진에 느릅나무 껍질과 밀가루를 기름에 섞은 것을, 일종의 아교 모양으로 될 때까지 짚을 태운 뜨거운 재로 데워서 그것으로 동판에 못을 몇 개 거꾸로 박는다. 다음에 이 동판을 데워서 그 사발이나 큰 접시 바닥에 붙인다. 이것이 식으면 철사로 꽃을 몇 개의 다발로 묶어서 위로 향한 못에 꽂는다. 꽃은 옆으로 기울이게 하는 것이 좋고, 복판에 오똑하게 세워서는 안된다. 줄기와 잎이 너무 바싹 달라붙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사발에 물을 붓고 깨끗한 모래를 조금 넣어서 동판을 덮어 꽃이 직접 사발 바닥에서 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꽃이 달린 가지를 잘라서 꽃병에 꽂을 경우에는 꽂기 전에 가지를 어떻게 손질하면 좋겠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항상 자신이 손수 나가서 가지를 꺾어올 수는 없고 남이 꺾어온 가지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가지를 손에 들고 앞뒤 양쪽 옆으로 여러 가지 방향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어느 방향이 가장 모양이 보기 좋은가를 결정한다. 그것이 결정되면 그 가지를 날씬하고 고취가 풍기는 색다른 모양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분의 작은 가지는 모두 잘라 버린다. 그 다음에 줄기를 어떠한 모양으로 꽃병에 꽂을 것인가. 줄기를 꽃병에 꽂았을 때 잎과 꽃이 가장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줄기를 구부리면 좋겠는가를 생각한다. 만일 닥치는 대로 한 개의 묵은 가지를 손에 집어들고 그 곧은 부분을 꽃병에 꽂았다고 하면 줄기는 너무 뻗어나고, 가지는 너무 빽빽하고, 꽃이나 잎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게 되어 매력도 표정도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곧은 가지를 구부리면 줄기 한가운데에 칼로 약간 상처를 내어 그 상처에 기와나 돌부스러기의 작은 조각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하면 곧은 가지는 알맞게 구부러진다. 큰 가지가 너무 약할 때에는 바늘을 두서너 개 박아서 든든하게 한다. 이 방법을 쓰면 단풍잎이나 대나무의 작은 가지나 그 밖의 보통 풀이나 엉겅퀴잎 같은 것까지 훌륭한 장식물이 된다. 몇 개의 중국 구기 열매에 파란 대나무의 작은 가지를 곁들인다든가, 품위 있는 풀잎에 몇 개의 엉겅퀴 가지를 배합해도 배치만 좋으면 참으로 아취 있는 서정을 풍겨 줄 것이다.
|
|
|
문학자료 → 철학 |
|
|
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6. 라이프니츠
단자의 퍼즐 게임 어떤 면에서는 17세기를 여성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생애 역시 이러한 관점에 잘 들어맞는다. 그가 고급 매춘부나 여인들과 놀아났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방탕함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은 집안의 여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정반대로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고달픈 떠돌이 생활을 할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연 과학적, 철학적 발견을 사랑하였고, 그의 외교적인 성공을 귀부인들에게 알려 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귀부인들과 열심히 교제하였고, 폭넓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에는 황후와 여왕이 있었고, 공작 부인, 선제후 왕비, 선제후 공주도 있었으며, 일반 공주들도 있었다. 이 귀부인들과의 편지에서 연애의 말이나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은밀한 말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는 지극히 사무적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사무적인 용건만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정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라이프니츠도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신동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하자, 그는 8세 때 혼자 힘으로 라틴어 철자 읽는 법을 익혔다. 그는 동판화로 장식된 리비우스의 책을 대하게 되었을 때, 표지에 있는 글자를 보고 그 낱말들의 뜻을 해독해 내었다. 그 다음에는 본문에 몰두해서 낱말 하나 하나의 의미들을 해독했다. 또한 그는 "지식의 틀"을 갖추고 있는 논리학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다. 15세에 이미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학을 공부하지만 법률학을 공부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곧 철학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고 그때부터 끊임없이 그 문제와 씨름한다. 당시 철학은 목적 개념을 중심에 둔 아리스토텔레스와 기계론적 인과율에서 시작하고 있는 데카르트 사이에 놓여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의 로젠탈을 혼자 산책하면서, 이 두 입장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훗날에도 라이프니츠는 이 두 입장 중 한 가지를 택한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두 입장의 종합을 시도했다. 이렇듯 그는 이미 15세에 자신의 미래의 철학적 작업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을 발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법률학 공부를 하며 박사 학위 취득을 꿈꾸지만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식 높은 교수들은 그가 너무 젊다고 생각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대학 학장 부인이 라이프니츠를 싫어하여 박사 학위 취득을 방해하였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 전기 작가가 전하듯이 "여행길"을 떠났고,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학적을 옮겨 그곳 교수들의 경탄을 받으며 뛰어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했다. 그 즉시 21세의 그에게 교수직이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는 대학교 교수직에 뒤따르는 속박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를 거절하였다.
라이프니츠의 그 이후 생활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비록 그는 신교도였지만, 잠시 동안 마인츠 영주와 대주교의 정치적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그는 하노버궁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하노버 왕당원의 자문관으로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일은 대부분 외교 사절로 파리, 비엔나, 베를린, 뮌헨 등지를 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그의 위임자뿐만 아니라 서두에서 말한 귀족 부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밖에도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법률적 사건에 대한 업무일지 작성을 위임받았다. 라이프니츠는 마인츠에서도 이와 유사한 외교 활동을 수행한 바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모험적인 내용의 진정서를 작성하는데, 이 진정서에서 프랑스 왕에게 이집트를 침략하도록 제의했다. 이것은 프랑스 왕의 관심을 독일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는 은밀한 의도였던 것이다. 프랑스 왕은 물론 이 진정서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00년이 휠씬 지난 후 나폴레옹은 이 점도 참작하여 자신의 계획을 세웠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특징적인 점은 그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활동하든지 그의 의도는 언제나 화해를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개개의 민족이 자신의 민족 고유의 과제를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민족 연합을 열망했다. 즉 모든 그리스도교 민족들의 조화와 세계 평화를 열망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공직상으로 하노버와 볼펜뷔텔에서 궁정 도서관장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약간 특이한 도서관장이었다. 어떤 사람이 책을 빌려 가려고 하면 몹시 화를 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제안한 하노버 왕가의 역사 서술을 위임받았다. 그는 자료 수집 과정에서 영주 가문에 관해 몇 가지의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그는 일반성 속으로 빠져든다. 하노버 왕족의 역사는 그 왕족이 지배했던 지역의 역사와의 연관 없이는 고찰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역사학적 노력에 앞서 먼저 지질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그는 논증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노버 왕족에게 지정된 땅은 두말할 나위없이 지구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지구의 발생사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하노버 왕족의 역사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적 귀결에 따라 지구의 근원사를 기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가 왕가의 구체적인 역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영주가 참다 못해서 연구의 진행 상태를 재촉한 것도 역시 당연했으리라. 물론 라이프니츠는 영주가 관심을 쏟고 있는 그 가문의 명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세계의 생성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이 일과 함께 라이프니츠는 분열된 교회를 재통일하려는 임무에도 몰두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루터교와 개혁파 사이의 분열을 통합하고, 그 다음으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통합을, 마지막으로는 서유럽 교회와 그리스정교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화해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이 분야에서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다. 그가 온건한 저술이나 타협적인 교섭 활동으로 다리를 놓아주기에는 그들간의 대립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도 라이프니츠의 학문적 노력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여 눈에 띨 정도로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는 비엔나, 드레스덴, 베를린, 페테르스부르크 등지에서 아카데미(학술원) 창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일을 위해 세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다른 명칭으로 세워졌던 프로이센 학술원만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실현되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그 학술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그는 그 학술원의 재정을 위해 기상 천외한 방법들을 제안하는데, 달력, 소방 펌프, 뽕나무, 여권, 브랜디에 세금을 매기자고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학술원의 업무에서도 제외되어 학술 원장임에도 불구하고 창립 회의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도 그가 조용히 학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의 학문적인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더 이상 도달하지 못했고, 또한 라이프니츠 이후에도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 혼자 전 학술원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수학, 물리학, 역학, 지질학, 광물학, 법학, 경제학, 언어학, 역사학, 신학 등을 골고루 연구하였다. 그는 수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견 즉 미분학을 발견하게 된다. 미분학은 그 최초의 발견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뉴턴 및 그의 추종자들과의 달갑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서로가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라이프니츠는 계산기와 잠수함의 설계에 성공하였다.
한편 그는 학술계에서 지위와 명성을 지닌 거의 모든 학자들과 광범위하게 학문적인 서신 교환을 한다. 이러한 그의 편지는 15,000여 통이나 된다. 실제로 라이프니츠가 가장 폭넓게 영향을 미친 영역은 철학 분야였다. 그는 사유 문자, "인간 사고의 알파벳", 즉 개개의 개념에 대한 기호를 발견한다. 이로써 그는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논리학과 의미론 분야의 선구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단계에서 그친다. 그의 본질적인 연구 분야인 형이상학적 철학에서도 그는 하나의 커다란 완결된 체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의 대부분의 논문은 그때그때 씌어진 소논문들이며 친구 특히 귀부인들이나 오이겐 왕자와 같이 영향력 있는 친구들의 물음과 의견에 대한 대답들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적수 로크를 비판하는 글을 완성하고도 로크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는 발표하지 않는다. 완성된 저서로는-몇몇 소논문을 제외하고는-(변신론)만이 출판된다. 이 책은 프로이센의 여왕 소피 샤롯테와의 대화에서 자극을 받아 저술한 것이었는데 이 책으로 그는 당시 대단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가상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마르고 중간키의 체격에 얼굴은 창백했고, 손과 발은 항상 차가웠다. 그의 손과 발은 그의 손가락처럼 다른 신체 부분에 비해서 너무 길고 가늘어서 선천적으로 노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하고, 강하다기보다는 섬세하고 명쾌하며 나긋나긋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발음을 잘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후음 자모와 K자는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의 한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모습을 보충한다. "그는 일찍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었고 머리 한가운데 비둘기 알만한 크기의 혹이 있었다. 그는 어깨가 넓었으며 항상 꾸부정한 모습으로 다녀서 마치 곱사등이처럼 보였다. 그는 한번도 자기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만큼 음식을 선택해서 먹기보다는 항상 똑같은 음식점에서 똑같은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라이프니츠의 말년의 생활에 대해 앞서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계속 공부만 했고, 며칠이고 의자에서 떠나지 않는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오른쪽 다리의 혈액 순환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걸을 때 불편을 느꼈다. 그는 혼자 치료하려고 애썼는데 단지 다리 위에 압지를 놓는 것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다리에 심한 통풍 증세를 일으켰다. 그는 조용히 누워서 안정을 취했고, 침상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무릎을 곧추세웠다. 조금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나무로 된 나선형 기구를 만들게 하여 통증 부위마다 장치해 놓고 나사를 죄었다. 나는 그가 이것 때문에 신경을 다쳤고 마침내는 다리를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그 후 거의 항상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듯 다양한 인간 관계 속에 우뚝 서 있던 다재다능한 인간 라이프니츠, 그는 왕실과 제후들과도 밀접한 교분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1716년 70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당연히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왕실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거의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매장되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업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추측하건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자라고 일컬어지는 매우 작은 사물에 대한 특이한 이론을 주장한 것이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자는 실재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더 물으면, 대개는 침묵만이 감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사상에 대한 서술은 특히 그가 단자론으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는가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된다. 더 나아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실재를 그의 독특한 방식인 단자론적으로 해석하게끔 만들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우선 라이프니츠는 그의 위대한 선배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중요한 점에서 대립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사물의 실재를 연장된 것으로서 파악한다면 그 실재성은 충분히 이해된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관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단순한 연장성 만으로는 사람들이 어떤 사물과 관계할 때, 그 사물이 저항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동물의 경우처럼 동물들이 혼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실재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를 수용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힘의 개념을 도입한다. 개개의 사물은 모두 그 자신에 내재해 있는 힘, 다시 말해 활력의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적인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배후에 본래적이고 참된 실재성이 나타나니, 그것이 곧 비가시적인 힘의 세계이다. 이로써 단자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라이프니츠가 힘 개념으로부터 실재를 해석하고 있는 그 활력의 점이란 가장 작은 단위이다. 라이프니츠는 물론 단자들이 물질의 종류처럼 무수히 나뉘어질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나뉘어질 수 없는 근원적인 단일성이다. 이러한 단일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모나드"이다. 이런 까닭에 라이프니츠는 각각의 활력점을 모나드 즉 단자라고 부른다.
그는 특정한 실재 영역, 곧 생명체 혹은 유기체를 고찰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통찰을 얻게 된다. 이들 영역에서는 그것들에 내재해 있는 힘이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개개의 생명체는 자체 안에 그 생명체와 더불어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이끌고 조직하는 하나의 중심, 하나의 작용 원칙, 하나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이제 이러한 유기체를 본보기로 하여 모든 실재를 사유하여야 한다고 라이프니츠는 결론 내린다. 왜냐하면 죽어 있는 것이 생명체로부터 파악되어야지, 그 반대로 생명체가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파악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존재자에 있어서의 활력의 점은 유기체 안의 그것과 동일한 종류의 것들이다. 모든 가장 작은 단위, 즉 모든 단자들은 살아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나타나게 된다. "자연 전체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시각적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어떠한 물질이든 그 물질의 한 조각 한 조각은 나무와 풀로 가득 찬 정원으로 이해되거나 물고기가 많은 연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나무와 풀의 가지, 동물의 팔과 다리, 동물의 몸에 있는 물기 한 방울 등등은 또한 그런 종류의 정원이고 연못이다. 정원의 초목 사이의 지면이나 공기, 연못에서 노니는 고기 사이의 물 등은 식물도 물고기도 아니지만 그것들은 식물이나 물고기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다만 그 대부분이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따라서 우주에는 황폐의 사막, 불모의 땅, 죽음의 그림자란 전혀 없다." 무한하게 풍부한 실재의 왕국은 무한한 수의 살아 있는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단자들 하나하나는 각기 다르다. 이 말은 헤겔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풍자적인 말을 하게 하였다. "전해 오는 일화에 의하면, 서로 동일한 두 개의 사물이란 없다는 이 명제는, 라이프니츠가 머물고 있던 궁정의 정원에서 떠올랐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부인들에게 똑같은 두 개의 잎사귀가 있으면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다. 궁정에서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시대야말로 형이상학의 황금 시대가 아니겠는가! 그 시대에는 나무 잎사귀에 비료나 주면 되었지 애써 형이상학의 명제들을 검토할 필요는 없었다."
실재를 고찰하면서 이제까지 라이프니츠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존재 영역, 즉 정신적인 존재를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정신적 존재는 진정한 실재에 속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이제 그것을 그의 구상 속에 수용해야 한다. 그의 원칙에 의하면 상위의 것으로 하위의 것을 해석해야 하기에, 그는 모든 실재를 정신을 본보기로 유추해서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정신의 본질에는 이중적인 것이 있다. 즉 정신은 표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표상에서 표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제 단자의 본질을 정신으로부터 해석한다면, 모든 단자들에게 있어서의 표상과 추구라는 두 가지 계기를 기술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실재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실재의 본래적인 실재는 살아 있는 활력의 점으로서의 단자인데, 이 활력의 점은 표상과 추구를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이 사상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 사상에 의하면 의자, 책상, 침대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그러한 물질적인 사물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들의 실재는 오히려 표상과 추구의 능력을 갖춘 활력의 점들이다. 우리는 이 사상을 부족하나마 그대로 라이프니츠의 근본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죽은 존재자 내부의 활력의 점들은 단지 혼란한 표상만을-마치 인간이 정신을 잃었을 때, 그 사람 안의 표상이 그러하듯이-갖고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설명으로써 이 사상의 부족함은 약간 완화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아스러움은 여전히 남는다.
라이프니츠는 단자에 있어 혼란스러운 표상과 분명한 표상을 구별함으로써 단자의 영역에 독특한 단계를 도입한다. 가장 밑의 단자는 전적으로 혼란스러운 표상만을 갖고 있는 "조야한 단자"이다. 이 단자는 무기물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 위에 생명체, 유기체의 세계가 있는데, 여기의 단자들은 대부분 혼란스러운 표상을 가지고 있고 그 외에 몇 개의 분명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낫다. 인간의 인식이란, 그의 중심 단자 즉 인간 안의 다른 모든 단자를 통솔하는 그 단자가 혼란스러운 표상에서 분명한 표상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 즉 원초 단자는 전적으로 분명한 단자만을 가지고 있다. 신은 실재를 진리 안에 있는 그대로 본다. 즉 거대한 단자들의 왕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의 단자 구상에서 한 가지 어려움에 부딪친다. 즉 어떻게 단자들이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서도 사물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단자들 역시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 가능성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가 힘의 개념을 시종일관 논리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단자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단자 자체로부터 전개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는 용수철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용수철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작용은 그 자체의 내적인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단자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근거로부터 키워 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단자는 다른 단자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따라서 그러한 영향을 결코 발휘하지도 못한다. 이 사실을 라이프니츠는 창문이 없는 단자의 비유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한다 "단자에는 그 무엇이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할 수 있는 창문이 없다" 단자는 완전히 자족적이다. 그러나 이 경우 라이프니츠는 분명한 표상을 갖춘 단자가 어떻게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이 목적에 따라 그는 개개의 단자는 모두 내면에 혼란된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모든 다른 단자에 대한, 따라서 전체 현실에 대한 표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개개의 단자 안에 온 세계가 현존하고 있다. 개개의 단자는 "살아 있는 영속적인 우주의 거울"이고, "작은 우주"이다. 아니 그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신성"이다. 단자가 이미 항상 표상하고 있는 것에는 지금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이미 언젠가 존재했던 것, 그리고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까지도 속한다. 단자는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컨대 한 유럽인의 중심 단자는 자신 안에 천 년 전에 중국 해안을 떠다니던 작은 나뭇조각에 대한 혼란스러운 표상을 지니고 다닌다. 이것은 너무나도 엉뚱한 세계관이 아닐까? 만일 단자 하나 하나가 다른 것과 연관 없이 그 자체 고립된 채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극치에 이른 유아론이 아닐까? 만일 다른 단자가 연락해 오지 않는다면 의식을 갖추고 있는 단자는 어디서부터 그가 내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세계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결국에 가서 세계는 실제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표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결국 모든 실재는 단 하나의 유일한 주체를 제외하고는 단순한 가상이라는 절대적 관념론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는 무한히 많은 단자를 갖추고 있는 실재 세계가 하나 있다는 것을 근거 제시 없이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떻게 이러한 단자의 세계가 완전히 무질서나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는 두 가지 생각으로 대답을 한다. 한편으로 그는 단자 하나 하나에는 그 근원으로부터 내면의 법칙이 함께 주어져 있어, 이 법칙이 그 단자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예정 조화의 가설을 끌어들인다. 예정 조화설에 따르자면, 처음부터 제각기 다른 단자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자론의 의미로 보면 그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한 사람의 중심 단자에는 그 근원에서부터 이 순간 그 단자가 항상 이미 자신 안에 갖고 있던 다른 사람의 중심 단자에 대한 혼란스러운 표상을 분명하게 끌어올리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말해져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중심 단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 예정 조화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단자 전체가 어떻게 서로서로 조화를 잘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시대에 다른 대답이 가능하지 않았듯이 라이프니츠도 신의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물음에 답한다. 단자 하나하나에 내면의 법칙이, 그리고 단자 상호간에 조화가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다면, 이 일은 창조주인 신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자론에 대한 확고부동한 근거는 곧 창조 사상이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체계의 이러한 최고의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 증명에 착수한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를 상기시키는 그의 최초의 신존재 증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는 하나의 신에 대한 관념이나 하나의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에 대한 이념은 모든 완전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고 존재는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는 실재한다." 다른 증명은 영원한 진리 또는 본질, 예컨대 수학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진리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근원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지성, 즉 "영원한 진리의 영역"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지성은 "모든 가능한 사물의 이데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신은 세계 안에 있는 우연의 근거로서 증명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우연적인 것을 초월하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 근거가 곧 신이다. 끝으로 라이프니츠의 독특한 마지막 신존재 증명은 예정 조화의 체계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예정 조화의 체계는 단자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호 조화시키고 정돈해 주는 정신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곧 신이다. 단자론과 예정 조화실의 사상으로부터 신의 본질과 다스림도 규정된다. 신은 위대한 수학자와 같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개개의 단자에 내면적 법칙을 기획하여 전체의 모든 단자가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츠에게 신은 동시에 모든 단자들의 근윈이기도 하다. 단자는 신으로부터 "끊임없는 번갯불"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때 셀링이 보았듯이, "신은 흡사 실재를 잉태하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른 관점으로 단자 세계의 창조는 신이 개개의 단자가 대변하고 있는 무한한 관점들의 전부를 산출해 내는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 관점에서 세계란 신적 관조의 다양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세계가 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어떻게 세계에는 그렇게도 많은 고뇌와 불행과 악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그 시대가 특히 절박하게 몰두한 변신론의 문제, 신에 대한 변론의 문제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유한한 세계 전체 안에서는 바로 이 세계의 유한성 때문에 모든 것이 똑같이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선 속에 악과 불행도 섞어 넣어야 했다. 그럼에도 라이프니츠는 신은 그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에서 가장 최상의 세계를 선택하여 창조하였다고 확신한다. "선은 신으로 하여금 세계를 창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선이 지혜와 결탁하여 신으로 하여금 최상의 것을 창조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낙천주의에 대해 볼테르는 그의 9캉디드)에서 실제의 의문점들을 제시하며 온갖 조소를 퍼붓는다. 헤겔도 라이프니츠를 철저히 비판한다. 그는 단자론을 "형이상학적 소설"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모든 대립들을, 그 대립들 자체를 해결하지는 않고 신 안에서 힘들이지 않고 일치시켜 버리는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은 악의에 찬 말을 한다. "신은 흡사 그 안으로 모든 모순들이 흘러 들어오고 있는 시궁창과 같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소피스트
어느 날 한 소피스트(Sophist:궤변론자)가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왔다. 그는 예쁜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의 개인가?" 소피스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소크라테스가 물었다. "암컷인가 수컷인가?" 소피스트는 암컷이라고 대답했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물었다. "이 개는 어미인가 아닌가?" 소피스트가 말했다. "에미요."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그대는 암컷의 아들이구먼."
- 소피스트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완전하며 진실하지 않았고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논쟁하는 것만을 좋아한다.
|
|
|
문학자료 → 세계사 |
|
|
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3장 신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것인가? (4/4)
5) 박.석.김 3성 신화 - 신라 고구려의 경우, 처음에는 해씨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중에는 고씨가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백제에서는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도 해씨가 왕위를 차지하다가 부여씨에게 빼앗긴 듯합니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현상을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설명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지 않고 달리 해석하는 학자도 적지 않습니다만, 아직은 이른바 3성 교립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신라의 건국신화는 위의 3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박혁거세 신화 신라를 건국한 사람든 박혁거세라고 합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옛날 산골짜기에 고조선의 유민이 내려와 여섯 개의 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이 그것이다. 6촌에는 촌장이 있었으나 이들 통합해 다스리는 왕은 없어 사람들이 걱정했는데 마침 양산 아래 나정 부근에서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기에 가서 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붉은 빛의 큰 알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에 알을 쪼개니 사내아이가 나왔으므로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나온 알이 마치 박 크기만 하다고 해서 박을 성으로 삼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나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을 추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으므로 이름을 혁거세라고 했다. 혹은 불구내라고도 하는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위호는 거서간이라 했다. 한편, 사량리의 알영정에서는 계룡이 나와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느데 입이 닭의 부리같았다. 물에 아이를 씻기니 부리가 떨어져나가고 수려한 용모가 드러났다. 우물 명칭을 따서 이름을 알영이라 했다. 사람들이 두 아이를 잘 기른 뒤 13세가 되던 해에 혼인시키고 왕과 왕비로 맞이했으며(서기전 57), 두 사람을 두 성인이라고 일컬었다.
위의 축약된 설화를 통해 우리는 먼저 신라가 여러 개의 씨족 혹은 부족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가였음을 시사받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명맹 혹은 연합적 성격을 띠는 정치제라는 것이지요, 삼국유가의 기록에 따르면 앞의 6촌 중 양산촌은 급량부로 바뀌었으며, 고허촌은 사랑부, 대수촌은 점량부, 진지혼은 본피부, 가리촌은 한기부, 고야촌은 습비부로 각각 바뀌었다고 합니다. 6촌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서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씨족집단일 개연성이 높은 듯합니다. 6촌이 6부로 바뀌었다는 것을 자연촌락 혹은 족단적 성격을 지닌 사회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라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l 다만 그러한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서는 아직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부에서는 기록에 준하여 유리니사금 9년(32)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신라의 국가 형성 및 발전단계로 볼 때 너무 이른 듯합니다. 또 왕도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한 자비마립간 12년(469)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보다 조금 더 늦은 소지마립간 무렵(479~500)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위 신화의 주인공은 박혁거세입니다. 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알은 새가 낳는 것입니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하늘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해와 하느님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가 새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전령사입니다. 따라서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 곧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신라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박혁거세 신화와 같은 난생설화를 남방계설화로 분류하면서, 부여...고구려에서처럼사람이 햇빛 등에 감응되어 알을 낳는 식의 감정형 난생설화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신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붉은 색이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은 타오르는 불, 나아가 하늘의 태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박혁거세를 목욕시키니 그의 몸에서 광태가 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고 합니다. 광명천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붉고 밝은 현상을 이름에 적용한 것이 바로 '박'과 '력'이요, '불구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양신 숭배사상이 반영된 이름이지요, 거기에 덧붙여진 거세는 거서간의 '거서', 거슬한의 '거슬' 그리고 백제의 길지.길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옛 말입니다. 우리말을 중국문자인 한자 가운데 비슷한 음이 나는 글자에 맞추어 표현하다 보니 이렇듯 각기 달라진 것이지요, 따라서 박혁거세란 '밝은 임금'이라는 보통명사를 이름처럼 사용한 거이라 하겠습니다.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는 '거서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거서'가 군장처럼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한다는 것은 '거세'를 통해 이미 알았습니다. 그리고 간 역시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거서간'은 정치적 수장을 중복 존칭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신라느이 건국 시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박혁서세 신화에서 신라의 건국은 서기전 57년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간지로 나타내면 갑자년이 됩니다. 갑자년을 간지가 시작되는 첫 해입니다. 그래서 참위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는 해로 꼽아왔습니다. 바로 그러한 갑자년에 신라가 건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인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과거의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것이 다시 삼국사기와 같은 후대의 역사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는 서기전 57년에 건국했고,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건국한 것으로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국측 사서를 검토해보면 오히려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즉,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전'과 '고구려전'이 있는데, 거기에 고구려는 당시 상당한 국력을 지닌 국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백제전'과 '신라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전'이라는 항목에 마한 54개국 중 하나로서 백제국이 있으며, 진한 12국 중 하나로서 사로국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백제국이 백제의 초기 단계, 사로국이 신하의 초기 단계 명칭일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발전단계가 서로 다를 경우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는 쪽(백제.신라)보다 국가의 면모다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쪽(고구려)이 더 일찍 건국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중국측의 당시 역사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하의 건국의 순서를 추정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송서는 남제의 심약이 488년경에 편찬한 역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고구려전과 백제전이 전합니다. 북제의 위수가 554년경에 편찬한 위서에도 고구려전과 백제전만 전합니다. 신라전이 처음 보이는 것은 양서 단계에 와서의 일입니다. 양서는 당나라의 요사렴이 636년경에 편찬한 사서입니다. 그만큼 신라는 국가의 순서를 가늠하는 척조의 하나인 외교 면에서 백제에 현격하게 뒤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중국 사서에 기재되었느냐 아니냐가 두 나라의 국가 수준이라든가 건국순서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한반도의 국제정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들의 기록 유무를 일종의 참고자료로 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의 국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준을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전래 시기라든가 율령 반포시기 그리고 군사력의 비교 등입니다. 특히 4세기경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백제와 신라의 차이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황해도 일대를 놓고 일진일퇴의 호각세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고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에 사신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차이가 났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같은 측면 때문에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되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신라가 서기전 57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반드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조양동 고분군 등 경주지역에서 조사된 각종 유적을 통해 서기전 2~1세기경에 이미 정치체로 보아도 좋을 정도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연맹왕국이사의 국가와 서기전 57년경에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성읍국가 단계에 해당하는 구가로서의 사로국의 출현은 오히려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신라의 건국 연대에 대한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단순히 후대의 조작으로만 보아서도 곤란하다고 하겠습니다.
신라의 여성과 골품제 박혁거세 신화에서 특이한 점은 알영에 대한 부분입니다 왕비에 대한 신화를 따로 만들고, 왕비를 왕과 함께 '성인'이라고 칭송한 예는 우리 역사상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합니다. 출생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알영은 결코 박혁거세에 뒤지지 않습니다. 계룡이란 닭을 닮은 용이란 뜻이겠는데, 나중에 알게 되듯이 닭은 김씨족의 토템이자 국가의 상징으로 작용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알영은 장차 국가의 주인이 될 김씨들의 원조로 보아도 무방한 일물이라 하겠습니다. 알영신화를 통해 받는 신라의 국가 이미지는 성차별이 적은 사회입니다 가부장적인 권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사회, 나아가 남성과 여성이 비교적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독 신라에서는 3명의 여왕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라가 현대사회처럼 자유주의에 입각한 개방적인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혈통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위치를 평가하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신분제란 바로 골품제를 지칭한 것입니다.
골품제는 성골.진골로 나뉘는 골과 육두품.오두품.사두품 등의 품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왕위는 물론이고 정부의 각 부서 장관과 군부대 지휘관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골' 신분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품'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 '골'신분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품'에 속하느 사람들은 그들 '골'족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적어도 7세기전까지 성골은 왕실의 구성원에 한정되었고, 진골은 그밖의 귀족층에게 적용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성골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골은 박.석.김씨에 한 정되었습니다. 진골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모두 진골이어야 합니다. 만약 부모 가운데 한명이 6두품이라면 자식은 당연히 사회적 지위가 6두품으로 강등되어 신라의 17개 관등 중 제 6등급인 아찬의 지위보다 더 높아질 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 정부의 각 부서에서 차관이상의 지위로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각 부서의 중간관리자이자 일선책임자에 해당하는 대사가 대부분 육두품에 속한 사람들의 일자리였던 듯합니다. 오두품은 더 낮은 지위인 제10등급의 대나마가 한계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의한 등의 기술직에 종사했으며, 각 부서의 실무진에 해당하는 사지의 직위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출세였을 것입니다. 사두품 역시 대부분 기술직이나 각 부서의 말단 실무진이었던 사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제 12등급인 대사까지만 승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혈통입니다 누구의 피를 이어 받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기준이지요, 그런데 만약 한쪽의 혈통만을 중시한다면 지배층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배층의 권위는 물론 그들 내부의 이익 역시 현저하게 감소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혈통을 모두 중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혈통 중시는 보통 여자의 입지를 한껏 올려놓을 수는 있는 최상의 여건입니다 그래서 유산 상속도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도 상속의 개념이 적용되는 부문입니다. 왕위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남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틱으로 했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 남자가 없을 경우 다른 혈동의 남자를 계승권자로 인정하기보다 여자로 하여금 계승토록 하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골품제와 같은 엄격한 신분제는 필연적으로 족내혼을 수반하게 됩니다. 혈통을 중시하므로 근친혼이 성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법흥왕에게는 지소라는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딸을 법흥왕의 동생, 그러니까 자기의 삼촌인 입종에게 시집을 갔고,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입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혼인시킴으로서 혈통의 순수성을 이어가겠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신라 골품제의 핵심입니다.
석탈해 신화 박혁거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남해입니다. 박혁거세와 알영의 아들인 남해는 차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무당을 의미하는 방언이었습니다. 고급스럽게 표현하면 제사장이지요. 신라의 왕이 아직 제사장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차차웅은 자충으로도 기재되었는바, 이것이 불교 승려를 가리키는 '중'이라는 말과 통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렇하면, 신라에서 기존의 무당이 누리던 지위가 불교가 전래된 뒤에는 불교 승려에게로 계승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물론 그렇더라도 신분과 정치적 기능은 많이 달라졌겟지만.... 여하튼, 탈해신화는 남해 차차웅 때를 배경을 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재된 신화를 간략하게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타나국의 왕이 여왕궁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알을 버리게 했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각종 보물과 함계 알을 독 속에 놓은 후 배에 태워 바다로 떠나 보냈다. 배는 물길을 따라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도착했으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다시 길을 떠나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했다. 어느 날 해변에 살던 노파가 하늘에 까치가 모여 울고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보니 배에 궤짝이 있고, 그 속에는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노파가 아이를 거두어 이름을 탈해라 하고, 까치 작자에서 조를 빼낸 석을 성으로 삼았다. 탈해는 그러던 어는 날 성장하여 키가 9척이나 되었으며, 학문에 힘써 지리까지 통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경주 지역을 내려다 보더니 양산 아래에 있던 호공의 집이 길지임을 알아채고 내려가서는 그 집이 자기의 집이라고 우겼다. 시비가 일자 관가에서 재판하게 되었는데, 탈해는 미리 그 집 땅에 숯을 묻어놓은 뒤 '그 집은 대장장이였던 우리 선조의 집이다'라고 주장했다.이에 사람들이 호송의 집 한켠을 파보니과연 숯이 나오는지라 탈해의 말을 인정했다. 호공의 집이 있던 곳은 나중에 월성이 되었다. 탈해가 집을 빼앗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그가 매우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남해왕은 탈해에게 자기의 맏딸을 시집보내는 한편, 대보로 삼았다. 남해왕이 죽을 때 '아들이냐 사위이냐를 따지지 말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했으므로, 남해왕의 아들인 유리와 탈해 가운데 한 사람을 다음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는 속설에 따라 떡을 깨물게 하여 비교하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았다. 그래서 유리가 왕위를이었으며, 칭호를 이사금이라 했다. 유리는 34년간 재위하다가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석탈해의 고향 위의 설화는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여 주목을 맏아왔습니다. 우선 사람이 낳은 알을 통해 태어난다는 점에서 똑같으며, 어머니가 물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연관성이 인정됩니다. 또한, 자신의 출생지를 떠나 따른 곳에 정착할 때 기지로써 근거를 마련한다는 발상도 같습니다. 즉, 탈해가 꾀를 내어 호송의 집을 빼앗는 장면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 비류국과 서로 우열을 겨룰 때 어느 쪽이 더 전통 깊은 국가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자 궁실의 기둥과 자재를 마치 오래된 것인 양 변조시킴으로써 비류국왕의 양보와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삼국유사에는 탙해가 궤짝에서 나오자마자 토함산 꼭대기로 올라가 석총으로 만들어 놓고 그안에서 7일 동안 머물다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의 석총이 고구려식의 적석총을 의마하는 것이라면 탈해집단이 혹여 고구려계가 아닌가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마침 탈해는 자신의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했으므로, 이를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지닌 북방계 이주민의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해봄 직합니다. 물론 탈해가 바다를 이용해 신라로 이주했다는 신화의 일부 내용을 참작하면, 탈해를 해양계 이주집단의 상징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후 신라의 수준 등과 바다와 관련된 일에 많이 종사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금관가야국과 충돌한 것이 설화에 반영되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탈해가 호공에게서 빼앗은 집이란 지금의 월성입니다. 월성은 신라의 왕성이었던 곳입니다. 따라서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는 대목은 장차 일어날 왕위계승을 암시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탈해는 왕위를 탈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남해왕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것은 탈해집단이 무력으로 경주 지역으로 제패한 것이 아니라 토착집단과의 제휴를 통해 정치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알지 신화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탈해니사금은 서기 57년에 즉위했다고 합니다. 물론 기록 그대로 믿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연대를 무시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 초기사에서 연대 문제는 매우 복잡한 부분이므로, 여기에서는 따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일단 미흡하나마 삼국사기의 기록에 준하여 설명하겠는데, 나중에 경주 김씨는 물론 신라의 국조로까지 추앙되는 김알지는 탈해니사금 9년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알지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탈해니사금 9년 봄 3월이었다.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새기를 기다린 다음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조그만 궤짝이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아뢰자,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더니, 그 속에는 조그만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와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늘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거두어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빛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김을 성으로 삼았다. 시림의 명칭을 바꾸어 계림이라 하고, 그것을 국호를 삼았다.
김알지의 탄생과정은 박혁거세의 탄생과정과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흰 말이 흰 닭으로 바뀌고, 붉은 색 알이 금빛 궤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기재된 알지신화를 참고하면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공통점은 더 많아집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영평 3년(60) 8월 4일이었다.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다가 시림 속에서 매우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우고 구름 속에는 황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는데, 빛은 궤짝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왕에게 아뢰자 왕이 숲으로 행차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있다가 곧 일어나 혁거세의 고사처럼 했다. 그래서 그 말에 따라 알지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는 그곳 말로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중략) 왕이 길일을 택해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에게 양보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빛 궤짝에서 나왔으므로 김을 성으로 삼았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유를 낳고 수유가 욱부를 낳고, 욱부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게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의 알지신화는 마치 삼국사기에 생략된 부분을 보충 설명하는 듯한데, 붉은 구름 운운한 대목과 밝은 빛 운운한 대목은 태양신 숭배사상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혁거세의 고사라는 것은 사람들이 알을 깨뜨리니 알 속에 있던 박혁거세가 사람들을 처음 보고 "알지 거서간이 한번 일어났다"고 말했다는 대목을 가리킨 듯 합니다. '알지'가 어린아이를 가리킨다고 설명한 부분도 참고가 됩니다 어린아이를 지역에 따라 '아기' '애기' '아지' 등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알지를 '낟알'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 곡령신앙의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신라와 계림 신화에 따르면 김알지는 신라 김씨, 곧 경주 김시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숲을 신성시해 시림 혹은 계림이라 했고 계림은 국가의 별명으로까지 이용된 것입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신라의 국호화 별명은 참을 많습니다. 먼저, 국내 기록에서 신라의 국호와 관련된 명칭을 찾아보면, 서벌.서나벌.서야벌.서라벌.사로.사라.시라.계림.계귀.추림.신로.구구타예설라 등이 있습니다. 중국측 기촉에는 사로.사라.계귀.신로.신라.구구타예설라 외에 설라라고 적은 곳이 있습니다. 일본 기록에서는 신라.신량.사라.계림.지라기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를 국호로 사용한 것은 지증왕 4년(503)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편, 알지가 신라 김씨의 시조라는 기록은 약간의 검토를 필요로 합니다. 신라 흥덕왕릉비문에 '태조 성한'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란 시조왕을 뜻합니다. 신라의 김씨는 자신들의 시조를 성한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표현했던 것입니다. 흥덕왕에 앞선 문무왕릉비문에는 '15대조 성한왕'이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비문은 당시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신라인들은 과연 누구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겼는지 가장 분명하게 알려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신라 당시의 자료에서는 한결같이 '알지'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성한'이라는 인물이 나올 뿐인데 여기의 성한이 알지와 동일인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알지라는 인물의 실존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신화이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탈해왕 때의 인물인지 그리고 알지 - 세한 - 아도 - 수유 - 육뷰 - 구도 - 미추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시실인지를 달리 확인할 길도 아직 묘연합니다. 그래서 신화를 동반한 족보를 볼 때는 매우 신중해져야 합니다. 신화를 그대로 믿어 역사에 반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특히 신화 속의 '신간을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이유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검토하는 가운데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요?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起死回生(기사회생) 起(일어날 기) 死(죽을 사) 回(돌이킬 회) 生(날 생)
사기(史記) 편작창공(扁鵲倉公)열전에는 춘추(春秋)시대의 명의(名醫) 진월인(秦越人)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월인은 당시 의원(醫員)이었던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워 천하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설속의 신의(神醫)인 편작(扁鵲)이라 호칭하였다.
백성들을 치료해 주며 천하를 돌던 어느 날, 그는 괵나라를 지나면서 멀쩡하던 태자(太子)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왕의 부름으로 입궐하여 태자의 상태를 검사하였다. 태자는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 진월인은 태자에게 침을 놓았다. 잠시 후, 태자가 깨어나자, 그에게 처방문을 써주었다. 그의 처방대로 치료를 받은 태자는 한 달도 못되어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진월인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로 하여금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越人非能生死人也. 越人能使之起耳). 라고 하였다.
起死回生(Restoration of the dead to life) 이란 죽을 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남 을 뜻한다.
…………………………………………………………………………………………………………………………………
|
|
|
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
|
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4. 수:암 - 50/1의 곤충
중국의 진나라 차윤이 반딧불이로, 손강이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형설이란 말이 생겼다는데 갖은 고생을 하여 학문을 닦았을 때를 두고 형설지공이라 부른다. 실은 필자도 그놈을 몇 마리 잡아 병에 넣고 시도해봤으나 책읽기에는 얼토당토 않기에 그저 반짝거리는 똥구멍을 잘라내 이마에 짓눌러 문지르고 귀신놀이했던 기억이 있다. 이마 외에도 볼따귀에 문질러 인디언놀이도 했으니 그것이 곧 형광이다. 형광은 열을 덜 내는 특징이 있다. 깜빡깜빡 빛이 나면서 조명탄같이 흩날리는 개똥벌레는 여름밤의 대명사였으나 지금은 보호지역에서나 가끔 보게 되었고 마을 근처에서는 눈을 닦고 봐도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이 반딧불이를 연구하는 데 제일 어려운 일은 채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은 유충을 많이 잡아야 실험실에서 사육하여 발생, 생태 등을 연구할 텐데 말이다. 반딧불이를 못 보는 세상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싶지만 모두가 자승자박이요, 자업자득인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것이라 하니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자연을 해코지 말고 제대로 두어야겠다.
반딧불이는 절지동물문의 곤충으로 딱정벌레목에 속하는데 보통 말해서 갑충이라 부르며 앞날개는 두껍고 딱딱하나 뒷날개는 얇아서 살포시 날아 앉아 있을 때는 앞날개에 덮여서 보이지 않는다. 무당벌레, 길앞잡이, 바구미 등이 반딧불이와 비슷한 갑충으로 동물 중에서 가장 많은 것(70퍼센트 이상)이 곤충이고 그 중에서 제일 다양한 것이 이 갑충이라니 이들을 지구의 주인이라 불러도 될 성싶다. 영어로는 반딧불이를 파이어플라이(firefly)라고 해서 '불빛을 내는 파리'라는 뜻이 되겠으나 사실 파리(fly) 무리는 아니다.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생물을 발광생물이라 하는데 이렇게 빛을 내는 생물에는 세균에서부터 버섯, 지렁이, 지네, 오징어, 메기, 심해어 종류 등 수없이 많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특이한 적응을 한 것이다. 그리고 반딧불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개똥벌레가 표준어로 되어 있고 이외에 반딧불, 반디, 반되불, 반두, 까치불, 고개빤드기 같은 단어만 나와 있는 경우도 있다. 생물의 용어 통일이 늦은 것도 문제지만 출판사 사람들도 전공학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국어학자들 이름만 빌리다 보니 그렇게되기 일쑤다. 뭐니뭐니 해도 생물의 이름은 생물명명집에 올라 있는 것을 본디 이름으로 써야 하고 반딧불이도 '곤충 명명집'에 표준어로 당당히 표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생물의 국명은 명명집이나 도감의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어쨌거나 반딧불이는 완전변태하는 놈이라 알 유충(애벌레) - 번데기 - 성충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반딧불이의 유충이 사는 곳은 종에 따라 달라서 애기반딧불이(Luciola lateralis)는 알을 물가의 이끼에 낳고 부화된 애벌레는 물에서 살며, 꽂반딧불이(Lucidina bipligiata)나 늦반딧불이(Lnychuris rufa)는 육상종이라 알을 식물 뿌리에 낳고 새끼는 풀밭에서 산다. 반딧불이는 세계적으로 130여 종이 되고 우리 나라에는 여기에 예를 든 3종 외에도 5종이 더 있어 모두 8종이 기재되어 있으나 그 중에도 우리 나라를 떠난 것이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음울해진다. 근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에 사는 고등 동식물 180여 종이 멸종된 것으로 발표되고 있는데 하등 동식물까지 넣으면 그것의 몇십 배가 넘을지도 모른다.
먹지 않고 짝짓기에만 열중하는 반딧불이 반딧불이는 보통 6-9월에 활동을 주로 하는데 이들은 성충이 되고 고작 일주일 정도 살면서 짝짓기를 끝내고 산란하고 나면 곧 죽는다. 그래서 하루살이 같은 곤충과 마찬가지로 성충은 지방 성분을 많이 비축해놓고 있어 먹지 않고 새끼치기에만 정신을 판다. 알은 1개월 후 부화되어 유충이 되며 유충 상태로 월동(겨울나기)을 한다. 다음해 4월경이면(빨리 나오는 종) 월동에서 깨어난 유충은 무럭무럭 자라면서 6-7 회 탈피를 하고 탈바꿈하여 번데기가 된다. 그런데 이들 유충들이 뭘 먹고 사는가가 궁금하지 않은가. 육상종은 주로 육상 달팽이를 잡아먹고 수서종은 역시 권패인 물달팽이나 다슬기를 먹는다. 그래서 반딧불이를 사육하기 위해서는 달팽이나 다슬기를 채집하고 키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땅속으로 들어간, 생명을 잉태한 반딧불이 번데기는 40-50일 정도 긴 잠을 잔 후에 날개가 생겨 처녀비행을 하고 나서 일주일간 짝짓고 그렇게 죽어간다. "반딧불이로 별을 대적할까"라는 말이 있는데 달걀로 바위를 치는 꼴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으로 반딧불이가 뿜어내는 불빛이 미약하기 짝이 없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반딧불이의 새끼가 물과 땅에 사는 놈이 따로 있듯이, 활동도 다양하게 낮에 활동하는 주행성과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 있어 우리가 주로 보는 것은 야행성이다. 빛은 야행성이 더 강하게 내고 반짝거리는 발광주도 종에 따라 다를뿐더러 서식제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하니 사람 얼굴이 하나같이 다른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정겨운 반딧불이는 똥구멍에서 빛을 내는 것일까. 똥구멍이라 했지만 복부 체절 끝에 발광기가 있는데 수놈은 6-7째 마디에 암놈은 6절(6째 마디)에 있어 암놈보다 수놈 것이 더 크고 밝다.
곤충들이 서로를 알리는 의사소통 방식에서 개미나 벌은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을 분비해서 그 냄새를 이용하고 매미나 귀뚜라미는 소리를 쓰는데 이 반딧불이는 빛으로 하는 것이다. 수놈이 일정한 주기로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면 같은 종의 암놈이 용케도 나 여기 있다는 반응신호를 보내 서로 만나 짝을 짓다니 이것을 어찌 미물들이 하는 짓으로만 보겠는가. 그리고 반딧불이는 성비가 다른 동물들과 달라서 그 값이 50이나 되는 놈이 있다. 다시 말하면 수:암 - 50/1로 암놈 한 마리에 수놈이 쉰 마리나 된다. 그래서 암놈 쟁탈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마흔아홉 마리는 들러리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일까. 이런 성비가생물학적으로 어떤 점이 유리할까 하는 질문에 좋은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독자 여러분의 판단은 어떠한지 나름대로 추리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들은 해가 지고 20분 후에 성적으로 가장 활발해지는데, 이 시간이 되면 암놈이 굴에서 기어나와 깜박이로 하늘을 나는 수놈을 땅으로 유인해 90초 정도 교미하고 바로 제 굴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산란을 준비하고 그 굴이 무덤이 된다.
번데기에서 성충이 되어 나올 때 몸 속에는 충분한 지방덩어리를 가지고 나왔기에 먹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짝찾기에만 미쳐 깜빡거리고 있는 것이다. 종족보존을 위해서는 이렇게 모든 생물들이 기막힌 작전과 장치를 가지고 있다. 딱 하나 덧붙인다면 대부분의 곤충은 페로몬을 분비하여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는데(냄새가 멀리까지 날아간다) 이놈들은 빛으로 하니 아마도 빛의 감각이 둔화되어 암수가 서로 만나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진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반딧불이를 잡았을 때 빛은 나건만 열이 없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생물들의 빛은 냉광으로, 특히 반딧불이는 루시페린(Iuciferin)이란 물질이 산화되어 빛이 나오는데 산화될 때 생기는 에너지의 98퍼센트가 빛으로 바뀌고 2퍼센트 정도만이 열을 낸다고 한다. 때문에 찬 빛이 나는 것이다. 사람이 먹은 음식은 산화되어 약 40퍼센트가 ATP라는 형태로 에너지 전환이 일어나고 나머지 60퍼센트는 열로(체온보존에 쓰인다) 바뀌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먹고 살 만해져서 해외여행(여행이 아닌 관광이 더 많을지 모르겠다)이 부쩍 늘어 호주나 뉴질랜드로도 많이 간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들리게끔 짜여 있는 코스에 웨이모도 동굴이 있어 그 천장에서 은하수를 보는 것은 정말로 장관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빛을 내는 동물은 반딧불이가 아니고 파리의 일종인 발광버섯파리의 유충이 내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가도 좋을 성싶다. 안내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고 파이어플라이(firefly) 하니까 반딧불이로 설명할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그 파리의 유충들이 명주실을 쳐놓고 빛을 발해서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꼬드기느라 그렇게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이다. 동굴에 살기에 어미 파리는 눈이 퇴화되어 있다고 한다.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면 반딧불이 세계에도 경쟁(다툼), 사기(속임수), 포식(잡아먹기)이 있어서 반딧불이 중에 왁살스런 Photuris versicolor라는 종은 암놈이 육식을 하는데 별명이 femme fatale로 붙어 있으며 우리말로는 요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은 종마다 고유한 신호체계를 갖는데 단위 시간에 얼마나 길게, 몇 번이나 깜박이는가 하는 그 주파수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놈은 다른 수놈 반딧불이의 신호를 흉내낸 가짜 신호로 수놈을 유인해서 가까이 다가오면 냉큼 나꿔채서 잡아먹는다고 한다. 꾀 많은 여우의 꾐보다 더하다.
생물계에는 별난 일이 다 일어나니 이렇게 다른 종과 비슷한 행위를 하거나 몸이 닮거나 유한 색을 갖는 것을 의태라 한다. 정녕 의태는 적응 방법의 하나로 모두가 공격하고 살아남기 위한 죽살이치는 별난 수법이다. 이제 어떡하면 우리나라의 반딧불이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이놈들이 못사는 세상(자연)은 사람도 못살 곳이기에 걱정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이 동물은 강이나 냇물의 맑기를 알려주는 지표생물로 이놈들의 먹이인 다슬기나 달팽이가 살도록 하면 된다. 먹이가 죽으면 이들도 따라 죽게 되어 있으니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농약이나 제초제 사용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들은 강이란 강은 깡그리 파헤치고 둑을 쌓고 해서 잔챙이 물고기 새끼도 제대로 못살게 만들어놓고 있으니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좁은 소견인가. 게다가 개천의 둔덕에 흙과 풀이 없으니 반딧불이가 알을 낳을 곳이 없는 것이다. 이런 절규를 우이독경으로 흘려 듣는 귀에 말뚝을 박은 정책입안자들은 분명 좋은 내세를 맞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자동차 꽁무니의 점멸등의 반짝거림을 볼 때마다 고향 하늘에도 저렇게 지천으로 개똥벌레가 흩날렸으면 하는 바람과 시샘의 눈길을 보낸다.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