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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64호
2012.5.11 (음 3.21)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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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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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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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 세상을 움직여 가는지 이해할 나이가 되면 당신은 현기증이 심해서 그것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된다. - C.R.깁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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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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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기
지난 봄날의 하루가 떠오른다. 옷장을 열어 본 아내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옷이 없다’고 했던 날이다.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멋쩍게 웃는 나와 달리 중학생 딸은 그 뜻 알겠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이 얘기를 들은 갓 스물의 여학생들은 ‘여자는 철이 바뀔 때마다 입을 옷이 없는 게 맞다’며 깔깔 웃는다. 남자들은 모르는 ‘여성 공감’의 힘이다. 한마디로 ‘입을 옷이 없다’는 뜻은 ‘입을만한 옷’이 없다는 뜻이니, 곧 ‘(맘에 드는) 새 옷이 없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봄의 문턱을 넘어서나 싶더니 초여름 날씨가 이어진다. 환절기가 짧아진 것이다. 환절기(換節期)는 뜻 그대로 ‘철이 바뀌는 시기’이다. 철이 바뀔 즈음에는 큰 일교차로 면역력이 떨어지기에 건강상품이 인기를 끈다. 옷장 열어보며 한숨 쉬는 여성들을 위한 패션상품도 쏟아져 나온다. ‘환절기 건강’, ‘간절기 패션’처럼 같은 때를 두고 표현이 달라지기도 한다. 인터넷 검색 결과를 보면 쓰임의 차이가 또렷해진다. ‘환절기 건강’(약 400만건)-‘간절기 건강’(약 70만건), ‘환절기 패션’(약 100만건)-‘간절기 패션’(약 330만건)이다.(구글 검색) ‘간절기 패션’(약 1880건), ‘환절기 패션’(약 880건)처럼 뉴스 검색 결과도 다르지 않다.(네이버 검색)
1990년대에 등장한 ‘간절기’는 2000년 국어원 신어자료집에 오르면서 세력을 얻는다. 뜻풀이는 ‘한 계절이 끝나고 다른 계절이 올 무렵의 그 사이 기간’이니 ‘환절기’와 다르지 않다. ‘간절기’는 일본어 ‘셋키노 아이다’(節氣の間, 절기의 사이)의 ‘간’을 앞에 앉혀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절기(節氣)는 ‘계절 바뀜’과 무관한 것이니 ‘간절기’를 우리말답게 쓴다면 ‘주로 패션업계에서’처럼 쓰임을 명시하고 한자(間節期)도 밝혀야 한다. 수다한 동의어와 유의어는 말글살이를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혼란을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외래어의 된소리 표기
외국어의 발음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겼을 때 '쌔끼' '씨빨' '쌍' '또라이' '똥꼬' 등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이들 발음을 그대로 표기한다면 우리말로는 욕이 되거나 웃음이 절로 나오는 말이 된다.
외래어 표기 원칙 가운데 중요한 것이 된소리(경음)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지음이 된소리인 'ㄲ, ㄸ, ㅃ, ㅆ, ㅉ'으로 발음되더라도 각각 거센소리(격음) 또는 예사소리인 'ㅋ, ㅌ, ㅍ, ㅅ, ㅊ'으로 대입해 표기한다. 우리말은 표기하지 못할 발음이 없을 정도로 우수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외래어 표기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외국어의 모든 발음을 그대로 적거나 별도의 자모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표기 원칙에 반영됐다.
까페→카페, 씨스템→시스템, 싸이클→사이클, 빠리→파리, 르뽀→르포, 삿뽀로→삿포로, 광뚱→광둥 등이 된소리에 가까운 현지음을 우리말로는 거센소리 또는 예사소리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들이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아랍어 등 대부분의 언어를 표기하는 데 이 원칙을 따른다. 다만 예외적으로 중국어 표기에서는 'ㅆ, ㅉ'을, 일본어 표기에서는 '쓰(つ)'를 쓴다. 푸켓→푸껫, 호치민→호찌민 등처럼 동남아 2개 언어(태국어.베트남어)에서도 된소리를 사용하기로 최근 규정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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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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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을 위한 서정시 - 허혜정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들 뭔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나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들 흥나는 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내심 옆 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넘겨짚진 않지만,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건 벽 너머 세상, 어쩌면 그 호기심조차 다 똑같은 목적 때문이라 생각할지 모를 그래서 혹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해왔을지 모를 그들
하지만 성공까지는 바래본 적이 없다 종이가 무엇이란 걸 알기 때문에 목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다 닥치는 대로 쓰고 핸들을 돌리고 돌리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맞을지 모를 숫자를 찾아 한 칸씩 한 칸씩 정교하게 조합해 맞춰보는 퍼즐 반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향을 틀었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바보같이 머리를 쳤다 알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다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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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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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앓이(4) - 서공식
한걸음 물러서는 노을에 기대서서 뒤채는 속앓이가 어스름을 다지는데
울음의 뒤 끝이거니 꽃비가 쏟아진다.
결코 다시 못 올 것들 미련스레 부여잡고 흐름에 어울리는 한 줌 여유 못 갖춘 채
떨어진 꽃잎을 좇아 우수(憂愁)만 쌓여가고......
봄인데도 저문 날이 가까이 서성이고 어쩌면 이 서러운 날 한 가닥 위안일까.
쓸쓸한 초저녁별이 바스러지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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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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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삶의 방식 - 네자루의총(포 건스 : 오글라라 수우 족)
"진실이 담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영원히 기억된다. 그러면 그는 결코 그것을 잊는 법이 없다."
나는 일전에 워싱턴에 있는 문명인 대추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만찬에도 참석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다르다.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담배를 피운 뒤 헤어지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다. 그것이 우리를 초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얼굴 흰 사람들의 방식은 다르다. 그들은 음식을 먹고 난 뒤 어리석은 우스갯소리를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떠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초대한 사람도 기분이 좋아진다. 문명인들의 방식에는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나를 초대한 사람(인류학자 클라크 위슬러)은 우리 인디언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이야기들을 여러 권의 노트에 깨알같이 적어 놓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뭐든지 글로 기록하며, 그래서 항상 종이를 갖고 다닌다. 그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워싱턴에는 그들이 우리 인디언들에게 했던 약속을 기록한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그걸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를 초대한 주인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자신이 여러 권의 노트에 열심히 적어 놓은 우리 인디언의 이야기들을 그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현대 문명인들이 그것을 읽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렇긴 해도 우리는 당황스럽게 짝이 없다. 도대체 왜, 그들은 무엇이든지 종이에 적어 놓으려고 하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문명인들이 나타났다 하면 항상 종이에 적는 일이 시작된다. 우리가 설탕이나 차를 사러 가도 백인 장사꾼은 장부에다 열심히 기록한다. 의사들까지도 환자가 옆에 앉으면 종이에 뭔가를 기록하려고 연필부터 집어든다. 나는 야만인이라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이겠지만, 문명인들은 종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것들이 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인디언은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 진실이 담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영원히 기억된다. 그러면 인디언은 결코 그것을 잊는 법이 없다. 반면에 문명인들의 경우는 한번 서류를 잊어버렸다 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설교하기를, 위대한 책 속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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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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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0장 자연의 즐거움
3. 암석과 수목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다. 네모 반듯한 집을 짓고, 그것을 한 줄로 차례로 늘어놓고는 나무도 없는 똑바른 길을 만들어 나간다. 구부러진 길이나 옛날식 집은 이미 없어지고, 정원에 우물이 있는 집은 어디를 보나 찾을 길이 없다. 도시 한 복판에 내 사사로운 정원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것은 도리어 꼴불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에서 자연을 쫓아내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다. 건물의 실용적 방면에 대해서만 까다롭게 늘어놓는 바람에 건축업자들도 넌더리를 내어 실용 이외의 일은 대강 아무렇게 해치워 버린다. 지붕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다. 옛날 모양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만다. 오늘날 일반건축물을 물건에 비한다면 나무토막 쌓기 놀이라고 할까. 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아이가 다 쌓아 올리기도 전에 그만 싫증이 나서 뚜껑도 해 덮지 않고 미완성인 채로 팽개쳐 두었다. 현대 문명인에게 자연의 정신은 완전히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나무까지도 문명화하려는 모양이다. 큰 거리에 나무라도 심으려고 하면 우선 나무에 번호를 달고 소독을 하고 가지나 잎을 자르고 사람의 머리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동그라미나 별 모양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을 심는 일은 흔히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심은 꽃이 조금이라도 줄이 흐트러지거나 하면 마치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생도들이 보조를 흐트러뜨린 것을 보았을 때처럼 이맛살을 지푸리고 당장 가위를 댄다. 베르사이유 정원에는 원추형으로 나뭇가지를 다듬은 한 쌍의 나무가 완전한 원형이나 직선형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다. 인간 세상의 영광과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제복을 입은 병사처럼 나무를 훈련하는 인간의 능력이란 이런 것인가. 만일 한 쌍의 나무 중의 한 쪽이 너무 자라기라도 하면 그것만으로 균형과 영광과 권력이 손상된 것처럼 곧 머리를 잘라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을 회복하여 가정 안에 되찾으려는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울적한 이야기다. 흙을 떠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로는 제 아무리 예술적 재능에 뛰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돈이 있어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얻었다 하더라도 작은 풀밭이나 우물이나 참대밭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 있다. 이 정도까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높다란 마천루나 밤에 불 켜진 창문의 행렬 외에 관상할 만한 것이 어디에 남아 있는가. 마천루나 불 켜진 창문의 행렬을 우러러보면 인간은 더욱 그 문명의 힘을 자만하게 되어,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작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가망이 없는 것으로서 포기해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게 땅을, 더우기 충분한 땅을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유는 어떻든 인간에게서 땅을 빼앗아 버리는 문명은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장래의 문명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1에이커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선 무엇이든지 해내기 시작할 것이다. 나무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고, 돌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우선 주의하여 잘 자란 나무가 있는 땅을 선택할 것이다. 잘 자란 나무가 없다면 버드나무나 참대처럼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를 새장에서 기르지 않아도 된다. 저절로 새가 모여 든다. 더욱 더 주의하여 가까운 곳에 개구리나 또 될 수 있다면 도마뱀이나 거미 따위도 살 수 있도록 손질을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유리 상자에 넣은 자연이 아니라 천연적인 자연 그대로를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오는 모양을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보스턴의 <선량한 가정>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과 번식에 대한 탄식할 만한 무지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도마뱀과 거미와의 싸움을 관찰하는 재미도 맛볼 수 있을 것이고, 진흙투성이가 되는 재미도 맛볼 수가 있을 것이다.
바위에 대한 중국인의 정감에 관해서는 이미 앞의 절에서 조금 말해 두었다. 그 설명에서 중국의 풍경화가가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적인 해설에 불과하여, 돌로 만든 동산이나 암석 일반에 대한 중국인의 기호를 설명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바위는 거대하고 단단하며 유구함을 연상케 해 준다는 것이 그 근본적인 생각이다. 바위는 말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며 대영웅과 같은 굳센 성품을 지니고 있다. 속세를 떠난 학자와 같이 고고 초연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바위는 또 그 어느 것이나 고색이 창연하다. 그런데 중국인은 무엇이든지 옛것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 특히 예술적으로 보면 바위는 위대하고 장중하며 기이하고 기괴하다. 더우기 또 <위>라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은 <험>에 통하는 말이지만 도저히 그 진의를 번역해 낼 수가 없다. 지상 3백척, 깎아지른 듯이 솟은 절벽은 <위>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찰해야겠다. 날마다 산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바위를 가정에 가져다 놓을 필요가 생기게 된다. 바위 동산이나 석굴은 중국을 두루 돌아다닌 유럽인의 이해와 감상은 곤란하겠지만 역시 기초, <위>, 장중한 바위의 산봉우리가 이어진 모습을 본뜨려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유럽인을 나무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위 동산이나 암굴의 대부분은 터무니 없는 취미로 만들어져서, 자연의 웅대하고도 장중한 정취가 옮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석굴은 몇 개의 돌을 시멘트로 이어 붙였다. 마치 시멘트로 만든 구경거리다. 참으로 예술적인 축산은 회화의 구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인공으로 된 암석 세공의 예술적 감상과 풍경화 중의 바위산의 예술적 감상과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대의 문인 두관이 바위에 관한 <운림석보>라는 책을 저술하고 있고, 또 송대의 화가 미불이 연석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점은 능히 수긍이 갈 것이다. 이 책에는 축산에 쓰이는 각지의 바위 수백 종의 성질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있어 이 위대한 송대 화가의 시대에 축산술이 벌써 고도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산꼭대기의 웅대한 바위를 감상함과 병행하여 그것과는 다른 입장에서 정원석을 감상하는 일이 발달했으며, 바위의 빛, 촉감, 겉보기, 결, 때로는 두드려 보았을 때의 그 음색 등을 까다롭게 따지게 되었다. 바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촉감과 돌결의 색깔을 까다롭게 따졌다. 이 방면의 발전을 크게 조장한 것은 가장 좋은 질의 연석이나 인재를 수집하는 도락이었다. 이 두 가지 물건은 중국 문인의 일상 생활과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치, 촉감, 명암, 농담이 가장 큰 요점이 되었다. 후세에 나타난 돌이며 경옥이며 비취로 만든 담배갑에 있어서도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고급 인재나 담뱃갑 중에는 육칠 백 달러나 하는 것도 있었다. 집이나 정원용 석재의 효용을 철저하게 감상하려면 중국 서도까지 올라갈 필요성이 있다. 대체로 서도는 추상 세계의 리듬과 선과 구성의 연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로 좋은 돌은 장중함과 초탈함을 연상시켜 주는 것이어야겠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선이라 해도 직선이니 각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의 기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올드 보이>인 노자는 그의 <도덕경> 속에서 <불각의 바위>라는 말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다. 자연을 너무 부질없이 휘젓지 말라. 가장 좋은 예술품은 최대의 시나 문장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인공적인 흔적도 없이 굽이치는 냇물이나 뜬구름처럼 자연스러워 중국 문예 비평가가 가끔 말하듯이 <도끼나 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그대로 예술 전분야에 적응한다. 불규칙의 아름다움, 리듬과 움직임과 표정을 암시하는 선의 아름다움, 그 점에 감상의 대상이 있다. 중국 상류층인 사람의 서재에서 걸상으로 혹투성이의 떡갈나무 뿌리가 쓰여지는 수가 때로 있는데, 이러한 것을 소중히 하는 심리도 위에서 설명한 심리와 똑같은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원에서 보게 되는 축산의 대부분은 자연 그대로의 돌로 되어 있다. 높이가 10피이트, 15피이트나 되고, 위인처럼 초연하게 고립하고 있는 나무 껍질로 된 화석도 있고, 호수나 동굴에서 발견된, 대개 구멍투성이고 외모가 극히 불규칙하게 생긴 것도 있다. 어느 문인의 말에 의하면 구멍이 지나치게 둥근 경우에는 잔돌을 끼워 넣어 원을 일그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상해나 소주 근방의 축산은 대개 태호의 돌로 되어 있어, 전시대의 바다 물결의 흔적이 보인다. 이런 바위는 호수에서 파낸다. 그 선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마음에 들도록 끌로 가공하여 다시 호수에 넣어 일 이 년 내버려 둔다. 물의 작용으로 끌 자국을 없애려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감상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또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주위에 나무가 없는 집은 벌거벗은 남녀와 같다. 나무와 집과의 차이는, 집은 세워지는 것이지만 나무는 자란다는 점이다. 무엇이나 성장하는 것은 세워지는 것보다 보기에 더 아름다운 법이다. 실제상의 편의를 생각해서 벽은 수직으로 하고, 마루는 수평으로 만들게 되어 있지만, 벽은 고사하고라도 마루에 관한 한 여러 가지 방의 마루를 각기 다른 수평상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직선과 정방형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직선과 정방형은 나무가 여기에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 무미한 맛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색채 계획에 있어서도 우리는 집을 녹색으로 칠하는 일은 전혀 없지만, 자연은 그렇게 하고 있다. 사실 나무는 모두 녹색이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나무 중에서 어떤 종류의 나무의 특수한 선이나 윤곽에는 화제가 될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한 나무는 특히 미적인 감흥을 일으켜 준다. 중국의 비평가들이나 시인들은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즉 나무는 어느 것이나 아름답지만 어떤 종류의 나무는 특별한 표정이며 힘이며 기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무는 많은 나무 가운데서 특히 선발되어 일정한 느낌과 결부되었다. 평범한 감람나무에는 소나무에서 보는 바와 같은 초연한 기품이 없고, 버들은 우아하지만 <장중>이니 <영감적>이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소수의 나무만이 그림이 되고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소나무와 매화나무와 대나무, 버드나무 등이며, 소나무는 그 장대한 기품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매화나무는 그 낭만적인 기품 때문에 사랑을 받으며, 대나무는 선이 청초하고 가정적인 기품 때문에 진귀하고, 버드나무는 가냘프고 고운 아름다운 사람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기품 때문에 모두가 좋아한다.
소나무가 주는 감흥은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해야만 할 것으로, 가장 시적인 의의가 두터울 것이다. 소나무에는 어느 나무보다도 숭고하고 단정한 기품이 엿보인다. 나무에는 숭고한 것도 있고 야비한 것도 있으며, 장대한 기품을 자랑하는 것도 있고 평범한 기품을 지니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매튜 아놀드가 웅대한 호머의 시풍을 말하듯이 중국의 예술가는 소나무에 갖추어진 늙고 큰 품격을 찬미한다. 이 웅대한 기품을 버들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시인 스윈버언에게서 웅대한 시풍을 찾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다. 한결같이 아름답다고는 하더라도 그 중에는 섬세한 미, 우아의 미, 장중한 미, 준엄한 미, 괴기한 미, 불균형의 미, 힘찬 미, 오래된 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오래된 미 때문에 소나무는 여러 나무 중에서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헐렁한 옷을 입고 죽장을 끌며 산길을 걷는 세상을 등진 사람, 인간 최고의 이상으로서 존경받은 은자와도 같다. 이입 옹이 도리양유의 과수원에 앉아 있어도 옆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없다면 어린 자녀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러러 볼 준엄한 늙은 선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나무 중에서도 노송을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늙으면 늙으수록 더 운치가 있으며 노송이어야만 장중한 풍격을 띠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나란히 같은 풍취가 있는 것에 사삼이 있다. 특히 학명이 selaginela involven.로 알려져 있는 종류로, 가지가 꾸불꾸불 구부러져 환상을 이루고 있고, 희한한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하늘을 향해 곧장 뻗어 있는 가지는 청춘과 희망의 심벌로 보이며, 땅을 향하여 늘어져 있는 가지는 몸을 숙이고 소년을 쓰다듬는 늙은이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소나무는 침묵과 장중과 속세를 초월한 범상한 기품을 나타내며, 은자의 품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상한다는 것은 예술상 가장 의미 심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나무를 감상하는 데 있어 반드시 따라 붙게 마련인 것은 중국의 그림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우암>과 나무 그늘을 거닐고 있는 인물이다. 소나무 아래에 설 때 사람은 장중함과 노성감을 느끼고, 그 고고한 모습에 이상한 행복감을 깨닫고 이것을 우러러 본다. 노자는 <자연은 말이 없다>라고 했다. 과연 노송은 말이 없다. 고요하고 태연하게 솟아 있으며, 높은 곳에서 말 없이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 소나무 아래에서 많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 그 어른들이 또 노인이 되었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겪은 늙은이처럼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거기에 신비와 장중이 있다. 매화나무가 아름다움을 칭찬받는 것은, 그 가지가 뻗은 맵시가 낭만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향기가 맑고 고상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시적 감상을 위해 선발된 나무 중에서 소나무와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겨울과 짝지어져 <세한삼우>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좀 우습다. 왜냐하면 대나무와 소나무는 상록수이고, 매화나무는 늦겨울 이른봄에 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화나무는 특히 밝고 고상함을 나타내는 셈이다. 상쾌한 겨울 기운이 담긴 맑고 고상한 심벌이다. 그 단정하고 고운 모습은 싸늘한 단려함이며, 세상을 버린 사람처럼 공기가 차면 찰수록 그 단려한 기품은 더해 간다. 도 난처럼 은일한 풍취가 깃들어 있다. 송대의 은둔 시인 임화정은 매화는 내아내, 학은, 내 아들이라고 하였다. 서호의 한복판에 외로이 있는 산에 남아 있는 그의 숨어 살던 유적은 오늘날 문인 묵객의 동경이 되어 있다. 그의 무덤 아래에는 그의 <아들>인 학의 무덤이 있다. 이 시인이 유명한 다음의 7언구에는 매화의 향기와 그 모습의 풍취가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암향부동월황혼 매화의 아름다움의 정수는 이 일곱 자로 끝나며, 그 중 한 자도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이 누구나 다 시인하고 있는 바다. 대나무는 그 줄기와 잎의 화사한 풍격이 매우 좋다. 화사할수록 학자의 가정에서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대나무의 아름다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상냥하게 웃는 아름다움이며, 대나무에서 받는 기쁨은 온화하고도 고요한 기쁨이다. 몸매가 가늘고 날씬하며, 가지가 드문드문 솟은 기품이 죽취가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죽이나 화죽이나 두서너 그루의 대나무는 한무더기의 죽림 못지 않게 귀여움을 받고 있다. 가지와 잎의 날씬한 기품을 좋아하는 것이므로 두서너 대라도 그림이 된다. 그것은 마치 매화 두 서너 송이가 훌륭한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된 셈인지 대나무의 날씬한 모습이 꺼칠꺼칠한 바위와 조화가 매우 잘 된다. 그러므로 몇 그루의 대나무에 곁들여 한두 개의 바위가 그려져 있는 수가 많다. 이러할 때의 바위는 언제나 앙상한 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려지는 것이다. 버드나무는 어디서나 자라기 쉬운 나무다. 특히 개울 둑 같은 데 많다. 이 나무는 무엇보다도 우선 여성적 나무다. 그러므로 장조는 우주 만물 가운데 인간의 심금을 가장 심각하게 울리는 네 가지 중의 하나로서 버드나무를 치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중국 부인의 가냘픈 허리를 <유요>라 한다. 중국의 무기는 긴 옷소매와 흐르는 듯한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의 율동을 방불케 하려고 애쓴다. 버드나무는 잘 자란다는 데서 중국 도처에 1마일 사방에 걸쳐 이를 심고 있으며, 그 위를 바람이 스쳐갈 때의 모양을 <버들물결>이라고 한다.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에는 꾀꼬리가 즐겨 앉기 때문에 그림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버드나무에 꾀꼬리는 꼭 붙어다니는 물건이다. 매미도 곧잘 그 가지에서 쉰다. 서호 십경의 하나인 <유랑문앵>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이유로 찬미되고 있는 나무는 얼마든지 있다. 한 예를 들면 오동과 같은 나무는 나무 껍질이 깨끗하고 그 표면이 매끄러워, 작은 칼로 쉽사리 시를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 또 중국인이 매우 애호하는 견만초는 그 근경이 두세 치나 되며, 고목이나 바위 같은 데에 달라 붙어 있다. 곧은 나무 줄기와 이 줄기에 구불구불 감겨 있는 만초는 재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품질이 좋은 만초는 영이 잠자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용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다소 기웃한 고목은 그 줄기 때문에 크게 애호와 존경을 받고 있다. 소주에 가까운 태호와 목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네 그루의 사삼에는 각각 <청>, <희>, <고>, <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청>이라는 나무는 줄기가 길고 곧게 솟아 있고, 잎이 꼭대기에 양산 같은 모양으로 퍼져 있다. <희>는 땅 위를 기며 지그재그로 Z형을 세 개 만들고 있다. <고>의 꼭대기에는 잎이 없고 굵고 뭉툭하게 생겼으며 가지는 드물게 나고 반은 말라서 사람의 손가락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기>의 줄기는 맨 위의 가지까지 나선형으로 비비꼬여 있다. 중요한 점은 나무의 관상은 다만 나무만의 관상이 아니라 다른 자연물, 예를 들면 바위, 구름, 새, 벌레, 인간 따위와 관련해서 비로소 그 참다운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함이요, 바위를 쌓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요, 소나무를 심는 것은 비를 기다리기 위함이요, 파초를 심는 것은 바람을 맞기 위함이며, 버들을 심는 것은 매미를 청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새소리를 나무와 함께 즐기며, 귀뚜라미 소리를 바위와 함께 찬양한다. 새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바위 사이에서 운다. 중국인은 우는 귀뚜라미나 매미를 고양이나 개나 그밖의 다른 가축들보다 훨씬 사랑한다. 모든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나 조류 중에서 다만 학만이 소나무나 매화 같은 종목에 들어 있다. 그것은 즉 학은 은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학은 물론이고 백로까지도 다 한적한 늪이나 연못에 새하얀 맑은 모습으로 늠름하고도 얌전하게 그리고 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학자는 학이 되고 싶다고 한다. 시인의 심정이 자연 속에 녹아 들어가면 동물이 행복해야만 비로소 인간도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동안의 심경은 정판교(1693 - 1765)가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새를 새장에 넣어 길러서는 안된다고 한 글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새를 새장에 가둬 길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덧붙여 둘 말이 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새가 싫기 때문이 아니다. 새를 사랑하는데 스스로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새를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 주위에 수백 그루에 나무를 심어 새의 왕국과 가정이 나무 그늘 사이에서 잘 보이도록 해두는 것이다. 그러면 날이 샐 무렵 잠이 깨어 그대로 침대 속에 있으면 하늘의 음악과도 같은 새의 지저귀는 합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잠자리를 나와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아침 차를 마실 때 아름다운 새의 날개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것이 보여 일일이 그것들을 눈여겨 볼 겨를이 없다. 한 마리의 새를 새장에 넣고 바라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즐거움이다. 대체로 생활의 즐거움이란 우주를 공원으로 보고, 호천을 연못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물은 모두 각자의 성질에 따라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이 다정함과 냉혹함, 세상에 즐거움이 많은 가운데 새를 새장에 가두거나 물고기를 어항에 넣거나 하여 기뻐하는 것과 이 나의 즐거움을 비교해 보라. 얼마나 큰 차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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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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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5. 스피노자
진리에 대한 거부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모욕을 받았던 사상가를 찾으라고 한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스피노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운명은 생존시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철학 교수인 토마시우스는 스피노자를 "개화가 안 된 저술가","신을 모독한 전형적인 유태인이자 완전한 무신론자", "소름끼치는 괴물'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다른 사람으로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의사이자 화학자인 디펠은 스피노자를 아무리 욕해도 직성이 안 풀렸던 것 같다. "우둔한 악마", "꽉 막힌 요술장이", "돌아 버린 멍청이", "정신 병원에서 값싼 공이나 세울 천치", "술이 취해서 정신이 돈 듯한 사람", "넝마 같은 철학", "눈속임의 익살스런 광대짓"이나 하고 "가장 유치하고 가장 비참한 헛소리"만을 펑펑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두꺼운 책 페이지마다 서술하고 있다. 의학자와 화학자가 그처럼 말하는데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침묵을 지킬리 만무하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의 교수 슈투름도 비슷한 말로 스피노자를 "불쌍한 녀석", "별난 짐승"이라고 표현했으며, 또한 "저주받을 직관"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와 같은 비방은 스피노자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사실 그에 대해 비난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고작해야 밤에 연구하는 스피노자의 습관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비방의 꼬투리가 되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지간에 한 전기 작가는 이 사실에 대해 스피노자가 "암흑의 작품"을 저술하고 있다고 밖에는 어떻게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주문을 외워서 어둠을 불러내는 곳에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며, 여기서부터는 신학자의 영역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한 신학자중 한 사람으로 예나의 신학 교수인 무제우스는 이렇게 묻는다. "악마를 매수해 모든 신적, 인간적인 권리를 완전히 파멸시켜 버린 곳에서 어느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천부적으로 커다란 재앙을 가진 타고난 사기꾼으로서 이 파괴 작업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달변인 교수 한 사람은 그의 직업에 걸맞게 스피노자에 대해 더 심한 견해를 말한다. 그는 스피노자의 책에 대해 "신에 대한 모독, 무신론으로 꽉 차 있어 참으로 지옥의 어둠 속에나 던져 버려야 할 책이다. 그 책은 지옥으로부터 인류에게 피해와 수치를 입히기 위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지구에서는 몇 세기 동안 그보다 더한 파멸의 근원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몇 세기 정도의 시기라는 것은 이제 막 학자들의 비난의 대열에 끼어 든 도트레이트에서 온 한 곡물 상인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몇 세기 동안뿐만이 아니라, "지구가 존립해 온 이래 지금까지 그처럼 신앙심 없는 책은 출판된 적이 없었다."그만큼 그 책은 "현학적인 혐오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유명한 정신계의 거두들도 오해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말로 스피노자와 그의 철학에 대해 그들이 품고 있는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다. 볼테르는 스피노자의 체계가 "형이상학을 가장 추악하게 오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책 중 하나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진 저술", "아연 실색할" 책이라고 평가했다. 칸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며 친구였던 하만은 마침내 스피노자를 "건전한 이성과 학문을 해친 노상 강도요 살인자"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아주 기묘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증오자와 비방자의 군단에 맞서 갑자기 불같이 달아오른 숭배자의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레싱은 야코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 "사람들은 여전히 스피노자에 대해 마치 미친개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말하고 있었죠."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 외에는 철학이라 할 만한 것은 도대체 없습니다." 헤르더는 야코비에게 이렇게 써 보낸다. "나는 이 철학이 나를 매우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고상한 이 철학에 대한 소리만 들어도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합니다." 괴테는 인간 스피노자가 "진정한 분노와 정열"을 갖고 있다고 피력한다. 괴테는 슈타인 부인과 함께 스피노자의 책을 읽고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분명 그의 정신이 나의 정신보다 더 심오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저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에서 감동적인 찬가를 삽입한다. "성스러웠지만 버림받은 스피노자의 영혼에 경건한 마음으로 내 머리털을 제물로 바친다! ... 그는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네." 그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경멸받아 온 그 철학자를 어느 정도로 지지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증거를 마지막으로 하나 더 든다면, 베를린의 철학자 칼 졸거의 편지를 들 수 있다. "스피노자는 나로 하여금 거의 오전 내내 그에게 몰두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내 동생은 그의 세 살된 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벌써부터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스피노자는 아주 똑똑한 남자였단다. 칼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는 모든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구나." 그렇다면 도대체 철학자 스피노자는 누구인가? 그는 무신론자인가 아니면 성인인가? 악마와 같은 사람이었나 아니면 신과 같은 사람이었나? 1800년경 그를 흠모했던 한 사람이 스피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도대체 그 인간 스피노자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금세 저주받았다가 금세 축복 받고, 금세 애도 받았다가 금세 비웃음을 샀던 스피노자"
그의 사상이 불러일으킨 소용돌이를 보고 사람들이 최소한도로 추측할 수 있듯이, 우리는 그를 고지식하고 자신에 찬 자기 사상의 옹호자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마도 그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눈에 안 띄며, 가장 겸손하고 조용한 철학자였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163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민 온 유태인 가족이었다. 그의 이름은 바루흐였는데 당시의 관습에 따라 이름은 라틴어로 베네딕투스라 불리었다. 이 이름은 둘 다 축복 받은 자라는 뜻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외적인 삶에서는 축복 받지 못했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그의 고향의 유태인 종교 공동체와 치열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성서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소견을 밝힌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가 볼 때 구약성서는 모순과 애매 모호한 것 투성이였고, 그래서 그는 구약의 모든 부분이 전적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때까지 이 총명한 젊은이에게 희망을 걸었던 유태인 공동체는 이 일로 크게 실망하여 그를 외면한다. 사람들은 밀정을 시켜 그를 염탐하기도 하고 뇌물로 매수하려 들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이 통하지 않자 드디어는 그를 암살할 계획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결국은 유태인 교회의 단호한 추방령을 선고받는다.
스피노자에게 내려진 엄청난 파문 선고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바루흐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추방한다. 이는 성스러운 하느님과 성인들의 공동체가 허락한 것이다. ... 요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한 그 저주와 엘리사가 소년을 저주한 그 저주를 받고 율법서에 씌여 있는 그 모든 저주를 받아라. 밤낮으로 저주받을 것이며, 잠잘 때도 일어날 때에도 저주받아라. 나갈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결코 용서하지 마옵시고, 주의 노여움과 분노가 이 사람을 향해 불타게 하소서. ... 주는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시고,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에서 그를 제명하여 파멸을 내리소서. ... 어는 누구도 말이나 글로써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호의를 보여서도 안 되며, 그와 한 지붕 아래 머물러서도 안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며, 그가 저술한 책을 읽어서도 안 되느니라. ... " 스피노자는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 논쟁을 위한 논쟁은 그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는 한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각자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따라서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내가 진리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 두어라."
그런데 분노를 불러일으킨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각자는 모두 자신의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한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는 고대에서부터 진리라고 여겨 왔던 것으로 향할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렇게 가차없이 자신의 진리를 맹세하고 나서자 그 당시 권력층의 증오를 온 몸에 받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일로 인해 그는 유태 교회와의 투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아울러 역시 이 일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그의 전시대에 걸쳐 증오를 온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철학함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진리에, 오로지 진리에만 귀기울이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인간의 판단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진정한 철학자였다. 민족과 신앙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자, 그렇지 않아도 고독에 젖어드는 성향이 있던 스피노자는 더욱 깊이 고독 속으로 젖어들어 갔다. 그는 처음에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암스테르담 근처에서 숨어 살다가 그 후 덴하그 근처에서 살았다. 그는 3개월 동안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방문객이 쓰고 있다시피 그는 "흡사 그의 서재에 매장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들에게 멀리서 이야기합니다."라고 털어놓았다. 물론 그에게는 몇 안 되는 친구가 있을 뿐이었으며 편지 왕래도 매우 드물었다. 한 전기 작가는 "그는 제자에게도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생계 수단으로 광학 렌즈를 가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기부금을 주어 돕겠다는 친구들의 제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는데 다만 꼭 필요한 정도만을 받았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생활보다 더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만년에는 자신이 손수 집안일까지 해야 했다. 그저 가끔 파이프담배를 즐길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고요 속에 묻혀 사는 이러한 생활로도 적들의 증오에 가득 찬 논쟁을 피하지는 못했다. 100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적대자 중 한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그의 은둔 생활은 결코 칭찬 받을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숨어 산 것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참된 신과 그의 말씀, 모든 종교를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 버릴 저주받은 체계를 생각해 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가 했던 가장 쓸모 있는 활동이란 결국 사방의 벽 사이에 틀어 박혀 땀을 흘리며 신을 모독하는 책이나 써낸 데 불과하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적대 행위 앞에서 그의 적막한 생활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물론 익명으로 (신학적, 정치적 논고)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을 때, 그에 대한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다. 그때 그에게는 사상의 자유를 변호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는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았던 그 시대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넘어서서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만일 그가 교회의 가르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만이라도 내세웠더라면 그에게 어느 정도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진리를 향한 추구가 공식 교회의 문전에서 정지될 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피노자가 국가에 대해 교회의 지나친 간섭을 통제하고 종교와 정치적 신념의 자유를 보장하는 과제를 부여했을 때, 그 당시 권력자들이 최고도로 격분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국가의 목적은 실제로는 자유"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마치 현대에 씌어진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상을 피력한다. "이러한 자유가 억압되어 사람들이 울타리 안에 갇히고 최고 권력의 허락 없이는 감히 움직일 수도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최고 권력이 원하는 것만을 사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매일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특히 국가에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충성과 믿음은 파괴될 것이다. 대신 비루한 위선과 음흉한 사기만이 조장되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거기서는 기만이 자라나 온갖 미풍 양속을 파멸시킬 것이다. 존경받는 인물이 그가 단지 다르게 생각하고 위선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국가를 반역한 사람처럼 취급된다면, 국가에게 이보다 더한 불행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 범죄나 악행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적으로 판정 받고 사형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범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악한 사람들에게 공포의 장소인 재판정이 선행과 덕행의 고상한 사례를 벌하는 가장 멋진 연극 무대가 된다면, 이보다 더한 범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신학적, 정치적 논고)는 출판되기가 무섭게 교회와 국가 당국은 물론 대학 당국으로부터도 금지 당한다. 이 일에 관한 한 가톨릭 관계 당국이든 프로테스탄트 관계 당국이든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다. 네덜란드 총독은 가장 엄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아 이 책의 인쇄나 유포를 금지했다. 그 책은 "신을 모독하고 영혼을 타락시키는" 저작이며 "근거가 없는 위험스러운 견해와 추악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책에 동조하는 듯한 말조차 해서는 안 되었다. 이 규정을 과감히 어기며 책을 출간한 출판업자는 3,000굴덴의 벌금과 8년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 논고에 반대하는 팜플렛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고, 정말 허위에 가득 찬 어떤 도서 목록은 그 책을 (신학적, 정치적 논고), 배신한 유태인이 지옥의 악마와 결탁하여 만들어 낸 책"이라고 소개했다. 이 모든 비난에 맞서는 스피노자의 유일한 무기는 침묵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이렇게 썼다. "바보처럼 놀라기만 하지 않고 학자로서 자연의 사물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교도인이나 무신론자로 간주되었다." 스피노자는 문제 자체에 있어서는 굴복하지 않았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사상이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진리는 항상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얘기만이 아니다. 사악한 중상 모략도 나로 하여금 진리를 위험 속에 내버리도록 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은닉된 세계에도 때때로 그를 인정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팔츠의 영주 카를 루드비히는 스피노자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 정교수 자리에 취임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 왔다. 그 제안을 전달한 하이델베르크의 한 신학 교수는 이렇게 첨부하였다. "당신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우리 영주처럼 특출난 학자들을-영주께서는 당신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여기십니다-자비롭게 대하는 영주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철학하기 위한 가장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며, 당신이 이 자유를 공인된 교회에 혼란을 조장하기 위해 오용하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제의는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심사 숙고 끝에 이렇게 답장을 보낸다. "교수직을 맡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더라면, 저는 다른 자리가 아닌, 팔츠의 영주 전하께서 당신을 통해 제게 제의한 바로 그 교수직을 맡았을 것입니다. 자비로운 영주께서 황송하게도 제게 허락해 주는 철학의 자유 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자리를 맡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이 훌륭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철학함의 자유가 어떠한 한계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인된 교회를 혼란시키려 든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불화란 종교에 대한 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의 상이함 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왜곡하고 단죄하는-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대립의 정신에서 생겨나옵니다. 저는 이미 저의 고독한 사생활을 통해서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처럼 영광된 자리에 오를 경우에는 얼마나 더한 일들을 우려해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진실로 존경하는 선생님, 당신께서는 제가 어떤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망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방해받지 않는 생활에 대한 애정 때문에-그러한 생활을 어느 정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위해-제가 공식적인 강의를 거절하였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그의 외로운 사색의 고요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의 전기 작가가 술회하듯이 "박물관에 매장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냈다. 그는 오랫동안 폐병으로 고생하다가 44세의 나이로 역시 고독하게 죽었다.
스피노자가 죽은 후에야 그의 중요한 철학 저서인 (지성의 완성에 대한 논고)와 대작인 (에티카)가 출판된다. 또한 이때에서야 비로소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졌던 적개심과 증오심 앞에서도 자기 자신과 자신이 발견한 진리에 충실히 머물면서 명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고독 속에서 끝까지 견뎌 낸 이 사상가의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솟아 나왔는지도 드러났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그가 그의 사유에서 항상 세계와 번잡한 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커다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상함을 초월하여 영원에 이르려는 열망, 유한 속에서 갖는 정열로서 어느 시대에서나 철학의 근본 느낌이었던 바로 그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논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난 후 ... 나는 마침내 참된 선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쓸데없는 것을 버린 후, 영혼이 진실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그런 선을 말이다. 나에게 지속적이고 최고의 즐거움을 영원토록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이-이것을 내가 발견하고 획득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과연 있는지를 탐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스피노자가 피하려고 했던 것은 일상 생활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 부와 명예와 쾌락의 추구 등이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는 한낱 공허하고 허무하며 무상할 따름이었다. 그는 그것을 오직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으로 고찰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에게 허망함을 초월하여 허망함으로 인한 모든 비애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상태에 대한 열망이 자라나온다. 그가 그러한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영혼을 유일하게 진정한 즐거움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며, 그 사랑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특징은 무상함에 대한 비애의 경험에서 출발해 참된 사랑을 통해 영원한 것으로 뻗어 나가서 그 사랑 안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신을 향한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때문에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신에 취한 사람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신성으로 가득 찬 상태이다." 슬라이어마허도 스피노자를 이렇게 이해한다. "그의 머리 속에 꽉 찬 것은 고귀한 세계 정신이며, 무한자는 그의 시작과 끝이었고, 우주는 그의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그는 성스러운 순결과 깊은 겸허로 자신을 영원한 세계 속에 비추어 보며, 그 자신이 세계의 사랑스러운 거울임을 깨닫고 바라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산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신비스러운 찬송이며, 정당하게 '나는 존재하는 자 바로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오로지 유일한 그 분을 향한 영혼의 비약과 탄식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위대한 걸작 (에티카)는 자기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상과 더불어 시작된다. 철학이 신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아주 자명하였다. 그는 바로 이 점에서 신에 대한 확실성은 자기 확실성의 길을 통해 비로소 얻게 된다는 스승 데카르트와는 정반대이다. 이에 반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즉 신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어떤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신의 본질은 모든 불완전함을 배제하기 때문에 ... 그것은 그의 실재를 의심할 수 있는 원인을 모두 제거해 버리고 그 실재에 대해 최고의 확실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최초의 원인이며 자기 자신의 원인이기도 한 신은 스스로를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다"는 것이 통용된다. 그렇다면 정통 유태교의 대변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변자들이 그의 생존시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박해한 그 증오는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무한한 열망의 대상으로 알고 있는 신이 그리스도교나 유태교에서 이야기하는 신과 같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그 신은 전지 전능한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창조하고 창조 활동 속에서 세계를 그 자체에 내맡기는 그러한 신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세계에 자립적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열망의 근본 감정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은 덧없고 무상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물론 정확하게 고찰해 보면, 그러한 지나가 버리는 것은 절대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나 실재가 아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고 오직 신뿐이다. 이렇게 스피노자는 창조주로서의 신과 창조물로서의 세계라는 사상을 초월한다. 바로 이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피히테가 이것을 잘 파악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지하게 단일성을 추구해야 하는 모든 철학의 어려움이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사라져 버리든가 또 신이 사라져 버리든가 해야 한다. ... 이 문제를 최초로 깨달은 용감한 사상가는, 만일 그러한 소멸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 파악했을 것이다. 이 사상가는 다름 아닌 스피노자이다."
그러나 세계는 분명 존재하고 인간들도 분명 존재하지 않느냐고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물음을 던진다. 만일 본래적 의미로는 신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도대체 세계와 인간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계는 단지 신 그 자체가 실재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며, 인간은 신 그 자신이 사유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올바른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본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사물이 내게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이 나에게 나타난다라고. 다시 말해 나 자신 신의 사유인 바로 그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은 모든 실재 즉,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모든 실재는 신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신 안에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물과 인간의 정신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오직 신만이 단 하나의 유일한 실체일 뿐이다. 사물과 인간의 정신은 단지 이 실체의 양태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일시적인 것을 단호하게 포기하고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나는 신과 자연에 대해, 근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대변하는 견해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나는 신을 모든 사물의 내적 원인으로 간주하며 ... 이 사물들을 초월하는 원인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고 있고, 신 안에서 움직인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과 모든 고대 철학자와 일치를 보면서 주장한다. 더 나아가 감히 덧붙여 모든 고대 히브리인과도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그 당시의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의 격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신에 취한 이 철학자를, 신을 모독하는 무신론자라고 헐뜯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사상에는 인격적인 신이나 혹은 오직 예언자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자신을 드러내는 그러한 유일신을 위한 자리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계시는 모든 실재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 사상은 시대가 바뀌자 레싱과 괴테, 헤르더와 슬라이어마허, 피히테, 노발리스, 셸링 등과 같은 사상가와 시인들로 하여금 암스테르담의 이 고독한 철학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이들은 신과 세계에 대한 비슷한 경험을 통해 그들이 스피노자와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신과 실재에 대한 파악 불가능성은 스피노자가 생각하듯이, 그 둘이 내적으로 밀접하게 뒤엉켜 있다는 사상을 갖고도 파악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 안에 신이 현존하고 있다면, 신은 세계의 실재에 속해 있는 대립과 투쟁에도 관여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을 1700년경 메밍겐 시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세계 안에서 전쟁과 전쟁의 함성을 들었다. 따라서 신은 자기 자신을 거슬러 전쟁을 이끌어 나가야만 하고 자기 속을 부글부글 끓여야 한다. 신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 죽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들 사이의 그 모든 분노, 증오, 원한, 불운은 자기 자신을 거스른, 자기 자신에 맞서는 신의 격정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이 인간 안에서 살고, 괴로워하고, 죽고,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자고, 성교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슬픔과 절망과 불행이 바로 신의 슬픔이고 절망이고 불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의 그 모든 어리석고 지저분한 생각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지껄여댈 이성의 신성 모독과 끔찍한 환상들은 모두 그 속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모사하고 거울에 비추어 보는 신 자신의 생각과 서술이어야 한다. 두 사람 혹은 몇 사람 사이의 대화는 신이 자기 자신과 달콤하게 나누는 담화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소심한 사람은 스피노자 사상의 그 심오한 깊이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스피노자가 신에게로 향한 무한한 열망으로 세계와 그 세계의 모든 번잡스러운 일과 모든 투쟁에서 이미 오래 전에 떠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은 극도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토록 전적으로 영원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적인 것이란 무로 해체되어 버리며, 실재란 사라져 버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 자신 스스로가 비실재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실제로 스피노자에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유로 하여금 유한을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과감한 시도를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투명한 고독의 진정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죽음을 생각하며 헤겔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그 말은 처음에는 매우 의아하게 들리지만 결국 올바른 것이다. "그는 폐병으로 오랫동안 앓다가 1677년 2월 2i일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든 특수성과 개별성이 하나의 실체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 자신의 체계와 일치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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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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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할리우드
성 베드로는 미국의 선교 상태를 걱정하여 가장 믿을 만하고 보수적인 제자인 성 테레사를 보내 상태를 살펴보고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녀는 우선 뉴욕에 머물러 사흘을 지낸 후에 전화를 하고는 그들이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나쁘다고 전했다.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녀가 애원했다. "안 됩니다. 일을 완수하시오. 시카고로 가시오." 성 베드로는 말했다. 그녀는 슬프게 말했다. "썩어빠진 쓰레기더미입니다. 사방에 죄인들이에요.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나를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인내와 용기를 가지시오." 성 베드로가 위로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할리우드가 가장 나쁘다고 합디다. 그곳을 한번 둘러보고는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시오." 2주일이 흘러가고 4주일이 흘러갔다. 그리고 6주가 지나갔는데도 성 테레사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성 베드로가 화가 극에 달하여 그 사건을 하늘의 FBI에게 말 의뢰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교환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할리우드에서 전화입니다." 그리고 나자 달콤한 목소리가 선을 타고 울려왔다. "안녕, 피터. 내 사랑, 오 숭고함이여, 나 테리(테레사의 애칭)에요."
- 좋은 습관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에게서 좋은 습관을 뽑아내지 못할 것이다. 종교가 너의 나쁜 습관이 되도록 하라. 명상이 너의 나쁜 습관이 되도록 하라. 내가 너의 위스키가 되었다는 것은 완벽하게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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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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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3장 신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것인가? (3/4)
4) 온조실화 - 백제
삼국의 건국신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백제의 온조설화입니다. 여기에는 묘하게도 신이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의 건국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로서 주몽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을 온조라고 했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했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이름을 십제라고 하니, 이때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했다. 마친내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로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 세계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이처럼 백제의 건국설화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처제의 아들 내지 손자라고 소개한 주몽을 백제에서는 부인 덕에 왕위를 계승산 비범한 일물 정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제인의 고향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에서도 역시 건국시조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상당히 치열하게 다투던 경쟁 상대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제에서는 자존심 상하게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 건국시조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다 백제의 건국집단이 고구려 지역에서 남하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유적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에는 대규모의 적석총 유적이 있습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백제의 수도, 특히, 지배계급의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1~2기가 아닙니다. 그 사이 도시개발 등으로 밚은 고분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래는 수십기의 적석총이 석촌동 일대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왕릉일 개연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확정적으로 말해도 좋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의 설화에 의하면 주몽은 어디까지나 북부여 출신의 졸본부여 사람이었습니다. 백제왕의 성도 부여씨입니다. 그래서인지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부여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528년에 백제의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뒤남부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부여계승의식의 강력한 표출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백제 초기의 묘제 가운데 하나인 토광묘는 부여지역의 토광묘와 축조방식 등이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백제에서 고구려식의 적석총이 축조되는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왕 - 고구려의 실질적 건국자 주몽을 부여 출신의 고구여 건국자로 설명하지 않고 졸본부여의 계승자로 소개한 백제의 온조설화가 어떤 면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보다 주몽의 입지에 때해 더 정확하게 묘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고구려의 유리왕에 대한 설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소개된 유리왕의 설화에 따르면,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얻은 부인이 주몽의 독신 남하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부여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유리는 아버지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 주춧돌 아래 숨겨진 칼 조각을 찾아낸 위 남녘에서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탖아갔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몽과 마찬가지로 유리도 옥지.구추.도조 3명과 함께 남하했으며, 주몽을 만나 태자에 책봉된 뒤 왕위를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는 한 매목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칼을 맞대어본 주몽이 "너는 진짜 내 아들이다. 무슨 신성한 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유리가 몸을 날려 공중에 솟아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타는 재주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주몽의 능력에 육박하는 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보다는 동명왕편에 인용된 설화가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주몽의 건국에서 끝나는 것이 유리명왕의 출현과 즉위로 종결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건국은 유리명왕의 즉위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온조왕은 건국하자마자 동명왕묘부터 세웠다고 합니다. 위패를 모셔두고 제사지내는 곳을 묘라고 합니다. 여기의 동명왕이 부여의 건국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고구려의 주몽을 지칭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을 자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주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냈을까요? 주몽은 졸본부여의 계승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인에게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닌 졸분부여의 계승자로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명왕묘를 세우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유리왕의 고구려'와 경쟁적인 계승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비류전승 - 부여계승의 건국실화 여하튼, 온조실화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이복형제의 국가로 묘사되는 친밀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백제에는 온조설화 이외에 또 다른 건국설화가 있습니다. 이른바 비류설화라고 하는 것인데, 내용상 온조설화와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삼국사기에 조그맣게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는 북부여와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인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해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다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게 총애했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했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을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낱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해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구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앞에서 본 온조 설화와 달이 비류를 중심으로 한 비류설화는 주봉과의 연계가 매우 약합니다. 비류설화에서 주몽은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류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 사람 우태입니다 우태 역시 남하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몽에 대한 비류 형제의 감정은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강하진 않으나마 주몽과 백제의 연계는 비류설화에서도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는 연맹왕국? 비류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와 함께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추홀이 수도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온조설화와 비류설화가 각지 다른 경로로 전승되어 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온조설화는 하남위례성 지역에서 비류설화는 미추홀 지역에서 각각 전승되어온 설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설화 모두 온조와 비류를 형제로 설정한 점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이즘에서 신화속의 개인은 집단을 상징한다는 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조집단과 비류집단은 형제라는 말이 됩니다. 집단과 집단간의 형제관계? 다소 어색한 이 말은 집단과 집단 사이의 연명관계라는 말로 바꿀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시기 온조 집단과 비류집단 사이의 연맹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이 바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라고 하겠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자리잡았습니다. 미추홀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지금의 인천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증거는 매우 미약합니다. 오히려 각종 자료를 분석해보면, 지금의 경기도 양주.파주.연천을 잇는 지역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반면,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 특히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비류가 형이며, 온조가 동생입니다.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에 따른다면 형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생인 온조가 시조로 존숭되었습니다. 비류의 현명하지 못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 설화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형이란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류집단이 먼저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뒤이어 온조 집단이 남하해 한강 유역에 정착했는데, 온조집단의 경제.군사력이 비류집단을 압도한 결과 자중에는 비류집단의 구성원까지 흡수하게 되었다는 것이 온조설화에 숨은 속뜻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간략한 분석을 종합하면 부여에서 고구려 방면으로의 주민 이동과 부여.고구려 방면에서 한강 유역으로의 주민 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한강유역에 여러 집단이 공존하다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통합된 역사적 사식이 백제의 건국설화에 반영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도모라는 사람이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구태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는 이야기가 각각 일본과 중국측의 역사서에 전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참여한 집단이 다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제국과 백제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처음 국호는 십제였다고 합니다. 온조왕이 나라를 세울 때 10명의 신하가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비류가 죽고 미추홀의 주민들이 위례성으로 이주할 때 즐거이 따라왔으므로 국호로 백제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한편, 중국측 사서인 수서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가 바다를 건너 남하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산국기 한전에 마한 54개국의 국명을 열거하던 중 백제국이라는 국호를 소개한 대목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백제와 백제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으로 된 글자이며, 또 백제국의 위치가 한강유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러 모로 백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 뜻이 더 좋고 세련된 백제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삼국사기에 거론된 십제라는 국호는 어딘지 어색합니다.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십'에서 '백'으로 나라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각해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하튼, 백제는 서기 538년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또 한번 바꾸었으며, 얼나 지나지 않아 다시 백제로 환원시킨 것이 알려집니다.
백제의 건국 시기와 풍속 백제가 건국한 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전한 성제의 홍가 3년 곧, 서기전 18년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에는 나중에 지어낸 듯한 부분이 없지 않아서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른 자료를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는데, 중국측의 당시 자료와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검토해보면,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건국한 시기는 대략 2세기 무렵의 일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백제의 건국 및 성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으로는 춘천시 중도의 적석총, 가평군 마장리의 주거지, 양평군 대심리의 취락지, 양평군 문호리의 적석총, 하남시 미사리의 주거지와 밭 유적, 서울시 송파구의 석촌동.가락동 백제고분군, 풍납동토성 몽촌토성등이 대표적입니다. 백제의 주민으로는 왕실을 차지하고 귀족층이 주류를 이룬 부여.고구려계 남하민과 마한의 구성원이던 토착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밖에 낙랑.대방군이 멸망하면서 백제에 흡수된 중국계와 교류를 통해 백제에 거주하던 일본계 백제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지리적 조건과 중국계 백제인들의 활동 때문인지 백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빨리 그리고 많이 받은 국가에 속합니다. 백제인들은 일직부터 유학을 널리 배우고 익혔으며, 혼인 풍습이 중국과 같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치르는 등, 중국의 예법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같았으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중시하는 등의 풍습 또한 고구려와 같았다고 합니다. 백제의 여자들은 시집을 가기 전에는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았지만 시집을 가면 양 갈래로 땋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시 고구려의 풍습과 같은 것이 듯합니다. 그리고 절을 할 때에는 양 손을 바닥에 대어 존경을 표시했으며, 투호와 저포 등의 놀이와 바둑.장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투호란 멀찍이 서서 항아리 안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이며, 저포는 주사위로 하는 놀이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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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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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卵擊石(이란격석) 以(-써 이) 卵(알 란) 擊(부딪칠 격) 石(돌 석)
묵자(墨子) 귀의(貴義)편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말이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기, 묵자는 노(魯)나라를 떠나 북쪽의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점장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 점장이는 묵자에게 북쪽으로 가는 것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묵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계속 북쪽으로 향하여 치수(淄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치수의 물흐름이 너무 빨라 건널 수 없게 되자 묵자는 다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되돌아 오는 묵자를 보고 그 점장이는 거만하게 굴며 묵자의 기분을 건드렸다. 묵자는 제나라에 가지 못하게 된 판국에 점장이의 비웃음까지 받게 되자, 몹시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말은 근거없는 미신이오. 당신의 말을 믿는다면 천하에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러한 말로써 나의 말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돌을 치는 것과 같소(以其言非吾言者, 是猶以卵投石也). 천하의 계란을 다 없앤다 해도 돌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오.
以卵擊石 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는 뜻이니, 이는 곧 손해만 볼 뿐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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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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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3. 쇠똥도 손탄다
대단치 않은 일에 연거푸 실수만하여 기막히고 어이가 없을 때를 '쇠똥에 미끄러져 개똥에 코박을 일이다'라고 하는데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니 허허거리고 살아볼 일이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겨울에는 논바닥에 꽝꽝 얼어붙은 개똥을 망태기에 주워담았고 여름이면 바소구리로 쇠똥을 들어날랐다. 말 그대로 '똥이 금'인 세상이었는데 지금은 쇠똥이 소 키우는 사람들에게 큰 짐이 되고 말았다. 집집마다 몇 마리씩 키우는 소마구에서 나오는 똥오줌으로 시골의 갯고랑(개울)이나 샛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말 그대로 부영양화로 해캄 같은 녹조류가 강바닥을 완전히 덮어 흉측한 몰골로 바뀌고 말았으니 고기 몇 점 먹겠다고 온통 강을 죽여버린 것이다.
인간에게는 한없는 익충 집 마구간에서 몇 마리 정도를 키우는 경우는 그렇다 치고 규모가 큰 목장에서는 쇠똥을 어떻게 치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골치를 앓는 이것을 치우는 곤충이 있으니 바로 쇠똥구리이다. 곤충 무리 중 풍뎅이과 딱정벌레목의 갑충 중에 쇠똥이나 말똥을 먹고 사는 보통 쇠똥벌레라고 하는 것들로 쇠똥구리 혹은 말똥구리라 부른다. 여기서는 쇠똥구리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자(지금은 말똥이 쇠똥보다 드물기에). 우리가 어릴 때 졸참나무 그늘에 소를 매어두면 이놈들이 날아와 똥을 물어 나르고 윙윙 떼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아직도 시골에 그 씨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우리네 선배들은 동식물의 이름을 잘도 붙였다. 쇠똥구리라는 말은 더욱 그렇다. 풍뎅이 암수 두 마리가 쇠똥이나 말똥을 동그랗게 토막내어 수놈이 뒷다리로 밀고 암놈은 앞다리로 당겨 굴려 가는 것을 보고 '쇠똥 굴리는 놈들'을 줄여서 쇠똥구리로 붙였으니 말이다. 여기서 '구리'는 똥이나 굴리는 '멍텅구리'의 '구리'일까? 어쨌거나 쇠똥구리는 목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풍뎅이로 똥치우기가 전공이다. 소가 하루 종일 풀 뜯어먹고 그 많은 똥을 갈겨대어 목초를 덮어 질식시켜버리는데 사람 대신 이놈들이 청소를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벌레인가.
영국인이 처음 호주나 뉴질랜드로 이주했을 때 이 풍뎅이가 없어서 영국에서 일부러 들여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독자 여러분은 이해할 것이다. 먼저 쇠똥구리의 특징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것을 체장(몸길이)이 약 1. 8센티미터이고 흑색에 광택 나는 몸빛이며 촉각(더듬이)은 적황색에 가깝다. 불도저꼴로 머리 끝에는 돌기가 나 있고 쇠스랑 같은 넓적한 앞다리 끝에는 톱니가 나 있어 땅을 파거나 똥을 동그란 공 모양으로 자르기 쉽도록 만들어져 있다. 어쩌면 저렇게 살기에 안성마춤으로 진화했나를 생각하면 그들의 환경적응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놈들의 후각도 알아줘야 하니 수킬로미터 밖에 있다가도 쇠똥 냄새를 맡으면 득달같이 달려 온다고 한다. 아프리카 케냐의 국립공원에서 관찰한 쇠똥구리는 똥이 약간 가슬가슬 마르면 머리 끝을 처박고 넓적다리를 놀려 쇠톱으로 물건을 자르듯 깎아질러 파 내려간다. 세로 가로 깊이를 재지도 않고 사방팔방으로 재단한 듯 둥근 똥덩어리를 멋지게도 만들어낸다. 알고 보면 이덩어리에다 알을 슬게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들 이름이 '넙슬 볼(nupital ball)'이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면 '결혼식의 공'이 되겠는데 '사랑의 똥덩어리'도 어떨지 모르겠다. 덩어리 하나 만드는데 빠른 놈은 1분 6초, 느린 놈은 53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이것은 같은 종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아프리카에만도 고만고만한 풍뎅이가 2,000종이 넘는다니 종에 따라 다르다. 주로 수놈들이 덩어리 만들기를 하는데 종에 따라서는 암놈이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쇠똥을 자른 후 알을 낳기까지
1. 쇠똥을 둥글게 재단한다. 2. 떼내어 뒷다리로 굴린다. 3. 파서 묻는다. 4. 한 개의 알을 놓는다.
쇠똥구리는 덩어리가 둥글면 굴리기가 쉽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아무튼 이제 쇠똥구리는 제 몸뚱어리보다 더 큰 볼(ball)을 굴려 옮겨야 한다. 그 모양을 보면 수놈을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앞다리를 땅에 박고 뒷다리에 힘을 줘 밀고 암놈은 앞에서 바로 서서 앞다리로 끌어당기는 부부의 힘 합침이 일어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수놈은 수놈이 슬슬 밀어 굴리고 암놈은 덩어리 위에 올라타서 호습 타기를 하기도 한다. 가장 빠르게 굴리는 놈은 1분에 14미터가 넘는다고 하는데 뭐가 급해서 그렇게 빨리 굴려야 하는 것일까. 미물들의 행동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 그놈들의 세계에도 찌그렁이 붙는 놈들이 많아서 힘센 놈들이 빼앗아가고 날치기하니 빨리 굴려가 안전한 굴에 묻어야 하기 때문이다. 똥덩어리를 길바닥에 놓고 싸움박질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쇠똥구리는 살아 있는 풀보다 거의 소화된(실은 소 뱃속에서 미생물들이 발효시킨 것이다) 쇠똥이 제 먹이라 그것을 두고 박이 터져라 먹이 싸움을 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이들 세계도 흉흉한 세상이라 덩어리를 옮겨놓고도 이제는 굴파기에 더욱 바빠진다. 똥굴리기도 힘이 벅찼는데 또 땅파기를 해야 한다. 땅굴파기는 주로 암놈이 맡아서 하는데 열심히 흙을 파 내려가면 수놈은 그 흙을 물어다 멀리 치워야 한다. 허기가 지면 옆의 똥덩어리를 질겅질겅 씹어가면서 어떤 놈들은 굴을 1미터가 넘게 파 들어가기도 한다. '아프리카 쇠똥구리의 생태 The ecology of the african dung beetle'이라는 논문에는 이 땅파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암놈은 굴 속에 있으니 새나 다른 포유류에게 먹히지 않아 안전하나 수놈은 위에 있어 만일의 경우 암놈 대신 먹혀 암놈을 보호한다"라고. 쇠똥구리가 덩어리를 굴려온 뒤 집을 짓는 땅파기는 주로 천적을 피해 캄캄한 밤에 한다고 한다. 덩어리의 크기는 다 달라서 콩알만한 것에서 큰 것은 정구공만하다고 하는데 굴파기가 끝나면 똥덩어리를 굴에 굴려 넣고 짝짓기를 시작한다. 새끼가 먹고 클집(먹이)을 제자리에 넣고서야 교미를 하는 것이다. 암수가 교미를 하면서 암놈만을 유별나게 쇠똥을 게걸스럽게 질금질금 씹어 먹는다니 알을 튼실하게 하기 위함이라 해도 다른 동물에서는 보기 드문 행동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들이 모두 이놈들만이 가진 괴이한 기습임엔 틀림없다. 자르고, 굴리고, 파고 묻는 이 행동은 과연 누가 가르친 것이며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가 보면 소꿉질 같은 이 행위가 그들에겐 전쟁과 다름없는 삶의 투쟁이다. 보통 한 개의 덩어리에 알 하나를 낳는다고 하니 여러 개의 알을 낳는 쇠똥구리 부부는 똥 잘라 덩어리 만들어 굴려와서 땅 파고 알 낳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쇠똥구리는 목장의 똥 치워주고 굴 파서 땅 밑에 공기 잘 통하게 통기를 돕고 굴의 똥은 잘 썩어 땅을 걸게 해주니 이래 저래 익충이다. 똥 속의 알은 부화되어 새끼손가락만한 굼벵이(유충)가 되고 그것이 자라 번데기로 되었다가 어미가 된다. 그리고 굼벵이란 말에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언젠가 전북 고창에서 한 농부가 굼벵이를 키워보겠다고 사육법에 관한 문헌을 알려 달라고 해서 여기저기 알아봤으나 신통한 답을 못 줘 미안해 했던 기억이난다. 간에 좋다는 그 굼벵이 잡느라 제주도 초가집이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어사전에서 굼벵이를 찾아보면 매미의 유충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굼벵이는 이들 풍뎅이 무리의 유충이다. 쇠똥이나 썩어가는 지붕, 퇴비 두엄은 모두 썩어가는 짚으로 그것을 먹고 사는 풍뎅이(갑충)들은 먹이 생태가 비슷하다. 즉 이들 갑충들이 부패중인 짚에 알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굼벵이 사육에 뜻이 있는 사람은 이점에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그 굼벵이가 부은 간덩이에 좋은 것일까. 생명을 받을 때 죽음도 같이 받는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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