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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63호
2012.5.10 (음 3.2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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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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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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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추위와 굶주림, 갈증에 대비하는 이외의 모든 것은 오직 허식이며 낭비일 뿐이다. -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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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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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개연성/우연성/필연성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그것은 필연"이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소개해 준 사람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여러 면에서 잘 통할 것 같아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절대적으로 확실치 않으나 그럴 거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개연성'이라고 한다. "배리 존스 교수는 음주 전후 이성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해 본 결과 알코올이 감정 호르몬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처럼 쓰여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말한다.
만약 술을 마신 뒤엔 무조건 콩깍지가 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면 알코올과 이성에 대한 매력도는 '필연성'으로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연성'은 원인과 결과가 뚜렷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소나 성질을 가리킨다.
필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우연성'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과 같이 꼭 그런 결과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닌데도 뜻하지 않게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이른다. 어느 날 갑자기 길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날 것 같은 느낌은 '우연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어떤 관련성이 없음에도 일어나는 일(성질)은 '우연성', 특정한 연관성을 갖고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은 '개연성', 인과관계에 의해 벌어지는 일은 '필연성'이라고 한다.
[우리말바루기] 뱃속, 배 속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간혹 염치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이런 이들에게 사람들은 "모두가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제 뱃속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에서와 같이 '뱃속을 채우다'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하곤 한다. 이렇게 흔히 쓰이는 '뱃속'이란 단어와 '배 속'은 구분해 써야 한다.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위장.창자.콩팥 따위의 내장이 들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배'와, '안'을 의미하는 '속'을 각각 띄어 써 '배 속'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배의 안을 나타낸다. 그러나 '배'와 '속'이 결합해 '뱃속'이라는 한 단어가 되면 '뱃속'은 '배의 안'이라는 의미가 아닌 '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된다. 따라서 마음을 속되게 이를 때 외엔 '뱃속'이라고 쓰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뱃속의 태아가 발길질을 한다"에서와 같이 임신부의 아기를 '뱃속의 태아'라고 하면 안 된다. '뱃속의 태아'에서 '뱃속'은 '마음'이 아닌 '복중'을 의미하므로 "배 속의 태아가 발길질을 한다"처럼 써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뱃속'이 '복중'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고 표시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이 오류라고 인정한 것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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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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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터마임, 이제는 막이 내렸다 - 최동호
장막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팬터마임, 관중을 침묵시킬 뿐 결코 말하지 않는다. 흰 가루로 분장한 너의 얼굴이 무대 밖으로 돌출하듯 튀어나와 말없이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부릅 뜬 너의 눈이 어둠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전율케 한다. 소리나지 않은 광기의 목소리로 침묵의 벽을 향해 외친다. 곤두선 머리털이 빠진다.
네가 웃고 있다, 부드럽고 인자한 얼굴로. 관중이 복종을 거부할 때 네가 분노한다. 굳어진 얼굴을 가리는 철사 같은 손가락이 떨고 있다. 떨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들이며 우리는 새로이 태어난 인간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다.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아 우리는 살아난다.
너는 다시 웃고 있다. 놀라지 마라 우리는 하나이니라. 근심 걱정 없는 태평천하였으니 장막 뒤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팬터마임, 네 고독한 몸짓은 화약 연기와 같다. 막이 내리고 돌아나오는 극장 밖에는 찬연한 햇살이 어둠을 무찌르는 함성처럼 부서지고
마취된 정신의 빈틈을 울리던 소리가 성난 함성으로 되돌아와 하얀 얼굴의 악령에 홀려 있던 관중들의 외침이 밀물처럼 휩쓸고 나아갔다. 시대의 폭약이 터지고, 너는 쓰러졌다. 팬터마임, 이제는 막이 내렸다. 분장을 지워라. 분노를 터뜨리지 마라 흥분할 필요가 없다. 결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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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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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앓이(2) - 서공식
봄으로 다시 도진 가슴앓이 심하더니 후드득 꽃이 지니 씻은 듯 사라졌네. 아플 때 힘겹더니만, 아쉬움은 또 무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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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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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소중한 것들 - 작은나무(리틀 트리 : 체로키 족)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를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하며, 또한 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의 이름은 작은나무(리틀 트리)이고, 나는 체로키 족 출신 인디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 년 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고, 그날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날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의 오두막이 있는 테네시 산중으로 갔다. 버스를 내려서도 긴 띠처럼 풀이 자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는데, 멀리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그때 내 뒤에서 오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여보, 작은나무가 지친 것 같아요."
그 말씀에 저만치 앞에 가시던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셨다. 할아버지는 나를 내려다보셨다. 큰 모자에서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소중한 걸 잃었을 때는 녹초가 되는 것도 괜찮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할아버지를 따라잡기가 좀 쉬웠다. 할아버지의 걸음이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지치신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걸은 뒤 우리는 이번에는 차도 다닐 수 없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곧장 산의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가다가는 꼭 그 산과 부딪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우리가 계속 걸어감에 따라 산은 소리없이 열리면서 우리를 제 품안에 맞아들였다.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나는 서둘러서 바지를 입고 윗도리의 단추를 채운 뒤 할아버지와 함께 산 위쪽으로 산칠면조 사냥을 나갔다. 밖은 아직 어둡고 추웠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새벽바람조차도 나뭇가지를 흔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고 오솔길 한쪽을 가리키셨다.
"여기를 보렴. 산칠면조가 지나간 자국이 보이지?"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채, 흙 위에 찍힌 작은 새발자국을 여럿 찾아냈다.
"덫을 놓기로 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오솔길을 벗어나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구덩이 하나를 찾아내셨다. 우리는 구덩이 안에 들어찬 낙엽을 걷어냈다. 그런 다음 할아버지와 나는 둘이서 구덩이 속의 흙을 밖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내 키 높이만큼 구덩이가 깊어졌을 때 우리는 나뭇가지와 낙엽을 끌어모아 구덩이를 위장했다. 그리고 나서 할아버지는 구덩이 있는 데서부터 아까 산칠면조 발자국들이 있는 곳까지 좁다란 길을 내셨다. 길이 완성되자 할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붉은 인디언 옥수수 알들을 꺼내 그 길 위에 점점이 뿌려 놓으셨다. 구덩이 안에도 한 줌 던져 넣으셨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흙을 뚫고 솟아오른 얼음들이 우리의 발 아래서 부서졌다. 이윽고 아침해가 건너편 산 위에서 솟아올라 눈부신 빛으로 대기를 가득 채웠다. 얼음으로 덮인 나뭇가지들이 그 빛을 반사하는 바람에 눈이 아렸다. 이제 산은 일시에 깨어 일어나 대기중에 엷은 숨을 내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셨고, 나무들 사이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부는 아침 바람소리와 더불어 점점 뚜렷해져 가는 산의 숨결에 귀 기울이셨다.
"산이 살아나는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요, 할아버지. 산이 살아나고 있어요."
이렇게 할아버지의 말씀을 받는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할아버지와 내가 사물에 대한 똑같은 이해의 순간을 체험했다는 것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나 문득 바라보니 한 귀퉁이에서 작은 점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커져갔다. 커다란 새였다. 새는 자기 앞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으려고 해를 마주보는 자세로 날아오다가 번개같이 산허리의 풀밭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날개를 반쯤 접은 채 화살처럼 메추라기떼를 향해 내리꽂혔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저게 늙은 매 탈콘이다."
메추라기들은 혼비백산 숲 속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동작이 굼떴다. 매는 그놈을 강타했다. 깃털이 공중에 흩날리면서 메추라기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조금 뒤 매는 메추라기를 두 발로 움켜쥐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슬픈 표정까지 어찌할 순 없었다. 이런 나를 보더니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슬퍼할 필요없다. 작은나무야, 이것이 자연의 이치란다. 매는 느린 놈을 잡았고, 그 때문에 느린 놈들은 자기를 닮은 느린 자식들을 세상에 내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매는, 빠른 놈의 알이거나 느린 놈의 알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메추라기 알을 먹어치우는 들쥐 수천 마리를 잡아먹지. 이런 식으로 매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메추라기를 돕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칼로 흙 속에 묻힌 어떤 달콤한 식물 뿌리를 캐내어 절반을 잘라 나한테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필요한 만큼만 갖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사슴 사냥을 할때도 가장 훌륭하고 멋진 놈을 잡아선 안 된다. 그중 작고 느린 놈을 잡아야지. 그러면 사슴들은 더욱 강해지고, 그래서 늘 우리에게 고기를 마련해 주게 되지. 표범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너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연의 이치를 지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소리내어 웃으셨다.
"그런데 꿀벌만이 저한테 필요한 것 이상을 모아둔다. 그러니까 결국은 곰이나 사람한테 꿀을 빼앗기고 말지. 인간들 중에도 그런 자가 있다. 제 몫 이상을 저장하고 저 혼자만 잘 먹고 지내려는 자들이지. 결국은 빼앗기기 마련이야. 그 때문에 전쟁도 하게되고... 그들은 필요도 없는데 제 몫 이상을 차지하려고 별별 허튼 소리를 다 늘어놓는다. 또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자기가 더 많이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사람들은 그런 명분과 허튼 소리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다고 해서 자연의 이치가 바뀌어지진 않아."
할아버지와 나는 산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우리가 산칠면조 덫 있는 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와 있었다. 덫을 들여다 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산칠면조들이 내는 소리로 그것들이 그 안에 잡혀 있음을 알았다. 산칠면조들은 놀라서 산칠면조 특유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푸드덕거렸다.
"할아버지, 나가지 못하게 막는 문도 없는데 왜 저것들은 머리를 낮추고 기어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묻자, 할아버지는 구덩이 안으로 한껏 팔을 뻗어 연신 꽥꽥거리며 난리를 치는 큼직한 산칠면조 한 마리를 끌어냈다. 가죽끈으로 그 놈의 다리를 묶은 다음 할아버지는 날 쳐다보며 씩 웃으셨다.
"이 늙은 산칠면조는 어딘가 사람을 닮은 구석이 있지. 이 놈들은 제가 뭐든지 다 안다는 듯이 생각하고는 고개를 낮추어 네 주위를 살펴보려고 하는 법이 없어요. 언제나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대가리를 치켜세우고만 있으니 무얼 알 턱이 없지. 그렇게 하고 다니자면 그 머리가 여간 무거운 짐이 되지 않지. 우리 체로키 부족이야 우리 머리가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산칠면조들을 꺼내 다리를 묶고는 땅바닥에 눕혔다. 모두 여섯 마리였다. 할아버지는 그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모두 나이가 비슷하다. 머리 벼슬의 두께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지. 작은나무야, 우리는 세 마리밖에 필요없으니 네가 한번 골라 보거라."
나는 퍼덕이는 산칠면조들 주위를 돌면서 살펴보다가 마침내 그중 작아보이는 세 마리를 골라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머지 세 마리의 다리에서 가죽끈을 끌러 주기만 하셨다. 풀려난 놈들은 날개를 휘저으며 허겁지겁 산비탈을 굴러내려갔다. 할아버지와 나는 칠면조를 어깨에 둘러메고 산길을 내려갔다. 산칠면조는 꽤 무거웠지만 어깨에 닿는 그 감촉에 마음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겨울의 늦은 오후였고 바람은 잔잔했다. 나는 이 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는 이미 자연의 이치를 하나 터득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산짐승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짐승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짐승들을 '쫓아야 할'목표물로서가 아니라 '더불어'사는 존재들로 보셨다. 그러나 얼굴 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매우 거칠고 무례한 자들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의 존재를 잘 참아내셨다. 도시인들은 사냥개들을 끌고와서는 시끌벅적하게 온 산을 들쑤시며 다니곤 했다. 그 바람에 산짐승들은 그들만 나타나면 숨을 곳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들은 열두 마리의 산칠면조를 봤다 하면 그 열두 마리를 모조리 잡아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제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네가 드나드는 산에 점점 짐승들의 씨가 마른다고 연신 불평을 해댔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더러 머리를 흔든 적은 있었으나 언제나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내게만은 말씀해 주셨다. 그들은 체로키 부족의 이치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나 나는 무척이나 말주변이 없었고 말에 대한 감각이 둔한 편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경우 예외가 있다면 산이나 사냥, 또는 날씨 등에 관해 말씀하실 때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말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면 시끄럽고 골치 아픈 일들도 훨씬 덜할 거라고 하셨다. 어느 세상에나 똥 같은 자식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말썽을 불러일으키는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다고 내 생각에도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보다는 그 말이 갖는 '소리'를 더 높이 치셨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이 어떤 의미를 지녔느냐보다는 그 말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느냐에 더 관심이 있으셨다. 할아버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라도 음악소리를 들을 때는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것에 대해선 할머니도 같은 의견이셨다. 두 분이야말로 대화할 때 말뜻보다는 말소리에 의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분들이셨으니까.
나는 어느 날 밤 늦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아이 킨 예(I kin ye)."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이 말은 그 속에 담긴 느낌으로 볼 때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이었다. 또 할머니는 말씀 도중에 할아버지에게 곧잘 "두 유 킨 미?"라고 물으실 때가 있었으며, 이에 대해 할아버지는 "아이 킨 예."라고 대답하곤 하셨다. 이때의 킨은 '이해한다'는 뜻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I understand you)."라는 뜻이었다. 이렇듯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사랑과 이해는 하나로 통했다. 할머니는 곧잘, 이해할 수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를 사랑하는 일도 불가능하며, 또 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를 진실로 이해하셨고 따라서 서로가 사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이해의 도가 더욱 깊어져 간다고 하셨으며, 그러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이해의 개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것은 또한 설명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러한 이해의 상태를 그분들은 '킨'이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혈족, 친척이라는 뜻을 가진 '킨폭스(kinfolks)'라는 말이 원래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또는 '함께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란 뜻을 담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되다 보니 본래의 의미와 무관한, 그저 피를 나눈 사람들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굳어지고 말았지만 그건 절대로 그런 정도의 하찮은 뜻을 담은 말이 아니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추한 일들이 생기는 것은 바로 사람들 서로가 '킨'이 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정치가들이야말로 세상에서 '킨'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요, 말썽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들이라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네가 지나간 일을 모른다면 네게는 앞으로의 일도 없으며, 네 조상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네 부족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도 모르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우리 부족의 과거를 알려주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서리가 옥수수 알을 단단하게 만드는 계절이 되면 체로키 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추수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겨울 사냥 채비를 시작했으며, 자연의 이치를 따르겠다는 서약을 했다. 그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얼굴 흰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종이쪽지를 내밀며 서명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 종이쪽지가, 이 땅에 새로운 백인 정착민들이 들어올 것인데 결코 체로키 족의 땅을 빼앗지도, 가까이 접근하지도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문서라고 하면서. 이 종이쪽지에 체로키 족들이 서명을 하자 이번에는 더 많은 숫자의 얼굴 흰 사람들이 길다란 대검을 꽂은 총으로 무장을 한 채 다시 몰려왔다. 그 군인들은 먼젓번 서류에 적힌 내용이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내용인즉슨 이제 체로키 족들은 새로운 조약에 의해 지금까지 살던 골짜기와 집과 산들을 몽땅 내놓고 정부가 체로키 족을 위해 마련한 다른 땅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가 지는 머나먼 땅, 백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황무지 땅으로. 문명인들은 총칼로 모든 체로키 족을 골짜기 안에 몰아넣은 다음에 말과 포장마차들을 가져다 주면서 체로키 사람들에게 해가 지는 땅끝으로 갈 때 그걸 타고 가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체로키 사람들은 마차를 거부했다. 이제 체로키 사람들은 집과 땅을 빼앗긴 빈 껍질 뿐인 존재들이었으나, 군인들이 준 마차를 타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소중히 지킬 수 있었다. 그건 볼 수도, 입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걸 지켜냈다. 모두 군인들의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말을 탄 군인들이 총을 들고서 체로키 사람들을 앞뒤에서 호위하듯 포위한 채 따라왔다. 체로키 사내들은 똑바로 앞만 보고 걸을 뿐 땅바닥을 내려다보지도 군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체로키 여자들과 아이들 역시 옆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앞선 어른 남자들만을 묵묵히 따라갔다. 행렬의 맨 뒤에서 하등 쓸모가 없어진 빈 포장마차들이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따라왔다. 체로키 사람들은 그깟 포장마차 때문에 영혼까지 빼앗기지는 않았다. 비록 땅과 집은 빼앗겼지만 말이다.
얼굴 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얼굴 흰 사람들은 체로키 부족이 지나가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길가에 떼지어 몰려나왔다. 그들은 체로키 사람들이 마차도 타지 않고 맨발로 걸어가는 광경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러나 체로키 사람들은 그들의 비웃음에도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꼿꼿하게 걸어가자 그들의 웃음소리는 이내 멎어 버렸다. 자기네가 살던 산악지대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체로키 사람들은 하나둘씩 육체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처음에 백인들은 시신이 나올 때마다 행군을 멈추고 파묻을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하나둘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몇 백, 몇 천이 연속해서 죽어 넘어지자 그대로 행군을 계속했다. 시체는 빈 포장마차에 실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체로키 사람들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들은 시신을 두 팔로 안거나 들쳐업은 채 걸어갔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결국 이 수난의 길에서 전체 체로키 족의 삼 분의 일 이상이 사망했다. 때로는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백인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체로키 부족의 사람들은 울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문명인들 앞에서 자기네의 영혼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장마차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얼굴 흰 사람들은 이 길을 '눈물의 여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체로키 사람들이 울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붙인 건 아니었다. 체로키 사람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눈물의 길'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낭만적인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체로키 부족의 행진은 죽음의 행진이었고, 이러한 행진에 낭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백인들은 1만 3천 명의 체로키 부족을 집단으로 오클라호마의 수용소(우리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곳)로 강제 이주시켰다. 1천 3백 킬로의 행군중에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해 그 숫자는 4천 명에 달했다. 수용소에 도착해서도 나머지 절반이 사망했다. 이것은 다른 인디언 부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강제 이주로 미국 연방정부는 인디언 말살정책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지만, 아메리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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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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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0장 자연의 즐거움
2. 두 중국 부인
자연을 감상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어서, 사람의 기분과 개성에 좌우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 기교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나무, 하나하나의 바위, 또 어느 특정한 때의 하나하나의 경치를 감상하기란 어렵다. 어떠한 경치라도 정확하게 같은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칙을 세우기도 어렵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능히 자연을 즐기는 길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브룩 엘리스와 반 데르 벨레는 부부간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매우 현명하게 본 것 같다. ... 부부간의 사랑의 기술에서 어떤 것은 허용되고 어떤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또는 어떤 것이 쾌미가 있고 어떤 것이 쾌미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법칙으로 규정지을 것이 못 된다. ... 자연을 감상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은 아마도 예술적 기질을 지닌 사람들의 생애를 연구하는 일일 것이다. 대자연에 대한 감회, 일년 전에 본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동경, 어딘가를 찾고 싶다는 급작스러운 소망, 이러한 것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떠오른다. 예술적 기질을 지닌 사람은 가는 곳마다 그것을 발휘하므로 진정하게 자연을 즐기는 문인은 이야기 줄거리나 구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눈 경치나 봄 밤의 정취를 묘사하는 데 몰두한다.
저널리스트들이나 정치가들의 자서전에는 대개 회상록이 많이 실려져 있지만 문인의 자서전은 유쾌한 하룻밤의 회상이라든가, 여러 벗과 함께 어느 골짜기에서 놀던 때의 추억이 주로 담겨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R.키플링(1865 - 1936, 영국의 작가, 시인)이나 G.K.체스터튼(1874 - 1936, 영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의 자서전은 뜻밖에 실망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생애의 중요한 일화가 어째서 그렇게도 중요시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 인간, 인간, 가는 곳마다 인간 뿐이고, 꽃이며 새며 산이며 개울의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중국 문인의 회상록이나 서한은 이러한 점에서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 호수 위에서 놀던 하룻밤 이야기를 친구에게 편지로 써 보내기도 하고, 또 참으로 유쾌했던 그날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것을 자서전 속에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어 있다. 특히 중국의 문인은 적어도 그 몇 사람인가는 자기의 결혼 생활의 추억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었다. 그 중에서도 모벽강의 <영매암억어>, 심복의 <부생육기> 및 장탄의 <추등쇄억>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처음의 두 저서는 처첩이 죽은 뒤에 남편이 쓴 것이며, 맨 끝의 것은 늙은 장탄이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쓴 것이다.
우선 자기의 아내인 추부를 여주인공으로 한 <추등쇄억>의 몇 절을 여기에 발췌하고, 다음은 운을 여주인공으로 한 <부생육기>의 일절을 소개하겠다. 이 두 부인은 모두 특별한 교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훌륭한 시인도 아니었지만 모두 솔직한 기질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느니,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느니 하는 것들은 문제가 아니다. 대체로 인간은 불후의 명시를 지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정취 깊은 한때와 그때의 자기의 기분을 기록하거나 자연을 관상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만 시작을 익혀야 할 것이다.
A. 추부 추부는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수명은 길어야 백 년 밖에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 백 년도 반은 잠과 꿈으로 보내고, 반은 병과 슬픔으로 보내고, 또 그 반은 요람과 노쇠 속에서 보냅니다. 남은 것은 겨우 1할이나 2할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처럼 연약한 체질인 사람은 그 백 년의 수명조차 바랄 수 없습니다> 중추 8월의 달 밝은 하룻밤, 추부는 젊은 여종에게 금을 안고 따르게 하여 서호의 연을 헤치고 작은 배를 띄웠다. 나는 그때 서계에서 돌아오는 도중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추부가 뱃놀이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곧 수박 몇 개를 사들고 그 뒤를 쫓았다. 우리는 소제 제2교에서 만났다. 추부는 때마침 <한궁추원곡>이라는 서글픈 곡을 뜯고 있었다. 나는 장의를 걷어 올리고 앉아서 그 곡을 귀기울여 들었다. 때마침 주위의 산들은 저녁 안개에 싸이고 별과 달빛이 수면에 비치면서 여러 가지 풍악 소리가 은은히 울려왔다. 허공을 오고가는 바람소리일까, 혹은 경옥이 울리는 소리일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작은 배의 뱃머리는 벌써 근의원 남쪽 둑에 닿았다. 그 길로 우리는 여승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백운암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에 여승들은 새로 딴 연밥으로 국을 끓여 주었다. 연밥의 빛이라든가 향기라든가는 참으로 훌륭한 것으로 뱃속으로 스며들게 하기에 족하였다. 고기나 기름진 음식의 맛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조금 뒤 그곳을 떠나 단가교 옆에 배를 대고 땅 위에 참대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 장시간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회지의 소음은 파리 소리처럼 오히려 귀찮은 느낌이 들었다. ... 그렁지렁 하는 동안에 어느새 하늘의 별들은 하나씩 둘씩 빛을 잃어 듬성해지고 호수는 부옇게 흰빛으로 싸이고 말았다. 거리의 성벽 위에서 북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도 밤도 벌써 4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금을 거두어 들고 작은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왔다. 추부가 심은 파초는 벌써 커다란 잎이 피어, 발 저편에서 녹음을 던져주고 있다. 베개에 기대어 가을비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까 적적하여 단장의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날 한 잎의 나뭇잎에 3행의 시를 장난삼아 썼다.
누가 부지런하여 파초를 심었던가? 아침에 비가 적적하게 오고 저녁에 비가 적적하게 오누나!
그 다음날, 이러한 3행의 시가 그 뒤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쓸쓸히 애태우는 그대의 마음! 파초를 심은 마음, 파포를 원망하는도다.
여자 솜씨의 아름다운 글씨, 틀림없는 추부의 희필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싯구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어느날 밤, 창 밖에는 비바람 소리가 들리고 잠자리에는 벌써 서늘한 가을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추부는 잠옷으로 갈아 입으려는 참이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그리기 시작한 백화도첩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몇 개의 물든 누런 잎이 나풀나풀 창문으로 날아들어 사뿐히 침상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추부는 거울을 돌아보고 이러한 시를 읊었다.
어제는 오늘보다 더 좋은 날, 올해는 작년보다 늙어가는 이 내 몸.
나는 추부를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백수를 다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서로가 다른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겨를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화필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밤이 점점 깊어 감에 따라 추부는 무언가 마시고 싶다고 한다. 살펴보니 아궁이에는 벌써 불이 꺼진 지 오래고, 여종들은 모두 머리를 수그리고 잠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책상 위의 등잔을 들어다 조그마한 찻주전자 밑에 놓고, 그녀에게 연밥 끓인 것을 한 잔 데워 주었다. 추부는 10년 전부터 폐를 앓고 있다. 늦가을에는 꼭 기침을 하여 높은 베개로 몸을 받치지 않고는 깊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른 해보다도 튼튼하여 밤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았다. 아마 치료와 자양이 좋았던 모양이다. 온몸에 눈이 날리고, 그 속에 매화가 피어 있는 옷을 나는 추부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 옷을 입은 모습을 좀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니 인간 세계에 홀로 서 있는 매화 선녀처럼 보였다. 늦은 봄 어느날 추부가 녹색 옷소매를 팔랑거리며 노대 위에 나가 있노라니 동풍의 계절이 다 지나간 줄도 모르는 나비가 그 주변을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작년에는 제비가 예년보다 늦게 돌아왔다. 제비가 왔을 때는 발 밖의 복숭아꽃이 벌써 절반이나 지고 있었다. 어느날 제비 둥지에서 진흙이 떨어진 줄로만 알았더니, 제비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졌다. 고양이한테 잡아 먹히기라도 하면 큰 일이라고 생각한 추부는 얼른 그것을 집어 다시 제비 둥지에 올려 주고 둥지를 참대로 받쳐 주었다. 올해는 작년과 똑같이 제비 떼가 다시 돌아와서 집 둘레를 재재거리며 날아 다닌다. 이 제비들도 작년에 새끼를 구해준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추부는 바둑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다지 잘 두는 편은 못된다. 그녀는 밤마다 <지담>이라는 놀이를 하자고 졸라 때로는 새벽까지 계속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장난삼아 죽택의 문장을 인용하여 말했다. <돈던지기나 풀잎따기 놀이에서 임자는 두 번 다 졌으니 그럼 오늘밤은 나에게 뭘 주지?> 그러면 추부는 내 말을 받아, <내개 못 이긴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실 거예요. 이 패옥의 범을 걸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한 이삼 십 수 놓자 벌써 그녀의 형체는 점점 불리하게 되어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아기 고양이를 바둑판 위로 집어 던져 바둑판을 흐트러 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임자는 자기가 양귀비인줄 아는가 보군> 하고 나는 말했다(양귀비는 현종 황제에게 똑같은 짓을 하였다) 그녀는 잠잠히 말이 없었다. 다만 은촛대의 불빛은 복숭아 꽃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을 비쳐주고 있었다. 그 후로는 우리는 다시는 내기를 하지 않았다.
호포천 옆에 나지막히 바위 위에 가지를 뻗고 있는 몇 포기인가의 강남차가 있다. 꽃이 필 무렵에는 노랑꽃이 돌층계를 덮어, 그 향기를 맡고 있으면 마치 선향에서 노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꽃이 좋아서 곧잘 그 아래에서 차를 끓이곤 했다. 그녀는 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았다. 때로는 늘어진 가지가 머리에 걸리기도 하여 모처럼 곱게 빗은 머리를 흐트려 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 머리를 가려서 샘물로 추켜 가지런히 해 주었다. 돌아올 때는 꽃가지 몇 가지를 집 사람들에게 선물로 꺾어서 사람들에게 새 가을의 소식을 전하려고 수레 뒤에 달고 길을 달렸다.
B. 사랑스러운 여성 운 <부생유기>에는 중국의 어느 무명 화가와 그의 아내 운이라는 여성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회상기가 있다. 두 사람 다 단순한 예술가다운 기질의 인물로서 적어도 그들에게 찾아드는 행복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의 필치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이 운이라는 여성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생각된다. 두 사람의 생활은 비참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매우 명랑한 생활이었다. 그것도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명랑함이었다. 자연이 어떻게 하여 두 사람의 정신적 정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제부터 드는 3장은 그 모두가 명절인 7월 7석과 7월 보름인 백중날을 이 두 남녀가 어떻게 즐겼으며, 또 소주에서의 한여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기술한 것이다.
그 해(1780)의 7월 7일 칠석날 밤에 <아취헌>에서 함께 직녀성에게 예배하려고 운은 향과 초와 수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과일을 마련했다. 나는 <원생생세세위부부>라는 명을 새긴 인을 두 개 팠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에 주고 받는 편지에 쓰려고 새긴 것으로, 나는 주문으로 하고, 운은 백문으로 했다. 그날 밤달은 아름답게 빛나고, 물굽이 저 아래를 굽어보니 잔물결이 비단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얇은 비단을 몸에 걸치고, 손에 작은 부채를 들고 강을 굽어보는 창가에 둘이 나란히 걸터앉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은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다. 운은 자못 흥겨운 듯이 <저 달은 이 세상 어디서 보나 같겠지요. 우리들처럼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오늘 밤 저 달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나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음, 그야 저녁 바람을 쏘이며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겠지. 또한 그들의 안방에 들어 앉아 구름을 바라보며 시취에 젖어 있는 총며안 부인들도 많겠지. 그러나 부부가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름이 그들의 화제가 되리라곤 난 거의 생각되지 않아>
얼마 지난 뒤 마침내 촛불은 꺼지고 달마저 기울어, 우리는 공양한 과일을 들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7월 보름날은 귀절이다. 운은 초촐한 음식을 장만하여 달을 벗하여 둘이서 마시려는 생각인 듯했지만 밤이 되고 보니 하늘은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말았다. 운은 이맛살을 지푸리며 초연히 말했다. <우리가 둘 다 백발이 되도록 함께 사는 것이 신령님의 뜻이라면 달님은 반드시 또다시 나와 주실거예요> 나로서도 매우 실망되었다. 강 저쪽을 바라보니 무수히 많은 촛불처럼 반딧불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벗들과 여뀌 사이를 누비며 불을 켰다 껐다 한다. 우리는 곧 연구 놀이를 시작했다. 이것은 서로 각자가 두 줄씩 시를 지어 뒤를 이어가는 놀이인데, 첫줄에서 상대편이 일으킨 구를 맺고, 둘째 줄에서 딴 구를 일으켜 상대편에게 뒤를 잇게 한다. 이렇게 몇 연을 계속하는 동안에 오래 끌면 끌수록 점점 형편없는 것이 나오게 되어 들판에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쯤 되면 운은 내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지러지게 웃어대기도 하고 매어 달리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운의 머리에 꽂은 재스민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운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이렇게 농조로 말했다. <재스민은 진주처럼 둥글기 때문에 여자들의 머리 장식용으로 쓰이는 줄 알았는데, 여자의 머리와 분 냄새에 섞일 때 이렇게도 향기가 좋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소. 이런 향기가 나니 공양한 불수감 따위는 어림도 없겠구려> 그러자 운은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불수감은 향중 군자랍니다. 향기가 어찌나 그윽한지 코로 느끼지 못할 정도예요. 그렇지만 그 향기의 일부를 다른 데서 빌어 오기 때문에 향중 소인이지요. 향기가 좋기는 하지만 재스민은 사철 생글거리며 아첨하는 사람 같은 냄새가 날 뿐인걸요> <그럼 왜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친하는 거요?> 하고 내가 물은즉 운이 대답하기를, <저는 군자가 속인을 사랑하는 그 점이 좋아요>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 받는 동안에 벌써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올려다보니 하늘을 덮었던 구름은 어느새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수레바퀴처럼 둥근 보름달이 중천에 나와 있으므로 우리는 매우 기뻤다. 그래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 석 잔도 마시기 전에 갑자기 다리 밑에서 누군지 물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우리는 창문 너머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으나 습지를 달리는 오리 소리가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강물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창랑정 옆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운이 큰 겁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 이야기는 아예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러자 운은 한숨을 쉬면서 <아아! 저 소린 어디서 오는 걸까요?> 하고 말한다. 그래서 허둥지둥 창문을 닫고 술병을 방 안으로 옮겼다. 그때 등잔불은 콩알만하게 작아지고 창문에 친 커어튼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불을 끄고 침상 안으로 들어갔지만 운은 벌써 열이 높아 몸이 더웠다. 얼마 뒤에 나도 열이 나기 시작하여 우리 두 사람의 병은 20일이나 계속되었다. 행운의 술잔이 넘치면 재난이 온다는 옛말은 정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 인간이 백년 해로를 할 수 없다는 하나의 전조이기도 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넘칠 듯한 사랑으로 빛나며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장구로 엮어져 있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1절은 그들의 여름의 더위를 덜어 잊게 한 회상을 기록한 것이다.
창미 거리로 이사한 뒤 우리 둘의 규방을 <빈향각>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운의 이름과 아내를 언제나 손님처럼 존경하자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 집은 담이 너무 높고 뜰이 너무 좁아서 그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 뒤에는 서재로 가는 딴 채가 있었다. 딴 채 창문으로는 아주 황폐해진 육씨네 정원이 내다보였다. 운의 생각은 아직도 창랑정의 아름다운 경치 위로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금모교의 동쪽이자 경거리 북쪽에 살고 있는 어느 농사 짓는 노파가 있었다. 작은 오두막 집 둘레는 온통 채소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버들가지로 엮은 문이 달려 있었다. 문 밖에는 한 30평 쯤 됨직한 연못이 있고 연못 둘레는 가득히 나무로 덮인 황무지였다... 오두막집 저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깨진 기왓장을 쌓아올린 더미가 있고, 그 위에 올라서면 주위의 경치가 한 눈에 보인다. 그 주변은 가득히 풀이 무성한 들판으로 되어 있다. 언젠가 그 노파가 그 오두막집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운은 언제나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 그래서 다음날 나도 그곳에 가보았더니 그 오두막집의 간수는 단지 두 간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넷으로 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미닫이 창문이니 참대 침상이니 모두 서늘하게 기분이 좋아서 아주 살기에 편해 보이는 집이었다. 단 한 채 뿐인 이웃은 가꾼 채소를 시장에 팔아서 살고 있는 늙은 부부였다. 우리가 한 해 여름을 그곳에서 보낼 작정이라는 것을 안 그들은 연못에서 잡은 고기며 자기네 밭에서 가꾼 채소를 가지고 찾아오곤 했다. 우리는 그 값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도무지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운이 그들에게 각기 신을 한 켤례씩 만들어 주었더니 그들도 이것만은 거절할 수가 없어 마침내 받아 주었다. 그때는 마침 온갖 나무들이 땅 위에 녹음을 던지는 7월이었다. 여름의 산들바람은 연못 위를 스치고 매미는 온종일 시그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웃 노인이 우리에게 낚싯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나무 그늘에 앉아 낚시질을 하곤 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면 둘이 기와 더미에 올라 저녁놀을 바라보기도 하고, 흥이 날 때엔 시를 짓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이런 시를 지은 일도 있었다.
수운은 떨어지는 해를 삼키고 궁월은 흐르는 별을 쏘더라.
한참 뒤 달은 그림자를 수면에 떨구고 뭇벌레는 사방에서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참대 침상을 생울타리 가까이 끌어내어 걸터앉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 그런 때 노파는 술 안주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달 아래에서 조촐한 주연을 즐기는 것이다. 목욕을 한 뒤에 여름 신을 끌고 손에 부채를 들고 거기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노인이 말하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한밤이 가까워 잠자리에 들려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은 기분좋게 서늘해져서 도시에서 산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떤 때는 이웃집 노인에게 부탁하여 생울타리 옆에 국화를 심게 하였다. 9월이 되어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 운과 함께 다시 열흘 동안을 그곳에 머물렀다. 나의 어머니도 역시 기뻐하시며 그곳을 찾아주셨다. 그래서 축국연을 열게 되어 함께 국화 옆에서 게를 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곳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 버린 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꼭 여기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짓기로 해요. 땅을 한 열 이랑쯤 사서 집 둘레에 먹을 채소와 수박을 심도록 해요. 당신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수를 놓으면,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시를 지을 돈은 모자라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검소한 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가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도 정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진심으로 그 말에 찬성했다. 지금의 내 신분이라면 집 한 채쯤은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알아줄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다. 아아, 이것이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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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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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4. 파스칼
십자가에 못 박힌 지성
파스칼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다. 한 심술궂은 비평가는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 교사의 교육마저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저명한 세무관이었던 아버지가 직접 파스칼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했다. 그는 파스칼에게 어학을 배우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어린 파스칼의 본래 관심사였던 수학과 자연 과학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12세 때 그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백묵으로 삼각형과 원을 그리면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해 냈다. 이것은 그의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또한 16세 때에는 원추 곡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세 때 아버지의 조세 실무를 위해 최초로 활용 가능한 계산기를 발명했다. 그는 당시 대단한 논쟁이 되고 있던 텅 빈 공간의 존재에 대해 실험적인 연구를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심한 치통 때문에 더이상 훌륭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자, 서둘러 확률 계산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룰렛의 이론을 구상해 냈다. 마침내 그는 사이클로이드, 다시 말해 구르는 바퀴의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바늘이 그려내는 곡선을 연구하였다. 이로써 그는 훗날 라이프니츠에게 영예를 안겨 준 미적분에 가까이 접근한 셈이다. 그밖에도 파스칼의 학문적 관심은 순수 이론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파리의 곳곳을 다니는 합승 마차의 설계에 힘을 쏟기도 하였는데 이 구상이 실제로 빛을 보았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파스칼은 수학과 자연 과학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소질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어떤 것이 계속해서 개입된다. 즉 그의 본래의 정열은 갈수록 점점 더 철학으로 쏠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정열이 자연 과학을 하는 데는 다소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파스칼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철학을 택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일종의 초자연적 현혹이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인간 고유의 진정한 연구이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철학하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 가지 신비한 체험이 파스칼로 하여금 다른 인생 행로를 걷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이 그의 양복 안쪽에 꿰매어져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 그 쪽지에는 이 같은 체험이, 토막 토막 끊어진 짤막한 말들로 기술되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씌어있었다. "불, 확실성, 확실성, 느낌, 기쁨, 평화", "신만 제외하고는 세계와 모든 사물들을 잊어 버려라", "완전하고도 내적인 단념." 그 쪽지의 첫번째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와 학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 이제 파스칼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수회와의 격렬한 논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드디어 그는 그의 미완성의 작품인 (팡세)를 저술함으로써 정신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다. 그는 18세 이후로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렸으면서도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다. 그러나 만년에 가서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모든 교제에서 손을 뗐다. 그는 얼마 동안 수도원에 은둔하여 기도 삼매에 빠지기도 하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어떠한 봉사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에 그림도 양탄자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고 그가 즐겨 먹던 요리도 거절하였다. 그는 가시 돋친 혁대를 만들어서 몸에 감고 다녔으며 1662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색에서 과연 파스칼은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는 우선 인간을 무한한 세계 속에 몸담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렇지만 이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사유를 극도의 당혹감 속으로 몰아 넣고 만다. 지구에서 눈을 돌려 태양의 운행을 바라보면 지구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태양의 운행도 또한 "천공의 천체의 운행에 비하면 단지 아주 미세한 하나의 점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눈에 보이는 이 전체 세계는 전체 자연을 염두에 둘 때 눈에 띄지 않는 가는 선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자연 전체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유한함은 무한함의 면전에서 무화되어서 순수한 무가 되어 버린다." 이로써 사유는 끝이 나고, "무한함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연을 무한한 연장 속에서 관찰하지 않고 단지 개별적인 자연 현상만을 관찰할 때에도 그와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가장 작은 생명체를 관찰해 보면-파스칼은 진드기를 예로 든다-그것도 부분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우주의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도 역시 실재의 최종적인 구성 요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도 계속해서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개의 부서진 원자 조각의 내부에는 "무한한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그 안의 개개의 우주는 모두 자기의 천공을, 자기의 혹성을, 자기의 지구를 보이는 세계에서와 동일한 상태로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자연의 탐구는 무한 속으로 넘어간다. 그 탐구는 오직 무에서만 끝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탐구는 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또다시 사유는 "이 불가사이 속에서 자신을 잃고 만다"는 것이 적용된다.
이 이중적인 무한성의 사상의 의미는 중세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특별히 명료하게 나타난다. 중세 사상에서는 모든 사물이 유한한 세계의 전체 안에 자기의 지정된 자리를 갖고 있다. 이제 그러한 장소 규정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무한히 큰 것의 지평 안에서 존재자는 무한히 작은 것으로 수축되어 버리고 만다. 무한히 작은 것의 지평 안에서 존재자는 무한히 큰 것으로 팽창한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는 존재자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모든 사물은 무로부터 생겨나서 무한을 향해 나아간다. 누가 이 놀라운 진행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결코 사물의 참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단지 언제나 사물의 한가운데 파묻혀 있는 느낌으로, 사물의 근원이나 목표를 알 수 없다는 영원한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뿐이다. 나는 어디서든지 그저 어둠만을 볼뿐이다. 자연은 나에게 의심과 불안의 동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영원한 도주 속으로 도피해 가고", "불가사의한 신비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형상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을 고찰할 때, 파스칼에게는 문제점이 더욱 심화된다. 인간을 무한히 큰 것의 지평 앞에 놓고 볼 때, 인간은 사라져 버리는 먼지처럼 작게 보이며, "우주 속에서 지각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우주도 역시 전체를 염두에 둘 때는 지각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무한히 작은 것의 지평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은 그 자신이 "거대한 상, 세계, 아니 전체로서" 보일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그가 몸담고 있는 자연과 연관지어 고찰해 볼 때, "무한에 비하면 무이고, 무에 비하면 전체"이다. 즉 인간은 "무한과 무라는 두 심연 사이에" 떠다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이 그 속에 삼켜져 있는 전체와 마찬가지로 거기로부터 이끌려 나온 그 무도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은 "그 자신이 자연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대상이다." "이것이 존재 속에서의 우리의 본래 위치이다. 우리는 광대한 중간에서 떠돌며 항상 불확실하게 동요하면서,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으로 튕겨진다. 어느 한쪽 경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고정시켜 지탱할 만한 기반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 경계는 흔들리고 우리 자신을 떠밀어낸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영원히 도망쳐 버린다."
인간을 자연과 관련해서 고찰할 때 나타나는 이런 식의 분열은 인간 현존재만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분열은 인간의 실존 깊숙이까지 파고든다. 인간 존재란 파스칼에게 모순 속의 존재를 뜻한다. 바로 거기에 무엇보다도 사유의 위력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유 속에서 모든 존재자를, 전체 속에서 모든 것을 포괄한다 "전체는 공간을 통해서 나를 에워싸고, 나는 사유를 통해서 전체를 포괄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가능하다. "인간의 전적인 존엄성은 사유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로써 동시에 인간의 전적인 무기력이 드러난다. "한 줄기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렇지만 또한 그에게는 다른 한 면이 있다. 즉 인간은 그의 무기력함을 사유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온 우주가 일어나 그를 죽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죽는다는 것을 알며 우주가 자기보다 어떤 점에서 우월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 분열은 인간의 본질에 한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와 행동에서도 그것은 나타난다. 파스칼은 그것을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흔히 행하고 있는 생활상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토끼 몰이, 공놀이, 춤, 관청에서의 업무 등이 그런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진지한 일과 마찬가지로 게임과 같은 일도-파스칼이 보는 바에 따르면-기이한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것들은 겉보기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들을 행하는 자세인 서두름과 열성은 그것들이 이곳 저곳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을 뒤좇는 광적인 집착에서 자라 나오고 있음을 알려 준다. 부유한 귀족에게 소중한 것은 그가 사냥하는 토끼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가 내기에 이기면 받게되는 이득도 아니다. 그는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해 오락을 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을 뿔뿔이 흩어 놓기 위해 산만한 것을 추구할 뿐이다.) 파스칼은 그것을 깊이 숙고해 본 뒤, 궁극적으로는 그 배후에 홀로 있음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방안에서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적나라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로 하여금 고독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들을 격렬하게 뒤흔들어 놓아 정신을 빼앗아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사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 파스칼은 그 안에서 인간 실존의 비참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홀로 있는 그러한 순간 인간에게는 "권태, 우울, 비애, 고뇌, 불쾌, 절망"이 엄습한다. 그는 "자신의 허무함, 자신의 외로움,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예속성, 자신의 무기력, 자신의 공허감" 등을 느낀다. 그는 모든 인간 현존재에게 얹혀져 있는 뿌리깊은 위협을 예감한다. 즉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곧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최소한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이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무런 근심 없이 낭떠러지로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은 이러한 비참함 가운데서도 인간의 위대함의 어떤 면모를 발견한다. 즉 인간에게는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자기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나무는 자기 자신을 비참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비참함이란 자신을 비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위대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인간은 완전해지기를 바라지만, 그가 전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본질과 현존재 사이의 이러한 철저한 모순은 필연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그로 하여금 근본적인 불확실성 속에 살도록 만든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 하지만 단지 우리 안에서 불확실성만을 발견할 뿐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제거해 버릴 수 없는 오류 투성이의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무가 그에게 진리로 나타난다." "우리는 무한히 위로 상승해 올라가는 탑을 쌓고자 견고한 지반과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토대를 발견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지반은 전체가 흔들리고 땅은 갈라져 심연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 것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다. "나는 내 주위에서 암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파악 불가능하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육체를 갖춘 영혼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영혼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도,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모순인 채로 남아 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외쳐댄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스스로에게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인식하시오!" 그는 요약하여 이렇게 판단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얼마나 기묘한 존재인가! 얼마나 새로운 존재인가, 얼마나 기이한 괴물인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존재인가, 얼마나 모순적인 주체인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가! 인간은 모든 사물의 지표이며, 보잘것없는 땅 위의 벌레! 진실의 관리자이고, 불확실함과 오류의 하수구이며, 우주의 광채이자 찌꺼기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에 직면하면 지쳐 버린 체념이나 무기력한 회의주의 또는 근거 없는 독단론으로의 도피가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독단론과 마찬가지로 회의론도 엄격히 입증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은 독단론과 회의론, 이 둘 사이에서 살고 있다. 즉 "애매 모호한 이중성과 어떤 의심스러운 불명료함 속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안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에는 결정적인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의 기만이나 비참함을 보고 있을 때, 내가 말없이 이 우주 전체를 관찰할 때, 빛이 그 자신에게만 내맡겨져 있는 인간을 관찰할 때, 우주의 이 구석에서 방황하며, 누가 그를 거기에 갖다 놓았는지, 그가 왜 그곳에 와 있는지, 그가 무엇이 될지, 그가 언제 죽는지,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없이 버려져 있는 인간을 관찰할 때, 나는 마치 자고 있는 어떤 사람이 황량하고 무시무시한 섬으로 보내져서 그가 깨어났을 때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고 그곳에서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음을 깨달았을 때처럼 아연 실색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나는 그러한 매우 가련한 처지에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을 경이스럽게 여긴다." 이렇듯 파스칼 앞에 인간 현존재의 무의미함의 가능성이 대두된다. 그것은 신이냐 무이냐의 양자 택일로 드러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듯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무나 노한 신의 손안에 떨어진다는 것만 알뿐이다. 이때 나는 이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것이 나의 부분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이렇듯 현존재 속에서의 나의 처지란 전적인 나약함과 불확실성뿐이다."
따라서 이성은 사유의 전 영역에서 좌초하고 철학함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러한 상태에서 파스칼은 진지하게 그리스도교 복음에 눈을 돌린다. "신이 없는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한 무지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신으로부터의 가르침만이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와 인간 실존의 "불가사의한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신의 계시는 인간의 불가해함을 근원적인 본질의 상태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기이한 이탈", 인류의 최초의 원죄의 결과로 파악한다. 인간은 "분명히 잘못하였고 그리하여 자신의 참된 장소에서 떨어져 나왔다. 인간은 어디에서든 불안 속에서 무익하게, 헤어날 길 없는 암흑 속에서 자신의 참된 장소를 찾아 헤맨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인간의 참된 장소는 있다. 우리는 "이전에 완전성의 단계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단계로부터 불행하게도 떨어져 버렸다." 파스칼은 이것을 인간의 "첫번째 본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즉 "인간의 첫번째 행복에 대한 어딘가 무기력한 직감"으로 남아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타락한 상태의 비참함을, 즉 "폐위된 왕의 비참함"을 그렇게도 슬프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그가 본래 근원적으로 속해 있었던 그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이다. 이것이 인간의 "두번째 본성"이다. 그러나 이 두번째 본성은 그의 첫번째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극복한다." 그래서 이제 파스칼은 실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으로 비약한다. 인간에게 은총 속에서 하사되는 밝은 빛에 의해 자연적 현존재의 불가사의함이 그에게 투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도 어려움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적 계시를 인식한다는 것은 애매모호하고 수수께끼 투성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이렇게 파스칼은 모든 지적인 통찰의 가능성을 내몰아 버린다. 이성이 아닌 인간에게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진정한 확실성의 가능성을 성사시킨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고, 믿음의 장소는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은 이성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신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다." 믿음은 물론 아무런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종교는 "확실하지 않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카오스"가 가로놓여져 있다. 신은 "떨어져 있는 신"이며, 숨어 있는 신으로 머물러 있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모험이다. 모험은 그 자신의 독특한 종류의 확실성을 수반한다.
이렇듯 결국에는 믿음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파스칼 철학의 고유한 과제가 된다. "이성의 최후의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무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이성 자체의 부인만큼 이성에 적합한 것은 없다." "이성의 전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인 실패 속에 사유의 자기 포기만이 남게 된다. "당신의 그 모든 통찰들은 단지 당신 자신 안에서는 진리도 구원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약속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성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철학의 포기는 철학함의 정당한 종말이 된다. "철학을 비웃는 것, 그것이 곧 진정한 철학함이다." 이러한 말은 파스칼처럼 매우 어렵게 철학을 한 사람만이 말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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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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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로프
늙은 긴즈버그는 자기의 가족에게 진저리가 났다. 그는 가족들에게 그들을 떠나 일본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거기까지 가실 거예요?" "걱정마라. 손수 노를 저어 갈 테니까." 그들은 부두까지 그를 전송하러 나와 아버지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길이가 긴 로프를 배에 묶어 두었다. 긴즈버그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수평선을 향해 배를 저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들은 밤새도록 그가 배에 있도록 내버려 두었으나 해가 떠오르자 신변이 걱정되었다. 게다가 안개가 굉장히 짙게 끼어 배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밤새도록 배를 저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긴즈버그, 별일 없어요?"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외쳤다. "일본에서 나를 아는 놈이 도대체 누구냐?"
- 그는 밤새도록 배를 저어서 일본에 도착했다고 믿고 있었으나 배는 길다란 로프에 묶여 있었다. 그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거든, 로프를 준비하라. 그러면 적어도 해변에 묶여 있기는 할 것이며 더 멀리 가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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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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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3장 신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것인가? (2/4)
3)주몽신화 - 고구려
주몽신화의 내용과 분석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입니다. 그의 시호는 동명성왕입니다. 시호란 정승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고인의 행적을 기려 새로이 붙여 주는 이름입니다. 아마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곡려 건국자의 동명성왕이라는 시호에 대해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부여 건국자의 이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구려의 동명성왕에는 성이라는 글자가 덧붙여져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주몽의 신성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부가된 수식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용도 유사합니다. 다음은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대략적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어서 아들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을 때 큰 돌을 보더니 마주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돌을 치우게 하자 금색 개구리 모양을 한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하늘이 나에게 준 자식이다."하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나중에 재상인 아란불이 부여왕 해부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제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다 근처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비옥해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해 그곳으로 도읍을 옯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나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가람이 와서 도읍했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여자를 데려와 물으니,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나와 노는데, 어떤 남자가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의 집안으로 유혹해 정을 통하고는 가버렸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안을 좇아갔다고 꾸짖고는 우발수로 쫓아냈습니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어놓았는데, 햇빛이 비추므로 몸을 피했으나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추더니 임신을 해 다섣 되 크기의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이 알을 버려 개...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했다. 나중에 들에 버리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쪼개려 했지만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라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사내아니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이이했다.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을 때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매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소는 것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그 사람됨이 용감하니 만약 일찌감치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따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라고 했다. 왕이 듣지 않고 말 기르는 일을 시켰는데 주몽이 탈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적게 주어 수척하게 만들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왕은 살진말을 자기가 타고 말은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나중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자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눈치채고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로 간들 안되겠느야?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 주몽은 이에 오이.마리.협보 등 3명과 함께 가다가 엄시수에 이르러 건너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병에게 잡힐까 염려해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오늘 도망가매 추격병들이 쫓아오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넌 뒤 흩어져 추격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3명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있었고, 한 사람은 승려복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자네를 어디 사람인가? 성은 무엇인가?"하니,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입니다."라고 했고, 승려복을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입니다."했으며, 마름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입니다. "라고 했으나,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 무골에게 중실씨, 묵거에게 소실씨라는 성을 주고 그들에게 "내가 하늘의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명의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그들의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펀에 이르렀다. 그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도읍하고자 했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이 단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그로써 고를 성으로 삼으니, 당시 주몽의 나이는 22세였으며, 한나라 효워제 건소 2년이요,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내용인데,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외에 광개토왕릉비문과 모두루 묘지명, 삼국유사, 동명왕편, 위서 등에도 혹은 길게 혹은 짧게 실려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서기전 37년에 건국하는 과정이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와 같은 문화배경 하에서 성장했음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또한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구려의 건국주도 세력은 부여에서 분파해 나온 집단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언어와 각종 풍습이 부여와 같다는 당시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위의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엄시수를 건너 졸본천 가에 건국했다고 했으나, 광개토왕를비문에서는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의 홀본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의 엄리대수는 엄시수.엄호수.시엄수.엄체수. 등으로도 표현된 지금의 송화강일 것입니다. 또 홀본서성이 위서에는 홀승골성으로도 되어 있는데, 남아 있는 유적 등으로 볼 때, 아마도 중국 요녕성 환인 지방의 오녀산성 일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유리명왕 때 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국내성 일대로 도성을 옮기게 됩니다.
부족연맹채제 - 5부 신화에 따르면 주몽은 남하할 때 3명의 부여인과 동행했으며, 엄시수를 건던 뒤에도 다시 재사 등의 3명을 만나 수하로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설화 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상징하므로, 부여로부터의 남하집단이 비교적 큰 규모였으며, 남하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여려 부족을 병합한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지역을 빈번히 공격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동명성왕 재위 2년에 비류국을 병합한 것인대, 비류국은 당시 그 일대에 분포한 여러 소국들을 이끌던 주도세력이었던 듯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비류국을 병합함으로써 신흥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 듯한 기록이 중국측의 역사서에는 다소 짧고 건조하게 실려 있습니다. 즉,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 등의 5개의 부족이 있어서 그중 연노부 사람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노부가 점점 힘이 미약해지더니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 왕위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종족으로서 대사인 사람들만 고추가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는데, 유독 연노부의 적통대인만큼은 고추가라는 칭호를 얻을 뿐 아니라 종묘와 영성사직에 제사 지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노부가 후한서에는 소노부로 나옵니다. 한편 왕은 대대로 절노부의 여자와 혼인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노부를 왕비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의 중국측 기록을 보노라면, 혹시 비류국이 연노부(소노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비류국의 왕으로서 주몽에게 항복한 송양의 이름이 소노부의 소노와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물가 혹은 계속 등에 해당하는 지역을 나.노.내라든지 양.양.양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5부가 삼국사기에는 연나부.환나부.관나부.비류부 등의 명칭으로 나와 혼란을 줍니다. 어느 쪽이 원래 명칭인지는 정확이 확인할 수 없으나, 연나부는 절노부, 환나부는 순노부, 관나부는 관노부, 비류부는 소노부를 각각 달리 표현한 것인 듯합니다. 한원..통전 등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계루부는 나중에 내부 혹은 황부로 칭해졌으며, 절노부는 북부.흑부.후부, 순노부는 동부.청부.상부.좌부, 관노부는 남부.적부.전부, 소노부는 서부.백부.하부.우부 등으로도 불려졌습니다. 그중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명칭은 국호에까지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고구려라는 국호가 초기에는 중국측에 구려로 표기된 적도 있는데 이것이 성을 뜻하는 고구려어 구루에서 왔다면, 계루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사와 순장 5부의 대사는 각자 사자의.선인과 같은 관직을 따라 두고 왕에게는 그 명단만 보고하면 그만이었다고 합니다. 부족 차지 혹은 지방차지적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3세기경의 고구려에서는 일하지도 않고 지내는 자만 1만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하호는 멀리로부터 쌀과 생선.소금 등을 운반해야 했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가 전투집단적 성격을 띠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전사로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고구려 사람들의 성격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마다 무기를 지니며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다는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같은 시기의 부여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감하다고 온후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고구려 사람들의 성격을 흉악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중국특과 군사적 마찰을 자주 일으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기 3세기경에는 고구려에 이미 상사.대로.채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과 같은 관직이 설치되어 국가적 면모를 분명하게 갖추었으나, 감옥은 없어서 죄 지은 사람이 있으면 제가 의논해 죄인을 죽이고 그의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관습법과 연좌제를 시행한 것이지요.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가무를 좋아했으며, 10월에는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벌였다고 하는데, 동맹은 아마도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강한 축제이자 정치행사였던 듯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데릴사위제가 널리 행해졌던 모양입니다. 양쪽 집안이 혼인하기로 합의하고 나면, 여자 집안에서는 뒤뜰에 서옥이라는 작은 건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위가 여자 집 대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면서 재워줄 것을 무릎꿇고 비는데,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해야 여자 집에서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이후 사위는 여자 집에서 몇 년을 살다가 둘 사이에 낳은 아이가 크면 비로소 부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데릴 사위제는 장차 남자 집안에 기여하게 될 여자의 노동력과 생산력에 대한 보상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서, 일종의 신부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독특한 혼인방식의 하나로서 형사취수제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부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도 순장이 실시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데, 동천왕이 죽자 그의 은덕을 사모한 나라 사람들이 매우 슬퍼하고 가까운 신하 가운데 자살해 순장 당하겠다는 사람도 여럿이었으나, 다음 왕(중천왕)이 순장을 막았으므로 공식적으로 순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명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묘 앞에서 가서 자살하매 다른 사람들이 나뭇가지 등으로 시체를 덮어주었는바, 그후 동천왕의 묘가 있는 곳을 시원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까지는 적석총을 많이 사용했으며, 평양천도(427)를 전후한 무렵부터는 봉토석실분을 많이 조영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무덤을 만들이 위새서는 많은 인력과 재물을 들여야 하므로, 그곳에 묻힌 사람은 일단 당시의 중상류층에 속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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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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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事求是(실사구시) 實(열매 실) 事(일 사) 求(구할 구) 是(옳을 시)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는 학문을 즐겼던 한 왕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의 경제(景帝)에게는 유덕(劉德)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유덕은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에 봉하여지고 하간왕이 되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하였다. 진시황이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후 고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오기도 하였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도 하간왕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진(秦)나라 이전의 옛책들을 그에게 바쳤으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과 함께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자, 유덕은 한무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고대의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그는 학문 탐구를 즐길뿐만 아니라 옛날 책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修學好古, 實事求是) 라고 말했다.
實事求是(By verification of the facts to get the truth) 란 실제에 근거하여 진리를 밝혀 냄 을 뜻하며, 바로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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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典》'漢書' 河間獻王德傳
이 말은《漢書》'河間獻王德傳'에 실려 있는, '학문을 닦아 예를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함.(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초기, 즉 청나라 말기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계몽사상가로서 활약한 양계초(梁啓超)는《淸代學術槪論》을 써서 淸代 학술의 개론을 시도한 사람이다. 양계초는 다시 능정감(凌廷堪)이 대진(戴震)을 위하여 지은《事略狀》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이용하여 대진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옛날 하간(河間)의 헌왕(獻王)은 실사(實事)에 대하여 옳음을 구하였다. 도대체 실사(實事)의 앞에 있으면서 내가 옳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내가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교례당집》35권 )
더구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학문의 표적으로서 존중한 것은 대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보다도 후배에 해당하는 청나라 왕조의 학자들 중에는 주대소(朱大韶)나 왕정진(王廷珍)과 같이, 스스로를 '實事求是'라고 아호를 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사실을 토대로 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청조(淸朝)의 고증학파가 공론(空論)만 일삼는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반동으로 내세운 표어이다.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은 정확한 고증을 존중하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학문연구의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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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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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2. 박쥐의 두 마음
'박쥐 구실(편복지역)'이란 말이 있다. 낮에는 짐승(쥐)이 되고 밤에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유일한 포유류(젖빨이동물)인 박쥐가 새떼한테는 날개를 접고 나는 짐승이라고 하고, 짐승 무리에게는 날개를 펴서 새라 하며 제 편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세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여 반복 무상한 지조 없는 자를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면 이런 박쥐는 어떤 생태를 가지고 있을까. 1,000종이 넘는 박쥐들이 지구 이곳 저곳에 널려 살고 있으니 그놈들의 생태도 천태만상이라 여기에 쓴 글은 그들에 대한 일부분의 설명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이놈들의 제일 큰 특징은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 얇은 막이 있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날개 익, 손수 자를 써서 익수류로 분류하고 또 사람처럼 새끼를 낳아 젖으로 키우니 고등 포유류로 분류한다. 특히 앞다리는 끝에 발톱이 달린 엄지발가락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속에 우산살같이 박혀 있고 뒷다리는 발가락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다. 우장이라야 짚이나 띠로 엮은 도롱이나 댓개비, 갈대로 만든 삿갓밖에 없었던 시절에 박쥐날개처럼 접고 펴는 서양 우산을 보고 '박쥐우산'이란 이름을 붙일 만했다. 어쨌거나 우산의 살대를 박쥐의 긴 발가락으로 본 어른들의 안목과 관찰력에 아연 입이 쩍 벌어질 뿐이다. 포유류 중에서도 유일하게 박쥐가 하늘에 사는 것은 땅에 사는 우리와 비교할 때 특이하게 적응을 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날다람쥐도 하늘을 나는데'하는 의문이 남는 독자도 있겠으나 날개짓을 해서 멀리 또 오랫동안 나는 놈은 역시 박쥐뿐이고 날다람쥐는 공기의 부력을 이용하여 잠깐 동안 활공을 할 뿐이다.
박쥐들의 더불어살이 박쥐는 주로 동굴이나 다 캐내고 버려진 폐갱, 다리 틈, 고옥의 처마 밑에 살며 낮에는 그 속에서 지내다가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로 우리 나라의 것들은 야행성 나방이나 풍뎅이, 모기 같은 곤충을 잡아먹지만 외국의 경우는 꽃의 꿀을 빨아먹는 놈, 물고기를 잡아먹는 놈, 소나 말 등 가축의 피를 먹는 흡혈박쥐도 있어 이들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사막에 사는 박쥐는 선인장의 꿀을 빨아먹으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보통 박쥐들은 해충을 잡아먹으니 박쥐도 사람에게 유익한 동물 중의 하나다. 미국의 한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박쥐 150마리가 한해에 1,800만 마리의 벌레를 잡아먹는다고 하니 농약 남용을 피하는 방법으로 박쥐를 이용하자는 주장도 있을 만하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 당시 미국이 박쥐를 훈련시켜 일본의 중요 군사시설에 폭탄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결과는 실패했어도 시도 그 자체는 매우 흥미를 끈다.
박쥐는 동굴의 생태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다. 긴긴 세월 지하로 스며든 물(실제로는 물에 녹은 이산화탄소)에 석회암이 녹아 구멍이 생긴 것이 동굴인데 큰 동굴 안에는 광장도 있고 폭포도 있어 굴 속의 산과 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녹색식물이 없다는 일반 자연의 생태계와 다를 뿐이다. 굴 속은 100여 미터만 들어가도 한점 빛이 없어 풀이 자라지 못하지만 그래도 거미, 곤충, 달팽이들이 떼지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뭘 먹고 거기서 산단 말인가. 동물은 식물이 있어야 사는 게 아닌가. 답을 말하기 전에 동굴 동물들은 빛을 받지 못하기에 하나같이 채색이 희고 눈이 퇴화되어 있다. 빛이 없으니 눈이 있을 필요가 없고 몸색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장님새우가 있는데 이놈은 뭘 먹고 그 어두운 칠흑 속에서 살아가며 새끼를 치는가. 이들은 자신들보다 더 위에서 살고 있는 박쥐들이 싼 똥이나 박쥐 시체에서 썩어 흘러내리는 그 유기물을 먹고 이 하얀 눈 없는 것들이 살고 있다. 동굴 생물은 한치의 진화도 하지 못한 옛날 그대로의 고생물로 지구의 역사를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봐도 되겠다. 겨울이면 바로 그 굴의 틈바구니에 박쥐들이 떼를 지어(겹겹이 층을 지음) 월동을 한다. 체온을 서로 나누면서 겨울잠을 자는데 모두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도 볼 만하다. 멕시코의 한 동굴에서는 2,000만 마리 정도가 떼를 지어 겨울을 보내는데 그들이 내뿜는 열로 굴속이 방안보다 더 따뜻하다고 한다. 온도란 너무 낮거나 높아도 생물이 살아가는 데 제한요소가 되는데 물과 산에 버금가는 중요한 환경요인인 온도를 떼를 지음으로써 극복해나가고 있다.
이들이 떼를 지어 사는 또 다른 이유를 흡혈박쥐에서 볼 수 있다. 먹이사냥을 나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와 배곯는 놈들이 판판이 생겨 십시일반으로 그놈에게 피를 조금씩 토해 먹인다는 것이다. 이틀만 굶어도 죽는다니 옆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인데, 흔히 '이기적 동물'이라 하지만 공포의 대상인 흡혈박쥐도 남을 생각하는 이타적 동물이라니 인간의 눈에 비친 것과는 썩 다른 모습을 여기서도 본다. 남아메리카에 사는 흡혈박쥐는 무게가 겨우 30그램(큰 달걀이 60그램)으로 생쥐만한 것에 비해 날개를 편 길이가 1. 5미터나 되는 독수리만한 놈도 있다니 어디 가나 크고 작은 놈이 있게 마련이다. 흡혈박쥐는 일처다부제로 가족을 이루기 때문에 수놈들간에는 암놈을 서로 차지하려고 박이 터져라 싸움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러니 한때는 군림하던 장사 아비도 늙어 힘빠지면 힘센 자식놈 한테 매몰차게 쫓겨나고 일단 밀려나 겉돌게 되면 내가 아빈데하는 넋두리도 통하지 않아 저 아래 구석 낮은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새삼스런 사건이 못 된다. 냉엄한 자연계 계급형성 순위가 결정되어 그것에 순리대로 따르지 않으면 집단 내의 계속된 투쟁으로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결과가 와서 종족(집단)보존에 불리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놈들 앞니는 면도날 같아서 살갗에 상처가 난 가축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여 흐르는 피를 30분 정도 핥아먹으면 배가 찬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예는 거의 없다고 하며 우리나라에는 그 종이 없으니 박쥐를 두려운 동물로 보지 말아야겠다.
으슥한 밤하늘에 퍼드덕 나는 여러 마리의 박쥐를 보고 있노라면 계속해서 찍찍대는 소리가 악머구리 끓듯한다. 박쥐는 눈이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소리를 보내어 물체에 부딪혀 돌아오는 것을 귀로 알아차려 먹이를 잡기도 하고 방해물을 피한다 하니 이것을 반향탐지라 한다. 그래서 놈들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콧구멍에서 계속 소리를 발사하는데 정지하고 있을 때는 보통 1초에 5회, 날아다닐 때는 20-30 회 정도 울어제낀다. 소리의 에코(echo)로 상대방의 성을 알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화가 난 것도 알아맞출 수 있다니 이놈들은 소리로 말을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소리의 신호가 17가지나 되어 위협, 공격, 항복, 우애의 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내는 소리는 진동수가 너무 높아(초음파)우리 귀로는 듣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반향탐지의 기작을 밝히기 위해 처음에는 눈을 가리고 날려보내기도 하고 귀를 막거나 양턱을 꽉 매어 날려보내는 등 잇단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이들을 연구한 결과를 이용하여 바닷 속 물체나 잠수함을 찾아내는 음파탐지기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박쥐가 잠수함을 잡는 셈이 된 것이다.
박쥐의 '박'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끝으로 '박쥐'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 '박쥐'의 '박'은 악기의 하나인 박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다. 박은 악기의 한 가지로 6~9의 홀 모양을 뚫어서 녹비 끈을 꿰어 두 손을 마주잡고 벌렸다 오므렸다 하여 소리를 내는 것으로 여기서 '오므렸다 폈다'는 것에서 박쥐의 날개 펴기와 접기가 비슷하여 '박 닮은 날개 가진 쥐'가 박쥐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어원을 밝힐 수 없는 아쉬움을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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