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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62호
2012.5.9 (음 3.19)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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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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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는 지름길은, 값이 싸고 습관적으로 쓸 수 있는 데다가 세금이 공제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 - 선샤인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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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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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걸판지게 놀다
"오늘 우리 한번 술도 먹고 춤도 추고 한바탕 '걸판지게' 놀아보자." "이번 일만 잘되면 내가 '걸판지게' 한턱을 내겠다." "어느 시골 농부가 정치권을 겨냥해 하는 '걸판진' 욕설이 단연 압권이었다."
'요란하고 떠들썩하다, 넉넉하고 푸짐하다, (입이) 걸다'의 의미로 언중(言衆)이 널리 사용하고 있는 '걸판지다'라는 단어는 우리말에서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걸판지다'를 찾으면 '거방지다'의 잘못으로 돼 있다. 그렇다고 '걸판지다'를 모두 '거방지다'로 바꿔 쓸 수는 없을 듯하다. 말맛도 떨어질뿐더러 앞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뜻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거방지다'는 '몸집이 크다(거방진 허우대), 하는 짓이 점잖고 무게가 있다(덩치 큰 사내가 거방지게 사람들을 좍 훑어보았다), 매우 푸지다(거방지게 술을 사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둘째 예문에서의 '걸판지게'는 '거방지게'로 바꿔도 의미상 문제가 없지만, 나머지 두 예문에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첫째 예문에서의 '걸판지게'는 '신이 나게, 신명 나게'로, 셋째 예문에서의 '걸판진'은 '입이 건' 정도로 바꿔 쓰는 것이 좋다.
북한에서는 '걸판지다'가 우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른 '너부죽하고 듬직하다(얼굴이 걸판지게 생기다)'의 뜻으로 쓰고 있다.
[우리말바루기] 퀘퀘하다, 퀴퀴하다, 쾌쾌하다
장맛비가 한창이다. 장마철엔 기온과 습도가 높아 세균과 곰팡이가 번식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진다. 곰팡이와 세균이 번식하면 퀴퀴한 냄새가 나며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음식물 쓰레기의 냄새나는 물을 뚝뚝 흘려 놓아 엘리베이터 안에서 쾌쾌한 냄새가 날 때가 많다." "장마철에 환기가 될 리 없는 구석방은 습기가 차고 퀘퀘한 냄새로 가득하다." "오늘은 차 안에서 이상하게도 쾌쾌한 냄새가 난다."
예문에 쓰인 '쾌쾌한' '퀘퀘한'은 잘못 쓴 말이다. 문맥으로 보아 상하고 찌들어 비위에 거슬릴 정도로 냄새가 구리다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모두 '퀴퀴한'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쾌쾌(快快)하다'는 '성격이나 행동이 굳세고 씩씩해 아주 시원스럽다' '기분이 무척 즐겁다'란 뜻으로,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했다" "한 후배가 의미 있는 모임을 준비했으니 나오라고 하기에 나는 쾌쾌히 승낙했다"처럼 사용된다.
'퀘퀘하다'는 '퀴퀴하다'를 잘못 쓴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퀴퀴하다'에 해당하는 말로 '퀘퀘하다'가 쓰이고 있다. '쾨쾨하다'도 있는데 이는 '퀴퀴하다'의 작은말이다. '쾌쾌(快快)하다' '쾨쾨하다' '퀴퀴하다'는 의성어.의태어와는 다르므로 그 뜻에 맞는 단어를 정확하게 써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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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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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 김초혜
그대 내게 오지 않음은 만남이 싫어서가 아니라. 떠남을 두려워 함인 것을 압니다.
나의 눈물이 당신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감추어두는 숨은 뜻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화염(火焰)때문임을 압니다.
곁에 있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그립고 사는 사랑의 혹법을 압니까.
두 마음이 맞비치어 모든 것 되어도 갖고 싶어 갖지 않는 사랑의 보를 묶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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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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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앓이(1) - 서공식
허랑한 시간들은 왜 이리 화살 같나 어는새 꽃잎지고 날 빛은 따가운데 봄날이 다 지나도록 움틀 기미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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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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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마음의 계절 : 얼굴에내리는비(레인 인 더 페이스) - 훙크파파 족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나의 이름은 얼굴에내리는비(레인 인 더 페이스)이다.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이곳에 왜 왔는가? 연어떼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첫 연어떼가 강물로 거슬러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일은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마치 전투를 벌일 양 온 것으로 생각하진 말아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 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문명인들의 도시 풍경은 얼굴 붉은 사람의 눈에는 하나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이 야만인이라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장소라는 곳이 없다. 봄의 나뭇잎 소리를 듣거나 곤충의 날개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아마도 내가 야만인이라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일 테지만, 당신들의 도시에서 들리는 소음은 귀를 욕되게 할 뿐이다. 인디언은 물웅덩이의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바람의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한다. 한낮에 내린 비에 씻겨진 바람 그 자체의 냄새를 좋아한다. 미국산 소나무의 향내도 마찬가지다.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기는 더없이 소중한 것! 그것은 동물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똑같이 숨결을 나누어갖기 때문이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사람처럼 당신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악취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런 식으로 당신들 자신의 잠자리를 계속 파헤치고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인가 당신들은 스스로의 폐허에서 숨이 막혀 깨어날 것이다.
들소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야생마들은 모두 길들여지고, 숲의 은밀한 구석까지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하다. 그리고 산마다 목소리를 전하는 전선줄이 어지럽게 드리워져 있다. 덤불숲은 어디에 있는가? 없어져 버렸다. 독수리는 어디에? 사라져 버렸다. 들짐승이 사라진다면 인간이라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들짐승들이 저 어두운 기억의 그늘 속으로 모두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혼의 깊은 고독감 때문에 말라죽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똑같이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당신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러니 사냥이니 날쌘 동작이니 하는 것에 대해 굳이 작별을 고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연어떼를 보았으니 이제 나와 나의 부족은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어쩌면 또 한번의 행복한 겨울은 짐작에 그칠 뿐, 나의 부족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꿈일지 모른다. 당신들 문명인들에게 밀려, 살아남기 위해 고통받아야 할 막막한 겨울 들판으로 뿔뿔이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연어떼의 반짝이는 춤을 나의 부족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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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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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10장 자연의 즐거움
1. 낙원은 잃어버렸는가
지구상의 무수한 생물 가운데서 모든 식물에는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것은 없고, 모든 동물도 또한 사실상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인간이라는 한 생물이 있어 이것만이 자기와 자기의 환경을 의식하고 다라서 그 환경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예지가 시작된 것은 우주에 회의를 품고 그 비밀을 탐구하고 그 의의를 발견하려고 한데서 비롯한다. 우주에 대한 태도에는 과학적인 것도 있고, 도덕적인 것도 있다. 과학자의 관심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구의 내부와 표피의 화학적인 구조, 지구를 둘러싼 대기의 두께, 대기의 맨 위층에 방사하는 우주선, 구릉이나 암석의 형성, 생명 일반을 규정하는 법칙 따위의 발견이다. 이 과학적인 태도는 도덕적인 태도와 관련은 있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안다는 것과 탐구한다는 것의 순수한 욕구다. 이에 반하여 도덕적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연과 조화하는 것도 있고, 정복과 복종, 지배와 이용이라는 관계가 되는 것도 있고, 불손한 모멸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이 마지막 태도, 다시 말해서 불손하게도 지구를 모멸하는 태도는 문명, 특히 어느 종류의 종교에서 생긴 것이며 실로 기괴한 산물이다. 그 근원은 <실락원>이라는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원시종교 전설의 유물로 지금까지도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
낙원 상실성이라는 것을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떤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다. 결국 에덴 동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 우주의 실체가 얼마나 추하다는 것인가. 나는 물으리라. 이브와 아담이 죄를 저지른 뒤 꽃은 피지 않게 되었던가? 단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신은 능금나무를 저주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였던가? 꽃의 빛깔은 생기를 잃고 창백해져야 한다고 결정했던가? 황조나 꾀꼬리나 종달새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던가? 산꼭대기에는 눈이 없어지고 아름다운 호수 위에 빗긴 그림자는 간 곳이 없어졌는가? 새빨간 저녁 해와 무지개며 여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안개는 없어졌는가? 나무 그늘은? 떨어지는 폭포는? 흐르는 맑은 물은? 도대체 누가 <낙원>은 <상실되었다>느니, 오늘날 인간은 추한 우주에서 살고 있다느니 하는 신화를 발명해 낸 것일까? 참으로 인간이야말로 은혜를 저버린 방종한 신의 아들이다.
이 현실 세계가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자연계의 모양, 소리, 향기, 맛과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과의 사이에는 신비롭다고 생각되는 완전한 교감작용이 있다. 우주의 모양, 소리, 향기와 우리의 자각 기관과의 이 관계는 극히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저 볼테르에게 심한 웃음거리가 된 목적론의 논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목적론자가 될 것은 없다. 신은 이 향연에 우리를 초청할지도 모르며 또 초청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향연에 참석하는 것이 중국인의 태도다. 이제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미각을 돋구는데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자기가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향연에 초대받고 있는가 어떤가를 조사하거나 하는 것은 철학자의 형이상학에 맡겨둘 만한 일이다. 영리한 사람은 음식이 식기 전에 먹어 버린다. 배고픔은 언제나 건전한 상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아, 지구야말로 참으로 아름답다. 첫째, 낮과 밤, 아침 저녁의 순환이 있다. 뜨거운 낮 뒤에는 서늘한 저녁이 있고, 바쁜 아침을 알리는 조용히 밝아오는 아침이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여름과 겨울의 변화. 그 자체가 벌써 다시 없는 것이다. 봄은 여름으로, 가을은 겨울로, 저절로 옮아가는 완전무결한 4철의 모습,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째, 삼엄하고 숭고한 나무숲이 있다. 여름은 녹음, 겨울은 따뜻한 햇볕.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네째, 달이 바뀌어 감에 따라 꽃은 피고, 열매는 익는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섯째, 구름이 몹시 두껍고 안개가 짙은 날과 하늘이 맑고 청량한 날과의 그때 그때의 변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섯째, 봄의 소나기, 여름의 뇌우, 가을의 상쾌한 소슬바람, 겨울의 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일곱째, 공작과 비둘기와 종달새와 카나리아의 묘한 노래 소리.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덟째, 동물원에 가 보라. 원숭이, 호랑이, 곰, 낙타, 코끼리, 코뿔소, 악어, 소, 말, 개, 고양이, 여우, 다람쥐, 산쥐, 그밖에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갖가지 동물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홉째, 홍어, 황새치, 전기뱀장어, 고래, 큰가시고기, 홍합, 전복, 새우, 참새우, 거북, 그밖에 상상에 넘치는 다채로운 종류의 물고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열째, 장대한 삼목의 우람한 줄기, 불을 뿜는 화산, 웅대한 동굴, 장엄한 산꼭대기, 들쑥날쑥한 언덕, 고요한 호수,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 새파란 둑길.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각자의 미각을 돋구는 메뉴는 실제로 끝이 없다. 가장 영리한 유일한 방법은 우선 몸을 일으켜 향연에 참석하여 인생의 단조로움을 한탄하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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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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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3. 데카르트
가면 뒤의 철학자 17세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이고,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상야릇한 말이 전해 내려온다. "연극 배우들이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처럼, 나는 세계의 극장에 들어갈 때 가면을 쓴다." 가면을 쓴 철학자? 사물과 인간을 밝히려는 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면 속에 숨어야 할까? 그는 무엇을 숨기는 것일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그들은 잘 알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그들에게 불투명하게 보였다. 그는 편지와 저서를 통해 그의 사상이 오해되고 왜곡되는 것을 계속해서 방어해야만 했다. 그의 학설의 의미에 관해서는 도대체 일치된 견해라고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성서의 진리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개혁파 종교 회의와 몇몇 대학에서는 그의 저서들을 금하고, 가톨릭 교회도 그의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넣었다. 사람들은 그의 철학적 행위를 엿새에 걸친 신의 창조 활동과 비교하기도 하고 또 그를 구약의 입법자인 모세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의 비신앙, 무신론과 부도덕을 규탄하기도 한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해석자 중 어떤 사람은 데카르트를 "신과 신의 교회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싸운 그리스도교 철학자"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은 그의 철학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사상에 봉기하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도 여전히 가면은 벗겨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저서를 숨기는 사람, 이 수수께끼 같은 철학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데카르트는 어떤 사람인가?
가장 외적인 사실부터 살펴보면, 그는 1596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로써 그의 전기는 거의 끝이 날 뻔했다. 왜냐하면 숨어 있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너무도 컸던지 태어나자마자 지구라는 이 연극 무대에서 사라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독한 열성을 갖고 대들었기에 의사들마저도 손을 들어 버릴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근대 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근세 철학 자체가 있게 된 것은, 의사들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아이를 건강하게 돌보아 준 유모 덕분이다. 데카르트는 그가 이토록 어렵게 삶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 가지 장점을 끄집어낸다. 그는 수업이 있을 때에도 동료 학생들의 시기와 부러움 속에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남아 있어도 되었던 것이다. 이 습관은 그가 더 큰 힘에 의해 강제로 포기하게 될 때까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계속 이야기하기로 하자. 데카르트가 다녔던 학교는 당시 매우 유명하였다. 훌륭하고 전통 깊은 스콜라 학풍의 방식으로 학문을 연구하던 예수회 학교였다. 데카르트는 곧 순종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학구열이 높은 모범 학생으로 인정받았다. 그때 그는 이미 가면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공부에만 몰두하는 얌전한 모범 학생인 것 같은 겉모습 뒤에는 반란적인 정신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게 그는 생명력을 잃어 가는 전통에 반항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제시된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가장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특히 철학이 더욱 그러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도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그러한 기이하고 믿기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으리라고 훗날 기록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스콜라 철학) 대신에 막 나타나기 시작한-예수회 학교에서는 금지하고 있는-과학과 철학에서의 혁명적인 방향 전환에 은밀히 몰두하고 있었다. 훗날 그는 바로 그것에 더 깊은 기초를 마련해 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데카르트는 얼마 동안 학문을 외면한다. 그는 훗날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스승들의 예속에서 벗어나도 좋을 나이에 이르자마자 그동안 배워 온 공부를 완전히 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지식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지식도 탐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청춘의 나머지를 여행을 하면서 궁정과 군대를 둘러보고, 여러 상이한 종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고, 경험을 쌓으며, 운명이 내게 제공하는 사건들 속에서 내 자신을 시험 해 보고, 어디에서건 내가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세계의 책"을 데카르트는 맨 먼저 파리에서 찾아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커다란 세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기 작가의 기록을 빌리자면, "몇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서" 쾌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 말을 타고 펜싱을 하며 춤을 추고 도박을 즐겼다. 그러나 이것도 단지 하나의 새로운 가면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는 갑자기 사교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고독 속에서 지냈다. 어느 누구도, 친구와 가족까지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고, 신들린 듯이 수학과 철학의 문제에 몰두하여 연구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넓은 세계가 그를 유혹했다 그는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기회는 군복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군인이 되었다. 그가 과연 한번이라도 적에 맞서 칼을 뽑았는지 우리는 물론 알지 못한다. 단지 해상 여행에서 그를 습격한 해적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일개 사병으로서가 아니라, 장교 그것도 급료를 완전히 포기한 고급 장교로 시작한다. 그에게는 어떤 이상을 위해 싸우는가 하는 것은 관심 밖의 문제였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야전 사령관 아래서도, 가톨릭의 야전 사령관 밑에서도 복무했다. 그는 사실 "배우"보다는 오히려 "구경꾼"이 되고자 하였고, "행위자"보다는 오히려 "관객"이 되고자 하였다. 전쟁터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사람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인지, 즉 그 목적에 이용되는 무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군인 관광객으로서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두루두루 여행하였다. 바로 그 때문에 그에게는 전쟁 행위가 지속되는 날보다는 겨울 막사의 시간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나는 하루 종일 혼자 따뜻한 방 안에 틀어박혀서 오로지 나의 생각만을 정리할 수 있는 한가로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썼다.
도나우 강가의 노이부르크의 겨울 막사에서 데카르트는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후기 철학 사상의 씨앗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게 기이한 통찰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기묘하고 의미 심장한 꿈들이 계속 이어진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에 사로잡혀 로레토(중부 이탈리아의 안코나에 있는 성지 순례지)로의 성지 순례를 예찬하더니 군복무를 그만두고 그곳으로 성지 순례를 떠난다. 그 후 그는 일반 시민으로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데, 이것 역시 그곳에서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그는 곧 이 피난처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파리의 분위기가 철학적 사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괴상한 생각만 들게 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철학적 사유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세계라는 커다란 책"을 철저히 탐구한 후, 이제 방향을 돌려 탐구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완전한 고요함이 필요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적막 속에서 고독하게" 오직 인간 정신의 영역에서의 발견을 위한 삶을 산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물론 "나에게 그동안 내가 간직해 온 그 모든 확신을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근본적으로 뒤엎을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네덜란드는 이러한 창조적인 고독을 그에게 제공해 주기 위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다른 사람들의 일보다는 자기 자신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는 위대하고도 매우 활동적인 민족의 무리 속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막에서와 같이 고독하고 한적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라면 나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나의 전 생애를 보낼 수도 있으리라."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명 수신인 주소를 사용한 폭넓은 편지 왕래만이 그와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적막이 그가 그때까지 헛되이 추구하였던 바로 그 행복을 가져 다 주었다. "참된 것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이 생활 속에서 얻는 거의 유일하게 순수한, 어떠한 종류의 고통에 의해서도 흐려지지 않는 행복이다." "나는 여기서 어떠한 걱정거리에도 놀라 깨지 않고 10시간이나 잠을 잤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고요 속에서 저서만을 저술했다. 물론 그의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 글을 썼다. 그가 막 한 권의 책을 완성했을 때, 그가 그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과 같은 대상에 대해 비슷한 것을 말했던 갈릴레이가 바로 그 말 때문에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그는 불안해하며 자신의 저서가 공개되지 못하도록 한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의 바람은 그저 조용하게 사는 것뿐이다. ... 세상은 나의 작품을 내가 죽은 뒤 100년이 지나서야 보게 될 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그 친구는 그렇다면 그의 책이 좀더 일찍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철학자 하나를 죽이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데카르트는 이렇듯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자신의 적막을 방어하지만 마침내 그가 자신의 생각 중 아주 조금만을 공개했을 때, 그는 즉시 적대시되어 무신론과 신성 모독죄로 고소를 당했다. 당국마저도 "신학자들의 수염, 목소리, 눈썹까지도 두려워하는" 여론에 영향을 받아 그에게 반대했다. 그는 물론 당연히 그를 향한 공격이 어처구니가 없음을 주장한다. "어떤 신부는 내가 회의론자를 반박했기 때문에 나에게 회의적인 태도가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어떤 설교자는 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나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결국 그러한 공격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시인한다. "만일 내가 미개인들이 생각하는 원숭이처럼 그렇게 영리했더라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내가 책을 썼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미개인들은, 원숭이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사람들이 자기(원숭이)에게 강제로 일을 시킬 것이기에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썼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더라면 간직할 수 있었을 그 고요와 평온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더 이상 참고 견디지 못한다. 그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웨덴 왕궁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는 생활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때까지 데카르트의 하루 일과는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여왕은 이른 새벽 5시에 그에게 철학을 배우고자 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마저도 익숙하지 못했다. 그는 스웨덴을 "바위와 얼음 한가운데 있는 곰의 나라"라고 하면서 한숨을 짓는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북유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귀향을 결심하기도 전에 54세의 나이로 죽는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삶은 끊임없는 은폐를 위한 싸움이었다. 그의 저서에서도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그의 저서도 기이한 애매 모호함으로 휘감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카르트의 관심사였던 바로 그 사실 자체 안에 깊숙이 그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놀랍도록 대담하게 철학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리하려 한다. 그러다가 자기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낭떠러지에 놀라서 뒤로 물러나 고대 사상과 고대 신앙이 밟았던 길로 다시 돌아간다. 아마도 시대의 전환기에 있는 사상가는 새 것의 흔적을 따라가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것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아무튼 도래하는 것에 대한 의무감과 과거에 대한 책임감 사이의 분열된 앎 속에 데카르트와 같은 수수께끼의 현상이 갖는 독특한 비밀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자의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며, 더 나아가 인류의 정신사 전체에 우뚝 솟은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일차적으로 수학과 자연 과학의 영역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비록 데카르트가 이 분야에서, 특히 분석적 기하학의 발견을 통해 매우 중요한 업적을 세우긴 했어도 말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수학의 정확한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다. 이로써 철학이 확실함과 명증에 있어 기하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로써 지금까지의 서로 상반되는 견해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이를 위해 세운 목표는-언젠가 명확히 표현했듯이-철학이 매장되어 있었던 그 암흑으로부터 철학을 다시 밝은 빛으로 끌어 내 오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단한 철학적 요구로부터 어려움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 예컨대 형이상학적 물음, 특히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본질에 대해 제기하는 물음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철학의 원초적인 주제를 수학의 모델에서 얻은 새로운 방법적 통찰을 가지고 다시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그 방법이 타당한 해결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적 통찰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에게는 분명했다. 그는 언젠가 만일 사람들이 철학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눈을 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있는 것과 같다고 썼다. 철학함이란 데카르트에게서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해야 할 일은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학적 공리와도 같이 직접적으로 확실하고 명백하며 그래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 줄 수 있는 한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시작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잠정적인 확실성들을 분쇄해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여겨 왔던 것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만 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고 첫번째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는 단호하게 결심하여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회의하는 사유의 자유 속으로 뛰어든다. 이러한 일을 감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대담성이 그로 하여금 철저한 회의 속에서 근세 철학의 결정적인 일대 변혁을 이를 수 있도록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근세 철학은 그의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져 온 것의 토대를 시험하자마자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흡사 깊은 소용돌이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도, 수영을 하여 표면으로 떠오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외부 세계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과연 사물이 인간에게 나타나듯이 실제로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지, 아니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지 등이 의심스러워진다. 우리는 감각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속이고 있는지 종종 체험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심 속에서도 최소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존재는 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확실함도 역시 주의해 보면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현존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단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 생애가 하나의 지속적인 꿈"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붕괴 속에서도 또 하나의 확실함은 남아 있다. 꿈속에서도 견지되고 있는 지양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예컨대 2+3=5라는 명제와 연장, 형태, 시간, 공간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진리마저도 데카르트가 근원적으로 철저히 회의하자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한 진리가 인간의 정신 구조와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본질 구조가 그러해서 그에게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조차 속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의심이 세번째 단계에서 가장 심오한 논점에 이르게 될 때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나타난다. 인간이 근본적인 기만 속에 살고 있다고 전제하고-데카르트가 하듯이-또한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견지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신이 인간을 본질적인 왜곡과 비진리 속으로 창조해 넣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신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주장한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기만적인 신" 또는 더 나아가 "악의에 가득 찬 악마"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물론 이 사상을 주장하는 데는 주춤거린다. 그렇지만 그가 이 생각을 단지 물음의 방식만으로라도 사유하려고 감히 시도한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확실성의 문제와 더불어, 정신이 새로운 근대시대로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위험에 처해 있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창조된 인간은 그가 창조주의 손안에서 평온을 발견하고 그의 진리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만일 가장 탄탄한 이 확실성의 토대가 근본적인 회의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면 인간은 헤어날 길 없는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에 직면한다. 데카르트 자신도 그의 회의의 길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그 자신이 그렇게 "헤어날 길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된다. 데카르트와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 중 한 사람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그는 이러한 모험적인 시도가 안고 있는 위험을 분명하게 느꼈다.
데카르트가 그의 회의를 매우 날카롭게 전개시켜 나간 책인 (성찰)은 회의의 길을 끝까지 진행해 나가면서 그래도 여전히 견고한 확실성을 발견해 나간다. 그런데 만일 어느 누가 회의가 무로 끝나고 마는 그 구절까지만 읽고 그 순간 죽어 버리고 만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그의 친구는 물어 왔다. 이 경우 그는 영원한 행복을 상실해 버리지 않겠는가? 그것은 그에게서 모든 확실성을 빼앗고만 한 철학자의 잘못 때문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물론 앎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져 버린 바로 거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 나오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는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대화편에서 대화의 참석자로 하여금 그의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확고 부동한 점 같은 이 보편적인 의심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과 당신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곳으로 이끌고 있는 이 사상의 흐름은 서양 의식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데카르트가 앎이 뒤흔들리는 요동 속에서도 확고함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회의도 피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회의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근원적인 확실성을 분만할 때까지 그 회의를 붙잡고 늘어진다. 내가 표상하는 모든 것, 내가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대상이 전부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에 대한 나의 표상은 실재하고, 동시에 이 표상을 가지고 있는 나 역시 실재한다 의심 그 자체가, 아니 바로 그 의심이 나의 현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에 대한 이러한 가장 가까운 확실성은, 신이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파괴될 수 없다. 신이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속고있는 자로서 실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명제,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기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회의는 그 안에서 근대가 예고되고 있는 의식의 위기에 있어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새로운 확실성을 향해 돌파해 나가는 데 성공한다. 의심의 소용돌이 속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곧 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데카르트가 중세 철학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가장 근원적인 확실성의 장소를 더 이상 신에게서 발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장소를 인간에게 옮겨 놓음으로써 그의 철학에 가장 두드러진 공헌을 하고 있다. 이때부터 비록 다소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을 그 자신의 두 다리로 세우고 오직 그 인간으로부터 솟아나는 그러한 확실성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근대 사유의 특징에 속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에게서 최초로 결정적인 철학적 정초를 획득하게 된 자의 자율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확실성으로는 단지 기초만 닦여질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위에 철학이라는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데카르트는 우선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자아가 사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자아는 사유하는 존재라고 정의된다. 이리하여 자아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는가를 살펴보면, 그는 자기 경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세계 사물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얻은 개념을 이용한다. 그는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자아는, 물질적 세계로부터 생각되어-물리적 세계의 사물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색깔 또는 무게처럼-사유, 의지, 느낌 등과 같은 특성을 가진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전형적인 인간 존재로서의 자아의 본래적인 모습에 대한 관점이 잘못 놓이고 만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인간 현존재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의 전망을 한순간 동안 열어 놓았지만 즉시 그것을 다시 덮어 버리고 만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출현시키는 자들의 운명을 겪는다. 즉 그들은 그들이 본 것을 너무나 성급하게 전수되어 내려 온 시각이라는 베일로 가려 버린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자기 확실성을 발견함으로써 다음 시대로 하여금 사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별한 본질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는 그러한 길을 걷게 만든 사람이다.
데카르트가 구상한 바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해석에서 두번째의 숙명적인 전개의 길이 열린다. 그가 볼 때 자아의 본질은 사유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물론 사유는 폭넓은 의미로서 감정이나 의지, 요컨대 의식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로써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사유하는 사물"로서의 인간과 의식하지도 사유하지도 못하는 존재 사이에는 건너기에 매우 힘든 틈이 벌어지고 만다. 자아는 구체적인 세계 안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고찰되지 않았다. 순전히 의식 안에서 살고 있는 자아란 사물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데카르트로부터 한편으로는 세계 없는 주체,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객체를 세워 실재를 양분하는 근대적 분열이 시작된다. 이 분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과 세계에 관한 철학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 자기 확실성의 발견과 자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써 모든 것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회의의 길 끝에서 튀어 나왔던 가능성은, 즉 인간이 근본적인 전도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남아 있지만,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테마, 즉 모든 실재성의 근원에 대한 물음인 신에 대한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저 근본적인 전도는, 창조 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이 사기꾼으로서 사유되고 있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신이 정직하다는 것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이 여하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러한 의도로 데카르트는 인간이 그의 내면에서 최고로 완전한 이데아를 발견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데카르트는 이 이데아는 인간 자신으로부터는 유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 즉 "신과 무 사이의 중간"인 인간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이데아를 자신으로부터 산출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데아를 어디에서 받은 것인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최고로 완전한 존재 자신이 이데아를 인간의 마음 속에 심었음에 틀림없다. 그 존재만이 가장 완전한 이데아의 원조일 수 있다. 이 말은 신이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이데아의 근원으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이 완전하다면, 신은 인간을 근본적인 거짓 속에 버려둘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사기꾼일 수 없고 오히려 순수 진리이어야만 한다. 이로써 모든 의심이 제거된다.
이렇게 신의 존재와 신의 정직성에 대한 확실성을 되찾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순간 자기 자신을 자기 의식의 위험스러운 고독 속에서 발견하였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다시 창조의 안전한 질서 속에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은 여전히 그 바탕에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구상한 신존재 증명은 자세히 관찰해 보면 순환 논증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신존재 증명을, 인간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이데아를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데 근거를 두고 전개해 나간다. 인간과 같은 유한한 존재는 무한함의 이데아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원인에는 적어도 그 원인에 의해 작용받는 결과만큼의 존재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함에는 그 자체 유한함보다 무한히 더 많은 존재가 주어진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어디에서 자신의 참됨을 입증 받는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주장은 직접적으로 명백하며 근원적으로 확실하다. 신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진 상태로 내던져서 신의 근원적인 확실성에 관해서 조차도 회의하는 채로 있는 처지라면 도대체 근원적인 확실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신의 존재와 그의 정직성에 대한 증명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직접적인 명증의 원리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만일 데카르트가 그의 신존재 증명의 근거를 이제 비로소 끄집어내야 할 바로 그 원리에 둔다면, 이 증명은 사실상 순환 논증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된다면 형이상학을 새롭게 건립하려는 데카르트의 노력은 시작부터 좌절되고 만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의 기획 투사와 마찬가지로 계몽적인 경향에 있어서, 그리고 신앙심 깊은 사유와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적인 절망에 있어서 앞으로 도래하게 될 철학을 위한 위대한 도발자였다. 이렇듯 그는 우리 눈앞에 기이하게도 희미한 빛 속에 가려져 있다.
불타오르는 정신의 열정으로 새로운 것을 향해 몸을 돌렸으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또한 기존의 사유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해체시키는 사상으로 극단의 한계에까지 모험적으로 밀고 들어가서는 거기에서 드러나는 가능성에 놀라 다시 신에 근거를 둔 확실성 속으로 숨어든다. 그는 붕괴된 형이상학을 새롭게 건립하기 위해서, 창조주에 대한 잃어버린 앎을 되찾기 위해 정열적으로 노력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신의 확실성도 근원적으로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신의 확실성으로의 위험한 접근에는 또한 궁극적으로 창조주 자체를 거부하는 회의가, 자아의 자유를 지반이 없는 심연에 내던져 버릴 회의가 도사리고 있다. 데카르트는 그의 새로운 발견이 불러일으키게 될 곤경-이것은 그 자신도 간신히 피해 갈 수 있을 뿐이다-에 대해 무언가를 미리 알아챘기 때문에 그렇듯 불안해하며 적막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 곤경이란, 그가 스스로 과제로 설정한 바로 그 실재의 직접적인 확실성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동경을 결국에는 확실한 앎 속에서 잠재울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형이상학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자신 안에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내적인 애매 모호함 속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통찰을 앞에 두고 그 자신 수수께끼처럼 되어 버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만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혼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가면 뒤로 자신을 숨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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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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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종교적인 이유
라비 그로스만과 오맬리 신부가 연회에서 옆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햄 좀 드시지요." 신부가 권했다. "먹지 않습니다." 라비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좀 들어 보십시오. 정말로 맛있어요!" 신부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고맙습니다만, 종교적인 이유로 저는 이 육류를 먹지 않습니다." 오맬리 신부는 또 말했다. "기막히게 맛있군요! 당신도 꼭 이 햄의 맛을 보셔야 되는데. 당신도 좋아할 겁니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라비 그로스만이 대답했다. 만찬이 끝나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로스만이 말했다. "당신은 아내와의 동침을 즐깁니까?" "오, 라비여. 나는 결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실 텐데요. 나는 성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라비가 말했다. "당신도 그것을 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햄보다는 나을 겁니다."
- 존재의 세계만이 유일한 실재 세계이며 진리의 세계이다. 그곳에 도달하지 않는 한 너는 계속 낯선 땅을 헤맬 것이며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 도달할 때, 오직 그때서야 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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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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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3장 신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것인가? (1/4)
신화란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언뜻보면 그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가가운 존재입니다. 고대...중세의 신은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고대의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자주 일치시켰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이야기, 중국의 삼황오제 이양기 등은 모두 신 같은 인간, 인간 샅은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들 신화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신들의 각종 활동을 통해 고대의 자연환경과 고대인들의 생활방식 그리고 그들의 보편적인 인생관.역사관.자연관 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고방식만을 반영한 것은 신화가 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사회적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사회 공통의 경험과 의식, 그것은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에서 신화는 사료의 하나로서 존중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건국신화입니다. 신화 속에서 신인 혹은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장면은 그 나라의 건국배경 뿐 아니라 신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단군신화 - 고조선
고조선과 조선 - 위만의 고향 고조선이라는 국가명칭이 처음 기록된 곳은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일연이 쓴 책입니다. 그 책의 기이 편 첫머리에 고조선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이어서 그에 관한 역사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부르니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지상세계에 내려가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싶어하니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천부인 3개를 주며 허락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 환웅천왕은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의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그 무렵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았는데, 항상 신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20매를 주며 백 일동안 해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곰과 범이 받아 먹었는데, 곰은 삼칠일을 잘 지내 여자가 될 수 있었으나, 범은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임신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단군왕검이라 했다. 단군왕검은 중국 요임금 즉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서 조선이라 칭했으며, 나중에 백악산의 아사달로 도읍을 옯겼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주 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옯겼다가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고 했다.
위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것은 고조선 항목에 이어 위만조선 항목이 나오는 데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이란 위만의 '조선'이전에 존재하던 '옛날의 조선이라는 뜻이 담긴 명칭인 것입니다. 삼국유사에서 이처럼 단군.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한 이유는 위만이 중국 사람이므로 그 이전의조선과 국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조선전에 따르면, 중국의 연나라 사람위만이 진.한 교체기의 전란을 피해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가니, 조선왕 준이 그에게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는데,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서기전 194년에 정변을 일으켜 수도인 왕검성을 급습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왕은 남쪽으로 내려가 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위만은 중국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히 따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인접했던 연나라와 조선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요. 그러다가 연나라에 소왕이 재위하던 무렵(서기전 311~279)에 진개라는 장군이 이끄는 연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조선은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휴유증으로 국력이 많이 미약해졌다고 합니다. '2천여 리'라면 매우 넓은 땅이지요. 그런데 조선이 어디 그 땅만 빼앗겼겠어요? 그 넓은 땅에 살던 사람들도 함께 연난라의 백성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연나라는 중국의 변방지역으로서 주민 구성이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따라서 사기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라는 문구만으로 위만이 종족적으로 중국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중국따에 살던 조선 사람이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기에는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조선인의 풍속을 따랐다는 것인데, 위만이 조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휘애서 일부러 다른 민족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자기 모국으로 돌아오면서 원래의 복장으로 갈아 입었다는 뜻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앞서의 시대상황과 준왕이 처음부터 그를 매우 신임한 실에 비추어 보면 원래의 복장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계속 하요한 점이라든지, 나중에 볼 바와 같이 위만전권하에서도 여전히 토착인 들이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세형 동검문화를 계속 이어나간 점 역시 위만이 조선 사람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정권 이전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을 따라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매우 유용한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조선과 근세의 조선을 구분하는 명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조선'은 바로 그러한 구분점으로서의 편의적 명칭일 뿐입니다.
단군신화의 형성시기 다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돌아갑시다.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해 단군신화를 소개했습니다. 해당 기사의 공신력 높일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위서'와 '고기'가 과연 어떤 책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위서라는 제목의 역사서가 몇 번에 걸쳐 제작된 적은 있습니다. 그중 어떤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남아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물론 '위서'를 우리 쪽의 역사서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그럽게도 그런 책은 아직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기'는 더욱 이상합니다. 그것이 책 이름인지, 아니면 '옛날 기록'이라는 뜻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점 때문에 한때 단군신화를 몽고항쟁기에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고 치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환인과 같은 불교식 명칭이 차용된 것이라든지,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즉위했다고 하여 역사의 유구함을 드러내려 한 것 등이 바로 그 증거라고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신화의 내용을 살피다 보면 거기에 얼마나 오랜 동안 인간이 겪어온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단군신화의 내용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봅시다.
신화의 상징성 환인은 인도의 신 이름을 한자로 옮긴 석제환인타라에서 따온 것으로 천제 혹은 태양신을 불교식으로 바꾼 칭호인 듯합니다. 신화는 원래 구전되어오던 것을 나중에 채록한 것이므로, 채록할 당시의 용어가 많이 차용되는데,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고려시대에 채록되면서 당시의 국교인 불교의 영향이 반영된 거이라 하겠습니다. 신화의 이러한 속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신화를 들 수 있습니다. 1287년 편찬된 제왕운기에는 단군신화가 유교식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상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상제 환인의 서자 단웅이 귀신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만든 다음 단수신과 혼인시켜 단군왕검을 낳게 했다는 식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신화는 세월 따라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신단수는 수목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애니미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곰과 범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과 범을 토템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 있으며, 환웅 역시 천신족을 자처하는 집단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곰에 대한 숭배는 동북아시아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진 의식이므로 어느 한씨족의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곰을 숭배하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환웅이 거느린 풍백.우사.운사는 기후를 주관하는 신입니다. 특히 비와 관련된 신들이지요. 비는 해와 함께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쑥과 마늘은 농경문화의 잔편을 반영한 것으로 볼수 있겟습니다.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면서 곡식을 가장 먼저 열거한 것도 농경문화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백일 동안 해를 보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삼칠일 만에 곰이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갓난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금기와 우려를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단군신화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경험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단군의 자손은 곧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계급의식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중세인 고려시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낡아 보입니다. 그런데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 위치한 무시사당의 화상석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물론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다른 신화를 형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거 동이족이 활동하던 지역에 동이족을 대표하는 집단(조선)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합니다. 석실로 된 무씨사당이 서기 147년을 전후한 무렵에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단군신화는 청동기시대에 고조선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여주는 건국신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조선은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으며, 제정일치의 사회였을 것입니다. '단군'은 무당을 의미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무당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제사장이지요. 따라서 단군왕검은 제사와 정치가 한 사람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나온 명치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지배자가 바로 단군황검이라는 것입니다.
한 제국과의 전쟁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측에 오히려 더 많이 전합니다. 특히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 조선과 한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를 살았던 사마천이 남긴 기록이기에 매우 자세하고 생생합니다. 주로 서기전 109년에 양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기록했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조선의 우거와은 주변의 진국 등이 중국과 교통하려는 것을 자꾸 막을 뿐 아니라 한나라에 대해서도 제후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양국간의 몇 가지 사소한 다툼을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한나라의 무제가 보낸 5만여명의 군대는 한 차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했고, 1년 가까이 대치 상태를 거친 뒤 서기전 108년에 내분을 이용해 조선을 멸말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곳에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 군대와 조선의 군대가 대치할 때, 조선에서는 태자를 화의 사절로 보내 말 5천 마리와 군량을 바치려 했으나, 태자를 수행하던 만여명이 지닌 무기를 처리하는 문제로 국경인 패수 근처에서 시비가 일어 그만 평화제의 가 무산된 적이 있다.
지나치게 간추린 내용이어서 입체적인 전달은 불가능하지만, 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었고, 중국과의 경계를 이루던 것이 패수였다는 단순 사실만큼은 분명히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또 태자의 사절단이 만여명에 달했으며, 말 5천 마리를 한나라에 보내려 했을 정도로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고, 군사 기반이 튼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상.니계상.상.장군.대신 등 다양한 관료조직을 암시하는 명칭들을 자주 접할 수도 있습니다.
한서 조선전에도 사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지리지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이 이른바 한사군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 조선 멸망 이후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사람들을 교화시킨 이야기를 전하면서 당시의 형법 8개 조목 가운데 3개 조목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즉시 사형에 처하고,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되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50만(전?)을 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이 적용된 시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의 사회상과 문화 수준의 단면을 알려주는 매우 유용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도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합니다. 그중에는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한 부분도 있는데 그곳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연나라의 베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조선을 치려 하자 조선의 제후로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연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조선의 대부 예가 설득해 두 나라 모두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연나라의 제후가 왕을 칭한 시기는 역왕 때이니, 서기전 332~321년경입니다. 그리고 그후 소왕 대인 서기전 311~279년 사이에는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군사를 이글고 고조선을 공격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부는 진나나라가 습격할 것을 걱정해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의 부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의 아버지입니다. 모두 서기전 4~3세기경 고조선의 군사력이 매우 강했음을 암시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과 관련해 우리 나라에 전하는 사서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조선시대 숙종 2년(1675)에 북애거사가 편찬한 것이고, 환단고기는 각종 고서를 계연수라는 사람이 1911년에 새로이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책 보두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처음 간행된 생소한 책입니다. 그중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에 의하면, 우리의 고대사는 7대에 걸친 환국시대와 18대 1,565년간 이어진 배달시대 그리고 47대 2,096년간에 걸친 조선시대로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학적 지식에 근거하면, 위와 같은 전언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국가의 출현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우리의 경우 청동기시대는 아무리 소급해도 서기전 1500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임금과 같은 때(서기전 2333년경)라고 한 단군신화의 내용도 매우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국가와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서일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대몽항쟁기에 씌어졌으며,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규원사화에는 한말의 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이들 사서가 고조선시대의 기록에 근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한다면, 고조선측이 남긴 기록의 흔적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반도 서북부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상정합니다. 특히 지금의 평양 지역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한사군을 설치했지요. 그중 낙랑군에는 조선현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고조선의 중심지가 낙랑군에 편재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지역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유적과 유뮬이 대향으로 발견 조사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러나 고조선의 문화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비파형 동검과 지석묘.적석총의 분포 범위를 생각한다면,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훨씬 넓어져야 합니다. 요동반도를 비롯해 요하 동쪽은 물론 요하 서쪽에서도 고조선의 문화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대능하 혹은 난하에서부터 한반도의 예성강 혹은 청천상에 이르기가지의 지역으로 모두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약 기록 속의 조선이 연나라와 인접한 나라였으며, 2천여 리를 빼앗기도 여전히 국가 규모가 작지 않았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의 높은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나름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시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홀시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시기입니다. 고조선이 언제 건국해서 언제 멸망했는지, 또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었는지를 먼저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초기의 패수는 대능하에 비정될 수도 있습니다. 인근지역에서 고조선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선을 대제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화유적의 해당 시기가 지역데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비파형 동검의 경우, 요서.요동.한반도에서 모두 발견되지만, 시기는 각기 달라서 요서 지역이 가장 빠르고, 한반도의 유적 편년이 가장 늦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조선이 이동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동반도의 남담인 여순에서 서기전 6~4세기에 조영된 대규모의 적석총이 발견된 것을 보면 한동안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 지역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한변의 길이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적석총 묘역에서 23기의 묘곽과 144명분의 인골이 비파형 동검.동경 등 다량의 청동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많은 인골을 순장된 사람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무덤의 주인은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동의 요양.무순 등지에서는 전국시대의 장성유적도 발견됩니다. 연나라 혹은 진나라가 적어도 이곳까지는 진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는 그보다 훨신 동족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연나라 장군 진개가 있는 군대가 고조선으로부터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상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기록을 고조선이 최소한 2,000여 리 이상의 땅을 가졌던 증거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족으로 밀려났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전설을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이 동쪽으로 이동한 시실의 반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조선의 이동은 더욱 실감납니다. 역사학이란 이처럼 미궁 속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2) 동명신화 - 부여
동명신화의 내용과 분석 우리는 흔히 부여를 고조선의 후손이 세운 나라쯤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상 부여라는 명칭이 출현한 것은 이미 고조선의 당시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조선과 함께 중국측 기록에 실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서기 1세기경에 이미 부여에서 왕호를 사용했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부여의 국가 형성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부여를 건국한 사람은 동명이라고 합니다. 그의 건국 과정에 대해 후한서 동이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북쪽 색리국(한원에는 탁리국으로 나오며,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고리국으로 되어 있다.)의 국왕이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그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더니 계란 크기만한 것이 저에게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두매,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려두데 했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며 보호해 죽지 않았으며, 마구간에 버리자 말들도 역시 그러했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어미가 기를 것을 허락하고,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커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가 용맹해지는 것을 염려해 다시 죽이려 했는데,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으로 가다가 엄호수에 이르러 활동,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동명을 건네주었다. 마침내 부여에 와서 왕노릇 했다.
위의 신화에서 하늘의 이상한 기운이란 해 혹은 햇빛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체로 몽고와 만주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들 중에는 햇빛에 감응되어 임신.출산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모두 주인공의 비범함을 드러내기 위한 과장된 표현일 것입니다. 동명이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엄호수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동명은 송화강의 북쪽에 살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 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 것은 이미 단군신화를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명의 남하는 동명집단 혹은 동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의 남하로 바꾸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왕이 죽이려 하자 남하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북방의 어떤 세력 혹은 집단에 밀려 송화강을 건너 남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화에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중국 길림성의 길림시 일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단산과 동단산일대에서는 석관묘(흔히 따을 판 다음 그 안에 넙적 편평한 돌로 바닥과 벽을 만들고 시체를 안치하는 방식의 무덤을 가리킨다. 머리 쪽과 발 쪽의 벽은 판석 1장을 사용하며, 양 협의 긴 벽은 여러 장의 판석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뚜껑 돌 역시 넙적한 판돌을 사용한다. 석관묘가 발전한 것이 바로 지석묘라는 견해로 있다.). 토광묘(땅을 파서 광을 만든 다음 시체를 묻는 방식의 무덤을 가리킨다. 관 없이 시체를 직접 흙으로 덮는 방식을 순수토광묘라고 하며, 나무로 만든 관속에 시체를 넣은 다음 묻는 방식을 토광목관묘라고 한다. 또 토광 안에 관보다 더 넓고 큰 형태의 곽을 만든 다음 시체 또는 관을 안치하는 방식은 토광목곽묘라고 한다. 토광묘는 지금도 흔히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무덤형태이다.)...옹관묘(독무덤이라고도 하며, 항아리 속에 시체를 넣어 땅 속에 묻는 방식의 무덤을 말한다. 땅속에 항아리를 세워 놓고 그 안에 시체를 쭈그려 앉게 만드는 경우에는 항아리를 하나만 사용하고, 시체를 길게 드러눕게 하는 경우에는 보통 2개 내지 3개의 항아리를 길게 연결해서 관처럼 이용했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한 무덤 형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영산상 유역의 대형 옹관묘에서 금동관 등의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등의 고분과 산성유적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단산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같은 청동제 무기류와 반월형 석도 그리고 조...기장 등의 추위에 강한 곡물을 들 수 있습니다. 농업과 목축의 증거일 것입니다. 방사선 탄소 연대 축정법(1940년대에 미국의 물리학자 리비가 개발한 방법으로서 목탄.뼈등 생명을 읽은 유기물질이 지닌 탄소량을 확인함으로써 해당 유적의 조성연대를 알아내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자료 분석결과는 1950년을 기준삼을 때 시간적으로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는 뜻에서 BP로 표시된다. 즉, 만약 BP 1,1550+-100으로 표시되었다면 서기 400년을 전후한 시기로서 오차의 폭은 전후 100년이라는 뜻이다) 후석산유적에서는 서기전 1000+-100년 장사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405+-85년이라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동단산 문화의 남성자 유적 인근을 부여의 왕성지로 보기도 합니다.
부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길림시 인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용씨가 침입하는 서기 3세기 후반에 이르면, 부여가 분열하면서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옮겨가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동부여라고 합니다. 그리고 4세기 초에 이루면 원래의 부여(북부여) 역시 서쪽의 농안.장춘 방면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영향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살 어린왕과 사출도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여 부여시는 늦어도 2세기경부터 부자 상속제가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위구태 -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로 이어진 왕위 계승에서 마여는 서얼이었기 때문에 제가가 함께 옹립했으며 의라는 불과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왕위에 앉힐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아버지, 곧 전왕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전왕의 아들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아무런 반대없이 왕위에 오른 시기를 학자들은 보통 왕권 안정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여의 왕권이 처음부터 안정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모두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 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기도 했답니다. 부여에는 사출도라는 군사.행정체계가 있었습니다. 왕 밑에 있는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각각 한 지역을 맞아서 다스리며 방위를 담당하는 체계입니다. 일종의 지방자치이지요. 가는 몽골 계통어의 한.가한 그리고 고조선 등의 한.간.한.금 등과 통하는 말로서, 귀인.대인을 뜻합니다. 이들 가가 다스리는 지역은 큰 곳이 수천 가, 작은 곳이 수백 가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출도가 부여의 전 시기에 걸쳐 시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만약 서기 2세기경에 부여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면, 사출도와 같은 체게는 더 이상 시행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여 사람들은 평소 흰색 옷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에 나갈 때는 수를 놓은 비단옷이나 모직옷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은 나라 정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지냈으며, 전쟁을 벌일 때에는 소를 잡아 발굽의 모양을 보고 실흉을 점쳤다고 합니다. 은나라 정월은 축월로, 음력 12월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 도예의 무천과 같은 추수감사제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넣어 장사를 지냈으며, 지위가 놓은 사람이 죽으면 아랫사람을 죽여 함께 묻는 순장을 했는데, 많을 때에는 백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형벌은 매우 엄격했는데, 그중 몇 가지가 중국측 기록을 통해 전합니다. 첫째,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둘째, 도둑질을 하면 12배를 갚게 한다. 셋째, 간음한 사람은 남녀를 모두 죽인다. 넷째, 부인이 투기하면 죽인 다음 시체를 남산에 버려 썩게 하되, 친정에서 가져가고자 하면 소와 말을 내게 한다. 이와 같은 형법은 아마도 관습법이었을 것입니다. 그중 여자의 투기를 미워한 대목은 가부장적인 관념의 표출로 해석됩니다.
부여의 충속 중에는 형사취수제가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드는 풍습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앞의 제 2장에서 이미 다룬바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시 다루지 않겠습니다만, 이 풍습은 고구려에서도 널리 행해진 풍속이라는 사실만큼은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문화적 친연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여와 고구려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리라는 생각은 양국의 건국신화를 비교하고 나면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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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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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壓卵(태산압란) 泰(클 태) 山(뫼 산) 壓(누를 압) 卵(알 란)
진서(晉書) 손혜전(孫惠傳)에는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晉)나라 때, 손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은 모두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당시 진나라는 각지역 황족들의 다툼으로 몹시 혼란한 와중에 있었다. 손혜는 처음 제(齊)나라의 사마(司馬) 경의 부하로서, 조왕(趙王) 사마 윤(倫)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후 성도(成都)의 왕 사마 영(潁)의 장군이 되어 장사(長沙)의 왕 사마 의(義)를 정벌하러 가기도 했으나, 이후 그는 한때 은거생활을 하였다. 동해(東海)의 왕 사마 월(越)이 군사를 일으켜 그 세력이 커지자, 그는 사마월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를 칭송하였다.
그대의 깃발이 한번 휘날리면 오악(五岳)이 무너지고, 그대의 입김 한번이면 강물이 거꾸러 흐르니, 그대의 이러한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밀고 나아가 반역의 무리들을 토벌하고, 정의를 바로 잡으소서. 이는 실로 맹수가 여우를 삼키고, 태산이 계란을 깔아 뭉개고, 작은 불씨가 바람을 타고 넓은 들을 태우는 것처럼(泰山壓卵, 因風燎原), 쉬운 일입니다 .
泰山壓卵 이란 매우 강하여 상대가 없거나 일이 매우 용이함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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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1. 생물의 이름에도 바른 표기법이 있다.
부쳐온 편지에 이름이 제대로 쓰여 있지 않을 때는 괜스레 편지 뜯기가 싫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름만큼은 정확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옛날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패류에 얽힌 말을 찾아보면 "우렁이 속 같다"는 말은 속으로 파고들면서 굽이굽이 돌아서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호두 속 같다"거나 "추자속 같다"는 말과 비슷하게 쓰인다. 뱅글뱅글 토라지게 감겨 있어 도무지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달팽이가 바다를 건너다니"라는 말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 말할 거리가 안된다는 뜻이고 "달팽이 눈이 되었다"란 핀잔을 받거나 겁이 날 때, 움찔하고 기운을 못 펼 때를 비유한 것이고, "달팽이 뚜껑 덮듯이"란 입을 꼭 다문 채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나온 '우렁이','달팽이'라는 단어 외에도 흔히 많이 쓰이는 패류를 칭하는 것에 '조개','고동'이 있다. '조개'라는 말은 껍질이 두 장인 부족류(이매패)를 말하는 것으로 물이 있는 강이나 바다에서만 살고 땅(뭍)에는 살지 못한다. 조개의 껍질을 조가비나 조갑지로 부르며(조개를 영어로는 바다의 것을 clam, 민물산을 mussel로 구분해 쓴다) 우렁이, 달팽이, 고동(고둥)은 모두 껍질이 돌돌 말려 있는 복족류를 말하는 것으로 우렁이는주로 강에, 고동은 바다에 사는 놈들로 영어로는 달팽이를 랜드 스네일(land snail)이라 하고 우렁이와 고동은 스네일(snail)이라 하는데 민물에 나는 것(freshwater snail)과, 바다에 사는 것(sea snail)으로구분해서 쓰기도 한다. 여기에 강에서 나는 다슬기속(Semisulcospira)의 지방명(방언)을 보면 학명이나 국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다슬기를 지역에 따라 소래고둥, 갈고둥, 민물고동, 고딩이, 물비틀이, 대사리, 달팽이, 냇고동, 올갱이, 소라, 배드리, 골뱅이 등으로 부른다. 이런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다슬기'라는 우리말 이름을 정해서 쓰는 것으로 보통 말에서 표준어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물이 죄다 이름이 있다고 했는데 '이름 모를 풀','이름 모를 꽃'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모름지기 이름을 바르게 불러줘야 한다. 그리고 생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써붙여 줘야 하니 학명에도 규칙과 규약이 있는 것이다. 달래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인 부추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부추를 지역에 따라서는 정구지, 소풀, 솔 등으로 부르는데 부추가 표준어이고 나머지는 모두 방언(사투리)이며 여기서도 표준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나라 안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말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더 큰 어려움이 따르니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학명으로 통일해서 부르기에 이르렀다. 부추의 학명은 Allium odorum이다. 말과 글이 다른 사람들끼리도 학명만 대면 서로가 어떤 풀인가를 알아차린다. 언제가 신문에 난 것처럼 조류학자 원병오 선생과 북한 학자의 대화에서도 같은 새를 두고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르게 불러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학명을 대니 서로 알아차리고 그 새가 북한 어디에 살고 있다고 답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학명은 하나의 암호처럼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그 대화의 몇 토막을 적어본다.
남한 조류학자: 북한의 슴새 집단서식지는 어딥니까? 북한 조류학자: 슴새가 뭡네까? 남: 카르네이테스 레우코메라스 말입니다. 북: 아, 꽉새 말이군요. 서해안 여러 곳에 살고 있습니다. 남: 검은머리물떼새는 어떻습니까? 북: 무슨 새요? 남: 해마토푸스 오스트라레구스 말입니다. 큰 병아리만 하고 갯벌에서 사는 물떼새 말입니다. 남한에는 150마리 정도가 살고 있는데... 북: 긴부리까치도요를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북조선에도 서해안의 섬에 100마리 이상 살고 겨울에는 북쪽에서 날아와 그 수가 좀더 늡니다.
이처럼 학명은 남북한학자들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적으로 표준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명을 잘못 쓰는 일이 너무 많아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한다. 일반 독자에게는 어려운 내용이 되겠지만 참고로 읽어주기 바란다. 부추의 학명에서 Allium은 속명으로 대문자로 시작하고 odorum은 종명으로 소문자를 써야 한다. 학명은 라틴어로 쓰며 활자체는 반드시 이탤릭체로 써야 하고, 그 체가 없으면 학명 밑에 따로 밑금을 긋는다. 그래서 부추의 학명은 이탤릭체로 쓴 Allium odorum이거나 밑금을 그은 Allium odorum이 맞다. 그런데 학명의 명명자에 (?)를 붙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바다에 사는 말전복의 원래 학명은 Haliotis giantea Gmelin이었지만 뒤에 속명이 Nordotis로 바뀌어 이 속명이 바뀐 것을 알려주는 방법으로 명명자 이름에 (?)를 해서 Nordotis giantea (Gmelin)으로 표기한다. 학명도 그 생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에 Haliotis는 귀(전복이 귀를 닮았다는 말이다)라는 뜻이고 giantea는 크다는 의미다. 학명도 아무렇게나 쓰는 게 아니고 모두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Haliotis(Nordotis) giantea Gmelin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말전복의 속명이 다시 원래대로 Haliotes가 되어 Gmelin의 (?)가 없어지고 Nordotis가 아속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학명은 학자들에 의해서 바뀌기도 한다. 우리 나라 제주도에서 나는 전복의 일종인 오분자기의 학명을 Haliotis(Nordotis) giantea sieboldi Reeve로 쓰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sieboldi는 아종명으로 오분자기를 말전복의 아종으로 본 학명이다.
이렇게 학명 하나에도 규칙과 규약이 있건만 전공서적에도 학명 표기의 오류가 있고 신문이나 약 광고 등에는 학명이 뭔지도 모르고 잘못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명 설명에 이어 생물의 우리말 이름을 살펴보자. 생물의 이름을 신문이나 광고는 물론이고 전문서적에도 잘못쓰는 일이 흔한 것을 보는데 생물 이름에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식물 이름에서 '민 미꾸리 낚시'가 맞느냐? '민미꾸리낚시'가 맞느냐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름은 아무리 길어도 붙여 써야 옳다. 다른 예로 새 이름 '흰눈썹붉은배지빠귀' '흰죽지꼬마물떼새'처럼 붙여 써야 옳은 표기법이다. 한편 생물 이름의 앞뒤에 덧붙여 써서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 독자들은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다. 앞뒤에 붙은 말로 생물을 짐작할 수 있다.
개: 비슷하나 약간 차이가 있다. 개망초, 개머루 갯: 바닷가 또는 습한 지역에 나는 것. 갯고들빼기, 갯그령 꼬마: 작다. 꼬마물떼새 도깨비: 잎이나 열매가 크거나 무섭다. 도깨비고비, 도깨비부채 멧: 산이란 뜻. 멧세, 멧종달이 민: 없다, 갖지 않았다. 민달팽이, 민미꾸리낚시 벼룩: 작고 왜소하다. 벼룩이자리, 벼룩나물 새끼: 작소 왜소하다. 새끼노루귀, 새끼노루발 섬: 섬지역서만 산다. 섬댕강나무, 섬초롱꽂 쇠: 작다. 쇠우렁이, 쇠백로, 쇠기러기 알락: 본 바탕에 다른 색이나 점이 섞임. 알락명주잠자리, 알락뜸부기 애기: 작다. 애기풀, 애기냉이 어리: 작다. 어리연꽃, 어리굴 왜: 작다. 왜우렁이 외대: 줄기가 곧추 서 자란다. 왜대으아리, 외대바람꽃 재: 재색, 회색의 의미. 재갈매기 좀: 작다. 좀도요, 좀개구리밥 진퍼리: 진창으로 된 펄, 습지에난다. 진퍼리잔대, 진퍼리사소 칡: 칡무늬나 검은 색. 칡소, 칡붕어 타래: 화서(꽃의 순서)가 꼬여 있다. 타래난초, 타래사초
또 우리말 이름의 (뒤에 붙은) 사촌, 아재비, 붙이 등은 모두 비슷하다는 뜻으로 쓴다. 이름을 붙이는 데는 의미말고도 나라나 지명, 사람의 이름이 붙는 경우도 많다. 만주송이풀, 만주자작나무, 미국가막사리, 가야물봉선, 한라참나무, 사창분취, 한계령풀, 금강초롱꽃, 진네풀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글을 잘못 알고 있는 생물상식 중의 일례인데 실은 잘못 알고 있다기보다는 아예 모르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이 글은 분류학을 전공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하겠다. 생물의 우리말 이름이 정말로 예쁜 것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둔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자기의 이름값을 다 한다. 만물은 제 자리가 있고 또 제 이름이 있다. 풀 한 포기도 자리를 지키고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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