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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61호
2012.5.8 (음 3.18)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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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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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태어날 때 삼신할머니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호기심이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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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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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외래어 받침 표기법
우리말을 맞춤법에 맞게 적어야 하듯이 외래어도 표기법에 맞게 적어야 한다. 외래어 표기 원칙이 복잡한 데다 예외 규정도 많기 때문에 제대로 적기가 쉽지 않지만 일반인으로서는 몇 가지 원칙만 알고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 외래어 표기 원칙 가운데 하나는 받침은 대표음인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ㄱ, ㅋ, ㄲ'은 모두 'ㄱ'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ㄱ'으로만 적는다. 'ㄷ, ㅌ, ㅅ, ㅈ, ㅊ'은 'ㅅ'으로, 'ㅂ, ㅍ'은 'ㅂ'으로 적는다. 이런 규정은 학교에서 배워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만 이것을 지키지 않은 상표나 아파트 이름 등이 널려 있어 혼란스럽게 한다. '더샾'이 대표적이다. '더샾센트럴파크' '더샾퍼스트월드' 등 '더샾'이란 단어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받침은 대표음으로 적어야 하므로 '샾'은 '샵'이 돼야 한다. 원래 이 회사가 짓는 건물이나 아파트의 상표(브랜드)는 영어로 'the#'이지만 한글로는 '더샾'으로 표기하고 있다. '#', 즉 'sharp'는 정확하게는 '샾' '샵'도 아니고 '샤프'가 맞는 표기다. '샤프'를 굳이 한 글자로 표기하려면 대표음 원칙에 따라 '샵'으로 적어야 한다. 가게나 상점을 뜻하는 'shop'의 경우에는 '숍'이 맞는 표기다. '숍'을 '샾'이나 '숖'으로 잘못 적는 예가 흔하다. 외래어의 받침을 잘못 처리한 경우는 이 외에도 생활 주변에서 많다. '크린랲'의 '랲' 역시 '랩'이 맞는 표기다. '마켙'은 '마켓', '디스켙'은 '디스켓', '굳'은 '굿'으로 적어야 한다. 받침에 해당하는 알파벳이 'p' 't' 'd'라고 해서 'ㅍ' 'ㅌ' 'ㄷ'으로 표기해선 안 된다.
[우리말바루기] 번번이 / 번번히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챙겼는데 날씨가 좋아 우산이 짐이 된 적,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비가 와 낭패를 본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기상청 날씨 예보는 번번히 틀려!"라고 불평해 본 경험 또한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매번'을 나타내고자 할 때 '번번이'로 써야 할지, '번번히'로 써야 할지 헷갈리곤 한다. '번번이'와 '번번히'는 그 의미가 달라 잘못 사용하면 전혀 다른 뜻으로 전달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우선 "약속을 번번이 어기다"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지다" "좋은 기회를 번번이 놓치다"에서와 같이 '매번' '때마다'라는 의미로 쓸 땐 '번번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기상청 날씨 예보는 번번이 틀려!"가 바른 표현이다.
'번번히'는 '번번하다'에서 온 말로, "농지 정리를 해 논 전체를 번번히 골랐다"에서와 같이 '구김살이나 울퉁불퉁한 데가 없이 펀펀하고 번듯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셋방을 이리저리 옮겨 살다 보니 세간 하나를 번번히 장만하지 못했다"에서처럼 '물건 따위가 멀끔해 보기도 괜찮고 제법 쓸 만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번번하다'는 "외모가 번번하다"에서와 같이 '생김새가 미끈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요즘 같은 장마철, 애꿎은 기상청을 번번이 탓하기보다 불시에 찾아올지 모르는 비에 대비해 우산을 습관처럼 챙기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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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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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다 쓴 시 - 최문자
나는 땅바닥에 대고 시를 썼다. 돌짝도 흙덩이도 부서진 사금파리고 그대로 찍혀 나오는 울퉁불퉁했던 삶. 삐뚤삐뚤 한글 자모가 나가고 미어진 종이 위에서 연필은 몇 자 못 쓰고 부러졌다. 지금지금 흙부스러기가 씹혔다. 숨기고 있던 내 부스러기들이 씹혔다.
더 이상 세상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땅바닥에 와 있었다. 죽은 꽃잎에 대고 죽은 사과알에 대고 작은 새의 죽은 눈언저리에 대고 꾹꾹 눌러썼다. 에서겔서의 골짜기 마른 뼈처럼 우두둑 우두둑 무릎 관절 맞추며 붙이며 죽은 것들이 일어섰다.
나는 흙바닥에 대고 시를 쓴다. 죽음도 사랑도 절망도 솟구치며 찍혀 나오는 미어지는 종이 위에 꾹꾹 놀러쓴다. 몇 자 못 쓰고 부러지는 연필 끝에 침 대신 두근거리는 피를 바른다. 시에서 늘 피린내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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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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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포 서어나무. - 서공식
까닭도 하나 없이 십리 포에 비가 온다. 서어나무 숲 사이로 우산을 펼쳐들면 제 각기 따로 피어난 암 수꽃의 입맞춤
바다가 그리워 서어나무로 일어서서 한 가지에 받쳐진 외꽃으로 피어날 때 애달픈 속내 울음이 파도위로 나른다.
허방을 딛고 가는 사슴 같은 바람 안에 서어나무 상사화는 뚝 뚝 뚝 핏물지고 백사장 돌아선 어귀 흰 손 사레 멈춘다.
포말로 다가 오는 순환을 기약하면 그렇게 소중한 바람 하나 꽃이 되고 또 하나 우산을 펴는 비 내리는 서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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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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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시애틀 추장 外
세상의 다른 이름 시애틀 추장 - 수콰미쉬 족과 드와미쉬 족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워싱턴의 얼굴 흰 대추장이 우리에게 우정의 표시와 안부를 전해 왔다. 무척이나 친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우리의 우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위대하고 훌륭한 백인 추장은 아울러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다.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백인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우리가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우리로부터 사들이겠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 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 부족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에서 솟아오르는 수액은 우리들 붉은 얼굴 가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고, 순록과 말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강의 물결과 초원의 꽃들의 수액, 조랑말의 땀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이며 모두가 같은 부족, 우리의 부족이다. 따라서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의 땅을 사겠다고 한 제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의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문명인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함을 안다. 그에게는 우리의 땅조각이 다른 땅조각들과 똑같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땅을 손에 넣기 위해 밤중에 걸어오는 낯선 자이다. 대지는 그의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는 대지를 정복한 다음에 그곳으로 이주를 한다. 그는 대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 우리의 방식은 당신의 방식과 다르다. 우리의 대지를 팔아야 한다면, 그 공기 또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불어 보내는 것이 공기이며, 세상의 모든 아침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것이 그 공기이다. 바람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과 마지막 숨을 주었다. 그 바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묶여 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사람이 삶의 거미집을 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 역시 한 오라기의 거미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그가 거미집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 온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조상들의 육신과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대지를 존중하도록 해야 한다. 대지가 풍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풍요롭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듯이,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에게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대지에게 가해지는 일이 곧 대지의 아들들에게 가해진다. 사람이 땅을 파헤치면 곧 그들 자신의 삶도 파헤치는 것이 된다. 이것을 우리는 안다. 대지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의 소유물이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머지않아 당신의 부족이 홍수 뒤의 강물처럼 이 대지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반면에 나와 나의 부족은 썰물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러한 운명은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스라한 별을 지켜보듯이 우리의 소멸해 가는 운명을 지켜볼 뿐이다. 얼굴 흰 사람들의 꿈을 우리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이 마음 속으로 어떤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으며, 긴 겨울밤에 자기의 자식들에게 그려 보이는 내일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면... 하지만 우리는 야만인들이고, 문명인들의 꿈은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며, 얼굴 흰 형제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니까. 당신의 부족과 나의 부족은 기원도 다르고 운명도 다르다. 이 두 부족 사이에는 공통점이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들의 유해가 더없이 성스러우며, 그들이 휴식하고 있는 장소는 신성한 곳으로 모셔진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 조상의 무덤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그럼에도 후회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의 조상은 무덤의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자기가 난 이 땅과 당신들을 사랑하기를 그치고 먼 별들 아래를 헤맨다. 그리고는 금방 잊혀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죽은 혼들은 자기를 태어나게 한 아름다운 세계를 결코 잊지 않는다. 육체를 떠나서도 구불거리는 강과 숨은 골짜기, 이 거대한 산과 호수들을 변함없이 사랑한다. 저마다 외로운 사냥꾼들인 살아 있는 우리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들이 가 있는 저 '행복한 사냥터'로부터 돌아와 종종 우리를 방문하고 위로하고 길을 인도하는 것이다. 밤과 낮은 한 집에 살 수 없다. 얼굴 붉은 사람들은 떠오르는 아침녘 해에 새벽 안개가 달아나듯이 문명인들이 다가오면 뒤로 달아날 수밖에 없다. 남은 날들을 어디에서 보내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남은 날들도 많지 않으니까.
우리에 대한 당신의 제안을 공정한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부족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제공하는 인디언 거주지역 안으로 물러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얼굴 흰 대추장의 명령을 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대자연의 목소리라 여기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몇 번의 달이 더 기울고, 몇 차례의 겨울을 더 넘기고 나면 한때 이 드넓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던, 한때 위대한 정령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살던 힘센 부족의 아들들은 모두 무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한때는 당신들보다 더 강하고 더 희망에 넘쳐 있던 한 부족의 아들들이. 하지만 내가 왜 내 부족의 운명에 대해 슬피 여길 것인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한 부족이 가면 한 부족이 오고, 한 국가가 일어나면 한 국가는 물러난다.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한 차례의 눈물, 한 번의 타마나우스, 즉 한 번의 만가와 더불어 그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영원히 떠나간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의 부족이 스러질 날이 지금으로선 아득히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다.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문명인들이라 해도 공통된 운명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제안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것이며, 결정이 나는 대로 알려 주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 바이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당신에게 팔더라도 항시 자유롭게 우리 조상의 무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친구와 아이들의 무덤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족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신성한 것이다. 모든 언덕빼기, 모든 골짜기, 모든 평야와 숲덤불이 우리에게는 아득히 사라져간 날들의 슬프고 기뻤던 사건들을 간직하고 있다. 고즈넉한 해안을 따라 태양 아래 죽은 듯이 입다물고 있는 바위들조차도 우리 부족의 삶과 연결된 사건들에 대한 추억으로 몸을 떨고 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이 흙도 우리 부족의 발이 닿으면 훨씬 더 다정하게 반응한다. 이 흙은 우리 조상들의 뼈로 이루어졌고, 당신들의 구두 신은 발보다 우리의 맨발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짧은 계절 동안 이곳에서 삶을 누렸던 흩어진 전사들과 그리운 어머니들, 마음씨 좋은 아줌마들은 아직도 이곳의 장엄한 침묵을 사랑한다. 설령 최후의 얼굴 붉은 사람이 사라져서 우리 부족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 하나의 신화로 남을지라도 이 해안은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로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먼 훗날 당신의 아이들이 황야에서, 슈퍼마켓에서, 고속도로 위에서 또는 고요한 산림 속에서 자기가 혼자라고 느낄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 부족의 보이지 않는 혼들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므로.
이 모든 대지 위에 자기 혼자라고 할 만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마을과 도시의 거리들이 밤이 되어 고요해지고 당신은 황량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아직도 이 아름다운 땅을 사랑하는 우리 부족의 숨결이 모든 곳에 가득하다. 문명인들은 결코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라 해서 아무런 힘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당신은 우리 부족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내가 '죽은 자'라고 말했던가? 그렇지 않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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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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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9장 생활의 즐거움
10. 여행의 즐거움
옛날에는 여행이 놀이였으나 요즘에는 하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백년 전에 비하면 오늘날의 여행은 훨씬 편해졌다. 정부는 국립 관광국을 만들어서 관광사업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현대인은 전체적으로는 그의 할아버지가 한 것보다는 여행하는 일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오늘날에는 이미 사라져 버린 예술이 되어 버리고 만 것 같다.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진짜 묘미를 알려면 젼혀 여행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갖가지 엉터리 여행에 대해서 우선 알아 두어야 한다. 엉터리 여행의 첫번째는 정신을 향상하기 위한 여행이다. 오늘날 정신 향상이라는 것은 확실히 정도가 좀 지나치고 있다. 사람의 정신이 그렇게 쉽사리 향상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 나는 큰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클럽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나 강연회에서 정신이 향상된다는 것은 우선 바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년 내내 그렇게 진지하게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만 온갖 애를 다 쓰고 있다면 적어도 어쩌다 얻는 모처럼의 휴가 때만은 마음을 한가하고 편하게 가져서 쉬게 해주어야 한다.
여행에 이런 잘못된 생각이 여행 안내인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는 여행 안내인이라는 사람만큼 참을 수 없는 수다장이고 꼬치꼬치 성가시게 구는 사람들도 없다. 이 사람들로부터 누구누구는 1792년 4월 23일에 태어나 1852년 12월 2일에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길 모퉁이건 동상 앞이건 그냥 지나가 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일찌기 수녀원의 수녀들이 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가는 일행과 묘지에서 만났던 경험이 있다. 그 한 무리가 묘석 앞에 걸음을 멈추자 수녀는 학생들을 보고 고인이 언제 어떤 일을 했느니, 몇 살에 결혼을 했느니, 부인의 이름이 무엇이니 하고 모처럼의 여행하는 즐거움을 완전히 망치는 박식한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도 또한 학교 학생들처럼 안내인으로부터 시끄러운 강의를 받게 된다. 우등생 타입의 여행자쯤 되면 선량한 학교 학생처럼 정성껏 노우트에 기록까지 한다.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도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이 라디오시티에서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불쾌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다만 다른 점은 중국의 안내인은 전문가가 아니며 과일 장사거나 당나귀를 모는 마부거나 농부의 아들이거나 해서, 미국의 여행 안내인보다 성질은 쾌활하지만 설명이 그다지 정확하지 못하다는 결점이 있다. 전에 나는 소주의 검지를 찾았던 일이 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머릿속에서 역사의 연대며 사건이 뒤죽박죽이 되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사연인즉 이러했다... 검지의 상공 40척이나 되는 곳에 온몸이 오싹할 것 같은 다리가 걸려 있고, 그 돌다리에 검이 용으로 둔갑하여 승천했다든가 하는 둥근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귤을 파는 소년의 이야기로는 여기가 옛날의 미녀 서시가 아침에 몸단장을 하던 곳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서시의 화장대는 거기서 1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년은 여러 가지로 많은 말을 했지만 결국 소년이 바라는 것은 자기의 귤을 좀 사달라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어떤 모양으로 변하고 수식되어 그 모습이 변태되는가를 알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두 번째 엉터리 여행은 화제를 얻게 위해, 다시 말해서 뒷날 이야기할 재료를 얻기 위해 여행하는 일이다. 차와 샘물로 이름난 항주의 호포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자기의 사진을 친구에게 보인다는 것은 과연 시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사진에 정신이 팔려서 진짜 귀한 차 맛을 모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이 버릇이 되면 좀처럼 떼어버릴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우리가 런던이나 파리 시내를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가끔 보게 되는 일이지만 카메라를 갖고 다니는 여행자들에게는 특히 그렇게 될 위험성이 많다. 카메라에 정신이 팔려서 명소를 구경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 사진을 들여다 볼 특권은 갖고 있겠지만 트라팔가르 광장이나 상제리제의 사진 같은 것은 뉴욕에서도, 북경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쯤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적을 눈으로 보고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라 뒷날 이야기 재료로 삼으려는 생각이니까 유역하는 장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억도 풍부해질 것이고 화제로 삼을 장소도 많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루 동안에 한 곳이라도 더 많이 돌아다녀야만 하게 된다.
여행하는 명소의 프로그램을 손에 들고 한곳에 올 때마다 프로그램을 연필로 지워 간다. 이러한 관광객에 한하여 모처럼 휴가를 얻어 노는 날에도 능률만을 올리려고 아둥바둥하는 것이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여행을 하게 되니까 아무래도 세 번째 잘못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타입에 속하는 사람들은 비엔나나 부다페스트에 몇 시간 머무는가 하는 것을 미리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완전한 여정표를 만들어 둔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지켜 나가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시계에 얽매이고 달력에 끌려다니는 셈이다. 이러한 옳지 못한 여행만이 여행은 아니다.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진짜 여행의 동기는 다른 데 있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우선 첫째로, 여행하는 참된 동기는 세상을 피하고 사람들에게서 떠나는 것이어야 한다. 좀더 멋지게 시적으로 말한다면 잊기 위한 여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의 가정이 있는 동네에 있으면 손윗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상당한 사람으로 생각되어 제법 의젓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정한 인습이라든가, 규칙적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의무에 매여 살게 마련이다. 어떤 은행가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에 있을 때는 보통 일반으로 취급받기가 힘들며 자기가 은행가라는 사실을 잊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경우 여행을 떠나는 참된 동기는 여행만 하면 보통 사람처럼 취급해 주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이리라. 장사일로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소개장은 매우 편리한 것이겠지만, 상용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순수한 여행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소개장을 가지고 있으면 일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고 사람이 조직한 인위적인 우연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회적인 지위를 떠나서 타고난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찾아낼 기회가 적어지게 마련이다. 외국에서 친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자기와 같은 사회층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안내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숲속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더 감흥 깊고 크다. 손짓만으로 치킨프라이를 주문하거나 토오쿄의 순경에게 길을 묻거나 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적어도 이런 여행자는 운전수나 비서에게 그다지 수고를 끼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참된 여행자에게는 언제나 방랑하는 기쁨, 유혹, 모험심이 있다. 여행한다는 것은 <방랑> 한다는 뜻이다. 방랑이 아닌 것은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행의 본질은 의무도 없고, 일정한 시간도 없고, 소식도 전하지 않고, 호기심 많은 이웃도 없고, 환영회도 없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나그네길인 것이다. 좋은 나그네는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도 모르는 법이고,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여행자는 심지어 자기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방랑하는 정신이 있어야만 사람들은 휴가를 이용하여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그네는 인적이 드문 곳, 참된 고독을 맛볼 수 있는 곳, 자연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방면에 피서지를 구해서 가고 싶어한다.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아가거나 핑크나 푸른빛 수용복을 사느라고 오랜 시간을 허비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입술 연지만은 그래도 좋다고 해두자. 왜냐하면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은 장 자끄 루소를 신봉하는 사람이니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붉은 입술 연지를 바르지 않고서는 어떤 부인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문명의 입술은 창백하며, 자연의 입술은 붉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같은 피서지나 바닷가를 찾아가서 자연과의 보다 친밀한 결합을 잃고 또는 잊기 때문에 입술이 파랗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온천으로 찾아간 사람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야 내 혼자 몸이 되었구나> 그러나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 호텔의 휴게실에서 신문을 집어들고 B부인이 월요일부터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날 아침 <홀로 호젓한> 산책을 하다가 어젯밤 기차편으로 도착한 더들리 집안 식구들과 만나게 된다. 목요일 밤에는 S부인도 남편과 함께 이 멋진 산골짜기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이윽고 S부인은 더들리 집안 식구들을 티파이티에 초대하고, 더들리 집안 식구들은 S부부를 트럼프 놀이에 초대한다. 다음에 S부인이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들려 온다. <얼마나 멋져요? 마치 뉴욕에 와 있는 것 같군요, 안그래요!>
그러나 나는 말하리라. 여기에 또 다른 취미의 여행이 있다. ...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다람쥐와 사향쥐와 산쥐와 구름과 나무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와도 만나지 않는 그런 여행이 있다. 내 친구인 어느 미국 부인이 중국인 친구들과 함께 향주 부근에 있는 어느 산 위로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서 올라갔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안개가 짙은 아침이었다고 한다. 산 위로 올라감에 따라 안개는 점점 짙어 가기만 했다. 나뭇잎을 후두둑 가볍게 때리는 물방울 소리도 들린다.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 부인은 실망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올라 가 보세요. 꼭대기에서 보는 경치가 아주 좋답니다. 하고 중국 친구들이 주장하는 바람에 부인은 그들의 뒤를 따라 계속해서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가자 구름 멀리에 싸인 보기 흉한 바위가 보인다. 앞서 말한 멋있는 경치란 바로 이 바위를 두고 한 말이었다. <저게 뭐죠?> 하고 부인이 물으니까 <역연암이랍니다> 하고 친구가 대답했다. 은근히 화가 난 부인이 산을 내려가려고 하자 <하지만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훌륭하답니다> 하고 그들은 말한다. 부인의 옷은 이미 안개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내려가는 것을 그만 두고 남들을 따라 올라갔다. 간신히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안개만이 자욱이 떠돌고 있을 뿐, 먼 산줄기의 윤곽만이 수평선 위로 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항의했다. <그게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이리로 올라온 것이랍니다> 이것이 중국인 친구들이 들려준 대답이었다는 이야기다.
사물을 보는 것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사물을 구경하면서 다니는 많은 나그네들은 사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사실은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책을 쓸 재료를 얻기 위해서>니 뭐니 하면서, 마치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 사람들이나 자기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완전히 다 보아 버려서 주제가 동이 나고 만 것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며 외국으로 떠나는 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 <실밥>은 로맨틱하지 않고 게룬세이 섬(영불 해협에 있는 해협, 군도 중의 한 섬)은 너무나도 따분하고 지루해서 큰 소설의 재료로 삼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인가 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여행은 관찰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하는 철학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철학에 의하면 먼 나라로 여행하는 것과 오후에 뜰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과의 차이는 없어지고 만다. 김성탄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양자는 똑같은 것이다. 이 중국의 극평가가 저 유명한 <서상기>를 평하는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나그네의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도구는 <가슴 속에 뛰어난 재능과 눈썹 밑의 신안>이다. 사물을 느낄 줄 아는 마음과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추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은 시간과 돈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가슴 속에 뛰어난 재능과 눈썹 밑의 신안>을 갖추고 있다면, 비록 산에는 오르지 않더라도 집에 머물러 있거나 들판을 거닐면서 뜬구름, 개, 생울타리, 외로이 서 있는 나무를 관찰하면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참된 여행법에 대한 김성탄의 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세상 사람들이 쓴 기행문을 읽고, 참다운 여행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물론 여행에 익숙한 사람은 먼 길을 여행하여 바다와 육지의 웅장한 경치를 바라보고 그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바다와 육지의 명승지를 전부 찾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의 가슴 속의 뛰어난 한폭의 재능과 눈썹 밑의 한쌍의 신안이 일개워 준다. 어느날 발과 눈과 마음의 힘을 많이 소모하면서 어느 석굴을 찾아간다. 그것이 끝나자 곧 이어서 또 다음날에도 다른 좋은 경치를 찾아 발과 눈과 마음의 힘을 소비한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날마다 이곳 저곳 명승지만 돌아다녔으니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떤 석굴을 찾아보았는가 하면 또 다른 명승지를 찾고 있으니...> 그러나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점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찾아간 두 곳은 떨어져 있다 해도, 2백 리나 3백 리, 그렇지 않으면 80리나 70리나 50리, 아니 단지 10리나 5리 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뛰어난 재능과 눈썹 밑의 신안>을 갖고 불과 10리나 5리 거리의 차라면 석굴이나 명승지를 본 것과 같은 눈초리로 바라볼 수는 없었던가. 만물의 어머니인 자연이 위대한 기술과 지혜와 힘으로써 석굴이나 명승지를 갑작스럽게 만들어 낸 것을 보면 필경 눈은 놀라고 마음은 서늘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때로 나는 이 우주의 작은 것, 새, 물고기, 꽃 또는 가련한 식물, 새의 깃, 물고기의 비늘, 꽃잎, 풀잎 같은 것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는 어머니인 자연이, 그 위대한 기술과 지혜와 힘으로써 이런 작은 것까지도 창조해 낸 신비로움을 감탄하게 된다.
사자는 들토끼를 잡는 데도 큰 코끼리를 공격할 때와 똑같은 힘을 기울인다고 하는데 만물의 어머니인 자연이 하는 일도 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자연은 석굴이나 명승지를 만들어 내는데 그 힘의 전부를 쓰지만 새, 물고기, 꽃, 꽃잎, 풀잎, 심지어는 새의 깃, 물고기의 비늘, 꽃잎, 나뭇잎을 만들어 내는 데도 그가 지닌 모든 정력을 기울인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눈을 놀라고 하고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유독 석굴이나 명승지만은 아니다. 또한 석굴이나 명승지가 어떻게 생겨났는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장자는 현명하게도 말한다. <말의 몸의 여러 가지 기관 하나하나를 가리켜 말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서로 다른 기관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말이 눈앞에 있으면 우리는 그것이 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커다란 호수 주위에 빽빽이 우거진 숲과 큰 묏부리를 덮는 나무나 비석이 있다고 하자. 깊은 숲과 나무 비석이 서로 한데 모여서 큰 호수나 큰 묏부리의 경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그네에게는 즐거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절벽이나 높은 산봉우리도 작은 돌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으며, 떨어지는 폭포는 하잘것없는 작은 샘물이 한데 모여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에 대해서 말한다면 돌은 사람의 주먹만한 크기의 것이며, 샘은 보잘것없는 작은 시냇물 정도 밖에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데 모여서 저마다의 구실을 주장하지 않고 한몸이 되면 비로소 수레의 구실을 하게 된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든다. 진흙이 자기의 본성을 버리면 비로소 쓸만한 그릇 구실을 하게 된다. 우리는 벽에 구멍을 뚫어서 창문과 문을 만든다. 창문과 문들이 자기의 존재를 잃게 될 때 집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된다> 석굴이나 명승지를 찾아가서 우람하게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꼬불꼬불 돌아가는 산 길,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 똑바로 흘러서 강을 이루는 것, 비스듬히 기울어 언덕을 이루는 것, 그런가 하면 바닥이 되어 고원 구실을 하는 것, 기울어 언덕이 된 것, 걸쳐서 다리가 된 것, 한데 모여서 협곡이 된 것 등등을 볼 때, 변화무쌍한 그 속에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찾아내고 더욱이 위대함과 신비로움은 자연의 각 부분이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고 공이 될 때 생겨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각 부분이 하나하나의 개성을 주장하지 않게 되면 그때는 이미 산길도 아니고, 절벽도 없고, 하천도 없고, 고원도 없고, 언덕도 없고, 다리도 없고, 협곡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가슴 속의 뛰어난 재능, 눈썹 밑의 신안이 유유히 떠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 공이 되었을 때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구태여 석굴을 찾고 명승지를 찾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같이 생각할 때, 새삼스럽게 석굴이나 풍경지를 찾아갈 필요는 없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불과 2백 리나 3백 리, 아니 10리나 5리 되는 길가에도 이러한 자연의 단편이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고 공이 된 상태로 뒹굴고 있지 않은가. 조그마한 구부러진 다리, 가지가 엉성하게 외따로 서 있는 나무, 보일까말까한 늪지대, 마을, 생울타리, 개... 내가 유유히 돌아다닐 수 있는 석굴이나 명승지의 신비로움이 이런 데도 있음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 속에 간직한 뛰어난 재능과 두 눈썹 아래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필요한 것은 이밖에는 없다. 그러나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데 남다른 재능이 필요하고, 유유히 배회하는 데 날카로운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면 여행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가슴 속의 특별한 재능, 눈썹 밑의 특별한 눈이라는 것이 특별히 따로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떠돌기를 즐긴다는 것이 이미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뜻하며 유유히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남다른 눈이 갖추어 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저 미불이 바위를 평가한 표준은 <수><추><투><수>였다. 그러나 10리나 5리 안에 널려 있는 물, 마을, 다리, 나무, 생울타리, 개 따위는 모두가 수이고 추이고 투이고 수이다.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면, 미불이 바위를 본 눈초리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지닌 수, 추, 투, 수를 느낄 수 있다면 그 사이를 배회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된다. 이 네 가지를 빼놓고 험준한 못부리 산길이나 절벽이나 하천이나 고원이나 사면이나 다리나 좁은 골짜기나 또는 석굴과 명승지의 웅대함과 신비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석굴이나 명승지를 꼭 찾아가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많이 남겨두고 있는 셈이 된다. 아무데도 찾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생울타리, 한 마리의 개에서 자연이 지닌 신비로움과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석굴이나 명승지를 대하더라도 위대하지 않은 것, 신비롭지 않은 것 밖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인 착산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역사상 여행법을 가장 잘 터득한 사람은 공자요, 왕희지가 그 다음이었다> 내가 어째서냐고 물으니까 착산이 설명하기를 <쌀이란 아주 희게 씻을 수는 없고, 다진 고기는 아주 훌륭하게 잘게 다질 수는 없는 법이다 라고 말한 공자의 말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고, 왕희지는 그가 쓴 글로 알 수가 있다네. 왕희지가 쓴 글에는 그의 아들인 왕헌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거든> <자네 이야기는 옛부터 전해온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네> 하고 나는 말했다. 착산은 일찌기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왕희지는 집에 있을 때면 정원에 심은 나무에 핀 꽃의 암술을 세면서 하루를 보낸 일이 흔히 있었다. 암술 세는 데 온 마음을 쏟은 나머지 하루종일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제자가 스승의 곁에서 수건을 들고 서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말했다. <그럼 그 이야기의 권위를 자네는 어디에서 찾아내는가?>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가슴 속에서> 그는 이같이 경탄할 만한 인물이었다. 아아,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의 로맨틱한 공상력은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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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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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2. 니콜라우스
신에 관한 명명
정신계에서의 위대한 인물이 동시에 현실 세계라는 무대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되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1401년 쿠스에서 모젤의 어부이자 상인-물론 가난하지는 않았지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당시 유럽에서 정신적으로나 세속적으로 높은 영광을 독차지한 귀족 가문에 속하지는 못했다. 니콜라우스는 그가 소박한 어부의 아들로서 그 정도 성공한 사실에 한평생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이때 그가 정신적으로 최고의 선조로 삼았던 베드로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가 부모 밑에서 돈에 대한 감각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에 대한 감각을 터득한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개인적으로 전혀 필요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점을 경탄해하며 찬양해 마지 않는다. 그의 식탁은 매우 검소하게 차려졌다. 그는 양초 대신에 값싼 석유 램프를 사용하였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는 또한 말 대신에 나귀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더 큰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나 싶다. 헤아려 보건대 그때 그는 그의 스승이 예루살렘에 의기 양양하게 입성한 것을 회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사람의 행각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이나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니콜라우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 다음의 일화뿐이다. 그가 언젠가 그의 아버지와 다투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거룻배에서 물 속으로 집어 던지자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황하며 떠돌아 다니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믿는다면,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당시 매우 유명한 학교인 디벤터 학교에 착실히 다녔으며 그 학교에서 곧 두각을 나타냈다 한다 그는 15세에 법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면서 몇 년 동안은 인문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 후 바로 법률학 분야에서 유명한 파두아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22세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후 그의 고향에서 변호사로 정착했다. 그러나 변호사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는 그가 맡은 최초의 소송에서 졌던 것이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극단적인 결론을 내려 앞으로는 법조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루벵 대학의 교회법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는 그 대신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서품식을 받지도 않고 트리어 교구의 한 본당의 주임 신부직을 맡게 되었다. 이어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곧 성직자의 직위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신자들의 영신 생활을 돌보는 그 이상의 일을 떠맡게 된다.
니콜라우스가 그와 친분이 있는 추기경의 부름을 받고 바젤의 종교회의에 참석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고향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즉시 교황에 맞서 종교 회의의 권리를 변호하는 당에 가입했다. 그는 종교 회의의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철저한 문헌과 자료 조사를 거쳐 방대한 저서 (가톨릭의 단결에 대하여)를 쓰는데, 이 책은 대단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당시 사람들의 놀라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황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우리는 무엇이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를 몰고 왔는지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니콜라우스가 항상 갖고 있던 명예욕이 작용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혼란한 시대에서 교회의 문제는 단일한 지도자 아래에서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고 깊이 생각한 끝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니콜라우스는 바젤에서 폭넓은 분야에 걸쳐 교회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교황과 종교 회의 사이의 반목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트리어 대주교의 임명권에 대한 분쟁과 뵈멘의 후스 교회와 로마 교회를 화해시키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활동은 세속적인 분야에까지 널리 뻗쳤다 그는 바이에른 지방의 귀족들사이의 불화, 아니 더 나아가 스페인과 영국의 분쟁까지도 조정하도록 위임받았다. 교회 밖에서도 니콜라우스의 담판 능력은 높이 평가되었다. 더구나 그는 귀족들의 결혼 중매도 맡아서 해줄 정도였다. 이 모든 일 외에도 그는 달력 개정 문제에도 몰두했다. 이때 그는 충분한 계산 끝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1700년과 1734년 사이에 일어나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교황과 종교 회의의 의견이 일치된 가장 중요한 과제는-그 둘이 비록 그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옥신각신했지만-동방 교회와 로마간의 화해이다 니콜라우스는 특별 사절단의 지도급 위원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떠난다. 그는 귀향길에서 망망 대해를 바라보며 "위로부터의 선물, 빛의 아버지의 선물"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모든 분열에 앞서, 특히 실재성의 모든 영역에서 단일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그 단일성은 궁극적으로 무한함에, 즉 신 안에 놓여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돌아와서 은둔 생활을 하며 그의 저서 (무지의 지에 관하여)를 저술한다. 그 후 교황의 특별 사절로 임명된 니콜라우스는, 당시 연속적으로 열리고 있던 독일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직무를 대행하며 교회의 개혁에 대해 토의하게 되었다. 그는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고 이로써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따라서 교황이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준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에 임명한다. 동시에 교황은 그에게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는 데 쓰라며 금화 1000냥을 보낸다. 니콜라우스가 누리고 있는 명성은 그가 콘클라베의 교황 선거에서 후보로서 잠시 거론되었다는 사실이 말해 준다.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 생활의 개혁, 특히 수도원을 개혁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것은 몹시 힘든 업무였다. 수많은 수도원에 아주 나쁜 죄악들이 만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방종한 여자들과의 주연, 매춘부들,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에 오가는 사악한 교제 등이 만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미신의 만연은 교회 공동체의 종교적인 숭배에까지 침투한다. 피의 기적이 도처에서 숭상되었다. 니콜라우스는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 그는 잠을 네 시간으로 줄였으며, 여러 차례 노여움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를 초대한 집주인에게 고함을 지르고 연회 식탁에 오른 치즈와 빵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또는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주교가 될 것이라고 방정맞게 까불거리는 불쌍한 신부 1명을 라인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니콜라우스의 그 다음 시기의 삶은 추한 분쟁으로 인해 음울해진다. 교황은 그를-상임 평의원단에서 선출한 사람을 마다하고-브릭센의 주교로 임명한다. 이로써 그는 그곳이 많은 영토의 주교 관구를 포함하고 있기에 성주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티롤의 공작과 충돌한다. 이 공작은 주교좌에 대해 서약한 신하 관계를 전혀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주교좌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한다. 이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드디어 싸움이 벌어지고, 이 싸움에 주교 자신도 휘말려 들게 된다. 수차례의 협박과 심지어는 기습까지도 자행된다. 결국 니콜라우스는 퇴각해 간 자신의 성 안에 포위당하고 만다. 요새는 공격을 받아서 마침내 점령되고 니콜라우스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후 사태는-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몹시 못 마땅한 타협이기는 하지만-타협을 봄으로써 종결된다. 또 니콜라우스는 그의 개혁 계획 때문에 한 명문 수녀원과 그 수녀원의 호전적인 여자 대수녀원장과 심한 대립에 빠진다. 이 대립은 특히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에 대항할 용병대를 모집함으로써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하는 형태를 띤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니콜라우스는 여자 대수녀원장의 편에 서서 싸움에 가담한 농민의 무리를 학살한다.
드디어 이 모든 어려운 일에 지쳐서 니콜라우스는 "흰 눈과 검은 계곡으로부터" 로마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이 없는 동안 교황의 직무를 대행한다 이 일을 맡고 있는 동안 그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의 여러 가지 분쟁에 휩쓸리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제국 의회에 참석하여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있던 터키인에 대항하는 십자군 파병 준비에도 관여한다. 프로이센에서는 분별없이 폴란드 왕과 전쟁을 하고 있는 독일 기사단의 싸움을 평정하여 질서를 바로잡아 놓는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100년 전쟁도 교황의 전권 위임자로 중재했다 물론 두드러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는 데 힘을 쏟았다. 개혁의 일환으로 추도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 후 그는 십자군 원정 전함의 출범을 재촉하기 위해 서둘러 가는 도상에서 1464년 6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빈콜리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그의 영혼만은 고향 쿠스에 잠들었다. 앞에서 썼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는 정신없는 교회의 일과 외교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랄 만한 사실이다. 더욱이 그의 글들을 읽노라면 한결같이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평온함 속에서 씌어진 듯해 경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가 쓴 책의 숫자 역시 대단하다. 앞에서 언급한 책 외에 몇몇 책 제목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혜의 사냥에 대하여), (지혜에 관한 소견), (정신에 관한 소견), (신을 향한 열망), (관조의 절정에 관하여), (근원에 대하여), (은닉된 신에 관하여), (믿음에 관하여) 등이다.
니콜라우스의 사유의 내용은 그가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귀향길에 체득했던 발견에 의해 규정된다. 그는 여기서 신에 대한 사고를 무한함으로 파악했고 그래서 그에게는 무한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대두된다. 그는 이미 수학의 분야도 탐구했다. 니콜라우스는 미적분을 연구하였는데, 이 미적분은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비로소 완전히 정리된다. 니콜라우스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람으로서 그의 연구는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에서 우세하였던 질적인 규정에 치우치는 경향에 반해 그는 이미 측량과 계량의 근세적인 방법을 보급시킨다. 그는 확신에 가득 차 지구가 돈다는 혁신적인 이론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수학과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견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니다. 두 학문은 다만 그의 관심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반면에 니콜라우스는 철학적 신학의 문제를-이것은 당시 철학의 중심 분과였다-그에 앞선 어떤 사람도 한 적이 없는 그러한 방법으로 심화시킨다 그는 단 하나의 유일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즉 무한자인 신은 무엇이며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 가는 것을 경험한다. 어느 순간 신의 본질에 대해 무엇인가를 파악한 듯싶다가도 그것은 다시 파악 불가능의 늪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우스는 항상 새롭게 신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바로 여기에 이 사상가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신을 분명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니콜라우스가 신을 "절대적인 무한성"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할 때 드러난다 무한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 개념이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경우 절대적인 무한성과 나란히 독립적인 유한성의 영역이 존립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경우가 가능하다면 그때는 무한성 자체가 제한되고 유한화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제 분명해지는 것은, 무한성을 그 순수한 대립이 없음에서 고찰할 때, 유한한 사고에는 "접근하기 어렵고 파악하기 어렵고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통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우스가 신을 "절대적인 단일성"으로 부를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도 또한 단일성은 어떤 그 자체로 존립하는 유한한 다수성에 대립해 있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됨이 적용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절대적 단일성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모든 비교 가능성을 벗어나 신을 "지칭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말로 나타낼 수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단일성으로서의 신의 개념도 역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된다.
적절한 신의 개념을 발견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신이 절대적인 무한성으로 또는 절대적인 단일성으로 파악될 경우 신은 자기 옆에 어떠한 유한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건간에 그러한 유한한 것이 대립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니콜라우스는 계속되는 사유의 시도 끝에 신을 "모든 대립의 소멸"로 파악한다. 이렇게 신을 생각할 경우 유한함은 실제로 무한함 안에서 폐기되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니콜라우스는 "신은 모순적인 것의 붕괴 가운데서도 존립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니콜라우스는 신을 "그것을 넘어서서는 더 큰 것이 있을 수 없는 것" 즉 "절대적 크기"로 파악하려 한다. 이로써 신은 유한한 크기와의 어떠한 관계에서도 벗어난다. 왜냐하면 제한된 것에는 증가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대적 크기에서는 더 이상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해된 신은 여전히 하나의 대립의 관계, 즉 절대적인 최소의 것과의 대립의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이 대립 역시 참된 신의 개념 안에서는 지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니콜라우스는 신이 가장 큰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장 작은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일관성있게 강조한다.
그렇지만 가장 큰 것이며 동시에 가장 작은 것으로 사유된 신의 개념은 여전히 정태적으로 사유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아마도 니콜라우스가 그러한 신의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신의 본질에 대한 명칭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새로운 명칭 안에는 무한한 창조력의 계기, 즉 가능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가능은 단순한 가능성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은 그가 무엇일 수 있는 바 바로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는 이 관련을 좀 대단한 표현 방식인 "가능-있음"이라고 해보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파악된 신은 모든 실재성을 자기 안에 포용한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것은 "실재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가능-있음의 실재성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능-있음이 유한하게 되어 가는 것과 맺는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칫 잘못하면 니콜라우스가 신의 가능과 세속적 가능을 같은 차원에 놓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제 신을 "다름이 배제된 바로 그것"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개개의 유한한 존재자는 모두 항상 그 자신과 맞서 있는 어떤 다른 것을 대면하고 있고, 이 다른 것에 대해 그 자신 역시 하나의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에게는 해당되지도 않고 해당될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다름이 배제된 바로 그것으로서의 신은 모든 유한한 것에서 분리된다. 니콜라우스는 이 개념에 대해 그것은 "지칭될 수 없는 신의 개념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신기한 수수께끼처럼 찾는 사람에게 빛을 발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시금 니콜라우스에게는 신을 다름이 배제된 바로 그것이라 지칭하는 것도 신의 본질 안에서의 정태적인 계기를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에 있어 역동적인 계기, 즉 가능이 더 강력한 비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능-있음에서처럼 신은 가능이며 동시에 있음이라는 관점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콜라우스에게 이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순수한 가능의 개념이다. 신은 "가능 그 자체"이다. 니콜라우스는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에게 분명하고 더 참되고 더 쉽게 지칭할 수 있는 어떤 이름이 주어질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 그는 이로써 신에 관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신의 개념도 다른 개념과 마찬가지로 접근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신을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모든 시도에서 니콜라우스는 세계를 거의 완전히 시야에서 놓쳐 버린다. 비록 그가 항상 모든 실재성은 신의 관점 아래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든 유한한 것의 유래는 무한한 근원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신이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떠나 보내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신은 모든 실재적인 것을 그 자신 안에 "포용하고 있다." 세계는 단순히 신의 "전개"이며,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 신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신 안에 있다"는 것이 통용된다.
만일 니콜라우스가 신존재에 대해 그렇게 많은 규정을 하고 있다면 이 모든 규정이 결국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되어 버리기는 하지만-그에게 있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그렇다면 신을 인식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애당초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지성의 도움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대립의 차원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항상 하나를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해 놓는다. 그러나 신은 모든 대립과 분리를 넘어서 있다. 지성보다는 오히려 이성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니콜라우스의 이해에 따르면, 이성은 대립을 바로 그 자신의 그때마다의 단일성 속에서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 역시 신을 항상 인간의 관점 아래에서 바라볼 뿐 신이 그 자신 안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지성과 이성이 전형적인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던, 그것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신은 유한한 인식 안에서는 도대체 파악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바 그 모든 것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파악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신과 비슷하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이제 니콜라우스의 사유는 대담하게 전개된다. 우리가 신을 앎 속에서 파악할 수 없다면 아마도 무지 속에서는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을 보기를 원한다면 이성은 무지의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우스에게 있어서 무지란 절망하여 앎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에 대한 물음에서 무지 그 자체를 분명하게 움켜쥐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지는 "아는 무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는 신에게로 가까이 가는 정당한 방식이다. "파악할 수 없는 신에게 우리는 오직 이 무지의 지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니콜라우스의 철학적 신학은 "부정 신학"이 된다. 이 부정 신학은 철학의 한 분과로서 이미 니콜라우스 이전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부정 신학의 본질적 특징은 그것이 신에 관해서는 오직 부정하는 진술로만 말할 것을 허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유한한 실재의 존재 규정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과 관련지어서는 부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정에 의해서 신의 존재까지도 부정적 술어의 형태를 띤다. 신은 결국에 가서는 무와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무한한 신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은 어떤 것에 가까워진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에 대해서는 "그가 존재한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통용되지 않는다 이 역설은 모든 유한한 것과 신과의 무한한 간격을 끝까지 생각해 보려고 한 철학적 신학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신이 전혀 파악될 수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슨 권한으로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직면해서 니콜라우스가 신에 대한 인식을 앎의 형태가 아닌-무지의 지의 형태도 아닌-다른 영역으로 이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은 신을 "동경"하면서 그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일자를 향한 끊임없는 동경"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동경 속에 어떤 방식으로건 동경의 대상 즉 신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동경도 신의 실재적인 파악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신을 향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여기에서도 신은 파악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다. 니콜라우스는 마침내 자신이 신비의 체험에로, 순수 관조에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신비의 체험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떠한 한계도, 모든 종말과 유한함도 초월하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모든 인식보다 더 앞서 있는 그것을 관조하는 그러한 정신적인 안목을 갖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신은 "어둠 속에서 보이고", 그것도 "파악할 수 없는 관조 속에서 순간적인 무아경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이 길도 결론적으로는 목적지로 이끌고 가지 못한다. 이때에도 신은 "어떠한 형태의 관조로도 보여질 수 없는 것"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이렇듯 어떤 방식으로든지-철학적 사유로든지 부정 신학으로든지 동경에서든지 신비의 관조에서든지-신을 파악하려는 니콜라우스의 그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만일 인간 측에서의 모든 능동적인 시도가 실패했다면, 단 하나 유일하게 남은 것은 신 측에서의 능동적인 관여이다. 신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신의 가장 고유한 계시로부터 생겨난다. "만일 숨어 있었던 신이 스스로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신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모든 인식과 관조 자체보다도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철학적 신학은 계시를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한다. 신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니콜라우스의 가장 극단적인 예고는 다음과 같다 "신은 그 모든 현자들의 눈에는 가려지고 숨겨져 있지만, 그가 은총을 하사하고 있는 가장 겸손한 자에게는 나타난다" 이렇듯 신에 대한 철학적 그 물음이 목표에까지 이끌고 가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은 니콜라우스가 그 물음을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보인 긴박감을 갖고 제기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철학의 분야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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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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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전통
골다 메어가 이스라엘의 수상으로 있었을 때, 인도의 수상인 인디라 간디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유적들을 관람한 후 간디 수상은 유태인 집회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좋고말고요." 이스라엘 수상이 대답했다. 몇 주일이 지나 간디 수상이 각료들 앞에 섰을 때, 그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이스라엘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간디 수상이 대답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유태인 집회에서는, 남자들이 앞에서 기도하고 수상은 뒤의 발코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었지요."
- 하나의 관습이 일단 정착되고 나면, 수상의 힘으로도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든다. 수상이라 할지라도 전통적인 관습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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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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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2장 선사시대이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2)
움집 건축
신석기인들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농토 근처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움집을 지었습니다. 땅을 둥글게 혹은 원형에 가까운 네모 모양으로 판 다음 그 위로 나무를 세우고 풀을 얹어 만든 집이지요, 중앙에는 화덕을 만들고 그 주변에 저장구덩을 만들었는데, 토기와 각종 도구들이 주로 이 부근에서 수습되었습니다. 출입구는 보통 한켠의 땅을 골라 계단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간혹 나무 사다리를 이용한 흔적도 발견되는데, 남향이 일반적입니다. 출입구 근처에 저장구덩을 만들어놓은 곳도 많습니다. 신석시시대의 주거지는 보통 강가나 바닷가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물과 싶은 관련 속에서 생활했음을 의미합니다. 농사를 짓고, 어렵을 하는 일 등이 우선적으로 그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는 흔히 패총이라고 부르는 조개더미가 많이 발견되는데, 그들이 한곳에 오랜 동안 거주하며 조개류를 많이 섭취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일종의 쓰레기장이지요. 강가나 바닷가는 모래 성분이 많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신석기인들은 다른 속보다는 수월하게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주로 쓰던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글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밑둥이 뾰족하거나 둥글기때문에 맨바닥에 그냥 세워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토기를 대체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아마도 토기의 밑둥을 땅에 묻어 세워놓은 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냥 땅바닥을 파고 음식물을 저장하기보다는 구멍에 토기를 끼워 세우고 그 안에 농산물을 담아놓은 것이 곤충.습기 등의 피해로부터 식량을 지키는 좋은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멍을 파는 일은 모래 성분의 흙바닥이기에 어렵진 않았을테지요. 그만큼 신석기시대의 뾰족밑토기는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우리에게 함축적으로 전해줍니다. 한편, 뾰족밑 토기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단하지 않은 그릇의 경우 억지로 바닥을 편평하게 만드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기벽을 한 곳을 모아 뾰족하게 처리하는 것이 그릇의 수명을 늘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농사를 지으면서 신석인들은 기후와 같은 자연의 섭리에 더 민감해졌을 것입니다. 특히 해의 소중함과 비의 필요성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겠지요.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생명이라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산이나 나무, 강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무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오늘날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터전 주변에 만들어졌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이 지내는 것이죠. 또 사람을 묻을 대에는 머리를 동쪽이나 동남쪽으로 두는 풍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아마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신석인들이 영혼의 불멸을 믿고 이었으며, 나아가 조상숭배의식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조상숭배의식은 혈연에 입각한 집단화를 수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무렵 씨족 혹은 부족 단위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신석기인들의 주거지가 취락을 이루었으며, 몇 개의 취락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씨족은 같은 조상을 모신 직계의 혈연집단이며, 부족은 혼인 등을 통해 씨족과 씨족이 결합해 공통의 언어와 신상을 지니며 나중에는 같은 조상을 숭배하게 되는 지연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상은 대부분 특정한 동식물과 연관되어 매우 미묘한 신앙 내지 관념을 형성시키는데, 이를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가령, 어떤 부족에서는 소나 말을 자기들의 조상과 연관시키고, 어떤 부족에서는 범이나 늑대를 수호신으로 믿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상, 신석기시대의 문화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추측에만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19~20세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아직도 원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가지의 씨족.부족사회를 조사한 결과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에 따른 것입니다. 비록 한계는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현존하는 다른 사회를 통해서 추정해본다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문화란 무엇인가? - 진화론
문화를 아주 단순하고 간략하게 정의히면, 어느 한 인간 집단의 생활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예술.법률.도덕.관습.상식 등이 모두 문화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문화는 공유되며, 학습되고, 축적되며, 변화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취락을 이루고 부족 사회를 형성시킨 신석시대는 문화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 동안 연구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인류학자들입니다. 그들 중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궁의 타일러를 비록해 19세기에 활동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문화는 진화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의 경우에는 '에니미즘 ->(주술) ->다신교->일신교'로 발전하며. 가족제도의 경우에는 '난혼->혈연가족->집단혼가족->대우혼가족->가부장제->단혼제'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진화론자들은 첫째, 모든 문화는 저차원->고차원, 단순->복잡, 불완전-> 완전으로 진화하며, 둘째, 단순.보편적 발전의 형태를 취하고, 셋째, 발전 속도에 차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종교.윤리 등 사상적인 분야에서도 발전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 그리고 문화가 지역.종족마다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등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당시 서구인들이 지녔던 편견과 자민족중심주의를 학문에 반영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서자,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 기원론(역사적 특수주의)이 제기되었습니다. 일종의 창조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은 문화그들은 문화는 인종이나 지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집단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성되고 역사과정에서 변화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이 일제시기의 우리 나날에 영향을 주어 일본 제국 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조시키고 표현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자적 기원론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서는 유용하지만, 문화의 복잡성과 유사성을 설명하고 효율적인 이론 틀을 세우는 데에는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파론
진화론의 대안으로 제기된 이론으로는 전파주의가 있습니다. 문화란 특수한 환경에서 단 1회 발생하며, 시간적으로 앞서고 질량면에서 우세한 문화가 사방으로 전파.차용되어 다른 지역의 문화를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농경'을 중시해 고대 문화의 기원을 이집트에서구하려는 견해가 제기되기고 했는데, 이에 동조한 사람들을 이집트 학파라고 합니다. 반면, 세계를 여러 개의 문화권으로 나누고, 문화권마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설정해 문화의 일방적 전파.차용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전파주의는 우리에게 국제적인 넓은 시야에서 문화를 이해할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그 기여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현상 배후의 시대...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문화가 전파될 때 왜 모두 수용되지 못하고 거절당하거나 변형되는 것들이 생기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이 궁색하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모양이지만 지역에 따라 기능과 의미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전파론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또모든 문화가 중심부에서만 발생한다는 시각은 인간의 문화창조 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각을 문화사대 주의를 유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적 시각을 문화에 적용한 결과하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능주의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기능주의에 입각한 해석도 나왔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회제도와 문화요소는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각기 적절히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능주의를 제창한 말리노프스키는 개인의 심리적 욕구를 중시해, "문화란 사회구성원인 개개인의 심리와 생리적 욕수를 충족시키고 그 결과가 분배된 뒤에는 상호간 교환을 거켜 소비가 이우러지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각종 조직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설명이지만,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문화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변화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능주의가 시간이라는 요소를 경시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문화요소의 복합적 기능에 대한 고려가 미흡하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물론 구조기능주의라 하여 이에 대한 보완적 성격이 강한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아직 의문점이 다 해소되었다는 말할 수 없습니다.
형사취수혼과 문화이론
이상, 인류학의 중요 이론을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만, 간략히 설명하는 바람에 이해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위의 3가지 이론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형사취수혼이라는 매우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 대해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강시의 고구려 사회가 적장자 상속 단계로 발전하기 전의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사회의 상속문화는 집단 상속에서 형제상속을 거쳐 부자 상속으로 발전했는데, 당시 고구려는 형이 자기 여자를 재산과 함께 동생에게 물려주었으니 형제상속 단계에 속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파주의적 입장에서는 북방사회 문화권의 소산으로 이해합니다. 중국측의 고대 기록에 따르면, 형사취수혼과 같은 관습이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여.고구려.흉노.선비 등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던 북방민족 사이에는 이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흉노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과 생모를 제외한 나머지 첩들을 모두 자시 여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형태와 모양만 다를 뿐, 여자를 재산으로 인식하고 상속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주의적 입장에서는 자기 집단의 인적...물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합니다. 즉 목축 사회의 경우, 남편이 죽고 나면 부인이 자녀들과 재산을 이끌고 자기의 친정집단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의 집단은 대단한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망인에게 새 남편을 제공함으로써 집단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정을 모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 이론 모두 그럴듯합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직도 갈증이 해소되진 않았지요? 왜 그런지는 여러분 스스로 고민하면서 직접 찾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4) 권력과 약탈 - 국가의 탄생
청동기의 사용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만들면서 불을 다루는 기술을 향상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700~800도에 이르는 고열을 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우연찮게도 청동이라는 매우 귀중한 금속을 얻을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청동은 구리에 비소라든가 주석, 아연과 샅은 이물질이 섞여 더 단단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지중해 해안에서는 서기전 3500년경에 이미 청동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서기전 1000년경에야 비로소 청동기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물론 이 연대는 개략적인 추정치에 불과하므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만주와 그 인근지역을 포함해 우리의 청동기시대가 서기전 15세기까지 소급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라고는 하지만 모든 도구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아닙니다. 각종 농기구와 공구는 여전히 석기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돌괭이, 돌삽, 반달 모양 돌칼, 돌도끼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기입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에 한정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청동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청동이 단단하지도 않아서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일에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청동도끼라든가 낫, 칼 등은 공구가 아닌 살상용 무기로 보아야 합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그것을 계승한 세형동검, 동모.동과 그리고 동경.동령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무기류가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이 시기에는 크고 작은 전투.전쟁이 집단간에 빈번히 발생했던 모양입니다. 집단간의 전쟁은 승리와 패배, 우위와 열등, 지배와 피지배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선민사상은 바로 그러한 상황의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청동기시대에도 토기는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의 대표적 토기는 민무늬토기인데, 신석기시대의 토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더 단단하며, 그릇의 두께도 얇습니다. 그릇의 모양은 매우 다양하지만 밑바닥은 편평하고, 색깔은 적갈색인 것이 많습니다.
지석묘와 취락
제작 기술이 향상되고, 품목이 늘었다는 것은 사회와 문화가 그만큼 복잡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서 청동기시대로 들어서 농업과 수공업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유적의 발굴을 통해 알려졌는데, 청동기 제작지가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전문 집단이 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업의 분화, 곧 전문직의 출현은 소유의 격차를 유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간 신분의 차별화를 유도합니다. 계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계급은 권력의 기반하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생전에 누리는 것이지만 죽은 뒤에도 과시할 수 있습니다. 무덤을 통해서이지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는 지석묘와 석관묘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고인돌이라고도 하는 지석묘는 권력을 지닌 지배층의 무덤으로 많이 사용된 듯합니다. 지석묘의 형태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일괄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통 4개의 지석과 1개의 개석으로 조성된 북방식(탁자식) 지석묘의 경우 돌의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개평현 허가둔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개석의 무게사 무려 70톤에 달하며, 길이는 8.4m, 폭은 5.6m에 달하는 대형입니다. 이런 지석묘를 만들려면 적어도 수백 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묻기 위해서 말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조.피.콩.수수.보리.벼와 같은 곡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돼지.소.말 등을 가축화한 흔적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농업의 발달은 남성의 역할을 증대시켜 여성 및 모계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내지 부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계.모계사회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더 필요하며, 또 신석기시대를 모계사회, 청동기시대를 부계사회로 일반화시키는 것도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더 싶이 연구해 밝혀내양 할 부분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주로 야트막한 구릉에 취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근에는 하천이 있어 식수와 농업용수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취락을 둘러싸고 목책이나 호를 조성해놓은 곳도 있습니다. 아마도 맹수 혹은 다른 집단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취락의 구조를 살펴보면, 개인의 주거공간 외에도 대형 창고와 공동작업장 그리고 집회용 공공건물로 판단되는 대형 건물들이 취락의 중앙부나 한쪽에 지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마다 각기 다른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해당 유물이 그 건물의 성격을 대변하기 때문이겠지요.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평면 형태가 일반적을 원형이었던 데 반해 청동기시대에는 장방형이 일반적이었습지다. 화덕이 한쪽 별 근처로 물러나고, 저장구덩도 한쪽에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도 달라진 풍경입니다. 저장할 물건이 많아서인지 아예 부속건물을 만들어 딸린 방 혹은 저장공간으로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수 목적의 대형 주거지를 제회하고 대부분의 주거지는 대략 5~6명 정도의 인원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기본적으로 핵가족 내지 직계가족의 생활형태를 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가조직의 탄생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청동기시대의 특징은 권력과 계급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국가조직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국가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그리고 연구자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릅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국가는 모두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되거나, 신을 대신한 영웅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국가도 인간 역사의 진전에 따른 자연적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그러한 인식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계급국가론입니다. 원시공산체사회가 기술.문화의 발전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로 발전하게 되면 소유의 격차로 인해 평등한 인간관계가 깨어지면서 계층내지 계급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불평등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고 그 관계를 조직화한 것이 바로 국가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란 사회...경제적 우위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서,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분열되었을 때 출현하는 일종의 권력결집체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집단간의 전쟁과 그를 통한 정복이 국각조직을 형성 시켰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른다 정복국가론입니다. 이웃 집단과의 약탈전쟁이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성립시키게 되고, 그것이 곧 계층화를 초래해 국가 형성의 요인이 되었다는 이론이지요, 그러나 정복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복집단 내부의 사회구조라든가 정복활동의 원인과 동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계급국가론과의 연계성에서 정복국가론을 이해할 때 국가의 형성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하튼 국가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영역과 조직(관료...군대), 제도(법령), 수취체계(조세) 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꼭 필요한 법입니다. 청동기시대 문자 출현이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역사현상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점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아직 이 시기에 독자적인 문자를 창안해 사용한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중국의 한자를 차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신 당시의 자연환경과 자신들의 생활상 그리고 각종 기하학 무늬를 마치 낙서하듯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 특히 고령군 양전동과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가 유명한데, 아마도 수렵.어렵.농경의 무난함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철기의 사용
철기를 처음사용한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히타이트 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늦어어 서기전 1000년경에는 이미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보다 늦어 서기전 300년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서력기원 이전에는 세형동검과 같은 청동기를 여전히 사용해 온전한 철기시대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서기전 300년 사이를 보통 초기 철기시대라고 합니다. 철기 제작은 그만큼 불을 사용한 기술이 발전했음을 의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동기와 마찬가지로 초기에 제작된 철기도 그리 단단한 것은 못되어서 사용하는 데 제한이 따랐습니다. 가령, 쇠도끼의 경우나중에 단조철부가 제작되기까지 거푸집을 이용해 만든 주조철부로는 큼지막한 나무를 베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쇠도끼는 우선적으로 무기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철기 제작은 1,000도가 없는 고열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청동을 만들 대보다 어려운 일입니다만, 재료를 구하기가 훨씬 쉬워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종래 석기를 사용했던 농경 부분에서는 땅을 더 깊고 넓게 파면서도 힘은 덜 들게 하는 철제 농기구를 이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인력으로 더 많은 땅을 경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연그럽게 생산력이 상승했습니다 생산력의 상승을 통해 얻은 잉영생산물이 군량미로 이요되는 경우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장기간의 전쟁이나 원거리 정복을 가능케 했으며, 그를 통해 국가 형성과 통합...발전이 더욱 촉진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대규모 고대국가의 출현은 모두 철기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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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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難兄難弟(난형난제) 難(어려울 난) 兄(맏 형) 難(어려울 난) 弟(아우 제)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동한(東漢)시기, 영천(潁川)의 허(許)지방에 진식(陳寔)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그는 생활이 검소하여 집안에 하인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있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기(紀)이고 자(字)는 원방(元方)이었으며, 작은 아들은 이름이 담(湛)이고 자(字)는 계방(季方)이었다. 이들 또한 모두 명망이 드높은 인물들이었다. 원방에게는 장문(長文)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계방에게는 충(忠)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각각 자기의 아버지의 공적을 다투었는데, 끝내 해결할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묻기로 하였다. 진식은 원방은 형이 되기 어렵고, 계방은 동생이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 라고 대답하였다. 두 손자는 이 말을 듣고 모두 만족하여 물러났다. 難兄難弟 란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서로 엇비슷하여 우열을 분간하기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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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군자(梁上君子)"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진태구(陳太丘)가 낭능후(郎陵候)를 지낸 순숙(筍淑)의 집을 아들 진기(陳紀 : 元方)와 진심(陳諶 : 季方), 진군(陳群 : 長方)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약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숙은 어린 막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부름을 시켰다. 이 때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덕성(德星)이 동쪽 순숙의 집에 다 모여 있다."라고 했다. 한번은, 진식(陳太丘)이 친구와 어디를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워낙 늦어 먼저 출발했는데 늦게 온 친구가 진식을 욕하자 그 때 진기(陳紀 : 元方)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서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시고는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제 오셨으니 손님과 제 아버지 중 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진식(陳太丘)을 찾아왔던 사람은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내 사과하려 했으나 어린 진기(陳紀 : 元方)는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또 한번은 사촌간인 진기(陳紀 : 元方)의 아들과 진심(陳諶 : 季方)의 아들 사이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인 진식(陳太丘)에게 와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진식(陳太丘)은, "원방(元方)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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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한 애처가의 발명품
1876년의 필라델피아 의학회에서 조셉 리스터 경의 병원균설에 감명을 받은 미국의 의료 관계자는 조셉 로렌스 의사 한 사람이 아니었다. 브루클린에서 온 31세의 약제사 로버트 존슨도 저명한 영국인 외과 의사 리스터의 강의를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 리스터는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으로 만든 재료가 외과용으로 쓰이는 것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리스터는 수술할 때 사용하는 붕대는 모조리 석탄산 수용액에 담가 소독하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약제 회사 시밸리 앤 존슨의 공동 경영자였던 존슨은 미국의 병원에서 톱밥이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불결한 기구가 사용되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토목 기사인 제임스와 변호사인 에드워드 형제에게, 리스터가 강의 때 이야기한 이론에 따라 개별 포장한 외과용 멸균 붕대를 만들어 판매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참여해 달라고 설득했다. 1880년대 중반 이들 형제는 존슨 앤 존슨 회사를 설립하여 면과 거즈로 만든 타원형 붕대를 제조했다. 붕대 하나마다 세균을 막는 패키지에 밀폐하여 멀리 떨어진 병원이나 전쟁터의 의사에게도 위생적으로 운반되도록 한 것이다. 존슨 형제는 보건 위생업계에서 점점 성공을 거두었다. 1893년 존슨 형제는 미국의 어머니들을 겨누어 산뜻한 향내가 나는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를 팔기 위해, 조산부들이 사용할 출산용품이 한 벌 든 포장에 베이비 파우더를 서비스 상품으로 넣었다. 더불어 세계의 모든 가정 약장에 등장하게 될 멸균 제품이 곧이어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1920년에 존슨즈 앤 존슨의 사장인 제임스 존슨은 알 딕슨이라는 사원이 조그만 붕대를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구매과에서 면의 매입을 담당하고 있던 딕슨은 그 무렵 막 신혼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딕슨의 신부는 성격이 덜렁거려 늘상 부엌에서 칼에 베이고 불에 데이곤 했다. 그러나 남편 회사의 커다란 외과용 붕대를 사용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알 딕슨은 밴드에이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쉽게 붙일 수 있고 탄탄해서 무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붕대를 연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딕슨은 아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자기 회사의 멸균된 면과 거즈를 작게 잘라 반창고 중앙에 얹어 사용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 귀찮아진 딕슨은 이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두고 반창고의 달라붙는 부분에 일단 크리놀린의 뻣뻣한 천을 붙여 두는 것을 생각해 냈다. 제임스 존슨은 알 딕슨 사원이 두 장의 크리놀린 천을 벗겨 손쉽게 자신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는 것을 보았을 때 회사에 새로운 구급용품이 생긴 것을 알았다. 밴드에이드라는 이름은 이윽고 구급 반창고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는데, 존슨 앤 존슨 회사의 뉴브런즈윅 공장의 관리자인 W. 존슨 케논이 이 이름의 발안자였다. 그리고 최초의 접착 붕대 구급 반창고는 무균 상태에서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그러나 손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매상이 대단하지는 않았다. 구급 반창고 밴드에이드의 가장 강력한 선전맨 중에 그 회사의 연구부장 프레드릭 킬머(시인 조이스 킬머의 부친)박사가 있었다. 킬머는 1890년대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의 개발과 마케팅의 책임자였으며 1920년대에는 밴드에이드의 판매 촉진 캠페인에 참가했다.
그는 밴드에이드가 베인 상처나 화상의 감염증을 예방하고 치료를 빠르게 한다는 사실을 의학적이고도 일반적인 기사로 써서 널리 알렸다. 회사가 한 가장 교묘한 선전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무료 밴드에이드를 전국의 보이스카웃단을 비롯해 지방의 푸줏간까지 무제한으로 배달한 것이었다. 밴드에이드의 인기가 치솟았다. 1924년에는 기계 생산으로 길이 약 7.5센티미터, 폭 약 2센티미터의 밴드에이드가 제조되고 있었다. 4년 뒤에는 통풍을 좋게 하여 치료를 더욱 빠르게 하기 위해 거즈 패드에 통기 구멍을 낸 밴드에이드가 미국에서 발매되었다. 밴드에이드의 발명자인 알 딕슨은 그 뒤에도 존슨 앤 존슨에 오랫동안 근무하여 부사장이 되어 중역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오늘날까지 가정집 약장에 반드시 한 개쯤은 들어 있는 소형 반창고는 이렇듯 한 애처가의 고안품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회사에서 딕슨의 발명품에 대해 1921년에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한 후 세상 사람들이 1천억 개 이상의 밴드에이드를 사용했다고 어림잡고 있다. 이 밴드에이드와 함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의약품이 소독제이다. 베인 상처를 깨끗이 하는데 사용하는 약 알코올성의 수렴제 위치해젤(wych hazel)은 위치해젤 나무, 즉 미국의 조록나무 잎과 나무껍질로 만든다. 열을 가하면 깍지가 터지는 이 키 작은 나무는 앵글로색슨 시대에 실용적인 면과 미신적인 면에서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뭇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드러나 마치 나무가 죽은 듯이 보이는 만추가 되고 나서야 노란 꽃이 피므로 영국 주민들은 위치해젤 나무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고승이 작은 위치해젤 가지를 들고 있으면 그 손은 군중 속에서 범죄인을 지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낭창낭창하고 작은 위치해젤 가지가 더욱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우물을 파기 위해 지하수 장소를 찾는 점술봉으로 삼은 것이었다. 실제 나무 이름에 있는 '위치'라는 단어는 가지가 낭창낭창한 나무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wice'에서 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위치해젤 나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일로 미루어 최초로 이 나무에서 약을 만든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좀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인디언 부족이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 1620년 메이플라워 호로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의 일단. 총 102명)에게 위치해젤 나무껍질로 통증이나 타박상, 찰과상을 완화시켜주는 로션제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 뒤 2세기 동안 사람들은 가정에서 자신들이 쓸 위치해젤을 만들고 있었다. 이 로션제는 미국에서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소독제, 세안제, 수렴제, 국소용 진통제, 냄새 제거, 화장수의 원료, 그리고 위치해젤의 알코올 성분이 재빨리 증발하여 땀을 흘리고 식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므로 더운 날의 청량액(오늘날의 스플래시와 같은 것)으로도 사용했다.
1866년에는 뉴잉글랜드의 교사 토마스 뉴튼 디킨슨은 이것을 시판하면 돈벌이가 될 만큼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그는 질이 좋은 미국산 위치해젤 나무가 자라는 들판이 가깝게 있는 코네티컷 주 어섹스의 코네티컷 강 연변에 제조소를 차렸다. 1860년대에 디킨슨의 위치해젤은 작은 나무통에 담겨 약국에 보내졌으며 약국은 그것을 병에 넣어 손님에게 팔았다. 딕슨의 위치해젤 처방이 무척 호평을 받았으므로 오늘날까지 기본적인 제조법은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적어도 300년 동안 약장에 넣어온 약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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