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860호
2012.5.4 (음 3.14) / 발송인: |
|
(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아무리 높은 왕좌에 앉아 있을망정, 사람은 궁둥이로 앉게 마련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유머. - 타키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삼겹살의 나이
강원도 양양에 다녀왔다. ‘매체언어의 중립성’을 논의하는 모임이 있어서였다. 토론회 짬짬이 양양군의 이모저모를 훑어보다가 ‘가축사육 현황’에 눈길이 멈췄다. 지난주 ‘뭉치사태 속에서 아롱아롱하게 보이는 아롱사태’ 따위의 소 부위별 이름을 다룬 뒤여서 그랬을 것이다. 군내 가축 수를 따져보니 돼지가 으뜸이었다. 찾는 이가 많으니 마릿수도 많을 것이다. 돼지고기를 쇠고기 부위에 견주어 짚어보니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등심과 안심, 갈비, 사태 따위는 쇠고기와 같지만 다른 이름도 꽤 있었고, 뜻밖에 역사가 짧은 것도 있었다.
뜬금없이 ‘삼겹살의 나이’를 물었던 이가 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삼겹살이란 표현을 듣지 못했다’는 게 그가 품은 의문의 시작이었다. 1970년대 이전에 출간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삼겹살’은 등장하지 않는다.(1963년판 <동아국어대사전>) 신문에는 1959년에 처음 나오고(<경향신문> 1월20일치 4면) ‘삼겹살’ 이전에 ‘세겹살’이 나온다.(<동아일보> 1934년 11월3일치 4면) 살과 지방 부분이 세 번 겹쳐 있어 붙여진 이름인 ‘삼겹살’이 ‘한겹, 두겹…’에 어긋나는 조어여서 그럴 것이다. ‘세겹-’이 ‘삼겹-’이 된 까닭은 매출을 늘리려는 상인들이 ‘몸에 좋은 삼(蔘)’을 ‘세겹살’의 삼(三)과 관련지어 붙인 이름이라는 설이 있지만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돼지의 가로막(횡격막) 부위에 있어서 ‘가로막이살’로 불리다 새 이름이 붙은 ‘갈매기살’은 1995년부터 지면에서 발견되고, 목덜미 부위의 살을 이르는 ‘항정살’은 2000년 이후에 신문기사에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돼지)목살’이었으니, ‘목덜미 항(項)’을 끌어다 쓴 말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보이기 시작한 ‘가브리살’은 ‘뒤집어쓰다’는 뜻인 일본어 ‘가부루’(かぶる)에서 비롯한 말이다. 내력이 마뜩잖은 ‘가브리살’은 등허리 부위의 껍질 바로 안쪽에 붙은 살의 뜻을 살려 ‘등겹살’이라 하면 어떨까 싶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종군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정부의 종군위안부 강제 동원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26일 압도적인 표 차로 미 하원 외교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한다. 얼마 전 일본 의원들은 종군위안부들이 허가를 받고 매춘행위를 했으며 이들 대다수의 수입은 일본군 장교나 심지어 장군보다 많았다고 주장하는 광고를 워싱턴 포스트에 게재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이처럼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종군위안부'라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종군(從軍)'이란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가거나, 전투 목적 이외의 일로 군대를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을 뜻한다. '자발적으로 가다'는 의미가 강하다. "세계 최초의 종군기자는 런던 타임스의 W H 러셀로, 크림전쟁에 종군해 일선의 참상을 보도했다"처럼 쓰인다.
'종군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 다닌 위안부라는 의미로, 강제로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감추려고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현재 공식적인 용어로는 한국.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유엔 등 국제기구를 포함한 영어권에서는 '일본에 의한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가 쓰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오랫동안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왔으나 이 역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신대'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시대 노동인력으로 징발됐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말바루기] 입천장이 '데이다'
뼛속까지 시원한 것을 찾게 되는 여름. 그러나 삼계탕 같은 뜨거운 음식을 즐겨 먹는 이도 많다. 흐르는 땀을 닦는 것으론 모자라 입천장까지 데어 가며 먹는 모습이 미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양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 쉬운 여름엔 속을 덥혀 주는 뜨끈뜨끈한 음식이 오히려 좋다고 한다.
불이나 뜨거운 기운으로 살이 상하는 것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을 '데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데이다'로 알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펄펄 끓는 찌개를 떠먹다가 혀가 데였어" "입천장이 데이는 줄도 모르고 뚝배기 한 그릇을 다 비웠다"와 같이 쓰고 있지만 '데었어' '데는'으로 고쳐야 맞다.
'데다'는 "남자한테 데일 만큼 데였어"처럼 '몹시 놀라거나 심한 괴로움을 겪어 진저리 나다'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이 역시 '데이다'를 기본형으로 알고 활용해서는 안 된다. "남자한테 델 만큼 데었어"가 올바른 표현이다.
예전에 '데이다'는 '데우다' '덥히다'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식탁 위의 된장찌개를 데여 먹어라" "인삼은 몸을 데여 피를 잘 돌게 한다" "장마로 눅눅해진 방을 데이려고 군불을 지폈다"와 같이 사용하면 안 된다. '데워' '덥혀' '덥히려고'로 바로잡아야 한다.
주로 찬 액체나 식은 음식에 열을 가해 뜨겁게 하는 것은 '데우다', 방이나 몸의 온도를 높여 따뜻하게 하는 것은 '덥히다'를 써서 표현한다.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 주는 감동적인 실화다"처럼 '덥히다'는 마음.감정 등을 푸근하고 흐뭇하게 하다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
|
청마와 춘수 - 강희근
청마와 춘수는 많이 다르다 한 사람이 바다라면 한 사람은 뭍이다
청마가 살았던 집 그 집은 약봉지 냄새가 났다 춘수가 살았던 집 그 집은 꽃잎 버는 냄새가 났다
청마는 시를 쓸 때 약 달이듯이 쓰고 춘수는 시를 쓸 때 꽃구경 가듯이 쓴다
그래서 청마의 시에는 생명이 쿨룩거리는 소리 나고 춘수의 시에는 꽃에다 이름 붙이는 소리 난다
아, 청마가 결혼식을 올릴 때 올리며 인생을 시작할 때 유치원생 춘수가 화동花童이 되어 꽃을 바친 것 통영에 가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아는 사람은 말할 때 시인이 된다 꽃다발이 된다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나 또한 설뫼되어...... - 서공식
물소리 깊어져서 잔설을 벗겨내고 소소리 바람불어 가슴을 헤쳐대면 얼레지 새순을 틔워 설뫼는 잠을 깬다.
한걸음 들어서서 마음을 기울일 때 등불 켠 금강초롱 천산의 길라잡이 뜬구름 따라 흐르는 까닭 없는 나를 본다.
능선을 타고 넘는 이내가 길어지면 아득한 임을 따라 가뭇없이 그리워라 노을빛 비낀 설뫼는 파도 되어 출렁이네.
|
|
문학나눔 → 동시 |
|
|
벌 - 이성인
벌을 선다. 아이들이 조용히 책을 읽는 국어 시간에 나는 내 짝과 함께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벌을 선다.
누가 맨 처음 그었을까 책상 한가운데 칼로 깊이 새겨 놓은 선.
모르고 넘어간 내 공책을 내 짝 철이가 밀쳐 버리고 철이의 책을 난 떨어뜨려 버리고 그러다가 선생님의 눈에 띄었지. 왜 그랬을까? 정말 바보처럼 왜 그랬을까? 내 책상도 아니고 네 책상도 아닌 우리들의 책상인데 그땐 왜 그랬을까?
아이들이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국어 시간에 내 짝과 나 둘이서 벌을 선다.
|
|
|
문학자료 → 수필 |
|
|
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9장 생활의 즐거움
9. 집과 실내장식에 대하여
<집>이라는 말은 모든 생활조건, 즉 가옥의 물질적인 환경 전부를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집을 고르는 데는 집의 내부가 어떤가 하는 것보다는 집안에서 바깥을 내다본 전망이 어떠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집이 시골에 있다는 것과 그 주위의 경치가 중요하다. 자기가 소유하는 손바닥만한 땅을 굉장히 자랑하고 있는 상해의 부자들을 전에 나는 만나본 일이 있다. 그 땅 안에는 지름이 10피이트쯤 되는 연못이며, 개미가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3분쯤 밖에 걸릴 것 같지 않은 동산이 있는데, 그들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산기슭 오두막에 살면서 산과 개울과 호수를 자기네 정원으로 삼고 있는 것을 모른다. 양자를 비교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산 속에 세워진 집들이 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손바닥만한 땅을 자기의 소유지로 만들어 담을 둘러 치거나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집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산마루에 걸려 있는 흰 구름이며, 하늘을 나는 새, 폭포수, 새들의 노랫소리가 한데 어울려 이루어지는 자연의 교향악, 눈앞에 널리 펼쳐지는 모든 경치는 다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도시에 살고 있는 어떤 백만장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부자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늘을 나는 구름은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구름을 바라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어쩌다가 구름을 바라보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름은 푸른 산의 윤곽과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름을 바라보는 진짜 묘미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배경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러기에 중국인이 지니고 있는 집과 정원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마치 아름다운 함 속에 들어 있는 보석과도 같이 집 그 자체는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전원의 한 부분이며 게다가 조화를 이루는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본 관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이 간 모든 흔적은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하여 벽의 직선은 그 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로 가리거나 중단하거나 해야 한다. 거대한 벽돌처럼 네모 반듯한 집은 공장의 건물이라면 또 수긍이 간다. 능률을 첫째 목적으로 삼는 것이 공장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네모 반듯한 주택이라는 것은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집은 어떤 문인의 다음 글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대문 안에는 작은 길이 있다. 이 길은 구불구불해야 한다. 작은 길이 구부러지는 모퉁이에는 옥외용 울타리가 있다. 이 울타리는 아주 작아야 한다. 울타리 뒤에는 대지가 있다. 대지는 평평하여야 한다. 대지 양쪽의 조금 높은 곳에는 꽃이 피어 있다. 이 꽃들은 언제나 싱싱해야 한다. 꽃 너머에는 담장이 있다. 담장은 낮아야 한다. 담장 옆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반드시 노송이어야 한다. 소나무 밑둥에는 몇 개의 바위가 놓여 있다. 바위는 반드시 기암의 운치가 있어야 한다. 바위 너머에 정자가 있다. 정자는 간소한 느낌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정자 뒤에는 대나무가 드문드문 있어야 한다. 대밭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어야 한다. 집 곁에는 길이 있다. 길은 갈라져 있어야 한다. 몇 갈래의 길이 합치는 곳에 다리가 있다. 다리는 손님들이 건너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매력이 있어야 한다. 다릿목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나무들은 키가 커야 한다. 나무 그늘에는 풀이 있고 그 풀은 푸르고 싱싱해야 한다. 풀밭 위쪽에 도랑이 있다. 그 도랑은 그 폭이 좁아야 한다. 도랑 끝에는 샘이 있다. 샘물은 퐁퐁 솟아나와야 한다. 샘 위에는 산이 있다. 산에는 깊은 산 속과 같은 아취가 있어야 한다. 산기슭에 서원이 있다. 서원은 네모 반듯해야 한다. 서원 모퉁이에 채소밭이 있다. 채소밭은 아주 넓어야 한다. 채소밭에는 황새가 한 마리 있다. 황새는 춤추듯이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황새가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손님은 야비하게 굴어서는 안된다. 손님이 오면 술상이 나온다. 술은 절대로 거절해서 안 된다. 잔을 거듭하는 동안에 취기가 돈다. 취객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집의 매력은 그 집이 지니고 있는 개성에 달려 있다. 이입 옹은 그의 저서인 <한정우기> 속에서 집과 집안의 실내 장식에 대해 몇 장을 쓰고 있는데 그 머리말에서 친밀감과 개성이라는 두 점을 역설하고 있다. 나는 친밀감보다는 개성을 느낄 수 있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크고 여봐란 듯이 잘 꾸민 집이라 할지라도 주인이 기분 좋게 거처할 수 있는 특별실이 반드시 하나는 있어야 되며, 그 방은 대개 어김없이 좁고, 이렇다 할 꾸밈도 없고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어 친밀감과 따뜻함이 있는 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입 옹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은 옷을 입지 않고는 나다니지 못하는 것처럼 집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옷이 지닌 본뜻이지만 그것은 집에도 그대로 들어 맞는다. 지름이 몇자씩이나 되는 굵은 대들보를 건네고, 높이가 이삼 십 척이나 되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면 아주 위풍이 당당하지만, 본디 그러한 집은 여름철에는 좋지만 겨울철을 지내기에는 알맞지 않다. 관원이 사는 저택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누구나 몸서리를 치는 것은 공간이 너무나 넓기 때문이다. 마치 너무 커서 허리둘레에 딱 들러 붙지 않는 털외투를 입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낮은 벽을 둘러치고 겨우 무릎을 하나 들여 놓았을 만한 가난한 사람의 집은 검소한 생활의 미덕이 나타나 있어 집 주인은 그래도 좋겠지만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알맞지 않다. 가난한 선비가 거처하는 오두막집에 들어갔을 때 왜 그런지 모르게 거북하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 하겠다. 관원의 저택은 너무 높거나 으리으리하지 않는 게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집과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조화가 조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의 요령으로 풍경화에 그리는 집은 10척의 산을 그리면 나무는 1척이고 1촌의 말에 콩알 만한 인물을 그려야 서로 조화가 잡힌다는 공식이 있다. 10척 산 위에 이삼 척이나 되는 나무를 그리고, 1촌 높이로 그린 말안장이나 쌀알이나 좁쌀 만한 인물을 그리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다. 관원의 키가 9척이나 10척 쯤 된다면 이삼 십 척 높이의 저택에 사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건물이 높을수록 집안에 사는 사람은 키가 적어 보이고, 집이 넓을수록 몸집이 초라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저택을 조금 작게 하고 몸을 좀더 살찌게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입 옹이 그의 저서에서 자세히 설명한 가옥의 설계와 실내 장식에 대한 요점을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그가 다루고 있는 제목은 지붕이 있는 집, 창문, 간막이, 등잔, 탁자, 의자, 골동품, 장식장, 침대, 여행가방 등에 걸쳐 있다. 드물게 보는 독창적인 발명가여서 어떤 제목에 대해서도 반드시 참신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가 발명한 것 가운데 몇 가지는 이미 오늘날의 중국 전통의 일부가 되어 있다. 물론 그가 끼친 가장 현저한 공헌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개자원전>으로서 시장에 나온, 그가 고안한 서간전과 창문과 간막이의 새로운 안을 들 수 있다. 생활술에 관한 그의 저서는 아직 그다지 유명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여지고 있는 초보자용인 죽국화의 교본 <개자원화전>과 연결되며, 또한 그의 저서인 <십종목>을 통하여 언제나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실로 극작가, 음악가, 쾌락주의자, 의복 디자이너, 미용 전문가, 아마튜어 발명가 등을 한몸에 겸한 보기 드문 인재였었다. 그는 침대에 대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새 집으로 이사할 때마다 언제나 맨 먼저 찾아내어 자세히 조사해 보는 것은 침대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침대는 옛날부터 커어튼과 테두리간을 막는 커다란 장식장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작은 방을 이루고 있는 그런 설비였다. 주위에는 기둥이 있어서 책, 찻병, 구두, 양말 같은 것을 올려 놓거나 넣거나 하는 선반과 서랍이 기둥 주위에 달려 있다. 그는 침대에도 꽃병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방법은 폭이 한 자 이상, 높이는 고작해야 두세 치 밖에 되지 않는 얄팍한 나무 선반을 만들어 그것을 수를 놓은 커어튼 앞에 장치하는 일이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이 나무선반은 뜬 구름과 비슷한 느낌을 주도록 약간 주름을 잡아서 수를 놓은 비단천으로 둘러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무슨 꽃이든지 그 계절에 피는 꽃을 놓는 것인데, 때로는 <용뇌향>을 피우는 것도 좋을 것이고, 향내가 좋은 불수감이나 마르멜로 열매를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몸은 이미 사람의 몸은 아니다. 꽃 사이에서 춤을 추고, 꽃 속에서 잠을 자며, 꽃 속의 꿀을 빠는 나비인 것이다. 이미 사람이 아니라 낙원 속을 천천히 거닐며 그 곳에서 자고 깨는 신선인 것이다. 나는 일찌기 자면서 비몽사몽간에 매화꽃 향내를 맡은 적이 있다.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그 달콤한 향내는 마치 내 몸 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목과 이와 뺨에도 스며들었다. 날아갈 듯이 가벼워 마치 몸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잠이 깬 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이런 행복을 즐기고 있는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겠소. 이런 즐거운 생각만을 하고 있으니, 본디 하늘이 준 다른 즐거움을 죽여 버리고 말게 되지나 않겠소?> 그러자 아내는 대답한다. <우리가 언제나 가난하여 출세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당신의 말씀이 옳아요>
이입 옹이 이룩한 공적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창문에 대한 고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호방식 부채 모양의 창과 <매화창>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유람선 옆에 부채꼴 모양의 창을 낸다는 생각은 부채에 그림이나 글을 쓰기도 하고, 부채에 그린 그림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기도 하는 중국인의 습관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이입 옹의 생각은 부채꼴로 된 창문을 액판으로 하여 배 옆에 달아 두면 배 안에서 기슭의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도, 강둑 위를 거닐면서 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연이나 다회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도 중국 부채에 그려진 그림과 같은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눈은 영혼의 <창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본디, 창문이 지닌 뜻은 그곳에서 경치를 바라보자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문은 가장 좋은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또 가장 편리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이입 옹도 말하고 있듯이 바깥 경치에서 자연의 요소를 따다가 실내 장식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다.
탁자나 의자나 장식장 등에 대해서도 그 수많은 새로운 고안을 해냈다. 여기서는 다만 겨울에 쓰는 보온 의자, 즉 따뜻한 의자의 발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것은 방안이 적당히 따뜻하지 않을 경우에는 매우 편리하고 유익한 발명이라하겠다. 보온된 긴의자라는 것은 나무로 만든 긴의자에 높은 목제받침을 장치한 것으로 그 받침대는 높이가 두 세자, 주위에는 낮은 탁자 정도 높이의 똑바른 널빤지가 붙어 있다. 긴의자의 양쪽에도 두 장의 널빤지로 된 문이 달려 있어서 사람이 의자에 걸터 앉으면 그 문을 닫게 되어 있다. 이 널빤지로 만든 문은 받침대의 주위에 둘러쳐진 똑바른 널빤지와 함께 완전히 조립식 탁자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리하여 긴의자에 걸터 앉은 사람은 책상 후면에 둘러 싸이고 만다. 받침대에는 뜨거운 재와 연기가 나지 않는 잘핀 숯불을 넣는 서랍이 달려 있다. 긴의자는 걸터 앉아서 일을 하거나 피곤할 때는 옆으로 누울 수도 있게 되어 있다.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 나무랄 데 없는 이 일터를 유지하는 비용은 하루에 불과 네 덩어리의 숯-아침에 두 덩어리, 오후에 두 덩어리 넣는다-이상 더 필요가 없다고 그는 잘라 말하고 있다. 또한 여행할 때에는 두 개의 튼튼한 대나무 장대를 양쪽에 매어 고정시키면 이 긴의자는 보통 가마와 같이 쓸 수 있다는 것도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다리를 차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가지고 가는 음식이건 술이건 언제나 따뜻하게 해 둘 수 있다는 이익까지 있는 셈이다.
그는 또한 여름철에 쓸 수 있는 것으로는 서양식 욕조와 비슷한 벤치를 생각해 내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도기로 만든 욕조를 맞춰 벤치 안에 장치한 것으로 의자 등받이까지 흐르는 욕조에 물을 가득히 채워 자리를 차게 하려는 생각이다. 따뜻한 의자를 난의라고 하는데 반해서 이것은 양궤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회전할 수도 있고 접을 수도 있고 그 높이를 조절할 수도 있고 역전시킬 수도 있고 새 부분품과 같아 낄 수도 있는 침대니 소파니 이발용 의자 등을 발명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떼어낼 수 있는 조립식 테이블이나 골동대 따위는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발달되어 온 것으로 상당히 정교한 것이 만들어져 있다. <연궤>라고 불리는 이 조립식 테이블의 원리는 서양에서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나뭇조각 맞추기 놀이와 같은 미국 어린이들의 놀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뭇조각 맞추기 놀이라는 것은 빈틈없이 주워 맞추면 정방형이 되는 한 벌의 나뭇조각을 평평한 곳에 늘어 놓아 동물이나 사람이나 도구나 또는 가구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노는 놀이를 말한다. 여섯 개의 부분으로 된 <연궤>는 그 조립 방법 여하에 따라서 크고 작은 다른 정방형, 장방형, T자형 등 몇 가지 모양의 탁자가 되고 게다가 위쪽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로 향하게 하면 모두 40종의 배열이 가능하게 된다. 또 하나의 조립식으로 <접궤>라고 불리는 조립 테이블은 3각형의 부분과 대각선이 있는 점에서 연궤와 다르다. 즉 구성하는 부분이 복잡하기 때문에 완성된 것의 윤곽도 한층 더 여러 모양의 여러 종류가 되는 셈이다. 첫번째 연궤의 형은 대체로 크고 작게 어느 쪽으로나 만들 수 있는 식탁용, 골패 탁자용으로서 설계된 것이며 촉대를 놓는 장소가 흔히 탁자 한가운데 만들어져 있는 수가 많다. 두 번째 접궤의 형은 식탁, 골패 탁자, 화대, 골동대를 겸해서 설계된 것이다. 화대와 골동대는 보다 다종 다양한 변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접궤는 열 세 조각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립하기에 따라서는 정방형 테이블, 장방형 테이블, 다이야몬드형 테이블이 되며, 탁자의 표면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구멍을 만드는 것도 자유자재하여 색다른 모양으로 조립되며, 그것은 주부가 머리에 쓰기에 따라 무한해질 수가 있다.
중국인의 실내 장식의 이상은 간소함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관념으로 이룩된 것으로 생각된다. 잘 정돈된 방에는 틀림없이 몇 가지의 가구가 비치되어 있고 그것은 대개 마호가니제로서, 겉에는 단순한 선을 새기고, 매우 정성껏 닦아서 끝쪽은 흔히 둥그스름하게 한다. 마호가니제를 닦는 것은 손일이어서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윤이 나는 정도는 물건의 값이 나가는 정도를 뜻한다. 대개 서랍이 없는 긴 판자로 된 테이블을 벽쪽에 놓고 그 위에는 붉은 갈색의 큰 꽃병을 놓는다. 방안의 다른 구석에는 높이가 다른 마호가니의 꽃병받침이나 골동대가 한둘 또는 셋 쯤, 그리고 우툴두툴한 나무 뿌리로 다리를 만든 걸상이 두서넛 놓여 있는 정도일 것이다. 책장이나 골동품을 장식하는 장이 한편에 놓이고, 높이와 세로 폭이 다른 각 부분이 잇달아 죽 놓여 있어 이상하게도 현대적 효과를 보이고 있다. 벽에는 족자가 한두 폭 걸려 있다. 순수한 필력이 훌륭한 글씨거나 화필 자국보다 공백이 더 많은 족자다. 그 화면처럼 방은 <공령> 즉 <비었으되, 영동하고> 있어야 한다. 중국 가정 설계와 가장 뚜렷한 특색은 뜰을 깐 안 마당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수도원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며 평화와 고요와 안식의 상징이다.
|
|
|
문학자료 → 철학 |
|
|
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1. 에크하르트
신은 곧 신이 아니다 철학 그것은 남자들만의 특권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미 650년 전에 이 사실을 반박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다. 그는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라틴어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그가 소속해 있던 수도원은 그에게 수녀원에서도 강론하게 하였는데 그것도 독일어로 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때 자신의 신학적, 철학적 생각을 얌전한 수녀들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매우 풍부한 용어를 활용했다. 수녀들은 감격한 듯이 천진 난만한 시를 써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느 한 수녀는 임종의 침상에서, 그녀가 에크하르트에게서 중요한 자극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때 체험한 것이란 자신의 지성과 감성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매우 고귀하고 알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순전히 개인적인 사실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 기사 가문인 "호크하임 가에서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어린 나이로 에르푸르트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마도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와 쾰른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는 고향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낸 후 파리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1320년 그곳의 교수가 되었다. 바로 이 직함(Magister)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호칭이 유래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그는 새로 설립된 작센의 지방 교구-네덜란드에서 발트해 연안의 리블랑드까지 관할하는-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뵈멘의 주교 총대리 자리를 역임하며 뵈멘에 있는 여러 수도원을 개혁하는 과제를 맡게되었다. 그는 한번 더 파리 대학에 재직한 후에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수도원 소속 대학의 학장직을 맡았고, 마지막으로 쾰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는다. 그는 1327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라틴어로 된 학술 저서와 독일어 논문, 설교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공인된 교회와의 대립이었다. 교회는 한 사상가가 독자적인 사유의 길을 걷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어느 누군가 전통적인 궤도를 이탈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교회의 불신의 눈초리가 쏠리고, 결국 교회는 갖고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개입한다. 이 같은 일이 바로 에크하르트에게도 일어났다. 도미니크 수도원의 지도적인 인물을 종교 재판에 회부하려는 기막힌 사건이 발생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 재판을 주관해 온 바로 그 수도원의 원장을 종교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감히 에크하르트에게 즉시 접근하려 들지는 않았다 먼저 에크하르트 생각에 크게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생각을 말하고 다니는 평신도를 박해했다. 그들을 잘 타일러 개종시키려 하지는 않고 익사시키거나 화형대의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마침내 쾰른의 대주교가 교황에게 에크하르트에 대해 불만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종교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물론 처음에 에크하르트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가 소속된 수도원이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자신도 결코 이교도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가 죽은 후 교황은 칙서를 발송해 마이스터의 28개의 명제가 부분적으로는 이단적이고 부분적으로는 몹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다.
말년의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에크하르트는 오랫동안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사상의 의미와 영향력은 여전히 과소 평가되고 있다. 통상적인 철학사의 서술에서 그는 정말로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 철학사에서는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철학함의 과정이 가장 많이 다루어진다. 전문적인 철학자는 전체 철학사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저변의 다른 흐름, 즉 신비적 철학함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쉽게 무시한다. 에크하르트가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그에 앞서 3세기경에는 플로티노스가, 5세기경에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가, 8세기경에는 에리우게나가 있다. 에크하르트의 사유 방식은 그의 직계 제자인 니콜라우스쿤자누스에서 시작하여 야콥 뵈메, 바더의 프란츠에 의해 계승된다. 그러나 신비의 철학은 그것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면 피히테의 후기 사상 그리고 셀링과 헤겔의 사상은 에크하르트가 모범적으로 대변했던 신비의 철학 방식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비적인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신비의 철학 방식에서 단지 기이함과 난해함, 모호한 사변과 뒤죽박죽의 공상만을 본다면, 그것은 분명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만 가지고는 그 철학의 독특한 특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특색말고 다른 것을 보아야만 한다. 신비적 철학함은 일종의 경험이다. 그것도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경험이다. 즉 하나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길에서 그가 경험한 것이 나타난다. 이렇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경험의 길을 고찰해야 한다. 그것도 그 길을 추상적인 과정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가야 하는 길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먼저 모든 세속적인 현실과 절연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떨어져 나옴"에 도달한다. 이것이 에크하르트의 근본 개념이다. "설교할 때마다 나는 종종 떨어져 나옴에 대해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의 길은 우선 떨어져 나옴의 길 즉 이별의 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외적인 일에 마음쓰지 말고, 더 이상 외적인 일로 근심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에서 자신을 비워야 하며", "모든 사물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인간은 순수하게 "모든 피조물을 망각해 버리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신비의 경험을 시작할 때 선택받은 소수만이 이를 수 있는 무아경의 초월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떨어져 나옴은 모든 인간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그것은 내적인 자세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실천적으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는 인간은 온갖 잡다한 일, 즉 격정이나 어리석은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스승은 1,000명의 교과 선생보다 값지다." 이러한 세계에서 자유에 도달한 사람은 순수한 내면성을 얻는다. 신비의 몸가짐은 "내면의 작용으로 모든 힘을 흩어진 사물에서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 모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든 진리를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신비의 길은 두번째 단계,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떨어져 나옴 즉 자기 포기로 이어진다. 인간은 그의 애착과 바람, 자기 자신의 의지까지도 버려야 하며, 자기 자신에서 풀려 나와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그런 속에서 "완전히 평온해져야" 한다. 인간은 전적인 "내맡김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영혼의 평온일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정신의 빈곤" 속에 서 있게 될 것인데, 이것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러한 길은 물론 나름대로 특별한 위험이 있다. 만일 인간이 그가 원하는 모든 것,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도대체 그에게는 무엇이 남겠는가? 에크하르트가 가리키는 신비의 길은 결국 순수한 무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과감히 길을 갈 것을 요구한다. "떨어져 나옴은 무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순한 무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이 무에 닿아 있기에 완전한 떨어져 나옴과 무 사이에는 어떤 사물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실현하는 한에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우리의 모든 본질은 다른 데가 아닌 바로 무가 되는 데 놓여 있다." 이것은 물론 그러한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 속에서 자아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바로 세계와 자기 자신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비로소 인간에 있는 본래적인 것, "영혼의 핵심", "영혼의 근거"가 전면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에크하르트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끌어들여 인간의 이 파악할 수 없는 핵심을 기술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우두머리", "정신의 빛", "이성", "영혼의 작은 성", 또는 특히 무엇보다도 "영혼의 작은 불꽃"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모든 명칭은 그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보다 더 지칭되지 않으며, 알려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
여기에서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공인된 교회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 이르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듯 많은 이름으로 불려진 영혼의 근거가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창조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만일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면, 엄격한 의미로 신만이 보유해야 하는 그런 특성이 인간에게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에크하르트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혼의 작은 불꽃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창조되지 않은 것", "피조물이 아닌 것"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바로 이 두번째 사상에 대해 교회의 대변자들이 에크하르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핵심에 대한 그의 사상을 신학에 적용시킨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내려간다면, 인간은 영혼의 밑바탕에서 신과의 직접적인 관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혼의 바탕은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에크하르트의 근본 경험이다 그리고 이 근본 경험은 그가 영혼에 대해 기획하고 있는 구도를 규정한다. 영혼은 근본적으로 신적인 종류의 것이다. 영혼 속에는 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 있다. 영혼은 자신 안에 "신적 본질의 형상"을 간직하고 다닌다. 아니 영혼 자신은 "신이 영혼의 밑바탕에 감추인 채 놓여 있는 한" 곧 신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밑바탕은 원래 영혼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장소이다 "영혼의 작은 불꽃은 신의 빛을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에 대한 인식은 오직 떨어져 나와 있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신의 근거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근거로 들어 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떨어져 나와 있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신성의 가까이"에 이른 사람이며 신과 "순수한 합일"에 도달한 사람이다. "여기에서 신은 영혼 안으로, 근본 안으로 들어선다." 신적인 실재성과의 이러한 만남은 인간 측에서의 투신 속에서만이 아닌 신 측에서의 자기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은 "영혼의 밑바탕에 자신의 그 모든 신성을 지니고" 현존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근본과 신과의 이러한 완전한 일치를 찬미하기에 여념이 없다. "신에 가까이 있는 것과 영혼에 가까이 있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구별이 없다." "한 일치가 다른 일치보다 크지 않다. " "여기에서 신의 근거는 곧 나의 근거이고, 나의 근거는 곧 신의 근거이다. " "신과 나, 우리는 하나이다. " 공식적인 교회는 그러한 발언을 물론 이단이라 낙인찍어 버린다. 신과의 합일 사상에서 앞에서 말한 자아의 무화는-이것은 떨어져 나와 있음에서 실현된다-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인 무화가 아니라 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무화가 되어 신성 속에 매장된다." "영흔은 신의 본질 안에서만 완전히 평온해진다." 바로 이렇게 자아의 독특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 영혼 안에서 신이 탄생할수 있다. 이때 "영혼의 밑바탕, 영혼의 본질에서 아버지이신 신은 그의 아들을 낳으며 그래서 영혼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신의 탄생 안에서 일어나는 합일이 너무나도 완전하기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신은 "나를 그 자신으로서, 그리고 그 자신을 나로서, 그리고 나를 그의 본질과 본성으로서 낳는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통적인 사유의 방법으로는 물론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다. 영혼은 "그러한 것이 있음을 분명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단지 "알지 못함", "알려지지 않은 인식"만이 남는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알지 못함과 알려지지 않음을 뜻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이외의 모든 앎과 인식보다도 자신 안에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무지란 신에 대한 고유하고 참된 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논에서 알지 못함으로 들어서야 하며, 그렇게 될때 우리의 알지 못함은 초자연적인 앎으로서 고상하게 되고 자랑스럽게 된다." 신비적 근본 경험에서 에크하르트가 철학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그것, 즉 신에 대한 사변이 발전될 수 있다. 신에 대해서 우리는 우선 "신은 존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전통과 일치한다. "신에 대해 신이 무엇이며 누구인지를 묻는 사람은, 신은 곧 존재이라는 대답을 얻을 것이다"
신은 "단적으로 존재"라는 것은, 신이 곧 "모든 사물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는 모든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명하다시피 한 이러한 사상을 넘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신은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존재자 중의 존재-이것은 이미 나름대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사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다만 신의 존재의 은총에 의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자연들의 자연이고, 빛들의 빛이고, 살아 있는 것의 삶이고, 본질적인 것의 본질이고, 말하는 자의 말이다." 에크하르트는 결국 대담하게 거듭 범신론적으로, 따라서 이단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감행한다. "모든 사물은 신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웅대하게 짜여진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 현실은 그 전체가 신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창조물은 신의 말씀이다. 모든 창조물은 그들의 모든 작용에서 신을 흉내내고 싶어한다. 모든 창조물은 모두 그것들이 처음에 흘러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외침을 가진다. 창조물의 그 모든 생명과 본질은 처음에 그것들이 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외침이며 그곳으로 서둘러 가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잘 들어맞는다. "신의 본질은 곧 나의 삶이다. 신의 본질이 나의 삶이라면, 신의 존재는 곧 나의 존재이며, 신의 본질성은 곧 나의 본질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크하르트는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한다 신을 단순히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면, 신의 존재를 창조된 사물의 존재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크하르트는 명료하게-겉보기 에는 위에서 인용한 명제와 반대이다-이렇게 말한다. "신에게는 존재가 서술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은 존재자도 아니며, 오히려 신은 존재자보다 높은 어떤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존재하는 사물과 단순하게 동일시되어 버린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이 존재자보다 높은 것은 분명 정신적인 것, "통찰", "지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내에서는 본질상 정신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신의 참된 존재 방식은 "존재보다 더 높은" 곧 "통찰"이다. 존재의 개념은 신에 관한 한통찰의 개념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린다. "신은 순수한 통찰이고, 이 통찰의 존재 방식은 단지 통찰함 그 자체일 뿐이다."
그렇지만 신의 존재를 통찰로 보는 이러한 규정은 인간이 떨어져 나와 있음에서 겪은 그 경험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경험에서는 오히려 존재와 통찰로서 이해된 신의 배후를 파고 들어가는 사유가 자라나온다. 그리고 이 사유는 "신성의 근거", "황량한 사막"에 부딪치며, "끝이 없는 심연"과 "밑바닥이 없는 바다" 속에서 신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에서는 물론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만다. 에크하르트는 단지 "은폐된 신성의 알려져 있지 않음", "영원한 은폐의 가려진 암흑"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상의 존재를 파악하려면 사유는 신의 개념을 넘어서서 더 파고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허공에 등등 떠다니는 본질이며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무"이기 때문이다.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본질적인 방법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신에서 자유롭게 되는" 데 있다. "만일 그대가 신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가 신인지, 어떻게 그가 정신인지, 어떻게 그가 인격인지, 어떻게 그가 형상인지 등등의 모든 것이 없어져야 한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신을 사랑해야 한다. 즉 비신, 비정신, 비인격, 비형상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의 순수하고 깨끗하고 명료한 일자로서의 신-어떠한 이중성과도 구별이 되는-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자 안에서 무에서부터 무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침잠해야 한다."
이로써 떨어져 나와 있음은 그 극단의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내버려 둘 수 있는 최고의 것, 가장 가까운 것은 그가 신 때문에 신을 내버려 두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사자만큼
여자 조련사가 사자를 자유 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그녀가 부르자 사나운 사자가 온순하게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입에 문 사탕을 받아먹었다. 서커스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해마지않았다. 단 한 사람, 뮬라 나스루딘을 제외하고는. "그런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겠다." 군중 속에서 그가 크게 말했다. "당신이 한 번 해 보시겠소?" 서커스 연기 지도자가 비웃는 투로 응수했다. "물론이지요. 나도 그 사자만큼 잘할 수 있다구요." 뮬라가 대답했다.
- 항상 말의 의미를 새겨 들으라.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는 언제나 그의 전인격을 들으라. 그러면 너는 그가 소유의 차원에 살고 있는지, 존재의 차원에 살고 있는지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기회
어떤 사람이 그의 아내와 함께 플로리다로 여행을 갔는데 여덟 마리의 말들이 달리면서 트랙을 도는 것을 보고 경마에 매혹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큰돈을 걸었다. 그리하여 며칠 후 그들의 수중에는 2달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낙천적인 남편은 자신이 혼자 트랙에 나가게 해준다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그는 레이스마다 큰 비율의 말에 돈을 걸었고 운좋게도 레이스마다 돈을 땄다. 드디어 마지막 레이스가 끝날 무렵에 그는 만 달러 이상의 돈을 따게 되었다. 그는 연승의 행운을 계속 밀고 나가리라 결심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조그만 도박장에 들어갔다. 그는 룰렛판에서 4만 달러를 땄다. 그는 한 번만 더 하고는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까만색에 4만 달러를 모두 걸었다. 룰렛판이 돌았고 사회자가 발표했다. "14번, 붉은 색." 그는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가 베란다 위에서 그를 기다리다 애가 타서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남편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2달러 잃었어."
- 소유의 차원으로 돌진하면 일어나는 일은 꼭 한 가지 ― 존재를 잃게 된다. 삶은 커다란 기회이다. 사실 삶에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다. 너는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
|
문학자료 → 세계사 |
|
|
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2장 선사시대이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2)
1) 흙은 살아 있다 - 고고학의 원리
살아 있는 흙-생토 요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산업 발전에만 정신을 쏟는 사이에 우리 국토의 많은 부분이 오염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건강은 물론 후손들의 생활 터전가지 위협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국토의 오염원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생활쓰레기와 폐수 등 땅을 병들게 하는 요소들은 우선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땅이 병든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인 듯하지만, 이건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생동감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세포의 끊임없는 분열과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풀.나무와 같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가 성장 혹은 활동을 멈추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생깁니다. 그리고 땅 위에서 생활합니다. 따은 흙알갱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물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흙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동물의 피부색이 다양한 것처럼 흙의 색깔도 다양합니다. 흙도 변합니다. 먼지가 날아와 모이더니 흙덩이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흙덩이가 돌이 되기고 합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흙을 생토하고 합니다. '살아 있는 흙'이란 뜻이죠, 생토는 자연퇴적한 상태의 흙입니다. 그 위에 흙먼지가 날아와 덮이고, 낙엽이 떨어져 쌓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며 생토인 흙은 마치 세포처럼 성장합니다. 그래서 생토의 색깔도 천연색 그대롭니다. 생명력이 있기에 탄력이 있습니다.
죽은 흙 - 부식토 인간의 손길이 닿은 후의 흙은 부식토 혹은 부토라고 합니다. '썩은 흙'이란 뜻이죠. 부토는 마치 활동을 멈춘 세포와 같습니다. 다른 흙 조직으로부터 강제로 이탈되어 생명을 잃은 흙입니다. 이들은 생명체의 세포가 그렇듯이 급속히 썩어갑니다. 그리고 매생물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싫고 썩어가기에 부토의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탄력을 잃어 푸석푸석합니다. 우리가 비옥한 땅이라고 부르는 속은 대부분 부토로 이루어진 땅입니다. 석어가기에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식물의 성장으로 촉진시키는 것이죠. 농사를 지을 때 가래.삽.곡괭이 등으로 논밭을 가는 이유는 흙을 썩게 해 그곳에 심을 벼와 보리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비옥한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흙을 보다 깊이 파서 더 많은 흙을 썩게 해야겠지요. 이처럼 논밭을 깊이 파는 것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손길이 거쳐간 자연 재지는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한 부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흙도 죽는다.' 이 원리를 이용한 학문이 있습니다. 바로 고고학입니다. 역사학이 기록에 의존해 인간의 발자취를 목원하는 학문이라면, 고고학은 남겨진 물건을 이용해 인간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무덤.성곽.살림터.절터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죠. 현행법에 의하면, 어느 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곳에 민족문화유산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있다면 먼저 발굴을 통해 유적의 성격을 구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개발을 앞둔 지역을 반드시 고고학의 조사를 거쳐야 하는데 조사 과정에서 토기 조각이라든지 석기, 혹은 금속기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유물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대한 발굴이 진행됩니다. 우선 유적이 폐기된 뒤에 쌓인 자연퇴적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거합니다. 그러면 유적이 만들어질 당시의 지표면이 드러나는데, 그 중에는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성을 보이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흙의 색깔이 다르고, 성질이 다른 곳, 바로 썩은 흙이죠, 부토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면 유적을 사용하던 당시의 땅 모습이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복원과정에서 당시 각종 유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물론 충분히 교육받은 고고학자에 의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적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발굴은 또 다른 파괴다'라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2) 지구와 인간
지구의 역사 우리 인간은 지구상의 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 속의 수없이 많은 행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죠. 따라서 인간은 지구가 생긴 뒤에 출현했고, 지구는 우주가 탄생한 이후에 생겼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체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부터 약 180억년전쯤에 탄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덩어리의 물질이 폭발해 팽창하면서 지금의 우주와 같은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부터 약 45억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가 탄생합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하는 것은 약 40~30억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방상충.해면과같은 미생물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나타나 활동한 시기를 시생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지금부터 약 9억년전쯤에 이르면, 원시 조류, 박테리아 그기로 각종 단세호 동물들이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때부터를 원생대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부터 약 6억년 전쯤에는 해초와 양치식물 그리고 무척추동물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고생대이지요. 이무려박지 지구상의 생염체 중 동물은 모두 물고기류였습니다. 육지동물이 나타나는 것은 지금부터 약 3억 5천만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약 3억년 전쯤에 이르면 중생대가 펼쳐집니다.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다시 구분되는 중생대에는 활엽수계의 식물과 파충류.양성류.경골어 등이 번성했습니다. 중생대 말기 곧 지금부터 9,000만년 전쯤에는 대뇌가 발달하는 대신 얼굴이 짧고 한 쌍의 유방과 손발을 가진 원시 형태의 영장류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신생대는 지금부터 약 6,500만 년 전 쯤에 시작되었습니다. 신생대는 다시 제3기와 제4기로 나뉘어지는데, 지질학에서는 제3기를 다시 고신세, 중신세, 선신세등으로 구분하고, 제4기를 홍적세와 충적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출현 인류는 지구의 지각 변동이 심하고 포유류가 번성한 제 3기의 말기쯤에 출현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처음 발견된 '남쪽 원숭이 사람'이 바로 그것인데, 그들의 출현 시기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지금부터 400~300만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들에 앞서 라마원숭이처럼 인류의 조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이미 1,000여만 년전에 인도.케냐.터키.중국 등지에서 서식한 흔적을 찾을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확증이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화석을 조사한 결과 '남쪽 원숭이 사람'의 두뇌 용량은 평균 약 500cc로 추정되며, 성인 남자(수컷의 평균 키는 140cm, 몸무게는 52kg으로 추정됩니다. 평균 수명은 11~12살이어서, 여자(암컷)의 경우 늦어도 7~8살쯤에는 출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 원숭이 사람'이 과연 현생 인류의 조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석 구조로 볼 때 두 발로 서서 걸었으며, 치열이 현생인류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의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연장을 사용한 듯한 흔적도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아프리카의 케냐 지역에서는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쯤에 해당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솜씨 좋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화석 주변에서 석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중국 운남성에서도 돌과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했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략 170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되는데, 학자들은 원모인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부터 약 180만년 전 쯤, 그러니까 신생대 제 3기 말엽에 이르면 지구의 기온이 낮아지면서 남극지방과 고산지역을 중심으로 빙하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 4기의 홍적세에는 한랭성 기후의 영향으로 4~5번의 빙하기가 펼쳐지고, 그 사이 사이에 3~4번의 간빙기가 찾아옵니다. 빙하기는 지구전체가 얼음으로 뒤엎였던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보다 평균 온도가 약 17도정도 낮은 상태로서 극지방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빙산이 형성되던 시기일 뿐이죠, 따라서 비록 제한을 받긴 했지만, 각종 동식물의 번식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기입니다.
인류의 진화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부터 약 100만년 전쯤에는 '곧 선 사람'들이 출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곧 선 사람'의 출현 시기를 150만년 전까지 소급시키기도 하는데, '남쪽 원숭이 사람'과는 한동안 병존했다고 합니다. 뼈의 구조 등에서 현생인류의 조상임이 분명한 '곧 선 사람'의 초기 두뇌 용량은 성인남자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700~800cc정도이며, 후기의 뇌용량은 1,000cc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의 평균 키는 162.5cm, 몸무게는 76.5kg으로 추산됩니다. '곧 선 사람'의 화석 중 대표적인 예로는 50만년 전에 해당하는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의 남전인은 60만년 전에 해당하는 인류 화석이라고 합니다. 홍적세의 중기 후반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5만년 전쯤에 이르면 '슬기사람'이 출현합니다. 두뇌 용량이 1,300~1,400cc니까 현생인류와 비슷하며, 골격도 유사하지만, 눈두덩과 턱이 더 크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제석기를 사용한 이들은 기둥을 세운 집을 만든 듯하며, 원시적 종교 관념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라크의 한 동굴유적에서 시체 위에 꽃을 뿌리고 흙을 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든지, 중앙아시아에서 주검 둘에 염소 두개골 6개를 뿔을 땅에 꽂아 배치한 유적이 발견된 것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슬기사람'의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만년쯤에 해당하는 네안데르탈인 관련 유적에서는 실과 바늘을 이용한 듯한 가죽옷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발견되 화석 중에는 정촌인, 장양인, 오르도스 인 등이 슬기사람에 해당합니다. 북한에서도 '슬기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1972년 덕천 승리산에서 2개의 어금니와 어깨뼈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덕천인'이라고 부릅니다. 또 1977년에는 평양에서 '역포인'으로 명명된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현생인류와 같은 '슬기슬기사람'은 늦어도 4만 년 전에는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크로마뇽 인의 골격이 현재의 유럽인과 유사하며, 두뇌 용량 역시 1,500~1,600cc로서 지금의 우리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산정동인, 기린산인, 유강인 등이 같은 시기의 화석입니다. 북한에서는 덕천 승리산에서 발견된 '승리산인'의 화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타제석기의 사용 지금까지 소개한 화석은 모두 홍적세에 살다간 인류의 흔적입니다. 이 무렵 인간은 돌을 연장 혹은 무기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돌을 깨뜨려 더 날카롭고 편한 모습으로 바꿀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돌을 개뜨려서 만든 도구를 타제 석기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구석기 혹은 뗀석기라고도 하는데, '곧 선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전기 구석기 시대, '슬기사람은 중기 구석기 시대, '슬기슬기사람'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대한 위의 지식은 모두 고고...인류학자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또 그중 상상부분은 단순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위의 사실들은 필수조선으로 삼아 유추의 날개를 펼치다보면 의외로 구석기인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타제석기는 대부분 꽤 큼지막합니다. 물론 후기 구석기 시대의 말기쯤 오면 작고 가는 세석기가 사용되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주로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1.5리터짜리 주스 병보다 조금 짧은 크기의 울퉁불퉁한 뾰족한 석기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요? 사냥을 했다고 합시다. 무엇을 잡았을까요? 돌의 크기로 보아 꽤 큰 짐승을 잡았을 겁니다. 만약 토끼나 다람쥐처럼 작고 날쌘 짐승을 잡았다면 석기가 그처럼 클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절대 그처럼 커서는 안되겠죠. 마침 당시의 자연환경을 조사하고 구석기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발견된 짐승의 뼈를 관찰해보니, 북반구에는 순록...매머드처럼 덩치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터운 짐승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환견이 석기의 크기를 결정지은 것이지요.
구석기인의 생활상 구석기인들은 순록 혹은 매머드를 어떻게 사냥했을까요/ 아마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같이 움직여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3~4명 혹은 4~5명만으로 순록 산양이 가능했을까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제와 그 자녀들, 그러니까 사촌들까지 포함하고, 그것으로도 일손이 모자라면 6촌...8촌 형제들과도 함께 움직여야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리지어 사냥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석기 시대에 30~4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규모는 노천에서 생활할 때가 많았던 구석인들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에도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도구가 시원찮은 탓에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오랜만에 사냥에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한쪽에서는 사냥감을 몰고, 한쪽에서는 끈으로 짐승의 다리를 잡아채고, 또 몇 사람은 달려들어 돌도끼를 던지거나 휘둘어서 함께 잡았으니, 당연히 공평하게 나누어야지요. 순록 한 마리를 잡았으나, 나누고 보니 각자에게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순록만 잡아서야 어디 생활이 되겠습니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사냥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놀아서는 공평하지 않지요. 그런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겠지요. 근처의 나무열매라든가 그 밖의 먹을 만한 것들을 채집해야 했을 것입니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각종 식물의 잔흔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순록이나 매머드는 채식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한동안 생활하고 나면 먹을 만한 식물은 바닥나고 맙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구석인들도 역시 식물을 섭취해야 했으므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석기인들은 그들의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다시 말하면 순록이나 맘모스가 움직여 가는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럴듯한가요? 이처럼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마치 탐정처럼 이리저리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구석기인들의 숨결이 내 손을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 유적으로는 공주시 석장리와 웅기군 굴포리, 제천시 점말동굴, 단양군 금굴과 상시, 제주도 빌레못 등이 유명합니다.
세석기의 사용 지금부터 약 12,000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의 기후가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기온이 상승하게 된 것이지요. 날씨가 따뜻해지자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먹이사슬이 풍부해지면서 몸집이 작고 재빠른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작고 째빠른 동물들을 쥐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크고 무거운 석기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지요. 다라서 효과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냥감에 맞춘 도구를 개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 덩치가 큰 짐승들이 많을 때에는 돌을 깨어 잔편은 버리고 알맞게 다듬어진 핵심만 골라 썼는데, 작은 짐승들이 번성하게 되자 이번에는 잔편중에서 알맞은 것을 골라내어 사냥도구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 굵기만한 작고 가는 석기 말입니다. 그래서 세석기입니다. 잔석기라고도 합니다. 세석기를 주로 사용하던 기를 중석기시대라고 합니다. 세석기로 사냥을 한다? 그렇습니다. 세석기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살과 창 그리고 작살 등을 만들어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가볍고 빠른 동물을 잡으려고 가볍고 빠른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사냥감이 작은 동물로 바뀌고, 또 더 효과적인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니 사냥방식도 달라져야 하겠지요? 이제는 예전처럼 대규모로 무리지어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개별적으로 사냥하다 보면 사람마다 능력이 달라 수확에 차이가 나겠지요? 이제 곧 재산에 대한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것,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과 함께 말입니다. 작고 가는 무기를 사용하다 보니 가끔은 상처만 조금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짐승을 잡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운 좋게 생포하는 수도 있었을 테지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던만큼 그것을 길러 나중에 사냥이 잘 안될 때를 대비했을 법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특히 중석기기대의 생활유적에서 개의 뼈가 자주 다량으로 발견되는 것은 개의 가축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중석기인들은 대체로 동굴생활을 했던 것을 알려집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물고기들이 번성했으니, 그냥 두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작살 등으로 어렵에 나섰겠지요. 그러나 깊은 물에서는 작살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그물입니다. 비록 지금의 그물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세석기인들은 그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세석기를 사용했던 시기는 매우 짧습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잇지만, 유럽 일대를 기준삼을 때, 대략 서기전 9000년경을 전후해 1,000~2,000년 정도 지속되었으니까 그 긴 구석기시대에 비한다면 찰나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세석기 문화에 해당하는 뚜렷한 유적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저 중석기 문화와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유적 몇 군데만 확인된만큼, 앞으로 한 반도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강가나 들판을 거닐 때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농경과 문화 - 혁명의 시대
토기 제작 짧은 중석기시대가 지나자, 신석기 시대가 왔습니다. 돌을 일정한 모양으로 깨거나 떼어낸 뒤 그것을 갈아서 만든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돌을 갈아서 만들었다 하여 간석기 혹은 마제석기라고 합니다. 마제석기의 사용은 인류가 돌의 성질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재활동의 개념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부러지거나 날리 무디어진 석기를 다시 갈아 쓰는 일이 빈번하던 시기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요소 중 또 한 가지는 토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가운데 잿물이나 유약을 쓰지 않고 그냥 불에 구운 것을 토기라고 합니다. 지금가지의 자료에 의하면 토기는 신석기기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토기의 제작 시점은 곧 신석기시대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대략 서기전 8000년 쯤에는 토기가 이미 제작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서기전 6000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토기가 제작된 듯합니다. 그런데 이웃일본에서는 서기전 1만년쯤에 만들어진 듯한 토기가 발견되어 한동안 논란이 일었습니다. 실제로 그 시기에 이미 토기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과학기구를 이용한 연대측정에 약간의 오차가 발생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 번에 걸쳐 재검토한 그 연대가 확실하다면 인류의 토기 제작 및 신석기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소 수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후대의 토기와 달리 가마 속에서 굽지 않고 노천에서 구웠기 때문에 그리 단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릇의 두께가 매우 두꺼우며, 면이 거친 것이 특징입니다. 그저 저장하는 데 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보통 붉은 색을 띱니다. 노천에서 구웠기 때문에 산화작용으로 그릇의 색깔이 변한 것이지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연기 때문에 시꺼멓게 그을은 곳도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입니다. 토기의 표면에 빗금을 돌린 것이지요, 물론 이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토기도 있습니다. 원시무문토기라고도하는 '이른 민무늬토기'와 융기문토기라고도 하는 '덧무늬토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웅기군 굴포기, 양양군 오산리, 부산시 동삼동 등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서울시 암사동, 하남시 미사리, 양양군 오산리, 무산시 동삼동 그리고 북한의 온천군 궁산리가 유명합니다. 인류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토기를 만드는 기술에 비한다면 돌을 갈아 석기를 만드는 기술은 한낱 잔기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만큼 코기는 고도화된 지식과 기술의 집적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흙에 대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불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일정 수준에 합치되었을 때, 비로소 토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과 정착생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토기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토기의 발명을 재촉했을까요? 바로 농경입니다. 신석기시대 최대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농경은 인류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농사는 주로 돌괭이와 돌삽 등을 이용했습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의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탄화된 '피'가, 그리고 평양시의 남경 유적에서는 탄화도니 '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에는 피...조와 같은 잡곡류가 많이 재배된 듯합니다. 농경에는 보통 목축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이 점이 문화의 급진전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예전처럼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물게 되니, 각종 편의시설을 공들여 짓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백없이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도전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문화란 전통위에 서는 법입니다. 신석기인들의 정착생활은 바로 그러한 전통의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을 사람의 형질적인 면에 적용했을 때,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했던 사람들을 역사상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석기인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터전을 한반도와 그 인근지역에 마련해준 한민족의 조상이라 하겠습니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胸有成竹(흉유성죽) 胸(가슴 흉) 有(있을 유) 成(이룰 성) 竹(대 죽)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동파문집(東坡文集)49에는 운당곡언죽기라는 글이 있다. 동파라는 호로 유명한 소식은 문장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그에게는 자(字)가 여가(與可)인 문동(文同)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또한 문장과 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소식은 정치적으로는 불우하였으나, 그가 그린 대나무와 그 기법은 옥국법(玉局法)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화죽기(花竹記)라는 책에서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마음 속에 대나무을 완성해야 한다(故畵竹, 必先成竹于胸中) 라고 하였다. 그의 친구 문여가는 생동적인 대나무를 그리기 위하여, 많은 대나무를 심어 두고 매일 관찰하며, 대나무의 특징과 모습을 기억해 두었다. 당시 유명한 한 문인은 문여가가 대나무를 그릴 때, 완전한 대나무가 이미 그의 가슴속에 있었다(與可畵竹時, 成竹已在胸) 라고 칭송하였다.
胸有成竹 은 成竹在胸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을 하기 전에 완전한 계획을 구상하여야 함 을 비유한 말이다. 지금도 成竹 은 속셈 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
|
|
문학자료 → 이글저글 |
|
|
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셀린 사나이
처음에 바셀린은 아주 폭넓게 사용되고 남용되었다. 반투명한 젤리 물질인 바셀린을 낚시꾼은 송어를 끌어들이기 위해 낚싯바늘에 발랐고, 무대 여배우는 빛나는 이 연고를 눈물로 보이기 위해 뺨에 발랐다. 바셀린은 여간해서는 얼지 않기 때문에 북극 탐험가인 로버트 피어리는 살갗이 트지 않도록 피부를 보호하는데 썼으며, 기계 장비가 녹슬지 않도록 발라서 북극점까지 가지고 갔다. 그리고 고온다습한 열대 지방의 더위 속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았으므로 아마존의 원주민은 바셀린으로 요리를 했고, 빵에 발라 먹었으며, 돈 대신에 바셀린으로 거래를 하기도 했다. 바셀린의 발명자인 브루클린 출신의 화학자 로버트 오거스터스 치즈블로는 바셀린을 모든 곳에서 갖가지 용도로 사용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치즈블로는 96세까지 살았는데 바셀린 덕분에 오래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바셀린을 한 스푼씩 먹고 있었던 것이다. 1859년에 로버트 치즈블로는 파산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등유가 가정과 산업용의 주된 연료원이었으나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붐으로 석유 연료가 좀더 싸질 거라는 전망 때문에 그가 브루클린에서 하고 있던 등유 사업은 위협받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이 젊은 화학자는 석유 사업에 참여할 작정으로 석유가 발견된 중심지인 펜실베이니아 주 테이터스빌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보링 막대기에 끈적끈적 달라붙어 꼼짝 않는 풀 모양의 파라핀 같은 석유 찌꺼기를 보고 화학자로서 호기심을 느꼈다.
치즈블로의 질문을 받은 현장의 작업원들은 펌프를 막히게 하는 이 물질에 재미삼아 이름을 몇 개 붙여 놓고 있었으나 그 물질의 화학적인 성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전혀 짐작을 하지 못했다. 다만 작업원들은 그것을 칼에 베인 상처나 화상에 바르면 치료가 빨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치즈블로는 석유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상한 석유 폐기물을 병에 담아 브루클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풀 모양의 그 폐기물을 정제하고 정분을 추출하기 위해 몇 개월에 걸쳐 실험을 했다. 그러자 화합물은 투명하고 매끄러운 물질로 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석유 젤리'라고 불렀다. 치즈블로는 자신이 모르모트가 되어 젤리의 치유력을 시도하기 위해 손과 팔에 크고 작은 베인 상처와 찰과상, 화상을 입혔다. 그리고 추출물을 바르자 상처는 병균 감염도 없이 즉시 낫는 듯했다. 1870년에 치즈블로는 세계 최초의 바셀린 석유 젤리를 제품화하고 있었다.
바셀린(vaseline)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치즈블로는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1800년대 후반에 그의 친구들이 주장했던 것이 그 하나다. 치즈블로가 이 물질을 정제하고 있던 초기 무렵, 아내의 꽃병을 실험용 비커로 사용한 점에 착안하여 'vase'(꽃병)에 당시 의약품의 접미사로 인기가 있던 '린'(line)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즈블로가 설립한 제조 회사의 직원에 따르면, 치즈블로는 좀더 과학적으로 독일어인 'wasser'(물)와 그리스어인 'elaion'(올리브유)이라는 두 낱말을 합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로버트 치즈블로는 자신이 만든 제품의 실험대 제 1호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광고인도 되었다. 그는 말 한 마리가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 뉴욕 주 북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베인 상처나 화상에 바셀린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공짜로 배달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했다. 6개월 안에 치즈블로는 마차로 도는 세일즈맨 20명을 고용하여 약 30그램당 1페니에 바셀린을 팔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바셀린을 베인 상처와 화상 외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주부들은 바셀린이 나무 가구의 때나 얼룩을 지워 반짝반짝하게 해주고 나무의 표면을 보호해 준다고 말했다. 또한 바싹 말라 버린 가죽 제품이 바셀린 덕분에 되살아난다고도 보고해 왔다. 농부들은 집 밖에서 사용하는 기계에 바셀린을 듬뿍 발라 두면 녹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프로 화가는 바닥에 바셀린을 얇게 펴두면, 물감이 튄 것이 눌러 붙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셀린을 누구보다 찬양한 것은 약방 주인들로 그들은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이 연고를, 자신들 고장에서 만드는 고약이나 크림,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20세기 초에 바셀린은 가정용 상비약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로버트 치즈블로는 끈적끈적하고 성가신 폐기물을 백만 달러 산업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1912년에 뉴욕의 커다란 보험 회사 본사에 큰 불이 났을 때,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치료에 바셀린이 사용된 것을 알고 치즈블로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는 병원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신흥 자동차 업계에서는 바셀린을 바르면 차의 배터리 단자가 부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여 바셀린은 공업계에서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스포츠 세계에서도 일반화가 되었다. 장거리 수영 선수는 바셀린을 몸에 발랐으며, 스키어는 얼굴에 발랐고, 야구 선수는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글러브에 문질러 발랐다. 이렇게 다종다양한 이용법이 나오는 동안 바셀린의 발명자는 날마다 한 스푼의 바셀린을 먹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50대 후반에 늑막염에 걸렸을 때 치즈블로는 담당 간호사에게 정기적으로 전신을 바셀린으로 마사지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조크대로 치즈블로는 바셀린 때문에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났으며, 그 뒤로도 40년이나 더 살아 1933년에 사망했다.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