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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8호
2012.5.2 (음 3.12)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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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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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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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하게 사는 이점의 하나는 끊임없이 멋진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A.A.밀른(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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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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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개고기 수육
예년과 달리 올해는 더위가 유난히 일찍 찾아왔다. 초복이 아직 멀었는데도 '보신탕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예부터 땀을 많이 흘려 허약해진 몸에 영양을 보충해 주는 여름 보양식으로 보신탕이 최고로 꼽히기 때문이다.
보신탕집에 가면 개고기를 여러 가지 양념, 채소와 함께 고아 끓인 국인 보신탕(개장국)뿐 아니라 개고기 무침과 개고기 수육 등이 있다. 그런데 '개고기 수육'이란 표기는 현행 국어사전의 뜻풀이로 보면 잘못이다. '삶은 개고기' 정도로 표현해야 옳다. '돼지고기 수육'도 마찬가지다. '삶은 돼지고기'라고 써야 한다.
사전에서는 '수육←숙육(熟肉)'을 '삶아 익힌 쇠고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쇠고기에만 '수육'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뜻풀이는 언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돼지고기 요리 중에 '돼지 머리 편육'이 있다. '편육'이 '얇게 저민 수육'을 일컫는다면 '돼지 머리 편육'도 잘못이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 번 사전에서 '수육'의 뜻풀이를 '삶아내어 물기를 뺀 고기'로 수정한다고 한다.
삶은 돼지고기를 김치 등과 함께 먹는 '보쌈'의 뜻풀이도 이해하기 어렵다. '삶아서 뼈를 추려 낸 소, 돼지 따위의 머리 고기를 보에 싸서 무거운 것으로 눌러 단단하게 만든 뒤 썰어서 먹는 음식'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언어 현실과 괴리가 있다. 이것 역시 보완이 필요하다.
[우리말바루기] 단어를 쪼개지 말자
① "우린 조국 위해 죽음 두려워 안 해" "대선 후보끼리 검증 바람직 안 해" ② "검찰, 자기 계좌는 추적 안 해" "대통령 면담 요구 안 해" "6자회담 포기 안 해"
①의 '두려워 안 해' '바람직 안 해'는 주로 기사 제목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틀린 표현이다. 제목의 글자 수에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문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
'두렵다' '두려워하다'를 부정하면 '두렵지 않다' '두려워하지 않다'가 된다. '두려워 안 해'는 '두려워해'라는 한 단어를 쪼개어 그 사이에 부정어 '안'을 끼워 넣은 형태다. 이는 쪼갤 수 없는 단위를 분리한 것이므로 문법에 맞지 않는다. 바르게 쓰려면 '두렵지 않아'나 '두려워하지 않아''안 두려워해'로 해야 한다. '바람직 안 해'도 마찬가지다. '바람직하다'를 부정하려면 '바람직하지 않다'나 '안 바람직하다'로 표기해야 한다.
'○○하다'는 더 쪼갤 수 없는 하나의 단위로서 한 단어다. 이를 쪼개려면 조사 '을/를'을 붙여 '○○을/를 하다'로 띄어 쓸 수밖에 없다. '공부하다' '운동하다'는 '공부를 하다' '운동을 하다'로 쓸 수 있으며, 이를 부정하면 '공부를 안 하다' '운동을 안 하다'가 된다.
②의 '추적/요구/포기 안 해'는 ①과 다르다. '추적/요구/포기' 뒤에 '을/를'이 생략된 형태로 보기 때문이다. '두려워 안 해'나 '바람직 안 해'는 '안 두려워해' '안 바람직해' 또는 '두렵지 않아' '바람직하지 않아'로 해야 맞다.
[우리말바루기] 과다경쟁
#장면 1. 한 대형 할인점의 식품매장. 자사 상품을 구입하면 그릇 등을 끼워 주는 ㄱ사의 사은품 행사가 한창이다. 이에 뒤질세라 ㄴ사는 상품 하나를 사면 같은 물건을 덤으로 주는 행사로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벌써 몇 달째 벌이고 있는 무리한 판촉 경쟁으로 양사의 수익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장면 2. 매끼 비타민제를 챙겨 먹는 ㅂ씨. 평소 비타민은 많이 복용해도 해가 없다고 알고 있던 그는 식의약청의 발표를 보고 놀랐다. 비타민도 필요 이상으로 섭취하면 설사.복통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면 1처럼 시장 확대를 위해 기업들 사이에서 경쟁이 과열돼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과다경쟁'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같은 업종의 기업 사이에서 일반적인 자유경쟁의 범위를 넘어 손해를 보면서까지 지나치게 하는 경쟁은 '과당경쟁(過當競爭)'이라고 사용해야 맞다. "사상 최악의 급식 대란은 수조 원대에 이르는 급식 시장을 둘러싼 업체 간 과당경쟁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와 같이 써야 한다.
'과다(過多)'는 너무 많음을 뜻하는 말로,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비타민도 지나치게 섭취하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 주는 장면 2와 같은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 "몸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과다 복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광고 판촉비 과다 지출로 수익성이 대폭 저하됐다"처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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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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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醉의 彼岸 -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수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우에서 솔개미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운명 ――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오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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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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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 짓기 - 노인숙
산기슭 높새바람 흔들리는 구름 아래 죽계천 푸른 소리 귓곁에 뉘어 두고 노을만 사무쳐오는 소백산 높은 갈기
피 묻은 능선 달려 외솜다리 꽃 피우고 그늘진 갈피마다 퍼덕이는 땅의 숨결 이제사 일상을 접고 새 집 한 채 둥지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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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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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졸업장 - 임길택
나는 언제나 상을 받아 보나. 내 짝 도영이는 스무 장도 넘는다는데 나는 언제나 상을 받아 보나.
일만 시키신 어머니는 상장 하나 못 받아 온다고 내가 머리가 없다는데 내가 커서 무얼 해먹고 살아야 하나.
우체국상장을 받는 사람 단위조합장상을 받는 사람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상을 받는 사람 자꾸자꾸 이름이 불리고 또 손뼉을 칩니다.
6년 동안 그렇게 손뼉 치는 연습만 해오다가 나는 오늘 노래 속의 빛나는 졸업장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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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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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9장 생활의 즐거움
7. 음식과 약에 대하여
집이라는 것을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생활에 관련되는 온갖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넓은 관점에서 본 음식은 본디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동물이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의 생명은 신의 무릎 위에서 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숙수의 무릎 위에서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신사는 누구나 다 숙수를 소중히 여긴다. 생활의 즐거움의 대부분이 요리의 취사 선택을 하는 숙수의 수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언제나 유모를 소중히 여기고 친절하게 대접하려고 애를 쓴다. 그것은 젖먹이의 건강이 오로지 유모의 기분이나 일반적인 생활 조건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젖먹이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조심을 한다면 음식을 만들어 주는 숙수에 대해서도 유모에게 하는 것과 같은 친절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날씨가 좋은 날 아침 자리에 누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대체 이세상에서 정말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몇 가지나 있는가 하고 손꼽아 세어 보면, 반드시 맨먼저 손가락을 꼽아야 할 것은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있는가 어떤가를 알아 보는 것은 사람이 현명한가 어리석은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테스트라고 하겠다.
현대의 도시 생활의 템포로는 굉장히 빨라져서 요리나 음식물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시간과 머리를 쓸 여가가 점점 적어져 왔다. 가정의 주부이며, 훌륭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아내가, 남편에게 통조림 수우프니, 통조림 완두콩을 음식상에 내놓아도 남편 쪽에서 투덜거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먹는다면 어딘지 좀 이상한 생활이다. 남에게 대하여 친절하고 너그럽도록 마음 쓰기 전에 우선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여성이 시정의 추한 꼴을 폭로하여 일반적인 사회 상태를 좀 개선했다 하더라도 두 개의 가스 버너를 동시에 틀어 10분 동안에 식사를 모두 끝내야 한다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겠는가. 옛날에 공자는 음식 솜씨가 서툴다고 부인과 이혼했는데 이런 여자라면 당장에 공자로부터 이혼장을 받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공자 편에서 이혼할 것을 선언하였는지 부인 쪽에서 이 까다로운 인생 예술가의 주문을 피하기 위해서 집을 뛰쳐 나간 것인지, 그 사정은 별로 뚜렷하지 않다. 공자의 주문은 <쌀은 아주 희어야 하고 다진 고기는 매우 잘게 다져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부인이 <고기에 적당한 양념을 하지 않고 내놓았을 때>라든가, <반듯반듯하게 고기를 썰지 않았을 때>라든가 <고기의 빛깔이 좋지 않을 때>에는 공자는 젓가락을 아예 대지도 않았다 한다. 이렇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부인은 참고 견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날 신선한 음식이 동이 나서 아들인 이를 근처 식료품점에 보내어 술과 언 고기를 사 오게 하여 그것으로 임시 변통을 하려고 하자, 공자는 <나는 집에서 만든 술이 아니면 안 마신다. 가게에서 사온 고기는 먹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부인으로서도 이쯤 되고 보면 짐을 싸들고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는겠는가. 이 공자 부인의 심리는 나의 짐작에 불과한 것이지만, 공자가 불쌍한 아내에게 대한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조건은 고전에도 남아 있다.
중국인은 음식을 통틀어 영양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음식물과 약을 전혀 구별짓고 있지 않다. 몸에 이로운 것은 약이며 동시에 음식이라는 생각이다. 현대 과학이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음식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정하게 된 것은 겨우 전세기에 들어온 일이지만, 오늘날에는 다행히 모든 현대식 설비를 갖춘 병원에는 전문가인 식이요법가를 으례 고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의사들이 한걸음 더 나가서 식이요법가를 중국을 보내어 수업시킨다면 약병의 필요성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옛날 의학자인 손사막(16세기에 생존했던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다운 의사는 우선 병의 원인을 찾아낸다. 병의 원인을 알게 되면 처음에는 먼저 식이요법으로 치료하려고 하는 법이다. 식이요법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약의 처방을 쓰게 된다> 원 나라의 궁정에서 일한 어느 국수가 1330년에 쓴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중국에 현재 남아 있는 책 가운데서 음식물을 논한 가장 오래된 책이며, 음식물은 본디 양생의 문제라고 하여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주의를 하고 있다. 스스로의 건강에 유의하는 사람은 음식물을 절도 있게 먹고, 근심거리를 없애고, 욕망을 줄이고, 감정을 누르고, 체력을 헛되이 소모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말을 적게 하고, 성패를 가벼이 여기며, 슬픔과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알고, 어리석은 야망을 버리며, 좋고 나쁜 생각을 피하고, 시력과 청각을 진정시키며, 내장의 섭생에 충실해야 한다. 정신을 많이 쓰고,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면 어찌 병에 걸릴 까닭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심신을 기르려고 하는 사람은 배고픔을 느꼈을 때만 먹고 결코 배가 부르도록 먹어서는 안 된다. 또한 목마름을 느꼈을 때만 마시고, 더우기 배부른 상태가 되도록 마셔서는 안된다. 오랜 사이를 두고 조금씩 먹어야 하며, 너무 많은 분량을 쉴새없이 먹어서는 안된다. 배가 불렀을 때에도 약간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플 때에 약간 배부름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배부르게 먹는 것은 폐를 상하게 하고 배고픔은 정력의 활동을 해치는 일이다.
이렇기 때문에 중국의 모든 요리서와 마찬가지로 이 요리서도 마치 약국의 처방과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국인이 적당하게 약과 음식을 혼동하고 있는 데 대해 축하의 뜻을 표시해야만 한다. 이런 혼동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약은 더욱 약다워지는 반면, 중국의 음식은 한층 더 음식다워진 것이다. 중국의 원 시대에 이미 포식의 신이 나타났다는 것에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타오치라는 이름의 신으로, 옛날 사람들이 즐겨 청동이나 석조의 모티프로 썼던 흔적이 오늘날 발견되고 있다. 이 타오치의 영혼이 우리 중국인의 마음 속에는 저마다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중국 약전을 요리책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었고, 중국의 요리책을 약전 비슷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한 자연 과학의 일부분으로서의 식물학이나 동물학이 중국에서 발달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과학자들은 뱀이나 원숭이나 악어의 고기나 낙타의 혹이 어떤 맛일까 하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다. 참된 과학적인 호기심은 중국에서는 식도락으로서의 호기심이다.
어떤 야만족이나 한결같이 의약과 마법을 혼동하고 있으며, 노장의 무리들은 <양생>과 불로불사, 또는 오래 사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중심적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으로 생각해 볼 때 음식과 약은 흔히 그들 사이에서는 혼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예로 든 원조의 궁정 요리서였던 <음선정요>에는 오래 사는 방법과 병을 앓지 않고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말한 몇 장이 있다. 노장 철학을 연구한 무리들은 열정적으로 자연에 귀의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야채성 음식과 과일의 효과를 역설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슬을 마시고 자라나는 델리킷한 풍미를 간직한 신선한 연밥을 먹는 것을 학자들은 가장 고상하고 운치있는 기쁨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시와 노장파적인 탈속감에 결부되어 있는 것같이 여겨진다. 가능하다면 이슬 그 자체를 마시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잣, 쇠귀나물, 칡뿌리 등이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신기를 맑고 힘있게 해 주기 때문에 모두 장수의 효력을 지녔다고 한다. 연밥을 먹으면 색욕과 같은 인간적인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것보다도 좀더 약다운 것으로 연명 장수에 뛰어난 효과가 있고 어느 때 식사의 일부로 쓰여지는 것으로는 천문동, 지황, 고려 인삼, 창출, 자운영, 여뀌 등 그 밖에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들지 않기로 한다.
중국의 약전은 유럽의 과학자들에게 광대한 연구 분야를 제공하고 있다. 간장에 조혈의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서양 의학이 발견한 것은 고작 지난 10년 이내의 일이지만 중국인은 옛날부터 간장을 노인에게 소중한 강장제라고 생각하여 왔다. 서양의 도살 업자가 돼지를 죽이면 신장, 위장, 장(그 안에는 위액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피, 골수, 뇌 등 가장 많은 영양 가치를 지닌 부문을 모두 버리고 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뼈는 인간의 피의 적혈구를 만드는 장소라는 것이 요즘에 와서 겨우 발견되어 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양 뼈, 돼지 뼈, 쇠 뼈 등을 훌륭한 수우프로 만들지 않고 버리고 만다는 것은 놀랄 만한 식품 가치의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는 바로는 음식에서 미미, 진미를 구하는 음식 철학은 결국 다음의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즉 신선함과 풍미, 이와 혀끝에 닿는 감촉이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명요리사라 할지라도 요리해야 할 신선한 재료가 없다면 쪼글쪼글한 캐비지 요리 한 접시도 만들 수 없을 것이며, 사실 요리법의 명인은 이르기를 훌륭한 요리를 만들려면 그 절반은 재료 사들이기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17세기의 위대한 쾌락주의자이며 시인이었던 원매가 고용했던 요리사는, 요리를 만들라고 주인이 말해도 구하는 재료가 한창 제철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로 만들지 않는 사나이였는데 원매는 그를 위대한 권위를 가진 사나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썼다. 이 요리사는 매우 성급한 성질의 소유자였으나, 주인이 음식의 풍미를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랫 동안 계속해서 일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떤 특별한 연회의 요리사로서 정중한 태도로 부탁하지 않으면 절대로 오지 않는 예순이 넘은 늙은 요리사가 지금도 사천성에서 살고 있다. 더우기 재료를 사 모으는 데 1주일 동안의 여유를 주고 절대로 자유럽스럽게 자기 생각대로 해야 하며, 메뉴의 결정도 일체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연하다든가 쫄깃쫄깃하다든가, 꼬들꼬들하다든가, 입에 닿는 감촉이 아주 좋다든가 하는 음식을 씹는 감촉은 대부분 얼마 동안 불에 올려 놓느냐, 화력을 어느 정도로 조절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중국 음식점에서는 가정에서는 만들 수 없는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은 훌륭한 화덕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풍미에 대해서 말한다면 음식에는 분명히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소금이나 간장 외의 양념은 넣지 않고 음식의 재료 자체에서 나오는 국물로 요리를 하면 가장 맛있는 것이 첫째 경우이고, 다른 음식의 맛과 합하게 하는 것을 최상의 방법으로 하는 음식이 두 번째 경우이다. 생선의 경우를 말한다면 신선한 등어나 송어를 가장 맛있게 먹으려면 물고기에서 저절로 나오는 국물로 요리를 해야 하며, 청어와 같은 기름진 생선은 소금에 절인 중국산 완두콩과 함께 요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요리 방법은 없다. 옥수수와 콩을 함께 익힌 미국의 서커테시 요리 같은 것은 완전히 맛이 조화된 요리의 좋은 예라고 하겠다. 자연계의 어떤 종류의 맛은 서로 다른 음식의 맛과 함께 섞었을 때 비로소 가장 훌륭한 맛이 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죽순과 돼지고기는 아주 좋은 한쌍인 모양이어서 서로 상대편의 냄새를 빌어 오고 자기의 냄새를 빌려 주게 되어 있다. 햄은 단것과 잘 조화가 되는 모양이어서 내가 상해에 있을 때 부리던 요리사는 햄과 품질이 좋은 황금빛 북경 대추를 함께 찜통에 넣고 쪄서 만드는 요리를 아주 잘하는 것이 자랑이었다. 검은 목이버섯과 오리알도 수우프로 만들면 잘 어울렸고 뉴우요오크의 새우는 소금에 절인 중국의 비거(두부소오스)와 잘 맞았다.
사실 자기가 지닌 맛을 다른 음식에 빌려 주는 것을 주요한 구실로 삼고 있는 식품은 상당히 많다. 버섯, 죽순, 사천성의 잡채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가장 진귀하게 여기는 음식물로서 제 자신의 맛은 없고 전혀 다른 식품에서 맛을 빌어서 만들어지는 음식도 상당히 많다. 중국 요리 가운데 가장 값비싼 것으로 빠져서는 안되는 세 가지 특징은 빛이 없고, 냄새가 나지 않으며, 이렇다 할 뚜렷한 맛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식품은 상어 지느러미, 제비 둥우리, 은이버섯을 들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는 하나 같이 걸쭉한 교상이며 무색, 무취, 무미다. 이러한 것들이 어째서 굉장히 맛이 좋은가 하면 언제나 가장 값비싼 수우프를 만드는 데만 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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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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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9. 안셀무스
신존재 증명
11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일생에는 끊임없이 폭풍우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15세가 되던 해에 안셀무스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의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그에 대해서는 검소한 부인과는 정반대로 병적이다시피 지나치게 낭비벽이 심했다는 사실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아들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때 어린 안셀무스는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꾀를 하나 생각해내었다. 그는 수도원장을 감동시켜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에게 병이 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것이다. 안셀무스는 실제로 심하게 앓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매우 종속적이었던 수도원장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 안셀무스에게는 건강을 다시 회복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별 도리없이 안셀무스는 건강을 즉시 회복한다.
안셀무스는 성년이 되어서 드디어 노르망디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원장을 거쳐 원장이 된다. 그는 원장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전기 작가가 전하듯이, 그가 신에 대한 인식의 결과로서 인간에 대해서도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수도원 학생들에게 라틴어 문법 변화를 가르칠 때만은 신경질을 냈다. 그는 나중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따라서 영국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것 역시 극적인 사건의 전개 없이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대주교의 자리를 거절하려고 하였다. 이때 그의 성직계의 친구들과 속세의 친구들은 일종의 기습을 감행한다. 즉 안셀무스가 왕의 병상에 위문차 왔을 때, 그를 꽉 붙들고 강제로 손을 벌리게 해서 그에게 주교의 지팡이를 쥐어 준 것이다. 그 후 친구들은 그를 교회로 데리고 가서 감사의 찬미가를 부른다. 안셀무스는 끝까지 거절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그러한 짓궂은 장난에 불쾌한 내색도 하지 못하고 대주교가 되어야만 했다.
사실 안셀무스가 대주교의 자리를 꺼릴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복잡한 정치에 휩쓸리게 되고, 이 일은 그에게 논쟁거리만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특히 중요한 것은, 과연 왕이 주교를 선임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안셀무스는 그 일로 인하여 왕과 교황 모두에게 의무를 지고 있는 어려운 입장이 된다. 그는 항상 면직의 위협을 받는다. 말년에 그는 몇 년 동안 영국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한다. 상황은 첨예화되어 왕은, 안셀무스가 로마로 여행하려 할 때, 돈이나 다른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려 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의 짐을 수색할 정도까지 되었다. 안셀무스는 절망에 빠져 떠나기 전에 미리 교황에게 편지를 쓴다. "저는 이미 4년 동안 대주교로 있었으나 전혀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영혼은 몸서리치고 추악한 혼란 속에서 무익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국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을 수 있기를 날이면 날마다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셀무스가 이 모든 폭풍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평온을 찾아 그의 중요한 저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한층 더 경탄할 만하다. 그는 이 저술들로 중세 철학과 신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특히 두 가지 사상 영역에서 이러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진다. 즉 사유와 믿음의 관계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신존재 증명이 시도된다.
먼저 믿음과 사유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안셀무스는, 인간의 이 두 가지 능력 즉 믿음과 사유 중 어느 것도 그것 하나만 갖고서는 진리를 파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앎은 본질적인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앎은 믿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단순한 믿음도 앎과 연결되지 않는 한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과 사유의 관계에 대한 안셀무스의 근본 명제는,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이다. 똑같은 의미로 그든 "앎을 추구하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믿음은 모든 심오한 앎에서 없어서는 안 될 출발점이며, 인간은 필연적으로 믿음으로부터 앎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안셀무스는 어떤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먼저 두번째 문제, 즉 믿음은 그 자체 본질상 인식을 가리키고 있다는 명제와 관련해서 안셀무스는 사랑의 개념으로 되돌아 간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알고 싶어한다. 따라서 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역시 신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결론 짓는다. "내가 믿음을 확고하게 한 다음 믿고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태만함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명제에서는 믿음은 인식에 선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올바른 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믿음의 심오함을 이성으로 탐구하려고 하기에 앞서 그것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이 주장도 사랑과 관련지어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신에 대한 인식은 중립적인 앎이 아니라 신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쏟는 통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식은 신에게로 향한 사랑을 필요로 하며, 이 사랑이 곧 믿음이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내가 믿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 상호 관계에서 본다면 이성과 신앙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안셀무스는 이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즉 신은 이성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창조자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모순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신적인 앎에 관해서도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해도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안셀무스는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이성만으로, 따라서 순수 철학적 방법으로 신존재 증명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전기 작가의 증언에 따르자면, 안셀무스도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을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신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셀무스는 신존재 증명의 시도에서, 우선은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려 놓은 선을 따른다. 안셀무스는 현실을 볼 때, 모든 것이 다소 선하거나 다소 완전하다는 그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선함과 완전함의 척도를, 그것도 절대적인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준해 모든 선을 측정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최고의 선은 다른 선을 통해서 고찰되는 유한한 선이 아니라, 그 스스로 선한 선이다. 더 나아가 안셀무스는, 우리가 선하다고 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최고의 선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러한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최고의 선은 창조의 원리이며, 그래서 안셀무스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위대함은 절대적인 위대함을, 모든 존재자는 절대적인 존재자를-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신으로 파악되어야 한다-전제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후대에 안셀무스는 처음보다 훨씬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방식의 신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이때 출발점으로서 그는 전제가 필요없는 증명의 근거를 찾아 나선다. 그는 그러한 근거를 신이라는 순수한 개념에서 발견한다. 모든 인간이 어리석은 사람이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더 이상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신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절대적으로 커다란 것으로서의 신의 이데아가 실재한다. 이때 커다란 것은 양적인 뜻이 아니라, 존재 가능성의 최대 가능한 충일로 이해해야 한다. 추론은 이렇게 전개된다. 만일 신이 지성 속에 존재한다면, 실제적으로도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지 이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이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존재하는 그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념적인 신에게는 완전함, 즉 존재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으로서의 신은 실제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인 신도 지성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
안셀무스는 어떻게 이러한 사상이 그의 정신 속에서 생겼는지를 다음과 같이 감명깊게 묘사한다. "나는 자주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보았다. 때때로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파악했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정신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나는 결국 나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절망적이고 불가능하다고 여겨 이 시도를 포기하려고 하였다. 쓸데없는 일에 나의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그 생각들을 머리에서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버둥거리며 저항을 해도, 그 생각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나를 엄습해 들어왔다. 어느날 내가 이제는 이 격렬한 엄습에 맞서 싸우기에도 지쳐 버렸을 때, 사유는 내가 그 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발견하려 애썼던 그것을-발견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고의로 억제해 왔던 그것을-내게 안겨 주었다."
안셀무스의 가장 독특한 창작인 이 신의 개념을 통한 신존재 증명은 파란 만장한 역사를 갖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벌써 이 증명을 거부한다. 칸트는 그 유명한 100개의 은화의 예를 끌어들여 이 증명에 반대한다. 생각 속의 100개의 은화는 실재의 100개의 은화보다 적을 수가 없다. 단지 이때 거기에 존재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라는 말은 첨가되어 사실을 좀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사실 내용적인 술어가 아니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특히 헤겔은 안셀무스의 증명을 다시 받아들인다. 헤겔은 물론 이 증명을 합리적인 증명으로서가 아니라 "사유 속에서 정신으로 신에게로 고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실 안셀무스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 밖에 가우닐로라는 이름의 수사가 이미 안셀무스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신존재 증명에 대해 회의를 나타냈다. 가우닐로는 만일 우리가 이 증명을 인정한다면, 결국 우리는 가장 완전한 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선에도 존재가 첨부되어야만 그 최고도의 완전함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우닐로는 그의 신존재 증명에 대한 비판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수도원에 감금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신존재에 대한 연구는 가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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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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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엄마
어느 일요일, 학교에서 소풍을 가다가,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잃어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친 듯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에스텔! 에스텔!"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아들을 발견해 내고는 달려가서 두 팔로 그를 끌어 안았다.
"왜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에스텔이라고 이름을 불렀지?"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전에는 한 번도 엄마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대답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곳은 엄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 '엄마'라고 부른다면 수많은 어머니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곳은 어머니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너는 엄마를 개인적으로 불러야 한다. 하느님 역시 개인적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면,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면, 신은 너의 삶에서 아무런 진실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힘
한 어린아이가 정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주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리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커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네 힘을 다 사용하고 있지 않구나." "아니에요. 저는 모든 힘을 다 쓰고 있는 걸요.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았잖니? 그것도 역시 너의 힘이란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데도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더구나. 그것이 네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 테크닉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에너지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테크닉만을 갖고 명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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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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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1장 우리는 왜 국사를 배워야 하는가?
2) 역사의 주인
역사학의 대상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역사학은 인문학의 한 분야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역사학자의 연구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것들은 제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문제에 한정된 활동도 역시 제외하는 게 보통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학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사회적인 활동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모두 역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파는 일도 사회적 활동이고, 옆집에 사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역사가의 서술 범위에 들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가들은 사회의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도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역사학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실체를 '사실'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은 이 사실을 밝히는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이 모두 역사서에 수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가운데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실만을 뽑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사회적 가치가 역사학자의 서술기준이 되는 셈이지요, 이는 아마도 '역사=교훈'이라고 하는 관념때문일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동서양 모두 "역사는 정치 기록"이라는 인식이 전통적 역사관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는 기존의 역사가 지배픙 중심의 기록을 일관해온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다만, 동양의 경우 유교 경전의 영향으로 백성 혹은 백성의 뜻을 중시햇고, 심지어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아 같이 주권재민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이 통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조세.군역.요역의 대상이요, 왕을 위시한 지배층의 생활 근거였으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다수 혹은 집단으로서의 백성은 중시되었어도 개별화된 백성은 홀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오랜동안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해온 사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웅사관입니다. 영웅주의 또는 영웅중심사관이라고도 불리는 영웅사관은 어떤 한 사람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해당 시대를 설명합니다. 영웅을 시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표로 인식한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와 같은 용어가 그에 해당됩니다. 우리 나날의 경우에는 광개토왕 시대, 세종대황 시대라는 용어를 지적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선왕조를 일컫는 이조라는 명칭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아주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특출한 지도력을 발휘했을 때 그를 부각시킬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사람도 사회 구성원의 하나이며, 사회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한계를 분명히 전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와 조직 그리고 인력 등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영웅사관은 이 점을 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사관에는 한 사람이 시대 혹은 사건에 대한 공적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전통에서 승리하고 난 뒤, 지휘관 한 사람만 훈장을 받는 등 각종 포상을 독차지하고 나머지 병사들의 공적이 무시된다면 이처럼 불공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웅사관하에서는 이런 일이 공공연히 일어납니다. 살수대첩-을지문덕, 귀주대첩-강감찬, 한산대첩-이순신 등의 역사 인식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시대 상황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물줄기를 연상시티는 그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민중사관
영웅사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은 것이 이른바 민중사관입니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입니다. 역사 인식의 폭을 녋혔다는 점에서 민중사관은 영숭사관에 비해 한 단계 발전한 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중'의 범위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민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구를 민중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보통 민중과 피지배층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민중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피지배층의 범위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주류는 일단 하층민입니다. 그리고 서기에 중류층이 포함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민중이란 보통 하층민과 중류층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말뜻만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상류층 역시 지배자는 아니기에 민중과 유리될 수 없습니다. 크게 보아서는 지배층도 민중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늘날 자신을 민중과 무관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없은 것입니다. 비록 분명하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누구를 민중이라 할 수 있을지 관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심에는 일반 서민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그들 서민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그들의 역할을 강조해야 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한 자기 심각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동서양 모두 정치사 중심의 역사 지속되는 동안 피지배층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그에 따라 민중에 관한 문헌자료가 빈곤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그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쉽지는 않습니다. 설령 자료가 충분하다 해도 역사의 주체를 항시 민중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인간 사회의 변화에 어느 정도나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민중의 역할은 강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들의 덩치는 점점 작아집니다. 왜 그럴까요?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물론 소중한 존재이지만, 역사상 그들을 무한정 강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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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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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池肉林(주지육림) 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방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주왕은 본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임금이었으나, 달기라는 요부에 빠져 그만 극악무도한 폭군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잔혹한 형벌을 고안해 내어 자신을 반대하는 관리나 백성들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여기에서 쾌락을 느꼈다. 그는 향락을 위하여 높이가 천척(千尺)에 달하고 둘레가 삼리(三里)나 되는 궁전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노역케 하였다. 화려한 궁실(宮室)이 완성되자 각지의 준마(駿馬), 명견(名犬), 미녀(美女) 등을 수집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던 그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덩이를 걸어 숲을 이루게(以酒爲池, 懸肉爲林)한 다음, 많은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발가벗고 서로 희롱하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하며, 자신도 먹고 마시면서 이러한 광란의 잔치를 감상하였다.
酒池肉林(sumptuous feast) 이란 지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술자리나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기업들의 연이은 부도 속에서도 향락 산업만은 불황을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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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典》'史記' 帝王世紀 十八史略
고대 중국의 夏나라 걸왕(桀王)과 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와 달기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 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殷나라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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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디오르, 브래스, 클라인, 지방시, 드라 렌타, 폰 프루스텐베르그, 카시니, 가르뎅, 로렌, 구찌. 역사는 오늘날의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기록에 담고 있지만 지금까지 계속 왕족이나 귀족의 옷을 만들어온 재단사, 드레스 메이커, 재봉사들의 이름은 어떤 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패션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가장 일찍부터 프랑스와 밀라노는 유럽의 2대 패션의 중심지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8세기 말까지 중요한 것은 옷자체(모양, 세공, 색, 소재, 그리고 물론 그것을 입고 걸어다니는 사람)로서 디자이너가 나설 공간은 없었다. 디자이너 의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고 브랜드 현상의 어버이가 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이름은 로즈 베르탄. 그녀야말로 명성과 신망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얻어낸 최초의 디자이너다. 1700년대 중반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로즈 베르탄은 재능을 타고나긴 했지만 몇 차례의 행운을 만나지 못했다면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로즈 베르탄은 1770년대 초에 파리에서 부인용 모자 가게 주인으로 출발한다. 그 가게의 멋진 모자는 샤르트레 공작 부인의 눈에 띄었고 부인은 베르탄의 후원자가 되어 그녀는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난다. 이 오스트리아 여왕은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는 드레스 모양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로즈 베르탄은, 나중에 프랑스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또 유명한 왕비가 되는 이 여성의 의상을 모두 위임받는다. 로즈가 프랑스 황태자비를 위해 만든 사치의 극치인 의상을 두고 여제는 마치 무대 여배우처럼 야하다고 슬퍼했으나, 프랑스 궁전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빼앗았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더욱 많은 시간과 돈을 패션에 쏟아 붓는다. 그 낭비가 국가적 스캔들까지 되었을 때 로즈 베르탄의 살롱은 파리 패션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로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주 두 번씩 만나 새로운 드레스를 만드는 한편 프랑스 대부분의 귀족, 스웨덴이나 스페인의 왕비, 데본샤 공작 부인, 러시아 황후들의 의상까지 만들고 있었다.
로즈 베르탄의 의상에는 엄청난 가격이 붙었다. 하지만 몰아치는 혁명의 폭풍도 그 가격을 내리는 일, 의상의 수요를 줄이는 일, 왕비의 패션광적인 집착(이것이 체포의 방아쇠가 되었고 결국에는 단두대로 향하게 만든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만)을 억제하는 일 가운데 이루지 못했다. 1791년 6월 초에 남편인 앙투아네트는 로즈 베르탄에게 대량의 여행복을 시일 안에 빨리 맞추라고 주문을 한다. 그런데 이 주문이 발각되어 왕과 왕비가 국외 도주를 꾀하고 있다는 의심을 뒷받침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왕비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고 1793년에 단두대에 선다. 로즈 베르탄은 프랑크푸르트로 도망갔고 그 후 런던으로 옮겨가 유럽과 아시아 귀족의 의상을 계속 디자인했으며 나폴레옹이 치세하던 1812년에 세상을 떠났다. 로즈 베르탄의 세계적인 명성으로 사람들은 의상을 디자인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부티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만든 의상에 자신의 이름을 넣게 된다. 그리고 파리의 디자이너인 샤를르 윌트는 1846년에, 오늘날에는 저작권법에 따라 위조나 모조가 금지되어 있는 브랜드 의상을 패션 모델을 써서 알린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이렇게 해서 전속 디자이너가 있는 고급 양장점이 탄생한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태어나 커다란 이익을 낳는 산업으로 발전한 것은 19세기의 일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패션 쇼와 동시에 일어난 기성복 보급이 서로 어우러진 결과다. 오늘날 백화점이나 옷가게에 가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마음에 드는 옷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이 옛날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성복이 나타나서 편리해진 지는 아직 300년도 지나지 않았고 양질의 기성복이 탄생한 지는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필요할 때 전문 재봉사나 집안의 여인네들이 옷을 만들어 왔다. 첫 기성복은 남성용 양복이다. 헐렁하고 볼품없는 싸구려 옷이 1700년대 초 런던에서 팔리고 있었다. 모양을 존중하는 남성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손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재봉사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되면서도, 몸에 맞지 않는 이 양복은 아무리 헐렁거리더라도 특별한 때를 위해 꼭 양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나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구입되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하층 계급의 시민이 귀족보다 훨씬 많았는데 대부분이 귀족에게 지지 않으려고 분발하고 있었으므로 기성복 양복이 많이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기성 양복은 리버풀이나 더블린에서도 만들어졌다. 재봉사 길드는 이 유행을 억누르려고 기성복을 위법이라고 못박는 법률을 정하라고 청원한다. 그러나 의회는 그런 성가신 일에 말려드는 것을 피했고, 기성복을 사는 사람이 더욱 늘어나자 길드를 버리고 이 새로운 수요에 따르려는 재봉사의 수도 증가했다. 1770년대가 되자 기성복 선풍은 유럽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를 엄습한다. 재봉사들은 질도 좋고 몸에 맞는 양복을 만들려고 경쟁하게 된다. 게다가 양질의 기성복은 상류 계급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70년대 말기에는 프랑스의 6개 회사가 양복과 제2의 기성복인 코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트는 특히 어부들이 마음에 들어 했다. 항구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 옷을 몇 번씩 가봉하여 몸에 맞추어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옷은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모양이나 기호, 사이즈도 모르는 남이 만드는 옷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양이나 색이나 소재를 여러 가지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이상, 옷을 만드는 데 들이는 커다란 수공을 절약할 수 있는 일등의 기성옷에는 맞춤복에 없는 이점이 많이 있으므로 결국에는 여성들도 기성복의 커다란 매력에 지고 만다.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처음으로 커다란 기성복 제조 회사가 1824년에 파리에 탄생했는데 꽃가게와 비슷하다고 하여 라벨르 샤르디네르(아름다운 꽃바구니)라고 이름지었다. 거의 같은 무렵인 1830년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퍼드의 브룩스 브라더스가 신사용 기성복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두 가지 발명에 힘입어 기성복 제조업은 오늘날처럼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한다. 우선 재봉틀이 옷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옷을 손바느질 외의 방법으로 재봉한 것이다. 나아가 신사복, 부인복, 아동복 각각에 규격 사이즈를 채용함으로써 제2의 돌파구가 열린다.
1860년 무렵까지 천은 두 가지의 방법으로 사이즈에 맞도록 재단했다. 한 가지는 가지고 있는 옷과 똑같이 새로운 옷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는 옷을 풀어서 천 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또 다른 방법은 모슬린을 대략적인 형태로 재단하여 가봉하고 시착한 다음 다시 한 번 모양을 바로 잡는 작업을 몸에 딱 맞을 때까지 되풀이한다. 그런 다음 완전하게 형태가 갖추어진 모슬린 형태를 실제로 옷을 만들 좀더 값비싼 천에 대고 베끼는 것이다.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은 언제나 고급복의 재봉에 채용되고 있었는데 이 방법은 아무리 봐도 대량 생산용은 아니었다. 1860년대에 업계는 규격 사이즈에 맞춘 '사이즈별 옷본'을 채용한다. 손님은 이제 기성복을 살 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몸에 대보고서 어느 것이 가장 잘 맞는 사이즈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정에서도 잡지나 가게의 카탈로그에 실린 것이나 통신 판매용 옷본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875년까지 옷본은 1년에 1천만 장 판매되었고, 옷본을 사용한 옷을 입는 사람을 멋쟁이로 부르게 되었다. 맞춤복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빅토리아 여왕마저 왕자를 위해서 당시 가장 인기가 높던 패털릭 옷본을 사용한 양복을 주문하고 있다. 기성복에는 어딘가 민주주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이 모두 평등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자이건 거렁뱅이건 대부분의 사람이 한정된 몇 가지의 사이즈에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패션이 소수의 부자 계급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손쉬운 것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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