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6. 에피쿠로스와 제논
의무 없는 행복과 행복 없는 의무
에피쿠로스와 제논, 그리스 후기 철학자인 이 두 사상가는 에피쿠로스적인 세계관과 스토아적인 세계관의 창시자이며, 정반대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좀 괴상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대척자(지구상에 정반대되는 곳에 사는 사람)이다. 이 말은 두 사람의 발이 서로 반대되는 땅위에 서 있어서, 그들의 머리는 정반대되는 것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단 한가지 점에서 일치할 뿐이다. 그들이 그리스적 정신이 몰락해 가는 시대에 살았던 만큼, 이 두 사람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순수한 철학적 인식이 아니라, 갈수록 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올바른 위치, 특히 철학자의 올바른 위치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똑같은 물음에서 시작한 그들은 서로 정반대되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선 에피쿠로스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고대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쾌락에 빠졌다는 소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은 것을 토해 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밤마다 벌어지는 연회에 자신의 정신력을 모두 탕진해 버렸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사랑의 향락에 흠뻑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몇몇 단편에 포함되어 있는 창기와의 잦은 서신 교환과 부인들을 은근히 유혹하는 듯한 편지들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가 그 중 한 여자와 그 여자의 집에서 동거했다는 사실은 특히나 매우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그가 그의 동생을 중매해 주었던 것 역시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또 악의 있는 어떤 적대자는 12통의 음란한 편지를 그가 쓴 것이라고 무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못된 짓을 하느라고 진지한 학문 연구를 등한히 하였다고 전해진다. 요컨대 사람들은 에피쿠로스를 여지없이 깍아내렸던 것이다. 로마의 엄격한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그를 단 한마디로 "방탕자"라고 부른다. 또 다른 후세 사람은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을 심지어 "에피쿠로스의 돼지들"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물론 제자들과 후대의 추종자들은 스승의 이런 모습을 극구 부인한다.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자로 칭송받았다는 것이다. 학파 내부에서는 어쩌다가 가끔 기껏해야 딱 한 잔의 포도주만을 마셨을 뿐, 대개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주 어려운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콩요리로 연명했다 한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그의 온화함과 자기 만족을 보면 그의 생활을 하나의 신화라 부르게 된다." 또한 그의 말에 따르자면, 에피쿠로스는 관능적인 사랑도 삼가했다고 한다. "사랑의 향락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철학자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더 있다. 그는-이것은 그의 유언장이 증명하고 있다-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노예와도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다. 노예에게도 철학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유언장에는 노예를 해방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자신의 학문적 연구에 관해서 에피쿠로스 자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미 14세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관심을 일생동안 한번도 등한시한 적이 없었다고. 이에 대해 그는 그의 마지막 이별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인상적으로 쓰고 있다. "매우 행복했던 삶의 나날을 다시 한번 경하하며 동시에 삶의 순간을 마감하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오줌이 나오지 않는 괴로움과 이질로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철학적 대화를 상기하면서 내 영혼의 기쁨은 이 모든 고통을 견며 냅니다."
비난과 변호,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의 공통적인 배경을 갖는다. 그것은 에피쿠로스가 어떻게 자기 시대의 위기를 견뎌 내려고 했는가하는 방식이다. 에피쿠로스는 그리스 말기에 덮쳐 온 인간 현존재의 의미에 대한 무력감에 직면하여 인간의 삶의 본질은 행복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을 피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쾌락은 행복한 삶의 근원이자 목표이다." 비록 에피쿠로스가 육체적인 향락을 경멸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말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쾌락은 정신의 아름다운 황홀경을 추구한다. 즉 대화를 나누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철학함을 추구한다. 에피쿠로스는 참된 쾌락과 참된 행복은 영혼의 고요한 평정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격정을 침묵시킬 때에 도달할 수 있다. 즉 두려움, 욕망, 고통 등과 같은 이 모든 "영혼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격정을 가라앉히면, "우리 영혼으로부터의 그 모든 혼란은 사라진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최대 과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에피쿠로스가 철학이라 이해했던 그것, 즉 실천적 삶이 구현되는 셈이다 "어떠한 격정도 치료하지 못하고, 격정을 영혼에서 내몰지도 못하는 그러한 철학자의 이야기는 공허하다." 그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본래적인 철학적 태도, 즉 정신의 "의연함", 영혼이 누리는 "바람 한점 없는 잠잠함", "바다와 같은 고요함"이 나타난다.
그런데 어떻게 철학이 그런 식의 "영혼의 치료약"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철학이 격정의 들판을 벗어나 이성의 차원으로 들어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쾌락의 영역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성의 차원에서 철학의 최고 쾌락이 생겨 나온다. "인간은 이성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쾌락이 넘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반대로 쾌락이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이성적으로 생활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통찰과 실천적 삶으로 이해된 철학은 인간 현존재의 절정에 이른다. "오직 명석한 사고만이 우리에게 즐거움에 넘친 생활을 마련해 준다", "이성은 우리의 최고선이다." 영혼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면, 철학자는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자기 만족을, 정신의 행복한 자유를 느끼며 살게 된다. "자기 만족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인간이 오직 그의 주위 세계의 예속에서 해방될 때 획득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표어는 "은둔 생활을 하라!"이다. 이것이 성공하게되면 철학하는 사람은 "인간 가운데서 신처럼"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적인 생활로의 귀환은 철학자가 공적인 생활에 대한 요구, 특히 정치적 생활에 대한 요구에서 될 수 있는 한 물러서야 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철학자는 부와 명예와 권력의 유혹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철학자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크게 관여할 필요가 없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공적인 의무를 멀리 한다. 그 모든 일은 단지 영혼의 혼란만을 조장할 뿐이다. "인간은 생업과 정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의 방식은 결코 은둔자의 자세가 아니다. 에피쿠로스가 그의 집합 장소인 "정원"에서 우정을 향유한 것을 보면, 공적인 생활의 자리를 이제는 우정이 대신한 것이다. 그 후의 모든 에피쿠로스 학파 학자들은 이 우정의 생활을 실천했다. 왜냐하면 "우정을 얻을 수 있는 재능은 지혜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우정을 맺으며 살도록 만들었다." 보통 때 냉정한 에피쿠로스도 이 말만은 떨리는 시적 억양으로 말한다. "우정은 지구의 주위를 춤추며 돌면서, 우리 모두에게 행복에 눈을 떠야 한다고 공언한다."
공적인 생활 이외에 철학자가 이성적인 영혼의 평온함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이 세계관은 현실을 불안한 것으로, 또한 모든 실재 심지어 인간까지도 지배하는 강력한 자연의 힘이나 어두운 운명의 유희장으로 파악하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신화와 또 몇몇 초기 철학자가 구상한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세계관이 허용되지 않도록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는 이러한 의도로-순수 인식에 대한 충동에서가 아니라-자연 철학에 헌신한다. "우주의 본성이 어떻게 성립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그저 시인들이 지어 낸 신화가 우주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를 따라 아주 의심스러운 표상만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불안에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피쿠로스는 자연에 대한 고찰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인다 사실상 실재하는 것은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사물이 아니며, 어떤 무한한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력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맹이, 즉 원자이다. 원자는 그 수가 무한하고 크기와 모양 그리고 무게가 아주 다양한데, 이러한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고 다시 분리되기도 한다. 원자는 무한히 텅 빈공간에서 영원한 운동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서 사물을 만들어 낸다. 이때 원자가 무한히 많기에 무한히 많은 세계를 산출해 낸다. 영혼까지도 아주 미세한 원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가 이런 식으로 파악된다면 세계는 더 이상 인간에게 위험한 거주지가 아니다. 이 경우 철학자는 더 이상 세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한층 심화된다. 철학자의 조용한 자족을 특별히 방해할 수 있는 것으로는, 신들이 분노와 벌로써 또는 호의와 표상으로써 인간 생활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신들에게서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을 빼앗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을 현존재의 가장자리로 내몰아 버린다. 그는 인간에게 해를 줄 수 없는 체류지를 마련해 신들을 그곳으로 보낸다. 신들은 세계 사이의 중간 지정에 거주한다. 신들이 그곳에서 이 세상의 사건에 관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도 그러한 신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그들의 안식처에서 신들은 지복의 삶을 누리고 있다. 그곳은 철학자의 삶과 비교될 수 있다. 다만 신들의 삶이 훨씬더 완전한 삶일 뿐이다. "신성은 불사 불멸하고 지고 지순한 행복의 존재이다." "신들의 생활형태는 더 이상 복되고 더 이상 풍부한 선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삶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불안의 원천인 죽음과 인간 현존재의 무상함이 아직 남아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그리스 정신의 근본 경험에 속해 있고 고대 말기에 한층 심화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는 죽음의 본질을 성찰하면서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좀더 정확하게 고찰해 보면 죽음은 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그것만을 실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찾아들지 않았다. 죽음이 찾아들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통찰이 본질적으로 삶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죽음이 일종의 무일 뿐이라는 인식은 덧없는 삶을 비로소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영혼의 한결같은 평온함에 대한 관심은 불사 불멸의 사상도 거부한다. 죽음과 더불어 육체와 영혼을 형성해 왔던 원자들의 결합이 해체되고, 개별자는 소멸해 버린다. 이 사실을 통찰하게 될 때, 인간은 신들이 제멋대로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린다는 내세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내세의 운명이란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인간이 이 제한된 삶을 살면서 현세의 그 모든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모든 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에 의해 좌우되고, 정신의 성찰도 바로 여기에로 이끌고 가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철학함 역시 필연적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젊은이는 철학함을 망설여서는 안 되고, 늙은이는 철학함에 지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의 건강을 돌보기에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제 에피쿠로스와는 정반대되는 사람인 제논에 대해서 알아보자. 제논은 에피쿠로스의 학설과 생활 방법을 극단적으로 거부하였다. 제논은 에피쿠로스가 최고의 행복으로 간주한 쾌락을 몹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는 쾌락을 "매우 많은 청년의 영혼을 나약하게 만드는 유혹녀"라고 했다. 제논에게는 쾌락의 자리에 의무가 들어선다. 제논은 겉으로도 항상 엄격하고 준엄하게 행동하였다. 고대의 증인들은 서로 다투어 그의 특이한 모습을 기술하기에 정신이 없다. 그는 야위었지만 장딴지는 굵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한 체격은 아니었고 약간 수척한 편이었다. 항상 머리가 갸우뚱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세였으며, 이는 그리 크지 않은 키 때문에 특히 눈에 띄었다. 왜 재치 있는 전기 작가가 그러한 모습을 이집트인 크레아티스와 비교해 묘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준엄한 외모 뒤에는 근엄한 정신이 깃들여 있었다. 제논은 외관상 조금 어두운 분위기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을 정신적인 오만함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가 다정 다감하고, 품행이 단정하였다고 칭찬하기도 한다. 첫번째 특성에 대한 증거는 지나칠 정도의 수줍음을 탔다는 것인데, 이 수줍음 때문에 그는 특히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두번째 특성에 대한 증거는 그가 한두 번 창녀와 교제를 했는데, 마지막 교제는 다만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로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실 때에도 절제하거나 삼가하였고, 요령껏 연회를 피해 다녔다. 좋아하는 음식은 녹색 무화과와 빵과 벌꿀이었고 여기에 곁들여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셨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의 외투는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한다. 매우 금욕적인 사람을 특징지을 때, 상투적으로 "철학자 제논보다 더 금욕적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을 정도이다. 어쨌든 그가 92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생활 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했음에 틀림없다.
이 모든 괴팍함에도 불구하고 제논의 정신적 출현은, 특히 그가 많은 무리의 젊은 추종자들을 가진 것을 보아도 매우 중요하다. 마케도니아 왕은 아테네에 체류할 때마다 제논의 강의를 빠뜨리지 않고 경청하였다 한다. 이렇듯 제논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점차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이 그에게 도시의 열쇠를 맡겨 보관하도록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황금 월계관을 씌웠고, 그의 명예를 찬양하기 위해 동상을 세웠으며,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묘비를 세워 주었다. 그런데 사실 제논은 우연히 철학을 하게 되었다. 그는 본래 크게 성공한 상인이었는데 한번은 배가 침몰하여 엄청난 양의 화물을 잃은 일이 있었다. 그때 아테네의 어떤 책방에서 한 권의 철학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제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학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고, 그 이래로 그는 배의 침몰이 아주 도움이 되는 사건이었다고 자랑하였다. 한편 철학함에 있어서는 더 깊이 항해를 해나갔다. 어떤 고대의 증인은 그에 대해 "언제나 사물의 근본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진지한 탐구가였다"고 한다. 제논과 그의 젊은 제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얼룩덜룩하게 채색된 주랑이었기 때문에 그 학파는 "스토아"(건축에서 주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것도 특징적이다. 쾌락의 사도 에피쿠로스가 정원의 뜰 안에서 머물고 있는데 반해, 쾌락의 적대자이며 의무의 사나이인 제논은 엄격하고 진지한 건축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제논의 철학적 사상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려면, 이와 일치하는 후대 스토아 철학자들의 견해를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고대의 증인들은 뚜렷하고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위 중기 스토아 철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파나이티오스, 포사이도니오스와 로마 철학자인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은 여기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이 두 학파는 스토아 학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은 클레안테스이다. 그는 전직 직업이 권투 선수였는데, 게으른 거지 같은 사람으로서, 밤마다 물을 긷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경마사 출신인 크리시포스이다. 그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만일 신들이 철학을 한다면 그들은 크리시포스 식으로 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초기 스토아 철학자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출발하였다. 그때는 의지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의지할 기반에 대한 물음이 최우선의 문제였다. 따라서 철학은 그들에게 인간 현존재에 직접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철학은 "삶을 영위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는 생활의 의미를 에피쿠로스처럼 쾌락과 향락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서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 배후에는 인간은 더 이상 우주와 도시 국가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에 단지 그저 자기 자신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의 도덕적 과제는 어떤 보편적인 덕의 구현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인간의 특별한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양 정신사에서 처음으로 인격 개념이 등장하고, 이 개념은 후기 그리스도교 사상을 거쳐 특히 괴테 시대에 이르러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스토아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가? 제논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자연 본성과 일치하여 살 때 자신과의 일치에 이른다." 따라서 자기 실현은 주관적 임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법칙, 즉 인간 속에 있는 자연 본성과 결부된 문제이다. 자기 자신과 일치된 행동을 하여 그래서 자기의 내면 속의 자연을 실현하는 사람은, 동시에 우주의 포괄적인 법칙과 일치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자연을 파악하려는 스토아 철학자의 관심이 생겨난다. 그것은 순수한 지식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기 인식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 관심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관심보다 더 진지한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는 닫지 세계에서 야기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세계를 파악하려 한다. 이에 반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는 도덕 그 자체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기 위해 자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자연에 대한 인식을 얻으려는 노력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 말고 어떤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스토아 학파는 자연의 본질도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다르게 이해한다. 스토아 학파는 자연을 아무런 의미 없는 우연한 원자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력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하나의 강력한 자연의 원리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불이라고도 불리고 삶의 숨결, 또는 정신, 이성, 또는 운명이라고도 불린다. 궁극적으로 자연의 원리는 신성으로 표현되고 가장 최고의 신과 동일시된다. "신, 정신, 운명, 제우스 등은 모두 같은 것이고 그것은 그 외에도 여러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신은 불사 불멸하고 이성과 정신을 갖춘 생명체이며, 행복에 있어서 완전하며 어떠한 악도 접근할 수 없고,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존재자를 배려하고 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처럼 신들은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지 않는다. 신들은 현존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는 신들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진다. 신들은 인간사에 관계하며 전체뿐 아니라 개별적인 것에도 관계한다." 강력하고 신적인 원리는 살아 있는 모든 실재 안에 현존한다. "신은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신은 곧 세계의 영혼이다."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고,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렇다. 따라서 "전 대지와 온 하늘이 신의 존재이다." 신은 "구정물 속에도, 회충 속에도, 범죄자 속에도" 있다. 세계는 이렇게 살아 있는 전체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성을 갖춘 생명체"이다. "이성이 세계의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파고 들어가" 있기에 세계 자체가 "이성적이고 영혼적이며 이해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스토아적으로 생각된 자연은 그 자체가 "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한한 창조력 때문에 신적인 원리는 하나의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 무한히 많은 세계, 서로 끊임없이 순환하여 뒤따르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신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그 통찰에 세계의 신성에 대한 사상보다 훨씬더 큰 가치를 둔다. 바로 이 내적인 신성이 인간의 자연 본성이다. "우주의 자연에서 인간의 자연 본성도 유래한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이 아레오파고스의 연설에서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그의 이성으로 인해 신과 친척이 된다." 이러한 의미로 클레안테스는 신을 향해 "우리는 당신과 같은 종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보편적인 세계 이성에 참여하고 있기에 그는 또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성을 깨워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가장 고귀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이성에 인간의 참된 본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에 진리의 가능성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이성이 모든 실재를 지배하는 세계 이성에 상응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가 인식하는 것이 참이라는 보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거대한 자연의 필연성 속에 깊이 파묻혀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이 생각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날마다 체험하고 있는 자유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자유는 제멋대로의 임의가 아니라, 본래의 근원에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자유로운 그 사람, 그의 이성이 선택하는 것만을 행하는 그 사람만이 자유롭다." 인간이 실제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나 행위할 때, 자연적이고 이성적이며 신적인 그러한 자기 자신에서부터 행위하는 것이며, 바로 그때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필연성의 테두리 내에서 그 자신의 자유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는 신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인 이성에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최고 이성의 명령인 도덕 법칙이 있어 그 법칙이 행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작용하는 다이몬이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의지와 화음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이고 신적인 원리에 복종하는 것이 곧 덕의 본질이다. 덕은 "이성과 화음을 이루고 있는 영혼의 자세이다." 덕은 곧 "이성적 존재의 완전한 구현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행복이다." 물론 이때 인간은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된다. "덕은 덕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어야 한다. 덕은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격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격정은 인간을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원리에서 이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본성상 이성을 따르고 이성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이것은 행동을 제약한다. 왜냐하면 "감정도 우리가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고 영혼의 조화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감정은 "영혼의 질병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의 삶의 이상은 "격정 없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의연함"이다. 많은 스토아 철학자는 이와 같은 이념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스토아 철학적인 자세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모범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의무의 사상, 즉 "순응함"의 사상이 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의무에 관한 한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가 의도했던 것과 같은 개인 문제로의 환원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에게 공적인 과제를 부과해야 한다. "덕이 있는 인간은 고독 속에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의 공동체 안에 편입되어 최선을 다하여 이 공동체를 촉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자연이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서로 결합될 수 있고, 조화를 이를 수 있으며,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보편적인 인간 사랑, 즉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함께 결속시키고 있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자라 나온다. 공적인 생활에서의 의무를 강조한 이 사상은, 그리스 시대 말기의 진지하고도 엄격한 철학자, 즉 제논의 가장 위대한 공적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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