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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2호
2012.3.5 (음 2.13)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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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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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책이 있다. 어떤 책이든지 읽는 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신의 불꽃이 불 붙기까지는 그 책은 사물(死物)에 불과하다. ─ H.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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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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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시다바리, 나와바리, 당일바리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한 대사 중에 "내가 니 시다바리가?" "니가 가라, 하와이" 등은 당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회자되곤 했다. 여기서 문제 하나. "녀석은 흑곰파의 막내 시다바리였다" "여기는 조선 땅이야. 너희들 나와바리가 아니야" (이환경 '야인시대'), "울릉도의 특산품으로는 호박엿과 당일바리 오징어가 있다"에서 쓰인 '시다바리, 나와바리, 당일바리'는 모두 일본말에서 온 것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모두 다 일본말은 아니다. '시다바리'는 '아랫사람, 부하, 조수', '나와바리'는 '구역, 세력 범위'를 뜻하는 일본말이지만 '당일바리'의 '바리'는 우리말이다.
'바리'란 "해마다 몇씩은 잡아다가 주리를 틀었고 그럴 때마다 돈 바리와 쌀 짐이 들어왔었다" '마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 또는 그 짐을 세는 단위'를 의미하거나 '놋쇠로 만든 밥그릇'을 뜻하기도 한다. '바리'는 '바로, 즉시'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상도.함경도 지방의 방언이기도 하다.
"백화점들이 명절을 맞아 자연산 전복과 당일바리 옥돔으로 구성된 명품 선물세트를 내놓았다" "반건조 오징어는 당일바리만 쓴다"에서 '당일바리'는 '그날 바로 잡은 고기(오징어)'를 뜻한다. 여러 지역에서 많이 쓰이고 있지만 아직 표준어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아이들의 밥을 담은 작은 밥 바리를 '애기바리'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 바루기] 배부, 배포
#장면 1.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무료신문을 펼친 김씨. 거기엔 국정홍보처가 만든 책자가 끼워져 있었다. 언론통제라는 여론의 비판에도 취재 지원 선진화를 내세워 밀어붙이고 있는 기자실 통폐합과 관련된 홍보물이었다. #장면 2. 금융 전문 인력 취업설명회가 열린 한 대학 강의실. 삼삼오오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학생들의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설명회를 개최한 금융회사 측에서 취업 희망자를 대상으로 건네준 입사 지원서였다.
국정홍보처가 서울 시내에 뿌린 홍보 책자를 보고 있는 장면 1의 김씨와 취업설명회를 연 회사의 입사 원서를 들고 있는 장면 2의 학생들은 '배포'된 인쇄물을 받은 것일까, '배부'된 인쇄물을 받은 것일까.
'배포(配布)'는 신문.책자 등을 널리 나눠 주는 것으로 "중앙일보는 독일 월드컵 때 한국과 프랑스전 결과를 실은 호외를 발행해 거리응원을 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와 같이 사용한다. '배부(配付)'는 출판물.서류 등을 나눠 주는 것으로 "교육청은 출신 학교별로 합격 통지서를 배부했다"처럼 쓰인다.
둘 다 나눠 준다는 점에선 의미가 같지만 '배포'는 장면 1과 같이 한정돼 있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 뿌리는 것이고, '배부'는 장면 2처럼 어느 정도 제한되거나 정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사원들에게 사보를 배포했다" "행인들에게 광고 전단을 배부했다"고 하면 어색하다. 두 문장의 '배포'와 '배부'를 바꿔 써야 자연스럽다.
[우리말 바루기] 비속어
명확하게 정의하긴 어렵지만 통속적으로 쓰이는 저속한 말을 속어(俗語)라고 한다. 일반 대중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면서도 정통 어법에서는 벗어난 말을 가리킨다. '꼴통, 죽사발(묵사발), 그놈, 양아치, 조진다, 쪽팔린다, 떡 됐다, (~의) 밥이다, (내가) 쏜다, 못해먹겠다' 등이 이런 속어라 할 수 있다. 속어는 정식 대화의 언어나 문장어(文章語)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지만 친근한 사이에서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짱짱하다, 긁는다, (~를) 깼다, 망했다, 국물도 없다, 죽치고 앉아 있다, 부스럭지(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 등도 거친 표현으로 격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넓게는 속어에 포함할 수 있다.
속어보다 더 비천한 느낌을 갖게 하며 욕설로 느끼게 하는 것은 비어(卑語)라고 한다. '대가리(대갈통), 마빡, 상판때기, 주둥이(아가리), 다리몽댕이, 처먹는다, 닥쳐라, 뒈진다' 등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이 비어다. 요즘은 특히 인터넷상에서 이런 비어가 난무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속어와 비어를 아울러 비속어라 하는데, 이런 비속어는 올바른 언어생활을 저해하고 특히 청소년에게 정서적으로 나쁜 영향을 준다. 어른들이 이런 비속어를 마구 쓴다면 청소년이 일상대화나 인터넷에서 즐겨 쓰는 '열라, 졸라, 절라, 걍, 넘넘, 지대로, 므흣' 등 일그러진 말을 타이를 구실이 없어진다.
비속어를 섞어 가며 하는 막말을 흔히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말에 비유한다. 그만큼 천박한 말이라는 뜻이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라 했다. 만약 자리를 가리지 않고 이런 말을 마구 쓴다면 그 사람의 정서나 정신을 의심해 봐야 한다. 참, 위에서 든 속어의 예는 모두 며칠 전 대통령이 연설에서 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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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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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in a blue moon - 정채원
그곳에 가면 한 달에 두 번 보름달이 뜬다네 두 번째로 뜨는 보름달은 푸른 달이지 구름 속으로 하마가 날아다니고 땅위에 내려앉지 못하던 발 없는 새들이 숲속에서 마지막 춤을 춘다는 밤 소식 알 길 없던 헤어진 연인들이 달나라에서 문자를 보내오고 사과꽃이 한꺼번에 후드득 진다네 영문도 모르는 눈먼 새는 푸드득 암청 하늘로 황급히 날아가고 다음날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다네 푸른 달 아래 사과꽃 밟으며 우린 누구나 죄인의 얼굴이 되겠지만 누군가는 아직도 무염시태(無染始胎)를 꿈꾸기도 하지만 나는 장미보다 가시의 정원을 꿈꾸네 모든 상처 간신히 아문 뒤에 감기로 죽고 싶지는 않다네 죽음이 살갗 밖으로 푸르스름 혈관처럼 내비치는 밤 달빛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색소폰을 불며 비소 먹은 듯 그렇게 푸른 꽃을 피우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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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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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 노인숙
붉은 깃발 펄럭이며 이기고 돌아오라.
사무친 물결 따라 바다는 멀고 멀어
흰 깃발 주검이 되어 핏빛 노을로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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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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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나리아 - 고홍수
유리 접시의 물 속에서 플라나리아 한 마리가 허리를 잘립니다. 유유히 헤엄치다가 날카로운 면돗날에 둘로 잘리니 바닥에 붙어 꼼짝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죽을 거라고도 하고 머리가 있는 쪽만 살 거라고도 하고 둘 다 살 거라고도 했지만 나는 다시 붙을 거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과학실에 가보니 그놈은 두 마리가 되어 꼬무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놈을은 본디 한몸인 줄 모르는지 제각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생명력이냐고 선생님은 감탄하셨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도 잃어 버린 반쪽을 찾을 생각도 않는 바보 같은 벌레라 개울 바닥 돌 밑에서 햇빛을 피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서로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으로 따로따로 꿈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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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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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8장 가정의 즐거움
5. 우아한 노경으로
내가 보는 바로는 중국의 가족 제도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하여 특별히 마음을 써서 주로 그것을 바탕삼아 마련되어 있다. 이것은 즉 유년 시대, 소년 시대, 노년 시대는 인간의 생애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어린이와 노년이 만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사고 방식이다. 어린이들은 무력하여 자기 자신을 돌볼 힘이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 또 노인과 비교해 볼 때 물질적인 위안이 없어도 능히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질적인 궁핍을 거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자집 아이들보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행복할 수도 있다. 맨발로 다니는 일도 있지만, 그렇게 다니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질 뿐 고생스럽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게 있어서는 맨발로 다닌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그것은 아이들에는 커다란 생명력, 즉 젊음의 약동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슬픈 일도 있겠지만 곧 잊어버리고 만다. 노인처럼 돈 걱정을 하지 않고, 큰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번거로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돈 많은 과부는 자유공채를 사모으지만, 아이들은 고작해야 장난감 총을 사려고 담배 경품권을 모을 정도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수집의 재미를 비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모든 어른들처럼 새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습관도 아직 정해져 있지 않고 어떤 특별한 상표가 붙은 커피만을 마시는 것도 아니며, 눈에 띄는 것에는 무엇에나 손을 내밀게 마련이다. 인종에 대한 편견도 거의 없을 정도이고, 종교적 편견 따위는 아예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사상이나 관념이 어떠한 선배의 잘못에 빠진 이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청소년에 비해 노인은 두려워하는 관념도 뚜렷하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도 엄격하게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는 보다 훨씬 더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한다. 노인에 대한 이같은 다정한 태도는 중국인의 원시적인 감정 속에 이미 다소 존재해 있다. 이러한 느낌을 유럽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오직 저 기사도의 정신, 부인에 대한 친절한 마음 정도이다. 그러나 엣날의 중국인에게 기사도가 있었다면, 부인이나 어린이들에게 발휘된 것이 아니라 노인에게 대해 발휘된 것이었다. 이 기사도적인 마음은 맹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 가운데 뚜렷이 나타나 있다.
효도의 의로써 말하면 백발 노인이 짐을 진 모습이 길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은 선정의 마지막 목표를 나타낸 말이다. 맹자는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종류의 사람들을 이같이 말하고 있다. 즉 <과부, 홀아비, 고아, 자손이 없는 노인>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에 맨 먼저 든 두 종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미혼 남녀를 없애려는 시정에 의하여 구제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아들을 어떻게 다루면 되겠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맹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부터 고아원이라는 것은 양로금과 함께 늘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고아원과 양로금이 다같이 가정의 보잘것 없는 대용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직 가정만이 어린이와 늙은이에 대해 충분한 보호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린이의 경우에는 각별히 신경을 써 가며 돌보아줄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대체의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요, 높은 곳으로는 흐르지 않는다>고 중국인이 언제나 말해 온 바와 같이, 사랑은 내리사랑이어서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애정은 다소 수양에 의하여 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식을 사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배워서 수양을 쌓은 인간은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인을 사랑하고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마침내 온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의 논자들이 말하는 것을 믿는다면, 늙은 양친을 돌보는 자격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은 마침내 실제로 열렬한 일반 사회의 요망이 된 것이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감으로 생각되는 일은 임종의 자리에 누운 부모에게 약초나 고깃국을 마련해 드려서 마지막 효도를 다할 기회를 영원히 잃는다거나, 또는 그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일이다. 나이가 쉰, 예순이 된 고관이 부모를 고향에서 모셔다가 도시에서 자기와 함께 살게 하면서 <밤마다 자리에 드는 것을 보고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릴> 수 없다면, 돌이켜 생각할 때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의 죄를 진 것이 되므로, 친구나 동료들에게 언제나 거북한 변명을 하거나 해명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유감스러운 심정은 모처럼 고향에 돌아왔으나 때가 늦어서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지은 다음 두 줄의 감회에 잘 나타나 있다.
나무는 조용히 있기를 원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이 만일 이 세상을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애의 황혼이 질 무렵을 가장 행복한 때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여 오래 살려고 애를 태우는 일도 없이 오히려 자진해서 노경이 오기를 기다려, 생애 가운데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천천히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동양인의 생활과 유럽인의 생활과를 여러 가지로 애써 비교 대조해 보지만, 나이에 대한 동양인의 사고 방식을 빼놓고는 절대적인 차이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생각의 차이는 매우 뚜렷하게 달라서 중간적인 것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성, 여성, 일, 오락 또는 성공 같은 것에 대한 동양인의 태도가 서양인과 다른 것은 모두 비교상의 문제다. 중국인의 부부 관계도 본질적으로는 서구인의 그것과 그다지 다를 바 없고, 부자간의 관계도 역시 그러하다. 개인적인 자유나 민주주의적인 사상 또는 백성과 지배자와의 관계에서조차 결국은 그다지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나이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에 이르러서는 서구인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만은 동서는 정반대의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남의 나이를 묻거나 자기의 나이를 말하거나 할 때의 태도를 보면 이런 점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중국에서는 공용으로 사람을 불렀을 경우 그 이름을 묻고 난 뒤 맨먼저 묻는 것은, <연세는 얼만가요?> 하는 말이다. 그때 상대편이 <스물 세 살입니다>라든가 <스물 여덟 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듯이 머뭇거리고 있으면, 물어본 쪽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편을 위로하면서, <아직 앞날이 창창하신 데다가 앞으로 언젠가는 노인이 되실 테니까요> 하고 말하게 마련이다. 또한 만일 서른 다섯 살이라든가 서른 여덟 살이라고 대답하면 깊이 존경하는 태도로 대뜸 <아, 그러십니까> 하고 말한다. 나이가 많음을 말하면 할수록 묻는 편에서는 태도가 엄숙해진다. 그러다가 쉰 몇 살이라고 말하기라도 하게 되면 묻는 편에서는 대뜸 음성을 낮추어 공손하게 존경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중국에 가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이며, 중국에서는 머리가 허옇게 세면 심지어 거지까지도 특별히 친절한 대우를 받는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쉰 살이 되는 생일, 바꾸어 말하면 인생의 반세기가 된 것을 알리는 날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다같이 기쁘게 한다. 이순(예순살)의 나이는 쉰 살 때보다 더 행복하고 위대하며, 미수(여든 여덟 살)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하늘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존경받게 된다. 흰 수염을 기르는 것은 할아버지가 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할아버지가 되었다든가 쉰 살이 넘었다든가 하는 필요한 자격도 갖추지 못하고 흰 수염을 기르면 남에게 뒷손가락질을 받을 염려가 있다. 이런 풍습 때문에 젊은이들이 노인의 태도나 위엄이나 견식을 흉내내어 자기의 진짜 나이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몇몇 사람의 젊은 중국 문인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제 중학교를 갓 졸업한, 아무리 보아도 스물 한 살에서부터 스물 다섯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들인데도 잡지에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청년은 무엇을 읽어야 하며, 또 무엇을 읽어서는 안 되는가> 따위의 말을 해서 짐짓 어버이다운 친절한 마음으로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인 모두가 이같이 노령을 존경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빨리 나이가 들기를 원하고, 언제나 나이 들어 보이기를 바라는 심정을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노인이 가진 특권이다. 젊은이들은 노인이 이야기하는 동안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만 한다. 중국의 속담에도 있듯이 <젊은이에게는 귀는 있지만 입은 없다> 서른 살 된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스무 살 된 젊은이는 듣는 편이 되지만, 그 서른 살 된 사람도 마흔 살 된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는 말없이 듣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를 할 때는 남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인 만큼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디를 가거나 남들이 이야기를 들어 줄 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공평한 인생의 게임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언젠가는 나이를 먹을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설교를 하다가도 할머니가 말을 시작하면 곧 자기가 하던 이야기를 그치고 정중한 태도로 자세를 고쳐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아버지는 할머니의 처지를 부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네가 길을 건너온 것보다 나는 좀더 많은 다리를 건넜단다> 하고 노인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을 무슨 권리로 젊은이가 감히 입을 열겠는가. 남에게 이야기를 할 어떤 권리를 젊은이가 가졌단 말인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나 중년 부인이 자기의 나이를 말하기를 싫어하는 심정은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젊음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처녀들도 나이가 스물 두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했고, 약혼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 나이에 대해서 다소 겁을 먹게 마련이다. 세월은 사정없이 지나간다. 독일 사람들은 이런 것을 무서운 마감 시간이라고 하는데, 자기 혼자 뒤에 처져 있다는 불안한 심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밤늦게 문이 닫혀진 뒤에 공원 안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을 때 느끼는 그런 불안한 기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일생을 통해 가장 긴 해는 스물 아홉 살 때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스물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3년, 4년, 때로는 5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떠나서 남에게 자기의 진짜 나이를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남이 연장자라고 생각하도록 하지 못하고 어찌 현명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나이도 아직 어린 사람이 어떻게 인생이나 결혼이나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참된 가치에 대해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유럽인의 모든 생활 방식이 젊음을 존중하고, 따라서 그들 남녀로 하여금 자기의 진짜 나이를 말하기를 꺼리게 하는 것은 수긍이 간다.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능률적이고, 활동적인 마흔 다섯 살 된 여비서도 그녀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되면 당장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만다. 그러나 참으로 괴상한 핑계도 다 있다. 자기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하여 진짜 나이를 감추려고 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형편이 이러고야 인생 그 자체도, 젊음의 존귀함도, 모두 하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절대로 무의미한 일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틀림없이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는 가정에 머물러 있는 편이 나이에 대해서 좀더 존경을 받을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 바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이 일이니 능률이니 공명이니 하는 것에 그다지 사로잡히지 않게 되기까지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의 아버지가 인생의 이상적인 거처를 사무실보다는 가정에서 구하고, 중국인 부모들을 본따서 자기에게는 이미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아들이 있으므로 자랑스럽게 그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절대 편안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공언할 수 있게 되는 날 비로소 즐거운 노년이 찾아오기를 고대하며, 쉰 살이 되는 날을 손꼽아기다리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튼튼하고 건강한 미국의 노인들이 <나는 젊다>고 남에게 이야기하고,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젊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 참된 뜻은 건강하다는 뜻으로, 이것은 아무래도 언어학적인 재난인 것 같다. 늙어서 건강을 즐긴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늙을수록 더욱 건강>하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다. 그러나 <건강하고 젊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되면, 신비로운 매력이 없어질 뿐더러 나아가서는 표현 방법이 불완전한 만큼, 노년 그 자체까지도 불완전한 것인 듯한 결과가 되고 만다. 결국 이 세상을 바라볼 때, <홍안백발>의 노인을 그리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 가운데는 중국인의 복록수신의 그림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높은 이마에 얼굴빛이 불그레하고 흰 수염을 기르고 그리고 빙그레 웃고 있는 그 모습! 이 노인의 그림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앞가슴께까지 늘어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평화롭고 흐뭇한 얼굴로 그것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기 때문에 품이 갖추어졌고, 아무도 그의 지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유유자적 무릇 모든 사람의 눈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애에 넘쳐 있다.
늙어서도 활동력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노익장>이라는 찬사를 드린다. 미국에서는 훌륭한 흰 수염을 기른 노인네의 모습은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노인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찌기 내 앞에 나타나 본 일이 없다. 아니 꼭 한 번 뉴우저어지 주에서, 이만하면 머리를 숙일 만하다고 생각되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본 일이 있다. 이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마도 안전면도칼 탓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산들이 생각 없는 농부들에 의하여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고 만 것과 같은 형상이어서 한탄스럽고 사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농부들은 중국 북부 지방의 아름다운 숲을 완전히 벌거벗기어 미국 노인의 턱처럼 보기 흉한 대머리 산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미국 사람들이 여기에 눈을 떠서 다같이 옛날처럼 되도록 나무를 심을 계획에 참가 한다면 미국에는 아직도 개척할 수 있는 보고가 있다. 보아서 즐겁고 듣기에 즐거운 아름다움과 예지의 보고가 있다. 미국에는 수염 기른 노인네란 이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저 염소수염을 기른 엉클 샘도 이미 없어졌다. 누구나 다 안전면도칼로 흰 수염을 깎아버리고, 품위 있게 긴 수염을 늘이는 것도 그만두고, 번들번들한 턱을 어루만지면서 로이드 안경 속에서 날카로운 눈초리를 번득이면서 하잘것 없는 애송이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저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대인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인가!
미국의 노인들은 오늘날 여전히 바쁘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어이없을 만큼 강력해진 개인주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긍지이며 독립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자식들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그들의 헌법 속에서 많은 인권에 대해 규정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식에게 봉양받는 권리는 잊고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효양에서 오는 권리이며 의무인 것이다. 젊었을 때는, 자식 때문에 무척 고생도 했고, 자식이 아플 때에는 몇 날 밤씩이나 잠도 자지 않고 간호를 했으며, 아직 말도 못할 때부터 기저귀를 빨고, 1세기의 4분의 1이나 걸려서 자식을 길러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친 세상의 어버이들이 늙은 뒤에 자식들이 보살펴 주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나 자기의 자랑을 가정 생활이라는 기획 전체 속에서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하면 그러한 가정에서 어렸을 때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나고, 다음에는 반대로 자기 자시글 훌륭하게 키우고, 이번에는 그 자식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생관이 가정 안에서의 상호 부조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립이라는 뜻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 들면서 자식들에게 기대고 살아 간다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어버이를 보살필 수 있는 자식이 있다는 것은 행복된 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의 세상사는 이것 외에 재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늙은 어버이에 대한 효양을 중국인이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버이에게 은공을 갚아야겠다는 한결같은 정성 때문이다. 친구에게 진 빚에는 한도가 있지만 어버이로부터 받은 은혜에는 한도가 없다. 효도에 대해서 중국인이 쓴 글을 보면 기저귀를 빤다는 말이 여러 번 되풀이 해서 나온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이 어버이가 되었을 때 뼈에 사무치게 느껴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버이가 노경에 이르렀을 때 받드는 자식들에게 의지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상 위에 차려놓은 좋아하는 음식을 즐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효양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호텔의 손님의 시중을 드는 것과를 비교하거나 하는 것은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다음에 드는 글은 자식이 가정에서 어버이에 대하여 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한 것인데, 도석석이 쓴 글로서 옛날의 학교 교과서로서 굉장히 유명한 어느 수신 책에 들어 있는 것이다.
여름에 어버이를 섬기려면, 곁에 모시고 서서 부채질을 하여 더위와 파리와 모기를 몰아 내야만 합니다. 겨울에는 잠자리를 따뜻하게 마련해 드리고, 난로에 불이 잘 타고 있는지 언제나 난로를 살펴보도록 해야 됩니다. 들창이나 문에 구멍이나 틈이 없는가, 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지나 않는가를 잘 조사하여 어버이의 만족과 기쁨을 사도록 애써야만 합니다. 자식이 열 살이 지나면 아침에는 어버이가 일어나시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한 뒤 어버이의 침실로 가서 간밤에 편안히 주무셨는지 아침 문안을 드려야 합니다. 만일 어버이가 벌써 일어나 계시거든 우선 아침 인사를 드린 다음 다시 절을 하고 그 방에서 나와야 합니다. 밤에는 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어버이의 자리부터 보살펴 드리고 어버이가 편히 잠이 드실 때까지 곁에 모시고 있다가 혼곤히 잠이 드시면 머리맡의 커어튼을 쳐 드리고 조용히 물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누구나 중국의 노인이나 노부가, 조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봉건적>이라고 말하고 몹시 비웃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중국의 노신사들로 하여금 누구나 집착을 갖게 하고, 근대 중국은 이제 보잘것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자기 원대로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누구나 다 나이를 먹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점이다. 인간이 추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글자 그대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개인주의를 깨끗이 없애 버린다면 <인생의 황금 시대는 늙어가는 미래에 있으며, 지나가 버린 아무것도 몰랐던 젊은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으로 되돌아와 인생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와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면 시간이라는 무자비한 코오스 위에서 참혹한 경주를 벌이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며(그러나 본인은 그런 줄 모르고), 언제나 자기네보다 앞쪽에 있는 거ㅅ 환경에 위협을 받을 것이고, 물론 이길 가망도 없고, 결국은 모두 지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몸이 늙어가는 것을 실제로 막을 도리는 없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늙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뿐이다. 구태여 자연에 대해서 반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점잖게 나이를 먹어가는 편이 좋다. 인생의 교향악은 평화, 고요함, 안락, 정신적인 만족이라는 위대한 피날레로 끝내야 하는 것이며, 찢어진 북이나 찌그러진 심벌 소리로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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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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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20. 담론의 질서 - 푸코 Michel Foucault (1926~84)
역사가로 불리길 거부한 사람 - 양운덕(고려대학교 강사)
"18세기 말에 고전적 사고의 토양이... 사라졌듯이, 우리가 그 가능성을 순간적으로 감지하는 데 불과한 (지식의) 배치가 무너 진다면, 우리는 마치 바닷가 모래톱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겨 나가듯이 인간이 지워지리라고 주장할 수 있다." (괄호 안과 강조는 글쓴이) 이브 몽탕, 에디트 피아프 등이 즐겨 부른 '고엽'이란 노래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푸코가 쓴 '말과 사물'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책은 푸코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하듯이 내용이 극히 난해한데도 불구하고, 광고도 하기 전에 불티나게 팔려 나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이다. 이 구절은 서구 사람들에게 그들이 달콤하게 빠져 있던 '인간학적 잠'에서 깨어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니체의 '신의 죽음'에 견주어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말로 유명하다. 푸코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있고 세계를 완벽하게 알 수 있고 인간의 의지에 따라 세계를 이성의 왕국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인간주의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인간주의는 18세기 말에야 등장 한 '이상한' 관점이며 일정한 지식의 배치에서 나온 결과이므로 그 배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지적한다.
1926년 10월 프와티에에서 태어난 푸코는 앙리 4세를 거쳐 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느 대학에서 헤겔 연구의 대가인 장 이폴 리트, 과학사가인 조르쥬 캉귀엠,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59년 광기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60년부터는 클레몽-페망 대학의 철학과 주임 교수로 있었다. 1966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말과 사물'을 낸 후 파리 벵센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1970년 콜레쥬 드 프랑스의 사상사 자리를 이폴리트에게서 물려받았다. 1984년 뇌질 환으로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연구하면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는 사르트르처럼 정열적으로 모든 사회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온갖 화제를 뿌리거나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자신이 정리한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어머니와 누이와 형제를 살해했다'가 영화화되면서 그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고, 죄수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단체인 '감옥 정보 모임'에 참여하는 괴짜 교수로서 특이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열정을 이론적 논의로 삭이는 냉정한 이론가로서, 사회 전체를 지도하고 평가하는 보편적 지식인이 되길 거부하고 구체적인 사회 모순들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특수한' 지식인이 되려 한다. 20세기 프랑스에서는 2차 대전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자유, 주체의 실존,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실존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사르트르가 그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이런 흐름은 레비-스트로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나타나면서 주체, 자유, 역사 발전 등을 부정하는 흐름으로 바꿔다. 그래서 주체 중심와 '안으로부터의'사고가 주체 외부의 보편적 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바깥으로부터의'사고로 바뀐다. 푸코는 이 흐름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조주의의 틀을 넘어서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사회적 '타자'(정신병자, 환자, 죽음, 비행자, 성 등)를 통해 정상적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기능하면서 그 타자를 배제하고 억누르는지를 밝힌다. 그는 이 질서가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그래서 기존의 지식과 권력이 감추고 있고 정상인들에게 익숙해져서 편하게까지 느껴지는 사고와 행위의 틀을 깨뜨리려 한다.
푸코의 저작들, '고전 시대에서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성의 역사' 등은 역사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자신은 역사가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흔히 역사는 연속성과 총체성을 가정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그것들을 연속적 운동안에 자리 매김하고 종합한다. 그러나 푸코는 연속성과 총체성이라 는 독단을 깨뜨리고 '단절' '불연속성' '돌연변이'등을 강조한다. 그는 객관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에 관해 '말하고 쓴 것'인 '담론'에 주목한다. 담론은 과학, 철학, 문학, 법률의 텍스트와 허구, 이야기, 제도적 규율, 협정, 안내 책자, 약호(코드), 정치적 선언 등을 가리킨다. 푸코는 담론에 관한 '고고학'을 모색한다. 담론의 고고학이란 담론에 나타난 인간의 사상을 찾거나 그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담론의 고고학은 담론의 형성과 변형을 기술하고 '담론의 출현 조건, 그 불완전한 연결 고리, 뚜렷한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푸코는 특정 시기에 광기, 병, 비행, 인간, 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처를 밝힌다. 이런 방식을 '계보학'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푸코는 이런 관념이 당연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님을 지적한다. 이 지적은 단순히 편견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진리 자체도 부정한다. 진리란 없으며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담론만 있다. 푸코의 이런 시도는 바로 다음의 물음에 답하려는 것이다. 서구 에서 "지식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왜 서구의 주체는 자신 을 지식의 대상으로 구성하려 하며, 그런 지식을생산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담론을 통제하는 배제 절차들
푸코는 담론을 분석한다. 이것은 담론이 ,형성되는 방식과 담론 형성에 관여하는 사회, 정치, 제도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는 담론이, 이 담론을 만들어 내는 담론 형성체에 의해 규정되고 그 구성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본다. 담론의 규칙은 어떤 가능성을 만들면서 다른 가능성을 배제한다. 즉 담론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선택과 배제가 작용한다. 따라서 담론의 존재나 형성 자체에 권력이 개입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강하다"라는 담론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받아들이는 진리 체계란 그 사회가 허용하는 '참'의 집합이고 '참'으로 규정되는 것은 일정한 힘을 지닌다. '담론의 질서'는 푸코가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강연한 것을 출판한 책이다. 이 글에서 먼저 담론에 작용하는 제 도적 제약을 밝힌다. "어떤 사회에서도 담론의 생산은 통제되고, 선택되고, 조직되고, 다수의 절차에 따라서 재분배된다." 그리고 푸코는 담론에서 작동하는 여러 유형의 '배제 절차'를 분석한다. 첫번째 유형의 배제 절차에는 금늣, 분할, 참 거짓의 대립이 있다. 우선 '금지'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 이나 자유롭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어떤 것에 관해 말할 수 없다는 것, 요컨대 누구라도 아무것이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금지의 규칙은 대상에 대한 터부(특정 대상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상황의 제의가 부여하는 금지(수업 시간에 학생이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주체가 특권을 갖거나 박탈당하는 것(교사의 말은 학생 의 말에 견주어 특권을 갖는데 등이다. 이런 금지는 성(욕망)과 정치 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둘째, 분할이라는 배제 절차는 이성과 광기의 대립에서 잘 나타난다. 푸코는 정신병원이 광인들을 치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배제하는 장치라고 본다. 정상인이 볼 때 광인은 정상인의 질서를 수용하지 않는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존재다. 광인의 담론은 중요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비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회적 '타자'인 광인은 정신병원에 격리 수용된다. 이제 광인은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고 치료하는 의사에게만 말할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정신병리학 담론은 사실상 대화를 가장한 이성의 '독백'이다. 셋째, 참 거짓의 대립이 있다. 푸코는 이것을 서구 사람들의 '진리를 향한 의지'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는 담론의 진리가 '누가'얘기하고 '어떻게'얘기하는가라는 권력에 의존해서 결정되었다. 그 뒤 진리의 중심은 얘기한 내용으로 옮아간다. 참 거짓 담론을 나누는 것은 참된 담론이 더 이상 권력과 연결되지 않고 순수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진리는 순수하고 그 자체가 목적으로 추구된다. 16, 17세기 초 '과학' 지식은 새로운 형식의 진리 의지를 나타낸다. 그것은 관찰하고 측정하고 분류할 수 있는 대상에 주목하고 인식 주체에게 특정한 관점과 기능을 부과한다. 그래서 지식이 유용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되도록 규정하는 진리 의지가 만들어진다. 그 뒤 서구 학문은 참 된 담론에 근거를 두려 한다. 이런 진리 의지는 교육 방법, 서적, 출판, 도서관 체계, 학회, 실험실 등 제도적 실천으로 강화되는데 특히 지식이 형성되고 분배되는 방식에 뿌리 박고 있다. 이런 진리 의지는 다른 담론들에 압력을 가하고 권력을 휘두른다. 푸코는 특히 이 참 거짓의 대립에 주목하고 바로 이 '진리를 향한 의지'가 가장 지배적이고 널리 받아들여졌다고 본다. 그것은 다른 두 가지 배제 원리를 흡수하고 그 근거를 마련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욕망이나 권력과는 무관한 것처럼 작용한다. 이처럼 진리 의지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절대 적인 것으로 가장한다.
한편 푸코는 '주석' '저자' '분과'등 담론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두번째 유형의 절차를 분석한다. 이 절차들은 담론의 '내부'에서 작동하며 담론을 분류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일정하 게 분배한다. 첫째, 대부분의 사회에는 '주요한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들은 주요한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부차적인 텍스트들을 만들어 낸다. 이 때 주석은 이중 역할을 한다. 주석은 '일차' 텍스트에 들어 있는 숨은 의미를 끌어내어 그 텍스트의 내용을 확정하는 한편 그러면서 텍스트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로막는다. 주석은 텍스트 자체와 다른 것을 말하도록 허용하지만 말해진 것은 바로 그 텍스트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다. 이처럼 주석은 텍스트와 같은 내용 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둘째, 문학 등에서는 '저자'가 텍스트를 지배한다. 이를테면 저자가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이것과 다르게 또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거나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의미만을 강요하는 태도가 흔히 있다. 이 경우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저자의 의미를 똑같이 되풀이해서 찾아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담론의 생산은 분과의 통제를 받는다. '분과'란 참된 것으로 여겨지는 일련의 명제, 규칙, 정의, 기법 등을 가리킨다. 특정 한 분과에 속하는 명제들은 특정한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이미 정해진 개념적 도구와 기술적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이런 점에 어굿났기 때문에 발전 당시에는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푸코는 담론을 통제하는 세번째 유형의 절차를 분석한다. 첫째, 말하는 개인이 가져야 할 자격이나 자질 등을 규정함으로써 담론을 제약하는 절차가 있다. 이것은 담론이 어떤 폐쇄된 집단 안에서만 유통되어 특권을 유지하게 한다. 중세 음유 시인들의 모임이나 오늘날 전문가 집단과 같이 특정 담론에 권리가 있는 사람들만이 모인 '담론 결사'가 그 보기다. 이런 폐쇄된 모임은 오늘날에는 드물지만 이런 담론은 여전히 제약된 구조 안에서 소통되고 있다. 둘째, 종교와 정치와 철학의 '교의'는 수많은 개인이 공유하는 것이지만 그 구성원들은 같은 진리를 인정하고 공인된 담론을 받아 들이면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교의는 개인을 어떤 종류의 말하는 행위에 비끄러매고 다른 종류의 말하는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그들을 결속시킨다. 셋째, 교육이나 사회적 동화 체계는 개인이 어떤 종류의 담론에 접근하도록 하는 수단이다. 교육의 보급 방식이나 허옹 또는 금지를 볼 때 교육은 사회적 구별, 대립, 투쟁의 선을 따른다. 모든 교육 제도는 정치적 수단이다. 푸코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철학들이 이런 제한파 배제를 정당화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철학에는, 담론이란 그것을 말하거나 쓰는 주체 안에 이미 있던 내면성을 바깥에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고 주체의 내용에 견주어 껍데기나 내용 없는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있다. 이런 철학은 '주체'에 과장된 허구의 역할을 부여 하고 담론의 현실성을 부정한다.
푸코는 서구 문화가 담론을 두드러지게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존중은 실은 담론의 실제 효과를 두려워해서 그것을 무력화 하려는 겉치레 존중일 뿐이라고 본다. 푸코는 이제 역사나 지성사에서 중시해 온 전통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통적 관점을 버리기 위해서는 의식, 연속성, 보편적 구조란 개념을 버리고, 사건과 계열이란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 때 사건이란 보편적 틀 속에 규격화되지 않는 단일함을 말하고, 계열이란 'ㄱ' 'ㄴ' 'ㄷ'이 하나의 전체로 종합되지 않은 채로 배열 된 것을 말한다. 또 그는 기계적 인과성이나 필연성을 버리고 사건들을 생산하는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푸코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 보편성, 총체성, 연속성, 필연성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파괴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태도를 '행복한 실증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푸코는 '담론의 질서'에서 담론에 작용하는 권력을 문제 삼는 데, 권력을 부정적인 것, 담론에 대한 제한으로 이해한다. 이런 입장은 그 뒤 수정되어 권력이 담론을 제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의 담론을 생산한다고 보는 태도로 발전한다. 그래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권) 등에서 권력이 실제로 담론을 생산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곳에는 없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시오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으라고 명령하지 마시오" 푸코는 자신을 '( )주의자'로 분류하고 그것에 자신을 가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정치적 태도도 마찬가 지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사회 현상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그것에 봉사하려는 것을 혐오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전통에 의존하는 것도 멸시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급진주의자들과는 일정한 대의 명분을 공유하지만, 과학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자비로운 인간성을 믿는 무정부주의 좌파를 천진난만하다고 비판한다. 푸코의 철학적 태도 는 니체의 허무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그에게는 니체의 낙관론이 없다.
1984년 7월 27일(푸코가 죽은 날은 25일) '르 몽드'지는 머리기사로 '철학자 미셀 푸코의 죽음'을 뽑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3편의 글을 싣는다. 폴-드르와는 그의 사상을 상대주의, 특히 절대적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역사가 베인느는 그의 저작이 2,500년에 걸친 서양 형이상학, 역사의 연속성과 주체의 동일성을 끝장낸 금세기 최대 사건이며 역사 서술의 방향을 완전히 바픽 놓았다고 평한다. 현대 프랑스 사회학을 대표하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저작이 새롭고 엄격한 사고와 지적 모험을 감행한 대표적인 보기라고 주장한다. 부르디외는 푸코 사고의 특성을 '위반'에서 찾는다. 그것은 사회의 경계선을 침범하고 뛰어넘는 행위다. 푸코는 기존의 철학이나 사고가 미치지 않는 범위, 금기를 사고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성과 언어의 지배에 저항하고 지식이 지배 수단이며 권력의 산물임을 밝헌다는 것이다. 이제 푸코를 평가하는 입장들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푸코의 '말과 사물'을 서구 문화에 대한 고고학으로 서술한 메이저-포에츨은 푸코의 가장 큰 기여가 인문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점이라고 본다. 그는 이 패러다임이 무질서한 지식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추상적 모델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푸코의 저작을 구조주의와 해석학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드레쥐스와 레비 노우는 보편적 인식 구조를 찾는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보다는 권력과 진리에 대한 니체식의 계보학적 분석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푸코의 니체적 요소를 염두에 두면 고고학적 분석과계보학적 시도 사이의 틈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세리단은 푸코를 오늘날의 니체로 보고 그의 작업이 니체가 시도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푸코의 미시적 권력 분석에 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푸코,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쓴 스마트는 푸코의 권력 분석이 지식과 현실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더 높은 합리성'에 포함된 오류들을 비판한다고 본다. 반대로 고든은 새로운 '반역의 논리'가 필요하긴 하지만 푸코의 권력 분석이 마르크스주의에 맞서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에 대해 세리단은 푸코의 정치적 해부학은 좌우파 모두에 대한 근본적 단절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이론, 새로 운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마트는 푸코의 분석을 새로운 정치 이론이나 실천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매우 유용한 비판으로 이해한다. 고든 역시 푸코가 지금자지 간과되어 온 권력 형태들을 밝혔고 그것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니체적 도전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이해한다. 여러 가지 평가들이 엇갈리긴 하지만 푸코를 현대의 신니체주의자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적인 예로 니체는 '즐거운 학문' 제7장에서 사랑, 욕망, 질투, 양심, 잔인함의 역사, 법이나 형벌의 비교사 등 지금까지 쓰이지 않았던 몇 가지 역사 목록을 제시했다. 그리고 푸코는 실제로 이런 역사들을 썼다. 그는 니체의 권력 의지를 받아들여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가 한 권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다른 권력들이 만드는 연극이라 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그의 회의주의, 이성과 진리에 대한 거부를 위험스럽게 보는 시각도 많다. 푸코는 모든 진리를 의심한다. 모든 지식 과 과학은 권력 의지의 수단이라고 본다. 진리 의지는 인간과 세 계를 잘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만들어 낸다. 이성은 권력 의 테크놀로지이며 과학은 지배 도구다. 이에 대해 독일의 비판 이론가 하버마스는 서구 문화를 탈신비화하더라도 이데올로기와 이론, 신화와 지식을 구분하는 보편적 진리 기준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하버마스는 보편적 이성의 원리를 버리면 철학이 종말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을 급진적이고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현대 신보수주의자의 목록에 푸코의 이름을 넣는다. 하버마스가 보편주의를 진리의 합리적 보증물로 보는 데 반해, 푸코는 그것을 지배의 가면으로 본다. 푸코에 따르 면 총체적 진리는 총체적 감시와 억압을 낳고, 보편적 진리란 자기를 모든 지식의 척도로 가장하는 권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런 다양한 평가들에 대해 푸코 자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푸코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신들이 노리고 있는 곳에는 없다. 나는 웃으면서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평가가 어떠하든 그의 물음과 대답이 서구 사람들 자신의 사고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가 중요하다. '광기' '인간' '지식' '감옥' '성' 등이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면,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푸코다. '자명함과 보편성을 파괴하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 지지자들을 불만스럽게 할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바로 이 파괴를 참된 철학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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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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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넷째 묶음 - 성숙 인격
월남 이상재와 해학
유머라는 말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의 특질 또는 그러한 작용을 말한다. 즉 기이감과 익살스러움, 하찮고 우스꽝스러움, 기대에 어긋남 등의 즐거움을 돋우는 해동, 말, 글의 특질이나 이런 특질을 알아보는 능력 또는 이를 표현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대상의 특질은 무엇이고 이를 감지하거나 표출하는 작용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아이젠크는 크게 세 가지 이론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첫째, 어떤 것을 인지 또는 표현했을 때 웃음이 생기는가를 따져 인지 내용의 부조화성과 대조성, 기대에 어긋남 등에서 웃음의 요인을 찾는 인지적 이론이 있다. 둘째, 웃음의 요인을 의욕적인 측면에서 찾는 이론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우월감을 충족과 잘 적응된 상태 또는 억압된 욕구의 충족에서 웃음의 요인을 찾으려는 것이 있다. 셋째, 정서적인 측면에서 순수한 환희와 이와의 연합 또는 여러 정서의 대비 속에서 웃음의 요인을 찾는 이론이 있다. 아이젠크는 웃음을 자아내는 이같은 지, 정, 의의 세 요인이 지적인 요인에 의해 생기는 웃음과, 감정과 의욕의 요인에 의해 생기는 웃음으로 다시 구별 된다고 보았다. 단순하고 익살스러우며 성적이고 공격적인 우스개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되는 우스개를 즐기는 사람도 있는데, 전자는 외향성과, 후자는 내향성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시어스(미국의 심리학자)는 우스개를 구조 요인과 주제 요인으로 나눈다. 구조 요인은 종결로 향하는 원 경향성이 급작스레 어긋나면서 처음의 경향성과는 다른 엉뚱한 종결로 귀착되는데, 어떤 우스개든 이 특질이 없는 것은 거의 없다. 반면 주제 요인은 우스개의 필수 요인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공격욕, 우월감, 성욕의 충족이 주제가 된다. 전자가 인지적 유머라며, 후자는 정의적 유머다. 프루겔(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은 우월감과 공격성을 표현하는 유머가 사회의 발달 과정에서 점차 세련되고 인간화하면서 이때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어 오던 것을 오히려 동정하고 이와 합해서 제 3자를 공격하는 웃음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리고 플루겔은 이 공격적 웃음이 사회적으로도 정당화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요컨대 유머의 표현도 사회화되어 사회가 정당하다고 보아주는 방식과 대상에 대해 웃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류의 사람들은 유머를 자아가 초자아의 입장을 취해 더 고차적인 차원에서 스스로의 불안이나 난처함을 내려다보고 웃음으로써 감정 소모를 절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울포트는 성숙 인격의 특질의 하나로 유머를 내세우면서 "사랑하는 것을 웃으며 그러면서도 그것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이런 능력은 자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게 하는 자기 통찰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머는 공격성이나 성욕과 깊이 관련된 우스개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유머는 참된 자기를 알고 그러한 자기를 객관화시켜 웃을 수 있는 철학적 웃음이다. 따라서 인지적으로 비공격적이고 사회화한 유머는 자기 스스로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갖는 자기 통찰력 혹은 자기 객관화의 힘을 필요로 한다. 즉 예리한 지성으로써 가치 있는 인생관(자아관)에 서서 자기나 남을 보며 웃으면서도 이를 해결해 나가는 방향성이 있어야 이러한 유머는 가능하다.
유머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분은 한말 민족 운동의 지도자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다. 월남은 확고한 자신의 주장을 지키면서도 넓은 도량으로써 노소의 구별 없이 해학으로 대했으나, 그 내용은 결코 난잡하지 않았으며 흔하나 우스개에도 항상 한 가닥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깨달음이 있게 하였다. 그가 갑신정변 후 우정국 말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좌상, 우상을 역임한 김홍집이 미국에서 귀국해 국정의 개혁을 월남과 같이 논의한 적이 있었다. 김홍집이 탐관오리들의 숙청 본보기로 8도의 감사들을 처벌해야겠다고 말하니, 36세의 월남은 이에 답하길 "여덟 사람까지 죽일 것이 뭐 있소, 세 사람만 죽이면 될텐데?"라고 했다. 말하자면 제 정승만 본보기로 처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김홍집은 이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1888년 주미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재직하다가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고종이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폐하께서 선정을 베푸시면 미국은 호의를 가질 모양이며, 그렇지 않으면 가졌던 호의도 없어질 듯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주체적인 집정 태도를 풍자해서 간청한 예로 유명하다. 또 3.1운동 후 옥에서 나온 월남은 한참 동아나 그 청년을 바라보면서 "자네는 지금 호강하며 지내고 있는가?"라고 하며 반문했다 한다. 우리의 지금 처지가 옥내, 옥외를 가려 힘들 때냐는 뜻이다.
1922년 김윤식이 죽었을 때의 일이다. 박영효가 사회장을 발기했을 때, 망국 대신에 대해 사회장이 결정되었다. 이때 사회장 본부에 "개같은 놈"이라는 투서가 날아들어 본부 사람들이 분개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월남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대접한 말인데 그래?"라고 하며 투서한 사람을 두둔하였다. 옆에 있던 위원들이 불쾌하게 여기며 이유를 캐묻자, 월남은 "그래도 개는 주인을 아는 동물이야. 망국 대부로서 주인을 알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해 모두가 아무말도 못하였다고 한다. 월남의 유머에는 상당히 공격적인 것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의적, 국가적 견지에서 이를 해치는 것에 대한 공적 공격이라 할 수 잇다. 예를 들어 보자. 참찬으로 있을 때 상관인 참정 박제순이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위원직 10명을 요구하며 월남에게도 몇 명을 마음대로 임명하라고 했다. 그는 "내게는 위원이 소용없으니 돈으로 대신 주시지요"라고 하며 "늘 팔아 자시니 판로를 잘 아시겠으나 나는 그것을 모르니 소용없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또 병합 후 청빈 속에서 세금을 못내 강제 집행까지 당했던 월남에게 경성 부윤이 전근 간다고 사전 양해도 없이 발기인에 월남을 끼워 초청장을 돌린 것을 받아 보고는 "가재 전부를 집행해 빈집을 만들더니 마침내 성명까지 집행함은 너무 심하지 않소?"라고 말해 만좌를 웃겼다고 한다.
1906년인가 1907년에 일본 시찰을 가서 병기창을 둘러보던 중 감상을 이야기하라는 일본인에게 "병기창을 보니 일본은 과연 강대국의 면목을 가졌소. 그러나 나에게는 퍽 유감스럽게만 보이오. 성경에 총검으로 일어나는 자는 총검으로 망한다는 구절이 있으니 그것만이 걱정되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후 1911년 월남이 일본에 갔을 때 구한국 공사관에서 한국 유학생에게 연설하였는데, 그가 부모 잃은 동생들을 만난 것 같다고 말해 장내를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찰 소감을 묻는 일본인에게 월남이 "새어머니 집을 보니 죽은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오"라고 답해 주, 객이 다같이 침통해 했다고 한다. 그 언젠가는 조선군 사령관의 초대연에서 사령관이란 자가 감기로 고생한다고 말하자, 월남은 "감기는 대포로 못 고치시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항상 경찰의 감시 하에 있던 월남이라 경찰에 대한 풍자도 많다. 경찰관이 찾아와 "이리 오너라"라고 하고 문을 두드릴 때면 "오냐 나간다"라고 응수하며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월남이 어떤 연회에 나가 보니 눈익은 형사들이 많이 눈에 띄어 "어허 개나리꽃이 만발하였군"라고 하며 형사의 별명 '개'와 존칭 '나리'를 연결시켜 즉흥적으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한다. 별세 며칠 전에도 담당 형사가 문병을 가장해 동정을 살피러 왔는데 가족들이 못 들어가게 하였다. 이것을 안 월남은 그를 들여보내라 하고 들어온 그를 맞으며 "이 사람아, 기어이 내가 죽는 데까지 따라 올 참인가?"라고 하며 유머스럽게 꾸짖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시 별세 전 병상에서의 이야기다. 변영로와 구자옥이 문병 가니, 자신이 아끼던 두 청년을 보고 "이놈의 자식들, 내가 뒤졌나 안 뒤졌나 보러 왔지?" 라고 하며 웃기고는 벽쪽으로 돌아 누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란다. 죽어 가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웃어 보다가도 죽음의 절대성 앞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절망감 때문이리라. 아니면 사랑해 마지 않던 두 청년과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에 차마 울음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이같이 풍부한 유머를 나타내고 있는 그의 유머 성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안재홍(1891-1965)은 월남 사회장의 애사 속에서 "해학을 잘 하심이 선생의 평소이신가? 폐부를 찌르시는 해학 속에는 골수에서 우러나오는 분격이 잠기셨고, 낙천적으로 표현하심이 선생의 천질이신가? 화기유유하신 낙천의 그늘에는 천지에 사무치는 비통이 숨으셨다"고 보았다. 또한 변영로는 "치미시는 울분을 본의 아닌 해학으로 대체하시고 복받치는 불만을 진심 아닌 풍자로 교역하셨다"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월남의 유머의 원천을 공격욕으로 본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올포트는 성숙 인격의 특징으로 자기 객관화 경향을 내세우고, 이 경향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자기 통찰력과 풍부한 유머감을 내세운다. 유머는 자기 객관화로 말미암은 자기 스스로 웃는 것이며, 이같은 유머는 근본적으로 공격적이 아닌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공격적인 유머를 나타낸 월남의 성격 성숙성을 의문시해야 하는가. 그렇게 공식적으로 단순히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월남은 어려서부터 심술과 장난이 심했다고 한다. 그가 18세에 상격하여 과거에 낙방한 후 줄곧 박정양의 식객으로 35세까지 있었으니, 그의 욕구불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군다나 나라를 생각하고 정의를 앞세우는 그로서는 당시의 문란상에 대한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그의 유머에서 공격적인 경향이 다분함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하겠다. 안재홍이나 변영로가 그의 유머를 공격성의 표출로 보는 것은 정당하다. 다만 그 공격성의 표출이 개인적 공격이 아닌 사회화한 공격이며, 사회가 미워하고 경계 타도하려는 대상에 대한 불만을 승화시켜 나타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옳지 못한 상대를 비웃거나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유머라 해도 그 상대는 개인적인 적대, 경쟁 관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상대가 사회 일반이 미워하는 부정 관료나 침략자의 협조자였으므로 그의 유머는 사회적으로 공명을 얻었다. 말하자면 공격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공적 공격의 형식을 취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물론 그에게서 비공격적인 유머도 많이 나타난다. 박정양이 앓고 있을 때 의사를 데리러 간 사람이 심부름을 소홀히 했다고 꾸지람을 듣고 있자 "심부름 잘하면 또 시키는 법이야"라고 하며 웃어넘긴 것, 3.1운동 후 출감하는 그에게 인사하는 청년을 보고 자네는 호강으로 지내는 셈이냐며 반문한 것, 그리고 김윤식을 개 운운하며 비방한 자를 편들면서 "그래도 대접한 말인데 그래"하고 한 것 등은 표면적으로는 공격적인 것 같지만, 자기 입장을 확고하게 지키고자 하는 깊은 함축성을 지닌 유머이다. 이것은 비공격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며 깊은 반성을 촉구하는 유머라고 볼 수 있다.
총체적으로 보아 월남의 성격상 활동적인 외향적 경향이 우세해서인지 유머의 내용이 대상 지향적일 뿐 자기 지향적인 면은 적은 편이다. 그리고 그 유형도 인지적이라기보다는 정의적이다. 이것은 깊은 교양과 확고한 자기 입장에 서서 인간화하고 사회화한 인지적 테두리를 통한 유머이기 때문에 단순한 우월감의 충족이나 억압된 욕구의 충족으로 그치는 유머가 아니다. 다같이 즐길 수 있고 깊은 여운을 주어 생각하게 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올포트는 유머를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웃으며, 그러면서 그것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지만, 월남의 유머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웃으며, 그러면서 그것을 다같이 사랑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웃음은 웃음의 대상을 기반까지 없애 버리는 허무화의 웃음이 아니고, 웃음을 새로이 튼튼한 기반 위에 세워 주는, 웃음의 방향성이 뚜렷한 것이 하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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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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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욕망
반 고흐는 별들에 가 닿을 만큼 커다란 나무를 그렸다. 태양과 달은 아주 작게 그리고 나무는 크게 그렸다. 나무들은 점점 더 높아져서 별들에 가 닿았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 미쳤소? 어디서 그런 나무를 보았습니까? 태양과 달은 그렇게 작고 나무들은 또 그렇게 크오?" 고흐는 말했다. "나무를 바라볼 때면 나는 언제나 거기서 하늘에 가 닿으려는 대지의 욕망을 봅니다. 나무는 하늘에 가 닿으려는 대지의 욕망이요, 이것은 대지의 야심이죠. 대지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내 그림으로 할 수가 있소. 바로 이것이 내가 나무를 보는 방법이오. 하늘에 미치려는 대지의 욕망이 바로 그것이오."
- 이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길이다. 거기에 그릇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매우 시적이다. 진실한 이해자는 중용에 있을 것이다. 그는 태양과도 같을 것이다. 태양은 아름답게 시적으로 빛난다. 아름다운 그대로, 시적인 그대로 두엄더미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구분되어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진실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유
뮬라 나스루딘은 세 가지 이유에서 마실 수 없다고 술을 마시라는 카우보이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유를 대라!" 화가 난 카우보이가 큰소리로 말하자 온 마을이 공포로 술렁거렸다. "우선, 저는 종교적인 이류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둘째,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저는 그 저주받은 음식엔 손대지도, 건드리지도, 맛보지도 않을 것을 맹세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대장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막 술을 먹었기 때문이죠." 나스루딘이 말했다.
- 내 말을 지적으로만 이해할 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실행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는 말은 전부 머리 속에만 머물러 있고 결코 살아 있는 체험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살아 있는 체험이 되지 않는 한, 가치없는 지식의 잡동사니일 뿐이다.
더 쉬운 일
멋쟁이이긴 하지만 빈털터리이며 바람둥이인 사람이, 장점이라고는 재산밖에 없는 추녀와 갑작스러운 결혼을 하여 그의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더욱 그의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결혼 후에도 그가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자네가 돈 때문에 저렇게 끔찍이도 못생긴 여자와 결혼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네. 그렇지만 자네가 외출할 때마다 그녀를 동반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남편이 설명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그것이 그녀에게 작별 키스를 하는 것보다는 쉬우니까 말일세."
- 마찬가지다.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것은 매우 값싸고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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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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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9. 천안문광장을 메운 자유의 함성 - 천안문 사건 발발 (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 / 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 / 6월항쟁. 6, 25선언 공표 1988년 / 서울 제24회 서울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1989년 6월 4일 오전 1시 40분, 약 10만에 가까운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들이 밤을 세우고 있는 천안문 광장을 습격했다.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바로 겨누고 사격했으며 광장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로써 약 50여 일간에 걸친 중국인민들의 요구는 막을 내렸다. 다음날 중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중국 내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면서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한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해산했고 총에 맞거나 전차에 치인 학생은 없다. 폭도들이 소란을 피운 곳은 다른 곳이다. 폭도들은 군으로부터 총을 탈취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300여 명이다. 희생자의 절반은 군인이며 절반은 폭도 및 질 나쁜 구경꾼들이다) 라고 발표했다. 4일 한밤중의 대살육전이 끝나고 날이 밝아지자 4일 오전 계엄부대 사령부는 (수도에서 어제 저녁 중대한 반혁명 동란이 발생했다. 폭도들은 광기의 상태로 해방군 장병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군용차를 불질러 바리케이트를 쳣으며 해방군 장졍을 연행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뒤엎으려고 획책했다) 라고 하면서 천안문의 학살을 정당화했고, 천안문 시위대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간신히 피한 한 학생은 홍콩으로 탈출하여 기자들에게 그날밤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많은 동료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전차에 깔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군대는 짖겨진 시체를 삽으로 모아 포대기에 넣어 불태웠다)
이날 사건의 희생자는 중국 당국의 발표, 대만 그리고 외국언론에 따라 각각 다르다. 정확한 보도로 정평이 있는 영국 BBC 방송이 6월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만 7천여 명 (그중 군인이 1천여명) 에 이르렀다. 당연히 부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몸을 피한 시위대 지도부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대표들에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잡히면 총살당했다. 이것이 89년 봄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인 촤후를 장식하는 천안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떤면에서 10여년 전인 1976년 주은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집회와 비슷했다. 두 사건 모두에 관련된 사람은 등소평이다. 1976년에는 시위대를 배후조정한 협의로 실각했지만, 1989년 사건 때 그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위치였다.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무엇을 요구했는가? 북경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어떤 때는 1백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던 천안문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호요방의 죽음이었다. 그는 4월 15일에 죽었는데, 그때부터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천안문 광장의 약 50여일 일간에 걸친 긴 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호요방의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중국의 체제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0여년간 개혁과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및 개방정책은 완고한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 있던 중국을 커다란 혼란 속에 빠뜨렸다. 1980년대 중반에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개인농, 즉 사유제하의 농민이 생겨났으며 생산량도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산물의 생산량이 무한히 증가할 수는 없었다. 중국정부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산물 수매가격을 약 30% 가량 전체적으로 인상했고 이로인해 중국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으나 이 돈은 일부기업과 당 간부수중에서 놀아나게되어 경제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어떻든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중국경제는 상품시장 및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당연히 배금주의적인 풍토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에서 당간부들이나 몇몇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되어 심각한 소득 불평등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8년 중국공산당 13기 삼중전회에서는 긴축경제정책이 채택되었다. 개혁과 개방은 중국경제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고 이제다시 긴축경제정책을 펴게되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주 불투명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당간부들은 특권신분층으로 지위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개방정책에 의해 새로 세워지는 회사들은 당간부와 결탁할 수밖에 없고, 당간부들은 권력뿐 아니라 개인의 부도 증대시켰다. 고위 당간부들의 자식들은 그 부모를 이어 요직을 차지했다. 대학생들은 부패한 당간부에 의한 국가경영으로 인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가 있기 전부터 이미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공산당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개선요구는 공산당 중앙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말이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호요방의 죽음은 1989년 4월 15일 이었다. 호요방은 당면의 과제를 놓고 당시 중앙당 간부들이었던 조자양, 이붕, 양상곤, 등과 격력한 토론을 벌리다 졸도하여 그대로 죽고 말았다. 학생들은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않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 라고 애석해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등소평이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앙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집회장소는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이었다. 그들은 호요방의 재평가, 면예회복과 언론보도의 자유, 그리고 제반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등소평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동란이다) 라고하면서 강력한 진압을 명령하였다. 이를 이어받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는 이 학생운동은 비합법 조직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동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판,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시위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중국을 공식방문하고 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에 헌화하기로 예정이 잡혀있던 5월 17일에는 1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이 헌화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시위대의 행위에 동정적이었던 총서기 조자양은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방문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위로했다. 그는 실권자인 등소평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중앙에 의해 조자양은 연금상태에 들어가 실각되고 이붕 수상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5월 20일 북경의 중요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시위대를 포위했고 포위된 상태에서도 북경 중앙미술학생들은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그러나 민주의 여신상은 군인들에 의해 넘어뜨려졌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되고, 민주를 부르짖던 시위운동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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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助長) 助(도울 조) 長(길 장)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편에는 공손추와 맹자의 문답이 실려 있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 를 설명하고 나서, 순리(順理)와 의기(義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의 한 농부의 조급한 행동을 예로 들었다. 그 농부는 싹이 빨리 자라지 않자 그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도와주었다 라고 말했다. 그의 아들이 궁금하게 여겨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싹들은 자라기는커녕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는 이 이야기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은 사람을 드물다(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여 내버려두는 사람은 김을 매지 않는 자이고, 자라도록 돕는 사람(助之長者)은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이니,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助長 이란 문자적으로 도와서 성장시키다 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버려 두어도 잘 될 일을 쓸데없이 건드려 망쳐버린다 는 부정적 의미가 훨씬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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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하이힐을 즐겨 신은 남자
부츠는 전투용 신발로 탄생했다. 수메르나 이집트의 병사들은 맨발로 싸우고 있었으나 기원전 1100년 무렵의 앗시리아인은 구두 바닥을 금속으로 보강하고 장딴지까지 올라오는, 끈이 달린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앗시리아인들은 히타이트인과 함께 구두 제조로 널리 알려졌고 좌우의 모양이 다른 군대용 부츠를 신었다는 증거가 있다. 히타이트어 문헌 중에 농업신인 테리피누가 어리석게도 '오른쪽 부츠를 왼발에 신고 오른발을 왼쪽 부츠에 넣었기'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앗시리아의 보병용 부츠가 바로 그리스나 로마 병사들에게 도입된 것은 아니다. 맨발로 싸우고 있던 그들이 우선 신기 시작한 것은 바닥에 압정을 박아서 미끌어지지 않고 내구성이 있게 만든 샌들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튼튼한 부츠를 신은 것은 주로 도보를 하는 원정 때였다. 추운 계절에는 모피로 속을 대고 동물의 발이나 꼬리를 장식으로 매단 부츠가 많았던 것 같다. 부츠는 또한 추운 산악 지방이나 광대한 초원 지대의 유목 기마 민족이 평소에 사용하는 구두가 되기도 했다. 튼튼하고 더구나 약간 올라간 뒤꿈치가 발을 등자(발걸이)에 단단히 고정시키므로 부츠는 전투용 장비로서 안성맞춤이었다.
1800년대에 독일 헤센 지방의 구두 기능공은 무릎까지 오는 '헤시안'이라는 군대용 부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광택이 있는 검은 가죽 제품으로 로마인의 부츠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꼬리가 매달려 있었다. 같은 무렵 영국의 구두 기능공은, 전쟁의 승리를 등에 업고 웰링턴 부츠를 유행시켰다. 웰링턴이란 이름은 워터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대파한 장군인 웰링턴 공의 애칭인 아이론 듀크, 즉 아서 웨슬리 웰링턴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부츠는 몇 세기에 걸쳐서 유행과 퇴조를 되풀이해 왔다. 그리고 부츠의 가장 큰 특징인 유별난 뒤꿈치가 하이힐 구두의 유행을 낳았다. 하이힐은 하룻밤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조금씩 높아진 것으로, 시작은 16세기의 프랑스다. '하이힐'이라는 말은 요즘엔 뒷굽이 높은 여성 구두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원래는 남성의구두를 일컫고 있었다. 16세기에는 여성화에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다리는 긴 옷 밑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뒷굽이 높은 구두의 편리함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말을 탈 때였다. 힐 덕택에 발을 등자에 단단히 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힐을 붙이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된 최초의 부츠는 승마용이었다. 또한 중세에는 위생 시설이 빈약하고 도시가 과밀해서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따라서 두꺼운 바닥과 뒷굽이 있는 부츠는 실제로 몇 인치 몫의 보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심리적인 효과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세에 크록(목화)이 등장한 것은 거리의 오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북유럽에서 크록은 일부 또는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거리의 쓰레기로부터 고급 가죽 구두를 지키는 오버 슈즈로 태어났다. 그리고 따뜻한 계절에는 흔히 작은 가죽 구두 대신 신었다.
'펌프스'라는 독일 구두가 1500년대 중반에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이것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보석을 박기도 한 굽이 낮고 헐거운 덧신이었다. 그런데 나무 바닥을 걸을 때 뒷굽이 '뚜걱뚜걱' 하고 소리를 내므로 역사학자는 펌프스라는 이름이 붙여진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훗날 여성의 덧신인 스카프(슬리퍼)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붙여진 것이리라. 160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하이힐 신사용 부츠가 예장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유행시키고 굽을 더욱 높인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다. 유럽 역사상 가장 길었던 73년 동안의 치세 중에 프랑스 군사력은 최강이 되었고 프랑스 궁정은 과거에 없던 세려되고 찬란한 문화를 누린다. 하지만 위업이 아무리 떠받들여져도 루이 14세의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어느 날 자신의 키를 조금이라도 크게 보이려고 구두의 뒷굽을 몇 인치인가 높게 만들었다. 그러자 왕을 모방이라도 하듯 궁정의 남녀 귀족들 모두가 구두 기능공에게 자신들의 구두 뒷굽도 좀더 높이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구두 뒷굽을 더욱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남성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키로 되돌아왔지만 궁정의 여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에 역사적 불균형이 구두 뒷굽에서 나타난 것이다.
18세기에 프랑스 궁정 여성들은 금빛 은빛 자수 모양이 있는 뒷굽 3인치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미국 여성들은 파리의 유행을 모방하여 '프렌치 힐'이라는 이 구두를 도입했다. 이것이 미국에서 뒷굽의 양극화를 낳는 원인이 된다. 여성의 뒷굽이 점점 높고 가늘어져가는 한편, 남성의 구두는(부츠를 제외하고)반대로 낮아진다. 1920년대에 '하이힐'은 이제 실제의 뒷굽높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매혹적인 여성화의 패션을 나타내는 말이 되어 있었다. 끈이 없는 슬리퍼식 로퍼는 노르웨이의 초기 오버 슈즈인 크록에서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좀더 정확히 위전 로퍼는 메인 주 윌튼의 제화공인 헨리 바스가 '노르위전'(노르웨이인의)이라는 말의 끝 두 음절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바스는 뉴잉글랜드의 농부들을 위해 1876년에 발목까지 덮는 튼튼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 채벌용 구두나 특별 주문한 구두도 취급했다. 그는 버드 제독이 남극 탐험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신은 방한 부츠나,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 비행을 했을 때 신은 가벼운 비행용 부츠를 만든 인물이다. 1936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슬립 온식 모카신에 주목한 바스는 노르웨이 제조업자로부터 이것을 미국 시장용으로 다시 디자인할 것을 허가 받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로퍼가 '바스 위전'이라는 상품 라인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바스 위전이 손바느질한 모카신으로 과거에 없던 인기를 누렸다. 구두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던 옛날의 관습을 따르자면 바스 위전은 대학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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