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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0호
2012.2.28 (음 2.7)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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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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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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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책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은 분명히 생활 가운데 부질없는 야심과 쾌락의 추구에만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한데, 그 세계가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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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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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다
건국신화에는 시조가 알에서 왔다는 난생설화가 많다. 둥근 알을 태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태양은 곧 하늘이니 건국 시조는 하늘에서 알을 빌려 내려온 것이라 믿었던 시대의 일이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야의 김수로왕 등이 난생설화의 대표적인 주인공이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고주몽),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박혁거세), ‘6개의 알에서 남자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고…’(김수로왕), <위키피디아>에 나온 설명이다. 모두 알에서 비롯했는데 ‘(알을) 깨고’, ‘(알에서) 출생’,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온 것이다. 표현의 차이만 있는 것일까.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과 관련한 제보를 받았다. “‘갓 태어난 새끼는 털이 없는 맨몸에 온도 조절 능력이 없어서…’처럼 ‘펭귄이 태어났다’는 표현은 바르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태어나다’는 ‘사람이나 동물이 형태를 갖추어 어미의 태(胎)로부터 세상에 나오다’(표준국어대사전)라는 뜻이니 난생동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해산’, ‘태어남’과 한뜻인 ‘출생’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다’는 이처럼 어미와 태로 연결된 젖먹이동물(포유동물)에만 쓸 수 있는 표현이지만 꼭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다.
‘동물이나 사람이(사람이나 동물이) 꼴을 갖추어 세상에 나오다’(우리말큰사전·연세한국어사전)처럼 ‘태어나다’ 뜻풀이에 ‘어미의 태’를 적시하지 않은 사전이 여럿이다. ‘태’(胎)를 ‘태어나다’의 어원으로 볼 근거도 확실하지 않다. 다행히 국립국어원은 “‘태어나다’가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해 의미의 뜻풀이 추가를 검토하겠다”고 한다. 펭귄은 물론 닭과 공룡, 개구리도 태어날 수 있는 길이 하루속히 열리기 바란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외래어 / 외국어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부연 흑백텔레비전에 눈길이 모이던 그때, 야구 중계를 도맡아 하던 아나운서가 있었다. ‘빳따’(배트), ‘스라이딩~’(슬라이딩), ‘스뚜~라익’(스트라이크)이라 우렁차게 외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볼’을 ‘보울’이라 했던 그 아나운서의 발음이 고화질텔레비전(HDTV) 시대에 떠오른 건 미국 프로풋볼리그(NFL) 기사를 접해서이다.
‘이번 수퍼볼에는 30개가 넘는 기업들이…’(ㅈ일보), ‘슈퍼보울이 오는 7일 오전…’(ㅅ일보), ‘결승전인 수퍼보울은 단일 경기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ㅈ일보), ‘미국프로풋볼(NFL) 챔피언전인 슈퍼볼(Super Bowl)과 관련된 숫자다’(한겨레). 지난 화요일에 펼쳐진 결승전 관련 기사에 나오는 경기 이름이 네 가지로 표기되었다. ‘슈퍼’와 ‘수퍼’, ‘볼’과 ‘보울’을 제 나름대로 조합해서 쓴 결과이다. 외래어 표기 규정에 맞춰 적으면 ‘슈퍼’와 ‘볼’이 맞다. ‘볼’(bowl)은 ‘서양 요리 따위에서 사용하는, 안이 깊은 식기’를 가리키지만 ‘식기 안면처럼 우묵하게 생긴 경기장’(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기도 한다. ‘큰 사발처럼 생긴 미식축구경기장(또는 우승 트로피)’에서 유래한 경기 명칭은 ‘슈퍼볼’이다.
슈퍼는 ‘super-’의 발음[su:-] 또는 [sju:-] 가운데 널리 쓰인다고 판단되는 [sju:-] 발음을 기준으로 하여 ‘슈’로 적도록 한 것이고, 볼은 ‘중모음은 각 단모음의 음가를 살려서 적되, [ou]는 ‘오’로 적는다’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것이다.(영어 표기, 제8항) 이처럼 외래어 표기는 관련 규범을 바탕으로 현지 발음과 관용 등을 따져 정한다. 정해진 표기는 약속처럼 함께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미국에 가보니 이렇게 발음하더라’며 제 주장을 내세우는 건 옳지 않다. 외래어는 외국인을 위한 게 아니라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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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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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 - 윤의섭
모두 스쳐간다 활짝 피었다가 꽃잎처럼 흩어져 간다 저들이 뒤에서 성채를 이루거가 갑자기 소멸하여도 다가오는 풍경 흘려보낼 뿐이다
당신은 어느새 겨울로 접어든 노래입니까 산 중턱에서 만난 일주문이 묻는다 그 밤 소스라치며 떠오른 별들의 가장 오래된 후렴을 듣는다
폐가가 되어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고목이 되어 마지막 잎새를 피워보기도 했다 길고 긴 외경의 시간
가라앉은 책꽂이와 수북한 재떨이 식은 커피와 한켠에 고스란히 접혀있는 고지서 변함없는 절벽 무심한 파도의 해안에 이르러 고생물은 여정을 멈춘다 음악을 틀고 무한반복을 설정한다 백과사전에서 행성 항목을 찾아 페이지를 넘긴다 차례차례 별들이 스쳐간다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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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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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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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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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8장 가정의 즐거움
3. 성적인 매력에 대하여
여성의 권리와 그 사회적 특권의 증대가 겉으로는 인정되고 있지만 여성은 아직 마땅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 있어서조차도 그러하다. 내가 느낀 이 인상이 틀린 것이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의 권리가 커짐과 더불어 여성을 숭배하는 관념도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도대체 여성을 숭배한다는 것, 즉 참된 의미에서의 여성 존경은 여성에게 돈을 쓰게 하거나, 가고 싶은 곳에 가게 하거나, 실무를 보게 하거나, 투표를 하게 하는 것과는 반드시 병행하지 않는다. 구 대륙의 한 시민이며 구대륙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나는 평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는 중요한 일도 있고, 아무래도 좋은 일도 있게 마련인데, 미국 여성은 구대륙에서 살고 있는 동성과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좋은 일에 있어서는 모든 일이 앞서고 있지만 중요한 면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위치에 놓여져 있다. 어쨌든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여성 숭배 사상이 보다 더 강하고 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미국 여성이 지니고 있는 참된 주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전통적인 왕좌, 즉 가정이라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가정 안에서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는 행복한 천사로서 통솔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나는 이같은 천사를 본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신성한 가정 안에서 뿐이다. 가정 안이라야 부엌과 객실 사이를 조용히 왔다갔다 하며 가족에 몸을 바치는 가정 주부의 모습이 있다. 가정 안이라야 부인은 어딘지 모르게 빛을 내게 마련이고 이런 것은 사무실에서는 아예 어울리지도 않고 또 생각할 수도 없는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다만 사무용 자켓을 입었을 때보다 비단옷을 입고 있는 편이 더 매력 있고 우아하다는 단지 그것 뿐이겠는가. 아니면 단순한 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가정에 있어서의 여성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과 같다는 점에 깊이 음미할 바가 있다. 여성에게 사무복을 입히면 남자들은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며, 동료로서 그녀들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얇은 명주 크레이프나 비단 모슬린으로 만든 부인복을 입혀서 하루 일곱 시간의 노동 시간 중 한 시간쯤 사무실 안을 조용히 거닐게 하여 보라. 남자들은 경쟁 의식을 버리고 여성에 위압되고 감탄하여 제대로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판에 박은 일을 하라고 하면 여성은 실로 재빨리 요령을 알아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하는 데는 남성보다 훨씬 뛰어난 일손이 된다. 그러나 사무실 직원들이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차라도 함께 마시게 되어 장면이 바뀌게 되면 여성은 당장 그 자리에서 자기네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 동료나 상사를 보고 머리를 손질하라느니, 비듬을 없애려면 어떤 로션이 가장 좋다느니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게 마련이다. 사무실에서 여성의 말씨는 공손하지만 한 걸음만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당당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 된 입장에서 솔직히 말한다면... 굳이 꾸며서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공공생활 속에 여성이 그 모습을 나타낸 뒤로 사무실이나 거리나 할 것 없이 매우 우아하고 상냥한 기분이 더해져서 남자들에게는 참으로 고맙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실 안에서 주고 받는 말소리도 조용해지고 빛깔도 화려해지고 책상도 깨끗해졌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성적인 매력이나, 남자들이 그 성적인 매력을 찾는 기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그래도 미국의 남자들은 다른 나라의 남성들에 비하면 퍽 많은 덕을 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여성들은 이를테면 중국 여성들과 비교해 볼 때 성적인 매력이라는 점에서만은 훨씬 노력을 하여, 이성을 기쁘게 해 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 사회에서는 너무나 성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어 여성 그 자체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서양 여성들이 머리를 매만질 때에는 중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얼굴 화장을 하게 되면 중국 여성보다는 훨씬 대범하게 하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식사를 가려서 하고, 운동을 하고, 얼굴에 맛사지를 하고, 날씬하게 아름다워지기 위해 광고를 읽는 따위의 일에는 정성을 다한다. 또한 허리의 곡선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침대 속에서 두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있어서는 중국 여성보다는 훨씬 열심이다. 중국 여성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의 주름살을 펴고 머리를 물들인다. 로션이나 향수를 사는 데 쓰는 돈도 중국 여성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 그리하여 화장 도구가 또한 굉장하다. 예를 들면 낮에 바르는 크림, 털구멍에 바르는 크림, 레몬 크림, 볕에 그을리는 것을 막는 기름, 주름살 펴는 기름, 거북이 알에서 짜낸 기름, 그밖에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향유를 들 수 있다. 생각컨대 미국 여성들에게는 시간과 돈이 넉넉하다는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들은 남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옷을 입고, 그녀들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옷을 벗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이와는 반대로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자기 자신을 위해 옷을 입는 것인지, 또는 두 가지 경우가 다같이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 여성들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미국 여성들처럼 현대적인 화장 도구를 충분히 손에 넣을 수가 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같이 이성을 끌려고 바라는 여성에게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을 짓는 일을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50년 전만 해도 중국 여성은 발가락을 구부려 단단히 매어 남자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눈물겨운 고생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같은 전족을 폐지하고 기꺼이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
예술가는 남녀 육체의 해부학을 평등하게 연구하지만, 남성의 육체에 관한 연구를 영리상의 계산에 잘 맞도록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인 듯 싶다. 극장은 인간을 벌거벗기는 곳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의 마음을 괴롭히기 위해 여자를 벌거벗기는 것이지, 여자를 괴롭히기 위해 남자를 벌거벗기는 일은 우선 없다고 본다. 예술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것을 취지로 삼는 고급 쇼우의 경우에도 여성은 예술적이고 남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여자는 도덕적인 존재가 되라, 남자는 에술적인 존재가 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간단한 코메디에 나오는 남자 배우들은 언제나 손님들을 웃길 생각만 하고 있다. 예술적이라고 생각되는 무용에서조차도 그러하다) 돈벌이를 하려고 광고를 낸다. 그러면 저절로 테마가 잡힌다. 그것을 언제까지나 겉모양만 바꾸어서 상연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어떤 남자 배우가 에술적인 존재가 되려고 원한다면 잡지를 한 권 사다가 광고난을 한 번 죽 훑어 보기만 하면, 그밖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 편에서는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너무도 강하게 느낀 나머지 마침내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적 교의를 받아 들여 자기를 위축시키고 성적 매력을 발휘하기 위해 몸을 마사지 하게 되고 엄격한 훈련을 달게 받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더 아름다운 세계에 이바지 하려 하는 것이다. 좀더 마음씨가 좋지 못한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를 사로잡아서 놓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성적인 매력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성적인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은 여성이 본디 타고난 자질에 대한 미숙하고 덜된 사고 방식이다. 이런 미숙한 생각은 연애나 결혼의품격에 대해서는 어떤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연애관이나 결혼관도 잘못된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여성은 한 집안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상대 노릇이나 해주는 존재쯤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이다. 그런데, 성을 그토록 지나치게 강조하면 남성의 상대로서의 여성이 지닌 의의가, 어머니로서의 의의를 내쫓아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주장한다. 여성은 어머니가 됨으로써 비로소 최고의 모습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스스로 즐겨 어머니가 되기를 회피하는 아내는 순식간에 그 존엄성과 성실성의 대부분을 잃게 되어 남성의 한낱 노리개가 되는 위험 속에 빠지고 만다. 내 의견으로는 자식을 낳지 못한 아내는 첩에 지나지 않으며, 비록 첩이라 하더라도 아기가 있으면 어엿한 아내이다. 법이야 뭐라고 하든 사실이 그러하다. 아이만 있으면 정실부인이 아닌 여성의 입장도 고귀하고 신성해지지만 아이가 없으면 아내의 위치도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요즘의 부인네들 가운데는 얼굴과 몸맵시의 아름다움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피임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애욕의 본능이라고는 하나 인간 생활을 품부히 하기 위해 그에 알맞은 적당한 일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여성 자신이 오히려 손해를 본다. 성적인 매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은 아무래도 여성이 신경을 쓰는 일이며 남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성적인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또한 공평하지 못한 일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즉 아름다움과 젊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면 중년 부인은 백발과 세월의 흐름을 적으로 돌리고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중국의 시인은 일찌기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었다. 청춘의 샘이란 한 조각의 허망이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태양을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고> 지나가는 <청춘을 되불러 올 수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중년 부인이 그 성적인 매력을 유지하려고 조바심을 하며 애를 태우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맹렬하게 겨루는 것을 뜻하며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유우머만이 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령과 백발을 적으로 돌리고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을 벌이는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면, 무엇 때문에 백발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주계영은 이렇게 노래했다.
늙으매 헤일 수 없는 수백 개의 흰 머리칼 막을 재간도 없네, 한탄한들 무엇하랴, 가는 세월에, 늙어가는 그대로가 또한 흉일세.
참으로 옳은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미국식 사고 방식은 모두 자연스럽지 못하고 또 공평하지도 못하다. 중량급 선수가 몇 년 뒤에는 젊은 도전자에게 선수권을 물려 주고 뛰어난 경마용 말도 늙게 되면 나이 어린 말에게 지위를 넘겨 주어야 하는 것처럼 부인도 늙게 되면 젊은 여성과 겨루어 보았자 누가 이기고 질 것인가는 뻔한 일인 만큼 그런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일 그런 짓을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의 성과 싸우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머니나 나이든 여성들에게는 불쾌한 이야기다. 성적인 매력의 문제로 중년 부인들이 자기들보다 젊은 여성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가망없고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여성에게는 성보다도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느니만큼 더욱 어리석게 생각된다. 구애라든가 구혼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래도 육체적인 매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성년이 된 남녀는 이미 그런 매력에만 사로잡힐 나이는 아닐 것이다.
인간은 온갖 동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성애가 강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성애의 본능 외에 가정 생활을 영위하는 데서 비롯된 그와 마찬가지로 강한 이미로서의 본능이 있다. 성애의 본능과 어버이로서의 본능은 대다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가족의 시초는 긴팔원숭이의 생활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미술, 영화, 연극을 구경하고 언제나 성적인 자극을 거듭하여 너무나도 변질적인 교양 속에 빠져 성애 본능이 어버이로서의 본능을 짓누르게 되면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습성을 기르게 되면 가족적인 이상이 잊혀지기 쉽고, 게다가 개인주의적인 사상까지 곁들여 갖게 되면 결과는 더욱 좋지 않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회에서는 결혼은 기괴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대개 결혼식을 알리는 종소리로 모든 일은 경사롭게 끝나는 것인데, 이와 함께 그러한 키스는 끝나고 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회에는 남성의 짝이지 아기 어머니가 아니라는 이상한 여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상적인 여성이란 완전한 육체적인 균형과 매력있는 젊은 여성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람 옆에 서 있을 때만큼 여성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아기를 품에 안고 너댓 살 된 어린이의 손을 잡고 걸을 때만큼 여성이 진지하고 위엄있어 보이는 때는 없다. 전날에 내가 본 적이 있는 유럽의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의 광경인데, 어머니가 베개를 베고 침대에 누워 가슴께에 있는 갓난 아이와 놀고 있는, 그때만큼 여성이 행복한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성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너무 심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중국인에게는 심리적인 컴플렉스 같은 것은 아랑곳없는 일이니까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저 정신분석학적인 오이디푸스식 인과 관계나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컴플렉스 따위를 끌어내 보았자, 중국인의 안목으로 본다면 우스꽝스럽고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나는 여기서 밝혀 두지만 나의 여성관은 이러한 심각한 모성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만 단순히 중국인의 가정 이상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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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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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8. 존재와 무 L'Etre et le Neant(1943) -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1905-80)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프랑스의 지성 - 조광제(경남대학교 강사)
프랑스를 떠올릴때 함께 다가오는 가장 매력적인 낱말을 든다면 '레지스탕스'가 아닐까? '아우쉬비츠'가 집단 학살의 악마적인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반면 '레지스탕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체적인 인간이고자 하는 결단과 투쟁을 상징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 레지스탕스의 중심에 선 철학자다. '레지스탕스'는 사르트르에게 자유가 어떻게 목숨 이상으로 인간에게 근본적인가를 체험케했다. 샤르트르는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2세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는 '아버지'는 이미 결정나 버린 과거가 열려있는 미래를 얽어매는 것을 상징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에 대한, 이같은 사르트르의 해석은 첫 철학책'존재와무'의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사르트르는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외조부는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친조부이다. 11세때 어머니가 재혼하여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사르트르는 1924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이끈 레이몽 아롱, 조르쥬 캉귀엠, 모리스 메를로 퐁티를 만났다. 특히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대변하는 저널 '현대'지를 공동으로 편집하게 된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모두 현상학자로서 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때로는 같은 길을 때로는 서로 엇나간 길을 걷기도 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지성계를 주도하게 된다. 1929년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르트르는 같은 시험에서 2등을 한 시몬느 드 보봐르를 만나 세간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계약결혼을 했다. 이 유별나고 자유로은 동거관계는 1980년 당시 미학 문제에 골몰하던 사르트르가 생을 마감함으로써 함께 마감하게 된다.
1931년부터 아브로 중고등학교에서 철학교수로 일하다가 1933-34년에 걸쳐 베를린으로 가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했다. 후설현상학에 대한 연구는 사르트르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존재와 무'가 "현상학적 존재론에 관한 논고"라고 부제를 달고 있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둘러싼 온갖 사물과 사건에 관해 "이것들이 도대체 다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가령 우리는 밤 하늘의 별, 계곡의 바위, 억수같은 비, 불투명한 안개, 밤거리의 비명소리, 연인들의 입맞춤, 잔인한 살인 등을 보고 들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이 모든것이 다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질수 있는데, 현상학은 이것들이 '무엇무엇'이 되는 데는 반드시 인간의 주체성이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현상학은 별이 별일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 별을 별이게끔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왜 그런가를 밝힌다. 또 현상학은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세계속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것들과는 달리 세계전체를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베를린에서 이런 현상학을 배웠던 것이다. 베를린에서 돌아온 사르트르는 1936년 최초의 철학 논문 '자아의 초월성'과 철학책 '상상력'을 연이어 발표하고 1937년 소설 '벽'에 이어 1938년 유명한 첫 장편소설'구토'를 출간했다. '구토'에는 현상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투로 주인공 로캉탱의 일상적인 의식이 묘사되어 있다. '구토'에는 인간의 의식을 완전히 벗어난 사물의 모습, 인간의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물의 모습, 다른 인간의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물화된 인간의 모습, 사물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간의 모습등이 그려져 있다. 1939년 '정서론에 관한 소고'를 출간하면서 전쟁에 가담한 사르트르는 1940년 6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투옥된 뒤 1941년 4월 민간인임이 밝혀져 석방된다. 석방된 뒤 저항단체 '사회주의와 자유'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 가운데 1943년 드디어 '존재와 무'를 출간했다. 같은 해 희곡'파리떼'도 발표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난뒤 사르트르는 '현대'지의 창간 주필을 맡으면서 또 하나의 장편소설 '자유에의 길'을 발표하고 이듬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유물론과 혁명''무덤없는 죽은자'를 발표했다. 특히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서구의 전통을 규정해 온 기독교적 인간관과 본질적인 인간관을 비판하고, 인간이란 각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배우처럼 반드시 어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고 행동해 나감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각본을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열려있는 존재 즉 실존임을 역설했다."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은 여기에서 참뜻을 얻는다. 사르트르는 1947년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실 참여로서 문학행위를 강조했다. 이듬해 '민주주의와 혁명'이란 단체를 결성하고 그뒤 공산주의 진영과 끊임없는 협조와 대립의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대담'(1950)'공산주의자와 평화'(1952-3) '방법론 문제'(1957) 등을 발표한 사르트르는 1960년 또 하나의 큰 철학책'변증법적 이성 비판'제 1권"실천적 총체의 이론"을 출간한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실존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통일하려 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이론을 기본으로 삼고 특히'총제성'개념을 바탕으로 삼아 역사 상황에서 개인의 주체적 혁명실천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추적한다. 그뒤 사르트르는 1980년 숨을 거둘때까지 많은 저술과 정치 사회 활동을 수행한다.
사르트르는 철학, 문학, 예술, 정치, 사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가장 왕성한 종합적 지성의 힘을 발휘한 불세출의 거장이었다. 특히 1964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을 거부한 것은 그의 매력을 드높였다. 20세기 프랑스 지성을 들먹일때 사르트르가 그 중심에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구조주의가 프랑스의 지성계를 장악하기 시작할 무렵 이제 사르트르의 지성적 위력은 쇠퇴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때 프랑스는 사르트르가 지성계의 무대에서 퇴장해 버린 뒤 지성계 전체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느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식으로 한 영역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지성의 표현방식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르트르식으로 종합적 지성의 표현방식을 택할 것인가 기로에 섰을때, 프랑스가 결국 사르트르의 길을 택한 것은 사르트르의 지성이 프랑스 지성계에 얼마나 강한 영향을 발휘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우리는 자유로 선고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르트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책'존재와 무'의 내용을 살펴보자. '존재와 무'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또 그것을 위해 '어떤 것'이 있을때 그 어떤것의 '있음'이 어떠한가를 다룬다. 가령 바위가 있을때 바위의 '있음'을 다룬다. 또 가령 수치심이 있을때 수치심의 '있음'을 다룬다. 바위의'있음'이나 수치심의 '있음'을 다룬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어떤 것의 '있음'을 다룬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 하는 발생적인 원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가령 바위의'있음'을 다룬다는 것은 옛날옛적에 퇴적물이 쌓여 습기가 달아남으로써 응결되었기 때문에 바위가 생겼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할 일이지 철학이 할 일이 아니다. 철학에서 바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있음'이 어떤 방식으로 성립하는가를 다룬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모든 것이 있기는 있는데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를 다루기 위해 그 모든것이 있음을 알고 있는 의식을 끌어들인다. 어떤것이 의식을 갖는가 또는 갖지 않는가? 어떤 것이 의식을 가짐으로써 또는 갖지않음으로써 어떻게 달리 있는가? 이런 따위가 문제인 것이다. '존재와 무'의 부제인 "현상학적존재론에 대한 논고"에서 '존재론'이란 명사는 모든 것의 '있음'을 다룬다는 데서 성립하고, '현상학적'이란 수식어는 의식을 중심으로 '있음'을 탐구한다는 데서 성립한다.
사르트르는 '있음'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있긴 있되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있고 또 자신이 의식하는것(자기 자신)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있음이다. 말이 복잡하다. 풀어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물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자랑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애정과 분노를 느끼며 살아왔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의 기쁨이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의식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기뻐하거나 성낼 따름인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의식함으로써 그 기쁨을 한층 더 만끽할 수 있고, 분노를 의식함으로써 그 분노를 더 깊이 마음속에 새길 수 있다. 먼저 내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기쁨이 있고, 다음으로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그 기쁨을 또 다시 의식하는 의식이 있다. 우리는 때때로 재미있고 즐거워하면서 이런 일에 이렇게 재미있고 즐거워하다니 무슨 꼴인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재미있고 즐거우면 그저 재미있고 즐거워하면 되지 그것을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어릴때부터 왠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일에 익숙할 것이다. 어떤 의식에는 늘 의식을 다시 의식하는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비유컨대 거울에는 그 거울을 비추는 또하나의 거울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울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 역시 거울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새로운 그 거울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벌써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이 없듯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은 없다. 거울에는 자신이 비추는 것으로 가득차 있듯이 의식에는 의식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또 비친 것이 없이는 거울이 아니듯이 의식된것을 빼 버리고 나면 도대체 의식이란 것은 없다. 그런데 의식된 것이 바로 의식은 아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의식의 '있음'이 아주 독특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릇에 물이 가득 들어 있을 때 물을 덜어낸다고 해서 그 그릇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물을 부으면 부을수록 점점 커지고 물을 덜어 내면 낼수록 더 작아지는 어떤 신기한 그릇이 있다고 해 보자. 물이 그릇은 분명 아니지만 물이 없어지면 그릇도 함께 없어질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릇과 물은 한 몸이라 할수 있다. 사르트르가 본 의식은 바로 이 그릇과 같다. 그릇의 처지에서 보면 물은 곧 자기 자신이면서 또 한편으로 곧바로 자기 자신은 아니다. 의식은 자신 속에 가득 차 있는 의식된 내용들이 곧 자기 자신이면서 또 한편으로 곧바로 자기 자신은 아님을 안다. 이같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되 자기 자신이 없이는 있을수 없는, 그리고 의식하는 자기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가득차 있는 것이 곧바로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있음'을 사르트르는 대자존재라 일컫는다.
이런 대자존재인 '있음'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르트르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있음'은 스스로를 의식할수 없고 따라서 그 자신속에 닫혀 있는 '있음'이다. 우리는 각 물건을 '이것'이라 가리킬수 있다. '이 책''이 돌'심지어 '이 사람''이 느낌'이라는 말들이 그것이다. '이 돌'이라 말할수 있으려면 그 돌은 그 자체또는 그 자신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돌이 그 자신을 벗어날수 있다면 '이 돌'이라는 우리의 말은 효력을 잃고 말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벗어날수 없는 것들의 '있음'을 일컬어 사르트르는 즉자존재라 한다. 대자 존재는 자기자신과 어떤 거리를 지닌다. 그러나 즉자존재는 자기 자신과 아무런 거리도 갖지 않는다. 대자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거리를 둘수 있는 것은 대자존재가 성격상 그 자신을 부정하면서 성립하기 떄문이다. 이때 대자존재가 부정하는 자기자신은 이미 결정되어 버린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왔고 살아온 그만큼 우리 자신은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습이 곧 나 자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 자신의 곧바로 나 자신임을 부정한다. 그 부정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의 나와 거리를 갖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순간순간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그 부정을 통해 진정한 나 자신을 형성해 온것이다. 누군가 전에 본 내 모습에 근거해 지금의 내가 어떠한 인간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나는 참으로 난감해질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 현재까지 내 모습을 다 알고 있고 또 그것을 근거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단정 짓는다면 역시 나는 난감해 질 것이다. 이는 우리의 존재가 과거와 현재에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순간순간 미래로 열려 있는 데서 성립함을 말해 준다. 사르트르는 이같이 순간순간 이미 이루어진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미래로 도약해 가는 것을 초월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초월에서 자유를 찾는다.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면서 미래로 초월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사르트르는 말한다."우리는 자유로 선고되었다."
남은 지옥이다.
초월하는 순간 초월하는 주체는 그 자체 아무것도 아니다. 초월그 자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와 무'에서 '무'란 인간의식의 대자존재적 초월을 일컫는다. 무는 초월의 방향을 자유롭게 한다. 돌이켜 말하면 무에서 성립하는 자유로운 초월이 우리 인간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해온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초월의 산출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에는 미리 정해져 있는 본질적인 방향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에게서 초월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는 데서 구체화 된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방식으로건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다.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를 향해 뛰어드는 것, 또는 자신이 스스로 짜 만든 그물을 미래로 던져 미래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즉자존재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어떤것으로 정해져 있다. 돌덩이가 돌덩이인 까닭은 이제까지 돌덩이였기 때문이다. 즉자 존재는 과거에 얽매여 있고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따라서 즉자 존재는 필연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대자존재는 주체적인 자유를 나타내고 즉자존재는 필연성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다. 대자존재는 주체적인 자유를 나타내고 즉자존재는 객관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즉자존재는 대자존재에 대해 도구로서 기능한다. 왜냐하면 도구가 되려면 객관적 필연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망치가 객관적 필연성이 없다면 망치를 두드릴때 망치는 못을 치지 않고 언제든지 내 이마를 칠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에서 이 두 존재는 결코 서로 겹칠 수 없고 서로를 밀어내는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다.
'존재와 무'후반주에 이르러 사르트르는 또 하나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남과 관련해 내게서 성립하는 '있음'이다. 가령 내 아버지에 관련해서 볼 때 나는 자식으로 있고, 국가에 관련해서 볼때 나는 국민으로 있다. 이처럼 나에게 속해 있긴 하나 언제나 남과 관련해서 성립하는 '있음'을 대타존재라 한다. 남은 나에게 남이고 나는 남에게 남이다. 서로는 자신에게 자신이면서 서로에게는 남인 것이다. 처음부터 남은 내가 나를 초월하는 작업에 결코 동참할 수 없다. 초월은 나 자신 속에서만의 일이고 애초 남은 내 속에 진정으로 들어올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나를 대할 때 나를 외면적으로 규정되는 어떤 대상으로 본다. 이를 사르트르는 남이 나를 객관화한다고 말한다. 즉 남은 나를 즉자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남이 나를 즉자 존재로 본다는 것은 나를 그의 도구로 본다는 것과 통한다. 사라트르는 내가 남에 의해 즉자 존재가 되는 경험을 '수치심'이라 한다. 가령 열쇠구멍을 통해 방안에서 옷벗는 나를 누군가 훔쳐보고 있을때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그때 그 누군가는 나를 즉자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또 누군가가 그렇게 내 방 안을 들여다보다 제 3의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었을때 그 자 역시 제 3의 다른사람에 의해 즉자존재가 되는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나를 즉자존재로 만드는 남의 시선을 사라트르는 '흉측한 시선'이라 일컫는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은 뚱뚱한 선술집 주인이 멜빵을 매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주인이 멜빵에 걸려 있다고 느낀다. 로캉탱의 '흉측한 시선'은 선술집 주인을 여러 물건 가운데 한 물건인 양 보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수치심을 분석하면서 수치심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남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나타내고 남이 나를 대상화하는 '흉측한 시선'을 지닌 대자존재로서 존재함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나는 타인과 더불어 살면서 타인이 나를 진정한 정신적 주체로 대우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남이 나를 진정한 정신적 주체로 대우한다는 것은 곧 그 타인이 내가 그를 즉자존재로 대상화해도 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은 좀처럼 나를 진정한 정신적 주체로 대우하려 하지 않는다. 즉 내가 타인을 즉자존재로 대상화하는 정도에 따라 나는 그 타인에 애해 그만큼 자유롭고 타인 역시 나에 대해 마찬가지로 처지에 있다. 그래서 이제 나의 실존은 주관 내부에서 독백하기를 그치고 상호투쟁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상호투쟁의 인간관계에서 일단 두 가지 유형의 사는 방식이 나타난다. 하나는 내가 나 자신만의 세계가 주는 불안에서 달아나 남이 나에게 부여하는 가치에 따라 살려 하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남의 주의를 끌어야 하고 남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남의 욕망에 적절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우선 나의 욕망을 포기한다. 이때 남은 내 주인이 되고 나는 남 앞에서 부자유의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런 삶의 전략을 사르트르는 '매저키즘' 즉 피학적 삶의 방식이라 한다. 이런 삶의 방식은 자기 패배적이다. 수치심은 나의 대자 존재적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피학적인 삶을 계속 유지할수 없다. 이제 나는 오히려 남을 내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배우로 만들어 수치심을 통해 깨닫게 된 나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남은 자신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저항할 것이므로 나는 남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사르트르틑 '새디즘' 즉 가학적 삶의 방식이라 한다.
그러나 새디즘 역시 자기 패배적이다. 왜냐하면 새디즘에 의한 자유로운 주체성은 강제로 얻은 것이므로 만족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불안한 나의 세계로 되돌어온다. 그럴때 나는 남과의 관계에 대해 일체 무관심하게 살아 보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관심의 방식 역시 실패한다. 남에 대한 무관심이란 바로 남에 대한 끈질긴 관심의 다른 한 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사르트르에서 개인적 실존의 초월적 주체성의 자유는 나와 남과의 상호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자유로 귀착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말했다. "남은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존재하는 모든 것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특별한 존재인가를 다루어 초월해 가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유로운 선택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드러낸 그러한 인간은 개인으로서 내면적 인간에 국한되는 것이었고 결국 구체적 인간관계속에서 어떻게 인간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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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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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넷째 묶음 - 성숙 인격
지도자의 인격
집단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사람됨이야말로 그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관건이라 하겠다. 이제 올바른 지도자로서 꼭 갖추어야 할 사람됨으로서의 성숙 인격적 특질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구성원 서로 서로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한군데 모여 있거나 혹은 관찰자의 의식 속에 한데 뭉쳐 인지되는 사람들의 모임을 집단이라고 한다. 부양하고 부양 받고, 사랑하고 사랑 받는 관계로 서로 모여 있는 것은 가정이다. 또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어떤 결론을 내리는 관계로 모여 있는 위원회라는 집단도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두 사람 이상의 구성원들이 자기의 초자아 속에 똑같이 동일한 모델이나 이상을 지니고 있을 때, 이들은 심리적으로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초자아란 출생 후 부모나 다른 가족으로부터 훈련받아 마음속에 형성된 이상적인 모습이나 표준적 기준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 초자아는 한 개인의 이상이나 양심 또는 행동의 기준이라 할 수 잇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자기가 해야 할 것과 살아갈 방식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즉 추구하는 바가 같고 삶의 이상형이 같을 때 이들은 한 집단이 되었다고 본다. 한 집단을 이루면 구성원은 서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서로가 모방의 대상이 되고, 이로 인해 자기 신뢰는 더욱 굳어져 구성원 상호간에 '우리들'이라는 표현이 자연히 나타나게 된다.
집단 내에서 몇몇 구성원들이 그 중 한 사람에 대해 동일시를 보이며 각자가 지니고 있는 유사한 내적 갈등을 해결해 나갈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이 집단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가 집단 전체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 다른 구성원들은 이에 추종해 나가는 상호 작용의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일정한 양식으로 일관성 있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 이 상호 작용이 뒤바뀌는 수도 있다. 이를테면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늘 이끌어 나가고, 다른 사람들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사태의 변화에 따라 이끌어 가고 따라다니는 이러한 관계가 교체되는 경우가 있다. 부부 관계에서도 생활의 모든 면에서 부창부수를 고수하기도 하지만, 가사 문제나 자녀 양육에는 아내가 선도적 역할을 맡고 남편은 이에 뒤따라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같은 집단 내에서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지도자가 바뀔 수도 있다. 지도자란 집단을 지도하는 자리에 임명 또는 선출되어 그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보통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이 실제적인 실권을 쥐고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집단을 이끌어 나가는 직책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지도자라고는 할 수 없다. 지도자는 또 집단 구성원들의 행동의 촛점이 되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구성원들이 다 같이 애정을 표시하고 자기와 동일시하는 중심적 인물이 있으며 구성원 상호간의 동일시도 생기고 구성원 각자의 이상적 자아 속에 이 중심 인물의 사람됨이 구체화되어 구성원들은 이를 모방하고 추종하는 행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지도자가 이끄는 방향으로 집단을 쉽게 움직여 나간다. 이처럼 집단 구성원과의 정서적 유대를 중시하는 지도자의 개념은 집단의 목표나 기능의 완수와는 관련이 적은 입장에서 지도자를 생각하게 되는 흠도 없지 않다.
집단 속에서 영향력이 많은 사람을 지도자라 생각하려는 경향도 있다. 제반 사회적 상황에서 선도적으로 계획을 잘 세워 여러 사람의 행동을 조직화시키는 능력, 그리고 여러 사람을 잘 이끌어 협동해 나가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본다. 즉 여러 사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나가게끔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는 자를 지도자로 한다. 특히 이 영향력이 집단 구성원에게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요건은 이 영향력이 집단 전체의 기능이나 발전에 크게 공헌하는 점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구성원에게 미치는 지도자의 영향력은 집단 전체의 진행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에 비하면 2차적이라고 하겠다. 사실 지도자의 참된 존재 의의는 집단 전체를 이끌어 효과적인 성취를 이룩하게 하는 데 있다. 이렇게 볼 때 집단 전체의 성취에 적극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참된 지도자를 규정지으려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입장에서는 집단 전체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발휘하는 데 집단의 통합성, 응집성, 점착성 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들을 강화시키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의 존재를 그가 한 집단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나 인망 또는 구성원에게 주는 영향력 혹은 집단의 성취에 공헌하는 정도에 따라 파악하고 있지만, 그리 분명한 해답은 아직 못 얻고 있다. 지도자란 무엇이며 지도력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실제로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격상 특징들을 지적한 연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도자의 신체적 특징을 살핀 연구를 보면, 키가 크다느니 작다느니 체중과 외모 등이 상관이 있는 것 같다느니 하지만 확실한 결론은 내리기 어렵다. 다만 체력이 강건하고 정력적인 면이 공통되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또 우수한 지능을 지도자의 일반적 특징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카텔은 인격 특성 12개 중의 하나로 일반 정신 능력을 생각했는데, 이는 지적이며 현명한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독립성, 인내력 면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 정신 능력이 지도자들에게는 훨씬 강하게 나타나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능력이 그대로 지도력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가 지능이 너무 우수하면 오히려 지장이 많다고 한다. 지도자의 지능 계수가 일반 구성원들보다 30 이상의 높은 차이를 보일 때, 지도 관계는 형성되기 어렵다고 한다. 심리학자 터만(1884-1959)의 천재 연구에서는 큰 집단의 지도자는 구성원보다 지능 계수의 평균의 20 내지 30은 높아야만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다고 밝힌다.
자신감 또한 지도자의 중요한 특징이라 하겠다. 위대한 역사상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고, 이에 더하여 명예욕과 지배욕 또는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편이라고 본다. 하여간 집단이 크든 적든 한 집단의 지도자는 그 구성원들보다 자신과 확신이 더 센 편이라 한다. 이러한 자신과 확신이 목표 달성을 위한 활동을 순조롭게 하고 권위를 인정받게 해주기도 한다. 지도자는 강한 인내력, 지구력, 결단력이 있으며 요구 수준이 높은 만큼 근면하고 야심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카텔은 지도자는 초자아의 세기가 강한 편이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결단력, 책임감, 자제력, 야심 등이 많은 것을 말한다. 크레치(미국의 심리학자)는 집단의 구성원 중 지배욕이 강한 사람이 지도자로 발전된다 하여 지배욕을 지도자의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보았다. 집단 속에서 개인은 다름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달성시켜 나가면서 동시에 부수적으로 개인적인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한다. 이 때 지도자와 추종자를 구별하게 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것으로써 어떤 강력한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강력한 욕구란 다름 아닌 지배욕 또는 권력욕이며, 지도자란 결국 이런 욕구를 가지고 이를 충족시켜 나가는 사람이다.
지도자의 사람됨의 특징을 찾아보아도 모든 집단의 지도자에 해당되는 지도자 특유의 인격 특질이라는 것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지도자에게 바람직한 사람됨의 특징이란 구성원들이 용인하는 목표로 집단을 잘 이끌어 나가고 이를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게 하는 측면을 갖추면 된다고 본다. 이러한 면을 지니는 사람은 집단을 구성하는 일반인보다는 한층 탁월한 인물이어야 하며,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능률적, 자주적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이란 결국 성숙 인격자를 말하므로 지도자의 특질은 성숙 인격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자의 기본적 자질은 올바른 사명감을 가지고 이것을 완수하기 위해노력하는 것인데, 심리학적으로 이와 같은 모습을 자기 실현 또는 자기완성이라고 한다. 자기 실현 등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성질들에 대해서 앞서 성숙 인격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성숙 인격이 보여주는 책임감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지력 등의 성숙한 자세들은 지도자의 품성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라 하겠다.
지도자가 그 구성원들을 통솔해 나가는 행동들을 분석해 보면, 크게 고려성과 선도성이라는 두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성이란 지도자가 상호간의 우호 관계, 신뢰, 존경, 그리고 지도자와 구성원 사이나 집단원 상호간의 따뜻한 관계를 고려해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또 선도성이란 구성원의 역할을 정의 짓고 조직을 확보하는 것, 의사 소통의 통로를 터주고 일하는 방식을 일러주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고려성은 집단유지 기능에, 선도성은 집단 목표 달성 기능에 각기 깊은 관계를 갖는다고 하겠다. 지도자의 기능 중 고려성에 관련이 깊으면서도 집단의 목표 달성에도 중요하게 역할 하는 상호간의 애정적 관계를 문제삼아 보기로 하자. 사실 사랑과 이해로 타인과 따뜻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성숙 인격의 중요한 특질이다. 한마디로 애정이란 말을 쓰지만, 애정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차이가 있다. 호니는 애정 행동을 유발하는 원동력에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나타나는 사랑의 감정이나 이에 수반되는 행동에도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사랑일 때는 자발적이고 분별력 있게행동하지만, 불안에 쫓겨 사랑하는 경우는 강박적 또는 맹목적으로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것 같다고 한다. 흔히 인격적으로 한 개인과 접촉하여 쾌감, 안정감, 행복감 등의 정서적 충족을 얻음으로써 그 인격과 영구적인 접촉을 유지하려는 경향성에 대해 애정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자신의 불안 상태를 면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접근하여 의지하려고 하는데, 이 경우 사람의 감정적 충족은 2차적이고 불안에서의 구제가 1차원적인 요소가 된다.
설리반(1892-1949,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은 애정을 어느 특정인이 체험하고 있는 만족이나 안전을 마치 자신의 만족과 안정처럼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다시 말해 대인 친교의 욕구가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대인 친교란 접근적인 인간 관계로서 두 사람이 서로의 개인적 가치들을 인정하고 이를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관계에서는 공동 의식이 생겨 집단 전체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즉 서로의 개인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모든 문제를 우리의 일로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 의식을 갖는 이러한 인간 관계가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애정적 관계란 결국 상대방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여겨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고를 다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성숙 인경의 모습이라 하겠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구성원 각자를 이해하고 장점과 단점을 살핌으로써 그들의 발전과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해 솔선 지도하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통일되고 자주적이며 성숙한 인격을 도야하는 과정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교양이란 한마디로 안전감, 지배욕, 명예욕 따위의 하위 욕구 충족이 아닌 참된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아마도 대소를 막론하고 어떤 집단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려면 참된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는 바로 이러한 교양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197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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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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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산다는 것
어떤 재단사가 그의 친구와 사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아프리카에서 사자를 사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10피트쯤에서 다가오는 한 마리의 사자를 발견하게 되었네. 마침 내 손에는 총이 없었어. 그 사자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어. 사자는 5피트 거리로 좁혀 들어오고 있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 친구는 숨을 죽였다. "잘 들어 보게. 간단히 말해서 사자는 결국 나를 덮쳤네. 그리고 나를 죽였지." "그게 무슨 말인가? 사자가 자네를 죽였다니? 자네는 여기 앉아 있고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재단사가 말했다. "허어, 그럼 자네는 이것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 살아 잇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거에 의해서, 과거의 그 사자에 의해서, 혹은 미래에 의해서, 미래의 그 사자에 의해서 죽어 있는 것이다.
뚱뚱한 여자
어떤 여자가 말했다. "나는 뚱뚱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전혀 뚱뚱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가 뚱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호텔에서 나와서 도어맨에게 말했다. "택시를 불러 주세요." 도어맨이 말했다. "예, 즉시 택시를 불러 드리죠. 그런데 당신에게 맞는 택시가 있을까요?"
- 그녀가 뚱뚱하다 해도 그녀는 유일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유사점들을 찾지 말라. 그녀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존중해야 한다. 유사점은 다른 것들을 통해서 온다. 당신은 빈약한 사람을 본다. 그리고 비교를 한다. 하지만 누구나 필요한 부분은 꼭 가지고 있다.
세탁기
어느 부인이 정신병 의사에게 도움을 간청하고 있었다. "제 남편은 자신을 세탁기로 압니다. 그는 그의 머리를 좌우로, 뒤로 그리고 앞으로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비누칠을 하며 물끓는 소리를 낼 줄도 알아요." 정신병 의사가 말했다. "그거 참 괴로운 일이군요. 그런데 그 현상이 어떤 해를 주는지요." "선생님은 이해 못하시는군요!" 부인이 말했다. "남편은 시트를 깨끗하게 사용하질 않아요!"
- 누군가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면 잠시 기다려라. 당신이 미쳤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들은 전혀 미치지 않았으며 단지 저마다 다를 뿐이다. 그들은 다른 길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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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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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7. 문화대혁명의 후예들 - 4인방 체제의 등장 (1973~1976)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73년 / 6, 23 평화통일외교정책 발표. 김대중 피랍 사건 1974년 / 긴급조치 1, 2, 3, 4, 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1975년 / 유신헌법 찬반투표 실시 (찬성 73. 11%)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모택동의 혁명동지이자 유력한 당간부였던 유소기와 등소평은 실각하여, 유소기는 감옥에서 폐렴으로 죽었으며 등소평은 강서의 한 시골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갔다. 모택동의 우상숭배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홍위병의 광란은 2년여 만에 진정되었고 그들은 하방에 의해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69년에 중국공산당 9전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선출된 중앙위원 279명중 그전부터 중앙위원이었던 사람은 고작 53명에 지나지 않았다. 문혁기간 중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이 당대회에서 임표가 모택동의 후계자로 정식 지명되고 모주석 바로 다음 직위인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혁기간중 등장한 문혁파가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나 임표가 모반사건에 이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루 잠시 중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4인방 그룹들이다.
임표의 모반사건이란 당 부주석이었던 임표가 모택동을 암살하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다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많은 의문점을 안고있다. 정부는 임표가 사건이 발각되자 헬리콥터로 국외탈출을 시도했으나 사막에 추락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임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며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심심치않게 나돌았다. 모택동은 임표를 후계자로 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고 군대를 장악해나가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그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표가 반란사건을 일으킬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그는 모택동에게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표는 2인자의 지위를 넘어서서 모택동과 어깨를 겨눌 정도로 성장했고 모택동은 그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2인자 임표가 제거되자 문혁파인 4인방이 급부상하여 주요관직을 장악햇다. 4인방이란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강청, 4명을 가리킨다. 73년 대회에서 당 부주석에 선출된 왕홍문은 문화 혁명기에 활발한 조직할동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장춘교는 대약진운동의 이론가로써 활약햇던 인물로며, 붓대하나로 중국을 휘어잡아서 일명 '붓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 요문원은 그의 문장실력으로 문화대혁명의 불을 지핀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예술단원 출신으로 1930년대 모택동과 결혼한 강청이다. 73년 공산당 전국대회를 계기로 문혁세대들은 급속하게 공산당 조직의 중심부로 스며들었다. 그들이 가장 취약한 곳은 군사부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메꾸기 위해 민병을 그들의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인 운영경험이 없기 때문에 임표시대 추방되었던 당의 원로들이 복귀하계 되었고 그들은 원로중심인 주은래 주변에 모이게 된다. 이들의 복귀는 문화대혁명에의해 성장한 새로운 세력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76년 혁명 1세대이자 당의 핵심인 주은래가 죽었다. 등소평은 76년 4월 주은래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배후조종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된다. 4인방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어서 공산당의 살아있는 신화였던 모택동도 죽게되자 이제 중국공산당은 바로 이 4인방에 의해 장악되었다. 물론 모택동은 그의 후계자로 화봉국이라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지명했다. 4인방으로서도 세력기반을 갖추고 있지않는 화봉국의 등장이 그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아직 4인방은 당의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죽음은 인민들이나 당간부들로 하여금 당에 대한 비판 및 4인방에 대한 반발을 거세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사라진 공백기를 틈타 권력투쟁이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화봉국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틈타 모택동이 죽은지 채 한달이 되기도 전에 4인방을 전격 체포했으며, 4인방체제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4인방의 급격한 몰락은 그들이 오직 모택동이라는 개인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당내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4인방의 몰락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정도까지 그들의 기반이 취약한 것일줄을 몰랐던 것이다. 4인방의 몰락으로 몰아간 세력은 화봉국을 중심으로 한 비4인방 문혁파, 섭검영, 이선념 등의 실무관료, 그리고 군인 그룹들이다. 그러나 화봉국도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화봉국은 그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위해 4인방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단결과 경제건설을 강조하는 한편 4인방의 체제하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이때 등소평도 화봉국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그는 곧 중앙관직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중앙에 복귀하여 화봉국과 권력투쟁을 전개한 끝에 결국 그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4인방의몰락은 문화혁명을 통해 등장했던 문혁파의 모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던 옛 관료들이 다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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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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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難而退(지난이퇴) 知(알 지) 難(어려울 난) 而(말 이을 이) 退(물러날 퇴)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년조에는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다(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 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정(鄭)나라는 패권(覇權)을 다투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정나라는 먼저 진나라에 의지하였다. 그러자 초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자국(自國)의 안전을 위하여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먼데 있는 물로는 불을 끌 수 없듯 진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던 환자(桓子)는 정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으며,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진나라로서도 승산이 없었다. 이에 그는 철군하려 하였으나, 지휘에 따르지 않던 부하들은 초나라 군사와 교전을 하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知難而退 란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 을 뜻한다. 대권을 향한 용(龍)들이 아직껏 꿈틀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대세의 불리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얄팍한 자존심과 환상(?)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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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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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모자와 가발의 경쟁사
머리를 덮는 모자가 영어로 'hat'인데 굉장히 오래 된 집을 나타내는 'hut'와 발음과 철자가 비슷하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서양인들은 몸에 걸치는 의상을 연구하기 훨씬 전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이 초가집 '해이트'(haet) 또는 '허트'(hutt)는 먼 옛날 사람들을 자연의 위협이나 어두운 밤으로부터 지켜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은 더위나 비 또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들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쓴 모든 것을 해이트 또는 허트라고 불렀다. 어원학자들은 이것들을 모두 '피난소'나 '보호하는 것'이라고 번역한다. 머리를 덮는 것과 오래 된 집과의 연관은 'hat'나 'hut'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 옛날에 영국 사람들은 '캐판'(cappan)이라는 골풀 다발로 만든 원뿔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캐반'(cabban)이라는 역시 골풀로 만든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말에서 캡(cap)과 캐빈 (cabin)이 태어난 것이다. 말의 발달사를 보면 새로운 이름을 붙일 때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이름을 빌려 오는 예가 많이 있다.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다. 사냥꾼이나 여행자들이 태양이나 비를 피하기 위하여 쓴 펠트로 된 이 '페타소스'는 넓은 챙이 있는 모자인데, 쓰지 않을 때는 끈으로 등에 매달고 있었다. 페타소스는 맨 먼저 에트루리아인, 이어서 로마인이 쓰기 시작했는데 중세에는 상당히 보급되었다. 그리스인은 끝을 자른 원뿔꼴의 챙이 없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집트 모자를 흉내낸 이 모자는 소재인 '펠트'의 의미에서 '필로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모자는 대부분의 유럽 문화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중세 말기 대학이 출현했을 때는 4면 펠트 모자인 '필리우스 쿼터라터스'로 학자 전용 모자가 되었고 훗날에는 '모르타르보드'(챙의 위가 사각이며 평평하고 장식이 달린 식모)로 졸업식 때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쓰는 모자가 되었다. 지금은 모자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인기 있지만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옛날 여성들은 거의 모자를 쓰지 않았고 남성들은 실내나 교회 등에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습관은 16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16세기에 가발이 유행하고 디자인이 대형화하면서 모자를 쓰는 일은 아주 불편한 일이 되고 말았다.
가발 열풍이 식자 남성들은 또다시 모자를 쓰는 습관을 되찾았으나 이제는 옛날만큼의 열의는 없었다. 그리고 전과는 전혀 반대인 세 가지 습관이 생겨났다. 남성은 실내나 교회나 여성 앞에서는 결코 모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습관이 정착한 1700년대 말기에 많은 여성들이 모자를 쓰기 시작한다. 리본이나 날개, 꽃 들을 꽃모양으로 장식하고 테두리를 레이스로 두른 모자였다. 그 전에 유럽 여성들이 쓴 모자는 실내에서는 장식이 없는 캡 모양이었고 밖에서는 두건 상태 모자였다. 턱 밑에서 끈으로 묶는 부인 모자는 '보닛'이라고 불렀다. '보닛'이라는 말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중세 말기까지는 작고 부드러운 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여성용의 특별한 모자를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온 뒤부터다. 밀라노는 보닛의 중심지가 되었고 밀라노의 모자는 전 유럽에서 인기품이 된다. 그래서 모든 부인 모자를 영어로 '밀리너리'(millinery 부인 모자류)라고 통합해 부르게 되었고, 밀라노의 기능공들을 '밀리너'(milliner 부인 모자 가게)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18세기 말엽에는 굴뚝처럼 생긴 검은 모자인 실크 해트가 출현했다. 런던에서 신사용 장식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존 에셀린튼은 1797년 1월 15일 황혼 무렵 자신이 디자인한 새로운 모자를 쓰고 가게에 나타났다. 런던의 "타임"지는 에셀린튼이 쓴 굴뚝같은 검은 모자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구경꾼들 사이에 밀고 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한 남자는 쇼윈도에서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갔다고 한다. 에셀린튼은 치안 방해죄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실크 해트의 주문을 받게 된다.
영국의 복식사가는 에셀린튼의 실크 해트가 세계 최초라고 주장한다. 한편 프랑스의 복식사가는 실크 해트의 디자인은 에셀린튼보다 1년 전에 파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에셀린튼이 그것을 도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 태어났다는 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프랑스의 만화가인 샤를르 베르네가 그린 그림 "1796년의 멋쟁이"뿐인데, 에셀린튼의 것과 매우 비슷한 실크 해트를 쓴 신사가 그려져 있다. 예술가란 원래 시대를 앞서가지만, 이 그림의 제목은 실제 제작 연도보다 옛날 것으로 정한 것이 분명하다고 영국인들은 말하고 있다. 페드라는 가벼운 펠트제의 부드러운 챙이 달린 중절모로 1882년에 상연된 프랑스 연극 "페드라"의 등장 인물이 쓰고 있던 모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19세기의 파리를 열광시킨 극작가 빅토리안 사르드가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쓴 "페드라"가 새로운 모자의 유행을 낳았던 것이다. 방울과 깃털을 단 페드라는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 좋아하는 모자가 된다. 파나마 모자는 당연히 중미의 수도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가벼운 스트로 모자는 파나마초 잎을 가늘게 따서 만든 것으로 페루에서 태어났다. 파나마는 이 모자의 중요한 유통 센터이기는 했다. 북아메리카의 기술자들이 1914년 파나마 운하 건설 때 파나마로 와서 이 모자를 만나 파나마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1780년 제 12대 다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 스탠리는 런던 근처에서 3년생 말들의 경마 레이스인 다비를 매년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모자가 윗부분이 둥근 돔 상태에 가느다란 테두리가 달린 딱딱한 펠트 모자였다. 이 모자를 다비 백작이 언제나 쓰고 있었으므로 경마 레이스와 똑같은 '다비 해트'(중산모)라는 이름을 얻었다.
1860년대 필라델피아의 신사용품 상인이었던 존 B. 스테트슨은 모자 판매로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중서부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많은 부자 목장 주인들의 일을 눈여겨본 스테트슨은 '목장의 왕자'들에게 어울리는 커다란 모자를 만들기로 했다. '평원의 주인'이라고 이름 붙인'텐갤런'(깊고 커서 10갤런이나 들어간다는 뜻에서)의 카우보이 모자가 스테트슨의 사업을 성공시켰고 이 모자는 서부 개척 시대의 남녀를 상징하는 소품이 되었다. 버팔로 빌이나 카스터 장군 그리고 톰 믹스도 이 스테트슨(카우보이 모자)을 쓰고 있었고, 애니 오클레이나 칼라미티 제인도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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