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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9호
2012.2.1 (음 1.1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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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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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세계 전체가 결국은 책으로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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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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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고국, 모국, 조국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반평생을 지냈다. 그는 망명 생활 중에도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을 간직하며 '고국'을 그렸다고 한다. "몸은 파리에 묻혀도 심장은 '모국'에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쇼팽이 평생 그리워한 '고국'도, 끝내 돌아가고 싶었던 '모국'도 그의 '조국' 폴란드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들 세 단어는 같은 의미로 쓰인 걸까?
조상 때부터 살아온 자신의 국적이 속해 있는 나라를 '조국(祖國)'이라 한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이를 땐 '모국(母國)',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일컬을 땐 '고국(故國)'이란 말을 흔히 사용한다. 셋 다 자신의 나라를 뜻하지만 쓰임엔 차이가 있다.
'조국'은 국내에 있는 사람이든, 해외에 있는 사람이든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데 반해 '모국'과 '고국'은 주로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 쓰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고국'은 해외에 잠시 머물 때도 사용할 수 있지만 '모국'은 외국에 잠시 나가 있을 때는 쓰지 않는다.
"'이별의 곡'은 쇼팽이 조국을 떠나올 때 첫사랑과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며 만들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간 지 30년 만에 모국 땅을 밟았다"고 하면 자연스럽지만 "중국에 나포됐던 선원들이 모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면 부자연스럽다. 이때는 '고국'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우리말 바루기] 사전(辭典), 사전(事典)
신문이나 책 등을 읽다가 잘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사전을 찾아본다. 사전이 모르는 개념에 대해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전에는 '사전(辭典)'과 '사전(事典)'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두 가지 사전 모두 모르는 낱말이 나왔을 때 그 뜻을 이해하고자 찾아보는 물건이라는 점은 똑같지만 그 쓰임이 다르다.
글을 의미하는 '말 사(辭)'자를 붙인 '사전(辭典)'은 낱말이나 구절을 일정한 순서대로 모아 발음.의미 등을 설명해 놓은 책을 말한다. 국어사전,영어사전과 같은 사전이 이에 해당한다. '일 사(事)'자를 붙인 '사전(事典)'은 단어 풀이보다는 특정 분야별로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자세하게 풀이한 책을 말한다. 영화 사전, 과학 사전, 문학 사전, 동식물 사전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백과사전은 사전(辭典)일까, 사전(事典)일까. 백과사전은 학문.예술.문화.경제.사회 따위의 과학과 자연 및 인간 활동에 관련된 모든 지식을 압축해 부문별 또는 자모순으로 배열한 책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백과사전은 '百科事典'이라 나와 있다. 모든 지식을 모아 풀이했기 때문에 '사전(辭典)'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분야별로 사물과 일의 이치를 풀어놓은 것이기에 '사전(事典)'이라 해야 맞다. 사전(辭典)이든 사전(事典)이든 인류가 쌓아놓은 지식창고임에는 틀림없으므로 자주 뒤적이는 게 좋겠다.
[우리말 바루기] 접두사 '햇-, 숫-, 맨-'
'햇과일, 숫염소, 맨손, 되돌아가다, 휘젓다, 들볶다, 시퍼렇다'에서 '햇(해)-, 맨-, 숫-, 되-, 휘-, 들(들이)-, 시(싯/새/샛)-'처럼 어떤 단어의 앞에 붙어 새로운 단어가 되게 하는 말이 있다. 이들을 접두사라고 한다. 접두사는 홀로 쓰이지 못하므로 항상 어떤 단어 앞에 붙여 쓴다.
접두사 중에서 '햇-, 숫-, 맨-' 등은 많은 사람이 관형사로 혼동해 띄어 쓰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햇-, 숫-'은 예외 없이 모두 접두사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맨'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햇(해)-'은 '그해에 난'이란 뜻의 접두사다(햇감자, 햇병아리/ 해쑥, 해콩). '숫(수)-'은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한'(숫처녀, 숫눈, 숫총각), '암수의 구별'(숫양, 숫염소, 숫쥐/수꿩, 수소, 수나사, 수단추/수캉아지, 수캐, 수컷, 수탉, 수탕나귀, 수퇘지, 수평아리, 수톨쩌귀), '수량을 나타낼 때'(수백만, 수천) 쓰는 접두사다. 참고로 '수캉아지, 수캐, 수컷, 수탉, 수탕나귀, 수톨쩌귀, 수퇘지, 수평아리'는 '수' 다음의 첫소리를 거센소리로 적는다.
'맨-'은 '맨손, 맨땅, 맨발, 맨주먹'같이 '다른 것이 없는'의 뜻일 때는 접두사다. 그러나 '맨 꼭대기, 맨 먼저, 맨 구석'처럼 '더 할 수 없을 정도나 경지에 있음'을 나타낼 때는 관형사이고, '맨 소나무뿐이다, 맨 놀기만 한다'처럼 '다른 것은 섞이지 아니하고 온통'이란 뜻일 때는 부사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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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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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 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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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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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흰나비 - 노인숙
네 날개 가루 묻어 내 눈을 비볐더니
문지른 손가락 끝 흰 살결 푸른 무늬
파르르 날갯짓 앞에 내 사랑 눈 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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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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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콩밭 - 김용택
오늘도 학교 갔다 와서 아기 업고 강 건너 밭에 아기 젖 주러 갑니다.
밭에 가면 어머니는 콩밭이 훤하게 지심을 매다가 내가 엄마! 하고 부르면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배가 을매나 고팠을까 하며 수건 벗어 먼지 털고 밭 가로 나와 아기 젖을 줍니다. 울던 아기가 울음을 뚝 그치면 매미 소리 물소리가 들립니다. 아기는 두 손으로 엄마 손을 움켜쥐고 젖을 먹으며 까만 눈으로 엄마 눈을 바라봅니다. 아가 눈엔 엄마가 엄마 눈엔 아기가 들어 있고 푸른 산 뭉게구름이 보입니다.
젖을 다 먹이고 아기 업고 돌아오면 아기는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길가에 풀잎을 뜯기도 합니다. 나는 풀꽃을 꺾어 아기 손에 쥐어 줍니다.
집에 와서 아기를 내려놓고 강 건너 콩밭은 보면 콩들이 엄마 뒤를 따라 올망졸망 자라고 내가 집에 다 갔나 못 갔나 고개 들고 우리 집 보며 또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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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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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8장 가정의 즐거움
2. 독신 생활은 문명의 기형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살며 행복할 수는 없는 존재이며, 반드시 자기 주위에 있어 자기보다는 커다란 집단과 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정에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자아라는 것은 그 자신의 크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정신적 사회적인 활동이 행해지는 한 고립된 자아보다는 좀더 큰 자기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 어떠한 나라에 있어서도 또한 어떤 형태의 정부에 있어서도 참된 생활로서 다소의 의의를 지닌 것이라면, 결코 그 나라나 그 시대와 꼭 같은 넓이와 폭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다 더 큰 자아>라고 부르는 바의 보다 작은 환경 속에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친지들이나 활동 범위에 의하여 정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같은 사회적인 단위 속에서 사람은 살고, 사람은 움직이고,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같은 사회적인 단위는 하나의 교구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학교나 감옥이나 회사나 비밀 결사 또는 자선단체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정을 대신할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완전히 가정을 밀어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종교 그 자체도, 아니 때로는 커다란 정치 운동도 인간의 모든 존재를 소모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온갖 집단 가운데서 유독 가정만이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으로 진실하고 만족스럽고 의의가 있는 유일한 생활 단위로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터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가정이 있게 마련이며, 또한 그 뒤의 일생도 가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가정을 자연스러운 곳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핏줄이라는 것이 있어서 앞서 말한 보다 큰 자아라는 사상을 뚜렷하고 참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생물학적인 진실이라고 나는 말하는 바이다. 이 가정이라는 자연적인 집단 생활을 잘해 나갈 수 없는 사람은 그밖의 집단 생활에서 성공할 가망이 없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자는 모름지기 집 안에서는 효도를 다해야 하며, 사회에 나가서는 공손할 줄 알아야 하며, 성실하고 믿음성이 있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에 친하고, 행한 뒤에 아직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의 집단 생활의 중요성을 떠나서 생각하면 인간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고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하고, 자기가 타고난 개성을 최고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알맞은 이성의 짝에게서 받는, 빈틈없이 잘 조화된 따뜻한 마음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보다도 강한 생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여자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의 처녀는 모두 잠재의식적으로 붉은 결혼용 속치마와 꽃가마를 꿈꾸고 있고, 서구의 처녀들은 누구나 결혼식 때 쓸 면사포와 결혼식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꿈꾸고 있다. 인위적인 문명의 힘으로 쉽게 쫓아내기에는 여성에게는 너무나도 강력한 모성적 본능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자연의 뜻은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으며, 아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여성은 그러므로 여러 가지 정신적 도덕적 특질을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다. 진정 이러한 특질이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다하도록 여성을 이끌어 주고 모성 본능 속에 올바르게 나타나고 또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테면 여성이 지닌 현실주의, 판단력, 번거롭고 귀찮은 일에 대한 참을성 어리고 연약한 것에 대한 사랑, 남을 돌봐 주기를 좋아하는 성품, 강렬한 동물적 사랑과 증오, 또 굉장히 자기 본위이며 울기 잘하는 감상적인 성벽, 일반적인 사물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 자연의 의도에서 벗어나서 여성의 모든 생명의 강한 특질이며 또한 기본적 표현인 모성적인 본능을 도외시 하고 여성을 행복하게 하려 한다면 터무니 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무식한 여자도, 건전한 교육을 받은 부인도, 모성 본능은 결코 억압되는 일 없이 어렸을 때에 이미 그 싹이 트고, 청춘 시절에 이르러 더욱 더 강렬해지게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부성 본능은 서른 살이 넘기 전에는 거의 나타나는 일이 없다. 어떤 경우라도 다섯 살짜리 아들이나 딸을 갖게 될 무렵까지는 거의 부성 본능을 의식하지 않는다. 스물 다섯 살쯤 된 사나이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어느 집 어느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어 우연히 아기가 태어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내의 생각은 일로 가득 차 있는 데 비해 남편은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서른 살쯤 되어야 겨우 시장에도 데리고 가고 친구의 앞에서 자랑도 할 수 있는 딸이나 아들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자기가 아버지라는 실감이 나게 되는 것이다. 스물이나 스물 다섯 살의 사나이로서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흐뭇하게 여기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흐뭇해하기는 커녕 그런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여성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 또는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조차도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며, 여성의 심신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 영향은 여성의 성질이나 습관까지도 바꾸고 마는 것이다. 여성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고대하게 되면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그녀가 생각하거나 인생의 사명이나 생활의 목적에 대하여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게 된다. 이때 그 여성은 세상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맡은 바 구실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부유한 중국인의 집에 태어나 아무런 부자유를 모르고 응석받이로 귀엽게 자란 외딸이 있었는데, 어른이 된 뒤에 자기의 아기가 병들어 있는 동안 몇 달씩이나 잠을 자지 않고 정성껏 간호한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자연의 설계에 있어서는 이토록 강한 부성 본능은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그러한 본능은 주어져 있지 않다. 대체로 남성이라는 것은 오리의 수놈이나 거위의 수놈처럼 수컷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외에는 태어난 자식에 대하여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나 여성은 이와 같은 생존의 중심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한 그녀가 맡은 바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심리적으로 가장 괴로와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문명은 수많은 훌륭한 여성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미혼인 채로 지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데, 여성에 대해서 이 얼마나 어리석은 문명인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외형적인 생활의 피상적인 영달을 넘어서 좀더 높은 곳, 남녀 본성의 깊숙이 가로놓여 있는 근원에 부딪쳐 거기서 정당한 배출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개인적 경력이 형태로 표현되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독신 생활에는 무언가 개인주의적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 그지없는 주지주의적인 점이 있는데, 이 후자 때문에 독신주의는 배척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일단 자기가 좋아서 쓸데없는 주지주의자가 되는 고집스러운 독신주의자나 미혼 여성은 그 외형적인 공적에 너무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정 생활 외에 무엇인가 좋은 대용물 속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고 깊은 만족을 맛볼 수 있는 지적, 예술적, 직업적인 흥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것을 부정한다.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없는 대신 그 대용을 <경력>이라든가, 개인적인 공적이라든가, 동물 학대 반대 같은 일로 메꾸고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행동은 어쩐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나타난다. 노처녀들이 호랑이 잔등에 있는 채찍 자국을 보고 그 어떤 잔인한 학대라도 받은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서커스의 지배인에게 호랑이를 너무 잔인하게 다루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녀들의 항의는 호랑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종족에게 향하여진 전혀 당치도 않은 모성 본능에서 오는 것으로서 마치 호랑이 자신이 약간의 매질로 욕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인생의 어느 한 점만을 헛되이 손으로 더듬으면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럴 듯하게 여겨지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다.
정치적, 문화적, 예술적 공적에 대해서 치러지는 보수는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창백하고 지적인 독선에 그치지만, 자기의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진실이다. 얼마나 많은 저작자나 예술가가 늙은 뒤에 자기가 이룩해 놓은 일에 흐뭇해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이룩해 놓은 일을 평하여, 노인의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주로 생활해 나가기 위해 마지 못해 한 일이라고 흉을 보고 있는 것일까. 허버트 스펜스는 그가 숨을 거두기 며칠 전, 18권이나 되는 그의 저서인 <종합철학>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책의 무게를 느꼈을 때 책보다는 손자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명한 가정부인 엘리아는 스펜스의 저서와 그 <꿈 속의 아이들>을 기꺼이 바꾸지는 않았을 것인가. 과연 설탕의 대용품이라든가 버터의 대용품, 솜의 대용품은 실로 보잘것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대용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비참한 일임에 틀림없다. 존 D 록펠러는 넓은 범위에 걸쳐서 인류의 행복에 크게 이바지 했으니까 그의 마음 속에 도덕적, 미적 만족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같은 도덕적, 미적 만족은 극히 박약한 것이어서 골프장에서 힘센 윈스트록이라도 치는 날에는 쉽게 뒤집혀 버리게 마련이며, 결국 참되고 영속적인 만족을 준 것은 아들인 제2세 록펠러였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행복이란 대부분 자기에게 알맞은 일, 즉 자기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일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남녀의 90퍼센트가 과연 그들이 진실로 자기를 바칠 수 있는 일을 찾아냈을까.
세상에는 흔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답니다> 하고 제법 잘난 체 큰 소리를 치지만, 그런 말은 대부분 약간 에누리해서 들어야 한다. 아무도 <내 가정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너무나 뻔히 잘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무원들은 중국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와 매우 비슷한 심정으로 자기 직장에 다니고 있다. 모두 그렇게 하니, 난들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심정이다. <내가 하는 일은 재미가 있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그러한 말은 엘리베이터 안내원이나 교환양이나 치과의사의 경우는 새빨간 거짓말이며, 편집자나 부동산 관리인이나 주식 중개인의 경우는 과장된 허풍이라고 할 수 있다. 발명이나 발견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북극탐험가나 연구실에서 일하는 과학자는 별도로 치고,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성품에 맞아서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가 바람직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의 형용을 고려해서 생각하더라도 일에 대한 사랑과 어린아이에 대한 모성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천직이 무엇일까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것저것 직업을 바꾸지만,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을 기르고 지도하는 여성으로서의 평생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여성 독자들은 내가 말한 뜻을 잘 알아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을 지켜 나가는 무거운 짐은 결국 여성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내가 더욱 더 가정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짐작한 일이고 또 제목이다. 그러니까 결국 앞으로의 문제는 누가 여성에 대해 보다 친절한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공적이라는 뜻에서의 여성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뜻에 관한 여성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직업에 적합하다느니 능력이 있으니 하는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여성이 어머니로서 꼭 어울리는 것 이상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꼭 들어맞는 은행장은 적다고 나는 믿는다. 무능한 과장, 무능한 지배인, 무능한 은행가, 무능한 은행장이라는 것은 있지만, 무능한 어머니란 우선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은 본디 모성적으로 태어난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여학생들의 여성으로서의 이상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 동요된 점은 있지만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며, 인생을 건전하게 바라보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내 눈에 비치는 이상적인 여성은 화장품과 수학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며, 남녀동권론자보다는 여성다운 여성이다. 그녀들에게 화장품을 주라. 그리고, 공자가 말했듯이 행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수학 연구에 몰두하게 하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보통 일반 남녀의 이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세상에는 뛰어나게 유능한 남자가 있는 것처럼 뛰어나게 유능한 여성도 있다. 이 사람들의 창조력은 인류 사회의 참다운 진보에 공헌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여성이 아니라, 보통 여성을 보고 결혼을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아기를 낳고, 또한 부엌일을 할 것을 나는 요구하고 싶다. 그리고 또한 남성을 보고 예술 따위는 잊어버리고, 머리를 깎아 주거나, 구두닦이를 하거나, 도둑을 잡거나, 땜질을 하거나, 급사 노릇을 해서 가족들의 식생활을 위하여 어김없이 돈을 벌도록 나는 요구하고 싶다. 남자나 여자 가운데 어느 편이고 아기를 낳아 젖먹여 기르고 홍역의 탈 없이 보살펴 주고 선량하고 어진 시민으로서 길러내야만 하는데, 남자는 아기를 낳는 일은 전혀 할 수 없고, 아기를 안아 주거나 목욕을 시켜 주는 일은 아예 성가신 힘든 일인 만큼, 아무래도 이런 일은 여자가 맡아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남녀가 할 수 있는 일로서 아기를 낳는 일과 이발, 구두닦이, 백화점 문지기와의 그 어느 쪽이 고상한 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자기들의 남편은 백화점에서 낯선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어 주는데 그 부인이 집 안에서 접시를 씻는 일을 싫어할 수는 없다. 옛날에는 남성들이 판매장의 일을 맡아 보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여 남성 대신 점원이 되는 바람에 남성은 그만 문지기 일을 맡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비교적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근무한다면, 이 사회는 그들을 환영할 것이다.
무슨 일이나 생활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일에 귀천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손님들의 모자를 맡는 일이 자기 남편의 양말을 깁는 일보다 더 필요하고 로맨틱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모자를 맡는 일을 보는 처녀와 가정에서 양말을 깁는 아내와의 다른 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양말을 깁는 아내에게는 자기의 특권으로서 운명을 좌우하는 남편이 있는 데 비해 모자를 맡는 처녀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양말을 신는 사람은 여자에게 그런 일을 시킨 만큼의 가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이와 동시에 남편의 양말 따위는 아내가 수선할 만한 것도 못 된다고 대충 그렇게 결정해 버리고 이것을 내던져 버린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비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들이란 모두가 그렇게까지 값없는 존재는 아니다. 문제의 요점은 바로 다음 한 가지 점에 있다. 즉 가정에는 다음 세대가 될 자녀들을 길러서 가르쳐야 할 중요하고 또한 신성한 일이 있는데도 그런 가정 생활이 여성에게는 너무나 저급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것은, 건전한 사회인의 태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과 가정과 모성을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저급한 교양을 지닌 가정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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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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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7. 역사와 계급의식 Geschichte und Klassenbewubtsein(1923) - 루카치 Georg Lukacs(1885-1971)
사회주의를 위한 이론 투쟁 - 박정호(경기대학교 강사)
20세기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미학자, 문학 이론가의 한 사람인 게오르그 루카치는 1885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태계인 아버지는 아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길 바랬지만, 아들은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자본주의적 삶을 깊이 혐오하고 잇었으므로 이런 바람에 심하게 반발했다. 1902년에서 1906년까지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사회학과 철학, 특히 미학에 있었다. 1904년에 루카치는 현대극을 노동자 계급에게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공동으로 다른 사람들과 '탈리아' 라는 극단을 함께 창설하기도 했다. 1906년부터 루카치는 상당 기간을 외국 유학을 보내게 된다. 당시 독일 사회학계의 중심 인물은 짐멜과 베버였는데, 르카치는 1909년과 1916녀에 베를린에서 짐멜의 '개인적인 제자'가 되어 강의를 들었으며, 1913년에서 1917년가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베버 서클'에 속해 있었다. 특히 베버와의 교분은 각별해서 베버는 루카치가 1918년에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옐레나 그라밴코와 결혼하려 할 때 부모에게 '자기 친척'이라고 말하게 해서 루카치 부모의 반대를 무마하려 했을 정도였다. 철학적으로는 주로 리케르트, 빈델반트, 라스크 등의 신칸트주의에 영향을 받다가 1차 대전을 계기로 헤겔과 마르크스로 기울었다. 이 밖에도 당시 루카치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딜타이, 키에르게고르, 덧, 토예프스키 등이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1918년 11월 헝가리에는 러시아에서 귀국한 벨라 쿤을 중심으로 공산당이 결성되었는데 루카치는 12월에 입당했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마치 "일주일 만에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고 생각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전향은 1902년부터 이따금 연구해 온 마르크스주의가 결국 진리하는 내적 확신, 청소년 시절부터 자본주의적 삶에 대해 품어 온 증오심, 윤리적인 동기 등이 작용한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내적으로 준비되어 온 것이었다. 1919년 3월에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선포되었는데, 루카치는 이 정부에서 교육 및 문화 부인민위원이 되어 교육과 문화의 재편성을 위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짰다. 루카치를 비롯한 볼셰비키들의 문화 정책은 새로운 도덕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그들은 극장을 노동자들에게 개방하는가 하면 아이들의 성교육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고 여성 해방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루카치는 루마니아 군대의 침공을 받는 동부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133일 만에 무너지자 루카치는 1919년 9월 빈으로 망명해서 1929년까지 머물렀다. 1928년 루카치는 다음해에 얄릴 헝가리 공상당 대회에 제출하기 위해 정치 논문들을 작성했다. 루카치의 가명을 따서 [블륨 테제]라고 불린 이 논문들에서 루카치는 헝가리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곧장 전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당면 목표로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기회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루카치는 자기 관점이 정당함을 믿었지만 당에서 쫓겨나서는 파시즘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아비판을 단행했다. 루카치는 자기 입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이것은 자신의 실천과 정치 능력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이론 작업에 전념하기로 작정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뒤 루카치는 1934년 소련에 가서 1944년까지 머물렀다. 루카치는 1933년과 1934년에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해 자아 비판을 하는데, 그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우선 루카치는 사회주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존손해야 한다고 보고, 스탈린주의에 대해 공공연한 비판이 파시즘에 정신적 지지를 줄 수 있으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루카치는 자기가 이제 더 이상 찬동하지 않는 [역사와 계급 의식]의 견해들을 비판하는 것은 문학 비평을 쓰고 출판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인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스탈린의 교조주의적 견해를 강요하지 않는 글을 씀으로써 자기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일종의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루카치는 1945년에 헝가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의 미학과 문화철학 교수가 되었고 헝가리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공산당 내부의 지원을 받으며 라코시의 지도 아래 일당 독재 체재를 수립하는데,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힘입어 독재 체재에 맞서 헝가리 혁명이 발발한다. 혁명이 진행된 13일 동안 루카치는 당과 정부에서 주요자리를 차지했다. 소련군의 탄압으로 혁명이 실패하고 루카치는 루마니아로 추방되었지만, 1957년 4월 부다페스트로 돌아올 수 있는 허가를 얻게 된다. 그 때부터 루카치는 일체 정치에 관여치 않고 오로지 미학과 철학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마지막까지 저술활동을 하다가 1971년 6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쓴 철학상의 주요 저서로는 [역사와 계급 의식](1923)밖에도 [청년 헤겔](1948), [이성의 파괴](1954),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1984, 1986) 등이 있다.
총체성의 관점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
[역사와 계급 의식]은 1919년부터 1992년까지 루카치가 헝가리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혁명 운동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서 틈틈이 쓴 논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역사와 계급 의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회 정치적 사건으로는 1차 대전, 후진 러시아 혁명의 성공, 선진 유럽 혁명의 지연 등을 들 수 있다. 루카치는 1차 대전으로 세계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으며 "누가 우리를 문명에서 구해 줄 것인가"라는 절박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루카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마침내! 결국! 인류가 전쟁과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유럽에서도 1차 대전 직후 일시적으로 혁명의 물결이 휘몰아 쳤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체로 유럽의 혁명 운동은 20년대 초를 고비로 수그러들었지만, 당시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일부) 혁명 운동의 실패는 다만 일시적 후퇴일 뿐이고 머지 않아 거대한 혁명의 파고가 전세계, 아니면 적어도 전유럽을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역사와 계급 의식]에서 루카치는 세계 혁명의 객관적 조건과 경제조건이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심치 않았다. 그가 해결하려 한 문제는 후진 러시아에서는 이미 혁명이 성공했는데 선진 유럽에서는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지연되고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 설정 때문에 자연히 루카치는 혁명 운동이 겪는 위기의 근원을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에서 찾게 되었다.
루카치는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을 지배하고 있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나 카우츠키의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 위기를 이론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19세기 말 유럽의 새로운 현상들, 곧 제국주의의 팽창, 대공황에서 탈피, 카르텔 트러스트 콘체른 등에 의한 생산 통제, 노동자의 생활 수준의 상대적 향상 등에 접하여, 혁명과 비약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을 거부하고 점진적 개량을 주창했다. 그에 따르면 유물론적 역사관은 변증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으로서 역사를 미리 예정된 물질의 운동 법칙에 따른 진행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은 변증법을 "마르크스 학설에서 반역자이자 사물의 모든 합리적 관찰을 방해하는 함정"이며 "혁명적 폭력의 창조력에 대한 기적의 신앙"이라고 하여 거부하고 칸트에게 돌아갈 것을 호소했다. 베른슈타인에게는 사회주의란 역사 발전의 합법칙적 결과가 아니라 윤리적 이상이나 당위가 된다.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다고 자처했지만, 그 역시 마르크스주의를 진화론과 똑같이 봄으로써 혁명을 포기하게 된다. 즉 카우츠키는 사회 운동의 질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자연과 사회의 변화를 모두 다윈의 적응 모델로 설명하려 했으며, 유물론적 역사 이론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과 분리된 순수한 과학 이론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이제 객관적 법칙의 필연적 결과가 되었고 인간의 주체성은 무시되어 버렸다. 요컨대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공통점은 객체와 주체, 또는 객관적 합법칙성과 주관적 의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혁명적 실천의 부정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카치는 진정한 변증법적 방법을 부각시킴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성을 지켜 내려 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이론의 개별 내용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변증법적 방법에서 찾고, 변증법적 방법의 본질이 총체성의 관점을 견지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조아 과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역사를 설명할 때 경제적 동인에 우위를 둔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총체성의 관점을 취한다는 점이다."
과연 변증법적 방법의 핵심인 총체성이란 무엇일까? 루카치가 말하는 총체성의 관점이란 모든 부분 현상을 '전체'의 계기로서 고찰하는 관점이다. 이 때 전체는 주체와 객체,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사회 역사적 현실은 인간 실천의 산물이므로 여기에는 이미 주체 또는 사유가 개입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주체와 객체는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총체성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은 주체와 객체를 통일적인 한 과정의 계기로 파악한다는 것이 된다. 변증법적 총체성에는 항상 주체가 구성 계기로서 관여하며, 또 객체는 단순한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변혁 활동의 대상이자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상호 작용을 방법론적 고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루카치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객관주의(카우츠키)와 주관주의(베른슈타인)를 모두 거부하고 변증법적 방법의 혁명성을 견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루카치는 이런 관점에서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과 반영론(또는 모사론)을 비판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자연에는 주체와 객체의 상호 작용이 없으므로 자연 변증법은 사회 역사적 현실의 특수성을 포착할 수 없다. 또 반영론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고 사유를 존재의 수동적 반영으로 본다는 점에서 거부되어야 한다. 루카치의 생각으로는 이런 관점들은 혁명적 실천의 요구를 무디게 하는 것이다.
사물화-이데올로기 위기의 원인
루카치는 변증법(총체성)의 상실로 요약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 위기'가 단순히 주관적 환상이나 오류에서 비롯은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을 '사물화'라는 개념을 써서 밝히고 있다.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은 마르크스 [자본론]의 '상품 물신숭배' 이론과 베버의 합리화 이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 생산이 일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맺어지므로, 인간 노동의 산물이요 죽은 사물에 불과한 상품이 마치 스스로 의지와 인격을 갖고 관계를 맺는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이런 형상을 종교에서 인간 두뇌의 산물이 신이 되어 인간 자신을 지배하는 현상에 빗대어 '상품 물신숭배'라고 불렀다. 루카치는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사물화'라 부르고, 사물화 때문에 인간 특유의 노동과 그 산물이 인간에서 독립해 인간에게 낯선 자기 법칙성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노동 과정은 사물화를 일상적으로 발생시킨다. 자본주의의 기계제 대공업에서는 노동 과정이 '합리화'되어 부분 작업으로 분해되므로 노동자의 인간적. 개성적. 질적 속성들은 배제되어 인간 주체도 생산물도 모두 수량화되고 계산의 대상으로 전략해 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카치는 베버의 합리화 이론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근대 서양 문명 특유의 합리성이 '형식적 합리성'이며 이 합리성의 지표가 계산가능성이라고 보는데, 루카치는 형식적 합리성이 상품 생산 사회에서 비로소 일반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루카치는 베버의 형식적 합리성 개념을 이용하여 베버가 분석한 행정과 사법의 합리화와 나아가서는 과학까지도 사물화 현상으로 포괄할 수 있었다.
루카치는 이렇게 총체적으로 사물화된 사회에서 주체는 정관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주체의 활동이란 고작해야 외부 세계의 법칙 자체에 개입하지 못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순수 내면의 자유로 도피하거나 하는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주객의 분열과 총체성의 상실, 그리고 이에 따른 혁명성의 상실은 자본주의 사물화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계급이든 사물화를 겪을 수밖에 없지만, 사물화를 극복하고 총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프로레타리아트의 처지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는 자기가 객관적 법칙을 이용하는 듯한 환상을 갖는 데 비해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의 상품화를 통해 철저한 자기 분열을 겪음으로써 이 분열을 의식하고 이를 극복할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몰락한다는 인식이 될 것이므로 부르주아지의 계급 이익과 배치되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그들이 처한 사회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곧 투쟁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루카치가 주장하는 바는 플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실제로 언제나 사회의 총체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 상황과 계급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총체성을 인식할 '객관적 가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카치는 현실에서 플로레타리아 개개인이나 플롤레타리아 대중이 지닌 실제의 심리적 의식과 진정한 계급 의식을 구분한다, 진정한 계급 의식이란 계급 상황과 계급 이해에 '귀석되는 의식', 즉 한 계급이 사회 총체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들의 상황과 이해 관계에 따라 응당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의식을 말한다.
루카치는 공산당이 바로 실제 의식과 귀속 의식의 차이를 극복하여 귀속 의식을 구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차이 때문에 당은 계급과 분리되어야 하지만 당은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뿐, 계급을 '대리해서' 또는 계급의 이해 관계를 '위해서'투쟁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루카치는 레닌식의 전위당 모델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장하는 대중의 자발성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상황에 내재해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진정한 계급 의식을 갖고 혁명적 실천에 나서게 될 때 '주객동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헤겔 변증법을 복권시키다
[역사와 계급의식]은 출간되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노비에프, 데보린, 루다스 같은 당시 국제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루카치의 입장이 관념론이고 이론적 수정주의라고 호되게 공격했다. 이들은 주로 루카치가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과 반영론을 부정한 데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다른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루카치의 계급 의식 이론이 레닌식의 전위당 독재를 합리화한다고 비난했다. 반면 블로흐, 레바이, 코르슈 등은[역사와 계급 의식]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부활시켰다고 환영했다. [역사와 계급 의식]은 비록 당시의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한테서 많은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원조가 되었다. 이렇게 된 요인을 몇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헤겔 변증법을 복권시키고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연관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것은 루카치의 의도대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성을 복원시킴으로써 수정주의 전통에 강력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나아가서 이 책은 소외 문제를 마르크스 이래 처음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비판의 핵심으로 다룸으로써 그 뒤 좌파 사상가든 우파 사상가든 인간 소외의 문제를 시대의 핵심 문제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업적은 마르크스의 [경재학 철학 초고]와 레닌의 [철학 노트]가 1930년대 초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때 놀랄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계급 의식]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유럽의 사상 및 문화 전통을 독창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 이론 정도로만 통용되던 마르크스주의에 철학적 차원을 복원시키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유럽의 지성계에서 상당한 지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몇십 년 동안에는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의 영향으로 골드만, 메를로 퐁티등 몇몇 사람 외에는[ 역사와 계급 의식]에 별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책이 다시 유럽의 비정통 좌파에게 주목받은 때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아래 1960년대 초반까지 이른바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한 시기와 1960년대 말 학생 운동 시기였다. 한편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다양한 방식으로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 총체성 개념, 자연 변증법의 부정 등을 받아들였다. 동구의 실천철학자들도 [역사와 계급 의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비교적 최근에 의사소통 행위론을 기초로 사물화론을 재정립하고 있다. 비록 1960년대 이래 알튀세주의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와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지만, [역사와 계급 의식]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사회 비판의 강력한 이론 틀로서 생명력을 유지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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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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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넷째 묶음 - 성숙 인격
성숙 인격의 모습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건전 인격, 성숙 인격, 통일 인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연구를 종합해 보면 성숙 인격에 관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질들이 강조되고 있다. 첫째, 성숙 인격은 타고난 자기의 가능성을 성취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충분히 달성한다. 둘째, 성숙 인격은 자기의 현실을 효율적으로 인지하고 현실 속에서의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며 현실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셋째, 성숙 인격은 확고하고도 타당한 인생 목표를 지니며 통일된 세계관을 세우고 이에 맞추어 행동한다. 넷째, 성숙 인격은 문제를 직접 현실 속에서 해결하기를 좋아하며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문제 중심적으로 살아간다. 이 다섯 가지 특질들은 통일된 한 인간의 모습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포착한 것이므로 서로 연관 있고 중첩되기도 한다. 이제 이 다섯 특질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자기 성취, 자주성, 책임, 소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특질을 생각해 보자. 프롬은 성숙 인격의 핵심적 특질로서 생산적 오리엔테이션을 지니는 것에 관해 지적하였다. 여기서 오리엔테이션이란 사람이 경험하고 행동하는 기본적 태도나 생활 방식의 테두리를 이루는 것을 말하며, 생산성이란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힘을 사용하고 가능성을 실현하는 인간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산적 오리엔테이션이란 인간 조건의 충분한 인식과 자각을 토대로 자기 자신, 타인, 자연에 대해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으로 관계하는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으로 살아갈 때 자기에게 주어진 독자성, 책임, 가능성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고, 이를 충분히 성취시켜 나가는 자기만의 자주적인 생활이 전개된다. 매슬로우(미국의 인문주의 심리학자)는 성숙 인격을 자기 성취라고 규정하고 자기 성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즉 자기 성취란 각 개인마다 다르게 타고난 가능성, 능력, 자질 등을 스스로 깨달아 이를 충분히 개발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성취에서는 환경이 자기에게 부여하는 사명을 충실히 달성해 나가며, 인간의 공통된 본성과 각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개별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수용한다. 또한 한 인간 속에서 여러 가지 요구, 과제, 특질들이 결합되고 통일되어 나가는 것이 자기 성취다. 이렇게 볼 때 성숙 인격이란 이 세상에서의 참된 자기의 위치를 알고 그 자기를 실현시켜 나가는 사람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자기는 확대된 자아 또는 적극적인 자아 개념인데,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기는 인간으로서의 참된 자기 가치를 고려해 공적 복지 즉 국가, 민족, 인류의 복지를 지향하면서 활동하는 책임감이다. 일찍이 1898년 11월 이상재 선생은(1850-1927) 옥에서 나와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는 상소문에서 "신(본인)은 정부의 한 관리입니다. 그 직책이나 권한은 상관의 지시를 받아 엄정하게 시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만 천부의 병이야 어찌 조금이라도 남에게 양보하겠습니까?"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인간으로서 타고난 천성과 책임을 헛되어 양보할 수 있겠느냐는 자아의 존재 의의에 대한 다짐이라 하겠다. 병이란 인간으로서 타고날 때부터 지니는 정당한 성향과 권리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각자의 자주성이며 책임과 소임이다. 또한 이것의 표현과 성취를 해내는 사람됨이 성숙 인격이라고 본다.
둘째, 현실의 효율적인 인지와 그 속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고, 그러면서도 이러한 현실과 자기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경향이 문제가 된다. 앞에서 올바른 자아관, 자주성, 책임감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이러한 자기의 성취와 자기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정확한 현실 파악과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조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이러한 지적 능력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정적 태도는 서로가 상보적 관계에 있으며, 어느 한 쪽도 없어서는 안 된다. 사실 정서적으로 너무 흥분하거나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동기화 할 때는 정확한 현실 파악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다. 또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현실 인지가 계속되지 못하면, 마음의 안정성도 지속되지 못하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능력의 소산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성, 순수하고 객관적인 무욕 상태, 편견 없는 공적인 자세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무욕의 바탕만으로 정확한 현실 파악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넓고 깊은 지식의 축적과 풍부한 지식을 참고로 할 때 안정되고 편견 없는 자세는 정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그의 업적을 중시한다. 그런데 성숙 인격이 갖는 이러한 정확한 인지력과 뒤에 언급할 문제 중심성이 근간이 되어서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탁월한 업적이 성숙 인격자에게는 자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셋째로 중요한 특질은 이해심과 사랑을 지니고 따뜻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점이다. 올포트(1897-1967, 미국의 성격 심리학자)는 성숙 인격자의 사회 관계는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자연히 따뜻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나는 이들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상대의 모든 인간 조건을 이해하고 동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프롬도 생산적 오리엔테이션을 지닌 사람에게서 비로소 참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참된 사랑이란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네 가지 특질을 내세운다. 즉 사랑하는 상대를 성심껏 돌보아 주는 노고, 상대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것, 상대를 존경하는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참된 지식이 그것이다. 상대를 위한 노고란 상대의 발전과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해 스스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실로 참된 사랑이 보여주는 헌신적인 희생은 바로 이 노고라는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상대에 대한 책임감은 어쩔 수 없이 부과되는 의무와는 좀 다르다. 이것은 상대의 여러 가지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인 양 느껴져 그것에 대해 손을 쓸 수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느껴지므로 상대를 괴롭히는 자가 밉고 원망스럽게 여겨진다. 사랑하게 되면 맹목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열중에 빠진다는 것도 이 특질 때문이라고 본다. 노고와 책임감의 두 특질만이 주가 되어 있는 사랑은 흔히 있는 통속적인데 여기에서는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헌신적이어서 잘못하면 지배욕과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구실밖에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를 존경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이지적인 두 요인이 없이는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란 덮어놓고 복종한다든가 무서워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는 상대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파악해 있는 그대로 그의 사람됨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모르고는 존경할 수 없다. 상대방을 정확하게 인식해서 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상대를 잘 알고 그의 특이성을 인정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요 동정이며, 이에 더해서 책임감을 느끼고 그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노고까지 나타내는 바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해와 동정의 수준이든 사랑의 수준이든 따뜻한 대인 관계는 상대를 잘 알고 존경하는 데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인 관계에서 이러한 애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를 성숙 인격이라고 한다.
넷째, 성숙 인격인은 확고하고도 타당하나 인생 목표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통일되고 체계가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정립해 이에 맞추어 생활해 나간다. 카텔(미국의 성격 심리학자)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으나 이 여러 가지를 단 하나의 조화된 인생 목표에 응집시켜 살아가는 사람됨을 통일 인격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활 목적들이 가장 중요한 인생 목표에 조화 있게 응집되도록 하려면 필수적으로 통일되고 체계화된 인생관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리즈만(미국의 사회 심리학자)도 합리적이고 비권위적이며 비강박적인 분명한 인생 목표와 올바른 가치 지향성을 지니고 사는 것을 성숙 인격의 특질로 보았다. 오늘날 교육 특히 대학 교육에서 자주적이며 성숙된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 교양 교육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통일된 인생관의 수립에 그 목표를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교양 교육이란 지성, 의지력, 정서, 체력을 종합해 바람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인격적 기초를 다지게 하려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올바른 인생관의 수립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섯째, 성숙 인격의 특질은 문제 중심성이다. 당면한 문제를 직접 현실 속에서 해결하는 데만 만족을 느낄 뿐 공상이나 대리적 해결로 충족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문제 중심적으로 일에 열중하기 쉽다. 매슬로우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숙 인격자는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의 모습이나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외적인 문제에 몰두하기 때문에 마음의 불안이나 긴장 또는 지나친 내성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자기가 열중해서 하는 일에 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감을 느끼고, 공적인 관점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단 할 일에 열중하면 쓸데없는 잡념 없이 집중적으로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며 담담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심적 상태는 의식이 생생하며 아무런 잡념이 없는 무장애 상태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명경지수의 상태, 선에서 말하는 견성의 명묘하고 청정한 마음이 아닌가. 이런 상태에서는 자아 의식이 의식상에 자주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망각적이 된다. 실없는 동기에 방해되지도 않고 오직 대상 중심적으로 대상에만 응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식하고 이에 집중해서 객관적으로 대처해 나간다. 그러므로 인지하는 데 대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거나 왜곡시키지도 않고 부당한 추상화도 보이지 않는다. 활동하는데 집중적이며 정확하고 착실하다. 능률적이며 성공적인 결과가 저절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 문제 중심성이라는 특질은 단순한 주의의 집중성, 일에 대한 전일성이라는 표면적인 경향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숙 인격의 핵심적인 성향이라고 볼 수 있는 의식, 동기, 대상 지향성의 순수성과 안정성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197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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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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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두 희극 배우
두 희극 배우가 만났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궁전 무대에서 자네를 보았어." 그는 으르렁댔다. "자네는 내가 방송에서 써먹었던 익살을 써먹더군. 그 익살이 내 것인데도 말이야." "보게. 이 어리석은 친구야." 비난받던 친구가 대답했다. "내 무대에서 나온 것은 내 것일세. 나는 그 대가를 지불했거든. 그렇지 않나? 내 무대에서 나온 것은 내 것이야. 나는 대가를 치렀다구."
-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모든 것, 당신이 사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지식과 같은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모두가 빌려온 것이며 남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것들을 소유하고,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굴욕일 뿐이다. 그것들을 쓰레기로 알고 버려라.
불황
한 프랑스 초상화가가 단골 카페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조그만 술병이 비워지자 그는 한 병을 더 주문하려고 했다. 그때 문득 그는 <불황이 오고 있다>는 신문 머리말을 보기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 병 더 마시려던 생각을 바꿔서 계산서를 청구했다. "술맛이 좋지 않으세요?" 주인이 물었다. "아니, 좋아요. 그렇지만 불경기가 오고 있다니 절약해야죠. 그만 마셔야겠어요." 화가가 변명했다. 주인이 말했다. "불황이라, 그러면 제 집사람도 계획했던 비단옷을 포기하고 무명옷을 입어야겠군요." 불황이라 비단옷을 맞추려던 주문이 취소되자 재단사는 중얼거렸다. "지금은 사업을 확장할 때가 아니군. 여기서 계획했던 것을 그냥 이대로 활용해야겠군." "불황이라고?" 재단사가 그 가게를 확장할 계획을 취소해 버리자 건축가는 말했다. "그러면 집사람 초상화를 부탁할 수 없겠군." 그래서 건축가는 화가에게 편지를 써서 초상화를 취소했다. 편지를 받은 화가는 단골 카페에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주문했다. 그때 그는 옆자리에서 며칠 전에 본 바로 그 신문을 발견했다. 화가는 그 신문을 집어서 천천히 읽어 보았다. 그 신문은 십 년 전 것이었다.
- 지식은 돌고 돈다. 그것은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어가고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지식을 통해서 살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한다. 지식은 그들을 절름발이로 만든다. 당신은 절름발이다. 당신은 중심에 있지 못한다. 당신의 지식은 당신을 중심에서 몰아낸다. 어린아이는 중심에 있다. 아이가 자라 사물을 알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점 더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길을 잃게 된다. 이윽고 나이가 들면 그는 그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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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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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6. '세계인민의 적' 과의 화해 그때우리 나라에서는 - 1970년 /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년 / (7, 4 남북공동성명) 발표. 10월 유신
60년대 중국은 소련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절정은 1969년 우수리 강을 사이에 든 영토분쟁이다. 한때의 동반자였던 소련이 이제는 중국을 위협하는 가장 의험한 나라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 중국은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현실적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동반자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볼 때 미국은 '세계인민의 적'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중국은 부득이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변신에 중대한 계기를 미국이 제공하게 된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 을 발표했다.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청산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연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미국의 경제도 해외 군사비 지출등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종결 및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닉슨 독트린으로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긴장완화 시대, 이른바 '데탕트'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위의 그림은 중,미의 화해는 양극화되었던 세계를 다극화로 변모시켰다. 사진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대통령이 주은래와 만찬에 참석한 모습.'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국과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미국은 서로에게 손짓하여 가까워질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69년 소련과 중국의 국경분쟁에 대해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중국 편을 들었다. 당시 중국은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를 두껍게 막고 있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던 69년 11월에 미국함대의 대만해협 순찰이 중단되었으며 12월에는 중국에 대한 미국인의 여행제한이 완화되었다. 1970년 11월의 유엔총회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에 받아들이고 대만을 밀어내자는 안이 알바니아에 의해 제안되어 과반수를 간신히 넘기면서 통과되었다. 71년 4월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유명한 '핑퐁외교'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입이 승인되고 중국은 안정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닉슨은 파키스탄이나 루마니아의 지도자들을 통해 미국 고위층의 북경 방문가능성을 타진했고 중국은 이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1971년 미국의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했다. 그는 주은래를 만나 대만과 월남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긴 시간 동안 회담했고 주은래는 닉슨의 중국 방문을 요청했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발표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은 동아시아 관계는 말할 것도 세계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72년 2월 '세계인민의 적'의 우두머리인 미국 대통려이 북경에 모슨을 드러냈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상해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공동성명은 양국의 20여년간에 걸친 적대관계를 끝내고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우연히 또는 오산이나 오해로 인한 적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들 사이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결의 목적과 부합되는 지역으로부터 모든 미군이 궁극적으로는 철수할 것 ) 임도 아울러 박ㄹ혀 베트남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중국도 (자유와 해방을 위한 모든 피압박 인민들과 민족들의 투쟁) 에 대한 지지를 거듭 밝히면서도 중국은 결코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두 나라는 (다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3국과의 협정이나 이해관계) 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는데, 이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소련과 공모하여 중국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가장 큰 걸림돌은 대만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상해공동성명) 에서는 아주 외교적인 언어로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에 호소하지 않고) 국제분쟁을 해결할 용의가 있음을 양국이 합의하는 문구를 넣고 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이미 오래 전에 모국에 속한 중국의 1개 성) 이라고 하여 대만에 관한 문제는 어떤 다른 나라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중국 국내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대만해협 양쪽에 있는 모든 중국인에게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을 뿐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 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외교적인 표현이다. 미국은 대만을 오랫동안 지지해왔고 반공전선의 가장 철저한 우방으로 간주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외교적인 표현은 중국이나 대만 어느 쪽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대만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중국에게도 명분을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이와같이 (상해공동성명) 은 서로 합의하고 있는 부분과 아직은 합의되지 않는 양국의 견해차이를 밝히고 있다.
이 공동성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두 나라는 스포츠나 문화 등으로부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1973년 키신저는 다시 중국을 방문, 중화안민공화국과 미국이 북경과 워싱턴에 연락 사무소를 열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정치가들과 민간인들의 교류는 빈번해졌으며 교역량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냉전체제는 끝나고 세계는 바햐흐로 다극화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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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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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可救藥(불가구약) 不(아닐 불) 可(옳을 가) 救(건질 구) 藥(약 약)
시경(詩經) 대아(大雅)에는 한 충신의 답답한 마음을 노래한 판(板) 이라는 시(詩)가 실려 있다.
서주(西周) 말엽, 여왕은 포학하고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백성들은 몰래 그를 저주하였으며, 일부 대신(大臣)들까지도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여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유명한 관리였던 범백(凡伯)은 왕의 이러한 처사를 지나치다고 여겨 과감하게 글을 올렸으나,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하늘이 저리도 가혹한데 날 그렇게 놀리지 마소. 늙은이는 진정으로 대하는데 젊은이는 교만스럽네. 내 하는 말 망녕된 것 아닌데도 그대들은 농으로 받네. 심해지면 그땐 고칠 약도 쓸 수 없다오(不可救藥). 기원전 841년, 백성들의 폭동으로 여왕의 폭정은 결국 종말을 맞게 되었다. 不可救藥 이란 일이 만회할 수 없을 지경에 달하였음 을 형용한 말이다. 학원 폭력의 심각한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모두가 좋은 약을 찾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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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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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옛날엔 코를 풀고 어떻게 처치했는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장식품일 뿐 아니라 답답한 남성용 복식품인 넥타이의 기원은 군대에 있다. 목에 매는 복식품 기술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기원전 1세기다. 로마 병사들은 한낮의 더위 속에서 몸을 식히기 위해 스카프를 물에 적셔서 목에 감은 '포케일'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실용적인 목적밖에 없는 이 스카프는 실용적으로나 장식적으로 남성의 표준 장식품이 될 만큼 인기를 끌지 않았던 것 같다. 남성 넥타이의 기원은 또 다른 군대 습관에서 찾을 수 있다. 1668년 오스트리아 군대였던 크로아티아 용병 연대 일행이 몸에 린넬과 모슬린 스카프를 감고 프랑스에 나타났다. 스카프가 '포케일'처럼 한때는 기능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군대 제복에 장식적인 액센트를 주는 것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유행에 민감한 프랑스인 남녀가 이 아이디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목에 린넬과 레이스 스카프를 감아서 앞의 중앙에 묶고 끝을 길게 내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프랑스인들은 이 타이를 '크라바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이 멋스러운 복장을 가르쳐 주었던 '크로아티아인 경기병'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이 패션은 즉시 영국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사치를 좋아하던 영국 왕 찰스 2세가 스스로 시범을 보이고 궁정에서 강제로 착용하게 하지 않았거나, 즐겁게 기분전환 할 수 있는 패션을 요구하는 풍조가 거세지지 않았다면 이 유행은 금방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런던 사람들은 1665년에 크게 유행한 페스트와 1666년에 시태를 태워 버린 대화재 때문에 무척 의기소침해 있었다. 스카프 열풍은 런던 대화재의 불꽃처럼 순식간에 온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유행은 다음 세기의 멋쟁이인 포우 브란멜의 등장으로 더욱 붐을 이룬다. 브란멜은 크고 화려하게 묶은 넥타이와 그것을 신식으로 매는 방법으로 유명해졌다. 실제로 넥타이를 어떻게 잘 매는가 하는 것은 남성들에게 큰 문제여서 끊임없이 검토되고 논의되고, 숱한 매체들이 앞다투어 논쟁을 일삼을 정도였다. 당시의 패션 관계 출판물에는 넥타이를 매는 방법이 서른 두 가지나 실려 있다. 넥타이 이름과 매는 방법에는 유명인 이름이나, 영국의 애스콧 경마장처럼 사교장이 된 장소 이름이 붙여졌다. 그때부터 넥타이는 벨트에 닿는 긴 것, 나비 넥타이처럼 짧은 것, 단순한 것, 누빈 것, 끈처럼 가느다란 것, 가슴의 폭 만큼 폭이 넓은 것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인기를 유지해 오고 있다. '보우 타이'(나비 넥타이)는 1920년대에 미국에서 보급되는데 역시 크로아티아인이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패션사 연구가들은 오랫동안, 자그마하고 붙이고 떼는 것이 손쉬운 보우 타이가 긴 넥타이의 한 종류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지방에서는 몇 세기에 걸쳐서 보우 타이가 남성 의상의 일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사각 손수건을 대각선으로 접어서 나비처럼 묶은 것을 끈으로 목에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초기 넥타이의 한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 이 손수건은 언제부터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15세기에 프랑스인 선원들은 동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인들이 들일을 할 때 폭염으로부터 머리를 지키기 위해 쓰던 넓고 가벼운 린넬 천을 가지고 왔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프랑스 여성들은 질이 좋은 이 린넬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하여 이 천의 용도와 사용 방법을 만들어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뜻으로 쿠브르셰(couvrechef)라고 이름지어 머리를 장식했다. 영국인이 이 습관을 도입하면서 이름도 영국풍인 커치프(kerchief)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럽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논일을 하는 중국인들과는 달리 이미 햇빛 차단용 파라솔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손의 커치프는 처음부터 패션적인 장식물이었다. 당시의 수많은 책이나 그림들을 보면 정성스럽게 장식된 손수건이 웬만해서는 머리에 올려져 있지 않고 눈에 띄도록 손에 들거나 흔들거나 때로는 은근슬쩍 떨구거나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금실이나 은실로 바느질한 실크 손수건 등은 15세기에 무척 값비싼 상품이었으며 귀중품으로 유언장에 기재되는 일도 많았다.
영국에 레이스 손수건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때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니셜을 조합한 장식 문자를 넣은 사방 4인치 크기로 한쪽 구석에는 방울을 매달았다. 한때 이 손수건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는 끈"이라고 불렀다. 신사는 사랑하는 여성의 이니셜을 넣은 손수건을 모자 밴드(모자에 감은 리본)에 단단히 넣어 두었고 여성은 가슴 속에 이 사랑의 끈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이 머리에 쓰던 것에서 손의 커치프인 손수건으로 유럽에서 다시 태어난 복식품은 도대체 언제부터 코에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아마 손의 커치프가 유럽 사회에 소개된 뒤의 일이 아닐까? 하지만 당시에 코를 푸는 방법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모양이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손으로 힘껏 코를 풀고 무엇이든 가까운 곳에 있는 것으로 닦았던 모양인데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옷소매였다. 옛날 에티켓 책은 이것을 정식으로 코 푸는 방법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고대 로마인은 '땀 천'이라는 뜻의 '스다리움'이라는 천을 가지고 다녔는데 더운 날 땀도 닦고 코도 푸는 데 사용했다. 스다리움을 사용하는 매우 좋은 습관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옷소매로 코를 닦는 일을 처음으로 비판한 것은(손으로 코를 푸는 것은 비판하지 않았지만) 16세기의 에티켓 책으로, 손의 커치프가 대단한 기세로 확산된 시기의 일이다. 1530년에 습관과 에티켓에 대한 책을 쓴 인문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코를 옷소매로 닦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반드시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16세기 후의 손수건은 차츰 코를 푸는 데 사용하게 된다.
19세기에 병원균의 공기 전염이 알려지고 기계로 대량 생산된 면포가 싸게 팔리자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습관은 급속히 확산된다. 우아하게 손을 장식하던 커치프가 믿음직스러운 실용 손수건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실용화한 손수건을 넣는 핸드백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고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핸드백은 위를 조인 봉지처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영어로 핸드백이나 지갑을 뜻하는 'purse'의 어원은, 고대인이 가방을 만드는 데 사용한 짐승 가죽으로 '비르사'(byrsa)라는 그리스어다. 로마인은 봉지 모양의 백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르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라틴어화하여 '버사'(bursa)라고 불렀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부르스'(bours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백이나 지갑 안의 돈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 후 파리의 증권거래소 이름인 'Bourse'로도 되었다. 옷에 주머니가 만들어지는 16세기까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도 이런 백을 가지고 다녔다. 단순히 열쇠나 신변 잡화를 넣는 한 장의 천 조각에 지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때로는 매우 멋진 자수에 보석을 박은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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