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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6호
2012.1.19 (음 12.26)/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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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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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의 세탁에 독서보다 좋은 것은 없다. 건전한 오락 가운데 가장 권장해야 할 것은 자연과 벗하는 것과 독서하는 것. 두 가지라 하겠다. - 도꾸도미 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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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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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그림찾기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역에 내리면 차이나타운이 있다. 130년 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께 이 땅에 발을 디딘 중국 상인 40여명이 정착하며 시작된 곳이다. 우뚝 솟은 패루를 지나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중국풍의 볼거리·먹을거리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이 동네 한쪽에 북성동 주민센터가 있다. 거기에서 ‘틀린 그림 찾기’를 만났다. 주민센터 어귀에 있는 전자안내판 메뉴의 하나로 제공되는 ‘틀린 그림 찾기’. 차이나타운을 담은 사진 두 장의 서로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놀이이다.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놀이인데 안내 화면에 나온 이름은 ‘틀린 그림 찾기’였다.
언뜻 보면 똑같은 그림이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서로 다른 그림이다. 그림 두 개를 번갈아 보며 포장지 무늬, 수염 모양, 가로등 장식, 머리띠 색깔 따위가 다른 걸 모두 찾아내면 놀이는 끝난다. 디지털 이미지가 많아지면서 컴퓨터로 손쉽게 다른 곳을 찾아내는 방법도 등장한 이 놀이 이름은 그래서 ‘다른 그림 찾기’라 하는 게 맞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찾는 놀이이니까.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이고, 다르다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표준국어대사전)이다. ‘틀리다’에 맞서는 말은 ‘맞다’이고, ‘다르다’의 반대말은 ‘같다’이다.
심심풀이로 즐겨 하는 ‘다른 그림 찾기’를 ‘틀린 그림 찾기’로 버젓이 표기하는 곳이 여전히 많다. 인쇄매체 시절부터 널리 쓰인 ‘틀린 그림 찾기’를 인터넷 시대에도 받아쓰기 때문일 것이다. ‘틀리다’와 ‘다르다’의 제 뜻 살펴 쓰지 못한다고 타박하지만 말고 사전에 밝혀주는 건 어떨까. ‘다른그림찾기’를 올림말로 삼고, ‘틀린그림찾기’는 ‘다른그림찾기의 잘못’임을 사전에 명시하는 거다. ‘다른 그림 찾기’의 사촌쯤 되는 ‘숨은그림찾기’는 표제어로 당당히 올라 있다. ‘복잡하게 그려 놓은 그림에 숨겨진 물건을 찾도록 한 놀이’가 숨은그림찾기의 뜻풀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 바루기] 찰라, 찰나, 억겁
불교는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같이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문화에는 불교적 색채가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다. 언어 역시 불교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는 게 많은데 그중 하나가 '찰나'와 '억겁'이다. '찰나'를 발음하기 어려워서인지(표준 발음은 [찰라]) "문을 열려는 찰라" "버스가 떠나려는 찬라"처럼 잘못 쓰는 예가 많다. '억겁' 역시 '겁'을 '겹'(면과 면, 선과 선이 그 수만큼 거듭됨을 나타내는 말)'으로 착각해 "억겹의 세월"과 같이 '억겹'으로 틀리게 쓰는 경우가 있다.
'찰나'는 산스크리트어의 '크샤나'에서 온 말로 '생각이 스치는 한 순간처럼 짧다'는 의미다. 그 길이에 대해서는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 65찰나가 흐른다거나 1/75초에 해당한다는 등 많은 설이 있다. '겁'은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이 무한히 긴 시간'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라는 뜻이니 '억겁'은 얼마나 더 긴 시간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겁'은 '천년에 한 번 천상의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노니는데 그 옷자락이 바위에 닿아 큰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기간'이라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은 '억겁의 인연'을 통해 만났을 것이다. 찰나의 감정으로 억겁의 인연을 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우리말 바루기] 시건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으로 총기 규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총기에 대한 규제는 우리나라 군대가 단연 으뜸이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사격장에서 탄피 하나 때문에 전 부대원이 고생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내무반 안에서의 총기 규제도 엄격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총기 파악과 시건장치 확인은 필수다.
"송문집은 M1 소총을 총걸이에 걸어 시건장치를 하고 방한화에 묻은 눈을 털었다" (신상웅 '히포크라테스의 흉상'), "외국인 수용시설이다 보니 시건장치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인명 피해가 컸다"처럼 문 따위를 잠그는 장치를 뜻하는 '시건장치'란 말을 흔히 쓰고 있지만 '시건'은 일본식 한자어다.
'시건(施鍵)'은 원래 일본어로는 '시정(施錠)'이 맞는 말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시건'으로 쓰이고 있다. 한자어 '정(錠)'은 '자물쇠'를, '건(鍵)'은 열쇠를 뜻한다. 따라서 '시정'은 '자물쇠를 설치하다'로 말이 되지만, '시건'은 '열쇠를 설치하다'로 애당초 의미가 통하지도 않는다. '시건장치'의 순화용어는 '잠금장치'다.
"행정부는 총기 제조업체들에 총기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잠금장치 설치 등의 압력을 가해 왔다" "조사 결과 김씨는 농촌마을엔 출입문 잠금장치가 허술하다는 점을 노려 대낮에 범행을 저질러 왔다"처럼 '시건장치' 대신 '잠금장치'로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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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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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 김경후
1 자정의 책상엔 지우개 또는 얼룩진 종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한때 사람들은 빵조각으로 글씨를 지웠지 빵이 아니라 망각을 달라
2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3 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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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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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2) - 유권재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눈부신 겨울 햇살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묵묵히 참된 겸손을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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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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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긴데 - 서정슬
아기가 어른 옷을 입었습니다. 아기가 어른 신을 신었습니다. 옷이 너무 커 신이 너무 커 아기는 넘어졌어요.
아기가 큰 모자를 썼습니다. 아기가 큰 가방을 들었습니다. 모자가 너무 커 가방이 너무 커 아기는 보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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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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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7장 우유론 - 때로는 빈둥빈둥 놀며 지낼 필요도 있음을 논한 장
4. 이 지상이 그대 천국
이 강렬한 인생애가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는 인생의 실상이 마주칠 때 시적인 애조를 띠게 된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슬프게도 이 인생의 무상에 눈뜨게 되면 중국의 시인이나 철인들은 보다 더 강하게 보다 더 격렬하게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지상의 생명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라면, 그 생명이 계속되는 한 보다 더 열렬하게 인생을 즐기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헛되이 영원을 바라면 이 지상 생활의 건전한 즐거움이 깨지고 만다. 아아더 키이드 경이 전형적인 중국인다운 느낌으로 말한 다음의 한 마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지상이야말로 유일한 천국이다. 이 일을 세상 사람들이 나와 더불어 믿는다면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점점 노력하게 될 것이다> 소동파는 말하였다. <인생은 봄꿈이 끝나고 흔적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해서 그는 이 인생을 흠뻑 사랑한 것이다. 중국문학을 읽고 우리가 여러 번 당면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인생의 무상과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감상이다. 중국의 시인이나 철인이 가끔 기꺼이 환락을 다할 때 언제나 그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은 인생의 무상과 속절없음을 느끼는 이와 같은 비애감이다. 이 생각이야말로 만월과 아름다운 꽃을 벗삼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바라볼 때 늘 영탄하는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지나니>라는 싯귀에 담겨 있는 비애감이다. 이백의 유명한 시 <뜬 세상은 꿈과도 같으며 환을 이루어 봄이 몇 번이리>가 지어진 것은 춘야도이원에서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생자필멸, 즉 인간은 결국 무로 돌아가며 촛불의 불꽃처럼 꺼져 없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은 나로서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면 마음이 냉정해지고, 비애감까지도 다소 느낀다. 대다수의 사람은 시적인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믿음으로써 비로소 처세의 결의도 굳어지고, 사려 깊고 진실하게 또는 일정한 체관을 가지고 살아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또한 평화가 있다. 왜냐하면 참된 평화는 최악의 것을 받아들이는 심경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정력의 해발(심리학적인 용어, 자극에 의해 저축된 힘을 발산하는 것)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의 시인이나 서민이 생활을 즐길 때에는 환락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잠재의식이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즐거운 연회가 끝났을 때 <천리나 계속되어 장이 서 있는 아무리 번화한 장거리도 언젠가는 쓸쓸해질 때가 온다>고 중국인이 가끔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의 향연은 저 느부갓 네살(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을 바빌론에 잡아 가둔 왕, B.C 605 - 572)의 향연이다. 이 세상이 꿈과 같다는 생각은 우리들 이교도에게 어떤 정신적인 것을 불어 넣어 준다. 본디 이교도의 인생관은 송대의 풍경 화가와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 이러한 화가들이 신비의 안개 속에 누워 때때로 구름과 안개에 잠긴 산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생자필멸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생이라는 명제는 하나의 간단한 명제가 되고 만다. 반드시 죽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이 지상에서 살아야 할 일정한 수명이 주어져 있다. 더우기 그것도 겨우 인생칠십 고래회이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만은 주어진 여러 가지 조건 아래에서 되도록 즐겁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자기의 생활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된다. 본시 유교라는 것에는 현실적인 경향 즉 엄청나게 세속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조오지 산타야나가 말한 바 <동물적 신앙>이라는 것이 다분히 담겨 있는 어떤 종류의 상식, 다시 말해서 인류의 과거는 하등 동물이었다는 상식을 가지고 끈덕지게 인생의 일을 해 나간다. 다아윈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동물적 신앙의 덕택으로 인간은 본시 동물계의 일족이라는 총명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은 모두가 동물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본능이 정상적으로 충족되었을 때에만 참된 행복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믿음으로써 이 인생, 본능과 관능의 인생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인생의 모든 면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물론자인가? 이 문제의 답변은 중국인에게는 매우 곤란한 문제다. 중국인의 정신성은 일종의 물질적, 현세적, 생존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므로 정신과 육체와의 구별을 중국인은 잘 모른다. 물론 중국인은 동물적인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동물적인 즐거움 그 자체는 관능적인 문제로 정신과 육체의 구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다만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은 앞 장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영과 육의 두 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음악도,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정신 세계를 높여 주는, 인간이 가진 예술 가운데서 가장 영적인 예술이지만 그것은 청각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중국인에게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공감(sympathy)이 음의 교향(symphony)과 어째서 다른지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의미에서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애인의 정신과 육체를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한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용모의 기하학적 정확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몸가짐이나 몸짓을 사랑하고, 그 여자의 표정이나 미소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표정이나 미소가 육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지 않은가.
인생의 현실성에 관한 이와 같은 중국인의 느낌 속에는 중국인의 인간주의 또는 실제에 있어서 중국인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법의 영향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인의 철학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진리를 안다는 것보다는 인생을 알려고 하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사색 같은 것은 인간이 산다는 일에 대해서는 방해물이며, 또 인간의 지성 속에 생겨난 창백한 반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러한 것들은 말끔히 일소해 버리고 인생 그 자체에만 매달려 언제나 처음이며 동시에 영원한 문제에 자문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서구적 의미의 철학이 중국인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극히 한가한 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유럽의 철학자는 언제나 논리에 열중되어 있고,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지식의 가능성의 문제를 설정하는 인식론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인생 그 자체를 안다는 문제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쓸데없는 것으로, 말하자면 다만 사랑을 구할 뿐 결혼하여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전쟁에도 나가지 않고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영국군처럼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철학자야말로 가장 하찮은 것으로, 그들은 열렬한 연인처럼 진리에 구애는 하지만 일찌기 청혼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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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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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4.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 -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1889-1951)
전쟁 포로가 된 그의 배낭에 들어 있던 원고 - 심철호(중앙대학교 강사)
혹시라도 철학자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범상치 않은 괴짜이리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비겐슈타인은 그런 사람들의 철학자상에 걸맞는 인물이라 하겠다. 청년 시절부터 비상한 주목을 받은 철학자답지 않게 그의 생애는 수수께끼 투성이요, 범인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그의 삶을 추적한다 해도 그의 철학을 암시할 만한 대목을 찾기는 쉽지 않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철학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십인십색으로 어지럽다.
루트비히 비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유하고 교양있는 철강 재벌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엔지니어 출신인 아버지 다뉴브 공국의 철강업계 리더였으며, 어머니는 비겐슈타인 집안의 뛰어난 예술적 감수성의 모태였다. 사교적인 비겐슈타인 집안은 음악가들과도 깊은 교분을 맺어서 슈만, 말러, 브람스 등이 그의 집안에 드다든 당대 음악가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온 가족이 음악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으며, 특히 라벨의 유명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1차 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천재 피아니스트인 넷째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 루트비히는 클라리넷 연주와 지휘에 조예가 깊었고, 그의 휘파람 솜씨는 교향곡을 소화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비겐슈타인 가문의 운명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루트비히가 13세 때 큰형이 자살하고 2년 뒤 둘째 형도 세상을 떠났으며 셋째 형마저 1차 대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네째 형은 앞서 말했듯이 불구가 되었다. 루트비히는 당시 부잣집 자녀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14세까지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다음엔 북부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물리학을 배웠고, 이어서 베를린의 기술 고등학교를 마쳤다. 1980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당초 맨체스터 대학 연구생으로서 항공공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그의 관심은 순수 수학과 수학의 기초를 거쳐 마침내 철학에까지 미치게 되어 1912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의 하나인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를 들으며 그와 사제 관계를 넘어 동료로서 교분을 나누게 된다. 일찍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자기를 가르친 철학자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영향을 주는 천재성을 발휘했다(그의 스승인 조지 무어는 1930년대에 비트겐슈타인의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1914년 1차 대전이 터지자 비트겐슈타인은 탈장때문에 병역 면제 대상이었지만 자원 입대하여 조국 오스트리아 군대의 장교로 참전했다. 1918년 남부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된 비트겐슈타인의 배낭속에서 [논리철학 논고](아래에서는 [논고]로 줄임)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1912년 러셀의 권유로 [논고]를 출판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 철학계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시골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택한다.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전쟁 전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거의 대부분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 주고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어린이 교육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영받는 교사가 되지는 못했다. 1921년 교사를 그만둔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로 돌아와 몇 달간 수도원에서 정원사 조수 생활을 한 뒤에 그의 또 다른 장기인 건축과 조각 등으로 소일했다. 이 시기에 그가 누이를 위해 설계 시공했다는 건물은 당시로서는 첨단인 바우하우스 양식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렇듯 스스로 선택한 철학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한 그를 철학계는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침내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로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이 되어 이른바 후기 철학을 구상한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공언한 철학 문제의 해결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된다. 특히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의 싹이 될 만한 강의 노트 [청색본]과 [갈색본]은 학생들이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를 받아 적은 노트에 표지 색깔을 그대로 제목으로 딴 것이었다. 이 두권의 노트는 철학계의 비상한 관심거리였으나 그는 생전에 결코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하지 않았다.
1936년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원 임기가 끝나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 협만의 오두막에서 약 1년간 칩거하며 [철학적 연구]의 집필에 몰두하다가 케임브리지로 다시 돌아와 2년 뒤인 1939년 스승 조지 무어의 후임으로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수직에 취임도 하기 전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기여하기위해 교수직을 포기하고 런던의 한 병원에서 잡부로 일했으며 뒤에는 뉴캐슬 의학연구소에서 일했다(1930년 초 그는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전쟁 뒤 케임브리지에 복귀한 그는 1947년 연구에 전념코자 다시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일랜드의 농장과 갤웨이 바닷가 등을 전전하며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1949년 봄 [철학적 탐구] 제 2부를 탈고했으나 이미 그는 불치의 암 환자가 되었다. 동료 철학자와 제자들 그리고 고향 가족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말년을 정리하던 그는 1951년 4월 29일 케임브리지의 주치의 집에서 생을 마쳤다. 유고 [철학적 탐구]는 1953년 출판되었다. 사교적이던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스스로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피하고 평생 가난한 독신으로 지낸 비트겐슈타인은 화려한 명예나 공직 생활보다 은둔 생활을 즐겼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은 딱딱하기 이를 데 없으며, 케임브리지 대학 철학 교수 경력도 이었지만 스스로는 철저하 아마추어 철학자로 자처했다. 자신의 철학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물론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해 준 스승 러셀에게마저도 자신의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가차없이 비판하는 결백증을 보인 비트겐슈타인, 그의 철학을 [논리철학 논고]를 중심으로 살짝 훔쳐 보기로 하자.
모든 철학는 언어 비판이다 [논고]는 그 성립에서부터 내용, 문체에 이르기까지 유례를 찾기 힘든 책이다. [논고]의 대부분은 1차 대전 때 써졌다. 그러나 전장의 포연 속에서 잉태되었다는 점은 [논고]의 철학적 통찰에 별 힌트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먼저 처음 몇 줄만이라도 들여다 보자.
1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 1.1 세계는 사람들의 총체이지, 사람들의 총체가 아니다. 1.11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 그리고 그 사실들이 사실들 전부라는 점에 의해 확정된다.
더러 철학자를 일컬어 '삼척 동자도 다 아는 내용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말하는 사람'이라고 비고는 농담이 있는데 이 농담을 연상시킬 만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서문에서 "이 책 속에 표현죈 생각들을 스스로 이미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 내용은 접어 두고라도 낯설은 번호매김, 무뚝뚝한 문장, 결코 친전하다고 할 수 없는 서술방식 등은 전문 철학자들까지도 [논고]에 대해서 함부러 왈가왈부하기 힘든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고작 80녀 쪽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 하나의 위안이랄까? 아래에서 할 설명에 참고가 될 만한 구절 몇 대목만 더 소개한 다음 [논고]에 실린 주장들의 의미를 짚어 주장들의 의미를 짚어보기로 하자.
2 경우인 것, 즉 사실은 사태의 존재다. 2.01 사태는 대상들의 연계다. 2.1 우리는 사실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2.13 대상은 그림 속에서 그림의 요소들과 일치한다. 2.18 모든 형태의 그림은 실재를 바르게 또는 그르게 그릴 수 있기 위해서는, 실재와 논리적 형식, 즉 실재의 형식을 공유해야 한다. 3 사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4.11 참임 명제의 총체는 자연과학의 총체다. 4.21 가장 단순한 명제, 즉 요소 명제는 사태의 존재를 주장한다.
[논고]에 따르면 언어는 외적으로 그 언어가 가르키는 실재세계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 내적으로는 마치 수학의 함수 관계처럼 언어들끼리도 진리함수 관계라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먼저 언어와 세계의 외적관계는 언어의 각 요소와 세계의 각 요소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가 성립하는 동형 관계 구조를 이루고 있다. 언어와 세계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지니게 됨으로써 언어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그림'노릇을 한다. 우리가 언어를 통하여 세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까닭은 언어와 세계가 이러한 논리적 동형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고]에 따르면 제대로 된 언어는 외적으로 세계에 대해 그림 역활을 하며 내적으로는 진리함수적 논리 구조를 갖고 있는 언어다. 진리함수적 논리 구조란 무엇인가? 예컨대 "날씨가 좋다"를 요소 명제 P라 하고 "소풍을 간다"는 복합 명제 P Q라 한다면, "날씨가 좋으면 소풍을 간다"는 복합 명제 P-'Q가 된다. 이 때 요소 명제 P와 Q의 진리값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복합 명제 P-'Q의 진리값이 자동으로 결정된다. 이를테면 날씨는 나빴지만 소풍을 갔다면, 즉 P는 F지만 Q는 T라면 "날씨가 좋으면 소풍을 간다"는 복합 명제 P-'Q의 진리값은 T가 된다. 이처럼 요소 명제의 진리값에 따라 복합 명제의 진리값이 결정되는 관계를 일컬어 진리함수 관계라고 부른다. 진리함수의 논리에서는 아무리 복잡한 복합 명제라 할지라도 요소 명제들의 진리값만 전체 복합 명제의 진리값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혁신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한 체계성을 갖추고 있는 진리함수의 논리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서 개발되었을때, 논리의 창시자들은 이 진리함수의 논리야말로 이상적 언어의 참된 구조를 밝혀주는 것이여, 또한 세계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초기의 비트겐슈타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앞의 진리표도 그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일상 언어는 문법적 모호함과 의미의 다양성 등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참된 논리 구조를 은폐하고 있는, 따라서 세계의 참모습을 왜곡시키는 불완전한 언어이다. 진리함수의 논리를 갖춘 언어만이 세계에 대한 참된 그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을 갖춘 언어를 분석해 가면 세계의 모습도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논고]의 첫 부분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주절들이 이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 논리적 원자론의 세계관을 표명한 것이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한편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언어는 겉으로 대표적인 실은 무의미한 헛소리나 다름없다. 제대로 된 언어의 대표적인 사레는 자연과학에 등장하는 언어다. 그런데 종래 철학 언어 가운데 헛소리나 다름없는 것도 꽤 있다. 다시 말해서 도대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을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 양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과거의 철학이 다루려 한 모든 문제를 문제조차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매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통적 철학에서 어떤 문제들은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문제 자체가 언어의 한계 밖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란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성실한 자세다. 바로 종교와 예술의 근본 문제가 이런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영역은 자연과학적 명제의 세계이고 이 한계를 벗어난 언어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논고]자체의 명제들은 자연과학적 명제들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주장들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말을 해 버린 자기당착을 범한 것은 아닌가? [논고]의 대부분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진술로 채워져 있다. 즉 언어의 논리적 구조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 그리고 그 관계에 개한 진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논리적 구조를 보여 주는 그림을 언어 자체로 보여 준다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논리적 구조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 그 구조를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이 어떤 대상을 비추어 줄수는 있지만, 거울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줄 수는 없듯이.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에 관한 [논고]의 진술들을 궁국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
6.54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내 명제들을 의해- 내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내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뒤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러나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와 그 관계를 밝히는 이 명제들이 터무니없는 헛소리이지는 않다.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서 언어는 이 논리적 구조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세계와 언어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말할수 있는 것과 보여질수 있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말할수 수는 없으나 보여지는 것-여기에는 논리학, 윤리학, 미학, 삶과 죽음, 신 등에 대한 생각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은 과학적 언어(즉 그림으로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또한 초월적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종교, 가치, 삶의 의미 같은 문제에 대해 말해왔다. 그러나 [논고]에 따르면 이런 문제들은 말할 수 없는 것, 다만 보여질 수 있을뿐 인 신비적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는 과대망상을 버려야 한다."좌우간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논고] 서문) 바로 자연과학의 영역이 그러하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철학이 할 일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명료하게 그어 주고, 누군가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할 때 그가 언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해 주는 논리적 해명 작업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이성의 지위를 언어로 대치한 철학사의 혁명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대체 이성이란 무엇일까? 이성을 뜻하는 그리스 말 '로고스'는 운례 '말, 판단, 개념, 정의, 이유'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성서 요한복음 첫 구절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계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 나오는 "말씀"이란 단어의 그리스 말도 물론 '로고스'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 주는 특징으로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 그 유명한 정의를 내렸으며, 그뒤에도 이성적 능력이란 바로 언어를 쓸 줄 아는 능력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수천 년간 철학의 탐구 대상으로서 이성이 각광을 받아 온 것과는 달리 언어가 철학의 중심 문제로 부각된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처음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니 [논고]는 세계를 비추는 빛으로서 이성의 지위를 언어로 대치한 철학사의 혁명을 이룩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철학적 관심의 전면에 내세운 것은 언어가 인간 정신의 구체적이고도 객관적인 표현이라는 통찰에서 출발한 것이다. 종래 철학은 이성, 정신, 의식 등을 탐구함으로서 인간과 세계레 대해 해명하려고 해 왔다. 안간과 세계의 문제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는 비트겐슈타인도 같은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이성이나 정신, 의식 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언어에 대한 비판을 철학의 첫 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철학자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이성과 언어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언어를 객관적 탐구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철학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이성의 한게를 밝히기 위해 언어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을 [논고]의 목적으로 삼았다, 즉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언어의 참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전통적 철학의 많은 문제들은 해결된다기보다는 도대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것으로 해체되어 버린다고 확신했다. 이런 견해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 같은 환영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이 자기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 [논고]에서 언어에 대해 말한 바를 비판적으로 재고하기에 이르렀다. [논고]에서는 언어와 세계사이에 자명한 대응 관계가 성립하며, 세계에 대한 그림의 역할만이 의미 있는 언어의 정당한 기능이라고 믿었다. 또 일상 언어는 언어의 참된 논리적 구조를 은폐하고 있으므로 진리함수적 논리구조를 갖춘 이상언어만이 세계를 참되게 기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물음은 그 물음이 제기되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만 명확하게 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는 언어 사용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놀이는 언어 외적인 관심과 목적으로 구성되는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삶 전체는 수없이 많은 삶의 양식으로 구성되며 그 때마다 쓰이는 언어의 의미를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언어가 구체적 삶의 양식을 떠나서 고립되었을 때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언어를 구체적 삶의 맥락 속에서 실제로 쓰는 것이다. 철학의 문제들도 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논고]의 언어관만으로 철학 문제들을 만족스럽게 해결하거나 해체한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후기 언어관과 [논고]에 등장하는 초기 입장 사이에는 상당한 단절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고 생각하면 속단이다. 철학의 문제가 언어의 혼란에서 유발된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처방이 진리함수적 논리 구조를 갖춘 이상 언어로 환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구체적인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하는 말놀이의 혼란을 막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후기 철학은 초기 입장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인생에 대한 해결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에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개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같은 초기 명제들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현재도 20세기 언어분석철학의 물줄기 방향을 잡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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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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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교수와 학생의 길
사마광(중국 송대의 학자)의 '권학가' 속에 부모는 자녀가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의무가 있고, 스승은 제자를 분명하고 철저하게 교도(가르치고 이끔)할 책임이 있으며, 부모와 스승이 할 일을 다해 주는 데 열심히 배워 대성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녀들 자신의 죄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가정, 학교, 학생이 각기 할 일을 다해야 소기의 교육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인데, 이 셋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기울면 교육에 흠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가정, 학교, 학생의 문제 중 가정에 관한 요인은 일단 접어 두겠다. 이제 학생을 철저하고 바르게 교도해야 할 스승과, 이를 받들어 대성시켜야 할 제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특히 이것을 대학에서의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 한정시켜 생각해 보자. 말할 것도 없이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성숙 인격의 형성을 지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학문이란 공적으로 인정되며 표준화된 연구 방법으로 얻은 개별적 지식들을 조직화시킨 체계적인 지식이다. 그러므로 학문적 지식은 타당성이 높고 객관적이며 실용성이 있는데, 이는 편견이나 독단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정확성이 높고 객관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 얻은 학문적 지식은 그것이 인류의 발전과 생활의 풍요화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학문을 발전시키는 본거지가 바로 대학이며, 이 대학에서 연구와 교수(가르침)를 통해 학문을 넓히고 전달하는 주동적인 역군이 교수이다. 따라서 교수가 지니는 일차적인 소임은 학문의 발전을 위한 연구와 또 이를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라 하겠다. 연구와 가르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시하는가 할 때, 연구 활동에는 그의 독창성과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는 점에서 연구의 성취를 일차적으로 앞세우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교수의 연구 활동을 권리적 소임으로 본다면, 강의하는 것은 의무적 소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는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어는 정도 용납이 가능하지만, 가르치는 일에서 준비에 태만하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대학의 사명은 순수한 학문의 연구와 그 가르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학문에 기초해서 현실 사회에 직접 적용하고 생활 향상에 이바지하는 응용적 지식이나 기술의 연구와 습득 또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이 지니는 직업적, 기술적 소임을 무시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전문화하고 분화한 한 구석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적 직업인을 준비하는 교육의 터전이 대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 대학의 학구적 풍토와 직업 준비 교육의 기능에 대해 말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인격적 지도의 소임이라 하겠다. 이것은 체력, 지력, 정서, 동기를 합친 개개인의 특유한 - 그러나 일관성 있는- 행동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자아 개념과 인생관이 핵심이 되어 굳어지게 된다. 따라서 사람됨의 여하에 따라 본인이나 타인 또는 사회 일반이 받는 효과는 지대하며, 특히 전문적 직업인의 경우에 미치는 그 효과는 더욱 크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격을 형성하는 일 역시 대학에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임으로 보인다. 이같은 대학의 소임에 비추어 교수가 할 일이란 크게 학문 연구와 이의 가르침 그리고 인격 지도로 요약되지만, 교수가 학문적 전문가로서 사회 전반의 발전에 직접 기여하는 사회 봉사 활동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이같은 여러 기능의 중요성에 대해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단언할 수 없겠지만, 개별적인 경우 상황에 적절하게 조화하지 못하다는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대학생의 소임은 교수가 하는 강의와 실습 그리고 그의 연구 활동에 직접 간접으로 접하면서 학문 발전의 현황과 연구 방법을 습득하거나 직업인으로서 필수적 기술과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라 본다. 또한 교수와의 접촉이나 교양적 정진을 통해서 성숙 인격을 이루러 가는 것이 대학생의 소임이라 하겠다. 이렇게 교수가 지니는 연구, 교육, 인격 지도라는 세 가지 소임과, 학생이 지니는 학문, 기술의 습득과 인격 도야의 소임은 다 같이 학문이나 기술의 연구 활동을 매개로 한 인격적 접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사회에서 대학 내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자유롭게 교수와 접촉하여 학문이나 인생 문제를 제대로 지도 받고 있는 학생은 불과 15%정도였다. 나머지는 거리감이 있거나 시간적으로 만나 볼 수 없다고 불평한다. 게다가 숫제 만나고 싶지 않은 교수도 있다고 한다. 또 교수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도 상당수가 불만을 표시하였다. 요컨대 이것은 학생과 교수 사이에 어떤 불신 경향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조사 결과라 하겠다.
학생과 교수 사이에 불신 풍조가 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혼히 그 원인은 사회 일반에 펴져 있는 상호 불신 풍조가 그대로 대학 내에 옮겨진 것이라고 본다. 더욱이 그 원인은 교수의 지나친 권위주의적 허세가 불신을 조장한 데 있다. 또 교수들이 위선적으로 혹은 불성실하게 학생을 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교과 내용에 대한 불신으로 옮겨져 그렇다고 보는 학생도 있다. 사회적으로 대학 교육을 간판과 자격증을 얻는 방편쯤으로 보기 때문에 학생이나 교수 서로가 상대에 대한 노력과 관심을 잃어 이같은 불신 관계가 생겼다고 보는 이도 있다. 또 대학에서의 교수에 대한 경제적 대우가 너무나 소홀해 교수들이 대학 외 활동에 바빠서라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학생들이 너무 기대에 어긋나게 굴어서 그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어졌다고 실토하는 교수도 없지 않다. 원인이야 어떻든 이렇게 학생과 교수 사이에 불신 경향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학으로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사제지간에 불신이 있다면, 교육 목적의 달성은 이미 기대할 수 없다. 학생이 미덥지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으며 보기조차 싫을 때 교수가 정열을 기울여 그를 지도할 리 만무하다. 마찬가지로 학생 쪽으로도 교수가 미덥지 않으며, 교수를 동일시해 가며 본받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교수의 입장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이때 대학생은 교수의 지도를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교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제대로 수용될 리 없다. 여기에 인격적 지도의 실효는 더욱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불신 관계의 책임이 어느 쪽에 더 많든지 간에 이러한 경향성은 교수나 학생 모두에게 똑같은 불행이며 손실이다.
이런 풍조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수나 학생이 깊은 자기 성찰로써 불신을 바로잡아 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사실 사람을 못 믿는 것은 신용을 배반당한 경험이 많아서 생기는 수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가 타인에게 성실하지 못해 그러기도 한다. 즉 자신의 이러한 불성실을 그대로 타인에게 투사시켜 그가 자기를 속이리라고 보게 된다. 교수가 학생을 멸시하고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결함(불성실)의 표출에 지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교수를 적대시하고 무시하는 학생이 있다면, 이는 자기 열등감의 투사이거나 교수에게 자기 불만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대학 풍토의 변질 내지 황폐화의 문제에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정부 당국이나 대학 경영자가 명실상부하지 못한 대학 경영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수가 지나치게 부직에 치우치고 있어 교수 본래의 소임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학생들이 자기가 해야 할 당면 과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문제에 각기 깊은 반성과 성실한 노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대학 풍토의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또 하나 반드시 성찰해야 할 학생 교수 사이의 문제점은 학생들이 교수들에 대해 갖는 기대에 대한 올바른 자세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체로 초, 중, 고에서는 교사가 수업 시간뿐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관여하고 지도한다. 그러나 교사라면 언제나 이렇게 세심한 존재이겠거니 하다가 대학에 들어와 보면 사정이 다르다. 학생들이 강의 시간이나 특별 활동에서 교수와 접촉하지만, 교수가 학생들에게 일일이 간섭하거나 적극적으로 나오는 태도는 볼 수 없다. 그야말로 문의에 응하는 식의 교수를 대하면서 그들은 당혹감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무관심이라 할까 마치 소박이라도 맞은 듯해 주눅들고 교수와는 원인 모를 벽이 쌓여 간다.
필자는 대학에 갓 들어와 교수가 너무 쌀쌀하다느니, 고등학교 선생님의 고마움을 새삼 알겠다느니, 너무나 자유로워 오히려 불안스럽다느니 하는 학생들을 자주 만났다. 사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이미 성숙한 인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일이 간섭하기보다는 자기가 스스로 어련히 해 나가겠거니 하며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오히려 자상하게 일일이 관여하는 것은 주책없는 짓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성인 사회에서 너무 지나치게 남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사생화 침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등학교와 대학 사이에는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데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며 교수의 태도만을 탓한다면, 이는 학생 자신의 미숙함과 부적응의 탓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교수와 학생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말할 것도 없이 성숙한 인격들의 관계라고 본다. 교수와 학생은 대학을 터전으로 하여 유대를 맺으므로 그들의 관계 역시 연구라는 대학의 본질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넓은 의미로 순수한 학문 연구와 전문적인 기술 습득을 포함한 연구 활동을 통해 사제 관계가 성립된다고 하겠다. 사실 대학은 교수와 학생이 연구에 몰두하게 하며 인류와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하려 하기 학교 바깥 사회와는 달리 특권적 자유를 부여받고 있다. 무론 학문에 한한 연구의 자유지만, 이같은자유는 교수와 학생의 개인적 특권이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특권이다. 따라서 이 자유가 자주적이고 자각적인 학자 또는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특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와 국가 발전이라는 목표를 앞세우고 특권적인 자유를 향유하면서 연구 활동과 가르침에 종사하는 교수와 학생은 다같이 대학인으로서 엄격한 자율성과 주체성이 있어야 하고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 역시 이러한 성숙 인격들의 관계여야 한다.
교수-학생 관계는 연구 협동 관계뿐만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다.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이 되게 하려면, 이 두 사람 사이에 '라뽈(rapport)'이 이루어져야 한다. 라뽈이란 상호 조화되고 협조적인 친근 관계를 말한다. 이 관계는 상대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협조해 줄 것이 확신되는 안정된 관계다. 이러한 관계 수립에는 일시적이나마 기교도 있을 수있겠지만, 지속적인 라뽈을 이룩하는 데는 상호간 성실성으로 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상대를 지배하거나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권리, 장점을 존중하고 인간으로서의 존귀성을 인정하며, 그를 깊이 이해하고 그의 발전을 위해서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그를 돕는 태도가 성실성이다. 이러한 성실성은 성숙 인격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교수의 인격이 라뽈을 크게 좌우한다고 본다.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는 자기 스스로를 잘 통찰하면서 상대를 정확하게 보고 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 상대를 잘못 본다거나 자기 위주로 상대를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상대에게 너그러울 수도 있다. 관용이란 증오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상대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받아 주는 것이므로 자기 통찰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같이 있을 때만 이루어진다고 본다. 자기를 잘 알고 상대를 잘 이해할 때 자기 중심적 기준에서 벗어나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 요컨대 자각적이고 성실한 인격을 지녀야 상대의 존경과 신망을 얻게 되며 자신의 주장도 더욱 설득력 있게 수용하게 할 수 있으리라.
과거에는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조차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식의 절대 권위로 스승을 받들게 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보다도 자각적인 접촉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대학생은 특히 연령적으로 자기의 앞날과 현재 위치 또 그 소임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들 또한 자각적인 입장에서 교수에게 접근하고 존경하며 인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인간은 흔히 직접 접촉하는 상대에게 반항, 경쟁, 적대감이 있고, 이를 무의식 속에 억압하여 겉으로는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불쾌 감정을 갖게 되기 일쑤다. 특히 가정에서 부모나 형제 사이에 이같은 관계가 성립되기 쉽고, 때때로 가족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학교의 스승에게로 전환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연유하여 교수에게 이유 없는 반항과 공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각적이며 교양 있는 학생이라면 깊은 자기 성찰로써 이같은 정서적 불안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자기 결함을 극복하여 보다 나은 사제 관계를 이룩해 나갈 것이다.
요즘은 근대화의 물결에 다라 합리주의 생활 방식이 권장되면서 과거의 엄격했던 사제간의 분별과 절대성이 무너지고, 이 관계를 일시적인 계약관계로 보려는 풍조가 많이 보인다. 그러나 낡은 과거의 의식 구조라 해도 서로 도우며 유대감을 느끼고 평생토록 서로 협조하는 사제 관계의 측면은 섣불리 버려서는 안 된다. 서로 인연을 맺은 상호 관계를 지속시켜 안정감을 즐기는 기풍은 한낱 야수에게도 있거늘 어찌 학문 연구를 같이하고 사람됨의 바탕을 지도 받는 사제 관계가 한낱 옛날의 일이었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우리나라 대학의 전통에서는 졸업 후에도 사제간에 서로 돕고 돌보아 주는 미풍이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온고지신이 참된 창조의 발전임을 자각하여 앞으로 새로운 시대의 사제 지도를 닦아 나가는 데 이 문제는 크게 고려되어야 한다.
요컨대 현대에서의 사제 관계는 학문 활동을 주축으로 한 성숙 인격인 내지 성숙 인격을 지향하는 자들의 자각적인 관계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현실과 장래를 똑바로 인식하면서 바람직한 학문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제간의 기강을 굳히는 데 다같이 노력해야겠다.
"197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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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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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사랑은 싸움?
구약 시대에 유명한 노아의 방주에서 배 안에 있는 동안 사랑의 행위가 금지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홍수가 지나 온갖 동물들이 방주에서 쌍쌍이 줄을 지어 나갈 때, 노아는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코양이와 암코양이가 나왔는데, 그들 뒤로는 수많은 새끼고양이들이 뒤따라 나왔다. 노아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수코양이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 사랑은 일종의 싸움이다. 사랑은 곧 싸움이다. 싸움이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의 에너지는 바로 싸움 속에서 싹튼다. 그러나 사랑이 반드시 싸움이나 투쟁만은 아니다. 사랑은 그 이상이다. 사랑은 싸움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싸움은 사랑을 파괴시키지 못한다. 사랑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지만, 사랑은 싸움없이 존재할 수 없다.
위조 지폐
어떤 사람이 돈을 지불하는데 위조 지폐를 사용했다고 고소 당했다. 피고는 심문받는 도중 그 돈이 가짜였다는 것을 몰랐다고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도록 강요당하자 이렇게 자백했다.
"그것은 훔친 것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면 돈을 훔쳤겠습니까?"
판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결정을 내려서 위조 지폐의 죄목을 기각시키고 새로운 죄목, 즉 절도죄로 대치시켰다.
"분명히 저는 그것을 훔쳤습니다."
피고는 순순히 자인했다.
"그러나 위조 지폐는 법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훔친 것이 어떻게 범죄가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의 논리에서 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석방되었다.
- 그러나 삶에는 이러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실제 그렇다면 그렇게 쉽게 석방되지는 못할 것이다.
엄마
어느 일요일, 학교에서 소풍을 가다가,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잃어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친 듯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에스텔! 에스텔!"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아들을 발견해 내고는 달려가서 두 팔로 그를 끌어 안았다.
"왜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에스텔이라고 이름을 불렀지?"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전에는 한 번도 엄마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대답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곳은 엄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 '엄마'라고 부른다면 수많은 어머니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곳은 어머니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너는 엄마를 개인적으로 불러야 한다. 하느님 역시 개인적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면,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면, 신은 너의 삶에서 아무런 진실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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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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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3.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해 - 집단농장화 및 대약진운동(1950년대 후반)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4년 / 사사오입 개헌 1956년 / 3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됨
한국전쟁이 끝나가는 52년경 중국에서는 토지개혁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진다. 이 정책의 핵심은 장기간의 점진적인 사회주의 공업화의 실현, 국가가 주도하는 농업, 수공업, 상업정책 등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3차에 걸친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제1차 5개년계획은 1953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67논 3차 5개년개획이 끝나는 해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계획은 경제적인 측면에 집중되었는데, 사회주의 선배격인 소련을 모델로 했다. 농업에서 소련에서 집단농장인 콜호즈와 유사한 농업합작사를 추진하는 한편, 중공업을 크게 발전시키고자 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이 계획이 끝나는 시기까지 무기의 자급체계를 비록한 자주 국방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농업면에서는 소농 중심의 농업상산체제를 고쳐 집단농장화를 적극 추진해나갔다. 집단농장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집단농장 관리의 문제, 그것을 운영하는 간부의 자질 부족,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한 농민의 참여의식 부족 등의 이유였다. 55년 전국 대표대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첫째, 자발적인 의사, 상호이익을 기초로하여 빈농에 의지하고 중농과 단결할 것, 둘째, 겅제성을 줄이고 중농의 이익을 해치는 것을 줄일 것, 셋째 개인이 경영하는 농가의 생산의욕을 꺽지 말 것 등의 개선책을 마련했다.
어떻든 1차 5개년계획으로 인해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공업은 사회주의적 집단소유 혹은 국유제가 되었다. 공업의 비중이 농업보다 높아졌고, 철강생산 등의 목표량을 당성하는 등 사회주의 체제이 기초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1956년 9월 8회 당대회가 열려 지금까지의 경제정책에 대한 검토 및 새로운 정책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그 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2차 5개년계획의 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과 각 부분간의 균형있는 발전, 둘째 공업과 농업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농업에 대한 투자비율을 높일 것, 셋째 합작회사의 이익 분배비율을 높일 것 등이었다. 그러나 1975년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조짐이 보였다. 10월 당대회에서 (빠르고 휼륭하고 유익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는 원칙이 결정된 것이다. 이른바 대약진운동이다.
제국주의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만큼 무엇보다 인민 내부의 반사회주의 세력들의 반동적인 움직임을 차단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정책노선이었다. 이것은 공업과 국방건설의 속도를 빨리해야 한다는 정책변화로 이어졌다. 그 속도는 15년 내에 공업생산면에서 영국을 추월하자는 것이었다. 이로한 정책은 58년 당대회에서 통과되었다. 또한 이제는 소련을 모델로 하지않고, 수정주의로 빠지고 있는 소련을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공업정책이 적극 추진되었으며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합작사가 합병되어 인민공사가 만들어졌다. 58년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농가가 인민공사에 소속되었다. 인민공사는 평균5천 호 정도 구성되고 전국에 2만 4천여개가 설립되었다. 인민공사에서는 공급제와 임금제가 채용되었는데, 식비는 노동의 유무에 상관없이 인민공사가 지급하고 일정 등급에 따라 임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임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에도 맞지 않아 농민들의 열심히 일할 의욕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대약진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건에 맞지 않는 무리한 목표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혹사기켰드며, 목표량에 이르지 못했어도 허위보고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대약진운동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되곤 했다. 현실은 보고된 수치와는 전혀 달랐다. 농촌에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굶어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거지가 되거나 강도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이다. 59년 국방상 팽덕회는 대약진운도의 실패를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그는 당을 분열시모택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당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실패는 급속한 공업화 노선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비협조, 자연재해 때문이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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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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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城計(공성계) 空(빌 공) 城(성 성) 計(꾀 계)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텅빈 성(城)에 속아 넘어간 조조(曹操) 휘하의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갈량은 양평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두고, 대장군 위연(魏延) 등을 파견하여 조조의 군대를 공격케 하였다. 때문에 성 안에는 병들고 약한 소수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 때, 조조의 군대가 대도독 사마의(司馬懿)의 통솔로 양평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성을 지키고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과감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군사들을 시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입구와 길을 청소하여 사마의를 영접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자신은 누대(樓臺)에 올라가 조용히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성 앞에 당도하여 이러한 상황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 그는 성 안에 이미 복병을 두고 자신을 유인하려는 제갈량의 속임수라고 생각하고, 곧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空城計란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준비가 전혀 없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피서철 빈집털이가 우려된다고 하는데, 제갈량의 계략을 응용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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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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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여성들의 저항의 상징, 바지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묘사된 성 판타레오네(판타로네)의 의상이 판타롱, 그것이 좁아져서 바지가 되었다. 성 판타레오는 '모든 것에 자비를 베푼 자'로 알려진 4세기 기독교의 의사이자 순교자다. 로마 제국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령으로 참수된 판타레오네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이 되었고 그 피(지금도 액체라고 알려져 있다)를 넣은 성 유물 상자는 이탈리아의 바렐로 마을에 남겨져 있다. 판타레오네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름이 옷 이름에 붙여진 명예를 얻은 유일한 성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적인 것이다. 판터레오네라는 이름은 '전부 사자('판'은 전부 '레오네'는 사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성인은 두뇌 회전이 빠른 경건한 의사였는데 이탈리아의 전설에서는 기묘하게도 사랑스럽지만 머리가 둔한, 전혀 성자 같지 않은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전설의 인물 판타레오네의 이상한 행동이나 의상으로부터 훗날 팬츠의 이름이 태어났다고 한다. 판타레오네는 하인을 뼈와 가죽만 남도록 굶주리게 만들었다. 또 신사로서의 체면에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여성을 농락했기 때문에 여성으로부터 노골적인 조소를 받았다. 이런 이야기가 16세기 이탈리아의 "코미디 아델라루테"에 등장하는 야위고 검고 턱수염을 기른 판타로네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인물은 발목에서 무릎까지는 다리에 딱 붙고 그 위는 페티코트처럼 퍼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코미디는 유랑 극단에 의해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도 전해졌지만 판타로네는 어디서나 매우 특색 있는 이 바지를 입은 채 나타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인물과 바지를 '판탈롱(pantalon)'이라고 불렀고 영국에서는 '팬터룬(pantaloon)'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멋대로"에서 이 영국식 이름을 더욱 유행시켰다.
팬트룬은 18세기에 들어(이미 이 무렵까지는 무릎 길이의 바지로서 한 스타일을 확보하고 있었다) 미국에 상륙하자 축소되어 '팬츠(pants)'라고 불리게 된다. 성 판타레오네가 돌고 돌아 팬츠라는 이름의 의상 제공자가 되었으며, 고대 켈트인은 남성의 발을 덮는 의상으로 'trews'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것이 바지(trousers)가 된다. 또한 로마인은 헐렁한 바지를 뜻하는 말인 'laxus'를 사용했는데 '넉넉한'을 뜻하는 이 말에서 '슬랙스(slacks)'가 태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옛날에 발을 덮던 의상에는 아직까지 주머니라는 편리한 것이 붙어 있지 않았다. 주머니만큼 단순하고 게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 1500년대 말까지 없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사람들은 돈이나 열쇠, 약간의 신변 잡화는 작고 깨끗하게 포장하여 임시로 쓰는 가방에 넣거나 옷의 어딘가에 적당한 부분에 넣고 다녔다. 1500년대의 남성이 흔히 소지품을 넣은 곳은 코드피스(바지의 터진 앞부분을 숨기기 위한 장식용 봉지)였다. 이것이 나중에는 너무 커져서 우습고 성가시게 되어 못쓰게 되지만 원래는 바지의 터진 앞부분을 숨기는 편리한 덮개(단추 가리개)로 태어난 것이다. 당시의 패션에서 이 덮개에는 천을 넣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남성의 귀중품을 싼 천조각을 넣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코드피스가 유행하지 않게 된 뒤로도 이 천만은 살아남았다. 윗부분을 끈으로 조여서 작은 가방으로 만들었고 허리에 매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천이 주머니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바지에 처음으로 주머니가 나타난 것은 1500년대가 끝날 무렵이다. 주머니가 될 때까지는 2단계의 진전이 있었다. 우선 처음에는 남성이 몸에 딱 맞는 바지의 옆 봉제선을 터서 이곳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은 천으로 만든 작은 봉지를 넣었다. 그리고 곧이어 바지와 떨어져 있던 작은 봉지가 바지에 영구적으로 붙게 되는 것이다. 주머니가 한번 붙자 매우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세기로 들어서자 주머니는 남녀 모두의 케이프나 코트의 주요한 디자인이 된다. 처음에는 코트의 소매 부분에 붙던 주머니가 곧이어 허리 부분에 붙게 된다. 멜빵(서스펜더)은 바지를 매달아 올리기 위해 사용되기 전까지는 양말 고정용으로 장딴지에 감아서 사용했다. 당시의 양말은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신축성이 없었다. 멜방이 나타난 곳은 18세기 영국이다. 어깨에 거는 단추로 바지에 고정시킨 영국식의 이 패션을 채택해서 이름 그대로 '서스펜더'(거는 것)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사람들이었다. 초기의 브리치스(무릎 길이의 반바지)와 마찬가지로 니커보커스는 넉넉한 바지로서 무릎 바로 밑에서 주름을 잡아 조였다. '니커보커스'라는 이름은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 시)의 초기 이주자들에게 많았던 네델란드인의 성인 니커보커에서 온 말이다. 그들이 즐겨 입고 있던 것이 넉넉한 바지였다. 하지만 이 별명이 붙은 것은 19세기의 작가인 워싱턴 어빙이 작품 속의 작가인 디트리히 니커보커를 탄생시킨 뒤의 일이다. 어빙이 1809년에 쓴 유머러스한 두 권의 작품"세계의 시작부터 네델란드 왕조 끝까지의 뉴욕 역사"속에서 네델란드계 시민인 니커보커는 무릎 바로 밑을 버클로 조인 브리치스를 입은 네델란드인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일러스트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미국인들은 특히 소년용 바지를 흉내냈던 것이다.
옛날에 전 유럽 남성이 입고 있던 몸에 딱 맞는 타이츠 형태의 바지와 비슷한 '레오타드'는 19세기 프랑스인인 주르레오타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레오타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몸에 딱 달라붙는 의상을 입고 공중제비를 함으로써 묘기와 돋보이는 의상 두 가지로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많은 여성팬을 가졌던 레오타드가 남성들에게 남긴 충고 한마디, "부인들에게 사랑 받고 싶으면 자신의 가장 훌륭한 곳을 숨기지 않도록 좀더 자연스러운 의상을 입어야 한다." 발목 부분에 주름을 잡은 헐렁헐렁한 바지에 벨트가 달린 짧은 웃옷은 1851년 뉴욕 주에 살던 아메리아 젱크스 블루머가 선보인 스타일이다. 친구인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의 팬츠룩을 흉내낸 이 남성용 옷은, 여권 신장론자이며 사회개혁가인 스잔 B. 앤소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블루머 부인의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블루머'라는 이름이 붙어 버렸다. 당시에는 남성 의상이었던 바지가 블루머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블루머는 당시의 커다란 후프 스커트(원래는 스커트 허리가 소매까지 펼쳐진 17세기의 퍼지게일)가 부도덕하고(임신을 숨기기 위해서 고안된 스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람이 들어가 입는 것이 성가시고 화장실에서 불편하다며, 여성의 복장 개혁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1840년대에는 탄력이 있는 린넬과 말털로 짠 크리놀린(버팀살을 넣어 부풀게 만든 페티코트)이 유행하여 드레스는 더욱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블루머는 유행하던 드레스 입기를 거부했다. 1851년부터 블루머는 헐렁거리는 바지와 짧은 웃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부인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이 늘어나자 이 바지를 저항을 상징하는 유니폼으로 삼았다. 바지를 입기 시작한 움직임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유행한 자전거 열풍으로 더욱 성황을 이룬다. 스커트는 자주 자전거의 톱니 바퀴나 체인에 말려서 가벼운 상처를 입기 쉬웠다. 때로는 커다란 상처를 입기도 했다. 블루머는 자전거를 탈 때 이상적인 복장이 되었고, 바지를 입는 성별이 결정되어 있던 그때까지의 긴 전통에 도전하게 되었다.
블루머처럼 활동성이나 실용성을 강조하며 현대에 들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바로 미국에서 탄생한 청바지이다. 아직 청색도 아니고 바지도 아니었던 무렵의 진스는 데님과 비슷한 능직물 목면으로서 튼튼한 작업복용 천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 천은 이탈리아의 도시인 제노바(Genova)에서 직조되었는데 그것을 프랑스의 직조공들이 제느(Genes)라고 불렀던 데서 '진스(jeans)'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하지만 청바지의 기원은, 리바이스 스트라우스라는 17세의 미국 이민 재봉사의 전기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850년대 골드 러시의 전성기에 샌프란시스코로 이민간 스트라우스는 텐트나 포장마차에 크게 필요하던 캔바스 천을 팔고 있었다. 재주 있는 장사꾼이었던 스트라우스는 광부들의 바지가 금방 해지는 것을 알아차리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튼튼한 캔버스 천으로 오버올(아래위가 한데 붙은 작업복)을 만들어 보았다. 이 바지는 천은 딱딱하고 거칠었으나 수명이 길었으므로 스트라우스는 재봉사로 성공하게 된다. 1860년대 초기에 스트라우스는 캔버스 천을 프랑스의 님에서 짠 좀더 부드러운 데님으로 바꾼다. 이것이 유럽에서 '서지 드 님(serge de Nimes 님산 서지)'으로 알려진 천으로 미국에서 '데님(denim)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나아가 스트라우스는 이 데님 바지를, 더렵혀져도 눈에 띄지 않는 짙은 감색으로 염색했다. 인기는 배로 늘어났다. 카우보이들은 몸에 딱 붙게 하려고 스트라우스의 바지를 입은 채 말의 물통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나와 햇빛 속에 누워서 천이 마르며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데님 바지는 튼튼하고 잘 찢어지지 않았지만 광부들은 장비가 무거워 자주 주머니의 봉제선이 찢어져 버린다고 불평했다. 스트라우스는 이 문제를 러시아에서 온 유태인 재봉사 야곱 데이비스의 아이디어를 빌려서 해결한다.
1873년에는 구리로 된 리벳이 주머니 이음새마다 붙었고, 광부가 금을 구분하느라 쭈그려 앉을 때 가랑이의 봉제선이 찢어지지 않도록 앞부분 끝에도 또한 붙였다. 그런데 가랑이의 리벳은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모닥불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리벳이 뜨거워져서 화상을 입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가랑이의 리벳은 달지 않게 되었다. 주머니의 리벳은 1937년까지도 계속 붙였었는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미국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한결같이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교장은 엉덩이 주머니의 리벳이 목재 책상이나 의자를 후벼파서 더이상 수리가 힘들 정도로 상하게 한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주머니의 리벳은 제거되었다. 완전히 실용성만을 생각하여 태어난 청바지는 1935년에 패션 상품이 된다. 이 해의 "보그"지에 두 명의 사교계 부인이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광고가 실렸고 이것이 '웨스턴 시크'라는 유행의 발단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유행은, 1970년대에 들어서 디자이너 청바지의 유행이 시작될 때까지는 한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애용되었다. 그러나 작업복으로 태어난 바지가 또다시 외출용으로 바뀌자 바야흐로 거대한 산업을 낳게 되었다. 디자이너 청바지 전쟁이 한창일 때는 캘빈 클라인의 청바지는 값이 무려 50달러나 됐는데도(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일 주일에 25만 벌씩 팔리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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