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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5호
2012.1.8 (음 12.15)/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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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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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구원의 손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에 되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 리처드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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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금싸래기 땅
정부의 아파트 투기 억제 정책으로 요즘 주택시장에는 찬바람이 불지만 대형 토지 매매시장은 활기가 넘친다고 한다. 지역 경제 활성화, 재정 확충, 신청사 건립 비용 마련 등을 위해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기관이 보유하던 '금싸래기 땅'들이 잇따라 시장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금싸래기 땅'이란 노른자위에 위치한 비싼 땅을 일컫는다. 하지만 '금싸래기 땅'은 '금싸라기 땅'이라고 써야 한다. '싸래기'가 북한에서는 표준어이지만 우리말에서는 '싸라기'가 표준어이기 때문이다. '금싸라기'는 '금'과 '싸라기'가 합쳐진 말이다. '싸라기'가 부스러진 쌀알을 뜻하므로 '금싸라기'는 금의 잔부스러기를 의미한다. 금이 워낙 귀한 물건이다 보니 잔부스러기라도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금쪽같다'란 말도 매우 소중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처럼 아주 드물고 귀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일컬을 때 '금싸라기'란 단어를 쓴다.
금싸라기 외에 '싸라기'가 들어간 단어에는 '싸라기눈'이 있다. 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을 말한다. 준말은 '싸락눈'이다. 우리 속담에 '싸라기 쌀 한 말에 칠 푼 오 리라도 오 리 없어 못 먹더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우습게 여기지 말고 소중하게 써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 바루기] 대중, 민중, 군중
"내 상황과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자신의 속내를 꼭 집어 말해 주는 듯한 유행가 가사에 기대 누구나 한 번쯤 울고 웃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듣고 부르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가. 그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대중(大衆)'이라고 한다. 신분.계급 등의 구별이 없는 사람의 무리를 일컫는 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랩이 생소했던 당시 대중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처럼 쓰인다.
'대중' 외에도 수많은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말로 '민중'과 '군중'이 있다.
'광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은 민중가요로 불리는데 이때의 '민중(民衆)'은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봉기를 일으킨 민중을 향해 '배가 고프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은 너무나 유명하다"와 같이 사용한다.
'군중(群衆)'은 한곳에 모인 많은 사람을 이르는 말로 "반전 가수 조앤 바에즈는 광장의 군중을 향해 비폭력을 호소하는 노래를 불렀다"처럼 쓰인다.
셋 다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단어지만 '대중'은 특별하거나 전문적인 사람과 상대되는 일반 사람들, '민중'은 지배층과 상대되는 피지배층의 사람들, '군중'은 일정한 곳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중적 인기를 군중적 인기, 민중 봉기를 대중 봉기, 대중음악을 군중 음악으로 표현하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말 바루기] 앎, 알음, 만듬/만듦, 베품/베풂
프랜시스 베이컨이 외쳤던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동양인은 일갈한다. "아는 것이 병이다"라고. 여기서도 동서양 사유(思惟)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아는/안다는 것'은 지식을 말한다. 지식을 순 우리말로 하면 '앎'이다. '앎'은 동사 '알다'의 명사다. 원래는 명사형이었을 것이나 완전히 명사로 바뀐 것이다. 이런 낱말을 전성명사(轉成名詞)라고 한다. '살다'의 '삶'도 마찬가지다.
'알다' '살다'처럼 ㄹ불규칙활용을 따르는 낱말들, 예컨대 '거칠다, 둥글다, 만들다, 베풀다' 등의 명사형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앎'과 '삶'처럼 어간의 ㄹ을 살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바로 ㅁ을 붙인 '거침, 둥금, 만듬, 베품' 등은 틀린 표기다. '거, 둥, 만듦, 베풂' 등으로 적어야 바르다.
'알다'에서 온 명사가 '앎' 말고 또 하나 있다. '알음'이다. 이것도 '갈음, 기쁨, 얼음, 울음, 웃음' 등과 같이 완전히 명사가 된 것이다. '알음'은 '사람끼리 서로 아는 일/지식이나 지혜가 있음/어떤 사정이나 수고에 대하여 알아주는 것' 등을 뜻한다.
'앎'과 '알음'은 모두 '알다'에서 나온 명사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앎'은 지식(知識)을, '알음'은 면식(面識).안면(顔面)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차이는 '아는 체하다'와 '알은체하다'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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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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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비꽃에 대한 사유思惟 - 김완
1 작고 여린 그녀가 무리지어 바람결 따라 흐느끼고 있다 가녀린 꽃, 알갱이들이 이룬 은빛 파도, 은빛 바다가 소리 없이 출렁거리고 있다 소문 없이 바다가 들고나는 아무도 돌보지 않은 개펄 검붉은 칠면초 벗 삼아 사람들 손길 거부한 채 흐느끼듯 출렁이며 군무를 추고 있다 무리 속에 노란 꽃 숨어있네 진실은 늘 가까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 알지 못할 뿐 가녀린 그녀 종일 춤추는 곳 짱뚱어 헤엄치고 뛰노는 곳 풍경에 스밀 수만 있다면 오오 풍경 속에 그녀와 나 그대로 풍화될 수만 있다면
2 파란 하늘에 흰 구름 둥실 떠있는 곳 바람에 일렁이는 그대여 색(色)을 다듬는 화가의 손길 떨린다 색(色)은 색과 색 사이 군집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터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을 부르는 것 그대 무리지어 출렁이니 은빛 파도, 은빛 바다가 되고 살살이 꽃보다 더 가녀린 바람에 마구 볼 비비며 춤추는 꽃 개펄의 물길 따라 보랏빛 칠면초와 한 세상 연출하는 소금 창고의 칙칙한 어둠 걷어내고 논두렁 밭두렁 뚝방길 따라 모두가 풍경이 되는 순간까지 시간 속에 온전히 몸 맡기고 저물어가는 그대여
3 한 낮의 햇살 한 땀 한 땀이 순백의 염료 소금으로 익어간다 개펄 건너편 젖은 눈시울의 태평염전 아내가 차려낸 가난한 밥상에는 비싼 푸성귀 자꾸 줄고 한숨만 소금 산처럼 소복하다 누구에게나 좋은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지만 소금이 익어가는 동안 사내들 밤마다 소주병을 비워낸다 바람에 하얗게 부서지고 말라가는 개펄 풍경처럼 스밀 수 만 있다면 검게 탄 얼굴들 짠한 눈물들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어야하리 소금 익어가는 날, 눈부신 허기 은빛 군무로 하늘거리는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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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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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1) - 유권재
애증도 골이 깊으면 잊혀진 듯 묻히는지
사는 게 고단해 지면 말문마저 막히는지
가슴에 쌓인 세월만 쓸어내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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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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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 온 산꿩 - 서정슬
하늘이 그리워라 산이 그리워라 망 너머로 먼 하늘을 바라봅니다.
꺼욱꺼욱 산열매 같이 따먹던 나의 친구야, 꺼욱꺼욱 나처럼 어느 곳에 잡혀 갔을까? 지금도 나무 열매 찾아 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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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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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7장 우유론 - 때로는 빈둥빈둥 놀며 지낼 필요도 있음을 논한 장
2. 한가로움에 대한 중국인의 소설
중국인이 위대한 빈들빈들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국인은 위대한 활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양극은 서로 칭찬하게 마련이라면 중국식 빈들당이 미국식 활동가를 찬미하는 것처럼, 미국식 활동가는 중국식 빈들당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양자는 이른바 국민적 특질로서 저마다 좋은 점이 있다. 동서가 결국 합류할 것인지 어떨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명료한 사실은, 동서는 점차로 합류해 가고 있다는 것과, 근대 문명이 진보하고 교통편이 증대해 감에 따라 점점 합류의 경향을 띠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중국에 있어서 우리는 이 기계 문명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이 두 형태의 문화, 즉 중국의 옛부터의 인생 철학과는 근대적 기술 문명과를 어떻게 융합시키느냐 하는 방법과 그것을 완성시켜서 어떻게 하면 일종의 살아나가는 방법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방법과 그 문제를 구명하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는 옛부터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동양인의 생활에 관해 특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무도 장래를 예언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결국 기계 문명은 급속도로 우리를 몰아세워 한가로운 시대로 접근시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싫건 좋건 노는 일이 많고 하는 일이 적어지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나 다 환경 여하에 달린 문제로서, 만일 한가함이 눈앞에 매달려 있어서 언제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게 되면 오히려 생각밖에 얻어진 그 한가함을 어떻게 즐기면 되겠는가 하는 방법을 아무래도 생각해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또 손쉽게 하는 방법도 서둘러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결국 다음 세기에 관해서는 아무도 에언할 수 없다. 앞으로 30년 뒤의 인간 생활을 예언하려고 한다 해도 무모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문명이 급격한 발전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그럭저럭 문명에 지치고 말 때가 올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 문명의 세계에서 얻은 물건을 다시 조사해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인간 생활의 물질적 조건이 이제보다 좋아져서 질병이 없어지고, 가난이 줄고, 오래 살게 되어 먹을 것이 풍부해질 때가 온다면 현재와 같이 인간이 아둥바둥해야 한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아래 우리가 놓인다면 그 결과로서 현재보다 더 게으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오늘날의 미국은 기계 문명에 있어 가장 진보한 나라다. 그리고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의 세계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생활형이나 규범의 영향을 띠어 가리라고 세상에서는 생각되어 왔다. 나는 이에 대하여 이론을 내세우고 싶다. 왜냐하면 미국인의 기질이 앞으로 어떠한 모양으로 바뀌어갈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작 바뀌어가는 국민의 기질로서 말할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저 반 와이크 브룩스의 신간(1936년 출간의 Elowering New England를 가리킨다)에 논의되어 있는 바로는 뉴잉글랜드(미국의 동북 주. 즉 메인, 뉴우햄프셔, 버어몬트, 메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의 총칭으로 미국 문화의 발상지)시대의 문화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찌기 꽃처럼 활짝 피었던 뉴우잉글랜드 문화가 전형적인 미국 문화가 아니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저 월트 휘트먼이 그 <민주적 전망>(휘트먼은 이 책 가운데서, 장래 자유로운 남성과 완전한 어머니들이 나타날 것을 지적하고 있다)에서 펴나간 이상이 미국의 민주적 진보의 이상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미국으로서는 조금 휴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의미에서 그 황금열(19세기 말의 캘리포니아의 황금열. 이 때문에 뉴우잉글랜드의 문화는 시들게 된다) 때문에 꺾여지고만 미국의 고대 문화(즉 19세기 중엽의 뉴우잉글랜드 문화가 다시 꽃필 때가 온다면 그때야말로 제2의 휘트먼, 제2의 도로우, 제2의 로우웰(1819 - 1891, 미국의 시인, 비평가)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때가 오면 아메리카 기질이라는 것은 현재의 그것과는 훨씬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며, 오히려 에머슨이나 도로우에 매우 가까운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인간의 교양이란 본디 한가로움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중국인식 사고 방식에 의하면 한적을 사랑하는 현자가 가장 교양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 된다. 바쁜 생활과 현자의 생활 사이에는 아무래도 철학적인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현자는 바삐 서두르지 않는다. 바삐 서두르는 인간은 현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란 가장 우아하게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한적한 생활의 기술이며 변화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으련다. 오히려 옛부터 전해온 중국인의 한적한 생활에 대한 신성한 소망을 북돋우고 중국학자들이나 정도는 낮지만 일반 중국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그 무애 무우, 한적, 유유자적의 기분(때로는 시적 기분이 되기도 한다)의 원천인 중국 철학에 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영달과 성공을 싫어하고 생활로서의 생활을 강렬히 사랑하는 그러한 중국인적 성격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우선 18세기에 나타난 비교적 이름 없는 저작가 서백향(무명 속에 파묻혀 있으니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의 말을 빌어 보면, 중국인적 한가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시간이 유용함은 그 유용하지 않음에 있다... <시간을 방 안의 마루라고 하면 한가함은 가구를 놓지 않은 부분과 같은 것이다> 한 치 사방의 조그마한 작은방에 세들어 있는 직업 부인은 방 안을 서성거릴 수도 없기 때문에 누구나 다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월급이 좀 오르면 그 즉시 좀더 넓은 방으로 이사하려고 한다. 그러면 새로 이사한 방에는 싱글베드며 화장대며 파이프가 두 개 달린 가스 장치에 점령되어 빈틈없이 유효하게 쓰여지고 있는 공간 외에 얼마간의 놀고 있는 마루가 있다. 방이 아늑하게 보이는 것은 이 놀고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럭저럭 어떻게든지 이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는 것도 생활에 한가함이 있기 때문이다.
3. 한적생활의 예찬
중국인이 한적함을 사랑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결합해서 생긴 것이다. 우선 중국인의 기질에서 출발하여 다음은 문학적으로 예찬되었고, 끝으로 철학 속에서 그 타당성을 발견했다. 즉 강렬한 생활애에서 발생하여 역대의 문학적 낭만주의의 저류를 따라서 강화되었고, 끝내는 주로 도교라고 불리는 생활 철학에 의하여 <바르고 현명하다>고 단정된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도교적 인생관을 중국인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중국인의 기질 속에 도교적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만 한다. 이미 우리가 한가함의 산물이라고 규정한 한가한 생활의 낭만적 예찬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듯이 부유한 계급을 위한 것은 단연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문제의 진로를 가로막는 터무니 없는 오해인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한적한 생활을 구하고, 또는 할 수 없이 그 생활로 들어간 빈곤하고 때를 만나지 못해 불우하며 청빈한 선비를 위한 것이다.
중국 문학의 걸작을 읽으면서 청빈한 대철학가가 가난한 선비들에게 소박하고 한적한 생활을 찬미한 시문을 가르치고 있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 나는 이들 스승은 그 시문 속에서 강한 개인적 만족과 정신적 위안을 발견하였음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을 얻는 데도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며 또 벼슬길에서 떠남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스승이 남기고 간 그 많은 시문은 과거에 실패한 선비들의 마음을 그 얼마나 위로했겠는가. 또 <시장이 반찬>이라는 격언은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일 수 없었던 불우한 사람들의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해주었으리라. 중국의 청년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소동파나 도연명 또는 그 밖의 그들이 싫어하는 유한 지식계급에 속하는 시인들을 비난하지만, 도대체 문학사상 이보다 더 심한 오인은 없다. 생각해 보라. <강상의 청풍이요, 산간의 명월이라> 하고 읊은 소동파, <석로점아의(밤 이슬은 나의 옷자락을 적시고), 계명상수지전(닭이 우노매라 뽕나무가지 위에서)> 하고 읊은 도연명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비난한다. 마치 강상의 청풍이나 산간의 명월이나 뽕나무의 닭이 자본 계급의 독점물인 것처럼! 이들 지난날의 위대한 시인들은 농부의 생활 상태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는 정도를 지나서 그들 스스로가 직접 가난한 농부 생활을 하였고 그 속에서 평화와 조화를 발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고도의 감수성과 자유인적인 성질을 타고난 중국의 낭만주의자들은 세속적인 재산을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정감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한 생활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관직생활을 싫어하고,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하기를 엄하게 거부하는 태도 속에 그것은 잘 나타나 있다. 한적한 생활이 부유한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들(미국의 성공자들은 그 얼마나 아둥바둥하는가!)의 특권이라는 것은 실로 가당치 않으며, 중국에서는 이른바 고결한 경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지는 유럽인이 생각하는 방랑자의 기품이라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호의를 구걸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존심이 강하고,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남에게 메이지 않고, 자주적이며 세속적인 성공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지나치게 현명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고결한 정신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초연한 정신에서 오는 것이며, 또 필연적으로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야망이나 어리석은 행위나 부귀와 명성의 유혹을 꿰뚫어보는 능력에서 생긴다. 어쨌든 자기 인생의 영달보다는 마음에 갖추어진 소질을 존중하고 부귀나 명성보다는 정신을 존중하는 이들 고결한 선비들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바에 따라 중국 문예의 최고 이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훌륭하게 소박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세속적 성공을 고고하게 백안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층의 위대한 문인들, 도연명, 소동파, 백낙천, 원중랑, 원매 등은 대개 잠시 관직에 있었으나, 하찮은 일에 머리를 쓰고, 밤낮 머리를 조아리거나 동료 관리들을 보내고 맞는 생활에 그만 진절머리를 내다가 끝내는 깨끗하게 관직 생활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현명하게도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원중랑은 소주의 태수직에 있을 때 상사에게 일곱 통의 진정서를 연거푸 내어 1년 내내 변함없는 머리를 조아리는 생활을 탄식하면서, 자유롭고 근심없는 한낱 인간으로 돌아갈 것을 허용해 달라고 간청했다. 다소 난폭하다고 생각될 만큼 한적한 생활을 찬미하고 있는 한 예는 이들 시인 외의 또한 시인 백옥섬이 스스로 나재당이라 일컬은 서재를 찬미하여 쓴 비문 속에 있다.
게으르면 노자를 읽지 않는다. 도는 서중에 없음이다. 게으르면 경도 보지 않는다. 경은 도보다 깊지 못함이라. 도의 본질은 허에 있고 맑음에 있으며 차가움에 있다. 그러나 나는 날이 다하도록 바보스러운 마음이니, 또 어디서 허를 구하랴. 게으르면 시서도 읽지 않는다. 놓으면 시신이 떠남이라. 게으르면 금도 잡지 않는다. 노래가 현 위에서 죽음이라. 게으르면 술도 좋아하지 않는다. 강호 스스로 술잔 밖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장기에도 대하지 않는다. 승패는 판세 밖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산하도 보지 않는다. 화취는 마음 속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풍월도 대하지 않는다. 선경은 스스로의 품 속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속세를 끊는다. 갈건과 모든 것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라. 게으르면 춘추도 모른다. 천행이 마음 속에 있음이라. 소나무는 죽으리, 바위는 삭으리, 그러나 나는 나, 영원한 나. 이 집을 나는 부르리라. 나재당이라고.
그러므로 한적한 생활을 예찬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 매이지 않고 근심없는 심경, 자연 생활을 마음껏 열렬히 즐기는 것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시인과 학자들은 모두가 이상야릇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강호객인-두보>이니 <동파거사-소동파>니 <노호일인>이니 <하외각노옹>이니, 그 밖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하지 않다. 전혀 필요하지 않다. 한적한 생활의 참다운 즐거움은 부유한 계급이 독차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버는 일을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윤택한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은 언제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 그날의 생계에 빠지는 것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노자는 인간의 실생활에 적의를 나타냈다고 해서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일에만 떨어지는 것을 목과하기에는 노자의 인생애는 너무나도 정이 깊은 것이어서 속세의 생활을 버릴 것을 가르친 것이다.
원래 사랑이 있는 곳에는 질투가 있기 마련이다. 열렬하게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훌륭한 한적한 한때가 남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질투심에 차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방랑자에게 언제나 특유한, 품위와 긍지를 보존하고 있어야만 한다. 낚시질을 하는 잠깐 사이도, 업무에 종사하는 몇 시간도, 다같이 신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마치 영국인이 스포츠를 할 때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듯이 일종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과학자가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남이 방해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에 정신을 팔고 노는 사람이 골프 클럽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식 시장의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또 상인이 하루에 많은 물건을 팔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쏜살같이 가버리는 봄의 얼마 남지 않은 날을 헤아리고는 봄빛을 찾아 들과 산으로 나가지 못했던 일을 반드시 한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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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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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3.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Materialism and Empirioicriticism(1909) - 레닌 Vladimir Ilyich Ulyanov Lenin(1870-1924)
'불꽃'처럼 살다 간 혁명가 - 김성환(성심여자대학 강사)
사람들에게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아 보라고 하면 20세기 말에 일어난 소련의 붕괴만큼 첫 손가락에 꼽는 사건도 드물다. 그러나 시간으로 보나 논리로 보나 바로 이 소련을 세운 20세기 초의 러시아 혁명이 먼저가 아닐까? 지구 육지의 1/6이나 되는 큰 땅에 최초로 사회주의 나라를 세운 이 혁명은 레닌의 사상을 깃발로 내걸고 일어났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인한 이마를 가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1870년 4월 22일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이 된 교육 관료였고 어머니도 교사였다. 계몽 사상을 지닌 부모였다. 레닌은 상류층의 전통 교육을 받았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으로 마음을 돌렸다. 왜 그랬을까? 1887년 대학생이던 형 알렉산드르가 러시아 전제 군주를 암살하려다 들켜 처형당한 일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테러리스트의 길을 가다 실패한 형의 처형 소식을 듣고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야." 그는 죽은 형이 갖고 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으며 1887년 카잔 대학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곧 학생 시위 혐의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 뒤 비밀모임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를 열심히 공부했고 1891년에는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법학과도 졸업했다. 전과목 우등생은 레닌뿐이었다. 1983년부터 노동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쓴 첫 글 ('인민의 벗'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와 싸우고 있는가?)(1893)에서 레닌은 "미래의 주인은 농민"이라고 주장하는 인민의 벗 또는 나로드니키를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1897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이미 알고 있던 나데즈야 크루프스카야와 다시 만나 1898년 5월 결혼했다.
1899년 2월 유배 생활을 마치고 페테르스부르크에 살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둔 중앙 집권적 당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이스크라)(불꽃이라는 뜻)라는 지하신문을 외국에서 만들어 러시아에 뿌리려고 뮌헨으로 가 12월에 첫 호를 냈다. 독일, 런던, 파리, 스위스에서 5년 동안 첫 번째 망명 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당에 필요한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이 시기에 나온 중요한 글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같이 더 나은 경제적 생활 조건을 얻기 위한 싸움만 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저절로 온다고 주장한 경제주의자들을 공격하고 혁명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철저한 규율로 단결한 당을 세워 정치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3년 7~8월 브뤼셀과 런던에서 이미 1898년에 세워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가 열렸다. 레닌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참가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이스크리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당원의 자격 문제, 당 중앙위원회와 (이스크라) 편집진의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두 파로 갈라졌다. 레닌의 반대자들이 항의 표시로 대회장을 떠나는 바람에 레닌의 지지자들은 다수파('볼셰비키'라 불림)가 되었고 남은 반대자들이 소수파('멘셰비키'라 불림)가 되었다.
1905년 10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레닌은 11월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했고 레닌은 핀란드, 스위스, 파리, 오스트리아 등을 돌아다니며 두 번째 망명 생활을 보냈다. 이 기간은 레닌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당 안의 수정주의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철학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을 썼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레닌은 스위스에 있었다. 적국 독일의 영토를 넘기 위해 다른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독일 정부가 제공한 밀폐된 기차를 탔다. 4월 페트로그라드(옛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한 레닌은 혁명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정치 권력을 잡는 것이라고 보고 노동자 계급의 독재와 전쟁 중지를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레닌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레닌은 숨어서 계속 글을 쓰고 당을 지도했다. 10월 중순 당이 무장봉기하여 케렌스키 정부를 무너뜨리자 레닌은 11월 초 밖으로 나와 새 정부의 의장이 되었다. 트로츠키의 평가다. "일할 때는 지칠 줄 몰랐고 과학, 예술, 문화를 사랑했지만 이것이 아직은 극소수의 소유물임을 잊지 않았다. 크레믈린에서 생활은 외국에서 망명객으로 살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단순한 생활 습관이 생긴 까닭은 지적 작업과 강력한 투쟁이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강한 만족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칙에 철저한 레닌도 정치 권력을 잡은 뒤에는 유연한 정책을 폈다. 10월 혁명 전에는 제국주의 나라들 특히 독일과 '혁명 전쟁'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위협했으나 혁명 뒤에는 새로 태어난 정부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하면서 당 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8년 3월 독일과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맺었다. 또 경제에서는 혁명 직후 시장경제를 완전 폐지했다가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으로 부분적이나마 농산물과 공산물을 시장에서 팔도록 허용했다. 1921년 말부터 레닌은 뇌동맥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1918년 카플란이 쏜 총에 맞아 부상한 후유증도 있었다. 1922년 5월 처음 졸도했고 12월 두 번째 졸도하여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1924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근처 고르키에서 죽었다. 마지막 투병 기간에 레닌은 러시아 최고 문학가이자 절친한 친구 고리키와 필생의 사업인 혁명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라나는 새 세대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 그들의 삶에는 그토록 잔혹한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럽지 않다. 우리 세대는 놀랄 만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을 성취했으니까.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 불가피했던 모든 잔혹한 일은 결국 이해되고 변호될 것이다. 모든 것이."
물질이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관념이 물질의 최고 산물이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얼마쯤 읽다 보면 한 가지 놀라운 느낌이 들 것이다. 왠지 잘 모르지만 레닌은 굉장히 화가 나 있다. 서문도 채 넘기 전에 독설이 뛰어나온다. "이 용감한 투사들은 유물론이 격파되었다고 믿으며... 노골적으로 신앙주의로 나아간다.....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면서 말로는 아니라고 변명하기 일쑤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자신의 변절은 은폐하고...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무릎꿇고 반항'하는 격이다." 무슨 놈의 철학책이 이럴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1909년 5월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제목에서 바로 드러나듯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정면 대결이다. 그리고 레닌이 이 책을 쓴 가장 중용한 동기는 1905년 혁명이 실패한 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특히 볼셰비키 자체 안에서 나타나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의 대표는 당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 보그다노프와 루나차르스키다. 이들은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의 철학인 경험비판론을 근거로 삼는다. 이에 반대하는 유물론의 대변자는 바로 레닌 자신이고 포이에르바흐와 엥겔스가 레닌의 사부다. 그리고 레닌의 진단에 따르면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의 정신적 보스는 버클리, 흄, 칸트, 피히테 같은 철학사에서 관념론자라는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다. 참 복잡한 계보다. 그런데 도대체 유물론과 관념론이 뭐길래 레닌이 그토록 흥분하는 걸까?
유물론은 돈만 밝히는 이론이고 관념론은 비현실적 이론이라고 편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좀 고리타분하지만 지금부터 약 2, 500년 전 서양 철학이 태어나 그리스로 잠시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때 철학자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나이가 가장 많은 철학자는 탈레스일 것이다. "세계의 모든 것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다. 시험 볼 학생이라면 이런 내용을 외우고 말겠지만 철학은 이제부터다. 탈레스의 말은 누가 뭐라고 물으니까 대답한 말로 볼 수 있다. 그 물음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골치부터 아프겠지만 답은 쉽다. 바로 "세계의 모든 것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또는 줄여서 "세계는 무엇인가?"다. "세계는 무엇인가"는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아직도 살아 있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양한 답을 내놓았지만 이제 우리가 한번 대답해 보자. 우선 세계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물질과 관념으로 나눌 수 있다. 물, 돌, 집, 별 같은 무생물과 꽃, 개, 사람 같은 생물은 모두 물질이다. 그런데 관념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가수 변진섭의 노래 (희망사항)의 노랫말 속에서 관념을 한번 찾아보라. "밥을 많이 먹어도 배가 나오지 않는 여자"나 "껌을 씹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여자"가 관념이라고 대답하면 틀렸다. 관념은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어서 나오는 대답이겠지만 철학에서 관념이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가리킨다. 정답은 이 노래 마지막에 나오는 "나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에서 '좋더라'다. '좋더라'라는 감정이나 '빨갛다'라는 감각, 충동, 사고, 의지들이 바로 정신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과 관념 중 어는 것이 근본이고 어는 것이 파생된 것일까? 감각, 사고 등은 뇌라는 물질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은 물질이 근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한편 자동차, 집 등은 쓰임새를 예측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사고가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은 반대로 주장할 것이다. 철학에서는 앞 사람을 유물론자, 뒷 사람을 관념론자라 한다.
옛날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다시 레닌의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레닌이 마흐와 아베니리우스의 경험비판론을 다시 비판하는 까닭은 경험비판론의 정체를 관념론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경험비판론이란 말은 스위스 철학자 아베나리우스가 만들었다. 그는 '경험'이란 개념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이 개념에 철학자들이 붙인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비판'하고 제거하려 했다. 그가 지적한 가장 대표적인 군더더기는 "경험 외부에 물질이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경험비판론자들의 핵심 주장은 무엇일까? 먼저 오스트리아의 물리 학자이자 철학자 마흐는 감각을 분석한다. "우리는 뾰족한 끝을 가진 어떤 물체를 보고 만지고 그 뾰족한 끝이 피부에 닿으면 아픔을 느낀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우리는 뾰족한 끝을 가진 물체의 모든 성질을 눈, 피부 등 감각 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효과'로 보게 된다. 이런 효과를 감각이라 한다." 마흐가 감각을 분석함으로써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만 물질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색, 소리, 압력 같은 감각이다. 물질은 감각들을 묶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감각을 낳는 물질을 따로 가정할 필요가 없다." 다시 레닌의 독설이 튀어나온다. "진부한 말씀이군요, 존경하는 교수님! 이것은 물질이 단순히 추상적 상징이라고 말한 버클리를 문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헛고생한 사람은 에른스트 마흐다.... 만일 우리 감각의 '감성적 내용'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면 공허한 '철학적' 유희에 몰두하고 있는 이 단순한 나밖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인가?" 마흐의 견해가 17세기 영국 철학자 버클리의 사상을 표절했다는 지적이다. 버클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세계 속의 모든 것은 내가 지각(또는 감각)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관념이 근본이고 물질은 파생된 것이라는 관념론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유아론이 담겨 있다.
레닌은 두 가지 이유로 이런 관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첫째, 지구는 생물과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도 이미 있었다. 관념론에 따르면 인간이 감각하거나 사고하기 전에는 지구라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둘째, 인간은 뇌가 없으면 감각하거나 사고할 수 없다. 관념론에 따르면 뇌라는 물질이 없어도 감각과 사고는 있을 수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므로 물질이 먼저고 관념은 나중이다. 한편 아베나리우스는 좀더 세련된 형태로 경험비판론을 주장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대신 '객관' 또는 '대상'이라는 어려운 말을 쓴다. 아베나리우스는 '주관'과 '객관' 대신 '자아'와 '환경'이란 말을 쓰면서 자아와 환경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고 언제나 함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주장을 자아와 환경의 '원리적 병렬'이라 하는데 이는 주관 없는 객관도, 객관 없는 주관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아베나리우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원리적 병렬'이란 유물론과 관념론 중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둘을 잘 종합한 이론으로 보인다. 주관 없는 객관도 객관 없는 주관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은, 관념 없는 물질도 물질 없는 관념도 있을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한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은 아베나리우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어느 철학자와 보통사람의 대화를 소개한다.
보통사람 : 사물이 따로 있어야 감각과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요? 철학자 : 사물이 당신의 감각과 사고를 떠나서, 또 감각과 사고를 통하지 않고도 당신 앞에 나타나겠는가?... 보통사람 :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맞군요.
레닌은 이 대화에서 보통사람을 현혹하는 '철학자'가 독일 관념론자 피히테라고 밝히고 아베나리우스가 유물론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고발한다. 진짜로 유물론을 인정하려면 "객관 없는 주관은 없지만, 주관 없는 객관은 있다"고 해야 한다. 레닌은 아베나리우스가 피히테처럼 '주관 없는 객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관념론자라고 규정한다. 도대체 레닌은 무슨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자신 만만하고 무자비하게 경험비판론자들을 몰아붙이는 걸까? 레닌의 대안은 두 가지, 유물론과 반영론이다. 첫째, 유물론이란 엥겔스의 말을 빌려 정리하면 이렇다. "감각 기관으로 알 수 있는 물질 세계,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세계가 유일한 현실 세계요, 우리의 감각과 사고는 아무리 초감각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뇌, 즉 물질적 신체 기관의 산물일 뿐이다. 물질이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관념이야말로 물질의 최고 산물이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이다." 둘째, 반영론은 이런 유물론을 바탕으로 삼는 인식론이다. 반영론이란 마치 사진기가 사물을 촬영하듯 주관이 감각과 사유를 통해 주관 외부에 독립하여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베끼고 복사한다는 주장이다. 주관이 대상이나 객관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니까 우리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레닌은 이런 반영론에 입각하여 우리가 얻은 인식의 주관이 미리 가지고 있는 관념, 범주 같은 사고 틀로 조작된 주관적인 것이며 우리가 세계를 아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인식론을 비판한다.
과학성과 편들기
이제 레닌의 철학을 평가할 차례다. 그런데 어떤 철학적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철학에서는 논리적 방법을 자주 쓴다. 일상 대화에서도 우리는 말싸움을 할 때 상대의 말을 잘 듣고 그 말 속에 서로 어긋나는 내용이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데 이것이 바로 논리적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 다른 평가방법을 써 보자, 하나는 과학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실천적 방법이다.
유물론은 과학적인 이론일까? 현대 과학에 따르면 '본다'는 것은 뇌의 일이다. 보는 과정에서 눈이 받아들인 수많은 자투리 정보를 일관성 있게 재구성하는 것은 뇌다. 뇌는 대상이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어느 것이 대상이고 어느 것이 배경인지, 대상이 움직이는지, 어느 것이 대상이고 어느 것이 배경인지, 대상이 움직이는지 우리 머리가 움직이는지를 재빨리 판단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은 아직도 감각이 노의 기능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이런 맥락에서 유물론은 과학적 이론이다. 그런데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다툰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물질은 사라졌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느냐는 점이다. " 물질은 사라졌다"는 주장은 19세기 중반 열역학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이 확립되고 19세기 후반 전자기파에 관한 장(場)이론이 발달하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 17세기 뉴턴 과학이 성공한 때부터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인 원자론 또는 입자론이 의심을 받았고,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질을 가진 물질 입자 대신 공간상에 퍼져 있는 성질을 가진 장을 근본 실체로 보는 철학자들이 나타났다.
경험비판론은 19세기 말 원자 내부에서 발견된 전자를 근거로 그때까지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의 정체가 전기 에너지로 밝혀졌으며 따라서 원자는 비물질화하고 "물질은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전자의 발견으로 사라진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 때까지 우리가 물질에 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 뒤 소련과 동유럽의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레닌의 이 주장을 물질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끝이 없다는 뜻에서 '물질의 무진성'이라 이름 붙이고 이 주장을 과학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닌의 유물론에 대한 과학적 평가는 주로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70여 년 동안 노력한 소련 과학철학자들의 몫이었다. 물론 이들은 레닌의 유물론이 과학적으로 틀리다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단순히 정치적 의도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이들의 노력이 너무 진지했다. 한편 서방 세계에서도 편대 과학이 유물론과 관념론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튼 논란거리였다. 이미 1930년대 중반에 물리학계의 두 거물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각각 유물론과 관념론의 입장에서 매우 치열하고 전문적인 철학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물리학적 실재론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실천적 방법으로 레닌의 유물론을 평가해 보자. 이 유물론이 옳다는 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실천의 검증을 받았지만 오늘날 소련이 붕괴한 사실은 결국 이 유물론이 그르다는 걸 증명한 건 아닐까? 그러나 레닌의 유물론을 실천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유물론이 지향한 사회가 실현되었고 또 건강하게 유지되었는가를 따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이 유물론의 실천적 의미부터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철학의 실천적 의미는 한마디로 '편들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말로는 누구에게나 옳은 주장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로 지배 계급을 편드는 주장을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철학을 남겼지만 당시의 노예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었고 오히려 노예제가 지속되는 데 이바지했다. 마르크스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 세상에서는 철학도 편들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그렇다면 자기는 차라리 피지배 계급을 편들겠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 편들기 정신을 이어 받았고 그가 편든 사람도 바로 노동자들이었다. 레닌 유물론의 핵심이 이런 정치적 편들기와 혁명적 실천성이었기에 러시아 혁명기에 이 유물론이 살아 움직일 수 있었고 아직도 생존력이 남아 있다고 평가한 대표적인 인물은 루카치, 알튀세들이다. 우리가 레닌의 유물론을 실천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좀더 지켜보아야 한다. 비록 소련은 망했지만 노동자들은 아직 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며 그 시대의 과학과 현실을 부모로 삼아 태어난다. 오늘날 과학과 현실은 아직도 유물론과 관념론 가운데 어느 한쪽 손을 번쩍 들어주지 않는 듯하다. 물론 철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옳은 진리를 밝힌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도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다. 그러나 레닌은 철학이 과학과 현실을 외면하면 쓸모 없거나 해로운 것이 된다고 보았기에 과학의 내용과 일치하고 노동자 계급을 편든다고 생각한 유물론을 내 놓았다. 과연 이 유물론이 과학의 내용과 진짜로 일치하고 노동자 계급을 진짜로 편든 철학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과학성과 편들기야말로 우리가 레닌의 책을 오늘 다시 읽으면서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할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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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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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스튜던트 파워의 요인들
학생 문제는 세계적인 과제인 것 같다. 오늘날 학생 문제로 골치 앓지 않는 나라는 많지 않으니 말이다. 작년만 해도 서독과 프랑스 등지에서 대규모의 학생 소요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산발적이지만 150여 개 대학에서 치열한 학생 소란을 겪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학생 폭동이 계속되면서 드디어는 이를 단속하는 학교법이 생겨 법석을 피우고 있다. 이밖에 유럽의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남미의 브라질, 아르헨티나, 심지어는 공산 국가인 유고, 체코, 폴란드에서도 학생 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개헌 반대"라는 이슈를 내걸며 학생들이 데모를 벌여 대부분 휴교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움직임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이것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이 학생 소요에 대한 여론이나 의견은 어떠한가. 물론 각 나라마다 또 각 학교마다 특수성이 다르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일괄적으로 생각해 보자. 학생 소요에 가담하고 있는 학생은 물론 일부 학생들이다. 우리 나라에서 매일 보도되는 데모 학생의 수효는 몇백 명 몇십 명으로 되어 있다. 야단스러운 미국의 학생 소요도 약 10%의 학생만이 가담하고 있는 형편이며, 이들을 이끄는 선두는 불과 2%의 학생이라고 한다. 일부 학생들이 떠들어대는 것이라 하지만, 이 때문에 대학 운영이 마비되고 사회적 혼란까지 가져오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학생 소요의 원인이나 이들의 처리 문제를 생각할 때, 학생 소요에서 주동역할하는 선봉 학생들과, 이들에 동조하는 일반 참가 학생들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먼저 주동 학생들 개별적인 성격적 결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특정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를 절대시하는 광신도인 경우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 스스로의 심적 불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이와 같은 광신도가 되는 수가 있다. 어떤 학생들은 지나칠 정도로 반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공격심과 반항 의식으로 뭉쳐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이같은 경향도 자라나는 환경에 불만과 억압이 많을 때 형성된다. 또 이들 주동 학생 중 일부분은 정치적으로 극렬한데, 이들이 외부 정치 세력의 조종을 받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 주동 인물들을 중심으로 문제를 다룰 때는 문제의 원인과 처리가 단순한 개인 사례 연구에 그칠 가능성이 짙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학생 소요의 원인이나 처리를 문제삼는 데 단순한 참가자인 일반 학생들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첫째로 현대의 젊은이나 학생들의 특징을 문제삼을 때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이들이 기성 세대와 단절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미국의 학생연합회의 회장을 지낸 슈바르츠는 자기들 세대를 "as the first post-war, post-depression, post-television, post-technology, post-bomb, post-space generation"으로 특징짓는다. 즉 이차대전 이후에 태어나 전쟁을 모르며 그 무서운 불경기도 겪지 않았다는 것, 텔레비전 문화 속에서 고도로 발달된 기술과 풍요한 생산의 덕택으로 부족함 없이 여유 있는 생활을 해 왔다는 것, 또 핵폭탄 제조와 우주 계획의 경쟁이 치열한 현대에서만 살아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한 근심 따위는 해보지 않고 자라나 성인이 되었다. 현재의 풍요한 생활 조건은 영구적으로 확보되어 변할 수 없는 데, 이것을 얻기 위해 애써 일하지 않아도 으례 주어지는 당연한 조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같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불완전한 사회제도, 이해할 수없는 국제 분쟁, 인종 차별, 폭력 등등은 존재한다. 더욱이 기성 세대에도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해 확고한 가치 체계가 없다. 그리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데도 뚜렷한 방향과 일정한 가치관을 제시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리즈만(미국의 문화평론가)의 말처럼 50년대 이후 성인들은 어린이에게 이끌려 산다. 우리 사회에서도 도시에서는 자녀들에게 이끌려 왕성한 소비 풍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이렇듯 의, 식, 주의 풍요한 생활 속에서 확고한 가치 체계를 물려받지 못하고 자란 이들 젊은이들의 눈에는 현실 사회의 불합리성, 불완전성이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많이 지적되고 있는 요인은 대학의 변질이다. 이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이란 속세에서 떨어져 학문적 정예 분자들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특수 지대였다. 그 당시 대학생의 이미지는 굉장한 수재이든가, 아니면 상당한 자산가의 자녀라는 점에서 촉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 스스로도 이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었다. 전후 대학은 급격하게 팽창하여 거대한 기구로 발전되었고, 대학생의 수도 굉장하게 불어났다. 우리 나라는 대학 팽창의 억제 정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에 2만 미만이었는데 1969년에는 13만에 가까운 대학생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도 1948년에 250만이었는데 1969년에는 13만에 가까운 대학생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도 1948년에 250만이었는데 1969년에는 690만이며, 내년쯤엔 780만이 되리라고 한다. 이같은 학생 수의 팽창에 따라 교수도 변질되어 갔다. 수입은 신통치 않고 저하된 학생 자질에 흥미 잃어 오로지 연구 활동에만 몰두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는 연구에 몰입함으로써 수입도 좋아지고 진급도 빠르며 명성도 올라간다. 그러나 학생들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소원해지니 학생들은 자긍심도 없어진 데다가 교수로부터의 소외감까지 겹쳐져 자기의 존재 의의를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심한 욕구 불만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현대 조직 사회에서의 개인의 비인간화,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개인적 분노를 폭력적 반항으로라도 터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셋째로 학생 소요의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매스콤의 발달이다. TV와 라디오의 보급으로 오늘날 전세계의 모든 사건은 동시적이며 집단적으로 보도되므로 온 세계가 한꺼번에 어떤 문제를 받아들이고 이를 토의하며 같이 해결하게 되었다. 매스콤의 발달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너무 벅차고 직접적인 자극을 주고 있다. 이들 자극 중에는 폭력 행사가 많이 보이는데, 이들 폭력 행사는 그것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이므로 젊은이들에게는 충격적인 인상을 주며 스스로 사회 참여의 긴박감을 느끼게도 한다. 반면에 거대한 조직 사회 앞에서 그들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심적 상황에서 기성 체계에 대하나 공격만이 스스로의 주체성과 존재 의의를 찾는 유일한 방편이 된다고 느낀다.
넷째로 학생들의 폭력 행위는 현대의 사회 체제가 이들 젊은이에게 희망, 이상, 의욕을 북돋워 주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소비 사회에서는 생산품의 소비 실적이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가치를 등급 지어 주며, 인격이니 자유니 봉사니 또는 의미 있는 생활이나 개인의 존엄성, 사랑 등등은 경쟁에 낙후된 인간들의 합리화 내지 퇴행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회 속에서 지각 있고 세상 물정을 알게 되는 젊은이들은 현실 사회에 대한 혐오와 저항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인문 과학, 사회 과학 계통의 학생들에게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드골(프랑스의 정치가)도 "기계적인 사회, 현대의 소비 사회는 학생들이 요구하는 것, 즉 이상, 희망, 의욕을 그들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런 이상, 의욕, 희망을 학생들이 참여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섯째로는 사회의 변질과 대학 사명의 변화에 관계되는 것인데, 과거식의 학구풍의 고수는 학생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의 대학은 학문 탐구가 주목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다수의 고등 기술자가 필요하게 되어 대학에 이들의 공급을 요구하고 있다. 산업 사회의 기술자 공급 요구가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교수의 완고한 아카데미즘에 반발하게 하여 파괴를 일삼고, 교과 과정에 학생의 결정권까지 주장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학생들이 보다 더 값싸게 산업 사회에 적응하여 구세대의 까다롭고 힘든 대학 체제를 바꾸는 데 앞장선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는 학생 소요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을 생각하였다. 이제 학생 소요의 형태와 대책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학생들은 현실 개혁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주장한다. 평화적인 방식과 폭력적인 방식이 그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의 여부는 학생 소요를 지도하는 쪽의 성격과 당국의 대책에 따라 달라진다. 지도부가 극렬할 때는 으례 폭력화하고, 온건파가 지도할 때는 평화적 개혁의 형식을 취한다. 그러므로 당국은 사태를 파악해서 소수의 지도부와 일반 학생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고 지도부들끼리만 떠들어대게 하면, 학생 소요는 폭력화되지 않고 평화적으로 수습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당국이 부질없이 자극적으로 대처하고 처벌해서 어떤 이슈를 만들어 주면, 일반 학생들이 지도부에 동조하게 되어 소요는 확대되기 마련이다. 소요 집단이 커지면 많은 인원수를 발판으로 지도부는 여러 가지 요구를 내세워 당국과 흥정하려 든다. 이때 학생 동조자가 많을수록, 지도부의 공격 성향이 강할수록 학생들은 어려운 요구를 내놓게 된다. 메케이슈(미국의 사회 심리학자)는 당국이 학생 소요를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방안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학생들이 문제삼고 떠들어댈 수 있는 이슈를 되도록이면 조심스럽게 고려해서 미연에 막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학교 내의 시설, 제도, 운영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슈가 반드시 학교 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체제의 문제는 학교 당국자로서는 어찌할 수 없으므로 이같은 노력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둘째로는 일단 학생 소요가 발생했을 때 당국은 초기에 어떤 강경책이라도 씀으로써 일반 학생들이 흥분하게 하고 지도부에 동정하는 과정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한 처벌을 하거나 경찰을 끌어들여 사태 수습할 때 일반 학생들은 지도부에 합세해서 크게 폭동화 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로는 학생들의 불평이나 요구를 미리 알아차려 그 일부라도 충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학생들의 합리적인 요구가 어느 정도라고 충족되면 일반 학생들이 지도부에 합류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제까지 학생 소요가 있을 때 이를 미리 예방하거나 최소한의 희생으로 이를 수습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건을 그 당장의 미봉책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킬 때, 총장, 학장, 교수, 사회 인사들은 입모아 합리적 설득을 통한 개선을 추구하도록 권장한다. 실로 이 합리적 설득을 통해 결론 내리고 일 처리를 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합리적 설득을 통한 상호 토론으로 피차에 서로 이로운 결론에 도달하려면, 한 가지 가정 위에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서로 이해하고 고집을 버리는 애정 관계에 있을 때에만 토론과 합리적 설득은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 오늘날 선진국의 발달한 민주 제도 속에서도 이 기본 가정인 상호 애정 관계가 결핍될 때는 완벽한 제도라 해도 어느 파나 어느 계층의 자기 중심적 추구에 말려들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실로 학생 소요의 근본적 원인도 이러한 현실에 직면해 학생들의 합리적 설득을 통한 개량 의욕이 벽에 부딪치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찍이 프롬은 본래의 참된 인간은 생산적으로 세계와 관련 맺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참된 인간은 이 세계를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또는 이성과 애정을 파악하고 이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힘으로 이 세상의 표면을 꿰뚫고 본질을 파악하며 사랑의 힘으로 타인과의 벽을 뚫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 생산적인 업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고를 아무리 강조해도 생산적인 애정이 없다면, 그 이성은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아론(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은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개인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며, 생산이나 소비 자체가 생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의 항거는 이를테면 형이상학적인데, 이는 초월적 신앙의 상실로 인해 아무런 궁극적 목표도 없고 지혜의 가르침도 없이 보다 많은 지식과 보다 많은 권력을향해 미친 듯이 치달리고 있는 현대 문명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 학생 소요의 근본 요인은 앞에서도 자주 지적되었듯이 주체성의 상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천분을 깨닫고 자기의 현실 조건을 잘 인식해 참된 자기의 소임과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할 때 보람을 느낀다. 이같이 보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주체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학생들이 이같은 자기 실현적 존재로서의 의의에 관해 교육받는다기보다는, 자신을 일정한 틀의 부분품 아니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여기게끔 교육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이성적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기성 체제를 파괴해야 한다는 공격적 행동으로서만 주체성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선진 사회의 학생 소요의 근본 원인이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 존재의 상실이라고 볼 때, 애정적인 인간 관계와 인생의 의미를 확립 또는 회복시켜 주는 문제는 학생 세력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는지.
"196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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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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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어떻게
가족들은 완고한 할아버지를 헝가리로부터 미국으로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딸의 가족과 함께 뉴욕에 머물러 있었다. 할아버지는 뉴욕과 뉴욕이 제공하는 모든 것에 홀딱 반해 버렸다. 하루는 손자 윤켈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센트럴 파크의 동물원에 갔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 할아버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하이에나가 갇혀 있는 우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윤켈아, 나는 고국에서는 웃고 있는 동물을 본 적이 없단다." 윤켈은 근처에 서 있던 안내원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나의 할아버지는 최근에 유럽에서 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는 웃는 하이에나가 없다고 하십니다. 할아버지에게 전해 드리도록 설명을 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안내원이 말했다. "네, 그놈은 하루에 한 번 먹이를 먹습니다." 윤켈은 할아버지에게 헝가리 말로 통역을 했다. "그것은 하루에 한 번 먹이를 먹습니다." 안내원이 계속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합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 목욕을 합니다." 노인은 주의 깊게 경청했다. 안내원이 덧붙였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번 짝을 짓습니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번 짝을 짓습니다." 노인은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는 하루에 한 번 먹이를 먹고, 일 주일에 한 번 목욕을 하는군. 그렇지만 그것은 일 년에 불과 한 번밖에 짝을 짓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가 있을까?"
- 이 할아버지는 늙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유년기에 고착되어 있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성적이다. 그는 하이에나가 일 년에 단 한 번밖에 짝을 짓지 못하는데 어떻게 웃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을 초월하는 축복의 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식 이외의 것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화스러운 집이나 차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닌 것에도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 속에 갇혀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옥이다.
당신이
핀켈스타인이란 사람이 한 세일즈맨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글쎄, 난 당신의 달걀을 사고 싶지 않아요. 내 호텔이 완전히 잿더미가 된다 하더라도 난 당신의 달걀을 사지 않겠소. 그리고 내 아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의 달걀을 사지 않겠소. 그리고 내 아이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사지 않을 거요." 그 달걀 상인은 논쟁의 핵심을 찔렀다. "만일 당신이 장님이 된다면 달걀을 한 줄 사 주시겠습니까?" 핀켈스타인은 경고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빼시오."
- 현실이나 삶의 진실을 피할 수는 없다. 만일 죽음이 실존한다면, 그것을 회피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가 진실을 빨리 직시하면 할수록 더 좋을 것이다. 왜 그대는 죽음과 위험에 대해서 항상 자신을 제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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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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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2. 못 다 피고 시든 꽃 - 백화제방, 백가쟁명(1956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0년 / 6, 25 동란 발발 1951년 /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2년 / 발췌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선 1953년 /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조인
1957년 1차 5개년계획이 끝났을 무렵 중국의 경제조건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임금은 높아졌으며 실업자는 줄었다. 이 상황에서 모택동은 57년 2월 (인민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중국에 건설된 사회주의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의견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사회주의 사회에는 적과의 모순이 있으며 인민 내부의 자체모순이 있다는 것이고, 두 종류의 모순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민 내부의 모순을 잘못 처리하게 되면 모순이 격화되어 적대적인 모순으로 발전하여 이러한 생각은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소련, 폴란드, 헝가리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산당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가 안고있는 모순점들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민 내부에서는 단결과 비판을 통한 새로운 단결을, 과학과 문화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가이익, 집단이익, 개인이익을 아울러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7년 4월 모택동은 상해에서 (당과 지식인의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 당과 비당원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민주적인 여러 당파 없이는 안된다 ... 민주적인 여러 당파없이는 안된다 ... 민주적인 사람들을 타도하려 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에 반대하기 위해 궐기하게 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하다. 백화제방과 공산당의 기반이 잡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은 견뎌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남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식인들에게는 당에 대한 비판을 권유했다. 지식인들은 그동안 반대의견을 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권유가 있게 되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당원들이 전분기관에가 실권을 쥐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당에 가해졌으며, 대학에서는 당 위원회가 대학을 장악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민주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인 당파들이 10여만 명 규모의 정치적 조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당원 가운데서 이들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공산당의 지베권을 비판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민주 제당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교통부장 장백균 등은 공산당의 지도권 자체를 부인하고 신문의 자유 및 양당제 아래의 정당정치적인 체제로의 변화가지도 주장하고 자섰다. 많은 수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이러한 견해에 동조했다.
공산당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비판이 제기되자 57년 6월부터 반대세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른바 '반우파 투쟁'이라는 것이다. 공산다의 지도권을 부정하거나 비판을 가한 사람들은 부르주아로 지목되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는 당의 지도권에 도전하는 부르주아우파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자는 주장의 글을 실었다. 그후 1년여에 걸쳐 우파에 대한 총공격이 행해졌다. 58년 7월까지 전당원과 공산주의 청년단을 동원하여 우파에 대한 철저한 공격이 진행되었다. 국무원 고위관직에 있던 장백균과 자융기는 그들의 대표적인 표적이었다. 여류시인 정령 등 많은 믄예인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중앙당의 고위간부, 당원작가, 예술가 등 7천여 명이 우파로 지목되어 당에서 쫒겨나 노동개조에 보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당의 말만 곧이 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비판에 나섰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직성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심지어는 모택동이 우파는 전인구의 5% 정도일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 각 직장에서 무턱대고 5% 정도의 인원을 찍어 추방한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등소평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970년대 다시 복권되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 반우파투쟁 이후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아지면 중앙당이 행하는 정책을 무조건 따르게 되어 중국의 발전을 늦추는 걸림돌이 되었다. 반우파투쟁은 공산당의 경직성이 강화되는 것을 잘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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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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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不可失(시불가실) 時(때 시) 不(아닐 불) 可(옳을 가) 失(잃을 실)
상서(尙書) 태서(泰誓)편은 주(周)나라 서백후의 아들인 발(發)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함에 임하여 군사들을 모아 놓고 훈시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소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돌아가신 아버지 문왕의 명을 받았으니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큰 땅에도 제사를 지냈으며, 그대 무리들을 거느리고 하늘의 벌하심을 이루려는 것이오. 하늘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니,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그대로 따르시오. 그대들은 바라건대 나 한 사람을 도와 영원히 온 세상을 맑게 하시오(爾尙弼予一人, 永淸四海). 때가 되었으니 잃어서는 아니 되오(時哉弗可失)! 기원전 222년, 서백후 문왕(文王)의 아들인 발(發)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중국 땅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주나라 무왕(武王)인 것이다.
時不可失(Must not lose the opportunity) 이란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는 뜻이며, 물실호기(勿失好機) 와 비슷한 표현이다. 역사적으로 부(富)와 명예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기회를 놓치지 않은 몇몇 사람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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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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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파리의 비키니 수영복 대회
수영복이 하나의 특별한 의상으로 탄생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그때까지 수영이나 물놀이는 그다지 인기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수영을 할 때는 내복이나 알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수영이 환영받게 되었고 수영복의 필요성이 생겨났을까? 1800년대 유럽의 의사들은 '마음의 우울함'을 고치는 레크리에이션으로서 수영이 효과적이라며 권유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우울함'이라는 말에는 상사병 같은 한때의 심심풀이부터 결핵성 수막염처럼 죽음이 확실한 증세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고치는 것이 광수, 샘물, 바닷물 등의 '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몇 세기에 걸쳐 온몸을 물에 적시는 일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럽인이 몇 천 명씩 호수나 시냇가나 해변을 돌아다니면서 흠뻑 젖어 물놀이를 하게 되었다. 이 수요에 발맞춰 등장한 수영복은 외출복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예를 들어 여성용 수영복을 보면 천은 플란넬이나 알파카 또는 서지 등으로 몸에 딱 맞는 정도였으며, 하이 넥 칼라에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 무릎까지 내려가는 스커트 밑으로 블루머, 검은 스타킹, 마포로 만든 낮은 운동화를 신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두터운 천으로 만들어진 수영복이 물에 젖으면 입고 있는 사람 자신의 몸무게만큼 무거워져서 익사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의 사고 사망자 기록에 따르면 썰물의 파도 때문에 익사한 해수욕객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번거로움이나 위험성 면에서는 남성의 수영복도 여성의 수영복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나중에 나온 좀더 가벼운 '수영용' 수영복과 비교하면 초기의 수영복은 실로 '목욕용' 수영복인 셈이었다.
1880년 무렵부터 여성들은 '이동 편의 오두막' 덕택에 해수욕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트랩과 탈의실이 달린 이 진기한 고안물에는 해변에서 얕은 여울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가 달려 있다. 여성들은 이 오두막 안에서 드레스를 벗고 목 부분을 끈으로 조이게 되어 있는 긴 플란넬 의상을 입고 트랩으로부터 바다로 내려간다. 게다가 '모디스티푸드(신중함을 위한 햇빛 가리개)'라고 부른 차양막이 달려 있어서 해변에 있는 남성들의 눈으로부터 여성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이동 편의 오두막에는 '디퍼'라는 여성 감시인이 있어서 어슬렁거리는 남성들을 내쫓았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얼마 전 몸에 딱 맞는 원피스식 수영복이 확산된다. 하지만 아직은 소매가 달려 있고 길이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여성용 수영복에는 치마가 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덴마크계 미국인인 칼 얀센이 직물 기술을 획기적으로 개량함으로써 대대적인 수영복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83년에 덴마크의 오르후스에서 태어난 얀센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13년에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편물 제작소의 공동 경영자가 된다. 이 회사는 울 스웨터나 양말, 챙이 없는 모자 같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1915년에 얀센은 편물기를 사용하여 신축성이 뛰어나며 몸에 딱 맞고 가벼운 울 스웨터를 만들려고 시도하여 신축적인 리브 짜기를 고안한다. 이 울 니트는 스웨터 생산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틀랜드 보트 팀의 한 친구가 얀센에게 더욱 '탄력성'이 있는 경기용 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몸에 딱 맞는 리브 짜기로 만든 얀센의 신축적인 옷은 곧이어 포틀랜드 보트 팀 전원이 입게 되었다. 포틀랜드 사는 회사 이름을 얀센 편물 제작소로 바꾸었고 슬로건을 내건다. "목욕을 수영으로 바꾼 수영복!"
1930년대에 들어서자 수영복은 노출 부분이 많아진다. 여성 수영복은 어깨끈이 가늘고 등이 없는 디자인이 되었다가 곧이어 홀더 넥의 윗부분과 팬티로 나누어진 투피스식 수영복으로 바뀐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이 비키니다. 이 이름 때문에 비키니 패션은 불안정한 시대의 도래와 영원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로 알려진 태평양의 마샬 제도 해역에서 원폭을 투하했고 평화시의 핵실험을 시작했다. 원폭은 그보다 1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루이 레아르라는 디자이너가 지극히 작은 면적의 천을 사용한 대담한 투피스 수영복을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수영복에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았다. 신문은 온통 원폭 투하에 대한 기사로 메꾸어져 있었다. 레아르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고 그 디자인의 위력도 폭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 화제의 중심이었던 '비키니'를 그 이름으로 삼았다. 원폭 투하 4일 뒤인 7월 5일, 레아르의 톱 모델인 미슐란 베르나르디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고 파리의 자동차 도로를 퍼레이드 한다. 1946년은 수영복이 원폭 못지 않게 숱한 논쟁과 관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킨 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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