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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4호
2012.1.7 (음 12.14)/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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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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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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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책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은 분명히 생활 가운데 부질없는 야심과 쾌락의 추구에만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한데, 그 세계가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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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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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버스 대절해서 행선지로
봄만큼 여행에 대한 충동으로 들뜨는 계절도 없다. '방랑과 변화를 사랑하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한 바그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속살거리는 햇살이 그만큼 유혹적이다. 목적과 행선지는 달라도 봄이 꽃을 피우듯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활력을 되찾는다. 여행이 주는 선물인 셈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일단 목적지를 정해야 한다. 이를 흔히 '행선지(行先地)'라는 말로 표현해 "철쭉이 한창인 지리산 바래봉으로 갈지, 녹차의 향이 짙어 가는 보성으로 갈지 행선지를 정하느라 고민이다"와 같이 사용한다. 하지만 '행선지'는 '목적지를 향해 가다'는 뜻의 '행선(行先.ゆきさき)'에 '지(地)'가 붙은 일본식 한자어로 '가는 곳' '갈 곳'으로 바꿔 쓰는 게 좋다. 갈 데가 결정되면 교통수단이 필요한데 이때도 유의해야 할 말이 있다. "육로로 울릉도를 돌아보려면 택시를 대절하는 게 가장 편하다" "올봄이 끝나기 전에 관광버스를 대절해 마을 사람 모두 꽃구경 가기로 했다"처럼 '대절(貸切.かしきり)'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이 역시 일본말의 잔재다. '계약에 의해 일정 기간 동안 그 사람에게만 빌려 줘 다른 사람의 사용을 금하는 일'이라는 '대절'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로는 '전세(專貰)'가 있다. "관광버스를 대절하다"는 "관광버스를 전세 내다", "대절 버스로 가다"는 "전세 버스로 가다", "전세 버스를 대절하다"는 "전세 버스를 이용하다" 등으로 바꿔 쓰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말 바루기] 구구히, 구구이
"사실밖에 말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부모는 크게 충격을 받고 아이를 다그치려 한다. 그럴 때 아이는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구구히'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기 십상이다"처럼 '구구히'를 써야 하는 경우 '구구이'와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구구히'와 '구구이'는 그 쓰임이 다르다. '구구히'는 '구구하다'에서 나온 부사로 "소문이 구구히 돌았다" "학설이 구구히 있다"에서와 같이 '각각 다르다', "변명을 구구히 늘어놓았다" "사정 이야기를 구구히 털어놓았다"에서처럼 '잘고 많아서 일일이 언급하기가 구차스럽다'는 의미로 쓰인다. "목숨을 구구히 보전하느니 죽는 게 낫다"에서와 같이 '떳떳하지 못하고 졸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구이'는 '한 구 한 구마다'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편지는 구구이 정성이 담겼다" "비통한 심정이 구구이 새겨 있다"와 같이 쓰인다. '구구이'에서의 '구'는 '둘 이상의 단어가 모여 문장의 일부분을 이루는 토막'인 구(句)를 의미하므로, '구구절절이'와 비슷한 쓰임새라 보면 된다.
"아이가 '구구히'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구구이' 옳은 말만 하기를 원한다면 무조건 다그칠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어떤 심리에서 말을 둘러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처럼 '구구히'와 '구구이'를 구분해 사용하면 된다.
[우리말 바루기] 붙이다, 부치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품격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건물마다 난삽하게 매달린 간판을 정리하고 지저분한 현수막을 제거하거나 각종 표지판을 정비하는 등 지역 주민의 쾌적한 생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중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어떤 일을 작심하여 세차게 밀고 나가는 모양을 표현할 때 은유적으로 '걷어붙이다'란 말을 쓴다. 하지만 발음상의 이유인지 "옷 소매를 걷어부치는 버릇이 있어 금방 늘어나 버렸다" "회사를 살리고 사업장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사가 팔을 걷어부치기로 했다"처럼 '걷어부치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붙이다'는 '붙다'의 사동형으로 맞닿아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기본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걷어붙이다'의 경우 소매를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접어 올린 모양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주체의 마음가짐이나 자세까지 의미가 확장된 듯하다. '붙이다'와 '부치다' 중 어느 표현을 써야 할지 모호할 때는 '붙이다' 또는 '부치다'가 올 자리에 우선 '붙게 하다'는 말을 넣어보면 알 수 있다. 의미 전달이 되면 '붙이다'가 맞는 표현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대개 '부치다'가 맞는 표현이다. 가령 '힘에 붙이다'는 떨어지지 않도록 무언가를 갖다 붙인다는 의미가 아니므로 '부치다'를 써야 한다. 편지.회의 등도 '보내다' '넘기어 맡기다'는 뜻이므로 '편지를 부치다' '안건을 회의에 부치다' 등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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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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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들 - 심보선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殮)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사람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봐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아니어도 혁명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을까 어떤 의문들이 이 세계를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기에 아이들의 붉은 입술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끝없이 옹알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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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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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에서 - 유권재
안에 바람 부는가 들어가지 못하겠네
나는 달마의 초상이 벽에 앉아 굽어보는 햇살이 반쯤 점령한 거실에나 앉아 있겠네. 바람이 창을 두드리고, 그리하여 새가 날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세상 속을 헐렁한 동공을 열고 설렁설렁 들여다보겠네. 그 중에서 깨알 같은 사소함은 다 걸러내고도 무채색 연화지옥도쯤은 그려 볼 수 있겠으니
어떤가, 열꽃 만발한 세상, 같이 꽃구경이나 하시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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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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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기도 - 서정슬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개미를 한 마리 죽인 일이 있어요. 그 개미는 사람을 무는 놈이었어요. 팔다리를 따끔따끔 물길래 손가락으로 꼬옥 누른 거예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귀뚜라미 다리 하나 뗀 일이 있어요. 그놈은 방안을 운동장인 줄 알았나 봐요. 펄떡펄떡 뛰다가 앉아 있길래 가만히 뒷다리를 잡았더니 떨어졌어요.
그보다 훨씬 전, 아주 어릴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왜 이런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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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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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7장 우유론 - 때로는 빈둥빈둥 놀며 지낼 필요도 있음을 논한 장
1. 인간, 즉 유일하게 일하는 동물
인생의 향연은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 오직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식욕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요는 식욕이 당면한 문제이지 향연 그 자체는 아니다. 결국 인간 생활에 관해서 가장 난처한 문제는 인간은 일을 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가 하는 문제, 또 인간이 자신에게 과하고, 문명이 인간에게 과해 온 노동의 분량이 과연 타당한 분량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이나 두려움이나 구속이나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러한 것들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지금 나는 여기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창문 저쪽에 보이는 교회의 첨탑 주위를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고 있다. 그러나 비둘기는 점심에 먹을 것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비둘기의 점심보다는 내 점심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 또 내가 먹는 몇 가지 물건 중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노동대중의 노동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물건을 실어 나르며, 배달하고, 조제하는 등의 고도로 착잡한 조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짐승보다 먹을 것을 얻기가 힘든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 마리의 야수가 도회지 안에서 풀려나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을 구하려고 저렇게 아둥바둥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한다면 이 인간 사회에 대해서 깊은 회의와 곤혹을 느낄 것이다.
이 야수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은 모든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일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리라. 물레방앗간에서 일하는 소수의 연자매 끄는 말이나 물소를 제외하고는 가축조차도 일할 필요는 없다. 경찰견은 때때로 일이 있을 때에만 일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집을 지키기로 되어 있는 개라 할지라도 대개는 놀고 있으며, 화창한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 아침 시간에도 곧잘 잠을 자고 있다. 뽐내기를 잘하는 고양이는 생활을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몸이 날쌔게 태어났기 때문에 옆집 울타리 따위는 아랑곳 없이 가축이라는 자기의 신분도 잊어버리고 나다니고 싶은 곳은 어디나 나다닌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아둥바둥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류만이 우리 안에 갇혀 사육되고 있으면서도 먹을 것도 얻어먹지 못하고 문명과 복잡한 사회에 강요되어 일하고, 먹을 것을 위해 골치를 썩여야만 한다. 물론 인간 생활에도 좋은 점이 있기는 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지식의 기쁨, 이야기를 주고 받는 즐거움, 연극을 구경할 때 공상하는 재미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 생활은 너무나 복잡해져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활동의 90p가 먹는다는 문제 만으로 차지되어 있다고 하는 근본적 사실만은 여전히 확고부동한 것이다. 문명이란 주로 먹을 것을 찾는 일이고, 진보란 먹을 것을 얻기가 더욱 곤란해져 가는 일이다. 먹을 것을 얻는 일이 이처럼 곤란하게 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이 오늘날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위기는 인간 시회가 지나치게 문명화 되었다는 데에 있다. 먹을 것을 얻는 노동이 너무나도 격심해져서 그 때문에 노동을 하는 동안에 식욕을 잃어버리게 되는 데까지 문명이 와 있다는 데 위험이 있다. 그런데 마침내 그러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야수가 보건, 철학자가 보건, 그다지 고마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대도회를 내다보고, 잇대어 늘어선 집의 지붕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놀란다. 참으로 기가 막힌 광경이다. 두서넛의 급수탑이 솟아 있고 건축중인 어음 교환소의 두서너 개의 철근의 광고판 뒷면이 보이고, 그 속에 몇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아스팔트의 지붕과 벽돌 건물이 죽 이어져 있고, 모양이나 질서도 없이 네모진 것이며, 뾰죽한 것이며, 깎아 세운 듯한 것 등이 늘어서 있고, 빛이 바랜 더러운 굴뚝이나 빨랫줄이나 안테나의 교차된 선이 그 사이로 여기저기에 보인다. 거리 속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도 회색이나 아니면 퇴색한 붉은 벽돌집의 담이 죽 이어져 보인다. 조그마하고 컴컴한, 모두 다 같은 모양의 창문이 똑같은 줄을 지어 죽 늘어서 있고 반쯤 열린 창문은 그 절반이 커어튼에 가려 있다. 창틀에는 우유병이라도 놓여 있을 것이다. 그밖의 다른 곳에는 조그마한 싱싱한 꽃을 꽃병에 꽂아 놓아 두었을 것이다. 한 어린이가 개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지붕 계단 있는 데에 걸터 앉아서 아침마다 조금씩 햇볕을 쬔다. 다시 눈을 들어 바라보면 몇 마일이나 되는 저쪽에서 지붕은 줄을 지어 늘어서 있고 아득히 먼 저쪽 하늘에 보기 흉한 네모진 외곽을 나타내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급수탑도 있고 벽돌집도있다. 실로 인간은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한두 개의 컴컴한 창 뒤에서 어느 가족이나 어떻게 날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생활을 위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두서너 개의 창 뒤에서는 비둘기가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부부는 밤마다 잠자리로 들어가고,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면 아침 차를 마시고 남편은 거리로 나가서 가족을 위해 뾰족한 재주도 없이 빵을 구해 돌아다니고 아내는 죽어라 하고 열심히 끈기있게 일하며, 먼지를 털어내고 좁은 자기집을 말끔히 치운다. 4시나 5시경이 되면 문간 계단이 있는 데에 나가서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 사람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조금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한다. 이윽고 밤이 온다. 그러면 녹초가 되도록 지친 몸으로 또다시 잠자리에 들어간다. 이렇게 그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좀더 훌륭한 아파트에서 살며, 좀더 유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방이나 전등갓도 좀더 예술적이다. 모든 것이 보다 더 질서정연하고 깨끗하다! 방도 다소는 넓다. 그저 다소 넓을 뿐이다. 방 일곱 개 짜리 플랫(공동 주택에서 한 가족이 쓰는 같은 층 위에 한 세트의 방)을 세 얻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를 얻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생활이 보다 더 행복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은 돈 걱정이나 빛 걱정은 비교적 적기는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더욱 귀찮은 분규가 있고, 이혼이 있고,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바람둥이 남편도 많으며, 그 어떤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부부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행복이 어떠니 하는 문제는 전혀 이러한 훌륭한 아파트에 사는 남녀의 소질과 기분에 달려 있다. 실제로 유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하면 심한 노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런 사람들보다는 한층 더 권태를 느끼고 무료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동차도 있고 또 시골에는 별장도 있을 것이다. 오! 시골집,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인가! 그리고 보면 사람들이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우선 엄청난 돈벌이에 마음이 끌려서 도회지로 나가고 싶기 때문이며, 큰 돈을 번 다음에는 또다시 시골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도회지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거닐 때 미용원이나, 화원이나, 선박 회사가 있는 큰 거리의 뒤에는 약방, 식료품점, 철물점, 이발소, 세탁소, 대중 식당, 신문 잡지의 매점 등이 즐비해 있는 다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한 시간쯤 더 거닐어 보라. 만일 그것이 대도시라면 여러분은 암만 가도 똑같은 곳에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에는 거리의 모습이 차례로 비칠 뿐으로, 어디까지 가도 여전히 약방, 식료품점, 철물점, 이발소, 세탁소, 대중 식당, 신문 잡지의 매점 등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게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 곳에 온 것일까.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세탁소 사람은 이발소와 식당의 급사의 옷을 세탁하고, 식당의 급사는 세탁소 사람과 이발사의 식사를 나르고, 이발사는 세탁소 사람과 급사의 머리를 깎는다. 이것이 문명이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확실히 이들 세탁소 사람이나 이발사나 급사 가운데는 그 일생 동안에 그 일하는 장소에서 단 5리도 다른 곳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라는 오락이 하나 있다는 것이 그들게는 천만다행한 일이다. 스크린에는 새도 울고 울창하게 흔들리는 나무도 보인다. 터어키도, 이집트도, 히말라야도, 안데스도, 폭풍우도, 난파선도, 대관식도, 개미도, 송충이도, 사향쥐도, 도마뱀과 지네와의 싸움도, 언덕, 파도, 모래, 구름도 그리고 또 달까지도 모두 스크린 위에 나타난다! 오, 현명한 인류여, 무서우리만큼 현명한 인류여! 기가 차누나, 머리에 희끗희끗 흰 머리가 섞일 때까지 조금도 쉴새없이 꾸준히 먹기 위해 죽도록 일만 하고, 끝내 논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이 문명이야말로 참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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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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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2. 권력에의 의지 De Wille Zur Machl(1906) - 니체 Friedrich Wilhelm Nielzsche(1844-1900)
자유로운 정신의 반란 - 김재기(경성대학교 교수)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84년 10월 15일 독일 작센주 뢰켄에서 개신교 목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와 함께 외가로 옮겼다. 할머니와 두 이모 등 외가 식구들 특히 여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니체는 기억력이 뛰어나 '꼬마 목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지만 몸은 허약했다. 또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즉흥 연주를 하고 8세 때는 벌써 작곡을 하는 등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14세때 명문 고교에 진학했는데 딱딱한 학교 분위기와 낡은 도덕을 비웃으며 반항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셰익스피어, 괴테 등을 탐독했으며 18세 때 쓴 "운명과 역사"라는 글은 이미 그의 사상의 핵심이 될 만한 철학적 내용과 야망을 모여 준다. "어떤 강력한 의지로 세계의 과거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곧바로 자립적인 신의 대역에 오를 수 있을 것이며 세계사란 우리에게 꿈처럼 황홀한 무아지경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고교를 졸업한 니체는 1864년부터 본과 라이프치히에서 신학과 고전어학을 연구했다. 대학 시절 잠시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말년의 정신마비 증세가 이때 걸린 매독의 후유증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여자들을 경멸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망설이곤 했는데 이런 이중성은 어릴 때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받은 종교적 교육과 집안 분위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본능적 결벽증"이라고 부른 순수한 삶에 대한 열정을 끝내 버리지 못했기에 방탕한 생활을 곧 청산했다. 쇼펜하우어에 심취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를 우연히 사 읽고 3년 뒤 한 편지에서 "쇼펜하우어의 경이로운 선율이 내 가슴속 깊은 곳을 휘저어 놓은 1865년 가을의 며칠"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다. 물론 그는 나중에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평생 이어졌다.
25세 때 유명한 고전어 학자인 스승 리츨의 추천으로 박사 학위도 없이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가 된 니체는 가끔 근처 트립셴에 살던 바그너 부부를 방문했으며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를 흠모하여 나중에 그녀를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편두통, 치질, 가슴앓이, 류마티즘, 지독한 근시 같은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던 니체는 1870년 보불 전쟁이 나자 위생병으로 지원 종군했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1872년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써 바그너에게 바친 뒤 여러 저술을 발표했으나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1876년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축제 연주를 기획하자 니체는 새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거기서 바그너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 결별한다. 니체가 보기에 바그너는 그리스도와 아폴로를 숭배하고 기독교 게르만적(도덕 이성적) 예술을 추구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후원하던 군주를 위해 일하는 권력의 시녀로 전략하여 결국 독일과 서양의 몰락을 상징하는 화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 떄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아아 너도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너마저. 아. 너마저........ 정복당한 자여! " 이 때부터 니체는 초기의 낭만과 심미 경향에서 벗어나 독창적 사유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그 첫 성과가 1878~79년에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다. 이 책에서부터 그는 아리송한 경구와 잠언 형식으로 자기 사상을 펼쳐 나간다. 또 이 시기에 자연과학과 다윈의 진화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1879년 건강 때문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약간의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주로 지중해 연안과 알프스 등을 떠돌며 집필을 계속했고 1881년 여름 알프스의 실스 마리아 호숫가를 산책하던 중 "모든 것은 끓임없이 윤회한다"는 영감을 얻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영겁 회귀' 사상을 낳게 된다. 1882년에는 젊고 총명하며 자기를 숭배하던 21세의 미녀 루살로메와 결혼하려다 젊은 연인의 방해로 실패했으며 이때를 "이 겨울은 내 생애에서 최악이었다"고 술회했다. 1883년부터 "신은 죽었다"라는 경구로 유명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 2, 3부를 각각 10여 일 만에 완성했지만 이 책은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렸을 뿐이고 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천재성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했고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주변에서 그를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사람들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1888년 9월 토리노로 이사한 뒤 니체는 점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병세가 심해지는 가운데 5편의 마지막 저작, (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우상들의 황혼)(반(反)그리스도)(이 사람을 보라)를 썼다. 이 책들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경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가들은 단순히 '정신 병자의 넋두리'일 뿐이라고 혹평하기도 하지만, 일찍이 (서광)이라는 책에서 "새로운 사상의 길을 트고 사람들이 존중하던 관습이나 미신을 싹 쓸어 버린 것은 거의 어디서나 정신착란이었다"고 갈파한 니체의 말을 생각해 볼 때 그 속에는 전통이라는 사회의 억압에 대항하는 개인의 의, 자유로운 정신의 반란이 숨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1889년 들어 급속히 쇠약해진 니체는 1월 초순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져 행인들에 의해 집으로 옮겨졌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고 예나 대학병원으로 옮겨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니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습게도 그가 쓰러진 뒤였는데 1894년 덴마크의 유명한 문예비평가 브란데스가 니체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책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자 그의 이름은 유럽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니체는 어머니 곁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바이마르에 있는 누이의 간호를 받았으며 1900년 8월 25일 심장쇠약으로 사망했다. 니체가 죽은 뒤 방대한 양의 유고와 편지는 누이동생 부부의 손에 넘어갔다. 사실 니체 자신은 지독한 반(反)유태주의자인 매부를 아주 싫어했지만 결국 유고가 누이동생 부부에 의해 멋대로 왜곡되고 꾸며져 출판됨으로써 그의 저작은 오랫동안 반유태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게 악용되었다.
생성은 모두 무죄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사상 전체를 압축해 놓은 가장 중요한 저술이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된 저작이 아니라 누이동생이 니체 말년의 단편들을 모아 1906년에 편집한 것으로, 유고 간행을 맡은 누이동생의 왜곡과 조작 때문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니체가 이 저작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1882년 9월인데 그 때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내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내가 필생의 과업의 두려운 면모와 대면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 과업이란 영겁회귀에 대한 영감을 좀더 분명하게 다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1885년부터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했다. 이 저작에 "모든 가치의 전환을 위한 실험"이란 부제를 붙이고 1888년까지 여러 개의 초안을 마련했는데, 그 내용은 대개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대한 설명, 기존 가치에 대한 비판, 새로운 가치의 정립, 영겁 회귀에 대한 통찰을 담은 '초극의 철학'등이며 현재 나와 있는 (권력에의 의지)도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음은 물론이다. 모두 1, 067개의 단편, 우리 말 번역본으로 600쪽에 이르는 이 거대한 분량의 책 속에 담긴 사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간단히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생성은 무죄임을 밝히고 도든 도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길잡이를 제시하는 것"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니체가 보기에 세계의 본질은 권력을 추구하는 본능과 의지다. 여기서 권력이란 물론 정치 권력 같은 세속의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힘, 활력이다. 니체가 "삶은 권력에의 의지"이고 "이 세계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소모되는 게 아니라 변화하기만 하는 힘"이며, 또 "이 세계는 권력 의지다 ....... 그리고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또 여러분 자신도 이 권력에의 의지다"라고 강조할 때 이 수수께끼 같은 말들의 의미는 모두 똑같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물론 당시의 자연과학, 특히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이 나온 뒤 유럽에서는 인간의 삶과 사회, 역사까지도 생존 욕구나 본능적 충동, 생명력의 우월을 가지고 설명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니체는 이것을 무생물의 세계나 우주 전체에까지 적용하여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았던 것이다.
니체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먼저 2, 500년 동안 유럽 문명을 지배해 온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도덕, 정치 사상 들을 건강한 삶을 약화시키는 니힐리즘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니힐리즘은 문 앞에 서 있다. 모든 방문객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쁜 이 존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회적 빈곤 상태나 생리적 변질 또는 부패를 니힐리즘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빈곤은 정신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그 자체로는 결코 니힐리즘을 낳을 수 없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빈곤에 대해 전혀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특정한 해석, 즉 기독교 도덕적 해석 속에 니힐리즘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지금까지 절대자인 '신'의 보호막 아래서 우리의 이성으로 절대 진리와 가치를 알 수 있고 세계와 삶의 목적과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로 그 확신이 흔들림에 따라 거꾸로 이 세계 전체가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보는 병적 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진리나 가치,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이런 믿음은 허약한 인간들. "가축떼 같은 저급한 종자들"이 좋아하는 것일 뿐이며 그 믿음에 대한 반발인 니힐리즘도 실은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처럼 기만적인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정신적 상태를 이렇게 진단한 니체는 그 때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 종교, 도덕, 철학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신이 아닌 인간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설교함으로써, 삶의 원리에 비워 볼 때 멸망해야 마땅한 허약자들을 변호하는 기독교와 전통 도덕과 철학은 삶 그 자체를 부정하는 '노예의 도덕'이며 고귀하고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비천하고 왜소한 자들의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진리라는 이름의 두건을 쓴 경멸스러운 방탕아들"일 뿐이며 "철학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도덕군자들을 목매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새로운 가치는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그는 과학의 발전에 발 맞추어 인간의 인식 능력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절대 지식의 주춧돌을 찾으려 애쓴 근대 철학자들의 노력을 헛수고라고 빈정거린다 니체에 따르면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구별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므로 중요한 것은 오직 적나라한 삶 그 자체, 순수한 자연적 생성,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같은 것이 되풀이되는 영겁 회귀뿐이다. 최근 한 TV 광고에 나오는 "여자의 변신은 모두 무죄"라는 문구가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는 뜻이듯이, "모든 생성은 무죄"라는 니체의 말은 삶 자체를 위해서는 모든 게 정당화되므로 더 이상 객관적 진리나 도덕 따위는 필요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제 니체에게는 권력에의 의지 즉 강한 것을 추구하는 본능만 남고, 종래 미덕이 라고 여겨진 평등, 정의, 진리, 겸손, 동정심, 검소함, 인내심 등은 악덕이 되는 반면 강하고 우월하고 재능 있는 모든 것이 말뜻 그대로 덕이 된다. 한마디로 노예 근성에 반대되는 주인다움, 승리자의 속성이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찬미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새로운 가치 기준대로 살기 위해 '삶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방해하는 모든 것에 맞서 단호히 투쟁하여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을 것을 호소한다. "고통과 긴장과 상심의 시기에는 싸움을 택해야 한다. 싸움은 우리를 단련시키며 근육을 늠름하게 만든다." 그는 이런 삶을 '기독교적 삶'과 대비하여 '디오니소스적 삶'이라고 부르면서 세속의 행복을 거부하고 이 비극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강하고 고귀한 자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비극적 인간은 가장 가혹한 고뇌도 긍정한다. 그는 그 정도로 충분히 강하고 풍요로우며 신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운명도 부정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삶 때문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하고 가난하며 쇠락해 있기 떄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신은 삶의 저주이며 스스로를 이 삶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표시다...... 토막토막 잘린 디오니소스는 삶의 약속이다. 그것은 영원히 재생하고 파괴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사람들이 흔히 '자유'라고 부르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사실상 '권력에의 의지'며 이 의지는 영원히 생성하는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에서 '영겁 회귀'를 깨달음으로써 기존의 가치와 위계 질서를 초극하고 운명애를 터득한 인간을 '초인'이라 불렀는데 그 초인의 모습은 이제 쓸쓸한 철학자의 독백으로 재현된다. "독수리는 결코 무리지어 날지 않는다. 그런 건 참새나 찌르레기한테 맡기는 게 좋다 .... 높이 날아오르고 발톱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천재의 운명이다."
귀족적 관념론, 염세적 영웅주의
"언젠가 많은 것을 말해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속에 말 없이 쌓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 -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니체의 이 시구는 평생을 질병과 홀대 속에 고통받으며 살아야한 자신의 운명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 쌓인 생각들이 그의 표현대로 '쇠망치'와 '다이너마이트'가 되고 '새로운 복음'이 되어 번갯불처럼 사람들의 머리를 후려치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내 저서를 연구하기 위한 강좌가 개설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예언은 적중했다. 그가 죽자마자 그의 사상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으며 현대의 주요사상 가운데 니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왜 니체가 그렇게 중요한 사상가로 떠올랐는가?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들이 모두 그렇듯이 니체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극단적 주관주위와 비합리주의에 빠져 인종 차별과 전쟁을 옹호하고 민주주의와 진보적 사회운동을 반대한 반동 철학자라고 혹평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를 20세기 현대 사상의 천재적인 선구자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맞서는 평가가 나오게 된 것은 사실 니체 자신의 철학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이 양면성은 니체가 살던 시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니체가 살던 시대는 격동기였다. 유럽 전체로 보면 산업 혁명이 완료되고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로 넘어가 여러 나라들이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하는 시기 였으며, 후진국이던 니체의 조국 독일에서는 1848-49년의 시민 혁명이 실패한 뒤 위로부터의 개혁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통치 아래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 제국이 대중의 민주화 운동을 총칼로 탄압하면서 유럽 최고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시기였다. 또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시민 운동과 노동 운동이 발전함과 동시에 과학 지식의 진보와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기존의 모든 가치와 질서가 격렬하게 흔들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니체가 저술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한 시기(1872-88)가 비스마르크의 집권 시기(1871-90)와 같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니체는 물론 정치와 사회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저작과 사상 곳곳에는 시대의 상흔이 깊이 남아 있다. 당대의 많은 사상가처럼 니체도 자신의 시대를 "유럽 문명 전체가 위기에 빠진 시대"로 보았으며 그 근본 원인을 유럽 사람의 삶이 나약해졌다는 사실에서, 다시 나약함의 원인을 전통 도덕과 가치관에서 찾았다. 따라서 니체는 전통 도덕과 가치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혼란을 극복하고 위기에 빠진 문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말년의 자서전적 저작 (이 사람을 보라)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나는 여태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항변을 한다....... 지리가 수천 년 묵은 거짓과 투쟁하게 되면 우리는 여태껏 꿈도 꾸지 못한 충격과 지진의 흔들림과 상전벽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정치라는 개념은 완전히 허깨비 장난이 되어 버리고 낡은 사회의 권력구조는 공중에서 분해되고 말 것이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의 평범한 시민들의 속물 근성과 기회주의적 속성은 니체의 말마따나 "건강하고 활력 있는 삶의 몰락을 보여 주는 한 징후로서" 당연히 극복되어야 할 것이었다. 더구나 애당초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덕이나 이성적 논리, 과학 기술 등이 거꾸로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괴물로 둔갑해 버린 19세기말의 역설적 상황에서 "모든 가치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절대 진리와 가치에 대한 독단적 확신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철퇴를 던진 니체의 사상은 분명 선구적인 통찰력을 보여 준다. 그는 "삶의 목표를 세속의 행복과 안정"에 두고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순응하는 속물 군상들을 비판하면서 모든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삶의 활기를 찬미한다. 이런 니체의 생각은 20세기의 많은 사상, 특히 논리만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삶을 중시하는 실존주의, 이성 중심의 서양 문명 전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대 철학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신, 물질 세계, 역사 법칙, 보편적 욕망 등 어떤 궁극적 근원이나 중심을 가지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종래의 철학을 거부하고 철저한 상대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데 있다. 이렇게 되면 참과 거짓, 선과 악, 주관과 객관, 이성과 광기 등의 이분법적 구별이 무너지는데 바로 이 점을 한 발 앞서 강조했기 때문에 니체는 현대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니체에 따르면 이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자기만의 관점, 자기 고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미리 정해진 안전한 길을 따라가지 않는 이 과정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이 힘든 과정을 꿋꿋하게 견뎌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날카로운 통찰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해석하고 그 위기에 대처하는 니체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그는 시대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 사실 니체 시대에 나타난 위기의 징후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감에 따라 과거에 진보적 역할을 담당한 상층부의 시민 계급(부르주아지)이 더 이상 성장하는 대중 운동을 이끌고 가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시민 계급의 동요와 보수화가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으며 더구나 정상적인 시민 혁명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이뤄 내지 못한 독일의 부르주아지와 중간 계급은 그런 부정적 측면들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유럽 문명의 위기에 대한 니체의 진단은 날카롭긴 해도 과녁을 벗어난 화살과 같다. 또 이처럼 원인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니체의 사상은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평범한 사람들, 즉 수많은 근로 대중의 삶을 무시하고 역사의 발전을 무시하는 '귀족적 관념론'과 '염세적 영웅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니체의 철학은 인종주의자들이나 독일의 국수주의자들, 더 나아가서는 반동적인 나치즘과 파시즘에 이용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의 여동생이 그의 저작을 왜곡하여 소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철학 속에는 이미 이런 경향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그의 철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며 결함이다.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땀 흘리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노동에서 찾지 않고 개개인의 신비스러운 '삶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니체의 사상은 기존 가치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파괴적 부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는 무한히 해석할 수 있으며 다양한 해석이야말로 힘의 징후"라는 니체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보다 하 세대 앞선 마르크스가 이미 멋진 답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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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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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독서의 지도
대학생의 학업이나 생활 지도를 위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독서 지도의 문제다. 학업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양이나 성격의 발달을 위해서도 독서가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독서 지도를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나누어 보면, 그것은 독서의 내용 지도와 형식 지도이다. 우선 강의나 과외 활동을 통해 고전과 학술적 참고문헌을 읽혀 그 내용 파악을 더욱 충실하게 하도록 지도하는 분야가 있다. 또 하나는 독서의 기술을 형식면에서 지도하고 교정해 독서의 능률화를 기하는, 소위 독서 클리닉(교정 상담소)이나 학생 상담에서 문제삼는 분야다. 전자가 안내적인 집단적 독서 지도에 속한다면, 후자는 상담적인 개별적 독서 지도에 속한다. 대학의 학생 전체를 상대로 한 학생 독서지도위원회로 하여금 교양 도서의 추천이다. 읽는 방법의 교시 또는 독후감의 검토 등을 하게 한다든가, 학생들의 클럽 활동인 독서회, 윤독회, 연구 발표회 등을 맡아서 지도하는 것들이 전자의 내용이다. 반면에 학생 상담소나 독서 클리닉에서 이를 찾아오는 학생들의 독서 부진 문제를 상담하며 능률적인 독서 방식을 일러주는 것은 후자 즉 형식에서의 지도라 하겠다. 대학의 각 분야에 걸친 교수들로 구성된 학생독서지도위원회 같은 모임에서 학생들이 읽을 만한 교양 도서를 추천하거나 추천 도서를 읽혀 독후감 같은 것을 쓰게 해서 이를 읽고 지도해 줄 수도 있다. 또한 독서에 관해 학생들의 상담에 응해 읽을 책의 순서나 준비 과정을 지도할 수도 있으며, 명저 소개회 같은 모임을 통해 읽을 만한 책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한다든지 읽을 때의 주안점이나 비판적 관점을 가지게끔 지도해 나갈 수도 있다. 요즘은 여러 잡지사나 대학의 학부에서 교양을 위한 동서 고금의 양서들을 뽑아 읽기를 권장하고 있으며, 매월 한두 개씩 읽어 오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들은 그것이 비록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라 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읽기 전이나 읽은 후에 적당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같은 면에서도 학생독서지도위원회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학생독서지도위원회는 학생 전반에 걸친 교양 도서의 지도만이 아니라, 학생 클럽 활동 영역인 독서회들의 계획과 진행에도 함께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각 대학에서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클럽 활동으로는 "타임반"이니 "뉴스위크반"이니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영문학 교수들의 의견으로는 이같은 활동이 노력에 비해 얻는 효과가 아주 적다고 한다. 지나치게 시사성을 띤 용어와 속어가 많고 문장의 간결성이 심해 영어 공부로서는 마땅하지 않다고 한다. 굳이 잡지로 공부해야 한다면 오히려 좀 쉽게 씌여진 'U.S.리포트 앤드 뉴스'같은 것을 읽어 가는 것이 발전성이나 흥미에서도 좋고 시사 영어 공부에도 좋다고 한다. 물론 잡지가 싸고 사기 쉽다는 요인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도 부족으로 말미암아 노력에 비해 효과가 적은 수고를 학생들이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면에 특히 지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담당은 역시 학생독서지도위원회가 적임이라 생각한다. 학생독서지도위원회의 지도 목표는 주로 교양을 위한 독서 지도이기 때문에 번역된 고전을 읽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대중성 있는 문학작품이나 사상 관계 서적이 주로 다루어진다. 또한 그 내용도 대의 파악이나 자기 발견을 위한 교양 교육적 지도가 된다. 이런 점은 강의 중에 내주는 독서나, 강독에서 원서를 찬찬히 읽어 가는 것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이를테면 사회학과 학생이 교양으로 막스베버의 번역본을 읽을 때와, 상급반에서 강독으로 원본을 읽을 때하고는 읽어 가는 입장이 다르다. 이런 면에서 학생독서지도위원회의 지도가 너무 전문적인 수준이 될 수 없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의 전문적인 연구의 기초가 되고 도움을 준다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과외 활동을 살펴보면 우정적인 것, 학술적인 것, 종교적인 것, 예술적인 것, 봉사적인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과외 활동 중에서 극소수의 활동만이 학교 당국의 도움을 받아 합법화되어 지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과외 집단 활동은 대학과의 관련 여부가 어떠하든 간에 대체로 일정한 목표를 가진 집단 체제로서 효과적인 자기 발전을 노리며 사회적 훈련 소속감, 안전감을 은연중에 얻을 수 있는 교우 활동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집단 활동은 독서하는 클럽으로 발전되기도 하며, 그렇지 않다 해도 활동의 일부에 독서가 끼어드는 수가 많다.
이러한 독서회나 독서 클럽 활동의 지도는 교수가 맡게 마련이다. 지도 교수는 대체로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선정되는데, 간혹 교수와 학생 사이에 이해의 결여로 말미암아 클럽 활동에 지장이 생기는 수도 있다. 학생들은 자기들이 존경해 추대한 교수의 성의가 부족하다느니 하며 실망하고, 교수는 또 교수대로 학생들이 기대에 어긋나게 활동한다고 재미없어 해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수들이 연구 활동과 생활 지도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학생들의 집단 활동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작용하므로 순수한 학술 활동만으로 시종일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교수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들 독서회 활동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학생은 칸트의 저서를 읽으며, 어떤 학생은 동학 사상을 따져 가며, 어떤 학생은 선불교 책을 정독해 가며, 어떤 학생은 신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학생들은 읽은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한다. 한국의 토지 제도의 변천을 더듬어 가는 학생, 이순신 장군의 인간됨을 주제로 삼는 학생, 이율곡의 책을 읽고 따지는 학생, 사회 사상사를 읽고 토론을 하는 집단 등등 여러 내용이 있으리라 본다. 형식에서도 이들은 몇 달 동안 모여서 원본을 강독해 가며 내용을 토론하거나, 아예 미리 읽어 와서 내용만 요약 발표하고 토론하는 등의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또 이같은 학생 활동에 지도 교수가 참여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라고 생각된다. 클럽의 성격이나 지도 교수의 개인, 사정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방식이야 어떻든 학생들의 활동 방향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에는 학생들의 활동 정도에 맞추어 단호한 결정을 내려 주는 지도가 절대 필요하다.
지도 교수의 역할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집단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의 자격을 조정하거나 너무 지나친 요구 수준을 적당히 현실화시켜 가는 일, 적당한 집단 활동의 분량이나 절차 등을 일러주는 일에서부터 학생들과 어울려 책을 읽으며 잘못된 곳을 교정해 주는 일까지도 할 수 있다. 아마도 교수들은 중도에서 학생들의 불만에 봉착하겠지만, 목적에 맞는 준비 과정을 갖게 해서 결국 유종의 미를 거둘 때 학생들의 기쁨을 생각하며 지도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의 형편상 교수와 어울려 학문적인 독서 활동을 대학원생에게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대학생들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독서 활동이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그러나 학생 선택을 잘하고 준비 과정을 잘 밟게 해서 적절한 지도만 한다면, 꽤 높은 수준의 독서회 활동도 그리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제까지는 정상적으로 독서할 수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독서 지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생 중에는 독서 능력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학업에 능률이 오르지 않는 학생들도 상당수 있다. 이들에게도 지도와 훈련을 어느 정도 가하며, 이들은 독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아무튼 독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면, 공부하기가 쉽고 학업 성적이 올라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서 방법의 교정 지도는 대학에서도 학생 지도의 주요 과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아직 우리나라 대학에서 관례화 하지 않았지만, 외국 대학에서는 강의 시간에 요구하는 참고문헌 읽기의 숙제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한 시간에 30-40쪽 가량을 읽어야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와 같은 독서 속도를 갖지 못한 학생은 밤늦게 까지 공부해야 이를 간신히 따라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므로 독서 속도가 느린 사람은 좀처럼 대학 공부를 해내기가 힘들다고 한다. 직업적으로도 독서 능력은 중요하다. 신문이나 잡지의 편집원으로 일하는 이들은 한 시간에 60-70쪽은 읽을 수 있어야 직책에 어울릴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독서 속도가 본격적으로 학업이나 직업의 기초로서 사회에 표면화하지는 않았지만, 독서 속도가 은연중 학업이나 직업의 적응 여부를 좌우하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한마디로 독서를 잘못 한다는 것은 결국 독서 속도가 더디다는 뜻이다. 줄줄 훑어 내려가지 못하고 글자 하나 하나를 떼어서 읽다 보니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자연히 읽은 데를 다시 되돌아가 읽게 되므로 독서 속도가 더디다. 읽는 사람의 안구 운동을 살펴보면 독서 속도에 빠른 사람은 한 줄에 불과 2, 3회만 정지할 뿐인데, 속도가 더딘 사람은 한 줄 읽는 데 7, 8회에 걸쳐 정지한다. 눈 운동이 정지하는 순간에 글자나 어구 또는 문장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지 회수가 적게 읽어 가는 사람은 어구나 문장을 단번에 지각해서 이해한다. 또 빨리 읽는 사람은 정지 시간도 짧다. 한 지점만 응시하고 딴 생각이나 공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정지 시간이 짧게 마련이다. 독서 속도를 빠르게 하려면 소리내어 읽거나 혀, 목구멍 등을 움직여 입 속에서 읽지 말아야 한다. 즉 묵독을 해야 한다. 안구 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에 시간 소비나 에너지 소비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독서 내용에 따라 읽는 속도를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신문, 잡지, 대중 소설따위는 대의 파악만 해도 되므로 대충 훑어 내려 가도 되지만, 수준 높은 문학 작품, 학술 논문 따위는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 있는 표현이므로 천천히 새겨 가면서 읽어야 한다. 또한 교과서는 완전 이해뿐만 아니라 전부를 기억하며 읽어 가야 한다. 하나의 책이라도 부분에 따라 읽는 태도나 속도를 달리하는 것이 좋다. 중요하지 않거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은 빨리 읽어 가고, 처음 보는 것이나 중요한 곳만 자세히 본다.
이름 있는 한 철학자에게 철학책 신간본을 가져다주니 불과 한 시간 정도로 다 읽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해 사람들은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책은 서론과 역사적 개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인용, 자기 입장 등을 서술했는데, 석학인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웬만한 이론은 다 알고 있으니 그런 것을 소개한 부분은 훌훌 넘기고 저자의 주장에만 정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한 시간 정도로도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육당(최남선, 역사학자)은 한문책을 읽는 데 열 손가락을 펴서 훑어 내리면 전부 이해하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역시 육당의 한문 실력이 높기도 하겠지만, 그 분이 쉬운 부분에서는 대충 훑어 내려가는 모습만을 보면서 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독서 속도는 이해력과 상관이 높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해력이 좋고, 이해력이 좋은 사람은 빨리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빨리 읽는 사람은 읽어 내려갈 때 단어의 모습이나 그것이 주는 표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구나 문장의 의미만을 직접 파악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독서할 때는 글의 의미 파악에 열중할 수 있는 주의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독서 속도에 크게 방해되는 요인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집중력 부족이라고 한다. 책을 읽다가 공상에 잠기고 다시 몇 줄 읽다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글자나 어구에 접해서 다른 표상이나 사건이 떠오르게 되어 중간 중간이 빠지게 되니 대의 파악이 잘 안 된다.
그러면 이렇게 공상이나 다른 생각이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독서로부터 관심을 빼앗아 공상으로 몰고 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대체로 정서적 문제가 많다고 본다. 물론 상담 교수의 상담을 받는 것도 좋지만, 자주 나타나는 공상이나 다른 생각의 내용을 매일 기록해서 한 일주일 모아 보면 문제의 소재가 짐작된다. 이때는 이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어느 것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것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집중하기에 힘들다는 것은 읽어도 이해가 안 되고 그것이 자기에게 주는 의의가 느껴지지 않아 자연 관심 있는 다른 분야로 생각을 돌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게끔 독서 내용의 의의를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서에서 어휘 이해력은 매우 중요하다. 어휘력이 빈약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자연 독서 속도도 더뎌진다. 그러므로 어휘력을 풍부하게 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이해할 수 있는 그것에서 성공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때 맹렬한 관심이 생긴다. 따라서 그 학과나 그 책을 성공하도록 노력하는 데서 자연 관심이 회복되고 독서도 정상화되리라고 본다. 끝으로 학생들이 시험해 보아도 좋을 효과적인 독서 방법을 적어 보기로 하자.
1. 어느 한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 읽으려는 책이 자기의 연구 계획이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적합한가를 고찰해서 적합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읽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적합하지 않을 때는 보다 적합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식해야 하면, 이 책과 동일한 문제를 다룬 다른 저자의 견해와 비교하는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
2. 예비적 개요를 기록하라. 논문, 책의 제목, 저자의 지위, 다른 저작의 개요, 본 저작의 연도, 발행소 등을 적어 놓는다. 서문을 읽어 저작의 목적이나 입장을 알아야 하고, 목차를 살펴서 저작의 개요를 머리에 놓고 읽기 시작한다. 읽으면서 중요한 것은 정리해 가며 읽는 것이 좋다. 무슨 책이든 다시 읽을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것이나 더욱 확실히 알고 싶은 것은 반복해 읽는 것도 좋다. 중요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세 번 읽을 것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개요 파악에 중점을 두며, 두 번째 읽을 때는 부분적으로 정밀하게 검토하면서 읽고, 세 번째 읽을 때는 전체 저작의 의향, 의의를 생각하며 읽는다.
3. 빨리 읽어 가는 노력을 하라. 책은 졸면서 읽어서도 안 되고, 또 책을 마냥 들고 있다 해서 저절로 읽혀지는 것은 아니므로 한 번 읽을 때 집중해서 빨리 읽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너무 천천히 읽으면 잡념이나 공상이 생기게 마련이고, 또 그럴 경우 부분만을 이해하게 될 뿐 전체 의미는 잘 파악되지 않는 수가 많다. 차근차근 공들여 읽은 고전은 오히려 그 전체의 뜻과 향기를 모르고 넘기는 수가 많다. 너무 늦게 읽은 나머지 전체 의미를 놓치면서 읽어 가기 때문이다. 빨리 읽으면 처음에는 의미 파악이 애매할는지 모르나, 차차 의미 파악을 제대로 하게 되면서 잡념이나 공상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오히려 효과적인 독서를 할 수 있다.
4. 규칙적인 독서를 하라. 책은 계속해서 장시간 읽어 나가는 것보다 매일 일정 시간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읽어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피로감이 없는 생생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규칙적이어도 읽는 시간을 너무 짧게 잡으며, 읽기 시작하면서 얼마 안 되어 바로 그만두는 결과가 되므로 자기에게 적절한 시간을 정해야 한다.
5. 독서 속도를 적당히 조절하라. 단순하고 쉬운 부분이나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은 빠르게 혹은 생략하면서 훑어 내려가고, 중요한 부분이나 어려운 데는 차근차근 읽어야 한다. 모르는 글자나 어구는 사전을 찾아 뜻을 정확하게 하며, 의미 파악이 어려울 때는 전후 관계를 도식화하거나 요약해 가며 일관성 있게 뜻을 파악해야 한다. 요컨대 타성적으로 마냥 똑같은 속도로 읽을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빠르게도 읽고 늦게도 읽어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책 위나 옆 공백에 자기 나름의 주석, 요점, 제목을 붙여 가며 읽어라.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적거나 중요한 데를 줄치고 표를 해 가며 읽으면, 그후 다시 읽을 때나 인용할 때 편할 뿐 아니라 읽어 가는 데도 이해하기에 좋다. 물론 도서관이나 남에게서 책을 빌어다 읽을 때는 예외다.
7. 책을 읽으면서도 읽은 데까지는 기억을 되새기면서 읽어라. 읽은 데까지의 대의를 암기해서 생각해 보며 이를 검토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좋다. 저자의 견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에 비판을 가하면서 다른 견해와 비교해 볼 때, 독서는 자기 발전의 거름으로 작용된다. 다시 말해 한 저서가 비평받기 전까지는 미완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때, 저서의 미완성 부분을 자신이 책을 읽어 가면서 완성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전만 찾으라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보아 이를 완성한다는 입장으로 자기 발전을 위해서 독서가 이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196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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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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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꿈
정력적인 터틀톱이 75세 생일날, 의사의 진찰실을 찾아갔다. "선생님, 나는 오늘 밤 스무 살짜리 소녀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원기를 복돋워줄 약을 좀 주십시오." 의사는 이해가 가는 듯 빙그레 웃으며 그 노인에게 처방을 해주었다. 그날 밤 늦게 의사는 호기심이 나서 환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이 도움이 됩니까?" "놀랍습니다. 벌써 일곱 번째입니다." 터틀톱이 대답했다. "대단하군요." "여자는 어떻습니까?" "여자요? 그녀는 아직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 꿈꾸고만 있지 말라. 그러면 너는 여자를 놓쳐버릴 것이며 삶을 놓쳐버릴 것이다. 꿈꾸기를 멈추고 현실을 보라. 현실은 네 앞에 있다. 현실은 이미 네 주위에, 네 내부에, 네 외부에 있다. 네가 꿈을 꾸고 있으면, 꿈이 너의 내적 공간을 점령한다.
속임수
한 유태인 부부가 플로리다에 갔는데, 호텔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호텔은 유태인을 금지하기로 악명 높은 호텔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키, 당신은 입을 꼭 다물어야 해. 한마디라도 당신 입에서 나오는 날이면 모든 것이 허사야. 나에게 맡겨둬. 나는 영어를 잘하니까 데스크에 있는 사람도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리를 들여보낼 거야." 그들은 데스크로 다가갔다. 데이브가 방을 청했다. 호텔 직원은 그들에게 열쇠를 주었다. 방을 얻는 데 성공한 후 베키가 말했다. "데이브, 날씨가 아주 더운데 수영하러 풀에 갈 수는 있겠지요?" 데이브가 말했다. "좋아, 그러나 한마디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 그들은 탈의장으로 갔다. 데이브는 탈의장 심부름꾼에게 신호를 했고 그는 그들에게 의자와 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베키는 데이브를 향해 물었다. "이제 풀에 들어갈 수 있어요?" "물론이지, 그러나 잊지 마. 한마디도 말하면 안 돼." 베키는 풀의 가장자리로 가서 물에 발가락을 담가보았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오, 베이(유태어의 감탄사)!" 하고 고함을 지르다가 문득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그 소리에 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는 유태어로 덧붙였다. "그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이야."
- 속일 수 없다. 어떻게 해도 그것은 나타난다. 동기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동기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이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기는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동기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스스로는 그 동기를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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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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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1.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 - 한국전쟁 참전(1950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46년 / 신탁통치 문제로 미, 소 공동위원회 개최. 반탁운동 일어남 1949년 / 남한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수립 선언 1949년 / 반민특위 발족, 김구 피살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고,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남한을 공산세력을 막는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남한의 공산화를 적극적으로 막고자 했다.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계획을 중국국민당의 패배로 좌절되었는데, 이제 동아시아 보루인 남한이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은 초반에는 북한의 압도적인 우세로 전개되었으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말쯤에는 남한군의 선두부대가 백두산까지 진격, 중국 국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만일 북한이 패전하여 사회주의권에서 떨어져나간다면 중국으로서는 심히 우려할 상황이 올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중국지도자의 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한국국이 38선을 넘는 것은 상관없지만 미군이나 유엔군이 북상할 때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제국주의자드이 중국침략과 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움모에 강력히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싸움에 밀려 중국 쪽으로 퇴주한 북한군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영토내에 비행기를 띄우기도 했다. 미국의 군사행동은 중국의 위기의식을 더욱 크게 했고, 마침내 중국은 1950년 10월 말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중국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하나인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하는 인민지원군 약 60만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북한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 한때 다시 서울이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고 원래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돕자 맥아더 사령관은 대만의 국민당 군대 50만을 동원하여 중국 남부를 공격하고 동북지방에 30~40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한 제안에 발맞추어 당시 대통령인 트루먼도 그해 11월에 (원폭 사용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 그리고 국제여론도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했으며 미국의 동맹국에게도 이 봉쇄에 동참하기를 요구했다. 미국은 1951년 5월 유엔 총회에서 중국 및 북한에 대한 전략물자 금수안을 가결시켰다. 미국 내에서는 '상호방위원조통제법'을 통과시켜 특정품목을 공산국가에 수출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런 미국의 조치는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중국경제는 이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로 제한되었고 경제개발에 막 나서는 중국의 상황을 매우 어렵게 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1년여 만에 다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 중국은 다시 정쟁수행을 위한 체제로 국가정책을 짜게 되었다. 여러 정파 및 대표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인민 세계평화방위, 미국침략반대 위원회' 가 만들어졌으며, 미국에 대한 저항의식을 국민에게 불러일으키는 작업들이 행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 군대가 다시 중국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구체제 인물들과 국민당과 관련된 세력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공산당 간부를 암살하거나 토지개혁을 방해하는 등의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51년에서 52년 사이에는 부패한 관료들과 자 가들의 불법행위를 적발하여 처벌했으며, 지식인들의 사상개조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에게는 국가를 위한 경쟁적인 생산활동을 촉구했고 농민들에게는 사회질서 강화, 민병 참가, 군량납인 등을 요구하였다.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투기방지, 물가안정 등을 이룰 수 있도록 유도했다. 많은 인민들이 이러한 정신무장을 하는 교육에 참가했으며 북경, 상해, 천진 등과 같은 대도시 인민들의 80퍼센트 정도가 국가를 위한 애국선언에 동참했다. 공산당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국전에 계속 참가하면서 반혁명운동을 완전히 누르고, 토지개혁 등 새로운 국가건설을 가속화시켰다.
한국전쟁은 51년에 접어들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어느 쪽도 일방적인 우세를 보이지 않게 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 때 중국은 1. 미국에 대항하는 원조운동을 더욱 강화할 것 2. 애국 증산운동을 제창, 추진할 것 3. 모택동 사상 학습운동을 조직할 것 등 3개항을 결의했다. 이는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끝나는 이후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압력에 대항하고 국방의 강화 및 근대화와 중공업 기반건설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급속하게 만들어내자는 중국 지도자들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의 조인과 함께 끝이 났으며 이때부터 중국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중국 내에서 공산당의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유주의자 등 공산당에 속하지 않는 파벌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더욱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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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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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擧兩得(일거양득) 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의 혜왕은 초(楚)나라의 사신 진진(陳軫)에게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물었다. 진진은 다음과 같은 고사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변장자(卞莊子)가 범을 찌르려고 하자 여관의 아이가 만류하면서 지금 두 범이 서로 소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는데,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서로 빼앗으려고 싸울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니, 그 때 다친 놈을 찔러 죽이면 일거에 두마리의 범을 잡았다는 이름을 얻게될 것입니다(一擧必有雙虎之名) 라고 말했답니다. 조금 후에 두 범이 싸워서 큰 놈이 다치고 작은 놈이 죽자, 변장자가 다친 놈을 찔러 죽이니 과연 한 번에 두 마리 범을 잡은 공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一擧果有雙虎之功).
一擧兩得 은 一石二鳥(Killing two birds with one stone) 一箭雙 (일전쌍조: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 와 같은 표현이며, 모두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 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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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말] 양득(兩得). [동의어] 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 일거양실(一擧兩失). [참조] 조명시리(朝名市利). [출전]《春秋後語》,《戰國策》〈秦策〉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은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옵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 지는 법이옵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하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이옵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와 조(趙)나라를 통해서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오며, 더욱이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이옵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이옵니다.”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주] 구정 : 우왕(禹王) 때에 당시 전 중국 대륙인 아홉 고을[九州]에서 바친 금(金, 일설에는 구리)으로 만든 솔. 하(夏),은(殷) 이래 천자(天子)에게 전해 오는 상징적 보물이었으나 주왕조(周王朝) 때에 없어졌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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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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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원작소설보다 영화로 더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기억할 것이다. 얄미우리만치 당차고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무시해 버리는 그 시대의 신세대였다. 남녀의 공식적인 만남의 장소인 파티장에 가기 위해, 스칼렛은 유모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으로 허리를 있는 대로 졸라맸다. 그렇게 졸라맨 그녀의 허리는 남자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 클라크 케이블의 두 손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가늘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위에 사람 다섯은 들어갈 만한 폭 넓은 드레스로 몸을 감쌌다. 인상 깊은 것은 그 다음 장면이다. 가슴이 깊이 파이고 어깨에 프릴이 많이 달린 그 드레스. 그녀는 어깨를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려고 기를 쓴다. 정숙한 여성은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유모의 애원 섞인 핀잔도 무시한 채 말이다. 파티장에서 그녀는 뭇남성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여성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그녀의 후손들은 배꼽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팬티보다 5센티미터쯤 더 내려오는 핫팬티와 함께.
1960년대 초 영국 마리퀸트가 '어머니와 같은 옷입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한 이후 지구촌에는 미니 선풍이 불어닥쳤다. 곧 프랑스의 한 디자이너는 '옷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노브라를 제안했다. 거리에는 슬립처럼 어깨를 가느다란 끈으로 처리한 '슬립형 미니' 원피스나 등을 과감히 드러낸 배꼽티에 슬리퍼를 신은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깨나 가슴 부분을 파거나, 속옷 패션, 앞 단추를 몇 개 푸는 식의 노출 면적 확대는 머지 않아 투명 소재를 통해 가슴을 엿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런 노출 패션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는 신발이다. 슬리퍼 등 뒤축이 없는 여름용 신발 못지 않게 발목이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워커 부츠 같은 겨울 신발이 각광받고 있다. 그야말로 계절 파괴이다. 노출 패션이 성숙하고 세련된 여성미를 표출하려는 욕망과 관계 있다면, 베이비돌(baby doll) 스타일은 귀엽고 천진난만한 소녀의 느낌을 표현한다. 여성들의 두 가지 욕망이 옷차림에 교차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 섹시함과 여성스러운 느낌을 최대한 살린 노출 패션 스타일과는 달리 베이비돌 룩은 소녀다운 건강한 이미지와 인형 같은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목의 선을 깊이 파내고 아기자기한 단추나 레이스, 프릴 외에는 장식을 거의 하지 않는 미니 원피스 차림의 한껏 어려 보이는 소녀들이 배꼽을 드러낸 섹시한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얼룩무늬 군복의 밀리터리 룩, 엉덩이에 살짝 걸친 바지가 신발까지 덮는 힙본 룩, 속옷도 겉옷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언더웨어 패션, 가슴이 팽팽하게 드러나는 글래머룩 등 다양한 패션이 눈을 즐겁게 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햇빛에 눈을 보호하던 선글라스는 여성들의 머리띠 대용으로 쓰이고 있으며, 갖가지 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세계화에 발맞추는 것인가. 미인의 상징이던 하얀 피부는 한물가고 건강미 넘치는 구리빛 피부가 그 자리를 대신해 선탠 전문점이 성업하고 있다. 강아지도 패션 소품으로 만드는 감성, 표현하지 않는 감각은 감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신감에는 개성과 자기 만족, 모방, 유행에 대한 부화뇌동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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