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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3호
2012.1.6 (음 12.13)/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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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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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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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책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은 분명히 생활 가운데 부질없는 야심과 쾌락의 추구에만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한데, 그 세계가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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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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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
‘고객님 앞으로 주문 상품 <나이 한 살>이 배송중입니다. 본 상품은 특별주문 상품으로 취소·교환·환불이 불가합니다. 상품 수령 후 수취 확인 바랍니다.’ 연말에 접어들면서 돌아다니는 문자메시지이다. ‘가는 세월’ 아쉬워하는 세대가 공감할 내용이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의 맛을 마흔 넘어서야 되새김하는 늦깎이인 나는 ‘특별주문 상품’인 ‘나이 한 살’이 싫지만은 않다. 청춘의 뒤끝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고 중년 이후에야 알 수 있는 신체의 변화를 몸소 겪으며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아 온다. 새해는 새 학기처럼 다가온다. 2011학년에서 2012학년으로 ‘진급’하는 것이다. 한 해 더 ‘진급’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호젓한 절간에서 ‘해맞이 템플스테이’를 하고 고즈넉한 성당에서 ‘송구영신 피정’을 하는 이들이다. 묵상과 성찰을 통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차분히 앞날을 도모하는 게 낫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경구는 그래서 뜻깊다.
인생의 속도와 방향은 부모와 스승, 동료 그리고 책을 항법사 삼아 자신이 결정한다. 낯선 길의 동반자는 ‘지도를 보이거나 지름길을 찾아주어 자동차 운전을 도와주는 장치나 프로그램’(표준국어대사전)인 ‘내비게이션’이다. 항법사에 어울리는 외래어는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내비게이터’이다. “‘내비게이션’은 ‘길도우미’로 다듬었다”고 밝힌 국립국어원 연구원도 “‘내비게이션’은 영어를 바탕으로 한 우리식 외래어, 이른바 콩글리시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한겨레> 2008년 7월) 국립국어원은 <2003년 신어자료집>에 ‘한 지점으로부터 다른 지점으로 정확히 도착하게 하는 데 이용하는 차량용 항법장치’로 ‘내비게이터’를 수록한 바 있다. 2003년에 ‘내비게이터’를 인정했다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내비게이션’을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로 올린 국립국어원의 뜻이 궁금하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연륙교'의 발음은?
마라톤 중계방송을 할 때 가끔 인용하는 격언이 있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 ‘인간 기관차’로 널리 알려진 체코의 장거리 육상 선수 에밀 자토페크가 남긴 말이다. 사냥과 유목으로 살았던 민족의 본성을 드러낸 표현이다. 농업이 바탕이었던 겨레에게는 달리기보다 걷기가 더 어울린다. ‘올레길’, ‘둘레길’처럼 걷기 좋은 길을 찾는 이가 늘어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도로 상황도 바뀌고 있다. 길 건널 때면 오르내려야 했던 육교가 사라지고 횡단보도가 생기고 있으니까.
다리는 원래 물을 건너기 위해 생긴 것이다. 개천을 건너고 큰 강을 가로질러 세우는 다리와 달리 ‘번잡한 도로나 철로 위를 사람들이 안전하게 횡단할 수 있도록 공중으로 건너질러 놓은 다리’(표준국어대사전)는 ‘땅 위의 다리’인 육교(陸橋)라 한다. 섬과 뭍을 잇는 다리는 ‘연륙교’이다. 엊그제 <한겨레>를 비롯한 여러 매체가 “인천시가 영종도 제3연륙교를 상반기에 착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관련 방송 뉴스를 검색해보니 ‘연륙교’의 발음이 한 꼭지 안에서도 서로 달랐다. “제3연륙교[열륙꾜] 건설 타당성에 대한 용역 조사 결과…”(ㅅ방송 기자), “제3연륙교[연뉵꾜]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ㅅ방송 앵커), “제3연륙교[열륙꾜] 건설은…”(ㅁ케이블 뉴스 앵커·기자), “제3연륙교[연뉵꾜]는 영종하늘도시와 청라지구를 연결하는…’(ㅁ케이블 뉴스 출연 공무원).
연륙교는 ‘강이나 바다, 호수, 섬 따위가 육지와 잇닿음. 또는 그 사이를 메워서 이음’의 뜻인 ‘연륙’(連陸)에 ‘다리 교’(橋)가 붙어서 생긴 말이다. ‘ㄴ’은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발음한다는 표준발음법 5장 20항에 따라 ‘연륙’은 [열륙]이고 ‘연륙교’는 [열륙꾜]가 된다. [연뉵꾜]는 ‘연-륙교’라 겉짐작해 생기는 잘못이다. ‘육교를 잇는(連)’ 다리는 없다. 글을 말소리로 옮길 때 제 뜻 바로 헤아리면 발음은 저절로 바로잡히기 마련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 바루기] 너글너글하다, 느글느글하다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자기 얼굴에 그때까지 살아온 삶의 켜와 흔적이 쌓여 드러나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사람끼리 만날 때에도 첫인상이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얼굴에 너그럽고 부드럽고 선한 기운이 있으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호감을 갖게 할 터이다.
'우리가 만난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은 모두가 소박하고 너글너글하며 포도와 포도밭을 더없이 사랑해서 와인을 얘기할 때면 다들 못 말리는 와인 예찬자가 된다." "사람이 너글너글하고 착해서 모두 그를 좋아한다." "그는 성미가 너글너글한 편이다." 이렇게 쓰이는 '너글너글하다'는 매우 너그럽고 시원스럽다는 뜻이니, 사람의 성격이나 성품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된다. 중요한 일로 처음 대면한 사람의 얼굴에서 너글너글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느글느글한 느낌을 갖게 된다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느글느글하다'는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아니하여 곧 게울 듯이 속이 매우 메스껍고 느끼하다는 뜻이다. "삼시 세 끼를 내리 일식만 먹었더니 속이 느글느글하다" "달걀노른자의 비릿하고 느글느글한 냄새가 나는 싫다"처럼 쓰인다.
'너글너글하다'와 비슷한 말로는 '서글서글하다'가 있다. '느글느글하다'와 비슷한 낱말로는 '느글거리다' '니글니글하다'가 있다. 같은 단어가 중첩되는 이런 종류의 우리말 중에는 모음 하나 때문에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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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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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들 - 김원경
죽은 자작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손톱을 기르는 것처럼
육체가 조금씩 액체가 되고 수증기가 되고 말을 잃고 미세하게 돋아나는 불안을 얘기하자 나는 간신히 침묵이 떨어지는 순간을 본다
나의 이 불안이 누군가 죽음 이후에 심어 놓은 미세한 균사체가 아닐까 의심될 즈음 나는 자꾸만 투명한 내장을 꺼내서 최후의 수분까지 증발시키려는 순간과 악수한다
왜일까 왜 그래야만 할까를 생각할 때 이미 난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건 세수할 때마다 떨어뜨린 긴 속눈썹 파르르 떨고 있는 한 줄 현(絃) 위에서 발목을 잃은 무용수의 창백한 울음소리
때론 침묵이 너무 진지해 게바라의 별은 어느 날 전광판에서 더 빛나고 있다지만 바람 불지 않아도 바람개비는 계속 돌고 있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처럼 서로 다른 속도로 흩날리며 다가와 읽혀지는 순간 머나먼 곳으로 사라지는 침묵들
침묵은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 수천 개의 긴 문장을 투명한 액체로 쓰고 있다 나는 이 한 문장을 해독하는 데 한 생을 다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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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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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의 세계에 연꽃이 피다[2] - 유권재
아득히 하늘 바라던 그 침묵이 저러할까
내 겨우 가부좔 틀 자리하나 얻었으나
떨어질 꽃잎 한 장에 소스라치는 바람이네
*성효스님의 국회 연꽃사진전에 부쳐 -0406 牛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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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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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꾹리의 아이들 - 손동연
1 두꺼빈 집 짓고 황샌 물 긷고. 그럼 우린 뭐 하나? 보리밥 한 그릇 먹고 나무 한 짐 해오고 수제비 한 그릇 먹고 빨래 한 짐 해오고.
2 가자 가자 감나무 방귀 뀌는 뽕나무 낮 무섭다 밤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삭정이를 꺾으며 검불을 긁으며 나무 한 짐 하는 데 노래는 스무 짐씩.
3 뻐꾹리의 새는 울어도 사투리로 운다. 글자로는 적지 못할 그런 노래들이다. 뻐꾹리의 꽃은 피어도 제멋대로 핀다. 물감으로는 칠하지 못할 그런 빛깔들이다.
4 밟으면 밟을수록 잘 자라는 보리 밟히면 밟힐수록 더 잘 크는 질경이. 배워도 우리는 이런 것을 배운다 교과서에 안 나오는 이런 것들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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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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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6장 인생의 항연
5. 정신적 쾌락이란?
여기서 우리는 흔히 고급이라고 생각되는 지적, 정신적 쾌락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이 인간의 지력보다 그 감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저급한 감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구별되는 이른바 고급의 정신적 쾌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감각 속에 뿌리를 박고 그 속에서 끝을 맺으며, 또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같은 사물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학, 미술, 음악, 종교, 철학 등 고급인 정신적 쾌락에 관하여 대충 고찰해 보면,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에 비하여 그 지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회화라 하지만 우리가 풍경화나 초상화를 볼 때에 실제의 경치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다는 관능적인 쾌락을 불러 일으켜 주지 않는다면 회화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 문학이라고 하지만 인생의 모습을 그 속에 재현시켜, 그 정취와 명암을 그려 내고, 목장의 향기나 뒷골목의 악취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문학의 가치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소설은 인간과 그 희노애락의 참된 모습을 그려내는 데 따라서 참된 문학적 표준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을 이 인생에서 떼어 놓고 다만 그것을 냉담하게 분석하는 데 그치는 책은 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책이 인간적인 진실을 담고 있으면 있을수록 뛰어난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소설이 다만 냉혹한 해부에 그치고 인생의 맵고 신 것, 쓴맛, 또는 그 냄새를 그려낼 수 없다면 그 어찌 독자에게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경우에 관하여 말하자면 시가는 인간의 정서로 윤색된 인생의 진실에 지나지 않으며, 음악은 말없는 정감이며, 종교는 공상의 형태를 취하는 예지에 지나지 않는다. 회화가 색채와 공상의 감각에 바탕에 두고 있는 것처럼, 시가는 인생애의 진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음향, 가락, 리듬의 감각 위에 놓여져 있다. 음악은 순수한 정감 그 자체이며, 인간의 지력이 그것에 의해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언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음악은 워낭 소리, 어시장, 싸움터의 여러 가지 음향이나 때로는 꽃의 아름다움, 파도의 일렁임, 달빛의 은은하고 고요한 맛까지도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이 감각의 한도를 넘어서 철학적 관념을 표현하려고 하면 그 순간 음악은 타락되며, 따라서 타락 세계의 산물로 화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의 타락은 종교가 이론 그 자체에 빠짐으로 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타야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 타락의 과정은 너무도 이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산타야나는 말한다. <불행하게도 종교가 이론으로 도금된 미신이 되기 위해서 공상 세계의 지혜가 되기를 그만둔 지도 이미 오래다> 종교의 타락은 신조나 신앙 형식이나 신앙 개조나 교의 그리고 그 해석 따위에 온갖 정성을 집중하여 결국 현학적인 정신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앙을 정상화하고 합리화하고 옳다고 믿게 됨에 따라 경건한 마음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모든 종교가 자기만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망신하는 좁은 소견의 종파로 변하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결과 모든 종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론으로 신앙을 정당화하면 할수록 더욱 소견이 좁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가장 악질적인 고집스럽고 좁은 소견에 개인 생활의 철저한 이기주의하고도 결합하게 되고 만 것이다. 종교도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다른 종파에 대하여 너그러운 태도를 가질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교 의식을 신과 인간과의 사적인 거래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간의 이기주의만을 길러 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을은 갑에 대하여 거의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기회에 찬미가를 불러서, 신의 이름과 갑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대신 갑은 을을 축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 다른 누구보다도 특히 우선 자기를 축복하고 다른 어떤 가족들보다도 우선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는 것이다. 매우 <신앙심이 깊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는 노부인들 가운데 지나친 욕심장이가 흔히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결국 자기만이 진리를 찾아냈다고 망상하는 독선적인 생각은 종교가 본시 근거로 삼고 있는 온갖 보다 섬세한 정감을 몰아내고 만 것이다.
미술, 시가, 종교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공상의 신선미, 보다 커다란 정서적인 미감, 보다 발랄한 생명감을 부활시키기 위해서이며, 그 밖의 다른 이유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각이 점차로 둔해지고, 고통과 부정과 잔인한 것에 대한 희로 애락의 정도 약해지고, 차가운 현실의 보잘것 없는 싸움질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인생에 대한 공상도 그만 일그러지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 세상에는 그 날카로운 감수성이나 섬세한 정서적인 감응이나 공상의 신선미를 잃지 않은 몇몇 시인과 예술가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의 의무는 우리의 도덕적인 양심이 되고, 무디어진 공상을 반성시켜 주는 거울이 되며, 위축된 신경을 조정해 주는 데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예술은 우리의 마비된 정서라든가, 생기를 잃어버린 사고나 부자연스러워진 생활에 대하여 풍자와 경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약아빠진 세계에 살면서 순진성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또한 생활의 건강함과 건전함을 회복하고, 지나친 정신 활동으로 말미암은 열광착란을 고쳐 주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해 주고, 이성과 인간성과의 사이의 연락을 재건해 주며, 인간의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해 균형을 잃은 생활의 파편을 다시 조립하여 먼저대로의 완전한 것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다. 이해가 따르지 않는 지식, 감상이 따르지 않는 비판, 사랑이 따르지 않는 아름다움, 정이 따르지 않는 진리, 자비가 따르지 않는 정의, 온정이 따르지 않는 예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얼마나 비참한 세상인가! 특히 정신의 활동이리고 셍각되는 철학에 대하여 생각해 볼진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린다면 그 위험은 보다 더 크다. 이른바 정신적인 기쁨이라고 하는 것 가운데는 긴 수학의 방정식을 푸는 기쁨이라든가,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기쁨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떠한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아마도 온갖 정신적인 기쁨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나는 맛있게 차린 음식하고라면 기꺼이 바꿀 생각이다.
첫째, 그 속에는 우리의 정신적인 용무의 부산물인 변덕이라고도 부름직한 것이 끼여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일일 뿐, 인체에 필요한 그 밖의 다른 여러 작용과 같이 긴급하고도 없어서는 안될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지적인 기쁨은 결국 크로스워어드 퍼즐(낱말을 가로 세로 맞추는 놀이)을 잘 풀어 맞추었을 때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 둘째로, 이때 철학자는 대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완전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며 진실 그 자체를 배경으로 삼는 것보다도, 세계의 이론적 완성이라는것을 크게 생각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을 옳게 그리는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마치 별의 모양으로 별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정도를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좋겠다고 하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만물의 설계에 내재하는 단일한 이치를 찾아내지 않더라도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실 그러한 것은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수학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결혼할 나이가 된 처녀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편이 훨씬 좋다. 처녀가 하는 이야기는 구체적이며, 그 웃음에는 정기가 넘쳐 흐르기 때문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인간성에 대한 지식을 듬뿍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시나 노래보다는 돼지고기를 택할 것이고, 노릇노릇하게 구어져서 씹으면 바삭바삭하는 고급 소오스를 발라서 구운 등심살코기 한조각을 위해서라면 번잡한 철학 따위는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유물론자이다. 생활을 사색보다 소중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만 철학의 광열이나 숨막히는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동심이 지니고 있는 참된 통찰력이 신선함과 소박함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철학자라도 만일 참된 철학자로서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면 어린이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 안에 갇힌 아기 사자를 보고도 그러할 것이다. 발톱이며 근육이며 아름답고 부드러운 털, 뾰족한 두 귀, 반짝이는 똥그란 눈, 그 재빠른 동작, 장난을 좋아하는 짖궂은 성품 등,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완전히 자연스럽게 갖추어져 있는가. 신이 준 완전이 때때로 인공의 불완전으로 바뀌는 것을 돌아볼 때 철학자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안경을 쓰고, 식욕도 없고, 때때로 골치를 앓고 마음을 괴롭히고, 전혀 인생의 아취를 알지 못하는 것을 철학자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바 하나도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기꺼이 시가와 손을 잡고 우선 자연, 이어서 인간성이 지닌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줄 때야말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당한 가치를 지닌 인생 철학이라면 인간이 타고난 본능의 조화를 이루는 데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너무나도 관념적인 철학자는 자연 그 자체가 곧 꿰뚫어 본다. 중국의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성격은 자연에 순응해서 살고, 마침내는 천지와 똑같은 가장 높은 위치에 이르렀을 때 얻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손자가 쓴 <중용> 속에서 설한 가르침인 것이다.
하늘이 주신 명을 성이라고 하고, 이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이른다. 희로 애락의 감정을 아직 나타내지 않음을 중이라고 하고, 희로 애락을 알맞게 나타냈을 때, 이를 화라고 한다. 중은 철학의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이다. 중화에 이르렀을 때 하늘과 땅에는 질서가 생기고 만물은 고이 자란다. 성이 있음으로써 명이 있으며 이를 성이라 한다. 명하게 함으로써 성에 이른다. 이를 교라 한다. 성이 있으면 곧 명이 있으며, 명하게 하면 곧 성에 이른다. 오직 천하의 지성, 그 성을 다하게 한다. 그 성을 다하면 곧 사람의 성을 다한다. 사람이 성을 다하면 곧 사물의 성을 다한다. 사물의 성을 다하면 곧 천하의 화육을 돕는다. 천하의 화육을 도우려면 곧 천지와 더불어 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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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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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1.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1846) - 마르크스, 엥겔스 Karl Heinrich Marx(1818-83) Friedrich Engels(1820-95)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 - 김범춘(한국방송통신대학 강사)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힌 마르크스는, 부릅뜬 눈에 조금은 겁먹은 듯하기도 하고 순박해 보이기도 하는 흉상 아래 묘비에서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다. 마르크스만큼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온 인물도 없을 것이다. 급진적 혁명가에서 짐승에 가까운 공산주의의 창시자, 급기야는 사라지는 몽상가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지어 준 악의에 찬 찬사를 마르크스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의 라인 지방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태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변호사였고 휴머니즘과 계몽주의에 심취한 당시 독일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어린 시절이야 평범한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잘 놀고 씩씩하게 자란 마르크스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랬듯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가 요즈음 대학생들처럼 점수에 맞춰서 과를 선택하지는 않았겠지만 정작 법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것이 당시에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많은 철학자들이 헤겔 학파를 만들어서 연구할 만큼 헤겔의 사상이 절대적인 권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베를린 대학을 거쳐 예나 대학에서 1841년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루소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 것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는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당대의 유물론 철학자인 포이에르바흐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지배적이던 헤겔 철학은 현실을 적극 긍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헤겔에 따르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 이기 때문에 당시 현실의 프로이센 국가는 이성이 실현해 낸 최상의 국가로 둔갑했고 프로이센 정부는 헤겔을 국가 철학자로 극진히 대우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핵심을 모든 것이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변증법에서 발견하고, 프로이센 국가를 역사의 종국적 상태가 아니라 단지 역사 발전과정의 한 국면으로만 보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프로이센 정부의 눈에는 국가의 혁명적 변혁을 주장하는 반국가적 행위로 비쳤다. 1842년 마르크스는 신흥 자본가들이 만든 (라인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진보적인 논설을 실었지만 이 일도 프로이센 정부의 발행금지 명령과 신흥 자본가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끝나고 마르크스는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가난과 불행으로 가득 찬 한 철학자의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3년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의 누이인 예니 폰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급진 민주주의자였던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폐간과 망명 생활을 시작한 후, 더 정확하게는 (헤겔 법철학 비판)의 서문을 쓴 뒤 공산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 철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작업은 사변적이고 종교적인 사상이나 개인주의 사상과 대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844년 늦여름부터 사귀기 시작한 평생 동지 엥겔스와 함께 (신성가족)을 썼는데, 그 내용은 슈트라우스, 슈티르너 같은 청년 헤겔 학파의 견해를 비판하고 헤겔의 관념론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물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1845년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정식화한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 11)을 썼는데, 마지막 11번째 테제가 다음과 같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가 다루려는(독일 이데올로기)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그 부제가 "최근 독일 철학과 그 대표자 포이에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에 대한 비판 및 독일 사회주의와 그 여러 예언자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원리와 범주를 최초로 밝힌 이 미완성의 저술은 1932년에야 유고로 출간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운동의 팸플릿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고 공산주의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는 표어는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이다. 1848년 3월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귀국하여 1849년 5월까지 쾰른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기관지인 (신라인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자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마르크스는 파리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서 죽을때까지 가족과 함께 거기서 살았다. 1851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출간했고, 1865년부터 필생의 대작인 (자본론)을 집필하기 시작해 1867년 제1권을 출판했으나 제2권과 제3권은 그가 죽은 뒤 엥겔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전모를 밝히는 경제학책이지만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사상이 집대성된 저술이다.
마르크스는 망명 생활 중 대부분의 생계를 엥겔스에 의존했는데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는 마르크스의 극심한 궁핍이 잘 나타나 있다.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그 동안 집세를 내지 못해 오히려 집주인이 쫓아내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고, 전당포에 저당잡힐 물건이 더 이상 없었으며 제대로 끼니를 이을 수도 없었고, 딸과 하인의 약값을 대지 못한다고 슬퍼했다. 이런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마르크스가 저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해방이라는 신념과 평생을 함께 한 엥겔스, 딸들의 도움, 아내 예니의 뒷바라지, 그리고 충직한 여자 하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1881년 아내 예니를 잃고 곧이어 1883년 1월에는 끔직이도 사랑하던 딸 예니가 갑작스럽게 죽자 마르크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결국 1883년 3월 14일 망명지 런던에서 노동 해방과 인간 해방의 한 심장이 멈추었다. 엥겔스는 추도사에서 "반대자는 많았으나 개인적인 적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살아 있을 것이며, 그의 저작도 그럴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추도사를 어떤 의미로든 지금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 사상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마르크스는 이전 철학자들이 즐겨 말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즉 계급의 현실생활 자체에서 역사의 근본 원리를 찾는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사상인 역사에 대한 유물론 또는 역사적 유물론이다. 미완성의 제2권을 포함해서 모두 2권으로 된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역사적 유물론으로 본다면, 서론격이자 총괄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제1권 제1장 "포이에르바흐 : 유물론적 시각과 관념론적 시각의 대립"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 이데올로기)의 제1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뒷 부분은 유물론적 시각을 가지고 여러 학설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이념'을 가리키는데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거나 전파하는 사람을 '이데올로그'라 부르고 이 말을 '정치적 공상가'라는 경멸의 뜻으로 사용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독창적으로 정의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한 시대를 지배하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에게 전통이나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해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제도나 법률, 철학과 종교, 예술 등을 망라하는 의식 체계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에게는 자신의 현실과 이해를 정확하게 반영한 진짜 의식이지만, 만일 피지배 계급이 똑같은 내용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현실과 이해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이데올로기는 가짜 의식 또는 '허위의식'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연예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을 대중의 우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대중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가급적 자기를 계속 우상으로 생각하게끔 여러 가지 일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가장된 일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나 꾸며내는 일은 그에게는 현실적인 이해와 욕구를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연예인의 의식은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열성팬이 그처럼 옷을 입고 말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대중의 우상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할수록 그 열성팬은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잃고 자신의 현실조차 망각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연예인에게는 이런 열성팬들의 자기 상실은 그를 계속 우상으로 만들어 주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연예인이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말, 행동, 사고 등이 이념이나 이상의 형태로 정돈되어 열성팬에게 무조건 흘러들어간다면,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비밀을 폭로하려면 연예인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연예인의 행동은 현실을 참되게 반영하고 있는지, 팬들은 연예인이 건네 주는 의식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자기 위치를 깨닫게 하는 참된 의식인지를 물어야 한다. 내가 있는 현실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나를 주어진 어떤 상태에만 머무르게 하는 의식은 허위의식이며, 이런 의식이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는 까닭은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허위의식을 부수고 현실적인 의식, 제대로 된 생각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마르크스를 따라가 보자.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식화된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유물론은 우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제일 중요한 일로 먹고 마시고 거주하는 일을 내세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물로서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물질적인 활동을 해야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욕구를 충족하면 언제나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동물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또 인간은 역사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 인간 자신을 재생산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 것이며 자기에게 내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일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생산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언제나 인간은 특정한 협동 관계를 맺으면서 역사적으로 생존해 왔다. 신분 질서 속에서 생활했던 봉건제나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을 외치는 민주주의 등은 인간이 맺는 특정한 사회 관계일 뿐이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 이런 사회 관계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나 의식 활동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인간은 협동 작업을 하면서 노동을 분업하는데, 처음에는 남성과 여성의 정적 분업에 불과하던 분업은 개인의 자질이나 우연한 요소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전한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분업은 현실활동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의식 활동이나 이데올로기 활동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분업이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으로 분화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의식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순수 의식, 순수 도덕, 순수 철학을 할 수 있다. 즉 의식은 의식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이데올로기 활동, 의식 활동의 담당자는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은 단순히 현실적인 생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 즉 인간을 초월한 신적 존재나 자연과 대화하는 일을 한다. 이제 제사장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조차 신의 예지라고 포장할 수 있고 보통사람들은 제사장의 역할에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제사장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관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렇게 발생하고 급기야 인간이 만들어 낸 관계가 인간을 떠나서 인간을 지배하는 관계가 된다. 이데올로기의 기본 형태는 종교로 드러나지만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철학은 이데올로기이거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 이전에 독일 철학은 당시의 이데올로기이고, 마르크스 철학은 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자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이다. 이 때 새롭다는 말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 지배 계급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요 궁극적으로 마르크스가 바라는 세상이 오면 모든 사람의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특정한 의도를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정신과 의식으로 표상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지닌다. 한편 제사장의 경우를 보면 이데올로기의 발생이 분업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데, 마르크스는 분업을 폐지하는 것이 인간 해방을 위해 결정적인 계기라고 말하고,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업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룬다. 노동 분업은 단순히 노동의 종류에 따른 분업만을 만들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분배의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서는 소유의 불평등을 낳는다. 노동이 분화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배타적인 노동영역을 갖게 되고 이 영역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에서 배분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영역에 인간이 구속되는 모순이 나타낸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생산 전반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한 가지 영역에만 얽매이지 않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아침에는 사냥 낮에는 낚시 저녁에는 목축 밤에는 비판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일은 꿈일까? 생산력이 발달하고 대부분의 생산 영역이 개인의 이해에 따라 조작되지 않는다면, 즉 생산이 사회적으로 조절된다면, 꿈 같은 이 일이 실현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우리가 이런 일을 꿈으로 생각하고 현실은 결코 이런 이상 상태가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어떤 이상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 상태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오늘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공산주의 사회는 마치 어린이에게 뒷날 어른 몸의 모습처럼 주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어른이 되기 위해서 현실적인 노력을 다하는 가운데 실현되는 현실적인 운동 과정이고 그 산물인 것이다.
현실적인 실천으로 묻고 대답하라
역사를 사상이나 이념이 지배해 온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관의 신비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벗겨진다. 마르크스는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지배 계급의 사상이지만 그 사상이 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의 사상이 되고 나면 결과적으로는 사상의 뿌리인 사회적 생산 관계에서도 독립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지배 계급이 한 시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이 시대와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이제 철학자들은 사상과 이념이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결론으로 비약한다. 철학자들은 이것이 환상임을 깨닫지 못한 채 역사를 더욱 더 이념적인 형태로 서술하고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헤겔뿐 아니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그 시대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이 유치한 환상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이 아니라 이념에 발을 딛고 거꾸로 서 있었기 때문에 자연이든 역사든 거꾸로 서 있는 것이 아주 정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철학자들은 오직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절대 자아의 세계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소매상인조차도 일상 생활에서 말로만 있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데 오직 철학자들만이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도덕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현실적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역사에서 자유가 승리했다고 말할 때에도 자유라는 이념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 승리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도덕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말한 때와 자유가 승리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낮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착취조차 사상이나 이념이 하는 일이고 우리는 그 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셈이다. 현실에 대한 이 모든 왜곡과 거꾸로 서기의 근본 이유는 그 동안 철학이 인간과 세계의 해석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해석하기만 한다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현실은 언제나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변하고 만다. 철학을 바로 세우고 인간을 현실에 개입하도록 만드는 일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함께 마르크스의 철학 작업은 끝났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철학 작업이 끝났다는 말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철학 작업이 종말을 고했다는 뜻이지 마르크스가 철학을 폐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 마르크스가 인간과 사회를 더 이상 이론과 학문의 입장에서만 보지 않고 사회 경제 활동, 즉 인간이 활동하는 토대인 사회 경제 조건들에서부터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고, 둘째 철학은 이제 해석하는 이론 작업이 아니라 변혁하는 실천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에서 변혁하는 실천 행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경제결정론'이라고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처럼 경제 활동에 초점을 맞추면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역사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의 작업은 구체적인 한 시대의 실증적인 자료를 수집함으로써 한정된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한계는 자료의 분석에만 집착하는 연구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경제 활동을 강조한 것은, '분석'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고 나서 나타나는 낱낱의 빛들을 다시 현실을 통해 모으는 '종합'의 산물이다. 이 때 현실을 통해 모은다는 말은 실천을 끌어들여야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 사상은 사람들이 가진 관념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를 면밀히 분석하여 그 근거를 밝힌 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건설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을 현실 변혁으로 이끌어 나가는 실천 단계로 발전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다른 역사철학이나 역사이론과 구분 짓는 관건은 바로 이 실천에 있다. 이런 뜻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 8번째 테제에서 "모든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고 말하고 곧이어 11번째 테제에서는 철학의 변혁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를 통해 그 때까지 유물론 사상의 한계를 비판했고 거기서 싹으로만 나타나 있던 새로운 유물론의 핵심 사상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리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사변과 관념으로 이해해 온 인간, 사회, 역사를 인간의 물질적 활동과 경제 활동을 통해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새로운 출발이다. 여기에 나타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그뒤 (공산당 선언)을 통해 사회의 물질적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확정하고 사회를 공산주의적으로 변혁하는 혁명의 무기가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연구 성과들은 (자본론)에서 집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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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전과 문제의 고민
현재 재학 중인 학과가 마음에 맞지 않아 불만이면서도 하는 수 없이 다니고 있는 학생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대학별로 보면 적은 데는 23%에서 많은 데는 58%에까지 달하고 있다. 졸업 후 취직이 잘 된다는 이른바 인기 학과의 학생 중에도 상당수가 전과를 희망하고 있다. 이렇게 전과 희망자가 생기는 이유와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지각이 생겨 스스로의 자질이나 역량을 옳게 짐작하여 자기의 가정 형편이나 사회적 정세 또 앞으로의 전망을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 학생은 자기의 이상이나 취미에 가장 적합한 인생 계획을 설계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학생은 이를 준비하기 위해 우선 적합한 대학과 학과를 정하고 입학할 수 있게끔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 계획을 세우고 학교 선정을 하는 데 학생 혼자서만 하기는 벅찬 일이고 또 불안스러워서 부모와 교사 혹은 선배들과 상의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학생 본인이나 상담 상대가 지각 있고 성격적으로 성숙하여 올바로 학과를 선정하고 무난하게 입학할 때에는 순조롭게 발전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참된 자기 이해와 객관적인 자기 평가에 입각하여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지향하고, 이에 따라 대학이나 학과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나 학과를 결정하는 데 자기 중심적인 허욕과 기분에 따라 또는 유행에 휩쓸려 선정하는 수가 많다. 동무와의 경쟁심에서 또는 저 친구가 저 학교에 가는데 낸들 못가랴 싶어 그 쪽으로 지원하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님이 저 대학을 다녔으니 나도 꼭 그 대학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덮어놓고 지원하려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객관적인 자기 평가 없이 일시적인 기분이나 유행에 따라 실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을 신경질적이라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또는 학과 선정이 신경증적으로 이루어질 때 입학 후 반드시 후회하게 되고 재선정, 재출발의 고민을 하게 된다. 신경증적인 부모나 교사의 조언을 좇다가 진로를 잘못 택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부모 스스로가 원하던 직업을 갖지 못했거나 다니고 싶었던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 부모들은 자신의 꿈을 자녀를 통해 성취해 보려고 자녀에게는 접합하지 않은 대학이나 학과를 지원하게 하는 수가 있다. 또 담임 교사는 학생들을 일정 대학에 되도록 많이 진학시킴으로써 높이 평가받는다는 생각으로 학생 개개인의 적성이나 장래 성공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많이만 들어가게끔 지원하게 하는 수도 있다. 이같은 부모나 교사는 모두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인해 자녀와 학생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아무리 학생 본인이 그의 자질이나 역량을 잘 고려해 진학했다고 하지만, 그는 지원 학과의 교과 내용이나 장래 풀려 나갈 직장 영역에 대해 그릇된 정보를 가짐으로써 입학 후에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국문학과'는 소설이나 쓰고 공부를 하고 '영문학과'는 영어를 배우며, '교육학과'는 교사가 되는 학과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들어와 보니 막상 그것이 아니더라고 낙담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자기 중심적인 기분과 정확하지 못한 편견에 의거하여 본인의 적성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한 생각으로 진학해 겪어 보니 예상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다 객관적으로 자기를 평가할 수 있고 장래를 더욱더 절실하게 예감하면서 현학과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학과 변경이라는 게 용이한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되어 실망과 고민은 심해진다. 마음잡지 못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자제력을 잃어 되는 대로 살아가는 학생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전과를 희망하고는 있으나 이것을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는 학생들이 취할 방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자기는 현학과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학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나 선재 또는 교사에게서 받은 학과의 교과 내용과 장래 진로에 관한 지식이 정확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입학 후 반년이나 일년 사이에 경험하면서 알게 되는 현학과에 대한 정보도 오류에 찬 것일 수 잇다. 그러므로 현학과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해당 교수나 과의 선배를 만나 학과의 성격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학과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이 이 학과에 적합한 위인인가의 여부를 고려해야 한다.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앞으로의 조건, 자기 자신의 지능, 성격, 흥미, 역량, 가치관 등을 고려해서 자신의 학과가 적합한가를 따진다. 이 문제를 학생 스스로가 결정짓기는 막연하므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지도해 줄 전문가를 찾는 것이 좋다. 이런 상의에 응할 만한 선배나 친척 또는 교수들이 있을 것이요, 이런 문제를 전담하는 기관을 찾는 것도 좋다. 현학과에 대한 불만은 이제까지 말한 소질, 가치관, 흥미의 차이에 따른 부적응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본인의 성격상 어떤 열등감이 원인이 되어 덮어놓고 불평, 불만만 토로하여 잘 적응해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학생들이 현학과에 대한 불만과 부적응은 현학과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부적성에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감이 현학과에 전가되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경우 현학과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현실 전체에 적응하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 한다. 현상황에 불만을 느껴 다른 학과를 원하고 잇지만, 그곳으로 옮겨간다고 해서 잘 적응될 가능성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잘 아는 사람 중에 처음 전공한 학과를 버리고 다른 과로 학사 편입하여 전공을 바꾼 사람이 셋 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모두 현재는 먼저 전공했던 학과에 관계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예는 전과 희망자 중 상당수가 성격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요인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에 적응하려면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현학과에 맞지 않는다고 개탄하며 고민하는 사람 중에는 현학과에 열중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학과 공부에 파고들어 가면 진지한 흥미를 가지고 전공하라 수도 있다. 사실 현학과를 열심히 공부해 보지도 않고 그 학과가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두 성격적 부적응성에서 오는 것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판단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요인을 밝히기 위해서도 성격 진단에 도움되는 전문 기관을 찾아 상의해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러 가지를 검토한 끝에 전과하는 것이 좋다고 결론지었을 때는 서슴지 말고 전과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학제나 사회적 형편상 학생들의 전과가 그리 쉽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그 길이 전혀 없는 것만도 아니다. 동일한 대학 내에서 유사 학과끼리는 사무적으로 전과가 가능하며, 각 대학이 편입학 시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학사 편입 제도나 대학원 진학에서도 타학과 전공 학생을 받아 주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정당한 전과 희망은 해결될 수 있다. 공연히 불가능하다고 고민만 하다가 귀중한 대학 시절을 우물쭈물 헛되게 지내지 말기를 바란다.
"196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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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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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고장난 오르간
어떤 왕의 거대한 궁정에 오르간이 하나 있었다. 왕은 그것을 매우 아꼈지만 어디엔가 고장이 있었다. 그 오르간은 매우 독특한 것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수리할 줄 몰랐고 아무도 그와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이 왕이 아주 어릴 적, 그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그 오르간 소리를 들었었는데 그때 이후로는 고장이 나버렸다. 그러나 왕은 그 오르간을 몹시 아꼈으므로 자기의 방 안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곁에서만 봐도 아름다웠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많은 기술자가 불려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많은 노력을 했으나 점점 더 나빠질 뿐이었다. 그 오르간은 점점 더 망가졌고 그 왕은 희망을 잃었다. 그 오르간은 고쳐질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늙은 거지가 나타나서 문지기에게 말했다. "오르간이 고장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 문지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러 나라에서 뛰어난 기술자와 음악가들이 왔었으나 어디가 고장인지를 몰랐고, 그 오르간이 너무 복잡해서 그것이 어떤 형태의 오르간이며 어떤 종류의 음악이 연주될 수 있는지조차도 몰랐었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웃음을 터뜨리려다 그 거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거지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믿을 만한 듯이 보였다. 거지는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비록 거지일 망정 그의 얼굴은 당당해 보였다. 그 문지기의 마음은 말하고 있었다. "아마 또 한 번의 시간 낭비가 될 거야." 그러나 그의 가슴은 말했다. "이 사람은 매우 자신에 차 있는 듯한데 한번 고쳐 보게 한들 또 어떻겠나?" 그래서 그는 그 거지를 왕에게 데리고 갔다. 거지를 보자 왕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많은 기술자가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대는 미쳤음에 틀림없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그 거지가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 오르간은 벌써 완전히 고장이 나 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고장낼 수도 없을 것이니 폐하께서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신들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왕은 생각했다. '그의 말이 옳다. 더 이상 고장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승낙했다. "좋아, 한번 고쳐 보게." 여러 날 동안 그 거지는 오르간 뒤에서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한밤중에 그는 오르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궁전 전체가 미지의 멜로디와 매우 신성한 뭔가로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달려왔고 왕도 침실에서 나와서 말했다. "그대가 해냈구나. 그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그대는 기적을 행했네!" 그 사람이 말했다. "아니오,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아버님 때에 제가 이 오르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 그대가 준비되어 있다면 더 이상의 피해가 그대에게 가해질 수는 없다. 그대는 이미 피해를 받고 있으며 나는 더 이상 그대를 해칠 수가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눈을 바라보고 나의 목소리를 느껴 보라. 나에게 기회를 달라. 그것은 어렵지 않다. 일단 그대가 무한속으로 녹아들게 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나온 그 근원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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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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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0 대륙의 실패를 거울삼아 - 장개석의 대만 통치 시작 (1949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3년 / 카이로 선언. 한국의 독립 결의 1945년 /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됨 1945년 / 8, 15 해방.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
대만이 청대 이후 중국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가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자 대만인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은 이 저항을 강력하게 무너뜨렸다.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대만은 일본의 대재벌인 미쓰이, 미쓰비시 등의 독점자본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했다. 일본의 통치에 대한 대만인들의 저항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신해혁명에 고무되어 일어났던 무장 항일봉기, 5, 4 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민회 등의 의회설치 운동이 있었고 국민혁명의 시기에는 대만 공산당, 대만 농민 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항일운동은 철저히 탄압당했으며 일본은 일본어 보급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때에는 20여만 명의 대만인들이 징집되어 동남아시아 전선 등지로 끌려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 치하 조선과 흡사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망 이후 대만을 다시 중국영토로 회복시킨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45년 일본은 물러갔고 대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 아래 속하게 된다. 국민당 지배하의 대만 역시 중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국민당의 부채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미국의 문서에 의하면 대만에 파견된 신임 장관은 오만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섬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대만에서 주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47년 2월 27일 정부의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던 한 노파가 단속반에게 폭행을 당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에 항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경찰은 항의하는 군중에게 총질을 했다. 그 다음날 28일 이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장관 집무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경찰은 또다시 이 시위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른바 '2.28사건'이다. 사건은 확대되었다. 대만의 유력인사들은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항의 요구안을 제시했다. 신임장관이었던 진의는 반발이 거세어지자 그들과 타협하는 듯 하면서 시간을 번 다음 본토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3월 8일 2천여 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이후에도 군대를 계속 증파했다. 3월 9일부터 섬 전체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다. 국민당의 경찰과 군인은 행인을 약탈하고 총질을 했으며 총에맞은 부상병을 치료하던 간호원에게까지 총탄을 퍼부었다. 숨거나 도망가려는 자는 무조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약 3만 명 정도가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49년 대만 전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으며, 그 계엄령은 87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49년 12월 10일 장개석은 공산당에 패해 국민당의 50만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중국본토로부토 이주해온 국민당에 의해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된다.
냉전체제의 세계질서 속에서 대만은 미국의 소중한 우방이었다. 미국은 1950년 6월 대만 해협에 미 7함대를 배치하여 대만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은 원조를 했다. 미국은 1970년대 중국과 화해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 및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인정하게 될 때까지 대만과 장개석 정부를 중국으로 인정했다. 대만은 세계적으로 반공투쟁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대만은 냉전체제 아래 미국을 등에 업고 국제적인 지위를 누렸지만 국내에서는 국민당이 계엄령 상태 아래 철저한 장개석의 1인 독재체재를 유지했다. 단, 본토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관리들의 부패 등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했다. 그의 권력은 대만에서도 절대적이었다. 국민당 이외의 당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의회가 있었지만 국민당에 의한 1당제의 절름발이 의회였다. 오래 전에 중국본토에서 이주해와 대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중심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으나 국민당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으며, 대만 독립운동가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국민당 1당, 그리고 장개석 1인의 독재체제 아래 대만은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1960년대에 섬유나 가전제품 등 노동집약적인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지향형의 공업화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현재 대만은 아시아 신흥공업국을 가리키는 이른바 '4마리 용' 중 가장 안정된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외환 보유고를 자랑하기도 한다. 중국대륙과의 경제수준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대만의 지위는 계속 낮아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과 중국의 수교였다. 현재 국민당 지배의 대만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인정하는 나라는 30여 국을 넘지 못한다. 우리 나라도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했고, 이로인해 국내의 많은 화교들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다른 나라와 국교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만은 세계의 많은 나라와 교역을 계속하고 있으며 50만에 가까운 정규군대 및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75년 장개석은 마침내 눈을 감고, 그의 아들 장경국이 대만의 총통이 되어 대를 이어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 장경국도 죽은 뒤 현재는 최초로 대만 출신인 이등휘가 대만을 통치하고 있으며, 일당 독재체제에 대한 민주화 시위에 따라 점차 대만인들의 정치적인 발언권도 강화되어 가는 추세이며 야당의 존재도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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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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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鑒不遠(은감불원) 殷(성할 은) 鑒(거울 감) 不(아닐 불) 遠(멀 원)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탕(蕩)이라는 시는 나라의 흥망(興亡)에 대한 교훈을 노래한 것이다. 하(夏)나라 최후의 왕인 걸왕(桀王)은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다 결국 그들의 반항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16세기경 상(商)부락의 지도자인 탕(湯)는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4세기경에는, 상나라의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지역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1세기 중엽 당시 서백후(西伯侯)의 아들인 발(發)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은나라가 멸망하기 전, 서백후는 주왕에게 간언하기를 넘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가지와 잎은 해가 없어도 뿌리는 실상 먼저 끊어진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鑒不遠 在夏後之世) 라고 하였다. 鑒은 선례(先例) 본보기 라는 의미로 쓰였으니, 殷鑒不遠(An example is not far to seek) 이란 본보기로 삼을 만한 남의 실패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 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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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하(夏) 은(殷) 주(周)의 3왕조 중 殷王朝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라는 희대의 요녀독부(妖女毒婦)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國庫)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음주폭락(飮酒暴樂)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다가 충간자(忠諫者)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지형을 일삼는 악왕(惡王)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주왕(紂王)의 포학(暴虐)을 간(諫)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의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처형 당하고 서백(西伯)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 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殷王朝)의 시조인 탕왕(湯王)에게 주벌(誅伐) 당한 하왕조(夏王朝)의 걸왕(桀王)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라'고 충간(忠諫)하다가 화(禍)를 당했는데 그 간언(諫言)이《詩經》'大雅篇'의 '탕시(湯詩)'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先例)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삼공(三公)에 이어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末路)를 되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怨聲)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離叛) 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發)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원 말】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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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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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인류 최초의 거울은?
깨끗한 웅덩이의 잔잔한 수면이 인류 최초의 거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3500년경 청동기 시대가 되자 금속을 닦아서 만든 거울이 사랑을 받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청동 거울을 단순한 나무나 상아 또는 금 손잡이에 끼웠다. 이집트인들은 동물이나 꽃, 새를 조각하여 디자인이 멋진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집트의 묘지에서 발견된 많은 거울들을 보면, 옛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손잡이는 사람이 청동 거울을 머리 위로 받치고 있는 디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금속 거울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이 기술을 이집트에서 배웠다. 모세는 이동 신전을 위해 제식용의 커다란 대야를 만들 때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거울을 내놓도록 했고 그것을 '놋쇠 대야' '놋쇠 받침'이라고 했다. 기원전 328년에 그리스에 거울 가공 기술학교가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금속판의 반사면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모래로 닦는 정교한 기술을 배웠다. 그리스의 거울에는 원반형과 상자형 두 종류가 있었다. 원반형 거울은 표면이 깨끗이 닦였고 뒤에는 조각이나 부조 장식이 있었으며 테이블에 세울 수 있도록 다리가 하나 달려 있었다. 상자형은 두 장의 원반형 거울이 조개처럼 닫히도록 만들어졌고 한 장은 깨끗이 닦은 것, 또 하나는 닦이지 않은 것으로 거울을 보호하는 뚜껑 역할을 했다. 거울 제조업은 에트루리아와 로마에서 크게 번창하여 땅에서 파낸 것이나 수입품 등 모든 금속을 닦아 냈다. 그렇지만 거울의 재료로는 은이 애용되었다. 은이 가지는 중간색이 얼굴의 메이크업 색조를 바꾸지 않고 비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경 금 거울이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대부호의 집에서는 하인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전용 금 거울을 요구할 정도였고, 많은 하인들은 임금의 일부로 거울을 지급 받았다고 옛 기록은 전한다.
중세까지 남녀 모두 선조가 사용한, 금속을 닦은 거울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1300년대에 들어서 화장대의 필수품인 이 거울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유리는 기독교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형틀이나 입으로 불어서 병이나 컵 또는 장식품으로 가공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300년 밀라노에서 베네치아의 유리를 부는 기능공에 의해 유리 거울이 탄생했다. 유리를 부는 기술은 예술의 극치였으며 기능공들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유리를 불 만큼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유리 거울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다. 금속과 달리 유리는 모래로 닦아도 쉽게 반사면이 깨끗해지지 않았고, 형틀에 흘려 보내는 완전한 판유리를 만들 필요가 필요가 있었다. 이 기술이 처음에는 미숙했기 때문에 초기의 유리 거울은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지게 비추었다. 하지만 유리 거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다. 14세기의 베네치아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가 최고로 중요한 일이었다. 부유한 남성, 여성 모두 펜던트의 보석 대신 금줄에 유리 거울을 붙이고 보란 듯이 목에 걸고 다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실망할 정도로 심한 모습이라도 타인의 눈에 비친, 거울을 단 자신의 이미지는 틀림없이 품위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남성은 도검의 손잡이에 작은 유리 거울을 박고 있었다. 왕족들은 상아나 은, 금으로 테두리를 한 유리 거울을 많이 수집했으나 실제로 사용하기보다는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거울은 기능보다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잘 비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거울의 질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는데, 1687년에 프랑스의 유리 부는 기술자였던 베르나르 페로가 아주 편편하고 찌그러짐이 없는 판유리의 제조법을 고안하여 특허를 땄다. 그러고 나서 완벽하게 비추는 유리 거울뿐만 아니라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까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즐거움을 앗아간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용모를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무시무시한 병인 천연두가 1600년대의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것이다. 한 번 휩쓸 때마다 몇 천 명이 픽픽 쓰러져 죽었고, 많은 사람의 얼굴에는 수두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보기 흉한 곰보가 되었다. 유럽인 대부분이 많든 적든 지저분한 곰보 자국 때문에 얼굴의 윤기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별이나 초승달, 하트 모양을 한 패치(patch ; 한 번에 열 개도 넘게 붙였다)가 곰보 자국에서 시선을 빼앗는 수단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패치는 검은 비단이나 빌로드로 눈가, 입가, 뺨, 이마, 목, 가슴에 정성스럽게 붙여졌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붙였다. 남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에는 실로 효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프랑스에서는 패치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곤충인 '파리' 라는 뜻으로 '무슈'라고 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여 여분용 패치 상자를 만찬회나 무도회에 갈 때 휴대했다. 패치 상자는 작고 얇았으며 뚜껑 안쪽에 작은 거울이 붙어 있었다. 현대 콤팩트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패치를 붙이는 일은 무언의(하지만 매우 알기 쉬운) 언어로까지 발전했다. 여성의 입가에 붙인 패치는 바람을 피우고 싶다는 신호, 오른쪽 뺨은 기혼, 왼쪽 뺨은 약혼중임을 의미했고 눈가의 패치는 가슴에 숨긴 정열을 나타냈다.
1796년 의학적인 차원에서 패치의 필요성은 없어졌다. 영국의 한 시골 의사인 제너가 농촌의 여덟 살짜리 소년에게 가벼운 천연두라고 할 수 있는 우두를 접종했던 것이다.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우두 접종설을 실험한 것이다. 접종 후 곧이어 소년에게 가벼운 발진이 나타났다. 그것이 사라지자 제너는 더욱 위험한 천연두를 접종했다. 소년에게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면역이 생긴 것이다. 제너는 이 처치를 우두를 뜻하는 라틴어인 'vaccinia'에서 이름을 따 'vaccination(종두)'이라고 이름지었다. 우두 접종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천연두는 사라졌고, 패치는 가리개용 필수품에서 멋부리는 화장용품으로 변해 갔다. 멋부리는 화장품인 패치에서 펜슬로 그리는 점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보석을 박은 패치 상자에는 딱딱한 파우더가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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