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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2호
2012.1.2 (음 12.9)/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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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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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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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는 최신의 연구서를 읽으라. 문학에서는 최고(最古)의 책을 읽으라. 고전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 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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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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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한계와 한도
9초75. 10년 전 스포츠과학자들은 육상 100m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를 이렇게 예측했다. 현재 공식 세계기록은 9초77. 10년 전 예측에 거의 도달했다. 스포츠과학의 발달로 최근엔 10년 전 추정치보다 기록을 더욱 단축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과연 100m의 인간 한계는 얼마일까?
'한계(限界)'는 사물.능력.책임 따위가 실제 작용할 수 있는 범위 또는 그런 범위를 나타내는 선을 말한다. "한 네덜란드 교수가 '육상 100m의 한계는 9초50'이란 기존 학자들의 예상치보다 더 낮춘 9초29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에서 '한계'는 사람이 100m를 9초29보단 빨리 뛸 수 없다고 여긴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처럼 '한계'는 어떤 범위 이상은 없다고 볼 때 사용한다.
'한계'와 유사한 말로 '한도(限度)'가 있다. 일정한 정도 또는 한정된 정도를 일컫는 말로 "다리운동을 할 때는 허리나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는 게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도전하고 싶다"와 같이 쓴다. 주로 어떤 범위 이상은 넘어설 수 없다고 보는 경우에 사용한다.
두 낱말이 범위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쓰임이 비슷한 것 같지만 정해진 범위 이상은 없다고 볼 땐 '한계', 정해진 범위 이상은 넘을 수 없다고 여길 땐 '한도'를 써서 표현한다. "인간이 지닌 시각 능력의 한도는 24분의 1초다"처럼 '한계'가 올 자리에 '한도'를 사용하거나 "1만원 한계 내에서 물건을 사라"와 같이 '한도' 대신 '한계'를 쓰면 어색한 문장이 된다.
[우리말 바루기] 가늠하다, 가름하다, 갈음하다
ㄱ. 사망 또는 결격된 자에 가름하여 상속인이 된 자의 상속분은 사망 또는 결격된 자의 상속분에 의한다. ㄴ. 이번에 지는 팀은 재기하기가 어렵다. 선수 여러분은 이 경기가 올 한 해 농사를 가늠한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주길 바란다.
위 예문에서 보듯 '가름하다' '가늠하다' 는 헷갈리기 쉬운 단어들이다. '가름하다'는 '사물이나 상황을 구별하거나 분별하다'란 뜻이다. 즉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실수가 그날의 승패를 가름했다" "사과를 하는 게 나을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을지 가름하기 어려웠다"처럼 쓸 수 있다. '가늠하다'는 "어떤 것을 짐작해서 헤아려 보다"란 뜻이다. "그는 그 도랑을 뛰어서 넘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외국인의 경우 얼굴로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처럼 쓰인다.
가늠하다, 가름하다 외에 '갈음하다'도 있는데 이는 '다른 것으로 바꾸어 대신하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부상으로 빠진 그를 갈음할 만한 선수가 없다" "옛날에 찍은 사진을 보여 드리고 싶었지만 잃어버려서 이 사진으로 갈음합니다"처럼 쓸 수 있다.
ㄱ의 경우는 '죽었거나 자격이 없어진 사람을 대신해 상속받는'이란 뜻이므로 '갈음하여'로 써야 하고 ㄴ은 이번 경기에 따라 올 한 해의 성적이 좋은 쪽, 또는 나쁜 쪽으로 갈린다는 뜻이므로 '가름한다'로 쓰는 게 문맥에 맞다.
[우리말 바루기] 바람피다 걸리면?
얼마 전 한 영화 사이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팜므 파탈'(악녀.요부를 뜻하는 말)의 대명사로 불리는 국내 여자 연예인으로 '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열연한 김혜수가 뽑혔다. 이 영화의 제목 '바람피기 좋은 날'은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 맞는 말이다. "결혼생활 중 바람피다 발각됐을 경우 남성은 평소보다 더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여성은 강하게 부인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다"처럼 '바람피다'는 말이 흔히 쓰이고 있으나 '바람피우다'고 해야 한다.
'피다'는 "철쭉이 피었다" "아이는 얼굴이 피고 살이 올랐다" "소나기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피었다" "사업이 잘 돼 형편이 좀 피었다" "웃음꽃이 피었다" 등처럼 '꽃봉오리가 벌어지다' '혈색이 좋아지다' '구름이나 연기가 커지다' '수입이 늘다' '웃음이나 미소가 겉으로 나타나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피우다'는 '피다'의 사동사로도 기능을 하지만 일부 명사와 함께 쓰여 그 명사가 뜻하는 행동이나 태도를 나타낸다. '재롱을 피우다' '어리광을 피우다' '게으름을 피우다' '담배를 피우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바람' 역시 그 명사가 뜻하는 행동이나 태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피다'가 아니라 '피우다'와 결합해 '바람피우다'가 된다. 따라서 '바람피기 좋은 날'은 '바람피우기 좋은 날'이라고 해야 한다. 바람을 피우는 것과 관련해서는 이른 나이에 하는 외도를 뜻하는 '일바람'이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바람피우다'가 '허황된 짓을 자꾸 하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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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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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팔자 - 김나영
‘야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 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 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까지 시켜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 만원이 넘는 큰돈을 삼일 만에 펑펑 다 써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질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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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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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의 세계에 연꽃이 피다[1] - 유권재
감아둔 겁(劫)이 풀려 되감은 겁을 지나
그러고도 한 천년 더 지나 온 인연 앞에
앞 다퉈 살아온 생이 부끄럽기 그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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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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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 박두순
1 밤하늘이 별들로 하여 잠들지 않듯이
들에는 더러 들꽃이 피어 허전하지 않네.
2 너의 조용한 숨결로 들이 잔잔하다.
바람이 너의 옷깃을 흔들면 들도 조용히 흔들린다.
3 꺽는 사람의 손에도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의 발길에도 향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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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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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6장 인생의 항연
4. 유물론의 오해
윗 절에 예거한 인생의 유쾌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이 쓴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다 진실한 인생에 있어서는 정신적 즐거움과 육체적 즐거움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정신적 즐거움은 육체를 통해서 감득될 때에만 진실하여진다. 나는 그 속에 도덕적 즐거움도 포함시키고 싶다. 저 옛날의 에피쿠로스 파(향략주의파)나 스토아 파(금욕주의파)의 철학자들이 가끔 사회의 오해를 받았던 것처럼 그 어떤 교의를 주장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세인의 오해쯤은 각오해야 한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로마 황제, 철학자 121~180)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의 정신 속에 숨겨진 본질적인 정애가 그 얼마나 잘못 보여져 왔던가. 또는 지혜와 절욕을 주장하는 에피쿠로스 파의 교의가 쾌락주의라고 일반에게 해석되는 일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어딘지 모르게 유물론적인 느낌을 받는 이러한 철학 사상에 대해서는 그것들은 이기적이라느니, 사회적 책임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느니, 자기만의 쾌락에 빠지는 것을 가르친다느니 하는 여러 가지 반대론이 대번에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론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논자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인생 애호자의 따뜻한 마음씨는 말할 것도 없고, 냉소주의자의 정애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의 동포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의나 신조도 아니고, 지적 확신의 문제도 아니며, 또 논의에 의하여 지지될 명제도 아니다. 이유가 필요한 인류애는 참된 사랑은 아니다. 참된 사랑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마치 새가 깃을 퍼득이듯이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건전한 마음에서 저절로 솟아나서 대자연에 접촉하며 움직이는 때묻지 않은 감정이어야 한다. 진심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동물이나 동료에게 참혹한 짓은 할 수가 없다.
인생이나 동료에 대한 직각, 자연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춘 극히 건전한 정신에 있어서는 정애란 당연한 일에 속한다. 그러한 사람의 마음에는 정애를 가르치는 철학도 인공적인 종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정신은 자기의 감각을 통해서 적절하게 함양되었고 기교적인 생활이나 더우기 기교적인 처세술 같은 것을 어딘지 모르게 대관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도덕적, 정신적으로 건전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을 파고 흙을 치워 이 정애의 샘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이때 이것을 가리켜 애타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비난은 받을 까닭이 없다. 유물론은 오늘날까지 오해를 받아 왔다. 개탄할 정도로 오해를 받아온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조오지 산타야나로 하여금 답변하게 해야겠다. 그는 스스로 칭하여 <유물론자... 아마도 현존한 유일한 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현대인 중에서 가장 정애가 깊은 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받고 있다. 그 말에 의하면 유물론 철학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것은 유물론을 외부에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지켜온 신앙과 비교해 봄으로써만 겨우 알게 되는 어떤 결함을 유물론에서 발견하고는 일종의 놀라움을 느낀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까지 알지 못했던 신앙이나 종교나 국가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새로운 세계의 정신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전혀 오해하고 있는 이른바 이 <유물론>에는 약동과 기쁨, 감각의 건전함이 있다. 산타야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참된 유물론자는 그 언제나 웃는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인물이다. <대체로 귀찮은 지성 때문에 재난이 되어 웃는 능력을 잃은>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즉 <이 어쩔 수 없는 유물론자>들로, 정신주의를 동경하면서도 이기적, 유물적 생활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유물론의 신앙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철저한 유물론자, 또 기독교의 세례를 엄동에 무심코 받고 나서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신자들과는 유를 달리하는 철저한 유물론자란 저 웃는 철학자 위대한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인물이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형상이 되어 나타나고 또 수없이 많은 굉장한 정열을 낳은 대자연의 기구를 내다보는 데모크리토스의 기쁨은 생물 박물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저지성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표본 상자 안에 있는 수없는 나비, 홍악이나 갑각류, 맘모스나 고릴라가 거기에 있다) 틀림없이 그 수많은 생명에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곧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야외극은 그 얼마나 훌륭한 한때였으며, 또 저 우주의 상호 작용 속에는 그 얼마나 끝없는 감흥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너무나도 사소한 여러가지 욕정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피하기 어려운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유물론이 사람의 억센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정감이며, 적극적인 기쁨에 가득차고 개인적으로 떨어지는 일 없이, 자기의 환상을 존중하며, 조그마한 냉소조차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옛부터 유물론적인 윤리학은 모든 생물의 침통한 슬픔을 냉담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유물론적인 논리학은 고통을 느끼는 신경 조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몹시 무서워 떨며 인간의 의지가 꺾여 넘어가지 않도록 고행자적인 태도로 그 의지를 되찾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슬픔을 경멸하는 것은 호산나를 부르며 절대 낙천론의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나 순전한 허영심과 자기 기만에서 생긴 여러 가지 악덕에 대해서나 또는 자기는 우주의 종점이며 절정이라고 믿고 득의양양한 태도를 취하는 무리들의 언론에 대해서는 유물론적인 웃음이야말로 안성마춤의 방위가 된다. 웃음에는 또 다음과 같은 미묘한 이점도 있다. 즉 유물론자는 깊은 동정이나 우정이 없는 곳엔 아예 가기를 싫어한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가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이나 재미난 이야기를 읽고 웃기는 하지만 이 영웅의 의향까지를 비웃지는 않는다. 그의 열성만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그러나 인간 세계를 적절하게 개량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세계부터 잘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도, 만일 그것을 얻고 싶다면 우선 이성에다 기준을 두고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언제나 자랑거리로 삼아 왔고, 또 관능적 생활보다 늘 상 위에 올려 놓아온 이러한 지능 생활이니, 정신 생활이니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불쌍하게도 현대 생물학은 정신이라는 것을 동물 섬유나 분비액이나 신경으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본디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대체로 믿는 바로는 낙천주의는 하나의 분비액이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순환분비액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는 신경의 한 상태다. 정신 생활이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것은 또 무엇에 의해서 존재하고, 어디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것인가. 철학자들은 진작부터 인간의 모든 지식은 지각적인 체험에서 생긴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우리는 시각, 촉각, 후각 등이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렌즈와 감광판이 없이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라는 것도 결국 전자가 후자에 비해서 선명한 영상이 비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정교한 렌즈와 건판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상의 지식으로부터 인생의 참된 지식으로 나아가려면 다만 사유나 사색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자기의 독특한 방법을 감득 해야만 한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생과 인간성에 관한 무수히 많은 모든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상을 서로 떨어진 관계가 없는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을 느끼고, 경험을 쌓으려면 우리의 모든 감각은 힘을 합쳐 활동한다. 지상에 빛나는 따뜻함이 마음 속에 생기는 것은 이러한 여러 감각이 서로 협조하고 또 심정과 지능이 서로 협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따뜻함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체로 푸른 빛이 나무의 표시인 것처럼 그것은 인생의 표시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그러한 지성의 따뜻함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된다. 마치 그것은 그 어떤 불행한 재해 끝에 괴로와하고 있는 죽어가는 나무가 아직 살아 있는지 어떤지를 알려면 잎에 생명의 빛이 있는지, 수분이 있는지, 섬유의 조직은 튼튼한지, 그러한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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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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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0.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les(1807) -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 우기동(성균관대학교 강사)
고전 문학과 철학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한 사상가의 위대함은 그의 사상이 당대에 끼친 영향은 물론이고 후대에 끼친 영향으로 평가한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 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 말은 바로 헤겔 철학이 서양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 한다. 헤겔은 베토벤과 횔더를린이 태어난 해인 1770년 8월 27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공국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고등학교(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788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다. 지극히 모범생이던 헤겔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지켜 보면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라는 인류의 고귀한 가치를 전파했고, 당시 유럽의 학생들은 그 영향으로 자유와 혁명을 찬양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헤겔도 다른 학생들과 더불어 '자유의 나무' 둘레에서 춤을 추면서 혁명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다. 헤겔이 매년 기념일마다 프랑스 혁명을 자축하며 포도주를 마셨다는 일화는 혁명이 그에게 얼마나 깊고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학창 시절 횔더를린, 셸링 같은 친구들과 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유를 표항하는 '학생 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스의 비극 문학, 계몽주의 문학, 루소의 작품 등을 섭렵했고, 이 때 이미 철학에 관심을 가져 플라톤, 야코비, 스피노자 등을 공부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와 혁명의 이념을 통해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는 한편, 지적 열망을 채워주는 문학과 철학의 공부를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전공이던 신학 공부는 등한시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1804년에 가서야 부모님의 소원대로 신학 공부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고전 문학과 철학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헤겔은 1801년 (행성의 궤도에 관한 철학적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획득하여 예나 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주로 자연법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을 강의했다. 이 예나 시절에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괴테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실러, 셸링 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 셸링은 1798년 부터 피히테, 슐라이어마하, 슐레겔 등과 (철학비평지)를 공동으로 발간하고 있었는데, 셸링과 피히테의 사이가 멀어지자 피히테 대신 헤겔이 1802년 공동발간인으로 참여하게 되고, 여기서 헤겔은 "독일 헌법론" "철학적 비판 일반의 본질"과 같은 현실적이고 예리한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셸링이 친구인 슐레겔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고 덕분에 슐레겔과 극도로 사이가 나빠져 예나를 떠나자 (철학비평지)의 발간도 1803년 중단되었다. 그 뒤 헤겔은 대학 강의에 전념했고 1805년에는 괴테의 추천으로 원외 교수가 되어 철학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헤겔은 강의를 하면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다듬어 갔다. 드디어 1807년 헤겔 철학 체계의 제1부라 할수 있는 (정신현상학)이 나왔다. 헤겔은 그토록 바라던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밤베르크 신문의 편집장을 거쳐 1808년 친구 니트하머의 소개로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었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에 관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813년 변증법을 체계화한 (논리학) 제1권을 간행했다. 이미 1811년에 뉘른베르크 명문 집안의 딸인 마리아 폰 투허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헤겔은 결혼하기 전 1807년 초에 어느 공작집 하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루트비히를 낳았는데, 루트비히는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1826년 네덜란드의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1831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전사했다. 헤겔의 두 아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첫째는 나중에 역사학자가 되었고, 둘째는 신교의 종교국장을 지냈다. 헤겔은 결혼 생활을 만족스러워 했는데,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세속적인 목적을 완전히 이룬 셈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직장과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다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줄곧 정식 대학 교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소망하던 대학 교수의 꿈은 1816년에야 풀렸다. 1816년 뉘른베르크에서 (논리학) 제2권을 출판하고, 그 해 가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수가 되자마자 자연철학, 정신철학과 같은 철학의 개별 분과를 집대성한 (엔치클로페디)를 출간했다. 1817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1821년 법, 권리, 도덕, 인륜을 다룬 (법철학)을 내놓았다. 헤겔은 서자 루트비히가 인도네시아에서 죽은 해인 1831년 11월 14일 급성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애도했다. "뛰어난 천부의 재능을 지닌 탁월한 향도요, 확고한 기초 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친구를 잃고 말았다."
숱한 대립과 모순의 과정을 겪는 의식의 역사
"헤겔 철학은 그 비밀이 묻혀 있는 정신현상학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의 말이다. 철저히 현실의 철학을 추구하고 실천을 중요시한 마르크스가 관념론의 전형이면서 난해하기로 이름 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어떤 비밀이 묻혀 있을까? 학창 시절에서 보이듯이 헤겔은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 속에서 철학을 연구했다. "날마다 아침 신문을 보는 것이 곧 아침 기도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정신현상학을 쓰는 동안 헤겔은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심한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더구나 나폴레옹과 프로이센 사이의 전투가 있은 뒤 헤겔이 강사로 있던 예나 대학은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기 때문에, 헤겔은 원고를 들고 예나의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우편으로 발송한 원고가 출판사에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매우 불안해 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헤겔은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심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1806년 10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예나 시내를 지나가는 나폴레옹을 보고 니트하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찰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세계 정신을 보았다." 헤겔은 나폴레옹이 자유와 민족주의를 전파한다고 보고 높이 평가했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에로이카(황제))를 작곡한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예나 전투의 포성 속에서 헤겔이 쓴 정신현상학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이 들어 있다. 하나는 철학에서 중요한 인식론의 문제로서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변증법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인간 노동의 중요성을 밝힌 것이다. 첫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 단계를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김포공항에서 눈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이것은 비행기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것이 감각적 확신 단계의 인식이다. 그 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비행기를 보니까 조금 전 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한 말이 또 나온다. 분명히 처음에 "이것은 비행기다"라고 한 것은 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한 말인데 옆에 있는 비행기에도 맞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에 있는 비행기와 옆 비행기가 공통의 속성들, 즉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행기는 모두 몸체, 날개, 바퀴, 엔진 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가 몸체, 날개, 바퀴, 엔진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지각 단계의 인식이다. 그런데 몸체, 날개, 바퀴, 엔진을 을 아무렇게나 조합해 놓으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된 비행기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비행기는 그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구조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 져야 한다. 우리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저 비행기가 구조적 원리에 맞도록 잘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인식은 과학의 법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가령 만유인력 법칙의 경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법칙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돌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 행성의 운동,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 등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만유인력 법칙이 구현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운동을 보고 이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오성 단계의 인식이다. 돌이 떨어지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현상'을 통해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인간 의식이 파악한 사고의 내용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할때 얻을 수 있다. 이런 진리를 얻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이 단계에서는 개별 현상과 보편 본질 사이의 구별이 없고 일치한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으로 전개되는 인식 능력의 각 단계는 이전의 상태를 언제나 잊어버리고 발전하는데, 이전의 단계를 모조리 포함하고 각 단계를 자신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 이전의 모든 단계는 정신의 낮은 형태의 인식 능력이다. 정신은 이성이 인간 사고의 내용과 객관적 사물의 본질을 일치시키고 종합함으로써 생겨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 최고의 절대 지식을 얻는 이른바 절대 정신이다.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은 언제나 낮은 단계의 지식을 매개로 발전하면서도 낮은 단계의 지식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이다. 이런 뜻에서 헤겔의 인식론은 변증법적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은 다른 낮은 형태의 배역들을 무대에 적절히 등장시키면서도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연출자와 같다. 그리고 그 연출자는 배역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빌려 온다.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이성과 같은 의식의 형태들은 그렇게 해서 정해진 배역들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이가 고향 아티카에 도달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처럼, 인간 의식 역시 절대 지식에 도달할 때까지 숱한 대립과 모순의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의식의 이런 운명을 인위적으로 꾸며내어 자신의 예술적 입맛에 맞게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겪어 온 과정을 의식의 형태들을 통해 철학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헤겔 철학은 자기 시대가 던진 현실 문제를 철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노동의 중요성을 끌어낸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자의식과 노동을 설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계급 사회인 고대 노예제가 형성되는 과정에 해당한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이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욕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언뜻 자기 스스로 만족을 얻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무시한 명예, 돈, 권력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명예, 돈, 권력은 사회에서 인정하는 명예, 사회에서 유용한 돈, 사회적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자기 스스로의 만족도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얻는 만족이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서로 인정받으려 하는 욕망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래서 주인 (지배 계급)과 노예(피지배 계급)가 생겼다. 인정을 받기 위해 두 자의식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승리한 쪽은 주인이 되고 패배한 쪽은 노예가 되었다. 이 '인정 투쟁'에서 패배한 노예는 자신을 살려 준 대가로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하면서 주인은 노예의 노동 산물을 향유한다. 노예는 끊임없이 주인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게으름은 곧 죽음을 뜻한다. 노동의 노예가 생존하는 방식이다.고대 노예에게 집어 넣은 죽음 공포는 채찍과 같은 직접적인 물리력이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불어넣은 죽음의 공포는 해고라는 딱지다.
그러나 헤겔은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야말로 자립적인 자의식을 확립하는 계기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노예는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동 대상의 객관적 법칙을 인식하고 그 대상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자신의 잠재 능력에 대한 확인이다. 이에 반해 주인은 물질 생활 전체를 노예에게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자립성을 잃는다. 노예가 없으면 주인은 물질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나아가 생존마저 위협을 받게 된다. 반면 노예는 주인이 없더라도 자신의 창조적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산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인 셈이다.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실질적 관계가 역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자의식을 확립하는 노예의 노동이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이 참으로 현실의 생활을 영위하고 역사를 형성해 가는 원천이다. 헤겔의 이런 노동관은 마르크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동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역사적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헤겔의 철학 체계는 프랑스의 정치 혁명과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해 뒤쳐진 독일이 철학적으로 응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독일의 시민 계급은 산업 혁명을 수행하거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정신 원리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헤겔에게 정점에 오른 독일 관념론으로 나타났다. 헤겔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정신의 발전을 구체적인 현실의 발전과 통일하려 했다. 이런 헤겔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뒤 크게 두 입장,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누어진다. 헤겔 우파 또는 노년 헤겔 학파는 딜타이, 빈델반트, 크로체등이 대표한다. 이들은 헤겔 철학을 궁극의 완성태로 보고 그것에 대한 해석, 연구, 보충 설명을 과제로 삼았다. 헤겔 좌파 또는 청년 헤겔 학파는 브루노, 슈트라우스, 포이에르바흐 등을 거쳐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발전한다. 이들은 헤겔 철학을 새로운 정치와 사회 현실에 맞도록 변형하는 급진적 입장을 취했다. 먼저(정신현상학)에서 나타나 인식론은 헤겔이 칸트, 피히테, 셀링으로 이어진 독일 관념론의 유산, 즉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란 과제를 수행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출발점이었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주관과 객관을 떼어놓고 보면 철학적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보고 어떻게 하든 둘을 통일하려 했다. 헤겔은 주객 통일의 계기를 이성에서 찾았다. 헤겔이 볼 때 절대주의의 폐지, 자유 경쟁의 확립, 법 앞의 평등 등을 실현한 프랑스 혁명은 "이성이 궁극적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때 이성은 개인의 합리적 사고가 아니라 '보편 타당한 신적 원리'다.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인 자유, 주체, 정신 등은 이 이성 개념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예컨대 정신 개념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이성을 의미한다. 역사가 몇 단계로 구분되는 것은 이성이 실현되는 수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주객 통일은 헤겔 역사철학의 근거가 되었으며, 비록 관념론적 이지만 인류의 역사 현실을 설명하는 원리로 등장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노동관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명확하게 구별했다. 헤겔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대상을 변형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스스로 역사을 창출한다고 했다. 마르크스도 동의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노동의 부정적 측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헤겔은 근대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 노동을 무한한 부의 원천으로만 간주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 리카도 같은 근대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이윤을 산출하는 자본은 인간의 노동이 축척된 것이다. 말하자면 부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그래서 노동은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다. 헤겔은 이런 견해를 수용하여 노동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역사의 특정 단계,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 측면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한 핵심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의 부정적 측면은 노동 소외로 나타난다. 노동은 분명히 인간의 역사를 만드는 기본 동력이다. 그러나 특정 조건 아래서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 까닭을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이전 시대보다 훨씬 풍요로운 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생산은 발달한 생산기술을 이용하여 대규모 공장에서 철저한 분업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아래서는 대규모 생산에 동원할 수 있는 대규모 노동력이 꼭 필요한 조건이다. 이런 노동력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자유 임금 노동자에 의해 공급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상품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대가만을 바라보고 기계처럼 일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밍크 코트를 살 수도 없고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서 살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소외 현상이고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 소외의 궁극 원인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다.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노동의 산물은 노동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몫이 된다. 이처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생산에서 노동은 본래 의미와는 달리 소외라는 극도로 부정적 측면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다. 생산뿐 아니라 인류 문화 전체도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노동 소외는 경제적 형태 외에 온갖 종류의 사회 문화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돈만 있으면 상품을 살 수 있으므로 돈을 벌기 위하여 노동한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품과 상품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신주의, 돈이 삶의 전부가 되는 배금주의, 무절제한 과소비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향락주의 같은 것이 팽배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인간 노동이 소외됨으로써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신이 되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 소외는 결국 삶의 가치를 인간 자신에 두지 않고 상품에 두는 가치 전도 현상까지 일으키고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노동의 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밝힌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역사 현실 속에서 노동의 의미와 역할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노동 소외라는 부정적 측면을 폭로한 마르크스의 견해도 새겨 볼 만하다. 노동 소외를 극복하는 길은 어떤 면에서 헤겔이 제시한 노동의 긍정적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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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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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학생들의 연애관
"세대사"는 대학생들의 연애관을 알아보기 위해 6항목으로 된 간략한 설문지를 작성하여 중앙대생, 연대생, 고대생 400여 명에게 응답을 받았다. 표본 추출의 방식이나 질문 항의 형식에 문제점은 있으나, 학생들의 연애관을 어림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아 이 조사를 중심으로 연애관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어떤 특정한 이성의 인격에 접함으로써 쾌락감, 안전감, 행복감 같은 정서적 충족을 느끼게 되어 그 인격체와 독립적이고 영구적인 접촉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연애"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격적 접촉은 신체적 접촉만이 아니라 상징적 접촉 혹은 정신적 접촉으로도 이룰 수 있다. 서로 만나서 살을 대는 것만이 아니라 서신으로 가까이 할 수도 있고 마음이 서로 의기 투합하여 합일하게 되는 경우까지 연애라 한다. 서로 싫어하지 않는 남녀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같이 영화도 보고 음악 감상도 하고, 혹은 전화나 서신으로 의견을 주고 받는 동안에 즐겁고 뜻이 맞아서 각자가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자꾸 이러한 접촉을 시도한다면, 이는 정신적 접촉을 주로 한 연애라고 본다. 이와는 달리 서로 만나서 손잡고 포옹하며 키스와 성교 등으로 즐거움을 찾는다면, 이는 신체적 접촉을 주로 하는 인간적 접촉이라고 본다. 같은 신체적 접촉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활동을 통틀어 성 활동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연애란 말은 이성과 정신적 인격 접촉으로 충족을 느끼려는 과정을 주로 말하지만, 약간의 성적 활동이 으례 수반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너무 결백할 정도로 성적 활동이 없는 연애는 플라토닉 하다고 무시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성 활동은 지나치게 두둔하고 있지도 않다. 너무 성 활동만을 위주로 한 연애는 '성애'니 '치정'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고 '연애'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어쨌든 이러한 연애의 즐거움은 정말로 대단하다. 인간 역사가 기억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를 한껏 찬미하였고, 그래도 다 못해서 앞으로 두고두고 찬미해 갈 것이니 말이다. 연애는 젊은이들의 과업(?)이다. 연애 감정은 아동이나 중년기 혹은 노인에게도 있지만, 대체로 청년기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연애의 본질을 알려면 청년기의 특징에 관련시켜 규명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동이 어른으로 되는 청년기에는 신체적 성장과 더불어 성적으로 성숙되어 왕성한 성욕이 나타난다. 이 강렬한 성욕이 연애에 작용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청년기의 연애를 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연애가 단순한 치정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급격한 성장에서 오는 심한 불안감이다.성인으로서의 독립 생활에 자신이 없고 각박한 세파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불안하기 때문에 청년기에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생활상의 안전을 찾는 요구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사회 관계에서는 자기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를 동반자 내지 지지자로 삼으려 한다. 일반적으로 이를 안정감 욕구라고 부른다. 이 욕구 때문에 어려서는 어머니에게 매달리게 되고 커서는 동고 동락할 동반자를 찾기에 열중한다. 즉 늘 마음의 안정, 즐거움, 쾌락 등을 추구하는 여러 활동이 나타난다. 이렇게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는 활동을 통틀어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곳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니 꽃을 사랑하고, 귀여운 자녀에게서 흐뭇함을 느끼니 자녀를 사랑하게 마련이며,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여 내세까지 돌보아 줄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그이와 같이 있으면 저절로 기쁘고 든든하며 희망이 생기고 사는 보람이 있으니 어찌 그이와 떨어지려고 하겠는가. 이렇듯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것은 안정감 욕구의 반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애는 이성에 대한 사랑이므로 아마도 성욕이 부과되어 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적 활동이 수반되는 사랑인 연애는 사랑이라는 미덕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성 활동이 금기시 되어 많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관이나 이에 대한 견해도 이 점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제껏 연애라는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원동력으로서 안정감 욕구와 성욕을 지적하였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행동이 그러하듯 이러한 행동을 대하는 관념 형태 내지 가치관과 의식 구조가 또한 행동을 좌우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행동이 아무리 하고 싶더라도 그것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면, 그 행동은 실천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연애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각자의 연애관이 문제된다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학생들의 연애관을 아는 것은 그들의 연애 경향을 짐작하는 데절대적인 요건이 된다. 먼저 우리 학생들이 어느 정도 연애하고 있으며 연애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연애에서 고민하게 되는 장해는 무엇인가, 또 문제시되는 성욕을 연애에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짐작하기 위해 결혼과 연애의 일치 여부와 연애 중의 성 관계에 대한 태도를 설문 내용을 중심으로 따져 보기로 하자.
"제1문" 사랑하는 이성이 있느냐? 있다면 그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에 "있다"고 한 사람이 31%, "없다"가 69%였다. 연애 대상에게서 구하는 것으로 행복이 35%, 이성의 인간성 탐구가 21%, 쾌락이 11%, 고독의 해소와 모성애, 배신이 각각 3%, 기타 24%였다. 이 질문 형식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성이라 해도 서로 연애하는 상대만인지 짝사랑하는 대상도 포함시킨 숫자인지가 애매하며, 또 현재 진행 중인 연애만인지 과거에 있었던 연애까지도 포함시켰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일본의 도시 남자 대학생들에게 연애 경험에 대해 설문한 하나의 조사를 보면, 대상자의 약 70%가 경험 있다고 답했다. 그 중 대학 시절의 사랑이 30%정도, 짝사랑이 35%였다. 이런 자료로 유추해 보면, 우리 대학생들이 상호 연애의 약 15% 정도가 대학 시절에 연애 경험을 갖는다고 보겠다. 홍성직 교수가 조사한 우리나라 대학생의 가치관 연구에서는 86%의 학생이 자유의사로 자기의 결혼 상대를 선택하겠다고 되어 있고, 숙명여대 학생 박경애의 조사에서는 대학 시절 남녀 교제를 찬성하는 비율이 96%로 나와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남녀 교제를 원하고 자유 결혼을 바라고는 있지만, 실제로 자유롭게 교제하고 연애까지 하는 학생의 수는 불과 15%밖에 안 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많은 장해를 받고 있음을 알수 있다. 연애 대상자에 대해 구한 답을 보면, 인격적 접촉으로써 자기의 안정감 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 사랑이라는 주장이 새삼 수긍된다. 행복이니 쾌락이니 고독의 해소니 모성애 추구니 하는 모든 것이 허전한 마음의 불안정성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며 연애하는 숫자가 과반수나 된다. 그리고 이성에 대한 인간성 탐구가 21%나 되는데, 이는 이성을 잘 모르고 있어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연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호기심에서의 연애는 호기심의 해소와 더불어 와해되거나 또는 성 유희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므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제2문" 사랑 속에서 느끼는 고민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배신" 27%, "경제적 부족" 23%, "사고 방식의 차이" 6%, "불성실" 5%, "기타" 4%, "모르겠다" 13%, "없다" 22%로 답하고 있다. 이 숫자로 보면 많은 학생들이 연애에서 만족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숫자로 보면 많은 학생들이 연애에서 만족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원하는 것과 기대하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특히 경제력의 부족이 연애에 큰 장해로 작용한다. 때로는 많은 학생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범법 행위를 하기도 한다.
"제3문" 연애와 결혼은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그렇다"가 42%, "그렇지 않아도 좋다"가 58%의 대답이 나왔다. 결혼을 신성시 하지만, 연애 자체는 이것이 성 행동을 수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많이 경계 당하고 있다. 다만 연애는 결혼의 전주곡으로 필요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일치론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일치론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연애의 향락성과 결혼의 실리성을 따로이 인정하는데, 그들은 결혼 전 성 행동을 어느 정도 용납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학생은 과반수 이상이 연애의 향락성 내지 성 행동의 개방성을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는가? 이는 다음에 나오는 질문과 더불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4문" 결혼 전 성 관계를 용인할 것인가? 이 질문에는 31%가 "있을 수 있다"로, 69%가 "있을 수 없다"로 대답하고 있다. 성 관계를 결혼에서만 용인하려는 것을 현대적이라고 하려는 데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 행동을 완전히 개방하였다면, 인류는 발전은 커녕 벌써 존립을 끝마쳤을 것으로 본다. 모든 인류의 정력이 성적으로만 발산되었다면 무엇을 남겼을 것인가. 하여간 결혼 전 성 관계를 상당히 용인하는 편이라고 하지만 결혼 전 다른 사람과의 연애 관계(제 3문)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음을 볼 때, 아직도 성 행동에 관한 터부는 젊은이들에게도 남아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제 5문" 처녀가 피임약을 가지고 다닌다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질문에 "있을 수 있다"가 9%, "절대로 부당하다"가 91%로 나왔다. 결혼 전 성 관계라 해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으므로 이는 너그럽게 보아줄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피임약을 휴대한다는 것은 계획적으로 향락을 위해 성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긍정하는 것은 훨씬 적극적인 용인이라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적극적인 결혼 전 성 행동의 승인은 9%밖에 안 된다. 이를 제 4문의 결혼 전 성 관계를 용인한 31%와 비교할 때, 아마도 과오로 생기는 성 관계를 너그럽게 용인하는 숫자가 20% 이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 6문" 이상적인 연애 유형은? 이 물음에 답하여 "베르테르형" 36%, "살로메형" 12%, "기타" 25%, "모르겠다" 27%로 나왔다. 대체로 자기가 본 인상적인 소설, 영화, 연극 등의 주인공을 이상적 유형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로맨틱한 경향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접촉이 주가 된 연애를 이상으로 보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나라 학생들은 구세대적 이성관과 태도에서 충분히 탈피하지 못한 채 새로운 이성관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성관도 내면화시키지 못하면서 상반되는 두 개의 이성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구세대적인 남존여비의 관념이 몸에 배어 있어 남학생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과대시 한다. 반면에 여학생들은 너무 기펴지 못하거나 남학생들을 우러러본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남녀 평등이니 이성 존중이니 하는 교육을 받고 의식적으로는 평등을 주장하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남존여비적 태도로 처신하게 된다. 남녀가 어울릴 때 양편 모두 이같은 입장이 된다. 그러므로 남녀는 이성을 대하게 되면 심하게 긴장하고 당황해 하며 이성 접촉을 퍽 어렵게 생각한다.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엄한 규칙이 아직도 완전 제거되지 않아 국민학교 아동들까지도 이성 아동과 노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이렇듯 이 규칙에 의해 어릴 때부터 이성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 이에 따라 이성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고, 결국 이러한 제재에 의해 호기심만 조장되어 이성을 터무니없이 경원하는 습성을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호기심은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고 맹목적으로 그리워하는 경향을 만들기도 하고, 첫눈에 대수롭지 않은 사람에게 매혹되어 연애 관계가 되고는 나중에 깨달아 파탄되기 일쑤다. 한편 남녀 교제는 바로 성적 교제를 연상시켜 덮어놓고 나쁘고 불결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남녀 교제를 열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싫어하는 미묘한 감정 복합이 이에 수반되게 마련이다. 또한 학생들은 이성 교제에서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연스러운 애정 표시를 못하는 흠이 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아하고 즐거운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고 멸시, 거부, 공격을 일삼는다. 상대를 골려 주고 난처하게 만들며 익살 궂은 장난을 한다. 이는 아동 시절부터 감정 억압을 강요하고 이성 적대시를 권장하는 훈육법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우아한 즐거움을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으로 쾌락을 찾으니 사디즘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더라도 애정 표시를 못하고 속으로만 애태우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우리 학생들의 경제적 곤궁 또한 연애관에 크게 반영되는 것 같다. 데이트에는 자금이 필요하고 적절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학교는 강의실뿐이며 집은 찹박(답답할 정도로 좁음)하고 가족들의 이해도 없으니 적당한 데이트 장소란 다방 극장 등이 고작이다. 아니면 교외로 나가야 하는데, 이것은 경제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력이 없는 친구들은 이를 엄두도 못 내게 되고, 또 좀 여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자주 만나기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 궁핍 때문에 연애에 대한 적극성이 크게 위축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학생들은 구세대적인 봉건적 이성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새로운 현대사회적 연애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겠다. 오늘날 젊은 세대의 성 행동의 문란을 우려하는 층도 있지만, 이는 상업주의 매스콤의 지나친 과장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아직도 건전한 성 윤리는 지켜지고 있다고 보인다. 앞으로 더욱더 새로운 이성관, 자연스러운 태도와 건전한 성 윤리를 토대로 한 정신적인 인격 접촉에서 생의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연애관을 지향하게끔 노력해야 한다. 짧은 기간에 관념 형태나 가치관의 변혁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이룩되는 것이겠지만 이를 옳게 방향 짓게 하고 촉진시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196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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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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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애완 동물
어떤 사람이 애완 동물 가게에 들어갔다. 그는 애완 동물을 돌아보고 주인에게 물었다. "저 큰 개는 얼마요?" 그 개는 매우 사나워 보이는 독일종 세퍼드였다. 주인이 말했다. "500루피입니다." 그것은 그에게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다. "이 작은 놈은 얼마나 합니까?" 그것은 몸집이 작은 다른 종류의 개였다. 주인이 말했다. "1,000루피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여기 작은 놈은 얼마요!" 그것은 제일 작은 개였다. 주인이 말했다. "2,000루피입니다." 그 사람은 매우 당황해서 물었다. "그럼 내가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얼마를 내야 합니까? 개가 작아짐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는데, 내가 만약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도대체 얼마를 내야 합니까?"
- 그대의 두려움은 이런 식이다. 그대가 나에게 가까이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무것도 없음'을 잃게 되면 모든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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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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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9. 약진하는 홍군, 무너지는 국민당 -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1949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9년 / 창시개명 강요. 중국 중경에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1942년 / 조선어학회 사건
전쟁 이전까지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겉으로는 일본군과 싸움에 온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로는 일본 패망 이후 중국에서의 패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 등으로 일본과의 전쟁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전쟁 이후의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계가 양세력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다. 장개석이 구상하고 있었던 전쟁 이후의 새로운 중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 2.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 3.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 당나라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
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여 국력을 강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다시 한번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비해 모택동은 전쟁 이후 새로운 국가형태를 연합정부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은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를 단결시켜 민주적인 임시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며, 당면 위기를 극복하여 전 중국의 항일세력을 통일,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후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들어 해방 이후 중국 전인민들을 이끌어 중국을 하나의 독립된 자유, 민주, 통일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
2차대전의 전세가 일본 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사건은 소련의 극동전선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은 1945년 4월 얄타회담에서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8월부터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 9일 소련군은 극동의 500킬로미터 전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약 150만명이다. 소련군은 8월 중 하얼빈, 여순, 대련 등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만주의 괴뢰정부 만주국도 끝을 맺었다. 일본은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에 굴복하여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최후의 한판이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오랜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말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을 받아 중경으로 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평화교섭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는 미국대사가 함께 했다. 미국은 당연히 국민당 정부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의 도움이 없다면 공산당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겉으로는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하면서도 은밀히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타격을 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했을 1945년 당시 전력에서는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모택동과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0월 국민당 정부는 약 200여만에 가까운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했다. 물론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했다.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1946년 1월 미국특사 마셜의 조정에 의해 국, 공 양당의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각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가 중경에서 열렸다. 국민당은 정치협상회의의 결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합의를 하고도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정치협상은 만주지방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깨지고 만다. 국민당은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고, 그 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이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두 세력의 싸움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있었다. 그 점에서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앞서 있었다. 실제적인 군사력은 약하지만 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인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토지개혁은 인민들을 공산당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946년 6월 200만에 가까운 국민당군이 화북과 화중의 대규모 홍군 근거지를 공격했다. 홍군은 화중지방, 양자강 하류 등의 거점에서 밀려났다. 국민당군은 47년 3월 대장정 이후 심장부였던 연안을 점령했다.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공격대상이 되는 도시거점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대를 빼돌려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택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산당의 근거지가 점령당했지만 공산당 군사력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 등을 공격하여 국민당 군대의 보급선을 끊었다. 또한 연안을 내주는 대신 좀더 풍요한 지역인 산서지역을 장악했다. 홍군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당군이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던 46년~47년 사이 국민당군 70만 명을 무력화시켰다. 국민당은 표면적으로는 이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중에도 두 세력 사이에는 평화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어느 쪽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47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총통인 자신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을 채택했다. 공산당도 역시 47년 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전복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3월에는 중경, 남경, 상해, 북경 등지에 남아있던 공산당 대표단이 철수했다. 협상은 끝이 났고, 싸우는 일만 남게 되었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군사적 우위에서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난 47년 경에 이르면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의 부패, 그리고 생존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이미 민심을 잃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물가폭등에 대한 도시 노동자들의 항의시위가 계속되었고 농촌에서는 납세거부 시위가 돛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장악한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도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특정지역을 점령하거나 방어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공산당의 계획은 성공하고 있었다. 1947년 홍군은 전세가 유리해진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46년에 국민당군 400만에 대해 100만에 그쳤던 공산당 군대가 200만으로 증가했다.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는 엄청난 물가상승 등 경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화폐를 월급으로 받지 않으려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실업자도 늘어났다.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장개석은 1949년 남경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공산당과의 평화교섭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답으로 공산당은 8개항의 평화안을 제시했다. 장개석을 포함한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른 군대 재편성,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등을 요구한 것이다. 장개석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 49년 봄부터 정부의 금괴와 정예부대를 대만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전 3년 만인 49년 1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했다. 4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남경을 점령했다. 남경 국민당 정부는 광동과 중경, 다시 성도로 옮겼다가 49년 12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대만으로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공산당 창당 이후 겨우 30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수도는 북경, 주석에는 모택동이 선출되었다. 30년에 걸친 긴 내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공산당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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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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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意洋洋(득의양양) 得(얻을 득) 意(뜻 의) 洋(넘칠 양) 洋(넘칠 양)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겸손의 교훈을 주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 )에게는 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려는데,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거동을 엿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처는 그에게 이혼해야겠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마부는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자는 그를 대부(大夫)로 천거하였다.
得意洋洋(triumphant) 은 의기양양(意氣揚揚) 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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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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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피부미용제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중동의 고온건조한 사막 기후에서 오일이 피부의 수분을 유지하고 건조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누가 발명되기 2000년이나 전에 피부에 윤기를 주는 이 모이스처라이저 종류가 몸의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다. 콜드 크림으로 메이크업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부의 연화용 오일로는 유향, 몰약, 타임, 마요라나, 과일이나 나무 열매의 에센스가 있었으며 이집트에서는 특히 아몬드로 향기를 냈다.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기원전 3000년의 이집트 점토판에는 피부 상태에 맞춘 특별한 손질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기미, 주근깨로 고민하는 여성은 거세한 소의 담즙, 낙타 알을 거품낸 것, 올리브유, 밀가루, 바다 소금, 식물 수지, 신선한 우유를 섞어서 만든 팩을 했다. 나이에 따라서 피부의 건조나 주름이 고민인 사람은 우유, 향료, 올리브유, 가젤이나 악어의 똥, 짓이긴 노송나무의 잎으로 만든 팩을 6일 동안 얼굴에 바르고 잤다. 그 뒤 몇 천년 동안 이것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여성지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기미와 주근깨에는 얇게 저민 오이를, 피곤한 눈에는 젖은 티백을, 그리고 벌꿀, 맥아 오일, 알로에 즙, 캄프리 약초의 미용 팩을 권장하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어린 동물의 생식기가 나이 때문에 늙는 것을 억제하며 성적인 능력을 유지하는 데 최고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최고의 것이 중동에서 송아지의 음경과 음문을 똑같은 양으로 섞어서 만든 보디 팩이다. 이 팩의 성분과 이름과 젊은 조직의 효능을 역설하는 내용들은, 어린 양의 태아 세포를 주입하는 유의 현대의 회춘 요법에 비해 특별히 그로테스크하지는 않다. 나이와 함께 상실되어 가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성적 능력에 대한 현대인의 망집, 그리고 회춘을 위한 요법이 있을 수 있다는 강한 신앙의 뿌리는 아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가장 먼 옛날에 그 발단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의 수많은 화장품 제조법 가운데 단 하나, 콜드 크림만은 거의 변하지 않고 몇 세기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고 있다. 콜드 크림은 왠지 차갑다. 콜드 크림을 피부에 바르면 다량으로 함유된 수분이 체온을 증발시켜서 차가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차가운 크림, 콜드 크림이다. 콜드 크림을 최초로 만든 것은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 의사인 갈레노스로 로마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서기 157년,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의 검도사 도장의 주임의사로 임명되었으나 로마 왕가의 치료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검도사들을 괴롭히는 악성 감염증이나 농양의 치료약을 처방하는 한편 귀부인들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었다. 그가 쓴 "약재 처방론"에는 콜드 크림을 만드는 방법으로 흰 밀을 세배의 올리브유(장미의 꽃봉오리를 담근 것)로 녹여서 '거기에 딱딱해질 때까지 물을 섞는다'고 쓰여 있다. 피부를 유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한다는 콜드 크림의 대용물로는 양모지와 당시에 데스품이라고 부른 라놀린을 추천하고 있다. 고대의 대부분의 화장품에는 유독 물질이 재료로 함유되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콜드 크림만은 단순하고 가장 안전한 화장품 가운데 하나였다.
좀더 근대로 오면 초기의 시판 콜드 크림 가운데 3종이 순도와 안정성 그리고 모든 계층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가진다. 1911년 함부르크의 독일인 약제사인 H. 바이엘스도르프는 피부에 습기와 영양을 준다는 콜드 크림의 변종을 만들어 냈다. '니베아'라고 이름 붙인 이 제품은 순식간에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의 전 세계 여성이 사용하고 있던 끈적거리는 크림을 대신했다. 니베아는 지금까지 본질적으로는 최초의 제조법 그대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자겐스 로션'은 원래 뛰어난 한 벌목꾼의 작품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28세의 앤드류 자겐스는 제재업에서 모은 돈을 투자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0년 신시네티의 비누 제조업자와 합명회사를 만들어 고급 화장비누의 제조에 들어갔다. 제재업에 종사할 때 핸드 로션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던 자겐스는 스스로 로션을 제조했고, 그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세상은 마침 여성들이 화장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 시판되는 화장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자겐스에게 그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자겐스 로션은 사회 계급의 벽을 깨뜨리고 빅토리아조 풍의 대저택 화장대 위에도, 소박한 집의 싱크대 옆에도 언제나 똑같이 놓이게 되었다.
알맞은 가격으로 널리 사용된 세 번째의 크림 '노그제마'는 교장선생님에서 약제사로 전업한 메릴랜드의 한 사나이가 만들었다. 1899년에 메릴랜드 대학의 약학과를 졸업한 조지 번딩은 볼티모어에 약국을 개업했다. 당시에 스킨 크림의 판매는 대단한 호조를 보였기 때문에 번딩은 가게 안쪽에서 자신이 직접 조합해 청색의 작은 캔에 담은 크림을 '닥터 번딩의 선탠 크림'이라는 상표를 붙여 팔기 시작했다. 파라솔 없이는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여성들이 이 크림을 사러 몰려들었다. 번딩은 자신이 만든 제품의 효과를 재평가하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이름은 없는지 여러 가지 말이나 문구를 라틴어와 영어로 만들어 보았으나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성 고객이 가게로 들어오자마자 선탠 크림이 습진(에그제마)에 놀랄 정도로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이 우연한 얘기에서 '닥터 번딩의 선탠 크림'은 '노그제마'(노 에그제마의 뜻)로 바뀌어 태어났다. 그리하여 선탠용 콜드 크림이 백만 달러짜리 사업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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