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6장 인생의 항연
1.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들 자신의 즐거움, 가정 생활의 즐거움, 나무, 꽃, 구름, 흐르는 시냇물, 떨어지는 폭포, 그 밖의 삼라 만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또한 어떤 모양의 형태로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주고 받는 이야기, 책을 읽는 즐거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든가, 유쾌한 모임을 갖는다든가, 가족끼리 단란하게 지낸다든가, 아름다운 봄날에 들놀이를 가는 즐거움처럼 그 형태가 뚜렷한 것도 있고, 시가, 미술, 사색의 즐거움과 같이 그다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들 두 방면의 즐거움을 물질적인 즐거움이니, 정신적인 즐거움이니 하고 나누어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이런 구별을 믿지 않고, 둘째로는 이런 식으로 나누려고 하면 언제나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남녀 노소가 함께 모여서 소풍을 즐기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맛보는 즐거움이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아이는 풀밭 위에서 뛰놀고 있고, 다른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꽃줄을 만들며 놀고 있고, 어머니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들고 있고, 삼촌은 맛있어 보이는 빨간 사과를 먹고 있고, 아버지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땅바닥에 누워 있고, 할아버지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개 그 누군가가 축음기를 틀고 있을 것이고, 멀리서부터는 음악 소리나 파도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게 마련이다. 이들의 즐거움 가운데 어느 것이 물질적인 즐거움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인 것일까.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취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일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파이프 취미보다 절대적으로 고급인 즐거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물질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난처한 일이며, 잘못된 생각이기도 하며,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즐거움을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음미하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설이 너무 지나치게 독단적인 것일까. 또는 인생의 목적은 본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태까지 생활의 목표는 그 참된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말해 왔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그렇다고 할 뿐인 것이다. 오히려 나는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말을 쓰기를 망설인다. 참된 즐거움을 주지로 하는 인생의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인간 본디의 태도 여하에 달렸다는 것과 같은 의식적인 목적은 아니다. 목적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공부라든가 노력이라든가 하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뒤 부딪치는 문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오륙십년 동안의 인생을 어떻게 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도록 생활을 규정해 가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이며, 대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태어난 신비로운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와는 반대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든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고 독단하여 덤비는 것이니까, 도대체 논리의 앞뒤를 잘못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의 많은 사상가들이 너무나도 지나치게 파고 들어간 이 문제가 오늘날에 와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신학이 미친 영향에 의한다. 우리는 모두가 너무 지나치게 설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하고 이에 대해서 논쟁을 하지만 여전히 시원하게 알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문제가 완전히 헛수고에 그치는 불필요한 일임을 잘 알 수가 있다. 만일 우리네 인생에 처음부터 목적이나 설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그렇게 알기 힘들고, 막연하고, 성가신 것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결국 둘이 될 것이다. 즉 신이 인간을 위하여 정해 놓은 신성한 목적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한 인간적인 목적이거나, 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전자에 관한 한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신의 고려 속에 들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반드시 우리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우리가 상상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지능이라는 것을 헤아려 짐작하는 것은 인간의 지능으로는 사실 곤란한 일인 것이다. 보통 이런 이론이 도달하는 마지막 결말은 신을 우리의 군대의 기수로 만들어서 인간과 똑같이 맹목적인 애국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 문제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들고 나올 수가 있다. 이 문제로 우리가 언제나 말다툼을 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 대해 말하면 그다지 철학적이 아니라 좀더 실제적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생에는 목저이나 의의가 꼭 있어야 한다고 고집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나는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월트 휘트먼도 말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마 앞으로도 몇 십 년이나 더 살아나갈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매우 간단해져서 두 개의 다른 대답이 나올 여지는 없다.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을 뿐이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이외에 인생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겠는가. 모든 이교도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큰 문제인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기도교적인 사상가들은 완전히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비장한 말이지만 인류의 <구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되어 가는 배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도저히 피할 길 없는 마지막 운명이라든가, 목숨을 건지려면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심정이다. <멸망해 가는 두 세계의 마지막 탄식>(그리이스와 로마)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에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구제라는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를 받아 이 세상에 살고 싶다는 문제 속에는 완전히 잊혀지게 마련인 것이다. 멸망해 버린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구제라는 것에 대해서 어째서 그토록 머리를 써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라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을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서 그들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저 막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일 뿐이며, 인간은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천국에 가면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성가가 들려오고 백의의 천사가 날고 있다는 둥 매우 막연한 말을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그 중 마호멧만은 향기로운 과일과 술이 가득하고, 검은 머리에 눈이 큰 정열적인 처녀들이 놀고 있는 천국의 행복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라면 누구나 알 수가 있다. 천국이라는 것이 좀더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닌 이상, 이 지상의 생활까지 잊고 천국으로 가려고 노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내일의 암탉보다는 오늘의 달걀>이라고. 여름 방학을 어떻게 지낼까 하는 계획을 세울 때 적어도 우리는 이제부터 가려고 하는 고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는 노력을 기울인다. 만일 이때 관광 안내소가 아무것도 그 고장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 도무지 그 고장에 대하여 흥미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냥 집에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 진보와 협력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도 진보와 협력이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부지런히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완전한 존재인데 어찌 더 이상 노력하여 진보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천국에서 빈들빈들하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고생이나 걱정 없이 지내려고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천국의 생활의 준비로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빈들거리며 노는 것을 배워 두는 편이 영리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의 우주관을 꼭 가져야 한다면 모름지기 자아를 잊고 우주관을 인생에 한정시키는 것을 그만두는 게 어떨까. 좀더 우주관을 넓혀 생각하여 우리의 생각 속에 바위라든가 나무라든가 동물 등 우주 만물이 지니고 있는 의의까지도 포함시키는 게 어떻겠는가. 자연 현상엔 일정한 기획이라는 것이 있다(그러나 이 말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말과는 그 뜻이 다르다) 내가 말하는 뜻은 자연 물상에는 하나의 규범이 있다는 것이며, 구극론으로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온 우주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생각에 이르며, 그런 뒤에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 있어서 인간의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연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일부이며,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터무니없는 짓을 계획하여 한달음에 결론에 이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천문학, 지지학, 생물학, 역사는 모두 한결같이 우리에게 많은 재료를 공급하고, 공명한 사고 방식을 짜내게 해주는 것이다. 조화의 목적을 이와 같이 큰 규모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조금 초라해지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가 있으며 따라서 주위의 자연과 조화가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하여 실제적이고 분별 있는 사고 방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2. 행복은 관능적인 것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생물적인 행복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오해를 살 위험은 있지만,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 두어야만 하겠다. 되풀이해 두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모두 관능적인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심론자와 유물론자는 언제까지나 서로 오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같은 언어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뜻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도 또한 이 행복 보전론 가운데서 유심론자에게 속아 넘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참다운 행복이란 다만 정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승인해야 하는 것일까. 가령 한 걸음 양보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을 승인하기로 하자. 그리고 곧 우리의 논지를 내세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행해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상태이다.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적인 행복이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란 주로 소화가 잘 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주로 오장 육부의 운행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고 있는 명성이나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저 미국의 어떤 대학총장의 소매 밑이라도 숨어야만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대학총장은 신입생의 각 클라스에서 훈시를 할 때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꼭 두 가지가 있다. 즉 성서를 읽을 것과 용변을 잊지 말 것> 실로 대단한 슬기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총장의 몸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현명하고 온정이 넘치는 분인가. 내장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다만 이것 뿐인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추상적인 문제 속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진정 행복한 때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사실에 비추어 해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시 말해서 슬픔, 괴로움,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경우도 있을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환희라고 부르고 있다. 가령, 내 경우라면 진짜 행복한 한 때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푹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해가 충분히 부푼다.그러면 마음껏 숨을 깊이 들이쉬고 싶어져서 가슴께의 피부나 근육에 유쾌한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 위에 길게 발을 뻗고 있노라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가는 그러한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타는데, 아름답고 깨끗한 샘물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흐뭇하게 들려온다. 나는 신발도 양말도 벗어던진 채 펑펑 솟아오르는 그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그는 그러한 한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꼭 드는 친구들 뿐이다. 두서도 없는 정담이 끝없이 경쾌하게 계속된다. 몸도 마음도 천하태평인 그러한 한때. 어느 여름날 한낮이 겨워,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15분 쯤 지나면 초여름의 소나기가 틀림없이 퍼부을 것 같다. 비를 흠뻑 맞고 싶지만 우산도 받지 않은 채 빗속으로 나가는 것도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얼른 밖으로 나가 들 한복판에서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구실을 댄다. 이윽고 흠뻑 젖어서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는 <허, 그만 비를 만났지, 뭐야> 하고 말하는 그 한때.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듣거나 그 통통하게 살찐 종아리를 볼 때면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정신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느끼는 기쁨과 육체가 맛보는 기쁨을 구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여인의 웃음, 미소, 머리를 가누는 모양, 여러 가지 일들을 대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해부하거나 하는 것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어떤 처녀이거나 좋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입술 연지나 볼 연지에는 여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또 미용의 지식에서 오는 정신적인 차분함이나 고요함이라는 것도 있다. 이런 느낌은 곱게 단장한 그 처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실하고 뚜렷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런 심정은 전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육신을 지닌 몸이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딱 갈라 놓는 차이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섬세한 정서나 위대한 정신미가 정신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그런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촉각, 청각, 시각에는 도덕성이라든가, 비도덕성이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적극적인 기쁨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며, 또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이란 매우 많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공연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보다는 재빠르게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동서양의 모든 위대한 인생 애호자들이 쓴 글 가운데에서 다소의 문례를 뽑아서 그들이 스스로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이 귀로 듣거나 코로 맡거나 눈으로 보는 그런 소중한 감각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고찰해 보자.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숲의 시인인 도로우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얻은 시취이며, 굉장히 심미적인 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자. 귀뚜라미는 돌틈에 얼마든지 있다. 한 마리 뿐이라면 더욱 흥취가 깊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언지 모르게 유장한 놈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목숨이 다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생물의 운명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벌레 소리를 유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헛되이 발버둥치며 허덕이는 인간의 번뇌를 생각할 때 그런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온갖 시련의 관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유장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봄의 욕정이나 여름의 광열이 한창일 때에 홀로 가을의 서늘함과 원숙함을 연상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새를 향해 귀뚜라미는 말한다. <너희들은 어린이들처럼 일시적 충동으로 울고 있구나. 자연은 너희들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숙한 슬기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4계절의 변화는 없다. 우리들은 4계절의 자장가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한다. 풀숲에서 영원한 노래를. 이미 그것이 천국(Heaven)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새삼스럽게 끌어올려(heave) 천국으로 보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5월에도 11월에도 영원히변함이 없다. 안 그런가? 고요한 슬기, 그 노래에는 산문과 같은 확실성이 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이슬을 마신다. 교미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속절없는 사랑의 선율이 아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원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4계절의 변천하는 테두리 밖에서 그 가락은 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지없이 고요하게 맑은 그 마음으로만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휘트먼이 지녔던 후각, 시각, 청각이 그의 장신성을 높이는 데에 얼마만한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또한 그가 그러한 감각들을 얼마나 중대시했는지, 다음의 글에서 찾아내어 보라.
[아침부터 내리는 눈보라는 온종일 그칠 줄 모른다.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같은 숲, 같은 길을 두 시간 가량이나 나는 걸었다. 바람은 멎었다. 그러나 소나무 사이로 낮은 음악적인 소리가 들려 온다. 매우 뚜렷한 이상한 소리, 마치 폭포 떨어지는 소리 같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다시 흘러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온갖 감각, 시각, 청각, 후각의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 눈은 내려 쌓인다. 상록수, 물푸레나무, 월계수, 그 밖의 모든 나무라는 나무의 수많은 잎과 가지 위에 쌓이고 쌓여 잎사귀는 하얗게 부풀어 오르고 에머랄드 빛깔의 가장자리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청암송의 높고 꼿꼿한 기둥... 아련한 송진 냄새가 눈 냄새와 한데 섞인다(냄새가 없는 것은 없다. 눈까지도 향기는 있다. 다만 여러분이 냄새를 맡아낼 수 있으냐가 문제다. 똑같은 두 장소란 없고, 또 시간의 경우에도 한때와 한때는 어딘지 다르다. 전혀 같을 수는 없다. 정오와 한밤중, 겨울과 여름, 바람이 부는 한때와 조용한 한때, 그 향기가 얼마나 다른가!) 정오와 한밤중의 향기, 겨울과 여름의 향기, 바람 부는 한때와 고요한 한때에서 풍기는 향기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 도시에서 사는 편이 대개 불쾌하다는 것은 도시의 시각, 후각, 청각의 변화와 뉘앙스가 시골보다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단조로운 잿빛 담장과 시멘트를 깐 보도 속에 그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흐뭇한 한때의 참된 한계, 참된 자격, 참된 성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따지게 되면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절에서 소개하는 어느 중국학자가 쓴 <유쾌한 한때에 관한 33절>을 번역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 주기 전에 그가 쓴 글과 비교하는 뜻에서 휘트먼의 글 가운데서 다시 한 대목을 인용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으면 중국인의 감각과 닮은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맑게 갠 상쾌한 어느날, 공기는 마르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산소로 가득차 있다. 나를 감싸고 나를 녹이는 건전하고 말 없는 아름다운 갖가지 기적들... 나무, 물, 풀, 햇빛, 첫서리... 그 가운데서 내가 오늘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가을에 특유한 이상할 만큼 투명한 하늘이다. 구름이라고는 크고 작은 흰 구름 뿐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이 푸른 하늘을 난다. 아침 나절에는 줄곧(아침 7시부터 11시까지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빛은 투명하고 생생한 푸른 빛이다. 그러나 한낮이 가까워지면 빛은 엷어져 두서너 시간 동안은 마치 잿빛이다... 그리고는 점점 더 빛은 바래서 황혼으로 접어든다...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언덕 위의 짬 사이로 찬란한 빛을 던지는 낙조를 바라본다... 불꽃의 방사, 장대한 담황색 경관, 그리고 붉은 빛이다. 수면에 비스듬히 넓은 은빛 광택... 맑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광, 섬광,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선명한 색조.]
[굉장히 흐뭇한 가을의 몇 시간 동안 분명히 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주로 이 하늘이 있기 때문에 가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날마다 하늘을 보지만 제대로 똑바로 참다운 하늘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더 바랄 나위 없는 유쾌한 한때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예전에 읽은 일이 있는데 시인 바이런은 숨을 거두기 전에 친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전생애를 통해서 행복했던 시간이라고는 단 세 시간 밖에 없었노라고 했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임금님의 종에 관한 오랜 전설이 독일에도 있다. 가까운 문 밖으로 나가 숲의 나무 사이로 빛나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이런과 종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매우 즐거웠던 한때의 기억을 기록해본 일이라곤 없다. 그런 순간을 맞게 되면 메모를 쓰느라고 모처럼의 아름다운 느낌을 잃게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그저 기분에 맡길 따름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간다. 고요한 황홀감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그러나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 또는 그것괴 비슷한 한때를 말하는 것인가. 굉장히 미묘하여... 삽시간에 사라지는 색조인가. 뭐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내키는 대로,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즐기게 해 주소서. 신이여, 당신의 그 투명한 짙푸른 심연 속에 나와 같은 환자를 위한 명약이 있나이까(오, 편안하지 못한 몸의 상태와 마음의 번거로움이 지난 3년 동안 계속되었나이다) 신은 대기를 통하여 나에게 신묘한 명약을 남 몰래 떨어뜨려 주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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