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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38호
2011.12.23 (음 11.29)/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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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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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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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작가시선 신인문학상 작품공모
詩가 우리 인간의 영혼에 영양제 주사를 놓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고 , 특히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더욱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한국문학을 이끌어 갈 치열한 문학 열정을 갖춘 패기 있는 유능한 작가를 발굴, 육성하고자 다음과 같이 작가시선에서 [신인문학상]을 공모합니다 .
* 응모 장르 및 원고분량 1) 시· 시조, 동시 : 각 10 편 2) 수필, 동화 : 200자 원고지 15매 이상 2 편 3) 평론 : 200자 원고지 30매 이내. 2 편 4) 소설 : 200자 원고지 70매 이내 .2 편
* 응모 및 접수방법 1) 접수는 닉네임이 아닌 본명이 발신인으로 된 전자메일로 응모하되, 본심에 올라간 응모자는 면접을 통해서 당선이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며, 지방거주 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분들은 전화통화 면접으로 대신 할 수도 있다. 2) 글체는 신명조체, 글의 싸이즈 11포인트로, 파일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응모부문으로 하고, 한글파일첨부 제출 한다. 3) 응모작을 보내실 때는 필히 연령, 주소, 성명, 성별, 약력 , 사진, 직업, 연락처를 기록하고 선명하게 잘 나온 인물 사진을 필히 첨부토록 한다. 4)응모작은 인터넷이나 책자에 발표 된 적이 없는 자신의 최신 작품이어야 하며, 다른 작가의 작품 도용, 타 문예지 중복작품 제출시, 당선이 취소되고, 법적인 책임과 제비용에 따른 손해배상의 책임을 응모자 본인이 지며, 변상토록 한다 . 5) 응모마감일 : 1월15일 [*문의: 011-9924-3344,] 6) 응모 원고를 보내실 E-mail : koreanatv@hanmail.net ,w2009w@hanmail.net
* 당선자 특전 및 당선작 발표 1)1회 당선으로 기성문인으로 대우한다. 2)당선자에게는 개인적으로 인터넷 메일을 통하여 당선 통보하고, 작가시선 문예지에 당선작품을 발표하며, 등단작이 게재 된 보관용『작가시선』誌는 당선자 본인이 구매토록한다. 3)당선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작가시선' 문예지에 작품 발표의 기회를 부여하고, 작가시선 문학회에서 주최하는 시화전참여와 전국 순례산간지역 시낭송회,국내.외 문학기행 및 각종 다양한 예술행사에 우선 초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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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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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백과전서적인 계통도에 우리가 바라는 이상의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을 하나하나 줄 뿐이며, 그 지식으로 만족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없는 것이지만 다시 그것을 넘어서려는 사람들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이다. ─ J. R. 달랑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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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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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푸른색, 파란색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의 새싹을 '푸른 새싹', '파란 새싹' 어느 쪽으로 불러야 할까. 둘 다 가능하다. 사전에는 '푸르다'와 '파랗다'가 똑같이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고 돼 있다.
'푸르다'의 옛말은 '프르다'로 '풀'의 고어인 '플'과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푸르다'는 풀의 빛깔을 나타낸다. 한자어로 치면 녹색(綠色)이다. '파랗다'는 옛말이 '파라다'로 '풀(플)'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파랗다'에서 나온 '퍼렇다' '시퍼렇다'를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청색(靑色)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르다' '파랗다'를 동일시하는 것은 둘 다 '풀'에서 나온 말로 풀색과 하늘색을 뭉뚱그려 하나로 봤기 때문이라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아니라 심정의 세계를 적당히 노래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보는 이도 있다.
신호등이 문제다. 아이에게 파란색이 들어오면 길을 건너라고 했더니 하루 종일 기다려도 파란 신호등이 안 들어온다고 하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물감 등의 색상에선 '파랑'이 하늘색만 뜻하기 때문이다. '푸른' '파란'을 같은 뜻으로 쓰다 보니 '녹색 신호등'을 '청색 신호등'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푸른' '파란' 어느 쪽으로 써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원에 맞게 녹색과 청색으로 구분해 '푸른 새싹' '푸른 신호등', '파란 하늘' '파란 바다' 등으로 구분해 쓴다면 색상에서 오는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우리말 바루기] 윤중로
1968년까지만 해도 여의도는 비행장을 제외하면 섬이라기보다는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큰 모래밭에 가까웠다. 67년 여의도개발계획이 세워지고 68년 밤섬 폭파를 시작으로 110일 만에 섬을 두르는 강둑을 쌓는 공사가 완공된다. 강둑은 '윤중제'로, 강둑을 따라 뻗은 도로는 '윤중로'로 명명됐다. 이렇게 해서 여의도가 본격 개발되고 윤중로에 심은 1400여 그루의 벚나무는 해마다 서울시민들에게 벚꽃의 향연을 베풀어 준다. 봄마다 펼쳐지는 여의도 벚꽃 잔치를 보통 '여의 윤중제(윤중로) 벚꽃 잔치'라 부른다.
그러나 '윤중제'라는 이름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윤중제(輪中堤)'는 일본말인 '와주테이(わじゅうてい)'의 한자 표기를 우리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와주테이', 즉 '輪中堤'는 강섬을 둘러 쌓은 제방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윤중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윤중'만 따로 떼어내 그 길을 '윤중로'라 명명했으니 웃음이 나오는 일이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학교에도 '윤중'이라는 이름이 붙어 '윤중초등학교' '윤중중학교'가 지금도 존재한다.
'윤중제'는 우리 식으로는 '방죽' 또는 '섬둑'이다. 86년 서울시 지명위원회는 '여의 윤중제'를 '여의 방죽'으로, '윤중로'는 각각 '여의도 서로' '여의도 동로' '국회 뒷길' 등으로 고쳐 쓰기로 했다. 98년엔 이들 공식 명칭을 새긴 도로명판이 설치됐다. 하지만 아직도 옛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일본의 잔재라고도 할 수 있는 '윤중제' '윤중로'라는 이름을 쓰지 말아야 한다. '윤중초등학교' '윤중중학교'라는 명칭도 어서 바꾸어야 한다.
[우리말 바루기] 추모, 추도
33개의 추모석. 버지니아공대에서 추도식이 열리던 날, 희생자 32명 옆에 범인 조승희의 자리도 마련됐다. 한국이 집단적 책임의식에 빠져 있는 동안 미국인들은 슬픔을 딛고 용서와 자성의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소외된 외톨이를 돌아보는 진정한 책임감을 발휘해야 할 때다.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는 것을 '추모(追慕)', 죽은 사람을 생각해 슬퍼하는 것을 '추도(追悼)'라고 한다. "버지니아공대에는 총격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이번 참사 사건으로 숨진 캐빈 그라나타 교수의 장례식에는 가족과 친지 등이 모여 고인을 추도했다"와 같이 사용한다. 두 낱말 모두 고인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쓰이는 상황이 꼭 같진 않다. '추모'는 사람을 그리는 데, '추도'는 죽음을 슬퍼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상갓집에는 그를 추도하는 조문객으로 가득 찼다"처럼 지인들이 모여 장사를 지내는 장례식장 등에선 '추도하다'란 말이 어울린다.
그러나 "4.19혁명기념관에서 민주 열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개최됐다" "충북 숭렬사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이상설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처럼 훌륭한 인물이나 업적을 되새기기 위해 세운 기념관 같은 데서 후세 사람들이 고인을 기리는 것은 '추모하다'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럽다. 죽음을 슬퍼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면 '추도하다'를 써도 무방하지만 이러한 미묘한 의미 차이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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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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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슬로우 - 김해자
큰 배가 항구에 접안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온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 풀 어헤드로 달려왔으나 그대에게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 서두르지 마라 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이번 생에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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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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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봄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네 - 유권재
절기를 잃어 버린 내 삶의 언저리에도 수런수런 풍문처럼 봄소식이 떠돌기에 아파트 난간 끝에다 풍경 하나 걸어본다.
이 순간 내 마음은 시골학교 봄 소풍 꽃잎처럼 흩어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산 너머 작은 암자도 덩달아서 달뜨는.
되돌아 갈 길이 없는 가물한 기억 속에 세상의 아름다운 건 모두 모여 있었는지 새 봄의 설레임마저 그 곳에 머물러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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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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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되겠어요 - 오승강
아버지는 니 공부 못하면 중학 안 보내 준다. 어머니도 니 공부 못하면 농삿일이나 시킬란다.
아버지 어머니 농삿일은 공부 못하는 사람들만 하는 건가요?
그렇지만 나는요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가 되겠어요.
무 머리에 배추가 자라는 씨앗, 고추나무 뿌리에 마늘이 달리는 씨앗도 만들어 멋진 농사지어 보겠어요. 박사 농부가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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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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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5장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가
4. 중용(Half and Half)의 철학 - 자사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고 근심도 없는 무애 무우의 생활을 취지로 삼는 철학은 너무나도 번잡한 생활이나,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그러므로 인간이 지닌 행동욕을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편 현대인은 몸을 위하는 것이 될지언정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이 철학의 신선한 바람을 쐴 필요가 있다. 인간을 채찍질하여 아무런 소득도 없는 헛된 활동을 하게 하는 일로매진주의는 고금을 통한 온갖 견유철학에 비하면 그 인류에게 준 손해는 아마도 보다 큰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철학에 언제나 반발하려고 하는 생물학적인 충동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우유철학이 널리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의 하나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견유 철학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다수의 인간이 철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는 견유 철학이 대중 사이에 넓게 유행될 그런 위험은 매우 적다고 본다. 노장 철학이 본능적으로 마음의 금선을 울리고 수천 년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고 모든 시나 온갖 산수화 속에서 우리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는 이 중국에 있어서조차 부귀, 명성, 권력을 망신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또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므로 우리네 인생을 명랑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중국인들이란 실패했을 때에만 남을 빈정거리거나 또는 시인이 되는 것이며, 중국 국민의 대다수는 모두가 훌륭한 흥행사들이다. 노장적인 냉소 철학의 영향은 중국인의 생활속도를 단지 느리게 하였을 뿐 천재나 실정을 겪게 되면 결국은 정의를 가져다 주는 <동과 반동의 법칙>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조장한다.
그러나 이런 무애 무우의 철학, 즉 자연 우유 철학에 대립하는 정반대 되는 철학적인 영향이 중국인의 사상 전체 속에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연적 신사의 철학에 대한 사회적 신사의 철학이다. 즉 노장 철학에 대한 유교다. 노장 사상과 유교가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견해와 적극적인 견해를 뜻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국 특유의 것이 아니라 온갖 인간성에 갖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모두가 절반은 노장파, 절반은 유교파로 태어나 있다. 그러나 철저한 노장주의자가 된다면 그 논리적인 결론으로서 산 속으로 들어가 선인이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둔자 생활을 하고, 나무꾼이나 어부와 같이 될 수 있는 대로 속세를 떠난 원시적인 생활을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푸른 산의 주인인 나무꾼, 푸른 물의 임자인 고기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에 반쯤 몸을 숨긴 노장파인 은자는 나무꾼이나 고기잡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나무꾼과 고기잡이는 산은 영원히 푸르고, 물은 밤낮으로 흘러서 그치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모든 것은 족하지 않소, 하고 한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이 초라한 두 사람의 이야기 벗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산은 마냥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이런 조용한 세계에서 은자는 완전한 평화감을 체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가르치는 초라한 철학이다.
이 자연주의보다는 좀더 훌륭한 철학이 중국에는 있다. 즉 휴우머니즘, 인간주의의 철학이다. 중국사상이 바라보는 최고 이상은 자기가 타고난 행복한 천성을 간직해 나가기 위하여는 인간 사회와 인간 생활에서 반드시 도피해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도시 생활로부터 도피하여 산 속에서 홀로 사는 은자는 아직도 여전히 환경에 끌려다니는 2류급 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은은 시중에 숨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주위 환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유유히 자기를 지키며 생활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로 돌아와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여자와 사귀나 자기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고승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철학을 하나로 섞어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유교와 노장 철학과의 모순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다만 양쪽 극단에서 출발한 교의이며, 이 양자 사이에는 많은 중간적인 단계가 있는 것이다. 반 견유 철학자가 가장 위대한 견유 철학자이다. 결국 최고의 생활이란 <중용>의 저자이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말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사려 깊은 생활을 말한다. 인간 문제를 논한 동서고금의 철학을 훑어보아도 사물의 두 극단 사이의 어디엔가 있는 꼭 알맞은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 즉 가운데 또 가운데 이를테면 <중용>의 교의보다 더 뛰어나게 시원한 진리를 찾아낸 이는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반쯤 세상에 나타나고 반쯤은 숨어서 생활하는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이상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활동과 무활동 사이의 완전한 균형에 도달하는 이 미묘한 심려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적당히 게으름을 피면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일하고도 적당히 쉴 수 있을 정도, 집세를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자도 아니며, 또 너무 돈이 많아서 그 때문에 오히려 <조그만 더 돈이 있었더라도 친구를 도와줄 수 있으련만> 하고 인정미 있는 일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도 아니요, 피아노는 있지만 그저 매우 가까운 벗들에게 들려 주거나 또는 주로 자기 혼자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것이며, 골동품 수집을 하지만 수집품을 난로 선반 위에 늘어놓을 만한 정도이며, 책은 읽지만 지나치게 열중하지는 않고, 상당히 공부는 했지만 전문가는 되지 않았고, 글은 쓰지만 신문에 보내는 기고가 때로는 안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실리기도 할 정도...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인에게 발견된 가장 건전한 생활의 이상이라고 내가 믿는 것은 중산 계급의 생활이상이다. 이것은 명조 말의 이밀이 지은 <중용가> 속에 잘 나타나 있는 이상이다.
중용가
이 세상 모든 중용이 으뜸이거니, 믿고 살아 왔네... 그러나 이상할손 이 <중용>...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이렇게 되고 보면 무슨 일이고 중용을 택하여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기 그지 없다. 하늘과 땅 사이는 넓디넓은 것,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냇물 사이에 농토를 갖네, 알맞게 지식을 얻고 알맞게 주인 되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며 일가끼리도 알맞게 대하네. 집은 너무 좋지도 않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으며, 가꾼 것도 절반이요 가꾸지 않음도 절반일세. 입은 옷도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새로운 것도 아닐세. 좋은 음식도 알맞게 먹으며 하인들도 바보와 꾀보의 중간쯤이다. 아내의 머리도 알맞을 정도로 영리하며 그러고 보면 이 내 몸은 반은 부처요 반은 노자라고 할 만하네. 이 몸 절반은 하늘로 돌아가고, 너머지 절반은 이승에 물려주니, 자식의 생각도 잊지는 않지만, 죽으면 염라대왕에게 해야 할 말, 이럴까 저럴까 궁리도 절반 술도 알맞게 절반쯤 취하며 꽃도 볼품은 반쯤 핀 것이 으뜸일세. 돛도 반쯤 올린 배가 가장 안전하도다. 말고삐도 절반쯤 느슨하고 절반쯤은 단단히 매며 보물이 너무 많으면 걱정이 많고, 가난하면 모든 일이 둔해지는 것도 세상 이치일세. 인생은 쓰고도 단 것임을 깨닫고 보면, 그 절반 맛이 가장 영리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세상을 비양거리는 노장 철학의 냉소주의가 유교의 적극론과 하나로 융합이 되어 중용의 철학으로 변했음을 보게 된다. 어이없을 만큼 저돌맹진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말하는 것이 당장은 만족스럽지 못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인간은 실존하는 대지와 가공의 천국과의 중간에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최대의 철학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미가 있는 철학인 것이다. 물론 이 사의에는 탐험가, 정복자, 대발명가, 위대한 대통령, 역사의 코오스를 바꾸는 영웅 등과 같은 다소의 초인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간신히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어 인류를 위해서 대단한 공헌은 없었지만 사회에서 다소의 일은 하였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이름은 알려저 있지만 그다지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는 그런 정도의 중산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한 개인이 가장 행복을 느끼고 가장 처세를 능하게 해 나갈수 있는 것은 생활 걱정이 우선 없고,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닌 정도, 이름이 알려졌다면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았다면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 약간의 재정 능력을 가진 조촐한 환경의 사람들이다. 뭐니뭐니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 나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늘 나라에서부터 땅 위로 끌어내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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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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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5. 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ia Sokratous -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8-348)
무지의 지를 깨우치는 등에 - 이정호(한국방송통신대학 교수)
플라톤은 30여편의 대화편을 남겼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거의 다 소크라테스의 행적과 가르침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지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대화편들에서 초기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행적과 가르침을 비교적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고, 후기 대화편으로 가면서 플라톤의 독자적인 생각이 많이 보태졌다는 것이 미루어 짐작된 일반적인 정설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특히 신에게 감사드린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소크라테스를 존경했고, 소크라테스 또한 플라톤을 처음 만난 뒤 그를 "어제 꿈에 본 백조"라고 말했을 정도로 플라톤을 아꼈다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편 (아래에서는 변명편이라 줄임)은 비록 플라톤이 지은 것이긴 하지만 초기 대화편에 속하기 때문에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 치하인 기원전 470년 (아래에서는 '기원전'표기생략)에 아테네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프로니 스쿠스는 당시에 활발하던 아테네의 여러 석조성축계획에도 참여한 중견 조각가였고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도 젊은 시절 아크로폴리스의 칼리스군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직업을 이은 유능한 조각가였던 것 같다. 이로 미루어 소크라테스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조각일을 하면서도 이미 "조각가는 대리석 덩어리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처럼 만들려고 하면서도 자기자신을 돌덩어리처럼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은 조금도 기울이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꽤 뒷날인 것 같다. 물론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는 학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뜻에서 '무지의지'를 깨우치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평생의 소명임을 신탁을 통해 자각한 뒤, 아테네의 등에로서 한결같은 철학자의 삶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43년, 그의 나이 40 되던 때부터인 것이다. 공생애를 보내기 전 그리스도가 3년동안 겪은 광야의 시험이라고나 할까. 신탁의 소명을 깨닫고 곧이어 포테이다이아전쟁에 참전한 3년동안은 그가 보여준 추위와 굶주림과 공포에 대한 인내심과 의연함은, 알키비아데스가 전하는 대로 실로 초인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싸움터에서 돌아온 그는 다음날부터 거리로 나가 부자건 가난한 자건, 길모퉁이에서건 광장에서건 시장에서건, 자기와 대화를 나누려 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대화에 끌어들여 상대가 무지의 지를 깨닫게 되기까지 끈질기게 문답을 끌어 나갔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변엔 그의 고결한 성품과 통찰력, 예리하고도 신랄한 비판정신에 이끌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또 한편으론 적의를 품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특히 거짓 선동과 수사로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정치가들에게 그는 결코 달가운 존재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신기해 그것을 익혀 다른 사람을 골탕먹이는 데 재미를 느낀 부잣집 자제도 있었다. 뒷날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실질적 장본인인 아뉘토스는 어느 날 가업인 피혁업을 잇게 하려는 자신의 뜻을 아들이 따져 들듯 거역하고 제멋대로 놀아나자, 그 탓이 소크라테스에게 있다 생각하고 그때부터 이미 소크라테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아무튼 소크라테스의 행적은 아테네 사회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자신의 소명을 끊임없이 수행해 나갔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가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처럼 돈 받고 가르치는 일도 없어 내내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다. 애를 셋이나 둔 소크라테스의 나이 어린 크산티페가 무능한 가장을 들볶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크산티페를 악처의 전형인 양 전하는 이야기들은 얼마쯤 과장된 것임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날 아기를 안고 울부짖는 크산티페의 모습에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오직 철학적 소명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저 거리에서 토론하는 일에만 매달렸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그는 포테이다이다전투에서 돌아온 뒤 40대 후반에 들어섰음에도 조국 아테네를 위해 델리온과 암피폴리스 전투에도 용맹스런 군인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415년에 신성모독죄로 고소당한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로 도망쳐 시라쿠사 공략계획을 폭로하는 바람에 아테네 함대 대부분이 파괴되었는가 하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00인 과두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불과 몇 해 동안 과두정이 민주정으로 민주정이 다시 과두정으로 그리고 급기야 30인 참주정으로 번갈아 뒤바뀌는 정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속에서도 변명편의 몇 가지 일화에서 나타나듯 민주정때건 30인 공포정치때건 위정자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처신은 너무도 하나같이 확고부동하고 의연한 것이었다.
402년 마침내 민주정이 부활되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악몽과도 같은 지난 2년 동안 공포정치가 남긴 후유증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동안 공포스런 정치적 학살과 모반과 생존을 위한 발버둥은 평범한 아테네 사람들을 적대적인 두 쪽으로 갈라놓았고, 이것은 이제 복수에 찬 증오와 비난과 매도로 터져 나오면서 새로운 정치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위정자들은 아예 서로간의 비판자체를 엄격히 금하는 법률을 공포했다. 이제 아테네에서 '비판'이란 곧 조국을 위협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비판정신의 화신이고 이미 아테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명망 또한 얻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그들의 정치적 의도에 걸림돌로 여겨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그는 배반자 알키비아데스와 공포정치의 핵심인물 크리티아스와 친분이 있었던 데다가 그의 언동은 민주정에 대해 비판적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음모를 진행했다. 마침내 그들 중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고 당시 정치적인 인기도 꽤 있었던 아뉘토스는 변론가 뤼콘과 함께 멜레토스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을 내세워 "청년을 타락시키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교묘하고도 모호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고소하고야 말았다. 한 세기가 가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399년, 소크라테스가 70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스스로 제청한 형량은 벌금 단 1므나
재판정에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린 변명판은 그 내용상 유죄판결을 내리기전 부분과 유죄 판결 이후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반부는 다시 세 부분, 즉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배경이 된 이른바 최초의 고소자들에 대한 변명부분, 멜레토스가 실제 고소한 내용에 대한 변명부분, 그 밖에 재판에 임하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유죄판결이 있은 뒤 피고쪽에서 제청할 수 있는 형량문제에 대한 소프라테스의 소신을 다른 부분과, 사형이 확정된 뒤 마지막으로 재판관들에게 연설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다수결로 판결하는, 500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하루 동안 진행되었다. 원고쪽의 고소이유서가 낭독된 직후 소크라테스의 연설로 변명편은 시작한다. 처음부터 말투로 보아 이미 소크라테스는 그 곳을 재판정이 아니라 그가 평소 지내던 광장으로 여기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고소장을 제출한 실제 고소자들을 두번째 고소자라 하고, 그러한 고소에 이르게 만든 보이지 않는 편견에 의한 이전부터의 낡은 고발을 '최초의 고소자'라 부르면서 먼저 그 최초의 고소와 고소자들을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보이지 않는 편견과 소문의 빌미가 된 소피스트들의 행태와 자신의 언동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구체적인 소피스트들의 언행을 예로 들며 경멸조로 이야기한다. 그 다음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자신이 왜 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또 그러한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었는지를 밝혀 준다. 이 부분에서 비로소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와 자기에게 부여한 철학적 소명이 다름 아닌 '무지의 지'를 깨우치는 것임을 밝히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지가 폭로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자들에 의해 미움과 중상을 받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두번째 고소, 즉 멜레토스의 고소장에 대한 논박을 시작한다. 고소장에 나타난 직접적인 고소이유는, 첫째 청년을 부패시켰고, 둘째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신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명부분은 다른 부분과 달리 특이하게도 멜레토스와의 대화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 대화법은 소크라테스적 문답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문답을 통해 멜레토스는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고야 만다.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처신을 겨냥한 비난에 대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죽음이 무서워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수치라고 이야기한다. 두 가지 고소에 대한 변명을 마친 소크라테스는 이제 재판관들을 향해 피고가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오히려 마치 피고를 향해 질타를 퍼붓는 검사의 모습으로, 재판에 임하는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힌다. 아테네의 등에로서 자신의 공적인 소명의식과 그 때문에 공직에도 나서지 않게 된 배경을 철저한 자기 인식에 기초해서 밝히고 있는 이 부분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태도 자체가 워낙 확고한 데다 그 내용 또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위압적이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조롱받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평판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해 간단히 말한 뒤 변명을 마무리한다. 소크라테스의 실질적인 변명은 이것으로 끝난다.
아테네 법정은 신에 대한 불경소송의 경우엔 피고의 변명이 끝난 다음에 유죄나 무죄냐만 판결을 내리고 유죄인 경우 다시 그 형량을 투표로 정했는데, 이 때에도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원고 쪽이 원하는 형량과 피고쪽이 원하는 형량을 듣고 나서 최종형량을 정하도록 되어 있다. 유무죄에 대한 판결은 예상대로 유죄였다. 그러나 표차는 예상보다 아주 적었다. 유죄로 투표한 사람이 280명, 무죄로 투표한 사람이 220명이었다. 이제 형량을 결정하는 일이 남았다. 원고 쪽 형량은 물론 사형이었다. 그러나 비록 크리톤과 플라톤 들이 부탁한 끝에 30므나로 늘어나긴 했지만 애초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제청한 형량은 재판관들을 조롱이나 하듯 벌금 단 1므나에 불과했다. 최종 형량을 결정하는 투표결과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청은 그를 무죄로 판결한 재판관들의 비위까지 건드리는 것이었다. 투표결과 소크라테스는 유죄여부를 판결한 투표에 견주어 훨씬 큰 표차인 360대 140으로 마침내 사형을 선고받고야 만다. 이로써 모든 재판은 끝났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유죄를 투표한 사람들과 무죄를 투표한 사람들을 향해 각각 경고와 위로의 연설을 한다. 그리하여 변명편은 무죄를 투표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죽음에 관한 의미심장한 언급과 더불어 그들을 향해 소크라테스가 건네는 마지막 인사의 말을 끝으로 맺는다. "그러나 시간이 다 되어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느쪽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을까
변명편이 비록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 비해 소크라테스의 사상보다는 삶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있지만 여기서도 역시 소크라테스 사상의 몇 가지 기본 특징은 여러 군데서 나타나고 있다. 첫째 특징은 소크라테스의 고유의 문답법 또는 논법이다. 물론 이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더욱 정교해지고 보태져 이른바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더욱 정교해지고 보태져 이른바 플라톤의 변증법으로 자리 잡은 논법이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무지의 지를 깨우치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방법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는 때때로 수사를 위해 풍자적으로 말해지기도 하지만 분명한 추론이 아닌 억측으로 이루어진 주장들은 가차없이 논파하려는 그의 확고하고도 적극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변명편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와의 문답을 통해 멜레토스가 스스로의 주장이 모순됨을 깨닫게 하여 그 주장이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 이런 논파과정을 자세히 보면 그것은 멜레토스가 내린 결론 자체의 사실여부를 캐는 논증이라기보다는 그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론절차의 잘못을 폭로하는 논증임을 알 수 있다. 추론절차의 잘잘못과 그로부터 나온 결론 자체의 사실여부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영웅이다. 여자를 좋아하는 자가 영웅이다. 따라서 그는 여자를 좋아한다."라고 누가 추론했을 때 이 추론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지적될 수 있지만 이 추론이 정말 그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사실인지를 판가름해 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논증이 자신은 청년을 부패시키지 않았다는 근거로선 별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렇게 주장한 자가 무지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논증으로 효할 뿐이다. 이것은 결국 재판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근본적인 의도가 자신을 변명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무지의 지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소크라테스가 심혈을 기울인 지식에 대한 견해이다. 많은 부분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크게 힘입었지만 특히나 지식과 덕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은 거의 그대로 소크라테스사상을 이어받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덕은 곧 지식이다"라는 잘 알려진 명제는 이와 관련한 그들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실천적 지혜와 이론적 지식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할 줄 안다"라는 우리 말에서 '안다'라는 말의 의미가 실천 능력과 밀접하게 관계를 이루며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예를 들어 운전 지식이 있다는 지식의 문제는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실천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른 삶과 올바른 앎의 문제 즉 도덕과 지식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선한 행위를 하려면 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선인지 알고 있었지만 행하지 못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선인지 알고 있었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사상이다. 덕을 뜻하는 그리스 말 '아레테'가 '능력'이란 뜻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덕은 곧 지식이다"라는 명제에서 '지식'이 '할 줄 아는 능력'을 뜻한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주 무지가 부도덕을 낳는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스스로가 어리석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음은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왜 무지의 지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일에 매달렸고 왜 그것이 도탄에 빠진 아테네를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셋째 특징은 민주정파 사람들과 민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 즉 소크라테스가 정치를 보는 태도이다. 지식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이미 그의 정치적 태도가 근본적으로 민주정을 비판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해 준다. 즉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나라의 좋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정치영역에서도 전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추첨과 순번에 따라 정사를 맡기고 수많은 필부들의 의사에 따라 정무를 결정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현실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정은 오늘날도 그러하듯 모든 분야에서 하나같이 다 전문가의 역할을 중시하면서도 유독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정치분야에서는 이른바 전문가 개념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변명편에서 말을 키우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견해의 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 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에 대해 아는 자만이 말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그러한 자들은 소수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정치 사상에서 핵심인 소수 엘리트에 의한 전문가 통치, 플라톤이 (국가)편에서 정립하여 내놓은 이른바 '철인정치론'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태도가 소수 엘리트정치라고 해서 소수의 특권을 조장하는 정치적 견해로 곡해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다만 국가라는 공동체에 필요한 여러 일들이 그야말로 좋은 국가를 이루는 일이 되기 위해선 그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일반 원리 위에서 철인이 할 일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변명편에서는 이미 그러한 생각을 몸소 실천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공직도 가사도 저버리고 철학적 소명의 수행에만 고집스럽게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 자기가 선 그 곳이 "제가 가면 최대의 이익을 각 사람에게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기가 가장 잘 아는 그래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에서 자기 할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나라가 가장 정의로운 나라인 것이다. 변명편이 전하는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결코 무죄를 호소하고 변명에 연연하는 피고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평생을 바쳐 수행해온 소명과 확신을 깨우치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결같이 자신에 찬 어조로 아테네의 무지를 질타하는 숭고한 교사의 모습이다.
재판정 역시 그에게는 자신이 평생 진리를 논하며 서 있던 광장이나 거리나 시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살아온 삶의 태도와 신념을 바꿀 수 없었고 차라리 그는 죽음을 결단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이 아테네 법정에서 그대로 평가되고 시인되어 아테네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아로새겨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끼친 영향은 플라톤에 의해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을 고전 그리스 시대의 사상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지킨 양심의 법정을 승인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 이성을 절대시한 근대 철학자 헤겔조차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결단하는 의식의 절대 권리를 주장한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말했는가 하면, 소크라테스를 "감히 개인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본질을 침탈한 데카탕스"라고 비판한 니체 또한 동시에 그야말로 저 진리를 향한 본능 즉 지식과 논증으로 죽음의 공포를 돌파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 사람의 모습을 갖춘 철학 그 자체, 다시 말해 온몸으로 사람들 속에서 철학한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듯 철학이란 오직 긴밀한 정신의 교제를 통해서만 사람의 영혼 속에 불꽃처럼 점화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시대의 모순은 물론 인간적 삶의 본질과 가치를 근본에서 응시하고 지성으로 대결하고 음미한 고결하고도 숭고한 한 시대의 개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역사적 보편성과 인간적 삶의 진실에 뿌리박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 삶이 왜 그곳을 지향하고 음미하고 육박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가를 보여준 실존적 인간 지성의 영원한 표상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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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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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현대화와 청소년 문제
지난해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청소년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이 문제는 현대 문명이 당면한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점차 문제성이 심각해져 더 이상 이를 도외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13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이 청소년기는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린이가 어른으로 되어 가는 시기이다. 신체의 급속한 성장은 성적인 성숙도 가져와 이 시기에는 성적 관심이 부쩍 커진다. 부모로부터 감정적으로 고민되고 장래의 직업을 대충 선정해 놓고는 이를 준비하는 데 집중하기도한다. 이때는 사회 규범, 도덕, 관습을 스스로 익혀 나가면서 자기 생활을 통제하고 이끌어 나갈 인생관을 수립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 나이의 젊은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내면적인 고민도 많고, 사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불평이 많다. 이 청소년들은 기성 시대들의 이해 부족과 지나친 간섭, 기성 사회에 부조리가 많다는 것 등을 불평하게 마련이다. 이 젊은이들을 많이 접촉하고 이들을 책임져야 할 기성층은 이들 때문에 또 크게 고민하고 있다. 너무 가정을 외면하고 친구들하고만 어울린다느니, 무책임하고 근로 정신이 부족하다느니, 반지성적이며 너무나 반항적이고 비판적이라고 탓하며, 질서, 규율, 관습을 무시하고 엉뚱한 요구를 많이 한다고 한탄한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문제성은 크게 사회화되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문제가 되어 있다. 이제 사회 문제화되어 있는 이 청소년 문제에서 중요한 것을 크게 네 가지로 묶어 열거해 보자. 첫째, 세대간의 단절에 대한 문제이다.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젊은이들은 부모나 교사와 대립이 격화되고 반항이 심해져 이들을 다루는 데 크게 애먹고 있다. 둘째, 학생들의 현실 참여에 대한 문제이다. 요즘에 학생들이 지나치게 사회 참여에 나서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 청년 문화에 대한 문제이다. 청소년기가 길어지면서 이들의 수가 많아지고 대학생 수가 격증된 데다가 친구와의 집단 활동이 강조되는 것을 계기로 이른바 청년 문화가 유행한다. 이것이 성인 사회에 문제를 던져 주고 있다. 넷째, 청소년 범죄의 증대에 대한 문제다. 세계적으로 청소년 범죄는 증가 일로에 있다. 이 문제는 내용에서도 더욱 흉악화 하며, 연령에서도 그 수치가 더욱 낮아진다. 이 모든 것은 사회구조적 모순이어서 더욱 문제가 된다. 이제부터 이들 네 가지 문제를 이에 연유하고 해당하는 원인과 전망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의 특징과 관련시켜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먼저 현대 사회의 특징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서구의 근대사를 통해 현대화를 살펴보면, 시민 계급이 지배권을 쥐고 산업자본을 통해 현대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 시민계급 정신은 과학적인 합리 정신이다. 베버(독일의 사회학자, 경제학자)의 말대로 서구 자본주의사회는 이를 주도한 시민 계급이 지닌 프로테스탄트 정신인 근면, 성실, 노동을 존중하며, 규율을 엄수하고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원천적인 자본주의 정신은 퇴색되고 천직으로서의 직업 의식도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관료 제도는 더욱 굳어지고 과학과 기술은 고도로 발전되어 정교한 기계 문명과 대량 생산이 급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 생활은 풍요해지고 교육과 참정권은 보편화되어 대중의 상당수가 대학 교육을 받고 누구나가 정치에 참여하여 전통적 가치와 습속에서 벗어나 특유한 대중 사회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 대중 사회 속에서의 개인은 아무런 자각도 없이 큰 기구의 한 부속품으로서 독자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어디론지 움직여 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망각과 정신의 무력 상태를 반성하고 스스로를 자각하는 운동이 현대 실존주의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는 19세기 말엽부터 현대화의 물결이 밀려들어 왔으나, 이 현대화 물결에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사뭇 뒤늦게 발전되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고도의 공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는 도시로 집중되었고,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가족 제도는 어느새 핵가족제로 바뀌었다. 학교 교육은 보편화되어 대학생도 많이 배출하게 되었고 생활도 풍족해졌다. 하지만 이에 따라 젊은 세대의 가치관과 기성층의 그것과는 거리가 생겨 어딘지 사회는 조화를 잃어 간다고 볼 수 있다. 전체 사회를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통일적 규범은 있을 수도 없다. 그리고 가치관이 세대에 따라 다르다고 해도 개인차가 많고, 또한 개인에게서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사회가 다양하게 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과도기적 혼란과 부적응이 싹틀 가능성이 많음을 무시할 수 없다. 전통 사회에서는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소임이 비교적 명확하고 안정되어 있어 연령 변화에 따른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중 사회에서는 분화와 전문화 그리고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각자 소임에 안정성이 없어지고 있다. 이렇듯 쉽게 변화하는 소임과 자기가 할 수 있는 소임에는 큰 격차가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불안해 하고, 이에 따라 이 불안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도 부적응 행동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오늘날 기성 세대나 청소년층이 다같이 호소하는 것은 세대간의 단절감이다. 부모나 교사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성층과 젊은 층은 의견이 맞지 않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대립에는 청소년층의 기성층에 대한 반항까지 곁들여 심각한 갈등을 이루는 경우도 많다. 앞서 청소년기의 과업에서 정서면의 독립을 이루는 것에 대해 지적한 바있다. 청소년은 생활 면에서 경제적 독립이 어렵기 때문에 의식주에서는 부모에게 의존하면서도 일반 행동이나 정서, 태도 면에서 독립을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해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앞으로 사회 진출할 때 독립적으로 생활할 것을 너무나 중시하는 나머지 사사건건 행동면에서 독립적으로 성취할 것을 기대하고 또 이같은 입장에서 간섭하게 된다. 이렇게 지나친 독립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청소년으로 하여금 부모나 교사에 대해 반항하고 적대시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곤 한다. 사실 이렇게 강요하지 않아도 청소년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그 나름대로 본받을 만한 사람을 찾아 그의 소임을 모델로 살고 있다. 이러한 모델이 되는 대상은 흔히들 독립 생활을 멋있게 해내고 있으므로 청소년들 또한 독립 성취를 열심히 배우게 된다. 세대간의 단절에 크게 작용하는 요인은 독립의 강요뿐만이 아니다. 청소년기에 들어서서 너무나 급속하게 높은 수준으로 독립되기를 기대하는 데서 불안과 갈등이 생기고, 또 이 때문에 반항이나 신경증성이 심해져 결국 이것이 세대간의 간격을 넓히게 된다고 본다.
이와 같은 개인적 요인과 더불어 사회적인 요인으로서 세대간의 대립과 이것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는 반항 의식을 조성하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급속한 현대화는 사회 체제를 급변시키고 있고, 세대간에 의식구조의 격차가 심해져 왔다. 따라서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자연히 대립과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후진국일수록 기성층은 교육이 뒤지고 청소년층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되니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의사 소통에 어려움이 생겨 세대감의 단절이 심한 편이라고 본다. 둘째, 현대는 대가족제에서 핵가족제로 옮겨지면서 연장자 중심에서 자녀 중심의 가정으로 그 성격마저 바뀌고 있다. 자년 중심의 가정이 나쁘지는 않지만, 절제 없는 자녀 중심적 태도는 아동기의 자녀를 양육하는 데 과보호적이 되기 쉽다. 아동기에 과보호적이었다가 청소년기에는 급격히 독립을 강요하게 되니, 아이들은 불안과 갈등에 빠지고 이 때문에 부적응이나 문제 행동을 나타내기도 한다. 셋째, 핵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약화되어 가는 경향이 청소년 문제를 야기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는 직장 근무로 늘 밖에 있어 자녀를 마주 대하는 시간이 적다. 이런 경우 특히 남자 아이는 아버지와 동일시할 기회가 적어져 성장 후 자신의 소임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된다. 그 아이는 이른바 역할 혼미에 빠져 적당한 자아상을 갖지 못하게 되며, 이 때문에 부적응이 나타나 올바른 위치에서 기성층을 대할 줄 모르게 된다.
학생층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열성적이며 정의감이 강하고 이상주의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 문제에 관해서 문제의 핵심을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경험이 풍부하고 보는 눈이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목적을 강조하지만, 책임감이 적고 관념적 공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현실의 모순과 결함에는 감수성이 예민하지만, 원대한 관점에서는 소루한(꼼꼼하지 못하고 소홀함) 점이 많다. 1960년대를 휩쓴 선진국의 학생 운동들에도 대체로 이러한 비판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이러한 학생층의 일반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오늘날 학생들의 현실 참여가 과열되게 나타나고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주어진 현대 사회의 조건에서 현실 참여 운동의 요인으로서 흔히 지적되고 있는 주장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세대간의 단절과 기성층에 대한 반항이 그대로 조직화되어 나타난다고 보는 점이다. 더욱이 학생들은 자주성이 부족한데도 동료 집단에 부화뇌동하면서 하찮은 구호에 집결되어 움직인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도 근본적으로는 기성층에 대한 반항 의식을 가정해야만 성립되는 가설이라 하겠다. 둘째, 학생의 수가 많아지고, 게다가 그들이 어느 한 지역 내에 밀집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생 서로가 조직을 꾸며 상호 의존하고 집결하기 쉽게 되어 있다고 보는 점이다. 셋째, 청소년들이 독립심을 기르고 인생관을 형성시키며 집업을 위한 준비에 열중해야 하는 시기에 과중한 입학 시험 준비에만 파묻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인생관 형성이나 직업 준비는커녕 부정견하고 불안정하게 되어 대학 입학 후에도 무기력하고 목표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대학 입학 후 수험 공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감정은 적극적인 행동으로 전화되어 급진적인 현실 참여를 나타나게 된다고 된다. 넷째, 두 번째 가설과도 관련되는 것인데, 대학 교육이 너무 보편화되다 보니 많은 학생 중에는 질적으로 부족한 학생들이 많아서 이들은 대학 강의에는 흥미가 없고 과외 활동이나 현실 참여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된다고 보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높은 수준의 역할과 전문적 직업을 감당하기 위해 전보다 긴 준비기가 요구된다. 이러한 긴 준비기가 곧 청소년기인데, 이 시기에 해당되는 젊은이들은 숫적으로도 많기 때문에 이들끼리만 어울려 특유한 생활 양식과 고유한 세계를 꾸미고 그들대로 보람을 찾으려 한다. 이들은 기성층에 대해서 반항적이기 때문에 기성층의 세계와는 다른 모양의 옷차림, 말씨 등을 지니며, 대인 접촉 방식이나 생활 방식 또는 즐기는 음악, 미술의 경향까지도 다르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소속감을 찾고 기성층과의 상당히 어긋나니 큰 사회 문제로 된다. 이들이 특유한 생활 방식을 나타낸다고 하여 사회학자들은 이를 하나의 하위 문화로 간주하고는 "청년 문화"니 "친구 문화"니 하고 있으나, 이 문제는 물론 선진국의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도 아주 무관한 문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작금의 청년 문화의 해독적 경향에 대해서는 당국의 철저한 조치에 의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해지지만, 그렇다고 이 물결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이 청년 문화 현상을 설명하려는 몇 가지 가설들이 현대 사회의 특질 속에서 찾아지고 있다. 첫째, 공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본격적인 생산 노동에 참가하지 않고 단지 이를 준비하는 단계에 있으면서도 현실 사회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관망적 입장에 서서 반희롱조로 생활을 즐기기가 일쑤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수가 많고 또 어떤 집단을 이루어 움직이게 되면서 친구 문화가 생겨났다고 본다. 둘째, 매스콤의 발달에 따라 청소년들의 특이한 모습이나 활동이 하나 하나 보도됨으로서 특이한 생활 방식이 빠르게 전파되고 획일적이며 동질적인 생활 양식이 젊은 층을 휩쓸게 되었다고 본다. 셋째, 생활이 풍요해져서 청소년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인층과 멀어져 동무들끼리 어울려 즐기다 보니 동무들과의 동일시가 더 많이 이루어져 청소년층에만 획일적인 생활 방식이 굳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넷째, 현대 사회에는 세대간의 단절이 심하므로 청소년끼리의 생활권에서 살다가 점차적으로 성인 사회에 접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적응면에서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이렇듯 가설 중에는 청년 문화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복잡한 성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한 예비 과정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다. 하여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이 청년 문화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해독적 요인이 엄중히 제거되고 있다지만, 나름대로 대비책은 준비되어야 한다.
현대화된 사회일수록 청소년 범죄는 전문화하고 직업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청소년 범죄가 증가 일로에 있으며, 질적으로 볼 때 절도범이 그 대부분이던 것이 점차 폭력화해 가고 퇴폐적인 범죄가 많아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 연령도 더욱 낮아지고 대도시 중심으로만 나타나던 범죄도 점차로 중소 도시나 읍, 면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사회가 현대화함에 따라 청소년 범죄가 증가되는 요인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지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의견들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사회가 복잡하고 경쟁이 심하게 나타나면 구성원의 비동조성과 파괴성의 경향이 늘어날 것이며, 이에 따라 비행 청소년의 수도 늘어날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둘째, 복잡하고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한 개인의 인격 발달이 고도의 성숙 수준에 이를려면 시간적으로나 노력적인 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생긴다. 이 때문에 제대로 적응이 안 되고 탈락하는 사람이 많아져 반사회적 성격이나 신경증적 경향이 심한 사람이 되기 싶고, 이들이 범죄화의 소지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셋째, 앞서 지적한 세대간의 단절이나 청년 문화의 발달로 말미암아 동료들끼리의 생활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생활 속에서는 방종과 모방의 기회가 많고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범죄화의 가능성이 많을 것은 당연하다. 넷째, 현대화하여 풍요한 생활을 즐기게 될 때는 빈곤에서 비롯된 비행은 없어지고, 오히려 풍부에서 비롯된 비행 쪽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범죄의 성격도 반사회적인 공격성과 유희성을 띠게 되어 극악화 하고 퇴폐화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물론 개별적인 비행 청소년의 요인을 따져 볼 때는 여러 가지 병적 성격이 많이 작용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요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려서부터의 부모의 관심, 사랑 그리고 수용적 태도와, 양친간이나 친자간의 부드러운 관계, 일관성 있는 양육법 등이 청소년의 범죄를 예방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겠다.
우리 나라의 청소년 문제는 아직 심각한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크게 문제화할 소지는 인정해야 한다. 이 문제의 해결은 단순히 교육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서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대책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197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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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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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공동체
어떤 숲에 큰불이 일어났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그 불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장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였다. 절름발이는 볼 수는 있었으나 뛸 수가 없었고, 장님은 빨리 달릴 수는 있었으나 앞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장님이 절름발이를 업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되었다. 절름발이는 볼 수 있었고 장님은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도왔다. 결국 그들은 불길 속을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 만일 두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었더라면 그 두 사람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힘을 합쳤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오해
어떤 사람이 수퍼마켓 앞에 차를 세워 놓았다.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의 차는 못쓰게 망가져 있었다. 누군가가 차를 들이받아 차 앞부분이 완전히 부숴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의 차를 망가뜨린 차의 흔적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낙담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런데 앞유리창 와이퍼 밑에 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매우 기뻤다. 차를 망가뜨린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꺼내어 읽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가 이 쪽지를 쓰고 있는 동안 적어도 이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소. 그들 모두는 내가 나의 이름과 주소를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소. 난 그렇지 않소."
-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이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그가 자기 주소와 성명을 적어서 와이퍼 밑에 끼워 넣는 것으로 믿었다. 어느 누구도 그 종이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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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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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5, 18개의 산맥과 17개의 강을 넘다. - 홍군의 대장정 (1934~1936)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1년 / 만주사변 발발 1932년 /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3년 /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고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추방되었으며 국민당의 공격을 받은 공산당은 정강산에 최후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공산당은 정강산에서 조직을 정비하고 홍군을 재편성하여 다시 주변지역에 세력을 확대했다. 특히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토지혁명등을 통해 공산당의 근거지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에 들어서면 중국대륙의 중남부의 여러 성들에 소비에트가 들어섰다. 그리하여 1931년 11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도는 강서의 서금이었고 임시정부의 주석은 모택동이었다. 소비에트의 실질적인 힘은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붉은 군대(홍군)였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남경의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비토벌은 30년에서 3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홍군은 1930년 국민당군의 1차 토공전과 31년의 공격은 막아냈다. 32년 일본의 침략(민주사변)으로 공세가 잠시 추춤해졌지만 장개석은 민주사변에서 일본과 타협한 다음 공산당 토벌에 다시 힘을 집중했다. 1933년 말 제 5차 포위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은 홍군의 세력근거지인 강서, 복건지역을 압박했다. 34년 공산당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공산당은 마침내 강서 소비에트 지구로부터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약10만의 주력부대가 장개석군의 공격을 피해 포위망을 뚷고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그 주력부대를 유지하여 후일을 기다리자는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에의한 것이었다. 방지민이 읶는 복건성 북부지역의 군대가 먼저 탈출했다. 뒤를 이어 정강산 지구의 홍군 제 6군이 탈풀했으며, 그 뒤를 이어 홍군의 주력부대가 탈출했다. 홍군의 탈출 및 장정은 초기에는 거의 도주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탈출한는 과정에서부터 많은 희생자를 냈고, 탈출에 성공하여 대장정에 나서면서 계속적인 추격을 받아 희생자는 늘어갔다. 34년 10월 탈출을 시작한 홍군은 4개의 봉쇄선을 뚫었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그들은 준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중대한 회의가 열린다. 모택동은 국민당국의 5차 포위공격에 대한 공산당의 전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즉 당지도부가 유격전이 아닌 진지전을 전술로 택한 것을 비판했다. 또한 모택동은 탈출과정도 '전략적 후퇴'가 아닌 '맹목적 도주'였다고 비판했다. 홍군의 간부 및 군인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근거지였던 강서의 농민들을 납득시키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싸움에 지친 홍군에게 휴식시간을 주지도 않았고 무거운 장비를 지고 행군하게 함으로써 행진속도를 더디게 하고 병사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의 비판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동안 지도부 중심에 있지 않았던 모택동이 다시 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도시봉기를 주도하고 탈출방식을 결정했던 지도부들은 제거되었다. 이 준의회의 이후 홍군의 장정의 방법과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국민당군의 추적에 맞서 싸워 살아남아야 하며, 일본군과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홍군은 1935년 5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부대를 다시 3개로 나누고 국민당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소부대 단위로 이동했다. 그들은 추격군의 예상을 뛰어넘어 귀주의 산악지역을 넘었으며, 마냥 도망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습적인 공격으로 추격의 발길을 멈칫하게 하기도 했다. 운남을 지나 사천을 접어들어서도 국민당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장정에서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산악지대의 강 대도하를 건너는 것이었다. 국민당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 강을 건너야 했다. 임표의 선봉대는 만 하루에 120킬로미터를 강행군하여 노정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선봉대가 다리 좌우의 거점을 확보해야 본부대가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도하를 건너자 이번에는 해발 4천미터가 넘는 대설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산을 넘어 7월에는 호북에서 탈출한 제4 방면군과 감숙에서 합류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섬서지방의 보안이었다. 이 지역은 강서 소비에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역시 공산당의 근거지였다. 이 보안 소비에트는 유지단과 고강 등에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지방군벌과 싸우면서 11개 성을 통과하고 18개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해낸 것이다. 주력부대인 제1방면군은 8만여 명에 불과했다. 나중에 2방면군 4방면군이 합류하여 홍군은 약 3만 명이 되었다. 장정 이전의 강서 소비에트 시기 군사력의 약 1/10 정도로 준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 장정을 완수한 병사들은 최정예부대로서 이후 항일투쟁과 공산혁명의 중심부대가 되었다. 모택동은 장정을 마감하면서 (장정은 선언서 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11개 성에 많은 씨를 뿌렸고 머지않아 싹이 나와 잎이 자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앞으로 틀림없이 수확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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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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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迷紙醉(금미지취) 金(쇠 금) 迷(미혹할 미) 紙(종이 지) 醉(취할 취)
송(宋)나라의 도곡(陶谷)이 편찬한 청이록(淸異錄)이라는 책에는 당나라 말엽의 명의(名醫)인 맹부(孟斧)의 고사가 실려있다. 그는 독창(毒瘡) 치료에 뛰어나서, 자주 황궁에 들어가 소종(昭宗) 황제의 병을 진료하였다. 차츰 황제를 진료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자, 그는 황궁내의 실내 장식이나 기물의 배치 등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훗날 맹부는 사천(四川)지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황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장식하였는데, 방안의 기물들을 모두 금종이로 포장하였다. 창문을 통하여 햇빛이 비칠 때면, 방안은 온통 금빛으로 가득하여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다 돌아가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방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만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해 버렸다네(此室暫憩, 令人金迷紙醉).
金迷紙醉는 紙醉金迷 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극히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한 말이다. 일부 초대형 호화 빌라의 실내장식에도 금빛나는 외제품들만 사용된다고 하는데, 입주자들의 건강(?)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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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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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금지 1호였던 가발
대머리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장용품이었던 가발. 가발의 역사는 대대적인 유행과 교회에 의한 금지를 되풀이해 왔다. 고대 세계에서 이발사의 지위가 최고였던 곳은 앗시리아였으나, 그보다 약 1500년이나 전에 이집트인은 가발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도 독자적으로 가발이 고안되었는데 대머리를 숨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순전히 정장용품의 하나였다. 많은 이집트의 가발이 오늘날까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깨끗하게 세 갈래로 땋은 가발은 화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식물 섬유와 천연 모발로 만들어져 있다. 장식용 가발 중에는 지나치게 큰 것도 있으며 무척 무겁다. 기원전 900년에 이시무케브 여왕이 국가 행사 때 쓴 가발은 너무 무거워서 하인들이 보행을 도와야 할 정도였다.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 이 가발은 화학 분석 결과 100퍼센트 갈색의 천연 모발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다른 가발도 그렇지만 머리 위로 높이 솟구치는 디자인은 왁스를 발라 형태를 보존했다. 금발 가발이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표백하거나 머리카락 가루를 붙이는 일을 좋아했으나 로마 여성들은 게르만족 포로의 머리에서 잘라낸 깨끗한 아마색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게르만족 머리카락으로 여러 가지 디자인의 금발 가발이 만들어진 것이다.
1세기의 로마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게르만족의 머리카락이 풍족할 만큼 많아서 로마인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대머리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쓰고 있다. 금발 가발은 결국 로마 창녀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창녀촌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도 했다. 방탕한 황제비인 메살리나는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매춘굴 순례'를 할 때 '노란 가발'을 썼다. 가장 미움받은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는 밤마다 쾌락을 좇아 거리를 어슬렁거렸는데 그도 역시 똑같은 가발을 쓰고 있었다. 금발 가발은 현재 창녀들의 하얀 부츠와 미니 스커트처럼, 척 보면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회는 어떤 목적으로든 가발을 일절 금지하려고 계속해서 시도를 했다. 1세기 때의 성직자들은 가발 착용자는 기독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2세기의 그리스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가발이란 모두 엄청난 속임수이며 악마의 발명품이다"라고 설교했다. 이어서 3세기에는 성직자인 키프리아누스가 "여러분이 이교도에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며 가발 착용자들을 심하게 규탄했고 전체 가발 또는 부분 가발을 쓴 기독교도의 예배 참배를 금지했다. 가발에 대한 심한 비난은 692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해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가발 착용을 그만두지 않는 기독교도를 파문했다. 국왕의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하여 결국은 파문 당한 헨리 4세조차 교회가 추천한 짧은 스트레이트로 아무 장식도 없는 헤어 스타일을 따랐고 궁정에서의 장발과 가발을 금지할 정도였다.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신도가 줄어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처음으로 가발이나 헤어 스타일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1580년까지 가발은 또다시 헤어 패션의 최신 유행이 되어 있었다. 웨이브를 풀고 염색을 한 가발의 부활에 누구보다 공헌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는 빨강이 섞인 오렌지색 가발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었는데, 사용 목적은 주로 심각하게 벗겨지는 이마와 엷어져 가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가발이 아주 당연한 것이 되자 가발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어리는 다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으나 그녀와 가까웠던 사람조차도 그녀의 목이 단두대에서 날아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가발의 인기가 최고였던 17세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40명의 상근 가발 제작자가 입주하여 고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교회가 가발 반대를 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사제들이 당시에 유행한 긴 웨이브의 가발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위계질서가 내부로부터 깨져 버렸다. 17세기의 문헌에 따르면 가발이 없는 사제가, 미사를 보러 가거나 신의 축복을 기원하러 가는 하급 성직자의 가발을 빼앗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샹롱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인 장 바프티스트 티에르는 가발의 해악, 가발 착용자를 찾아내는 방법, 살짝 다가가서 가발을 빼앗는 방법에 대한 책을 썼다. 교회는 결국 절충안으로 이 논쟁에 결말을 냈고 평신도는 대머리이거나 몸이 약한 고령자이면 가발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단지 교회 안에서는 금지되었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18세기의 런던에서는 법정 변호사의 매우 값비싼 가발이 자주 도둑맞았다. 가발 도둑은 바구니에 작은 소년을 담아서 어깨에 짊어지고 사람들이 많은 길에서 가발을 훔쳤다. 바구니에서 재빨리 손을 내밀어 지나가는 신사의 가발을 실례하는 것이 소년의 역할이었다. 가발을 도둑맞은 신사는 푸르뎅뎅하게 깎은 까까머리처럼 보기 흉한 자신의 머리 모습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을 대부분 포기했다. 법정 변호사들에게 가발은 법정에서 정식 의상의 일부였는데, 20세기인 지금까지 착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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