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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37호
2011.12.22 (음 11.28)/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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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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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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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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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항상 생활하고, 자기의 종자(種子)를 인간의 마음 속에 심으며, 후대의 새로운 시대에 끝없는 행위나 의견을 불러일으킨다. ─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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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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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말’
얼룩말의 ‘얼룩’은 무엇일까. 얼룩말은 ‘흰 몸통에 짙은 고동색 줄무늬가 있는 짐승’으로 알고 있던 내게 누군가 농 삼아 건넨 질문이다. 물음을 곱씹어 보니 즉답하기 어려웠다. 밝은 바탕에 짙은 줄무늬가 있는 건지, 짙은 바탕에 밝은 줄무늬가 드러나는 것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 풀지 못했던 숙제는 지난주에 접한 ‘어느 얼룩말의 죽음’을 통해 해결되었다. 신문에 실린 그레비얼룩말 사진을 보니 배가 하얬으니까. 그렇다. 얼룩말의 ‘얼룩’은 밝은 바탕에 줄무늬였다. 우리나라에 딱 한 마리 있던 이 그레비얼룩말은 ‘팜므파말’로 불리기도 했다. “동물원은 수컷 3마리와 합사시키려 했지만… 뒷발차기 공격으로 쇼크사시켰기 때문이다… 수컷 3마리를 연이어 죽음으로 몰고 가자 ‘팜므파탈’에 빗댄 ‘팜므파말’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ㅈ일보)
‘팜므파탈’(femme fatale)? 남성을 유혹해 죽음 등의 극한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치명적 여인’을 뜻하는 사회심리학 용어인 이 말은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작가들이 쓰기 시작한 뒤 미술·연극·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다. 최근에는 남성을 가리키는 반대 개념으로 ‘옴파탈’(homme fatale)이란 말도 등장했다. 여기에 기대어 ‘(수컷 여럿 잡은) 치명적인 말’의 뜻을 담아 별명을 붙인다면 ‘슈발(cheval) 파탈’쯤 되겠다. 하지만 말장난 삼아 가볍게 옮긴다면 ‘팜 파말’이라 쓰는 게 맞다. ‘치명적인(fatale) 여인(femme)’을 뜻하는 프랑스어를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옮기면 ‘팜므파탈’이 아니라 ‘팜 파탈’이니까. 마찬가지로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도시 이름은 ‘칸느’ 또는 ‘깐느’가 아니라 칸(Cannes), 파리 여성은 ‘파리지엔느’가 아니라 파리지엔(Parisienne)이다.
‘애가 타도록 몹시 괴로워함. 또는 그렇게 괴롭힘. 특히 여자의 아름다움이 남자를 매혹하여 애가 타게 함’(표준국어대사전)의 뜻을 지닌 말이 있다. 뇌쇄(惱殺)이다. 뇌쇄적 여인, 팜 파탈을 갈음할 만한 표현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 바루기] 건넛방, 건넌방
어릴 적 시골엔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먹이를 쪼는 병아리 떼를 볼 수 있는 한옥이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칸칸이 가로막힌 방으로 구성된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건넌방'이 없어지고 '건넛방'만 있는 세상이다.
'건넌방'과 '건넛방'은 둘 다 건너편의 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가 약간 달라 쓰임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건너에 있는 맞은편 방을 가리킬 때 '건넛방'이라 한다. "옆방은 막내딸 보고 쓰라고 하고 건넛방은 첫째 보고 쓰라고 합시다" "수학여행에서 우리들은 운이 나쁘게도 선생님 건넛방을 배정받아 계획했던 일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와 같이 쓰인다.
'건넌방'은 건너편에 있는 방이란 뜻을 가지고는 있으나 '안방에서 대청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방'을 가리키는 말로 '건넛방'보다 좀 더 특수화된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건넌방'은 한옥과 같이 대청마루가 있는 집에서만 가능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건넌방'은 옛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데,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라는 소설에서는 "그는 도둑놈처럼 조심스럽게 바로 건넌방 뒤 미닫이 앞 담에 서서 주저주저하더니 담을 넘었다", 염상섭의 '동서'라는 소설에서는 "남편은 들이닥치는 길로 한마디 하고는 건넌방으로 들어간다"와 같이 쓰이기도 했다.
[우리말 바루기] 지지배, 기지배, 기집애, 계집애, 임마, 인마
"어느 날 여고 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변치 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 예전에 즐겨 듣던 '여고시절'이란 노래 가사다. 노래처럼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동창 사이에선 "기지배, 요즘 잘나간다며" "야 임마, 정말 오랜만이다"처럼 격이 없이 '기지배' '임마'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인터넷상에서도 '기지배' ' 임마'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기지배' '임마'는 '계집애' '인마'가 바른 표현이다.
'임마'는 '인마'를 편리하게 발음하다 보니 생긴 것이며, '인마'는 '이놈아'가 줄어든 말이다. '인마'의 'ㄴ'은 '이놈아'의 'ㄴ'에서 온 것이다. '인마'가 '임마'로 발음되는 것은 'ㄴ' 뒤에 'ㅁ'이 올 때는 'ㄴ'보다 'ㅁ'으로 소리 내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신물, 근무, 논문'을 '심물, 금무, 놈문'으로 발음하는 게 편한 이치와 같다. 물론 표준발음대로 하려면 'ㄴ'을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 '인마'는 "야, 너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인마. 가끔가다가 네가 엄만지, 내가 엄만지 헷갈린단 말야"(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처럼 사용된다.
"기지배, 왜 연락 안 했니" "여우 같은 지지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황순원 '소나기')에서처럼 '기지배, 지지배, 기집애' 등으로도 쓰이지만 이들 또한 표준어는 아니다. '기지배'는 방언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지지배, 기집애'는 '계집애'가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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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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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팝니다 - 이성임
저리 쉽게 별을 구워낼 수 있다니 세상, 연고라고는 엉덩이 붙여놓은 자리뿐인 여자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 끌어안고 온 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 설탕 한 스푼, 소다 찔끔 섞어 잘 저으면 양은 국자 안에서 흠실흠실 몸을 바꾸는 여자의 꿈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코딱지만한 손에 별 하나씩 쥐고 쪼그리고 앉아 꿈을 빚는 꼬마 녀석들 바늘 끝에 침을 살살 발라 계곡을 따라가면 알퐁스 도데의 별 하늘이 열리고 은하철도999가 열리고 붓 끝에 매달린 고향 별 하늘이 열린다 바이올린 현처럼 쏟아지는 미리내 다리 건너 살풋 다가앉아 별을 다듬는 사이 어느새 초롱초롱 빛나는 개밥바라기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둠 결을 저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하늘정원에 별자리를 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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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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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의 열대야 - 김종원
밤과 낮 구분없이 삼굿에 푹푹 찌니
삼 껍질 일어나듯 송글송글 맺힌 땀
자다가 깨어서 보니 벌써 이운 스무날 달.
흥건한 땀 훔치며 다시 깨어 살펴보니
달달달 선풍기는 아내쪽으로 돌아가고
창 밖의 기우는 달만 땀 훔치며 끄덕이네.
(200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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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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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는 아이 - 오승강
산은 언제나 그윽히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하는 행동을 모두 바라보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다.
모내기를 하며 허리가 아파 괴로울 때, 담뱃잎을 지고 오며 무더위에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산을 보면 산은 언제나 나를 보며 견디라 견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동무들과 다툴 일이 생겨도 속으로 삭여 버리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내 할일은 내 다 해내는
그렇다. 나는 산을 보며 자라는 아이 견디는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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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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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5장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가
3. 냉소, 대우, 도회-노자
매우 성질이 비뚤어진 노자의 <노회-(원문 The old roga. 늙고 교활하다는 뜻)>철학은 옛부터 중국의 최고 이상인 평화, 너그러움, 소박함, 지족(만족할 줄 안다는 뜻)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 왔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지닌 슬기, 도회의 이점, 약자의 힘, 또한 진실된 뜻에서의 회의에 철저한 사람이 지닌 소박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무꾼이나 어부들의 자연 생활에 대한 시적인 환상과 찬미에 가득차 있는 중국 예술은 이와 같은 철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인이 지닌 평화주의 밑바닥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금의 손실을 보는 것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해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념에 의거한 것이다. 즉 만물의 운행은 스스로 정해진 바 있어, 자연의 동과 반동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므로 영구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일생 동안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없는 대우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뛰어나게 훌륭한 지혜는 얼른 보기에 어리석음과 같고, 뛰어난 능변은 말더듬이와 같다. 떠들썩함은 추위를 이겨내고 고요함은 열을 이겨낸다. 창정은 천하의 정이니라.
자연의 섭리에는 영원히 남보다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평생 동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죽어 지내는 큰 바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당연한 결론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슨 일이고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노자의 말을 빈다면 어진 사람은 <그 다투지 아니함으로써 천하, 또한 그와 다투는 일이 없도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로서 그 종말이 좋은 자가 없으며, 있다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으리라.
현대의 필자라면 아마 여기에 이렇게 덧붙여 쓸 것이다. <비밀 경찰의 도움 없이도 독재를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데려다 주오. 내 그의 부하가 되리라>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말은 전투용으로 훈련되고,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말은 분뇨차 끄는 것으로 길들여진다>
뛰어난 전사는 성급히 앞으로 나가지 않으며, 잘 싸우는 병사는 함부로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위대한 정복자는 남의 병력을 빌어 옴이 없이 이기도다.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마치 자기가 부림을 당하는 자보다 못한 듯이 행한다. 이를 남과 다투지 않는 데서 생기는 덕이라고 하며, 이를 남의 힘을 부리는 법이라 하며, 이를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라 하여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비법이다.
동과 반동의 법칙은 힘을 튕겨 물리치는 힘을 낳게 한다.
도로써 지배자를 돕는 사람은 병력으로써 천하를 억지로 정복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천하 인심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군마가 머무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대군을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그러므로 명장은 자기의 목적을 이룬 뒤에는 곧 군대를 거두며 자기의 승리의 이점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법이다. 목적을 이룰 뿐 자기가 성취한 일을 영광스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목적을 이룰 뿐 자기가 성취한 일을 뽐내지는 않는다. 목적을 이룰 뿐 자기가 성취한 일로 해서 교만해지지는 않는다. 목적을 달성하되 부득이한 일만 행하며 폭력을 씀이 없이 목적을 이룬다. 한참 기운차게 성한 때가 있으면 또한 힘이 빠지고 쇠잔해지는 때도 있다. 이를 지키지 않음은 도를 어김이니 도를 어기면 곧 멸한다.
중국인의 평화주의는 몽상적인 박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평화주의가 아니라, 노회 철학에 의한 평화주의인 것이다. 보편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학고 부동한 현묘한 지혜에 기초를 둔 것이다.
끝에 가서 줄어들게 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를 팽팽하게 해야 하며, 약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너뜨리려면 우선 이를 단단히 일으켜 세워야 하며, 빼앗으려면 우선 주어야 한다. 이를 가리켜 미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물고기는 연못을 떠나지 않게 함이 좋으며, 나라의 이기는 이를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간직해야 한다.
약자가 지닌 힘, 평화애의 승리, 스스로 몸을 낮게 하는 이로움을 노자만큼 효과적으로 이야기 한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물은 약자의 힘의 상징이었다. 조용히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서 바위에 구멍을 뚫는 저 물, 스스로를 가장 낮추려는 위대한 노자와 같은 지혜를 갖추고 있는 저 물.
강과 바다가 능히 여러 개의 작은 개울의 왕이 된 까닭은 자기를 낮추어 흘러내림으로써 능히 왕이 된 것이다.
이에 못지 않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곡>의 설로, 곡이란 공동, 만물의 자궁 또는 모체, 현 또는 암컷의 이름이다.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 이를 천지의 근이라 한다. 면면히 존재하는 것과 같으며 이를 아무리 써도 따르지 못한다.
동양 문명의 암컷은 원리를 대표하고 서양 문명은 수컷의 원리를 대표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어쟀든 자궁이라는 말과 중국인이 말하는 이른바 수동적인 힘으로서의 곡이란 말 사이에는 굉장히 서로 비슷한 데가 있다. 노자의 말을 빈다면 <천하의 곡이 되면 상덕을 갖춘 게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나는 노장사상의 고설을 짧게 간추려 다음과 같은 싯귀를 지었다.
우자에는 슬기가 있고 유장에는 아름다움이 있으며, 노둔에는 묘리가 있으며 하위에는 이가 따르느니라.
기독교도인 독자들에게는 흡사 산상의 설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산상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아마 별다른 감명도 받지 않을 것이다. 저 산상의 설교의 복음에 대하여, 노자는 <백치에게 축복 있으라, 땅 위에서 가장 행복한 자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덧붙였는데, 진실로 능청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노자가 한 유명한 말 <뛰어나게 훌륭한 지혜는 얼른 보기에 모자람과 같이 보이며, 뛰어난 능변은 말더듬이와 흡사하다>에 따라 장자는 <소지를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 8세기에 살았던 유종원은 자기 집 근처 산을 <어리석은 언덕>이라고 하고, 근처에 흐르는 강을 <어리석을 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18세기 사람인 정판교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도 어려운 일이요, 똑똑한 사람이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음으로 들어감은 더욱 어렵다> 중국 문학에서 어리석음을 찬미한 일이 그친 일이 없다.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는 예지는 일찌기 미국인도 다음과 같은 속어를 통해 이해한 일이 있다. <너무 지나치게 똑똑한 체하지 마라> 그러니까 가장 똑똑한 사람은 때로는 <멍텅구리>인 체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적인 교양 가운데는 기괴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높은 지성인 것이며, 또한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오직 하나의 무지한 복음과 옛사람들이 행한 바 있는 도회설을 발전시켜서, 생존경쟁에서의 가장 좋은 무기로 삼는 높은 지성이기도 하다. 장자가 말한 이른바, <소지를 떠나라>는 권고와 치인 예찬과는 그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걸인이라든가 산림을 핑계삼는 선인이라든가 기승이라든가, 또는 도적수가 쓴 <명료자> 속에 나오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괴짜들을 그린 중국의 그림이나 문학적인 스케치 가운데 언제나 반영되어 있다. 초라한 누더기를 걸친 반미치광이 중이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예지와 숭고한 품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때, 이러한 인생에 대한 총명한 깨달음은 낭만적이며 종교적인 맛을 띠게 되어 마침내는 시적인 환상의 세계로 드나들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유명한 우인들이 많다. 모두가 정말로 정신이 돌았거나 또는 미친 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굉장히 유명하여 일반 대중들이 좋아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를테면 저 바보로 유명한 송대의 화가인 미불이 있다. 미전이라고도 쓰는데, 그 자신이 <의부>라고 부르는 이상하게 생긴 바위 한 구석에 절을 하기 위해 예복을 입고 찾아간 일이 있은 뒤부터 이런 이상스러운 별명을 듣게 된 것이다. 이 미불이라든가 유명한 원대의 화가였던 예운림은 더러운 것을 몹시 싫어하는 성질이 있었다. 그러니까 깨끗한 것을 굉장히 찾는 괴벽스러운 결백광이었다. 또한 이밖에도 유명한 기승이며 시인이기도 했던 한산이 있다. 그는 더벅머리에 맨발로 마구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절의 부엌에서 이상한 일을 하고 남은 밥을 얻어 먹으면서, 절이며 절 부엌의 벽에 불후의 시를 남겨 놓았다. 중국인의 공상을 사로잡은 가장 위대한 기승은 물론 제전 또는 제공으로서, 이 스님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덧붙여지고 과장되어서 돈키호테의 세 배 가량이나 되어 오늘날까지도 끝날 줄을 모르는데, 이 많은 일화의 주인공인 그는 마법과 영약과 해괴와 술취한 세계에 살며, 수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여러 도시에 하루 사이에 나타나곤 하는 선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를 흠모하는 비석이 오늘날도 항주 서호 근처에 있는 호포사에 서 있다. 이밖에도 정도는 작지만 16세기, 17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낭만파의 천재들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훌륭하게 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그 기교한 생김새라든가 그들의 언행을 통해서 기인이니 광인이니 하는 인상을 일반에게 주기 쉽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로 서문장, 이탁오, 김성탄을 들 수가 있다(여기 인용한 맨 마지막 인물은 글자 그대로 <성탄>으로서, 자기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이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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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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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4. 대동서 - 강유위(1858~1927)
조경란(국민대학교 강사)
개혁에서 보수로
중국에서 옛 사상의 마지막 보루이면서, 한 편으로는 신사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상징하는 인물이 강유위이다. 따라서 중국의 전통사상은 물론이고 특히 근현대 사상을 살펴보려고 할 경우 강유위의 철학은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커다란 분수령이다. 그리고 강유위의 저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동서다. 강유위는 1858년 광동성 남해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에 패배하여 서구 열강의 침략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전근대적인 봉건 체제가 내부적으로 무너져간 역사적 격동기였다. 강유위의 집안은 대대로 정주학(성리학)을 받들어 온 집안이었다. 그는 7세때 이미 문장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나타내었다. 일찍이 10세때 부친을 여의고 그 뒤 할아버지 밑에서 정주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시험만을 위한 형식적인 공부를 몹시 싫어했다. 19세 되던 해 지방의 과거시험인 향시를 마지못해 보았는데 본래 뜻을 두지 않은 시험이었던지 낙방했다. 낙방한 그 해에 강유위는 할아버지의 절실한 친구이자 아버지의 스승인 광동지방의 대유학자 주차기의 문하에 들어갔다. 주차기는 정주학은 물론 경제지학에도 관심을 가진 인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조를 비판하고 드디어는 관직을 버리고 30여 년간 서당을 열어 자제 교육에 힘써 온 사람이다. 주차기의 이런 사상은 뒷날 강유위에게 정주학은 물론 경세치용학 등에 대해서도 매우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1877년 강유위 나이 20세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정서불안정을 보이는 가운데 과거에 섭취한 모든 지식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아직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아니었지만 이 때부터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사고를 하려는 내적 움직임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 즈음 스승 주차기와 결별하고 1879년 서초산에 들어가 유학 이외의 학문에도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실제로 강유위 자신이 쓴 연보에도 서초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전적으로 도교나 불교관계 책을 공부했다고 쓰여 있다 .정말 당시는 강유위뿐 아니라 사대부 지식인 중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당시 중국의 정치사회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의 위기상황을 절감한 지식인들은 모든 것을 공으로 보는 현실 초월이나 현실 부정의 입장에 섬으로써, 위기 일발의 상태에 빠져 있던 당시 중국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할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관념적 한계가 있긴 하다. 그러나 당시 체제가 공인한 학문인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얻기 힘든, 중국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불교의 입장에서 서면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이 궁지에 몰린 청말 중국에서 불교가 행한 중요한 역할이기도 했다. 도교와 불교에 관심을 둔 바로 그 즈음 강유위는 서양사상도 접하게 된다. 강유위 자신이 외국과의 접촉이 잦은 중국대륙의 최남단 평동 지방에서 자랐으므로 그 이전에도 서양의 세력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기회는 있었으리라 보인다.
서양 사상에 심취하여 본격적으로 서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홍콩으로 가서 서양의 문물을 직접 접하고 나서부터다. 강유위는 이 때 서양에도 '법도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고 말함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맞이한다. 즉 양무운동 실패 이래 중국과 열강사이에 나타난 힘의 우열이 근원적으로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세계의 역사와 지리 등 여러가지 정보가 실린 위원의 (해국도지)나 잡지(만국공보)를 통해 천문학, 지리학, 과학, 세계지리 등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인도, 일본, 러시아 등의 정치체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얻었다 .특히 일본의 명치유신과 러시아의 피요트 대제의 정치개혁에 대한 지식은 나중에 변법자강 운동이란 시대에 맞게 법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열강에 패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 당시 청조의 황제 광서제에게 변법을 요구한 정치적 사건으로서 강유위가 중심이 되고 그의 제자 양계초, 담사동 등이 참여한 운동이다. 사실 이 정치적인 변법운동 역시 이론적 원동력을 당시 서양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던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을 내용으로 하는 진화론에서 찾았다. 강유위는 이와 같이 중국의 전망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사상적으로는 유학을 기본으로 하고 도교, 불교와 서양 사상까지도 섭렵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행동을 어느 정도 구축하게 된다. 중국뿐 아니라 서양에 대한 지식을 더욱 넓힘으로써 그는 '세계에 대한 나름의 구상과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검토해 볼 (대동서)이다. 강유위는 1879년경부터 1884년까지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공부를 했다. 이것이 바탕이 되었는지, 그 뒤 과거 시험에도 합격하고 계속하여 훌륭한 저작들을 내게 된다. 한편 어렸을 적 받은 유교의 도덕교육은 그에게 정치와 사회질서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도록 끊임없이 강요했다. 또, 스스로도 이에 대한 대응으로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국사회가 자기에게 맡긴 책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1895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상서를 올린다. 드디어 1898년에는 변법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더니 급기야는 서태후의 쿠데타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강유위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망명길에 오른다.
망명길에서 일본, 싱가폴, 베트남, 타이, 인도네시아, 인도, 캐나다 등지를 둘러본다. 특히 캐나다에서는 보황회를 조직한다. 여기서 보황회란 어느정도 변볍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한 광서제를 지켜 주기 위한 조직이다 .그러나 이는 또 황제 제도를 인정하는 국가 체제를 보존하여 본질적으로는 봉건적 정치체제를 유지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유위는 변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곧바로 자기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개혁에 대한 주장을 쓰레기처럼 던져 버리려 한 것일까? 어쨌든 강유위는 운동이 실패한 뒤 진보적인 진영에 서서 사회개혁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가를 절감한 것 같다. 청 정부가 1900년 강유위 체포령을 내려 그를 수배하는 가운데 이제 방랑생활이 시작된다. 물론 유럽각지와 미국 등을 방문하면서 유랑생활치고는 아주 고급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 때 그는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 상태를 피상적으로나마 접하게 된다. 뒤에 이를 토대로 각종 여행기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1911년 신해 혁명 이후에야 가능했다. 1898년 변법운동이 실패한 뒤로 실로 15년 만의 일이다. 귀국해서는 1916년 원세계에서 제재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17년에는 장훈과 결탁하여 복벽운동을 추진하는 등 1927년 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사상에서나 정치에서 노골적인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저서로는 (대동서)외에도 (신학위경고), (맹자미언), (춘추필삭대의미언고), (공자개제고), (춘추공양정주), (맹자대의술), (대학주), (논어주), (중용주), (예운주), (춘추동씨학), (춘추삼세희), (맹자공양상통고), (대역미언), (숭금문이억고문), (일본명치변정고), (아대피득), (변법치강고), (공거상서기), (남해무술유사), (유사), (남해선생시집), (문집) 등이 있다.
첫째, 국계를 없애고 대지를 합한다. 강유위가 살았던 1858년에서 1927년이란 기간은 중국역사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전에 없던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양제국주의가 침략의 손을 뻗쳐 옴에 따라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중화제국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국가로서도 온존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화 제국을 떠받쳐 오고 있던 사상도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중국과 서양, 전통과 근대, 보수와 진보 등 여러 가지 가치 개념들이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이 한가운데 서서 당시 사상가들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사상적 활로를 찾아야만 했다. 강유위의 사상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로 거론될 수 있는데 그에게서 전통과 근대는 극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보편적으로 어떤 사상이든 모든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대동서)는 바로 강유위 사상의 특징을 말해 주는 저작임과 동시에 당시의 시대상을 잘 말해 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책 (대동서)가 말하려 하는 중심 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강유위 자신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즐거움을 구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가는 길에는 괴로움을 구하고 즐거움을 버리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거구락은 인간본성의 기본욕구이며 최고의 인도법칙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각종 욕구가 만족되는 것이 즐거움이요 만족되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모두 심신의 만족을 추구하며 이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부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하늘이 부여한 인권의 이치 즉 천부인권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지닌 근대 사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고거구락을 위해서 괴로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대동서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근원은 국계, 급계, 종계, 형계, 가계, 업계, 난계, 유계, 고계 등 9계에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9계가 있기 때문에 열거가지 고뇌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대동사회를 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 9계를 없애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없애기 위한 대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국계를 없애고 대지를 합한다."지구상의 모든 국가의 경계를 없애고 전 세계를 유일한 공정부로 통합한다. "
둘째, 급계를 없애고 민족을 평등하게 한다. " 모든 계급을 없애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한다. "셋째, 종계를 없애고 인류를 똑같이 한다." 인종을 개량하여 전 인류를 동일한 우량인종으로 만든다. "넷째, 형계를 없애고 독립을 보존한다." 남녀의 완전한 동권을 실시한다. "다섯째, 가계를 없애고 천민이 되게 한다." 가족제도를 파기하고 생활에 필요한 시설은 모두 공영으로 한다. "여섯째, 난계를 없애고 태평을 다스린다." 난계란 앞에서 말한 여섯 개의 계를 통틀어서 말하는데 이 난계를 없애고 태평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여덟째, 유계를 없애고 중생을 사랑한다." 인류평등의 이상이 달성된 후 인류계 뿐 아니라 모든 생물계에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한다. "아홉째, 고계를 없애고 극락에 이르게 한다."앞의 모든 고뇌를 제거하고 지상에 극락세계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를 이루기 위한 기본조건이 되는 것이다. 강유위는 이런 기본조건을 이룩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사회개혁의 방법도 세부적으로 밝히고 있다. "국가를 인정하지 않고 전 세계에 하나의 총정부를 두고 약간의 구역으로 나눈다. 총정부 및 구정부는 모두 인민의 손으로 뽑는다. 가족을 인정하지 않고 남녀 동거는 1년을 넘길 수 없으며 기한마다 교체해야 한다... 죽은 자는 화장해야 하고 화장터부근에는 비료 공장을 설치해야 한다."는 등등. 더 나아가 대동서에는 아주 시시콜콜한 내용도 눈에 띈다. 즉 머리칼에서 수염, 눈썹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아버린다. 온 몸의 털을 다 깍되 오직 코털만은 먼지와 더러운 공기를 막기 위해 약간 남겨 둔다. 임부가 좋은 곳을 택하여 거주하고 엄격한 태교를 실시하면 나쁜 형질은 도태하기 때문에 결코 폐인이나 병자가 생기지 않는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인류는 윤택한 생활을 하고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다고 하는 등 소외되지 않은 삶의 형태를 그리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대동서)를 구성하는 사상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양삼세설, 예운편의 대동소강설, 불교의 자비평등설, 루소의 천부인권설, 기독교의 평등자유설, 유럽의 사회주의 학설, 무정부주의, 엄복에 의해 소개된 진화론 등이다. 여기에서 대동설이란 원래 유교의 고전에서 이상 사회로 여겨지는 것인데 그 내용은 천하를 공유로 하고 홀아비, 자식없는 노인, 고아 등도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공공의 사회를 말한다. 공양삼세설이란 역사가 혼탁한 거란세, 안정이 시작되는 승평세, 안정이 성숙되는 태평세의 형태로 차례대로 발전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대동서는 형식과 내용에서 대동사상과 공양상세의 뼈대 위에 서양적, 근대적인 것을 중국적, 전통적인 것 안에 포섭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사유재산제 같은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낸 해악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강유위는 가끔 서양사상가에서 생시몽, 오웬,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사상가들의 위치와 비교되기도 한다. 어쨌든 강유위의 대동사상은 근대적인 것을 섭취하고 이것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중국적, 전통적인 것을 재조직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서구 문명의 충격에 중국사랑들이 반응한 여러가지 형태에는 전통에 완전히 집착하려 하는 보수와 그와는 정반대로 전반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급진파, 부분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파, 세계주의화를 주장하는 파 등이 있다. 대동서만을 기준으로 보면 강유위는 세계주의화를 주장하는 소수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사상을 이용한 중국 전통 사상의 재해석 강유위는 열강의 침략으로 망국의 위기에 빠진 상황속에서 서양의 문명 즉 근대과학, 민권론 등의 자극을 받아 전통사상을 재조직함으로써 개혁의 원리를 만들어 냈다. 이런 개혁의 원리가 본질적으로 왕조 체제를 근대적으로 수정함으로써 그 존속이나 강화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입헌 군주제와 민권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적인 정치체계를 수립하려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으나 어쨌든 대동서에서 분명히 엿볼 수 있는 것은 강유위가 정말 신구교체기의 사상면모와 계급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강유위의 대동서와 같은 서술내용과 방식은 낡은 병에 새 술을 담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대동서라는 대작을 차분하게 읽고 보면 내용이 실제로 박물학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뗜 일정한 주제를 두고 쓴 저술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세계 지식과 사상지식을 동원하여 그냥 열거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강유위는 앞에서 말한 세계가 인류진화의 궁극이라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당시 중국 상황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말도 없다. 이런 면에서 대동서는 강유위가 아직 젊은 나이에 쓴 습작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강유위의 대동사상이 그때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낙관적 신념과 전망을 제시하여 계몽적, 진보적 작용을 한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대동서 속에 나오는 남녀 문제에 대한 여성해방입장이라든가, 가족제도의 부정등에 대한 강유위의 서술은 당시 중국상황에서 방법으로나 현실로나 얼마만큼 실천적인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는 점이 있지만 유교 도덕원리의 근간인 공순원리를 외형적으로나마 부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대동서는 몇 천년간 지속되어 온 봉건 구습에 반대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양무론이나 변법론자들은 서학의 수용을 주장하면서도 한편 "중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한다" "서학은 중학에서 나왔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 이는 중학에 견주어 서학을 부수적이고 견강부회적인 것으로 보는 주장이다. 그러나 강유위는 이와는 달리 서학을 촉매로 하여 전통 사상 그 자체의 의미를 전환시켜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체적으로' 19세기 말 무너져 가는 중국 전통 사상의 재생가능성을 다시 한번 발휘하려 했다. 이 점이야말로 강유위 사상의 독특한 점이고, 또한 대동서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유위는 체계화된 서양사상을 비판하거나 또는 이에 대응하는 방법을 중국전통 사상으로 회귀하는 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사상을 이용한 중국전통 사상의 재해석, 재구성을 통해 그 방법을 찾았다. 결론적으로 대동서에 나타난 강유위사상의 특징은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이라는 문제를 남겨놓긴 하지만 현실대응을 위해 몇천년간 내려온 유교 자체를 과감하게 수정하고 다시 해석해 낸 데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전통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 사상으로서 유교자체의 존재근거를 뿌리째 흔들만큼 이후 전개되는 근대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의 철학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보려고 할 때뿐 아니라 중국학에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는 전통과 현대의 문제에 관해서도 알고 싶다면 양쪽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 강유위의 사상은 반드시 건너야 할 산이다. 대동서가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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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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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산림 전쟁
얼마 전에 고향인 충주에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광주를 지나 이천 땅을 거치게 된다. 1년에도 몇 번씩 다니는 길이라서 연도 풍경이라야 별로 새로운 것이 없지만, 한 가지 마음에 흐뭇한 인상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천 지방의 조림 사업이 제법 성공을 거두어 산림이 우거져 가는 모습이다. 벌써 35년이나 지난 옛 이야기지만, 서울에서 공부하겠다고 할머니를 따라 처음 이 길을 지날 때의 풍경과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비교적 산에 수목이 우거져 있던 고향에서 외지라고는 생전 다녀 본 적이 없던 열한 살 어린 소년이 서울에 간다는 벅찬 흥분으로 잔뜩 긴장해서 자동차에 흔들리며 이천 땅에 접어들었을 때 우선 보이는 모습이란 그야말로 기이한 풍경뿐이다. 높고 낮은 구릉과 산봉우리에 큰 나무라고는 하나 없고, 산사태를 막기 위해 계단식으로 잔디의 띠를 두르고 여기저기 까만 열매가 달린 회초리 같은 나무가 있는 새하얀 산의 모습, 하천이라고 해도 넓은 백사장 하상에 실오라기 같은 물꼬리가 보일 뿐이다. 그 정경이 이제껏 눈에 익혔던 산천 풍경과는 나무나 판이한 데 경이를 금할 수 없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이상해 "충주 땅엔 나무가 많은데 왜 여기는 산에 나무가 저렇게 없을까요?"라고 할머니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할머니는 동화조로 "옛날 옛적에 충주와 이천이 전쟁을 해서 충주 쪽이 이기고 이천 쪽이 졌단다. 그래서 이천이 입고 있던 옷을 벗겨다 충주가 끼어 입게 되어 그만 이천 땅은 백사장이 되었더란다"고 서슴지 않고 대답해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전쟁에 져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전쟁에 진 이천을 측은히 여기면서 이곳을 지나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던 이천의 산천이 이제는 나무가 우거지고 산사태 흔적이라고는 볼 수도 없으며, 하천에는 풀밭 사이로 그득히 물이 흐르고 있어 흐뭇한 감을 절로 느끼게 한다. 오히려 나무가 우거져 있던 충주 지방은 산은 높아도 나무가 거의 없고, 여기저기 할퀴어 놓은 듯한 사태 흔적이 많이 보이는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신 충주와 이천의 싸움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산림 전쟁에서 이번에는 이천이 이기고 충주가 졌다. 그러므로 이천은 충주 옷을 벗겨다 입고 나무가 무성한 두메 산골이 될 것이다. 이 뒤바뀌는 모습에 일면 감개 무량한 점도 없지 않아 있다. 사실 그동안 인접되어 있는 이 두 지역의 산림 정책이나 농민들의 조림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 보면, 오늘날의 이 대조적인 변화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는 겉모습에서도 충주 쪽은 목조 가옥이 많고 울타리도 거의가 다 나뭇가지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천 쪽은 흙벽돌집이 많고 울타리도 돌담이나 흙담이 많다. 연료도 충주 쪽에선 나무를 주로 때지만, 이천 쪽에서는 볏짚을 많이 이용한다. 또한 이천 지방에선 집집마다 충분히 불을 때지 못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충주 지방에서 어느 집의 방이 추울 때에는 "이천 사람 불때듯 하는구나"라는 농담을 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천 지방에선 관민이 힘을 합쳐서 사방 공사에 전력을 다하고, 동리마다 산림 보호 책임자를 두어 남벌을 감시해 왔다. 또한 이천에 선 봄에 비료용으로 갈잎을 꺾는다든지 7.8월에 땔감으로 풋나무 가지를 치는 것도 일정 기간을 정해서 일정한 규준에 따라 밑가지를 치게 하는 등 동민이 서로 협력해서 산림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우리는 잘 가꾸어 놓은 무성한 일본의 산림을 직접 본 일도 있고, 영국과 독일에서 잘 가꾸어진 인조림의 장관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다. 그리고 산림을 가꾸어 목재를 산출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문화 민족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이천 지방 농민들의 산림 가꾸기 운동은 한낱 한 지방의 자랑거리만은 아니리라. 흔히 우리 사회에 특히 지식층에서 오가는 말속에는 "대한민국의..."라는 어두가 딸려 나온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긍지를 표시한다거나 적어도 순수한 서술적 용어로 쓰여지기보다는 어떤 자기 멸시적 비평이나 열등감을 직감하게 하는 어감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 민족이 협조성이나 규율 엄수 또는 장취성(앞으로 진보해 나갈 가능성)이나 자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할 때 이 말이 자주 나오는 것 같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이같은 실망을 느끼게 하는 사회 동태나 개인 행동이 아주 없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규정지어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밝은 면과 적극적인 측면에도 정당하게 눈길을 돌려보아야 할 것이다. 이천의 농민들이 산림 조성 사업에 수십년래 노력 쏟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협조 정신이나 자주성의 역량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앞길을 밝혀 주는 증거가 아닐까.
"197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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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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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헛소리
어떤 사람이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다. "사라,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알릴 것이 있소. 양복장이 긴즈버그는 나에게 200달러를 빚졌고. 푸줏간 주인 모리스는 50달러 빚졌고, 이웃집 클레인은 300달러의 빚이 있소."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얼마나 놀라운 양반이냐. 죽어가면서까지 누가 얼마의 돈을 빚지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사라, 내가 지주에게 100달러를 빚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길 바라오." 그 말에 아내가 외쳤다. "오오, 이제 너희 아버지가 헛소리를 하시는구나."
- 네가 듣고 싶은 말이면 옳고, 그렇지 않으면 헛소리이다. 그러면 너는 즉시 그것과 무관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듣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인슈타인은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모든 삶이 쓸모없이 낭비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누구인가 그에게, "만약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결코 다시는 과학자기 되지 않겠소! 땜장이가 될지언정, 결코 과학자는 되지 않겠소! 과학은 끝났소!"
- 신비는 영원하다. 그것은 고갈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신비롭고 광대하며 고갈될 수 없는, 신이라고 하는 개념이다. 그대가 아무리 끊임없이 탐구해도 여전히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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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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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4. 일본의 대륙침략 -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193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8년/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조직 1929년/ 원산 총파업. 광주학생사건
(10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한 부대가 봉처 서북쪽 영 부근에서 우리(일본)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우리의 수비대를 습격했다. 적대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들(중국)이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다. 원래 우리 남만주 철도는 지난해 조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획득했고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 중화민국 동북군은 감히 이것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본제국 군대에 발포까지 했다. 본관은 철도 보호의 중책을 지고 있는바, 그 권익을 지키고 제국 군대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소화 6년 9월 19일)
일본은 이와같은 공식입장을 밝히고, 도발자인 중화민국을 '응징'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른바 '만주사면'의 시작이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봉천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 두절되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국제연맹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은 유럽의 더 큰 문제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을 감싸기까지 했다. 결국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에 가깝게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고 그 문제를 마무리해버렸다. 1. 만주에 대해 영토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2. 일본정부는 그 국민의 안전 및 재산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군대의 철수를 가급적 빠르게 시행한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 중국인들은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전국 주요대학에서는 '항일 구국회'가 결성되었다. 남경의 중앙대학 학생 4천여 명은 일본과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 그들은 중국정부 외교부에 뛰어들어 외교부장인 왕정정에게 잉크병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국내에서 공산당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당 집행위원회는 (전국학생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싸워햐 할 때 싸우지 않고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는 정부가 져야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워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 또한 정부가 져야한다. 이 큰 어려움을 당해 국민이 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비난만 일삼는다면 건강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중국정부가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국제여론을 통한 압력으로 일본이 물러가기를 원했으나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결정한 사항을 이행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이미 그들은 만주지역에 친일정권을 수립한 다음 완전히 먹어삼키려고 했다.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장악하려는 관동 주둔 일본군의 음모는 아주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일본군부는 만주지역을 (만주친일괴뢰정권 수립 -> 만주국 독립 -> 일본의 영구 소유화) 라는 3단계 과정을 거쳐 일본영토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제 1단계 친일 괴뢰정부의 황제로 낙착된 이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였다. 그는 만주족이었고, 한족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만주족의 독립적인 움직임으로 가장할 수 있다고 찬단했던 것이다. 관동군 사령관 혼조는 다음과 같은 만주지역 신정부 수립 3원칙을 일본각의에 제시했다.
1. 만주, 몽고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킬 것. 2. 만주, 몽고를 통일할 것. 3. 표면은 중국인이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이 장악할 것.
만주, 몽고를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지만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하여 차선책으로 만주, 몽고를 중국의 영토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독립국은 명목상일 뿐이고 일본의 조종과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 정부가 될 것이었다. 이 독립국을 움직이기 위해 국방을 일본이 담당하고 철도, 항공로 등이 통제되며, 그것들을 감독하기 위해 독립국 내에 일본인으로 구성된 자문부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만주 주둔 일본군(관동군)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흑룡강성을 공격해들어갔으며, 천진을 공격하는 틈을 타 천진에 있던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탈출시켜 만주로 데리고 갔다. 부의는 1912년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일정한 생활비를 받고 자금성에서 생활하고 있던 중 1924년 쿠테타를 일으킨 군벌 풍옥상에 의해 쫓겨나 천진에 머물고 있었다. 부의는 잃어버린 황제의 자리를 잊지 못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되찾으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이 만주국의 황제자리를 권유한 것이다. 부의에게는 더 이상 반가운 제의일 수가 없었다. 관동군의 제안에 대한 부의의 첫 질문은 그 국가가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인지 공화정인지였다. 부의는 다시 황제가 되고싶었던 것이다. 일본이 부의를 내세워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우려하자 장개석은 마침내 일본의 만주침략에 정면대응하는 단안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중국 자체에 충분한 자위역량이 없는 한 국제연맹은 일본의 폭력을 제지할 결심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결코 철군하지 않으리라 본다. 중국은 이미 만주땅을 잃었다. 동포가 한 마음으로 협력해 이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국제연맹을 신뢰하고 국제연맹이 정의를 옹호하고 공도를 주장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일본이 간단히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점, 그리고 대련, 여순을 간단히 반환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국민의 능력이며 세계의 공도이다. 우리는 최후의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피를 흘리겠다는 결심이다.)
중국은 만주지역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만주지방에 국제연맹의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의 제안에 따라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1932년 영국의 리튼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활동하고 있는 중에도 일본은 연이어 상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의 피해는 사망 약 4천여 명, 부상 7천여 명에 이르렀다. 상해를 공격한 것은 국제여론이 만주에 집중되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만주의 괴뢰정부 수립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의 옛 군벌과 지방의 유력자들을 모아 1932년 2월 18일 만주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어디까지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신국가의 이름은 만주국으로 정하고 3월 1일 건국하기로 했으며 국가의 형태는 공화국으로 결정했다. 그러자 황제의 지위를 바라고 있던 부의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관동군에서는 공화제 아래의 원수직을 주셌다고 하여 반발을 무마했다. 그 영역은 봉천, 길림, 흑룡강성의 동 3성으로 인구는 약 3천만 명 정도였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지난해 9월 18일 이후 일본은 불법으로 침략하여 중국인민을 협박하고 소수 반란분자를 이용해 비합법적 조직을 하여 부의를 데려다가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의 협박과 유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의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이 불법행위가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정부는 당초 이같은 정치조직은 반란기관이고 또한 일본의 부속기관이라고 간주해왔으며, 사태의 전책임은 일본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중국정부는 이와 같은 공식발표를 하고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나중에 부의를 천황으로하는 만주제국으로 바꿨다. 이제 만주는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부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다. 이는 곧 일본의 만주지배를 의미했다. 이런 상태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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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轍?魚(학철부어) ?(물 마를 학) 轍(바퀴자국 철) ?(붕어 부) 魚(물고기 어)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실려있다.
집이 가난한 장주(莊周:장자의 이름)는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고을의 세금을 거둬들여 그때 삼백금을 빌려주겠다는 감하후의 말에 장주는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지며 말을 했다.
내가 이리로 오는데 도중에 부르는 소리가 있어 뒤를 돌아보니 수레 바퀴 자국에 붕어가 있있소(車轍中有 魚焉). 그 붕어는 약간의 물만 있어도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남쪽의 오월(吳越)의 왕에게로 가서 촉강(蜀江)의 물을 보내주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그 붕어는 불끈 성을 내며 차라리 건어물전에 가서 자기를 찾으라고 하더군요.
?轍?魚(a fish in a dry rut-in extremities) 는 학철지부(?轍之? ), 철부지급(轍?之急), 고어학철(枯魚?轍), 학부(??) 등이라고도 하며,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북한 인구의 4분의 1인 550만명이 기아선상에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역시 허울 좋은 주체 낙원 건설 이 아니라 한 그릇의 강냉이 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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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어] 우제지어(牛蹄之魚). [출전] ≪莊子≫ 〈外物篇〉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란 뜻으로, 매우 위급한 경우에 처했거나 몹시 고단하고 옹색함의 비유.
전국 시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했던 장자(莊子)의 이야기이다. 그는 왕후(王侯)에게 무릎을 굽혀 안정된 생활을 하기보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그는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장자는 굶다 못해 감하후(監河侯)를 찾아가 약간의 식대를 꾸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감하후는 친구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핑계를 댔다.
“빌려주지. 2, 3일만 있으면 식읍(食邑)에서 세금이 올라오는데 그때 삼백 금(三百金)쯤 융통해 줄 테니 기다리게.”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2,3일 뒤에 거금(巨金) 삼백 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체면 불고하고 찾아온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장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고맙군. 하지만 그땐 아무 소용없네.”
그리고 이어 장자 특유의 비아냥조(調)로 이렇게 부연했다.
“내가 여기 오느라고 걷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부르지 않겠나.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붕어가 한 마리 있더군[?轍?魚].’‘왜 불렀느냐’고 묻자 붕어는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몇 잔만 떠다가 살려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귀찮은 나머지 이렇게 말해 주었지. ‘그래. 나는 2,3일 안으로 남쪽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로 유세를 떠나는데 가는 길에 서강(西江)의 맑은 물을 잔뜩 길어다 줄 테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랬더니 붕어는 화가 나서 ‘나는 지금 물 몇 잔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기다리라고 하니 이젠 틀렸소. 나중에 건어물전(乾魚物廛)으로 내 시체나 찾으러 와 달라’고 하더니 그만 눈을 감고 말더군. 자, 그럼 실례했네.”
[주] ‘?’이란 글자는 원래 ‘학’자인데 이 경우 ‘확’으로 읽어 ‘확철부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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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염색은 남자들이 즐겨했다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는 앗시리아인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이라크 북부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커트, 계단 커트 웨이브, 염색 기술은 중동에서 으뜸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머리에 대한 집착일 정도의 까다로움이 우수한 기술을 낳았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이발사는 상류층 조정 신하의 머리를 손질할 때 머리카락 끝을 조금씩 틀어서 깎는 그라데이션 커트를 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확실히 기하학적인 라인이 나오도록, 그리하여 어딘가 모르게 피라미드처럼 보이도록 깎았다. 긴 머리는 웨이브 방울 어깨에서 가슴에 걸쳐 계단 모양으로 흘러내리도록 정성스럽게 매만졌다. 머리카락에는 오일을 바르고 착향, 착색했다. 남성은 세로로 주름을 잡은 계단 커트로 깨끗하게 깎은 수염을 턱에서 가슴에 걸쳐 달고 있었다. 왕이나 전사, 귀족 계급 여성들은 푹신하게 흐르는 듯한 긴 머리에 사상 최초의 헤어 아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로 뜨겁게 만든 철봉을 이용하여 노예들에게 웨이브를 길게 했다. 앗시리아인들은 다른 화장술에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머리를 손질하는 기술만을 발전시켰다. 지위와 직업에 따라 머리 형태를 규정하는 법률까지 있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처럼 고위층 여성은 궁정에서 공무를 볼 때 남성과 똑같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양식화한 가발을 썼다. 대머리는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창피하게 여겨져 가발로 숨겼다.
앗시리아인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도 웨이브가 진 긴 머리를 좋아했다. 독특한 스타일의 긴 머리야말로, 짧은 머리로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은 북방의 야만족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표시라고 생각했다. '향기롭고 거룩한 정도로 아름다운 웨이브'는 그리스인의 동경의 대사이었고 산문이나 시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금발이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겨져 그리스의 위대한 영웅 대부분(몇 명의 이름을 꼽자면 아킬레스, 메넬라오스, 파리스)이 금발의 웨이브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금발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페니키아의 성분이 강한 비누와 알칼리 표백제를 써서 금발이나 빨간 머리로 바꿀 수 있었다. 당시의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비누 제조의 중심지였다. 남성들은 머리를 금발로 만들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썼다. 일시적인 금발로는 노란 꽃가루, 노랗게 만든 밀가루, 미세한 금가루를 섞은 타르캄 파우더(숫돌 가루)를 뿌렸다.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의 극작가인 메난드로스는 금빛이 더욱 오래 가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금발로 만들고 싶으면 이쪽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태양 광선을 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썼고 이어 실제의 방법을 '아테네제의 특수 연고로 머리를 감은 뒤에 모자를 쓰지 않고 몇 시간을 햇볕에 노출하여 머리가 금발이 되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그러면 분명히 금색이 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303년 프로 이발사들이 최초의 조합을 결성하여 로마에 가게를 열었다. 로마 사회는 기본적으로 머리 손질을 요구했고 그것을 게을리한 사람은 웃음거리로 여겨지거나 공공연히 모욕을 당했다. 그리스인의 금발 취향을 피하듯,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위가 높은 로마인들은 검은 머리 색을 좋아했다. 나이가 지긋한 로마의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은 백발을 숨기기 위해 고생을 했다. 1세기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프리니우스는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실하게 쓰고 있다. 인기 있는 흑발 염료는 호두 껍질과 부추를 함께 삶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염색하기 전에 우선 백발을 방지하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약초와 지렁이로 만든 페이스트를 하룻밤 동안 머리에 바르고 자는 일이 남성들에게 권장되었다. 로마의 대머리 방지약은 분쇄한 킨바이카의 열매와 곰의 기름을 섞은 연고였다.
전 세계가 금발이나 흑발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아직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고대 색슨인은 그림 속에서 머리와 수염이 담청색, 진홍, 그린,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다. 한편 갈리아인들은 빨간 색으로 염색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패션의 중심적 존재였던 무렵 당시의 저명 인사들은 여왕의 색인 밝은 빨강이 들어간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엘리자베스 1세를 궁정으로 방문한 어떤 대사는 여왕의 머리를 '도저히 자연스러운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선명한 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 시대 이전부터 남녀 모두 여러 가지 머리카락 가루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 습관을 패션의 기본 룰로 도입한 것은 16세기의 프랑스였다. 머리카락 가루는 미립자로 만든 표백 밀가루에 강한 향을 입힌 것으로 진짜 머리카락에든 가발에든 듬뿍 사용했다. 1790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에서 머리카락 가루를 비롯한 모든 머리 손질 용품들이 유행의 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고 웨이브를 넣고 덧상투를 몇 개나 겹쳐서 머리 위에 훌륭한 탑을 만들고 여러 가지 머리카락 가루를 뿌렸다. 파란색, 핑크, 바이올렛, 노란색, 흰색 모두 인기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머리카락 가루의 전성기 때 의회가 국고를 살찌게 하려고 머리카락 가루에 세금을 물렸다. 연간 25만 파운드의 수입을 예상했으나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전쟁으로 헤어 패션도 변덕스러운 유행을 따라 머리카락 가루의 유행이 지나가 버리자 세금 수입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머리 색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집착에도 아랑곳없이 본격적인 염색에는 항상 위험이 뒤따랐다. 염증, 발진, 암으로 연결되는 세포의 돌연변이 등 충분히 실험된 현대의 시판 염색약에도 위험은 있다. 그래도 부식성이 강한 원료를 사용한 옛날 제품과 비교하면 훨씬 안전하긴 하겠지만.
안전한 시판용 염색 염료를 개발하는 시도는 1909년 프랑스의 화학자인 유전 쉴러가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그는 프랑스의 무해 염모제 회사를 세우고 새롭게 발견된 화학물질인 파라페니렌지아민을 재료로 제품화했다. 나중에는 팔리게 되었지만 처음에 이 제품은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다. 1년 뒤에 쉴러는 좀더 매혹적인 회사 이름으로 '로레알'을 생각해 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염색이라면 여배우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50년이 되어서도 염색을 한 사람은 미국 여성의 겨우 7퍼센트, 그에 비해 현재는 무려 75퍼센트나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의식의 혁명을 가져온 것일까? 현대의 염색 혁명은 더욱 안전한 제품 때문도 아니고 간편해진 사용법 때문도 아니다. 대부분이 이미지 변화를 주창한 교묘한 선전 광고 때문이었다.
이 염색 선전의 선두에 화려하게 선 것이 클레이롤 사였다. 뉴욕의 카피라이터인 셸리 폴리코프가 생각해낸 선전 문구인 "그 여자, 했니? 안 했니?"와 "알고 있는 건 그 여자의 미용사 뿐이야"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졌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클레이롤 사는 삽화가 들어간 모든 광고에 아이를 넣었다. 염색을 한 여성 모델이 평범한 여성, 경우에 따라서는 어머니로 보이게 한 것이다. "그 여자, 했니? 안 했니?"가 시사하는 의미는 숱한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덕분에 최고의 선전 효과를 올리는 결과가 된 것은 아이러니였다. 사람들은 "그 여자, 했니? 안 했니? 그게 무슨 뜻이야?"하고 농담을 했다. "라이프" 잡지는 그 선전 문구가 노골적이고 아슬아슬하다는 지적을 하면서 광고의 게재를 거절해 버렸다. 이에 대해 클레이롤 사의 중역들은 전원 남성인 "라이프"지 심사단에게 이 광고를 남성과 여성 양쪽에 시험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고 할까, 예상했던 대로라고 할까, 무척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아무도 그 선전 문구를 가지고 성적인 연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성들은 모두 성적인 연상을 했다. "라이프"지는 태도를 누그러뜨렸고 제품의 판매는 호조를 이루었다.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일은 이제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1960년대 말기에는 거의 70퍼센트의 미국 여성과 2백만 명의 남성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머리카락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현대의 미국인이 2000년이나 전의 유행을 그제야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옛날과 한 가지 다른 점은 옛날에는 남성 쪽이 여성보다 많이 염색을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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