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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36호
2011.12.21 (음 11.27)/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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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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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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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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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우리들 인간이 지상에서 이루어 놓은 것이나 만들어 낸 것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경이로우며 또한 가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라 불리워지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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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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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표현
'이팔청춘(二八靑春)'은 16살 무렵의 꽃다운 청춘, 또는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을 일컫는다. 여기서 '16'을 한글로는 '열여섯'이라고 쓸 수 있다. 그러면 '열여섯'의 띄어쓰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열여섯'으로 붙여 쓴다. 국어사전에는 '열여섯'이란 단어가 올라 있지 않다. '열여섯'이 합성어가 아니므로 '열 여섯'같이 띄어 써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열여섯'으로 붙여 쓰는 이유는 한글 맞춤법 제44항 때문이다. 한글 어문 규정에 '수를 적을 때는 만(萬) 단위로 띄어 쓴다'고 돼 있다. '십이억 삼천사백오십육만 칠천팔백구십팔'과 같이 쓰라는 얘기다. '열여섯'도 마찬가지다. 만 단위로 띄어 쓴다는 것은 만보다 작은 수일 경우에는 언제나 붙여 쓴다는 뜻이다. '열여섯'이 나이를 나타내는 '살'과 결합할 때는 '열여섯 살'처럼 띄어 쓴다. 그러나 아라비아숫자로 쓸 경우엔 띄어쓰기가 달라진다. '16 살/ 16살' 둘 다 가능하다.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된다. 아라비아숫자와 그 다음의 단위명사를 붙여 쓰는 현실을 수용한 결과다. 현실에서 '16살'같이 붙여 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 '제2 차(제2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서 어떤 띄어쓰기가 맞을까? '제-'가 붙어 차례를 나타내는 경우의 띄어쓰기에서 많은 사람이 혼동한다. '제2 차(제2차) 세계대전'은 맞고, '제 2차 세계대전'은 잘못이다. 원칙은 '제-'는 접두사이므로 뒤에 오는 말에 붙여 쓰고, '차'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단, 아라비아숫자 다음의 단위명사는 붙여 써도 된다.
과중, 가중
'목 뒤가 뻐근하고 온몸이 찌뿌듯하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 십상인 직장인들이 흔히 호소하는 증상이다. 이러한 증세는 며칠 쉬고 나면 회복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충분히 자고 일어나도 몸이 천근만근 늘어지고 머리가 계속 무겁다면 "혹시 만성피로증후군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가중된다. 만성피로의 원인으로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꼽는다. 이때의 '과중(過重)'은 부담이 지나쳐 힘에 벅차다는 의미로 "업무량이 과중해 박씨의 간염이 급속히 악화된 점이 인정된다고 재판부는 판결했다" "그의 능력에 비해 과중한 직책이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처럼 쓰인다. 하지만 이를 '가중(加重)'으로 바꿔 표현하면 다소 뜻이 달라진다. "팀장은 한 명의 부하 직원에게 업무량이 가중되지 않도록 효율적으로 일을 배분해야 한다" "운동 후 흡연은 피로를 풀리게 해 준다고 믿기 쉽지만 이는 니코틴 자극에 의한 일시적인 느낌으로 시간이 지나면 피곤함이 가중된다"와 같이 책임이나 부담 등을 더 무겁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두 단어 모두 부담이 무거워진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과중'은 부담을 지는 사람이 견뎌 내기에 힘들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의 계획은 업무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처럼 단순히 부담을 더하다는 뜻으로 사용할 때는 '가중', "과중한 업무로 누적된 피로가 습관성 두통이나 우울증 같은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처럼 부담이 너무 커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쓸 때는 ''과중''으로 표현해야 한다.
버벅거리다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속도가 느리거나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신경질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주로 쓰는 말이 "버벅거린다" 또는 "버벅댄다"다. "예전엔 안 그러더니 컴퓨터가 갑자기 버벅거린다" "화면과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버벅대 영화를 볼 수가 없다"처럼 컴퓨터가 몹시 느리거나 어떤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끊김 현상이 일어날 때 '버벅거리다(버벅대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 긴장하거나 당황해 말을 더듬거리는 경우에도 '버벅거리다(버벅대다)'는 표현을 쓴다. "긴장한 탓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말할 때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발음을 버벅대는 경우가 있다" "말솜씨가 없어 버벅거리기도 했는데 그가 오해하진 않았는지 모르겠다"와 같이 발음이 불명확하거나 얘기가 순조롭게 되지 못할 때 '버벅거리다(버벅대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버벅거리다' 또는 '버벅대다'는 사전에 없는 단어다. '어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헤매거나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의미로 인터넷상에서는 물론 신문.방송 등 공공매체에서도 '버벅거리다'는 표현을 흔히 쓰고 있지만 표준어가 아니다. '말을 하거나 글을 읽을 때 순조롭게 하지 못하고 자꾸 막히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해 행동을 민첩하게 하지 못하다'는 뜻의 '더듬거리다(더듬대다)'또는 '더듬더듬하다'로 바꿔 쓰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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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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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 김경인
나는 멈춘다, 검은 사람들과 더 검어질 사람들이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숲길에서
언 땅 속에 꼼지락거리는 말들을 파헤치는 말발굽의 아우성과 식물도감 십칠 페이지 낡고 찢어진 풍경을 다 잊고서
너는 받아 적는다, 부화 직전 깨져버린 개개비의 청청록록 알껍질과 이제 막 날아오른 푸른머리흰눈의 발에 묶인, 슬픔처럼 길게 늘어진 철끈을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한 줌의 어둠 안에 사로잡히기 위해 네가 펼쳐든 대낮의 연분홍 양산이 접힐 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너의 목소리 빌려준 나의 팔다리들 그리고 아직 내 것인, 옛집 문고리에 달라붙은 얼굴에 대해
네가 꽃이었을 때 숲은 흰 빛. 밀서를 봉하기 위해 기꺼이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내가 흘러들어간
내가 키운 편애(偏愛)와 편집(偏執)의 호두나무야 울퉁불퉁한 열매를 잔뜩 달고 시름시름 자라나야지 여러 개의 물혹을 매달고 느리게 달려가는 추억처럼
파란 얼음 아래 어른거리는 물고기 비늘 내가 떠나온 시간의 사금파리들이 창백하게 반짝일 때
물속의 녹슨 자물쇠는 아무것도 고백할 것 없는 아이의 몸통에 다시 채워진다
너는 황혼 다음, 검푸른 어둠 호주머니 속 작은 손전등 호주머니 속엔 차가운 손이 두 개
나는 두드림을 반복하는 녹슨 문고리 어떤 이름도 적힌 적 없는 종이
죽은 글자들을 뜯어먹고 살찐 들쥐들이 짚덤불 아래 비좁은 잠자리를 다투는 숲, 숲으로부터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문장이 가볍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내가 처음 네게 가 닿던 그날, 창문에 서리다 사라지는 입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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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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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해수관음상 - 김종원
기다림은 애틋함 만남보다 향기로워
향수병 거머쥐고 영겁을 피는 미소
바닷가 홀로 있어도 시들 줄을 모르네.
동해에 비친 달이 방긋 웃어 일렁이면
연꽃 속 묻어 둔 속세의 눈빛 하나
크렁한 눈물을 달고 밤하늘을 비추네.
(200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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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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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희망 - 오승강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학교에서 있은 일을 생각해 본다.
문 짜는 공장 직공인 내 아버지 늘 하시는 말씀 "문 짜는 공장 차리는 게 내 소원이다. 니 크거던 문 짜는 기술자 되거라."
직업의 종류를 배우는 사회 시간 아이들은 모두 힘차게 장래 희망을 발표했다. "대통령, 국회의원, 의사, 판사, 간호원......" 나는 머뭇거리며 "문 짜는 기술자." 하고 얼결에 대답했다. 아이들은 모두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기껏 희망이 그거니?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그래 문 짜는 사람이면 어떠냐 앞뒤 생각도 없이 높은 사람 되겠다는 사람들보다 문 짜는 사람이 천배 만배 더 낫다.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소리 듣고 부끄러워하던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왜 나는 당당하지 못했을까? 왜 그랬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깨를 펴고 아이들의 놀림에 부끄러워한 나를 부끄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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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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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5장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가
2. 정, 지, 용 - 맹자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이상적인 성격은 마음에 온정을 지녀 대범하여 근심이 없고, 더우기 용기 있는 성격이다. 맹자는 그가 말하는 이른바 <대현>이 갖추어야 할 성덕(mature virtues)으로서 세 가지 덕을 들었는데 <지, 인, 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인(compassion)이라는 말의 첫음절을 떼어 버리고 정(passion), 슬기(wisdom), 용기(courage)를 위대한 인물이 지녀야 할 성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다행히 영어에는 패션(passion)이라는 말이 있어서 중국어의 정이라는 말과 매우 비슷한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두 말이 다 성적 열정(sexual passion)이라는 좁은 뜻에서 나왔지만, 그러나 이 두 말은 그보다도 훨씬 넓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장자가 말했듯이 <정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이성을 사랑하지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는 <정은 인간세계의 밑바닥을 바치고 있는 것이지만 재는 그 지붕을 채색하는 것이다> 대체로 정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정기, 빛나는 별빛, 음악의 곡조, 꽃이 주는 기쁨, 새의 깃, 여성의 아름다움, 학구적인 생활, 이것들 모두 정의 정다운 표현인 것이다. 표현이 없는 음악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정이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이야말로 유쾌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풍부한 생명력을 주는 것이다.
중국의 문인들이 정이라고 부르는 말을 패션이라는 말에 들어 맞추어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션이라는 말보다 조용하고, 거친 파도와 같은 정열이라는 격한 뜻이 비교적 적은 센티먼티(sentiment)라는 말로 되풀이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왕년의 로맨티스트들이 센시빌리티(sensibility)라고 부른 그 말과 같은 뜻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따사롭고 넓고 넓은 예술가적인 심정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패션이라는 것, 또는 그보다는 좀더 나은 말인 센티먼트라는 것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조금은 갖고 있는 것이어서, 부모를 자기 마음대로 골라 잡을 수 없듯이 본디몸에 갖추어진 차가운 성질이라든가 따뜻하 마음씨라든가를 우리들은 저마다 갖고 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한편 또한 마음속까지 차가운 성질을 갖고 태어나는 어린이란 아무데도 없다. 우리들이 따뜻한 마음씨를 잃게 되는 것은 다만 젊었을 때의 젊고 싱싱한 심정을 잃게 되는 정도에 의할 따름이다. 중년이 되면 우리가 지닌 다감한 성품은 무자비한 주위 환경 때문에 없어지고 숨이 막히고 냉각되어 또한 움츠러드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의 대부분은 이같은 순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거나, 또는 무자비한 환경의 영향을 피할 힘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을 배워가는 동안에 외부 세계의 많은 힘이 우리가 타고난 천성에 작용하여 이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기교적으로 만들고, 때로는 냉혹하기 이를 데 없이 무정하게 만드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을 많이 쌓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무렵에도 신경은 한층 더 둔감해지고 마비되어 버리게 된다.
정계와 실업계에서는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하다. 그 결과 누구라도 닥치는 대로 제쳐 놓고 자기만이 앞장서서 달리는 무시무시한 <억척꾸러기>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강철 같이 굳은 의지와 굳센 결의만은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어 겨우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 그런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정다운 맛 따위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나, 한낱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내가 경멸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는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만일 단종이라는 것을 나라의 정책으로 행한다면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인간, 미적 감이 썩어빠진 사람, 정감이 우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 냉혹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사람,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냉혈한, 또는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흥취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우선 단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격한 생활로 정신병자가 된 사람이나 그 희생이 된 사람보다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먼저 단종시켜야 한다. 열정이나 감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리석은 짓이나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그런 성품이 없다면 우스꽝스러운 것이어서 한 조각의 만화에 지나지 않는다. 자 도데가 그린 사포(Sappho)에 비하면, 이러한 인간들은 벌레나 기계나 자동인형이나 아니면 땅 위에 버려진 하나의 더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매춘부 가운데는 성공한 실업가보다도 마음이 훨씬 고상한 사람이 많다. 사포가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도대체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과연 그녀는 죄를 짓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을 사랑했다. 강하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지은 죄는 대채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쨌든 그녀는 현대와 다름없는 몹시 살기 힘든 가혹한 사회에 태어난 여인이었지만, 자 수많은 백만 장자에 비하면 훨씬 젊고 싱싱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하는 일도 좋은 일이다. 정열이나 감상적인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언젠가는 죄값을 치러야만 하는 잘못을 저지러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죄를 지은 어머니가 그 죄 때문에 때로는 오히려 보다 훌륭한 사랑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도 있다. 또는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엄격하고 준엄한 사람들처럼 까다롭게 일생을 보내지 않고 가족들과 좀더 즐거운 생활을 했더라면 좋았겠다고 늙은 뒤에 후회하는 어머니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일찌기 친구에게서 들은 일이 있는데, 일흔 여덟은 살이 된 어느 노파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지나간 78년의 생애를 뒤돌아보고 제 자신이 죄를 졌을 때를 회상하는 것은 그래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아량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하나의 철학으로 몸을 지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가혹하기에 온정만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 슬기와 용기에 결부되어야만 한다. 내 생각으로는 슬기도 용기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용기란 인생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용기가 있다. 그것은 어쨌든 우리에게 용기를 갖게 해주지 않는 슬기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은 야심을 부정하고, 사상에 관한 것이건, 생활에 관한 것이건 간에 일반의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히기 쉬운 망집을 벗어남으로써만 슬기는 용기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망집이 있다. 중국의 불교도들은 갖가지 작은 망집을 두 개의 크다란 망집으로 분류했다. 명성과 부귀가 바로 그것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건륭 황제가 남중국으로 여행을 하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많은 돛단배가 부지런히 지나해를 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때 황제는 곁에 있는 신하를 돌아다 보며 저 몇 백 척의 배 속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신하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두 척의 배가 보일 따름이옵니다. 배의 이름은 명성, 부귀라고 하옵니다> 많은 교양 있는 사람들은 부의 유혹은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명성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매우 위대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옛날 어떤 스님이 세속적인 번뇌의 두 개의 원천에 대하여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리기보다는 금전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리기가 보다 쉬운 것이다. 조용히 물러나 있는 학자나 스님조차도 여전히 자기네 동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이름을 떨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청중이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고 싶어하며, 너와 나와 단둘이 있는, 스승도 하나 제자도 하나인 이런 작은 절에서 숨어 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자 제자가 대답했다. <스님, 정말로 그 말씀이 옳습니다. 스님이야말로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을 이겨내신 오직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의 눈으로 인생을 살펴 보면 인간에 지닌 망집에 대한 이와 같은 불교도적인 분류는 완전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인생의 큰 망집은 두 종류가 아니라 세 종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명성, 부귀, 그리고 권력. 이 세 가지의 것을 하나의 커다란 망집으로 한데 묶어주는 꼭 알맞은 말이 미국에 있다. 그것은 이른바 <성공>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슬기로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성공 즉 명성, 부귀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은 실패와 가난과 무명에 대한 두려움을 모나지 않게 표현한 말이며, 이같은 두려움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미 명성과 부귀를 얻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해서 사람을 지배하려고 버티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나라를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희생은 때로는 너무나 큰 경우가 많다. 이에 다음가는 사회적인 망집이 여기 또 하나 있다. 강력하고 일반적인 망집으로서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는 체제가 바로 그 생각이다. 자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사실 매우 드물다.
그리스 철학자였던 데모크리스토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기는 두 개의 크다란 두려움, 즉 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압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므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보편적인 또 하나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이웃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다. 신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해방된 사람일지라도 이웃 사람들, 즉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놓여 나온 사람은 많지 않다.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고 있지 않든 간에 우리는 모두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역할과 차림을 하고 연극을 하는 인생의 배우인 것이다. 연극적인 재능은 그 재능의 일부로서 관계가 깊은 흉내내는 재능과 함께 우리가 우리네 조상인 원숭이들로부터 물려 받은 습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인간의 습성에서 비롯되는 이점이 여러 가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가장 눈에 띄기 쉬운 것이 관중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채가 큰 만큼 무대 뒤에서의 걱정도 한층 더 크다. 그러나 그것도 또한 사람이 살아나가는 하나의 생활 양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관중들이 기뻐하는 체제로 자기가 맡은 구실을 다했다고 한들 하나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반대할 만한 것은 배우가 인간의 자리에 대신 들어 앉음으로써 본디의 인간의 모습이 완전히 잃어지고 마는 것이다. 명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다만 언제나 웃음을 띤 채 본디의 자기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그러한 산택된 인물은 많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인 것이며, 지위라든가 직함이라든가 재산이나 부귀 따위의 이위적인 환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물로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너그러운 미소로써 받아들이고 자기만은 여느 사람들과는 좀 색다른 존재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개인 생활에서 본질적으로 간소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계급의 사람들인 것이며, 이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간소하게 지낸다는 것이 언제나 진실로 위대한 사람의 징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앞서 말한 여러 가지 환각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이 가장 불쌍한가 하면 자기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환각에 사로잡혀 있는 보잘것 없이 초라한 시골 관청의 공무원이라든가, 보석을 여봐란 듯이 자랑하는 벼락부자 출신인 사교계의 여인, 불후의 작가 대열에 끼게 되었다고 확신하며, 삽시간에 여태까지 해온 간소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잃어버린 뜨내기 작가 만큼 더없이 불쌍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연극적인 본능은 이같이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때로 무대에서 떠나서 생활하는 것을 잊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면서 이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도 참된 인간의 본능에 따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중국의 속담에 있듯이 <다른 여인의 결혼 의상을 짓고 있는 노처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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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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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3. 장자
장자(기원전 369-286)
나도 세상의 티끌 속에서 자유로이 살겠소 - 이현구(성균관대학교 강사)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자의 이름이 장주라고 했다. 학자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지금부터 2, 300년 전쯤에 나이 30세 안팎의 장주라는 남자가 지금의 하남성과 안휘성 경계 지역에서 살았고 기원전 300년이 지나서 죽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장자는 유교의 깃발을 높이 들고 공자 사상을 전파하던 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아마 장자가 조금 후배였을 것이다. 천하가 일곱 나라고 갈라져 서로 다투던 전국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 학자들도 여러 정치 노선을 내걸고 치열한 사상 논쟁을 벌인다. 맹자와 장자는 서로 만나지 못한 것 같고 당시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 가운데 장자가 만난 사람은 혜시라는 정치가였다. 혜시는 논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자주 장자의 토론 상대 노릇을 했다. 장자는 젊은 시절에 옻나무 동산 관리를 맡은 적이 있지만 곧 그만둔 것 같다. (장자)라는 책의 가을 하늘같이 확 트인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장자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모양이다. 지방 관리에게 쌀 꾸러 갔다가 푸대접당한 이야기, 짚신을 엮어서 목구멍에 풀칠한 이야기,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로 위나라 왕을 만난 이야기 등이 (장자)에 나오는데, 이것은 장자의 모습을 사실대로 쓴 것이라고 본다. 언젠가는 초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서 높은 관직으로 장자를 초빙하려 했으나 장자는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나라에 신주로 모셔 둔 신령스런 거북이 있지요. 그 거북은 죽어서 길이길이 신주처럼 모셔지는 것을 바랐겠소, 아니면 저 살던 물에서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싶었겠소?" "그야 살아서 즐기기를 바랐겠지요."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오. 나도 세상의 티끌 속에서 자유로이 살겠소."
그러나 우리는 장자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실히 알수 없다. 장자에게 삶과 죽음은 손등과 손바닥 같아서 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덧없이 흘러 가는 그림자요 꿈이다. 진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뿐이다. 아마 그래서 제자들이 혜시와 장자를 이렇게 비교했을 것이다. "혜시가 관직 생활하고 있는 위나라에 장자가 찾아갔을 때 혜시는 장자를 왕에게 소개하길 꺼렸다. 장자는 혜시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봉황새를 아는가. 이 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맑은 이슬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네. 솔개가 썩은 쥐 한 마리를 잡았는데 마침 지나가던 봉황새를 보고는 자기 먹이를 빼앗길까 허겁지겁했다네. 그 솔개 꼴이 바로 자네 꼴일세.'" 장자는 세상을 냉소하고 스스로를 고고한 학처럼 여긴 사람이었을까? 문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노력을 쓸데없는 것이라 하며 자연속에 숨어 버린 사람이었을까? 깊은 명상에 들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기를 모으고 온몸에 돌려 불로장생하려던 도사였을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장자)라는 책에서 찾는다면 그 답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장자)라는 책에는 서로 충돌하는 주장이 함께 소개되어 있고, 다루고 있는 소재도 갖가지일 뿐 아니라 비유나 우언의 독특한 표현 형식 때문에 주장하려는 뜻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자료에서도 장자의 삶은 재구성할 만한 건덕지를 충분히 모으기는 어렵다. 장자는 (장자)라는 책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장자)라는 책은 장자 학파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장자라는 인물은 고대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했던 한 무리 인간들의 집합체다.
(장자)라는 책은 지금 33편으로 전해지고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이다. (한서 예문지)에는 (장자)가 52편이라고 했으나 우리가 지금 보는 책은 진의 곽상이 편집하고 해설한 33편뿐이다. 그 중 내편은 대체로 장자 자신이 지은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제자나 장자 학파의 저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고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장자의 친필이 어느 것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뛰어들어 '정답'을 내놓은 학자는 없다. (장자)라는 책은 여러 사람 손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개성이 강한 천재들
장자의 문장은 웅대하고 자유분방하며, 설득력 있는 비유로 통념을 깨뜨리고, 끝없는 환상과 꿈의 세계로 독자들을 몰고 가서, 한 순간에 '평범한 인생에 대한 환멸'을 가르쳐 준다. (장자)는 약 30장의 논평이나 단상과 168장의 우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우화의 주장과 배합과 구성이 교묘하고 지루하지 않다.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는 독자의 선입견을 완전히 휘저어 놓고 시작한다. "북쪽 바다에 몇천 리 되는지 알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고기가 사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묘사가 사실적이지만 논리적 형식은 (노자) 첫머리의 "도라고 할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와 같이 역설적 구조다. 왜냐하면 '곤'이란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물고기 알을 가리키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장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는 모순된 문장이다. 이어서 "곤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하며 길이가 수천 리고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고 하는데, 이것도 묘사는 영화 장면처럼 생생하지만 의미는 '변화'에 있다. 물고기는 물고기고 새는 새라는 상식을 가진 독자도 (장자)의 첫 문장을 읽는 사이에 "물고기는 새로 변한다, " 다시 말하면 사물은 다른 사물로 바뀔 수 있다는 탈상식의 사고를 쉽게 받아들이고 만다. 이 '변화'에 대한 생각은 또한 세계의 본래 모습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전파되었다.
(장자)는 통념과 상식의 입장에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엉터리 거짓말을 끝없이 하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쉽게 눈치 채지 않게 썼다. 세상에 없는 일을 말하면서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철학과 문학이 이렇게 어우러져 교묘한 예술을 이룬 작품도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장자)의 우언이 가진 이런 예술성과 다의성 때문에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 따라 무협지 수준이 될 수도 있고, 고차원의 위상 수학이 될 수도 있다. 전국 시대에 학파들이 대결하는 마당에 이런 수법으로 자기의 세력을 펴고자 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진 것일까? 공자는 상황 속의 인간을 네 부류로 나눈 적이 있다. 미치광이 이상주의자들은 실현할 방도도 없이 원대한 꿈을 떠들어 댄다. 그들은 매우 진취적이지만 하는 짓이 위태롭다. 고집불통 교조주의자들은 세상의 흐름에 앞서지 않으면서 세상에 나서서 설치는 인간들이 하는 일마다 꼬집고 비판하고 반대한다. 세상의 소금이다. 공자는 이 둘의 장점을 취해, 상황에 적절하며 융통성 있고 성과가 있는 방법을 '중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중용과 아주 비슷하면서도 틀려 먹은 인간 부류가 있다. 공자는 이들을 '향원'이라고 했는데 기회주의적 속물들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출세한 인간이 되고 보통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지만 철학이 없고, 있다면 상하좌우로 눈치를 잘 살펴서 적당히 중간을 가는 인간들이다. '중용'과 '중간'의 차이는 철학이 있고 없는 차이다. 공자는 중용을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차라리 미치광이들이나 고집불통과 사귀고 싶다고 했다.
장자 학파 사람들은 고집불통의 천재들이었다.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큰소리 친다고 비난하고, 제깐에는 땀 흘리며 온몸으로 뛴다는 인간들을 냉소했다. 그들은 의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세상의 난사람들을 감시했고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쇠코를 꿰고, 물 긷는 기계를 발명하고, 효율적으로 인간을 관리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운동 들에 대해 언젠가는 망하리라 하면서 비아냥거렸다. 전국 시대는 부국 강병의 시대였다. 나라마다 침략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고 중앙 집권화로 인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 애썼다. 도가 사상의 기본 입장은 당시의 이런 경향에 대한 반발로 개인의 자유와 생명 존중사상을 주장했다. 또한 중앙 집중화의 시대 흐름에 대해 원시적 자연 부락의 관습에 의한 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이런 입장은 문명 건설과 인간의 자연 이용과 개발을 반대하고, 인간은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연주의적 철학 사상으로 발전했다.
세계에 대한 질문, 나에 대한 질문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알아낸 것은 광대한 해변에서 작은 모래알 하나를 집어든 것과 같다." 뉴턴 같은 천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니 참 흥미 있는 일이다. 어쩌면 천재들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월등히 많이 아는 사람이 스스로 모르는 것이 많다고 느낄 때 철학이 시작된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고 했을 때 '안다'는 것과, 소크레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아마 베이컨은 자연 법칙을 많일 알수록 인간이 자연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고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장자는 베이컨의 세계에 대한 앎에서 시작하여 소크라테스의 나에 대한 앎을 문제 삼았다. "하늘은 도는가? 땅은 정지해 있는가? 해와 달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가? 누가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할 틈이 있었을까? 그들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움직이는 어떤 기계 장치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저 움질일 뿐인가? 구름이 비를 만드나, 아니면 비가 구름을 만드나?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이 세상을 굽어보며 여유 있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신경을 쓸 여가를 가졌을까?" "하늘을 푸르고 푸른 것이 그 본색인가? 그것은 멀어서 끝이 없는가? 아래로 내려다보면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백 개의 뼈와 아홉 구멍과 여섯 내장이 다 갖추어졌으니, 나는 어느 것과 친할까? 너는 그들을 모두 다 좋아할까?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을까? (네가 따로 있다면)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너희) 심부름꾼들이 아닐까? 심부름꾼들끼리 서로 시키면 되지 않을까? 돌아가면서 주인이 되고 심부름꾼이 될까? 진짜 주인이 따로 있을까?"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은 장자의 첫째 가는 관심 주제다. 하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이므로 비교도 차별도 경쟁도 전쟁도 건설과 파괴도 성공과 실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이 모든 것들이 있다. 인간들은 선악 미추 시비 생사 유무를 구분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선택하고 경쟁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세계의 본래 그러한 모습과 어그러지기만 하는 인간의 '의식'때문이다. 장자는 이것을 '자연'과 '인위'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둘, 셋 그리고 무수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인위'때문에 세상이 복잡하고 험악해졌다고 본다.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계획, 의도, 방법은 혼란만 일으킬 뿐 실제로 주는 이익이 없다. "원숭이를 키우던 할아버지가 흉년을 만나 원숭이 먹이 걱정이 생겼다. 할 수 없이 원숭이들을 모아 놓고 설득했다. '너희에게 미안하지만 형편이 그래서 도토리를 하루에 일곱 개로 줄이고,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줄 작정이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웅성거리며 불만이 많았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면 되겠느냐?'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좋아했다." 원숭이 할아버지는 잔재주로 위기를 넘겼으나 원숭이들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다시 잔재주를 피워야 할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 설계하고 계획한다는 것이 겨우 이런 잔재주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언어와 지식에 근거하여 전파된다고 장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사색의 두번째 주제는 앎과 말이다.
장자는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알았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다. 그것이 착각인 이유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득하려 한 내용이 (장자)에는 매우 많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 말할 때 이미 세계자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세계는 하나다"라고 말하면 이미 하나의 세계와 '세계는 하나'라는 말이 있어 둘이 된다. 우리가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 뒤로 현지와 관계없는 지도가 나올 가능성도 생겼다. 맨 처음 어느 지역의 지도가 나오면 다른 사람은 그 지도를 들고 현지에 다니면서 새로운 내용을 덧붙인 지도를 만들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두 자의 지도를 들고 현지에 가서 지도끼리 비교하고 지도와 현지를 비교하여 다른 지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게으른 사람이 남들이 만들어 둔 여러 장의 지도를 모아서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식을 가지고 먹고살수 있는 사람들의 탄생이다. 현지에 가 보지 않고도 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알려지고 나면 이제 지도는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들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어렵다. 서로 자기 지도가 옳다고 큰소리고 주장할 뿐 아니라 현지에 가서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수한 지도들을 이것 저것 비교하느라 시간이 다 간다. 장자는 전국시대의 난국에 대해 처방을 내린 사상들이 현지에 가 보지 않고 만들어진 지도와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또 문제는 지도가 아무리 잘 만들어져도 현지는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는 서로 자기 지도가 옳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자기 지도가 현지와 다르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따라서 장자에 따르면 지도 중에 유일하게 현지와 맞는 지도는 없고, 이론도 현실 정치에 대한 '정답'이 되는 이론은 없다. 될 수 있으면 이론끼리 우열을 따지는 데 시간을 많이 소비하지 말고, 생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의 작용을 억제하고 중추신경계의 생명 활동을 자유롭게 하여 위장병과 노이로제가 없는 인생을 살게 하자는 것이다. 이론의 우열을 다투는 자들은 이론을 잘 모르면서도 자연의 질서에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억지로 조직하고 집단화하려고 하는데, 백성들은 각자 제멋대로 살게 두면 자연히 자그마한 농촌에서 덕망 있는 대표자가 나오고 질서를 이루는 것처럼 아무 문제도 없다고 장자는 주장한다. 그런데 이론에 대한 철저한 회의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장자 자기의 주장도 옳은지 그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나도 꿈꾸고 있지만 여러분도 꿈꾸고 있는 것이니 같이 꿈 깨자고 말하고 말았다. 참으로 한심한 대안이다.
이런 입장은 마침내 중앙 집권적 통치 조직이 이루어지고 도시가 생기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이 나타나자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그전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에 타협하여 그럭저럭 따라 살면서 불평 불만을 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통제와 감시가 못 미치는 산 속으로 숨는 방법이다. (장자)는 대게 이런 역사 변동의 시점에 이루어진 불평 불만 모음집이다. 그들은 전통적 자연 농촌 부락의 생활방식을 존중했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원시적인 농경 사회의 삶을 중시했으며, 지능을 발달시켜 온갖 거짓을 부리기보다 육체의 생명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삶을 열망했다. 그들은 변동의 주도 세력이 아니면서도 천부적인 이론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어서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자 학파의 반항 정신은 관념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당장 대세를 돌려 놓을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장기적인 포석을 해 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이들의 개체 주시와 생명 존중 사상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 등장했고, 실질적으로 유가 사상이 현실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새로운 이론 보완의 젖줄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풍부한 논쟁들 속에서 독특한 방법론을 개발한 덕분이었다. 장자의 허위의식 파괴 공작은 동양 사람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장자의 세계관은 우리 전통 사회의 정서에 밑바탕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양의 산수화를 보면 사람을 찾기 어렵다
장자 사상은 전국 시대의 제자 배각 사상 가운데 도가 학파에 속하고 노자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보지만, (장자)라는 책에는 유교 사상이 섞여 있는 편들도 있다. 또한 (장자)에는 공자를 우화 속에 등장시켜 조롱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소동파 같은 사람은 그것이 겉으로 보면 공자를 놀린 것 같지만 속에는 공자를 높이는 자세가 깔려 있다고 했다. 소동파는 어쨌든 장자를 외도이단의 가시밭길에서 구해 내려고 했기 때문에, 아무리 좋게 보아도 유교의 성인이 발붙일 곳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도척), (양왕)등 몇 편의 작품은 장자의 진정한 뜻과 거리가 먼 졸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동파의 바람이고, 장자의 근본 사상은 어디까지나 유가를 비판하고 노자를 잇는 도가 계열이다. 도교와 불교가 천하를 휩쓸던 시대에 유교를 되살려 낼 기초 작업에 큰 공을 세운 한유도, 장자가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하 계통의 학문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했다. 자하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열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로 문학이 전공이었다. 심지어는 장자 사상이 공자의 수제자 안연의 계통을 이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장자)에 대한 유가 사상가들의 끊임없는 눈짓은 (장자)의 풍부한 상상력과 언어의 예술을 배우는 것이 유교를 위해 이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은 1, 400년이 흐른 뒤에 나온 새로운 유교, 즉 주자학의 세계관이 노자와 장자 철학의 복사판이라는 현대 철학사가들의 평가에서 분명해진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은 정치와 윤리의 문제는 (논어)나 (맹자)에서 깊이 다루었지만 '세계'에 대한 질문을 (장자)에서 시작하며, 그런 점에서 중국에서 철학적 사고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를 최초로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책이 (장자)다. 동양의 산수화를 보면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어디엔가 있기는 있는데 그 존재가 뚜렷하지 않다. 큰 산과 강물이 있고 또는 폭포가 있으며 울창한 수풀 속에 보일 듯 말 듯 집이 한두 채 보이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한참 찾아야 한다. 강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든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고 있다. 세계 속의 인간 모습은 이와 같다. 장자가 그린 우주도에서 인간의 크기는 이런 산수화 속의 인간 크기와 꼭 같다. 고대에 이미 하늘, 땅, 사람이라는 큰 구분이 있었다. 그래서 유교의 책 가운데 (주역)이나 (중용)은 만물을 낳는 하늘의 공덕과 만물을 기르는 땅의 공덕과 만물을 경영하는 인간의 공덕이 맞먹는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그러나 장자의 눈으로 보면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장자에 따르면 인간은 우주를 다 알 수 없다. 우주를 인간의 생각으로 한정시키면 사람들은 우주 밖에 무엇이 있는지 물을 것이다. 그래서 엉뚱하게 우리 마음이 지어낸 신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 우주를 감싸고 있다고 헛소리를 하게 된다. 장자는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한 몸 속에 매달린 정신이라는 것을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선전하지 말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은 동양의 전통 사상에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육합(상하사방) 바깥은 논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장자의 제안은 전통 사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신을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을 막아 내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는 사물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고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여 주기성을 발견하고 법칙을 찾았지만 사물을 쪼개고 열어 보고 별들을 인간이 만들어 낸 궤도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따져 보는 방법은 아주 소홀히 했다. 말하자면 세계의 구조에 대한 탐구는 몹시 억제되었다. 그 책임의 일부는 장자 사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물과 하나가 되고, 천하를 알려면 천하와 하나가 되라" 이런 방법은 경험과 신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장자의 프로그램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큰 것을 알면 작은 것을 알 수 있고 시간을 알면 공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안달하지 않고 조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의 설계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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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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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서비스 정신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들도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새로운 발전을 시도할 것이다.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발전되고 보람있는 새해가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보람있는 생활을 위해 사회 전체가 여러분에게 크게기대하고 있는 여러분의 직책의 근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여러분의 왕성한 서비스 정신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이 서비스 정신에 관해서 말해보자. 첫째, 서비스 정신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정신이 밑받침된다. 상대편을 위해 그의 발전, 행복, 편리 등을 도와주는 것이 서비스라면, 이것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편을 잘 알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해 주는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그의 발전이나 그의 행복을 마치 나의 그것처럼 느끼며 그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사랑이다.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 부부나 젊은 남녀간의 사랑이 모두 이같은 노고, 책임감, 존경심, 지식의 네 가지 요소가 합쳐서 참사랑이 된다. 서비스 정신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네 가지 요인이 핵심이 된다. 둘째, 서비스 정신의 주축이라고 생각되는 요인은 객관성이다. 자기 스스로나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폭넓은 관점에서 일을 처리하거나 사람을 상대할 때, 부질없는 감정적 마찰이나 상호 적대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자기 통찰"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 객관화 상태에서는 진실된 유머와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며, 타인과의 관계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되고 자기 직책에도 충실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서비스 정신은 이같은 객관적 태도에서 솟아나는 것이라 하겠다. 셋째, 서비스 정신과 땔 수 없는 요인은 참된 인생관과 보람있는 가치관의 소유 여부다. 애정과 객관성만 가지고도 상대에게 잘 대해 주는 일이야 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상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서비스 핵심이 빠져 버린다. 인간 누구나가 올바른 방향을 추구하며 보람찬 생활을 하기 위해 대인 관계 속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서비스일진대, 이러한 방향 지향성이 없는 협조는 참된 서비스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평생 교양을 쌓아 가며 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다. 대인 관계에서 사랑으로 서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안전감을 얻고, 또 모든 사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스스로 제자리를 찾고 보람있는 인생관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서비스는 생활 속에 넘쳐 흐르게 되고, 서비스 정신은 인격화한다. 이렇듯 보람있는 인생관을 구현하려고 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람있는 생활이 되도록 인도해 성심껏 대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97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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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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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규율
어느 유명 인사의 집에서 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하인은 현관으로 나가 문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방문객을 확인한 뒤 문을 열어 주며 방문객에게 말했다. "우산은 문 옆에 놓으십시오." 방문객이 말했다. "난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럼, 다시 집에 가셔서 우산을 가져 오십시오. 주인님께서 제게 모든 손님들의 우산을 문 옆에 놓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손님을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 규율은 규율이다.
율법
어느 유부녀가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남자는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은 옳지 않은 짓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유태인이었다.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어요." 그러자 젊은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아직도 아홉 가지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 법률은 편협하다. 그것은 너무나 편협하기 때문에 인간은 허점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 때문에 삶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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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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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3 혁명 근거지 정강산 - 홍군의 형성(192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6년/ 6, 10 만세운동.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1927년/ 신간회 발족
1927년 제 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 우파의 공산당 축출로 끝이 났다. 공산당은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무장봉기를 통한 근거지 확보를 지령했다. 하룡, 섭정, 주덕 등 공산당 군 지도자들은 약 2만여 명의 홍군을 동원, 남창에서 봉기했다. 그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남창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건군 기념일은 이 남창봉기일인 8월 1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창봉기에 의해 수립된 남창 혁명위원회는 얼마 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남창을 압박해오자 혁명위원회는 남창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추적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무장봉기를 통한 해방구(소비에트) 건설 노선은 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7년 12월 섭검영이 지휘하는 부대 및 노동자 수천 명이 광주에서 무장봉기하여 광주노농민주정부, 즉 광주 코뮨을 수립했다. 그러나 공산당을 말살하려는 국민당군은 이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대로 포위공격하는 국민당 군대와 3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대부분은 죽음을 당하고 몇 명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또 다른 해방구인 해륙풍으로 피햇다. 이 광주 코뮨과 해륙풍 소비에트에는 한국의 사회주의자 150여 명이 가담했다고 한다. 무장봉기를 통해 도시 중심의 거점(소비에트)을 확보하려던 공산당의 전략과 코민테른의 지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노선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이 노선에 반대한 모택동의 노선은 농촌을 먼저 장악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패한 군대를 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이 정강산이 바로 공산당의 최후거점이었다. 여기에서 홍군의 기본적인 조직이 짜여졌다.
모택동은 자신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정리하여 노농혁명 제 1군 제 1사단 제 1연대로 이름붙였다. 부대 구성원들은 국민당의 소탕작전에서 살아남은 약간의 노동자들, 이 지역 출신의 젊은 광부, 철도원 및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뒤 주덕, 임표, 진의 등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재편성하여 홍군 제 4군(노농혁명 제 4군)이 창설되었다. 사령관은 주덕, 정치위원 모택동이었다. 약 5만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그 후 28년 하건의 반란 이후 많은 부대들이 정강산으로 모였는데, 그 부대들을 중심으로 홍군 제 5군이 편성되었으며 팽덕회가 지휘했다. 정강산은 몇 개의 부락이 있는 오지였고, 지역은 넓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자 의복, 식량 등이 매우 부족했다. 수수와 호박이 주식이었으며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옷을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군은 혁명정신에 투철했다. 혁명을 위해서 홍군의 행동수칙이 정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홍군에는 '3대 규율'과 '8대 주의'가 있었다. 먼저 '3대 규율'은
1. 모든 행동은 반드시 지휘에 따른다. 2. 인민으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한오라기라도 얻지 않는다. 3. 토호로부터 몰수한 것은 모두의 것으로 한다. 다음 '8대 주의'는 1. 가옥으로부터 떠날 때는 모든 문짝을 제 위치에 복귀시켜놓을 것. 2. 잠자고 난 뒤의 멍석은 개어서 원래의 위치에 놓을 것. 3. 인민들에게 공손할 것이며 가능한 한 모든 힘으로 그들을 도와줄 것. 4. 빌린 물건은 모두 반납할 것. 5. 손상된 물품은 고쳐서 원상회복시킬 것. 6. 농민들과의 거래시에는 정직할 것. 7. 물건을 살 때에는 반드시 대금을 지불할 것. 8. 위생처리에 주의하며, 특히 화장실은 인민의 주거지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할 것.
인민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한다는 규칙을 지키게 했다. 그런 홍군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지침을 외우도록 했다.
1. 적과 대항해서는 죽음으로써 끝까지 투쟁할 것. 2. 인민을 무장시킬 것. 3.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할 것.
이제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로 하여 주변지역인 호남, 강서, 광동 3개 성의 경계지역에 6개 현으로 구성된 소비에트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혁명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은 첫째, 무력투쟁의 방식이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투쟁이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도시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세력확대의 주대상을 농민으로 삼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중심적인 정책이 되었다. 그리고 지역별로 소비에트를 건설해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된다. 이 원칙은 이전의 실패에 대한 반성과 모택동의 판단에 주로 근거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했던 3대 규율과 8대 원칙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또한 홍군의 유력한 전투 방식은 유격전술이었다. 이것 역시 무기와 숫자 등 모든 면에서 약세인 조건에서 나온 전술이다. 유격전술의 원칙은 모택동에 의해 제시되었다.
1.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물러선다. 2. 적이 멈춰서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 3.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4. 적이 물러서면 우리는 추격한다.
그리고 이후의 세력 확대과정에서 이 원칙은 올바른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1928년 겨울이 끝날 무렵 공산당은 혁명의 중심 홍군의 산실인 정강산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많은 군대를 먹여살릴 수 있는 군수물자를 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은 국민당군이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어오기도 힘들었다. 그들은 광동 근처에 새로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틈을 타 강서지역 외의 몇 개 지역에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1930년 여름에는 전국에 걸쳐 약 30여 개의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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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卷有益(개권유익) 開(열 개) 卷(책 권) 有(있을 유) 益(더할 익)
승수연담록은 송(宋)나라 왕벽지(王闢之)가 남송(南宋) 고종(高宗) 이전의 잡다한 일화들을 모아 엮은 책인데, 이 책의 권6에는 독서를 무척 좋아했던 송나라 태종(太宗)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종은 이방(李昉) 등 14명의 학자들에게 사서(辭書)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이전에 발간된 많은 책들을 널리 인용하는 등 7년 동안의 작업을 통하여 사서를 완성하였다. 55개부문으로 일천권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은 처음 서명을 태평편류(太平編類)라 하였으나 후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으로 개칭하였다. 태종은 이 사서가 완성되자 몹시 기뻐하며 매일 이 책을 읽었다. 스스로 하루에 세 권씩 읽도록 정하여 놓고, 정사(政事)로 인해 못 읽는 경우에는 쉬는 날 이를 보충하였다.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태종은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을 펼치면 이로움이 있으니, 짐은 이를 피로하다 여기지 않소(開卷有益, 朕不以爲勞也). 開卷有益(Reading gives advantages) 이란 책을 읽으면 이로움이 있음 을 말한다. 요즘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들 황제(皇帝)보다 더 바빠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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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한 여성들
유독한 납이 들어간 분과 볼연지, 비소가 들어간 탈모제. 여성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오랫동안 죽음의 위험까지도 불사했다. 그리스 남성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여 화장품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뺨을 물들이기 위해 볼연지는 사용했다. 또 고급 창녀들은 볼연지의 빨강색을 강조하려고 우선 얼굴 색을 분으로 하얗게 발랐다. 분은 그 뒤 2000년 동안 유럽 여성들의 얼굴이나 목, 가슴을 하얗게 만드는 데 사용되어 왔는데, 많은 양의 납을 함유하고 있는 분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피부색을 망가뜨리고 수명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8세기 유럽에 나돈 '비소가 들어간 웨하스'를 여성들은 피부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 실제로 먹었다. 이 방법은 피가 독에 오염되어 각 기관으로 보내지는 적혈구가 감소하여 산소부족이 되었기 때문에 효과는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잔털을 제거하기 위해 남녀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탈모제인 석황은 성분이 비소 화합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위험했다. 볼연지도 안전하지 않았다. 원료는 뽕나무나 해초의 무해한 식물성이었지만 유독한 유화은인 빨강색으로 착색돼 있었다. 그와 똑같은 빨간 크림이 몸 안으로 좀더 들어가기 쉬운 립스틱에 사용되어 몇 세기 동안 그 독은 천천히 몸을 좀먹고 있었다. 납이나 비소, 수은은 한번 혈관에 들어가면 특히 태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옛날의 화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유산이나 사산, 선천성 기형이 비롯되었을지 그 숫자는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당시의 사회관습상 기형아는 태어나자마자 처리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역사를 통해 여성에게 화장을 금한 시도가 몇 번인가 이루어졌다. 도덕이나 종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4세기의 그리스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가정론"에서 어떤 신부의 화장을 사기라고 말하며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화장기를 보았을 때 '화장으로 당신의 용모를 가려 나를 속이려는 것은 내가 내 재산을 감추고 당신을 속이는 것과 똑같다'고 지적했다"라고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신학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2세기에, 여성이 화장이라는 수단으로 남성을 속여 결혼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의 제정을 지지했다. 나아가 1770년 영국 의회가 제정한 엄격한 법률은 "나이, 계급, 직업, 처녀, 미혼, 미망인에 관계없이 향료, 안료, 화장수, 틀니, 붙인 털 등으로 유혹하거나 속여서 결혼한 여성은 모두 마술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 벌하며 그 결혼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특히 이시기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그 위에 빨간 볼연지를 칠하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잡지인 "젠틀맨스 매거진"은 '텁수룩한 하얀 머리와 새빨간 얼굴의 여자'를 '껍질을 벗긴 양'과 똑같다고 쓰고 있다.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남성이 쓴 이 기사는 이어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미혼 여성이 이런 유행을 좇는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결혼 상대를 잡아야만 하니까. 하지만 이 경박함은 기혼 여성의 지위와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광적인 화장의 시대 뒤에 오는 것이 프랑스 혁명과 그 직후의 화장기 없는 시대다. 19세기 말까지 볼연지, 분, 립스틱(남녀 모두 6000년 동안 즐겨왔던 화장)은 유럽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이 일시적인 진정기에 어떤 패션 잡지는 "얼굴과 입술에 화장하는 것은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일이다. 가끔 착각한 여성들인 자신의 젊음과 건강한 빛을 위장하려고 뺨을 빨갛게 바르는데 이것은 누구의 눈에나 뻔히 인위적으로 보임으로써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곳을 강조하는 결과가 되어 오히려 사람들의 주목을 끌 뿐이다. 볼연지나 립스틱을 사용하는 시대가 두 번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1880년의 일이다. 무대 여배우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은 과거 몇 백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자가제품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쯤 완전히 부활한다. 그 선두에 선 것이 프랑스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탄생한 것이 현대의 화장품 산업이다. 겔랑, 코티, 로제 가레, 랑방, 샤넬, 디오르, 헬레나 루빈스타인, 엘리자베스 아덴, 레브론, 로더, 에이본 등 시판하는 브랜드 화장품의 출현은 과거에 없던 현상이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일은, 안전한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화학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나 미용사의 응원에 힘입어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 외국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 화장품 시장에서 에이본은 독창적으로 화장품 산업을 개척했다. 샤넬, 코티, 겔랑은 프랑스에서, 헬레나 루빈스타인은 폴란드의 클라코프에서, 엘리자베스 아덴(본명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글레엄)은 캐나다에서, 그리고 맥스 팩터는 소련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브랜드 화장품 시대를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이렇듯 여러 나라의 값비싼 유명 화장품의 홍수 속에서 에이본은 최고의 판매고를 자랑하는 자리에 오르는데, 그 성공의 열쇠는 방문 판매원인 '에이본 레이디'가 쥐고 있었다. 에이본 레이디 제1호는 사실은 남성으로 데이비드 맥코넬이라는, 뉴욕 북부 출신의 젊은 세일즈맨이다. 그는 1886년에 에이본의 방문 판매를 시작했는데 식구가 적은 자신의 집에서 여유 있게 화장품을 구입할 기회를 여성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향수나 핸드 크림을 판 것은 아니다.
맥코넬은 열여섯 살 때 서적 방문 판매를 시작했다. 책이 그다지 팔리지 않자 유행하던 판매 작전을 취하기로 했다. 즉, 처음에는 무료로 선물을 나누어주고 대신 상품의 설명이나 판매를 하는 방법이다. 판매를 시작할 때 향수 선물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맥코넬은 그 지역 약제사의 힘을 빌려서 오리지널 향수를 만들었다. 운이 따랐다. 후세의 세일즈맨이 판촉물로 금속 수세미를 선물하는 것이 주부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맥코넬도 여성들이 향수는 매우 좋아하지만 중요한 서적에는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적 판매를 중단하고 뉴욕을 본거지로 하는 '캘리포니아 향수 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름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친구 겸 출자자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호별 방문 방식은 화장품 판매에 가장 적절했다. 특히 교통 수단을 마차에 의존하는 시대에 시골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가게에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이본 레이디 여성 제1호는 뉴햄프셔 주 윈체스터 출신의 P. F. E. 올비라는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누르면서 에이본의 인기 제품인 '리틀 도트 향수 세트'를 팔고 다니는 일을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다른 여성들을 모아서 호별 방문 판매 양성 훈련을 했다. 회사 이름을 에이본으로 바꾼 이유는 단순하다. 맥코넬이 살고 있던 마을인 사판 라마포라는 지명에서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묻힌 스트레이포드 온 에이본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1879년까지 맥코넬은 열두 명의 여성 판매원을 고용하여 열 여덟 종류의 향수를 판매했으며 그 숫자는 갈수록 늘어날 뿐이었다. 오늘도 50만 명이 넘는 에이본 레이더가 미국 방방곡곡에 있는 집의 초인종을 누르며 돌아다님으로써 에이본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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