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명저 20
2. 논어 - 공자(기원전 551-479)
성인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이현구(성균관대학교 강사)
우리 속담에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성인은 보통사람과 뭔가 달라서 성인이라고 부르겠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풍속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공자는 성인으로 일컬어져 왔다. 우리는 보통 성인을 '가장 완전한 인간',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품격, 덕성, 인간미와 연관된 명칭이다. 그런데 중국 고대에 성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대개 발명가들이다. '무언가를 처음 만든 사람'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치지 않고 자기가 만들었다면 중국에서 성인으로 모셔졌을 것이다. 문자를 처음 만든 사람, 도자기를 처음 만든 사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사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모두 성인이다. 복희씨니 신농 씨니 요, 순, 우, 탕이니 하는 공자보다 대선배 성인들은 모두 발명가다. 발명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절구를 발명한 뒤에 천하의 곡식은 모두 껍데기가 벗겨지고 말았다. 실은 이 고대의 발명가들, 성인들은 세상을 바꿔 놓은 사람들이다. 이 성인 개념이 공자에 와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공자 뒤로는 성인이 없다. 공자의 수제자 안연이나 '유교의 파수꾼'으로 불리는 맹자도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지 성인은 아니다. 그 뒤에 훌륭한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현인이라 하여 성인보다 한 단계 낮춘다. 이것은 공자를 인간으로 만나기보다는 '완벽 그 자체'로 만들어 두려 한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람들은 공부의 목표를 '성인 되는 것'에 두고 출발했는데 한 사람도 성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이 성인을 저 멀리 하늘 꼭대기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 시대에도 제자들에게 성인으로 비쳤다. 공자의 학원에서 성인은 지혜와 덕성이 완전한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안연은 공자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탄식했다. 자공은 공자를 태양에다 비유하여 당시 공자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자공은 공자와 대화하면서, 자기의 동문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이고 자기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아는 정도의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을 때,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테지만 공자에게서 "그 말이 맞다"는 말을 들은 제자다. 자공은 말주변이 좋고 융통성이 있고 당시에 손꼽히는 부자여서, 공자 집단을 경제적으로 많이 지원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자공에게 최고 점수를 주지 않았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자공을 공자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자공은 그 사람들에게 자기가 수영장도 있고 잔디밭도 있는 수백 평짜리 남들이 부러워할 집이라면, 공자의 세계는 담장이 높아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는 대궐 같아서 문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웅대함을 알 수 없다는 비유로 스승을 변호했다. 공자의 무엇이 자공과 안연 같은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했을까? 공자를 성인이라 한다면 공자는 무엇을 발명했는가? 성인의 계보에서 공자 바로 앞은 주공인데, 그는 공자보다 500년쯤 앞서 살았다. 주공은 주나라 문화와 제도를 발명한 사람이다. 이미 농업도 발명되고, 문자도 발명되고, 정치 제도도 발명되어 이제 인간 사회에 필요한 발명품이 더 없을 듯한 시기에 나타난 공자는 교양인 만드는 법, 즉 교육을 발명했다.
공자는 20세쯤부터 창고와 정부의 가축을 관리하는 공무원 등으로 10여년 동안 충실히 근무했고, 50세 이후 몇 년간 조국 노나라에서 재무 담당과 대법관 등을 맡았고 외교 업적도 이루었다. 그러나 행정가, 정치가로서 공자보다 교육자, 역사가로서 공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공자는 스스로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입장이 섰다"고 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23세때 이미 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30대에는 제자들이 많았고,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옮겨 다니면서 관리자가 갖추어야 할 교양을 강의하고 실습했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내다가 어머니의 장례 때에 물어물어 찾았다고 한다. 공자의 아버지는 공자가 세 살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그 무덤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부모가 '야합'했다고 기록했다. 이 말은 '예법을 갖추지 않은 결합'을 뜻하며, 학자들은 공자의 아버지가 노인이었고 어머니는 매우 젊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혼자서 내려오는 성문을 떠받쳤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장사였다고 하니 공자도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공자의 아버지는 대부 신분이었으므로 귀족 계층이었다. 당시 신분 계층은 공, 경, 대부, 사로 '대부'는 하층 귀족이다. 공자가 고대 문화의 집대성자이자 역사가이면서 교육자가 되는 데는 그가 태어난 노나라 문화 환경의 영향이 컸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황하 유역을 차지했다.
주나라는 사방 100리, 70리, 50리 규모로 땅을 나누어 제후국을 세우고, 천자는 중앙에 사방 1, 000리의 땅을 관장하는 '봉건 제도'로 통치했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71개였고, 그 가운데 천자와 같은 성씨가 55개이며, 나머지는 공신이나 왕실과 혼인 관계가 있는 신하를 제후로 세웠다. 그러므로 주나라 천자의 집안 사람들이 천하를 나누어 다스리는 셈이었고, 각 제후국에서는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처럼 혈연에 기초한 통치 방식을 '종법 제도'라 한다. 천자와 촌수가 가까운 집안이 중앙에 가까이 자리 잡았는데, 노나라도 그 가운데 하나로 주나라 초창기에 전체 국가 제도와 문물을 완비한 주인공, 바로 주공의 봉토로 지정된 곳이었다. 주공이 직접 와서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주공의 나라라는 상징적 의미는 큰 것이다. 즉 노나라의 문화 전통은 주나라의 정맥을 이은 것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이 주공을 꿈속에서 자주 만난 모양이다. 그만큼 공자는 주나라의 통치 제도를 이상적인 제도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자의 시대에 이 제도가 점점 무너져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는 유능한 천자들이 나오지 않아 전체 제후국을 통솔할 구심력을 잃었다. 이 때부터 기원전 476년까지를 춘추 시대라 하는데, 주나라는 황하 유역의 일부를 차지했을 뿐이고, 주나라의 영역에 들지 않는 제후국 규모의 나라들이 200개 이상 있었기 때문에 변경에서는 계속 전쟁이 일어났다. 공자는 이 춘추 시대 말기에 살았고, 그 뒤에는 제후국끼리 전쟁으로 통합되어 7개의 큰 나라들이 대결하는 전국 시대 역사가 기다리고 있던 시점이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정치 모델은 주나라 제도였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은 주나라 제도에서 귀족이나 관리로 행세할 수 있는 교양과 행정 실무 능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교양과 덕성을 기르는 내용이 시와 예악이다. 공자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처럼 사람이 답답해진다고 했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함께 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모든 공부가 음악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음악은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무 능력과 기능이란 활 쏘기, 말 몰기, 글짓기, 계산하기 등이다. 그 시대에 일어난 사회 경제적 변동은 실제로 주나라의 신분 질서에도 변동을 일으켜, 공자의 제자들은 귀족 출신만이 아니었다. 공자는 귀족의 자제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귀족이 되는 교육을 시킨 셈이다. 공자는 "교육에는 신분이 없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공자를 중국 최초의 사설 학원 설립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자의 교육 방법은 선생의 몸가짐,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모범이 되는 시범식 교육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선생을 모시고 같이 생활했기 때문이다. 또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토론하는 현장 교육 방식과 제자들의 성격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하는 일대일 교육 방식 등이었다. 교육 내용도 개인의 감정을 다스리고 예법에 맞게 행동하는 연습이 중심이었다. (논어)에는 "학생들이여,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하며 신중하고 미덥게 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훌륭한 사람을 더욱 친하라. 그러고도 남는 힘이 있거든 글을 읽어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그러므로 공자의 교육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과는 다르다.
(논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러한 사정들을 알고 우리가 (논어)를 읽으면 의미가 새로울 것이다. 우리는 (논어) 첫 장을 잘 알고 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이 말을 지금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집에 와서 복습하여 외우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그때 기회 있을 때마다 익힌다는 것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귀로 듣고 기억했다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구이지학'이라고 한다. 구이지학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공부다. 거짓말쟁이도 남에게 "옛 성인 말씀에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배우고 익힌 것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도 거짓말 하지 않는 행동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익힌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벌어지는 모든 일, 말하는 태도, 걸음걸이, 손을 두는 법, 손님을 맞이하는 법, 회식하는 법 같은 갖가지 일을 우리 몸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벗이 먼데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 말은 누가 읽어도 옳은 말씀이라고 할 것이다. 벗은 본래 만나면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논어) 첫머리에 이 말이 나와서 의미깊다. 공자의 학원은 친목 단체가 아니었다. 공자는 젊은 시절부터 제자들과 함께 중원천하를 돌아다녔다. 68세 때 조국에 돌아와 고전과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하는데, 그 늘그막의 어느 날 "그 때 나와 함께 고생하던 그리운 얼굴들은 하나도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 온 정성을 다해 혼란한 천하를 바로잡아 보겠다는 뜻을 가진 집단이었다. 공자를 따라다닌 제자들 중에는 관리로 취직한 사람도 있고, 인격 수련에 전념한 사람도 있지만 모두 뒤에 유가라 불린 학파의 정신, 세상에 도가 실행되도록 하겠다는 공자의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도도하게 혼란으로 흘러 가는 세상에서 이 혼란을 바로잡아 보려는 뜻을 이해하는 동지가 먼 길을 찾아왔다면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공자 학원의 동지적 유대를 이해하면 우리는 왜 안연이나 자공이 공자를 성인이라고 했는지 한 가닥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인간 관계는 특별한 것이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세상은 한두 사람이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가서 인기를 얻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큰 사업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남 모르는 고민이 있다. 위대한 인간들의 고민이다. 공자 학원에 불이 꺼지고 저마다 잠자리로 돌아가면 제자들은 제각기 자기의 숙제를 안고 씨름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고민이다. 스승 공자가 있고 학우들이 있지만 이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고독하다. 큰 임무를 맡고 먼 길을 가야하는 공자 학원의 사람들은 인생의 이 고독에 좌절하고 흔들리는 인간이 아니기를 바랐다.
(논어) 첫 장을 꼭 이렇게 해석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논어)는 읽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논어)는 지금부터 2,000년 훨씬 이전에 써진 옛날 책이다. 그러나 실은 지금 다시 써진 책이다. 우리가 (논어)를 읽으면 2,400년 전 사람들의 말이 그렇게 쉽게 이해될 수가 없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인생이란 것 자체의 문제는 2천 몇백 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논어)는 그 시대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새로이 해석되어 왔다. 또한 (논어)는 그 표현법에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점도 있다. (논어)의 표현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추상적이지도 않다. 공자는 "함께 배우기는 하지만 꼭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같은 길에 접어들었어도 꼭 같은 입장이 아닐 수 있다. 같은 입장이라도 똑같은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했다. 공자는 언제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했을까? 혹시 정계에 진출한 두 제자 사이에 노선 싸움이 벌어졌을 때 한 말인가? 아니면 어느 날 학원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인가? 언젠가 공자는 흘러 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는 것은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 인생의 나날이 덧없이 흘러 감을 슬퍼한 것일까? 큰일을 추구하는 사람의 쉼 없는 노력을 생각한 것인가? 천지의 변함없는 질서와 운행을 생각한 것인가? 그저 냇물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 가는 것을 묘사한 말인가? 그러나 이 구절을 읽은 사람은 냇가에 서면 "서자여사부인뎌불사주야로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십상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논어)를 거꾸로도 외웠다고 하는데, 우리의 문화 전통에 끼친 (논어)의 영향을 실감하게 하는 말이다. (논어)의 중심 사상은 '인'이다, 덕치주의다, 인도주의다, 문화주의다, 실천 정신이다, 충효 사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논어)를 말하면 (논어)의 맛을 뚝 떨어진다. 우리의 문화 전통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논어)를 숙독할 필요가 있다. (논어)는 논문이 아니다. 그 속에 무슨 체계적인 이론을 설명하는 내용은 없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나의 방법은 일관되어 있다"고 했는데, 제자들이 뜻을 잘 몰라 동문인 증자에게 묻자,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자기를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루어 남을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알면 남도 그것을 갖고 싶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고, 자기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은 남도 당하기 싫어할 것인 줄 아는 방법이다. (논어)에서 가장 추상적인 단어는 '인'이다. 인은 남을 아껴주는 것이라고도 하는 사람다움이라고도 하는데, 공자는 이 인을 너무나 아껴서 제자들 중에 '인'이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없다. 사람답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말도 되겠다. 그러나 인이 어떤 뜻이냐를 아는 것과 (논어)를 이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간 공자와 (논어)의 값어치
(논어)는 인간적이다. 공자가 성인이라고 하니까 (논어)에서 완벽한 인간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미리 속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공자는 제자의 항의에 쩔쩔매며 변명하는 스승이다. 낮잠 잔 제자에게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인간"이라고 화를 낸 사람이다.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는 자기가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어기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우리 동네에서 인간됨이 제일인 사람으로 나를 꼽는다면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는 사람을 든다면 당연히 내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자기 자랑도 한 사람이다. 상복 입는 기간을 1년으로 줄이자는 제안을 하는 제자에게 "자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 해 놓고, 그 제자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그를 비난한 치사한 사람이다. 음식은 까다로운 편이었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정신이 혼란해지지는 않았다. 옷의 색상과 품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작업복으로 오른쪽 소매가 짧은 옷도 만들어 입었다고 하니 오른손잡이 의상 디자이너였다. 관청에 나가서 일할 때는 윗사람에세 온순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모습을 연출한 다중인격자다. "그리움은 말할 수도 없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한다"고 논평한 연애 심리 분석가이기도 했다. (논어)는 어쩌면 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인간들의 생활 기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쓰든 그것이 주는 감동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그것이 진실하게 쓰여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논어)는 인생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올려놓으려 한 공자와 제자들의 이야기다. 공자 학원에서 인생과 인간을 주제로 삼은 것은 세상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공자는 뒤에 유가 사상에서 틀이 잡힌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목표를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다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기 인격을 닦아서 천하의 백성들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은 요순 같은 성인도 어려워했다"고 말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목적의식을 강조하기 보다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 수련'을 하여 군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자기를 수련한다는 이 주제는 세상의 변동과 외부 사정, 남들의 칭찬과 비난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먼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개선하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공자는 '위기지학'이라고 했다. 그 방법은 명상과 성찰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효제충신을 실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모와 형제, 나와 타인의 인간관계 속에서 효도하고 우애 있고 거짓 없고 미더운 인간이 되려는 노력이 공부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공자는 일하지 않는 인간, 몸으로 하지 않는 인간을 싫어했다. "내가 하루 종일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얻은 것이라곤 없었다"고 하고 "너희는 정 할 일이 없으면 멍청하게 잡담이나 하지 말고 장기 바둑이라도 두라"고 했다.
안연이 공자에게 가장 어려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안연이 좀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 공자가 예가 아니면 생각하지도 말라고 한 것은 공자답다. 생각만으로 예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행동은 생각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생각만 해서는 진전이 없다. 사람은 구체적인 경혐을 넓히는 한편 그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조리가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진다"고 했다. 당시 선배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숨으면서 공자에게 같이 가자고 권하기도 했지만, 공자는 잘 안 될 줄 알면서도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나섰다. 공자가 생각한 계획은 '위로부터의 개혁'과 '내부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세상의 태평과 혼란은 군주와 관리의 도덕성에 달려 있다.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자연히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인간들 사이의 신뢰다. 백성들이란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 풀과 같으니, 윗사람들이 도덕의 모범을 보이면 화합이 이루어질 것이고, 자연 재해나 먹을 것이 부족한 문제도 합심하여 노력하면 잘 해결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공자가 그린 계획의 뼈대를 이룬다. 언젠가 자공이 공자에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군대와 식량과 백성들의 신뢰 가운데 부득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이 먼저입니까?" "군대를 먼저 포기해야 한다." "또 어쩔 수 없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식량과 백성들의 신뢰 가운데 무엇입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인간 사회는 신뢰 없이 한시도 지탱할 수 없다." 그래서 공자는 본의 아니게 도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이론을 말한 사람이 되었다. 노자나 장자는 공자의 도덕주의를 백성을 죽이는 이론이라고 비난하고 유가 집단을 큰 사기꾼들이라고 몰아붙였다. 묵자는 유교의 예악이 백성들의 노동력을 비생산적인 데 낭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법가 사상가들은 공자의 이론을 돌 하나도 옮겨 놓지 못할 공상가의 꿈이라고 비난했다. 19세기에 아편 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반 식민지가 된 중국의 현실을 놓고, 세계정세에 눈을 뜬 중국의 지성들은 "유교가 중화 민족을 망쳤다", "공자교를 타도하자"고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이런 비난 속의 공자는 이미 (논어)의 공자가 아니다. 공자는 이제 동네북이 되어 이 사람 저 사람의 잔치 마당에 끌려가서 흥을 돋구어 주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논어)를 좀더 생생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논어)는 인생 자체를 목적의식적으로 산 어떤 사람들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라는 면에서 그 값어치를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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