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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34호
2011.12.12 (음 11.18)/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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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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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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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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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을수록 독서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독서광이라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한눈으로 여러 대목을 살피며 읽어낸다. 그리고 요점만을 골라 낸다. 그러므로 자기가 필요한 대목을 자력적인 방법으로 인용할 수가 있다. ─ E. A. 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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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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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무르다, 버무리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꽁꽁 언 땅을 뚫고 나와 바람결에 몸을 비비며 싱그러움을 내뿜기 시작한 봄나물들은 그 비밀을 알까. 겨우내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고 피로를 덜어 주는 것으로 알려진 봄나물은 데치고 무치고 버무려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우리 밥상에 향긋한 봄을 전해 준다. 음식을 할 때 '여러 가지 재료를 한데 뒤섞다'는 뜻으로 '버무리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를 활용하는 방법이 제각각이다.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은 돌나물.달래 등을 날로 버무르거나 냉이.두릅 등을 데쳐서 무쳐 먹을 때 좋다" "봄동으로 겉절이를 할 때는 소금에 절이지 말고 버물어야 더 맛있다"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모두 잘못 활용한 것이다. '버무르다'나 '버물다'를 기본형으로 생각해 '버무르+거나' '버물+어야'처럼 쓰는 것으로 보이나 '버무리거나' '버무려야'라고 해야 어법에 맞다. '버무리다'만 표준어로 인정하기 때문에 "미나리에 생굴을 넣고 식초 양념에 버무려 먹으면 식욕을 되찾는 데 그만이다"와 같이 사용해야 한다. '버무리다'의 피동사인 '버물리다'를 기본형으로 알고 "어머니가 달래전을 만들려고 송송 썬 달래에 새우살을 넣고 버물렸다"처럼 쓰는 사람도 있지만 동작의 주체가 직접 행동한 것이므로 '버무렸다'로 고쳐야 맞다. '버무리다'에서 파생된 말로는 버무리(여러 가지를 한데 뒤섞어 만든 음식), 버무리떡(쌀가루에 콩.팥 등을 한데 섞어 찐 떡)이 있다.
날 뭘로 보고! 사람을 뭘로 보고!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 흔히 내뱉는 말이다. 그러나 '뭘로 보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뭐'와 '뭘'은 의미가 다르므로 구분해 써야 한다. '뭐'는 '무어', 즉 지시대명사 '무엇'의 준말이다. '뭘'은 '무엇'에 조사 '을'을 붙인 '무엇을'이 줄어든 말이다(무엇을→뭘). '뭘'은 "너 지금 뭘 먹느냐?" "요즘 뭘 하며 지내니?" 등처럼 쓰인다. 그러나 '무엇을'에 '로'를 붙인 '뭘로'(무엇을로)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뭘로 보고'는 '무엇을로 보고'로 풀이되므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뭐'와 '뭘'의 쓰임새가 헷갈릴 때는 '뭐'를 풀어 쓴 '무엇(무어)', '뭘'을 풀어 쓴 '무엇을'을 문장에 대입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사람을 뭐로/뭘로 보고!"의 경우 풀어서 "사람을 무어로 보고!"라고 하면 자연스럽지만, "사람을 무엇을로 보고!"라고 하면 말이 안 되므로 '뭐로 보고'가 맞는 표현이다.
추근대다, 찝적대다
겨우내 숨겨둔 속살을 드러내며 온갖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봄은 여인의 계절이다. 일찍 찾아온 봄소식 덕분에 산과 들, 공원에는 꽃 잔치를 즐기려는 여인들로 가득하다. 꽃이 있는 곳에 벌과 나비가 있듯이 이 잔치에 남성도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간혹 초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꽃구경은 뒷전이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추근대는' 남성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데도 계속 귀찮게 할 때 '추근대다'라고 말하거나 쓰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런데 '추근대다'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치근대다'라고 해야 옳다. '치근대다(치근거리다)'는 '성가실 정도로 은근히 자꾸 귀찮게 굴다'는 뜻이다. "그가 구속된 뒤부터 단원 중의 하나가 그의 약혼녀에게 계속 치근대고 있었다/ 영자 역시 그에게 치근거릴 근력이 남아 있을 성싶지 않게 늘 탈진해 있었다"처럼 쓰인다. 여린말로는 '지근대다'로 써야 하며, 작은말로는 '차근대다(자근대다)'를 쓰면 된다. 비슷한 뜻의 '찝적대다'는 표기도 자주 눈에 띄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집적대다(집적거리다, 집적이다)/ 찝쩍대다(센말)'라고 써야 한다. '집적대다'는 '말이나 행동으로 자꾸 남을 건드려 성가시게 하다'는 뜻이다. "건달들이 여자에게 집적댄다/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심심하면 나를 집적였다"같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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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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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 - 김승해
오랜만에 만난 너와 옛 궁터 걷는데 어찌 사냔 물음에 세상, 담쌓고 산다했지
담쌓고 산다고? 흙 속에 단단히 박힌 기와조각 같은 네가 쌓은 것이 한 채에 두른 담이라면 덧나기 쉬운 것들은 빗장 지르고 흐르기 쉬운 것들은 흙으로 개어 꼭꼭 눌러 박은 이파리 붉음 한 자경전, 저 꽃담 같은 거겠지
배롱나무 꽃 지고 여름 다 가는 날, 너는 깊이 담쌓아 감춘 것을 내게 들켰으니 저 담 끝에 문 하나 두어도 좋겠다 문 끝에 이파리 하나 돋을 새겨도 좋겠다
담이 높아도 꽃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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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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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우는 뻐꾹새 - 김종원
오월 봄비가 애타게 불러내어
뒷동산 대숲 너머 뻐꾹뻐꾹 오는 여름
보리밭 푸른 이랑에 파도치는 사모곡
돌무렁 보리밭은 오월의 푸른 바다
보리피리 뱃고동에 초록 바다 길을 열면
비 맞고 둥지 지키며 홀로 우는 뻐꾹새
(200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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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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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송현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 아빠의 헌 윗도리를 뒤집어쓰고 학교에 가면서 생각을 했어요.
우리 학교와 우리 마을을 다 덮을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을 만들 수 없을까?
공부가 끝나고 맨발로 길바닥에 젖어 있는 쇠똥을 밟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고 있는 풀잎을 보았어요. 비를 맞아 그런지 더 싱싱하게 보였어요. 그제사 나는 생각했어요.
만약 우리 학교와 우리 마을을 다 덮을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있다면 풀잎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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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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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4장.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6. 개인의 존귀함
오늘날 인간은 여러 가지 사상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크건 작건 대사회 변혁의 위협을 받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민주주의의 이상에 자꾸만 다가가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독재 체제 밑에서 살고 있다. (그 제도 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그 제도만이 남았는지 혹은 독재체제가 망하고 그 제도 밑에서 살던 사람만이 남았는지)그 어느 경우건 인간의 개인 생활은 때의 흐름에 여러 가지 방향은 주어지겠지만 그러나 역시 개성을 보지하는 한 개의 완전한 실체로서 남는다. 철학은 개인에서 시작될 뿐 아니라 또한 개인에서 끝난다. 개인은 생명의 궁극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인간 정신이 다른 것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대영제국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도 서섹스(동남 잉그랜드의 주) 지방의 영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상당히 행복하고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만적인 철학은 서섹스의 영국인은 대영제국을 있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 철학이라도 영국과 같은 통치국에서 살고 있으면 인간은 모두 제각기 행복된 개인 생활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정도의 것 이상으로 객관적인 이론을 전개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문명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개인 생활의 행복을 부정하는 사회 철학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철학은 병적으로 뒤집힌 장신의 소산이다. 인간의 문화라는 점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에 대해서 최후적인 가치 비판을 내리는 것은, 그 문화가 만들어낸 남녀의 타입 여하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고 또 가장 통찰력이 있는 인물의 하나인 월트 휘트먼이 그의 논문 <민주적 전망>에서 모든 문명의 최종 목표로서 개성의 원리, 즉 <개성주의>를 밝히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풍요하고 윤택하며 변화 무쌍한 개성주의가 아니고 문명 그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기초로 하여 서 있는 것인가... 종교, 예술, 학교 등을 가지고 있는 문명은 그것 이외에도 도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모든 일이 다 이 개성주의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주장이 다른 주장 보다 앞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개성주의의 세상을 초래하려고 바라면서 민주주의만이 대자연의 섭리와 같은 장래의 계획 아래 인류의 무한한 황무지를 갈아 엎고 씨를 뿌리고 모든 사람에게 향하여 정정 당당히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문학, 시가, 미학 등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그것은 주로 그러한 것들이 그 나라의 남성과 여성에 대하여 개성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재료와 암시를 주고, 허다한 효과 있는 방법으로 그 재료와 암시를 그들에게 역설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사실로서의 개성에 관하여 휘트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가장 건전한 심경에 있을 때에는 의식이 있고, 우뚝 솟아나는 사상이 있다. 모든 것이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유아독존이며 별처럼 고요하게 영원히 빛난다. 이것이야말로 본체론의 사상이다. ... 즉 네가 누구이든 네 것은 네 것, 내가 누구이든 내 것은 내 것.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 지상의 꿈 중에서 가장 심령적이고 가장 걷잡을 수 없이 막막하지만 그러나 가장 엄연한 기초적 사실, 모든 사실로 통하는 유일 무이한 문. 이러한 경건한 황홀감에 취하고 심원한 천지의 경이 속에 있으면 신조도 전통도 모두 힘을 잃고, 이 간단한 자아의 관념 앞에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참된 환상이 빛나는 곳에 자아의 사상은 홀로 존재하며 광채를 발한다. 우화에 나오는 난장이처럼 일단 자유를 얻어 지상을 떠나면 몽롱한 천지에 퍼져 하늘 꼭대기에 달한다.
이 전형적인 미국의 철인이 개인의 영광을 극히 웅변으로 말하는 말 속에서 아직도 여러 가지로 인용하고 싶은 유혹이 간절하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두기로 하자... 그리하여 마지막 결론과 요약은(이것이 없다면 모든 사물의 모든 운행은 무목적, 기만, 파멸이 되고 만다) 맨 끝의 가장 좋은 의지할 곳은 인간성 그 자체에 있다. 아무런 미신도 따르지 않는 인간 고유의 정상적이며 성숙하고 풍부한 소질에 있다는 이 간단한 자아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목표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모든 변질을 뚫고 나와 무한한 조소와 논의와 표현상의 실패를 돌파하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교의 또는 이론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 <최고 최선의 자유 속에서 올바르게 훈련된 인간이야말로 한 개의 법칙, 일련의 법칙이 될 것이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의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에 대한 반응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미국은 모두 똑같은 기계 문명 속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 생활하는 방식과 기품은 모두 달라서 각국이 모두 그 정치 문제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많은 생활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또 똑같은 트럭을 운전하는 두 사람의 운전수라도 농담을 알아 듣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인간이 기계의 힘으로 누구나 다 균일한, 무익한 상태에 빠져야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여기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어, 두 아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시켜서 사회에 내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두 아들이 각자 독자적인 내부적 법칙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그 생활을 형성해 가는 아들의 모습을 그 아버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같은 금액의 자본이 있는 은행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생활 문제에 관한 것, 또는 행복을 형성하는 모든 사정은 둘 다 다르다. 주소며 액센트며 기질도모두 다르다. 또는 그 책략도, 문제는 다루는 방법도 다를 뿐만 아니라 행원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행원들이 무서운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 따르는지, 또는 가혹하고 외고집장이인지, 또는 쾌활하고 마음이 태평한 사람인지의 차이가 있다. 돈을 모으는 방법, 돈을 쓰는 방법도 다를 것이고 도락, 친구, 사교클럽, 독서, 아내 등 개인 생활도 또한 각각 다르다. 신문의 사망자난을 보면 같은 시대에 생활하고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살았을 때에는 전혀 다른 생활을 보내온 사실에 누구나 놀란다. 결국 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그만큼 풍부한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리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자기가 택한 직업에 정성을 다하여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어떤 사람은 다채롭고 변화 많은 경력을 가진 자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발명을 하고, 어떤 사람은 탐험을 하고, 어떤 사람은 농담을 지껄이고, 어떤 사람은 무뚝뚝한 편이어서 유우머라곤 전혀 없으며, 어떤 사람은 명성과 부귀를 향하여서는 로켓처럼 뒤어나가지만 결국은 로켓이 폭발된 차디찬 재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 어떤 사람은 얼음 장사와 석탄 장사를 하여 금화로 2만 달러나 되는 돈을 모았지만 결국은 광 속에서 피살되고 만다. 인생이란 모두가 다 이렇다. 인간 생활은 이렇게 발달된 산업시대에 있어서도 놀랄 만큼 기묘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동안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이 가지각색이고, 인생의 각기 다른 묘미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오직 개인 생활이 모든 문명의 목적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 생활, 정치 생활, 국제 관계의 개선은 한 국민을 구성하는 개인의 행동과 기질의 총화에서 온다는 사실, 따라서 결국 개인의 기질과 성질이 어떠냐 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에서도 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정치와,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국가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인은 국민의 기질이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의 진로와 나폴레옹의 출현을 예지할 수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알 마르크스도 또한 자기의 그 사회주의 이론의 실제적 발전과 스탈린의 출현을 미리 짐작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진로는 자유, 평등, 박애의 슬로건으로 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인간성의 어떤 특색에 의하여, 특수적으로는 프랑스인 기질의 어떤 특색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이다. 카알 마르크스의 사회 혁명의 진로에 관한 예언은 그의 엄숙한 변증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언한 것처럼 논리의 온갖 법칙에 의하여 산업 문명이 가장 진보하여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첫째는 영국 또는 미국 어쩌면 독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유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에서 그 맨 처음의 실험을 할 기회를 얻었다. 카알 마르크스가 계산하기를 잊은 것은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의 인간적 요인이었다. 그들의 일하는 방법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대체로 미숙한 경제학의 커다란 실수는 국민적 문제의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종의 알 수 없는 요인을 탐구하는 데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론이나 슬로건을 믿지 않는 영국인의 성질, 필요할 때에는 느릿느릿 그 나아갈 길을 발견해 나가는 영국인의 그 방법, 개인적 자유를 사랑하는 앵글로 색슨의 성질, 자존심, 상식, 질서에 대한 사랑... 이러한 것들은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사건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 독일인 변증법 학자의 모든 논리보다도 훨씬 강력한 요소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국민적 문제의 처리와 그 사회적, 정치적 발전의 진로는 국가 내의 모든 개인을 지배하는 일정한 관념에 의해 결국 한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기질, 즉 우리가 추상적으로 국민의 타고난 기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결국 국민 전부에 걸친 개인의 총화이다. 대체로 민족적 기질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문제나 또는 위기에 직면할 때 행동하는 국민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고난 기질이 그 어떤 굳은 지조 이상의 것인 것처럼 생각하고는 중세 신학의 영혼과도 같은 신화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 국민의 타고난 기질이란 나라의 일을 해나가는 그 태도와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한 나라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처럼 독자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 추상물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다만 행동을 통해서만 안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태 또는 위기가 다가왔을 때 국민의 최후적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일종의 선택 문제로서 어떤 것을 택하고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한다는 문제에 귀착된다. 현학파의 역사가들은 헤겔이 하던 식으로 한 나라의 역사는 관념의 발전이며, 일종의 기계적 필연에 의한 진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것에 대하여 좀더 의미를 이해하는 현실적 역사관은 중대한 시기에 직면할 때마다 국민은 선택을 행했다. 그때마다 서로 반대되는 세력, 맞서는 정열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법인데, 어떠한 감정이조금 많은가 어떠한 감정이 조금 적은가에 의하여 저울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리라. 이러한 특정한 위기에 나타나는 이른바 한 국민의 타고난 기질이란 그 어떤 것이 좀더 갖고 싶다거나 또는 이만하면 넉넉하다는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는 국민의 결의인 것이다. 결국 모든 국민은 저마다 그 마음에 드는 것, 그 감정에 꼭 들어맞는 것을 가지고 전진하였고, 참을 수 없는 것은 내버리고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국민의 사조와 일련의 도덕적 감정과 사회적 편견에 기초를 두고 행해지는 것이다.
유교는 세계 평화의 문제를 개인 생활의 수양에 결부시켰다. 송시대로부터 유학자가 학동들이 배워야 하는 것으로 결정한 최초의 교훈에는 다음의 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고 꾀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린다.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을 다스린다. 그 집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는다. 그 몸을 닦으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슬기를 익힌다. 슬기를 익힘은 사물에 이르는 데 있다.
사물에 이르고 난 뒤에야 슬기로와진다. 슬기로와지면 그 뜻이 성실해진다. 뜻이 성실해진 뒤에야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야 비로소 몸을 닦을 수 있다. 몸을 닦은 뒤라야 집을 다스릴 수 있다. 집을 다스린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린 뒤라야 천하를 편하게 할 수 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 마음으로 몸을 닦기에 힘씀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서는 그 끝이 다스려질 리가 없다. 나무 기둥이 가늘고는 그 가지가 무겁고 튼튼할 리가 없다.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앞과 뒤를 알면 즉 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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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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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 주역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남쪽에 가면 이롭고 돈을 얻을 것이다
주역에 "서남쪽에 가면 이롭고 돈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서남쪽에는 당시 주나라와 친교 관계에 있는 부족이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가도 좋다는 뜻이고, 붕을 얻는다는 것은 친구를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붕이 조개 꾸러미인 화폐를 뜻했으므로 돈을 벌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당시 상업이나 여행과 관계있는 기록이지 입학 시험 때 가야할 학교의 위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주역이란 책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쓰이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인생사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신비한 점술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동양적 사고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해방식들의 공통점은 주역이 신비한 책으로서 고대 사람들의 어떤 지혜를 담고 있다는 전제다. 이것은 주역이라는 책의 구성이 복합적인 데다 국내 학자들에 의해 아직 완전히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무비판적 접근 때문에 주역이 초시대적 의의를 가진다고 과장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물론 시대의 제약 아래에서 나온 견해라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고전을 지혜로서만 받아들이면, 비판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견해를 오늘날까지 적극적으로 적용하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주역은 대체 어떤 책일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주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순전히 점사로 되어 있고 또 하나는 우주론과 인생론을 담고 있다. 점사는 64가지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고 각 항목마다 일종의 분류 기호인 괘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괘 아래에는 6가지 점친 기록이 짤막한 문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효사라 한다. 이 효사들을 대표하는 문구는 괘사라 하며 그 괘 옆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점사는 모두 괘사와 효사로 되어 있다. 이것을 경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으로만 보면 주역은 분명히 점서다. 또 하나의 부분, 즉 우주론과 인생론을 담고 있는 부분은 전 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10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십익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철학 쪽에서 주역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쓰는 글이 이 십익이다. 그러나 두 부분은 문체와 내용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쓰인 연대도 다를 것이다. 종래에는 8괘와 64괘를 모두 복회씨가 창안했다거나 8괘는 복희 씨가 64괘와 괘사, 효사는 문왕이 지었다거나 괘사는 문왕, 효사는 주공, 십익은 공자가 지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설들은 오늘날에는 믿기가 어렵다. 괘효사를 보면 '금시', '황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금이 아니라 청동기를 뜻하며 '혈'자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혈거 생활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괘효시는 문명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사람들이 살면서 점을 친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후에게 말을 주어 번식하게 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초 성왕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역을 바로 주초의 저작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역에는 정치적 위기 상황을 전하는 글이 많이 있는데 이런 글은 주초의 전성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로 서주말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는 점을 쳤다. 주역에 나온 점친 상황을 보면 당시 국가의 대사인 제사와 전쟁을 비롯하여 결혼, 상업, 자연 재해, 계급 사이의 대립, 형벌 등이 있다. 그러므로 괘효사를 당시 문자의 의미에 따라 해독해보면 그 때 사람들의 풍속, 생활양식, 생산력 수준, 사상 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주역의 한 부분인 괘효시는 서주말 이전 중국 사람의 생활 형태를 알려 주는 기록이다. 따라서 그것이 오늘날의 인생 문제를 지도해 주는 신비의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주역이 점서로 이용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당시의 다양한 생활 경험은 64괘만으로도 포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이렇게 분류한 데는 그 나름의 논리 체계가 있었다. 하나의 괘는 8괘(세 줄로 되어 있음. 예를 들어 '천을 상징하는 삼(점역자 주: 한자로 석삼자 -' 가로줄 3줄)가 중첩된 형태로서, 예컨대 '사괘'는 지를 상징하는 괘와 수를 상징하는 괘가 중첩된 것이다. 이 사괘는 군사 활동에 관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기록을 나타내는 기호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8괘의 각 괘는 음(짧은 두줄)과 양(긴 한줄)이라는 기호가 세 개씩 겹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어떤 사건, 인생사에서 어떤 사건이라도 64괘에 대입할 수 있으며 64가지 사건은 음과 양의 다양한 결합방식으로 해명할 수 있다. 이런 이진법적 체계아래서 당시 사람들은 점을 쳐서 어느 한 괘를 얻으면 유추를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석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주역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모든 우주의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고 과대하게 주장해 왔다. 또 십익에 있는 우주론은 어떤 자연 현상이라도 음양의 이치로 다 해명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밝히고 있다. 주역의 또 한 부분인 십익은 문체로 보나, 유가의 가치관을 옹호하면서 전제 군주의 전횡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나, 훨씬 후대의 작품일 것이다. 아마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피한 점서에 의거하여 유가의 세계관을 은밀히 재정립하려 한 진대 유생들의 작품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주역은 춘추전국 시대를 간격으로 하는 두 종류의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것이다.
기미를 통찰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십익에 나온 우주론과 인생론은 무엇일까? 먼저 십익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도'에 관한 이야기다. 도란 원래 길을 뜻한다. 모든 사물과 사람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각기 나름의 도를 가진다. 이것을 더 넓혀서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들 전체도 자신의 도를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역에서 도는 바로 이런 형이상학적 문맥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도는 궁극적이고 형체를 가지는 사물 체계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이상자'를 도라 하고 '형이하자'를 기라 한다." 그런데 도는 매우 특이한 성격을 가진다. 도는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성격을 가진다. 음과 양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가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내적인 침투 관계에 있다. 아무리 적은 분량이더라도 음 없는 양이 없고 양 없는 음이 없다. 양자는 상호 필수의 관계속에서 서로 보완하면서 순환하며 운동한다. 이런 뜻에서 세계는 율동성을 가진다. 세계는 유기체의 성격을 가진다. 또 이런 주역의 사고는 독립된 어떤 실체에서 사물의 진상을 보려는 실체적 사고가 아니라 사물의 내적이고 유기적 연관에서 진상을 보려는 상관적 사고다. 그러므로 주역의 세계관은 서양의 세계관과 크게 다르다. 정지된 실체를 중시하는 서양적 사고만으로 사물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면 주역의 이런 사고는 오늘날에도 재음미할 만한 큰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그러나 이런 주역의 형이상학이 다른 개별 과학 위에 과도하게 군림한다면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전통 사회에서 그런 적도 있었다. 사물의 모든 메커니즘을 음양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이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면서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 각 개별 과학 영역이 다루는 세부적인 메커니즘은 모르는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주역에 철학적 진리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시될 수는 없다.
한편 주역의 세계관은 구체 세계를 환상이나 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면에서 주역은 현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주역은 고대 사람들의 우환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왜냐하면 자연현상과 인생사에서 정지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변화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변화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의지하고 싶은 어떤 긍정적 사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정적 측면을 보이면서 사라져 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전의 사건에 안주할 수 없다. 여기서 주역은 사물의 이런 전환이 가져다주는 위기 국면을 강조하는 특이한 인식론을 내세운다. 사물이 반대 상태로 전환할 때는 반드시 그 기미를 내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기미를 미리 통찰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또 기미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긴장된 태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주역은 자강불식의 덕을 강조한다. 이 덕은 생성 변화하는 사물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물의 운동에 관여하기 위한 주관의 품성이다. 또 이 덕은 사물의 질서에 따라 사물을 변형해 나감으로써 대업을 이룩하는 기초다. 주역의 이런 견해는 후세 실학자들에 의해 발전했으며 따라서 오늘날에도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한편 주역에는 수에 대한 신비한 견해가 있다. 홀수는 양의 수이고 짝수는 음의 수이며 수는 사물이 존재하듯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비학적 견해는 현대적 수리로 발전하지 않는 한 미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역의 세계관은 인생과 사회의 문제를 우주 자연 전체와 연관 속에서 사유하는 하나의 고전적 사고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고전적 정신은 만일 오늘날에도 형이상학적 사유가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다면 계속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연을 그저 분석하고 이용하는 관점에 익숙한 현대 사람들은 바로 이런 관점 때문에 많은 폐해를 경험하고 있다. 전지구적 규모의 자연 파괴는 우리 인간의 삶을 묵시록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동양의 고전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견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주역의 세계관도 지나치게 신비화하지 않는 한 현대적인 재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주역의 영향을 받은 철학들
그러면 주역이 후세 철학에서 어떻게 이용되어 철학적으로 발전했는지를 살펴보자. 주역의 형이상학적 발언들은 특히 송대 이후에 발전한 신유가 철학의 기본 원리로 채택되었다. 물론 신유가의 발전에는 주역만이 아니라 도가와 불가도 대단히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신유가는 늘 도가와 불가를 허무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주역의 세계관을 도덕론과 함께 강조했다. 송대 신유가는 주렴계(1017~73)와 장횡거(1020~77)가 기초를 세웠다. 주렴계는 초월적인 도를 본체로 전제하고 도의 분화 운동을 통해 현상계를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장횡거는 본체를 기로 보고 기의 자발적 운동, 즉 기의 거듭된 응집과 분산 운동에 의해 현상 세계가 생겨났다고 본다. 주렴계의 고나점은 뒷날 정이천(1033~1107)의 주리론과 결합하여 주희의 주리론 체계를 형성했고 장횡거의 입장은 후세의 주기론 전통을 형성했다. 그런데 명말의 왕선산(1619~92)과 유종주(1578~1645)같은 학자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주기론의 측면에서 해석하여 그 초월적 성격을 불식했다. 그러나 주럼계와 장횡거의 차이야 어떻든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역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주렴계의 도는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방식으로 운동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운동인의 통일적 주재자는 태극이다. 이 태극이 다양의 세계를 산출한 최후의 근거로서 통일적 일자다. 이 일자가 움직여 양의 힘이 되고 정지하여 음의 힘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지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정지이지 운동의 중지는 아니다. 양의 힘은 적극적으로 사물을 생성시키는 힘이고 음의 힘은 생성을 일정하게 확정하는 힘이다. 전자는 발산하는 힘이라면 후자는 수렴하는 힘이다. 이 두 힘의 순환 법칙이 바로 도다. 이런 견해에 비추어 볼 때 주역의 사고는 세계를 일종의 동력학의 관점에서 보게 해 준다. 세계는 힘의 강약이라는 강도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모든 형체 있는 것도 본질적으로 유동적 힘의 흐름이 지배한다. 형체 있는 것들은 두 가지 힘이 긴장 관계 속에서 적절한 화합을 이루어 무한한 힘의 장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형체 있는 것들은 이 힘의 상태를 자신 속에 띠고 있는 일종의 전도체와 같은 것이다. 이런 역동주의적 사고는 장횡거에게는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음양의 통일체로서 태허를 말한다. 태허란 빈 공간이 먼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공간이 사실은 기로 충만되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모든 형체 있는 것은 그 본체인 기의 응결물이다. 동시에 그 형체 속에는 기의 본질인 생성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형체 있는 것들은 같은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평등하다. 그리고 서로 연속되어 있다. 만물은 하나다. 인간의 마음도 역시 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만물의 본질도 기의 본질과 동일하다. 마음은 이 동일한 본질을 자각하여 체현할 수 있는데 다만 형체에 사로잡힌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만물의 본체인 기와 그 본질 -마음의 본질이기도 하다-을 자각적으로 체화하는 덕성지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물의 본체인 기는 만물의 질료적 연원이다. 유에 따라 구분되는 물질, 식물, 동물, 인간은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응결된 형질을 가진다. 그리고 기는 투명성과 생성의 힘을 가지는데 유에 따라 구분되는 각 존재는 기의 본질을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다. 다만 인간만이 기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장횡거의 내재주의적 사고도 사실은 주역의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주역의 십익 가운데 대체로 계사전이 후대 철학에 많이 활용되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사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음양론과 함께 구체적 형체를 가진 세계가 실재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이다. 형체 있는 세계는 그것의 이법인 도에 견주어 그 실재성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형체 있는 세계는 마음의 환상이나 표상도 아니고 가상이나 허상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 밖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다. 이 실재 세계는 우리가 관련을 맺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터전이다. 인간이 사물을 열어 일을 성취하는 것은 이 실재 세계와 관계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은 사물의 되풀이되는 법칙을 인식하며 불행한 난관을 변화시켜 행복한 국면이 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가 환상이라면 이런 적극적 실천 태도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래에 간심을 가지고 적극적 실천을 하려는 사람에게 세계는 당연히 나에 대한 장애의 측면을 드러내는 실재 세계가 될 것이다. 또 만일 변화와 그 법칙에 대한 주의를 버리면 인간은 유익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주역은 사물의 부단한 변화, 특히 인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국면으로의 변화를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움직이는 그 변화를 중시한다." 주역은 세계를 생성의 관점에서 본다. 그러나 그 세계는 실재하며 전체적으로는 통일적인 이법이 그 속에서 움직인다. 바로 이런 현실성을 중시하는 주역의 정신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송대의 신유가에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주자학이 현실성을 회의하거나 부정하는 도가와 불가에 반대하고 인륜의 질서 규범을 천리로 주장한 것도 저 주역의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주역의 음양론에서 주도적 기능을 하는 것은 양이다. 여성적인 것에 견주어 남성적인 강건을 적극 강조한다. 이것은 남녀 관계의 호혜성을 전제하지만 호혜나 조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 원리다. 조화를 주도하는 주체는 남성 군자다. 따라서 주역은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주자학이 임금에 대한 충을 포함하여 남자 중심의 삼강오륜을 절대 원리로 고집하는 것을 보장해 주는 고전적 전거가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송대의 주자학과 대비되는 사공 학파 가운데 엽수심(1150~1223)은, 천, 지, 수, 화, 뇌, 풍, 산, 택이라는 여덟 가지 존재는 하나의 기가 음양으로 분화하고 음양이 다시 그것들로 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따라 그는 만물과 그 내재적 기 이상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형이상학을 부정했다. 다시 말해 자연 안에 있는 것 이상은 그 유래를 성인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통일성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현실 세계 속에 있다. 즉 차이의 세계의 질료는 기가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통일성이다. 그리고 엽수심은 인생사에 대해서도 인생에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공리를 늘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칙만을 가지고 이익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익을 원칙에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주의적 견해 역시 구체적 실재 세계를 중시하는 정신과 연결된 것이고 이것은 그가 주역 연구를 통해 얻어 낸 관점인 것이다. 주역의 정신은 후세의 주자학적 사로방식과 이와 대비되는 실용적 사고방식 모두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주자학을 내건 청의 안원(1635~1704)은 형체를 정신에 누가 된다고 믿는 주자학의 초월주의적 성격을 지적하고 비난했다. 이 비난도 주역에서 물려받은 태도, 즉 생성하는 현상계의 실재성을 믿고 도를 기 위나 밖에서 찾지 않는 태도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입장에서 그는 인간의 신체는 기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기의 본질인 생성 의지가 신체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그는 주자학의 신체 경멸에서 오는 자기 분열적 사고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구체적이고도 변화하는 현실을 강조하는 주역의 정신은, 중국과 한국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사회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사태가 다시 호전되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가지게 했다. 존재의 법칙은 묵시록적인 몰락이 아니라 조화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는 삶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가지게 하는 긍정적 측면도 낳았으나 한편으로는 사회의 전체적 조화와 응집을 강조하면서 비판적 사고와 행동을 억누르는 정체적 측면도 아울러 낳았다. 이런 정체적 사고는 오늘날에는 전체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신중하고도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주역에는 영원한 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오늘날에도 교훈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있다. 동시에 주역이 고고학, 인류학, 문학 등의 도움으로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할 고전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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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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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매기와 지그스의 가정
우리나라 가정의 양상도 점차 변화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숙모, 조카들과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는 점차로 그 자취를 감추고, 부부가 중심이 되어 자녀만 데리고 사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절대적인 남자의 권리는 사그러지고 남녀 평등이 풍토가 성숙되어 가정의 돈주머니는 부인이 도맡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오락에서 친구들끼리 즐기는 경향도 가족 중심으로 되어 간다. 아무튼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의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크게 환영할 바라 하겠지만, 이러한 가정 체제를 받아들이는 데 가족 중심이니 남녀 평등이니 하는 것에는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한다. 남편의 전횡이 나쁘다고 여성이 주장을 내세우는 나머지 여성 독단으로 운영되는 가정이 곧 남녀 평등한 가정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즘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 "매기와 지그스"는 꽤 흥미를 끈다. 매기는 50이 넘은 부인이지만, 기분만은 청춘이다. 번들번들한 콜드 마사지, 타오르는 듯한 볼 연지, 곤두세워 빗은 머리, 꽉 잡아맨 헤어 밴드, 귀밑에는 출렁대는 귀걸이, 게다가 앞가슴은 대담하게 노출시키고 타이트한 미니 스커트에다 날씬하게 보이려고 허리를 꼭 졸라매고 있다. 외출할 때 쓰는 모자는 날마다 달라지고 언제나 높은 하이 힐을 신고 나간다. 매력을 돋우느라 그렇게 차리고 다니겠지만 우리에게는 좀 징글맞아 보인다. 비록 반백의 부인이라도 우리네 중년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체념과 허무감 따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의욕적으로 세상이나 남편을 휘어잡고 인생을 즐기려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는 여성이다. 이에 반해 남편 지그스는 60이 가까운, 고풍을 즐기는 키 작은 신사다. 언제나 예복 차림으로 하이칼라에 실크 햇 그리고 지팡이를 잊지 않고 들고 다니는 사장님이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인을 아껴 주고 순종하는, 말하자면 유순한 공처가라 하겠다. 이 두 사람이 결합하여 이루고 있는 가정에는 몇 사람의 부속 인원이 있다. 언제나 은근히 아버지 편이 되어 동정해 주는 묘령의 딸 로라와,'예쁜이'로 통하는 매기의 친정 조카딸, 그리고 요리사와 용인 한 사람이다. 이렇게 두 사람씩이나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상류에 속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집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지그스 쪽의 친척이라곤 얼씬도 안하고, 매기의 친정 식구들만 문이 닳도록 드나든다. 장모는 말할 것도 없고, 처남 되는 비미라는 건달 녀석이 계속 드나들며 지그스를 괴롭힌다. 친정 조카들은 취직을 부탁하면서도 게으름이나 피우고, 또 정작 취직시켜 주면 염치없이 경쟁 회사로 팔려 가곤 한다. 친정 식구들의 행실로 보아 매기와 지그스의 가정 내에서 매기가 어떠하리라는 것이 가히 짐작된다. 쓸데없이 남편에게 신경질 부리고 폭행을 밥먹듯 하는 매기의 고약한 성격은 아마도 그녀가 자라난 가정 환경의 결과일 것이요, 또한 하류 가정에서 태어나 세탁부, 식당 접대부 등으로 고생하면서 상류 사회로 기어오르려고 피눈물나게 고생한 것이 부산물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류 출신으로서 출세해 상류 사회에 끼어들게 되었으니 제법 고상하게 처신해야 했을 것이다. 매기는 일과로 피아노 치고 노래도 부르며, 지그스와 함께 음악회에도 자주 나간다. 서투르지만 그림도 그리는 척하며 골동품 취미도 대단하다. 교제도 상류 인사들하고만 한다. 그러나 지그스는 이러한 매기의 고상한 취미에 골치 않는다. 골프를 치고 부인 몰래 포커와 경마를 즐긴다. 노름하기 위해 부인을 속여 가며 용돈을 감추어 놓고 쓰느라고 식은땀을 흘리는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몸은 늙었어도 지그스 또한 남자인지라 바람피울 가능성이 꽤 많지만 엄격한 매기의 감시로 꼼짝도 못한다. 매기는 자기가 생각하는 가정 위주의 방향으로 남편을 길들이려고 한다. 이에 대해 지그스는 일단 아내에게 순종하지만, 적당히 아내의 눈을 속여 자기대로의 재미를 보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다. 지그스가 젊은 여자들에게 보이는 왕성한 관심으로 보아 아마도 아내에 대한 애정에 금이 좀 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이들의 가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가정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내의 주장에 끌려가는 가정은 실속 있는 가정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자는 남자대로의 생활이 있고 고유한 흥미 영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내가 덮어놓고 자기 생각대로만 남자를 끌고 나가는 것도 슬기로운 방안이랄 수는 없다. 아내가 지나치게 자기 주장만 세운다면 남편의 애정을 저버리고 단란한 가정 분위기를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매기와 지그스의 가정은 그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요컨대 우리나라 가정의 근대화에서 엄격히 경계해야 할 점은 여태까지 남자의 권리가 너무 센 편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여자의 주장이 강력히 실행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다. 덮어놓고 부인의 주장이 신장된다고 그것이 현대화된 가정은 아닐 것이다. 남녀가 서로 상대를 존중하여 상대방의 취미, 생활영역, 요구 등을 이해하고, 자아를 주장하면서도 상대편에 대한 존경으로 그의 의견을 살려주면서 공통의 안식처를 꾸며 가는 것이 현대화된 가정의 참모습이 아닐까.
"196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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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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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휴가
뮬라 나스루딘이 아주 오랫동안, 몇 해 동안이나 일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은 무척 화창한 날이었는데 느닷없이 그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게 일자리가 있었다면 아마 오늘 같은 날은 휴가를 즐겼을 거야."
- 그는 사실 아주 여러 해 동안 일자리가 없이 놀고만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휴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일자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일자리가 없으니 어디서 휴가를 받는담? 그는 휴가 때문에 일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도자
어떤 구도자가 임제 선사를 찾아갔다. 임제는 중국의 위대한 선사였다. 그 구도자는 깨달음을 얻고 싶어했다. 그러나 임제는 이렇게 말했다. "기다려라.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구도자가 말했다. "저는 항상 제가 건너온 다리를 부숩니다." 임제가 말했다. "좋다. 네가 어디서부터 오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요즈음 쌀값이 얼마나 하는가?" 그러자 구도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놀리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때리겠소." 임제는 그 앞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노라."
- 만일 그가 쌀값을 기억하고 또 자기가 어디에서부터 오고 있는지를 기억한다면 그는 진리를 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짐이고 장벽일 뿐이다. 그러한 과거의 짐을 가지고 다닐 때 그대는 결코 현재를 향해 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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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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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1.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공산당 창당(1921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2년/ 방정환, 일본에서 색동회 조직하고 어린이 문화운동 시작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 다수 사망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사회주의 체제 국가 중의 하나다. 중국 사회주의의 원천은 어디일까?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해 정리된 공산주의 이론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현실에서 실현되어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성립되었고 점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회주의 구호의 하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후 1919년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코민테른(제3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다. 그 후 1920년에 인도네시아와 이란, 1922년에는 일본에서 각각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설된 것은 1921년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공산주의 이론은 일부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하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5, 4운동을 전후로 북경대 교수들 중 일부는 이미 공산주의 이론에 접하고 있었다.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한 인물은 이대교, 진독수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들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외세와 결탁한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중국의 반군벌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힘이 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도 중국의 이같은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으며, 제1차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정에서 러시아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원칙아래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이런 모습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중국의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체제를 우호적으로 보게했다.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을 주목, 1920년 중국에 공산당을 창설하라는 임무를 띠고 보이틴스키가 북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우선 중국 내 공산주의 이론에 밝은 북경대 교수 이대교를 만났다. 이대교는 북경대 교수를 그만두고 상해에서 글쓰는 데 전념하고 있던 진독수에게 보이틴스키를 소개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를 띤 보이틴스키와 중국의 대표적인 혁명적 지식인인 진독수의 대면은 중국에 사회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있어 결정적 계기가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다. 진독수는 보이틴스키와의 만남이후 1920년 8월 7명의 구성원으로 공산당 창립 발기대회를 개최했다. 그후 북경, 상해, 제남, 광주 등 전국 각지에 공산주의 소그룹(소조)들이 만들어졌고,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는 주로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마침내 1921년 7월, 상해의 프랑스 조계의 한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역사적인 중국공산당 창립모임이 있었다. 그 기숙사는 방학으로 학생들이 없었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겨우 13명이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한 모택동도 이 13명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은밀하게 창립대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비합법 활동으로 당국의 추적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은밀히 진행하고 있던 집회도 경찰에게 들통이 나 집회도중 서류를 싸들고 황급하게 대회장소를 옮겨야 했다. 출발점부터있었던 이런 시련은 공산혁명이 성공하는 때까지의 긴 장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1921년 출발한 당원을 공산당은 30여 년 뒤에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수천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조직이 되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정식 명칭은 중국공산당으로 정해졌으며 초기 당강령은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1단계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수립이었다. 또한 당연히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생산수단을 전부 사회적 소유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공산혁명이 성공해야 가능한 정책들이었다. 공산당의 창당이후 조직활동은 아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활동은 계몽적인 선전활동 그리고 노동자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922-23년을 전후로 하여 이들의 조직적인 활동으로 노동운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1922년 처음으로 대외선언을 채택하여 공산당의 존재를 정식으로 대외에 알리는 선언을 했다. 또한 코민테른에 가입. 국제적으로 공산주의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눈부신 조직확대로 군벌과 외국에 대항하는 국민혁명 운동의 한 세력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되었다. 1923년에는 군벌타도를 목적으로 하여 국민당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1924년 1월 국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삼대정책이 채택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게 된다(제1차 국공합작). 물론 국민당과의 합작은 당 대 당의 통합이 아니라 공산당 소속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운동이 성공하여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한 후 국민당의 우파들은 공산당을 몰아냄으로써 이때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 대립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그 뒤로 국민당은 공산당을 말살하기 위해 계속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공산당은 국민당과 투쟁하면서 조직을 유지해나가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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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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肝膽楚越(간담초월) 肝(간 간) 膽(쓸개 담) 楚(나라이름 초) 越(나라이름 월)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는 중니가 말하길 "뜻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 같으며(肝膽楚越也), 뜻이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도 모두 하나이다." 라는 대목이 있다. 또한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유협(劉 )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비흥(比興)편에는 물체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합치고 보면 간과 쓸개처럼 가까운 사이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간담(肝膽) 이란 본시 관계가 매우 가까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편( 眞篇)에서는 肝膽胡越(간담호월) 이라 하였는데, 肝膽楚越과 같은 표현이다. 이는 간과 쓸개의 거리가 초나라와 월나라의 관계처럼 멀다 라는 뜻이며, 비록 거리상으로는 서로 가까이 있지만 마치 매우 멀리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 를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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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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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고대엔 남성들도 립스틱을 발랐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겠지만 그것을 유지하려면 약간의 비용을 들여야 한다. 남녀 미국인들이 단지 아름답게 보이려는 이유만으로 미용실이나 이발소, 화장품 회사에 내는 돈은 연간 50억 달러를 넘는다. 하지만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화장이나 그 밖의 멋내기는 별로 놀랄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니다. 적어도 이미 8000년 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이니까 말이다. 얼굴이나 몸을 장식하고, 향료를 뿌리고, 파우더를 바르고, 머리를 염색하는 등의 행위는 모두 종교나 전투 의식의 일부로 시작되었는데 그 역사는 아주 오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6000년 전에 얼굴이나 눈에 화장을 하기 위해 안료를 잘게 깨거나 섞을 때 썼던 팔레트를 발굴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4000년에 이미 미용실이나 향료 제조 공장이 번성했고 메이크업 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에 사랑받던 아이섀도는 그린, 립스틱은 블루 블랙, 볼연지는 빨강이었다. 그리고 상류층 여성들은 손가락이나 발을 주황색인 헨나(부처꽃과의 식물) 염료로 염색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당시는 가슴을 드러내는 시대였기 때문에 가슴의 혈관을 푸른 색 안료로 뚜렷하게 그렸고 유두는 금색으로 칠했다. 이집트의 남성들도 여성들 못지 않게 화장을 좋아했다. 이승에서뿐만 아니라 저승에서까지도. 그들은 죽으면 저승에서 사용할 엄청난 양의 화장품을 함께 매장했던 것이다. 1920년대에 기원전 1350년 무렵의 이집트 왕인 투탄카멘의 묘지를 발굴했을 때 스킨크림, 립스틱, 볼연지가 든 작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고 무척 향기가 좋았다.
사실 기독교 시대까지 기록에 남은 모든 문명을 보면 그리스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파우더나 향료, 안료로 열심히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특히 눈은 몸의 어느 부분보다 마음 속의 감정을 잘 나타내므로 특히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던 것 같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얼굴 메이크업의 최대 포인트로서 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들은 골작석 가루나 청록색의 동광석으로 만든 녹색 아이섀도를 즐겨 칠했는데 눈꺼풀의 위아래와 양쪽을 진하게 발랐다. 또 아이라인을 그리거나 눈썹이나 속눈썹을 진하게 하려고 코르라는 검은 페이스트(paste)를 사용했다. 이것은 안티몬의 가루, 소성 아몬드, 검은색 산화동, 자토로 반죽해서 작은 설화 석고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그것을 침으로 적셔서 상아나 나무 또는 금속제의, 현재의 눈썹 펜슬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스틱에 발라 눈화장에 사용했다. 코르가 들어 있는 항아리들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상류 이집트인들은 남녀 모두 사상 최초로 눈 주위를 반짝거리게 하는 아이글리터를 붙였다. 풍뎅이의 딱딱한 황금빛 날개를 유발에 넣고 거칠게 짓이겨 공작석 아이섀도에 섞어서 썼던 것이다. 이집트 여성들 대부분은 눈썹을 밀어내고, 나중에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이 한 것처럼 눈썹을 붙였다. 진짜든 가짜든 코 위에서 양쪽 눈썹이 붙어 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은 코르를 사용하여 본래 떨어져 있는 눈썹을 하나로 이었다.
눈화장은 헤브루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메이크업이었다. 이 습관은 기원전 850년경, 아하브 왕의 왕비인 예제벨에 의해 이스라엘에 소개되었다. 시든의 공주였던 예제벨은 당시 문화나 패션의 중심지인 페니키아의 습관을 따르고 있었다. 성경도 그녀의 화장에 대해 쓰고 있다. "예후가 이즈르엘에 이르자 예제벨은 소식을 듣고 눈화장을 하고..."("열왕기" 하 9장 30절) 예제벨은 진한 화장을 하고 궁전의 높은 창문에서 자신의 아들과 왕좌를 다투는 예후를 나무랐다. 하지만 예후의 명령을 받은 자신의 하인에 의해 창문에서 떨어지고 만다. 예제벨은 평민의 권리를 냉혹하게 무시했고 헤브루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샤를 공공연히 모욕했기 때문에 악녀의 전형이라는 평판을 받게 되었다. 예제벨은 몇 세기에 걸쳐 화장품에 나쁜 이미지를 남겼다.
이집트의 메이크업 기술을 흉내내 바로 실천한 로마인과 달리 그리스인은 맨얼굴을 좋아했다. 기원전 12세기 도리스인의 침입이 시작된 시대부터 기원전 700년 무렵까지, 하루가 싸움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끝나는 그리스인들에게 몸을 장식하는 따위의 퇴폐적인 쾌락에 소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 뒤 사회가 안정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황금시대라는 번영을 맞이했으나 남자다움과 무풍류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리스 사회에서 발전한 것은 학문과 육상 경기였고 치장하지 않는 남성이야말로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조금씩 들어온 화장술이 고급 창녀들에 의해 정착했다. 고급 창녀들은 돈이 많고 생활이 풍요로워 진한 화장을 하고 머리를 멋드러지게 묶었으며 몸에 향료를 발랐다. 또 입냄새를 없애려고 입 안에 방향액이나 방향유를 넣고 혀로 굴리다가 삼키지 않고 적당한 때 뱉어냄으로써 좋은 냄새를 풍겼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구취 방지제인 셈이었다. 또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에게서는 흑발보다 금발을 좋아하는 금발 선호사상이 처음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금발은 순결과 사회적 지위가 높음, 성적 매력을 뜻했기 때문에 창녀들은 노란 꽃잎이나 화분에 칼륨을 섞고 사과 향을 첨가한 포마드로 머리색을 금색에 가깝게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남성이나 여성 모두 화장품을 무척 많이 사용했다. 동방의 원정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은 인도의 향료나 화장품, 금발용 황색 가루나 꽃가루, 금가루를 가지고 왔다. 아예 몸에 붙이고 오는 병사들도 많았다. 또 로마 여성들의 화장대에는 현대의 화장품에 버금가는 모든 것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1세기의 풍자 시인인 마르티알리스는 사랑하는 연인인 가라의 지나친 화장을 비난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가라, 당신이 집에 있을 때 당신의 머리는 머리를 빗어주는 하녀의 손 밑에 놓여 있구려. 밤이 되면 틀니를 뽑아 놓고 수백 가지의 화장품 상자 안에서 잠이 들지. 당신의 얼굴조차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아.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상자에서 꺼내 붙인 가짜 눈썹 밑으로 남자에게 눈길을 보내는구려."
로마인들의 화장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에 근거하여 어원 연구가들은 오랫동안 '화장품'을 뜻하는 'cosmetic'이라는 말이 줄리어스 시저가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유명한 화장품 상인인 코스미스(Cosmis)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왔으나, 아주 최근에 '장식에 시간을 들이는'이르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Kosmetikos'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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