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명상록
사색하는 생할인으로서, 영원히 낡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아우렐리우스의 고매한 양심의 목소리
제8장. 선과 악에 대하여
그대의 전 생애를, 혹은 그대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 철학자로서 생애를 보낸다는 것은 이미 힘들게 되었고, 많은 다른 사람들과 그대 자신조차도 철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덧없는 명예욕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속세의 때가 묻었기 때문에 철학자라는 직함을 쉽게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면, 남들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말고 그대의 남은 생애를 그대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 그대는 그대의 본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애써야 하고, 그밖의 어떤 일로 번민하거나 정신이 산만해져서는 안된다. 삼단논법이나 부, 명성, 쾌락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경험을 벌써 잊었는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은 인간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데에 있다.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 자신의 욕구와 행동을 규제하는 엄격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그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원리다. 인간을 정의, 절제, 남자다움, 자유로 이끌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니며,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이 바로 그 원리이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이 행동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러한 행동을 한 후의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를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라. 얼마 안있어 나는 죽을 것이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리고 신과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지금 나는 그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비탄에 빠져 있을 때에도 세상 사람들은 같은 일을 여전히 되풀이 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물은 우주의 본성을 따르며, 얼마 안 있으면, 그대도 하드리아누스나 으우구스투스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쨰는 그대가 하는 일을 직시하고 그 정체를 파악하라. 동시에 선량한 사람이 되어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 요구하는 것을 지체없이 행하라. 그리고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하라, 따뜻한 호의와 겸손된 마음으로 거짓없이. 그대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 사회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그대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지만, 잠은 이성이 없는 동물에게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각자의 본성과 화합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참되고 본성에 맞는 일이며 유쾌한 일이다. 그대가 어느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자문해 보라. 쾌락, 고통, 인과간계, 명예와 불명예,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가 이러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조금도 놀랍거나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나는 명심하면 된다. 사과나무에 사과 열매가 열린다고 놀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처럼, 세계가 당연히 일어날 일을 야기시킨다 해서 놀라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의사가, 환자가 열이 있다고 놀란다거나 키잡이가 역풍을 보고 놀란다면 이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말이나, 포도나무 등 모든 사물은 어떤 목적을 갖고 존재한다. 놀랄 필요가 없다. 태양도 말을 할 줄 안다면,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상식이 이런 생활을 허락할 것인가 생각해 보라. 자연은 만물의 시작과 과정 뿐 아니라 그 최후까지도 섭리한다. 예컨대 공을 던지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공이 위로 올라간다 해서 좋은 일이고, 공이 아래로 내려오다가 마침내 땅에 떨어 진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거품이 일었다고 해서 좋은 일이고, 거품이 없어졌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명의 등불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의 실상을 확인하라. 나이 먹고 병들게 되면 육체가 어떻게 되고, 죽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 지를. 칭찬하는 자와 칭찬받는 자, 기억하는 자와 기억되는 자 모두 덧없는 세월을 살 뿐이며, 이러한 일은 모두 이 지구의 작은 구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그런데도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니! 지구 전체도 한낱 미소한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의견이든, 행동이든, 말이든, 그대 앞에 닥친 문제를 직시하라. 그대가 역경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오늘보다 내일을 더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목욕을 하면서 올리브 유, 땀, 때, 더러운 물 등에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일상 생활의 각 구석이나 만물의 각 부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루실라는 베루스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나 마침내 루실라도 죽었다. 세쿤다는 막시무스가 죽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쿤다도 죽었다. 에피틴카누스는 디오티무스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에피틴카누스도 죽었다. 안토니우스는 파우스티나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안토니우스도 죽었다. 저 예지에 가득찬 사람들, 저 예언자들, 저 거만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루살이처럼 벌써 오래 전에 죽었구나. 어떤 사람은 죽자마자 곧 잊혀져 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전설에서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작은 살덩어리인 그대 자신도 분해되어 버리고, 그대의 갸냘픈 호흡도 끊기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인간이 인간다운 일을 할 때 참된 기쁨을 느낀다. 같은 인간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고 감각적 충동을 경멸하며, 그럴듯한 현상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 그리고 우주의 본성과 우주안에 있는 사물의 본성을 관조하는 것이 바로 인간본연의 일인 것이다. 그대와 다른 사물과는 세가지 관계가 있다. 첫째는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육체와의 관계, 둘째는 만물이 생성되는 원인과의 관계, 셋째는 그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고통은 육체에 해롭거나-육체에 해로운 경우는 육체로 하여금 스스로의 고통을 말하게 하라-영혼에 해롭다. 그러나 영혼은 스스로 평온을 유지하면서, 고통이 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판단과 감정, 욕망가 혐오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악은 그리 높은 절정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떠한 악도, 어떠한 욕망이나 마음의 동요도 나의 영혼 속에서 서식처를 찾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의 본성을 가려내고, 그 가치에 따라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다. 자주 이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모든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자연이 그대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었다는 점을 명심하라. 부와 재산을 자만심 없이 받아들여라. 그리고 언제든지 아낌없이 버릴 각오를 하라. 몸뚱이로부터 손과 발과 머리가 잘려 나가 따로따로 나뒹구는 것을 그대는 본 적이 있는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이기적인 일만을 하는 사람의 상태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대가 자연의 통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상상해 보라. 그대는 자연의 일부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스스로 자연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다. 신은 인간 이외의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분리되고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결합시키는 능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는 언제든지 자연의 통일성 속으로 되돌아올 수가 있다. 신의 은총을 항상 생각하라.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도록 배려하였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을 지라도 다시 돌아와 결합하고 자연의 구성원으로서의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는가? 우주의 본성이 이성적 존재에게 능력이란 장비를 부여받았을 때, 인간이 우주의 본성으로부터 받은 한 가지 능력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주의 본성은 본성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을 모두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오게 해서 자신의 일부로 삼는 것처럼, 이성적 존재에겐 모든 방해물을 예정된 목적을 달성하는 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대의 전 생애를 생각해 보고 괴로워하지 말라. 그대에게 닥칠지도 모를 여러가지 고난을 한꺼번에 생각하지 말라. 어떤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이 일에는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하라. 그렇다고 자인하면, 그대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다음에는 미래나 과거도 아닌 오직 현재만이 그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러나 이것도 그대가 한계를 정해 놓는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마저도 그대가 참을 수 없다면 그대 마음을 질책하라. 그대를 괴롭힌다고 생각되는 것을 털어버린다면, 그대는 안전할 것이다. 이러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이성이다. 그러나 나는 이성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성 자체가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대의 다른 부분(육체)이 고통을 받는다면 고통에 대한 의견을 갖도록 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후세의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후세의 사람들도 그가 지금 싫어하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후세의 사람들 역시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대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든, 어떠한 생각을 하든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를 묶어서 그대 마음대로 내팽개쳐 보라. 나는 본성에 맞게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한, 어디서든지 평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장소의 이동으로 인해 나의 영혼이 불행과 악화와 위축과 타락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그대는 찾아낼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다. 황소에게는 황소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고, 포도나무에게는 포도나무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돌에는 또한 돌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모든 사물에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그대는 불평하는가? 본성은 그대가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은 일으키지 않는다. 외부적인 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면, 그대를 괴롭히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대의 판단이다. 그대는 이러한 판단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 마음 속의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면, 누구도 그대가 의견을 바로잡는 데 방해하지 않는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못함으로써 그대가 고통을 받는다면, 누구도 그대가 의견을 바로잡는데 방해하지 않는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그대가 못함으로써 그대가 고통을 받는다면, 왜 불평을 중지하고 행동하지 않는가?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이 그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일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슬퍼하지 말라.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삶의 보람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충분한 일을 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삶처럼 장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만족한 마음으로 세상을 하직하라. 최초의 인상에 나타나는 그 이상의 것에 마음쓰지 말라. 누가 그대에 대해 험담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하자. 이것은 그저 전해들은 말이지 그대가 이 험담 때문에 해를 입었다는 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아들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가 위독한지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언제나 최초의 인상만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마음에 덧붙여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논평을 하든지. 오이의 맛은 쓴가? 그러면 버려라. 길 한복판에 가시덤불이 있는가? 그러면 피해서 돌아가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세상에 이런 것들이 생겨났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면 자연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목공이나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대팻밥이나 가죽 조각들이 널려 있다고 그들을 탓하면 그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대팻밥이나 가죽 조각을 버릴 곳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본성에는 여분의 공간이 없다. 그러나 자연 안에 있는 사물이 늙고 시들어 무용지물로 보일지라도 자연은 그것을 자신 안에서 변화시켜 새롭게 창조한다. 외계로부터 어떤 물질도 요구할 필요도 없고, 쓰레기장을 찾을 필요도 없다. 자연은 현재의 공간, 현재의 재료, 현재의 기술로 만족한다.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지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었는지, 존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찬양의 박수갈채를 바라거나 비난을 피한다면, 그대는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대는 매시간마다 세번씩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의 칭송을 받고 싶은가? 그대는 자기자신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은가? 자신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이웃의 자유의지는 그의 호흡과 육체와 마찬가지로 나의 자유의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는 각별히 상호협력하는 존재이지만, 우리들 각자의 이성은 독자성을 갖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웃사람의 악이 나에게도 해를 끼칠 것이다. 신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죽음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각의 상실이나 다른 종류의 새로운 감각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대는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대가 다른 종류의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된다면, 다른 종류의 생물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생존이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서로 협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가르쳐서 향상시켜라. 아니면 인내하라. 화살과 정신은 움직이는 방식에 있어서 각기 다르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거나 연구에 몰두할 때에 정신은 화살처럼 그 목표를 향하여 직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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