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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32호
2011.12.4 (음 11.10)/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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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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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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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긴 것은 운명 탓이나, 독서나 독서의 힘은 노력으로 갖추어질 수가 있다. ─ 세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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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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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국가 및 공공기관이 제정한 법률, 명령, 규칙, 조례 따위의 사회규범을 법이라 한다. 말과 글에도 법이 있다. 언어의 체계를 다듬어 정리한 문법이다. 우리나라 문법의 틀은 어문규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른바 ‘4대 어문규정’은 표준어 사정의 원칙과 표준 발음법을 체계화한 표준어규정, 표준어를 중심으로 우리말 표기의 규칙을 정한 한글맞춤법,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을 정한 외래어표기법 그리고 우리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을 밝힌 로마자표기법이다. Paris를 ‘파리’로 옮기는 것은 외래어표기법, 서울을 ‘Seoul’로 적는 것은 로마자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나라 밖에서 들어온 것이기에 ‘들온말’이라 하는 외래어는 표기법의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원산지’가 제각각인 언어의 발음을 살펴야 하고, 이미 굳어진 말은 관용을 인정하여 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표기 세칙과 관용 표기 등을 꼼꼼히 따져 외래어 표기를 정하는 일을 맡아 하는 기구가 있다. 올해로 20년째를 맞은 정부·언론 외래어심의 공동위원회이다.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말글살이에 새롭게 등장한 낯선 외래어, 표기가 혼란한 용어를 주로 다루는 이 위원회가 그저께 제100차 정례회의를 했다. 이 회의에서 영화 <엑스맨> 등으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배우 ‘휴 잭맨’, 같은 나라의 소프라노 가수 ‘조앤 서덜랜드’ 그리고 영국의 록 가수 ‘데이비드 보위’는 널리 쓰이는 표기를 인정했다. 외래어표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휴 재크먼(Jackman)’, ‘존(Joan) 서덜랜드’, ‘데이비드 보이(Bowie)’로 해야 하지만 언중의 혼란을 막기 위해 관용을 따른 결정이다.
외래어 심의는 관련 규범을 바탕으로 현지 발음과 관용 따위를 시시콜콜하게 따져 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성원이 지키기로 합의한 법을 따라야 사회가 안정되듯이 결정된 표기도 널리 알리고 ‘약속’처럼 함께 지켜 나가는 게 ‘결정’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유돌이, 유도리
자기계발 및 성공심리학 전문가인 컬린 터너는 "일에는 유능한데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흔히 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융통성이 없이 고지식하기만 하다. 사고방식이 완고하거나 부정적이다"고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융통성이라는 얘기다. 특히 조직생활에서는 융통성이 윤활유 역할을 해 준다. 융통성이 없으면 스스로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이처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보통 '유돌이(유도리)가 없는 사람'이라 부른다. '기계나 일이 돌아가는 것을 유들유들하게 해 주는 것' 정도의 의미가 연상돼 '유돌이' 또는 '유도리'란 말을 쓰곤 한다. 그러나 '유돌이(유도리)'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유돌이(유도리)'는 시간.금전.기력 등의 여유를 뜻하는 일본어 '유도리(ゆとり)'에서 온 것이다. 일본에서는 주5일제 수업과 교과내용 30% 감축 등 고등학교의 '여유 있는 교육', 즉 '유도리(ゆとり) 교육'이 학력을 저하시켰다고 해서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유돌이(유도리)'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 '여유' '이해심' 등 우리말로 적당히 표현하면 된다. "그렇게 유돌이(유도리)가 없어서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 "성수기라도 한두 자리는 유돌이(유도리)가 있게 마련이다" "따뜻한 말로써 감싸 주는 아량과 유돌이(유도리)가 필요하다"에서는 각각 '융통성' '여유' '이해심'으로 바꿔 쓰면 된다.
~대, ~데
ㄱ. 진달래가 지천인데 설악산엔 눈이 내렸데. ㄴ. 진달래가 지천인데 설악산엔 눈이 내렸대.
ㄱ과 ㄴ은 어떤 의미 차이가 있을까? ㄱ의 경우는 과거에 자신이 직접 경험해서 알게 된 사실을 지금 상대방에게 감탄조로 전하는 것이다. 이때의 '-데'는 '-더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이 설악산에 가 봤더니 눈이 내렸더라는 내용이다. 말하는 사람이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닐 때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내 친구가 그저께 가 봤는데 설악산엔 눈이 내렸데"처럼 쓸 수는 없다.
ㄴ의 경우는 자신이 경험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직접 설악산에 가서 눈이 내린 것을 본 게 아니라 그런 사실을 남에게서 들은 것이다. 이때의 '-대'는 '다고 해'가 줄어든 말이다.
ㄱ. 마카오에는 작지만 예쁜 박물관들이 많다대. ㄴ. 마카오에는 작지만 예쁜 박물관들이 많다데.
ㄱ과 ㄴ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이 경우는 위와 좀 다르다. 말하는 사람이 과거에 들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어서 '-다대'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ㄴ처럼 '-다데'로 쓰는 게 바르다. 이 '-다데'는 '-다고 하데'가 줄어든 표현이다. '-데'가 '-더라'의 뜻이고 '-대'가 '-다고 해'의 뜻임을 생각해 보면 '많다데'는 '많다더라'로 의미가 잘 통하고, '많다대'는 '많다다고 해'가 돼 어색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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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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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시 - 임창아
오랫동안 시를 썼다 시의 수명은 대체로 짧았으나 멈추지 않았다 한 구절을 위해 낭비한 종이들이 한심하게 책상을 점령하였다 그래도 좋았다 방탕하고 음탕한 낱말들이 좋았다 짝사랑이어도 나는 나를 용서한다 온종일 말꼬리나 잡고 늘어져도 일생을 바칠 만한 놀이 라 생각했다 완전하지 못한 삐거덕거리는 한 문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만치 화려한 수식어들이 손짓을 한다 입 없는 화자가 구시렁구시렁 문장과 문장 사이 막다른 골목이 나를 유혹한다 속이 울렁거린다 저 구불구불한 리듬을 타고 가자 내 유일한 파라다이스이자 아름다운 감옥으로, 그래도 좋았다 흥청망청한 낱말을 밟으며 나는 오래 늙어 갈 것이다 생면부지 낱말들이 정면으로 와도 비겁하게 고개 따위 숙이지 않겠다 한 호흡 크게 하고 몸을 낮추었다 태산처럼 높이 낯익은 문장이 걸려 있다 마음은 벌써 공중동작에 들었는데 자판 위의 사정은 여전히 도움닫기다 내 것 아닌 것은 항상 그리운 법 한 문장이 그리웠다 몸살나게 지독한 열병이었다 그러다가 괜찮네, 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나는 선택된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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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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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 웃음소리 - 김종원
입동 비 반겨 맞아 즐겨 나는 노랑나비
떼지어 비상하려다 제 분수 다시 알고
노오란 꽃웃음으로 내려앉은 환호성.
못 다한 이야기꽃 지천으로 다시 피워
까르르 데굴데굴 노란 웃음 구를 때면
귀 열고 님 기다리는 은행나무골 큰애기.
소슬바람 간질일 때 노란 웃음 쏟아지고
꾀벗은 가로수들이 팔을 벌려 홀로 서면
시간은 저문 해 쫓아 삼동(三冬)으로 치달아.
(2003.11.08. 立冬 비에 지는 은행잎을 보며)
* 꾀벗은 : 벌거벗은의 사투리. * 노랑나비 웃음소리 : 군무처럼 지는 은행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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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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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 권오삼
벌통을 닮은 집
사람들은 아침이면 부지런히 벌처럼 집 밖을 나서지만
저녁이면 꿀 대신 무엇을 갖고 들어가는지 무엇을 갖고 들어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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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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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4장.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4. 유우머 감각에 대하여
유우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까지 충분히 인정되어 왔는가. 유우머를 쓰기에 따라 인간의 모든 문화 생활의 질이니 성격이니 하는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 유우머가 정치, 학문, 인생에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들이 충분히 인정되어 왔는가. 나는 이것을 의심한다. 유우머의 기능은 생리적이라기보다는 화학적으로 사상과 경험의 기본적 조직을 변질시켜 버린다. 국민 생활에 있어서의 그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도 없다. 웃을 수 없었던 탓으로 전 카이제르 빌헬름은 제국을 잃었다. 또 미국인 식으로 말하면, 카이제르가 웃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국민은 수십억 달러를 탕진한 것이다. 빌헬름 호헨쫄레른도 사생활에서는 웃을 수 있었겠지만 공적 생활에서는 언제나 누구의 일이 마음에 거슬렸던지 그 카이제르 수염을 빼쳐올리고 매우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이제르의 웃음이 어떤 것인가, 또는 그 웃음의 대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카이제르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족하게 웃는 것은 승리의 웃음, 성공의 웃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났을 때의 웃음이었다. 빌헬름 호헨쫄레른이 언제 웃어야 하며 또 무엇을 웃어야 하는가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은 전쟁에 패한 것이다. 카이제르의 꿈은 유우머의 웃음으로 해서 제어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들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 자는 과연 누구인가. 양심가, 유능자, 재산가, 계략가, 섬세한 자, 영리한 자, 거만한 자, 애국심이 지나친 사람들,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고 싶다는 열의에 불타는 사람들, <경력>을 쌓아 세계에 대하여서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죽으면 어느 광장에 있는 청동마에 경쾌하게 올라 타고 있는 동상의 눈으로부터 길이 후세를 내려다 보겠다고 염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유능하고 영리하고 야심적이고 거만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동시에 가장 겁장이고 바보고 유우머리스트의 용기와 깊은 생각과 명민성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쓸데없는 문제만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넓은 정신 영역을 가지고 있는 유우머리스트는 좀더 대국을 직시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상은 보는 바와 같이, 낮은 목소리로 몰래 속삭이며 그럴 듯하게 겁을 내고 있는 듯한 모양으로 착실하고도 조심성 있는 태도를 취할 수가 있는 외교관은 전혀 외교관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억지로 세계를 구제하는 유우머리스트 국제회의를 열 건 없다. 이른바 이 유우머 감각이라고 하는 우수품은 모두 사람이 누구나가 다 풍부한 재고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에도 파멸적인 전쟁의 위기가 덮칠 것 같을 때에는 국제회의에 가장 나쁜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장 <경험이 많고>, 확신적이고, 야심적이며, 또 가장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겁을 내고 그럴 듯하게 당황하고 있는 외교관, 게다가 인류를 위한 <봉사>에 가장 열심인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날마다 오전, 오후에 회의가 열릴 때 미키마우스의 영화를 10분 동안씩 강제로 구경시킬 수만 있다면 어떠한 전쟁도 일어날 리는 없다. 이것은 유우머의 화학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상의 질을 변화시키는 작용이다. 오히려 이 작용이야말로 인류 문화의 근간에까지 미치고 장래의 인류 사회가 중용시대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에 있어서 중용시대라는 이상보다 위대한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보다 더 위대한 이성적 정신을 가지고 있고 소박한 사고 방식과 평화적 기질과 문학적 견해를 오늘날보다 광범위하게 갖추고 있는 인종이 출현하는 것이 결국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 이상의 세계는 합리적 세계는 아니다. 또 어떠한 의미에서도 완전한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대번에 인식하고 뭇 싸움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세계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리라. 또 우리가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그다지 무리 없이 실현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꿈이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소박한 사고, 명랑한 철학, 중용 문화를 가능케 하는 섬세한 상식,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연히도 유우머의 특질이 되어 있는 것으로 유우머에서 발생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체로 현대인의 생활은 너무나도 침울하며, 사상은 너무나도 착잡하다. 사상과 학문이 이토록 진지하고, 이토록 착잡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오늘날과 같은 불행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활과 사상의 단순성은 문명과 문학에 대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이상이라는 것, 문명이 단순성을 잃고 어려운 한 궤변이 순정한 철리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문명은 점점 더 곤궁하고 고달프며 퇴폐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태가 자꾸만 계속되어 가면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 사상, 야심, 사회 조직의 노예가 된다. 이러한 개념, 야심, 사회조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나치게 짊어진 인류는 그러한 것들을 지배하는 지위에는 설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모든 개념, 사상, 야심을 초월하여 미소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 정신의 힘이 된다. 이 힘이야말로 유우머리스트의 묘미다. 골프나 당구 선수가 공을 잘 다루듯이, 카우보이의 선수가 밧줄 던지기를 잘하듯이, 유우머리스트는 사상이나 개념을 잘 다룬다. 거기에는 숙련에서 오는 마음의 여유와 확실성과 솜씨있는 경묘함이 있다. 결국 자기의 사상을 마음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사상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사상의 주인공인 사람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 사람이다. 진지함이란 결국 노력의 표시에 불과하다. 노력이 있는 한은 아직 완전히 숙달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세상의 이른바 벼락부자라는 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어서, 사회에 나가도 마음이 턱 놓이지 않고 언제나 자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지나치게 진지한 작가라는 것도 벼락부자와 마찬가지로 어쩐지 어색한 점이 있고 마음이 턱 놓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상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기까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설처럼 보이지만 단순성이라는 것은 사상이 깊다는 외적 증거이며, 동시에 그 상징이다. 학문이나 저작에서 이와 같은 단순성에 이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상을 명철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구나 사상이 명철해질 때에만 단순성은 가능한 것이다. 저술가가 어떤 개념에 고생하고 있을 때는 그 개념쪽에서도 저술가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것에 틀림없다. 우등으로 대학을 갓나온 젊은 대학 강사의 강의는 대체로 알기 어렵고 복잡하기 짝이 없으며, 사상의 참된 단순함과 마음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간은 능숙하고 달변인 노교수들의 말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세상에서 흔히 보는 이 사실 하나만을 보더라도 내가 지금 말한 것은 수긍이 갈 것이다. 젊은 교수는 잘난 체하는 현학적인 말만 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훌륭한 것으로 크게 기대할 만하다. 전문에서 단순으로의 과정, 전문가로부터 상식가로의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지식 소화의 과정이며 단연 몸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할 만한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의 인생관과 관련시킬 때까지는 그 전문적인 지식을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가 열심히 지식(윌리엄 제임스의 이른바 심리학적 지식)을 탐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장거리 여행의 피로 끝에 한잔의 시원한 냉수를 마시는 것처럼 몇 번씩 <어디, 한잔 할까>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한잔 하는 동안에 참으로 인간적인 대부분의 전문가는 극히 중요한 이러한 자문을 해볼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논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하다는 것은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동시에 성숙이라는 것도 예상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우리의 사상은 점점 명료해지고 문제의 중요하지 않은 점이라든가 또는 잘못된 것 같은 점은 잘라 버려져서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는 일은 없게 된다. 관념은 점점 명확한 형태를 갖추어 가고 기다란 사상의 연속은 점차로 간편한 공식으로 정리되며(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그러한 공식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이른바 지혜라고 불리는 참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벌써 노력이라는 느낌은 없어지고, 진리는 이미 명확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독자는 진리 그 자체는 단순하니 그것을 공식으로 나타내는 편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개닫게 되어 비할 데 없는 기쁨에 잠길 수 된다. 사상과 그 표현 형식의 자연스러움은 중국의 시인이나 비평가들이 매우 찬미하는 바이며 점차 성숙해 가는 발전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곧잘 말한다. 소동파의 산문이 원숙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것을 평하는데, 소동파도 겨우 자연의 자연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말을 쓴다. 즉 젊었을 때에 즐겼던 과장이나 현학적이며 대가인 체하던 태도며 문학적인 쇼우맨쉽을 말끔히 씻어 버린 문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우머 감각이 이 사고 작용의 단순함을 조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론가들이 지나치게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하여 일반적으로 유우머리스트는 사실 그 자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사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착잡해지는 것은 사람이 개념 그 자체에 얽매여 있는 경우뿐이다. 유우머리스트는 그렇지가 않다. 개념과 현실과의 모순을 번갯불 같은 속도로 지적하며, 상식이나 기지의 번뜩임을 제 마음대로 구사한다. 이렇게 하여 문제를 매우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실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으므로 유우머리스트에게는 탄력성이 있고 경쾌하고도 섬세한 묘미가 갖추어진다. 온갖 형태의 포우즈, 허위, 현학적 넌센스, 학구적인 어리석음, 사회적인 겉치레 따위들은 슬며시 요령있게 쫓겨나고 만다. 생각하는 바가 섬세헤지고 기지를 깨닫게 되는 까닭으로 저절로 현자의 풍격을 갖추게 된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뚜렷하다. 생활과 사고의 단순함을 특징으로 한 건전하고도 분별있는 정신은 장차 유우머스러한 사고 방식이 이제보다 훨씬 넓게 행해지게 될 때만 오직 성취할 수 있다고 내가 믿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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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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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명상록
사색하는 생할인으로서, 영원히 낡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아우렐리우스의 고매한 양심의 목소리
제7장. 우주의 지배적 이성에 대하여
악이란 무엇인가? 그대가 이제껏 수없이 보아오고, 지금도 자주보고 있응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생길 경우에도 그것이 자주 보아온 일임을 잊지 말라. 천상천하 어디에도 똑같은 것이 있을 따름이다. 고대사와 중세사, 그리고 현대의 역사가 이 동일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현재의 도시들과 집들도 그것들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만물은 옛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진부하고 순간적인 것일 따름이다. 우리의 원리에 대응하는 인상(사상)이 소멸하지 않는 한, 우리의 원리 또한 소멸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상을 끊임없이 불타오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될 모든 일에 대하여, 나는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나의 마음이 동요를 하는가? 마음에서 떠나 있는 것은 마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대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좀더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삶을 새롭게 할 힘이 있다. 그대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물들을 다시 한번 보라. 그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공연한 과시, 연극, 양떼와 소떼, 투창연습, 강아지에게 던져준 뼈, 연못에 던져진 빵부스러기, 짐을 지고 땀흘려 일하는 개미의 근면, 겁먹은 생쥐의 쩔쩔매는 모습, 실로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 이러한 것들 속에서도 훌륭한 유머를 보여 주어야 한다. 거만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목표에 정진하는 만큼, 그만큼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하라. 토론을 할 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할 때는 매 순간마다 그대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즉각 깨달아야 하고 토론에 있어서는 그것의 진의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이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나의 이해력으로 그 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만일 이해력이 충분하다면 자연이 내게 준 도구로써 그 일에 이용한다. 그러나 충분치 못하다면 그 일에서 물러나, 나보다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양보한다. 또는 나의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일반적 선에 적합하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 이의 도움을 빌어 최선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한다. 혼자서 하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하든 나의 일은 사회에 유익하고 적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라. 성을 공격하는 병사처럼 의무를 다하는 것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만일 그대가 불구자여서 성벽을 올라갈 수 없는 경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올라갈 수 있다면 그대는 어찌하겟는가? 미래의 일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일을 처리하고 있는 이성으로써 미래의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연하라. 혼자의 힘으로 안된다면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의연해져라. 신체의 각 부분이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인 것처럼, 개별적인 이성적 존재도 상호협조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이성적 존재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관계는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한낱 한 부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대는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고 인간들은 위해 자비를 베푸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단순히 예의상 자비를 베풀 뿐, 그대 자신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나는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 금이나 에메랄드, 또는 자줏빛 조개가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나는 에메랄드이며, 나의 빛깔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언제나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성은 자신을 어지럽히는 법이 없다. 즉 두려움과 괴로움과 격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가 이성에게 공포와 고통을 안겨준다면 내버려 두라. 이성은 이러한 상태에 결코 빠져들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가능한 한 고통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고통받는다면 신음하라. 그러나 영혼 자체는 공포나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이러한 것에 대하여 의견을 형성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법이 없다. 이성은 스스로 결함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아무런 결함이 없다. 따라서 이성은 스스로 자신을 어지럽히거나 방해하지 않는 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교란되거나 방해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라. 그대는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변화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우주의 본성에 대해 보다 만족스럽고 적합한 것은 무엇인가? 장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겠는가? 곡식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영양을 섭취할 수 있겠는가? 유익한 것은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 자신에 있어서도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며, 우주의 본성에 있어서도 변화는 필연적인 것임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 원하지 않는 일을, 인간의 본성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다. 머지 않아 그대는 모든 일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 또한 그대를 곧 망각할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그들도 그대와 같은 형제이며, 무지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악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얼마 안 있어 죽게 될 것이며, 특히 잘못을 저지른 자로 인해 그대의 이성이 조금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을 떄 그대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찡그린 얼굴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주 찡그리면 모든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결국에는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잆을 정도로 굳어버린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이성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려라.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관념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더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대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에, 만일 그것마저 소유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것을 갖고 싶어 했을지를 생각해 보라. 동시에 그러한 사물을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는 나머지 그것을 잃어버릴 경우에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 환상을 버려라. 꼭두각시가 되지 말라. 현재에 충실하라. 그대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이해하라. 모든 대상을 원인과 결과적 산물로 나누고 분류하라. 그대의 최후를 생각하라.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잘못이 저질러진 곳에 그대로 남겨두라. 선과 악 사이에 놓여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연마하라. 인류를 사랑하라. 신이 정해준 길을 걸으라. 어떤 시인은 법칙이 만물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법칙이 만물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고통에 대하여,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은 넋을 잃게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고통은 참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로부터 초월한 정신은 스스로를 흐트리지 않음으로써 평온을 유지하고, 이성의 힘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으로 인해서 해를 입은 부분(육체)은, 가능한 한 고통에 대한 의견을 갖추고 있는 것이 좋다. 안티스테네스의 말, 선을 행하고 욕을 먹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외면상으로는 이성이 명하는 대로 온순하고 단정하고 침착하면서도, 마음이 단정하고 침착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비열한 사람이다. 분노는 사물에 통하지 않는다. 사물은 그대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벼 이삭이 익으면 거둬들이듯이 삶도 거둬들여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은 태어나고, 어느 한 사람은 죽는 법이다. 비탄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눈물 흘리지 말며, 격정에 휘말려 들지도 말라.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노라. 그대의 생각은 옳지 않다. 위대한 사람은 삶과 죽음의 위험을 헤아리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또 선인의 일인가 악인의 일인가만을 고려하면 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선한 나의 벗이여, 고매하고 선한 것이 자신과 남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일 같은 것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게. 적어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네. 생에 집착해서는 안되네. 운명은 신에게 맡기고,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여인들의 말이 옳다고 믿으며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하면 가장 훌륭하고 가치있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추구해야 될 문제라네. 그대도 별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별들의 운행을 살펴보라. 변화하는 원소들의 율동을 끊임없이 생각하라. 이러한 생각은 지상생활의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어줄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라. 정치적 지배권에 얼마나 많은 지배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가? 그대는 미래의 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일은 과거의 일과 같은 형태일 것이며,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0년간 인간의 생활을 관조한 것은 1만년 동안 관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관조할 것이 더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현재 일어나는 일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하고, 세밀한 검토 없이는 어떤 것이든 그대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대를 연마하는 것, 이런 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이성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라. 어떤 본성이 그대를 인도하는지에 시선의 촛점을 두라.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나타나는 우주의 본성과, 그대가 해야 할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는 그대 자신의 본성을 직시하라. 사람은 본성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한다. 모든 사물은 인간이라는 이성적 존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비이성적 사물에 있어서, 약자는 강자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적 존재는 상호협력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으뜸가는 특질은 사회적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육체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감각이나 육체적인 욕망의 충동에 압도되지 않는 것은, 이성과 지성의 특수한 역할이다. 감각과 육체적인 욕망은 동물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 작용은 우월성을 요구하고, 다른 작용에 압도 당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훌륭한 이유가 있다. 이성적 작용은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사물을 이용하도록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본질의 첫째 원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기만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견지하면서, 정진하라. 그러면 이성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나는 시체다. 오늘로써 나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대의 남은 삶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라. 그대에게 일어나는 것, 그리고 그대의 운명의 실에 짜여지고 있는 것만을 사랑하라. 이것이 최상의 길이다. 어떠한 곤경에 처하게 되면, 같은 곤경을 당한 이웃의 경우를 생각하라.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했고 얼마나 분노하고 경악햇으며, 얼마나 원망했는가를.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그들의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자연을 교란시키는 자와 교란에 동요하는 자들로부터 왜 그대는 떠나지 않는가? 왜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용하는 올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는가? 그대는 그들을 이용하고 그대가 하는 일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보라.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선량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라.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 자신이 마음을 살펴보라. 마음에는 선이 샘솟는 샘이 있으리라. 이 샘은 아무리 퍼올려도 마르지 않고 샘솟을 것이다. 건강해야 한다. 그리하여 행동이나 태도에 있어서 불규칙적인 생태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신은 지적이고 품위있고 절도 있는 표정을 유지할 때 제 얼굴이 드러나는 법이다. 이것은 육체 전체에도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식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기술은 무용가의 기술보다는 레슬러의 기술에 가깝다. 불시에 공격을 당했을 때 쓰러지지 않으려면 항상 꿋꿋하게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대가 어떠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항상 생각하라. 그들의 의견과 욕망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을 뿐더러,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고통을 겪게 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라. 고통은 수치가 아니며, 지배적인 지성을 해치는 것도 아니라고. 지성이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한, 지성은 고통에 의해 해를 입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말과 같이, 그대의 고통에는 그 한계가 있다. 환상적인 과장에 빠지지 않는 한,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것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많은 것들, 예컨대 졸립다거나 매우 무덥다거나 혹은 식욕이 없다는 등의 일들도, 사실은 고통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따라서 이러한 일로 불쾌감을 느낀다면, 고통에 항복했다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라. 비인간적인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된다. 그대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은 지성과 사물의 구성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다. 신성한 인간이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점을 항상 기억해 두라.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참으로 사소한 것이라는 점도 명심하라. 그리고 변증법이나 자연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자유롭고 겸손하고 사히적이며 신의 의지에 순종하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온세상이 그대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야수들이 그대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는다 해도, 그대는 모든 강제를 거부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정신이 평온을 유지하고 주위의 사물들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현존하는 대상을 훌륭하게 이용한다면 무엇이 방해할 것인가. 그리하여 판단력은 그가 관찰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사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사람들의 견해로는 여러 종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대들은 물질이다. 그리고 대상을 이용하는 능력은 그 수중에 장악된 것에 대하여, 너는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무엇이 정신을 방해할 것인가? 현존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 사회적 미덕을 발휘할 훌륭한 소재이다. 즉 인간과 신에게 속하는 기술이 제료인 것이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과 인간에게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것도 아니고 다루기에 벅찬 것도 아니며, 오히려 친숙하고 다루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인격의 완성은 하루하루를 그 날이 임종인 것처럼 살고,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무기력하지도 않으며, 또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서 살 때 완성된다. 자기자신 속에 있는 악마로부터 피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악마를 보지 못하고, 피할 수 없는 남들 속의 악만 피하려고 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그대가 선을 베풀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도움을 받았다면, 그대는 그것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선행을 베풀었다는 칭찬을 바라는가? 아니면 어떠한 대가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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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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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위선과 사기
5.16 이후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가짜가 많다. 사기꾼, 가짜 형사, 가짜 군인, 가짜 징수원 등과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 이들에 의한 피해는 늘어만 가고 있다. 상품에 이르러서는 가짜 상품 때문에 진짜 상품까지도 팔아먹을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상품은 우리 자신에게까지도 신용을 잃고 외래품을 애용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러는 동안에 외래품에도 가짜가 범람하여 화장품, 담배, 의류, 주류 등은 가짜 등급까지 매겨져 도매 시장에서 매매되고, 외국의 싸구려 보급판 책의 가짜까지도 나돌고 있다. 상품의 가짜만이 아니라 가짜 인물까지 나오고 신성시되는 인격적 존재마저도 가장하여 무도한 짓을 자행하는 위선자 군상들이 나타났다. 이게 도대체 웬일인가.
사회에 어울려 살아가는 데 남의 정서 안정을 돕는 일로써 자기 정서의 안정을 꾀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며, 남의 정서를 해치면서까지 자기 정서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남의 정서를 해치지 않고 자신의 안정을 추구하기를 종용하며, 만일 이 기대에 어긋나면 적절한 제재를 가한다. 이같은 권선징악의 압력 속에서도 이를 좇지 않고 남의 눈을 속여 가며 악이라고 할 만한 짓을 버젓이 하는 자들이 있다. 말하자면 위선자라고 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표면상으로는 사회에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남을 해롭게 하여 자기 만족을 얻는 부류들이 그들이다. 고아 구호 사업을 한답시고 구호금을 얻어다가 사복을 채우는 자, 육영 사업을 한답시고 학교를 설립해 걷어들인 수업료를 개인 기업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려는 자 등을 말한다. 옛날에 예수가 규탄한 위선자는 선을 지나치게 떠벌리고 내세우며 실행하는 척하는 자였지만, 오늘날에는 그 정도를 넘어서 표면상 선을 가장하고 악한 짓을 자행하는 자를 위선자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위선자와 사기꾼은 어딘가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남의 눈을 속인다는 것, 겉으로는 번드레하면서 실제로는 남을 울려 자기 충족을 얻으려는 점이 같기 때문이다. 하기야 남을 속여 의외의 이득을 보는 것이 무료한 우리 생활에 웃음을 가져다주는 자극제 역할을 하는 수도 없지 않다. 봉이 김선달이 강물을 팔아먹는 사기 행각의 유머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같은 풍조도 도에 지나치면 사회 불안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은 뻔하다. 오늘날 상거래에서 보증 수표가 아니면 신용하기가 어렵고, 물건을 사는 사람이 으례 가짜, 진짜 여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더욱이 신문은 수출업자들이 견본과 다른 상품을 보내 신용을 잃어 수출이 감소한다고 보도한다. 일단 우리 사회에 이러한 풍조가 그대로 만연되고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리 풍조가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무릇 한 개인의 고집적인 행동 경향이나 한 사회가 갖는 최빈적 성격은 그 개인이나 그 사회가 걸어온 역정과 짊어진 문화 양식 그리고 당면한 상황의 특이성에서 그 기원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사기 풍조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 즉 어찌하여 우리 사회에 사기 행위가 많은가를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특유성에서 더듬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피압박 민족으로 강대국에 의하여 제압 당해 왔기 때문에 늘 방어적 태세를 취하며 살아왔다. 더군다나 국내적으로는 오랜 봉건 전제 정치의 굴레 속에서 대부분의 백성들이 가렴주구를 당해 왔으며, 아직도 이같은 잔재는 완전히 일소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계속적인 억압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울분과 열등감 그리고 공격적 태도를 직접적으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버릇을 갖게 된 듯싶다. 국민적 성격을 보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심히 신경증적이며 내향적이고, 억압된 감정과 불안, 공포 그리고 여러 가지 면상이 착잡하게 혼합되어 때로는 의외로 잔인한 사디슴(가학증)을 노출시키고, 하찮은 일로 옥신각신하는 히스테릭한 협량 (좁은 도량)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불안한 성격이나 욕구불만 상태에서는 누구나 이를 극복하고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흔히 여러 가지 방어기제적 행동을 취한다. 정정당당하게 제 실력을 발휘하거나 타인을 지배하여 목적을 성취하지는 못하고, 간접적 방식으로 타인을 괴롭혀서 울분을 풀고 쾌재를 불러 본다. 또 비방과 음모로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사기와 모함으로 남을 괴롭혀 자기 만족감을 얻는다. 이것은 왜곡된 공격 또는 간접적인 자아 방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사기적 행위가 많다고 한다면, 이는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갖게 된 일반적 욕구 불만적 성격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민족적 성격이라 볼 수 있는 욕구불만 상태나 열등감은 우리 민족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갖게 하였다. 욕구 불만을 극복하고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스럽게 대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처음의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버릇이 생겼다고나 할까. 어느 운동 감독의 말이지만, 우리 선수들이 국제 시합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오는 경우 그곳 운동 전문가의 말인 즉 자기 나라 선수들이 기술이나 체력으로는 오히려 월등한데도 결국 지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한국인의 굳센 투지에 의한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감독 자신도 동의하는 바다. 이같은 불굴의 정신은 우리 나라에서 비단 운동 선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일반적인 성격일는지도 모른다. 오랜 압박과 빈번한 침략을 받아 오면서도 우리가 순수성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지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굴의 정신도 사태 파악에 무디고 깨끗한 승부 정신이 결여된다면, 그야말로 이전 투구의 추태를 보일 뿐이라 하겠다. 이는 못난이의 만용으로 그칠 것이다. 사회 규범도 아랑곳없이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에서 우리는 사기 행위가 자라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온상을 본다. 깨끗한 승부 정신을 겸비하지 못한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철저히 경계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같은 억지와 철면피적 행위가 불굴의 정신이라는 탈을 쓰고 일을 그릇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협동 정신과 깨끗한 승부 정신이 강조되어야지, 무슨 짓을 하든 권력만 잡고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사회를 거짓과 위선으로 병들게 할 뿐이다.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이다. 우리는 6.25동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전란을 경험하였다. 아직도 우리는 언제 전투가 재개될지 모르는 준전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으며, 동, 서 양 진영의 냉전의 최전선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자유당, 민주당 정권에 이어 5.16혁명으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동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정치적 불안정 상태에서 국민들은 백년대계는커녕 몇 년 앞을 내다보는 생활 계획마저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 때문에 장기 기업 계획이나 장래를 내다보는 안정된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 때문에 장기 기업 계획이나 장래를 내다보는 안정된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는 그날 그날의 호구지책으로 찰나주의, 향략주의만이 성행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백만의 북녘피난민에 대한 적극적인 구호 대책이 거의 없었으며, 독재자의 앞잡이로 무뢰한들이 횡행하여 사회 질서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국민들이 먼 앞날을 바라보는 전망을 지닐 수가 없다. 이에 따라 좁은 전망 속에서 향락적, 충동적 생을 영위하려는 경향이 성행하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물건 하나 팔아 터무니없이 팔자를 고치려는 사기 매매 행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해방 후 외래 문물이 범람과 편중적인 외국 여행 등으로 우리 사회에는 고도의 소비 문화가 유입되었다. 그에 비해 우리의 평균 국민 소득은 그와 같은 소비 생활의 수준을 뒷받침할 정도로 많은 증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 만연된 소비 풍조 속에서 사람들은 저소득 국민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생활비 지출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비정상적인 소득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생활 수준으로 인하여 위선이든 사기든 거리낌없이 아무 짓이나 다하며 살아가는 풍조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위선적 풍조에 관해서는 우리의 오랜 형식주의적 생활 방식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형식만 갖추면 그만이고 내용이나 실질은 문제삼지 않는 경향이 관혼 상례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날의 관혼 상례는 허례에 불과할 뿐 의식이 지녀야 할 성실성, 존엄성까지도 완전히 폐기해 버린 감이 들 정도다. 형식이나 체면만 지키기 위해 의식이 있지, 참된 의의나 내용의 충실을 추구하려는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표리 부동의 이중성으로도 발전하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예식을 성대하게 베푸는 이면에는 허영적 형식으로 많은 축의금을 거두려는 실속이 있다. 표리 부동의 이중성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관직을 노리는 경우 겉으로는 국민의 공복으로 봉사하겠다고 내세우지만, 실제 추구하는 것은 관직이 지니는 이권적 가치에 있다. 합리적으로 내세우는 주장 뒤에는 반드시 숨은 야욕이 따로 있는 것이다. 흉칙한 야심가일수록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더욱 미화시킨다. 이러한 이중성이 바로 위선을 발효시키는 좋은 터전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우리 사회에 이러한 악당들이 자라나게 하는 간접적 요인으로서 생각되는 것은 국민들의 고발 정신의 결핍과 비판 정신의 부족이 아닌가 싶다. 같은 사회에 살면서 사회를 좀먹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직접 자기와 이해 관계가 없다고 해서 눈감아주는 미덕(?)이 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신사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옆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는 소매치기를 보고서도 주제 넘는 고자질꾼으로 몰리거나 보복 당할까 두려워 짐짓 모르는 체한다. 물론 도리어 보복을 생각하는 소매치기도 문제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는 무엇을 뜻하는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 결여로 볼 수밖에 없다. 사회 참여 의식의 희박성이다. 이러한 풍토가 사기 행위가 위선이 우리 사회에서 무성하게 자라나게 하는 비료가 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 우굴거리는 가짜 꿀 장수나 길가의 네다바이꾼, 가짜 인삼 장수에서부터 점잖은 위선적사회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고발해서 뽑아 내는 국민 운동이라도 전개시켜야 하리라 본다.
"196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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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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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가르칠 수 없는 것
우파시냐드 시대의 스베타케투라는 어린 소년은 아버지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한 스승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수년 동안 그는 거기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 그는 모든 베다를 기억하였고 그 당시에 접할 수 있는 모든 과학과 학문을 통달하였다. 그는 위대한 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퍼졌다. 이제 누구도 그에게 가르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스승은 말했다. "그대는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스승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이 배워 알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물론 큰 자만감과 에고를 갖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막 마을 어귀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 우달락은 창문으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 보고 있었다. 매우 자만심에 찬 걸음걸이였다. 무거운 머리를 떠받치기라도 하듯 목과 어깨에 너무 힘을 주고 걷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슬퍼졌다. 진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고의 지식에 도달한 사람은 무엇을 알았다는 표시가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스케타케투는 자기 아버지가 매우 행복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되어 돌아왔다. 어디를 가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슬픈 표정을 보았다. 그래서 물었다. "왜 슬픈 표정이신지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에게 꼭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그것 하나를 앎으로 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는 그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그것 하나를 앎으로 해서 모든 고통이 끊겨지는 그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배울 수 없는 그것을 너는 배웠느냐?" 아들 또한 갑자기 슬픈 표정이 되었다. "아니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의 스승에게 돌아가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해라."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순됩니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면 스승께서 어떻게 저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요?" 아버지가 말했다. "그것이 진정한 스승의 기술이다. 그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너에게 가르칠 것이다. 다시 돌아가거라." 할 수 없이 그는 다시 돌아가 스승의 발에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것을 위해 저를 다시 스승님께 보냈습니다. 지금 저는 제가 어디에 있으며 그리고 스승님께 무엇을 물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배워서 알 수 없는 것을 배웠을 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요? 스승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으셨습니다." 그 스승은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 묻기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 너는 미묘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그것은 너무도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내가 너에게 할 수 잇는 일이란 간접적으로 돕는 일밖에는 없다. 이것을 한번 해 보아라. 내가 데리고 있는 적어도 사백 마리 이상 되는 소와 그밖의 가축을 데리고 인적이 끊긴 아주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거라.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가축들과 함께 살아라. 절대로 말을 하지 말아라. 이 가축들은 어떤 말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 침묵 속에 남아 있어라. 사백 마리가 번식하여 천 마리가 되거든 그때 돌아오너라." 스승은 또다시 이렇게 말했다. "숲속으로 가서 혼자 살아라.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말아라. 그곳에서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물들은 너의 어떤 생각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의 학자적인 자만심을 그곳에서 떨쳐버려라." 스베타케투는 스승의 말대로 따랐다. 그는 숲속으로 들어가 가축들과 수년 동안 같이 살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속에 떠돌아다녔다. 똑같은 생각들이 계속 맴돌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지겨워졌다. 스베타케투는 깨닫게 되었다. 사백 마리의 가축과 새와 야생 동물과 나무와 바위와 강과 냇물만 있을 뿐 거기에는 누구와 이야기할 대상은 전혀 없었다. 동물들 앞에서 자만심을 내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쓸모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스베타케투조차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에고의 상태로 남아 있다면 이 동물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을까?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거나 아니면 냇가에서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점차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여러 해가 흘렀고 이제는 자신이 언제 돌아가야 할 것인지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사라졌다.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사라졌다. 어떤 생각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침묵 속에 있게 되었다. 과거는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과거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미래 또한 떨어져 나갔다. 미래라는 것은 단지 과거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이 말했던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그는 단지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동물과 같이 순간에 살고 있다. 그는 이제 한 마리 소가 되었다. 가축이 천 마리가 되었을 때는 가축 자신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가축들은 스베타케투가 스승이 계신 아쉬람으로 데리고 가길 원했다. 그러나 스베타케투가 잊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소들이 이 사실을 알려주기로 결정을 하였다. "자, 이제 이만한 세월로서 충분하다. 우리들이 천 마리가 되었을 때 돌아와야 한다고 그대의 스승이 말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 이제 우리들은 천 마리가 되었다." 그래서 스베타케투는 비로소 동물들과 함께 돌아오게 되었다. 스승은 스베타케투가 천 마리의 가축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자신의 오두막 앞에서 발견하고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저기 천 마리의 짐승이 오고 있다. 저기 스베타케투는 없다." 스베타케투는 이토록 침묵의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는 에고나 자아 의식은 없었다. 단지 한 마리의 가축이 되어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은 그를 맞이하였다. 스승은 환희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스베타케투를 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대에게 말해야 할 것은 없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는데 왜 나에게 왔는가?" 스베타케투는 말했다. "단지 스승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당신의 발을 만지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스승님은 저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 스승은 어떤 것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간접적인 도움만이 가능한 것이다. 직접적인 인도가 있는 곳, 마음에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는 곳에서는 진정한 종교가 싹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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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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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79. 타도! 제국주의 - 5.4 운동 발발(191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19년 3.1운동 발발,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1914년 7월 게르만 족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슬라브 족인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전쟁은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아시아 등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이들 서양열강들의 식민통치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세력변화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해 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독일에 의해 주도된 1차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한 중국은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남에 따라 전승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여러 학교들이 휴교하고 천안문 광장에서는 북경대 교수들이 전승축하 강연을 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가 중국 전지역에 넘쳤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기쁨과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의 이익이 철저히 무시당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이 평화회담에서 윌슨의 '14개조 평화안'이 전후 처리를 위한 원칙으로 제시되었고, 그 평화안의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중국인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중국도 전승국의 위치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중국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제기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으로서는 독일을 비롯한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이권을 되돌려 받으려 했다. 즉,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세력범위와 이익범위 철폐, 외국군대 경찰의 철수, 영사재판권 폐지, 조차지 조계의 반환, 관세자주권 승인 등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기대는 환상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파리회담은 정의로운 세계, 평화로운 세계건설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 패전국 독일이 가지고 있는 이권을 나누어 가지는 자리였고, 전승국들의 이권이나 식민지에 대한 권리는 전혀 양보되지 않았다. 중국측의 요구는 대부분 묵살되었고, 전쟁 전에 독일이 가지고 있던 여러 권리는 일본으로 넘기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군벌정부가 보여준 반민족적인 성향,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전쟁 전에 일본측이 산동과 남만주 등의 이권을 확보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21개조 요구'가 원세개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1917년 이후 일본은 중국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1918년 중국영토 내에서의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 군사기지 설치 등을 승인하는 '중일공동방적협정'을 비밀리에 맺은 것이다.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대표의 요구가 묵살되고 일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 분노는 그들의 이권과 주권을 배앗아가려는 제국주의 열강들을 향한 분노였고, 또한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중국의 군벌세력에 대한 분노였다.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내용이 중국에 전해진 1919년 4월 30일 이후 북경에서는 5월 1일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그 결정에 대한 반대표시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으며, 5월 3일 저녁 각 학교 대표들은 파리 강화회담 반대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5월 4일 오후, 천안문 광장에서는 약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21개조를 취소하라)(청도를 반환하라)(매국노를 타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말 것과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긴 매국노들을 처벌할 것을 외쳤다. 시위대는 그들의 의사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몰려갔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저지당한 끝에 시위대표들이 진정서를 전하는 데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노한 시위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매국노로 지목된 조여림의 집을 습격했다. 그는 군벌정부의 교통총장으로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등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조여림은 이미 도피한 후였다. 시위대는 조여림의 집을 불태웠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중국정부는 학생 30여 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의 타도대상이었던 조여림 등의 매국노들에게 상을 줌으로써 중국인들의 민족감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의했고, 이날의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항의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동맹휴학 사태가 전국에 걸쳐 전개되자 그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정부는 마침내 6월에 들어서면서 시위에 가담한 대학생들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학생의 숫자가 많아져서 북경대학 건물이 임시수용소가 될 정도였다.
시위대의 체포소식이 당시 중국경제의 중심도시인 상해로 번지자 상해의 상가는 항의의 뜻으로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파업했으며, 도시의 창녀까지도 이 항의에 동참할 정도였다. 범죄가 넘치던 상해에서 시위가 행해지던 10여일 동안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해시민들의 애국적인 시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부두 노동자들의 작업거부로 일본 화물선은 화물을 싣지 못한채 항구를 떠나야 했다. 상해의 경제활동이 중단되는 것은 곧 중국경제의 마비를 의미했고 정부도 더 이상 강경책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중국정부는 전국민적인 항의에 굴복하여 매국노로 지목된 조여림 등 3명을 그 지위에서 파면했으며, 파리에 파견되었던 중국대표로 하여금 파리조약을 거부하도록 했다. 5월 4일 북경대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시위는 전국의 많은 국민이 동참하면서 한달여 만에 외국에 굴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군벌정부로 하여금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운동은 우리 나라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침략적인 외세에 대한 전국민적인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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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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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馬放牛(귀마방우) 歸(돌려 보낼 귀) 馬(말 마) 放(놓을 방) 牛(소 우)
상서(尙書) 무성(武成)편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의 주임금을 쳐부수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아침에 주(周)나라로부터 출발하여 상(商)나라를 치러 갔었다. 그 네쨋 달 초사흗날 왕은 상나라로부터 와서 풍(豊)에 이르러 무력(武力)을 거두고 문교(文敎)를 닦아, 말은 화산의 남쪽 기슭으로 돌려 보내고 소는 도림의 들에 풀어놓아(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천하에 다시 쓰지 않을 것을 보이었다. 歸馬는 군용(軍用)으로 쓰던 말을 산으로 돌려보내어 놓아 주었음을 뜻한다. 歸馬放牛 란 곧 전쟁에 사용할 말과 소를 숲이나 들로 돌려 보내어 다시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이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음 을 말한다. 어떤 학자는 남북이 통일되면, 남북한 군사력의 70%정도가 감소되리라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정말 탱크와 장갑차는 논밭을 갈고, 군함은 원양 어업에 닻을 올리며, 전투기는 총알 택시처럼 한라에서 백두까지 날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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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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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3. 끔찍하고 잔인했던 어린이들 이야기
드라큘라의 모델은?
19세기의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소설 "드라큘라"의 소재를 찾아낸 것은 대영박물관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스토커는 동유럽의 전승 민화 원고를 발견했다.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전투적인 군주 부라도 공에 대해 쓴 민화였다. 루마니아의 전설에 따르면 이 가학적인 군주는 사람을 꼬챙이에 끼워서 문 밖에 늘어 세워 놓고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고, 식사의 한 코스에 희생자의 피를 흘려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힘이 몸에 생긴다고 믿었다. 부라도의 범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새빨갛게 구운 쇠꼬챙이에 적이 된 친구나 자기에게 부정을 저지른 여자들을 끼워 놓고 살가죽을 벗겨냈다. 또 자기 자신을 감금하고 쥐나 새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며 즐겼다. 산 위에 있는 부라도의 별장은 드라큘라 성이라고 불렸다. 스토커의 소설 제목은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러의 모델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소설의 무대에 대한 힌트는 친구인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에게서 얻었다. 그가 스토커에게 트란실바니아의 흡혈귀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스토커는 트란실바니아로 찾아가서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잠겨 있는 산들, 새벽녘의 안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한 성에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드라큘라"는 1897년 다갈색 표지로 출판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소설 덕분에 괴기 공포 소설의 인기가 부활하여, 오늘날의 책이나 영화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괴기 소설의 대표격인 "드라큘라"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소설이 있었다. 메어리 셸리가 쓴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1816년 6월 스위스의 제네바 근교에서 며칠 밤에 걸쳐 열린 '이야기를 만드는 모임'에서 생겨났다. 19세기의 메어리의 남편인 24세의 퍼시 비슈 셸리, 18세의 시누이 클레어 클레어몬트(애인인 바이런 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28세의 바이런 그리고 그의 주치의인 23세의 존 폴리드리였다. 비가 계속 내리던 일요일에 바이런이 유령 이야기를 창작해서 즐기자고 제안했다. 어느 날 밤 메어리는 난로 옆에서 셸리와 바이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감이 번뜩인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당시의 과학 연구의 중심이 전류였기 때문에 이 두 시인은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열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전기를 통해 시체를 되살려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늦게야 두 사람의 토론은 끝났고 메어리 셸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상에 잠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31년판의 "프랑켄슈타인" 속에서 메어리 셸리는 그때 번뜩였던 영감을 선명하게 상기하고 있다. "나는 보았다. 신경이 예민하게 모아졌고 감은 눈 속으로 그 광경이 뚜렷이 떠올랐다. 사악한 작업에 전념하는 창백한 얼굴의 연구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광경이... 소름이 오싹 끼치는 남자의 시체가 길게 누워 있고, 강력한 기계 장치의 힘으로 무엇인가 천천히 생명의 조짐을 보이고, 그 생명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섬광처럼, 그리고 선명하게 그 아이디어는 나의 뇌리에 번뜩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멋진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그날 우선 '11월의 어느 음울한 밤의 일이었다'고 쓰기 시작했고, 그 다음은 비몽사몽간 꿈에서 본 을씨년스러운 공포 이야기를 계속 써나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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