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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 제829호
2011.11.27 (음 11.3)/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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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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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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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2012신춘문예
알립니다 2012신춘문예 공모 |
● 원고 마감 2011년 12월15일(당일자 소인 유효) ● 보낼 곳 광주광역시 북구 제봉로 324 전남일보 문화체육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500-758) ● 당선작 발표 2012년 1월 1일자 ● 심사 본보가 위촉한 권위있는 문인들이 심사하며 명단은 당선작 발표와 함께 공표 |
전남일보사는 시ㆍ단편소설ㆍ희곡ㆍ동화 등 4개 부문에 걸쳐 2012년도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전남일보 신춘문예는 그동안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면서 역량 있는 문학도들의 등용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전일 신춘문예 출신 작가들은 이 지역과 한국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과감한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한국 문단을 이끌어갈 예비 문인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 원고 마감 2011년 12월15일(당일자 소인 유효)
● 보낼 곳 광주광역시 북구 제봉로 324 전남일보 문화체육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500-758)
● 당선작 발표 2012년 1월 1일자
● 심사 본보가 위촉한 권위있는 문인들이 심사하며 명단은 당선작 발표와 함께 공표
● 유의사항
응모작은 다른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작품이어야 함
겉봉에 응모 부문 기입하고 작품의 앞ㆍ뒤에 주소, 성명(필명일 경우 본명 명기), 나이, 전화번호 등 표기 바람
당선 후 표절 또는 중복 입상이 밝혀지면 당선을 취소함
당선작 없는 가작의 경우 당선작 상금의 반액을 지급함
응모 작품은 반환하지 않음
※이밖에 자세한 사항은 전남일보사 문화체육부(062-510-0326)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모집 부문 및 상금 |
단편소설 원고지 80매 안팎 300만원 |
시 3편 이상 100만원 |
희곡 원고지 80매 안팎 100만원 |
동화 원고지 30매 안팎 100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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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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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으로만 치우치는 어리석은 무리의 미덕은 결코 영속되지 못한다. 독서를 경멸하고 과학을 경멸한다. 예술을 경멸한다. 자연을 경멸한다. 정신을 단돈 몇 푼으로 처리하는 그런 국민은 이미 존재를 유지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 러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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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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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갚음
진나라 무제가 높은 관직을 내렸지만 이를 고사한 신하가 있다. 그는 자신을 까마귀에 비유하면서 “까마귀가 어미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만 봉양하게 해 달라” 하였다.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 나오는 이야기다. 까마귀는 부화한 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이후 새끼가 다 자라면 먹이 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를 먹여살린다고 한다. 그래서 까마귀를 ‘되돌려(反) 먹이는(哺)’ 새라는 뜻을 담아 반포조(反哺鳥)라 이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반포지효(反哺之孝)는 어버이의 은혜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도를 뜻한다.
어제치 <한겨레>에 실린 ‘판검사 돼라 닦달에… 부모 기대 부담감에… 빗나간 교육열, 끊이지 않는 비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반포지효를 떠올리게 했다. ‘공부 스트레스’로 부모를 시해하는 원인을 ‘교육병리의 한계’로 다룬 전문가들의 분석에 공감했다. 아이들의 ‘극단선택’은 상당부분 어른들의 책임이다. ‘1등 지상주의, 성적 중심주의’ 사회는 어른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자식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거부할 자식 또한 없을 것이다. 부모의 빗나간 기대감은 자식의 앙갚음을 불러온다. 앙갚음은 ‘남이 저에게 해를 준 대로 저도 그에게 해를 줌’(표준국어대사전)이다.
보복을 뜻하는 앙갚음의 대척점에 안갚음이 있다. ‘안’은 마음을 뜻한다. 안갚음은 마음을 다해 키워준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자식이 커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 곧 반포지효를 이르는 말이다. 아이들의 행복과 자신의 기대 충족 욕망을 혼동하며 자식 닦달하는 사람이 흔한 세상이다. 하지만 ‘이웃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잘살면 된다고 여긴다면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부모도 적잖다. 자식에 대한 빗나간 사랑은 아이들을 엇나가게 할 수 있다. 받침 하나 차이로 뜻 달라지는 앙갚음과 안갚음처럼 말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든 / ~던
"너는 남편이 어떤 말을 해줄 때 가장 행복하든?" "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하고 나니 시원하든?"
과거에 어떤 일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 결과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물어볼 때 '-든' 꼴을 쓰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던'을 쓰는 게 옳다. 이 '던'은 "네 동생은 별일 없더냐?"에서의 '-더냐'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더 친근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위의 예문은 "너는 남편이 어떤 말을 해줄 때 가장 행복하던?" "그 사람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하고 나니 시원하던?"이라고 쓰는 게 바르다.
"저이가 네가 얘기했든 바로 그 사람이냐?" "남이야 책을 읽던 말던 무슨 상관이람."
위 예문의 '-든'과 '-던'도 사람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들이다. 이 경우 과거를 나타낼 때는 '-던'을 쓰고, 선택이나 나열을 나타낼 때는 '-든'을 쓰는 게 옳다. 첫째 예문은 과거에 청자(聽者)가 화자(話者)에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므로 '네가 얘기했던'으로 쓰는 게 바르다. 둘째 예문은 '읽는 것'과 '마는 것' 중 선택의 의미가 있으므로 '책을 읽든 말든'으로 쓰는 게 바르다. 이때의 '-든'은 '-든지'와 의미가 같다.
암울과 우울
마음에 근심이 있어 가슴이 답답하거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우울하다'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말 그대로 분위기나 상태, 심정 등을 나타낼 때 쓰인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우울'이 앞날에 대한 전망이 좋지 않거나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경우에까지 쓰이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의 전망이 아주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극심한 광고 판매 부진 등으로 수익성이 날로 악화해 이대로 가다가는 서비스를 포기하는 사업자가 나올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만 가득하다." "미국 경제를 끌어내릴 악재는 더 있다. 주택경기가 그것이다. 최근 발표된 주택 관련 지표들이 이 같은 우울한 전망을 지지하고 있다."
이렇게 사용되는 '우울한'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는 '암울하다'가 있다. 예문의 '우울한'은 '암울한'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막혀서 답답하다'는 울(鬱)은 두 단어에 공통된다. 암(暗)은 '어둡다'는 뜻이고, 우(憂)는 '근심하다'는 뜻이므로 이들 의미에 맞춰 사용해야 한다. 암울한 전망 때문에 우울해지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다. '우울'은 '전망'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한마음 / 한 마음
ㄱ. 한동네, 한마음, 한목소리, 한집안
위에 예시한 단어들은 모두 '한'과 결합하여 이뤄진 복합어이다. '한'은 본래 하나를 뜻하는 수관형사인데 그 의미가 확장되어 '같은'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동네'는 하나의 동네가 아니라 '같은 동네'를 뜻하고, '한마음'은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같은 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그 뜻에 따라 '한'의 문법적 성질을 달리 규정하고 있다. 즉, '하나'를 뜻할 때에는 관형사, '같은'을 뜻할 때에는 접두사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처리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다분히 문제를 안고 있다. 접두사는 예외 없이 다음 낱말과 붙여 써야 하는데, '한'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가령, '한 공장, 한 자동차, 한 학교, 한 회사' 등에서는 '한'이 '같은'의 뜻일 때라도 다음 말과 붙여 쓰기 어렵다. 실제로 이 말들은 ㄱ의 경우와 달리 사전의 표제어로도 올라 있지 않다. 이는 한 단어가 아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은 뜻의 분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관형사로만 보는 것이 타당하다. ㄱ의 경우는 파생어(접두사+명사)가 아니라, 합성어(관형사+명사)로 보는 것이 옳다. 이는 '새'가 접두사가 아닌 관형사임에도 '새날, 새댁, 새바람, 새순'의 합성어를 만드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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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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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虛)의 장(章) - 구상
제군(諸君)! 이 소식을 알자면 먼저, 마음을 욕망의 덮개와 불안의 밑이 없는 항아리로 비워놓게!
그럴 양이면 아롱진 바람들과 고름 낀 인업(因業)들이 민들레 마른 꽃술인 양 스러져 흩어질걸세. 애증(愛憎)의 동아줄도 풀어질걸세. 선악의 철창도 열어질걸세. 신화의 망루(望樓)도 무너질걸세. 마침내 그대는 화평(和平)으로 해방된다는 말일세.
제군(諸君)! 허(虛)란 실상 실유(實有) 그것일세. 어둠에서 빛으로 불에서 물로 진창에서 꽃밭으로 식료(食料)에서 변통(便痛)으로 바람에서 돌 속으로 사람에게서 짐승에게로 물고기에서 땅벌레에게로 죄수(罪囚)의 눈빛에서 간수(看守)의 눈빛으로 여왕(女王)에게서 걸인(乞人)에게로 시(詩)에서 과학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봄 여울에 눈 녹아 흐르듯 흐르며 또한 동양화의 여백(餘白)같이 본래(本來) 있어 생사(生死)와 명멸(明滅)을 낳고 시간과 공간을 채워서 남음이 없지.
그래서 허(虛)는 존재(存在)와 생성(生成)을 혼연(渾然)케 하고 운명과 자유를 병존(竝存)케 하며 모든 실존(實存)의 개가(凱歌)를 울려 저 허허(虛虛)한 창공(蒼空)을 스스로의 안에서 대응(對應)시키는 조화(造化) 속일세.
제군(諸君)! 그러나 이 경지는 막다른 심연(深淵)의 축복에서 드맑은 정상(頂上)에 이르른 생(生)의 화해(和解)된 인지(認知)라는 것을 납득(納得)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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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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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춘분에는 - 김종원
오늘 같은 춘분(春分)에는 봄나들이 가는 거여
친구랑 손을 잡고 아차산을 가는 거여
춤추는 봄바람 따라 설렁설렁 걷는 거여.
오늘 같은 반공일엔 나들이를 하는 거여
나들이옷 차려 입고 하늘공원 찾는 거여
봄눈의 황홀한 눈짓 봄을 따라 나는 거여.
오늘 같은 좋은 날은 임을 찾아 가는 거여
빨래 냄새 풋풋한 새 옷 입고 가는 거여
설레는 여의나루역 한강물도 춤출 거여.
(200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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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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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 신창호
구름 속에 별 숨은 캄캄한 밤중
호올호올 반딧불 날아갑니다.
어둠이 슬금슬금 겁이 나 슬금슬금
자그만 반딧불이 큰 어둠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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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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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4장.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1. 인간의 권위에 대하여
앞장에서는 인간이 동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 즉 인간과 짐승에게 공통되는 부분과 인간 문명의 성질에 미친 그 영향에 관해서 고찰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성과 인간의 권위 전반에 걸친 완전한 사고방식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다. 옳지, 인간의 권위... 이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인간의 권위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역설해 둘 필요가 있다. 또 그것이 무엇으로 해서 성립되어 있는가를 알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점이 혼란되어 알 수 없게 되며, 인간의 권위 그 자체를 놓쳐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20세기, 특히 현재와 앞으로 수십 년 동안에 인간이 그 권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극히 뚜렷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도 동물이라고 자네가 주장하는 것은 좋다고 치고 자네는 인간이 동물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동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대답한다. <그야 두려워 할 나위도 없지요>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 뿐이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동물계에는 인간 이상으로 훌륭한 것들이 여러 가지로 있다. 말처럼 생김새도 인간보다 훌륭하고 고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놈도 있고, 또 사자처럼 늠름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놈, 개처럼 후각과 양순함과 충성하는 정신에 뛰어난 놈,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력을 가지고 있는 놈, 전서구처럼 방향의 감각이 예민한 놈, 개미처럼 검소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능률적으로 일 잘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놈, 비둘기나 사슴처럼 기질이 순한 놈, 소처럼 강한 인내력과 만족감을 가지고 있는 놈, 종달새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 앵무새나 공작처럼 몸차림이 아름다운 놈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들보다는 원숭이가 내 마음에 든다. 내 마음에 드는 무엇인가가 원숭이에게는 있다. 그러나 그 원숭이보다는 인간인 편이 더 좋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있는 원숭이의 영리함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미는 인간보다도 이성적이어서 인간보다 훈련된 동물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안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개미나 코끼리가 거대한 잠망경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변광성을 발견하거나 일식을 예언하거나 할 수 있다면, 또는 물개가 미적분학을 발견하거나, 바다표범이 파나마 운하를 뚫을 수가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들을 세계의 주인공 또는 창주주로 모시고 그들에게 선수권을 넘겨줄 생각이다. 그렇다. 분명히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랑해도 좋으나 그렇다면 자랑해도 좋도록 해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권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을 발견해 내는 일에 우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 인간의 권위라는 것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이미 암시한 것처럼, 중국 문학의 찬미의 대상인 자유인의 네 가지 특징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정정하는 유우머 감각, 마지막으로 행위의 변덕스러움과 분방함이다. 이 네 가지를 합하면 이른바 미국식 개인주의의 교의를 중국식으로 뼈대를 바꾸어 놓은 것이 된다. 중국 문학에서 자유인을 그려낸 이상으로 개인주의자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낼 수는 없다. 미국의 개인주의를 대표한 최대의 문학적 선수인 월트 휘트먼 자신이 <위대한 한인>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확실히 우연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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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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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명상록
사색하는 생할인으로서, 영원히 낡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아우렐리우스의 고매한 양심의 목소리
제4장.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전원이나 해변이나 산속에 있는 집을 은신처로 삼기를 원한다. 그대도 이러한 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고 그대 자신 속으로 은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도 자기 자신의 영혼 속보다 더 평화롭고 온갖 근심 걱정으로부터 풀려나는 한적한 은신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것에 의지하기만 하면, 곧 완전한 안정을 가질 수 있는 사상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마음의 안정이 바로 정연히 정리된 정신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마음속의 은신처에서 조용히 휴식하며 자신을 쇄신하라. 그리고 그대의 생의 원칙은 간결하고 근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곧 그대의 영혼은 맑아지고 그대가 주목하는 것들에 대한 불만이 씻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불만은 무엇인가? 인간의 악에 대한 불만인가?
이성이 있는 모든 동물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존재하며, 서로 인내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과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중에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간에 적의나 의심, 원한과 갈등 때문에 무덤 속에 들어가고 재로 변했는지를 기억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로부터 그대가 할당받은 일을 그대는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자만이 있어서 사물의 우연한 집합만이 있을 뿐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상기해 보라. 그리고 세계는 일종의 정치적으로 묶여진 결합체임을 증명하는 이론을 상기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이 그대를 속박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신이 초연히 분리되어 그 자신의 힘을 인식하기만 하면 호흡이 순조롭든 격렬하든 간에 정신은 호흡과 섞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고통과 쾌락에 대하여 지금까지 듣고 긍정해온 모든 것을 상기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부질 없는 명예욕이 그대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대는 모든 일이 얼마나 빨리 잊혀지는가를 생각하고,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간 시간 속에 영원이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과, 갈채의 허무함과 우리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얼마나 공정하지 못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얼마나 좁은가를 생각하라.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찾을 것이다.
지구 전체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며, 그 속에 살고 있는 그대의 주거지는 작은 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또한 그대를 찬양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리하여 결국은 그대 자신의 작은 영지로 물러갈 것을 잊지 말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혼란시키지 말며 긴장하지 말라. 또한 자유로워야 하며,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죽어야 될 숙명을 짊어진 한 피조물로서 인생을 관조하라.
그대 주위에서 그대의 그대의 관심을 끄는 것에 대하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하라. 첫째, 사물은 밖에 있고 고정된 것이므로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마음의 동요는 오직 마음속의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 둘째로, 눈앞에 보이는 만물은 순식간에 변화하여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러한 우주의 변화를 이미 얼마나 많이 목격햇는지를 항상 명심하라. 우주는 변화이며, 인생은 관념일 뿐이다.
죽음의 본질은 출생과 같은 것이며, 자연의 신비이다. 오직 동일한 원소의 결합과 동일한 원소의 분해가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것을 부끄럽게 여길 일이 못된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 인체의 구조의 원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제 분수에 맞는 적당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필연적인 일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무화과 나무에서 수액이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간에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라. 그리고 그대의 이름조차 잊혀지게 될 것이다. 사람을 본래의 상태보다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생애를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며, 밖에서든 마음속에서든 그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당성을 띠고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가 관심 깊게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것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만 사물의 인과관계적인 지속성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게 할당할 가치를 분배하는 신의 섭리로부터 나오는 것 같은 공정하고 정당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선하다는 것과 관련하여 누구든지 그것이 선한 일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 어떤 행동을 하든 이 점을 명시하라. 그대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나, 그대에게 해를 끼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말고, 진리에 비추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그대는 지금까지 한 부분으로서 전체 속에 존재해 왔을 뿐이다. 이제 그대는 생성한 것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대는 생성의 본원 속으로 귀속될 것이다. 같은 제단 위에 떨어지는 유향의 낱알들일지라도, 먼저 떨어지는 것과 나중에 떨어지는 것이 있다. 그러나 결과로 본다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대가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죽음은 언제나 그대 곁에 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생명과 능력이 있는 동안, 선한 일을 행하라.
이웃사람이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스스로 정의롭고 부끄럼 없는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간에 있어서나 수고에 있어 크게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웃 사람에게서 약점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기의 길을 걸어가라.
죽은 후의 명성에 연연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억해 줄 사람도 얼마 안 있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 못하는 사람이다. 또 이들의 뒤를 이을 사람도 곧 죽게 되고, 마침내는 이를 칭송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바보같은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다가 그 모든 기억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깊이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설사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또 기억 자체가 영원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은 자에게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아니, 단순히 죽은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말이다. 칭송이 확실한 효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대가 지금 이성보다 다른 일에 집착하고 있는 나머지, 자기에게 주어진 자연의 선물을 거부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어떤 것이든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울 뿐이지 찬탄이 그 본질의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찬탄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는 것도 없고, 또 나빠지는 것도 없다. 나는 대중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일반적인 물건이나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법칙, 진리, 자비, 겸손, 예의 등도 그러하다. 이러한 것들 속에서 찬탄을 받았다고 해서 아름다와지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있는가? 에메랄드는 찬탄받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가? 또 황금이라든가, 상아, 하프, 관목 등이 그 미를 잃겠는가? 쓸데없이 헤매지 말고 어떤 행동을 하든 진리를 존중하고 어떤 인상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라.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면 많은 일에 파묻혀서는 안된다고 철학자는 말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꼭 해야 할 일, 사회인으로서의 그대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실천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야만이 훌륭한 행동을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안정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만 하는 데서 생기는 마음의 안정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만 물리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여가를 갖게 되고 불안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행위의 한 단계에 이를 때마다 이것은 불필요한 행동이 아닌가?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또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도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대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았는가? 그러면 이번에는 이런 일들을 보라.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오직 평온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가?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밖에 안된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상관하지 말아라. 태초부터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주로부터 그대에게 부여된 것이고 그대의 운명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대의 인생은 짧다. 그대는 이성과 정의의 도움을 얻어 오늘을 활용해야만 한다. 긴장을 풀었을 때에도 진지하라.
기억하는 우리들이나 기억되는 것이나 모두가 순간의 일이다.
만물은 변화에 의하여 생성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우주의 본성은 지금 존재하는 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를 다시 만들어내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라.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장차 존재하게 될 사물의 씨앗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대지와 자궁에뿌려지는 씨앗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통속적인 편견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그대는 얼마 안있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아직 소박하지 않으며, 온갖 번뇌로부터 해탈하지도 못했으며, 외부로부터 해를 입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직도 모든 사람에게 자비롭지 못하며, 그대는 아직도 정의로운 행동을 위해서만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주 안에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우주에 대한 문외한이라 한다면, 우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 또한 문외한이다. 사회적인 이성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자는 도피자이다. 이해의 눈을 감은 사람은 소경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생활에 유용한 모든 것을 지닐 수 없는 사람은 거지이다. 이 세상에서 야기되는 일에 불만을 느끼고 우리들의 보편적인 본성인 이성으로부터 물러나 이성을 포기하는 사람은 우주에 생긴 종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본성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대 자신도 탄생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을 유일한 이성적 동물의 영혼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자는 국가로부터 떨어져나간 보잘것없는 하나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대의 육체라는 껍질의 변모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그대 속, 악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능력이 존재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능력이 그런 생각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면 만사가 순조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가장 가까운 것, 즉 덧없는 육체가 깊은 상처를 입거나 화상을 입고 곪아 썩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일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부분만은 냉정해야 한다. 또한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자연에 위배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자연에 부합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일어나는 일은 자연에 합당한 것도, 자연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이를테면, 갖가지 사건으로 형성되어진 강과 같고, 그 흐름은 격렬하다. 어떤 사물이든 눈에 띄었는가 하면 어느새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이것 또한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사물의 연속에 있어서, 뒤에 오는 것은 선행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은 단순히 필연적인 순서에 따라 분리된 사물을 그저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이 조화를 잘 이루며 결합되어 있듯이 앞으로 존재하게 될 사물들 역시 단순한 연속에 그치지 않고 서로 놀라운 연관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죽어서 무덤 속에 있지만 과거에는 환자들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많은 의사들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점성가들이 남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죽어갔는가를,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과 불멸에 대하여 끝없는 논쟁을 벌이다가 죽었는가를, 얼마나 많은 장군들이 수만명을 살해하고 죽고, 얼마나 많은 폭군들이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며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세하며 폭력을 휘두르다 죽어갔는가를, 또 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폐허로 변했는가를 생각해 보라. 또한 그대가 일찌기 알고 있던 사람들을 상기해 보라. 이 사람은 그 사람을 묻어주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묻힌다. 이것도 잠시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인간사란 얼마나 덧없고 무상하며, 어제의 조그마한 점액이었던 것이 내일은 미이라나 재로 변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짧은 인생이나마 자연에 순응하며 살다가 만족 속에서 여생을 마쳐야 한다. 익은 올리브가 자연을 찬양하고 지금까지 키워준 나무에 감사해 하면서 떨어지는 것처럼.
끊임없이 파도에 부딪혀도 꿋꿋하게 버티며 노여운 물결을 다스릴 줄 아는 바위처럼 살아야 한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얼마나 불행한가? 아니다. 도리어 이러한 일이 나에게 닥쳐왔다 하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으며, 현재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며 미래로 인해 고심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경우에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누구에게는 행복이 되는 것이, 누구에게는 오히려 불행이 되는가? 어떤 일이 자기의 본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불행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대는 본성의 의도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의 올바른 행동을 방해하는가? 즉,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현명하고, 사려깊고, 솔직하고, 겸손하고, 자유롭고, 그 밖의 인간본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는가? 그대가 비탄에 빠질 경우, 이것은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꿋꿋하게 버티고 견디어내는 것이 행운이라는 원리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지름길로 달려라. 지름길은 자연스런 것이다. 지름길은 모든 것을 가장 건전한 이성에 따라 말하고 행하게 한다. 지름길은 고난과 투쟁 뿐 아니라 모든 농간과 속된 허세로부터 그대를 해방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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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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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학생들의 보수성
4.19 직후 학생들의 정치 참여 의식이 한창 고조되어 있을 때, 전용신은 영국의 아이젠크 척도로 이를 따져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학생들의 정치적 태도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아이젠크 척도란 영국인이 갖고 있는 모든 정치적 태도를 요인 분석하여 보수적이냐 급진적이냐라는 R차원과, 강경하냐 온건하냐라는 T차원으로 측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R차원에서 영국 각 당원들의 평균치를 잰 결과에 비교해 보면, 4.19 당시 우리 학생들의 정치적 급진성은 영국의 보수당원 정도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청년층이나 학생층은 급진적이라고 골치 앓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학생들이 지나치다는 견해를 흔히 말한다. 그러나 영국인의 표준치와 비교해 보면, 우리 학생들은 오히려 보수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것을 좀더 생각해 보기 위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서 어떻게 발달되는가, 보수, 급진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이젠크 이론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학생들의 보수성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아이젠크는 하나 하나의 사회 현상이나 이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해 사람마다 특수한 의견이 있고 반응이 있지만, 비슷한 사건이나 연관되는 것에는 거의 동일한 의견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관습적인 견해를 "의견"이라 하고, 이들 관습적인 의견들이 여러 가지 뭉쳐져 더욱 일반적 견해를 형성할 때 이를 "태도"라고 규정한다. 민족주의, 스파르타식 교육관, 산아 제한론, 국유화 정책 등이 이런 의미의 태도들이다. 아울러 그는 이들 태도들이 합쳐져 어떤 종합적인 사회 문제에 관한 견해를 이룰 때 이를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어떤 차원이 있는가. 아이젠크는 영국의 여러 정당들의 주장과 국민의 사회적 태도를 요인 분석해 보수, 급진 차원과 강경, 온건 차원으로 나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전제주의 대 자유주의가 후자라며, 보수주의 대 사회주의가 전자이다. 보수, 급진 차원에서 보수적 경향은 "국유화는 비효율적이다", "종교 교육은 강제 시행되어야 한다.", "사형 제도는 있어야 한다"와 같은 견해를 말한다. 이에 비해 급진적 경향은 "사유재산 제도 철폐", "일요 예배의 무의미론", "평화를 위해서는 국가 주권도 버려야 한다"와 같은 견해들이다. 강경, 온건 차원에서의 강경한 쪽은 공개적으로 공격 행위나 성적 자유를 주장하며, "죄짓는 자는 볼기를 쳐야 한다", "아동 교육에 매가 없을 수 없다", "시험 결혼제가 좋다", "이혼은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반면 온건한 쪽은 평화주의적이며 윤리, 종교의 제약을 준수하고 인정하며, 종교와 종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산아제한의 불법화, 사형제 금지, 매질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운다. 아이젠크는 R차원의 영국인 평균치 7.5와, T차원의 영국인 평균치 14를 중심 축으로 놓고 2차원 좌표를 만들어 개인, 단체, 정당의 이데올로기를 좌표로 표시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두 차원은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북구 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두 차원을 측정할 수 있게 설문지로 꾸민 것이 아이젠크의 사회적 태도 척도이다. 이 척도로 영국 각 정당의 이데올로기를 표시해 보면, 보수당이나 노동당은 T차원에서 중용적이면서 R차원에서는 보수와 급진으로 대립되어 있다. 또 파쇼당과 자유당은 R차원에서는 다같이 중용적이면서 T차원에서 강경과 온건으로 대립되어 있고, 공산당은 급진적이면서 강경한 좌표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실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경향이다. 또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행동에 영향을 주는 중개 개념으로서 이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헐(1884-1952,미국의 심리학자)은 활동 성향을 습관성과 동기의 상승으로 보았는데, 아이젠크도 정치적 활동은 각자의 사회적 태도와 활동 의욕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사회적 태도를 측정해서 파악하면 정치 활동도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이젠크는 이러한 태도를 학습 과정으로 보고 학습 이론에 적용시켜 설명하였다. 그는 마우라(1907~1984)의 두 요인 이론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습득 과정을 설명하였다.
마우라는 파블로프의 고전 조건반사와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 반응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조건 형성"이라 부르는 것이 좋고, 후자는 좁은 의미로 "학습"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조건 형성은 접근 즉 연합의 원리만이 작용되며, 학습은 강화의 원리만이 작용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말한다면, 전자는 현실 원리가 적용되고 후자는 쾌락 원리가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문화 습득 과정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있다고 보았다. 문화 습득 과정에는 개인이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이른바 사회화 과정과 개개인에게 따로따로 의식적으로 습득되는 개인 교육 과정이 있다. 사회화 과정은 조건 형성인데 연합 원리 즉 접근 반복되어 나타나며, 개인 교육 과정은 학습인데 강화 원리 즉 강화함으로써 쾌락을 얻고 충족을 얻기 때문에 습득된다. 아이젠크는 보수, 급진 차원 즉 R차원이 개인 교육 과정에 속하며, 강경, 온건 차원 즉 T차원이 연합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이 R차원에서 보수적이냐 개혁적이냐의 문제는 각자가 현재 처해 있는 지위, 계급, 상황에 대한 이기적인 전망에 따라 다를 것이다. 현재 고생하고 있는 하류층은 처지가 달리 바뀌었으면 할 것이요, 중류 이상은 현상 유지를 원하고 이를 주장하는 정당을 지지할 것이다. 이리하여 중류 이상은 보수당을, 하층 계급은 노동당을 지지하고 그 정견을 자기의 이데올로기로 내재화시킬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미워하는 아버지가 노동당이기 때문에 자기는 짐짓 보수당으로 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예외는 극소수이므로 대체로 노동자층은 노동당 지지로, 상류 계급은 보수당 지지로 판이하게 갈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선진국의 경우이며 의식화된 대중에게서의 경우일 뿐 의식화되지 않은 대중이 많은 후진국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습형은 개인들의 의식적 학습 과정이기 때문에 무엇이 자기 이익인지 모르는 무의식 대중 사이에서는 통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R차원에 비해 T차원의 형성은 양상이 다르다. 즉 파블로프의 고전 조건형성 과정으로 된다는 것이다. 조건 형성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반복 회수이며, 또 하나는 성격 유형이다. 여러 번 반복 연합시킬수록 조건 형성이 잘 된다. 또한 내향적 성격은 더 쉽게 조건 형성되며, 외향적 성격은 조건 형성이 힘든 편이다.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멋대로 공격하거나 성적 행위의 남용을 못하게 훈련시킨다. 이것이 사회화 과정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윤리, 도덕, 종교도 이같은 사회화 과정의 규준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사회화가 잘 되어 윤리, 종교의 규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온건하다면, 사회화가 덜 되어 공격적이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온건하다면, 사회화가 덜 되어 공격적이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강경하다. 계급적으로 중류 이상은 자녀 훈련에 열성적이어서 반복 훈련을 많이 시킨다. 중류 출신이 일반적으로 잘 사회화되어 있어 온건하다면, 하류 출신은 강경한 편이다. 물론 같은 중류라고 해도, 또 똑같은 반복 훈련을 받았다 해도 내향적인 사람이 더 온건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더욱 강경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이와 같은 보수성 점수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먼저 그들의 계급적 배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중류 이상일수록 보수적이며 하류일수록 급진적이라는 아이젠크의 생각을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보수성은 그들이 중류 이상의 출신이기 때문에 보수 정당 시책에서 이익을 얻어내려고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지니게 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이젠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R차원과 T차원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사회 계급이 현대화된 서구와 미국에만 해당되지, 반봉건적인 후진 국가에서는 T차원이 나타날망정 R차원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런 증거를 중동의 아랍 국가에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5.16직후에 한국의 비종교인 학생 집단과 종교인 학생 집단을 비교한 보고에서도 T차원에서는 변이가 있었으나, R차원에서는 심한 차이를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학생층의 보수성도 우리 사회가 아직 R차원의 분화가 발달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 광범위하게 여러 집단과 계층에 이 척도를 적용해 보아야 할 줄 안다. 학생들의 보수성은 우리 나라가 공산주의와 싸우며 반공을 국시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을 너무 경계하는 나머지 어떠한 개혁적인 사상도 위험시하고 일종의 터부(금기)로 보게 되어 급진적이면 완전히 위험 사상으로 보기 때문에 급진적 견해의 발달을 바랄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근대화되지 않은 것이 반공일 수는 없는데, 민주주의적 급진 사상까지도 위험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공산주의란 R차원에서도 극단적인 급진주의지만, 동시에 T차원에서 냉혹하고 무자비한 극력성을 지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 인도주의에 대립되는 공산주의의 성격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하여간 덮어놓고 급진적인 것을 위험시하는 풍조 때문에 이같은 학생들의 보수성이 조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해방 이후 계속된 우리나라 특유의 정치 풍토가 이같은 보수성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정권이 국권을 지배하게 되면 이 정권을 지지하지만, 그 정권이 실정을 거듭하면 다른 정당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역시 별수 없어 또 다른 정당에게 국권을 맡겨 보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니 실망에 빠지게 된다. 학습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강화를 받지 못하는 어떤 반응이 반복될 경우 그 반응은 사태와의 결합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그 반응은 소거되어 버린다. 어떤 정견을 가지고 애써 호소해 보았자 이익을 주지 못하는 일이 계속 되풀이 되면, 그런 정견은 끝내 기각되어 버린다. 기각되어 버린 후 다행히 다른 정견에서 강화가 있으면 그것이 학습되겠지만, 아무 것도 강화를 주는 것이 없을 때에는 그런 정견을 가지는 일 자체에서 후퇴해 버리게 된다. 사회는 부정견적 상태가 된다.이를테면 정치적 무관심이다.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지 몇 달 후의 보궐 선거에서 정치적 무관심이 극도에 달했던 때가 있었다. 무관심은 주주의 입장으로 증권 시장을 보는 태도라기보다 관객으로서 연극을 보는 흥미 정도밖에 안 된다. 이같은 무관심 상태에서는 이데올로기가 퇴화되어 유치한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은 의식주의 생활고에 허덕이는 하류 계층에서 많이 생기면, 오늘날의 한국적 정치 풍토에서는 지식층에도 만연되어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학생들의 보수성은 이같은 정치적 무관심의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현실의 정치 활동이 거의 정책적인 대립이 아니라 감투 싸움에 치우쳐 있으므로 일반 대중은 정견이나 정책적 판단을 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정치적 무관심과 정책적 논쟁의 빈곤 속에서 학생층에서만 활발한 정견의 다양성을 나타낼 리도 없고, 그들에게만 이데올로기의 의욕적 발전을 바랄 수는 더욱 없을 것이다. 그들 또한 그저 원시적인 정치적 의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학생들의 보수성을 조성해 준 또 하나의 요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196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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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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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슬픈 이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외과 의사가 있었다. 그가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되자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제자들이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이 축전을 베푼 날 제자들은 그가 약간 슬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왜 그렇게 슬퍼 보입니까? 선생님은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아무도 선생님과 비교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은 행복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계십니다. 자, 선생님의 제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세상 어디에나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그는 말했다. "나는 결코 의사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렸을 때 나는 무용수가 되고 싶었다네. 이제 내 인생은 다 갔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데에 내 삶을 소모해 버렸어. 나는 분명히 성공했지만 만족할 수가 없네. 그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건 배고프지도 않은데 누군가가 자네에게 먹기를 강요한 것과 다름없네. 자네가 물을 마시길 원했는데 누군가가 자네에게 우유를 강요한다면, 확실히 물보다는 우유가 낫지만 자네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물을 마시길 원했으므로 우유에 만족하지 못할 것일세."
-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그의 모든 성공은 잘못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증명
한 소년이 지나치게 많은 여자들과 놀아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소년을 정신 분석법으로 치료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대가는 매우 비쌌지만 완쾌만 된다면 해볼 만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오자 그는 그 치료법에 어떤 것이 있었는지 물었다. "네가 10살이었을 적에 우리가 너와 소녀를 붙잡아 왔던 일을 의사에게 말했느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가정부를 둘 수 없었던 것을 의사에게 말했느냐? 13명의 가정부들이 우리 집에서 달아났었지!" 아들은 끄덕였다. "5명의 모델과 13명의 여대생에 대해서도 말했느냐? 그리고 교장의 부인과 함께 지냈던 일도 이야기했느냐?" 다시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에게 말해 다오. 의사가 무어라고 했지?" "의사들은 내가 동성애적인 성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들이 말했다. "그들은 내가 동성애적인 성벽이 있다고 했단 말예요!"
- 전문가들은 무엇인가를 말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제 만일 이 소년이 동성애적인 성벽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이성적인 성벽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무엇인가를 찾아내야만 했고 무엇인가를 주장해야만 했다. 그것이 아무리 부조리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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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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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76. 무창에서 솟은 혁명의 불길 - 무창봉기 발발(1911년)
손문을 비롯한 혁명세력은 1900년대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시도하지만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난 계기는 의외로 청조의 철도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철도는 건설과정의 이권이나 건설 이후 이용과정에서의 효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근대시설이었다. 중국에서의 철도는 관영으로 건설되다가 민영화 요구에 밀려 민영화되는 경우가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세력들도 철도건설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청조는 1909년 호분, 호남, 두지역의 철도부설에 필요한 경비를 외국의 차관도입으로 조달하여 건설하고자 했다. 물론 이것은 청조의 자율적인 의사는 아니었다. 이에는 서양세력들이 철도건설과 그 운영권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은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철도건설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차관의 도입을 통한 철도건설은 곧 철도가 국유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청조가 철도 국유화정책을 발표하자 철도건 것을 추진하고 있었던 지방 실력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청조는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외국과의 차관계약에 서명했고 민간인 철도회사를 접수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은 이 차관계약을 통해 호북, 호남 일대의 철도부설권을 손에 넣었고 철도가 연장되어 건설될 경우 역시 그들이 우선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이 여러 지역에 일어났다. 최초의 집회는 장사에서 약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해오디었다. 호남성의 관리들과 철도회사는 국유화령을 취소하고 민영으로 계속할 것을 요청했으나 청조는 듣지 않고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이며 시위대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광동성에서도 역시 국유화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사천성에서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분노한 시위군중들은 아예 청조 타도 운동으로 그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철도국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시위는 청조의 탄압에 의해 잠시 주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새롭게 몰아가게하는 사건이 무창에서 발생했다. 무창도 역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사천성의 시위대에 총격이 가해지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어지자 청조는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사천성의 시위진압에 동원하려 했다. 그런데 무창에 있던 군대에는 이미 혁명세력이 침투해 있었다. 무찬 군대 내의 혁명 중심인물들은 혁명 거사일을 1911년 10월 6일로 잡았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해 계획일이 늦추어지는 가운데 봉기 중심인물의 하나인 손무가 폭탄을 제조하다가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혁명당원의 명부와 서류 등이 발각되어 이것이 청조에 보고되었다. 청조는 혁명계획의 주동자 체포에 나섰고 거사하기도 전에 지도부 대부분이 잡혀 총살되었다. 그러나 지도부를 잃은 혁명파 군인들은 10월 10일 밤 7시를 기해서 들고일어나 그들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죽이고 무기고를 습격, 점령했으며, 다음날 호광총독 관청을 장악함으로써 무창은 혁명의 도시가 되엇다. 무창에 이어 한양과 한구의 신군이 혁명국에 합류함으로써 혁명운동은 마른 들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청은 무창의 봉기소식을 듣고 2개 사단을 보내 이를 막게 했으나 혁명군에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무창에서 시작된 혁명운동 소식은 곧 중국 전지역으로 빠르게 퍼졌으며 1달여 만에 13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만이 예외였을 분이었따. 이렇게 빠른 속도로 혁명의 물결이 휩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청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중국인민들 사이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고, 혁명세력들이 군대내에 손길을 뻗쳐 조직적인 사업을 해놓은 결과였다. 한때 혁명세력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혁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구와 한양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어 혁명세력이 위기에 차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를 다시 혁명세력 쪽으로 돌리게 한 사건이 남경의 장악이다. 여러 성의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은 여전히 청의 군사력 아래 있었는데, 이 남경이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된 것이다. 11월 15일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의 대표는 상해에서 모여 대표회를 무창에 설립할 것 등을 결의했고, 무창으로 옮긴 혁명세력의 성대표들은 임시정부 구성안을 발표했다. 또한 청의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가 혁명세력에 가담한다면 그를 임시총통에 추대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원세개는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세개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당시 독립한 성의 대표들 중 상당수가 혁명파보다는 보다 온건한 입헌파가 중심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혁명세력의 상징인 손문이 12월 25일 귀국하여 상해에 모습을 나타냈다. 손문은 혁명세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29일 임시대총통 선거에서 손문은 각 성대표들의 압도적 지지로 이시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정식으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혁명 정부가 선포되었다. 손문은 "인민의 공의를 취하고 중을 위해 복무한다"는 총통선서를 했다. 드디어 2천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절대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최초의 근대적인 공화정 정부가 중국에 들어서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남경 임시정부는 임시대총통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혁명정책을 발표하였다.
1. 아편의 재배 및 흡연 금지 2. 여성의 전족 금지 3. 가혹한 형벌의 금지 4. 인신매매, 도박의 금지 5. 천민신분의 해방
그러나 중화민국의 장래가 마냥 순탄한 길에 들어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청나라의 신군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인 원세개의 영향력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외국, 특히 영국의 경우 민족주의적인 혁명세력이 움직이는 중화민국보다는 원세개를 중국의 대표로 세우고 싶어했다. 중국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데는 민족주의적인 혁명파보다는 민족의식이 희박하고 개인적 야심이 가득한 원세개가 훨씬 다루기 쉽다는 판단에서였다.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내에도 입헌파 등은 원세개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원세개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 혁명정부에서도 결국은 원세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청조를 멸망시킨다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의 대총통에 취임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청은 원세개에 혁명세력을 진압할 것을 명했지만 원세개는 더 이상 청조에 충성을 바치기를 원치 않았다. 원세개는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퇴위시키고 손문이 사임한 남경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혁명은 다시 한걸음 후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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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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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自爲政(각자위정) 各(각각 각) 自(스스로 자) 爲(할 위) 政(정사 정)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2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와 정(鄭)나라가 전투를 하게 되었다. 송나라의 대장인 화원(華元)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마부인 양짐(羊斟)이라는 사람에게만 주지 않았다. 양짐은 이 일로 화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다음 날 접전이 시작되자, 화원은 마차 위에서 양짐에게 마차를 오른쪽으로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양짐은 반대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 라는 화원의 호령에 양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제의 양고기는 당신의 뜻이고,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이오(疇昔之羊子爲政, 今日之事我爲政).
결국 화원은 곧 정나라 군사들에게 생포되었고, 대장이 없어진 송나라 군대는 정나라에게 크게 패하였다.
各自爲政 이란 각자가 자기의 주장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을 비유한 말이며, 동시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조화와 협력을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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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3. 끔찍하고 잔인했던 어린이들 이야기
진짜 신데렐라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동화일 것이다. 심술 사나운 계모와 유리 구두. 너무 유명한 이 신데렐라 이야기는 사실은 세계 각국에서 옛날부터 이야기로 내려온 것이다. 최소한 1000년 전부터 구전되거나 문자로 기록된 형태로 수 없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 대부분의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이상한 구두를 쓸데없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욕심 낸 여자들이 발을 자르는 잔인한 장면이 들어 있다. 현대 어린이들이 알고 있듯이, 부엌데기인 불쌍한 여자 아이가 어머니를 대신한 요정의 자비로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는 스토리는 완전히 샤를르 페로의 것이다. 만일 페로의 뛰어난 개작이 없었더라면 유럽 어린이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스코틀랜드판의 가난하고 아름다운 소녀 라신 코티의 불쌍하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야기밖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판에 따르면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못생긴 세 언니들이 소녀에게 강제로 골풀(rush;소녀 이름의 유래)옷을 입힌다. 라신 코티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한 요정은 없지만 소원을 들어주는 마술 송아지가 있다. 그러나 간악한 계모가 심술 사납게도 잡아먹고 만다. 비탄에 잠긴 소녀는 무도회에 가고 싶어서 소의 뼈에 대고 새로운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소원을 빈다.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아름다운 새틴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다. 왕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쪽 구두가 발에 맞는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계모는 첫째딸의 발끝을 잘라내고 그래도 발이 너무 컸기 때문에 뒤꿈치도 잘라낸다. 왕자는 이 추한 (발을 남몰래 줄인) 처녀를 받아들이지만 곧 작은 새가 '구두 속의 발은 그 구두의 임자가 아니다. 왕자가 찾는 아름다운 처녀는 라신 코티'라고 말해준다. 왕자는 라신 코티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이 이야기의 유럽판들을 보면 대부분 가장 못생긴 처녀의 발을 새틴이나 천, 가죽, 모피 신발에 맞게 하려고 잘라낸다. 그리고 언제나 여러 종류의 작은 새가 왕자에게 속임수를 일깨워준다. 페로가 어렸을 때 들은 프랑스의 이야기에서도 신발은 아무래도 유리(프랑스어로 verre)가 아니라 얼룩 무늬가 들어간 모피(vair)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유리 구두라면 늘어나는 일도 없고 투명해서 안이 보일 것이라는 장점을 깨달은 것은 페로의 비범한 재능이었다. 유리의 특성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붙인 제목 "신데렐라 또는 작은 유리 구두"를 보면 분명하다.
유럽에서 오래 된 신데렐라류의 이야기는 장바티스타 바질레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5일 이야기"에 "부엌데기"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나폴리 출신의 시인, 군인, 신하, 행정관으로 널리 여행을 한 바질레는 50편의 이야기를 썼다. 50편 모두 나폴리의 여성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세조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신데렐라는 요즘 말하는 아동 학대의 희생자였다. 바질레의 이야기는 불행한 소녀 세조라가 심술 사나운 계모를 죽이려고 획책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윽고 세조라는 계모의 목을 부러뜨리는 데 성공하지만, 불운하게도 아버지가 한층 더 심술 사나운 여자와 결혼한다. 새 계모가 데리고 들어온 여섯 명의 악질적인 딸들은 세조라에게 부엌일을 떠맡기고,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부려먹는다. 세조라는 화려하게 펼쳐지는 축제에 가보고 싶어서, 마법의 대추나무에 소원을 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변신한 세조라는 화려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백마에 올라탄 채 두 명의 하인까지 거느리고 간다. 임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한밤중 임금의 손에 남겨진 것은 한 짝의 신발뿐. 온 나라를 찾아다녀도 그 신발이 발에 맞는 처녀는 없다. 물론 세조라를 빼놓고.
이 초기의 이탈리아판은 샤를르 페로의 것과 놀랄 만큼 비슷한데, 고증가들은 바질레가 내놓은 이야기집을 페로가 알고 있었을 리가 없고 아마 페로는 프랑스의 구전 민화에서 알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최초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입에 담았던 것일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로 가장 오래 된 것이 서기 850년에서 860년 사이에 쓰여진 중국 책에 들어있다. 동양의 이 이야기에서는 엽한이라는 소녀가 심술 사나운 계모에게 학대를 당한다. 계모는 엽한에게 누더기옷을 입히고 일부러 깊고 위험한 샘으로 물을 길으러 가게 한다. 중국의 신데렐라는 집 옆의 연못에 3미터나 되는 마법의 물고기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누더기를 걸치고 소녀로 변장한 계모가 물고기를 속여서 붙잡아 죽여버린다. 엽한은 축제에 입고 갈 옷이 갖고 싶어서 물고기의 뼈에 소원을 빌자, 순식간에 멋진 깃털과 황금으로 장식된 드레스에 몸이 휘감긴다. 중국의 축제에는 왕자도 임금도 나오지 않지만 서둘러 돌아오던 중국의 신데렐라는 금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다. 그 구두는 '깃털만큼 가벼워서 설사 돌 위에서 깡충깡충 뛰어도 아주 조그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구두 한 짝은 그 지방에서 제일 돈이 많은 상인 손에 들어간다. 부자 상인은 팔방으로 구두 임자를 수소문하여 찾은 끝에 구두가 딱 들어맞고 '천녀'처럼 아름답게 변신하는 신데렐라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계모와 못생긴 딸은 무너져내리는 무거운 돌 밑에 깔리고 만다.
9세기 중국의 이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민화 수집가의 한 사람인 탄 첸 시가 채록한 것으로 그의 집에 오랫동안 살았던 하인에게 맨 어음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출처에 대해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판에는 유럽판과 분명히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현재는 700가지나 되는 각기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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