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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24호
2011.11.17 (음 10.22)/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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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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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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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12 신춘문예
새해 첫 아침, 세계일보와 함께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주십시오. 믿음직한 신예 등용문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힌 세계일보 신춘문예가 2012년 응모작품을 공모합니다. 신인의 패기와 열정,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인간에 대한 웅숭깊은 애정이 담긴 참신한 작품을 고대합니다.
◆공모 부문 및 고료 ▲단편소설(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500만원 ▲시(3편 이상)=300만원 ▲문학평론(200자 원고지 70장 안팎)=300만원 ◆마감:2011년 12월 15일(당일 도착분까지만 유효, 방문접수 가능) ◆발표:2012년 1월 1일자 세계일보 ◆보낼 곳: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 550-15 세계일보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153-803)
◆유의사항 ▲A4 용지에 출력해서 제출하고, 겉봉에 붉은 글씨로 ‘신춘문예 ○○부문 응모작’임을 명기해 주십시오. ▲원고 겉장과 뒷장에 이름(필명이면 본명 명기)과 주소, 전화번호, 원고지 분량(200자 기준)을 반드시 써 주십시오. ▲어떤 매체에도 발표되지 않은 작품이어야 하고, 당선된 작품이라도 후일 표절로 밝혀지거나, 동일 작품이 다른 매체의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되어 동시 당선되면 당선을 취소합니다. 부문별 심사위원 명단은 당선작과 함께 발표합니다. ▲응모작품은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문의:(02)2000-1296, http://shinch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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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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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인생 경험을 쌓지 않고서는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는 어느 만큼 깊이가 있는 내용의 책이고 보면, 적어도 그 내용의 일부를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 E. L. 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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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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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과 오뎅
“…감기약이 많이 독했으면 싶어요/ 술 취한 것처럼 아주 깊은 잠이 들어야/ 새벽에 말도 없이 찾아온 헤어짐의 기억이/ 나쁜 꿈일 뿐이라고 날 속일 수 있으니….” <감기 때문에>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심정을 담고 있지만 이른바 ‘19금 딱지’ 대상으로 논란이 된 노래이다. 노랫말에 ‘유해 약물’인 ‘술’과 ‘향정신성 의약품’인 ‘감기약’이 들어 있다는 게 쟁점이었다. 이런 엉뚱한 일이 예전에도 있었다.
“떡볶이와 오뎅을 파는 아줌마/ 순대와 튀김은 팔지 않아요/ 사람들은 맛나는 떡볶이만 먹고/ 오뎅은 왜 그런지 팔리지 않아….” 이 곡의 제목은 <떡볶이와 오뎅>이다. 이 노래는 방송사 자체 심의에 걸려 방송 금지곡이 되었다. 내용은 천진하기 그지없는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건 ‘오뎅’ 때문이었다. 당시 가요 심의를 했던 심의위원들은 “‘오뎅’은 방송언어로 부적절하다”며 음반사와 가수 쪽이 낸 재심의 신청도 기각했다.
그렇다. ‘오뎅’은 지금도 ‘방송 부적합 용어’로 분류되어 있다. 청취자 사연에 자주 나오는 ‘오뎅’은 ‘어묵’ 따위로 바꾸어 전하는 게 방송과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의 불문율이다. 국립국어원은 ‘오뎅’을 ‘꼬치/꼬치안주’로 순화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오뎅은 바르지 않으니) 어묵’으로 쓰라고 한다.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없지 않다. 일본어 찌꺼기를 솎아내는 일에는 찬성하지만, ‘오뎅’은 그냥 ‘오뎅’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선살 등을 으깨어 조미료를 넣고 버무려 만든 건 어묵이지만, 다시마와 무, 파 따위를 넣고 끓여낸 일본 음식은 ‘오뎅’이기 때문이다. ‘오뎅’이 순화 대상이면 일본 나가사키가 원산지인 ‘짬뽕’(チャンポン)도 그래야 한다. 피자와 햄버거, 스파게티와 케밥은 음식 이름일 뿐이다. 짬뽕과 한 식구인 ‘짜장면’이 복권되었다. 이와 함께 허접쓰레기(허섭스레기), -길래(-기에), 손주(손자) 등도 표준어로 인정받았다. ‘언어 현실을 반영해 결정했다’는 국립국어원의 뜻이 ‘오뎅’에도 미치기 바란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볏과 벼슬
다음에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무고개처럼 하나씩 짚어 나가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만한 무엇이다. 이것은 동물성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의 생김을 사물에 빗대어 구별하기도 한다. 장미처럼 생긴 게 있고, 완두콩 또는 호두 모양과 비슷한 것도 있다. 흔히 ‘관’(冠)을 붙여 장미관, 완두관이라 하는데 이 둘이 섞이면 호두관이 나온다. 이것을 가리키는 방언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것의 주인이 여염집 살림에서 빠질 수 없기에 그럴 것이다. 제주에서는 고달이라 하고, 강원도에서는 면두, 평안도에서는 멘두 또는 벤두미라고도 한다. 경상도 방언으로는 배실, 경북 일부에서는 장다루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말로는 변두, 육관(肉冠)이 있다. 이것의 생김은 맨드라미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 맨드라미를 계관(鷄冠)이나 계두(鷄頭)라 이르기도 한다. 김유정의 <동백꽃>,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해 황선미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도 등장하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빛깔이 붉고 시울이 톱니처럼 생긴, 닭이나 새 따위의 이마 위에 세로로 붙은 살 조각’(표준국어대사전)이다.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덕하고 면두를…”(<동백꽃>)의 ‘면두’(멘두, 벤두)는 앞에서 보았듯이 방언이다.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벼슬’이라 했다. 사전은 ‘벼슬’도 방언으로 다룬다. “닭장에서 비어져 나간 한 마리가… 볏을 세우며 달아난다”(<토지>)의 ‘볏’이 이것을 제대로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원작에는 ‘볏을 가진 족속’이라는 표현처럼 ‘볏’으로 썼다.
볏은 암탉보다 수탉의 것이 돋보인다. 우람하게 솟아오른 볏에 대감마님 수염처럼 늘어뜨린 아랫볏은 수탉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마당을 다스리는 수탉은 유난히 화려한 볏을 내세워 한껏 위세를 부린다. 하지만 이 수탉의 위엄은 오래가지 못한다. 권위의 상징인 볏이 사실은 ‘가발’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볏’은 ‘벼슬’이 아니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집히다 / 짚이다
다음 중 '짚이다'와 '집히다'가 바르게 쓰인 것을 고르시오.
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집히는 바가 없다. ② 주머니에서 짚이는 대로 돈을 꺼냈다. ③ 핀셋에 짚인 벌레는 달아나려고 애를 썼다. ④ 내심 짚이는 게 있어 뜨끔했다. ⑤ 손에 물컹한 것이 짚였다.
'짚이다'와 '집히다'는 혼동해 쓰기 쉬운 단어다. 우선 "눈치 빠른 그는 짚이는 게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에서처럼 '헤아려 본 결과 어떠할 것으로 짐작이 간다'는 의미로 쓰일 땐 '짚이다'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①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짚이는 바가 없다"로 써야 한다. '집히다'는 손가락으로 물건을 집거나 기구로 물건을 끼어서 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 '집다'에 피동형을 만들어 주는 접사 '~히'를 붙여 만든 피동사로, "빨래집게에 손가락을 집혔다"와 같이 쓰인다. 따라서 ②, ③, ⑤의 경우 "주머니에서 집히는 대로 돈을 꺼냈다" "핀셋에 집힌 벌레는 달아나려고 애를 썼다" "손에 물컹한 것이 집혔다"처럼 써야 맞다. 정답은 ④번.
거꾸로 / 반대로
얼마 전 슈퍼주니어-T가 트로트 싱글 '로꾸거'를 발표했다. 타이틀곡 '로꾸거'는 '거꾸로'를 뒤에서부터 표기한 것으로, 전체 가사가 앞에서부터 읽거나 반대로 읽어도 말이 되도록 구성돼 있다. 이러한 형식을 '팰린드롬(palindrome)', 즉 '회문(回文)'이라고 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언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거꾸로'와 바꿔 쓸 수 있는 말로 흔히 '반대로'를 떠올린다. '거꾸로'는 '차례나 방향, 또는 형편 따위가 반대로 되게'라는 뜻이다. '반대로'는 '두 사물이 모양.위치.방향.순서 따위에서 등지거나 서로 맞섬으로' 또는 '어떤 행동이나 견해.제안 따위에 따르지 않고 맞서 거스름으로'라는 의미로 쓰인다. '반대로'가 첫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 '거꾸로'와 바꿔 쓸 수 있지만 둘째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령 "옷을 거꾸로(반대로) 입다" "일의 순서가 거꾸로(반대로) 되다" "토마토는 거꾸로(반대로) 발음해도 토마토다"와 같은 경우 두 말의 의미상 차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꿈 속의 이미지는 현실의 생각과 거꾸로 나타난다" "그는 나와는 항상 거꾸로 한다" 같은 경우엔 '거꾸로' 대신 '반대로'를 써야 자연스럽다. 그가 일할 때 내가 놀고, 내가 일할 때 그가 노는 것을 '거꾸로'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돌아간 세상'이란 노래가 있는데 이 경우엔 '반대로 돌아간 세상'이라고 하면 어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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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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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넝쿨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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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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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날 - 이청화
십오일 전의 검은쥐가 나올 쥐구멍이 없다. 십오일 후의 흰고양이 넘어올 담도 없다. 다시는 무엇도 쫓고 쫓기는 일 없는 누각 가난에 등이 굽은 나그네여 여기 와 청풍이 날리는 장삼을 입고 저 금빛 수평선 바다를 보아라 그러면 운문이 떡도 얹어 주는 날마다 밥이 세 그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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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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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 김구연
6.25 동란 때 군인들이 많이 죽었다는 동멧산에는 해마다 유난히도 붉은 진달래꽃이 아름으로 피어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참꽃을 따서 먹지만 동멧산 진달래꽃만은 한사코 따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때 어디서이건 진달래꽃을 보면 동멧산이 떠오릅니다.
꽃불 속에 어른어른 아버지가 보입니다. 삼촌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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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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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2장 인간관의 양상
4. 인생은 한 편의 시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생은 한 편의 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생에는 인생의 독특한 리듬도 있고 맥박도 있고 성장과 노쇠의 내부적 주기도 있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유년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성년자가 사회에 적응해 가려고 조바심 하는 서툰 청춘기가 그에 이어진다. 그 뒤 거기에는 청춘의 번뇌와 어리석음이 있다. 이상과 야심이 있다. 얼마 뒤에 격렬하게 활동하는 성년기에 이르러 경험을 이용하여 사회와 인간성을 더욱 깊이 배운다. 이 중년기에 들면 얼마간 긴장이 풀려 과일이 무르익고 술이 익듯이 성격도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제까지보다 좀더 배짱이 커지고 좀더 냉소를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점점 따뜻함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게 되면 내분비선의 분비는 활발성을 잃는다. 만일 이 황혼기에 우리가 진정한 노년 철학을 가지고 그것에 따라 생활하는 방식을 정해 나간다면 그것은 평화, 안심, 한적, 만족의 시대가 된다. 마지막에는 생명은 소멸하여 영원한 잠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 인생의 리듬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만 한다. 대교향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주악상, 그 난파조, 그 마지막 대협화음을 맛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인생의 주기 운동은 평범한 인생의 생애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지만, 음악은 각 개인에 의하여 작곡되어 가야만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협화음이 점점 더 심해져서 나중에는 메로디의 주조를 압도하거나 없애버리거나 하는 수가 있다. 또 어떤 때에는 불협화음이 너무 강하게 되어 이상 더 음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권총 자살을 하거나 강에 뛰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중한 자기 교양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본디의 주조악이 흐려져서 절망적이 된 결과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지만 않다면 정상적인 인생은 엄숙한 행진이나 행렬처럼 순순히 마지막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단음이나 조단음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수가 가끔 있다. 이러한 때에는 템포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음악은 귀에 거슬린다. 밤낮으로 유유히 흘러 영원히 바다로 들어가는 대 갠지스 강의 장중하고도 웅대한 리듬과 템포야말로 우리가 동경하는 바다. 유년 시대, 성년 시대, 노년 시대가 스스로 갖추어지는 이 인생이 아름다운 자연의 배치가 아니라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하루에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일몰이 있으며, 1년에 봄 가을의 게절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은 것이다.
인생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계절에 따르면 무슨 일이고 다 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생물학적인 인생관에 의하여 인생의 4계절에 순응하여 살아 나가려고만 한다면 자부심이 강한 바보거나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가 아닌 한 인생은 한 편의 시로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7단계에 관한 문장에서 이 생각을 좀더 뚜렷하게 나타낸 바 있었다. 많은 중국인 문인들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다지 종교적인 점이 없었고 또 그다지 종교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이것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넓게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희곡 가운데의 인간이 모두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지상 만물의 섭리에 대해 아는 체하는 주제넘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은 것이었다. 이 말이야말로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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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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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죽음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죽음의 비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 삶의 중심에서 죽음을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낮에는 눈멀고 밤만을 볼 수 있는 올빼미는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는 것. 그대들이 진정으로 죽음의 혼을 보고자 한다면, 그대들의 가슴을 삶의 몸을 향하여 크게 열라. 삶과 죽음 하나, 강과 바다가 한몸이듯. 희망과 욕망의 저 깊은 곳에서, 그대들은 말없이 미지의 나라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눈 속에서도 꿈꾸는 씨앗들처럼 그대들의 가슴도 봄을 꿈꾼다. 꿈속에야말로 영원에의 문이 숨겨져 있으니, 꿈을 믿으라. 그대들이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영광스럽게도 왕앞에 서게 된 양치기의 떨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양치기는 떨면서도 왕의 주목을 받게 됨이 기쁘지 않겠는가?
과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바람 속에 벌거벗고 서서 태양 속으로 녹아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숨이 끊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만 한 숨결이 끊이지 않는 자기의 조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높이 오르고 퍼져서, 어떤 번민도 없는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은 침묵의 강물을 마실 때에야 실로 노래하게 되리라. 또 그대들은 산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대지가 그대들의 몸뚱이를 요구하게 될 때, 그때서야 그대들은 진실로 춤추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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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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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첫째 묶음 - 생활 속의 심리
질투
남편이 술먹고 늦게 돌아오는 날이 많고 자기를 본체만체 한다든가 공연히 짜증내는 빈도가 많을 때, 아내는 일단 남편을 의심하게 된다.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남편 사무실에 젊은 여인이 자주 전화하며 그 여인과 만나는 약속을 한다든가, 게다가 전화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는 말을 듣는다고 하자. 이야말로 심상치 않다. 아내는 흥분하게 된다. 더욱 엄중하게 감시하고 젊은 여인의 정체를 밝혀 내려고 하며 혹시나 하고 장래를 근심하기도 한다. 남편에게는 그렇게 정성을 다해 돌보았는데도 몰라주나 서운해 하기도 하고, 갑자기 그 남편을 비롯해 세상이 모두 무서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 뒷바라지에 더욱 정성을 기울이며 예쁘게 보이려고도 한다. 때아닌 멋을 부리는가 하면 심지어 젊어 보이려고 지나치게 애띤 화장을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남편의 관심을 다시 사겠다는 주의 획득적인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젊은 여인의 정체를 알아내기라도 하면, 그녀에게 쫓아가서 그녀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며 욕설을 퍼붓고 남편에게서 손을 떼게끔 할지도 모른다. 분풀이는 그 여인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차마 남편에게는 못하면서 애매한 식구들에게까지 공연히 짜증 부리며 들볶아 대고, 가구나 의복을 집어던진다든지 아예 집을 나가 버리는 수도 있다. 아내의 이와 같은 행동은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자기의 장래가 걱정되고, 남편에게는 서운해 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다고 느끼는 것 (남편에게서 도피하려는 것) 등은 소위 공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또 남편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화장에 신경 쓰며 남편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애정 정서로 볼 수 있다. 한편 문제의 젊은 여인과 싸움하고 식구들을 들볶고 가구를 파괴하는 등의 행동은 분노 정서의 표출이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질투는 공토, 애정, 분노 세 정서의 복합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즉 오직 그이와 가까이 있어야만 마음이 편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그리고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었는데-,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질 때는 그런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피해 버리고 싶은 심정과 아울러 애정을 상실할 것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더욱 관심을 쏟는 애정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 게다가 경쟁자에게나 그 상황에 대해서는 맹렬히 분노를 터뜨린다. 이것을 다시 도식화해 보자. 남편에게는 애정과 공포 즉 접근 경향과 도피 경향이 동시에 작용하는 양향적 입장에 서게 되는데, 이는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갈등 상태이다. 경쟁 상대나 타인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고 있으나, 이를 참고 상대에게 가까이하려니 괴롭기 그지 없는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강하고 웬만한 자제력이 있지 않으면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하기 일쑤인 흥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사랑을 미덕으로 찬양한다면, 그 부산물인 질투도 미덕으로 높게 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경쟁하게 될 때, 그를 물리치고 사랑하는 이를 자기 것으로 한다는 것이 정당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사고라 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상황도 그리 흔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근심할 것조차 없는 사소한 접촉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질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본인의 성격상의 결함일 수도 있다. 즉 심한 열등감이나 성적 무능력과 부정한 사실 등 자기 스스로의 결함을 상대에게 투사시켜 상대와 타인 사이에 부정한 일이 있는 것처럼 본다. 사실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성장 과정이 순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근심 걱정을 많이 하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거나 신경질과 변덕이 심한 부모 밑에서 일관성 없는 교육을 받으며 자란 경우,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늘 근심 많고 눈치보게 된다. 그리고 성격상 주의에 잘 적응하는 사람보다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서 질투가 더 많다는 연구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성숙한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서는 질투가 빈번하지도 않고, 또 표현도 거칠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서적으로 애정이 없어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랑을 빼앗기게 되는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태 파악에 객관적이어서 위협을 느낄 것과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을 잘 식별하고, 그 사태에 대해서도 공연히 흥분만 해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사려 깊은 안목으로 신중하게 대처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서적인 자제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질투가 많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적당하게 사태 파악을 한 후에 감정을 표출하므로 과격하게 흥분하지도 않고 사태에 적합하게 행동한다. 아마도 정서가 완전히 안정되어 있다면, 실제로 질투를 느껴야 할 위험 상황에서 공연한 질투로 흥분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객관적인 사태 판단에 따라 이성을 발휘하여 상대를 버리든가 탈취하는 식의 행동을 할 것이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자신감이 왕성하며 확고한 자아가 서 있는 성숙한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간절한 애정 욕구라든가 과격한 공격심과 불타는 분노 따위로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식의 행동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지나친 질투심이란 성숙한 성격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속성이다. 애교스러운 질투는 권태로움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다 보면 자신의 못난 성격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196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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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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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꿈 속의 꿈
진나라 때, 한 나무꾼이 땔나무를 줍고 있다가 뜻밖에도 뛰어 오는 한 마리 사슴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사슴을 쫓아가서 붙잡았으나 혹시 어느 누군가가 그 광경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겁이 나서 급히 구덩이 속에 사슴을 감추고 덤불로 덮어 놓았다. 그는 이 뜻하지 않은 행운에 미칠 듯이 기뻤다. 그러나 이 지나친 기쁨 때문에 그는 사슴을 숨겨 놓았던 장소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꿈을 꾼 것이 분명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의 중얼거림을 엿들은 한 사람이 그 주변을 살핀 끝에, 새로 덮인 흙을 발견하고 그 사슴을 찾아내어 가져가 버렸다. 사슴을 얻은 사람은 집에 도착하자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나무꾼이 사슴을 얻을 꿈을 꾸었다오. 그런데 그는 사슴이 있는 장소를 알지 못했소. 이제 내가 그 사슴을 얻었으니 그의 꿈은 사실이었던 거요" 부인이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의 꿈속에서 중얼거리는 나무꾼을 본 거예요. 그가 사슴을 얻었다구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구요? 사슴을 얻은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고, 그의 꿈이 사실일 수가 있겠어요?" "정말 그렇구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는 사슴을 얻었소. 나무꾼이 사슴을 꿈꾸었든, 내가 그 나무꾼을 꿈꾸었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오." 한편, 집에 도착한 나무꾼은 다 잡은 사슴을 잃은 것이 분해 대단히 화가 났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는 사슴이 어디에 있는지, 그 사슴을 얻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진짜로 꿈속에서 보았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그는 꿈에서 보았던 그곳으로 찾아갔더니 사슴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서 법정으로 이 문제를 가져가게 되었다. 재판관은 다음과 같은 판정에 따를 것을 선고했다. "원고는 먼저 실재하는 사슴과 꿈을 주장했다. 그는 지금 실재하는 꿈을 앞세워서 사슴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피고는 원고가 꿈꾸었다는 그 사슴을 실제로 얻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슴의 소유권을 지키려 한다. 그런데 피고의 부인에 따르면, 나무꾼도 사슴도 둘 다 꿈 이야기이므로 누구도 사슴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 있는 이 사슴은 당신들끼리 사이좋게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달리 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진나라의 왕이 외쳤다. "재판관은 그 자신이 이 경우를 꿈꾸었음이 틀림없다!"
- 꿈 속의 꿈 속의 꿈... 이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방법이다. 한번 꿈꾸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끝이 없다. 당신이 사고라고 부르는 그것은 바로 꿈이다. 꿈꾸기라고 불리우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사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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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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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71. 중국의 제도에 서양의 기술 - 양무운동의 추진(1860~1894년)
평등사회의 깃발을 내세운 태평천국 세력이 짧은 시간에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19세기 말 중국농민들의 생활이 그만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의 침략은 계속되엇으며 청나라는 더 이상 중국을 온전히 통치할만한 힘이 없었다. 청조의 지배층 내에서는 권력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태평천국이 전국을 휩 쓸 때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외국세력의 압력에도 변변히 저항을 못하고 굴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조 지배층 일부에서는 중국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의 근대 공업기술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곧 서양의 문물을 힘써 배우자는 것으로, 마치 우리 나라의 개화운동과 비슷했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태평천국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 중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으로, 이들은 한족으로서의 청의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다. 청조의 지배층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의 과학기술이었다. 청조가 서양과 대결할 때 우수한 서양무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뼈저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윤리도덕이나 정치제도들은 중국전통을 계속 유지하면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중체서용'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중국전통을 근본으로 하여 서양세력에 침략당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지만 내심으로는 아직까지 그들의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군 세력이 약화되고 있던 1860년대 초부터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1894년까지 계속된다. 양무운동을 담당했던 기관은 총리아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에서 실질적으로 힘을 가지고 태평천국의 난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중국번과 이홍장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양무운동은 보통 3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는 1860~1872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군수공업 중심의 개혁이며, 제2단계는 1872~1885년까지로 무기와 아울러 조선관련 기업, 근대적인 운수 통신시설, 전신 부설 등이다. 제3기는 1885~1894년까지로 이홍장의 북양해군이 편성되고 장지동이 한양제철소를 건설하는 등 근대산업시설과 군사조직이 강화되었다. 제1단게는 청의 황제인 동치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함풍제가 외국세력을 피해 가 있었던 열하에서 1861년에 죽자 측근 신하들은 그의 다섯 살 난 아들을 황제에 올렸다. 이 사람이 동치제다. 그러자 동태후(함풍제의 정부인)와 동치제의 친어머니인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함풍제의 측근들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 지배층들에 의해 전개된 개혁운동은 주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개혁은 동치제 때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동치중흥'이라고도 한다. 1862년 증국번이 '안경내군계소'라는 서양식 무기제조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흥장이 '상해양포국''강남제조총국' 등 무기공장을 만들었다. 이 공장들은 모두 관영으로 국가재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근대적인 군수시설들은 그것을 주도했던 양무파들의 실권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고, 특히 그중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이홍장이었다. 그는 북양대신이라는 직책으로 양무운동을 주도, 상해에 무기제조 공장을 세워 무기와 탄약을 생산했으며, 군함을 만들기도 했다. 이홍장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휘 아래 있던 해군의 전력강화를 꾀했고, 1888년 북양해군을 만들엇다. 그뒤 양무파의 또 다른 실력자였던 좌종당은 남양해군을 창설했다. 이들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국내의 정치, 경제제도 등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중국사회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태평천국군과 싸울 때는 외세에 의존하기도 했다. 이홍장의 외국들에 대한 정책은 타협과 양보였다.
그러나 군대의 전력강화와 산업의 성장으로 나라를 부강하고 안정되게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싸웟던 청일전쟁(1894)이다. 청나라는 군사력을 강화시키면서 가상적국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일본과의 싸움이 시작되자 그동안 많은 노력을 들여 육성했던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해군에게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이홍장의 양무운동이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전에 좌종당의 남양해군도 인도차이나 반도로 침투하는 프랑스와 맞서 싸운 청, 프전쟁에서 패한 바 있었다. 양무운동 과정에서 서양 여러 나라는 양무파들이 운영하는 공장에 기술자를 파견하고 기계를 수출했으며, 차관을 주어 경제적으로 그들의 지배 아래 두었다. 아울러 서구열강은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가 상품을 팔고 원료와 농산물을 사들이게 되어, 중국은 서양의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주권을 서양세력에 뺏긴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 실용적인 서구의 과학기술 도입을 통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주권을 강화시키지도 못했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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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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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知(사지) 四(넉 사) 知(알 지)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양진전(楊震傳)에는 후한(後漢) 때의 관리인 양진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평소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儒學)에 정통했던 양진은 한 고을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군의 하급 관청인 현(縣)의 현령(縣令)이 몰래 많은 금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양진에게 건네 주려고 하며 지금은 밤이 깊으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양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알고 있는데(天知地知子知我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현령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대로 물러갔다. 훗날 양진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환관과 황제의 유모인 왕성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모함을 받게 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四知 란 天知地知子知我知 를 가리키는 말이며, 세상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음 을 뜻한다. 四知와 비슷한 서양식 표현으로는 영어의 Walls have ears. 라는 속담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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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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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설날은 1월 1일이 아니다
설날은 명절 중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그리고 또 가장 널리 찾아볼 수 있는 명절이다. 그 시작은 달력이 생기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력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날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라.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새해 축하 행사는, 오늘날 이라크의 아르히라 도시에 가까이 있던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서 있었다. 당시 새해라는 의미는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나서 수확할 때까지 일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는데,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 그러니까 씨 뿌리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를 경축하였다. 그 축제는 열하루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대했던 것 같다. 첫째 날은 해뜨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서 성스러운 유프라테스 강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신이고 농업 신이기도 한 마르둑에게 다음해의 풍작을 기원하고 신성한 노래를 바쳤다. 그리고 작은 양의 머리를 잘라내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신전의 벽에 발라 그 성스러운 건물, 나아가서는 이듬해의 농작물을 온갖 병충해로부터 지켰다. 이 의식은 '쿠풀' 이라고 불렸으며 그 당시 헤브루인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식이 유태교의 '속죄의 날'에 행해졌다고 한다. 축연에는 많은 음식과 술이 나왔으나 이것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르둑에게 지난해 수확의 풍요함을 보여주고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엿샛날에는 가면을 쓴 배우의 무언극이 열렸는데 이는 풍작의 여신에게 바쳐졌다. 그 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개성을 살린 옷을 입고 화려한 춤을 추는 웅장한 퍼레이드가 신전을 출발해서, 종점인 '뉴이어 하우스' 라고 불리는 특별한 건물로 향하여 축하행사를 벌였다. 바빌론 시 교외의 뉴 이어 하우스 유적은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본래 봄의 씨 뿌리는 시기에 행해지던 새해 축하 행사가 어떻게 해서 한겨울로 옮겨졌을까. 이야기는 2,000년 전의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문학적으로나 농업적인 견지에서 말해도 한겨울인 1월을 농경의 주기나 한 해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 계절의 시작이라고 하는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때처럼 태양이 천구상의 기준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새해의 시작을 굳이 1월로 한 것은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로마 시대에도 처음에는 봄의 시작인 3월 25일을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경축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황제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임기를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려고 한 달의 길이와 일년의 길이를 제멋대로 주물러댔기 때문에 천문학 견지에서 본 달력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달력이 너무나 형편없이 되자 기원전 153년, 로마 원로원은 잘못된 달력을 바로잡고 새해를 1월 1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권력자들의 달력 고치기는 계속되어 달력은 일정하지 못했다. 기원전 46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다시 잘못된 달력을 바로잡고 1월 1일을 새해로 했으나, 그때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그 해를 445일로 정해야만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혼란의 해' 이다. 시저가 바로잡은 새로운 달력은 그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고 불렀다.
4세기 때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로 변했는데도 황제들은 계속해서 새해를 경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카톨릭 교회는 이교의 온갖 제전을 폐지하기 위해서 이들 제전에 기독교도의 참가를 금지시켰다. 이윽고 신자를 늘리고 그 영향력을 강화한 기독교 교회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정착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이교의 제전을 교묘하게 기독교 의식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교회가 새해 축하 행사에 대신하는 것으로 준비한 것은 기독교의 할례였다. 오늘날에도 카톨릭, 루터 교회, 동방정교회의 신자들은 1월 1일을 기독교의 할례제로서 경축하고 있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교회는 이 이교의 행사를 계속 적대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도시나 나라에서는 새해 축하 행사는 한동안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새해를 경축하게 되었을 때, 새해 첫날을 언제로 하느냐는 문제가 생겼다. 11세기에서부터 13세기까지 영국에서는 새해를 3월 25일, 프랑스에서는 이스터의 날로 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로 했다가 나중에는 12월 15일로 바꿨다. 이 무렵 유럽에서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던 것은 이베리아 반도뿐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설날이 1월 1일로 정해진 것은 사실은 아직 4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옛날부터 섣달 그믐날 밤은 일년 중에서 가장 시끄러운 밤이다. 옛날 유럽의 농민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 요란스럽게 풀피리를 불고 큰 북을 두드리며 곡물의 해충신을 내쫓았다. 중국에서는 이날 밤, 빛의 힘, '양' 과 어둠의 힘 '음' 이 만난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은 모여서 징을 두드리고 폭죽을 터뜨리는 관습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을 경축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로, 오늘날의 뉴욕 근처를 중심으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식민 도시를 건설한 네덜란드인들이다. 본래 그들에게 섣달 그믐날 밤에 떠들고 노는 것을 가르친 것은 본시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었다. 사람들이 신세계로 찾아오기 훨씬 전부터 이로쿼이 인디언(뉴욕 주에 살던 인디언)들은 이듬해 옥수수가 잘 되기를 기원하며 섣달 그믐날 밤에 의식을 지내는 관습이 있었다. 그 해에 남은 옥수수와 그 밖의 곡물, 헌옷이나 나무로 만든 가재 도구 등을 들고 다 같이 모여서 신년과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기원하며 그것들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던져 불태운다. 학자가 이러쿵저러쿵 추측할 것도 없이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참으로 명쾌한 의식이었다.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자신이 쓴 "황금의 가지" 라는 책에서, 이로쿼이 인디언의 섣달 그믐날의 관습을 또 한가지 소개하고 있다. "남자 여자 모두 가지각색으로 변장하고, 부락의 판잣집에서 판잣집으로, 주위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내던지면서 걸어간다. 인디언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는 정신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면죄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마음놓고 한다." 인디언들의 즐거워 보이는 난리법석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주민들도 질세라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다만 식량과 옷, 가구 등이 부족했던 탓으로 모닥불 속에 던져 넣을 수는 없었다.
1773년 뉴욕에서는 섣달 그믐날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두 달 뒤에 새해 축하용 폭죽이나 손으로 만든 꽃불, 공포를 사용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될 정도였다. 이렇게 설날이 왔다갔다 한 데서 파생한 것이 바로 만우절이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도 새해는 봄이 시작되는 3월 25일이었다. 그런데 1564년에 그레고리력이 도입되자 샤를 9세는 새해를 1월 1일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는 것을 싫어하거나 또는 깜빡 잊어버린 채 여전히 파티가 끝나는 날인 4월 1일에 선물을 교환하거나 파티를 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장난 삼아서 선물을 보내거나, 있지도 않은 파티에 초대하거나 하면서 그들을 놀려먹었다. 그리고 이처럼 놀려먹는 대상이 된 사람들은 '4월 물고기' 라고 불렀다(4월에는 태양이 물고기자리의 구역을 떠나버리니까). 사실 그 유명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도 두 번째 아내 마리아 루이자와 결혼한 것이 1810년 4월 1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그들을 '4월의 물고기'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그레고리력에 따른 새해에 완전히 익숙해지고 나서도 프랑스인들은 이 기묘한 만우절의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영국에 전해지게 된 것은 200년 후. 미국에 전해지는 것은 그보다 더 훗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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