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2장 인간관의 양상
1. 기독교인, 고대 그리이스인, 중국인
인간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인간관, 고대 그리이스인의 이교도적인 인간관, 그리고 중국인의 도교적, 우교적 인간관이 이것이다(불교적 인간관은 너무나 슬픈 것이어서 여기에는 넣지 않기로 한다) 이 세 가지가 내포하고 있는 우화적인 의미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생각하면 이 세 가지는 모두 본디 서로 틀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진보된 생물학적, 인류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이 이것을 좀더 널리 해석하면 한층 더 그 차이는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 원시적 형태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전통파 기독교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인간은 완전하고 천진난만한, 어리석기는 하지만 행복한 것으로 창조되어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에 지식과 지혜가 왔으며 또 그 다음엔 타락하여 낙원을 잃게 되어 인간의 고난이 시작된다. 그 고난은 주로, 1. 남자는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해야 하고, 2. 여자에게는 분만하는 고통이 지워졌다. 인간은 본디 천진난만하고 완전한 것이었는데, 오늘날 이 불완전한 꼴로 타락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요소가 하나 더 여기에 덧붙여졌다. 말할 것도 없이 악마라는 것이 이것이다. 인간의 보다 높은 천성은 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인데, 악마는 주로 육체를 통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영>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학사에서 언제부터 발명되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영>은 인간의 기능 이상의 것이 되었다. 조건이 아니라 실체가 되었다. 그러나 동물은 신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영을 갖지 못했으므로 이 영이 있고 없는 것으로 동물과 인간을 뚜렷하게 구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윤리는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리고 말았다. 악마의 기원을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이 예의 스콜라철학적인 윤리로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다가 그만 진퇴 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신이 아닌 악마가 신 그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말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고, 또 우주의 창세기에 있어 신이 아닌 악마가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영겁적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 결과 악마는 타락된 천사였음이 틀림없다는 의견에 일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악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속인 것이다(왜냐하면 이 타락된 천사를 유혹한 다른 악마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에서 영혼과 육체라고 하는 기묘한 2분법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신화적 관념은 오늘날 매우 널리 그리고 유력하게 행세하고 있어서 인생과 그리고 그 행복에 관한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속죄라는 생각이 생겼다. 여기서 오늘날 흔히 쓰이는 속죄의 어린양이라는 근대적인 관념을 빌어 오고 있는데, 옛날로 거슬러 올라 가면 군고기의 냄새를 좋아하여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신>이라는 관념에까지 이른다.이 속죄라는 관념에서 죄라는 죄가 다 한꺼번에 용서받는 수단이 발견되고, 교리를 완성하는 방법이 또다시 발견된 것이다. 기독교 사상의 가장 기묘한 생각은 이 <완성>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쇠퇴기에 발생한 것이어서, 죽은 뒤의 생명을 강조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고 행복론이나 또는 평범하게 산다는 문제 그 자체가 구세의 문제로 바뀌었다. 분명히 부폐와 혼란 속에 가라앉아 마지막 파멸 속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이 현세로부터 어떻게 하면 산 채로 빠져나갈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이 구세사상이라는 관념이다. 여기서 압도적인 중요성이 불사라는 문제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인간의 영생을 바라지 않았다는 창세기의 이야기에 대해 모순되는 이야기가 된다. 창세기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것처럼 지혜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은 아니다. 만일 그들을 내쫓지 않으면 또다시 신의 명에 거역하여 이번에는 생명의 열매를 따먹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나 않을까, 신은 이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다. 그는 팔을 뻗어 생명의 나무에서도 열매를 따먹어 영원토록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이신 하느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어 사람이 만들어진 흙을 갈게 하시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쫓아 내어 에덴 동산 동쪽에 케루빔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지혜의 나무는 에덴 동산 한복판 어느 곳엔지 있었던 모양이나 생명의 나무는 동쪽 어귀 가까이에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도 천사 케루빔이 버티고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망을 보고 있다. 요컨대 모든 것을 타락이라고 믿는 생각이 아직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즉인생의 즐거움은 죄이며 사악이다. 불쾌한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이 훌륭한 행위이다. 또 사람은 대체로 커다란 타력에 의지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죄의 교의는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의 근본적 가정이며, 개종자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기독교의 선교사는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인간성이 사악하다는 의식을 머리에 심어 주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그것은 물론 선교사가 포켓 속에 준비하고 있는 기성적인 구원이 필요해지기 위해서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전제이다) 요컨대 우선 첫째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믿도록 만들어 놓지 않으면 그를 크리스찬으로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조금 과격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 일까지 있다. <우리나라의 종교는 너무나도 편협하여 죄에 대한 생각만 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점잖은 사람은 이젠 교회에 나오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고대 그리이스의 이교도적인 세계는 독특한 별세계여서 인간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 또한 매우 다른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기독교가 인간을 신처럼 만들려고 애를 쓰는 데 비해 고대 그리이스인은 신을 인간처럼 닮게 만든 것이다. 저 올림피아의 신들은 확실히 쾌활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사랑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싸움도 하는가 하면 맹세도 어기고, 성도 잘 내는 패들이다. 그리이스인 자신처럼 사냥을 좋아하며 전차도 타고 창던지기도 한다. 아니 결혼까지 하는 패들로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생아를 가지고 있다. 신과 인간의 차이를 들자면, 신들은 다만 하늘에 천둥을 울리며 지상의 초목을 무성하게 하는 신력을 가지며 죽지 않고 영생하는 패들로서 포도주 대신으로 신주를 마실 뿐이다. 술을 만드는 열매는 대체로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이스인은 이 신의 무리들과 사이좋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폴로 신이나 아테네 신과 함께 배낭을 등에 지고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또는 도중에서 머퀴리 신을 불러 세워 웨스턴 유니온 회사의 심부름군 아이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에 흥이 나면 머퀴리 신이 <야아, 알았어. 그런데 좀 미안하지만 내가 얼른 뛰어가서 이 편지를 72번 거리에 전달하고 와야겠어> 하고 수작을 붙일 것 같은 모양을 상상할 수 있다. 때로는 참혹한 운명에도 따라야 하는 한정된 인생이라는 생각이 고대 그리이스인들의 머릿 속에 있었다. 일단 이러한 생각을 시인하게 되면 인간은 그 있는 대로의 상태를 달게 받게 되어 매우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이스인은 인생과 이 우주를 사랑했으며 자연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기에 몰두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진, 선, 미를 이해하려는 데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에는 에덴 동산과 같은 신화적 황금시대는 없고 따라서 인간 타락의 우화도 없다.
그리이스인 자신은 대홍수 뒤에 들판으로 내려온 데우칼리온과 그 아내 퓌라가 손으로 집어들어 어깨 너머로 던진 작은 돌로 만들어진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질병과 고생에 관한 설명은 더 우습다. 질병과 고생은 어느 보석 상자, 즉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젊은 여자의 욕망에서 나왔다고 한다. 고대 그리이스인의 공상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넓게 보았다. 기독교도들의 안목으로 볼 때에 고대 그리이스인들은 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체념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즉 그곳에는 이해력과 자유로운 사색적 정신을 구사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궤변 학자들 가운데는 인간의 본성을 선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악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대체로 근세의 홉즈 대 루소와 같은 심한 모순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에 와서는 인간은 욕망과 정서와 사상의 혼합물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이상적인 인생이란 예지 즉 참된 이해력이 가르치는 대로 이들 3자의 조화 속에서 살아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이념>은 불멸이나, 인간 개개의 영은 그것의 정의, 학문, 절제, 아름다움 따위를 사랑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천하게도 되고 고상하게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페도 편>에 있듯이 영혼도 또한 독존 불멸의 존재를 차지하고 있다. 즉 <영혼이 단독으로 존재하여, 그것이 육체에서 떨어져 있다면 또 육체가 영혼에서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라고 했다. 인간의 영혼 불멸에 관한 신앙은 분명히 기독교도, 고대 그리이스인, 노장 철학자 그리고 유교도의 견해에 공통되어 있는 점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근대의 영혼 불멸 신자가 덤벼들 만한 것이 아니다. 영혼 불멸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신앙은 아마도 현대인에게는 무미한 것이리라. 왜냐하면 재생설과 같은 영혼 불멸설을 지지하는 소크라테스의 모든 전제가 현대인에게는 수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인간관도, 인간은 창조주(만물의 영장)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유교가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천지인삼재>에 있어 인간은 천지와 격을 같이 한다. 그 배경은 정령설이다. 즉 만물은 살아 있으며 또는 정령을 가지고 있다. 산이나 강이나 또는 태고에서부터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에는 모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나 우레는 정령 그 자체이며 어느 큰 묏부리나 큰 강도 이것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정령의 지배를 받고 있다. 어떤 종류의 꽃이고 간에 꽃은 모두가 그 계절과 번영을 주재하고 있는 작은 정을 하늘에 가지고 있다. 만화여제라는 것이 있어서, 그 탄생일은 음력 2월 12일로 되어 있다. 어느 버드나무건 소나무건 향나무건 여우건 거북이건 몇 백 년 이상이라는 많은 나이에 이르면 이 불멸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두 정령을 갖게 된다. 이 정령설의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인간도 또한 영이 나타난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은 우주 전체 속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능동적, 적극적 즉 양의 원리와 여성의 수동적, 소극적 즉 음의 원리와의 결합에 의하여 생긴다. 이것은 실제로는 후세의 양전기, 음전기의 원리를 빈틈없이 상상한 것이 교묘하게 들어 맞는 데 불과하다. 이 영이 인간의 육체에 깃들면 백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육체에 머물지 않고 영의 상태인 채로 떠돌고 있으면 혼이라고 불린다(강렬한 개성, 즉 <영>을 가진 사람은 백력, 즉 백의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 혼은 죽은 뒤에도 계속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그 영은 보통은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는 것이지만, 사자를 매장한 뒤 공양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떠돌아다니는 망령이 된다. 물에 빠져 죽은 자나 타향에서 횡사를 하여 묻어줄 사람도 없는 사람들의 영에 대해 널리 공양하기 위해서 7월 15일을 우란분(망령 제일)로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또는 암살을 당했거나 억울한 죄로 원통하게 죽었거나 하였을 경우에는 그 망령은 억울하게 죽은 것을 분하게 여기는 나머지 허공을 떠돌며 그 부정에 대한 원한이 풀리어 원령이 만족할 때까지는 남에게 화를 준다. 원령이 만족하면 성화는 그만 풀리고 만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영혼이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니까 사람은 아무래도 어떤 종류의 번뇌, 욕망 즉 <활력의 흐름, 좀더 알기 쉬운 말로 할 것 같으면 마치(정신력)>에 해당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지만 그저 인생의 특질로서 갖추어져 있으며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남녀는 정렬, 자연적인 욕망, 고상한 야심, 또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성, 굶주림, 두려움, 노여움을 가지고 있고 질병, 고통, 오뇌,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수양이란 이러한 번뇌와 욕망을 조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적인 사고 방식으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이러한 인간성과 조화하여 생활함으로써 제6장의 끝에 인용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지와 동격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는 인간의 육의 욕망을 본질적으로 중세의 기독교도와 똑같이 본다. 즉 쫓아버려야만 하는 번뇌의 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머리가 좋아서 지나치게 생각하는 남녀는 이따금 이 사상에 물들어 그만 중이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유교의 상식은 대체적으로 이것을 금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다소 노장 철학의 영향에서 오는 것이긴 하지만, 박명하다고 고민하는 가인, 미녀는 인간적 망념을 품었다거나 또는 천상의 의무를 게을리 했다거나 하는 죄목으로 처벌을 받아 이 지상으로 쫓겨 내려와서 인간적 고난의 숙명 속에서 살아가는 <타락된 선녀>라고 보여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 정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정의 신> 즉 정신으로, 이 <정>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는 여우의 정이니, 바위의 정이니, 소나무의 정이니 하는 의미로 쓰인다. 영어로 가장 뜻이 가까운 말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vitality(활력) 또는 nervous energy(정신력)라는 말로, 하루 동안 때를 달리 하여 바닷물처럼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떠한 종류의 번뇌와 욕망, 그리고 이 활력으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노년 시절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은 여러 가지로 다른 주파를 가지고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에는 싸움을 경계하고, 청년 때에는 색을 경게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이득을 경계하라.
이 말은 다만 소년은 싸움을 좋아하고, 청년은 이성을 좋아하고, 노인은 돈을 좋아 한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은 이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인 것의 혼합물에 당면할 때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태도를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도 갖는다. 그것은 <적당히 해나가자>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것이다. 결국 이것은 무슨 일이고 간에 너무도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또 너무 적은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인간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숭고한 사상과 비천한 번뇌 사이에 끼여 있다. 이렇게 끼여 있다는 것이 본디 인간성의 본질인 것이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 물에 대한 갈증도 있고 훌륭한 사상도 좋아하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도 또한 좋아한다. 훌륭한 말도 좋지만 미인도 버리기 어렵다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의 상태니까 이 세상은 아무리 해도 불완전한 세상이라는 것이 된다. 인간 사회를 상대로 하여 그것을 여러 가지로 개선할 기회는 물론 있겠지만 중국인은 완전한 평화니 완전한 행복이니 하는 것은 그다지 탐내지 않는다. 다음에 드는 우화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사나이가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태어나려고 할 때에 염라대왕에게 다음과같이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사람으로서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다고 해도 제가 희망하는 조건이 아니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대왕은 물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나이는 대답하여, <이번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제상의 아들로서 태어나거나 또는 장래의 <진사-국가 시험 합격자>의 아버지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싫습니다. 집 주위에는 1만 정보의 땅과 물고기가 있는 연못과 모든 종류의 과일과 선량하고 애정이 두터운 아내와 아름다운 첩들이 없다면 싫습니다. 천장까지 황금과 진주로 꾸민 많은 방과 곡식이 가득 들어 있는 곳간과 황금이 꽉찬 가방도 없으면 싫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은 왕후 장상이 되어서 명예와 번영을 마음껏 누리고 백살까지 오래 살지 못하면 싫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대답했다. <사바 세계에 그런 인간이 있다면 이 내가 다시 태어나서 사바로 가겠다. 너 같은 것을 보낼 것 같으냐!>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생을 출발하자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인 것이다. 어쨌든 인간성으로부터 도피할 길이라곤 그 밖에는 없다 번뇌니 본능이니 하는 것은 본시 선이니 악이니 하고 이러쿵저러쿵 해 본댔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도리어 인간이 그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게 될 위험성이 있다.
의젓하게 길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춰라. 이러한 중용적인 태도에서 일종의 관대한 철학이 생긴다. 적어도 중용적 정신을 신봉하면서 살아 나가는 교양있는 너그러운 철인의 눈으로 보면, 이 철학은 법률적이건 도덕적이건 정치적이건 가릴 것 없이 <인간의 공통성>(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정상적인 인간적 번뇌>)의 부류에 드는 모든 인간적 과실이나 또는 옳지 못한 행실은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했다. 하늘, 즉 신 그 자체는 중용적인 존재여서 인간은 자기가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생활을 해 나간다면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에 가장 큰 선물로 오는 것이 양심의 평화이며 마음을 흐리지 않는 사람은 명령까지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을 둘 다 주관하는 중용적인 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 일은 모두 순조롭게 되어 나가는 것이다. 결국 폭군은 죽고, 반역자는 자살하며, 욕심 많은 사람의 재산은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노력가로 돈이 많은 골동품 수집가의 아들들(부친의 탐욕스러운 이야기와 권세를 부리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은 부친이 매우 고생하여 모은 수집품을다 팔아먹어 버려서 그 골동품은 이제는 사방으로 흩어져 남의 소유물이 되어 있다는 것 따위다. 살인자는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욕을 당한 여자들은 복수를 하게 된다.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학대받은 사람도 외친다. <하늘은 눈도 없단 말이냐!>(정의는 장님) 결국 도교, 유교 할 것 없이 어느 것에 있어서도 이 철학의 결론과 그 최고의 목적은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 또는 자연과 완전히 조화하는 것으로서, 이 사상을 분류하는 알맞은 용어가 필요하다면 <중용주의적 자연주의>라고나 해 두리라. 이 중용주의적 자연주의는 일종의 동물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이 인생을 살아 가게 된다. 어떤 무식한 중국 부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낳았고, 또 우리들은 눈군가를 낳는다. 그밖에 우리더러 무엇을 하란 말이냐> <누군가가 우리들을 낳았고, 또 우리들은 누군가를 낳는다> 이 말에는 무서운 철학이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인생은 한낱 생물적 과정이 되어 버리며 불멸론이니 하는 따위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도 없게 된다. 그것은 틀림없이 손자의 손을 잡고 과자를 사러 가는 중국인 할아버지의 생각인 것이다. 이때 이 할아버지의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은 5년이나 10년만 지나면 나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 조상님들의 앞으로 가는 것이다 하는 정도의 생각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남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나 손자를 두는 것이다. 중국인적 생활 방식은 모두가 이 한가지 생각에서 짜여져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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