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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20호
2011.11.13 (음 10.18)/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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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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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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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지난 7월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을 낸 백가흠(37)입니다. 과분하게도 이 작품으로 ‘(한국 문학의) 힌트는 백가흠’이란 별명도 얻었습니다.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광어’란 단편소설로 등단했습니다. 죽은 척, 모른 척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광어와 같았던 문학 청년에게 신춘문예는 문학을 넘어 삶의 열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작가들은 누구보다도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문학계의 든든한 자양분이자 대들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불멸의 청춘, 문학의 열정 그 대열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2012서울신문 신춘문예는 단편소설, 시, 희곡, 시조, 동화, 문학평론 6개 부문에 걸쳐 응모를 받습니다.
■모집 부문 및 상금 ●단편소설(80장 안팎) 500만원 ●시(3편 이상) 300만원 ●희곡(90장 안팎) 250만원 ●시조(3편 이상) 200만원 ●동화(30장 안팎) 200만원 ●문학평론(70장 안팎) 250만원
●마감 2011년 12월 9일 금요일(우편접수는 9일 도착분까지 유효) ●보내실 곳 100-745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 25 서울신문사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당선작 발표 2012년 1월 1일자 서울신문 지면 ●응모 요령
-응모작은 기존에 어떤 형태로든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같은 원고를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거나 기존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인정될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서류봉투 겉과 원고 첫 장에 응모 분야 및 작품 제목을 명기하고, 원고 마지막 장에 이름, 주소, 연락처 등을 적습니다. 직접 방문 접수는 가능하며 이메일이나 팩스로는 받지 않습니다. -접수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문의 서울신문 편집국 문화부 (02)2000-9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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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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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습관은 인생의 여러가지 불행 가운데 상당 부분으로부터 당신의 몸을 보호하는 하나의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 S.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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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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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엠제트
방송말’로 시작해 ‘말글살이’로 옷을 바꿔 입으며 여러분과 함께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매주 글감 골라 얼개 잡고 초고(草稿) 쓴 뒤 퇴고(推敲)하는 일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누덕누덕한 글 깁고 모자란 뜻 보태며 원고 다듬기 위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수십 차례 눈으로 훑어보고 소리 내며 곱씹어 읽어가다 보면 뜻은 제대로 담았는지, 내용 흐름엔 무리가 없는지 갈피 잡지 못할 때 없지 않기에 그렇다. 지난주 이 자리에 실린 ‘사리’도 마찬가지 과정을 밟았다.
최현정 아나운서는 “마지막 문단의 순서를 바꾸면 뜻이 더 또렷해지겠다”며 문학 전공자답게 짚어주었고, <뉴스데스크> 진행 짬짬이 외서 번역하느라 원고와 씨름했던 이정민 아나운서는 ‘이 빠진 따옴표’를 찾아 교정해 주었다. 스포츠 중계하며 외래어 표기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허일후 아나운서는 “D.O.C를 ‘디오시’로 표기하는 게 맞느냐”며 “차제에 외래어 표기를 제대로 짚어 달라”는 제안도 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영어 외래어 표기를 따져보려 한다.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영어 로마자를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 에이, 비, 시, 디, 이, 에프, 지, 에이치, 아이, 제이, 케이, 엘, 엠, 엔, 오, 피, 큐, 아르, 에스, 티, 유, 브이, 더블유, 엑스, 와이, 제트. C와 G, H 그리고 R와 S, V, Z에 유의하자. ‘씨, 쥐, 에이취, 알, 에쓰, 뷔, 지’가 아니다. 예컨대 와이더블유시에이, 티브이, 디엠제트이다. “고엽제와 제초제는 춘천 북쪽 DMZ[디엠지] 지역에 살포됐습니다”(ㅅ방송 뉴스), “아시아나 OZ[오지]140편을 시작으로…”(ㅁ케이블방송)는 ‘Z’의 발음을 잘못한 것이다. ‘Z’를 ‘지’로 적고 발음하면 ‘G’와 혼동될 수도 있다. ‘제트’라 하는 게 입에 붙지 않는다면 DMZ는 ‘비무장지대’, OZ는 ‘아시아나항공’이라 하면 될 일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정보무늬
사회생활 하며 익혀가는 세상살이 중의 하나가 명함 주고받는 법이다. 상대방과 눈 맞추고 두 손 모아 명함 건넨 뒤 악수를 청하는 게 기본. 내키지 않은 만남이어도, 인사치레에 그칠 거라는 걸 뻔히 알아도 ‘명함 거래’는 빠질 수 없는 사회 예절이 된 듯하다. 자신의 정보를 드러내는 명함은 시대 흐름을 담아내기도 한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일색이던 명함이 형형색색 다양한 빛깔로 옷을 갈아입은 건 오래전의 일. 플라스틱이나 헝겊으로 만든 게 있는가 하면 금박, 은박 명함도 있다. 인쇄 대신 구멍 뚫기도 하고 오톨도톨하게 점자 찍은 것도 있다. 최근에는 ‘이것’이 박힌 명함이 부쩍 많아졌다. 얼마 전 네덜란드에서는 이것을 새긴 기념동전까지 만들었다니까 말이다. 요즘 정보 전달 방법의 추세인 이것은 큐아르(QR)코드이다.
인터넷과 인쇄 광고, 명함은 물론이고 건물 외벽에도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큐아르코드는 ‘숫자 최대 7089자, 한자 등 아시아 문자 최대 1728자의 정보를 담을 수 있어서’(위키피디아) 스마트폰의 인식 기능과 더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큐아르는 ‘퀵 리스폰스’(Quick Response)의 머리글자를 붙여 만든 용어이다. 뜻이 단번에 들어오지 않는 표현이라 마뜩잖던 터에 ‘정보무늬’가 눈에 확 띄었다. 큐아르코드=정보무늬. 뜻도 그럴뿐더러 부르기도 썩 괜찮은 표현이다.
정보무늬는 국립국어원이 누리꾼과 함께 다듬은 말이다. ‘우리말 다듬기’에서 정리해온 표현은 이번주까지 315개. 댓글(리플)을 시작으로 누리꾼(네티즌), 누리집(홈페이지) 같은 온라인 용어와 각자내기(더치페이), 대리주차(발레파킹), 꾸러미상품(패키지상품) 등을 다듬은 생활용어는 제법 자리잡아가고 있고, 누비옷(패딩)이나 조리법(레시피)처럼 외래어에 치여 제구실을 못 했던 말은 되살아났다. 억지로 꿰맞춰 헛것이 된 말도 적지 않다. 말 다듬기 성과를 ‘숫자놀음’으로 가늠할 일은 아니다. 말글살이의 임자인 언중의 뜻을 한층 더 살피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백넘버, 노게임
야구에서 백넘버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29년 미국 양키스 팀에 의해서다. 그 뒤 아메리칸리그는 31년에, 내셔널리그는 33년에 정식으로 백넘버를 사용하게 됐다. "박찬호가 백넘버 61번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승엽이 자진해 25번 유니폼을 입고 미야자키 캠프에 들어갔다. 25번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마크 맥과이어.배리 본즈 등 홈런왕의 백넘버로 유명하다" 등에서 보듯 운동선수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번호, 즉 백넘버가 쓰인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러나 '백넘버'는 영어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콩글리시다. 언중이 많이 쓰는 바람에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만 정확하게는 영어로 '유니폼 넘버(uniform number)'라고 해야 한다. '백넘버'의 우리말 순화용어는 '등번호'다.
'백넘버' 말고도 스포츠에서 많이 쓰이는 '노게임' 또한 콩글리시다. "한국이 3-2로 이기고 있는 4회 말 상황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노게임이 선언됐다" "두산 선수들이 오랜만에 우천으로 인한 노게임 세리머니를 펼쳐 발길을 돌리는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처럼 '노게임'이란 말이 흔히 사용되지만 영어에는 없는 말이다. '노게임' 대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경기가 무효가 됐다" 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이 밖에도 '노'가 들어간 '노 타이틀' '노 세일' 역시 콩글리시다.
아구, 쭈꾸미
한국인만큼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싶게 우리나라엔 매운맛을 주된 맛으로 하는 요리가 많다. 그중에서도 콩나물.미더덕.미나리 등이 벌겋게 버무려진 아구찜, 갖은 양념과 고추장을 함께 넣어 볶은 쭈꾸미 볶음은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음식점에 들어가 보면 차림판에는 '아구찜' '쭈꾸미 볶음'처럼 '아구' '쭈꾸미'라 쓰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구'와 '쭈꾸미'는 '아귀''와 '주꾸미'가 맞는 말이다. 아귀는 원래 음식 재료로 쓰이지 않는 물고기였다고 한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아귀는 못생긴 데다 이빨도 촘촘해 쓸모없다고 여겨 어부들이 그물에 걸려들면 재수 없다며 버리던 물고기였다. 그러던 아귀가 마산에서 술안주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아구'는 '아귀'의 사투리인데, 지방에서 불리던 '아구찜'이 인기를 얻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표준어인 '아귀'가 아닌 '아구'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쭈꾸미'는 '주꾸미'를 편리하게 발음하다 보니 된소리로 잘못 적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꾸미 볶음' '주꾸미 구이' '주꾸미 탕'처럼 표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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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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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들려주는 紋章 - 차주일
거미가 실을 잣아 영역을 넓힌다 넓힐수록 좁아드는 평생 감옥을 밤새 개간한다 밭두렁 같은 그물에 붙들린 허공에서 거미가 구름을 뜯어먹고 바람을 경작한다 부대밭 다랭이 몇으로 일가를 꾸리는 여자는 거미 발동작처럼 허벅지 문질러 베실을 삼았다 삼베에서 평생 손발 떼어보지 못한 몸은 삼베를 닮아갔다 결국 제가 짠 베옷을 입고 저승 갈 어미, 가 짠 삼베수건에 얼굴을 닦던 시절이 있었다 막걸리 잡순 입술을 훔친 할아버지의 트림소리 인골 몇 조각을 그러 묶는 할머니의 아귀힘 거름냄새와 버무려진 아버지의 땀내 악보 없이도 매년 똑같은 어미의 흥얼노래 누이들의 요동치는 젖살 파동까지 모두 삼베수건에 매달려 있었다 어미가 짠 삼베는 거미줄보다 센 자성을 갖고 있다 가족들은 끼니때마다 삼베밥보 앞으로 모여들었다 삼베밥보 밑은 성지여서 밥은 순교자처럼 교교했다 허벅지가 굵어진 새끼들은 어미로 출가했다 내 유년의 성지를 다시 만난 건 출가한 지 삼십여 년 지난 한식날 선산에서였다 삼베밥보는 아직도 일가의 제삿밥을 덮고 있었다 그 삼베밥보를 모셔다 문장(紋章)으로 걸었다 밤마다 베틀 소리 하염없이 들려왔으나 문양 하나 보이지 않는 완전한 은폐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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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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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양주(家釀酒) - 박상문
최초의 술 만든자 우(禹)나라 때의 의적(儀狄)으로 과일껍질 빵 조각 쓰레기통에 모은 것이 발효돼 달콤한 냄새 얼키 한 맛이 주창(酒創)의 효시(嚆矢)였다.
밀 갈아 띄운 누룩 술 빚어 천신께 올려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으로 성영께 제례(祭禮) 지냄은 지해론 큰 선각자의 창주원조(創酒元祖) 덕분이라네.
한 끼 밥 굶더라도 술 한 잔은 꼭 마시며 금덩이만 마음 변하게 하는 것 아니고 흰 술도 얼굴 붉게 할 땐 하늘이 돈짝만 했지.
뱀이 물을 마시면 큰 독을 이루어내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어 내듯 큰 어른 진묵대사는 곡차마시며 제호(醍?)이루었다.
임란 때 사명대사 호국일념 어명 받아 적국 일본 풍신 수길 밤을 새며 수로 제압 범주(法酒)로 항복받아내 높은 경지 구국선양.
부아 산(負兒山) 정기 받아 모여 사는 민초들이 천지신명께 올린 가양주 한 잔으로 샘처럼 마르지 않은 무진장의 상징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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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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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보며 -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서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욕심 없이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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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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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1장 깨우침
3. 이상으로서의 자유인
정신적으로 말하면 동양과 서양의 혼혈아라고 할 만한 내 입장에서 말한다면 인간의 위엄은 인간이 짐승과는 다른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간에게는 유희적인 호기심과 지식을 탐구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둘째로는 여러 가지 꿈과 높은 이상주의가 있다(막연하여 두서가 없고 한낱 자만에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대견한 일이다) 셋째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유우머의 감각으로 꿈을 수정하고 보다 늠름하고 건강한 현실주의로 이상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끝으로 인간은 동물과 같이 기계적이며 일률적으로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자진해서 자기 자신의 반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여 자신의 의지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갖고 있다. 이 맨 끝의 사실은 인간의 개성은 마침내 기계적인 법칙에 복종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딱 잡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고 포착하기도 어렵고 예언하기도 어려운 것이어서, 정신이 돌아버린 심리학자나 독신인 경제학자들이 억지로 인간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기계적인 법칙이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어떻게든지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묘하고 꿈이 많은 유우머러스하고 변덕스러운 동물이라고 하겠다.
나의 최근 저서인 <내 나라 내 국민>에서 <노회한 철학자>를 예찬하려고 했다는 것이, 독자 여러분이 받은 에누리 없는 인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에누리 없는 인상으로서 자유민을 예찬하는 데 저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준다면 나로서는 그 이상 더 바랄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디 그래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것처럼 보여도 세상일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개인적인 자유가 몹시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시대에 살면서 잘 훈련되어 있고 순종적이며 조직화 되고 획일적인 노무자들의 무리 속에서 번호 순서대로 지급되는 신세를 면하려면 오직 이 자유민과 자유민적인 정신을 갖는 것밖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자유민이야말로 독재주의에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마지막 적일 것이다. 자유민이야말로 인간의 위엄과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뽑히고 뽑힌 투사들이며, 마지막까지 정복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근대 문명은 오로지 자유민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줄 안다.
중국인으로서 나는 말하는 것이지만 어떤 문명이건 인위에서 자연으로 진보하여 의식적으로 소박한 사색과 생활로 돌아오게 되기 전에는 이를 완전한 문명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어떠한 인간이건 현명한 자의 지혜를 터득한 다음 어리석은 자의 슬기를 몸에 익히어 우선 인생의 비극을 먼저 느끼고 있어서 인생의 희극을 깨닫게 되어 큰소리로 웃을 수 있는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그를 현명하다고는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소리로 웃을 수 있게 되기 전에 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맛보는 데서 깨달음이 생기고, 그 깨달음에서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을 아울러 지닌 철학자의 홍소가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엄숙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너무나도 엄숙한 것이기에 현명하고 명랑한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니이체가 쓴 말로 무엇인가를 부를 수 있다면 중국인의 생활 철학이야말로 진정 명랑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명랑한 철학만이 심원한 철학인 것이다. 서양의 엄숙한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철학이 지닌 유일한 기능은 어떤 것인가 하면 세상의 일반 실업가들이 생각하고 있는것보다도 더 가볍고 명랑하게 인생을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곧 나이가 쉰 살이나 되어 은퇴하려면 할 수 있는데 은퇴도 하지 않는 실업가는 내가 보기에는 철학가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인 사고 방식인 것이다.
인간이 이같이 가볍고 명랑한 정신에 물들었을 때야말로 세계는 한층 더 평화롭고 온당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 인생을 너무나 엄숙하게 대한다. 너무 엄숙하게 대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골치 아픈 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인간의 기질이 좀더 온당하고 평화롭고 또한 냉정한 것이 되게 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마도 이것은 한 학파의 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중국 민족의 철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자보다도 위대하고 노자보다도 위대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철학에는 공자, 노자, 그밖의 엣날 철학자들이 주장한 것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철학은 이들 사상의 원천에서부터 솟아나와서 그것을 한 개의 전체적인 것으로 조화시켜 그들이 지닌 예지의 추상적인 요령을 따서, 현대인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실제적인 생활법을 창조한 것이다. 중국의 문학, 예술, 철학들을 일관해서 맥맥히 흐르는 메시지이며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끈질기고, 가장 색다르고, 가장 필요한 중국 사상의 되풀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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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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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선과 악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이 도시의 원로인 한 사람이 나와 말했다. 선과 악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대해 그는 말했다.
내가 그대들 안에 있는 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악에 대해선 말할 수 없노라. 대체 악이란 무엇인가. 단지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 실로 선이 굶주릴 때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컴컴한 동굴 안에서도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를 때는 썩은 강물이라도 달게 마시는 법인 것을.
그대들이 자아와 한몸이 되어 있을 때는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비록 자아와 한몸이 되어 있지 않을 때라 하여 악한 것은 아니다. 내분이 심한 가정이라고 해서 도둑의 소굴은 아닌 것. 다만 그것은 내분된 집일 뿐. 또한 키없는 배가 위험스런 섬 주위를 정처없이 떠돌지라도 아주 가라앉는 것은 아닌 것. 그대들이 스스로를 베풀고자 노력할 때 그대들은 진실로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할 때에도, 그대들은 대지에 엉켜 그 심장을 빠는 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뿌리에게 <나와 같으라. 무르익고 가득 넘쳐, 언제나 그대의 풍요를 주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리라. 뿌리는 언제나 받아야 하고 열매는 언제나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들이 깨어나 말할 땐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의 혀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비틀거리며 잠들고 있을 때라 하여 악한 것은 아니다. 더듬는 말일지라도 허약한 혀를 튼튼하게 해줄는지도 모르게 때문에. 그대들이 목적지를 향해 확고한 걸음으로 걸어나갈 때, 진실로 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절룩거리며 저편으로 갈 때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절룩거린다고 뒤로 물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나 강하고 재빠른 그대들이여, 보라, 그대들은 절름발이 앞에서 결코 절름거리지 않는 것을. 그것이 친절한 행위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들은 선하다. 그러나 선하지 않을 때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대들이 게으른 것일 뿐. 가엾게 여겨라. 숫사슴도 거북이에게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칠 수 없음을. 그대들이 대아를 갈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그 갈망은 그대들 모두의 가슴속에 있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언덕의 비밀과 숲의 노래를 이끌어 힘차게 바다로 흘러가는 급류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잔잔한 강물로서, 바다에 이르기 전의 강물에서 스스로를 잃고 헤매인다. 그러나 열렬히 갈망하는 이로 하여금 갈망하는 것이 없는 이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느리고, 머뭇거리기만 하느냐라고 묻게 하지 말라.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란 헐벗은 이를 보고 <당신의 옷은 어디에 있소>라고 묻지 않으며, 또한 집없는 이에게 <당신의 집은 어떻소>라고도 묻지 않는 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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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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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첫째 묶음 - 생활 속의 심리
자살
자살의 동기를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가지각색이다.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하찮은 일로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환경 조건이 꼭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누구나 그의 자살을 수긍하는 유형도 있다. 미워하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죽는 경우, 원한에 사무친 상대방을 죽이려다 반대로 자기가 죽는 경우, 끝끝내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살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 죽음을 최고의 황홀경으로 찬미하면서 죽어 가는 경우 등등 실로 백인백태라 하겠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유형의 자살에 공통되는 요인은 무엇일까. 먼저 자살하려는 중년의 미혼녀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자살하려는 마음의 경로를 보기로 하자.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직업 여성으로서 30여 년 간 어머니를 모시며 두 남동생을 길러 오던 갸륵한 여인이다. 그러나 동생들은 싹수있어 보이지 않고 살아갈수록 경제적 부담은 가중된다. 설상가상으로 부양하는 식솔들은 동정은커녕 원망만 하는지라 그녀는 완전히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그녀가 자살을 결심한 네댓 달 전의 일이다. 알콜 중독으로 치료 중이던 동생이 병원을 뛰쳐나와 술집으로 싸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하룻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그후 얼마 안 가서 다음 동생이 장사한답시고 누이의 돈을 가져다 툭 털어먹고는 또 돈을 달라고 졸라댔다. 하는 수 없이 돈을 떼이고 나서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공연한 흥분과 초조감으로 밤마다 한두 시간 잘까말까 하는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족들은 염치없게도 맨날 호의호식할 생각만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때때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죽어 버려 저희들끼리 아무렇게나 살게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차마 죽지는 못하고, 그럴 때마다 죽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자기 자신을 꾸짖곤 했다. 두어 달 후에 동생이 사업에 실패했다며 돈을 얻으러 왔다. 그녀는 가족들이 돈을 주라고 성화같이 조르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돈을 주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가슴이 뛰고 변비가 심해졌으며, 불면증은 물론이요 공연히 슬퍼져 활기 잃고 세상이 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 모든 것이 싫어져 강에 투신하려고 다리를 몇 번이나 찾아갔으나, 그때마다 용기가 없어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 상태가 너무나 괴로워서 단골 의사에게 증세와 심경을 토로하였더니 의사는 죽으려고 했다면 당신도 동생들과 똑같이 못난 사람이 아니냐며 바로 입원할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이 의사의 말을 듣고 자기멸시, 자기비난의 말투만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불현듯 꼭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면서 가스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다 결국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입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울증 환자의 자살 미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자살의 심리적 기제를 잘 보여주는 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위협이 주는 불안이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동생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과 그 동생들이 원수같이 미워져서 멀리하려는 증오심과의 상호 갈등도 있을 것이며, 그리고 미혼으로 늙어 가면서 아마도 젊은 시절에 있었을 애정 사건에 관한 갈등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건들로 미루어 이 여자에게는 심각한 불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불안에서 도피하려고 때때로 자살을 염두에 두나, 그런 생각 자체가 죄악감을 일으켜 불안을 더욱 조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불안의 원천이 되는 복잡한 갈등들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이유 모를 불안 초조감만 느끼고, 가족들이 자기를 동정하지 않고 못살게 군다는 생각으로 심한 증오심만을 가족들에게 가졌으리라 보인다. 한편 자살을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용기 부족한 자기를 경멸하고 비난하는 경향도 있다고 보인다. 그러는 중에 의사의 말로 인해 자기멸시는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때까지 동생이나 가족들에게 가지고 있던 강한 증오심과 공격적 성향은 사회적 규제로 억압되어 왔는데, 자기도 동생들과 똑같이 하찮고 못난 존재라는 자기멸시감이 생겨 동생들에게 향했던 공격적 성향이 자기에게로 향했다고 해석된다. 요컨대 자살의 심리적 기제로 중요한 것은 자살의 소지를 만들어 주는 불안상태다. 실패를 거듭하고 격심한 갈등을 겪는다든가 곤경에 빠지게 되면, 불안은 고조되어 열등감, 고독감, 무감동 내지 자기 중심적인 협소하고 우둔한 지능 등이 증후로 나타난다. 이같은 심리적 상태가 자살 경향을 조성하고, 그 다음에 적당한 계기로 직접적 동기를 얻어 죽게 되는 수가 많다. 실연으로 고민하고 얼이 빠져 있다가 자신이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의 급사에 낙심하고 죽는 것은 그럴 듯한 구실을 얻어 죽는 것이다.
그밖에 자살을 실행하게 하는 데 두 요인이 작용한다. 공격성과 도피성이 그것이다. 어떤 갈등이나 불만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불같은 공격성향이 있으나, 억제하는 힘 때문에 원래의 대상은 공격하지 못하고 이것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는 경우다. 타인 살해 경향이 대개는 자살로 반전되곤 한다. 실연 끝에 애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거나 자기만 죽는 것이 이런 경우다. 공격성은 자살 경향에 불을 지르는 요인이라 볼 수 있다. 불안 상태에 있으면 괴로운 상태로부터 빠져나가는 방법은 무엇이나 좋게 생각되고, 불안 상태 외의 다른 모든 것은 평화스럽고 즐거운 상태로 보인다. 여기에 불안 도피로서의 죽음은 미화되고 매력을 띠게 된다. 공격성이 뒤에서 밀고 도피성이 앞에서 잡아당겨 자살은 유인력을 가지고 실행된다. 지나친 불안이 사람을 우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얽매인 쇠사슬을 끊으려고 몸부림치다 못해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는 인간의 우둔함이여!
"196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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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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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두통
어떤 사람이 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물론 나는 그의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가 나의 발을 만졌기 때문에 그의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이 나의 발에 닿았다. 나는 단지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가방 안에 물이 든 병을 넣어가지고 있었다. 나의 발이 그의 가방에 닿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발이 그 병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는 나에게 와서 감사하다고 매우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당신께서 제 병을 고치셨습니다." 내가 물었다. "무슨 병이었는가? 나는 그대가 병들었는지 알지도 못했었다." 그가 말하였다. "저는 몇 년간 심한 두통을 앓아왔습니다. 먼젓번에 저는 물을 한 병 담아 왔는데 당신이 발로 그것을 만졌지요." 내가 말하였다. "나는 결코 그것을 만진 적이 없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아무튼, 당신이 그 병을 만졌고 저는 며칠 동안 그것을 마셨습니다. 그랬더니 두통이 말끔히 가셨습니다."
- 그대는 항상 그대 자신과 다른 사람만을 믿어 왔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는가?
자기 꾀에 넘어가는 사람
언젠가 나는 함께 지내던 사람과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한밤중에 나는 화장실에 다녀와야만 했었다. 그는 매우 졸려 반은 깨어 있고, 반은 잠든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나의 침대를 바라보았을 때에, 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후에 몇 초 동안 잠에 곯아떨어졌음에 틀림없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가 눈을 뜨니 내가 다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몇 초 동안 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의 다리를 붙잡고 말하였다.
"제발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어떻게 당신께서 그것을 하실 수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저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참된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네가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하여 말할 기회는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너무나 바보스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저를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할 수 있는 스승을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저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 마음의 유희는 매우 미묘하다. 그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그대는 내가 행하지도 않은 일을 통하여 일을 진행시킬 수도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다. 다른 누가 그대를 속일 필요가 없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속인다. 그대는 스스로 자기 꾀에 넘어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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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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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67. 사실에 바탕하여 진리를 탐구한다 - 고증학의 발달(18세기~19세기 전반)
중국의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회변동과 상황에 맞는 사상들이 발달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사상이 나왔으며, 진시황 대의 분서갱유를 거쳐 한 대에 이르면 유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학문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대부분의 유교경전의 내용이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한나라에 들어오면 잊혀지고 사라진 유교경전에 관한 내용과 그 뜻을 밝혀내는 학문이 발달하는데 이것을 훈고학이라고 한다.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정확하게 밝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이 훈고학적 전통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송나라에 들어오면 단순히 유교경전의 글자 해석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전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된다. 그때 나온 사상이 성리학이고, 그 성리학의 세계관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나온 것이 양명학이다. 성리학이나 양명학은 인간과 세계, 자연의 이치를 보는 철학적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그와 같은 철학적 논의가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고염무 등이다. 이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면 처벌받기 때문에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도 쉽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과거의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경전의 뜻을 더욱 정밀하게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좀더 확실하게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일반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서양의 제주이트 교단 선교사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어 중국의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성립하는 청대의 학문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고증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진살을 구한다는 '실사구시'를 주장한다.
성리학이나 양명학과 같이 경전의 글자 하나 문장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적인 측면으로 관실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실을 구한다는 고증학자들은 우선 경전연구에 있어서는 한나라에서 이루어졌던 훈고학 쪽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훈고학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근거한다는 말과같이 객관적인 증거를 수집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전해내려오던 경전 하나하나를 다시 연구하여 어떤 것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이 위조한 것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고증학적인 분위기는 역사학, 지리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며, 특히 옛날의 비문이나 종 등에 새겨진 글을 판독해내는 금석학 같은 진실을 밝히는 매우 중효한 방법의 하나였다. 청대 고증학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특히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고전서)인데, 이것은 수만권에 이르는 책을 모아 분야별로 분류해서 정리한 대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청나라의 사상탄압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한족들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강경책과 회유책을 교묘하게 동원해야 했다. 관직에 만주족과 한족을 같은 수로 임명한다든지 하는 것이 한족을 회유하는 하나의 예라고 하면,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사상의 탄압, 변발의 강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금지 등은 만주족이 그들의 혈통을 잃지 않으면서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강경책에 해당한다. 그러한 강경책 중 하나가 바로 '문자의 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족 지식인들이 청조를 비난하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강력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사상탄압을 받아 회생되었다. 전국의 서적을 모아 검토하여 편찬한 결과인 (사고전서)도 실은 그 책들의 내용을 검토하여 청조를 비난하는 책들을 가려내어 읽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족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적인 문제에 눈을 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편찬사업에 동원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고증학은 성리학이나 양명학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방여하는 하나의 사상체계라기보다는 방법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한 학문이덨다. 물론 유교경전이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해내어 근대지향적인 사상을 찾아내려는 노력들도 행해져 성과를 거둔 부분도 있으나, 그 시대 전체를 주도할 만한 사상체계나 혹은 다가오는 근대세계를 맞아 사회의 핵심적인 사상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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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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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三暮四(조삼모사) 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열자(列子)의 황제(黃帝)편과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원숭이를 기르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기록한 대목이 있다.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숭이를 너무 사랑하여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원숭이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원숭이들도 저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원숭이를 사육하다 보니 먹이 대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는 원숭이의 먹이를 제한하고자 하였으나 많은 원숭이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서 먼저 그들을 속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 준다면(若與 朝三而暮四) 족하겠느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면 족하겠느냐?"라고 했다. 이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朝三暮四 란 본시 눈 앞의 차이만을 알뿐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나,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이고 농락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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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典》'列子' 黃帝篇 / '莊子' 齊物篇
宋有狙公者 愛狙養之成群 能解狙之意 狙亦得心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焉 將限其食 恐重狙之不訓於己也 先?之曰 與若?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 朝四而 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준 말】조삼(朝三) 【동의어】조사모삼(朝四暮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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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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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낙타를 타고 온 산타클로스
산타클로스의 모델, 성 니콜라스는 4세기 초 터키 남동쪽에 있던 고대 국가 리시아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신앙심이 깊어 하느님을 존경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주일에 두 번(수요일과 금요일)씩 단식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리시아 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그의 인생을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고 갖가지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맨 처음 기적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해 도중에 사납게 굽이치는 파도를 두 팔을 벌려 진정시킨 것인데 그 기적으로 그는 선원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 니콜라스는 미라의 주교였다. 뛰어난 설득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그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 존재로 로마의 지배자들에게는 괘씸한 존재였다. 이윽고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폭군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령으로 투옥되었다. 하지만 온갖 포악한 짓을 다 저지른 황제는 60세가 되자 시골로 돌아가 양배추를 심으며 살고 싶다고 하더니 갑자기 퇴위해 버렸다. 그것은 많은 로마인을 기쁘게 했고 하늘이 니콜라스를 돕는 것이었다.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나중에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니콜라스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다. 325년,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소집된 제1회 니케아 종교회의에 중요 인물로서 참석했다. 그 후 342년 12월 6일에 죽은 니콜라스는 러시아, 그리스, 시칠리아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어떤 어려움에 빠져도 니콜라스는 항상 다정함을 잃지 않고, 또한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를 좋아했던 그의 다정함이, 그를 산타클로스로 만들었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기록에는 니콜라스가 소년들의 후견인으로 일을 했다고 나와 있으며 나중에 아이들의 수호 성인도 된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그 이후에도)니콜라스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산타클로스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몇백 년 전에 유럽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갖고 왔던 산타클로스를 봐도 그가 진짜 산타클로스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폭포 같은 하얀 수염이 있기는커녕, 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가운같이 길다란 주교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주교의 관, 손에는 비틀어진 주교 지팡이를 든 채 발이 빠르고 늘씬한 사슴이 끄는 비틀어짐 주교 지팡이를 든 채 발이 빠르고 늘씬한 사슴이 끄는 썰매가 아니라 느릿느릿한 낙타를 타고 찾아왔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가 찾아오는 날은 12월 24일인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라, 그의 제삿날인 12월 6일이었다. 그가 난롯가에 놓고 가는 선물도 오늘날과 비교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물건, 즉 과일, 사탕, 나무나 점토로 만든 인형 등이었다. 하긴 산타클로스가 남기고 가는 오늘날의 선물이 과거보다 더 좋다고는 결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카톨릭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스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대신에 영국에서는 파더 크리스마스, 프랑스에서는 파파 노엘이라는 종교색이 없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했다. 하지만 어린이를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해서인지, 두 사람 모두 성 니콜라스와는 달리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성 니콜라스가 계속 살던 곳은 네덜란드였다. 미국에 최초로 이주해 온 네덜란드 사람들이 탄 뱃머리에는 선원의 수호 성인인 성 니콜라스의 상이 장식되어 있었고, 그들이 지금의 뉴욕을 중심으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했을 때 최초로 세운 교회에도 성 니콜라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함께 들어온 크리스마스의 관습은 미국에 맞는 형태로 바뀌면서 순식간에 신세계에 뿌리를 내렸다. 16세기 네덜란드 어린이들은 성 니콜라스가 오는 밤에는 나무 신발을 난로 옆에 두고 잤다. 나무 신발 속에는 성 니콜라스와 함께 선물을 날라다주는 낙타를 위해서, 짚을 가득 채워둔다. 그러면 니콜라스가 짚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로 선물을 양쪽 신발에 넣고 간다. 미국에서는 나무 신발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양말을 걸어 놓았고 그 양말 속에 채워둔 것은 짚 대신에 '기대감'이었다. 원래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스는 '신트 니콜라스'이고, 그것이 신세계에 와서 신타클로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어가 뉴암스테르담에서 그 세력을 잃자, 신타클로스는 영어화하여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사슴이 끄는 썰매를 비롯하여 미국에서 생긴 것이 많다. 그 대부분을 만들어낸 것이 뉴욕의 신학자 무어 박사의 시였다.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박사는 182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려고 "크리스마스 전야"라는 시를 썼다. 만일 이 시를 그의 친구가 박사 몰래 신문사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것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채 무어 박사의 서재에 조용히 파묻혀 있었을 것이다. 신문과 잡지들이 번갈아가며 이 시를 실었다. 곧 이 시에 묘사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잡아 갔다. 하지만 권위 있는 학자였던 무어 박사는 동시를 쓴 사실이 밝혀지면 명성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 시의 작자라는 것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1838년에 겨우 그가 썼다고 인정했을 무렵에는, 이미 전국의 어린이가 이 시를 보지 않고도 줄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산타클로스가 뚱뚱하게 된 것도 미국에서의 일이었다. 모델인 성 니콜라스는 늘씬하고 키가 큰 고상한 주교였다. 그 고상한 이미지가 유럽에서는 몇 세기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빨간 볼에 통통하게 살찐 산타클로스는, 19세기의 만화가 토머스 나스트가 만들어 냈다. 나스트는 1863년부터 1886년까지 "하퍼스 윙클리"지에 크리스마스의 삽화를 그리고 있었다. 20년 동안 계속된 이 나스트의 그림에 의해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산타클로스는 점차 오늘날과 같은 친숙한 모습으로, 이미 무어 박사가 쓴 불후의 명작에 나오는 땅딸막하고 작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통통하게 살찌고 수염을 기른 당당한 체격의 산타클로스로 변해 갔다. 나스트는 이 잡지에, 산타클로스가 장난감을 만드는 모습과 어린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모습, 또는 어린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의 목록을 읽고 있는 모습 등을 그리고, 산타클로스의 생애도 소개했다. 나스트가 그린 산타클로스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정한 산타클로스의 모습으로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슴 루돌프는 미국의 한 백화점에서 탄생했다. 잘 알려진 크리스마스 캐럴 '빨간 코 사슴'은 백화점이 배부한 소책자에 쓰였던 시였다. 1939년, 시카고의 백화점 몽고메리 워드는 산타클로스를 소재로 어른이나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멋진 얘기를 광고지에 싣고자 기획하고 있었다. 당시 몽고메리 워드의 카피라이터였던 로버트 메이는, 산타클로스에 관한 시를 짓고 그에 맞는 삽화를 그려 소책자로 만들고 다음해까지 놔두었다가 다시 읽고 싶을 만한 것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메이는 시의 주인공으로 산타클로스를 돕는 빨간 코 사슴을 생각해 내고 '로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친구인 화가 덴버 길렌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길렌은 동물원에 나가 몇 시간에 걸쳐 사슴의 갖가지 동작을 스케치했다. 몽고메리 워드의 중역들은 길렌의 기발한 그림이나 메이의 시는 마음에 들었지만, 사슴의 이름이 로로라는 것에는 반대였다. 로로 다음으로 레지날드가 후보에 올랐지만 이것도 어딘지 좀 어색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귀여운 이름이 올랐지만, 결국 메이의 네 살배기 딸이 제일 좋아하는 루돌프로 타결을 보았다. 1939년 크리스마스가 되자 루돌프가 그려져 있는 소책자 240만 부가 미국의 모든 지역에 배부되었다. 루돌프 소책자는 1947년까지 부정기로 찍어 배부되고 있었다. 그해 메이의 친구 조니 막스가 이 시에 곡을 붙였다. 그런데 노래는 만들었지만 가수가 결정되지 않았다. '빨간 코 사슴'은 가수들에게 계속 거절당한 끝에 1949년 겨우 진 오토리에 의해 녹음되었다. 오토리의 레코드는 예상 밖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히트 퍼레이드'의 톱에 올랐다. 그후 300종류 이상의 '빨간 코 사슴'이 녹음되고 800만 장을 넘는 레코드가 팔렸다. 진 오토리의 오리지널 레코드는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1위인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팔려나간다. 이윽고 루돌프는 텔레비전 만화에도 등장하고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각국에서 인기 캐릭터가 되었다. 각 나라의 전설이 덧붙여지고, 이미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성 니콜라스 전설에 다시 이 빨간 코 사슴 루돌프가 더해졌던 것이다. 이미 사회학자가 말했듯이 빨간 코 사슴은 20세기가 되어 산타클로스 전설에 덧붙여진 유일한 요소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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