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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11호
2010.11.25 (음 10.20)/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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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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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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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수정과 같은 것이다. 그 순수함이 빛이 되는 것이다. ─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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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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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과 보존
어떤 대상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의미를 가졌다. ‘보전(保全)’은 ‘본래 상태대로 온전하게 잘 보호해 유지한다’는 뜻으로 ‘생태계, 환경’ 등과 잘 어울려 쓰인다. ‘생태계 보전 및 관리/환경 보전’
‘보존(保存)’은 ‘잘 보호하고 간수해 남긴다’는 뜻인데 ‘유물, 공문서, 영토’ 등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공문서 보존 기간/문화 보존에 힘쓰자.’
국으로
“국으로 가만히 있어.” 자기 분수나 주제를 모르고 행동하면 이런 말이 나온다. ‘국으로’는 ‘국’과 조사 ‘으로’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제 생긴 그대로’, ‘자기 주제에 맞게 잠자코’라는 뜻을 가진 부사다.
‘욕심이 사람 잡지. 그냥 국으로 있었으면 오늘날 저 지경은 안 됐을 텐데 말이야.’(박경리, ‘토지’) ‘국’이 무슨 말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맛탕, 마탕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 중에 튀긴 고구마에 설탕과 물엿을 졸인 액체를 끼얹은 요리가 있다. 중화요리 '빠스(拔絲.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바스')'와 유사한 이 요리는 그 이름이 아직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아 두 가지 표기가 혼재하고 있다. '맛탕'과 '마탕'이 그것이다. 이렇듯 표기가 두 형태로 엇갈려 쓰이는 것은 이 말의 어원이 불분명한 데서 기인한다. 곧, '맛+탕'인지 '마+탕'인지 확실치 않다. 어원이 전자의 경우라면 '맛'은 단맛.쓴맛의 맛일 터인데, 후자의 경우라면 '마'가 무엇인지 아리송하다. '고구마'의 '마'가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하지만 이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단일 형태소인 '고구마'에서 '마'만을 분리해 낼 수 없다는 점이고(물론 속어.은어에서는 이런 식의 조어가 있긴 하다), 다른 하나는 이 요리가 고구마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감자.당근.옥수수와 같은 다른 재료를 가지고도 만들어진다는 점이다(감자 맛탕/마탕, 당근 맛탕/마탕, 옥수수 맛탕/마탕도 있다). 그렇다면 '맛+탕'은 타당성이 있는가? 이 역시 명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 의미를 해석하자면 '맛을 낸 탕' 또는 '맛있는 탕' 정도일 터인데, 왜 그것이 이 요리의 이름이어야 하는지 잘 와 닿지 않는다. 또한 '탕'이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 설탕의 '탕(糖)'인지(액체가 설탕을 졸인 것이라는 점에서?), 곰탕.쌍화탕의 '탕(湯)'인지(액체를 고거나 달이듯이 졸였다는 점에서?) 알 수 없다. 이 요리명은 '맛+탕'이나 '마+탕'과 같은 합성어이기보다는, 어원을 알 수 없는 단일어 '마탕'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안전문, 스크린 도어
추락 방지 등을 위해 지하철역에 설치한 문은 '플랫폼 스크린 도어(platform screen door)'가 정확한 표현이며, 국립국어원이 '안전문'이란 대체어를 선정했으니 그렇게 부르자는 내용을 지난해 2월 이곳에 게재한 적이 있다. 요즘 '안전문'을 설치하는 지하철역이 늘고 있으나 용어는 계속 '스크린 도어'로 쓰이고 있다. 보다 못한 한글문화연대(대표 김영명)가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스크린 도어' 명칭을 '안전문'으로 변경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도시철도공사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우선 '안전문'이 순수 한글 명칭이 아닌 한자어라는 점을 부적합 이유로 내세웠다. 우리말의 약 70%가 한자어다.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어는 피해야겠지만 '안전문'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므로 한자어라는 것을 문제 삼을 바 못 된다. 그렇게 따지면 '지하철'이나 '철도'도 한자어다. '안전문'이 '스크린 도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유로 들었다. 국립국어원이 이미 신중하게 검토하고 네티즌의 의견을 반영해 선정한 '안전문'이 '스크린 도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강변한다면 도시철도공사가 국립국어원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결과를 낳는다.
도시철도공사는 '스크린 도어'와 함께 '안전출입문' 또는 '안전덧문'이란 용어를 병행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앞에서는 '안전문'이 한자어여서 부적합하다고 해놓고선 '안전문' 사이에 한두 글자만 추가한 '안전출입문' '안전덧문'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안전출입문' '안전덧문'이 다소 구체적이긴 하지만 이름은 짧을수록 좋다. 궁색한 변명으로 '안전문'이란 용어 사용을 거부하고 별반 차이도 없는 말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미적거리는 것을 보면 도시철도공사도 우리말보다 외래어가 좋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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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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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죽은 새가 그대의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 김정웅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름새의 뼈 위로 눈이 내린다, 아니다, 떠나지 못한 것은 새가 아니다 내내 여름인 고향이 새를 떠나고 구더기 떼처럼 들끓었던 타국의 여름이 새를 떠난 것이다, 살아서 평생 열을 앓았던 몸에서 하나의 계절이 떠나는 것을 본다 새의 텅 빈 두개골 속, 그 어둠을 모두 메워 버릴 듯 눈은 내리고 끝내 내 몸에 정착하지 못한 계절을 따라서 달아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동안 내가 주었던 것은 체온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발목까지 쌓인 눈 속에서 발 없는 귀신이 된 것처럼 춥다, 얼어붙어도 흐르는 저 강처럼 자꾸 도망을 치던 그 여자를 끝내 건너지 못했다 유령이 되어서도 건너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흙탕물 일었던 그 여름의 강이 이 어둠 속에서, 눈발 속에서 다시 슬그머니 수위를 높인다, 이런 날에는 사람이 빠져 죽어도 세상은 눈치 채지 못한다 지난여름 내내 번성했던 추억들이 멸종하고 있다, 멸종된 동물들에 대한 도감(圖鑑)에서 이 장면을 본 것만 같아 슬프다, 내 생의 모든 페이지를 넘겨 버릴 듯 바람이 분다, 더 이상 채집할 추억은 없다는 듯, 그가 새의 두개골을 주머니에 넣고 발을 잃어버린 나를 이곳에 두고 간다 세상이 캄캄해진다, 이제는 그만 인생을 암전(暗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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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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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 최지향
무던한 겨울 나무 칙칙한 가지에도 느긋히 꿈을 꾸던 산자락 언덕에도 다스한 봄기운들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가없는 봄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 산 나무 죽은 나무 가림없이 봄맞이. 하지만 산 나뭇가지라야 생명이 움터납니다.
가지에 돋는 새싹 가녀린 순이지만 추운 겨울 다 견디어낸 대견한 생명입니다. 봄바람 불어오는 날 환영하며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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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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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 이문구
소는 덕석 입고 새김질 돼지는 검불 덮고 낮잠 겨울에도 일하는 건 나귀뿐이네.
남이 놀 때 바쁜 연탄 배달원.
달구지에 연탄 가득 빙판길에 가쁜 숨 연탄 묻은 얼굴로 안 가는 데가 없네.
나귀는 그러나 즐거운 나날.
친구는 없지만 팔려 다니지 않고 힘든 들어도 직장이 있네.
자가용차도 비켜 가는 읍내의 명물 어른 아이 없이 반겨 주는 눈길.
주인하고 나란히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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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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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 - 奇大升
讀書求見古人心 反覆唯應着意深
글 읽을 젠 옛사람 마음을 보아야 하니 반복하며 깊이 마음을 붙여야 한다
見得心來須體認 莫將言語費推尋
마음에 견득하면 체행해야 하는 법 언어만 가지고서 찾으려 들지 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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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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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
욕실 속의 악몽 -자주 '방심'상태에서 빠져 덤벙대는 내가 소설을 쓰는 건 하나의 구원이다
나는 학생 때 동급생한테서 "너는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하는 말을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나는 교실 안에서 생각에 잠긴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니까, 그 무렵부터 나의 '방심(방심)' 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아니 전보다 한층 더-나는 자주 '방심' 상태에 빠진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긴장하고 있으니까 그러한 일이 거의 없지만, 혼자 있게 되면 몇 분 간인가 의식이 전혀 없는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된다. 특히 욕실에서 심한데, 무엇인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헤어 브러시에 치약을 얹어서 이빨을 밖고 있기가 일쑤고 칫솔에 샴푸를 짜서 묻힌 적도 있다. 세 번에 한 번은 린스로 머리를 감은 뒤에 샴푸를 사용하고, 셰이빙 크림을 얼굴에 칠하기는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고 말끔히 씻어 낸 뒤에 그대로 외출한 적도 있다.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착각해서 목욕을 할 생각으로 옷을 전부 벗어버린 일도 있다. 그것도 한참 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가 없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뚫어질 듯이 응시하는 일도 있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아니, 왜 내가 이런 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을까?'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하지만, 보고 있을 때는 전혀 그런 의식이 없다. 이전에 지하철에서 쉐이프 팬츠 따위의 포스터를 뚫어질 듯이 몇 분씩이나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로 창피했다. 이런 것은 정말이지 난처한 일이다. "하루키 씨는 덤벙겨려서 귀여워요!"하고 젊은 아가씨에게 말을 정도라면 괜찮지만-그런 말을 들은 일은 없다-나이를 먹고서도 이런 짓을 한다면 완전히 치매에 걸린 노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나는 일단 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려 가고 있으니까, 이러한 일종의 비사회적 행위도 예술 활동의 부산물이라고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그나마 하나의 구원이다. 노상 전철을 잘 못 타거나, 전철 표와 디스코테크 우대권을 착각하고 역무원에게 건네주었다가 혼나거나 하는 외과 의사에게, 맹장 수술을 부탁해야겠다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가진 열여섯 개의 시계 -이따금 기분이 날 때면, 열여섯 개나 되는 시계의 시간을 일일이 맞추며 돌아다닌다. 저쪽으로 가서 바늘을 앞으로 돌리고 이쪽으로 와서 바늘을 뒤로 돌리다 보면, 인생이라는 건 정말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시계의 증가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성찰은-성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지만-특별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개인적 측면에서 생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일반적인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 결혼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의 이야기인데, 우리 집에는 시계라고 이름붙일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가난했던 탓도 있었지만 시계라는 것이 별로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밤이 지나면 고양이가 배가 고파서 문자 그대로 우리를 두들겨 깨웠으며, 잠이 오면 적당히 잠을 잤다. 거리에 나가면 가는 곳마다 전광 시계가 있어 불편할 것이 없었다. 집에는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어서, 시간을 확인하려면 500미터쯤 떨어진 담배 가게에 가서 담배를 사고, 간김에 안방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를 잠깐 들여다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시계가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그다지 없없다. 지금은 손목시계니 자명종 시계니 오디오 타이머 같은 것을 합치면 전부 열여섯 개의 시계가 집에 있다. 열여섯 개의 시계가 우리 집 안에서 제각이 시간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15년 전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로 거짓말처럼 믿을 수 없는 생활이다. 열여섯 개 가운데 절반 가량은 어디선가 선물받은 것이다. 무슨 상을 받았을 때의 기념품이라든가, 짧은 원고에 대한 사례비 대신이라든다, 개인적인 선물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한 것이 필립 K.디크의 소설에 나오는 어떤 종류의 엔트로피가 증대하는 것처럼, 차례차례 쌓여 버린 것이다. 그 덕택에 온 집안이 시계의 소굴처럼 되고 말았다. 이따금 기분이 날 때면, 그 열여섯 개의 시계의 시간을 일일이 맞추며 돌아다닌다. 저쪽으로 가서 바늘을 앞으로 돌리고 이쪽으로 와서 바늘을 뒤로 돌리다 보면, 인생이라는 건 정말 이상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계 같은 것이 없어도 별로 불편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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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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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죄와 벌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재판관 한 사람이 나와 <죄와 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라고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그대들의 영혼이 바람 속을 헤매고 다닐 때, 홀로, 지켜주는 이도 없는 그대들은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다. 심지어 그대들 자신에게조차도.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 지은 죄 때문에 천국의 문 앞에서, 어느 누구도 봐주는 이 없이 한동안 그렇게 문을 두드리며 줄곧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신적 자아는 대양과 같다. 그것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으며, 창공과도 같이 날개가 있는 것만 안아 올린다. 또한 그대들의 신적 자아는 태양과도 같다. 그것은 두더지의 길도 알지 못하며 뱀 구멍도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의 신적 자아는 그대들의 존재 내부에 홀로 살고 있지는 않다. 그대들 내부의 많은 것들은 아직 인간에 불과할 뿐이며, 또한 많은 것들은 아직 인간에 이르지도 못하고 있다. 단지 스스로 깨어남을 찾아, 잠든 채 안개 속을 헤매는 초라한 난장이 만이 있을뿐.
나는 이제 그대들 내부의 바로 그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죄와 그 죄에 대한 벌을 아는 사람은 안개 속의 난장이도, 그대들의 이 신적자아도 아닌 다만 그이기 때문에. 그대들이 죄인에 대하여, 마치 그가 그대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대들 세계에 침입한 낯선 이방인인 듯이 말하는 것을 가끔 듣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하고 성스러운 사람일지라도 그대들 한사람 함사람 속에 있는 지고의 것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악한 자일지라도 그대들 한사람 한사람 속의 가장 밑, 그 이하로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단 하나의 나뭇잎도 나무의 말없는 이해 없이는 갈색으로 변하지 않듯이, 죄를 저지르는 자도 그대들의 숨은 뜻 없이는 저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신적 자아를 향해 일렬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대들은 길인 동시에 나그네. 그리하여 그대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이 넘어진다면, 그것은 장애물이 있음을 알리는 경고로써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그는 또 앞서가는 이들을 위하여 넘어지는 셈이기도 하다. 비록 빠르고 정확한 걸음으로 갈지라도 아직 장애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 역시 그러하리라. 비록 이 말이 그대들의 가슴에 무겁게 드리울지라도...
살해 당한 자는 자기가 살해당함에 대해 책임이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또한 자기가 도둑맞음에 대한 책임이 없지 않다. 정의로운 자, 사악한 자의 행위에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 중죄인의 행위에 완전 결백할 수 없다. 그렇다. 죄인이란 때로 피해자의 희생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이란 죄없는 자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것이다.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직한 자,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왜냐하면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이들은 태양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에. 만일 흰 실이 끊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직공은 헝겊 전부를 잘 살펴 보아야 할뿐 아니라 옷감을 짜는 기계 역시 검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정한 아내를 심판하고자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녀 남편의 마음도 저울에 달게 하고 영혼도 자로 재어 보게 하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는 자로 하여금, 죄지은 자의 영혼도 살펴보게 하라. 그대들 가운데 누군가가 정의의 이름을 빌어 벌하려 한다면, 그리하여 악의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 나무의 뿌리를 살펴보게 하라. 그러면 그는 선과 악의 뿌리, 열매 맺는 것과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그렇다면, 정의롭게 재판하려는 그대들이여,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직하나 정신적으로 도둑인 자에게 어떠한 판결을 내릴 것인가? 또 육체적으로는 살인자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기자신이 살해당한 자에게는 어떠한 벌을 내릴 것인가? 또 겉으로는 사기꾼이며 박해자이지만 역시 자신이 박해받고 폭행당한 자를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 그리고 뉘우치고 반성함이 이미 지은 죄보다 더 큰 자들은 어떻게 벌하려 하는가? 그대들이 기꺼이 봉사하는 그 법에 의해 집행되는 정의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물론 그대들은 죄없는 이에게 뉘우침을 강요할 수도 없고, 타인의 가슴으로부터 뉘우침을 빼앗을 수도 없을 것이다. 뉘우침은 청하지 않더라도 한 밤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워, 스스로를 응시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정의를 깨닫고자 하는 그대들이여! 이 모든 행위를 충만한 빛 속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어떻게 깨달으려 하는가? 오직 그때에만 깨닫게 되리라.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란 소아의 밤과 신적 자아의 낮 사이의 희미한 빛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불가한 것이라는 것을. 또한 사원의 주춧돌이 결코 바닥에 놓인 가장 낮은 돌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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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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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첫째 묶음 - 생활 속의 심리
열등감의 효능
나는 어릴 적부터 말을 더듬었다. 중학교 때 한문 과목이 있었는데, 항상 출석부 순으로 책을 읽혀 내가 읽어야 될 시간이면 늘 결석했다. 다들 교실에서 재미있게 수업 받는 동안 나 혼자 운동장 한구석에서 비관(?)하고 있었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국어, 한문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혹은 수학일지라도 교과서를 읽히고 질문을 받는 것이 무서워 학교에 갈 때면 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된 듯 어린 마음에도 기분이 착잡했다.
이것은 말더듬으로 인해 열등감에 싸였던 어느 청년의 술회 중 일절이다. 여러분은 이 청년이 그 후 과연 어찌 되었을까 궁금할 것이다. 이제 이 청년이 취했을 행동의 가능성을 가정해 보자. 첫째, 이 말더듬이는 교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더욱 분발해서 결국 이 버릇을 고쳤을는지도 모른다. 원래 말을 더듬는 것은 선천적 요인에서 온다고도 하고, 왼손잡이를 무리하게 바른손잡이로 고치려 할 때 생긴다고도하고, 남이 말더듬는 것을 모방해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서적 혼란이다. 우리의 걸음걸이는 처음에 고생해서 의식적으로 배우다가 결국 자동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는 잘 걷다가도 걸음걸이에 신경을 좀 쓸라치면 발걸음이 일일이 의식되어 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안 된다. 이와 유사하게 자동적으로나 반사적으로 하던 말도 정서적 혼란이 오면 자동성이나 반사성이 깨져 다시금 발달의 초기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말더듬이다. 따라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되찾는 훈련을 하게 하면 교정될 수도 있다. 희랍의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 희랍의 정치가, 웅변가)처럼 열심히 분발 노력하면, 이 청년도 한문의 낭독을 유창하게 함은 물론 대웅변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 청년이 말로 하는 것은 잘하지 못해서 남의 멸시를 받을지언정 다른 면에서는 결코 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것저것 해보면서 침식을 잊고 노력한 결과 훌륭한 운동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수학을 제일 잘하는 학생이 되거나 일류 화가로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셋째, 학교 가는 것이 점점 더 싫어져서 자주 결석하거나 공부도 안하면서 집에 틀어박혀 소설이나 보고 영화 구경에 재미 붙이며 지내게 되는 일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입다물고 말하지 않으려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려고도 안할 것이다. 그의 성격은 우울해지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몹시 화내며, 심지어는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계획할는지도 모른다.
열등감은 왠지 모르게 불안정스럽고 불유쾌하며 긴장된 느낌을 지니게 한다. 또 자기 자신을 무력하며 하잘것없는 존재로 여겨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 갔으면 하는 심정을 갖게 한다.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연히 불안하기만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욕구 불만이라고 한다. 강한 영구성을 지닌 상태다. 사람은 이러한 욕구 불만을 어떻게든지 극복 또는 모면해 긴장을 해소하고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나타나는 반응을 적응 기제라고 부른다면, 위에서 예시한 첫번째 행동 방향은 욕구 불만 상태의 그 장애 요인을 지성으로써 정면 공격해 제거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경우라 하겠다. 즉 이는 객관적 현실의 인식과 분석으로서 이 상황에 가정 적합한 행동 방향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열등감에 의한 말더듬이가 교정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교정이 불가능한 경우 또는 불가능하다고 본인이 느끼는 경우에는 이 방법이 성립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두번째 행동 방향은 완전한 정면 공격까지 되지는 못할지라도 다소 적극적으로 곤란을 해결해 보려는 것인데, 되도록이면 더 심각한 열등감을 갖지 않게 혹은 자아가 완전히 절망적으로 손상되지 않게 하는 방향이다. 이것을 방어 기제라고 부른다. 세번째 행동 방향은 자신의 열등성이 완전히 절망적이어서 그런 열등성이 노출되는 상황으로는 아예 나가지도 않고 도피해 버리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법이다. 이것을 도피 기제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특히 열등감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행동 양식 중 방어적 측면과 도피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면을 중심으로 열등감의 반응 형식을 좀더 자세히 보기로 하겠다.
먼저 방어 기제부터 생각해 보면, 첫째로 보상 행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측면에서 큰 열등감을 가졌을 때, 다른 측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나타내 열등감을 극복하는 형식이다. 학급에서 성적이 좋지 못해 멸시 당하기 쉬운 아동이 운동에 온 힘을 쏟아 인기 끌고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이 예다. 유명한 위인이나 천재들을 보면, 열등감이 그들의 위업을 성취시킨 예가 얼마든지 있다. 베에토벤, 디즈레일리가 그렇고, 토스카니니의 탁월한 기억력이 또한 그렇다. 이와같이 보상 행동은 자기 일신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아들딸을 훈련시켜 성공하게 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가난하여 교육받지 못한 장사꾼 노인이 자녀 교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아들딸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모습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렇듯 보상 행동은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을 시킨답시고 어린 아이들을 지나치게 못살게 구는 예라든가, 친구들에게 과자를 사주며 뽐내기 위해 돈을 훔치는 일이라든가, 또 친구들 사이에서의 작은 영웅심에 의해 자극적인 폭행이나 강도질하는 청소년 범죄가 이런 예들이다. 둘째는 남으로부터 관심을 얻기 위한 행동이다. 사람들의 주의를 자기에게 집중시켜 불안정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려는 기제이다. 아동들 중에서 불평이 심하고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하며 약한 아이를 못살게 구는 아동이 이의 좋은 예다. 아우를 본 어린이가 손가락을 빨고 침흘리며 공연히 밥을 잘 안 먹는 것이나, 일부 여성이 반나체 복장을 즐기는 것도 이러한 심리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는 방어적 합리화 기제이다. 이것 역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자기 변호요 자존심의 옹호이다. 공부가 모자라 성적이 나쁜 것을 몸이 아파 그렇게 되었다고 스스로 믿으려고 하는 것이나, 출제가 공정하지 못한 탓이라고 보는 것이나, 선생님이 자기를 미워하여 그런 까다로운 문제를 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또는 원래 자기는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기려고도 한다. 우리 사회에는 정부나 사회의 문제를 그저 불평만 하거나 자신의 실패를 사주팔자 탓으로 돌리고 마는 사람도 많다. 결국 이것 역시 합리화의 모습이 아닐까. 이 기제와 유사한 것으로서 투사 기제가 있다. 자기의 열등감이나 그러한 생각을 다른 이에게 투사시켜 그도 역시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여인에게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 그 여인이 문득 자기를 향해 웃음 지었다고 해서 그 여인 역시 자기에게 흥미를 느낀다고 생각하고 프로포즈하는 것이 이 예다. 또는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이 산천 초목도 다 자기와 더불어 울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도 투사 기제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심하면 관계 망상이 되어 옆방에서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말도 자기를 흉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열등감이 강한 교사가 교실에서 아동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이 자기를 우습게 여겨 수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벌컥 화내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경우도 투사 기제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도피 기제에 관해서 말해 보기로 하자, 이는 우선 사회적 접촉으로부터의 회피가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열등감은 앞으로 있게 될 실패와 비난에 대한 정서적 반응인데, 여기에서는 공포가 심한 것이 주된 징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겁이 많고 불안해 하며 부끄러움이 강하다. 이러한 사람은 좀 어려워 보이거나 처음 당하는 일,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겁내는 경향이 심하다. 또한 이러한 사람은 경쟁을 되도록 회피하려 하고, 설사 경쟁이 불가피하다 해도 꼭 이길 자신이 있는 상대하고만 경쟁한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든 경쟁하거나 또 실패할 상황에는 들어가기를 꺼려한다. 부인들이 초대되어도 입고 나갈 의상이 없다고 거절한다든지, 길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일부러 피해 버리는 것도 이러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도피 기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자의식이 강하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관중 앞에 서게 되면 다리가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며 잔뜩 긴장되어 모두가 자기만을 주목하고 있는 듯 여긴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이 자기 얼굴의 주근깨라도 들여다보는 듯하며, 자기의 덧니만을 보는 듯하며, 화려한 자기 넥타이가 새삼 거북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등뒤에서 찬바람이 느껴지고 목소리도 이상하게 들리는가 하면, 자신의 안면 운동까지 의식하게 된다. 그러니 말도 자연 더듬게 되고 기분도 난처해진다. 유명한 위인 중에는 이런 식의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은 이런 자의식을 정신적 귀족의 표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셸링, 슈베르트, 패러데이, 페스탈로치, 뉴튼 등이 그좋은 예다.
다음 특징으로는 백일몽 즉 공상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열등감을 느끼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상으로 도피하게 된다. 우리가 순간순간에 갖는 백일몽은 지배자 아니면 승자가 되는 영웅형과, 비참한 희생자, 수난자가 되어 여러 사람의 동정과 비호를 받는 순교자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해피-엔드로 끝나는 반면, 후자는 끝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열등감이 심한 사람에게는 순교자형의 백일몽이 많다고 한다. 거부 경향이나 거부증도 열등감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것은 자기가 열등감을 느끼게 될 상태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경쟁 상태나 평가받을 상황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도피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성질을 지닌다. 말하자면 남과 같이 어울리지도 않고 무엇이든 제안 받기를 꺼려하며 간혹 남이 억지로 뭔가 권하기라도 하면 화를 내 싸울 정도로 심한 거부증이 보인다. 묵살, 조소, 무관심도 이것의 일종이다.
끝으로 병으로의 도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열등감을 해소 또는 방어하기 위해 병을 앓음으로써 인정을 받는다. 이른바 히스테리 증후가 이 한 예다. 이는 자기의 정신적인 열등감을 신체적 징후로 투사시켜 자존심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외아들로 귀엽게 자란 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아프다며 학교를 가지 않는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는 기막히게 대접을 받았는데 일단 학교에 가보니 선생님이나 동무들은 집에서처럼 그렇게 대우해 주지 않는다. 자연히 학교 가는 것은 싫어지는데, 그렇다고 이유 없이 빠질 수는 없는지라 이 꾀보는 병이라도 앓았으면 한다. 다행히(?) 이 아이는 병들어 그 난관을 모면하고 자신의 열등감을 보호한다. 물론 꾀병은 아니다. 정말 학교 갈 시간이 되면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것이다. 이런 히스테리 역시 열등감의 한 반응으로 본다. 이상 열등감의 반응을 대략 약술하였으나, 이러한 행동은 대개 누구나 경험하는 바다. 다만 그 열등감의 정도에, 또는 현실에서의 유리 정도에 차이가 있어 정상과 병적 이상이 구별될 뿐이다.
"195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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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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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도박
한 사업가가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을 나와서 식당으로 가고 있을 때, 웬 낯선 사람이 그를 막아서면서 말했다. "당신은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10년 전에 무일푼으로 이 도시에 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당신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부탁했었고 당신은 나에게 20달러를 주셨지요. 그것은 당신이 거지를 성공시켜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업가는 잠시 생각하게 보고 말했다. "그렇군요. 기억납니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그 낮선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도 도박을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삶은 너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부단히 거듭하고 있다. "너는 아직도 도박을 해보고 싶지 않은가?" 삶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 삶에는 아무런 보증도 없다. 삶은 단지 시작이다. 무모한 시작, 혼돈으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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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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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9. 만주족, 다시 일어나다 - 만주족의 재통일과 후금의 건국(1616년)
오래 전부터 만주지방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시대에 따라 숙신, 말갈, 여진족 등으로 통했으며 명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의 조상은 12~3세기경 통합을 이루어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제압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가 몽고제국에 의해 멸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후 만주족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 부족 단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 장백산 일대의 건주여진, 연해주 일대의 야인여진이라는 3개의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만주족을 통일하여 다시 중국대륙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한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건주여진의 부족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했던 부족장으로, 명나라에 반대하는 아타이 세력이 명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을 설득하여 명에 항복하게 할 목적으로 아타이의 성에 들어갓다가 억류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가 나오지 않자 아타이의 성에 들어갔다 똑같이 억류당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가 아타이를 공격하는 과정에 죽었다. 이것이 누르하치의 가슴 속에 갚은 원한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누르하치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우리 조상은 대대로 명에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죄없이 명에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한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스스로 명나라와 대적할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명나라에 복종했다.
당시 만주지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성량이라는 명나라 장군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해갓고, 누르하치의 세력확대는 이성량에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엇다. 왜냐하면, 만주에서 많이 나는 인삼이나 모피, 진주 등을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명의 상인들은 이성량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이성량과 누르하치는 중간에서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량은 부를 축적하는 데 눈이 멀어 만주지역의 북방민족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 자기의 임무를 저보리고 있었다. 결국 이성량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보고에 의해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 알려져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세력을 크게 확대했고, 새로이 파견된 명의 만주 책임자들은 이미 강성해진 누르하치의 세력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누르하치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일본의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외란이었다. 명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원군을 보냄으로써 국가사정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누르하치에게는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명나라가 일본과 사우는 틈을 이용해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내부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1616년(만력44년) 마침내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만주족을 자기 세력 밑에 넣어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요령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후금'이라는 이름은 12세기경 그의 조상들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과의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후금의 군대조직은 그들의 유목적 전통을 바탕에 두고 있는 팔기군이었다. 이 제도는 부대편성을 한 다음 각 부대마다 색깔이 다른 깃발로 구분한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군대조직이 아니라 빈번하게 이동하는 유목족에 있어 사회조직의 기능도 했다. 즉, 만주족이면 남녀노소가 모두 팔기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기능과 아울러 징세, 행정의 기능을 함께하는, 그야말로 유목민 특유의 사회 군사조직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사회조직은 평상시에는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전쟁시에는 그대로 부대편성으로 이어지는 등 효율적인 기능으로 만주족의 세력확대에 큰 힘을 발휘했다. 나중에 가면 정복한 지역의 민족들을 그 민족들에 다라 독자적인 부대로 편성하면서 팔기제도가 정착되게 이른다. 누르하치가 왕위에 오를 무렵의 후금 군대는 약 10여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후금은 군대를 동원, 명의 영토였던 무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자 명에서는 만주족 토벌을 위한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의 심양에 주력군을 주둔시켰다. 명과 후금의 대결을 결정적으로 후금에게 유리하게 만든 유명한 전투가 바로 무순 동쪽 50km 지점에서 벌어진 살이호의 전투다. 1619년 이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금의 군대는 심양, 요동 등을 그들의 영역 안으로 아루렀고, 1625년에는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대륙을 향해 한발 더 다가들게 된 것이다. 후금은 그들의 정복활동의 대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전투에 나설 때는 몇 가지 원칙을 군인들에게 지키게 했다. 예를 들면,
"싸워서 잡은 포로의 옷을 벗기지 말라" "여자를 납치하지 말라" "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말라" 등이었다.
누르하치는 1626년 관녕성을 공격하던 도중 부상을 입고 그해 8월 68세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2대 황제 태종이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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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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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口牛後(계구우후) 鷄(닭 계) 口(입 구) 牛(소 우) 後(뒤 후)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전국(戰國)시대의 모사(謀士) 소진의 일화가 실려 있다.
소진은 합종책(合從策)으로 입신(立身)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진(秦)나라 혜왕, 조(趙)나라의 재상인 봉양군 등을 만나 보았으나 환영 받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연(燕)나라로 가서 문후(文侯)를 만나, 연나라가 조(趙)나라와 맹약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해야한다는 합종의 계획을 말하였다. 문후의 후한 사례에 고무된 소진은 얼마 후 한(韓)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한나라의 선혜왕(宣惠王)을 만나 진나라를 섬기지 말 것을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유세하였다.
"이번 기회에 남북으로 연합하는 합종책으로써 진나라의 동진(東進)을 막아보십시오. 옛말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말라(寧爲鷄口無爲牛後). 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선혜왕은 소진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나머지 다섯 나라들도 그에게 설복되었으며, 결국 소진은 6국의 재상을 겸임하게 되었다.
鷄口牛後란 큰 집단의 말단보다는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낫다 는 것을 뜻한다. 이제 대선(大選)이 가까워지면서 鷄口 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맛으로 치자면 꼬리곰탕이 훨씬 나은 것을......
………………………………………………………………………………………………………………………………… [원말]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口勿爲牛後). [출전]《史記》〈蘇秦列傳〉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 곧 큰 집단의 말석보다는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말.
전국시대 중엽, 동주(東周)의 도읍 낙양(洛陽)에 소진(蘇秦: ?~B.C.317)이란 종횡가(縱橫家:모사)가 있었다. 그는 합종책(合縱策)으로 입신할 뜻을 품고,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동진(東進) 정책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6국을 순방하던 중 한나라 선혜왕(宣惠王)을 알현하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한나라는 지세가 견고한데다 군사도 강병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싸우지 아니하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한 치의 땅도 남겨 놓지 않고 계속 국토의 할양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차제에 6국이 남북, 즉 세로[縱]로 손을 잡는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동진책을 막고 국토를 보존하시오소서.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寧爲鷄口]쇠꼬리는 되지 말라[勿爲牛後]’는 옛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선혜왕은 소진의 합종설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이런 식으로 6국의 군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소진은 마침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대정치가가 되었다.
[주] 종횡가 :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제국(諸國)의 군주(君主)들을 찾아다니며 독자적인 정책을 유세(遊說)하여 그들 여러 나라를 종(縱),횡(橫)으로 묶어서 경륜(經綸)하려던 외교가(外交家),책사(策士),모사(謀士)의 총칭. 합종책을 설(說)한 소진과, 소진이 피살된(B.C.317) 후 합종책을 깨기 위한 연횡책(蓮衡策)을 펴 성공한 장의(張儀)가 그 대표로 꼽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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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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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생일 축하는 이교도의 제전?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서양의 옛전통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기일을 해마다 더욱 성대하게 기념해야 한다. 오늘날의 생일 축하 풍습은 과거의 관습으로부터 180도 전환을 거친 것이 많다. 옛날에는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여성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생일 케이크의 관습도 한때 그리스에서 잠깐 있었지만 그 후 몇 세기 동안 잊혀져 있었다. 그것이 '해피 버스데이 투 유'의 합창과 함께 촛불로 장식되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는 생일날이 기록된 것은 왕후나 귀족의 자제뿐이었다. 서민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고 여왕 이외의 어떠한 여성의 탄생일도 축하된 일이 없었다. 게다가 왕과 여왕과 귀족 남자들도 겨우 자기가 태어난 날을 알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생일 축하는 기원전 3000년경 메네스 왕에 의해 남북 이집트가 통일되고 난 후의 이집트 왕들의 생일 축하 파티이다. 왕들의 생일 축하는 궁전 전체의 축제로 시종들이나 노예, 해방 노예도 참가할 수 있었고, 왕궁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도 종종 대사면을 받아 해방되었던 것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록에 남아 있는 여성의 생일은 두 명밖에 없다. 1세기의 그리스 전기 작가인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하나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연인 마크 안토니를 초청해 열었던 성대한 생일 파티로 초청한 손님들에게도 선물까지 나누어준 호화로운 파티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것보다 오래된 시대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 축하 파티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친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역사상 가장 잔혹한 생일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긴 자식의 시체였는데, 무참히 손발이 잘려 있었다. 그리스인은 이집트에서 생일 축하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이집트의 고자 만들기도 함께 전해져 생일 케이크의 관습이 생겨났다. 저술가 필로코라스가 쓴 글에 따르면, 달과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매달 6일에 밀과 꿀로 커다란 케이크를 구워 여신의 탄신일을 축하했다고 한다.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던 이 케이크에는 이미 불을 켠 촛불이 장식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여겨지고 있다. 촛불은 기우는 달빛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 신들의 생일은 매달 축하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신마다 한 해에 열두 번의 생일 축하가 있었던 셈이다. 신들의 탄생일은 그렇게 몇 번씩이나 축하하면서 여성과 아이들의 생일은 한 번도 축하하지 않은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그러나 남성의 생일축하는 아무리 성대하게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에서는 살아 있는 남성의 생일축하를 Genethlia, 죽은 후 수년간 그 기일에 지내는 제사를 Genesia라고 불렀다. 로마 시대에 와서 생일축하에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었다.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기 전 로마 원로원의 어느 의원이 위대한 정치가의 탄생일을 축일로 해야 한다고 말해 기원전 44년에 암살된 줄리어스 시저의 탄생일을 해마다 축하할 것을 결정했다. 축하 행사는 퍼레이드, 서커스, 검객 투사의 시합, 야회, 연극 등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탄생일을 축하하는 관습도 기독교 시대의 개막과 함께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끊임없이 유태인이나 이교도의 박해에 시달린 초기의 기독교 신자에게 이 세상은 고통스럽고 잔혹한 곳이었다. 또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 범한 원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기에 생일을 축하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참된 구원이며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인 죽음이야말로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의 성자 축일이라는 것은 성인이 태어난 날이 아니라 죽은 날이다. 교회사 편찬자들은 초기의 기독교 서적에서 보이는 탄생일이란 말은 저 세상에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학자 페테로 크리소로가스는 분명히 이렇게 쓰고 있다. "성인의 탄생일이란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국으로 떠나간 날, 즉 노고에서 안락으로 해방된 날을 말한다." 초기 교회의 신부들이 탄생일을 축하하는 것에 반대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볼 때 생일 축하는 이집트나 그리스로부터 빌려온 것, 즉 이교도의 제전으로 비쳤던 것이다. 서기 245년 몇몇 역사가가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을 규명하려고 조사를 시작하자 카톨릭 교회는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인가 뭔가처럼' 탄생일을 이것저것 캐내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죄악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자 교회는 탄생일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갑자기 바꾸고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을 언제로 해야 할지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논의 끝에 정해진 날이 크리스마스이다(제5장의 '크리스마스' 참조).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게 되면서 간신히 서양에서 탄신일을 축하하는 관습을 되찾게 되었다. 12세기에는 전 유럽의 교구 교회에서 여성과 아이의 생일을 기록하게 되었고, 생일 축하도 해마다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생일 케이크도 촛불로 장식되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세에 독일 농민들 사이에서 '킨더페스테'라고 하는 어린이를 위한 생일 축하 행사를 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생일 파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킨더페스테는 생일을 맞은 아이가 눈을 뜨면 촛불을 장식한 생일축하 케이크를 아이 앞에 갖다 놓으면서 시작된다. 이 촛불은 계속 갈아 끼워 저녁 식사 때 케이크를 먹을 때까지 하루 종일 켜놓는다. 촛불은 아이의 나이보다 하나 더 많게 밝혀 놓았는데 그 여분의 한 자루는 '생명의 등불'을 나타냈다.(옛날부터 자주 사람의 생애는 촛불에 비유되고 맥베스의 대사에도 사람의 생애는 '순간의 등불'이라고 말했으며 '초 양쪽 끝에서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속담도 여기에서 나온 것) 생일을 맞은 아이들은 선물도 받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도 대접받게 된다. 소원을 빌고 촛불을 불어 끄는 오늘날의 관습도 독일의 킨다페스테에서 시작되었다. 촛불은 단숨에 불어 끌 것. 소원은 비밀에 붙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같다. 독일의 생일 축하 행사에는 지금의 생일 파티에는 없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이것은 생일을 맞은 아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생일 아저씨'이다. 수염을 기르고 난쟁이인 생일 아저씨가 지금의 산타클로스와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금세기 초까지는 어엿이 존재하였으며 생일 아저씨의 인형도 상점에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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