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810호
2010.11.21 (음 10.16)/발송인: |
|
(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문장의 재능으로만 저서를 쓸 수는 없다. 한 권의 책의 배후에는 반드시 한 인간이 있다. ─ 에머슨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선소리
이치에 맞지 않는 서툰 말을 뜻한다. 여기서 ‘선-’은 ‘선무당, 선웃음, 선잠, 선떡, 선하품’의 ‘선-’이다. ‘익숙하지 못하다’, 서투르다’를 뜻하는 ‘설다’에서 왔다. ‘설다’의 관형형 ‘선’이 접두사가 된 것이다. ‘서투른’, ‘충분하지 않은’ 등의 뜻을 더한다. 동사 ‘선소리하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다’란 뜻이다. “익은 밥 먹고 선소리하지 마라.”
애먼
‘애먼 사람들이 맞았다.’, ‘애먼 소리 하지 마.’ ‘애먼’은 일의 결과가 억울하거나 엉뚱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애매하다’와 관련이 있다. ‘희미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의 ‘애매(曖昧)하다’가 아니다.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는 뜻을 가진 ‘애매하다’가 있다. 관형형 ‘애매한’이 변형돼 ‘애먼’이 됐다.
~답다, ~스럽다
한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되는 코미디 프로그램 '형님 뉴스'에서 외치는 문구가 있다.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 이는 뉴스가 새 소식이라는 말뜻에 걸맞은 가치를 지니고 있을 때 뉴스'답다'는 말이 쓰인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답다'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런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겨울은 추워야 겨울답고 여름은 더워야 여름답다"처럼 '-답다'가 설명하는 주어는 '-답다' 앞에 오는 명사와 동일해야 잘 어울린다. 특히 '-답다' 앞의 명사가 사람일 경우 '~의 자격이 있다' '~의 신분이나 특성에 잘 어울린다'는 뜻을 나타낸다. '남자답다' '어른답다' 등이 다 그렇다.
'-스럽다'도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스럽다'의 주어가 '-스럽다' 앞 명사의 성질이나 느낌이 배어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까지 봐서는 '-답다'와 '-스럽다'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답다'와 달리 '-스럽다'라는 술어가 설명하는 주어는 '-스럽다' 앞에 오는 명사와 그 종류가 다른 경우에 쓰인다. 또한 '-답다'에는 그 앞 명사의 성질이나 특성이 가득 차 있는 느낌이지만, '-스럽다'에는 그런 성질이 있으나 미흡한 느낌이 있다.
"그 집 막내아들은 여러 명의 누나들 속에서 자라 여성스러운 점이 많다" "어린애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너무 어른스럽다" "그가 사내답지 못하게 구차한 변명이나 하다니"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행동해야 한다" 등을 견주어 보면 둘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한 번 / 파란색, 파란 색
"사랑의 아픔은 누구나 한 번은 겪는 일이다." "한 번에 일을 끝내기는 힘들다." "이 문제를 한번 잘 생각해 봐.""기회가 되면 한번 식사나 합시다."
'한 번'과 '한번'은 같은 글자로 돼 있지만 어떤 때는 '한 번'이라 띄어 쓰고, 어떤 때는 '한번'이라 붙여 쓴다. 많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 띄어 쓰고 붙여 쓰는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띄어 쓴 '한 번'은 두 번이나 세 번이 아닌 '1회'라는 뜻이다. 반면 붙여 쓴 '한번'은 '어떤 일을 시험 삼아 시도하다(한번 해 보다), 기회 있는 어떤 때(집에 한번 놀러오세요), 지난 어느 때나 기회(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지), 어떤 행동이나 상태를 강조할 때(춤 한번 잘 춘다)'에 쓰인다. 즉 '1회'라는 뜻이면 '한'과 '번'이 두 단어이고, 합쳐져 새로운 의미가 되면 한 단어다. 따라서 '1회'라는 뜻일 때만 띄어 쓴다고 생각하면 쉽다.
'큰 소리/ 큰소리(과장), 큰 집/ 큰집(종가)' 등도 의미에 따라 띄어쓰기를 달리하는 경우다. 또 '파란색'은 한 단어이므로 붙여 쓰지만 "너무 파란 색은 오히려 탁해 보인다"에서는 띄어 써야 한다. 바로 앞에 있는 '너무'가 '파란'을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붙여 쓰면 '너무'가 '파란색'을 꾸미게 돼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
|
|
길다방 송 양 - 이기와
길다방 송 양을 아시나요?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모를 끊어졌다 이어지고 다시 돌아나가는 시골길처럼 알다가도 모를 그녀 말이에요 누구든 따뜻한 봄바람을 주문하면 스쿠터를 타고 신속 배달해 주는, 돌멩이보다 잘 굴러다니는 그녀 있잖아요 각설탕처럼 프리마처럼 살살 애간장 녹이는 웃음 헤픈 그녀를 모르세요? 화려한 겉포장보다 내용이 궁금할 때 더러는 티켓을 받고 대여해 주기도 하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철새처럼 산간벽지 이곳저곳 지도 그리며 날아다니는 알고 보면 딱한 여자지요 보온병 보자기를 한 손에 들고 간혹 공장의 담벼락이나 면사무소 앞에 정류장 표지판처럼 우두커니 꽂혀 있는 그러다 덜컥 막차를 타고 야심한 기억 너머로 잠적해 버리는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락공판 날이 되면 어디서 밥이나 먹고 사는지 불현듯 궁금하게 만드는 꼭 어릴 적 헤어진 누이 같은 길다방 송양을 당신도 아시나요?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비가(悲歌) - 최지향
슬픈 노래가 들려옵니다. 창밖엔 비가 내립니다. 농부들 가슴 속에는 아픔의 비 강물되어 흘러갑니다.
우리 어머니 가슴에도 슬픔이 가득찼습니다. 참깨를 비어 세워 놓았건만 계속되는 비로 털 수가 없어
참깨씨 털어야 하는데 씨앗을 거두지 못한 채 싹이 바로 났대요.
|
|
문학나눔 → 동시 |
|
|
장날 - 이문구
아기는 장날마다 장에 가지요. 엄마가 끄는 리어카 따라 열무솎음 배추다발 함께 가지요.
장터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꼬부랑 할머니 갓 쓴 할아버지 싸구려 사세요 외치는 사람 비틀비틀 술 취한 사람.
그러나 아기는 재미없지요. 아기가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것 학교 앞 구멍가게에 다 있으니까요.
아기는 저녁때에 집에 오지요. 엄마가 밀어 주는 리어카 타고 빨랫비누 멸치 봉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함께 오지요.
|
|
|
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
|
權尙夏, <詠卽景>
絶無人事到山家 散帙隨緣老眼遮
산중 집에 인간사 전혀 이르지 않아 흩어진 책 인연 따라 늙은 눈을 가리우네
小雨聲中殘夢覺 滿庭零落碧桃花 가랑비 소리 속에 남은 꿈이 깨이니 뜰에 가득 벽도화 여기저기 떨어졌네
|
|
|
문학자료 → 수필 |
|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
내가 좋아하는 지도 그리기 -나는 비교적 편견에 찬 사고방식의 소유자라서, 그다지 일반적인 감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도를 잘 그리는 아가씨가 만일 근처에 있다면 나도 모르게 사랑을 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지도 그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댁으로 찾아 뵙고 싶은데, 약도 같은 것은 한 장 "하고 말을 하면, 공연히 즐거워져서 쓱쓱 그려 주게 된다. 음, 버스에서 내리면, 거기에 커다란 해바라기가 피어있고요, 그 옆에 이런 모양을 한 문이 달린 집이 있는데, 그 곳을 똑바로 지나쳐서, '모리가나 호모 우유'라는 간판을 왼쪽으로 돌아서,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꼼꼼히 그리게 된다. 원고 청탁이라면, "지금은 좀 바빠서 미안합니다"하고 거절할 때라도, 이런 것만은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하니까, 바쁘다는 것도 모두 거짓말이다. 글씨를 잘 쓰고 못 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지도도 역시 잘 그리고 못 그리는 사람이 있다. 제대로 못 그리는 사람이 그리는 지도는 재앙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못 그린 지도의 세 가지 요소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균형이 잡혀 있지 않다. 즉, 도로의 폭이라든가 거리 같은 것의 상대적인 비율이 엉터리다. (2)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음, 두 번째 오른쪽이었던가, 세 번째였던가 하는 식이다. (3) 포인트가 결여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기 쉬운 표식이 전혀 그려저 있지 않다. 이런 지도를 손에 들고 미지의 고장을 찾아 헤매는 날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혼자 걷고 있으니까 그나마 괜찮지만, 콜럼버스였다면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거다. 매번 이런 생각이 드는데, 세상에는 펜습자 교실이나 서예 학원같은 겉들이 넘쳐흐르고 있어니까, 개중에는 지도 그리기 교실 같은 게 하나 정도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러한 곳에서 제대로 지도 그리는 법을 배운 아가씨가 회사에 들어가서 무엇인가 그런 지도를 그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면 총무과의 아무개 씨에게 부탁하면 되네. 그녀는 지도 그리는 것만큼은 굉장히 잘하니까"하는 식으로 칭찬받는 장면을 상상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훈훈해진다. 나는 비교적 편견에 찬 사고방식의 소유자라서, 그다지 일반적인 감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도를 잘 그리는 아가씨가 만일 근처에 있다면 나도 모르게 사랑을 해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언젠가 가공의 도시의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소설을 쓴 일이 있는데, 굉장히 즐거웠던 걸로 기억한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나 -나는 옛날에, 소설가가 되기 전에 술집 비슷한 것을 경영했었는데, 그때는 단순하게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을 붙였었다
나는 물건에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새로 개점하는 가게라든가, 새로 발간하는 잡지라든가, 그러한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야, 어때? 괜찮지?" 라든가, "그런 이름을 어떻게 붙이냐? 촌스럽게!"하면서 떠들어대는 게 좋다는 거지, 아주 진지하게 "무라카미 씨, 우리 가게의 이름을 좀 붙여 주십시오"하는 부탁을 받게 된다면, 그건 사양하고 싶다. 나는 옛날에, 소설가가 되기 전에 술집 비슷한 것을 경영했었는데, 그때는 단순하게 예전에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을 붙였었다. 이런 것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주위를 빙 둘러보고 난뒤에 우연히 눈에 띄는 것을 얼른 붙여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이름을 붙이면, 손님 쪽에서 아무래도 답답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다음에 술집을 차리게 되면 '캥거루 구경'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생각했었으나, 가게를 할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단편집의 제목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기는 하다. 술집 이름을 책 제목으로 써먹었어니까 말이다. 워싱턴 D.C에 '원 스텝 다운'이라는 이름의 재즈 클럽이 있다. 나는 처음 이 가게 이름을 보았을 때부터 이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하고 굉장히 마음에 걸렸었는데, 어느 날 밤, 마크 머피라고 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공연이 있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으면 붙잡고 이 가게 이름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이냐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문자 그래도 가게에 한 발을 들여놓으면 그 유래가 확실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문을 열고 발을 한걸음 내디디면, 그 곳이 한 계단 낮아지는 것이다. 덕택에 나는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 것은 가게 이름으로 하기 보다는 문에다가 팻말을 붙여서 주의하게 하는 편이 손님들에게는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 '원 스텝 다운'은 좁고 지저분해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편안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재즈 클럽이었다. 자못 까다로워 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굉장히 재미었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스탠드 안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마크 머피의 파이브 콘서트를 실컷 듣고, 맥주를 두 병 마셨는데도 12달러밖에 안 나온 것도 신바람 나는 일어었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매매에 대하여
이번에는 한 상인이 말했다. 매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대지는 그대들에게 자신의 모든 열매를 허락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이 손에 넣을 방법만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풍요와 만족은 대지의 선물을 교환함으로써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의 교환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만 그대들을 탐욕이나 굶주림으로 인도할 뿐이리라. 장터에서, 바다와 들판과 포도밭의 일꾼들인 그대들이, 직공들과 도공들이나 향수 수집가들을 만날 때면, 대지를 주관하시는 절대 신에게 간절히 빌라. 그대들의 마음 속에 왕림하시어 저울과 서로의 값을 재는 계산을 성스럽게 해주십시오 하고. 그리고 빈 손으로 와서 그대들의 거래에 끼어드는 자들을 절대 용서치 말라. 그자들은 그대들의 노고 대신에 말을 팔려고 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들로 나갑시다. 아니면 우리 형제와 함께 바다로 가서 그물을 칩시다. 대지와 바다는 우리에게처럼 그대에게도 관대하리라." 만약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피리부는 자들이 그곳으로 온다면, 그들의 선물도 사라. 그들 역시 유향을 거두는 자들이며, 그보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비록 꿈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대들 영혼의 옷이며 음식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시장을 떠나기 전에 보라. 아무도 빈손으로 가는 이는 없음을. 대지를 주관하시는 절대 신은 그대들의 가장 작은 요구가 채워지기 전에는 바람 위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
|
|
문학자료 → 수필 |
|
|
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첫째 묶음 - 생활 속의 심리
루머의 정체
이것은 루머이겠지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퍼뜨린다. 루머가 어떤 환상을 지닌다든가 교묘하게 꾸며져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공포나 의혹을 풀어 줄 때, 그 루머는 특히 잘 퍼진다. 이를테면 상관을 은근히 미워하는 사병이 불평, 불만을 직접 나타내지 못하다가 마침 그 상관이 징계처분 받았다는 루머를 들었다면, 그는 이를 동료에게 그대로 퍼뜨리고 만족해 할 것이다. 이렇게 루머는 그것을 듣고 퍼뜨리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퍼진다. 노동자가 점심 시간에 하게 되는 루머는 임금 이야기가 많고, 식당에서 은행원이 하는 루머는 전시 수당에 관한 것이 많다. 아군이 후퇴하였느니 전멸되었느니 하는 루머는 말하는 사람이 근심하고 불안해 하는 바의 표현이며, 적이 전면 후퇴하였으니 곧 평화가 올 것이라는 등의 낙관적인 루머는 안정과 평화를 희구하는 징조다. 상관이 부하들 사이에서 떠도는 루머를 통제하려면, 먼저 부하들이 지니는 공포감과 희망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을알아보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첫째, 루머를 유포시키는 자가 누구인가 둘째, 어떤 것에 관한 루머인가 셋째, 이런 루머가 어떤 감정의 표현인가
사람들은 루머를 사실인 듯 믿고 퍼뜨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반신반의로 듣고 사실 여부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퍼뜨리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루머는 더욱 그럴 듯하게 부연되고 세련되어 말쑥한 몸매로 청중을 사로잡아 간다. 대개 루머는 여론이 모체가 되어 나타나며 일반 대중의 의심이나 근심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꾸며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루머라고 반드시 헛소문도 아니요 전적으로 조작된 것도 아니다. 사회, 정치에 관한 목격담은 군의 검열로 공식적으로 보도되기 어렵다. 그리하여 그 목격담은 루머 형식으로 변형되어 일반에게 퍼진다. 이를테면 해변에서 침몰된 선박의 승무원들이 구조된 것을 목격하고 이것을 전할 때, 사실은 많이 왜곡되어 퍼지기도 한다. 군 관계에 관한 기밀에 속하는 것은 정식으로 보도되지 않으므로 개인적으로 누설되어 루머로만 퍼질 수밖에 없다. 군함이 대파되었다면, 후송된 사상병 가족이 들은 이야기나 부상병의 목격담을 중심으로 한 확실하지 않은 자료가 예민한 추리를 거쳐 전후 관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퍼진다. 또한 야영장에 대기 중인 군인들이나 항구에 상륙한 부대가 자기들의 목적지나 감행할 군사 작전에 필요한 장비 등을 추측해서 사실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 루머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루머에 호의를 표시하는 사람은 이 루머를 의심하는 사람을 책망한다. 더욱이 그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부언하여 그것의 타당성을 강조하고 권위 있는 근거까지도 제시한다. 루머가 사실 그대로라 할지라도 이 루머 자체를 믿기는 어렵다.
이차대전 중에 독일은 심리 작전으로 루머를 많이 이용했다. 루머 작전에서는 선전의 기색을 절대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이 단파 방송이나 중립국의 신문을 통해 미국에 전파시킨 루머는 모두 그 근원이 독일이 아닌 것처럼 꾸며졌다고 한다. 이런 루머 작전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형은 이간책인데, 이 유형에서는 연합국 상호간의 유대를 분열시키고 서로 의심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루머를 유포시킨다. 둘째 유형은 연막 전술인데, 여기에서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 상충되는 소문을 전파시켜 어떤 것이 사실인지 모르게 한다. 셋째 유형은 비공식 보도 자료를 루머로 퍼지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차대전시 영국 공군이 베를린 역을 폭파시키는 했으나 별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는데, 독일은 큰 파괴를 당했던 것처럼 루머를 퍼지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국이 이 보도를 근거로 성공적으로 폭파시켰다고 공식 보도를 하자, 독일은 역 건물의 온전함을 사진으로 보도하면서 영국 보도의 허위성을통박했다고 한다. 넷째 유형은 미끼로써 루머를 이용하는 것이다. 즉 진실을 알기 위해 허위 사실을 소문으로 퍼지게 하면, 상대국에서는 사실을 보도하게 된다. 루머는 욕망, 공포, 증오의 세 감정 요인 중 어느 것이 주요 요인이냐에 따라 세 가지로 유형을 나눌 수 있다.
1) 관견몽적 루머 : 자기의 희망이 사실이 되었으면 하고 이를 믿으며, 또한 그것이 되풀이 되기를 기대하는 루머다. 이에 관한 예는 1942년 2월에 미국에서 퍼졌던 루머다. 이때 일본은 석유를 위시한 전쟁 물자가 부족해 6개월 이상 전쟁을 지속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사실처럼 돌아다녔다. 그리고 6.25 당시 서울이 인민군 점령하에 있을 때, 국군의 서울 탈환을 애타게 기다리던 150만 서울 시민 사이에 1950년 8월 중순경에 김일성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도 바로 이 일례가 된다. 2) 무시무시한 공포 루머 : 이는 공포 감정을 나타내는 루머이다. 1942년 초 미국에서는 독일이 방위 불능의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루머가 퍼졌으며, 6.25 초기에는 소련군의 탱크는 여하한 폭격으로도 격파할 수 없다는 식의 루머가 퍼졌다. 바로 이 예들은 '무시무시한 루머'에 해당하는 좋은 예들이다. 또한 6.25 중 겨울 후퇴 당시 강원도, 충청북도에 철거령이 내려졌을 때, 적이 바로 몇십 리 앞까지 왔다느니, 게릴라가 길을 차단했다느니 하는 루머가 있었다. 그 당시 주민들이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 가솔을 이끌고 가재 도구만을 대충 꾸려 남하 하는 대혼란을 일으켰던 것도 이에 속한다. 3) 쐐기 역할의 루머 : 이 루머는 가장 위험한데, 이는 연합군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을 조성시킨 루머다. 처칠이 대일전에서 루즈벨트를 매수해 미국을 개입시켰다느니, 영국이 자기 군대는 싸우게 하지 않고 식민지 군대와 연합국 군대만 싸우게 한다는 식의 루머가 바로 그것이다.
루머 역시 비옥한 땅에서 잘 자란다. 여기서 비옥한 땅이란 군중이든 군대든 정서적으로 움직이기 쉬운 집단을 말하며, 전쟁은 이런 땅에 비료를 뿌리는 좋은 조건이다. 승전을 열망하고 후퇴를 두려워하는 심정 내지 적개심이 루머 유발의 동인이 될 수도 있다. 1950년 12월 중순경 투르만 대통령의 특별 성명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방송을 통해 이 뉴스를 듣고 루머가 퍼졌다. 말하자면 72시간 이내에 38선에 원자탄이 투하되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전쟁 속에서 초조한 사람들의 심정과 원자탄이 터지면 서울도 위험할 것이라 해서 큰 소동이 일었던 것은 괴이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한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이는 그 당시에 전쟁력을 거의 미국에 의존해 있던 상황에서 전열을 분열시키려는 상대의 의도가 깔려 있는 루머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사건에 관한 뉴스의 결핍도 루머의 온상이 된다.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보도가 없으면, 기어코 허무맹랑한 루머가 생기게 된다. 이에 덧붙여 불만, 소요, 권태감 등도 루머의 요인이 된다. 감방, 병원, 병영 등에서 루머가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말하자면 일이 없어 심심할 때 쓸데없는 루머로 일종의 긴장과 자극을 얻으려는 것이라 하겠다.
모름지기 상관은 부하들이 일에 바빠 생각할 틈이 없도록 해야 루머와 무료함을 방지할 수 있다. 기대감 역시 루머의 요인이다. 대중은 뉴스를 갈망하며 특히 전쟁시에는 전승의 보도를 기대한다. 뉴스가 없을 때는 기대하는 바를 루머를 꾸미기 일쑤다. 검열은 중대 뉴스를 제한해 보도하게 하므로 루머를 조성시키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 이차 세계대전 초기에 프랑스에는 검열이 너무 엄중해서 루머가 많았으나, 영국에서는 검열을 적절하게 해 비교적 루머가 적었다고 한다. 검열은 악마(멋대로 놔둠)와 심해(지나친 억압)의 중간에 자리잡게 해야 한다. 너무 검열을 방치하면 오열(적군과 내통하는 자)의 루머가 무성하게 되며, 또 지나치게 검열을 엄격하게 하면 사람들이 루머의 잡음 속에서 갈피잡을 수 없게 된다. 검열의 적절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미국 정부는 적의 어뢰 공격으로 군함이 격침된 사실을 보도는 했어도 그 격침 지점은 발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 지점을 발표함으로서 적이 아군 잠수함의 작전 지점을 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회 안에 유포되는 루머를 통제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법칙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공식 보도의 신빙성을 유지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보나 당국자의 공식 보도에 신의가 떨어지면, 아마 그후부터는 신문 방송도 믿지 않고 권위 있는 사람들의 발표도 믿지 않게 되어 자연 루머만이 번창하게 될 것이다. 둘째, 지휘관이 신망을 얻어야 한다. 허위 보도의 풍토가 사라지고 검열 기준을 정착을 바탕으로 하여 보도에는 일정 수준의 제한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게 한다면, 보도 결핍의 부작용으로서 나타나는 루머도 사라지리라 본다. 셋째, 가능한 한 많은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사회에 큰 물의를 가져올 내용이 아닌 한, 되도록 많은 것을 자세하게 보도한다면 루머가 솟아날 틈새가 없다. 넷째, 사회적으로 성실한 생활 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 빈 시간은 공상의 터이며, 일없이 쉬는 손이 루머의 주책없는 혀로 바뀌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강제 노동으로 들볶는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일에 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말이다. 다섯째, 루머의 유포와 그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사회적 제재가 필요하다. 아울러 사람들이 루머의 진실 되지 못한 면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루머가 사실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그 루머의 발설자나 전달자에게 '공개적인' 제재를 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 또한 루머를 화제로 삼는 것도 삼가게 한다. 어느 한 곳에 루머판이나 루머란을 설치해 놓고 그 루머들의 허위성을 조리 있게 제시하여 터무니없음을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도 좋을 성싶다.
"1951년 3월"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진실과 언어
닭들이 생산하는 달걀의 양이 불만스러운 한 농부가 암탉들의 심리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그 방법으로 그는 화려한 빛깔의 앵무새를 사서 닭장에 넣었다. 과연 암탉들은 즉시 이 잘생긴 이방인에게 몰려들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들은 앵무새에게 맛있는 먹이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며 앵무새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마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새로운 가수를 따르는 십대 소녀들의 무리와도 같았으며 기쁘게도 그 결과로 암탉들의 알 낳는 능력은 향상되었다. 그런데 이 닭장의 수탉은 암탉들에게 무시 받게 되자 질투가 나서 앵무새에게 덤벼들었다. 부리와 발톱으로 할퀴고 초록과 노랑 빨강의 깃털들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놀란 앵무새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
"제발 부탁이니 그만둬 주세요. 나는 여기에 단지 언어 교수의 자격으로 들어왔을 뿐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언어 교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언어 교수는 삶의 가장 거짓된 형태이다. 진실에는 언어가 필요 없으며 그래야만 진실을 만날 수 있다. 진실에는 어떠한 매개물도 필요 없으며 삶 전체와 비언어적으로 접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
|
문학자료 → 세계사 |
|
|
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8. 변방, 바다에서 밀려드는 오랑캐 - 북로남왜의 화(16세기 중엽~16세기 말)
명의 멸망을 재촉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북족에서는 몽고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명을 침략하여 국가 존립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것을 '북로남왜의 화'라고 한다. 북방의 몽고족은 오랫동안 중국을 위협한 세력이었으며, 원나라로 중국대륙을 100여년간이나 지배했다. 명의 건국과 함께 북쪽으로 밀려난 후에도 몽고족의 중국에 대한 위협은 계속되었다. '토목의 변'은 몽고족의 일족인 오이라트의 에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한 세력에게 명군이 패배하고 명 황제 영종이 사로잡힌 사건이었다. 토목의 변 이후 에센은 1451년 주변 몽고세력을 통합하여 칸의 지위에 올랐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 오이라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타타르의 다얀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몽고 전체를 통일하면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다얀 칸의 손자였던 알단이 칸의 지위에 오른 후 1541년(가정21년) 알단 칸은 제2의 쿠빌라이가 되겠다는 야심을 실행에 옮겨 중국을 침공해들어왔다. 그들은 삭주를 거쳐 하북지방 깊숙이 침투,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2백여만 마리의 가축을 약탈해갔다. 그후에도 타타르의 침략은 연례행사로 되풀이되어 명나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550년의 침입 때에는 북경을 포위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중국 각 지방의 원군이 모여들어 북경의 함락만은 간신히 면했다.
북경에 대한 포위공격이 있은 이듬해 1551년, 명에서는 타타르와의 타협의 한 방편으로 몽고와의 말 거래를 허용했다. 말 시장을 열어 몽고의 말을 사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원래 명나라에서는 명나라의 책봉은 받은 나라에 한해 조공무역을 허락했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몽고족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조공국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몽고가 중국에 말을 팔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명나라로 보아서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을 사야 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결국 형식적인 책봉관계를 맺으면서 몽고가 명나라에게 말을 팔 수 있게 됨으로써 몽고는 유목민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말 판매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명은 몽고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몽고는 말 무역의 특권을 확보하면서 몽고족들의 생활기반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지만,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조건이 만들어짐으로써 그들의 대외팽창 의지를 잠재우게 되어 나중에 만주족에게 대륙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몽고족과 함께 명나라를 괴롭힌 또 다른 세력은 일본 왜구였다. 이들은 원 말기부터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일본과 명은 처음에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해안에 왜구가 출몰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12~14세기), 무로마치 막부시대(14~16세기)의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국내의 상업활동만으로 일본의 상업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까지 그들의 활동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를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영락제에 이르러서 공식적인 무역이 시작되었다. 공무역이 이루어지게 되면 당연히 밀무역은 금지된다. 명의 경제 때 일본의 아시카가와 관계를 맺고 왜구의 출몰을 막아줄 것을 일본에 요구하기도 했다. 아시카가 통치 시기에 일본국왕은 명과 조공국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아시카가 정권의 중국과의 무역을 공무역 형태로 독점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그 독점효과를 최대화 하기 위해 사무역은 당연히 금지되었다. 그후 잠시 왜구의 출몰이 줄었으나 아시카가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왜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다시 왜구들의 횡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약탈에 나서게 된 요인은 중국의 제한된 조공무역 때문이었다. 명이 일본에게 허용한 조공무역은 극히 제한되어 특권계급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지방호족들이나 상인들은 이러한 조공무역의 혜택을 볼 수가 없었고, 양국 상인들 간에 밀무역이 싹틀 소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지방세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실력자들이 독자적으로 중국과 무역거래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무역거래량은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해 일본의 욕구는 넘침에 따라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해 일본 지방세력의 하나인 오우치 쪽에서 배 3척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다른 실력자였던 호소가와 쪽에서 보낸 배가 거의 동시에 광동에 입항하게 되어 두 세력들간에 선상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여졌고, 일부 일본인들이 배에서 내려 명의 영파 등 해안지대를 약탈,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명 정부의 조공무역 체제 아래서는 밀무역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실격자들간의 쟁탈전 및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명은 당연히 밀무역자를 색출하여 처벌하게 되고, 그에 반발하여 중국 상인들 및 일볼인들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했다. 1533년(가정31년) 한 무리의 왜구들이 동남해안을 따라 절강, 항주, 안휘성 등 강남지방의 성들을 차례로 휩쓸면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왜구 무리들은 80여 일동안 약 4천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했다. 당시 왜구들의 잔인한 행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정도였다.
"곡식창고를 약탈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백성들을 죽였다. 시체와 피가 산과 강을 이룰 정도였다. 어린 아이를 기둥에 묶어놓고 끊는 물을 끼얹는 것을 놀이삼아 했으며, 임신부를 보면 뱃속에서 태아를 끄집어내는 등"
이처럼 왜구들의 잔학상은 조선에서나 중국에서나 마찬가지였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刻舟求劍(각주구검)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는 융통성 없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의 한 사나이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칼을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다른 칼을 꺼내어 그 배의 옆부분에 칼 빠뜨린 곳이라는 자국을 새기면서(遽刻其舟) 여기는 내 칼이 빠진 곳 이라고 말했다. 배가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자신이 새겨 놓았던 곳을 따라 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 칼을 찾으려 했다(求劍). 그러나 자신이 탔던 배는 칼을 빠뜨린 곳을 지나 계속 이동하여 왔으므로, 그가 칼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刻舟求劍 이란 뱃전에 새겨놓은 표시만을 믿고 물에 빠뜨린 칼을 찾으려함 을 뜻한다. 이는 곧 시세(時勢)나 세상 형편에 어둡거나 고지식함 을 비유한 말이다. 법 조항이나 문구(文句)에 얽매어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경우에도 刻舟求劍 이라는 말은 들어 맞는다. 이렇듯 현실 감각이나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 반대로 시류(時流)에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약삭 빠르게 앞서 가는 사람은 대사(大事)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 고집하며 이를 고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유하는 말. 《出典》'呂氏春秋'
戰國時代, 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楚人 有涉江者 其劍 自舟中 墜於水 遽刻其舟 曰『是 吾劍之所從墜』舟止 從其所刻者 入水求之 舟己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己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兎)
|
|
|
문학자료 → 이글저글 |
|
|
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약탈해 온 신부를 숨기던 곳은?
원래의 허니문과 지금의 허니문은 의미가 아주 다르다. 지금의 허니문은 말할 것도 없이 결혼 생활의 전주곡이며 둘만의 행복한 격리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전의 허니문 기간은 전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옛날 북유럽에서 약탈혼이 성행하고 있을 때 신부를 가까운 마을에서 약탈해 온 사나이는 그녀를 데리고 잠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랑의 들러리 이외의 누구에게도 거처를 알리지 않고 신부 가족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자기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숨어 있었다. 이것이 민속학자가 말하는 허니문의 시작이다. 허니문이란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둘이 서로 사랑하여 맺어진 것이 아닌 두 사람에게는 며칠이나 몇 주일씩 일하지 않고 행복에 잠기는 사치스러움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허니문이라는 말도 역시 북유럽에서 있었던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신혼인 두 사람이 한 달 동안 미드라고 불리는 꿀술을 매일 마셨다. 이 술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서기 433년부터 453년까지 훈족의 왕이었던 아티라는 서기 450년,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 공주와 결혼했다. 아티라는 그 결혼 잔치에서 이 증류주를 먹어 보고는 너무 맛이 좋아 큰 잔으로 벌컥벌컥 마셨다. 아티라는 이미 결혼한 그녀를 약탈하여 결혼하면서 로마 제국의 영토도 조금 떼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삼 년 후 다른 여성과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아티라는 미드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또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아니나다를까. 꿀술을 너무 많이 마신 아티라는 인사불성에 빠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허니문'의 허니(꿀)는 이 꿀술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문(달)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달은 한 달을 주기로 차고 기울기를 되풀이한다. 즉 달은 한 달을 주기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언제까지나 신혼초처럼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6,17세기 영국의 산문가나 시인들은 이 북유럽의 허니문 해석을 증거로 내세워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자주 결혼 생활에 비유했다. 이렇게 결혼이라는 것이 오늘날과는 많이 다른 의미이다 보니 이혼의 역사 또한 결혼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정식 결혼이 없다면 정식 이혼도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결혼증명서는 기원전 5세기에 이집트의 엘판틴에 주재하고 있던 주둔병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파피루스에 아랍어로 쓰인 이 결혼증명서는 매우 간단하고 매정했다. 그것은 마치 매매증서와 같이 건강한 열네 살의 소녀를 소 여섯 마리와 교환한다고 적혀 있었다. 법률을 좋아했던 로마 시대에는 결혼증명서가 몇 페이지나 되는 복잡한 법률 문서로 변해버렸다. 거기에는 결혼 지참금의 액수라든가 이혼이나 사망시의 재산 분배에 대해서까지 빈틈없이 적혀 있다. 서기 1세기에 개정된 결혼증명서가 헤브루인에 의해 정식으로 채용되어 조금 바뀌었을 뿐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혼도 처음에는 되는 대로여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 아테네나 초기의 로마에서는 법적인 이혼 따위란 없고 남편 마음대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지방 관청에 들어가 이혼을 신청해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고는 해도 그것이 기각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7세기 말경, 앵글로 색슨인의 사회에서는 남편은 되지도 않는 이유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당시의 법률 문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아내가 다음과 같은 요건에 하나라도 해당될 경우 남편은 이혼할 수 있다. 불임, 서툰 솜씨, 우둔, 짜증, 사치, 무례, 음주, 대식, 수다, 성급함." 이혼을 연구하고 있는 고대나 현대의 인류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저에서 일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합의에 의한 이혼이 많은 것은 모계사회이며 그곳에서는 여성의 출산 능력이 숭앙되어 가정 내에서 모친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계사회에서는 여성의 출산 능력이나 성적인 권리는 소위 혼인 비용을 지불해 남편이 사들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에서는 이혼이 남자측의 일방적인 편의로 행해지는 일이 많다.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